성철스님

[제8장 선종사상] 2. 견성의 본질 - (3) 오매일여

通達無我法者 2007. 4. 30. 11:59

 

제8장 선종사상

 2. 견성의 본질

 (3) 오매일여


우리가 이제까지 좀 지루하지만 여러 조사스님네들의 말씀을 많이 인용해 보았습니다. 결국 견성성불이라는 데 있어서 진여무심 이것이 구경이라는 것을 다 알게 되었을 줄 믿습니다. 그러나 진여무심을 성취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게으른 중생은 삼아승지겁이 걸리는 일이며 참말로 많은 노력이 실지로 필요합니다. 노력에 따라서 시간문제는 변동될 수 있지만 그래도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 완전한 진여무심을 얻으려면 어떠한 난관이 하나 붙느냐 하면 자나깨나 한결같다[寤寐一如]라는 난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오매일여(寤寐一如)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소소영령한 마음의 아는 성품이 있어서 볼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으며, 오온의 몸 속에서 주인이 된다고 말하니, 이렇게 하여 선지식이 되면 사람을 크게 속이는 것이다. 지금 내가 너에게 묻노니, 만약 소소영령함을 인정하여 너의 진실이라고 한다면 어째서 잠잘 때엔 또 소소영령함이 없느냐. 만약 잠잘 때에 소소영령함이 없으면 이것은 도적놈을 자기 자식으로 오인하는 것이니, 이것은 생사의 근본이며 망상의 연기이다.

有一般昭昭靈靈靈臺智性하야 能見能聞하야 向五蘊身田裏 作主宰하나니 恁麽爲善知識하면 大賺人이로다 我今向汝하노니 汝若認昭昭靈靈하야 爲汝眞實이면 爲甚麽하야 瞌睡時에 又不成昭昭靈靈고 若瞌睡時에 不是면 這箇喚作認賊爲子니 是生死根本이요 妄想緣起니라. [玄沙―傳燈錄]


이렇게 말씀한 현사(玄沙)스님은 설봉스님의 제자로서 선(禪)에만 통달한 이가 아니라 경, 율, 론 삼장에 회통한 분입니다. 선과 교를 막론하고 의심나는 것이거나 논란이 있으면 현사스님에게 와서 의견을 구하고 판정을 얻을 만큼 당대의 권위자였습니다. 그런 현사스님 말씀이 우리가 아무리 부처님 이상으로, 달마대사 이상으로 큰 법을 성취한 것 같은 생각이 들더라도 잠이 꽉 들어서 공부가 안 되면 근본적으로 공부가 아닌 줄 아는 데 표준이 있는 것이라고 전등록이나 어록의 여러 곳에서 많이 말씀하셨습니다.우리가 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 자기가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 것 같지만 잠이 꽉 들어서 공부가 안 될 때는 공부가 아닌 줄 알고 공부됐다는 생각을 아예 버려야 하는데 이것이 어렵습니다. 보통 공부해 가다 이상한 경계가 좀 나면, 이것이 견성이 아닌가 성불이 아닌가, 또는 내 공부가 좀 깊이 들어간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많이 일으키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 공부의 기준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잠이 꽉 들어서도 공부가 되지 않거든 공부가 안 된 줄 아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도적놈을 잘못 알아 자식으로 삼는 것과 같아서 손해만 봤지 이익은 없습니다.


박산스님이 평하여 말하였다. “이것은 망상연기의 사람이니 잠잘 때에 이미 주인이 되지 않는다면 생사가 닥쳐옴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한평생을 공연히 쓸데없이 보내니 다른 사람만 웃길 뿐 아니라 스스로도 웃길 뿐이다.”

評云此是弄糟魂漢이니 瞌睡時에 旣做不得主인댄 生死到來에 作麽生折合고 一生을 胡亂做去하니 豈但哄人이리요 亦自唭耳라. [博山―禪警語]


누구든지 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 잠이 꽉 들었을 때 공부가 안 되면 이것은 생사의 근본 해결에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이 정도 공부를 가지고 아는 체 하다가는 저도 망하고 남도 망치는 것임을 알아서 일생을 공연히 쓸데없이 헛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담당 (문준)스님이 대혜에게 말하였다. “고상좌여, 네가 일시에 나의 선법을 이해하여 설법을 하라면 설법을 잘하고, 염고, 송고, 소참, 보설 할 것 없이 네가 잘한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이 아직 있지 아니하다. 네가 성성(惺惺)히 생각할 때에는 문득 선이 있으나 겨우 잠들자마자 문득 없어지니 만약 이러할진대 어찌 생사를 대적하리오.”

대혜스님이 대답하였다. “참으로 이것이 저의 의심하는 바입니다.”

湛堂이 謂大慧曰 果上座야 我這裏禪에 你一時理會得하야 敎你說也說得하며 敎你拈古 頌古小參普說을 你也做得하나 祗是有一件事未在하니라 你惺惺思量時엔 便有禪호대 纔睡著하면 便無了하니 若如此인댄 如何敵得生死리요 杲曰正是某의 疑處니이다. [宗門武庫]


대혜스님은 17세에 출가하여 19세에 어록을 보다가 깨쳤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큰스님들을 찾아뵙고 법담을 하며 물어보니 다 자기만 못한 것 같고 누구든지 그 말을 당하지 못하니 천하를 횡행하듯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진정 극문(眞淨克文)선사의 제자인 담당 문준(湛堂文準)선사를 찾아갔습니다. 그 당시 천하에 이름난 다섯 큰스님[五大師]이 계셨는데, 오조 법연선사 밑의 불안 청원(佛眼淸遠), 불감 혜근(佛鑑慧懃), 불과 극근(佛果克勤=圓悟)의 삼불(三佛)과 황룡 사심(黃龍死心)과 담당 문준(湛堂文準)선사입니다.


위의 글은 그 당시 선계에 있어서 비중 높은 담당선사가 대혜스님에게 타이르신 말씀입니다. 사실 보면 자기가 아무리 아는 체하고 도도한 체하여도 자기 양심을 속일 수는 없는 것이어서 대혜스님처럼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발심해서 철저하게 공부를 해야 되지 자기가 공부 아닌 줄 알면서도 남을 속이려 들면 이것은 참 곤란한 일입니다. 이것이 천하에 유명한 대혜스님의 공부과정이니 앞으로 자세히 설명할까 합니다. 그 당시 대혜스님의 생각에 천하 선지식이라는 분들이 소용없고 오직 담당선사 한 분만이 눈 밝은 사람입니다. 다른 스님들은 잠이 꽉 들면 선이 안 되는 것을 지적하지 못했는데 담당스님 한 분만이 지적해서 자기의 잘못을 깨우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평생을 시봉하고 여기서 공부를 성취하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담당스님이 55세에 돌아가시게 되니 대혜스님이 낙담하여 여쭈되 “지금 스님께서 돌아가시면 제가 누굴 의지해야 큰 일을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담당스님이 “서울에 원오선사라는 분이 있는데 내가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눈밝은 본분종사이니 그 스님을 찾아가면 네가 반드시 큰 일을 성취할 것이다”고 유촉했습니다. 그래서 담당스님이 돌아가신 뒤 모든 뒷일을 다 처리하고, 원오스님을 찾아가면서 혼자 생각에 만약 원오스님이 딴 선지식과 마찬가지로 자기 공부의 병을 지적해 내지 못하고 나를 어느 정도까지 인정해 주는 기미만 보이면 나는 ‘참선이란 말짱 거짓말이니 선이 없다는 논(論)이나 짓고 ꡔ화엄경ꡕ이나 한 부질 싸서 평생 경이나 읽고 말 것이다’고 하면서 원오스님을 찾아갔습니다. 그것도 얼른 가지 못하고 십 년이나 넘는 세월을 지내고 찾아갔습니다. 만나 보니 담당스님이 류가 아니었습니다. 이런저런 말을 붙여 볼 도리가 없었으므로 원오스님의 지시를 받고 공부를 하였습니다.


대혜가 원오스님에게 물었다.

“제가 잠이 들기 전에는 부처님이 칭찬한 바는 의지해서 그것을 행하고, 부처님이 꾸짖은 것은 감히 위반하여 범할 수 없습니다. 전부터 스님을 의지했던 바나 조금이나마 스스로 얻은 바를 깨어 있을 때는 모두 다 수용할 수 있으나 선상에 앉아 반이나 깨어 있다가 조금 졸기 시작하면 주재를 할 수 없습니다. 꿈에 금보배를 보면 꿈속에서 기쁨이 한이 없고 꿈에 모든 나쁜 경계를 보면 꿈속에서 겁이 나고 벌벌 떨고 하니 스스로 얻은 생각건대 이 몸이 아직 있어도 다만 꿈속에서도 주인을 하지 못하니 하물며 지, 수, 화, 풍이 나누어 흩어지며 모든 괴로움이 불꽃같이 일어나면 어떻게 후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이르러서는 바야흐로 바쁠 뿐입니다.”

원오스님이 손으로 가리키며 “멈추고 멈추어라. 망상을 쉬고 망상을 쉬어라”고 하시고 또 말씀하셨다. “네가 지금 말하는 허다한 망상이 다 끊어질 때에 스스로 오매항일의 곳에 이를 것이니라.”

처음 듣고는 믿지 아니하고 매일 스스로 생각하였다. “자고 깨는 것이 분명히 두 쪽이니 어떻게 입을 크게 열어 선을 말하리오. 부처님이 말씀한 오매항일(寤寐恒一)이 거짓말이면 내가 이 병을 고칠 필요가 없거니와 부처님 말씀이 과연 사람을 속이지 아니하였다면 내가 아직 밝지 못한 것이다.”

뒤에 ‘훈풍이 스스로 남쪽에서 오는구나’라는 법문을 듣고 홀연히 마음 가운데 막혀 있던 물건을 버려 버렸으니 비로소 부처님의 말씀하신 바가 참 말씀이며 실재 말씀이며 여여한 말씀이며 거짓말이 아니며 속이는 말씀이 아니며, 사람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대자비임을 알았으니, 몸을 가루로 내고 목숨을 바쳐도 부처님 은혜를 갚을 수 없다. 마음 가운데 걸리는 물건을 이미 없애니 바야흐로 꿈꿀 때가 문득 말할 때이고 말할 때가 문득 꿈꿀 때임을 알았으니 부처님이 말씀하신 오매항일을 바야흐로 스스로 알았다. 이런 도리는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일 수 없으며 나타내 보일 수 없는 것이니 마치 꿈속 경계 가운데서 가질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것과 같다.

大慧問圓悟曰如宗杲未睡著時엔 佛所讚者는 依而行之하고 佛所呵者는 不敢違犯하야 從所依師及自做工夫 零碎所得者를 惺惺時에는 都得受用이나 及乎上牀하야 半惺半覺에 己作主宰不得이니어다. 夢見得金寶則夢中에 歡喜無量하고 夢見諸惡境界 卽夢中에 怕怖惺恐하니 自念此身이 尙存하야도 只是睡著에 己作主宰不得이어니 況地水火風이 分散하야 衆苦熾然하면 如何得不被回換이리오 到這裏하야 方始著忙이니이다 悟가 但以手로 指曰 住住하야 休妄想休妄想하라 하고 又曰待汝說底許多妄想이 絶時에 汝自到寤寐恒一處也리다 初聞亦未之信하고 每日에 我自顧컨대 寤與寐 分明作兩段이어늘 如何敢大開口說禪이리요 除非佛說寤寐恒一 是妄語則我此病을 不須除어니와 佛語果不欺人인댄 乃是我自未了로다 後因聞熏風이 自南來하고 忽然去却碍膺之物하고는 方知黃面老子의 所說이 是眞語實語如語며 不誑語不妄語라 不欺人이요 眞大慈悲니 粉身沒命하야도 不可得報니라 碍膺之物을 旣除에 方知夢時便是寤時底요 寤時便是夢時底니 佛說寤寐恒一을 方始自知로다 這般道理는 拈出하며 呈似人不得 如夢中境界하야 取不得捨不得이니라. [大慧廣錄]


6식 경계의 기멸이 완전히 끊어지고 7식 경계의 망상이 완전히 끊어져야만 꿈속이든지 잠잘 때든지 간에 오매일여가 되기 때문에 원오스님이 ‘망상을 쉬고 망상을 쉬어라’고 하신 것입니다.

망상이 일어났다 없어짐이 여전한 데서는 절대로 오매일여가 되질 않습니다. 분명히 자기가 오매일여가 안 된 줄 알고 실지 공부가 아닌 줄 알면서도 이 병을 고치지 못하고 큰소리를 치고 돌아다니면서 심지어는 부처님 말씀이 옳으면 자기 병을 고치고 부처님 말씀이 거짓말이면 자기 병을 고칠 필요 없다는 식으로까지 나오니만큼 그처럼 지견병(知見病)은 고치기 어렵고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원오스님 같은 큰 선지식을 만났기에 이 병을 고치고 마침내 오매일여가 되어 구경을 성취할 수 있었지 만약 그렇지 않았으면 이 병 고치기가 참 어려운 것입니다.


원오스님이 어느 날 상당하여 법문하시되, “운문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묻기를 ‘어떤 것이 모든 부처님들의 몸이 나오신 곳입니까?’ 하니 운문스님이 ‘동쪽 산이 물 위로 간다’고 대답하셨다는 법문을 들려주고는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겠으니 나에게 누가 ‘어떤 것이 모든 부처님들의 몸이 나오신 곳이냐’고 물으면 다르게 대답하겠다고 하시고 ‘훈풍이 스스로 남쪽에서 오니 전각에 서늘한 기운이 나는구나’고 하시는 법문을 듣고 대혜스님이 마음 가운데 걸리는 물건이 없어지고 몽중일여가 되었다고 합니다.

오매일여에는 꿈꿀 때에도 한결같은 몽중일여(夢中一如)와 잠이 깊이 든 때의 숙면일여(熟眠一如)의 두 종류가 있는데 꿈꿀 때의 오매일여는 제6식 경계의 영역으로 교가(敎家)의 칠지보살에 해당하고, 잠이 깊이 든 때의 오매일여는 제8 아뢰야 무기식에 머무르는 팔지 이상의 자제보살들과, 이 무기식까지 영원히 떠난 부처님 지위의 진여일여(眞如一如)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혜스님이 말한 바는 몽중일여입니다.


생각[想陰]이 다한 사람이란 이 사람은 평상시에 꿈이나 생각이 소멸하여 자나깨나 항상 같아서 깨달음의 밝음[覺明]이 비고 고요하여 마치 푸른 하늘과 같아서 다시는 거칠고 무거운 육식망상의 그림자 일이 없느니라.

想陰이 盡者는 是人이 平常에 夢想이 銷滅하고 寤寐恒一하야 覺明虛靜하야 猶如晴空하야 無復麤重前塵影事하니라. [楞嚴經]


능엄경에 있는 말씀인데 오매일여의 경지를 선종에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인용하는 것입니다.


보살이 제7지에 머물러서 방편의 지혜와 수승한 도를 닦고 익혀 움직임 없이 편히 머무르며 한 생각도 쉬거나 버리거나 끊어짐이 없으니 행, 주, 좌, 와 내지 꿈에서도 장애와 상응하지 않는다.

菩薩이 住此第七地하야 修習方便慧殊勝道하야 安住不動하야 無有一念休息廢捨하야 行住坐臥와 乃至睡夢中에도 未曾與蓋障으로 相應하나니라. [華嚴經]


제6식 망상의 기멸이 끊어지면 육식이 무루(無漏)가 되어서 묘관찰지(妙觀察智)가 성립하는데 무상정(無相定) 또는 무상정(無想定)이라고 합니다. 그 무상정에 들어갈 것 같으면 공부에 끊어짐[間斷]이 없는데, 보통 일상에서만 간단이 없는 것이 아니고 꿈속에서도 간단이 없게 됩니다. 꿈속에서도 공부의 경계가 한결같으면 7지보살이 아닐래야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화두공부가 잘된다 못된다 하는 것은 아직 6식 경계에 머무르고 망상의 기멸이 여전한 공부밖에는 되지 않는 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몽중일여를 성취하면 그 사람이 남자든가 여자든가 병신이든가 뭐든가 가림 없이 7지보살임에는 변동이 없는 것입니다. 예전 스님들이 공부를 해가다가 몽중일여의 경계를 성취하면 그 사람은 칠지보살이라고 선언을 했습니다.


보살이 칠지에 머무르면 행, 주, 좌, 와 내지 꿈속에서도 장애를 멀리 떠난다.

菩薩이 住第七地하면 行住坐臥와 乃至睡夢에도 遠離障盖하나니라. [十地經]


제7지 가운데 순수한 무상관(無相觀)이 비록 항상 서로 이어질지라도 가행(加行)이 있으니, 무상관 가운데 가행이 있는 까닭에 아직 자재[任運]하지 못하나니라.

第七地中에 純無相上觀이 雖恒相續而有加行하나니 由無相中에 有加行故로 未能任運하나니라. [唯識論]


제7지의 보살도 퇴전하며, 제8지 멸진정에 들어가야만 비로소 영원한 불퇴전이 됩니다. 제7지 무상정에 들어 몽중일여한 경계에 있다 해도 오래오래 가서 공부가 달리 나갈 것 같으면 퇴전해 버리고 맙니다. 어째서 그러냐 하면 가행, 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실지로 자기가 해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입니다.


제7지 가운데 비록 일체 상(相)에 움직이지 아니하여 일체 상이 현전하지 못할지라도 그러나 자재하고 임운하게 움직이지 못하니 가행이 있는 까닭이다. 제8지 가운데엔 임운하게 움직이니 가행을 짓지 않는 까닭이다. 이것을 제7지와 제8지의 차별이라 한다.

第七地中에 雖一切相所不能動하야 相不現得故나 然이나 不自在任運而轉하나니 有加行故며 第八地中엔 任運而轉하나니 不作加行故니 是名七, 八地差別이니라. [淸凉疏]


제7지는 무상정의 무심이고 제8지는 멸진정의 무심이며, 무상정의 무심은 뒤로 물러남[退轉]이 있으나 멸진정의 무심은 뒤로 물러남이 없으며[不退轉], 제7지는 근본적으로 말할 때 아직까지 범부의 지위에 속하나 제8지는 성인의 지위에 속하게 됩니다. 또 제7지나 제8지나 그 무심은 차별이 없는 것 같지만 실지로 수행을 해보면 제7지에서는 공용(功用)이 있는 동시에 자재하지 못하며, 제8지 이상이 될 것 같으면 공용(功用)이 없는 동시에 자재하는 차이가 있으니, 제7지의 보살은 꿈속에서만 한결같고[夢中一如], 제8지 보살 이상이 되어서만 잠이 꽉 들어서도 한결같은[熟眠一如] 참다운 오매일여가 성취됩니다.


무상천, 무상정, 멸진정, 수면, 민절, 이 오위 가운데에 일체 중생들은 네 가지는 있으나 멸진정이 없고, 성인은 뒤의 세 가지만 있고, 그 가운데에도 여래 및 자재보살은 오직 하나만 있으니 수면과 민절이 없기 때문이다.

無想天 無想定 滅盡定 睡眠 悶絶의 此五位中에 異生은 有四니 除在滅定이요 聖唯後三이요 於中에 如來及自在菩薩은 唯得一이니 無睡悶故니라. [唯識論]


유식론에서는 여래와 자재위보살은 수면과 민절이 없어서 어떠한 깊은 잠에 들었든지 어떠한 큰 병이 나거나 다치든지 하여 기절했다 하여도 거기서 변동이 없고 언제든지 한결같다는 것이니 그것이 실지로 오매일여입니다. 멸진정에 있어서는 수면과 민절이 없으니까 여기서는 언제든지 한결같지 않을 수 없으니 그것이 제7지의 몽중일여와 제8지의 숙면일여와의 근본 차이입니다.

이런 유식론과는 달리 능가경에서는 아라한의 지위를 증(證)해도 멸진정이 되어서 자재위보살과 같다고 합니다.


무심의 오위 가운데에 일체 중생들은 네 가지가 있다는 것은 무상천, 무상정, 수면, 민절은 있으나 멸진정이 없음이요, 성인은 다만 뒤의 세 가지가 있으니 멸진정, 수면, 민절이요, 부처님 및 제8지 이상 보살은 오로지 멸진정 하나만 있어서 수면과 민절이 없다. 수면과 민절 두 가지는 악법인 까닭에 나타나 보이기는 잠을 자는 것 같으나 실지는 잠이 없는 까닭이니, 즉 이승의 무학도 또한 민절은 있느니라.

無心五位中에 異生有四等者는 除滅盡定이요 聖唯後三이요 佛及八地已去菩薩은 唯得有一滅盡定하야 無睡眠悶絶이니 二以惡法故로 現似有睡나 實無有故며 卽二乘無學도 亦有悶絶也니라. [宗鏡錄 四七]


부처님과 자재위보살 이상은 누구든지 참다운 오매일여에 들어서 수면과 민절이 분명히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과 자재위보살의 멸진정이라는 것이 어떻게 틀리느냐 하면, 부처님은 진여위이어서 제8 아뢰야 미세념까지도 끊어진 순무심의 멸진정이고 제8지 보살 이상은 제6식, 제7식이 끊어진 무심의 멸진정입니다.


무심도 자재위보살 이상의 무심과 부처님의 무심이 달라서 구별되듯이, 멸진정도 부처님이 수용하는 멸진정과 자재위보살 이상이 수용하는 멸진정과는 구별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멸진정이든지 자재위보살 이상의 멸진정이든지 간에 멸진정에 들면 수면과 민절이 완전히 끊어져서 오매일여한다는 것만은 틀림없이 확실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부하는 데 있어서 참다운 구경까지 성취하려면 반드시 노력노력해서 잠이 꽉 들어서도 언제든지 변동이 없는 오매일여의 경계를 돌파해야지 그런 경계를 뚫고 나아가기 전에는 공부라고 취급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어떠한 문제가 해결되느냐 하면 예전 조사스님이 깨친 경계와 부처님이 깨친 경계가 똑같다는 것이 해결됩니다. 보통으로 볼 때는 아무려면 조사스님 조사스님 하지만 부처님과 같은 경계가 될 수 있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가칠종의 정맥으로 내려온 조사스님네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반드시 오매일여라는 경계를 지내 가지고 깨친 사람들이지 오매일여의 경계를 지내지 않고 깨쳤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현사스님이 지적한 그대로로서 참다운 선지식이라 하면 잠이 꽉 들어서도 한결같은 오매일여의 경계를 성취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그렇지 않으면 선지식 노릇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잠이 꽉 들어서 한결같은 오매일여의 경계에 있다 하면 벌써 제8지 보살 이상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만 가지고 본다 하여도 종문에서 조사나 종사라 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제8지보살 이상이라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것만 가지고 조사라 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오매일여가 된 여기서 깨쳐야 된다고 늘 말하느니만큼 실지에 있어서 제8마계(第八魔界)를 벗어나서 진여의 대원경지가 현발되지 않고서는 조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여기 대해서 앞으로 더 자세히 말하겠는데 특히 유의할 것은 종문 중에서 조사라는 스님치고 잠이 꽉 들어서도 한결같은 오매일여의 경계를 지내지 않은 스님은 한 분도 없다는 것을 유의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