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제8장 선종사상] 2. 견성의 본질 - (4) 사중득활

通達無我法者 2007. 4. 30. 12:00

 

제8장 선종사상

  2. 견성의 본질

   (4) 사중득활


달마대사가 말하였다.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쉬고 안으로 마음이 허덕이지 아니하여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 도에 들어갈 수 있느니라.”

한 생각도 나지 않고 과거와 미래가 끊어져서 번뇌가 순식간에 쉬고서 혼침과 산란을 끊어 없애 종일토록 어리석고 분별이 없으니 마치 진흙으로 만들거나 나무로 조각한 사람과 같은 까닭에 장벽과 다름이 없다고 한다. 이러한 경계가 나타나면 집에 이르는 소식이 결정코 가서 멀지 아니하다.

達磨云하되 外息諸緣하고 內心無喘하야 心如墻壁하야 可以入道니라. [傳燈錄]

一念不生하고 前後際斷하야 塵勞頓息하고 昏散을 勦除하야 終日獃惷惷地하야 恰似箇泥塑木彫底하나니 故로 謂墻壁으로 無殊라 하니라 到這境界現前하면 卽到家消息이 決定去地不遠이니라. [高峰妙]


우리가 생각이나 분별로 과거니 미래니 하는데, 한 생각도 나지 아니하는 무심지에 들어갈 것 같으면 거기서는 과거, 현재, 미래 전체가 다 끊어져 버리는데 이것을 ‘과거와 미래가 끊어졌다[前後際斷]’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진로(塵勞), 즉 밖으로의 모든 반연이 순식간에 쉬게 되는데 이것이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쉬는 것[外息諸緣]’이며, 또 혼침과 산란을 끊어 없애게 되는데 이것이 ‘안으로 마음이 허덕이지 않는 것[內心無喘]’입니다. ‘애준준(獃惷惷)’이란 목석과 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모양을 말하는데 무심한 경계를 표현한 말입니다. 일체 인연을 다 쉬고 일체 번뇌망상이 다 끊어진 무심지의 경계를 목석과 장벽에 비유했습니다. 그러면 목석과 장벽과 같은 대무심지에 이를 것 같으면 이것이 도(道)냐 하면 도(道)가 아니라 여기에 이를 것 같으면 구경각을 성취하는 것, 즉 도(道)를 이루는 것이 멀지 않다는 것입니다.

밖에서 들어오는 바가 없으니 곧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쉰 것 [外息諸緣]’이요, 안에서 나는 바가 없으니 곧 ‘안으로 마음이 허덕이지 않는 것[內心無喘]’이다. 이미 내심무천하고 외식제연한 즉 한 생각도 나지 않는 것[一念不生]이다.

外無所入則外息緣이요 內無所岑則內心無喘이니 旣內心無喘하고 外息諸緣則一念不生이니라. [密雲悟]


내가 이렇게 여러 큰스님들의 말씀을 인용한 것은 흔히 ‘마음이 장벽과 같다[心如牆壁]’는 말에 대해서 오해가 많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장벽과 같다고 하니 어디 가다가 담이나 벽에 탁 부딪치는 것과 같이 가도 오도 못하게 앞에 무엇이 가로막힌 것으로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장벽과 같다’는 것은 흙으로 만든 사람과 같고, 나무로 조각한 사람과 같아서 목석과 다름없는 대무심지를 장벽이라고 한 것입니다. 즉 일념불생하고 전후제단한 무심지가 장벽과 같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앞에서 말한 오매일여와는 어떤 관계가 있느냐 하면 몽중일여만 되어도 무상정이니만큼 겉으로 볼 때는 일념불생 전후제단과 같은 경계이며, 거기서 실지로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숙면일여의 자재위보살 이상이 되어도 일념불생 전후제단의 경계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도냐 하면 도는 아니어서 여기에 다시 살아나 깨쳐야 합니다. 자재위보살 이상의 멸진정에서 오매일여를 성취하여야 도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지 도를 성취한 것은 아니니 이 경계를 종문에서는 ‘죽은 데서 다시 살아난다[死中得活]’고 합니다.


일념불생전후제단이 되었다고 해도, 대무심지에 이르렀다고 해도 거기서 살아나지 못하면 이 사람은 크게 죽은 사람[大死底人]입니다. 크게 죽은 사람은 구경각을 성취하지 못하였으며 도(道)를 이루지 못하였으며, 견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실지로 이만한 경계에 도달하려면 참으로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또 어려운 것은 사실이나, 죽어서 살아나지 못한다[死了不得活]고 하면 이것은 도가 아니고 견성이 아니라고 고불고조가 한결같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물며 객진번뇌가 그대로 있는 경계에서 견성을 했다든지 도를 이루었다든지 하면 이것은 말할 필요조차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크게 죽은 경계에서 참으로 살아나야 합니다.


쉬고 쉬어 한 생각이 만년이며 과거와 미래가 끊어지면 승묘경계라고 부르니 보봉 광도자가 이런 사람이며 세간의 진로가 그를 어둡게 하지 못한다. 비록 이러하나 도리어 승묘경계에 떨어져서 도안을 가린다. 한 생각도 나지 아니하고 과거와 미래가 끊어진 승묘경계에 도달하여서는 반드시 곧바로 큰스님을 찾아보아야 함을 알아라.

休去歇去하야 一念萬年하며 前後際斷하면 喚作勝妙境界라 하나니 寶峰廣道者가 便是這般人이라 世間塵勞가 昧他不得하나니 雖然恁麽나 却被勝妙境界하야 障却道眼이니 須知到一念不生 前後際斷處하야 正要見尊宿이니라. [五祖演]


보봉 광도자(寶峰廣道者)는 진정 문선사의 제자이며 총림에서는 광무심(廣無心)이라는 별명을 가진 스님으로서 일념불생 전후제단이 되기는 했지만 살아나지 못해서 실지 도안(道眼)은 없다고 평(評)을 했습니다. 외식제연 내심무천은 쌍차(雙遮)를 말하는데, 철두철미한 쌍차(雙遮)가 되면 쌍조(雙照)가 안 될래야 안 될 수 없지만, 쌍차(雙遮)한 데서 머무르면 보봉 광도자같이 무심에 머물러서 실지 쌍조(雙照)가 절대로 안 됩니다. 결국은 도를 성취하려면 쌍차(雙遮)가 된 데서, 즉 크게 죽은 데서 다시 살아나 쌍조(雙照)가 되어야 합니다. 죽어 가지고 살아나지 못하면 이것은 산송장입니다.

보통 번뇌망상, 분별심이 그대로 있는 것을 가지고 공부가 아닌가, 도가 아닌가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죽지도 못한 사람입니다. 죽어서 살아나지 못한 사람도 도가 아닌데 아직 죽지도 못한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 법문은 오조 법연선사가 ‘사량분별이 떨어진 대무심지에 들어 크게 죽은 사람도 도가 아닌 승묘경계’일 뿐이라고 한 진정 문선사(오조 법연선사의 스승)의 법문을 인용하여 한 말입니다. 사량분별이 다 끊어진 여기에서 크게 깨쳐야 실지로 바로 안 것이고 도를 이룬 사람인 만큼 누구든지 이런 바른 길로 가야지 도가 아닌 것을 도로 삼으면 자타가 다 망한다고 경계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크게 죽어서 다시 살아나는 것[大死却活]은 선문의 생명선입니다.


원오스님의 ‘훈풍이 스스로 남쪽에서 오는구나’라고 법문하심을 보고 홀연히 과거와 미래가 끊어지니 마치 한 뭉치 헝클어진 실을 칼로 한번 끊으니 다 끊어지는 것과 같았다. 동상(動相)이 나지 아니하나 도리어 청정한 무심경계에 앉게 되었다. 원오스님이 말씀하시되 “아깝구나. 너는 죽었으나 살아나지 못하였으니 언구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다. 죽은 후 다시 살아나야 스스로를 속일 수 없느니라”고 하셨다. 원오스님 방에 들어갈 때마다 다만 ‘유구무구가 등칡이 나무를 의지함과 같다’는 공안을 들어 물으시고 내가 겨우 입을 열려고 하면 즉시 ‘아니다’라고만 말씀하셨다. 내가 비유로써 설명하되 “이 도리는 흡사 개가 뜨거운 기름솥을 보는 것과 같아서 핥으려 하나 핥을 수 없고 버리자니 버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니, 원오스님이 “너의 비유가 지극히 좋구나”고 하셨다. 어느 날 원오스님이 ‘나무가 넘어지고 등칡이 마르니 서로 따라 온다’고 법문하심을 듣고 내가 즉시 이치를 알고는 ‘제가 이치를 알았습니다’고 하였다. 원오스님이 ‘다만 네가 공안을 뚫고 지나가지 못할까 두렵다’ 하시고는, 한 뭉치의 어려운 공안을 연거푸 들어 물었다. 내가 이리 물으면 저리 대답하고 저리 물으면 이리 대답하여 거침이 없으니 마치 태평무사한 때에 길을 만나면 문득 가듯 하여 다시 머무르고 막힘이 없으니 바야흐로 ‘내가 스스로를 속이지 못한다’고 하신 말씀을 알았다.

老漢이 見圓悟老師의 擧熏風自南來하고… 忽然前後際斷하야 如一綟亂絲를 將刀一截截斷相似하니라 雖然動相이 不生이나 却坐在淨裸裸處하니 老師云可惜다 爾死了不能活이니 不疑言句是爲大病이라 絶後更甦하야사 欺君不得이니라 每入室에 只擧有句無句如藤倚樹話하고 纔開口하면 便道不是하니라 我說箇譬喩曰아 這箇道理는 恰如狗子가 看熱油鐺相似하야 要舐又舐不得하며 要捨又捨不得이니라 老師曰爾喩得極好라 一日에 因老師가 擧樹倒藤枯相隨來也하야 老漢이 便理會得하고 乃曰某會也니라 老師曰祗恐爾透公案未得이라 하고 遂連擧一絡索詴訛公案하야 被我三轉兩轉截斷하니 如箇太平無事時에 得路便行하야 更無滯碍하야 方知道我不謾爾이니라. [大慧廣錄]


대혜스님이 자기가 알았다고 큰소리친 이후 이십여 년 만에 몽중일여가 되어서는 부처님 은혜에 보답할 수 있다고 감격해 한 일은 앞에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몽중일여가 되니 공부가 다 된 것 아닌가 하고 원오스님을 찾아뵈니 ‘너의 지금 경계도 성취하기 어렵지마는 참으로 아깝구나! 죽어서는 살아나지 못하였으니 언구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다. 죽은 후 다시 살아나야 너를 속일 수 없느니라’고 경책하셨습니다. 전후제단의 승묘경계(勝妙境界)를 선문에서는 ‘죽어서 살아나지 못하였다[死了不活]’ 하여 지극히 배척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철저히 깨쳐 활연히 크게 살아나야만 정안(正眼)으로 인가하는 것입니다. 크게 죽은 후에 다시 크게 살아나기 전에는 불조 공안들의 심오한 뜻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오스님이 대혜스님에게 공안, 즉 ‘언구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몽중일여가 되고 숙면일여가 되었다 하여도 공안의 뜻을 알 수 없는데 하물며 객진번뇌가 여전한데도 공안을 알았다 하고 견성했다 하고 보림한다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임제정맥에 있어서 원오스님과 대혜스님은 역사적으로 유명하고 큰스님입니다. 이런 큰스님들의 경험담이고 서로서로 지시하고 지도하고 의지한 그런 공부 방법이니 여기 대해서 조금이라도 의심을 하게 된다면 결국 자기만 죽고 맙니다. 이러한 공부과정은 선종뿐 아니라 전체 불교에 있어서 표준입니다. 이처럼 대혜스님이 원오스님의 지시를 따라 ‘유구와 무구가 등칡이 나무를 의지함과 같다’라는 공안을 참구하여 마침내 ‘서로 따라온다’는 원오스님의 법문에서 다시 살아나서, 즉 깨쳐서 일체 공안을 바로 알아 인가를 받았으며 원오스님이 대혜스님에게 임제정종기(臨濟正宗記)를 지어 주었습니다.


흔히 내가 장 고불고조의 뜻을 따르자고 하니 조상의 뼈만 들춘다고 나를 오해하는 사람들이 제방에 많은 모양인데, 그러나 고불고조(古佛古祖)를 표방해서 전통적인 큰스님네들 법문을 귀감으로 삼고 거울로 삼아야지 공연히 내 옳으니 네 그르니 하여 서로서로 비방할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의 표준은 고불고조에 두어야 하니 원오스님이나 대혜스님 같은 큰스님네들이 실지에 있어서 몽중일여가 되고 오매일여가 되어서도 거기서도 공부라고 생각하지 않고 참으로 화두를 참구하여 깨쳐서 비로소 조사가 되고 도인이 되고 했으니 이것을 모범으로 삼지 않으면 무엇을 모범으로 삼겠습니까? 내가 장 주장하는 뜻을 충분히 이해하기 바랍니다.


반달이 지나도록 움직이는 모양이 일어나지 않으나 여기에 앉아 머무르면 합당치 못하다. 그것은 견의 자리[見地]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하니 정지견(正知見)을 가린 것이다. 매번 잠이 꽉 들어서 꿈도 없고 생각도 없고 듣고 봄이 없을 때엔 두 동강이가 되니 경이나 어록에서 이 병을 고칠 수 없었다. 이처럼 가슴속에 걸리는 것이 십 년이 지났는데 하루는 마른 잣나무를 보니 눈에 띄자 당장에 깨쳐서 그 전에 얻었던 경계가 산산이 부서져서 흩어지니 마치 캄캄한 방 가운데서 밝은 해가 있는 데로 나온 것과 같아서 비로소 경산노인의 서 있는 곳을 보았으니 삼십방을 두드려 주었으면 좋을 것이다.

半月餘에 動相이 不生하나 不合向這裏坐住니 謂之見地不脫이라 碍正知見이니라 每於睡著하야 無夢想見聞地엔 打作兩橛하니 經敎語錄에 無可解此病이라 如是碍在胸中者十年이라가 一日엔 見枯栢하고 觸目省發하야 向來所得境界가 撲然而散하야 如闇室中에 出在白日하니 始得見徑山老人의 立地處라 好與三十棒이로다. [雪岩錄]


‘견의 자리[見地]를 벗어나지 못했다’ 함은 무심지에 머물러 있음이니 죽어서 살아나지 못한 것이며, 십 년이 지나 잣나무를 보고 깨쳤다 함은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니, 쌍차(雙遮)된 데서 쌍조(雙照)가 된 것을 말하니 실지 중도를 정등각한 것입니다. 몽중일여가 되고 숙면일여가 된 대무심지에서 다시 살아나야 확철히 깨치는 것입니다.


설암스님이 고봉스님에게 물었다.

“낮 동안 분주할 때에도 한결같으냐?”

“한결같습니다.”

“꿈속에서도 한결같으냐?”

“한결같습니다.”

“잠이 꽉 들었을 때는 주인공이 어느 곳에 있느냐?”

여기에서는 말로써 대답할 수 없으며 이치로도 펼 수가 없었다. 5년 후에 곧바로 의심 덩어리를 두드려 부수니 이로부터 나라가 편안하고 나라가 조용하여서 한 생각도 함이 없어 천하가 태평하였다.

雪岩이 問曰日間浩浩時에 作得主麽아 答作得이니다 睡夢中에 作得麽아 答作主니다 又問正睡著時엔 主在何處오 於此에 無言可對오 無理可伸이라 後五年에 驀然打破疑團하니 自此로 安邦定國하고 一念無爲하야 天下太平하니라. [高峰妙]


고금을 통해서 몽중일여가 되었다 해도 실지 공부가 아니고 잠이 꽉 들어서 공부가 안 되면 아무리 석가, 달마 이상으로 깨쳤다고 큰소리쳐도 그것은 아무 소용없고 참다운 공부가 아닌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잠이 꽉 들어서 공부가 되나 안 되나 이것을 표준삼고 공부하여야 합니다. 이상에서 인용한 스님들은 중국스님들이니 그럼 우리나라에서는 어떠냐는 것을 나옹(懶翁)스님과 태고(太古)스님의 말씀을 인용하겠습니다.


공부가 이미 동정(動靜)에 간격이 없으며 오매(寤寐)에 항상 일여하여 접촉하여도 흩어지지 아니하고 넓고 아득하여도 없어지지 아니한다. 마치 개가 뜨거운 기름솥을 보는 것과 같아서 핥을래야 핥을 수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것과 같은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당한가.

工夫가 旣到動靜無間하며 寤寐恒一하면 觸不散蕩不失하야 如狗子見熱油鐺相似하야 要舐又舐不得하며 要捨又捨不得時에 作麽生合殺오. [懶翁集]


나옹(懶翁)스님이 공부해 나아가는 정도를 열 단계로 나누어 공부십절목(工夫十節目)을 작성하여 수도의 지침이 되게 하였는데 이것은 그 제6 절목으로서 참선하여 도를 깨침에는 오매일여의 경계를 통과함을 필수조건으로 삼으니, 만일 이것을 통과하지 못하면 견성이 아니며 도를 깨친 것이 아닙니다.


점점 공부가 오매일여에 이른 때에는 다만 화두하는 마음을 떠나지 않는 것이 요긴하다. 화두를 참구하는 의심이 정을 잊어버리고 마음이 끊어진 곳에 이르면, 금까마귀가 밤중에 하늘을 뚫고 높이 날아오르리니, 그때에 슬프거나 기쁜 생각을 내지 말고 모름지기 본분종사를 찾아가서 영원히 의심을 결단하라.

漸到寤寐一如時에 只要話頭心不離니 疑到情忘心絶處하면 金烏夜半에 徹天飛리니 於時에 莫生悲喜心하고 須參本色永決疑어다. [太古集]


누구든지 오매일여가 되었다 해도 거기서 자족심을 내지 말고 본분종사를 찾아가서 참으로 바로 깨쳤나 어쩌나를 점검받아야 합니다. 태고스님이나 나옹스님은 고려 말엽의 큰스님들로서 열심히 정진하였으며 나중에 중국에 가서 인가를 받은 스님들로서 오가칠종의 정맥을 바로 안 스님들입니다. 그런 큰스님들이 공부를 가르치는 데 있어서 오매일여를 많이 말씀하셨으니 오매일여의 관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견성이란 오매일여의 대무심지에서 깨쳐 인가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흔히 보면 나의 오매일여에 대한 법문은 어렵기 그지없고 보조스님의 수심결은 쉽다고 말합니다. 방장스님의 법문은 ‘일체 망상이 다 떨어진 곳에서 오매일여가 되어 가지고 거기서 깨쳐야 한다’고 하시니 이 공부는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고 도저히 어떻게 손댈 곳이 없으나, 수심결에서는 망상이 그대로 있고 번뇌가 그대로 기멸하는 것을 확실히 아는 것을 견성이니 돈오니 하고, 객진번뇌를 점차로 없애 가는 것을 보림이니 점수니 하니 공부가 쉽다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잘 하는 말이지만 고려 중기 이후 이조로 내려오면서 큰 공부인(功夫人)이 옳게 나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수심결에 있다고 봅니다. 수심결에 보면 번뇌망상 이대로가 견성이라 하고 화두 안 해도 된다 하니 공부인이 날래야 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중국까지 가서 공부를 바로 전해 받은 태고스님이나 나옹스님은 철저하게 오매일여의 관문을 말씀하고 계시느니만큼 우리가 부지런히 공부를 해야 하고 바른 길로 가야 합니다.


동정에 일여하고 오매에 항상 일여하여 화두가 현전함이 마치 물 속에 달이 비춰 여울 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 물이 세차게 흘러 접촉하여도 흩어지지 아니하고 넓고 아득하여도 없어지지 아니한다. 마음 가운데는 고요하여 흔들리지 않고 밖으로는 흔들려도 움직이지 아니하면, 의심 덩어리가 부서지고 바른 눈을 뜨는 것이 가까웠다. 홀연히 안팎으로 맞부딪쳐 자기를 깊이 밝히면 또 마땅히 대종사를 찾아 시험을 구하여 법의 그릇을 이룰 것이요 적은 것에 만족하여서는 안 된다.

動靜一如하고 寤寐恒一하야 話頭現前이 如透水月華가 在灘浪中하야 活潑潑하야 觸不散蕩不失하야 中寂不搖하고 外撼不動하면 疑團이 破하고 正眼이 開近矣라 忽然築著磕著하야 洞明自己어든 又宜見大宗匠하야 求煅煉成法器오 不可得小爲足이니라. [蒙山]


우리가 공부를 함에 있어서 오매일여라는 관문의 통과가 근본이 되어 있는데 오매일여가 되어서 깨쳤다 해도 구경에 못 들어가는 수가 있으니 꼭 본분종사를 찾아가서 인가를 받아야 합니다.

이만치 공부라는 것이 어려운데 공부하다가 번뇌망상이 여전한 사량분별을 가지고 아는 체하는 것은 생각해 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 선계(禪界)에서는 이 병이 너무 깊어 한철 두철 나면 뭐 좀 알았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이 있으니 한심한 일입니다. 오매일여가 되었나 안 되었나 스스로 생각해 보고 양심을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크게 죽은 사람이 불법도리가 전혀 없어서 현묘, 득실과 시비, 장단이 여기에 이르러서는 다못 이렇게 쉬었느니라. 옛 사람은 이를 평지 위에서 죽은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모름지기 저쪽으로 뚫고 지나가야 되며, 혹 의지하거나 이해함이 있으면 아무 관련 없느니라.

大死底人이 都無佛法道理하야 玄妙得失과 是非長短을 到這裏하야 只恁麽休去나 古人은 謂之平地上死人이니 須是透過那邊하야사 始得이요 或有依倚解會하면 沒交涉이니라. [碧岩錄]


이처럼 무쇠로 만들어 놓은 사람은 혹 기특한 경계를 만나거나 혹 나쁜 경계를 만나더라도 이 앞에 이르러서는 모두 꿈속과 같아서 육근이 있음을 알지 못하며 아침저녁을 알지 못한다. 비록 이러한 경계에 이르렀어도 찬 재와 꺼진 불을 지켜서 캄캄한 곳으로 들어가서는 못쓰니, 모름지기 몸을 돌리는 한 활로가 있어야 한다.

這般生鐵로 鑄就漢이 或遇奇特境界하며 或遇惡境界하야도 到此面前하여는 悉皆如夢相似하여 不知有六根하며 不知有旦暮하나니 直饒到這般田地하여도 切忌守寒灰死火하여 打入黑漫漫地去也니 須是有轉身一路하여사 始得다. [碧岩錄]


제8 아뢰야 무기식의 거짓 무심인 찬 재와 죽은 불에 집착하여 몸을 돌리는 활로를 못 얻으면 영원히 사지(死地)에 매몰되고 맙니다.


조주스님이 투자스님에게 물었다.

“크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때에는 어떠합니까?”

“밤 길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날이 밝아서 가야 한다.”

굉지스님이 소참에서 이 법문을 거론하고서 말씀하였다.

“만약 [크게 죽어서 다시 살아난] 이 시절을 알면 곧 ‘밝음 가운데 어두움이 있으니 어두움으로 서로 만나지 말고 어두움 가운데 밝음이 있으니 밝음으로 서로 만나지 말라’ 함을 알 것이니라. 일체 만법이 다 없어진 때에 밝고 밝게 항상 있으며 일체 만법이 생길 때에 비고 비어 항상 고요하니 문득 죽음 가운데 삶이 있고 삶 가운데 죽음이 있다고 말함을 알 것이다.”

설두스님이 이 법문에 대해서 송하였다.


삶 가운데 눈이 있으니 오히려 죽음과 같고

약을 거리끼니 어떻게 큰스님을 감정하리오.

옛 부처도 오히려 일찍이 이르지 못했다 말하니

티끌 모래 뿌림을 누가 이해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趙州問投子大死底人이 却活時에 如何오 投子云不許夜行이요 投明須到니라 宏智小參에 擧云 若箇時에 識得하면 便知道當明中有闇이니 勿以闇相遇요 當暗中有明이니 勿以明相覩로다 一切法盡處箇時에 了了常存요 一切法生時箇時에 空空常寂이니 須知道死中活活中死니라 雪偈頌云活中有眼還同死하니 藥忌何須鑑作家오 古佛도 尙言曾未到어니 不知誰解撤塵沙요. [宏智錄 五]


일념불생 전후제단이 되어서 멸진정의 깊고 깊은 무심지에 들어가 오매일여가 되었다 해도 크게 죽은 사람이니 거기서 살아나야지 살아나지 않으면 견의 지위[見地]를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서 구경은 모르고 맙니다.

‘밝은 가운데 어두움이 있으니 어두움으로써 서로 만나지 않는다’ 함은 조이쌍적(照而雙寂)입니다. 어두움이 있다고 하여 밝음의 상대적인 어두움으로만 취급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니 밝은 가운데 어두움이기 때문입니다. ‘어두움 가운데 밝음이 있으니 밝음으로써 서로 만나지 않는다’ 함은 적이쌍조(寂而雙照)입니다. 밝음이 있다고 하여 어둠과 대립되는 밝음으로만 취급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니 어두움 가운데 밝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밝음과 어두움이 함께 있는[雙雙] 밝음과 어두움입니다. 절대로 한 편에 치우쳐서 서로 대립되는 밝음과 어두움이 아닙니다. 밝음과 어둠의 대립이 그친 동시에 밝음과 어둠이 서로 융통자재하는 중도의 밝음과 어두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법문은 석두(石頭)스님의 참동계(參同契)에서 굉지스님이 인용한 구절입니다. ‘일체 만법이 다 없어진 때’란 쌍차(雙遮)를 말하고 ‘밝고 밝게 항상 있다’는 것은 쌍조(雙照)를 말하며 전체적으로는 크게 죽은 가운데 크게 살아남을 말합니다. ‘일체 만법이 날 때’란 쌍조(雙照)를 말하고 ‘비고 비어 항상 고요하다’는 것은 쌍차(雙遮)를 말하며 전체적으로는 크게 산 가운데 크게 죽은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쌍차(雙遮)가 쌍조(雙照)며 쌍조(雙照)가 쌍차(雙遮)여서 차조(遮照) 동시이니 이것이 중도(中道)입니다. 죽음 가운데 삶이 있고 삶 가운데 죽음이 있다는 것은 깨친 경계를 말하는 것이나 말로써 아무리 설명해 봐도 소용없습니다. 실지로 깨쳐 봐야 아는 것이니만큼 화두를 부지런히 해서 오매일여에서 확철히 깨쳐서야 그 경계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티끌 모래를 뿌린다’ 함은 장경(長慶)스님의 법문을 설두스님이 인용한 것입니다. 장경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묻되 “어떤 것이 바른 법의 눈[正法眼]입니까?” 하니 “바라노니 모래를 뿌리지 말라”고 한 법문입니다. 여기에 와서는 견성성불이라는 것도, 임제 할과 덕산 방도, 향상일로도, 또 온갖 말과 수식어가 다 소용없고 천칠백 공안도 눈에 모래를 뿌리는 것인 줄 알아야만 어느 정도 ‘삶 가운데 죽음이 있고 죽음 가운데 삶’이 있다는 뜻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삶 가운데 죽음이 있고 죽음 가운데 삶’이 있다 한다고 무슨 별다른 깊은 법이 있는가 집착하여 매달리게 되면 영원토록 불법을 모르고 깨치지 못하고 마는 것이며 그렇다고 실지 이런 경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크게 죽어서 크게 살아나면 제8 아뢰야 무기식까지 다 없어진 참으로 크게 죽은 경계가 나타납니다. 여기에서는 항상 죽은 가운데 항상 살아 있고 항상 산 가운데 항상 죽어서 밝음과 어두움이 서로 고요하고 서로 비치니, 곧 부처님과 조사의 바른 눈입니다. 이것을 밝음과 어둠이 함께하는[雙雙] 시절이라고 합니다.


숨이 끊어진 때와 종적이 끊어진 곳에서 참으로 바른 눈을 갖추어야 한다. 그때에는 역력하여 가라앉지 아니하고 신령하고 신령하여 상대가 끊어지니 문득 사방으로 활보하며 주위에 널리 응할 것이다.

絶氣息時斷蹤跡處에 須具眼하여사 始得다 那時에 歷歷不沈하고 靈靈絶對하여 便能闊步大方하여 周旋普應이니라. [宏智錄]


대무심지에서 크게 살아나야 함을 말하는 것이니, 크게 살아나면 쟁반 위를 구슬이 구르듯이 자유자재한 큰 활용[大用]이 널리 펼쳐 규범이 있지 않은 경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크게 죽은 데서 크게 살아나야지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경계가 나타나지 않는데 하물며 번뇌망상이 그대로 있는 데서 대용(大用)이 나타난다고 한다면 이것은 불법이 아닙니다.


마음이 안온하며 꽉 차 있고 살 방도가 차고 서늘한 때에 문득 겁(劫)이 공함을 보아서 털끝만큼도 인연의 번뇌를 짓지 아니하고 실끝만큼도 장애를 지음이 없다. 공허함이 지극하여 광명이 있고 청정함이 원융하여 빛나니 만고에 뻗쳐 혼매하지 않는 한 사실이 있다.

田地穩密密處와 活計冷湫湫時에 便見劫空하여 無毫髮許도 作緣累하며 無絲糝許作障翳하여 虛極而光하고 淨圓而耀하여 歷歷有亘萬古不昏昧底一段事로다. [宏智錄]


‘공허함이 지극하여 광명이 있다’ 함은 일체가 공한 크게 죽은 경계인 쌍차(雙遮)를 말하고, ‘청정함이 원융하여 빛난다’ 함은 크게 살아난 경계인 쌍조(雙照)를 말합니다. 적적한 가운데 광명이 있고 광명 가운데 적적하여서 억천만 겁이 지나도록 언제든지 어둡지 아니하는 이런 경계는 진여본성을 깨치고 진여대용이 현전한 사람의 경계입니다. 제8 아뢰야 무기식까지 영원히 없앤 참으로 크게 죽은 경계의 대공적(大空寂) 가운데서 크게 살아나서 발하는 대광명은 억천 겁이 지나도 옛되지 않고 만세에 뻗쳐 늘 지금이니 이것이 부처님과 조사들이 바로 깨친 경계이며 이것을 대적광(大寂光)이라고 합니다.

임제종에 있어서는 대기대용(大機大用)으로 밀고 나가지만 마음자리[心地] 문제에 있어서는 조동종이 아주 섬세하여서 ‘미세조동(微細曹洞)’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는만큼, 이러한 자세한 법문이 많이 있지만 여기서는 천동 굉지스님의 법문을 인용했습니다.


만약에 식음(識陰)이 다 없어지면 둥글고 밝은 청정한 묘심이 그 가운데서 피어나니 깨끗한 유리병 속에 보배 달을 넣은 것과 같다. 이에 십지와 등각을 뛰어넘어 여래의 묘장엄 바다에 들어가서 보리를 원만히 성취하여 무소득으로 돌아간다.

識陰이 若盡則圓明淨心이 於中에 發化하여 如淨瑠璃內含寶月하여 如是乃超十地等覺하여 入於如來妙莊嚴海하여 圓滿菩提하여 歸無所得이니라. [楞嚴經]


식음(識陰)이란 제8 아뢰야를 말합니다. 오매일여의 크게 죽은 데서 다시 크게 살아나는 것을 ‘깨끗한 유리병 속에 보배 달을 넣은 것과 같다’고 하며 안과 밖이 철저하게 밝게 되는 것이니 진여본성을 깨친 성불의 경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소득이 있느냐 하면 무소득으로서 한 법도 얻을래야 얻을 수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식음(識陰)이 없어지면 바야흐로 지위를 뛰어넘어 무소득을 요달하여 구경을 원만히 성취하니 깨끗한 유리병 속에 보배 달을 넣어 놓은 것과 같다.

若得識陰盡하면 方超地位하여 了無所得하여 究竟圓成하여 如淨瑠璃內含寶月이니라. [宗鏡錄]


선가에서도 구경각을 ‘깨끗한 유리병 속에 달을 넣어 놓은 것과 같다’고 표현하는데, 크게 죽은 데서 크게 살아나는 것을, 고요하면서 서로 비친다[寂而雙照]느니, 비치면서 서로 고요하다[照而雙寂]고 말합니다.

우리가 공부할 때는 부지런히 부지런히 해서 크게 죽어서 크게 살아나야지 아직 죽지도 못하여 망상분별이 기멸하는 경계에서 견성했다고 착각을 일으키든지 혹은 그런 망견을 가지고 남을 지도하게 된다면 저 망하고 남 망치는 것입니다. 한번 죽어서 크게 살아나야 하는 것이니 죽은 경계에 머물러 있으면 그것은 산송장이지 산 사람은 아니니 오매일여가 되었다 해도 크게 살아나야 안과 밖이 철저하게 밝아서 구경각을 성취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