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제8장 선종사상] 2. 견성의 본질 - (5) 대원경지

通達無我法者 2007. 4. 30. 12:01

 

제8장 선종사상

  2. 견성의 본질

   (5) 대원경지


크게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서 구경각을 성취하면 이것을 견성이라고 하는데 그 견성은 대원경지를 내용으로 합니다. 대원경지란 제8 아뢰야 무기식이 다 끊어지고 진여본성이 발현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경각을 성취한 자리, 즉 자성을 깨친 그 자리는 교가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선가에서도 대원경지(大圓鏡智)라고 표현하는데 교리적 이론이나 실지 체험한 선(禪)에서나 구경이 대원경지에 있다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대원경지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위산이 앙산에게 말하였다.

‘나는 대원경지를 종요로 삼아서 세 종류 생을 벗어나니 소위 상생(想生)과 상생(相生)과 유주생(流注生)이다. 상생(想生)은 생각하는 마음이 어지러움이요, 상생(相生)은 생각하는 바의 경계가 뚜렷하게 나타남이요, 미세한 유주생(流注生)은 함께 티끌 때가 되느니라.

潙山이 謂仰山曰吾以鏡智로 爲宗要하여 出三種生이니 所謂想生相生流注生이니라 想生은 卽能思之心이 雜亂이요 相生은 卽所思之境이 歷然이요 微細流注가 具爲塵垢니라. [人天眼目]


주관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상생(想生)이고 객관적으로 나타나 보이는 것이 상생(相生)입니다. 주관과 객관이 완전히 떨어지면 제8 아뢰야에 들어가는데 이것을 미세유주(微細流注)라 합니다. 실지에 있어서 ‘생각하는 마음’과 ‘생각하는 바의 육진 경계’를 완전히 벗어나서 대무심지에 들어가면, 그 작용[行相]이 미세해서 보통 중생은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재위 이상의 대보살들도 잘 모르니 그것을 미세유주라 합니다. 미세유주를 벗어나야만 대원경지가 드러나는 것이니, 설사 대무심지에 머물렀다 해도 미세유주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죽어서 살아나지 못한 것이니 산송장이며 눈을 바로 뜬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공부를 하려면 무분별심인 미세유주까지도 뿌리를 뽑아 버려야만 공부를 성취한 사람이고 대원경지를 성취한 사람이며 법을 바로 깨친 사람입니다. 견성하면, 마음을 깨치면 그만이라 하지 않고 ‘대원경지를 으뜸으로 삼는다’ 함은 대원경지는 과상(果相)이니 불과(佛果)를 증득해야 대원경지가 성립되는 것임을 구체적으로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서이니 이것으로도 견성이 과상(果上)의 불지(佛地)임이 분명합니다.


그 마음의 근원에 도달하지 못하면 제8 아뢰야의 미세유주인 마의 경계에 떨어진다.

未達其源하면 落在第八魔界니라. [洞山初]


제8 아뢰야 미세유주까지도 뛰어넘어야 깨친 것인데 제8 아뢰야 미세유주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제8 마구니 경계라고 합니다. 실지로 정각을 이루고 구경각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는 제8 아뢰야 미세유주가 큰 장애가 되어서 거기에 집착하게 되면 마구니 가운데 큰 마구니입니다.


갓난아기가 비록 육식을 두루 갖추고 있어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으나 아직 육진을 분별하지 못하여 좋고 나쁨과 장단과 시비득실을 모두 알지 못한다. 도를 배우는 사람도 이 갓난아기와 같아져서 영욕과 공명과 거슬리는 감정과 좋은 경계가 그를 동요시키지 못하며, 눈으로 색을 보되 맹인과 같고 귀로 소리를 듣되 귀머거리와 같으며 어리석고 어리석은 것 같아서 그 마음이 동요하지 아니함이 수미산과 같아야 한다. 지음과 인연의 생각이 없으며 푸른 하늘이 넓게 덮음과 같고 두터운 땅이 넓게 떠받치는 것과 같으니 무심인 까닭으로 만물을 잘 길러 이와 같이 공용이 없는 가운데 공용을 베푼다. 비록 이러하나 또다시 굴 속에서 뛰어나와야 옳다.


어찌 교가에서 말함을 보지 못하였는가? ‘제8 부동지 보살이 무공용의 지혜로 자재하게 일체지의 바다에 들어간다’고 하였으나 납승은 여기에 도달하여도 집착하여서는 안 된다. 능가경에서 말씀하되 ‘상생(相生)은 집애(執碍)요 상생(想生)은 망상이요 유주생(流注生)은 즉 헛된 인연을 뒤쫓아서 끊임없이 움직인다’고 하였다. 만약 무공용지에 도달하여도 오히려 유주생 가운데 있으니 제3의 유주생의 상(相)을 벗어나야 비로소 쾌활하고 자재하다. 능엄경에 말씀하되 ‘빠르게 흐르는 물을 바라보면 고요하고 조용하다’ 하였다. 갓난아기의 육식이 비록 공용이 없으나 생각생각에 흐름을 그치지 못함이 빨리 흐르는 물과 같다.

初生孩兒가 雖具六識하야 眼能見하며 耳能聞하나 然未曾分別六塵하야 好惡長短과 是非得失을 總不知라 學道之人도 要復如嬰孩하야 榮辱功名과 逆情順境이 都他不得하야 眼見色하되 與盲等하며 耳聞聲하되 與聾等하야 如癡似兀하야 其心不動이 如須彌山이니라 …… 無造作無緣於慮하야 如天普蓋하며 似地普擎하나니 爲無心故로 所以長養萬物하야 如是於無功用中에 施功用하나니라 雖然恁麽나 更須跳出窠窟하야사 始得다 豈不見가 敎中에 道하되 第八不動地菩薩이 以無功用智로 任運流入薩婆若海라 하나니 衲僧家는 到這裏하야 亦不可執着이니라 …… 楞伽經에 云 相生은 執碍요 想生은 妄想이요 流注生則逐妄流轉이라 하니 若到無功用地하야도 猶在流注生中이니 須是出得第三流注生相하야사 方始快活自在니라 …… 楞嚴經에 云 如急流水望爲恬靜이라 하니 孩子六識이 雖然無功用이나 爭奈念念不停이 如密水流오 [碧岩錄 八]


갓난아기는 대무심지에 든 사람을 비유한 것입니다. 무심인 까닭에 공용을 베푼다 해도 그것은 아직 대무심지에 머물러 있는 것이어서 죽었으나 살아나지 못한 것입니다. 제8지 부동지보살이 오매일여가 되어 대무심지에 들어 무공용지가 현전하였다 해도 아직 제8 아뢰야 미세유주에 있으니 모름지기 이것을 벗어나야 쾌활하고 자재하니 곧 죽어서 살아나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살아나지 못하면 조사의 공안도 모르는 것입니다. 원오스님이 대혜스님에게 ‘언구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라 하고 아무리 무공용지에 들어가서 참말로 자기가 자재한 것 같지마는 여기서 살아나지 않을 것 같으면 불법(佛法)은 꿈에도 모르는 것입니다. 오직 고인(古人)의 화두를 참구하여 깨쳐서 참으로 크게 살아나야 합니다.


맑고 공적하며 둥글고 밝아 움직이지 아니함이 대원경지이니라.

湛然空寂하여 圓明不動이 卽大圓鏡智니라. [頓悟要門]


맑고 고요하여 공적한 여기서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고 둥글고 밝아 움직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적이쌍조(寂而雙照)하고 조이쌍차(照而雙遮)해서 죽은 가운데 살고 산 가운데 죽은 차조동시(遮照同時)가 되어서만은 이것을 대원경지라 합니다.


제8 이숙식이 금강도 위에서 공하면 인과를 초월하여 바야흐로 대원경지로 바뀐다. 무구가 동시에 나타난다 함은 불과위(佛果位) 가운데서는 대원경지를 무구라 하니 이것은 청정한 진여인 까닭이다. 만약 대원경지로 상응하면 법신이 명백하게 나타나서 둥글고 밝게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어 이(理)와 지(智)가 하나로 같아서 바야흐로 구경인 일심의 본체를 증득한다. 이것이 유식의 지극한 법칙이며 여래의 극과이다. 밝게 살펴보건대, 이 제8식이 깊이 잠겨서 깨뜨리기 어려우니 이 이숙식을 실끝이라도 투과하지 못하면 끝까지 생사의 언덕에 머무른다. 덕이 높은 옛 큰스님과 모든 조사들이 이 제8식을 타파하지 않고서는 부처를 뛰어넘고 조사를 뛰어넘는 심오한 이치를 말하지 않았으나, 오늘의 사람들은 생멸심도 잊어버리지 않고 마음에 여러 가지로 물든 번뇌의 종자를 털끝만큼도 정결케 하지 못하고서 문득 도를 깨쳤다고 사칭한다. 어찌 얻지 못하고서 얻었다 하고 증하지 못하고서 증했다고 함이 아니리오. 참으로 두렵고 두렵지 않은가.

異熟이 若空則超因果하야 方才轉成大圓鏡智니 言無垢가 同時發者는 以佛果位中을 名無垢니 乃淸淨眞如니라 謂鏡智로 相應하면 法身이 顯現하야 圓明普照十方塵刹하야 以理智가 一如하야 方證究竟一心之體니 此唯識之極則이며 乃如來之極果也라 諦觀하니 此識이 深潛難破하니 此識을 絲毫未透하면 終在生死岸頭事니라 古德諸祖가 未有不破此識而有超佛越祖之談이어늘 今人은 生滅도 未忘하야 心地에 雜染種子도 未淨纖毫하고 便稱悟道하니 豈非未得을 謂得하며 未證을 謂證이리오 可不懼哉아 可不懼哉아. [憨山 八識規矩通說]


이 법문은 감산 덕청스님이 지은 8식규거통설(八識規矩通說)의 끝에서 간결하게 하신 말씀입니다. 감산 덕청(憨山德淸:1546~1623)선사는 선, 교에 모두 정통한 명(明)나라 말엽의 거장입니다. 제8 아뢰야 미세유주를 영영 떠나서 등각의 최후심인 금강도(金剛道) 이후에 이숙식이 공하여 여래의 극과인 대원경지를 증득하여야 오도(悟道)이며 견성임을 분명하고 널리 말하니 조계 정정을 서로 계승한 보기 드문 선지식입니다. 그리고 생멸의 망심도 아직 끊지 못하고 도를 깨쳤다고 사칭하는 것을 통탄함은 예나 지금이나 수도인의 공통된 병을 지적하여 부순 쾌론입니다. 그러니 거칠고 무거운 것과 미세한 일체 번뇌망상을 모두 없앤 구경무심인 대원경지를 실지로 증득하여 크게 쉬고 쉰 옛 사람의 마음자리에 도달하여야 합니다. 제8 아뢰야 미세념을 다 끊은 대원경지는 크게 죽어서 다시 살아난 무심, 무념, 무생, 무주이며 따라서 찰나간에 증하고 원만히 증한 구경정각인 돈오와 견성입니다.


생사의 언덕에 머무르는 일이라 함은 분단생사(分段生死)를 벗어났지만 변역생사(變易生死)에 머물러 있어서 분단생사와 변역생사를 완전히 벗어난 여래의 생사 자재는 아니라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