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고봉정상과 네거리
上堂云, 一人은 在孤峯頂上하야 無出身之路요 一人은 在十字街頭하야 亦無向背니 那箇在前이며 那箇在後오 不作維摩詰하며 不作傅大士하노니 珍重하라
임제스님이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
“한 사람은 고봉정상에 있어서 몸이 더 나아갈 길이 없고,
한 사람은 네거리에 있으면서 또한 앞뒤 어디든 갈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이 앞에 있고 어떤 사람이 뒤에 있는가[누가 더 나은가]?
유마힐도 되지 말고 부대사도 되지 말라. 편히 쉬어라.”
강의 ; 말이 있는 것이 옳은가?
말이 없는 것이 옳은가?
길거리만을 지킬 일도 아니고 높은 봉우리만을 지킬 일도 아니다.
쉽게 풀이하면, 높고 높은 봉우리에서 더 이상 나아갈 데가 없는 사람과 어디든 갈 수 있는 네거리에 있으면서 어느 곳으로도 가지 못하는 사람과 누가 더 나은 사람인가? 라는 말이다.
고봉정상에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알겠는데 네거리에서 오도 가도 못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바꿔 해석하면 사실은 오도 가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든지 다 갈 수 있다는 뜻이다.
교학에 전간문(全揀門) 전수문(全收門)이라는 것이 있다.
일체를 부정하는 길과 일체를 긍정하는 길이다.
고봉정상은 일체를 부정하는 입장이고, 네거리는 일체를 긍정하는 입장이다.
공(空)과 유(有)의 경우다.
공이든 유든 모두가 치우친 견해다.
변견(邊見)이며 편견이다.
그래서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가 없다.
도가 아니다.
중도(中道)가 아니다.
불교가 아니다.
진정한 삶의 길이 아니다.
둘 다 틀린 것이다.
거기서 더 나은 사람을 묻는 것은 장난이다.
덫이다.
유마대사는 유마경에서 불이(不二)법문을 말이 없음으로 표현하여 문수보살을 놀라게 했다.
그래서 말이 없음[杜口]으로써 그를 표방하고 있다.
그는 전간문의 삶이다.
그러나 부대사(傅大士,497-569)는 그와 반대의 입장이다.
설법을 많이 한 분이다.
그래서 사방에서 수행자들이 몰려들었다.
왕궁에도 출입하며 법을 설했다.
저서도 있다.
남달리 전법활동을 많이 하여 다 수용하면서 살았다.
그는 전수문의 삶이다.
임제스님은 경고한다.
“유마힐도 되지 말고 부대사도 되지 말라.”
하지만 임제스님의 말씀에 토를 단다면 왈, “유마힐도 되고 부대사도 되거라.”
임제스님은 쌍차(雙遮)로 보이고, 필자는 쌍조(雙照)로 보였다.
그래서 결국은 차조동시(遮照同時)가 된다.
하지만 이런 말을 독자들은 알아듣기 쉬울지 모르나 여운이 없다.
역시 임제스님의 말씀으로 끝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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