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臨濟錄)

임제록강설/탑기/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9. 10. 16:59
 

탑기   

臨濟慧照禪師塔記

 

강의 ; 임제스님에 대한 간단한 전기다.

아마 탑을 세우고 스님의 전기를 간단하게 기록하여 그 인물이 어떤 분인가를 후세에 길이 알리려는 뜻으로 쓰여 진 것 같다.

탑이 있으면 반드시 그 탑을 알리는 비명이 있어야 한다.

임제스님의 전기를 간단하게 소개할 때 필요할 뿐만 아니라 귀중한 자료가 된다.

 

61-1 간단한 행장 1

師諱義玄이니

曹州南華人也이요

俗姓邢氏니라

幼而潁異하고

長以孝聞하니라

及落髮受具하야는

居於講肆하야

精究毘尼하고

博賾經論이러니

俄而歎曰 此濟世之醫方也

非敎外別傳之旨로다

卽更衣遊方하야

首參黃檗하고

次謁大愚하니

其機緣語句

載于行錄하니라

旣受黃檗印可하고

尋抵河北하야

鎭州城東南隅

臨滹沱河側하야

小院住持하니

其臨濟

因地得名이니라

時普化先在彼하야

佯狂混衆하니

聖凡莫測이라

師至卽佐之하야

師正旺化

普化全身脫去하니

乃符仰山小釋迦之懸記也니라

선사의 휘는 의현이고 조주 남화사람이다.

속성은 형씨다.

어려서는 남달리 영특하였으며 자라서는 효성이 지극하였다.

마침내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 강원에 계시면서 계율을 깊이 연구하시고 경과 론을 널리 공부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것은 세상을 구제하는 약의 처방전일 뿐, 교외별전의 뜻이 아니다.”하며 탄식하고는 곧 옷을 갈아입고 제방을 행각하였다.

맨 먼저 황벽스님을 찾아뵙고 다음으로 대우스님을 찾아뵈었다.

그 기연과 말씀들은 행록에 실려 있다.

 

강의 ; 이미 황벽스님의 인가를 받고 하북으로 가서 진주성 동남쪽 호타하라는 강 곁에 있는 작은 절에 머무셨다.

<임제>라는 이름은 그 지역의 이름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그때 보화스님이 그 곳에 먼저 와서 거짓으로 미친 척을 하며 대중에 섞여 살았는데 성인인지 범부인지 헤아릴 수 없었다.

스님께서 그 곳에 가시자마자 보좌해 드리다가 정작 스님께서 교화를 왕성하게 펴실 즈음에 온 몸 그대로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는 작은 석가모니라는 앙산스님의 예언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61-2 간단한 행장 2

適丁兵革하야

師卽棄去하니

大尉黙君和

於城中

捨宅爲寺하니

亦以臨濟爲額하고

迎師居焉하니라

後拂衣南邁하야

至河府하니

府主王常侍

延以師禮하니

住未幾

卽來大名府興化寺하야

居于東堂하니라

師無疾하고

忽一日

攝衣據坐하야

與三聖問答畢하고

寂然而逝하니

時唐咸通八年丁亥 孟陬月十日也니라

門人以師全身으로

建塔于大名府西北隅하니

勅謚慧照禪師

塔號澄靈이라

合掌稽首하야

記師大畧하노라

그 때 마침 난리가 나서 그 곳을 떠나셨다.

태위인 묵군화가 성안에 있는 자기의 집을 희사하여 절로 만들었다.

역시 <임제>라는 액호를 달고 스님을 맞아 계시도록 하였다.

뒤에 옷깃을 떨치고 남쪽으로 향하여 하북부에 이르렀다.

부주인 왕상시가 제자의 예를 갖추어 맞이하였다.

거기에 머무신지 얼마 되지 않아 곧 대명부의 흥화사로 옮겨 동당에 기거하였다.

스님은 병이 없으셨는데 하루는 옷깃을 여미고 자리에 앉으시더니 삼성스님과 문답을 마치시고 조용히 돌아가셨다.

 

강의 ; 때는 당나라 함통 8년 정해(867) 정월 10일이었다.

문인들이 스님의 전신을 대명부 서북쪽에 탑을 세워 모셨다.

시호는 혜조선사, 탑호는 징령이라 하였다.

합장하고 머리 숙여 스님의 행장을 간단히 쓰노라.

    住鎭州保壽嗣法小師 延沼謹書

    住大名府興化嗣法小師 存獎校勘

    법제자 진주 보수사 주지 연소는 삼가 쓰고,

    법제자 대명부 흥화사 주지 존장이 교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