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능엄경(楞嚴經)

능엄경 강의 8 / 송찬우 교수

通達無我法者 2007. 11. 28. 10:37


 
 
 
능엄경 강의 8  
 


◈ 四非見精破識蘊滅第八識的指正修行路分三

《初破我執以顯一眞分三

◈ 4. 제8식견분현량[見精]을 부정함으로써 식온(識?)을 타파하여 제8식을 소멸하고 올바른 수행로를 분명히 지적하기를 셋으로 하다.
《1. 아집을 타파함으로써 일심진여를 셋으로 나타내다.
◎ 初當機出計 阿難白佛言. 世尊. 若此見精必我妙性. 今此妙性現在我前.(計卽色是我) 見必我眞. 我今身心復是何物.(計-色是我) 而今身心分別有實. 彼見無別分辯我身(計我大色小色在我中) 若實我心令我今見. 見性實我而身非我. 何殊如來先所難言物能見我.(計色大我小我在色中) 唯垂大慈開發未吾

◎ 1. 아난이 자기의 생각을 드러내다. 
23. 아난은 부처님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가령이 제8식견분현량이 반드시 저의 오묘한 본성이 그 본성은 현재 저의 목전에서 만물에 두루 보편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만물이 바로 저의 오묘한 본성의 모습이 됩니다.[計色卽是我]
  이처럼 현재 나의 목전에 두루한 제8식 견분현량이 반드시 저의 진실한 성품이라면 그 본성은 저의 육신을 떠나 목전에 있으므로 나의 진실한 본성은 도리어 육신 밖에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 저의 육신 안에 있는 마음은 당연히 진실한 마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저의 몸 안에 있는 마음은 다시 어떤 물건이라 해야 할런지요[計離色是我]
  그리고 현재 저의 육신 안에 있는 마음은 목전의 만물에 두루 보편한 보는 성품[見精]을 분별하는 실제의 알맹이가 있으나 육신 밖에서 만물에 보편한 보는 성품은 저의 육신을 분별하는 작용이 없습니다. 이로써 관찰해 본다면 분별하는 마음은 저의 육신 안에 있고, 목전의 만물에 두루한 보는 성품에 있지 않은 듯도 합니다.[計我大色小色在我中]
  가령 목전의 일체 만물에 두루 보편한 견정이 저의 실제 마음이라면 지금 저의 육신은 목전의 견정에 보이는 대상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처럼 목전의 보는 성품이 저의 육신을 밖에서 안으로 볼 수 있다면 목전의 만물에 두루 보편한 보는 성품이 진실한 저의 마음이므로 육신은 진실한 저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래께서 먼저 대상사물이 다시 너를 되돌아 보겠구나 라고 책망하셨던 말씀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計色大我小我在色中]
  대자비를 베푸사 아직 깨닫지 못한 저의 마음을 열어주소서.”



[要義] 여기부터선 제8식자증분(自證分)을 논파하면서 아집(我執)까지 가만히 타파하여 일심진여의 이치를 나타내고 있다.
  제7식은 제8식자증분체를 한결같이 집착하여 그것을 실재하는 자내아(自內我)로 헤아린다. 이것이 아집이다.
  그 때문에 소승인은 식자증체를 열반진아(眞我)로 헤아리고, 외로는 이를 신아(神我)로 집착하게 된다. 외도는 이 때문에 신아가 세계에 두루 보편하다는 등등의 말들을 한다.
  이 식자증체에 대한 이같은 잘못된 집착 때문에 성유식론(成唯識論)에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타나식(阿陀那識)은 매우 심오하고 미세하여 습기종자가 마치 폭포수 흐르듯 한다.
  나는 범부와 어리석은 소승인에게 이를 연설하지 않는데 그들이 이 식체를 실재하는 아로 분별할까 염려스러움 때문이다.”
  이같은 제8식을 세존께서 경솔하게 말씀하시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아난은 부처님께서 위에서 보여주신“가령 모든 사물을 전환하여 자기의 일심으로 귀결한다면 바로 여래의 경지와 동일하리라.”했던 말씀을 듣고 이윽고 목전에 보이는 사물이 진실한 마음인가 하는 의심을 일으켰다.
  아난은 이 가운데서 아집견(我執見)으로 가만히 헤아리면서 부처님께 법문을 청하고 있는데, 그 의도는 외도가 집착하는 신아(神我)를 논파하는 데 있다.
  왜냐하면 외도는 식자증분을 신아로 집착하고, 불법내의 소승인은 오온신심이 진아(眞我)를 떠나 있다[離蘊我]라고 헤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난을 대신해서 이들 둘까지를 함께 논파해야만 한다. 이들을 논파하는 말은 본 경문에 분명히 나타나질 않지만 실로  그 의미까지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아난이 헤아리고 있는 것은 몸 밖의 사물이 진실한 나의 모습이라고 총체적으로 헤아리고 있다 하겠는데, 이는“모든 사물을 전환하여 자기의 일심으로 귀결시킨다”한 이 한 말씀에서 일어났다.
  그 때문에 세존께선 다음의 경문부터 사물이 나아가 견정(見精)을 선택하여 그의 집착을 사물에서 바로 논파하고 계신다.

◎二世尊委破分二   ▣ 初卽物破是見 
佛告阿難. 今汝所言見在汝前是義非實. 若實汝前汝實見者. 則此見精旣有方所非無指示. 且今與汝坐祇陀林. ?觀林渠. 及與殿堂. 上至日月. 前對恒河. 汝今於我師子座前. 擧手指陳是種種相. 陰者是林. 明者是日. ?者是壁. 通者是空. 如是乃至草樹纖毫. 大小雖殊. 但可有形. 無不指著. 若必其見現在汝前. 汝應以手. 確實指陳. 何者是見. 阿難當知若空是見旣已成見何者是空. 若物是見旣已是見何者爲物. 汝可微細披剝萬象. 析出精明淨妙見元. 指陳示我. 同彼諸物分明無惑. 阿難言. 我今於此重閣講堂. 遠?恒河. 上觀日月. 擧手所指. 縱目所觀. 指皆是物. 無是見者. 世尊. 如佛所說. 況我有漏初學聲聞. 乃至菩薩. 亦不能於萬物象前剖出精見. 離一切物別有自性. 佛言. 如是如是

◎ 2. 세존께서 자세하게 논파하시길 두 분야로 하시다. ▣ 1. 사물에 나아가 그것은 보는 성품이 아님을 논파하시다. 24. 부처님은 아난에게 고하셨다.
  “너는 지금 너의 보는 성품이 목전의 만물에 두루 보편해 있다 하나 이 의미는 진실이 아니다.
  가령 너의 보는 마음이 너의 목전 만물에 두루 보편해 있어 네가 실로 그 끝을 본다면 이 보는 마음은 이미 일정한 방향과 처소가 있어야만 하므로 구체적으로 지적해 보여 줄 수 있으리라.
  나는 지금 너와 함께 기원정사 숲에 앉아 수목과 물이 흐르는 도장과 전각당우를 두루 빠짐없이 보고 있으며, 그 시야가 위로는 해와 달에 이르고 앞으로는 항하강을 마주 보고 있다.
  너는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사자좌(獅子座) 앞에서 손을 들고 분명히 지적해 보라. 이들 갖가지 물상들 가운데서 그늘진 곳은 숲이고 밝은 곳은 해이고, 간격이 막힌 곳은 담장이며, 공간이 통한 곳은 허공이며, 이처럼 내지는 가는 털끝만 한 풀까지 그 크고 작은 모습들이 다르긴 하나 형체가 있는 사물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지적해서 사람에게 보여 줄 수 있다.
  현재 너의 목전에 나열한 사물들에서 너의 견정이 반드시 보편해 있다면 너는 손으로 확실하게 지적해 보라. 어느 사물에 너의 견정이 있느냐.
  아난아 알아야만 한다. 현재 목전에 형체로 떠오른 모습들은 사물 아님이 없고, 형체없는 것은 허공이므로 이들을 제외하면 따로 지적할 것이 없다.
  가령 허공이 너의 보는 성품이라면 그 허공은 이미 너의 보는 성품을 이루었는데 무엇을 지적하여 목전의 허공이라고 하겠으며, 만일 형체있는 사물들이 너의 보는 마음의 모습이라면 그 사물자체가 이미 너의 보는 성품인데 또 무엇을 사물이라고 가리키겠느냐.
  너는 이들 삼라만상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분석하여 그 가운데서 정미하고 밝고 청정하고 오묘한 근원적인 보는 성품을 꺼내서 나에게 지적해 보여 줌으로써 나머지 다른 모든 사물들처럼 분명하여 미혹함이 없게 하다.”
  아난은 말하였다.
  “저는 지금 이들 삼라만상 가운데서 가까이로는 강당으로부터 멀리는 항하강까지 보며, 위로는 해와 달을 관찰하여 손을 들어 그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시야가 가는 데로 보지만 그 모두는 사물일지언정 거기에는 저의 보는 성품이라곤 없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듯이 저는 아직 유루초학성문(有漏初學聲聞)일 뿐입니다.
  내지는 보살의 경지에 이른다 해도 삼라만상에서 보는 성품을 분석하여 드러내진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체의 사물을 떠나서 따로 드러난 자성이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너의 말이 옳으니라.”

▣ 二卽物破非見 
佛復告阿難. 如汝所言無有見精離一切物別有自性. 則汝所指是物之中無是見者. 今復告汝. 汝與如來坐祇陀林. 更觀林苑. 乃至日月. 種種象殊. 必無見精受汝所指. 汝又發明此諸物中何者非見. 阿難言. 我實?見此祇陀林. 不知是中何者非見. 何以故. 若樹非見云何見樹. 若樹卽見復云何樹. 如是乃至若空非見云何見空. 若空卽見復云何空. 我又思惟. 是萬象中微細發明無非見者. 佛言. 如是如是. 於是大衆非無學者聞佛此言茫然不知是義終始. 一時惶悚失其所守. 如來知其魂慮變?. 心生憐愍. 安慰阿難及諸大衆. 諸善男子. 無上法王. 是眞實語. 如所如說不?不妄. 非末伽黎四種不死矯亂論議 汝諦思惟無?哀慕

▣ 2. 사물에서 견정이 아님을 논파하시다. 
  부처님은 다시 아난에게 고하셨다.
  “너의 말처럼 견정은 모든 사물에 있질 않고 모든 만상을 떠나서 따로의 자성이 있다 하자. 그렇다면 네가 지적하는 이 모든 사물들 가운데는 견정이란 없겠구나.
  지금 다시 너에게 고하노라.
  너는 여래와 함께 기원정사 숲에 앉아 숲이 우거진 동산과 내지는 해와 달까지를 다시 관찰해 보자.
  이들 갖가지 다른 물상들엔 너의 견정이 반드시 없으므로 네가 구체적으로 지적할 수 없다면 너는 다시 분명히 밝혀보라.
  이 모든 사물들 가운데서 어떤 사물이 너의 견정이 아니더냐.”
  “저는 실로 기원정사 숲을 두루 보지만 이들 가운데서 어떤 것이 저의 견정이 아닌지를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가령 수목이 저의 견정이 아니라면 어떻게 수목을 볼 수 있으며, 그 소목이 바로 저의 견정이라면 다시 어떻게 그것을 수목이라고 하겠습니까.
  이처럼 내지는 형체없는 허공에 이르기까지 그것이 저의 견정이 아니라면 어떻게 허공을 보겠으며, 가령 허공이 바로 저의 견정이라면 다시 그것을 어떻게 허공이라고 하겠습니까.
  저는 다시 생각해 보니 이들 삼라만상 가운데서 자세하게 밝혀보았더니 어느 것 하나 저의 견정 아님도 없습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너의 말이 옳으니라.”
  이 때에 대중 가운데서 무학아라한의 경지에 아직 이르지 못한 자들은 부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망연자실하여 이 의미의 시작과 끝을 몰랐다.
  이 때문에 일시에 황송하여 어찌 할 바를 몰랐는데, 왜냐하면 부처님은 견정이 사물을 떠나 있음과 사물에 상즉해 있음. 이 둘 모두를 옳다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여래께선 그들의 사려가 활홀하고 놀라워하는 것을 아시고 연민의 마음을 일으키사 아난과 모든 대중들을 위안하면서 말씀하셨다.
  “모든 선남자들아. 나는 위없는 법왕이므로 내가 하는 모든 말들은 진실한 말이며, 내가 증득한 진여의 이치에 걸맞게 하는 말이므로 속이거나 허망한 말이 아니다.
  따라서 외도인 말가리(末伽黎)가 일정한 답변이 없는 양시양미론인 사종불사론(四種不死論)으로 상대방을 교란하는 논의가 아니다.
  너희들은 자세하게 듣고 생각하여 너희들이 슬피 흠모하는 마음을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

◎ 三文殊顯眞 
是時文殊師利法王子愍諸四衆. 在大衆中卽從座起. 頂禮佛足. 合掌恭敬而白佛言. 世尊. 此諸大衆不悟如來發明二種精見色空是非是義. 世尊. 若此前緣色空等象. 若是見者應有所指. 若非見者應無所?. 而今不知是義所歸. 故有驚怖. 非是疇昔善根輕鮮. 惟願如來大慈發明此諸物象與此見精元是何物. 於其中間無是非是. 佛告文殊及諸大衆. 十方如來及大菩薩. 於其自住三摩地中. 見與見緣幷所想相. 如虛空華本無所有. 此見及緣元是菩提妙淨明體. 云何於中有是非是. 文殊. 吾今問汝. 如汝文殊. 更有文殊. 是文殊者. 爲無文殊. 如是世尊. 我眞文殊. 無是文殊. 何以故. 若有是者則二文殊. 然我今日非無文殊. 於中實無是非二相. 佛言. 此見妙明與諸空塵亦復如是. 本是妙明無上菩提淨圓眞心. 妄爲色空及與聞見. 如第二月. 誰爲是月. 又誰非月. 文殊. 但一月眞. 中間自無是月非月. 是以汝今觀見與塵種種發明. 名爲妄想. 不能於中出是非是. 由是眞精妙覺明性故能今汝出指非指

◎ 3. 문수보살이 진실한 마음의 이치를 나타내시다. 
26. 이때 문수사리법왕자가 사부대중들이 망연자실하여 법문을 청할 수 없는 처지를 민망히 여기사 대중 가운데 있다가 즉시 앉은 자리로부터 일어나 부처님 말에 정례하고 공경한 마음으로 합장하곤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모든 대중들이 위에서 밝힌 삼라만상과 허공에 있어서 그것은 바로 정견이다. 그것은 정견이 아니다 한 두 종류의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세존이시여. 가령 이 모든 목전의 삼라만상과 허공들의 물살에 나의 견정이 두루 충만해 있다면 삼라만상 가운데서 당연히 그것을 지적해 낼 수 있어야만 하는데도 지금은 무엇 때문에 지적할 수 없습니까. 가령 그 사물들이 나의 견정이 아니라면 그 사물들이 하나도 보이질 않아야만 하는데도 지금은 또 무엇 때문에 그 사물들을 빠짐없이 볼 수 있습니까.
  지금은 이 사물들을 볼 수 있는 의미와 볼 수 없는 의미. 이 둘의 서로 상반된 귀결점을 모릅니다. 그 때문에 대중들이 놀랐을지언정 그들이 지난날 아함경이나 방등경을 설할 때 그 설법을 감당하지 못할 만큼 선근공덕이 빈약했기 때문은 아닙니다.
  원하옵건대 여래께선 대자비심으로 이 문제를 거듭 밝혀 주옵소서. 이 모든 물상들은 그것을 바라보는 견정이 원래도 없고 견정이 아니라는 부정도 없습니다. 이는 도대체 긍정도 없고 견정이 아니라는 부정도 없습니다. 이는 도대체 어떤 의미입니까.”
  부처님은 문수보살과 모든 대중들에게 고하셨다.
  “시방세계의 모든 여래와 팔지(八地)이상의 보살들은 그들이 머물고 있는 삼매 가운데선 주관적인 견분과 객관의 상분과 이 둘의 중간에 일어나는 망상은 마치 본래없는 허공꽃과도 같다. 왜냐하면 삼매에 출입이 없이 머문 부처님과 보살은 식자증분마저 전환하여 사지심품(四智心品)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제8식 자증분에서 일어난 견분과 상분은 그 근원을 따져보면 보리묘정명체(菩提妙淨明體), 즉 근원적인 여래장심의 모습이다.
  그런데도 무엇 때문에 그 가운데 그 사물은 견정이다. 또는 견정이 아니다 라는 상대적인 두 모습이 있겠느냐.
  문수야. 나는 지금 너에게 묻겠다.
  진실한 너의 문수 자체 밖에 다시 따로의 문수가 있어서 그것이 문수 너의 진실한 모습이더냐.  이 둘의 문수 가운데서 무수 아닌 자가 있고, 또 진실한 문수의 모습이 따로 있더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바로 문수의 자체일지언정 저를 떠나서 따로의 문수 자체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령 이 둘의 문수 가운데서 진실한 문수가 있고 진실한 문수 아닌 자가 따로 있다면 두 개의 문수가 있어야만합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의 문수 본체일 뿐이므로 그 가운데 진실한 문수와 따로의 문수 아닌 이 둘의 모습이라곤 없습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이 오묘하고 밝은 견정이 허공과 모든 삼라만상의 관계에 있어서도 역시 이와 같다. 그 모든 삼라만상들은 그 근본을 추구해 본다면 오묘하고 밝은 위없는 보리로서 청정하고 원만하고 진실한 마음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들 물상이 나의 진실한 마음의 모습임을 모르는 최초 일념무명의 미혹이 일어나 청정한 여래장성이 무명업식, 즉 제8식 자증분으로 전환하여 그 때문에 자증분에서 다시 견분견문(見分見聞)과 상분색공(相分色空)이 허망하게 상대적으로 일어났다.
  이 같은 견상이분(見相二分)이 진실한 본성을 의지해서 일어난 것이 마치 본래 없던 제2월이 허공의 진실한 달을 의지해서 일어남과도 같다.
  제2월은 보래 없는데. 무엇 때문에 제2월에서 그것은 진실한 달이다. 또는 진실한 달이 아니다 하는 허망한 시비분별을 일으키겠느냐.
  문수야. 단지 하나의 달이 진실한 모습일 뿐. 진실한 달 밖에 본래없는 제2월에서 그것은 진실한 달이다 또는 진실한 달이 아니다 한 시비가 있을 수 없다.
  아난과 대중들은 이 같은 묘명진심(妙明眞心)의 이치를 깨닫지 못했다. 때문에 견분견정과 상분삼라만상에 있어서 그것은 견정이다. 또는 아니다.  이 둘을 안과 밖으로 구분하면서, 안으로는 육근과 밖으로는 육진과 그 중간은 육식으로 분류하여 밝혔다. 그러므로 그 사물은 견정이다. 아니다 하는 망상분별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가령 이를 따라서 문수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육근 육진 양쪽을 모두 끊고 중간 육식마저 따로 성립하지 않는다면 온 법계가 나의 정미하고 진실한 묘각명성(妙覺明性)의 모습은 나의 견정이라고 지적하고, 어떤 사물은 나의 견정이 아니므로 지적이 불가능하다는 이 두 관점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왜냐하면 보는 성품은 일체삼라만상을 동시에 빠짐없이 두루 지각하고 관조하기 때문이다.”



[要義] 아난과 대중들은 제8식견정은 사물에 있다. 또는 있지 않다 한 시비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때문에 문수보살이 특별히 이 문제를 아뢰고 법문을 청하였다.
  중생들은 본래 밖은 지혜를 미혹하여 무명업식을 이루었기 때문에 근신과 기계, 이들 삼라만상의 갖가지 차별상을 마음 밖에 따로의 모습으로 허망하게 분별하고 집착한다. 이 모두는 유식변현(唯識變現)일 뿐이다.
  가령 이같은 이치를 알고 무명업식을 전환하여 본래 밝은 지혜를 이룬다면[轉八識成四智] 일체 만물에 대한 상대적 관점이 그 자리에서 소멸할 것이다. 이를 두고 능가경에선 말하기를 “목전의 차별상을 상대적으로 인식하면 그것이 바로 업식(業識)이고, 차별상으로 인식하지 않으면 그 즉시 지혜반야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 차이는 단지 한 생각 전환하는 사이에 있을 뿐이다.
  일심진여의 실체가 전체로 변화하여 무명업식인 아뢰야식을 이루었다. 이 때문에 본래 차별없는 근신과 기계가 이를 따라서 일어났다.
  만일 이같은 이치를 분명히 알고 안으로 신심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밖으로 세계에 대한 집착을 잊는다면 바로 이 아뢰야식이 원래 여래장 일진법계로서 상주진심일 뿐이다. 그곳에 다시 무슨 시비의 차별상이 있으랴.
  무명업식을 의지해서 일어난 허망한 견정, 즉 견분을 의지함 때문에 시비의 차별상이 있게 되었다. 그러나 가령 이를 본래 밝은 큰 지혜로 분별없이 관조한다면 피차에 따른 시비의 차별상이란 끝내 없게 된다. 이는 큰 지혜가 아니면 환하게 비출 수가 없다. 때문에 대지혜를 표상한 문수보살을 빌려 목전의 사물과 그것을 마주보는 견정은 무엇 때문에 시비의 차별상이 없는 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 오묘하게 밝은 팔식견정과 모든 허공과 삼라만상들은 그 근본을 추구하면 청정하고 원만한 진심이 허망하게 밖으로는 색공(色空)과 안으로는 견문각지의 분별을 이루었는데, 그것은 마치 본래 없던 제2월과도 같다는 것이다. 가령 진실한 제1월의 자체를 분명하게 안다면 그곳엔 자연히 시비의 차별상이 없게 된다.
  앞에서는 견정의 편에서 허망한 견해를 논파하였다. 때문에 “이 견정은 제2월처럼 오묘하고 밝은 마음 자체는 아니다 그렇다고 물 속에 어린 달처럼 동떨어진 육식분별심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지금은 제2월과 같은 제8식견정까지 논파하기 때문에 “제1월이 진실일 뿐 다시는 제2월이란 따로 없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여래의 설법이 겉으로 드러난 곳으로부터 안으로 미세한 데 이르러 끝내 진실한 마음으로 귀결시켰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이 문제를 망상으로써 관찰한다면 시비의 차별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겠지만 오묘한 본성의 측면에서 관조한다면 시비의 소굴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상으로 아집견을 타파하여 일심진여의 이치를 나타내는 일은 모두 끝났다.

《二破自證以顯一眞分四 ◎ 初當機出計 
阿難白佛言. 世尊. 誠如法王所說覺緣?十方界. 湛然常住. 性非生滅. 與先梵志娑毗迦羅所談冥諦. 及投灰等諸外道種說有眞我?滿十方. 有何差別. 世尊亦曾於楞伽山爲大慧等敷演斯義. 彼外道等常說自然. 我說因緣非彼境界. 我今觀此覺性自然. 非生非滅. 遠離一切虛妄顚倒. 似非因緣與彼自然. 云何開示不入?邪獲眞實心妙覺明性

《2. 팔식자증분을 논파하여 일심진여의 이치를 넷으로 나타내다. ◎ 1. 아난이 자기의 생각을 드러내다. 
27. 아난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진실로 법왕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지각하며 보는 성품이 시방세계 모든 삼라만상들을 두루 빠짐없이 보고 앎니다. 이처럼 보고 지각하는 마음이 시방세계에 두루 보편하여 담연(湛然)하게 상주한다면 그 보는 성품은 상대적인 생멸성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과거에 바라문외도가 사비가라(娑毗迦羅. 金七十論. 勝論外道)에서 담론한 명제(冥諦). 즉 이십오제(二十五諦). 가운데 신아(神我)가 우주 삼라만상에 두루 보편하다고 담론한 내용과 고행외도(苦行外道)들이 말하는 진아(眞我)가 시방세계에 두루 충만하는 의미와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 세존께서도 지난날 능가산(楞伽山)에서 대혜(大慧)보살 등을 위하여 불교와 외도의 가르침이 동일하지 않는 의미를 부연하시면서 그들 외도들은 자체가 본래 그러하여 인연의 관계성을 빌리지 않는다고 항상 말하나 나는 인연법을 설하여 그들을 논파함으로 부처님이 설법하신 이치를 그들 외도가 집착하는 경계는 아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지금 관찰해 보니 보고 지각해 아는 경성(見性)도 역시 외도가 주장하는 자연(自然)의 이치를 이룬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체가 본래 그러하여 인연조건을 빌리지 않고 본래 있으므로 그것은 새삼 일어나지 않았으며[非生], 끝내 파괴되지 않으므로 소명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非滅]
  이같은 자연의 이치는 일진법계이기 때문에 허망을 멀리 여의었고, 색법도 심법도 아니므로 전도된 모습도 멀리 떠났습니다. 이 때문에 천태만상 가운데서 현재 있는 그대로가 절대 홀로의 모습을 드러납니다.
  가령 이 의미로 추구해 본다면 지난날 능가산에서 말씀하셨던 인연의 이치는 그들이 말하는 자연의 담론과 서로 닮지 않은 듯도 합니다.
  이점을 어떻게 열어 보여 주셔야만 저희들이 뭇 외도의 삿된 길로 들어가지 않고 진실한 마음 묘각명성(妙覺明性)을 증득할 수 있겠습니까.”



[要義] 제8식자증분을 타파하려 함 때문에 아난은 이를 자연의 편에서 질문하고 있다. 자연은 자체가 천연적으로 본래 그러하여 인연조건을 빌리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외도들은 안으로 근신과 밖으로 기세간, 이 모든 법들은 본래적으로 일어난 원인이 없이 천연적으로 그러하므로 현세에서 수행할 일도 그에 따른 깨달음의 결과도 없다고 헤아린다.
  따라서 그들은 모든 중생들의 아뢰야식 가운데 일체의 염정종자(染淨種子)를 동시에 함장한 인연 때문에 모든 업을 일어켜 금생을 버리면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인과의 이치를 모른다.
  그러므로 그들은 육신 가운데는 본래적으로 진실한 주제자가 있어 모든 세계에 항상 태어나 시방세계에 두루 충만하므로 이 진아(眞我)는 상주불멸이라고 잘못 헤아리고 집착한다. 즉 그들은 제8식에 함장된 종자인연이 세계의 인과관계를 일으키는 근원임을 모르는 것이다. 때문에 부처님은 인연설법을 펴시어 그들의 잘못된 집착을 논파하였던 것이다.
  일심진여의 이치는 미혹의 무명업식에 있다해도 수행을 통해서 깨닫기만 하면 그 자성을 증득할 수 있다. 외도는 이러한 이치를 모르고 허망한 인연의 모습으로 나타난 현상 있는 그대로가 상주진아, 즉 불생불멸하는 천연적인 진여라고 잘못 헤아린다.
  그 때문에 아난은 그들의 논리를 빌려 부처님께 이 문제를 따지고 질문하고 있다. 아난의 질문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그 첫 번째로 앞에서 세존께서 보여 주신“보고 지각하는 마음이 시방세계에 두루 보편하다”한 말씀을 듣고 외도가 말하는“진아가 시방에 충만하다”한 의미와 서로 동일한가 의심함이고.
  두 번째는 “지각하는 마음은 자연히 목전의 사물이 소속되지 않는다”하신 말씀을 듣고 그렇다면 오묘한 성품이 천연적이어서 외도들이 말하는 자연과 어떻게 구별되는가 하고 의심함이다.

◎ 二世尊委破分二 

▣ 初破自然 
佛告阿難. 我今如是開示方便. 眞實告汝. 汝猶未悟惑爲自然. 阿難. 若必自然自須甄明有自然體. 汝且觀此妙明見中. 以何爲自. 此見爲復以明爲自. 以暗爲自. 以空爲自. 以塞爲自. 阿難. 若明爲自應不見暗. 若復以空爲自體者應不見塞. 如是乃至諸暗等相以爲自者. 則於明時見性斷滅. 云何見明. 阿難言. 必此妙見性非自然. 我今發明是因緣生. 心猶未明. 咨詢如來. 是義云何合因緣性

◎ 2. 세존께서 자세히 논파하시기를 둘로 하시다. ▣ 1. 자연을 논파하시다. 
28. 부처님은 아난에게 고하셨다.
  “나는 지금 이와 같이 앞서부터 갖가지 방편으로 분별하고 보여 준 것마다 너에게 진실을 고하지 않음이 없다는 데도 너는 그래도 깨닫질 못하고 거듭 미혹하여 외도의 자연과 동일하다고 여기느냐.
  아난아. 일반적으로 말하는 자연은 반드시 본래적으로 그러한 자체가 있어 상주불변해야만 자연이라 말할 수 있다. 가령 상주 불변하지 않고 생멸의 인연을 따라서 천류 변화한다면 그것은 자연이 아니다.
  생멸로 요동하지 않고 두루 보편한 보는 마음을 반드시 자연이라고 한다면 너는 모름지기 우선적으로 분명하게 밝혀야만 한다. 너는 관찰해 보라. 오묘하고 밝게 보는 마음에 상주불변하는 하나의 실제가 과연 있는지를 실체가 있어야만 그것을 자연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오묘하고 밝게 보는 마음 가운데서 무엇을 천연적으로 본래 있는 자체라고 하겠느냐.
  이 보는 마음이 광명을 자체로 하느냐. 어두움을 자체로 하느냐. 허공을 자체로 하겠느냐. 공간의 막힘을 자체로 하겠느냐.
  가령 광명을 보는 인연을 지각하는 성품의 자연적인 실체라고 한다면 광명의 모습을 볼 때 그것이 본래 스스로 천연적인 실체가 되어 그것은 일정한 모습을 지니므로 따로 옮겨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지각하는 성품은 단지 광명의 모습만 볼 수 있을 뿐이므로 어둠은 보지 못해야만 한다.
  가령 다시 허공을 마음의 자체라고 한다면 공간의 막힘은 보지 못해야만 한다.
  이처럼 내지는 어둠을 자체로 한다면 다시 광명의 모습을 볼 땐 보는 성품이 단절하여 소멸하리니, 어떻게 광명의 모습을 볼 수 있으랴.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너의 보는 성품이 인연을 따라서 처처에 장애간격없이 나타나는데, 이를 어떻게 외도의 자연과 혼동하겠느냐.
  아난은 말하였다.
  “반드시 이 오묘하게 보는 마음이 이미 외도의 자연성이 아니라면 그것은 반드시 인연성(因緣性)에 속할 것입니다. 인연은 불교의 정법이며 외도의 삿된 집착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저는 지금 이같은 인연으로 일어난 보는 마음법을 밝히려 하나 마음에 이 점이 분명하질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 보는 마음이 인연으로 일어난 도리라면 보는 마음은 상주불변이 아닌데, 지금은 보는 마음과 보이는 사물이 원래 오묘한 본성이 두루 원만하여 생멸로 요동하지 않는다 함이 흡사 외도의 자연성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래께 이 문제를 여쭙습니다. 이 의미를 어떻게 해야만 인연성과 합치할 수 있는지요.”

▣ 二破因緣
佛言. 汝言因緣. 吾復問汝. 汝今因見見性現前. 此見爲復因明有見. 因暗有見. 因空有見. 因塞有見. 阿難. 若因明有應不見暗. 如因暗有應不見明. 如是乃至因空因塞同於明暗. 復次阿難. 此見又復緣明有見. 緣暗有見. 緣空有見. 緣塞有見. 阿難. 若緣空有應不見塞. 若緣塞有應不見空. 如是乃至緣明緣暗同於空塞

▣ 2. 인연성을 논파하시다. 
29.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네가 보는 성품은 인연성을 따라서 일어난다 말하므로 나는 다시 너에게 묻겠다.
  너는 지금 밝음과 어두움과 허공과 공간의 막힘. 이 넷이 보는 성품을 일으키는 원인 종자세력이 되어 비로소 너의 보는 성품이 목전에 나타난다.
  그 가운데에서 광명이 보는 성품을 일으키는 종자세력이 되어 보는 성품이 일어나더냐. 어두움이 보는 성품을 일으키는 종자세력이 되어 보는 성품이 있더냐. 허공이 보는 성품을 일으키는 종자세력이 되어 보는 성품이 일어나더냐. 아니면 공간의 막힘이 보는 성품을 일으키는 종자세력이 되어 보는 성품이 일어나더냐.
  아난아. 가령 광명이 원인종자가 되어 보는 성품이 일었다면 어둠이 찾아 올 땐 어두움을 보지 못해야만 하는데, 이럴 경우 그 보는 성품도 광명을 원인종자로 해서 있었으므로 광명이 사라질 땐 그 광명과 함께 사라져 단멸을 이루리라.
  가령 어두움이 원인종자세력이 되어 보는 성품이 일어났다면 광명이 찾아 올 땐 광명을 보지 못해야만 하며, 이처럼 내지는 허공과 공간의 막힘도 광명과 어두움과 같은 예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미 광명과 어두움과 허공과 공간의 막힘을 동시에 볼 수 있으므로 보는 성품은 이 넷의 차별상이 원인종자세력이 되어 일어나지 않음이 분명하다.
  아난아. 다시 광명이 보는 성품을 일으키는 보조연(助緣)이 되어 보는 마음이 일어나더냐. 어두움이 보조연이 되어 보는 성품이 일어나더냐. 허공이 보조연이 되어 보는 성품이 일어나더냐. 막힘을 보조연으로 해서 보는 성품이 일어나더냐.
  아난아. 가령 허공이 보조연이 되어 성품이 되어 보는 성품이 있다면 막힌 공간은 보지 못할 것이며, 막힌 공간이 보조연이 되어 보는 성품이 있다면 허공은 보지 못할 것이다. 이처럼 내지는 광명과 어두움이 보조연이 되어 보는 성품이 일어난다 함도 허공과 막힘과 같은 예이다.”

◎ 三的示精覺 
當知如是精覺妙明. 非因非緣. 亦非自然. 非不自然. 無非不非. 無是非是. 離一切相. 卽一切法. 汝今云何於中措心. 以諸世間?論名相而得分別. 如以手掌撮摩虛空祗益自勞. 虛空云何隨汝執捉

◎ 3. 정미하여 순수하게 지각하는 마음을 보이시다. 
30. “마땅히 알라. 이같은 정각묘명(精覺妙明)한 마음은 본래적으로 그 자체와 현실 지각작용이 한결같이 평등하여 자체는 변치 않으면서 생멸의 인연을 따르는 이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眞如有隨緣 不變之義]는 것을.
  이같은 진실한 마음의 실체는 변치 않으므로 생멸하는 인연의 모습이 아니며, 그러나 동시에 그 현실작용에 있어선 생멸하는 인연을 따르기 때문에 자연의 모습도 아니다.
  그러나 마음의 작용이 이미 생멸의 인연을 따르기 때문에 인연성 아님도 아니며, 생멸의 인연을 따르면서도 그 실체는 변하지 않았으므로 자연 아님도 아니다.
  이는 다시 연연성 아님과 자연성 아님까지도 없고, 인연성이 아님도 아님과 자연성 아님도 아닌 것까지도 없다. 왜냐하면 마음의 실체는 변치않는 상태에서 오묘한 작용을 일으켜 생멸의 인연을 따르고, 생멸의 인연을 따르나 다시 그 자체는 변치 않기 때문이다[不變隨緣 隨緣不變].
  마음은 이처럼 생멸인연과 불변의 자체가 둘이면서도 둘이 아니고 둘이 아니면서도 다시 둘이므로 이는 어느 한 쪽에서 그것은 인연성이다. 또는 자연성이다고 긍정적으로 단정할 수 없으며, 그것은 인연성이 아니다. 또는 자여성이 아니다 라고 단정적으로 부정할 것까지도 없다.
  이같은 마음의 실체는 유무(有無) 등 사구백비(四句百非)를 그 오묘한 작용은 동시에 일체차별상과 하나의 상즉관계를 이룬다[隨緣]
  마음의 이치가 이같은데도 너는 무엇 때문에 오묘하게 지각하는 본성 가운데서 분별심을 일으켜 모든 세간에서 인연성이다. 또는 자연성이다 하는 치우치고 상대적인 언어희론의 모습으로써 근본 마음의 이치를 분별하려 하느냐.
  이는 손으로 차별적 형체 없는 허공을 움켜쥐려하면 전혀 이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단지 스스로 수고로울 뿐임과도 같다. 허공이 어찌 너의 움켜쥐는 손을 따르겠느냐.

◎ 四重拂妄計 
阿難白佛言. 世尊. 必妙覺性非因非緣. 世尊云何常與比丘宣說見性具四種緣. 所謂因空因明因心因眼. 是義云何. 佛言阿難. 我說世間諸因緣相非第一義

◎ 4. 아난의 허망한 헤아림을 거듭 털어 내시다.

31. 아난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오묘하게 지각하는 성품이 외도들이 주장하는 자연성에 소속하지 않는다는 점은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성품이 반드시 인연성에 소속하지 않는다 하심은 옳지 않은 듯도 합니다.
  그렇다면 세존께서 무엇 때문에 평상시에 비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보는 성품이 작용을 일으키려면 네 종류의 인연 즉 공간ㆍ광명ㆍ육식심(六識心)ㆍ안근을 갖추어야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령 우리의 목전에 공간과 광명이 있지 않으면 볼 수 없고 분별심과 안근이 없어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지금은 보는 성품은 이같은 인연성에 전혀 있지 않다 하시니 그 의미는 무엇인지요.”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아난아. 내가 지난날 소승인에게 네 종류의 인연을 동시에 갖추어야만 안식이 일어난다고 말했던 것은 모든 세간에서 이미 인연관계로 일어난 차별상의 측면에서 말했을 뿐이고, 오늘 말하는 제일의진심(第一義眞心)의 이치는 아니다.”

[要義] 이상으로 아난의 허망한 헤아림을 논파하여 일심진여의 이치를 나타내는 일은 끝났다.

《三破見精以示始覺分三 ◎ 初徵破妄計 
阿難. 吾復問汝. 諸世間人說我能見. 云何名見. 云何不見. 阿難言. 世人因於日月燈光見種種相名之爲見. 若復無此三種光明則不能見. 阿難. 若無明時名不見者應不見暗. 若必見暗此但無明云何無見. 阿難. 若在暗時不見明故名爲不見. 今在明時不見暗相還名不見. 如是二相俱名不見. 若復二相自相陵奪. 非汝見性於中暫無. 如是則知二俱名見. 云何不見

《3. 팔식견정을 타파함으로써 시각(始覺)을 세 분야로 나타내다. ◎ 1. 아난의 허망한 헤아림을 따져 묻고 논파하시다. 
32. 아난아. 나는 다시 너에게 묻겠다.
  “모든 세간 사람들이 각각 그들 스스로 말들 하기를 나는 볼 수 있다고 하는데 무엇 때문에 볼 수 있으며, 다시 무엇 때문에 보질 못한다고 말하느냐.”
  아난은 말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해?달?등불의 광명으로 인해 갖가지 물상을 볼 수 있으며, 이 세 종류의 광명이 없으면 보지 못한다고들 합니다.”
  “아난아. 가령 이들 세 종류의 광명이 없을 때를 보지 못함이라고 말한다면 어두움마저도 보질 못해야만 한다.
  그런데도 반드시 어두움을 본다면 이는 단지 광명이 없을 뿐, 어떻게 보는 마음이 없다 하겠느냐.
  아난아. 가령 어두움에 있을 땐 광명을 보지 못함 때문에 보지 못함이라고 한다면 지금 광명에 있을 땐 어두움의 모습을 보지 못하므로 이도 역시 보지 못함이라고 해야겠구나.
  그렇다면 광명을 볼 땐 어두움의 모습이 없고 어두움을 볼 땐 광명의 모습이 없으므로 이 두 모습을 동시에 보지 못함이라고 해야 하는데 이같은 이치가 있더냐.
  가령 다시 광명이 찾아오면 어두움이 사라지고, 어두움이 당도하면 광명이 소멸하여, 이는 광명과 어두움이라는 두 모습이 서로가 서로를 멀리 낼지언정 너의 보는 성품이 그 둘 사이에서 잠시 있다간 잠시 없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어둠과 광명, 이 둘을 동시에 본다 말해야만 한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광명이 없을 땐 보지 못한다고 하느냐.”

◎ 二的示始覺分二
 
▣ 先揀緣 
是故阿難. 汝今當知見明之時見非是明. 見暗之時見非是暗. 見空之時見非是空. 見塞之時見非是塞

◎ 2. 시각(始覺)을 분명히 보이기를 두 분야로 하다. ▣ 1. 보는 성품. 즉 팔식견정은 인연성이 아님을 우선 간별하다. 33. 그러므로 아난아. 너는 지금 알아야만 한다. 광명을 볼 땐 보는 성품이 광명의 인연으로 있지 않으며, 어두움을 볼 땐 보는 성품이 어두움의 인연으로 없질 않으며. 허공을 볼 땐 보는 성품이 허공의 인연으로 있질 않으며, 막힌 공간을 볼 땐 보는 성품이 막힌 인연으로 있지 않다는 점을, 그렇다면 이들 네 차별상을 본다해도 그들 네 모습에 소속하지 않는다.”

▣ 次的示
四義成就. 汝復應知見見之時見非是見. 見猶離見. 見不能及. 云何復說因緣自然成和合相

▣ 2. 견정을 분명히 보이시다. 
34. “바로 이 광명?어두움. 막힌 공간으로서의 색법?허공이라는 이 네 가지 의미로 추리해 본데로 견정은 그들 인연을 빌리지 않고 오진경계를 떠나서 자체로 있는 이치가 성취된다.
  너는 다시 진실하게 보는 마음이 팔실견정을 볼 때 그 진실하게 보는 마음은 팔식견정까지도 초월하였음을 알아야만 한다.
  견정이 아직 일어나기 이전. 즉 증자증분(證自證分)이 열반의 실체적 본성자리이다.
  증자증분으로서의 진실하게 보는 마음은 오히려 팔식 견정. 즉 자증분까지도 떠나 있어, 그 견정도 도달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 곳을 인연성이다. 또는 자연성이다. 또는 네 종류의 인연이 화합해서 안식견분이 일어난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 三結責勸修
汝等聲聞. 狹劣無識. 不能通達淸淨實相. 吾今誨汝. 當善思惟. 無得疲怠妙菩提路

◎ 3. 견론 짓고 수행을 권유하시다. 
35. “너희들 성문승들은 도량이 좁고 무식하여 청정한 실상의 이치를 통달하지 못한다.
  나는 지금 너희들에게 가르치노니 잘 생각해서 오묘한 깨달음의 길에서 피로와 권태심을 일으키지 말라.”



[要義] 여기에서는 제팔식 견정까지 타파하여 본각(本覺)을 시각(始覺)하여 시각본각이 합일[始本合一]하였음을 나타냈다.
  지금까지 보는 마음을 논변한 이래로 제8식견정을 빌려 육식분별대상인 육진과 내지는 제7식분별대상인 법진, 즉 상분경계를 논파하고 다음으로는 그들 대상에 대한 주관 분별인 견분을 논파하여, 이로써 견상이분(見相二分)이 동시에 일어나는 자체인 제8식자증분체. 즉 견정을 나타냈다.
  견분과 상분은 제8식자증분. 즉 견정을 동일하게 의지하여 동시에 일어난다. 때문에 상분과 견분이 혼잡하여 구분하기 어렵다.
  그 때문에 아난은 혹 견분을 사물로 인식하기도 하고, 혹은 그 사물에 견분이 있다고 집착하여 갖가지 외도의 허망한 견해까지 일으키게 되었다.
  이러한 아난에게 세존께선 그가 집착한 사물에 나아가서 그 견분은 사물에 있고 있지 않는 문제를 따졌다.
  이 때문에 아난은 이윽고 견정까지를 타파하고 나서 유일진심. 즉 증자증분이 나타나 그곳엔 다시는 다른 불건이란 없이 시비의 밖으로 아득히 초월하였다. 아난의 인연성이다. 또는 자연성이다 하는 이 모든 의심이 여기에서 결단날 것이다.
  처음에 견분을 끊어 견정으로 귀결시켰는데, 그 견정까지도 망상에 소속하는 무명업식이다. 이를 식온이라고 하는데, 이는 마치 제2월과도 같다.
  가령 이 식온 자증체까지 타파하지 않는다면 본각진심(本覺眞心)이 일치하기란 어렵다. 그러므로 이 한 구절의 경문은 제8식견정까지 타파하여 시각지(始覺智)로 타파함에 있어서 세존께서 광명과 어두움 등을 따라서 보는 성품이 있느냐. 또는 없느냐 하고 따져 물은 이유는 앞에서는 목전경계를 마주하면서 논변하였으나, 여기에서는 분별대상을 떠난 상태에서 논변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서 이 견정은 대상경계의 인연을 의지해서 있지 않음으로 인연화합성으로 일어나지 않음을 나타내려 하였다.
  이처럼 제팔식견정은 진실한 마음에 절실하게 근접하여 있다. 때문에 이 식온마저 타파되고 나면 오온이 모두 다 공적해지는데, 이러한 지혜를 최초로 얻는 상태를 시각지라고 한다.
  아난이 최초에 오묘한 사마타수행법문을 청한 이래로 여기에 이르기까지 오온신심을 통론적으로 논파하여 인공(人空)의 이치를 나타냈다. 이는 오온신심의 아집이 공적했을 뿐, 법집은 아직까지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다음부턴 이종세계(二種世界)를 논파함으로써 법집마저도 타파하고 계시다.
  이상으로 오온팔식을 타파함으로써 인공(人空)의 이치를 드러내는 일은 끝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