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능엄경(楞嚴經)

능엄경 강의 15 / 송찬우 교수

通達無我法者 2007. 11. 28. 11:03


 
 
능엄경 강의 15
 
   
 
▲ 二會七大以顯事理無?分五

▲ 2. 칠대(七大)를 여래장성으로 융합하여 사리(事理)가 서로 장애함이 없음을 나타내기를 다섯 분야로 하다.

◈ 初當機疑請
◈ 1. 아난이 의심을 청하다.

阿難白佛言. 世尊. 如來常說和合因緣. 一切世間種種變化皆因四大和合發明. 云何如來因緣自然二俱排?. 我今不知斯義所屬. 惟垂哀愍開示衆生中道了義無戱論法


아난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평소에 말씀하신 일대시교(一代時敎)에선 모두 화합인연(和合因緣)을 의지하여 일체세간 유ㆍ무정의 갖가지 변화, 그 모두는 사대(四大)가 인연으로 화합하여 일어났다 하셨습니다.

여래께선 단순히 외도가 주장하는 자연의 논리만을 배격한다면 수긍이 가겠습니다만 무엇 때문에 인연과 자연, 이 둘을 동시에 배척하십니까. 이는 부처님의 평소 가르침에 매우 위배됩니다.

저는 지금이 의미의 귀결점을 모르겠습니다. 연민한 마음을 베푸사 대중에게 중도요의(中道了義)를 열어 보이사 희론법이 없게 해 주옵소서.


[要義]
여래께선 한결 같이 열어 보이시어 그 이치는 주치에 이르러 집착의 마음을 다 잊게 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난은 일상적으로 말하는 인연과 자연에 집착하여 의심하는 이유는 아난이 어리석어 그랬으랴.

그는 이치가 아직 미진함이 있었기 때문에 의심이 아직 결단나지 않았을 뿐이다. 때문에 아직 깨닫지 못한 모습을 보였을 뿐이다.

아난은 중도의 의미를 청했는데도 이 과목을 진제 쪽인 공여래장에 소속시킨 이유는 하나가 공하면 일체가 동시에 공하여 가(假)도 없고 중(中)도 없어 공(空) 아님이 없기 때문이다.

◈ 二許說誡聽
◈ 2. 설법을 허락하고 자세히 들으라 훈계하다.

爾時世尊告阿難言. 汝先厭離聲聞緣覺諸小乘法. 發心勤求無上菩提. 故我今時爲汝開示第一義諦. 如何復將世間戱論妄想因緣而自纏繞. 汝雖多聞. 如說藥人眞藥現前不能分別. 如來說爲眞可憐愍. 汝今諦聽. 吾當爲汝分別開示. 亦今當來修大乘者通達實相. 阿難?然承佛聖旨


그 때 세존께선 아난에게 고하여 말씀하셨다.

너는 지난날 마등가 여인의 주술에 걸렸을 때 지난날 들었던 성문ㆍ연각과 모든 소승법에 싫증을 내고 발심하여 위없는 깨달음을 은근히 구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너를 위하여 중도제일의제(中道第一義諦)를 열어 보여 주느라고 화합인연을 배격하였다.

그런데도 무엇 때문에 세간의 희론망상의 인연법을 가지고 스스로를 속박하느냐.

너는 많은 가르침을 들어 모든 불법을 안다고 하나 지금 여래장성 제일의제를 듣고도 도리어 의혹을 내는 것이 마치 약을 말하는 사람에게 진짜 약이 나타났으나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도리어 의혹심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그러한 너를 여래께선 진실로 연민스럽게 여긴다.

너는 지금 자세하게 듣거라. 나는 너를 위하여 화합인연도 아니지만 인연화합 아님도 아닌 이치를 분별하여 열어주리라.

이는 역시 미래에 대승을 수행하는 자들로 하여금 실상을 통달하여 모두 함께 여래장에 노닐게 하려 함 때문이다.

아난은 말없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었다.

◈三總出妄計
◈3. 아난의 잘못된 헤아림을 총체적으로 드러내다.

阿難. 如汝所言四大和合發明世間種種變化. 阿難. 若彼大性體非和合則不能與諸大雜和. 猶如虛空不和諸色. 若和合者同於變化. 始終相成生滅相續. 生死死生生生死死如旋火輪未有休息


아난아, 네가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사대의 모습이 인연으로 화합해야만 세간의 갖가지 변화가 일어난다.

아난아, 가령 그 세간의 사대성질의 자체가 인연으로 화합하지 않는다면 낱낱이 사대가 모든 사대와 뒤섞여 화합하지 못함이 비유하면 허공이 모든 색법과 화합하지 않음과 같으리라. 그렇다면 사대의 작용을 잃게 되어, 지대(地大)의 성질은 항상 견고할 뿐이고, 수대(水大)의 성질은 항상 젖을 뿐이고, 화대(火大)의 성질은 항상 따뜻할 뿐이고, 풍대(風大)의 성질은 항상 변함없이 움직일 뿐인데 어떻게 그것이 인연으로 화합하여 만물을 생성하겠느냐.

가령 사대의 자체가 단정적으로 화합한다면 갖가지 현실세간의 변화와 동일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상대적으로 이루고 이러나서 소멸할 때까지 상속하여 일어나면 없어지고 없어지면 일어나 일어나면 사라지고 사라지면 일어나기를 불을 회전하는 수레바퀴처럼 쉬는 일이 없으리라.

이와 같다면 사대의 체성을 잃게 되는데 가령 지대가 수대를 만나면 그 견고한 성질을 잃게 되고 수대가 화대를 만다면 윤택한 체성을 잃게 된다.

이처럼 자체성질을 이미 잃었는데 또 무엇을 자체로 하여 만물을 생성하랴.

◈ 四特示一源
◈ 4. 사대가 하나의 근원임을 특별히 보이다.


阿難. 如水成??還成水
아난아, 사대의 자체성질은 물이 얼음이 되었다가 얼음이 다시 물이 되듯 한다.


[要義]
여기에서는 아난의 질문에 총론적으로 답변하였다.

아난은 사대가 인연으로 화합하여 세간의 갖가지 변화가 일어난다고 인연화합에 집착하였다. 이는 본성 진여의 이치는 원융하고 주변 이치를 알지 못하고 그것을 화합인연의 모습으로 허망하게 헤아렸다.

가령 진심과 허망의 모습이 하나의 자체에서 일어남을 명료하게 알았다면 물과 얼음이 본성은 둘이 아닌 이치를 알아 그 자리에서 일체의 망상이 쉬리라.

◈ 五?示大性分七
《初示地大


◈5. 사대성을 보편하게 보이기를 일곱 분야로 하다.

《1. 지대(地大)를 보이다.

汝觀地性. ?爲大地. 細爲微塵. 至?虛塵析彼極微色邊際相七分所成. 更析?虛卽實空性. 阿難. 若此?虛析成虛空. 當知虛空出生色相. 汝今問言由和合故出生世間諸變化相. 汝且觀此一?虛塵. 用幾虛空和合而有. 不應?虛合成?虛. 又?虛塵析入空者. 用幾色相合成虛空. 若色合時合色非空. 若空合時合空非色. 色猶可析空云何合. 汝元不知如來藏中性色眞空性空眞色. 淸淨本然周?法界. 隨衆生心應所知量循業發現. 世間無知惑爲因緣及自然性. 皆是識心分別計度. 但有言說都無實義


너는 지대성을 관찰해 보라. 범부와 외도, 또는 소승인도 색법을 쪼개 공을 밝히는 수행관법[析色明空觀]을 익히므로 이 이치를 잘 알리라.

사대의 성질이 마주하면서 인식할 수 있게 드러난 성질은 대지가 되고, 극도로 미세하여 상대적으로 마주 볼 수 없는 성질은 미진(微塵)이다.

거친 물질부터 점점 쪼개 허공과 맞닿을 만큼 미세한 인허진(?虛塵)에까지 이르면 이같은 인허진은 극미(極微)를 쪼갠 색을 더 이상 분석할 수 없는 색변제상(色邊際相)으로서 이는 동서남북 상하 중앙의 칠분(七分)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 이르면 더 이상 분성이 불가능하다.

이같은 인허진을 다시 분석하면 그것은 실로 지대의 성질이 아닌 공성(空性)일 뿐이다.

아난아, 네가 말한 대로 사대의 성질이 인연으로 화합한다면 인허진을 다시 쪼개 허공성을 이루면 그 허공성이 화합해서 색상이 나왔다고 해야만 진실한 화합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너는 지금 질문하기를 인연화합 때문에 세간의 모든 변화의 모습이 일어난다고 하느냐.

너는 우선 이것을 관찰해 보라. 여기 하나의 인허진이 어느 정도의 허공을 사용하여 그 인연과 화합해 있느냐. 인허진 자체가 화합해서 인허진 자체를 이루었다고 하진 못하리라. 왜냐하면 상대와 화합하여 자체를 이루는 일은 있어도 화합이 그 자체를 이루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또 인허진을 분석하여 끝내 허공으로 들어가면 이는 색법을 쪼개 공성을 이루었다고 할 순 있어도 색이 화합하여 공성을 이루었다 하진 못한다. 너는 말해 보라. 어느 정도의 색상이 화합하여 허공을 합성하였겠느냐.

이처럼 색상을 화합하여 공성을 이루지 않았다면 사대의 성질이 화합하여 사대의 모습을 이루지 않았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색법이 화합할 땐 단지 색법이 화합일 뿐이므로 이는 색법을 화합하여 공성을 이루지 않는다.

가령 그렇다면 공성이 화합할 땐 단지 공성의 화합일 뿐이므로 이는 공성을 화합한 색상은 아니다.

그리고 색법은 형질이 있어 분석을 통해 끝내 공성으로 들어가는 일이 가능하나 허공은 형질이 없는데 그것이 어떻게 화합하여 색상을 이룬다 하겠느냐.

이처럼 공성은 화합하지 못함을 알았다면 인허진은 공성의 화합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너는 근원적으로 모르고 있다. 자체는 변치않은 상대에서 인연화합을 따르고 인연화합을 따르나 그 자체는 변치 않으면서 십계염정법(十界染淨法)을 일으키는 활동세력을 갖춘 것이 여래장성이라는 점을.

이같은 여래장성에 갖춘 색은 그 색법을 분석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진실하게 자성이 공적하며, 공성으로서의 진실한 색법은 허공을 화합하여 이룬 색이 아니다. 이는 청정하고 본연하여 법계에 두루 보편하다.

그것은 단지 십법계중생들의 미혹과 깨달은 마음을 따라 그들이 알고 인식한 염정법만큼 호응하여 각자가 지은 유루?무루업을 따라 발현한다.

그런데도 세간의 범부와 외도와 소승인은 여래장성은 인연을 따르나 자체는 변치 않고 자체는 변치 않으나 인연을 따르면서 중생이 지은 업을 따라 발현하는 이치를 모른다.

따라서 이를 미혹하여 그것은 인연성으로 있다. 또는 자연성으로 있다 라고 말한다. 이는 단지 분별망심으로 헤아렸으므로 단지 언설만 있을 뿐 그곳에 도무지 실재하는 의미라곤 없다.

《二示火大
《2. 화대(火大)를 보이다.

阿難. 火性無我寄於諸緣. 汝觀城中未食之家欲炊?時. 手執陽燧日前求火. 阿難. 名和合者如我與汝一千二百五十比丘今爲一衆. 衆誰爲一. 詰其根本各各有身. 皆有所生氏族名字. 如舍利弗婆羅門種. 優樓頻螺迦葉波種. 乃至阿難瞿曇種姓. 阿難. 若此火性因和合有. 彼手執鏡於日求火. 此火爲從鏡中而出. 爲從艾出. 爲於日來. 阿難. 若日來者. 自能燒汝手中之艾來處林木皆應受焚. 若鏡中出. 自能於鏡出然於艾鏡何不鎔. 紆汝手執尙無熱相. 云何融泮. 若生於艾. 何藉日鏡光明相接然後火生. 汝又諦觀鏡因手執. 日從天來. 艾本地生. 火從何方遊歷於此. 日鏡相遠非和非合. 不應火光無從自有. 汝猶不知如來藏中性火眞空性空眞火. 淸淨本然周?法界. 隨衆生心. 應所知量. 阿難. 當知世人一處執鏡一處火生?法界執滿世間起. 起?世間寧有方所循業發現. 世間無知惑爲因緣及自然性. 皆是識心分別計度但有言說都無實義


아난아, 화대의 성질은 원래 일정한 주체가 없이 단지 모든 인연에 의탁하여 불의 형체를 이루었을 뿐이다.

너는 실라벌성에서 아직 아침밥을 짓지 않은 집을 관찰해 보라. 밥을 지으려면 반드시 화경을 손에 잡고 해를 마주 비추면서 불을 구한다.

아난아, 그 불이 화합으로 있다면 나와 너와 일천이백오십비구가 각자 화합하여 지금 한 무리의 대중을 이루고 있다.

각자가 화합하여 하나의 대중이라곤 하나 그 근본을 따져 본다면 각자의 몸이 있고 그들 모두에게 태어난 씨족과 이름이 따로 있다. 이처럼 서로가 동일하지 않다.

가령 그 예를 든다면 사리불은 바라문 종족이고, 우루빈나는 가섭파종족이고, 내지 아난은 구담종성이다.

아난아, 가령 불의 성질이 인연화합으로 인해 있다면 밥을 지으려는 자들은 손에 화경과 쑥을 잡고 태양에 불을 구한다.

그들이 불을 구할 때 이 불은 화경에서 나오더냐. 아니면 쑥에서 나오더냐. 태양에서 나오더냐.

아난아, 그 불이 태양에서 온다면 너의 손에 있는 쑥을 태우므로 이 불이 태양에서 온다면 너의 손에 있는 쑥을 태우므로 이 불이 태양에서 경유하여 오는 도중의 숲들은 모두 먼저 불에 타야만 한다.

또 거울 속에서 나온다면 거울 자체에서 불이 나와 쑥은 태우면서 거울 자체는 무엇 때문에 용해되지 않느냐.

네가 손에 잡고 한번 시험해 보라. 그 화경엔 뜨거운 불의 모습이 없는데 어떻게 거울을 녹일 수 있겠느냐.

가령 쑥에서 나온다면 무엇 때문에 일광과 화경이 서로 맞닿기를 기다린 뒤에야 불이 일어나겠느냐.

너는 다시 자세히 살펴보라. 화경은 손으로 쥐고 있고, 태양 광명은 하늘에서 오고, 쑥은 땅에서 자란다. 이상의 세가지 사물은 각자 그들이 온 근본이 있다. 그러나 이 불의 성질은 유독 어느 방향에서 나와서 현재 여기에 있느냐.

그 불이 이미 찾아 온 곳이 없다면 화합인연으로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화합이라 함은 반드시 여러 가지 사물들이 한 곳에 섞기여만 화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태양과 화경은 서로가 아득한 거리에 떨어져 있으므로 이는 화합이 아니며, 그렇다고 그 불은 유래가 없이 자연성으로 있다 해도 안된다.

너는 아직도 모르고 있구나. 여래장성에 갖춘 불은 진공성이며, 그 성에 갖춘 진공의 진실한 불은 청정하고 본연하며 법계에 두루 원만하다. 이 불은 일체의 차별상을 떠난 진공성이므로 화합인연을 의지한 이후에 그 불이 있지를 않다. 이 같은 불이 중생의 마음을 따라서 그들이 알고 인식한 범주만큼 지은 업을 따라서 발현한다.

아난아, 알아야만 한다. 세간 사람이 한곳에서 화경을 잡고 있으면 한 곳에서만 불이 일어나고 온 법계에서 잡고 있으면 세간 가득히 불이 일어난다. 이처럼 세간에 보편하게 일어나는데 어떻게 불은 일정한 방향처소에 국한해 있다 하겠느냐.

이같은 불의 성질은 본래 공적하다. 이는 여래장성에 갖춘 인연을 따르나 자체는 변치 않는 본체이다. 중생이 각자 지은 업만큼을 따라서 발현하여 이윽고 십법계의 갖가지 차별적인 불을 이루게 된다.

세간 사람들은 이같은 이치를 모르고 그것을 인연성으로 있다. 또는 자연성으로 있다고 미혹한다.

이 모두 식심으로 분별하고 헤아렸으므로 단지 언설만 있을지언정 그곳엔 도무지 실재하는 의미라곤 없다.

《三示水大
《3. 수대(水大)를 보이다.

阿難. 水性不定流息無恒. 如室羅城迦毗羅仙斫迦羅仙及鉢頭摩訶薩多等諸大幻師. 求大陰精用和幻藥. 是諸師等於白月晝手執方諸承月中水此水爲復從珠中出. 空中自有. 爲從月來. 阿難. 若從月來. 尙能遠方令珠出水所經林木皆應吐流. 流則何待方珠所出. 不流明水非從月降. 若從珠出. 則此珠中常應流水. 何待中宵承白月晝. 若從空生. 空生無邊水當無際. 從人?天皆同滔溺. 云何復有水陸空行. 汝更諦觀月從天陟. 珠因手持. 承珠水盤本人敷設. 水從何方流注於此. 月珠相遠非和非合. 不應水精無從自有. 汝尙不知如來藏中性水眞空性空眞水. 淸淨本然周?法界. 隨衆生心應所知量. 一處執珠一處水出. ?法界執滿法界生. 生滿世間寧有方所. 循業發現. 世間無知惑爲因緣及自然性. 皆是識心分別計度. 但有言說都無實義


아난아, 물의 성질은 일정하질 않아서 혹은 흐르기도 혹은 멈추기도 하면서 항구한 모습이라곤 없다.

실라벌성에 외도인 가비라선인과 사사가라선인과 발두마와 마하다 등 물을 섬기는 모든 환술사가 달 속의 물을 구하여 이를 환술하는 약과 조합한다.

이 모든 환술사들은 보름 전 달이 한 중천에 떠오르면 손에 대합 같은 구슬을 쥐고 달에서 흘러 온 물을 받는다. 이 물은 그 구슬에서 나오겠느냐. 허공 속에서 스스로 있겠느냐. 아니면 달로부터 왔겠느냐.

아난아, 그 물이 달로부터 왔다면 그 달은 멀리 떨어진 방향에서도 구슬에서 물이 나오게 했으므로 그 물이 오면서 경유한 수목들 모두는 물을 토해 내야만 한다. 이처럼 달에서 경유하여 물이 왔다면 무엇 때문에 물을 취하는 구슬을 의지해서 나오겠으며, 경유한 숲에서 물이 흐르지 않는다면 물은 달에서 내려오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가령 그 물이 구슬에서 나왔다면 그 구슬 속엔 평소에도 물이 흘러 나와야만 하는데 무엇 때문에 보름 전 한 밤중에 달로부터 물을 받겠느냐.

또 그물이 허공에서 나왔다면 허공의 성질은 무변하므로 물의 성질도 당연히 가이 없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사람으로부터 하늘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물에 빠져야 하는데 세간에선 무엇 때문에 물과 육지와 허공에서 움직이는 물체가 따로 있겠느냐.

너는 다시 자세히 관찰해 보라. 달은 하늘에서 떠오르고, 구슬은 사람이 손으로 쥐고 있고, 구슬의 물을 받는 소반은 마술하는 사람이 설치하였다.

이들 세 물건들은 각자 그 유래가 있다. 그러나 물은 이들 가운데서 어느 방향에서 이곳으로 흘러왔겠느냐. 이미 흘러 온 곳이 없다면 인연으로 화합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분명해진다.

지금 달과 구슬은 서로의 간격이 아득히 멀므로 인연화합으로 있지를 않으며, 그렇다고 달 속의 물이 원인없이 자연성으로 있지도 않다.

물의 성질이 화합인연성도 아니고 화합 인연아닌 자연성도 아닌 의미를 너는 모르는구나.

여래장성엔 자성이 물이므로 있다해도 진공이며, 있다해도 그 성품이 진공인 진공의 모습으로서의 물은 청정하고 본연하며 법계에 두루 보편하다.

이같은 진공여래장성에 갖춘 물이 중생의 분별심을 따라 그들이 인식하는 범주만큼 나타난다.

따라서 한 곳에서 구슬을 가지면 한 곳에서 물이 나오고 온 법계에서 구슬을 잡으면 법계 가득히 물이 나온다.

이처럼 세간에 가득히 물이 나오는데 일정한 방향과 처소에 국한한다 하겠느냐.

여래장성에 갖춘 진공성수(眞空性水)가 중생이 지은 업만큼 따라서 발현하는데도 세간 사람들은 이를 모르고 물은 인연성으로 있다느니, 또는 자연성으로 있다고 미혹한다.

이 모두는 망상식심으로 잘못 헤아렸으므로 단지 언설만 있을지언정 그곳엔 도무지 실재하는 의미라곤 없다.

《四示風大
《4. 풍대(風大)를 보이다.

阿難. 風性無體動靜不當. 汝常整衣入於大衆. 僧伽梨角動及傍人則有微風拂彼人面. 此風爲復出袈裟角. 發於虛空. 生彼人面. 阿難. 此風若復出袈裟角汝乃披風. 其衣飛搖應離汝體. 我今說法會中垂衣. 汝看我衣風何所在. 不應衣中有藏風地. 若生虛空. 汝衣不動何因無拂. 空性常住風應常生. 若無風時虛空當滅. 滅風可見. 滅空何狀. 若有生滅不名虛空. 名爲虛空云何風出. 若風自生被拂之面. 從彼面生當應拂汝. 自汝整衣云何倒拂. 汝審諦觀整衣在汝. 面屬彼人. 虛空寂然不參流動. 風自誰方鼓動來此. 風空性隔非和非合. 不應風性無從自有. 汝宛不知如來藏中性風眞空性空眞風. 淸淨本然周?法界. 隨衆生心應所知量. 阿難. 如汝一人微動服衣有微風出. ?法界拂滿國土生. 周?世間寧有方所. 循業發現. 世間無知惑爲因緣及自然性. 皆是識心分別計度. 但有言說都無實義


아난아, 바람의 성질은 동요하는 성질이긴 하나 그 근원을 추구하면 원래 실체가 없다.

왜냐하면 요동하면 일어나면 고요하면 사라져 동과 정이 일정하질 않다.

너는 지금 목전에 보이는 하나의 일로써 관찰해 보라.

너는 평소에 의복을 단정하게 입고 대중 속으로 들어간다. 대가사인 승사리 모서리가 펄럭이며 곁에 있는 사람을 스치면 잔잔한 바람이 그 사람의 얼굴을 스친다.

이 바람은 가사의 끝 모서리에서 나왔겠느냐. 허공에서 일어났겠느냐. 그 사람의 얼굴에서 일어났겠느냐.

아난아, 이 바람이 너의 가사 끝에서 나왔다면 그 옷이 바로 바람이므로 네가 가사를 흔들지 않아도 바람이 일어나게 된다.

그 가사가 이미 바람이라면 바람처럼 날으고 흔들리면서 너의 몸에서 떠나야만 한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지금 그 가사가 떠나질 않느냐. 이는 요동에서 바람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또 너의 옷이 이미 바람이라면 나의 옷 역시 바람일 것이다. 나도 지금 설법을 하면서 대중 가운데서 대가사를 걸치고 있다. 너는 우선 나의 옷을 살펴보라. 바람의 성질이 어느 곳에 있는지를 나의 가사 속에 바람을 간직한 곳이 따로 있다고 말하진 못하리라. 그렇다면 이는 고요함에서도 바람이 일어나지 않음이 분명하다.

가령 이 바람이 허공자체에서 나온다면 너의 옷이 움직이지 않을 땐 무엇 때문에 바람이 일어 사람의 얼굴을 스치는 일이 없느냐.

또 허공의 성질은 상주불변이므로 그곳에서 일어나는 바람 역시 항상 일어나야만 하며, 또 허공이 실제로 바람을 일으킬 수 있다면 바람이 사라져 고요한 땐 허공 역시 바람과 함께 사라져야만 한다.

바람이 사라지는 모습은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허공이 사라지는 모습은 어떠하더냐. 가령 허공이 바람을 따라 일어났다가 바람의 소멸을 따라 없어진다면 그것은 허공이라 말할 수 없고, 허공이라고 말할 수 없다면 허공 자체가 이미 없는데 어떻게 허공에서 바람이 나온다 할 수 있겠느냐.

가령 바람이 사람의 얼굴을 스치면서 그곳에서 나온다면 사람의 얼굴로부터 나오므로 바람은 그 얼굴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당도하여 너의 얼굴을 스쳐야만 한다. 그렇다면 네가 옷을 가다듬고 입을 때 어떻게 반대로 상대방의 얼굴을 스치겠느냐.

너는 자세히 살펴보라. 너의 의복을 정리하는 일은 실로 너에게 있고, 상대방의 얼굴을 스치는 일은 상대방에 소속하고, 허공은 고요하여 바람의 흐름에 함께 하질 않는다. 이 가운데서 바람이 어느 방향에서 움직이면서 이곳으로 오겠느냐. 바람과 허공의 성질은 간격이 막혀 화합이 아니며, 그렇다고 바람의 성질은 원인 없이 자체적으로 있다 해서도 안된다.

너는 분명히 모르는구나. 여래장 가운덴 자성이 바람인 진공과 자성이 공인 진풍이 청정하고 본연하며, 법계에 두루 보편하여 중생분별심을 따라 그들이 알고 헤아린 만큼 호웅하며 나타난다.

아난아, 네 한 사람이 입고 있는 가사를 잔잔하게 움직이면 잔잔한 바람이 나오고, 온 법계에서 옷을 스치면 국토 가득히 바람이 일어나 세계에 두루 보편한데 바람이 어떻게 일정한 방향과 처소에만 국한해 있으랴.

바람은 중생이 지은 업을 따라서 발현하는데도 세간에선 이를 모르고 인연과 자연성으로 미혹한다. 이 모두는 분별식심으로 헤아린 것이므로 단지 언어적인 설명만 있을 뿐 그곳엔 도무지 실재하는 의미라곤 없다.

《五示空大
《5. 공대(空大)를 보이다.

阿難. 空性無形因色顯發. 如室羅城去河遙處. 諸刹利種及婆羅門毗舍首陀兼頗羅타?陀羅等. 新立安居鑿井求水. 出土一尺於中則有一尺虛空. 如是乃至出土一丈中間還得一丈虛空. 虛空淺深隨出多少. 此空爲當因土所出. 因鑿所有. 無因自生. 阿難. 若復此空無因自生. 未鑿土前何不無?. 唯見大地逈無通達. 若因土出. 則土出時應見空入. 若土先出無空入者. 云何虛空因土而出. 若無出入. 則應空土元無異因. 無異則同. 則土出時空何不出. 若因鑿出則鑿出空應非出土. 不因鑿出鑿自出土云何見空. 汝更審諦諦審諦觀. 鑿從人手隨方運轉. 土因地移. 如是虛空因何所出. 鑿空虛實不相爲用. 非和非合. 不應虛空無從自出. 若此虛空性圓周?本不動搖. 當知現前地水火風均名五大. 性眞圓融皆如來藏本無生滅. 阿難. 汝心昏迷不悟四大元如來藏. 當觀虛空爲出爲入爲非出入. 汝全不知如來藏中性覺眞空性空眞覺. 淸淨本然周?法界. 隨衆生心應所如量. 阿難. 如一井空空生一井. 十方虛空亦復如是. 圓滿十方寧有方所. 循業發現. 世間無知惑爲因緣及自然性. 皆是識心分別計度. 但有言說都無實義


아난아, 허공의 성질은 본래 자체의 모습이 따로 없다. 따라서 애초에 일정한 방원대소(方圓大小)의 모습이 없건만 단지 색법으로 인해서 공간이 상대적으로 환하게 나타날 뿐이다.

가령 실라벌성에서 거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 왕족인 찰제리종족과 바라문종족과 장사꾼인 비사족과 농부인 수타종족과 점성가ㆍ의사ㆍ점술사 등의 종족인 바라타족과 가장 천한 전다라종족 등이 안거할 집을 새로 지으려함 때문에 우물을 파서 물을 구한다 하자.

그들이 흙을 한 자 파내면 우물 속엔 한 자만큼의 허공이 있게 되고, 이처럼 점점 깊이 파 들어가 흙을 열 자를 파내면 우물 속엔 열자만큼의 허공이 있게 된다.

이처럼 허공의 얕고 깊음은 파낸 흙의 다소에 따라서 나타난다. 그렇다면 이 허공은 흙으로 인해 나왔겠느냐. 흙을 파낸 것으로 인해 있느냐. 아니면 원인 없이 스스로 일어났겠느냐.

대체로 범부와 외도는 지수화풍 사대에 있어선 그것은 인연성으로 있다고 집착하는 경우가 많고, 공대(空大)에 있어선 자연성으로 있다고 집착하는 경우가 많다.

아난아, 가령 이같은 허공이 원인 없이 자연성으로 있다면 우물을 파면서 흙을 들어내기 이전인 무엇 때문에 걸림없는 허공을 보지 못하고 오직 막히고 장애하여 통달함이 없는 대지의 모습만 보이겠느냐. 이처럼 허공은 우물을 파는 것으로 인해 있으므로 원인 없이 자연적으로 자생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 허공이 우물을 판 것으로 인해 그 뒤에 있었다면 흙을 파서 우물에서 옮길 때 그 순간마다 허공이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아야만 하며, 가령 흙만 먼저 나올 뿐 뒤를 따라 허공이 우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없다면 어떻게 허공이 흙을 판 뒤에 나왔다 하겠느냐.

만일 흙은 출입이 있어도 허공은 출입이 없다고 한다면 허공과 흙은 원래 각자 다른 원인이 따로 있질 않아야만 하며, 서로 다름이 없이 동시에 있다면 이는 동일한 자체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물에서 흙을 꺼낼 때 허공은 무엇 때문에 흙과 함께 나오지 않겠느냐.

허공이 파는 것으로 인해 나오고 흙으로 인해 나오지 않는다면 이는 허공을 파서 꺼내므로 우물 속의 흙을 꺼내는 일과는 무관하게 허공을 이루어야만 한다. 그런데 지금 한자만큼의 흙을 꺼내면 한 자만큼의 허공을 보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느냐.

허공이 파는 것으로 인해 나오지 않는다면 우물을 팔 때 흙만 나오고 허공은 보이지 않아야만 하는데 무엇 때문에 우물을 파는 만큼 허공을 보겠느냐.

너는 다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라. 우물을 파는 일은 사람이 방향을 따라 손을 움직이는 일을 따라 있게 되고, 흙은 땅에서 운반한데로 옮겨진다.

이처럼 땅을 판다고 말할 수 있을지언정 허공을 판다고 말할 순 없다. 그렇다면 허공은 무엇으로 인해 나오겠느냐. 이미 나온 곳이 없다면 인연화합으로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우물을 파서 공간이 생기게 함은 텅빈 공간과 꽉 찬 흙일뿐이다. 따라서 흙과 허공의 성질은 상호간에 작용하지 않으므로 인연으로 화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화합이란 피차의 성질이 다르지 않아야만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드시 흙을 파야만 허공을 보기 때문에 인연화합 아님도 아니며, 또 허공은 원인 없이 자연성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가령 허공의 성질은 원만하고 두루하고 보편하여 원래부터 생멸에 요동하지 않는다면 역시 알아야만 한다. 현재 허공과 함께 융합하여 나타난 지수화풍 사대를 공대와 함께 똑같이 오대(五大)라고 한다. 이를 현상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피차의 차별상이 없지 않으나 본성의 이치에서 관찰한다면 진실하고 원융하여 허공과 융합한 사대가 모두 여래장성이여서 그 근본을 추구하면 생멸상이곤 없다.

아난아, 너의 마음이 혼미하여 사대의 근원은 여래장성임을 깨닫지 못한다. 가령 네가 사대의 근본이 여래장성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물 속의 허공을 돌이켜 보라. 흙을 파는 것으로 인해 허공에서 나오더냐. 흙을 운반한 뒤에 허공이 우물 속으로 들어가더냐. 흙은 출입이 있을지언정 허공은 출입하지 않더냐.

가령 공대의 성질이 원만하고 두루하고 보편하여 출입이 아니다 출입 아님도 아님을 안다면 공대와 융합한 사대의 성질도 원만하고 두루하고 보편하여 인연화합이 아니나 화합 아님도 아님을 알리라.

너는 이같이 화합도 아니나 화합 아님도 아닌 의미를 전혀 모른다. 여래장 가운데 본성에 갖춘 진실한 깨달음인 진공 성품이 공인 진각(眞覺)이 즉 허공과 각이 모두가 여래장성이고 진실한 이치는 청정하고 본연하여 법계에 두루 보편하여 중생 분별심으로 따라 그들이 알고 인식하는 만큼 호응하여 나타난다.

아난아, 가령 한 우물이 텅 비면 허공은 한 우물만큼 나오고 시방허공도 역시 이와 같다. 이처럼 허공은 시방에 원만한데 어떻게 따로의 방향과 처소가 있겠느냐.

중생들이 지은 선악업을 따라서 십법계(十法界)의 허공으로 발현한다.

그런데도 세간 사람들은 무지하여 이를 인연성이다 자연성이다 하고 미혹한다. 이 모두는 분별심으로 헤아렸을 뿐이므로 단지 언어적인 설명이 있을 뿐 그곳엔 도무지 실재하는 의미라곤 없다.

《六示見大
《6. 견대(見大)를 보이다.

阿難. 見覺無知因色空有. 如汝今者在祇陀林朝明夕昏. 設居中宵白月則光黑月便暗. 則明暗等因見分析. 此見爲復與明暗相幷太虛空爲同一體. 爲非一體. 或同非同. 或異非異. 阿難. 此見若復與明與暗及與虛空元一體者. 則明與暗二體相亡. 暗時無明明時無暗. 若與暗一明則見亡. 必一於明暗時當滅. 滅則云何見明見暗. 若明暗殊見無生滅一云何成. 若此見精與暗與明非一體者. 汝離明暗及與虛空. 分析見元作何形相. 離明離暗及離虛空. 是見元同龜毛兎角. 明暗虛空三事俱異從何立見. 明暗相背云何或同. 離三元無云何或異. 分空分見本無邊畔云何非同. 見暗見明性非遷改云何非異. 汝更細審微細審詳審諦. 壅歸大地. 如是見精因何所出. 見覺空頑非和非合. 不應見精無從自出. 若見聞知性圓周?本不動搖. 當知無邊不動虛空幷其動搖地水火風均名六大. 性眞圓融皆如來藏本無生滅. 阿難. 汝性沈淪不悟汝之見聞覺知本如來藏. 汝當觀此見聞覺知爲生爲滅. 爲同爲異. 爲非生滅. 爲非同異. 汝曾不知如來藏中性見覺明覺精明見. 淸淨本然周?法界. 隨衆生心應所知量. 如一見根見周法界. 聽?嘗觸覺觸覺知妙德瑩然?周法界. 圓滿十虛寧有方所. 循業發現. 世間無知或爲因緣及自然性. 皆是識心分別計度. 但有言說都無實義


아난아, 8식 견분 즉 육근인 견대(見大)가 바로 각성(覺性)이여서 원래 하나의 정명한 자체이므로 그곳엔 아는 주체와 알 대상[能知心?所知境]의 구별은 본래 없다.

이는 색법과 허공으로 인해 하는 마음과 알 대상경의 구분이 있게 된 것인데, 즉 아는 마음인 육근은 따로 자성이 없고 단지 알 대상인 육진경계를 의지하여 육근에서 대상을 인식해 아는 작용이 일어난다.

너는 지금 기다림이 있으면서 일상에 아침이 되면 밝아지고 석양엔 어두워지며, 혹 한 밤중이라도 밝은 달이 뜨면 광명이 있고, 달이 없으면 어두워, 광명과 어두움과 허공과 물질을 반드시 너의 보는 성품, 즉 안근을 의지해야만 분석할 수 있다. 이는 명암ㆍ광명 등 보이는 색진에 자체 성질이 있질 않고 안근으로 인해서 그것이 나타난다 할 수 있다.

이같은 보는 성질은 광명ㆍ어두움 등 색상과 아울러 허공의 모습과 동일한 자체이더냐. 동일한 자체가 아니더냐. 혹은 동일하기도 혹은 동일하지 않기도 혹은 다르기도 혹은 다르지 않기도 하더냐.

아난아, 보는 성품이 광명ㆍ어두움ㆍ허공과 원래 동일한 자체라면 광명과 어두움의 두 자체는 광명이 일어나면 어둠이 없어지고, 어둠이 일어나면 광명이 사라진다. 이처럼 이 둘은 서로가 동시에 병존하지 못하므로 그 두 자체의 모습은 서로가 없게 된다.

가령 보는 성품이 어두움과 동일한 자체라면 광명이 찾아오면 보는 마음과 어둠도 따라서 없어질 것이며, 반드시 광명과 동일한 자체라면 어두움이 찾아오면 광명과 함께 소멸하리라. 어둠과 함께 사라졌다면 광명이 찾아온다 해도 그 어두움을 어떻게 볼 수 있으랴.

이처럼 광명과 어두움이라는 두 모습은 한쪽이 일어나면 한쪽이 사라지는 차별이 있으나 그것을 보는 성품을 광명과 어두움 따라서 생멸하지 않는데 보는 마음이 광명과 어두움 등과 동일한 자체가 어떻게 성립하겠느냐.

가령 보는 성품이 어두움과 광명과 하나의 자체가 아니라면 너는 광명과 어두움과 허공을 떠나서 보는 성품의 근원본체를 분석해 보라. 어떤 모습이더냐.

광명ㆍ어두움ㆍ허공을 떠나면 그것을 보는 성품도 토끼 뿔ㆍ거북 털처럼 헛된 명칭만 있을 뿐 명칭에 따른 실제가 없다.

또 보는 성품이 광명과 어둠과 허공이라는 이 셋과 동시에 전혀 다르다면 이 셋을 떠나서 무엇으로부터 보는 성품을 수립할 수 있으랴. 그러므로 하나의 자체도 아니나 다르지도 않음이 분명하다.

또 보는 성품은 광명과 하나의 자체이기도 하나 역시 어두움과도 동일한 자체라고 한다면 광명과 어둠은 서로 위배하는데 어떻게 동일한 하나의 자체라고 하겠느냐.

광명과 어두움과 허공, 이 셋을 떠나면 따로의 보는 성품은 원래 없는데 어떻게 혹 다르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리고 보는 성품이 이 셋과 동일하지 않다면 분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허공을 분석하고 보는 성품을 쪼개 보아도 보는 성품과 허공의 한계가 본래 없는데 어떻게 동일하지 않다 하겠느냐.

가령 보는 성품은 이 셋과 다르지 않다고 한다면 지금 목전에서 어두움을 보고 광명을 보면서 광명과 어두움은 서로가 천류변화하는 보는 성품은 그것을 따라 천류변화하지 않는데 어떻게 다르지 않다 하겠느냐.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동일하지도 않지만 다르지도 않다는 점이 분명하다.

너는 다시 보는 성품의 근원까지를 더욱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라.

지금 현재 보이는 광명은 태양에서 왔고, 어두움은 달이 없는 데서 왔고 공간의 통함은 허공에 소속하고 공간을 막는 물질은 대지로 귀결한다. 이처럼 광명ㆍ어두움ㆍ허공ㆍ물질은 각자 그 유래가 있다.

이같은 네 종류의 색법을 보는 너의 보는 마음은 어느 곳에서 나왔느냐. 이미 나온 곳이 따로 없다면 화합의 의미는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 진다.

대체로 여러 가지 성질이 한결 같아야만 서로의 화합이 성립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볼 수 있는 안근은 지각하는 성질이고 보이는 광명?어두움?허공?색법은 지각하는 성질이 없다. 이처럼 지각하는 성품과 지각없는 물질은 그 자체가 따로 상반되기 때문에 화합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보는 성품이 원인없이 자연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견문취상각지의 육종근성(六種根性)인 견대(見大)는 그 자성은 보이는 지수화풍공 오대와 융합하여 원만하고 두루하고 보편하여 원래부터 생멸에 요동을 당하지 않는다.

따라서 견대는 알아야 할 것은 요동하지 않는 가이 없는 허공과 동요하는 지수화풍과 육대(六大)라고 부른다.

현실 차별망상의 측면에선 피차가 없지를 않으나 본성에서 관찰한다면 진실하고 원만하게 융합하여 이 모두는 여래장성의 모습이므로 본래적으로 생멸하는 모습이라곤 없다.

아난아, 너는 마음이 어두워 너의 육근의 작용인 견문취상각지가 그 근본은 여래장임을 깨닫지 못하는구나.

너는 견문취상각지를 관찰해보라. 그것은 대상을 따라 생멸하는 성질이더냐. 생멸한다면 대상을 떠난 밖에 다시 무엇을 따로의 너의 진실한 성품이라고 하겠느냐. 대상과 동일하겠느냐. 동일하다면 어떻게 육근의 차별작용이 있겠느냐. 다르겠느냐. 다르다면 한 사람에게 어떻게 육근이라는 여섯 가지 성질이 있겠느냐. 생멸이 아니라고 하겠느냐. 그렇다면 현재 육진경계를 의지하면 앎이 있고 그것을 떠나면 아는 작용이 없는데 어찌 생멸이 아니라고 하겠느냐. 동일하지도 않지만 다르지도 않다고 하겠느냐. 그렇다면 원래 하나의 정명한 자체인데 어찌 동일하지 않겠으며, 다르지 않다 하겠느냐. 그렇다면 하나의 정명한 자체가 나뉘어 육근의 차별을 이루는데 너는 어리석음 때문에 네가 갖추고 있는 육근과 오대의 근본이 바로 여래장임을 아직 모르고 있구나.

여래장서이 갖춘 보는 마음(見大)이 본각의 밝음이며 본각의 정명이 바로 밝게 보는 마음이어서, 이는 청정하고 본연하며, 법계에 두루 보편하여 중생의 분별심을 따라 그들이 알고 인식하는만큼 육근으로 호응하며 나타난다.

너의 하나의 안근의 보는 마음이 법계에 두루하듯 나머지 이근으로 듣고 비근으로 냄새를 맡고 설근으로 맛보고 신근으로 감촉하고 의근으로 지각함까지도 오묘한 본성의 덕이 빛나 법계에 두루하다. 이는 시방 미진국토까지 원만한데 그 본성이 어찌 일정한 방향과 처소에 국한하랴.

이같은 본성이 중생이 지은 선악업에 따라 육근으로 발하는데도 세간인은 무지하여 이를 인연성 또는 자연성으로 미혹한다. 이 모두는 분별심으로 헤아린 것이므로 단지 언어적인 설명이 있을 뿐 그곳에 도무지 실재하는 의미라곤 없다.

《七示識大
《7. 식대(識大)를 보이다.

阿難. 識性無源因於六種根塵妄出. 汝今?觀此會聖衆用目循歷. 其目周視但如鏡中無別分析. 汝識於中次第標指. 此是文殊此富樓那此目?連此須菩提此舍利弗. 此識了知爲生於見. 爲生於相. 爲生虛空. 爲無所因突然而出. 阿難若汝識性生於見中. 如無明暗及與色空四種必無元無汝見. 見性尙無從何發識. 若汝識性生於相中不從見生. 旣不見明亦不見暗. 明暗不?卽無色空. 彼相尙無識從何發. 若生於空非相非見. 非見無辯自不能知明暗色空. 非相滅緣見聞覺知無處安立. 處此二非空則同無有非同物. 縱發汝識欲何分別. 若無所因突然而出. 何不日中別識明月. 汝更細詳微細詳審. 見託汝睛. 相推前境. 可狀成有. 不相成無. 如是識緣因何所出. 識動見澄非和非合. 聞聽覺知亦復如是. 不應識緣無從自出. 若此識心本無所從. 當知了別見聞覺知圓滿湛然性非從所. 兼彼虛空地水火風均名七大. 性眞圓融皆如來藏本無生滅. 阿難. 汝心?浮不悟見聞發明了知本如來藏. 汝應觀此六處識心爲同爲異. 爲空爲有. 爲非同異. 爲非空有. 汝元不知如來藏中性識明知覺明眞識. 妙覺湛然?周法界. 含吐十虛寧有方所. 循業發現. 世間無知惑爲因緣及自然性. 皆是識心分別計度. 但有言說都無實義



아난아, 식은 대상경계를 명료하게 식별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 성질은 본래 근원도 끝도 없어 단지 육근과 육진이 마주하는 것으로 허망하게 일어났다간 사라진다.

지금은 육식 가운데서 안식만으로 유추해 보기로 한다. 너는 지금 이 능엄법에 모인 성스러운 대중들을 너의 눈을 사용하여 두루 차례로 살피고 있다.

비록 보는 눈과 보이는 대중이 안근과 색진으로 마주하여 두루 살피긴 하나 대상에 대한 분별심이 일어나기 이전엔 단지 거울 속에 나타난 그림자와 같아 그들 대상이 아름답다느니 추악하다느니 하는 분별심이 일어나진 않는다. 즉 안근이 색진을 처음 마주할 땐 단지 그들 대상을 분별없는 현량성경(現量性境)으로 인식할 뿐이다.

그러나 일념분별식이 안근과 색진 가운데서 홀연히 일어나면 대중들의 이름을 차례로 지적하면서 이는 문수이고 이는 부룸이며, 이는 목건련이고, 이는 수보리고 이는 사리불이다 라고 한다.

이는 안식과 동시의식(同時意識)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같이 안식이 명료하게 아는 아음은 보는 안근에서 일어났느냐. 보이는 성스러운 대중들의 모습에서 일어났느냐. 허공에서 일어났느냐. 아니면 의지하는 원인 없이 돌출하였느냐.

아난아, 너의 명료하게 식별하는 안식의 성질이 안근자체에서 일어났다면 보이는 대상인 광명과 어두움과 물질과 허공이라는 네 종류의 색진이 없으면 그것을 마주 보는 너의 주관적인 안근도 따로 없게 된다.

이미 주관적으로 보는 성질도 없는데 어떤 사물에서 안식이 일어나겠느냐.

가령 너의 식별하는 안식 성질이 보이는 대상에 의해서만 일어나고 안근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 경우 이미 안근 자체가 없으므로 광명도 어두움도 볼 수 없고, 이처럼 광명과 어두움을 동시에 보지 못한다면 색ㆍ공이 없으므로 안식을 일으키는 대상도 자체의 성질이 없을 터인데 안식이 어떤 사물에서 일어나겠느냐.

이로써 안식은 안근자체 대상색진만으로는 일어나지 않음이 분명하다.

가령 안식이 허공에서 일어난다면 색상과는 상관하지 않을 것이며 역시 안근과도 상관하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주관적으로 분별하는 안식마저도 없게 되어 광명?어두움?색?공을 알 수 없으리라.

가령 색상이 아니면 인식할 대상이 사라져 주관적인 견문각지마저 성립할 곳이 없게 된다.

이처럼 안근과 색진, 이 둘 다 떠난 곳에 처하였을 경우, 그 허공에 자체가 없으며 안식을 일으킬 활동력이 없는 것과 동일하게 되고, 그 허공에 자체가 있다 해도 그것은 물질도 아니고 모든 마음도 아니어서 물질과 동일하게 구별할 수 없다. 그렇다면 허공자체를 분별할 수 없는데, 그곳에서 어떻게 명료하게 식별하는 안식이 일어날 수 있겠느냐. 설사 너의 안식이 일어난들 안근도 색진도 동시에 없는데 무엇을 분별하겠느냐.

가령 안식은 안근ㆍ색상ㆍ허공 그 어느 곳에도 의지함 없이 안식자체에서 돌출하였다. 무엇 때문 밝은 대낮에 홀연히 저녁에 뜨는 밝은 달을 식별하지 않겠느냐.

이처럼 원인 없이 돌출해야만 하는데도 지금은 이미 태양을 인식하는 가운데 달을 인식하는 안식이 돌출하지 않았으므로 원인없이 돌출한다 함도 옳지 않다.

너는 다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라. 청정색근인 안근은 너의 부진근인 눈동자, 즉 육안을 의탁하여 일어나고, 보이는 색ㆍ공 등의 모습은 각자의 의탁하는 소속이 있으므로 그 형상을 말할 수 있어 있는 자체를 이루나 허공처럼 꼴을 형상할 수 없는 경우는 없다는 자체개념을 이룬다.

이처럼 자체가 있고 없음이 각자 다르긴 하나 그러나 그것은 각자 시말이 있다. 그러나 네가 이처럼 분별하는 안식은 무엇을 연유하여 무엇으로 인해 나오느냐. 이처럼 이미 나온 곳이 없다면 안식은 화합인연으로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안식은 분별로 요동하고, 안식은 분별없이 고요하다. 이처럼 서로 그 자체 성질이 전혀 다르므로 서로가 화합하지 않는다.

안식이 그렇다면 나머지 이식으로부터 의식까지도 모두 안식과 같은 예로써 알라.

그렇다고 안식의 분별이 원인없이 자연성에서 나오지 않았으며 반드시 안근과 색진이 서로 마주한 이후에 나왔으므로 이는 화합 아님도 아니다.

가령 이 안식심이 인연화합으로 있지도 않고 인연화합 아님도 아니어서 본래 유래한 곳이 없음을 안다면 역시 알아야만 한다. 모든 명료하게 식별하는 식인 견문각지, 즉 육식은 각자 원만하고 담연하고 상주하여 그 자성은 모두 인연으로부터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러므로 견대ㆍ식대와 나머지 허공ㆍ지ㆍ수ㆍ화ㆍ풍 오대까지 평균하게 칠대(七大)라고 한다.
칠대의 성품은 진실하고 원융하여 그 모두는 여래장성이라 따라서 원래부터 생멸하는 모습을 얻을 수 없다.

아난아, 여래장성은 칠대에 보편하고 원융하다. 그 때문에 망상을 타파하면 팔식견정까지 타파되어 진심이 나타나면 삼라만상 그 모두가 여래장성 진심의 모습이다.

그러나 너는 안으로 마음이 건친 번뇌와 들뜬 견해로 일어난다. 때문에 네가 갖춘 견문. 즉 육식의 근원을 깨닫지 못하고, 육식과 앞서의 육대 모두가 그 근본은 자성에 원래 갖춘 여래장성임을 모른다.

네가 이 점을 깨닫지 못한다면 이 여섯 처소로 일어나는 육식심을 관찰해 보라. 그것이 동일한 하나의 자체이더냐. 그렇다면 그것은 여섯으로 차별이 난다. 전혀 다른 자체이더냐. 이는 본래 함의 정명체이다. 그렇다면 이 육식은 동이로써 말할 수 없다.

그것은 공성이더냐. 그러나 분별작용이 있으며, 그것이 실제로 있더냐. 그러나 형색이 없다. 그렇다면 이 육식은 있다 없다로 단정할 수 없다.

동일하지 않더냐. 본원은 하나의 자체이며, 다름이 아니더냐. 여섯 처소에서 서로 다른 작용이 나타난다. 그렇다면 이 육식은 동이로써 말할 수도 없다.

공이 아니라고 한다면 육근과 육근을 떠나 원래 자체 성질이 없고, 유가 아니라고 한다면 현재 일체의 색공을 분별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육식은 공이 아니다 유가 아니다 라고 말하지도 못한다.

이같은 육식을 너는 원래 모른다. 여래장성 속엔 본성이 진실한 식은 오묘하게 밝아 본래적으로 한다. 이는 본각이 오묘하게 밝음인 진실한 성품으로서의 묘각(妙覺)이다.

이는 담연하고 주변하여 허공이 식성(識性) 가운데 있으므로 시방허공을 머물고 토해낸다. 거기에 어찌 일정한 방향과 처소의 국한함이 있으랴.

칠대에 보편한 여래장성이 긴 하나 모든 부처님은 무명번뇌 속에서 보리를 증득하고 중생은 진여 속에서 모든 생사를 받는다. 이처럼 각자 지은 업만큼 따라서 발현 하는데, 이같은 성인과 범부의 차이는 미혹과 깨달음의 차이일 뿐이다.

그런데도 세간에선 이를 모르고 인연성으로 있다 또는 자연성으로 있다고 미혹한다. 이 모두는 식심분별로 헤아렸으므로 단지 언어적인 설명만 있을 뿐 도무지 실재하는 의미라곤 없다.

이상으로 불생불멸의 편에서 망상을 융합하여 진심으로 귀결함으로써 진공여래장성을 나타내는 일을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