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능엄경(楞嚴經)

능엄경 강의 16 / 송찬우 교수

通達無我法者 2007. 11. 28. 11:09
능엄경 강의 16
 
   
 
通議卷第四

二開不空如來藏以示假觀之體分三
◆ 初當機疑請


爾時富樓那彌多羅尼子在大衆中卽從座起. 偏袒右肩右膝着地. 合掌恭敬而白佛言. 大威德世尊. 善爲衆生敷演如來第一義諦. 世尊常推說法人中我爲第一. 令聞如來微妙法音. 猶如聾人逾百步外聆於蚊?. 本所不見何況得聞. 佛雖宣明令我除惑. 令猶未詳斯義究竟無疑惑地. 世尊. 如阿難輩雖前開悟習漏未除. 我等會中登無漏者雖盡諸漏. 令聞如來所說法音尙紆疑悔


 2. 불공여래장을 열어 가관(假觀)의 실체를 세 분야로 보이다.

◆ 2. 아난이 의심을 청하다.


이 때 부루나미다라니자가 대중 가운데 있으면서 앉은 자리로부터 즉시 일어나 편단우견 우슬착지 합장공경하고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대위덕을 지니신 세존이시여. 훌륭하게 중생을 위하사 여래의 제일의제를 부연하십니다.

세존께선 평소에 추대하여 말씀하시길 설법하는 사람 가운데서는 저를 제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여래의 미묘한 법음을 듣곤 마치 귀머거리가 멀리 백보 밖에서 모기소리를 듣는 듯하였습니다.

이같은 법음은 본래 보지도 못하였는데 하물며 들을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은 비록 밝게 선양하시어 저희들의 의혹을 제거하시나 지금 오히려 이 의미의 끝가는 데를 자세히 살펴 의혹이 없지를 못합니다.

세존이시여. 아난같은 무리는 비록 깨달았으나 명언에 대한 다문습기를 아직 제거하지 못했다곤 하나, 저희들은 이 법회대중 가운데서 부루의 경지에 이미 올랐습니다.

삼계내의 모든 유루번뇌를 다 제거하긴 했으나 오늘 여래가 말씀하신 법음을 듣고도 오히려 의심과 후회가 얽힙니다.

[要義] 앞으로 불공장성을 나타내려고 의심을 청하였다.

◆ 二正述疑情分二
▣ 初疑眞不容妄

世尊. 若復世間一切根塵陰處界等皆如來藏淸靜本然. 云何忽生山河大地諸有爲相. 次第遷流終而復始


◆2. 의심을 둘로 청하다.

▣1. 진심은 망상을 용납하지 않는지에 대해 의심하다.


세존이시여 세간에 일체 육근ㆍ육진ㆍ오음ㆍ십이처ㆍ십팔계 등을 그 근본을 추구하면 모두 여래장성이라. 이 모두가 청정하고 본래 스스로 그러하여 일체 인위적인 조작이나 변화가 없다면 일체 번뇌가 일어나지 않아야만 하는데도 어떻게 망상의 모습인 산하대지와 모든 유위생멸상. 즉 정보와 의보가 최초에 홀연히 일어나 그것들이 차례로 천류하게 되었습니까.

즉 무정은 성주괴공(成住壞空)으로 천류하고, 유정은 생노병사(生老病死)로 천류하고, 일념(一念)은 생주이멸(生住異滅)로 천류하면서 이같은 일들이 끝나면 다시 시작되고 시작하면 다시 끝나면서 순환을 반복하게 되었는지요.

▣ 二疑四大相陵
又如來說地水火風本性圓融周?法界湛然常住. 世尊. 若地性?云何容水. 水性周?火則不生. 復云何明水火二性俱?虛空不相陵滅. 世尊. 地性障?. 空性虛通. 云何二俱周?法界. 而我不知是義攸往. 惟願如來宣流大慈. 開我迷雲及諸大衆. 作是語已五體投地. 欽渴如來無上慈誨

▣ 2. 지수화풍 사대가 서로 능멸함을 의심하다.


또 여래께서 말씀하시길“지수화풍의 근본성품은 원만하게 융합하여 법계에 두루 보편하고 담연하게 상주한다”라고 하십니까.

세존이시여. 가령 지대(地大)의 성질이 법계에 보편하다면 이는 법계가 온통 지대의 성질일 뿐인데. 어떻게 다시 수대(水大)를 용납하겠습니까.

또 수대(水大)의 성질이 법계에 두루 보편하면 이는 온통 수대의 성질이므로 화대(火大)는 일어나지 않아야만 합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수ㆍ화 이 두 성질이 동시에 허공계에 보편하여, 서로가 능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세존이시여. 지대는 서로가 장애하는 성질이고, 공대(空大)의 성질은 허활하게 소통합니다. 장애는 소통하질 않고, 소통한다면 장애하질 않는데 어떻게 서로가 상반된 이 두 성질이 동시에 법계에 두루 보편할 수 있겠습니까. 저희들은 이 의미의 귀결점을 잘 모르겠습니다.

원하옵건대 여래께선 대자비를 베푸사 저희들의 미혹을 열어 주옵소서.

모든 함께 하는 대중과 이 말을 끝내고 오체를 투지하면서 여래의 위없는 가르침을 공경히 바랬다.

[要義] 여기서는 자기의 의심을 드러내고 질문하였다. 앞에서 육근ㆍ육진ㆍ육식ㆍ십팔계가 모두 여래장성으로서 청정본연한데, 무엇 때문에 산하대지와 모든 생멸유위상이 홀연히 일어났느냐 하였다.

이는 세계와 중생이 일어난 이유를 모르고 의심한 것이다.

또 칠대(七大). 즉 지수화풍공견식(地水火風空見識) 모두가 법계에 동시에 두루 보편하므로 지수화풍도 법계에서 무장무애하게 일제히 보편하다 하였다.

그럴 경우 수대는 화대를 능멸하고, 지대는 공대를 능탈해야만 한다. 그런데도 어떻게 지수화풍 사대가 낱낱이 무장무애하게 법계에 두루 보편할 수 있을까. 이 의심을 일으킨 이유는 본성은 진실하여 서로가 원융한 이치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질문은 철저하게 그 근원까지를 추궁하려 하였다. 가령 시방삼세를 일념에서 다 아는 여래의 일체종지(一切種智)가 아니면 그 근본시작의 원인을 끝까지 추구할 수 있겠는가.

◆ 三世尊?啓分五
▣ 初許說誡廳

爾時世尊告富樓那及諸會中漏盡無學諸阿羅漢. 如來今日普爲此會宣勝義中眞勝義性. 今汝會中定性聲聞及諸一切未得二空?向上乘阿羅漢等. 皆獲一乘寂滅場地眞阿練若正修行處. 如今諦聽當爲汝說. 富樓那等欽佛法音?然承廳


◆ 3. 세존이 이 문제를 다섯 분야로 설명하시다.

▣ 1. 설법을 잘 들으라 하시다.


이 때 세존께서 부루나와 회중에서 번뇌가 다한 모든 무학아라한에게 고하셨다.

여래가 오늘 이 법회 대중을 보편하게 위하여 승의(勝義) 가운데서 진실한 승의의 성품. 즉 일진법계의 이치를 선설하여 너희들 회중에서 고요한 곳에만 치우친 정성성문(定性聲聞)과 인법이공(人法二空)의 이치를 아직 증득하지 못한 모든 이와 상승(上乘)으로 마음을 도리킨 아라한들이 모두 함께 일승(一乘)을 얻고 곧바로 적멸장지(寂滅場地)인 진실한 아련야(阿練若)에서 올바로 수형하게 하리라. 너희들은 지금 자세히 듣거라. 너희들을 위해 설하리라.

부루나 등은 부처님의 법음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말없이 듣고자 하였다.

[要義]“승의제 가운데 진실한 승의제”는 성유식류(成唯識流)을 의거하면 네 종류가 있다.

첫째는 세간승의제(世間勝義諦)인데, 오온ㆍ십이처ㆍ십팔계 등이며.

두 번째는 도리(道理) 승의제인데, 사제법(四諦法)이며.

셋째는 증득(證得) 승의제인데, 이공진여(二空眞如)며.

네 번째는 승의승의제(勝義勝義諦)인데, 이는 일진법계를 말한다.

여기서부터는 법계연기(法界緣起)를 말하였다. 때문에 승의제 중에 진실한 승의제라고 하였다.

“아련야”는 적멸처(寂滅處)라고 번역하는데“화엄경”에서는 보리장(菩提場)을 아련야처라고 하였다. 이는 일승적멸장지(一乘寂滅場地)인데 법계성(法界性)을 근본수행인지(根本修行因地)로 삼기 때문에 이를 두고 올바른 수행처라고 하였다.

이 다음부터는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과 공불공여래장성(空不空如來藏性)을 나타내고, 이를 통해 원융법계의 이치를 드러냈다.

◆ 二示妄依眞起分五

▲ 初立一心爲迷悟之本

佛言. 富樓那. 如汝所言淸靜本然云何忽生山河大地. 汝常不聞如來宣說性覺妙明本覺明妙. 富樓那言. 唯然世尊. 我常聞佛宣說斯義


◆ 2. 망상은 진심을 의지해 일어남을 다섯 분야로 보이다.

▲ 1. 진여일심을 미오(迷悟)의 근본으로 수립하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부루나야. 너는“여래장성이 청정하고 본래 그러하다면 최초에 어떻게 산하대지가 일어났겠는가”라고 의심하고 있다.

너는 평소에 내가 했던 말을 듣지도 못했느냐. 여래께서 말씀하신“자체는 변치 않는 상태에서 생멸의 인연을 따르고[不變隨緣] 생멸을 따르면서도 자체는 변치 않는[隨緣不變] 진여각성은 스스로 오묘하고 스스로 밝으며, 그 본각성은 본래 밝고 본래 오묘하다”한 것을 부루나는 말하였다.

“네,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평소에 부처님이 이 의미를 말씀하시는 것을 늘 들어왔사옵니다.”

▲ 二雙詰二門爲生起之因
佛言. 汝稱覺明. 爲復性明稱名爲覺. 詰心眞如門 爲覺不明稱爲明覺 詰心生滅門

▲ 미오 두 문이 산하대지가 생기한 근원임을 두 분야로 따져 묻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네가 말한 성각묘명(性覺妙明)과 본각명묘(本覺明妙)에서 이 둘의 명자(明字)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자성은 본래 스스로 밝아 신령스럽게 어둡지 않은 상태를 홑으로 명각(明覺)이라고 하느냐.

아니면 각은 본래 밝지 않은데 애써 밝히려는 마음으로 그것을 밝히는 것으로 명각(明覺)을 이해하느냐.

[要義] 여기에서는 망상의 근원을 양쪽으로 따져 묻고 산하대지가 생기한 이유를 제시했다.

여래장이 이미 청정하고 본연하다면 산하대지나 모든 생멸 유위상들은 끝내 없어야만 한다. 그런데도 무엇 때문에 청정한 법계인 여래장성에서 홀연히 세계가 망상의 모습으로 일어났을까. “홀연히 일어난다”함은 까닭없이 일어남을 말한다.

망심이 진심을 의지하여 일어났음을 밝히려 한다면 우선적으로 일진법계가 그 근원임을 수립하고 이로써 미혹과 깨달음의 근본으로 삼아야만 한다.

그 때문에 부처님께선 평소에 늘 말씀하신 성각묘명(性覺妙明)과 본각명묘(本覺明妙)라는 두 마디 말씀을 드러내어 이로써 진여와 생멸 두 문을 열어 부루나에게 따져 물으신 것이다.

여기에서 세존께선 양쪽 진여와 생멸. 관문을 수립하고 부루나의 한 마디를 인용해 이로써 망상으로 나아가는 실마리를 삼으려고 했을 뿐이다.

참으로 말한다면 불성에는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정인불성(正因佛性)인데, 천연묘성(天然妙性)은 본래 스스로 원만하게 성취되어 인위적인 조작과 노력을 필요치 않음이며,

둘째는 연인불성(緣因佛性)인데 설사 정인불성을 갖추어 있다 해도 이를 먼저 깨달은 선지식의 가르침을 의지해야만 개발되는 의미이다. 이는 흔희들 말하는 부처종자(佛種)는 연(緣)을 따라 일어난다 한 경우가 여기에 해당하며,

셋째는 요인불성(了因佛性)인데, 정인불성과 연이불성이 한 덩어리로 화합하여 수행한 이 후에 자기에게 본래 갖춘 정인불성을 깨달음을 말한다.

여기에서 말한 성각묘명(性覺妙明)은 정인불성이며, 본각명묘(本覺明妙)는 요인불성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인위적인 수행공부를 의지해서 본래 밝은 불성이 드러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 두 불성을 인심으로 융합했기 때문에 이를 쌍으로 들어서 종본(宗本)으로 삼았다.

▲ 三認妄失眞
富樓那言. 若此不明名爲覺者則無所明
▲ 3. 망상을 인식하고 진심을 잃다.


부루나는 말하였다.

“가령 인위적으로 애써 밝히는 일이 필요치 않은 상태에서 그것을 홑으로 각이라고 한다면 그 각은 한갓 부질없는 어두운 각일 뿐, 명료하게 밝힐 대상의 각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밝지 않은 각을 얻은들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要義] 부처님은 부루나가 밝힌 한 마디를 이끌어내 의도적으로 미혹과 망상의 실마리를 열려고 하였는데, 부루나는 과연 진실한 각은 버린 체 망상각을 취하였다.

부루나의 의도를 말해본다면 애써 밝히는 수행을 통해서 이 각을 밝히지 않는다면 그럴 경우 그것은 단지 밝음만 있을 뿐 밝혀야 할 각은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요컨대 반드시 밝히는 대상이 있어야만 그것이 명각(明覺)이 된 것이라고 하였다.

부루나는 밝힐 바 없는 진각(眞覺)은 배격하고 반드시 인위적 수행을 통해 밝힐 바가 있는 망각(妄覺)을 취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밝히는 수행 주체와 밝힐 대상인 불각이 상대적으로 성립하면 “청정본연 여래장성”과는 거리가 너무 멀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 四生滅門中依無明不覺生三細

佛言. 若無所明則無明覺. 有所非覺. 無所非明. 無明又非覺湛明性. 先縱奪遺妨. 性覺必明. 覺義. 妄爲明覺. 不覺義. 覺非所明. 業相. 因明立所. 現相. 所旣妄立生汝妄能. 轉相.

▲ 4. 생멸문 가운데서 무명불각(無明不覺)을 의지하여 삼세(三細)의 망상이 일어나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네가 말하기를 “가령 밝힐 대상으로서의 명각(明覺)이 없다면 애써 수행하여 밝히는 각도 필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두운 무명(無明)일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진실한 본각은 주관과 객관이 단절하였기 때문에 깨우쳐야 할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본각은 아니며, 본각은 모든 차별상을 분명히 관조하기 때문에 밝힐 대상이 없다면 밝은 각이 아니라 그것은 무명(無明)이다. 라고 할 순 없다. 그리고 무명은 또 청정 담연하고 밝은 각성은 아니다.

담연청정한 각성은 반드시 명료하게 밝은 데도[覺義]. 허망하게도 그 본각을 인위적으로 애써 밝히려 한다[不覺義].

그러나 진실한 본각은 주관과 객관의 차별성이 본래 단절하였으므로 인위적으로 밝힐 대상이 아닌데도 반드시 인위적으로 밝히려 할 때문에[業相] 밝혀야 할 객관 대상을 수립한다.[理相]

이처럼 밝혀야 할 본각 대상이 허망하게 상대적으로 성립하고 나면 너의 밝히려는 허망한 주관도 따라서 일어난다.[轉相]
[要義] 여기서는 망상이 일어난 시초를 밝혔다. 즉 세계와 중생들의 업과(業果)가 모두 일념무명불각을 따라서 일어났음을 밝혀“산하대지가 무엇 때문에 홀연히 일어났느냐”한 질문에 답하고 있는 것이다.

▲ 五境界爲緣長六?分三
◈ 初總顯六?
無同異中熾然成異. 明全眞起妄. 異彼所異因異立同. 同異發明因此復立無同無異. 上總出妄相下正明六?. 如是擾亂相待生勞. 智相. 勞久發塵. 相續相. 自相渾濁. 執取計名字相. 由是引起塵勞煩惱. 起業繫苦相下總結妄相. 起爲世界. 靜成虛空. 虛空爲同. 世界爲異. 彼無同異眞有爲法.


▲ 5. 현상(現相) 경계가 외연(外緣)이 되어 육추(六?)가 다시 자라남을 셋으로 설명하다.

◈ 1. 육추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드러내다.


동이(同異)의 차별상이 없는 진여법성 가운데서 치연하게 추관ㆍ객관인 동과 이의 차별성이 일어났다[진여가 전체로 망상차별로 일어났음을 밝혔다]

상대적으로 치연하게 다른 모습을 정말 다르다고 여기고 다시 그 다른 모습에 의지하여 그에 상반된 동일한 모습을 수립한다[이는 허공이 홀연히 일어난 까닭이다]

또 이미 일어난 동일함과 다름을 상대적인 관점에서 밝혀 중생의 신명(身命)은 각자 차이가 나므로 동일함이 없다하고 사대팔식(四大八識)에선 모두가 같기 때문에 다름도 없다는 논리를 수립한다. [이는 중생이 홀연히 일어난 까닭이다. 이상은 허망한 모습을 총체적으로 드러냈고 다음부터는 육추의 모습을 밝힌다]

이처럼 평등한 성품 가운데서 제법이 단박 요란하게 일어나 동과 이가 상대적인 의존관계를 이루므로 이로 인해 피로한 번뇌가 일어난다[智相]

그 번뇌의 피로함이 오래 쌓이면 육진상(六塵相)이 일어나 [相續相]. 자연히 마음은 생멸상으로 혼탁하게 된다.[執取相計名字相]

이를 따라서 진료번뇌를 일으켜[起業相ㆍ業繫苦相. 이하는 허망한 모습을 총체적으로 결론지었다]

허망한 망상이 요동하는 측면에선 세계의 모습이 되고, 고요히 가라앉은 측면은 허공을 이룬다.

허공은 동의 모습이고 세계는 이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동이가 없는 진여평등법성 가운데서 치연하게 동이를 이룬 상태가 진실로 생멸유위법인 것이다.

[要義] 여기서는 전도망상의 근원을 살펴 육추번뇌의 모습을 나타냈다.

시상은 한 번 무명으로 미혹하면 삼세육추로 세계와 중생의 업과를 이룸을 밝혔고, 다음부터는 그 업과가 한번 이루어지면 윤회가 단절하지 않음을 보였다. 그 때문에 삼종상속(三種相續)의 원인과 사대호생(四大互生)하는 까닭은 따로 설명하고 있다.

◈ 二別示相續分三
《初世界相續

覺明空昧相待成搖故有風輪執持世界. 因空生搖堅明立?. 彼金寶者明覺立堅故有金輪保持國土. 堅覺寶成搖明風出. 風金相摩故有火光爲變化性. 寶明生潤火光上蒸故有水輪含十方界. 火騰水降交發立堅. ?爲巨海乾爲洲?. 以是義故. 彼大海中火光常起. 彼洲?中江河常注. 水勢劣火結爲高山. 是故山石擊則成?融則成水. 土勢劣水抽爲草木. 是故林藪遇燒成土因絞成水交妄發生遞相爲種. 以是因緣世界相續


◈ 상속하는 모습을 세 분야로 따로 보이다.

《 1. 세계상속을 보이다.


일체중생의 본각 자체에서 생기한 허망하게 밝히려는 망상[妄明]이 본각진공의 이치를 어둡게 하여 지각없는 허공을 이루었으며, 본각을 밝히려는 망상[妄覺]은 밝음이 되고 허공은 어둠이 되었다.

이윽고 밝음과 어두운 두 법이 서로가 서로를 능탈하여 교대로 신진대사를 거듭하면서 허망한 요동을 이루어 그 망상의 움직임이 바람이 되었다.

그 때문에 허공 다음으로 풍륜(風輪)이 일어나서 세계를 집지(執持)하다. [이로써 이 세계가 응결된 이유는 모두가 무명풍력으로 집지하여 산실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풍대의 종자는 무명망심의 일념요동하는 모습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미 본각을 밝히려는 망상과 어두운 허공[空味]이 서로가 능탈하면서 요동을 이루었다면, 요동하면 반드시 상대적으로 고요함이 있다. 그리하여 허망한 밝음[妄明=覺明] 가운데서 하나의 견고한 망상을 일으켰으며 이 때문에 일체 견고하고 장애하는 색법(色法)을 이루었다.

그렇다면 알아야 할 것은 온 대지의 금보(金寶)는 다름아닌 망명각체(妄明覺體)에서 생성된 견고하고 장애하는 모습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풍륜 다음으로 지대금륜(地大金輪)이 생성되어 국토를 보호하고 유지한다. [이로써 지대금륜(地大金輪)의 종자는 무명망심 가운데 일념 견고한 망상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

본각망심 가운데서 일어난 견고한 무명이 이미 금보를 이루고, 다시 무명이 요동쳐 거듭 바람이 일면 움직이는 그 바람이 견고한 금보와 서로 어루만지고 서로를 흔들면서 움직이는 만큼 더욱 견고해 진다.

때문에 세계는 화광(火光)이 일어나 설익은 것은 더욱 익히고, 있는 것은 없게 하는 성질이 된다. [화대의 종자도 무명망심이 한편으로는 움직이고 한편으로 고요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부딪치는 모습일 뿐임을 알 수 있다.]

각에서 일어난 견고한 망심으로 이루어진 금보가 이미 망심의 밝음을 머금어 윤기가 나고 그 망심에서 변화한 화광은 위로 상승하면서 푹 찌면 그 때문에 금보 속에 머금은 윤기가 수륜(水輪)이 일어나 그 물은 시방세계를 포함한다. [수대의 종자도 무명망심 가운데 금화이망(金火二妄)이 쪄서 이루어 졌음을 알 수 있다. 총론적으로 말한다면 최초 일념무명 때문에 풍륜이 일어났고, 그 풍륜은 견고한 물질을 집지했기 때문에 견고한 금륜이 생겼으며, 금륜과 바람이 서로 부딪쳐 화륜이 일어났고, 탐애하는 마음이 점점 깊었기 때문에 수륜이 일어났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지수금품 사대의 종자가 모두 일념무명으로 인해서 있다는 점이다. 이상은 무명을 의지해서 사대가 있음을 말하였고, 이 다음부터 사대로 인해 세계가 결성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무명이 이미 사대의 성질을 이루면 각자 서로가 위배하면서도 동시에 서로를 상생으로 구제한다. 가령 불의 성질은 본래 위로 오르고 물의 성질은 하강하는 것이 그 본성이다. 한쪽은 오르고 한편은 내리면서 서로가 서로를 구제하면서 모든 견고하게 장애하는 지대를 성립하여 기계(器界)를 이루는데, 가령 망심 가운데 탐욕의 물이 성하면 비습하여 큰 바다가 된다.

그 때문에 세계엔 사대해(四大海) 등 물들이 있게 된다.

또 망심 가운데서 진심(瞋心)의 불이 성하면 건조하여 그 가운데 큰 것은 주(洲)가 되고 작은 것은 삼각지가 된다. 그러므로 세상엔 사대부주(四大部洲)인 육지가 있다.

이처럼 수대가 결성한 대해수는 본래 비습한 물이어서 불은 없어야 할 듯하나 그 중심엔 이미 진심의 불이 물과 교차하기 때문에 동시에 물 속에선 화광이 항상 일어난다.

그리고 크고 작은 주나 삼각지는 본래 건조한 육지여서 물이 없을 듯하지만 그 중심엔 탐심의 물이 교대로 성립하므로 육지엔 물이 항상 강하를 흘러들고 있다.

가령 망심 가운데 물의 세력은 나약하고 불의 세력이 승하면 그것이 결성하여 높은 산이 된다. 그러므로 먼 산의 돌이 서로 부딪치면 화염이 일어나는데, 이는 불의 종자가 물 속에 그대로 있기 때문이며 그 돌을 녹이면서 다시 물로 용해하는데, 이는 물의 종자가 없어지질 않아서 이다.

다시 망심 가운데 흙의 세력은 나약하고 물의 세력이 승하면 그것이 초목으로 싹터 나온다. 그 때문에 불에 타면 다시 흙을 이룬다. 이는 흙의 종자가 초목 가운데 그대로 있음을 알 수 있으며, 혹 사물을 압축하면 물이 되는데 이는 물의 종성이 아직 없어지질 않았다는 증거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사물은 망심에서 나타났을 뿐이라는 점이다. 대체로 일념무명이 허망하게 요동하여 그것이 풍대를 이루고, 그 무명의 견고함이 지대를 이루고, 풍대의 동과 지대의 정이 서로 마찰하면서 화대를 이루고, 화대가 견고한 금을 푹 쪄서 수대를 이루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사대가 있게 되었다.]

이처럼 망심과 망경[妄心 妄境]이 서로가 서로를 상생하면서, 물과 불이 서로를 구제하여 육지와 바다의 종자가 되었고, 다시 물의 세력이 불의 세력을 따르면서 산석(山石)의 종자가 되었으며, 다시 흙의 세력이 물의 세력을 따르면서 초목의 종자가 되었다. 이처럼 서로가 서로의 종자를 동시에 이루면서 기세간(器世間)을 결성하였다.

이같은 인연 때문에 세계는 성주괴공이 일어나 끝나면 다시 시작하고 시작하면 다시 끝나기를 단절 없이 상속하는 것이다.

[要義] 위에서는 진각이 허망하게 요동하여 무명 등의 모습으로 전환했다 하였고, 여기에서는 그 무명이 다시 사대로 전환하여 세계상속이 있게 되었다 했다. 이로써 “차례로 천류하면서 끝나면 다시 시작한다”한 질문에 대해 답변하였다.

여래장성은 청정본연하여 법계에 두루 보편하면서 본래 요동하지 않고, 원래 일어나서 상속하는 일이 없으나, 단지 분별하는 업을 따라서 발현할 뿐이다. 그 때문에 동요하고, 생기하고, 상속하는 모습이 있을 뿐이다.

《二明衆生相續

復次富樓那. 明妄非他覺明爲咎. 所妄旣立明理不踰. 以是因緣聽不出聲. 見不超色. 色香味觸六妄成就. 由是分開見覺聞知. 同業相纏. 合離成化. 見明色發. 明見想成. 異見成憎. 同想成愛. 流愛爲種. 納想爲胎. 交?發生吸引同業. 故有因緣生?羅藍?蒲曇等. 胎卵濕化隨其所應. 卵唯想生. 胎因情有濕以合感. 化以離應. 情想合離更相變易. 所有受業逐其飛沈. 以是因緣衆生相續


《 2. 중생상속을 밝히다.



다시 부루나야. 네가 말한 명(明)을 허망이라고 한 이유는 다른 까닭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진각 자체에서 허망하게 인위적으로 밝히려는 마음을 더한 것이 그 허물일 뿐이다.

주관적으로 밝히려는 마음이 있으면 밝힐 대상이 상대적으로 성립하고, 밝힐 대상이 허망하게 성립하고 나면 주관적으로 밝히려는 이치가 자연히 그 대상의 범주를 넘지를 못한다.

그 때문에 하나의 정명(精明)한 자체가 상대적으로 분리하여 육화합상(六和合相)을 이루었다.

이러한 인연 때문에 귀로 들을 때는 하나의 마음이 소리의 범주를 벗어나질 못하고 보는 마음은 색법을 초월하지 못하여, 인식 대상으로서 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 여섯 종류의 허망한 육진이 이윽고 따로의 모습으로 성취된다.

이를 따라서 인식 주관인 견ㆍ문ㆍ취ㆍ상ㆍ각ㆍ지[見聞ㆍ嘗覺知]의 허망한 육근이 일어나고, 그 육근은 반드시 육진을 마주하면서 미혹을 일으켜 업을 짓고, 그 결과 태란습화 사생(四生)의 형체를 불러들인다.

그리하여 아버지ㆍ어머니ㆍ자기 이 셋이 서로가 서로를 의존하면서 동일한 업을 지은 자는 혹은 서로를 상상하고 혹은 탐애하면서 서로가 얽히고 설킨다. 때문에 태생과 난생 이 두 종류의 중생이 있게 되었다.

또 부모를 의지하지 않고 단지 자신의 업만을 가지고 혹은 습기에 합하여 형체를 이루기도 하고, 혹은 분리하고 변역하면서 변화하기도 한다. 이것이 습생과 화생이 생기하는 이유이다. [唯識論에서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음욕으로 탐애하기 때문에 난생과 태생이 일어나고, 냄새와 맛을 탐애하기 때문에 습생이 태어나고, 그의 욕구대로 따르므로 화생이 일어난다. 이것이 사생육취가 일어나는 원인이다.]

허망한 육근중음신(六根中陰身)이 인연있는 처소에서 탐욕스런 물질[色]이 밝은 모습으로 목전에 나타나 있으면 그 모습을 의지하여 문득 허망한 대상 경계를 이루어 그에 대한 탐욕망상이 일어난다.

그 때문에 남자는 아버지를 보면 다르다 여기고, 여자가 어머니를 보면 다르다고 여겨 증오심을 일으킨다. 다시 남자가 어머니를 보면 같다고 여기고, 아내라는 망상을 허망하게 일으키며, 여자가 아버지를 보면 동일하다 여기고 남편이라는 망상을 허망하게 일으켜 탐애심을 이룬다.

이 탐애의 망상이 부모의 붉고 하얀 두 물방울로 흘려들어가 태어 날 종자가 된다. 그러면 붉고 하얀 두 물방울이 탐애하는 망상 종자를 받아들여 태가 형성된다. 이는 비록 부모가 서로 교구한 것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긴 하나 실제로는 부모와 자기의 세 사람 업이 동일함 때문에 태속으로 빨려들어 간 것이다.

자기의 탐애하는 망상 인(因)과 부모와 교구하는 연(緣)이 서로 화합함 때문에 태속에서 칠일이 지나면 응결되어 매끄러운 핏덩이가 일어나고, 십사일이 지나면 포(?)가 형성된다. 〔等은 나머지 셋까지를 말한다. 이십일이 지나면 부드러운 살이 형성되고, 이십팔일이 지나면 단단한 살이 형성되고, 삽십 오일이 되면 구체적인 형태가 자리를 잡고 열달이 되면 출태한다.〕

그러나 태ㆍ란ㆍ습ㆍ화 사생은 모두가 혹과 업이 그 원인이 되어 사생이라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란생은 들뜬 망상 때문에 태어나고, 태생은 탐애와 연모의 정 때문에 태어나고, 습생은 냄새와 맛을 탐애하여 찰싹 붙어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태어나고, 분리하는 화생은 뛰어난 환경을 탐애하여 이쪽을 버리고 상대쪽으로 취향해 갔기 때문에 태어났다.

이 모두는 네 가지 업을 따라서 사생이라는 과보가 호응하면서 일어난 것이다. 이는 여기에 그치질 않는다. 한번 태어난 뒤로는 형체와 과보를 바꾸면서 생사가 그칠 날이 없다.

혹은 단순 감정이 지적 망상으로 변화하고, 혹은 지적 망상이 단순 감정으로 변하기도 하며, 혹은 습생이 화생으로도 변하고, 혹은 화생이 습생으로 변하면서 서로가 서로의 모습으로 뒤바뀐다.

그러므로 미혹으로 지은 업이었으면 반드시 그에 따른 과보가 있게 마련이다. 그들이 지은 선업을 따르면 사생 모두가 즐거운 과보로 상승하고 악업을 따르면 사생 모두가 아래로 가라앉고 떨어지는 고통이 따른다.

그 까닭을 추구해 보면 모두가 본각체에서 일으킨 망상이 허물이자 원인이며, 이 원인 때문에 중생이 서로가 서로의 모습으로 태어나고 상속하는 연(緣)이 된다.

이 같은 인과 연이 한 덩어리로 화합함 때문에 중생이 단절하지 않고 상속하게 된다.

[要義] 여기서는 중생상속이 모두 본가체상에서 일으킨 망상 때문이라 하였다.

《三明業果相續
富樓那. 想愛同結愛不能離. 則諸世間?母子孫相生不斷. 是等則以欲貪爲本. 貪愛同滋貪不能止. 則諸世間卵化濕胎隨力强弱遞相呑食. 是等則以殺貪爲本. 以人食羊. 羊死爲人. 人死爲羊. 如是乃至十生之類死死生生互來相瞰. 惡業俱生窮未來際. 是等則以盜貪爲本. 汝負我命. 我還汝債. 以是因緣經百千劫常在生死. 汝愛我心. 我憐汝色. 以是因緣經百千劫常在纏縛. 唯殺盜?三爲根本. 以是因緣業果相續

《 3. 업과 상속을 밝히다.


부루나야. 중음신(中陰身)의 증오와 탐애. 이 두 망상이 대상 탐욕의 경계를 탐착하여, 부모 자기 세 사람의 업이 서로 동일하게 맺히면 태속으로 들어간다.

태로 들어 간 뒤엔 탐애와 연모심으로 기뻐하면서 그곳을 스스로 떠나질 못한다. 이 때문에 세간의 부모는 자식을 낳고, 자식은 다시 손자를 낳아, 자자손손이 상생하고 상속하면서 단절하질 않는다. 그 원인을 추구해 보면 이들은 탐욕과 애련으로써 그 근본을 삼는다.

탐애의 마음이 있으면 반드시 신명이 있게 마련이며, 일반적으로 신명이 있으면 반드시 함께 자양(滋養)해야만 하며, 이미 자양을 탐하면 반드시 고기를 먹어야만 한다.

이 지경에 이르면 상대방 사물을 해치려는 마음이 일어나 비록 지극히 어진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도 그치질 못한다. 때문에 사생의 부류가 그들의 업력을 따라서 강한 자는 약자를 제압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다. 그 까닭을 추구해 보면 이들은 다른 생명을 살해하여 자신의 자양을 탐하는 것으로 그 본이 된다.

가령 예를 들면 사람이 양을 잡아먹으면 양은 죽어 사람이 되고, 사람은 죽어 양이 되어, 이처럼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것과 같다.

유독 사람과 양만 그러할 뿐 아니라. 내지는 십류중생까지도 죽으면 다시 태어나고 태어나면 다시 죽으면서 끝없이 되돌아가고 서로가 서로를 찾아와 잡아먹는다.

이같은 악업 때문에 세세생생에 함께 태어나 원한으로 만나 서로에게 보상하면서 미래세가 다하도록 잡아먹는 것을 그치질 않는다. 그 유래를 추구해 본다면 이들은 도둑과 탐욕이 그 근본이다. [여기에서는 고기를 먹었을 뿐인데 무엇 때문에 도둑질이라고 하였을까. 일반적으로 주지 않는데 갖거나 남몰래 훔치는 것을 모두 도둑이라고 한다.

가령 사람이 양을 잡아먹을 경우 양이 자기의 생명을 무엇 때문에 사람 더러 먹으라고 달게 베풀었겠는가. 이는 주지 않았는데 취한 경우며, 양이 죽어 사람으로 환생했을 경우 다시 찾아와서 양이 된 사람을 잡아먹는데 이는 남몰래 훔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 모두를 도둑이라고 하였다. 이상은 업과의 근본을 밝혔고, 이 다음부터는 상속의 이유를 밝혔다.]

살생탐욕으로 말한다면 가령 네가 나의 신명을 저버리면 너는 나에게 신명을 되돌려 주어야 하고, 네가 너의 신명을 져버리면 내가 너에게 나의 신명을 되돌려 줘야한다.

또 도둑질 하는 탐욕으로 말한다면 내가 너에게 빚을 지면 나는 너에게 부채를 갚아야 하고 네가 나에게 빚을 지면 너는 나에게 빚을 갚아야만 한다.

이같은 생명과 부채라는 인연 때문에 백겁천생을 지난다고 해도 서로가 보상하는 일이 끝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백겁천생토록 항상 생사에 상속하면서 그 가운데를 영원히 벗어나질 못한다.

또 애욕의 탐심으로 말해 본다면 네가 나를 탐애하면 나는 나의 모습을 연모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면 너는 나를 연모하게 된다.

이같은 사랑과 연모의 인연 때문에 백천겁이 지나도록 항상 얽히고 설키면서 끝내 해탈할 날이 없게 된다.

그 원인을 논변해 본다면 탐애라는 두 글자가 살생ㆍ도둑질ㆍ음행 이 셋의 근본이다. 이러한 탐애의 원인 때문에 업인(業因)과 고과(苦果)가 상생상속하면서 휴식할 날이 없다.

[要義] 여기에서는 업과 상속이 모두가 탐애심에서 비롯된다고 하였다.

◈ 三結顯妄相
富樓那. 如是三種顚倒相續. 皆是覺明明了知性因了發相. 從妄見生. 山河大地諸有爲相次第遷流. 因此虛妄終而復始

◈ 3. 이 모두는 망상임을 결론짓다.


부루나야. 이같은 세계와 중생과 업과 이들 세가지가 상속하는 이유는 특별하게 다른 법이 있는게 아니라 단지 허망 때문에 전도망상이 순환하면 서로가 태어나고 상속하게 된다.

총체적으로 말한다면 최초 일념불가 때문에 본각체에서 망상을 일으켜 이윽고 무명업식(無明業識)을 이루었으며, 이미 업식이 형성되고 나자 견상이분(見相二分)이 홀연히 일어났다.

그러므로 처음엔 세계가 있는 듯 하여 그로 인해 중생이 있게 되었고, 중생이 있음으로 해서 업과가 있게 되었으며, 끝내는 업과가 단절하지 않음 때문에 중생이 상속하였고, 중생이 단절하지 않음 때문에 다시 세계가 상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실체적인 모습은 아니고 모두가 본가체상에서 애써 허망하게 알고 밝히려는 망상 때문에 그 허물이 일어났을 뿐이다.

허망으로 일어난 명료하게 알려고 하는 망상 때문에 주관적인 견분(見分)을 이루었고 대상을 객관적으로 명료하게 알려고 하는 마음 때문에 인식 대상이 일어났다.[相分] 이는 상분경계이다.

너는 앞에서 “무엇 때문에 산하대지와 모든 유위생멸상이 일어났는가”라고 질문하였는데 그것은 본각체상에서 일으킨 허망한 명료하게 밝히고 알려는 마음과 그를 의지해서 동시에 견상이분(見相二分)이 일어남 때문에 본래없던 산하대지가 홀연히 일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와 중생과 업과 이 셋이 차례로 천류변화하고 순환유전함이 본각에서 일으킨 무명업식[自證分]과 그 곳을 의지해서 일어난 견상이분이 활동하는 모습 아님이 없다. 우주만유는 허망한 망상이 활동하는 모습일 뿐 진실한 모습은 아니다.

그 때문에 망상의 모습이 시작하면 끝나고 끝나면 다시 시작하여 단절없이 상속한다.

▣ 三示本無生滅分二
▲ 初執妄疑眞

富樓那言. 若此妙覺本妙覺明與如來心不增不減. 無狀忽生山河大地諸有爲相. 如來今得妙空明覺. 山河大地有爲習漏何當復生


▣ 3. 생멸이 본래 없는 이치를 두 분야로 보이다.

▲ 1. 망상을 진심으로 의심하다.


부루나는 말하였다.

“부처님 말씀을 의거한다면 모든 중생이 현재 갖추고 있는 망상 속의 묘각자체는 본래 스스로 오묘하고, 그 각체는 본래 스스로 밝으므로 이를 여래의 마음에 비교해서 말한다면 부처님에 있어서 증가하지 않고 중생에 있어서 감소하지도 않습니다.

단지 중생은 묘각체상에서 허망하게 따로 알려는 마음을 애써 일으켰을 뿐입니다. 때문에 까닭 없이 본래없던 산하대지 등의 모습이 홀연히 일어났습니다. 이는 그렇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감히 묻겠습니다. 여래께서는 지금 보리도량 가운데서 새벽 샛별을 보고 묘각진공묘명본각(妙覺眞空妙明本覺)을 깨달았습니다. 이는 부처와 중생이 그 시초근본을 하나인 듯도 합니다.

그렇다면 산하세계와 유위중생들의 습기번뇌인 업과를 부처님은 다시 어느 시절에 이르러야 일어나겠습니까.”

[要義] 부루나는 본가체상엔 미혹의 실체가 없어서 끝내 생멸이 끊긴 이치를 몰랐기 때문에 이 같은 질문을 하였다. 즉 중생속의 인성(因性)을 집착하여 부처님 과각(果覺)을 따져 물은 것이다.

▲ 二示本無生滅

佛告富樓那. 譬如迷人於一聚落惑南爲北. 此迷爲復因迷而有因悟而出. 富樓那言, 如是迷人亦不因迷又不因悟. 何以故迷本無根云何因迷. 悟非生迷云何因悟. 佛言. 彼之迷人正在迷時. ?有悟人指示令悟. 富樓那. 於意云何. 此人縱迷. 於此聚落更生迷不. 不也世尊. 富樓那. 十方如來亦復如是. 此迷無本. 性畢竟空. 昔本無迷似有迷覺. 覺迷迷滅. 覺不生迷. 亦如?人見空中華. ?病若除華於空滅. 忽有愚人於彼空華所滅空地待華更生. 汝觀是人爲愚爲慧. 富樓那言. 空元無華. 妄見生滅. 見華滅空巳是顚倒. 勅令更出斯實狂癡. 云何更名如是狂人爲愚爲慧. 佛言. 如汝所解. 云何問言諸佛如來妙覺明空何當更出山河大地. 又如金鑛雜於精金. 其金一純更不成雜. 如木成灰不重爲木. 諸佛如來菩提涅槃. 亦復如是

▲ 2. 본래생멸이 없음 보이다.


부처님은 부루나에게 고하셨다.

비유를 해보자. 미혹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한 마을에서 홀연히 미혹을 일으켜 남쪽을 북쪽이라고 했다면 이 사람의 미혹이 본래 미혹한 자체에서 일어났겠느냐. 본래 미혹하지 않은 상태에서 즉 올바로 아는 데서 나왔겠느냐. 너는 이 문제를 말해보라.

부루나는 말했다.

“이 사람의 미혹은 미혹을 의지하지 않았고, 역시 올바로 아는 마음을 근거하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미혹하기 이전엔 본래 미혹을 일으키는 근거가 없었는데 어떻게 올바로 아는 마음을 의지해서 미혹이 있었겠습니까.”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너는 미혹이 본래 뿌리가 없음을 이미 알았다.

가령 그 사람이 남쪽을 북쪽이라고 하면서 미혹했을 때 홀연히 올바로 아는 사람이 지시하여 바로 알게 하였다면 이 사람이 설사 오랫동안 미혹했다 하더라도 이미 올바르게 알고 난 뒤에도 이 북쪽에서 다시 미혹을 일으키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이미 바르게 알았다면 다시는 미혹하질 않을 것입니다.”

부루나야. 시방여래도 이와 같다. 이 무명의 미혹은 이미 자성을 근본으로 하지 않았으며, 역시 본각자체를 근본으로 삼지 않았다. 그 자체 성질을 추구해 보면 끝내 공적하기만 하다. 이는 지난 시절에 따로 얻을 말한 미혹은 원래 없었으며, 가령 방향을 미혹해서 미혹한 현재의 시기에 있다 해도 그 방향을 실제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옮겨 가지 않았다. 이는 어찌 미혹의 모습만 얻지 못하랴. 새삼 깨닫는 것까지도 역시 얻지 못한다.

다만 미혹할 때를 깨달을 때와 대비한다면 흡사 미혹이 따로 있고 깨달음도 따로 있는 듯하여 이는 방향을 미혹했을 때를 방향을 올바로 알았을 때와 대비하면 흡사 방향이 옮겨 가고 면역된 듯함과도 같다.

지금 한 번 미혹임을 깨달으면 그 미혹은 영원히 소멸하고, 그에 대비되는 각이라는 한 글자까지도 얻지 못한다. 하물며 다시 미혹이 일어나겠느냐.

이는 마치 눈에 병이 있는 사람이 허공에서 헛꽃을 보지만 그 꽃은 원래 허공에 실제 있지 않았으며, 눈병이 나으면 헛꽃은 허공에서 소멸하나 역시 실제로 새삼 없어지지도 않음과 같다.

그런데도 홀연히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헛꽃이 소멸한 허공에서 다시 그 꽃이 허공에서 일어나길 기대한다면 너는 이 사람을 어리석다고 하겠느냐. 지혜롭다고 하겠느냐.

부루나는 말하였다.

“허공에는 원래 헛꽃이 없었는데 어떻게 일어나고 새삼 소멸함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허망하게 허공에서 헛꽃이 소멸한다고 분별한다면 그것이 이미 전도망상인데 그것을 다시 피어난다고 기대한다면 이는 실로 미치광입니다. 이런 사람을 두고 어떻게 다시 어리석으니 또는 지혜로우니 하고 말할 가치가 있겠습니까.

부처님은 이윽고 그가 한 말에 나아가 따져 말씀하셨다.

헛꽃이 다시 피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네가 말한 것처럼 미치광이일 뿐이다. 너는 이미 이러한 도리를 알았으면서도 어떻게 나에게“제불여래의 묘각명공(明空)에선 어느 때 망상의 모습인 산하대지가 다시 일어나는가”라고 질문하느냐.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부처님은 눈병이 나은 사람이고 부루나는 헛꽃이 다시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제법은 본래 스스로 고요하여 미혹과 깨달음의 상대적인 모습이 없다. 부처님은 실제로 망상을 소멸하고 진실을 증득 한 분이라 여기는 것도 이미 전도된 망상인데 하물며 다시 부처님이 진실한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키기를 기다리겠느냐.]

또 금이 금광에 있을 때 광석은 금과 함께 뒤섞여 있다. 이 때는 두 물질이 뒤섞여 순금을 따로 구분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금광이 용광로를 거쳐 한번 단련하고 나면 바로 순금이여서 다시는 금광과 뒤섞이지 않는 것과 같다.

또 수목에 불이 나 재로 변화하면 다시는 나무가 되지 않음과도 같다.

제불여래의 보리열반도 이와 같을 뿐이다.

[要義] 부루나가 법을 잘못 집착하므로 부처님이 비유를 들어 현실에서 의심을 풀도록 하였다.

“금"은 보리지덕(菩提智德)에 비유하였고, “재”는 열반단덕(涅槃斷德)에 비유하였다.

이 다음은 지수화풍 사대가 서로 능탈함을 말하였다.

▣ 四顯理事無?
{上答云何忽生. 下答四大相陵}


富樓那. 又汝問言地水火風本性圓融周?法界疑水火性不相陵滅. 又徵虛空及諸大地俱?法界不合相容. 富樓那. 譬如虛空體非?相而不拒彼諸相發揮. 所以者何. 富樓那. 彼太虛空日照則明. 雲屯則暗. 風搖則動. 霽澄則淸. 氣凝則濁. 土積成?. 水澄成映. 於意云何. 如是殊方諸有爲相爲因彼生爲復空有. 若彼所生. 富樓那. 且日照時旣是日明. 十方世界同爲日色. 云何空中更見圓日. 若是空明空應自照. 云何中宵雲霧之時不生光耀. 當知是明非日非空不異空日. 觀相元妄無可指陣. 猶邀空華結爲空果. 云何詰其相陵滅義. 觀性元眞唯妙覺明. 妙覺明心先非水火云何復問不相容者. 眞妙覺明亦復如是. 汝以空明則有空現. 地水火風各各發明則各各現. 若俱發明則有俱現. 云何俱現. 富樓那. 如一水中現於日影. 兩人同觀水中之日東西各行則各有日隨二人去. 一東一西先無準的. 不應難言此日是一云何各行. 各日旣雙云何現一. 宛轉虛妄無可憑據

▣ 4. 이사무애의 경지를 나타내다.


부루나야. 너는 앞에서 또 질문하기를 “이미 지수화풍 사대가 원융하고 두루 보편하다면 어떻게 물과 불, 이 두 상반된 성질이 서로가 서로를 능멸하지 않는지요”라고 하였고, 또 따져 묻기를 “공대(空大)와 지대(地大)를 피차의 성질이 다르므로 서로가 용납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은데 어떻게 이 둘이 동시에 보편할 수 있는지요”라고 하였다. 나는 지금 너를 위해서 이 문제를 비유로써 밝혀주리라.

비유해 보자. 허공은 끝없이 푸르러 그 활달한 모습은 끝까지 추궁하기 어렵다. 오직 허공이라는 이름만 지목할 수 있을 뿐 그 어떤 것으로도 비교할 수가 없다. 때문에 그 자체는 무차별적인 형상과 동일하지 않다.

그럼에도 그들 모든 모습들이 그들 임의대로 일어나는 일을 거절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해가 허공을 비추면 밝은 모습이 나타나고, 구름이 끼면 어두운 모습이 나타나고, 바람이 불면 움직이는 모습이 나타나고, 날씨가 일제히 개면 맑은 모습이 나타난다.

음기가 응결하면 탁한 모습으로 발휘하고, 바람과 흙이 교대로 쌓이면 흙비가 내리고, 물과 광체가 맑게 사무치면 반사되는 모습이 나타난다.

각처의 밝음ㆍ어두움ㆍ맑음ㆍ탁함ㆍ움직임ㆍ흙비ㆍ반사, 이 같은 모든 유위상은 해를 의지해서 일어나느냐. 아니면 허공을 의지해서 그들 스스로 존재하겠느냐.

가령 이 모든 것들이 허공과 해를 의지해서 일어나면 지금은 우선 태양 하나 예로 들어서 나머지 여섯까지 사물까지 견주어 보리라.

태양이 허공을 비출 때 이미 태양이 밝아 즉 시방세계에 있는 허공으로서 광명이 있는 곳은 동일하게 태양 자체의 빛이라면 온 세간 가득히 하나의 태양 자체를 이루리라. 그런데도 어떻게 허공 가운데서 다시 쟁반같은 둥근 태양을 따로의 모습으로 보겠느냐.

이미 둥근 태양자체를 보았다면 태양 자체 밖에 나머지 밝은 광명의 모습은 응당 태양에 소속하지 않고 그 스스로 허공에 소속해야만 하는 데 어떻게 그 광명이 태양을 의지해서 일어나겠느냐.

가령 이 광명의 모습이 태양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는 허공 자체가 스스로 태양을 소유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허공은 이미 항상 존재하므로 광명도 반드시 변함없이 비춰야만 한다. 그런데도 어떻게 캄캄한 한 밤중이나 어둡게 구름이 덮이거나 안개가 끼는 태양이 없을 때엔 오직 어두운 모습만 보일 뿐, 광명이 일어나질 않느냐.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이 광명은 태양에 소속하지 않고 허공에 소속하지도 않는다는 점을. 그러나 역시 허공과 다르지 않으며, 태양과도 다르지 않다. 이 하나의 모습이 이미 그러할진대 나머지 여섯의 모습도 역시 그러하리라.

그러므로 알라. 모든 지수화풍 자체의 모습을 관찰해 보면 그것은 본래 허망이여서 광명의 모습이 태양도 아니고 허공도 아닌 따로 지적할 수가 없는 것과 같다는 점을.

그런데도 허망하게 따로 구체적으로 지적할 수 있다 라고 말한다면 이는 미혹일 뿐이다.

이치가 이러한데도 다시 사대가 서로가 서로를 능탈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마치 허공 꽃이 그대로 머물면서 끝내 헛 열매가 맺히기를 기대함과도 무엇이 다르겠느냐. 이는 미혹 가운데 다시 미혹한 자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사대 자체의 성질을 관찰해 본다면 광명이 태양과 허공과 서로 다르지 않듯이 그것은 본래 진실이여서 오직 여래장성 묘각명심일 뿐이다.

그러나 이 오묘한 마음은 본래 스스로 지각하고 본래 스스로 밝아 오직 절대보편한 여래장체일 뿐. 물과 불과 허공과 대지하는 따로의 모습이 아니다. 그런데도 무엇 때문에 그 이치를 모르고 거듭 나에게 질문하기를 “사대가 서로를 능멸하질 않고 서로가 용납을 합니까”라고 하느냐.

너희들은 한결같이 망각(妄覺)으로 애써 알려고 하는 마음만 알 뿐. 진각에는 스스로 오묘하고 밝은 이치가 원래부터 있다는 것은 모른다. 오묘하게 맑은 진각이 바로 여래장이며, 그 자리는 청정 본연하여 법계에 두루 원만한 자체이다.

그러나 그 여래장은 중생이 분별심으로 아는 범주만큼 호응하면서 그 업을 따라 발현한다. 이를 비유하면 허공자체는 차별상이 아니건만 모든 차별상이 일어나는 것을 거절하지도 않음과 같다. 여래장성도 이와 같다.

너희들 마음에 가령 허공의 모습을 생각하면 여래장성이 즉시 그 생각하는 업을 따라서 허공의 모습이 나타나고, 너희 마음에 지수화풍을 떠올리면 여래장성이 바로 그 업을 따라서 각자의 차별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며, 너희 마음에 칠대(七大)를 동시에 떠올리면 여래장성이 즉시 그 업을 따라서 칠대의 모습으로 동시에 발현한다.

무엇을 칠대가 동시에 나타남이라고 말하겠느냐. 비유하면 하나의 물 가운데 태양의 그림자가 나타나면 그 때 두 사람이 이쪽 저쪽에서 물 속에 어린 태양을 동시에 보는 것과도 같다.

이 두 사람은 하나는 이쪽에서 또 하나는 저쪽에서 서로 각자 따로 제 갈 길을 가건만 각자가 그 태양이 자기만을 따라 온다고 여긴다.

동쪽으로 가는 사람은 태양이 자기를 따라서 동쪽으로 간다 말하고 서쪽으로 가는 사람은 태양이 자기를 따라서 서쪽으로 간다고 말한다.

이처럼 태양은 일정한 준칙이나 실제가 있어 상상으로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물과 그 가운데 어린 태양 그림자는 본래 하나이다. 그런데 어떻게 두 사람이 동서로 각자 자기 갈 길을 가면서 그 태양이 자기만을 따른다는 생각을. 따라서 이쪽 저쪽으로 가겠느냐. 각자의 태양이 이미 둘로 있다면 무엇 때문에 물 속에는 다시 하나의 태양 그림자만 나타나겠느냐.

마땅히 알라. 이 광명은 태양도 아니고 허공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허공과 태양과 서로 다르지도 않다는 점을.

이같은 의미 때문에 분명하게 추구하면 이들은 철저한 망상의 모습뿐이어서 거기에서는 전혀 실제 자취를 의거할 수가 없다.

[要義] 부루나는 여래장성이 업을 따라 발현하는 이치를 몰랐다. 그 때문에 앞에서 “모든 유위상이 일어나서 상속하는 것과 칠대성(七大性)이 서로가 어떻게 서로를 능멸하지 않는지를 질문하였다.

위에서는 이미 모든 유위상의 생기와 상속에 대한 문제를 답변하였고 여기에서는 칠대가 원융한 이치까지를 비유를 들어서 논파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비유는 “화엄경”의 이사무애(理事無碍)와도 같은 도리인데 이로써 불공여래장의 이치를 보이고 있다.
다음부터는 불공여래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五顯迷悟同源以結事理無?

富樓那. 汝以色空相傾相奪於如來藏. 而如來藏隨爲色空周?法界. 是故於中風動空澄日明雲暗. 衆生迷悶背覺合塵故發塵勞有世間相. 我以妙明不滅不生合如來藏. 而如來藏唯妙覺明圓照法界. 是故於中一爲無量. 無量爲一. 小中現大. 大中現小. 不動道場?十方界. 身含十方無盡虛空. 於一毛端現寶王刹. 坐微塵裏轉大法輪. 滅盡合覺故發眞如妙覺明性

▣ 5. 미오가 같은 근원임을 나타내 이사무애를 결론짓다.


부루나야. 세간에서 서로가 능멸하고 서로가 장애하는 인이 어찌 다른 까닭이 있어서이겠느냐. 그 이유는 너희들이 여래장성을 미혹하고, 근본무명을 아직 타파하지 못하여 색공(色空)에 대한 집착분별을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차별없는 여래장성에서 색과 공을 나누고 색과 공이 서로가 서로를 능탈한다.

이윽고 이 때문에 여래장성이 번뇌염법의 인연인 업을 따라서 색과 공의 모습으로 발현하여 법계에 두루 보편하게 되었다. 이는 태허공이 모든 차별상이 일어나는 것을 거절하지 않음과도 같다.

그 때문에 그 가운데서 흡사 바람의 움직임과 허공의 맑음이 서로 다르고 태양 광명과 구름의 어둠이 서로 능멸하는 것처럼 허망한 분별을 일으킨다.

대지와 허공이 서로가 장애하고 물과 불이 교대로 능멸하는데 이르러선 번뇌진로의 모습이 온 눈에 가득하여 목전 가득히 장애만을 이룬다. 이 모든 허물은 다 여래장성을 미혹하고 무명으로 담담한데 기인한 것이다.

그리하여 본래 있는 각성엔 실제 위배함 없이 등졌고 허망한 진로의 모습엔 실제 서로 합함이 없이 합하였다.

이 때문에 진로번뇌가 일어나 이윽고 세간의 색공수화 등의 모습이 일어났고 이를 따라서 전체의 여래장성이 차별상을 이루어 걸핏하면 서로가 능멸하고 장애함을 이룬다.

부처님이 원융무애한 경지를 이루었는데 그것은 무슨 다른 방법이 있어서이겠느냐. 진실하고 오묘한 각명(覺明)은 불생불멸한 상주진심이다.

이 같은 이치를 증득하여 여래장성에 일치하였을 뿐이다.

그 때문에 여래장성은 이윽고 청정한 인연을 따라서 하나의 묘각명체(明體)를 이루어 법계를 원만하게 관조할 뿐이다.

그 가운데선 하나의 보편한 마음과 한량없는 차별세계가 서로 장애가 없고(一?無碍), 작고 큼이 서로가 용납한다(七大相容)

때문에 하나로 나타나도 여래장성이고 한량없는 차별로 나타남도 여래장성이며, 작게 나타남도 여래장성이고, 크게 나타남도 여래장성이며, 보리도량도 여래장성이며, 세계도 여래장성이며, 몸의 모습도 여래장성이며, 허공도 여래장성이며, 털끝도 여래장성이며, 보왕찰도 여래장성이며, 미진도 여래장성이며, 법륜을 굴림도 여래장성일 뿐이다.

하나로 나타난다 해서 그 하나가 작지도 않고, 한량없는 차별로 나타난다 해도 그 차별이 많은 것도 아니다. 미진 속에 앉는다 해도 협소하질 않고 시방세계에 두루한다 해도 시방이 광대하지도 않다.

이는 무엇 때문인가. 이 모두는 여래는 미진이 실제의 미진이 아님을 깨달아 소멸이 없는 데서 소멸을 설명하고 미진과 본각이 하나의 이치임을 깨달아 합할 곳 없는데서 합함을 이야기 하여 자성진여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하나ㆍ많음ㆍ작음ㆍ큼으로부터 내지는 신심ㆍ세계ㆍ보왕찰ㆍ미진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는 나의 묘각명성의 모습 아님이 없다. 전체의 체별상이 바로 여래장성의 발현이다. 그 때문에 원융무애 할 수 있는 것이다.

[要義] 여기에서는 미오의 측면에서 여래장성과 차별상을 논변하였다. 부루나는 “여래장성이 이미 청정본연하고 원융무애하여 서로가 능멸하지 않는다면 지금 세간에선 현재 서로가 능멸하고 장애하는 모습이 보이데 이는 무엇 때문이겠는가”라고 의심할까봐 부처님은 염려하였다. 때문에 부처님이 그 의심의 싹이 트기 이전에 먼저 말씀한신 것이다.

여기선 이사무애를 결론짓고, 아울러 사사무애(事事無碍)까지를 동시에 나타냈는데 뒷부분에 여래가 원융무애한 이유를 말씀하신 부분이 사사무애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