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능엄경(楞嚴經)

능엄경 강의 13 / 송찬우 교수

通達無我法者 2007. 11. 28. 10:57
 
 
   
능엄경 강의 13  
 
◈ 四會十八界

《初會眼識界

◈ 4. 십팔계(十八界)를 여래장성으로 융합하다.
《1. 안식계(眼識界)를 여래장성으로 융합하다.

復次阿難. 云何十八界本如來藏妙眞如性. 阿難. 如汝所明眼色爲緣生於眼識. 此識爲復因眼所生以眼爲界. 因色所生以色爲界. 阿難. 若因眼生旣無色空無可分別. 縱有汝識欲將何用. 汝見又非靑黃赤白. 無所表示. 從何立界. 若因色生空無色時汝識應滅云何識知是虛空性. 若色變時汝亦識其色相遷變. 汝識不遷界從何立.(若) 從(色) 變則(護亦) 變界相自無. 不變則恒. 旣從色生應不識知虛空所在. 若兼二種眼色共生. 合則中離. 離則兩合. 體性雜亂云何成界. 是故當知眼色爲緣生眼識界三處都無. 則眼與色及色界三. 本非因緣非自然性


다음으로 아난아. 무엇 때문에 십팔계의 근본을 여래장성이라고 하겠느냐.

아난아. 네가 앞에서 이미 밝혔던 것처럼 안근처와 색진처가 서로 동시적인 인연관계를 이루어 그 중간에서 안식을 일으켜 세 종류의 한계를 이룬다.

이같은 안식계를 안으로 안근계로 인해서 일어나 그 안근으로써 한계를 삼겠느냐. 밖으로 색진계를 의지해 일어나 색진계를 안식계가 일어난 한계로 삼겠느냐.

아난아. 가령 이 안식계가 단순히 안근계로 인해서 일어나 그 안근을 안식의 한계로 삼는다면 이는 이미 밖으로 색과 공이라는 색진계가 없어 안식이 있다 해도 분별할 대상 사물이 없다. 그렇다면 설사 너에게 안식이 있다한 들 그것을 무엇에 쓰겠느냐. 또 너의 안근도 청황적백의 색진 아니면 안근청정색을 표시할 수 없는데, 즉 안근마저도 없는데 무엇으로부터 안식계를 수립하겠느냐.

가령 이 안식이 색진만을 의지해 일어난다면 허공의 모습이 나타나 색업이 없을 땐 색에서 일어난 너의 안식은 이미 색법을 따라 소멸하였는데 어떻게 그것이 허공의 성질임을 알겠느냐.

또 색진이 변화할 때도 너의 안식은 역시 그 색진이 천류 변화하는 모습을 안다면 너의 안식은 색진의 모습을 따라 천류하지 않으므로 안식을 일으키는 상대적 한계의 모습은 자연히 없어진다. 그런데도 안식계가 무엇으로부터 성립하겠느냐.

가령 색법이 변화할 때 안식 역시 따라서 변화한다면 안식과 색법은 동시에 변화하면서 소멸하므로 안식계의 모습은 자연히 없어질 것이며, 또 안식과 색법이 동시에 변화하지 않는다면 인식과 색법은 항구하게 존재하게 된다.

이 경우 안식은 색법으로부터 일어나 색법과 같이 지각작용이 없으므로 허공의 소재처를 분별하지 못해야만 한다. 이미 허공의 소재를 모른다면 다시 어떻게 색법의 소재처를 알랴.

이처럼 색법의 소재를 모른다면 안식계를 다시 무엇으로부터 수립하랴.

가령 다시 안근과 색진, 이 둘에서 어느 한쪽만으로는 안식이 일어나지 못하므로 반드시 이 두 종류를 겸하여 안근과 색진이 하나의 자체로 합해야만 이 둘의 공동으로 안식을 일으킨다 하자.

이처럼 둘을 하나의 사물로 합하여 안식이 일어난다면 그 둘 중간 접점은 분리하여 한 쪽에 있는데 그 가운데서 어떻게 안식이 일어나겠으며, 분리하면 양쪽을 합하여 반은 분리하고 반은 합하여, 앎이 있는 안근이 앎이 없는 색진과 잡다하게 섞여 혼란하데, 어떻게 그 사이에서 안식계가 성립하겠느냐.

그러므로 알라. 안근과 색진이 상호인연관계로 안식계가 일어난다. 그렇다면 안근?안식?색진 이 세처소 어디에도 안식계는 없으며, 단지 안근과 색진과 안식계 이 셋은 그 근본을 추구하면 인연성도 자연성도 아닌 여래장청정성에게 일어난 허망일 뿐이다.


[要義]
여기부터서 십팔계를 융합하고 있다. 육근과 육진이 화합하여 육식이 그 가운데서 일어난다. 그 때문에 육근과 육진에 나아가서 육진은 실체가 없음을 논변하고 있다.

중론송(中論頌)에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諸法不自生
제법은 자체에서 일어나지 않고


亦不從他生
역시 대상에서 일어나지 않으며,


不共不無因
공동으로 또는 원인없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是故說無生
이를 무생성공이라고 한다.”

육근에서 일어남을 자생(自生), 육진에서 일어남을 타생(他生), 육근과 육진이 합해서 일어남을 공생(共生), 허공에서 일어남을 무인생(無因生)이라고 한다.

《二會耳識界
《2. 이식계(耳識界)를 여래장성으로 융합하다.

阿難. 又汝所明耳聲爲緣生於耳識. 此識爲復因耳所生以耳爲界. 因聲所生以聲爲界. 阿難. 若因耳生. 動靜二相旣不現前根不成知. 必無所知.(旣無所知之境亦無能知之根) 知尙無成識何形貌.(知根尙且無成所生之識作何形貌) 若取耳聞. 無動靜故聞無所成.(聞性尙且無成) 云何耳形雜色觸塵名爲識界.(旣無動靜又無耳根) 則耳識界復從誰立. 若生於聲. 識因聲有則不關聞. 無聞則亡聲相所在. 識從聲生(若此識果從聲生) 許聲因聞而有聲相(是則識已被聞) 聞應間識(不是聞聲矣) 不聞非界. 聞則同聲. 識已被聞誰知聞識. 若無知者終如草木. 不應聲聞雜成中界.(根塵旣雜則中界不成) 界無中位則內外相復從何成. 是故當知耳聲爲緣生耳識界三處都無. 則耳與聲又聲界三. 本非因緣非自然性


아난아, 네가 평소에 밝힌대로 이근과 성진이 상호인연이 되어 이식이 일어난다 한다. 이같은 이식은 이근으로 인해 일어나므로 이근으로써 이식이 일어나는 한계를 삼겠느냐. 소리로 인해 일어나므로 성진으로써 이식이 일어나는 한계를 삼겠느냐.

아난아, 단지 이근만의 인연으로 이식이 일어난다면 소리의 진동과 소리의 고요라는 두 성진의 모습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 이근은 소리를 알 수 없다.

이처럼 소리를 알 수 없다면 그 소리를 아는 이근도 성립할 수 없다. 만일 그렇다면 밖으로는 알 성진이 없고, 안으로는 그 소리를 아는 주체인 이근이 없어 이근과 성진도 성립할 수 없는데 이근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이식이 어디로부터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겠느냐.

가령 청정색으로 이루어진 이근이 아닌 고기 덩어리는 귓구멍이 소리를 듣고
그곳에서 이식이 일어난다면 소리의 진동과 고요가 없기 때문에 그 귓구멍은 소리를 듣는 작용이 성립할 수 없다. 귓구멍의 형체는 우리의 육진과 하나로 뒤섞였으므로 이는 신근(身根)에 소속하므로 그 신근이 아는 것은 성진이 아닌 촉진(觸塵)이다. 이는 신식계(身識界)일 뿐인데, 그런데도 어떻게 이를 이식계(耳識界)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렇다면 이식계는 다시 무엇으로부터 성립하겠느냐.

가령 이식이 단순히 성진에서만 일어난다면 이식은 성진으로 인해서 있게 된다. 그렇다면 소리를 아는 이근과는 상관이 없게 되며, 이처럼 소리를 아는 이근이 없다면 상대적으로 성진의 소재마저 없게 된다.

가령 이식이 성진으로부터 일어남을 인정한다면 역시 소리가 듣는 이근으로 인해서 소리의 모습, 즉 진동과 고요한 두 모습이 있다는 것까지도 인정해야만 한다.

이럴 경우 이식과 성진은 하나의 자체를 이루므로 이근은 소리와 하나의 자체를 이룬 이식까지도 들어야만 하며, 성진과 함께 이식까지를 듣지 못한다면 그 성진은 이식을 일으키는 한계가 아님이 분명해진다.

이근이 이식까지 들을 수 있다면 이식은 아무런 지각작용이 없는 성진과 동일하게 된다. 이식이 이미 분별지각이 없이 성진과 함께 이근에 들리는 대상이 된다면 이는 소리를 분별하는 이식이 없는데 무엇으로부터 이식을 들을 수 있으리오.

가령 다시 이식을 아는 자가 없다면 마치 초목처럼 종신토록 아는 것이 없으리라.

이미 이근과 성진, 어느 한쪽에서 이식계가 일어나지 않음이 분명해졌다. 그렇다고 이근과 성진이 하나로 뒤섞여 그 중간에 이식계를 이루었다 해도 안된다. 즉 이근과 성진과 이식이라는 이 셋이 공생관계로 성립했다 해도 안된다. 중간의 위치인 이식계가 없다면 안으로 이근과 밖으로 성진의 모습이 무엇으로부터 성립하랴.

그러므로 알라. 이근과 성진이 상호인연관계를 이루어 이식계가 일어난다 하는데 이 세 곳은 도무지 따로 실재하는 모습이 없어 이근과 성진과 이식계 이 셋은 그 근본을 추구하면 인연성도 자연성도 아닌 여래장청정심에서 일어난 망상일 뿐이다.

《三會鼻識界
《3. 비식계(鼻識界)를 여래장성으로 융합하다.

阿難. 又汝所明鼻香爲緣生於鼻識. 此識爲復因鼻所生以鼻爲界. 因香所生以香爲界. 阿難. 若因鼻生則汝心中以何爲鼻. 爲取肉形雙爪之相. 爲取?知動搖之性. 若取肉形. 肉質乃身身知卽觸. 名身非鼻名觸卽塵.(觸卽身塵不名鼻識) 鼻尙無名. 云何立界. 若取?知.(若以知性爲鼻) 又汝心中以何爲知. 以肉爲知. 則肉之知元觸非鼻. 以空爲知. 空則自知肉應非覺. 如是則應虛空是汝汝身非知. 今日阿難應無所在.(知性尙無將何爲鼻鼻根尙無又從何而生識耶) 以香爲知. 知自屬香何預於汝. 若香臭氣必生汝鼻. 則彼香臭二種流氣不生伊蘭及?檀木. 二物不來汝自?鼻爲香爲臭. 臭則非香. 香應非臭. 若香臭二俱能聞者則汝一人應有兩鼻. 對我問道有二阿難. 誰爲汝體. 若鼻是一香臭無二. 臭旣爲香香復成臭. 二性不有(香尙無體) 界從誰立. 若因香生. 識因香有(香卽是識) 如眼有見不能觀眼. 因香有故應不知香. 知卽非生. 不知非識.(若不知香卽非鼻識) 香非知有香界不成. 識不知香因界則非從香建立. 旣無中間(之識) 不成內外.(根境) 彼諸聞性畢竟虛妄. 是故當知鼻香爲緣生鼻識界三處都無. 則鼻與香及香界三. 本非因緣非自然性


아난아, 네가 평소에 밝힌 대로 비근과 향진이 상호인연관계를 이루어 비식이 일어난다고 한다. 이같은 비식은 비근으로부터 일어나 비근을 비식이 일어난
한계로 하겠느냐. 아니면 향진으로부터 일어나 향진으로써 비식이 일어난 한계를 삼겠느냐.

아난아, 가령 비식이 비근에서 일어나 비근이 비식계가 일어난 한계라면 너의 마음 가운데서 무엇을 비근이라고 하느냐. 한 쌍의 손톱모습처럼 생긴 고기덩어리 코의 형태를 비근이라 하느냐. 아니면 냄새를 맡고 호흡으로 요동하는 청정색근을 비근이라 하느냐.

가령 부근진(扶根塵)인 코의 형체를 비근이라 한다면 고기 덩어리 콧구멍은 신근(身根)에 소속하며, 또 신근으로 아는 대상은 촉진이지 향진은 아니다.

콧구멍은 이미 비근이 아닌 신근에 소속한다면 이는 청정색근으로서의 비근은 아니며, 이미 향진이 아닌 촉진이라 했다면 비근과 향진이라는 명칭도 성립하지 않는데 그 가운데서 어떻게 비식계가 성립할 수 있으랴.

또 냄새를 아는 청정색근을 비근이라고 한다면 너의 마음 가운데서 무엇을 냄새를 앎이라고 하겠느냐.

가령 살코기 콧구멍으로 안다하면 육진인 코가 아는 것은 원래 신근 촉진에 소속하므로 비근 향진은 아니므로 촉진을 아는 마음은 신근에 소속할지언정 비근과는 무관하다.

또 코에 뚫린 구멍이 안다면 그 구멍 자체에 아는 마음이 있게 되나 그러나 육진이 콧구멍은 지각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

콧구멍 살코기가 냄새를 안다면 이럴 경우 너의 콧구멍은 이미 허공과 같이 지각이 있질 않으므로 오늘 아난의 몸 역시 허공처럼 소재처가 없으리라.

다시 가령 향진에서 냄새를 아는 마음이 일어난다고 한다면 냄새를 아는 마음은 향진에 소속하여 스스로가 냄새를 아는데 무엇 때문에 너의 비근이 냄새를 아는 것에 관여하랴.

가령 향과 그 냄새라는 두 종류 흐르는 기운이 이란향과 전단향목에서 일어나질 않고 청정색근으로 이루어진 너의 비근에서 일어난다 해야 하리니,

향과 그 냄새가 흘러오지 않은 상태에서 너는 너의 비근에서 냄새를 맡아보라. 그것은 향진이더냐. 그곳에서 나는 냄새를 앎이더냐.

가령 비근이 냄새를 아는 자체 향진을 모를 것이며, 그것이 향진이라면 냄새를 몰라야만 하며,

또 향진과 냄새를 아는 이 둘을 너의 비근이 동시에 알 수 있다면 너 한 사람에게 한쪽으론 향진을 알고 한쪽으로는 냄새를 아는 두 개의 비근이 있어야만 하리라.

만일 이와 같다면 나를 마주하고 질문하는 데 있어서도 두 사람의 아난이 있어야만 하는데, 그 둘 가운데서 누가 너의 진실한 몸이겠느냐.

가령 비근이 하나라면 향진과 그 냄새에 있어서 단정코 둘이 있을 수 없으며,

가령 냄새가 이미 향진이라면 그곳에서 일어난 냄새가 향진과 단정적인 하나이므로 이는 냄새에 자성이 없게 되며,

만일 향진이 다시 냄새를 이룬다면 향진과 냄새가 단정적인 하나이므로 이는 향진의 자성이 없어, 즉 이 둘의 성질이 있질 않아 너의 비근도 자성이 없는 무용지물이 되리니, 비식계가 어디로부터 성립하겠느냐. 그렇다면 청정식으로 이루어진 비근이 비근을 일으키는 한계라는 논리도 성립하질 않는다.

가령 비식이 향진으로 인해 일어나 그 향진을 비식을 일으키는 한계라고 한다면 비식은 향진으로 인해 있으므로 이는 마치 안근이 대상을 바라볼 때 자체의 안근은 보지 못하듯, 비식이 향진으로 인해있었기 때문에 향진 그 자체를 몰라야만 하며, 만일 향진을 안다면 그것은 향진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며, 향진을 모른다면 향진을 아는 비식은 아니다.

향진은 그 냄새를 아는 것으로 인해 있지 않다면 향진계가 성립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향진은 반드시 그것을 분별하는 비식을 따라 발견하기 때문이다.

또 비식이 향진을 모든 상태에서 비식으로 인해 자체적으로 비식계가 성립한다면 이는 향진으로부터 건립한 것이 아니다. 이와 같다면 비식과 그 일어난 한계마저 없어져 그 허물이 무궁하다.

이미 비근과 향진, 이 둘 중간에 비식계가 없다면 공생(共生)관계로서 안으로 비근과 박으로 향진이 성립할 수 없어 모든 냄새를 맡는 성질이 끝내 허망하리라.

그러므로 알라. 비근과 향진이 상호인연관계를 이루어 비시계가 일어난다는 것을 이 세 처소는 도무지 실재하는 따로의 모습이 없어 비근과 향진과비식계, 이 셋은 그 근본을 추구해 보면 인연성도 자연성도 아닌 여래장청정심에서 일어난 망상일 뿐이다.


[要義]
식계(識界)를 모두 근진(根塵)의 편에서 논변하였으나 유독 이 비식계만은 냄새를 아는 마음까지 논변하였다. 그것은 왜냐하면 코의 형체와 냄새를 아는 성질까지 그것은 실체가 없음을 쌍으로 논변하였기 때문이다.

《四會舌識界
《4. 설식계(舌識界)를 여래장성과 융합하다.

阿難. 又汝所明舌味爲緣生於舌識. 此識爲復因舌所生以舌爲界. 因味所生以味爲界. 阿難. 若因舌生. 則諸世間甘蔗鳥梅黃連石鹽細辛薑桂都無有味. 汝自嘗舌爲甛爲苦. 若舌性苦誰來嘗舌. 舌不自嘗執爲知覺. 舌性非苦. 味自不生. 云何立界. 若因味生. 識自爲味. 同於舌根應不自嘗. 云何識知是味非味. 又一切味非一物生. 味旣多生識應多體. 識體若一體必味生. 鹹淡甘辛和合俱生諸變異相同爲一味應無分別. 分別旣無則不名識. 云何復名舌味識界. 不應虛空生汝心識. 舌味和合(根塵共生) 卽於是中元無自性云何界生. 是故當知舌味爲緣生舌識界三處都無. 則舌與味及舌界三. 本非因緣非自然性


아난아, 또 네가 평소에 밝힌 대로 설근과 미진(味塵)이 상호 인연관계를 이루어 설식이 일어난다고 한다.

이같은 설식은 설근으로 인해 일어나 그 설근을 설식이 일어나는 한계로 삼겠느냐. 미진으로 인해 일어나 그 미진을 설식이 일어난 한계로 삼겠느냐.

아난아, 가령 설근으로 인해 설식이 일어난다면 이는 외부의 미진을 빌리지 않고 설근 자체가 맛을 명료하게 분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간에 모든 자체 맛을 지닌 감자의 단맛과 모매(烏梅)의 신맛과 황연(黃連)의 쓴맛과 소금의 짠맛과 세신(細辛)ㆍ생강ㆍ계피의 매운 맛은 도무지 없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모든 맛이 설근에 있기 때문이다.

너는 너의 설근을 맛보라. 그 설근이 달더냐. 쓰더냐.

가령 설근의 성질이 쓰다면 너의 설근이 이미 쓴 맛을 이루었는데 무슨 맛이 찾아와 너의 설근에서 쓴 맛을 알랴.

설근 스스로가 그 설근을 맛보지 않는데 무엇이 그 설근은 쓴 맛을 이루었음을 알겠느냐.

또 설근의 성질이 쓴 맛이 아니라면 맛은 설근자체에서 일어나지 않는데 어떻게 설근에서 설식을 일으키는 한계를 수립할 수 있으랴.

가령 설식이 미진의 인연으로 일어나 안으로 설근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설식 자체가 맛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설식이 이미 미진으로 인해 일어났다면 설식 그 자체가 바로 미진이다. 이와 같다면 맛이 맛 그 자체의 맛을 보지 못하게 되어 이도 역시, 설근이 그 설근의 맛을 보지 못하는 것과 동일하게 된다. 그런데 어떻게 설식이 맛이 있고 없는 것을 분별해 알 수 있으랴.

또 일체의 맛은 한 물건에서 나오지 않는다. 맛을 일으키는 주체가 이미 다양하게 많은 물질에서 나오므로 거기에서 일어나는 설식 분별심도 많은 자체를 이루어야만 하며, 가령 설식 자체는 하나이고 또 그 식 자체는 반드시 맛으로 인해 일어난다 한다면 이미 그 맛에서 일어난 설식이 하나이므로 설식을 일으키는 미진도 하나여야만 된다.

이와 같다면 짜고 싱겁고 달고 매운 맛이 여러 가지 맛과 화합하여 공동으로 이루는 맛과 자체가 생길 때 원래 지니고 온 변함없음과 또는 태우거나 지짐으로 해서 특이하게 변이한 이 모든 맛들이 동일한 한가지 맛이어서 그곳엔 각자 다른 맛의 구별이 전혀 있을 수 없어야만 한다.

식이라는 명칭은 대상을 분별하는 성질 때문에 붙여졌는데, 이처럼 모든 맛에 대한 분별이 이미 없다면 그것은 더 이상 식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맛을 보고 분별하는 설식계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이처럼 설식은 설근에서도 미진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원인없이 허공에서 너의 설식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또 설근과 미진, 그 어느 한쪽만으로는 설식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설근과 미진이 화합해야만 이 둘이 그 중간에서 공동으로 설식을 일으킨다 하자.

그러나 이같은 화합에서도 설식을 일으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설근과 미진은 각자 따로 구별되어 하나로 화합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 둘은 원래 자체의 성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설근과 미진이 화합한데서 설식계가 일어나느냐.

그러므로 알라. 설근과 미진이 인연관계를 이루어 설식계를 일으키는데 이 세 곳은 도무지 실체가 없다는 것. 그렇다면 설근과 미진과 설식계 셋 곳은 근본을 추구하면 인연성도 자연성도 아닌 여래장청정심에 일어난 망상일 뿐이다.

《五會身識界

《5. 신식계(身識界)를 여래장성으로 융합하다.

阿難. 又汝所明身觸爲緣生於身識. 此識爲復因身所生以身爲界. 因觸所生以觸爲界. 阿難. 若因身生. 必無合離二覺觀緣身何所識. 若因觸生. 必無汝身誰有非身和合離者. 阿難. 物不觸知.(物不因觸而有知) 身知有觸.(身因有知而卽有觸) 知身卽觸(身知卽因觸而顯) 知觸卽身.(知觸卽因身而顯是則身觸不相離也) 卽觸非身(若卽觸則非身矣) 卽身非觸.(若卽身則非觸矣) 身觸二相元無處所. 合身卽爲身自體性.(觸若合身卽爲身自體而至觸矣) 離身卽是虛空等相.(觸若離身卽是虛空) 內外不成中云何立. 中不復立內外性空. 則汝識生從誰立界. 是故當知身觸爲緣生身識界三處都無. 則身與燭及身界三. 本非因緣非自然性


아난아, 또 네가 평소에 밝힌 대로 신근과 촉진이 상호 인연관계로 신식이
일어난다. 이 신식은 신근으로 인해 일어나 신근을 신식이 일어나는 한계로 삼겠느냐. 촉진을 신식이 일어나는 한계로 삼겠느냐.

아난아, 이 신식이 신식만을 인연해서 일어난다면 반드시 신근이 촉진과 합함과 서로 분리하는 이 둘에 있어서 지각하는 신근과 지각 대상인 촉진, 이 둘의 상대적 관계가 없으리니, 만일 이와 같다면 설사 촉진이 있다 한들 신근이 무엇을 식별하겠느냐.

가령 신식이 촉진으로 인해서 일어난다면 사물은 스스로 감촉하지 않고 역시 지각작용도 없다. 그것은 신근의 앎이 있어야만 촉진이 있다는 것을 지각하는데 지금은 신식이 그 촉진에서 일어났으므로 촉진을 아는 너의 신근은 필연적으로 없으리니, 그렇다면 모든 세간 가운데서 무엇이 있어 신근이 없는 상태에서 신근과 촉진의 화합과 분리를 알겠느냐.

아난아, 모든 사물은 그 자체가 감촉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신근으로 알아야만 그 촉진이 나타나므로 촉진을 아는 것은 신근이다.

그런데도 아는 신근이 대상 촉진에 있다면 그 아는 촉진이 바로 신근이 된다.

이처럼 아는 신근이 촉진에 있으면 그것은 신근이 아니며, 신근에 있다면 촉진에 있지를 않게 되어, 안으로 신근과 밖으로 촉진이라는 두 모습이 원래 두 처소가 없게 된다.

가령 그 아는 작용이 촉진을 떠나 신근으로 합했다면 그 아는 작용은 신근의 자체 성질이므로 촉진은 아니며, 그 아는 작용이 신근을 떠났다면 지각없는 허공과 같은 모습이므로 신근이 아니다.

이럴 경우 안으로 신근과 밖으로 촉진의 상관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데 그 중간의 신식이 어떻게 성립하겠느냐.

중간이 성립하지 않으면 안으로 신근과 밖으로 촉진의 성질이 동시에 공적한데, 너의 신식이 일어난다 한들 무엇으로부터 신식계를 성립하겠느냐.

그러므로 알라. 신근과 촉진이 인연하여 신식계가 일어난다 하는데 이 셋의 처소는 도무지 실체가 없어 신근과 촉진과 신식계의 세 근본을 추구하면 인연성도 자연성도 아닌 여래장청정에서 일어난 망상일 뿐이다.

《六會意識界
《6. 의식계(意識界)를 여래장과 융합하다.

阿難. 又汝所明意法爲緣生於意識. 此識爲復因意所生以意爲界. 因法所生以法爲界. 阿難. 若因意生. 於汝意中必有所思發明汝意. 若無前法意無所生. 離緣無形識將何用. 又汝識心與諸思量兼了別性爲同爲異. 同意卽意云何所生. 異意不同應無所識. 若無所識云何意生. 若有所識云何識意. 唯同與異二性無成界云何立. 若因法生. 世間諸法不離五塵. 汝觀色法及諸聲法香法味法及與觸法. 相狀分明. 以對五根. 非意所攝. 汝識決定依於法生. 今汝諦觀法法何狀. 若離色空動靜通塞合離生滅. 越此諸相終無所得. 生則色空諸法等生. 滅則色空諸法等滅. 所因旣無. 因生有識作何形相. 相狀不有界云何生. 是故當知意法爲緣生意識界三處都無則意與法及意界三. 本非因緣非自然性


아난아, 또 네가 평소에 밝힌 대로 의근과 법진이 상호인연관계를 이루어 의식이 일어난다. 이 의식은 의근으로 인해 일어나 그 법진을 의식이 일어난 한계로 삼겠느냐.

아난아, 만일 의근만으로 인해 의식이 일어난다면 너의 의근 가운데서 반드시 법진을 분별 조작한 뒤에 너의 의근이 분명하게 일어난다.

이와 같다면 법진이 있어야만 의근이 존재하게 되는데. 가령 앞에서 이미 분별 조작했던 법진이 없다면 의근 역시 일어남이 없어, 법진이 없으면 의근 역시 따로 없게 된다.

이처럼 인식대상인 법진을 떠나면 의근 역시 일어나는 형상이 없는데 이럴 경우 의근이 설사 의식계를 일으킨다 해도 분별할 법진이 없는데 무슨 소용이 있으랴.

또 너의 의식심과 모두를 사량하고 함께 명료하게 분별하는 성질인 이 둘은 동일하겠느냐. 다르겠느냐. 가령 의식심이 의근과 동일하다면 그것은 바로 의근일 뿐인데 어떻게 그곳에서 의식심이 일어나겠으며, 가령 의식심이 의근과 다르다면 사량하는 의근과는 동일하지 않은 무정물이므로 명료한 식별이 일어날 수가 없으며, 가령 명료한 식별이 없다면 이는 의근과 동류가 아닌데 어떻게 의근에서 일어난 육식심이라고 하겠으며, 가령 명료한 식별이 있다면 육식심과 의근은 모두 명료한 식별로써 자체 성질을 삼는데 어떻게 육식심이 의근을 의지해서 일어난다 하겠느냐.

동일함과 서로 다른 의근?육식심의 두 성질이 성립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육식심이 명료하게 분별하는 작용이 있다하면 이 의식계를 어떻게 의근으로써 성립할 수 있겠느냐.

가령 의식이 인식대상인 법진으로 인해 일어난다면 세간의 모든 사물들은 색성향미촉이라는 오진(五塵)을 떠나지 않는다. 너는 색법과 성법과 향법과 미법과 촉법을 관찰해 보라. 그 꼴들은 목전에서 분명하여 안으로 오근을 마주할 지언정 의근에 하나로 포섭되지 않는다.

너의 제6의식이 결정코 오진이 현재하는 법을 의지해서 일어난다면 너는 지금 자세하게 관찰해 보라. 그 오진법마다가 어떤 꼴인지를.

이들 법진이 가령 눈에 보이는 색공과 귀에 들리는 소리의 동정과 코로 냄새를 맡는 소통하고 막힘과 설근과 신근으로 감촉하는 화합이나 분리와 의근으로 인식하는 생멸하는 그림자. 즉 낙사영자를 떠나 이상의 모든 모습들을 제외하면 끝내 법진의 형상은 얻을 수가 없다.

혹시 이들 가운데서 생멸하는 모습이 법진의 형상이 아니겠느냐 라고 한다면 이 법진이 일어날 때 그들 색공 등 오진법을 따라서 법진의 그림자가 의근 속에 떠오를지언정 법진에 실재하는 형상이 있어서 일어난 것은 아니며, 법진이 사라질 땐 색공등 모든 오진법도 소멸한다.

의근이 인식할 법진이 이미 실재하는 형상이 없는데 법진으로 인해 제6의식이 일어난다 하면 그것을 어떤 모습으로 형상하겠느냐. 이미 실재하는 법진의 형상이 있지 않은데 의식계가 어떻게 그 법진으로 인해 일어나겠느냐.

그러므로 알라. 의근과 법진이 상호인연하여 의식계가 일어난다 하는데 이 세곳은 모두 실재하는 형상이 없다. 그렇다면 의근과 법진과 의식계 이 셋의 근본을 추구한다면 인연성도 자연성도 아닌 여래장청정심에서 일어난 망상일 뿐이다.


[要義]
제1권에서 아난이 묘사마다 법문을 청한 이대로 여기에 이르기까지, 처음엔 망상을 논파하여 진심을 드러냈고, 다음으론 망상을 융합하여 진심으로 귀결하여 나타낸 이치가 얕은 데에서 심오한 곳에 이르러 부처님 네 번의 시기에 설한 가르침을 총괄하였다.

즉 처음엔 마음을 따져 보는 마음을 논변하여 신견(身見)을 타파하였는데 이는 아함경의 의미에 해당하고,

다음으론 견분식정(見分識精)을 타파하였는데 이는 방등교의 의미이며,

다음으론 오온삼과(五蘊三科)를 여래장성으로 회귀하여 육근ㆍ육진ㆍ육식 십팔계가 본래 공적하다 함은 이는 반야교의 의미이며,

그 근본은 여래장묘진여성이라 함은 모든 법마다가 전체로 진여여서 이는 법화실상 종교로 융통하여 귀결시켰다.

가령 다음의 문장에서 나오는 칠대(七大)가 낱낱이 원융하여 법계에 두로 보편함은 이상의 모두를 화엄경의 이사무애법계(二事無碍法界)로 귀결함으로써. 삼제(三諦)가 원융한 공여래장성을 총체적으로 나타내 이를 공관(空觀)의 실체로 삼은 것이다. 이는 이른바 만법을 융합하여 여래의 묘장엄해로 귀결시킨 것이다.

이상으로 삼과법문을 여래장성으로 융합하여 즉사즉리(卽事卽理)를 나타내는 일은 모두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