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능엄경(楞嚴經)

능엄경 강의 19 / 송찬우 교수

通達無我法者 2007. 11. 28. 11:21

 

능엄경 강의 19
 
 
 
《三示觀行之因分三   ◎初明因眞果正 
阿難. 汝令欲令見聞覺知遠契如來常樂我淨. 應當先擇死生根本. 依不生滅圓湛性成. 以湛旋其虛妄滅生伏還元覺. 得元明覺無生滅性爲因地心. 然後圓成果地修證

《 3. 인지(因地)의 수행관찰을 셋으로 보이다.

● 1. 수행인지가 올바라야 깨달음의 관보도 바름을 보이다. 
  아난아, 네가 지금 현재 갖추고 있는 일상적인 견문각지(見聞覺知)의 네 성품을 멀리 여래의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사덕(四德)에 일치하게 하려면 생사근본인 다섯 겹의 혼탁한 모습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서 버려야만 한다.
  그런 뒤에 불생불멸하고 원만담적한 상주진성을 의지하여 본성을 따라 수행을 일으키고 다시 그 본성을 수행해야만[性修不二] 공부가 성취가 될 수 있으리라.
  이미 담연하기만 성품을 자체로 의지하면 바로 담연한 성품이 작용하여 허망한 육근ㆍ육진을 도리켜 진실한 자성으로 전환되고, 오음생멸을 조복받고 제거하면 일진각원(一眞覺元)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리하여 생멸이 끊긴 본래 있는 묘명진각(妙明眞覺) 상주진심(常住眞心)을 수행인지의 마음으로 삼게 된다.
  여기에 이르러야 비로소 십신만심(十信滿心)으로 진입하며, 그 뒤 십주초위(十住初位)로부터서 등각(等覺)에 이르기까지 과지(果地)의 수행을 원만하게 성취하고, 곧장 묘각(妙覺)에 당도하여 과지의 실제 증오를 부족함 없이 성취하리라.
  이것이 인심(因心)과 과각(果覺)이 명목이 서로 호응하고 발심과 구경각이 끝내 둘이 아니다.

[要義] 여기서는 탁한 모습을 맑히고 청결함으로 되돌아감을 밝혀 선정을 닦는 공부를 보였다.
  혼탁의 모습인 사대ㆍ오온ㆍ육근ㆍ육진ㆍ육식을 그 자체의 모습만으로 말한다면 탁한 물 아님이 없으나 본성의 측면에 논변한다면 모두가 여래장성이어서 탁수 가운데 청수의 성질 아님이 없다.
  지금 여래께선 앞으로 아난이 이근(耳根)에 나아가서 수행케 하려함도 탁수 가운데 청수의 성질을 맑히려는 것에 불과하다.

● 二喩斷惑淺深分二   ▩ 初喩漸斷 如澄濁水貯於淨器. 靜深不動沙土自沈. 淸水現前名爲初伏客塵煩惱

● 2. 비유를 들어 미혹을 끊는 심천을 두 분야로 나누다.

  ▩ 1. 점진적으로 끊음을 비유하다. 
  이는 마치 탁한 물을 청정한 그릇에 담아 오랫 동안 움직이지 않고 고요하면 모래와 흙이 가라 앉아 맑은 물이 나타남을 최초로 객진번뇌(客塵煩惱)를 조복 받음이라고 한다.[要義] 여기에서는 위에서 말했던 “원만하고 담적한 마음으로 망상을 도리키는 수행공부에 비유하였다.” 앞에서 “흙을 던졌다”함은 혼탁한 모습에 비유하였는데 지금도 거듭 탁한 물을 맑혀 청수를 만드는 것으로써 수행과 증오하는 모습을 비유하였다. “탁한 물”은 다섯 겹의 혼탁한 모습에 “청정한 그릇”은 “육근이 원만하게 함의 이치를 통하는 성품”에 비유하였으며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고 고요하다”함은 선정력이 견고함에 “모래와 흙이 가라앉는다.”함은 명탁을 제외한 나머지 네 겹의 혼탁상이 다시 서로 얽히지 않고 오주지번뇌(五住地煩惱)를 조복 받아 견사혹(見思惑)의 거친 번뇌가 임으로 운행하면서 먼저 떨어져 나가는 데 비유하였고, “맑은 물이 나타난다.”함은 담연하고 원만한 본체인 묘각명심의 진견도위(眞見道位)가 환하게 나타나는 데 비유하였고, “여기에 이르면 객진번뇌를 최초로 조복받음이라 한다.”함은 앞서의 모래와 흙이 최초로 가라 앉았을 땐 진흙이 앙금의 상태로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인데, 이는 색ㆍ수ㆍ상ㆍ행 사음을 타파하여 삼계내견사혹(三界內見思惑)은 끊었으나 삼계 밖에 근본무명[界外無明]인 식음의 뿌리는 조복만 했을 뿐 아직 끊지 못한 데에 비유하였다. 이상은 모두 탁한 물을 맑히는 공부를 비유하였고, 다음은 맑은 물로 되돌아가는 덕용(德用)을 밝혔다.

▩ 二喩頓斷 去泥純水名爲永斷根本無明

▩ 2. 단박 끊음을 비유하다.   가라앉은 진흙마저 제거하고 순수한 물만의 상태를 근본무명을 영원히 끊음이라고 한다.

● 三結眞窮惑盡 明相精純. 一切變現不爲煩惱. 皆合涅槃淸淨妙德

● 3. 진심을 끝까지 추궁하면 미혹도 끝까지 다함을 결론짓다.   밝은 모습이 정지하고 순수하여 일체의 변화로 나타남이 번뇌의 모습이 아니어서 여래의 열반청정묘덕에 합한다.

[要義] 다섯 탁한 모습이 이미 다하고 마음의 물이 맑고 밝아 정미 순수함이 마치 일체세간 천태만상의 그림자가 바다 가운데 나타나지 않음이 없는[海印三昧] 것과 같다.
  이 경지에서는 오온오탁의 번뇌에 국한되질 않고 모든 행동거지 오묘한 본성의 작용으로 일어나 다 여래의 상락아정(常樂我淨) 청정열반 무작묘덕(無作妙德)에 합치하게 된다. 이는 마치 진흙이 다하고 물이 순수하면 물을 마음대로 휘저어도 다시는 혼탁해지지 않음과도 같다.
  이는 생멸하지 않은 마음으로 수행공부한 때문이다.

◈ 二審煩惱根本意擇圓根分六 《初?令詳審 第二義者. 汝等必欲發菩提心. 於菩薩乘生大勇猛決定棄捐諸有爲相. 應當審詳煩惱根本. 此無始來發業潤生誰作誰受. 阿難. 汝修菩提. 若不審觀煩惱根本. 則不能知虛妄根塵何處顚倒. 處尙不知云何降伏取如來位

◈ 2. 번뇌의 근본을 살펴 원근(圓根)을 선택하기를 여섯 분야로 하다.
 
《 1. 자세히 살피라고 말씀하시다. 
  두 번째 결정적 의미를 말해보자. 너희들이 반드시 보리심을 증득하리라고 발심했다면 보살승에서 대용맹심을 일으켜 지난날의 분별심을 반드시 조복 받고 다섯 가지 탁한 모든 유위생멸상을 결정코 버려야만 한다.
  그러려면 응당 번뇌와 그 근본을 자세히 살펴야만 한다. 이 번뇌의 근본은 무시이래부터 지금에 이르렀는데 무엇 때문에 발업무명(發業無明)이라 하며, 또 어떤 것을 윤생무명(潤生無明)이라 하며, 무엇이 업을 짓는 선봉이며, 누가 과보를 받는 주체인가.
  아난아, 네가 위없는 보리를 수행하여 증득하고 싶어하면서 무명번뇌의 근본을 자세히 살피지 않는다면 육근?육진의 허망한 전도의 모습이 어느 곳으로부터 있게 되었는지를 모른다.
  허망한 전도망상이 일어난 곳도 모르는데 어떻게 분별심을 항복 받고 여래장 불과위를 증득할 수 있겠느냐. 이 때문에 전도된 망상을 소멸하고자 한다면 그 전도가 일어난 곳을 알아야만 하리라.

[要義] 여기에서는 번뇌의 근본이 일어나고 소멸하는 처소를 자세히 살피라고 권하고 있다.
  “번뇌”는 업을 일으키는 발업무명(發業無明)인데 현재 활동하는 업의 작용[現行業用]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는 분별하여 좋으면 취하고 싫으면 버리는 마음을 말하며, 제육식에 속해서 일어난다.
  “근본”은 윤생무명(潤生無明)인데, 종자를 윤택케 하여 삶을 받게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증오와 애욕의 마음으로 태속으로 들어가 생명을 받는 경우이며, 이는 제팔식에 속해서 일어난다.
  그러나 육진경계를 분별하고 업을 짓는 선봉이 되어 염정업인(染淨業因)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은 업인에 의해서 과보를 받는 것을 제팔식이 의보ㆍ정보를 총괄하는 주체[總報主]이다. 왜냐하면 제팔식이 염정종자를 함장하여 산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긴 하나 자세히 추리해 보면 전칠 모두가 동시에 제팔식 자체에 소속하여 현재의 활동을 일으킨다. 이는 식 스스로 업을 짓고 식 자체에서 과보를 받는 것이 된다.

《二正指結根
阿難. 汝觀世間解結之人不見所結云何知解. 不聞虛空被汝?裂. 何以故. 空無形相無結解故. 則汝現前眼耳鼻舌及與身心六爲賊媒自劫家寶. 由此無始衆生世界生纏縛故於器世間不能超越

《 2. 육근의 속박을 바로 지적하다. 
  아난아. 네가 전도와 전도하지 않은 처소를 모른다면 세간에서 매듭을 묵는 사람과[전도된 처소] 매듭을 푸는 사람을 관찰해 바라.[전도하지 않는 처소] 그러면 스스로 분명해 지리라.[매듭을 짓고 푸는 일이 다르나 모두 한 사람이 하는 일이다.]
  매듭을 풀려면 반드시 매듭 된 처소를 보아야만 한다.
  매듭 맺힌 곳을 보지 못했다면 어떻게 매듭을 풀 처소를 알겠느냐. 전도된 육근ㆍ육진이 어느 곳에서 일어났으며, 처소도 모른다면 어떻게 번뇌를 조복 받고 여래위를 증득하랴.
  지금까지 허공이 무너지고 분열되는 일을 당했다는 말은 듣질 못했다. 이는 무엇 때문이겠는가. 허공은 본래 형상이 없고 역시 맺히거나 풀림이 없기 때문이다. [맺히고 풀림은 생멸식심에 속할 뿐 맺히고 풀림이 본래 없는 여래장성만 못하다.]
  무엇을 매듭지을 묵음이라고 하겠느냐. 바로 너의 현재 활동하는 유근을 말한다. 이 육근이 육식을 이끌어 내 육진을 흡수하여 여래장성을 혼탁하게 한다.
  이는 마치 집안사람이 도적을 중개인으로 알고 끌어들여 집안의 보배를 겁탈함과도 같다. 육근ㆍ육진ㆍ육식이 무시이래로 사대오음을 자기의 실제하는 몸과 마음으로 인식한다. 때문에 정보중생(正報衆生)이 있어 허망하게 분별을 일으키고 스스로 속박하여 원묘한 본각을 시청각찰(視聽覺察)로 나눈다.
  육근을 의지해 시청각찰을 하기 때문에 의보(依報)인 기세간에 있어서 보는 마음은 색진을 초월하지 못하고, 듣는 마음은 성진을 초월하지 못한다. 이는 육근?육진?육식 이 셋이 서로가 교대로 분간할 수 없게 빈틈없이 짜여 매듭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 셋은 원래 하나의 묘각명심에서 일어나 여래장 가운데 공덕을 손상시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집안의 도적이 집안의 보배를 겁탈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 매듭을 풀기만 하면 육근?육진이 상대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오묘한 작용이 일어나면 집안의 도적이 타파되어 집안을 지키는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要義] 여기서는 번뇌근본을 살폈다. 발업ㆍ윤생. 이 두 번뇌 때문에 생사가 있게 되었다.
  이 번뇌를 육근을 의지하여 논변하였는데 이 번뇌는 원래 실체가 없고 단지 육식망상으로 작용할 뿐이다.
  때문에 육근문두에서 육진을 분별하고 집착으로 취하는 것은 무명이 애욕과 집착의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염념이 애취(愛取)하고 처처에 탐착하면서 생사가 육근?육진 가운데 맺힌다.
  육근과 육진이 서로 맺힌 처소가 생사의 뿌리가 맺힌 처소이다. 그 매듭을 풀려고 한다면 당연히 맺힌 육근에 나아가서 풀어야 한다.

  《三顯根因妄織 
阿難. 云何名爲衆生世界. 世爲遷流. 界爲方位. 汝今當知東西南北東南西南東北西北上下爲界. 過去未來現在爲世. 方位有十. 流數有三. 一切衆生織妄相成. 身中貿遷世界相涉. 而此界性設雖十方. 定位可明世間祇目東西南北. 上下無位. 中無定方. 四數必明與世相涉. 三四四三宛轉十二. 流變三疊一十百千總括始終六根之中各各功德有千二百

  《 3. 육근은 허망한 망으로 맺힘이 근원이다. 
  아난아, 무엇을 중생 정보세계라고 하겠느냐. [세(世)는 현재 몸 가운데 있는 천류를 시간적인 측면에서 하는 말이고, 계(界)는 이 몸의 전후 좌우 상하 중간의 공간적인 의미이다.]
  너는 알라. 동서남북 사정방(四正方)과 그 사이 간방(四渴?)과 상하를 계(界)라고 하는데, 이 숫자를 합하면 공간적인 방위는 십(十)이 되며, 과거ㆍ현재ㆍ미래를 세(世)라고 하는데 시간으로 흐르는 숫자는 삼(三)이 된다.
  일체중생은 몸으로 맺은 모습이 본래 없었다. 단지 사대오온이 서로가 교대로 얽히고 설켜 허망하게 몸으로 맺은 모습을 이루었을 뿐이다.
  이미 몸에 육근ㆍ육진 등의 모습이 맺히고 나면 “세”와 “계”가 일신 가운데 있게 된다. 시간과 공간이 교대로 뒤 바뀌면서 천류하기 때문에 “세”와 “계”가 서로 교대로 섭입(涉入)된다.
  그러나 공간이 시방(十方)이긴 하나 그 가운데서는 동서남북 사방만을 취하여 정방(正方)으로 삼고 상하는 취하지 않는데 상하는 사방에 상즉한 상하여서 일정한 방위가 따로 없기 때문이며, 네 간방도 취하지 않는데, 네 간방은 사방이 교접하는 중간이라 일정한 방향이 없기 때문이다. 이 넷의 숫자는 반드시 분명하여 삼세와 교섭한다.
  이 일정한 사방 공간의 위치가 천류하는 삼세로 들어가면 사방이 각자의 방향마다 삼세라는 시간이 있으므로 4× 3=12 해서 시간ㆍ공간이 함께 12를 이룬다.
  가령 삼세가 사방으로 들어가면 삼세 각각 사방이 있어 이도 역시 12를 이룬다. 이처럼 시간ㆍ공간 어느 쪽에서 완연하게 12로 전환한다.
  천류하고 변화하기를 세 번 중첩하면 일ㆍ십ㆍ백ㆍ천으로 시와 종을 총괄하여 육근 가운데는 각자마다 공덕이 천이백이 있다. [최초 일념망념이 천류하여 일ㆍ십ㆍ백ㆍ천으로 변하였다. 우선 사방을 삼세에 섭입하여 세 번의 중첩을 밝혀보자. 제1첩은 사방은 각 방마다 삼세를 논한다. 그러면 4× 3=12가 된다. 제2첩은 도앙삼세가 1로 변하여 10이 되면 30을 이룬다. 남서북방도 이와 같아 사방이 120을 이룬다. 제3첩은 동방 30이 10이 변하여 100 되면, 300을 이루고, 나머지 세 방향도 역시 그러하여 사방이 총체적으로 1200을 이룬다. 지급 일ㆍ십ㆍ백하고 말한 것은 큰 숫자를 만들었을 뿐이다. 또 삼세가 사방으로 섭입하는 것도 이와 같다. 이것이 세와 계가 서로 들어가면서 맺히는 일정불변한 숫자이다. 이 몸에 수량을 총체적으로 해관하여 논한다면 1이 변하여 12가 되는 것을 시작으로 100이 변하여 1200으로 끝나는데 까지 한결같이 1200을 통체적으로 갖추고 있다. “공(功)”은 력(力)의 의미고 “덕(德)”은 용(用)을 말한다. 육근 가운데는 각자 서로가 교섭하고 종횡으로 얽히는 력용(力用)이 있다. 육근이 대상 육진을 명료하게 요별하는 공덕이 1200이다.
  다음에는 육근이 육진을 마주하여 요별하는 작용이 각자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 공덕이 완전하기도 하고 부족하기도 한 것을 말하였다. 이는 본성 가운데서는 육근이 서로 알지만 작용에서는 서로 위배하는 경우이다.]

[要義] 여기서는 중생세계에 나아가서 속박을 받고 기세간을 초월하지 못함을 밝혔다. 그것은 육근의 맺힌 모습이 일정한 수량이 있기 때문이다. 삼매를 닦고자 한다면 반드시 우선적으로 육근 가운데 매듭을 제거할 줄 알아야만 정진 수행할 수 있다.
  육근 가운데는 공덕이 원만함과 원만하지 못한 차이가 있다.
  이 때문에 어느 근을 의지해서 수행하느냐에 따라 수행이 크게 차이가 난다. 공덕이 원만한 육근을 선택해서 수행하고 싶다면 반드시 육근 공덕의 수량을 선택해야만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무엇을 의지해서 매듭을 풀 수 있겠는가.

《四顯力用不齊分六   ● 初眼根 
阿難. 汝復於中克定優劣. 如眼觀見後暗前明. 前方全明. 後方全暗. 左右旁觀三分之二. 統論所作功德不全. 三分言功. 一分無德. 當知眼唯八百功德

《 4. 공덕의 역용(力用)이 같지 않음을 여섯 분야로 나타내다.

● 1. 안근 공덕 
  아난아, 너는 다시 이 육근 가운데서 어느 것이 우수하고 어느 것이 하열한지 판정해야 만 한다.
  안근은 보는 것으로 작용하는데, 뒷면은 보지 못하기 때문에 어둡고 앞면만 보기 때문에 전방은 밝다. 뒷면의 어둠과 좌우 방관까지를 합하면 이는 네 방향이 된다.
  공덕으로 논하면 사방이 각각 이백공덕이고 네 간방이 각각 일백공덕이다.
  지금 눈으로 보는 것은 앞을 보는 것과 좌우를 보는 것을 합해 세 방향이므로 육백공덕을 이루며, 여기에 앞의 두 간방 이백공덕을 합하면 모두 합해 팔백공덕이 된다.
  뒷면 한 방향의 이백공덕과 뒷면 간방 이백공덕은 보지 못한다.
  삼세에 나가서 삼분으로 논한다면 지금 팔백공덕을 얻게 되는데 이는 삼분의 이(三分二)이며, 사방에 나아가서 이를 밝히면 지금 세 방향만 보므로 세 분야는 공덕을 말할 수 있으나 한 방향은 보질 못하므로 한 분야는 공덕이 없게 된다.
  마땅히 알라. 안근은 팔백공덕일 뿐이므로 공덕이 원만한 근은 아니다.

● 二耳根
如耳周聽十方無遺. 動若邇遙. 靜無邊際. 當空耳根圓滿一千二百功德

● 2. 이근공덕 
  이근은 듣는 작용을 한다. 그 듣는 작용이 가장 두루 보편하여 시방세계의 일이라도 빠뜨림이 없다. 때문에 움직이면서 소리가 있을 땐 가깝고 멀리서 나는지를 바로 알며, 고요하여 소리가 없을 때라도 그것은 한계가 없음을 다시 지각한다.
  마땅히 알라. 이근은 천이백 공덕을 원만하게 갖추어 부족함이 없으므로 모든 육근 가운데서 가장 우수하다는 것을.

● 三鼻根
如鼻ㆍ聞通出入息. 有出有入而闕中交. 驗於鼻根三分闕一. 當知鼻唯八百功德

● 3. 비근 공덕 
  비근은 냄새를 맡는 작용을 하는데, 호흡을 내 쉴 때와 들이 쉴 때 쌍으로 통한다.
  비록 출식입식이 있긴 하나 또 중간에 교접이 빠졌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세 분야 가운데 한 분야가 빠졌다는 점이다.
  마땅히 알라. 비근은 팔백공덕일 뿐 공덕이 원만한 근은 아니다.
● 四舌根
如舌宣揚盡諸世間出世間智. 言有方分理無窮盡. 當知舌根圓滿一千二百功德

● 4. 설근 공덕   설근의 작용은 맛을 볼 뿐만 아니라. 오묘한 이치를 선양할 수 있다. 세간이나 출세간의 지혜를 끝까지 언어로 설명할 수 있다.
  언어는 방향 분야가 있고, 말은 혹시 국한됨이 있지만, 그 이치는 끝내 다하지 않고 의미는 모든 것을 해통한다.
  마땅히 알라. 설근은 천이백 공덕을 원만히 하였으므로 역시 공덕이 원만한 근이다.

● 五身根
如身覺觸識於違順. 合時能覺. 離中不知. 離一合雙驗於身根三分闕一. 當知身唯八百功德

● 5. 신근 공덕   신근은 감촉을 지각하는 작용을 한다. 감촉은 감정을 위배하기도 하고 감정에 순종하기도 한다. 그럼 감촉 대상과 신근이 합할 때는 지각하고 서로 분리할 땐 모른다.
  합할 땐 대상이 감정에 위배하는지, 순종하는 지를 지각할 수 있는데, 이는 이분(二分)만을 갖춘 것이다. 가령 신근을 삼분(三分)으로 증험한다면 중간이 분리되는 하나가 빠진다. 마땅히 알라. 신근은 팔백공덕만을 갖추었으므로 공덕을 원만하게 갖춘 근은 아니다.

● 六意根
如意ㆍ容十方三世一切世間出世間法. 唯聖與凡無不包容盡其涯際. 當知意根圓滿一千二百功德

● 6. 의근 공덕 
  의근은 제법을 보편하게 인식하는 작용을 한다. 때문에 시방삼세를 말없이 용납하며, 세간ㆍ출세간 법과 사성(四聖)ㆍ육범(六凡)에 이르러서도 그 끝까지를 다 포용하지 않음이 없다. 의근에도 천이백 공덕을 갖추었으므로 역시 공덕이 원만한 근이다.
  이처럼 육근 공덕은 우열이 있다. 너는 이를 알고 잘 선택해야만 한다.

《五誡選圓根 
阿難. 汝今欲逆生死欲流. 返窮流根至不生滅. 當驗此等六受用根誰合誰離. 誰深誰淺. 誰爲圓通. 誰不圓滿. 若能於此悟圓通根. 逆彼無始織妄業流得循圓通. 與不圓根日劫相倍. 我今備顯六湛圓明本所功德數量如是. 隨汝詳擇其可入者. 五當發明令汝增進

《 5. 원근을 선택하라고 훈계하다. 
  아난아, 너희들은 지금 이종생사(二種生死)를 역류하고 오욕진류(五欲盡流)를 따르지 않으려면 반드시 욕류가 일어난 근원을 돌이켜 추궁하고 불생불멸의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 그럴려면 우선적으로 이들 육수용근(六受用根=六根)이 어느 근이 중간과 합해서 경계를 취하는지. 어느 근이 중간에 분리해서 대상을 취하는지, 어느 것이 공덕이 깊어 헤아리기 어려운지, 어느 것이 공덕이 얕아 알기 쉬운지, 어느 것이 작용을 갖추어 원만하게 통하는지, 어느 것이 결손되어 운만하질 못하는지를 증험해야만 한다.
  이 육수용근에 있어서 스스로 살피고 증험하여 원통근(圓通根)을 선택해야만 무시이래로 사대육근(四大六根)이 서로 얽혀 망상업을 이루고 대상경계로 흐르는 생사의 매듭을 역류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매듭을 풀고 제거하려면 거듭 생사를 일으킨 육근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육근의 작용은 원만하고 원만하지 못함이 있으니 단지 하나의 원통근만 따라야 그 수행이 극도로 오묘할 수 있다. 가령 분리하지 않고 깊지 않고 원만하지 않은 근을 그 공효로 비교한다면 하루와 영겁처럼 차이가 날 것이다.
  나는 이상에서 육근 내의 담연한 본성과 공덕수량과 분리하고 합함과 깊고 얕음과 온전함과 부족함을 빠짐없이 분명하게 나타냈다.
  단지 네가 그 가운데서 불생불멸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을 스스로 선택하기만 하라. 나는 개발하고 지시하고 밝혀서 너의 선정력이 증장하여 보리를 진취케 하리라.

《六使一門深入
十方如來於十八界一一修行皆得圓滿無上菩提. 於其中間亦無優劣. 但汝下劣. 未能於中圓自在慧. 故我宣揚. 今汝但於一門深入. 入一無妄. 彼六知根一時淸淨

《 6. 한 육근의 문으로 깊이 들어가게 하다. 
  그러나 네가 스스로 선택하게 하고 내가 너를 위해 선택해 주지 않는 이유는 까닭이 있어서이다. 시방여래는 중생의 근기 따라 가르침을 베풀어 칠대십팔계(七大十八界) 가운데서 낱낱이 수행하여 모두 원만하고 위없는 보리를 얻으며, 역시 우열을 선택할 것도 없다.
  그러나 단지 너희들은 근성이 하열하여 육근이 원통하여 자유자재한 지혜를 얻지 못하여 유근문에서 어두움을 면치 못한다. 때문에 육근의 분리와 합함. 또 우열을 낱낱이 선양하여 이 가운데서 단지 하나의 문만 선택하여 이로부터 깊이 들어가게 한다.
  만일 하나의 문으로 깊이 들어가기만 한다면 하나의 근에 망상의 맺침이 없어 한 근이 풀리면 나머지 근도 모두 풀리게 된다.
  이 여섯 종류의 아는 근이 일시에 청정함을 얻으면 앞에서 말했던“시방여래가 하나의 문으로 초월하는 오묘한 장엄토”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要義] 여기에서는 육근을 선택하여 망상의 매듭을 푸는 것을 총략적으로 보여 마음을 수행하는 요결로 삼았다.
  이미 허망한 매듭의 근본을 알았다면 다시 공덕의 원만하고 부족함을 알아 원만한 근을 선택하여 마음 닦는 요점을 삼으라고 하였다.
  안근ㆍ이근은 분리하였고, 비ㆍ설ㆍ신근은 합하였으며, 의근은 심오하고, 나머지 오근은 얕으며, 이ㆍ설ㆍ의근은 공덕이 원만하고 나머지 세 근은 원만이 아니다.
  육수용근(六受用根)은 육진은 육근이 수용하기 때문이며, 육담원명(六湛圓明)은 육근이 모두 담연하고 밝은 본성을 따라서 일어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