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다운 자성(自性)ㆍ불성(佛性)을 참구(參究)합시다
아견을 버리고 계율을 지켜야 선정에 들어간다 가장 독스런 것이 아견입니다. 결국은 자기라는 아상(我相)이란 말입니다. 아상이 있으면 벌써 눈도 흐리고 얼굴도 흐립니다. 그러나 기도 모실 때 부처님한테 의지해서 독실하게 지내면 얼굴이 맑아지고 눈도 맑아집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근기가 약하니까 오랫동안 지속하지를 못합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가 하는 일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내 자신을 찾는 일입니다. 내 자신은 무엇인가? 참다운 자신, 참다운 자기는 자성이고 진여불성입니다. 우리가 진여불성을 그대로 증득(證得)해야 생사를 초월합니다. 우리가 진여불성을 증득하지 못하면 번뇌의 노예가 되어서 업을 짓고, 업을 지으면 내내야 삼계 내에서 뱅뱅 돌면서 지옥으로 갔다 어디로 갔다 하지요. 부처님 법을 만나지 못할 때는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행복과 영생해탈의 길로 인도하는 가르침이 있는데도 우리가 그걸 마다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결단을 내리셔야 됩니다. 결단을 내리고 그 다음 문제는 삼학도(三學道)라, 삼학도의 관념을 항시 마음에 두고 거기에 준해서 공부를 하셔야 됩니다. 계율과 선정과 지혜가 삼학도 아닙니까? 계율 없이는 절대로 선정에 못 들어갑니다. 근세에 있어 더러는 계율이 없더라도 무애행(無碍行)도 하고 막행막식(莫行莫食) 해서 도인이 된다 하기도 하는데, 부처님 가르침이나 정통조사(正統祖師)의 가르침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꼭 도덕적으로 하자 없이 계율을 지켜야 선정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시라불청정(尸羅不淸淨) 삼매불현전(三昧不現前)이라, 시라는 인도말로 계율입니다. 계율이 청정하지 못하면 깊은 삼매에 못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깊은 삼매에 못 들어가면 그때는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미혹이나 무명 또는 칭칭 감겨 있는 그런 업장이 안 녹아지는 것입니다. 이른바 심리(心理)와 생리(生理)가 온전히 녹아져야 참다운 깨달음이 온단 말입니다.
모든 질병은 잘못 먹고 잘못 생각해서 생긴다 그렁저렁 사는 사람은 절대로 삼매에 못 들어갑니다. 그렇기에 우리 재가불자님들은 좀 고생스러워도 육재일(六齋日)을 지키십시오. 육재일은 하다못해 한 달에 엿새만이라도 출가한 스님네같이 생활하라는 것입니다. 하루에 한 끼 먹고 내외간에 잠자리 같이 않고 고기도 안 먹고 술도 안 먹고 말입니다. 현대가 얼마나 무서운 때입니까? 금년만 하더라도 제가 아는 분이 네 분이나 암으로 죽었어요. 암을 퇴치하려고 얼마나 몸부림칩니까마는 아직도 모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암이 모두 다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대체로는 우리 입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또 우리 생각이 삼독심(三毒心)을 못 떠나는 데서 옵니다. 독 가운데 제일 무서운 독이 삼독심입니다. 탐욕심[貪心]을 내고 진심(嗔心)을 내고 또는 어리석은 마음[痴心]을 내고 말입니다. 진심을 내면 그 즉시 우리 세포가 오염됩니다. 우리 인간 세포가 지금 60조나 있다고 합니다. 그런 세포가 없어졌다 생겼다 합니다. 그런데 그런 세포가 우리 생각 하나하나를 다 반영합니다. 좋은 생각은 우리 세포를 정화시키고 좋지 못한 생각은 우리 세포를 중독시킵니다. 따라서 내내야 암이나 무엇이나 다 우리 스스로가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잘못 먹거나 또는 잘못 생각하기에 그렇습니다.
참다운 공부와 보시는 모두가 하나라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공부하는 방법도 역시 여러 가지가 있지 않습니까? 염불만 애써 하는 그런 공부도 있고 또는 천수다라니를 외우는 공부도 있고 화두공안을 참구해서 하는 공부도 있지 않습니까? 다 훌륭한 성불의 법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핵심은 무엇인가 하면 우리 마음이 반야바라밀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남한테 우리가 무엇인가 베푼다 하더라도 그냥 '저 사람은 나보다 못사니까, 불쌍하니까 베푼다' 이러면 이것은 단순한 선행밖에는 안 됩니다. 선행을 했으니까 그런대로 과보는 받겠지요. 그러나 이른바 도업(道業)이라, 도를 성취하고 진리를 성취하는 그런 업과는 거리가 좀 있습니다. 모든 존재는 본래로 둘이 아니다, 이런 생각을 떠나지 않으셔야 합니다. 도둑하고 나하고도 둘이 아니고 살인죄인하고 나하고도 둘이 아닙니다. 성품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일매지게 하나입니다. 거기다가 우리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실이니까요. 우리 중생은 사실을 외면하고서 허상에다 우리 마음을 집착시킵니다. 모두가 나와 둘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베풀어야 참다운 보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가 됩니다. 부처님을 생각해서 부처님이 되어가는, 염불공부가 사실은 제일 쉽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본래 부처인데 부처가 부처를 생각하면서 부처가 되어가니까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다른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화두공안 의심하는 것도 화두공안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우리 자성을, 우리 불성을 깨닫는 하나의 방편입니다. 따라서 어떤 공부든지 간에 반야의 지혜, 천지우주 모두가 다 진여불성 아님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화두공안을 들거나 염불을 하셔야 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이렇게 하는 것도 염불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부처님은 저 밖에 계시고,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하고 동경하고 그러면 우리한테 가호를 준다, 이것은 참선은 못 됩니다. 단순한 타력염불(他力念佛)은 되어도 참선은 못 됩니다. 참다운 염불도 못 됩니다. 진여불성 자리, 참다운 실상자리를 떠나지 않고서 하는 염불이 이른바 실상염불인 동시에 염불참선입니다. 따라서 우주에 충만해 있는 한도 끝도 없는 무량공덕을 갖춘 진여불성 자리, 자성자리, 본래 주인공 자리를 놓치지 않고서 화두를 참구해야 합니다.
[불기 2546년 11월 성륜사 동안거 결제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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