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마음] 참다운 자성, 불성을 참구합시다 2

通達無我法者 2007. 12. 1. 10:40

참다운 자성(自性)ㆍ불성(佛性)을 참구(參究)합시다


몸뚱이만 사라졌다 생길 뿐, 정신은 죽지 않는다
제행(諸行)이 무상(無常)이라, 심장이 한번 멈춰버리면 그때는 주검 아닙니까? 인간세상이 별로 좋은 데는 아닐망정, 그 역시 생로병사(生老病死)라, 늙고 죽고 다 허망무실하단 말입니다. 좀 오래 살고 늦게 간다 하더라도 결국은 다 가고 만단 말입니다.
우리 몸뚱이를 구성한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 사대는 아무런 흔적도 없습니다. 화장하면 재만 남을 것이고 매장하면 땅속에서 썩을 것이고, 그러한 물질이라는 것은 종당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 정신은 어떠한 것인가? 우리 정신은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많이 배운 사람, 덜 배운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 정신 자체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죽을래야 죽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보통사람들은 자기가 혹시 죽을까 봐 여러 가지로 불안해하면서 조심하고 영양을 섭취하려고 애쓰지 않습니까? 영양을 많이 섭취한다고 장수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만…….
가만 두어도 우리 생명은 죽지 않아요. 죽을래야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몸뚱이만 그때그때 인연이 다해서 사라졌다 또 업 따라서 생기고 하는 것이지 우리 생명 자체, 우리 정신 자체는 죽을래야 죽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 그렇기에 불생불멸(不生不滅) 아닙니까? 나지도 죽지도 않고 과거ㆍ현재ㆍ미래를 통해서 영원히 우리 정신은 존재합니다.
비단 개별적인 정신뿐만 아니라, 깨달은 사람들이 볼 때는 천지우주가 다 그런 생명체로 충만해 있습니다. 실질적인 생명 자체는 영원히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 그 우주가 모두 다 생명인 불성으로, 자성으로 충만해 있다는 그런 소식이 바로 반야의 참다운 소식입니다.

실상을 보면 우주는 항상 불성으로 충만하다
반야바라밀이란 것은 반야가 있어야 도피안(到彼岸)이라, 이 중생계의 고해를 건너서 영생해탈의 그런 경계로 갈 수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부처님이나 성인들도 모두가 다 반야를 의지해서 깨닫는단 말입니다.
반야는 어떠한 것입니까? 우주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이다, 이런 도리가 반야의 도리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모두가 이렇게 개별적인 존재일 뿐인데 어떻게 우주가 생명으로 가득 차 있는가, 이렇게 의심을 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느끼는 대로 공기가 없는 데가 있습니까? 모든 곳이 지금 공기로 충만되어 있습니다.
공기는 내내야 산소ㆍ수소ㆍ탄소ㆍ질소… 모두 그런 것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까? 물론 희박하고 더 농후하고 그런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우주란 것은 이 공기로 충만해 있습니다. 공기는 또 각 원자로 해서 그대로 거기에 가득 차 있습니다. 우주가 공기로 충만해 있듯이 모든 존재의 참다운 생명, 참다운 성품인 불성ㆍ자성도 역시 그보다 더 근원적으로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가 무엇인가 하면, 우주에 언제나 충만해 있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생로병사를 초월해서 영원히 있는 하나의 생명 자체입니다.
플라톤뿐만이 아니라 위대한 철인(哲人)들은 다 그런 소식을 전합니다. 그이보다 먼저 난 그리스의 파르메니데스도 '일자(一者)만 존재한다. 오직 하나만 존재하고 다른 것은 결국은 다 허망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란 것은 존재 자체, 존재의 실상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의 실상을 모릅니다. 우리 중생은 기껏해야 가상만 압니다. 허망상만 안단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런 말씀을 꼭 진리에 그대로 맞게 합리적으로 하셨습니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이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우리 중생이 있다고 보는 것은 다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와 같습니다. 물거품 같고 또는 풀 끝의 이슬 같고 또는 거울에 비친 허상 같습니다. 거울에 비친 모양이 사실로 있지 않아도 중생이 볼 때는 꼭 있는 것같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와 같이 우리 중생이 나요 너요, 좋다 궂다 하는 모두는 다 그런 허상인 것입니다. 허상은 허상으로 알면 좋은데 허상을 허상으로 모르는 것이 중생의 아견(我見)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아집(我執)입니다. 자기라는 개인에 대해서 집착을 못 떠난단 말입니다.
중생과 성자의 구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중생은 자기라는 아집을 미처 떠나지 못합니다. 또는 법집(法執)에서도 못 떠나고 있습니다. 대상적으로 보여지는 모든 것도 다 똑같이 허망한 것인데 이런 것도 사실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주관ㆍ객관이 우리 중생의 견해로 보면 구분되어 존재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이런 것은 모두가 다 허망한 것입니다.

사대오온을 떠나면 '나'는 없다
우리가 참선하기 위해서 겨울에 결제(結制)하고 여름에도 결제하고 또 그때그때 조석으로 좌선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참선은 무엇 때문에 하는 것입니까?
흐린 물을 가만히 두면 시간이 가면서 앙금이 차차 가라앉고 나중에는 그냥 맑아져 바닥이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도 이것 배우고 저것 배우고, 또 과거 전생에 업이 있고 금생에 나와서도 업을 짓다 보니 흐려질 대로 흐려졌단 말입니다. 아주 혼탁해 있습니다.
혼탁한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혼탁이 무엇인가 하면 '나'라는 생각입니다. 공부를 좀 했다 하더라도 '나'라는 생각을 그냥 금방 뗄 수가 있습니까? 상당한 인격자같이 보여도 어느 고비에 이르면 욕심을 부리고 자기중심적이 된단 말입니다.
'나'라는 것이 본래 있는 것 같으면 좋습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있는 것 같으면 그렇게 소중히 아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허망한 것이란 말입니다. 죽을 때 이르러 없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나'는 분명히 없습니다.
사대오온(四大五蘊)이라, 지수화풍 사대의 원소로 우리 몸이 구성되고 우리 마음도 역시 수상행식(受想行識)이라, 느끼고 또는 분별하고 감상하는 부스러기가 모여서 마음이 됐습니다. 사대오온을 떠나면 그때는 '나'라는 존재가 없습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그와 같이 된 것인데, 그것도 그대로 가만히 있으면 좋은데 그때그때 순간순간 변화해 마지않습니다. 그렇기에 제행무상(諸行無常)입니다. 모든 것은 결국 항상(恒常)이 없단 말입니다. 1초의 몇천 분의 일 동안도 그대로 있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 중생이 그런 미세한 변화를 보지 못하니까 어제의 '나' 오늘의 '나' 또는 몇십 년 뒤의 '나'가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서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이 제행무상입니다. 시간적으로 그때그때 같은 것이 없는 무상한 것은 또 공간적으로 본다면 공(空)이란 말입니다. 모든 것이 다 그대로 이렇게 움직이고 있고 변화 무상합니다. 유명한 그리스 철인 헤라클레이토스도 만법(萬法)이 유전(流轉)이라, 모든 것은 다 변화한다고 보았습니다. 1초의 몇천 분의 일 동안도 그대로 머무름이 없이 움직이고 있으니 어떻게 존재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시간적으로 봐서 무상이기 때문에 공간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공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2천 5백 년 이상 동안에 걸쳐 우주의 실상을 정밀하게 전했겠습니까? 부처님 가르침은 사실은 존재론입니다. 존재의 실상을 말한 것입니다. 현재 실존철학이나 생철학(生哲學) 같은 것도 존재의 실상을 어떻게든 말해 보려고 어려운 논리를 다 구사하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간단명료한 그 자리에는 이르지 못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마음을 깨달아서 성자가 못 되니까 그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