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보훈(禪林寶訓)

선림보훈17 늙고 병든 스님을 뒷바라지 하다  

通達無我法者 2007. 12. 3. 17:00
17  늙고 병든 스님을 뒷바라지 하다   고암 선오(高庵善悟)스님 / 1074∼1132 
 

 1. 내가 과거 조산(祖山)에 노닐다가 불감스님이 소참(小參)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탐욕과 성내는 허물은 원수나 도적과도 같으니, 반드시 지혜로써 대적해야 한다. 지혜는 물과 같아서 쓰지 않으면 막히고, 막히면 흐르지 않으며, 흐르지 않으면 지혜가 쓰일 수 없다. 이렇게 되고 나면 그 탐욕과 성냄을 어찌 하겠는가."
나는 그때 나이가 어렸으나 마음 속으로 그분이 선지식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드디어는 이를 염두에 두었다. 

2. 납자가 마음가짐이 바르다면 백번 꺾인다 해도 호연(浩然)히 근심 없으리라. 그러나 방향이 치우치고 삿되어 조석으로 좀스럽게 이끗만을 헤아린다면 이런 사람은 천지 사이에 멀쩡한 몸을 둘 곳이 없을까 내 염려스럽다. 『진목집(眞牧集)』

3. 도덕과 인의는 유독 옛사람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요즈음에도 있다. 단 지식이 분명하지 못하거나 학문이 넓지 못하며, 근기는 청정하지 못하고 의지는 좁고도 낮은 데다가 힘써 수행하지 않기 때문에 드디어는 성색(聲色)에 끌려가도록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대체로 망상(妄想)과 정념(情念)으로 익힌 것이 두텁게 쌓여 단번에 제거하지 못한 탓으로 옛사람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여경룡학서(與耿龍學書)』

4. 고암스님은 법성 고목(法成奇木:1071∼1128)스님이 금산(金山)에 살면서 사치스럽게 낭비한다는 소문을 듣고 길게 탄식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불법에서는 청정과 근검을 귀하게 여기니 이래서야 되겠는가. 이제껏 살찐 말과 날아갈 듯한 옷에 익숙해 온 후학들에게 지칠줄 모르는 탐심만 더해줄 뿐이니, 옛분들께 부끄럽지도 않는가."

5. 주지의 대체는 총림을 한 가문으로 생각하고 부서를 적절히 나누어 해낼 만한 적임자에게 일을 맡기는 것이다.
주지되는 이의 행동 하나에 안위(安危)의 이치가 달려 있고, 그의 잘잘못은 교화의 근원에 관계되니 남의 모범되기가 어찌 쉽겠는가. 주지가 해이하고 방종하면서도 납자를 복종시켰다거나 법도가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총림의 무질서를 막았던 경우는 이제껏 없었다.
옛날 육왕 개심(育王介:1080∼1148)스님이 수좌를 보내고 앙산 행위(仰山行偉:1018∼1080)스님은 그를 시중하는 스님으로 깎아내린 일들이 전적에 실려 있어 훌륭한 모범이 되기에 충분하다.
요즈음에는 각각 사욕을 따르느라 백장스님의 법규를 크게 무너뜨려 일찍 일어기를 게을리하고 예불과 법회를 빼먹는 경우가 많다. 혹은 멋대로 탐욕을 부리면서도 거리낌이 없고, 또는 물욕 때문에 시끄럽게 싸우기도 하며 심지어는 편벽하고 추악한 일에 있어서도 못할 짓이 없게 되었다.
아 - 아, 불교의 큰 가르침이 성대하게 일어나기를 바랄래야 바랄 수 있겠는가. 『용창집(龍昌集)』

6. 고암스님이 운거사(雲居寺)에 머물면서 선방에서 깨달음의 계기를 만나지 못하고 시간만 보내는 납자를 볼 때마다 그들의 소매를 잡고 정색을 하며 꾸짖었다.
"부모는 그대의 몸을 길러주었고, 스승과 도반은 그대가 지향하는 목적을 이루어주었다. 배고픔과 추위의 절박함도 없고 징병을 나가야 하는 수고도 없다. 이러고서도 확고하게 정진하여 도업(道業)을 완성하지 못한다면 뒷날 무슨 면목으로 부모와 스승, 도반을 보겠느냐."
납자 가운데서는 스님의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으니, 호령이 이토록 엄격하였다.

7. 고암스님이 운거사에 살 때, 납자가 병들어 연수당(延困堂)으로 옮겨졌다는 말을 들으면 마치 자기탓이라도 되는 듯 슬피 탄식하였다. 그리고는 조석으로 병문안을 하고 몸소 약을 달이기까지 하였으며, 자기가 먼저 맛을 보고 나서 음식을 건네주기까지 하였다.
혹 날씨가 점점 추워지면 그들의 등을 두드리며 "옷은 홑겹이 아니냐" 하고, 무더위에는 그들의 안색을 살피며 "너무 덥지는 않느냐" 하고 위로하였다. 불행히도 천명이 다하여 어쩌지 못할 경우, 그의 경제적 여건에 관계없이 상주물(常住物)을 내어서라도 극진한 예의로 보내주었다. 일을 맡은 사람이 혹 그것을 가지고 이러니 저러니 하면 스님은 이렇게 꾸짖었다.
"옛날 백장스님은 늙고 병든 자를 위해서 상주물을 세우셨다. 그대는 병들지도 죽지도 않을 수 있는가."
사방의 식자(識者)들은 스님의 사람됨을 고상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운거사에서 물러나 천태산(天台山)을 지나는데 따르는 납자가 50여 명이나 되었고, 그 가운데 같이 가지 못하는 자는 울면서 이별하였다. 스님은 이토록 덕으로 대중을 감동시켰던 것이다. 『산당소참(山堂小參)』

8. 고암스님이 운거산에서 물러나자 원오(圓悟)스님이 불인 요원(佛印了元:1032∼1098)스님이 살던 와룡암(臥龍菴)을 수리하여 편안히 쉴 처소로 만들려 하였다. 그러자 고암스님이 말하였다.
"수행자가 도를 닦는 즐거움이 있다면 육신 따위는 도외시해도 된다. 내 나이 칠십이라 마치 새벽별이나 그믐달과도 같으니,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겠는가. 또 초막이 있는 서산(西山) 언덕은 숲과 샘물이 죽 이어져 있어 모두가 내가 편안히 늙은 곳이다. 무엇 때문에 기어코 자기 소유로 하고 나서야 만족하겠는가."
오래지 않아 지팡이를 끌고 천태산을 방문하더니 그 뒤 화정봉(華頂峯)에서 입적하셨다. 
『진목집(眞牧集)』

9. 납자에게는 잘나고 못나고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선지식이 자세하게 그의 인격을 존중해 주고 두루 시험하여 도량과 재주를 발현시켜 주는 데 있다. 또한 드러내주고 권장하여 그의 말을 존중하고, 따뜻하게 사랑하여 그의 지조를 완전하게 해 주는 데 있을 뿐이니, 이렇게 하여 세월이 오래 되면 명성과 실제가 함께 풍성해지게 된다.
사람들은 모두가 마음을 가지고 있으므로 부지런히 깨우쳐 이끌어주면 된다. 이는 마치 옥돌을 그대로 두면 돌덩어리지만 잘 다듬으면 보배가 되며, 물의 근원〔發源〕을 막아버리면 웅덩이지만 틔워 흐르게 해주면 큰 시내가 되는 것과도 같다.
상법·말법시대에는 훌륭한 사람을 빠뜨리고 채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길러내고 권장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부족한 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법시대에서는 어리석다고 버려질 재목이라 해도 총림이 한창 성할 때 가서는 지혜로와질 수 있다. 이런 뜻에서 "사람은 모두가 마음을 지녔으므로 부지런히 깨우쳐 이끌어야 한다"라고 했던 것이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납자의 재능은 시기와 함께 오르고 내린다는 점이다. 좋아해 주면 다가오고, 권장하면 높아지며, 억누르면 시들고, 배척하면 끊어진다. 이것이 납자의 도덕과 재능이 꺼졌다 불어났다 하는 연유이다. 『여이도운서(與李都運書)』

10. 교화를 크게 펴는 데는 도덕과 예의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다. 주지되는 사람이 도덕을 존중하면 납자들이 높이 공경하고, 예의를 행하면 배우는 사람이 탐하고 경쟁하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 주지에게 체모를 잃을 만한 태만이 보이면 납자에게 능멸과 포학한 폐단이 생기며, 주지에게 얼굴빛을 바꾸는 분쟁이 있으면 배우는 사람에겐 공격하며 투쟁하는 재앙이 있게 된다.
옛 성인께서는 미연에 아시고 드디어는 현명한 인재를 가려내어 총림을 주관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보며 깨우치지 않아도 교화가 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석두(石頭:700∼791)·마조(馬祖:709∼788)스님의 도풍이 성행할 때 영걸스러운 인재가 나왔다. 그들의 태도는 부드럽고 아름다왔으며 온화하고도 자연스러워 모든 언행이 후세의 모범이 될 만하였던 것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여사심서(與死心書)』

11. 지난날 스승(불안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행각하러 관문을 나서서 갔던 작은 절들에서는 내 뜻대로 되지 않은 일들이 많았다. 그러다가 법안(法眼)스님이 지장암(地藏菴) 규침(珪)스님을 참례하고, 명교(明敎)스님이 신정(神鼎)스님을 배알했던 일을 생각해 보았더니 번뇌가 사라지더라" 하셨다. 『기문(記聞)』

12. 고암스님은 마음과 행동이 단정하고 강직하며 기상과 도량이 늠름하여 한시라도 예법을 잃지 않았다. 대중과 함께 살던 시절에는 여러번 침해를 받았으나 전혀 개의(介意)치 않고 종신토록 간소하게 처신하였다. 대중방에서는 아무것이나 함부로 허락하지 않았으며, 조금이라도 서로 맞지 않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정색을 하고 곧은 말로 다스렸으므로 납자들이 모두 믿고 복종하였다. 한번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도 닦는 일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다. 단 평소에 하는 일이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을 뿐이다."

13. 고암스님이 운거사에 머물면서 어떤 납자가 감춰진 남의 잘못을 공격하는 것을 보고는 부드러운 말씨로 그를 깨우쳐 주었다.
"무슨 일이든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수행인이라면 도를 닦는 것이 급선무이며 화합하는 것이 곧 자기를 닦는 일이다. 구차하게 애증의 감정을 멋대로 부려 다른 사람 행동거지나 헐뜯어서야 되겠는가." 스님의 자상함이 이 정도였다.
스님께서 과거에 운거사 주지를 맡아 달라는 명을 거절하자, 불안(佛眼)스님이 편지를 보내 이렇게 권하였다.
"운거사는 양자강 왼쪽 지방에서 으뜸입니다. 대중을 편안하게 하고 도를 실천할 만하므로 굳이 사양해선 안되리라 봅니다."
스님이 답하였다.
"총림이 생겨나고부터 이러한 명목(名目)에 가리워 절개와 의리를 무너뜨린 납자들이 적지 않았읍니다."
불감(佛鑑)이 이 말을 듣고 말하였다.
"고암의 처신은 납자들이 따라갈 수 없겠군." 『기문(記聞)』

14. 고암스님이 늙고 병든 스님을 위안하자고 권하는 글을 하나 지었다.
"변변찮은 내가 일찌기 대장경을 찾아보고 부처님의 의도를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비구가 가만히 앉아서 공밥을 받고 게으른 마음을 내며 `나는 존경받아 마땅한 비구입네' 하는 아견(我見) 일으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새벽마다 부처님은 제자와 함께 발우를 지니고 걸식하셨다. 귀천을 가리지 않고 높다 낮다 하는 마음이 없어 신자들에게 모두 고르게 복을 받게 하셨다.
그 뒤 마련된 상주물(常住物)이라는 것은 본래 늙고 병들어 걸식을 나가지 못하는 비구를 위해서 만든 것으로서 젊고 한창인 납자들은 먹을 수 없었다. 부처님이 입멸(入滅)하신 후 정법(正法)시대까지만 해도 그대로 실천되었으며, 상법(像法)·말법(末法)시대 뒤로 중국의 선림(禪林)에서도 걸식하는 제도를 폐지하지 않았다. 단 유능한 사람을 추천하여 걸식을 하게 하였으며, 얻은 시주물은 상주물로 모아 두었다가 많은 대중들을 편안하게 하였고, 드디어는 이것이 매일같이 걸식을 행하는 법규가 되었다.
요즈음 소문을 들으니 여러 사찰의 주지들이 인과(因果)를 무시하고 늙은 스님들을 편안하게 모시지 않는다 하니, 이는 부처님의 본뜻을 어기고 불교를 약하게 만드는 것이다. 실로 절에 안주하지 않는다면 그 스님들은 어디로 가야 하겠는가. 상주물이 본래 누구를 위하여 마련된 것인가를 돌이켜 생각치 않는가. 어떤 마음을 가져야 부처님 마음에 맞겠으며, 어떤 일을 추진해야 부처님의 행동에 맞겠는가?
옛날 부처님께서 생존해 계실 때, 혹 공양청(供養請)에 가시지 못하고 정사(精舍)에 머무실 경우, 승방(僧房)을 두루 돌아다니시며 늙고 병든 비구들을 보살피셨다. 낱낱이 위문하고 낱낱이 준비물을 배치하였으며, 나아가 모든 비구들을 빠짐없이 공경하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그들이 성내고 미워하는 마음을 버리도록 도와줄 것을 당부하셨으니 이것이 부처님〔調榮師〕께서 대중들에게 보이신 솔선수범이었다.그런데 지금은 자기의 입과 몸을 위해 상주물을 멋대로 쓰고 권세 있고 귀한 사람과 결탁하여 늙고 병든 자는 끊어버린다. 대중의 물건을 자기 소유로 덮어버리고, 부처님 마음과 부처님 행동은 까맣게 하나도 없으니 슬프고 슬프다.
고덕(古德)은 `노스님은 산문의 표상〔標榜〕이다'라고 말하였는데, 요즈음 선림(禪林)에 백에 하나도 노스님이 안 계신 이유는 늙으면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로써 더욱 알 수 있는 것은 오래 사는 것이 이로울 게 없으며 도리어 일찍 죽느니만 못하다는 것이다.
원컨대 우리 시대에서는 각각 부처님 말씀을 따르고 조사의 뜻을 계승·발전시켜야 한다. 
그러자면 늙고 병든 스님은 편안하게 위로하며 상주물의 양에 따라 적절하게 공급하였으면 한다. 이리하여 우매한 사람이 권세를 멋대로 휘둘러 짧고 박복한 내세를 초래하지 않았으면 한다. 간절히 더욱 살펴주기 바라노라."

15. 각범(覺範:1071∼1128)스님이 영원(靈源)스님의 문방(門榜)에 이런 글을 달았다.
영원스님은 애초에 세상에 나가는 것을 원치 않고 자신을 매우 꿋꿋이 지켰다. 장무진(張無盡:1043∼1121)거사가 강서(江西)지방에 부임하여 여러번 스님을 불렀으나 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자 돌연히 뜻을 바꿔 이렇게 말하였다.
"선림은 갈수록 시들어가는데 법을 널리 펴야 할 자들은 대부분 부처를 팔아 자신의 안일만 추구하고 있으니, 급히 떠받쳐 주지 않는다면 당장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이리하여 회상(淮上)의 태평사(太平寺)에서 법을 열었다. 나는 그때 동쪽으로 가다가 스님의 문하에 오르게 되었는데, 총림은 정돈되고 종풍(宗風)은 크게 떨쳐 백장(百丈)스님이 건재할 때 못지 않을 정도였다. 
그뒤 15년이 지나 이 방(榜)을 봉원(逢原)에서 보게 되었는데, 읽어내려 가면서 마치 그의 모습〔道骨〕을 보는 듯 오싹하였다.
이 글은 스님 황산곡(黃山谷)이 전서체(書體)로 일필휘지하였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격문(激文)이 있다.
"아 - 아, 천하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편다 하는 자들이 모두가 영원스님이 말씀하신대로 주지를 한다면 조사의 도가 널리 펴지지 못할까 무얼 근심하겠는가. 『논어(論語)』에서도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크게 하지는 않는다'라고 하였는데, 영원스님이야말로 이렇게 한 분이다." 『석문집(石門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