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보훈(禪林寶訓)

선림보훈/16 남에게는 엄격하고 자기에게 둔해짐을 경계하다

通達無我法者 2007. 12. 3. 16:57
16  남에게는 엄격하고 자기에게 둔해짐을 경계하다   불안 청원(佛眼淸遠)스님 / 1067∼1120
 

 1. 대중에 임하는 태도는 평상시에도 반드시 정숙해야 하며, 손님과 대화할 때는 개인적으로 친한 사이라 해도 엄숙해야 한다. 수행인이라면 말 한 마디, 모든 움직임에 앞서 충분한 사려를 거친 뒤에 실천에 옮길 것이지 갑자기 서둘러서는 안된다.
혹 자신이 결단하지 못할 경우에는 나이 든 사람과 선지식을 찾아 자세히 자문을 구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지식을 넓혀 모자란 점을 보완하고 깨닫지 못했던 것을 밝혀야 하니 부질없이 허세를 부려서야 되겠는가. 오로지 잘난 체만 하면서 그 추한 모습을 드러내다가 만일 일 하나라도 남 앞에서 실수하는 날이면 이제껏 쌓았던 많은 공도 건지지 못하고서 가리워져 버린다. 『여진목서(與眞牧書)』

2. 사람은 천지 사이에 태어나면서 음양(陰陽)의 기운을 받고 육신을 이룬다. 이러한 우리의 처지는 진실한 방편인 대승의 자비원력으로 세간에 응해 주느라고 출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탐욕을 졸지에 제거하지 못할 듯하다.
생각컨대 성인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아셨으므로 먼저 도로써 우리의 마음을 바로잡아 준 뒤 인의예지(仁義禮智)로 교화하여 탐욕을 막아주셨다. 나아가 일취월장하여 탐욕이 인의예지를 이기지 못하도록 하여 도덕을 완전하게 해주셨다. 『여경룡학서(與耿龍學書)』

3. 납자라면 언어문자에 막혀서는 안된다. 언어문자는 남을 의지해서 알음알이를 일으키는 것일 뿐, 스스로 깨닫는 방편을 막아 언어·형상의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지난날 달관 담영(達觀曇穎:989∼1060)스님이 처음 석문 온총(石門蘊聰)스님을 뵙고 방안에서 말로 따지는 데에만 열중하자 온총스님이 말하였다.
"그대의 논리는 종이쪽 위에 놓여진 글일 뿐, 사실 마음 깨달은 정도로 치자면 아직 깊은 도리를 보진 못하였으니 반드시 오묘한 깨달음을 구해야 한다. 깨닫고 나면 우뚝하게 자립하여 말〔言句〕에 의지할 것도 막힐 것도 없으니, 이는 마치 사자왕이 포효하면 모든 짐승들이 놀라는 것과도 같다. 문자공부를 마음공부에 비할 때 열에 하나 정도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용문기문(龍門記聞)』

4. 불안스님이 고암(高菴)스님에게 말하였다.
"백장(百丈)스님의 청규(淸規)는 바른 길을 내세워 삿됨을 단속하고 대중을 법도 있게 이끌어 시대 상황에 맞게 후인의 마음〔情〕을 다스린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물과 같아 법도와 예의로 제방(堤防)을 삼아야 한다. 제방이 튼튼하지 않으면 반드시 한꺼번에 터지게 되듯 마음을 다스리지 않으면 제멋대로 날뛰게 된다. 그러므로 망정(妄情)과 사악함을 제거하고 막는 데는 한시라도 법도가 없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예의법도가 어찌 망령된 마음을 방지하는 데에서만 그치겠는가. 입도(入道)를 돕는 계단이기도 하다. 법도가 서면 해와 달처럼 밝아 이를 보는 사람이 어둡지 않고 큰 길처럼 툭 트여 다니는 사람이 길을 잃지 않는다. 옛 성인께서 세우신 법도는 다르나 근원으로 돌아가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그런데 요즘 총림에서는 힘써 법도에 지배를 받는 자도 있고, 죽자고 그것만을 붙들고 있는 자도 있으며, 혹은 멸시하는 자도 있다. 이들은 모조리 도덕과 예의를 등지고 망령된 마음과 악을 따르기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옛 성인께서 법도를 세우신 뜻이 말법시대의 폐단을 구제하고 망령된 마음과 기욕(嗜欲)의 단서를 막으며, 사벽(邪僻)한 길을 끊어버리겠다는 데에 있었으니, 어쩌자고 한번도 이점을 생각치 않는가." 『동호집(東湖集)』

5. 불안스님이 고암스님에게 말하였다.
"털끝까지 보아내는 자도 자기 눈썹은 보지 못하며, 천 근을 드는 자라도 제 몸은 들지 못한다. 이는 마치 수행자가 다른 사람 책망하는 데는 밝으면서도 자기를 용서하는 잘못에는 어두운 것과 조금도 차이가 없다." 『진목집(眞牧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