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보훈(禪林寶訓)

선림보훈/18 사대부에 아첨하여 불도를 손상시킴을 경계하다  

通達無我法者 2007. 12. 3. 17:01
18  사대부에 아첨하여 불도를 손상시킴을 경계하다   귀운여본(歸雲如本)스님
 

 귀운 여본(歸雲如本)스님의 『변영편(辯 篇)』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나라 정국공(鄭國公) 부필(富弼)은 투자 수옹(投子修)스님에게 도를 물었는데, 그 때 오갔던 편지와 게송은 14장이나 되었으며, 대(台)땅의 홍복사(鴻福寺) 두 회랑 벽 사이에 비를 세웠다. 이로써 선배들이 근엄하게 법을 주관했다는 것과 왕공귀인들이 독실하게 도를 믿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국공이 사직(社稷)의 중신(重臣)으로서 만년에 방향을 제대로 찾았던 것은 투자 수옹스님에게 반드시 남다른 데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 자신도 "투자 수옹스님에게서 자극받은 바가 있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사대부 가운데서 불교를 진실하게 믿는 이는 나이도 잊고 세도도 굽히면서 용맹정진하여 완전하게 반드시 깨닫기를 기약하고야 말았다. 시랑(侍郞) 양대년(楊大年)과 도위(都尉) 이화문(李和文) 등이 광혜원 원연(廣慧院 元璉)·석문 온총(石門 蘊聰)과 자명(慈明) 등 모든 큰스님들을 뵈었을 때, 뜨겁게 오갔던 문답들이 여기저기 모든 선서(禪書)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양무위(楊無爲)와 백운 수단(百雲守端)스님의 관계, 장무진(張無盡)과 도솔 종열(兜率從悅)스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모두가 관문을 통과하고 정곡을 쳐서 철저하게 끝까지 깨달았는데, 구차하게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근세에 시랑(侍郞) 장무구(張無垢)와 참정(參政) 이한노(李漢老)·학사(學君) 여거인(呂居仁)은 모두가 묘희(妙喜) 노장을 뵙고 점점 진보하여 결국 선의 심오한 경지를 체득했으니, 이들은 속세를 초탈한 도반이라 할 만하다. 그들은 좋고 싫은 감정과 맞고 거슬리는 경계를 번개처럼 뿌리치고 우뢰처럼 쓸어버려 세속의 구차함과 거리낌을 벗어버렸다. 그리하여 보는 사람들은 옷깃을 여미고 황송한 마음으로 길을 비켜서며 그 경지를 엿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사군자(君君子)들은 한가하고 적막한 강가에서 서로를 구하고 선(禪)의 고요한 경지에 마음을 깃들이고자 하면서 본심만을 캘 뿐이었다.
후세엔 선덕(先德)들의 법다운 모범은 보지 못하고, 오로지 아첨을 일삼으며 승진하여 이름날릴 것만을 비뚤어지게 구하고 있다. 주지가 추천한 이름으로 장로가 된 자들은 더러는 명함을 써서 모 문중의 승려 아무개라 자칭하며 웃사람들을 받듬으로써 배경을 삼고 대중의 상주물을 빼돌려 뇌물로 바치면서 아첨하기도 한다. 식견 있는 자들이 그것을 딱하게 여기고 비웃는데도 수치를 모르고 그저 편안할 뿐이다.
아 - 아, 우리 불제자 사문들은 물병 하나, 발우 하나로 구름처럼 새처럼 떠돌아도 얼거나 굶주리는 절박한 상황은 없다. 그런데도 자녀와 옥백(玉帛)을 그리워하여 허리를 굽히고 빗자루질을 한다. 웃사람에게 아첨하고자 설설 기며 몸도 제대로 못피니 욕됨과 천함을 자초하는 상황이다.
은혜의 곳간〔恩府〕이라 칭하는 배경은, 자기 한 몸의 욕심에서 나왔으므로 기댈 곳이 못된다. 터무니없고 째째한 사람 하나가 앞에서 부르짖으면 백이나 되는 똑같은 무리들이 그 뒤에서 화답하며 다투어 그를 받들려 하니, 실로 비루하고 좀스러울 뿐이다.
교풍(敎風)을 깎아내고 약화시키는 것으로는 아첨하는 사람보다 심한 것은 없다. 실로 간사한 이가 교묘하게 살금살금 속여 들어가면 단정하고 올바른 사람이라 해도 몸은 불의에 빠지고 마음은 구제할 수 없는 지경까지 가게 되니 슬프지 않은가. 법을 파괴하는 비구는 마구니의 기운이 모여 있으므로 미친 속임수를 쓰면서도 태연자약하다. 속임수로 선지식의 자태를 나타내고 선림의 큰스님 이름을 대면서 그의 법을 이었다 하며 요직에 있는 귀인에게 아첨하여 그를 종속(宗屬)이라 한다.
바라지도 않는 공경을 바쳐가면서 불법을 무너뜨리는 단서를 터주고 속인을 법상에 오르게 하여 승려로서 그 아랫사람들에게 절을 하니, 성인의 법도를 왜곡시키고 종풍(宗風)을 매우 욕되게 하고 있다.
우리 불도가 쇠퇴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아 - 아 슬프다. 하늘도 귀신도 모두 벌을 주리니, 만번 죽어도 속죄되지 않을 사람은 아첨하는 자가 아니겠는가.

명교 계숭(明敎契嵩)스님의 『원교론(原敎論)』에는 이렇게 말하였다.
옛날의 고승들은 천자를 배알해도 신하 노릇을 하지 않고 미리 조서(詔書)를 지어 공(公)이니 사(師)니 하고 칭하였다.
제(齊)나라 종산(鍾山) 승원(僧遠:414∼484)스님은 고조(高祖)의 수레가 산문에 이르렀으나 법상에 앉은 채 맞이하지 않았으며, 호계(虎谿)의 혜원(惠遠:334∼416)스님은 천자가 심양(?湯)까지 당도하여 조서를 내렸으나 산문을 나가지 않았었다. 그리하여 당세에서는 그분의 사람됨을 대우하고 그분의 덕을 받들었다. 이 때문에 성인의 도가 진작되었던 것이다.
후세에 고승을 흠모하는 자들은 경대부(卿大夫)와 사귀면서도 낮은 사람만큼도 예의를 차릴 줄 모르며, 자기 처신은 제멋대로인 용렬한 사람만도 못하다. 더구나 승원스님이 천자를 뵌 일이나 태연자약했던 혜원스님과 비교가 되겠는가. 그러면서도 우리 불도가 흥성하고 납자들이 수행 잘하기를 바란들 될 수 있겠는가. 가르침은 보존하려 하면서 적임자를 구하지 않으면 가르침이 존재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생각하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다.
순희(淳熙) 정유(丁酉:1177)년에 크신 은혜를 하직하고 평전서산(平田西山)의 조그마한 마을에 붙어 살게 되었는데, 매일 가까이서 보고 듣는 일이 대부분 교만과 속임수여서 옛날의 교풍이 시들어 가고 있었다. 이런 판국에 내 말이 먹혀들어갈 리도 없으므로 몇자 적어 그런대로 자신을 경책할 뿐이다. 『총림성사(叢林盛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