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보훈(禪林寶訓)

선림보훈/34 큰도는 어리석음도 지혜로움도 없다 

通達無我法者 2007. 12. 3. 17:21
34  큰도는 어리석음도 지혜로움도 없다  졸암 덕광(拙庵德光)스님 / 1121∼1203
 

1. 졸암 불조 덕광(拙庵佛照德光)스님이 처음 천복사(薦福寺)에서 설당(雪堂)스님을 참례하였을 때, 관상장이가 한번에 그를 인물로 알아보고는 설당스님에게 말하였다.
"대중 가운데 광상좌(光上座)는 두상〔頂骨〕이 반듯하고, 이마는 넓고 턱은 도타우며, 사지와 양미간 이마 어느 한 군데 모난 곳이 없읍니다. 뒤에 반드시 왕의 스승이 될 것입니다."
효종 황제가 순희(淳熙) 초(1174)에 그를 불러 대면하였는데 마음에 맞아 내관당(內觀堂)에서 7일을 머물게 하고는 전례없던 특별대우를 하며 불조(佛照)라는 이름을 하사하니 소문이 천하에 퍼졌다. 『기문(記聞)』

2. 졸암스님이 승상(丞相) 우윤문(虞允文)에게 말하였다.
"대도는 훤출하여 본래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이 없읍니다. 예컨대 이윤〔伊尹:탕(湯)임금 때의 훌륭한 재상〕과 여망〔呂望:주나라 무왕(武王)때의 어진 신하로 강태공이라 알려져 있음〕이 농사짓고 물고기 잡는 데서 일어나 왕의 스승이 된 것과도 같으니, 어찌 지혜롭고 어리석은 정도를 가지고 헤아릴 수 있겠읍니까. 잡다하게 뒤섞여 있는 상태에서 대장부가 아니라면 누구라서 대도의 대열에 참여할 수 있겠읍니까." 『광록(廣錄)』

3. 선야 암(璇野庵)스님은 항상 황룡스님에 대해 말을 하였다. 
황룡 남스님은 관후(寬厚)·충신(忠信)하고 공순·자애로왔으며 도량은 원대하고 박학하다고 널리 소문이 나 있었다. 항상 운봉 열(雲峯悅)스님과 호상(湖湘)에서 노닐었는데, 한번은 나무 아래서 비를 피하게 되었다. 운봉스님은 두 다리를 길게 뻗고 양 손을 무릎에 얹은 채 마주앉았으나 황룡스님은 홀로 꼿꼿이 앉아 있었다. 운봉스님은 눈을 부릅뜨고 그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였다.
"불조의 오묘한 도는 두서너 집 모인 촌락이나 쓸쓸한 옛 사당 속에서 죽은 모습이나 짓고 있는 생명력 없는 것이 아니오."
그러나 황룡스님은 머리를 조아리고 사례할 뿐, 꼿꼿이 앉기를 더욱 고수하였다. 그러므로 황태사 노직(黃太史魯直)이 그를 칭찬하기를 "황룡 남스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공경을 잃지 않았으니 참으로 총림의 기둥이다" 하였던 것이다. 『환암집(幻庵集)』

4. 자기와 대중을 통솔하는 데는 반드시 지혜가 필요하고, 그릇된 망정을 떨쳐버리는 데는 반드시 깨달음이 필요하다. 깨달음을 등지고 6진(六塵)과 어울리면 마음이 가리워지고, 지혜와 어리석음을 분간 못하면 일이 문란해진다. 『서감사서(書監寺書)』

5. 불감(佛鑑)스님이 태평사(太平寺)에 머물면서 고암(高庵)스님에게 유나(維那)직을 맡겼다. 
고암스님은 어린 나이에 기상이 호탕하여 제방(諸方)의 스님을 무시하며 마음속으로 인정하는 자가 적었다.
하루는 점심공양시간을 알리는 건치〔:작은 종〕가 울리니, 행자가 다른 그릇에 음식을 담아 불감스님 앞에 놓는 것을 보았다. 고암스님은 당(堂)에서 나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하였다.
"오백이나 되는 큰스님들에게 다 이렇게 해드린다면 무엇으로써 후학들에게 모범을 보이겠는가?"
불감스님은 못들은 체하고 있다가 그가 당에서 내려오자 인사하고는 곧 물에다 점심 반찬인 채소를 씻었다. 불감스님은 평소에 비장병(脾臟病)이 있어 기름진 음식을 먹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고암스님은 부끄러워하며 방장실에 나아가 유나직에서 물러나겠다고 하자, 불감스님이 말하였다.
"그대가 한 말은 매우 합당하다. 내 병 때문에 그러했을 뿐이다. 성인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치로써 모든 장애를 뚫는다'라고. 먹는 것이 호화롭지 못하니 대중들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대는 뜻과 기상이 분명하고 원대하니 뒷날 종문의 기둥이 될 것이다. 이를 받아들이는 데 어려워하지 말기를 바란다."
불감스님이 지해사(智海寺)로 옮겨가자 고암스님은 용문사(龍門寺)를 찾아갔는데 그 후 불안(佛眼)스님의 법을 이었다.

6. 대체로 관원과 법담을 나누며 말을 주고받으려면 반드시 알음알이를 제거하여 상대방이 망상의 소굴 속에 앉아 있게 하지 말고, 바로 향상일구〔向上一著子〕만을 밝히게 해야 한다.
묘희스님께서도 `사대부와 마주할 때, 그가 질문하면 대꾸하고 질문이 없으면 대답해서는 안된다. 이런 사람이라야 옳으리라' 하셨는데, 이 말씀은 시대에 도움이 되고 주지의 체통도 상하게 하지 않으니 간절히 생각해야 되리라. 『여흥화보암서(與興化普庵書)』

7. 땅이 기름지면 만물을 잘 기르고, 주인이 어질면 인재를 훌륭히 기른다. 그런데 요즈음 주지라고 불리우는 자들은 대중은 아랑곳 않고 자기 욕심만 급하게 채운다. 착한 말 듣기를 싫어하고 악한 허물 가리기를 좋아한다. 방자하고 삿된 행동으로 한 때의 뜻은 쾌활하게 하나, 반대로 소인들에게 허물 가리기 좋아하고 충고 듣기 싫어하여 자기가 했던 것들을 고스란히 받게 되니 주지의 도가 어찌 위태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홍노서(與洪老書)』

8. 졸암스님이 야암(野庵)스님에게 말하였다.
"승상인 자암거사(紫巖居君)가 묘희스님을 이렇게 말하였다.
`묘희스님은 평소 도덕·절개·의리·용기를 우선하시니, 친할 수는 있어도 멀리하지는 못하고 가까이는 해도 범접하지는 못하며 죽일 수는 있어도 욕되게 할 수는 없는 분이다. 거처는 방탕하지 않고 음식도 멋대로 맛을 탐하지는 않으며 생사와 재앙에 임해서도 무심히 넘겼으니, 이 분이야말로 간장(干將)·막야()의 보검으로서 함께 칼끝을 다투기가 어려운 상대라 하겠다. 다만 해를 입어 다치지나 않을까 미리 걱정스러울 뿐이다.'
뒤에 과연 자암거사의 말처럼 되었다." 『환암기문(幻庵記聞)』

9. 야암스님은 주지하면서 납자들의 사정을 잘 알아주고 총림의 일에 밝았다. 언젠가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어느 총림의 주지라면 반드시 목적과 실천이 뚜렷한 납자를 가려내어 도와주어야 한다. 
그 일을 마치 머리에 빗이 있고 얼굴에 거울이 있듯 한다면 이익과 병통·좋고 나쁜 것이 숨겨지지 못하리라.
이는 자명(慈明)스님이 양기(楊岐)스님을 얻고 마조(馬祖)스님이 백장(百丈)스님을 만났던 경우처럼 물과 물이 서로 합하듯 거슬릴 수 없으리라." 『환암집(幻庵集)』

10. 껍데기만 받아들이는 말세 학인들은 남의 이론이나 들을 뿐, 자기 체험을 중시하지 않아서 결국 오묘한 도를 찾지 못한다. 그러므로 `산은 높은 것을 싫어하지 않으므로 그 가운데는 무거운 바위가 있고 푸른 숲에 싸여 있으며, 바다는 깊은 것을 싫어하지 않기 때문에 안으로는 사해의 큰 물과 깊은 소용돌이가 있다'는 말이 있게 된 것이다.
대도를 탐구하는 요점은 높고 깊은 것을 궁구하는 데 있다. 그런 뒤에야 그윽하고 은미한 곳까지 밝히고 현상의 변화에 무궁하게 응할 수 있다. 『여근노서(與覲老書)』

11. 졸암스님이 우시랑(尤侍郞)에게 말하였다.
"성현의 뜻이 그 속은 느슨한 듯하나 이치는 분명하고, 겉은 여유롭지만 일은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일을 주관함에 있어서는 빨리 이루어짐을 바라지 않고 꾸준함을 인정하며, 반드시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을 대수로 여기지 않고 여유를 갖고서 살피는 태도를 높이 삽니다.
이로써 성인의 뜻을 펼쳐가기 때문에 만세에 뻗치도록 계속되며 과실이 없는 것입니다." 
『환암집(幻庵集)』

12. 시랑 우공(尤公)은 말하였다.
"조사 이전에는 주지라는 직책이 없었으나 그 뒤 세상에 응하여 도를 실천하느라고 부득이해서 주지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극히 가난하여 비바람을 가릴 정도였으며 음식은 거칠어 주린 배를 채웠을 뿐이었읍니다. 고생으로 초췌해진 모습은 근심스럽기 짝이 없을 정도였지만 왕공대인(王公大人)이 한번 만나 보고자 해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읍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세운 총림은 돌무더기 내려앉듯한 거리낌 없는 기세여서 천지를 떠들썩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후세엔 그렇지 못하여 높은 마루·넓은 집에서 아름다운 옷·풍성한 음식으로 턱짓만으로도 자기의 뜻대로 되었읍니다.
이때 마군의 무리가 비로소 의기양양하게 그 마음을 요동하며 권세있는 문전에 기웃거리고 꼬리치며 불쌍하게 봐주기를 바랐읍니다. 심지어는 교묘하게 훔치고 폭력으로 빼앗기를 마치 대낮에 남의 황금을 움켜잡듯〔正晝攫金〕하였읍니다. 그리고 다시는 세간에 인과법칙이 있다는 사실 따위는 돌아보지도 않았읍니다.
묘희스님이 이를 쓴 것이 어찌 박산(博山)만을 위해서였읍니까? 곳곳에 팽배한 악습을 철저히 들춰내 털끝만큼도 빠뜨리지 않았으니, 이는 마치 편작(扁)이 이슬에 약을 복용*하고 환자의 오장육부를 훤히 꿰뚫어보듯 하였읍니다. 이 말을 믿고 받들어 실천한다면 따로 불법을 구하는 일이 무슨 필요가 있겠읍니까." 『견영은석각(見靈隱石刻)』

13. 시랑 우공이 졸암스님에게 말하였다.
"옛날에 묘희스님은 임제스님의 도가 스러져가는 마당에 일으켜 세워놓고도 성품이 겸허하여 도를 보았노라고 떠들어대지 않으셨읍니다. 평소에 권세 있는 집에 달려가지 않았으며 이양(利養)에도 구차하지 않았는데, 언젠가는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만사를 제뜻대로 쾌락만을 찾아서도 안되며, 사치스럽고 게으른 태도를 지녀서도 안된다. 
만사 중에는 시대에 도움이 되고 대중을 편케 해주는 것이 있는가 하면, 허물만 있을 뿐 효과는 없는 일도 있게 마련인데, 사치와 방일을 멋대로 한다면 되는 일이 없으리라.'
어리석은 나는 이 말씀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드디어는 평생의 훈계로 삼았읍니다.
노스님께서 지난날 주상(主上:왕)으로부터 내관당(內觀堂)에 유숙하도록 예우를 받은 것은 실로 불법의 행운입니다. 자비 원력을 게을리하지 마시어 착한 데로 나아갈 길을 밝게 여시고 대중을 책임진 도가 더욱 넓어지게 하소서. 그리하여 후배들이 이제껏 익힌 습관만을 도모하지 않고 각각 원대한 계획을 품게 하소서. 그러면 어찌 총림을 이롭게 구제하는 길이 아니겠읍니까." 『연시자기문(然侍者記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