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보훈(禪林寶訓)

선림보훈/39 미물까지 덮는 자비를 베풀다 

通達無我法者 2007. 12. 3. 17:27
39  미물까지 덮는 자비를 베풀다  간당 행기(簡堂行機)스님 
 

 1. 간당 행기(簡堂行機)스님은 파양(陽)지방의 관산(管山)에 20년이나 머물면서 명아지국과 기장밥을 먹으며 마치 세간의 영달엔 뜻을 끊은 듯하였다.
언젠가는 하산하다가 길가에서 슬피우는 소리를 들었다. 스님은 측은하게 여기며 그에게 다가가 연유를 물었더니, "온 집안이 학질병에 걸려 두 식구가 죽었으나 가난하여 시신을 거둘 도구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스님은 특별히 시장에 나가 관을 대여받아 장례하였는데, 이 소문을 듣고 고을 사람들이 감탄해 마지 않았다.
시랑 이춘년(李卵年)이 사대부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고을의 간당 행기노스님은 도 있는 납자이다. 더우기 자비로운 은혜가 사물에게까지 미쳤으니, 스님을 관산에서 쓸쓸하게 오래 머물게 할 수 있겠는가."
마침 추밀(樞密)인 왕명원(汪明遠)이 여러 관부를 순찰하다가 구강군수(九江郡守) 임숙달(林叔達)에게 이르자, 그는 원통전에 법석을 마련하고 스님을 맞이하려하였다. 스님은 명을 듣자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도가 시행되겠구나." 
그리고는 즉시 기쁜 마음으로 주장자를 끌고 왔다. 법좌(法座)에 올라 설법하기를 "이 자리는 사람 살리는 약을 파는 데가 아니라 죽은 고양이를 팔 뿐이니, 그런 줄도 모르고 생각없이 먹었다간 온 몸에서 식은 땀을 뺄 것이다"하였다. 그러자 승속이 깜짝 놀랐으며 법석이 이때부터 크게 떨치게 되었다. 『뇌암집(瀨庵集)』

2. 옛날엔 몸을 수행하고 마음을 다스리면 다른 사람과 그 도를 나누어 가졌고 사업을 일으키면 다른 사람과 그 공로를 함께 하였으며, 도가 완성되고 공덕이 드러나면 남과 그 명예를 함께 하였다. 그리하여 도는 완전히 밝아지고 공업은 다 성취되었으며 명예는 영화로왔다.
요즈음 사람들은 그렇질 않다. 자기의 방법만 고수하며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나을까 염려할 뿐 아니라, 또 선(善)을 따라 의로움을 힘써 자신을 넓히지도 못한다. 또한 자기의 공로를 독점하여 남이 그것을 차지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덕 있고 유능한 사람에게 맡김으로써 자신을 크게 하지도 못한다. 이 때문에 도는 가리워지고 공로는 손상되며 명예는 욕스러워지는 꼴을 면치 못한다.
이것이 옛날 납자와 요즘 납자의 큰 차이다.

3. "도를 배우는 것은 마치 나무를 심는 일과도 같다. 잎이 무성해야 베어서 땔감에 공급하고 좀 자란 뒤에야 찍어서 서까래를 만들며, 더 자라면 베어서 기둥을 만들고 완전히 커져야 대들보가 되니, 이는 노력을 많이 들여야 그 쓸모도 커진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때문에 옛사람은 그 도가 견고하고 커서 좁지 않았고 지향하는 목적은 멀고 깊어서 지나치게 세속적이지 않았으며, 말은 고상하여 천박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침 때를 잘못 만나 추위와 주림으로 언덕이나 골짜기에서 죽었다 해도, 그가 남긴 가풍과 공덕은 백 천년토록 뻗쳐 뒷사람들이 본받고 전하였던 것이다.
가령 지난날 짧은 도로 구차하게 용납되고 가까운 목적으로 영합되기를 구하며, 비루한 말로 세력 있는 이를 섬겼더라면 그 이익은 자기만을 영화롭게 하는 데 그쳤을 뿐, 남은 은택이 후세에 두루 미칠 수 있었겠는가." 『여이시랑이서(與李侍郞二書)』

4. 간당스님이 순희(淳熙) 5년(1178) 4월에 천태산 경성암(景星巖)에서 은정사(隱靜寺)로 다시 부임하게 되었다.
급사(給事)였던 오패(吳 )는 휴휴당(休休堂)에서 노년을 편안히 보내고 있었는데 도연명(陶淵明)의 시에 13편을 화답하여 가는 길을 전송하였다.

(1)
숲 속으로 돌아온 뒤
나는 세상과 멀어졌네
선지식 한 분이 계셨으니
때로는 나의 움막 찾아오셔서
함께 법담을 나누며
불서 읽는 나를 사랑하셨네
이윽고 경성암 떠나시니
나도 떠날 준비해야 하겠네
문득 나도 발우를 펴고
스님 따라 소반을 공양하며
진속(塵俗)의 누를 벗어나
깊이 바위 속에 묻히고 싶네
이 바위 정말로 높아
산해도(山海圖)에서 우뚝 빼어났으나
스님의 고상함에 비한다면
도리어 그만 못하다 하리.
我自歸林下 已與世相疎
賴有善知識 時能過我廬
伴我說道話 肯我左佛書
旣爲巖上去 我赤爲膏車
便欲展我鉢 隨師同飯蔬
脫此塵俗累 長與巖石居
此巖固高矣 卓出山海圖
若比吾師高 此巖還不如
(2)
내가 사는 산굴 속
사면이 우뚝한 겹겹의 바위
경성암이라 불리는 바위 있어서
가보고자 한 지 몇년 되었나
지금에야 절묘함을 확인하고서
일견에 뭇 산이 작게 보였네
다시 스님이 주인 되었으니
산과 스님 모두 깊어 쉽사리 말 못하겠네
我生山窟裏 四面是顔
有巖號景星 欲到知幾年
今始信奇絶 一覽小衆山
更得師爲主 二妙未易言
(3)
호산 속에 있던 내집도
눈만 뜨면 숲과 언덕뿐이나
수려한 이곳에 비하면
비교 안될 언덕 정도니
구름 서린 산 천리에 뻗어 있고
샘물은 사철 흐르네
내 이제야 비로소 와보니
오호(五湖)에서의 노닐음을 능가하네
我家湖山上 觸目是林丘
若比玆山秀 培 固難 壽
雲山千里見 泉石四時流
我今裳一到 已勝五湖遊
(4)
내 나이 일흔 다섯
나무 끝에 비껴가는 석양빛 같아
몸은 아직 죽지 않았다 해도
어찌 오래 갈 수 있으랴
그래도 숲 속에 머무는 것은
스님과 말년을 빛나게 하렴이었네
외로운 구름 한 점 어느덧 흩어지니
멀리 또 가까이 청황빛이 선명하네
我年七十五 本末掛殘陽
縱使身未逝 赤能豈久長
尙冀林間住 與師共末光
孤雲俄暫出 遠近駭蒼黃
(5)
평소에 산을 사랑하였으나
세속에 얽매여 가련키도 하였어라
지난날 이 고을 맡았을 때엔 
고요한 이 산을 알지 못하다가
스님 그리워 왔건만 또 떠나시니 
부끄러워라. 내 다시 무얼 말하리
그래도 오래 머물지 마시고
돌아와 함께 여생 보내소서
肯山端有固 拘俗赤可憐
昨守當塗郡 不識隱靜山
羨師來又去 愧我復何言
尙期無久住 歸送我殘年
(6)
마음은 꺼진 재 같고 
몸은 죽은 나무 같으시나
납자들의 큰 귀의처 되심이 
빈 골짜기 메아리 답하듯 하네
저의 더러운 몸 보살피사
최상의 법(法)으로 씻어 주시고
다시 원하옵나니 부처님의 법등 널리 펼치사
저희를 위해 대대로 밝혀 주소서
師心如死灰 形赤如枯木
胡爲衲子歸 昭響答空谷
顧我塵垢身 正待醍 浴
更願張佛燈 爲我代明燭
(7)
무성한 바윗가 나무
여름 들어 모두 그늘 이루니
오랫동안 가시밭 땅이
하루아침에 총림이 되었네
내 납자와 함께 
해조음(海潮踵) 들으렸더니
모였다간 흩어지는 인생
갑작스런 이별에 새삼 마음 놀라네
扶疎巖上樹 入夏總成陰
幾年荊棘地 一倦成叢林
我方與衲子 共聽海潮踵
人生多聚散 離別忽驚心
(8)
스님과 내왕한 세월
길지는 않지만
어느덧 친한 사이 되었고
풍류도 뛰어났어라
스님은 바위에 편히 앉으시고 
나는 먹을 양식 모았네
행여 스님이 일찍 돌아오신다면
즐거운 마음 다함 없으리
我與師來往 歲月雖未長
相看成二老 風流赤異常
師宴坐巖上 我方爲聚糧
師能早歸 此樂猶未央
(9)
분분히 선(禪)을 배우는 자
경쟁하듯 분주하네
말만 꺼냈다 하면
어리석은 뜻 자부하나
도의 경지를 살펴보면 
스님 같은 이 거의 없어라
상승법(上乘法) 전하는 사람이여
임제(臨濟)의 뒤를 영원히 빛내소서
紛紛學禪者 腰包競奔走
裳能說葛藤 癡意便自負
求其道德尊 如師蓋希有
願傳上乘人 永光臨濟後
(10)
우리 고을의 많은 스님네들
운해(雲海)처럼 드넓은데
대기(大機)는 오래 전에 없어졌으나
다행히 소기(小機)에 의지하니
일잠(一岺 : 원극 언잠스님)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완전하여 둘 다 모자람 없어라
당당한 두 노숙의 선(禪)이여
온 나라가 모두 기대합니다
吾邑多緇徒 浩浩若雲海
大機久已亡 賴有小機在
仍更與一岺 純全兩無悔
堂堂二老禪 海內共期待
(11)
옛날엔 주지하는 일 없었고
법지(法旨)만을 전했을 뿐이니
색공(色空)을 깨달으면
그대로 생사를 초월하였네
못난 중 본래면목에 어두우니
어찌 서쪽으로 돌아갈 길 알겠으리오
선상(禪滅)에 앉아 장사나 하니
불법은 이제 무엇을 의지하랴
古無住持事 但只傳法旨
有能悟色空 便可超生死
庸僧昧本來 豈識西歸履
買帖坐禪滅 佛去將何時
(12)
스님 중에 고승 있듯
선비도 고사(高君) 있다네
나는 고사 아니나
거친 마음으로나마 그칠〔止〕 줄 알았네
스님도 그러한 분이시라
그렇지 못할까 근심하였어라
나와 스님, 이웃집 사람임이 
어찌 그리도 다행이온지
僧中有高僧 君赤有高君
我雖不爲高 心祖能知缺
師是個中人 特患不爲爾
何幸我與師 俱是隣家子
(13)
스님도 원래 가난한 화상이요
나도 궁색한 수재(秀才)라네
곤궁 참는 마음 이미 사무쳤으니
늙은이 어찌 되돌아오지 않겠나
지금 스님과 잠시 이별하나
천석(泉石)은 시기치 말라
인연 따라 나에게 되돌아온들
스님이야 어찌 마음이 있으랴
師本窮和尙 我赤窮秀才
忍窮俱已徹 老肯不歸來
今師雖暫別 泉石莫相猜
應緣聊復我 師豈有心哉 『경성석각(景星石刻)』

4. 급사(給事) 오공(吳公)이 간당스님에게 말하였다. 
"옛사람은 천암만학(千巖萬壑) 사이에서 모든 사려분별을 끊고서 흐르는 시냇물을 마시고 나무열매를 먹으며 마치 부귀공명에는 뜻을 끊은 듯하였읍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주지를 맡으라는 명을 받게 되면 방아지기 등의 천한 일로 자기의 잘난 자취를 숨기고 살아갔으며 애초에 출세에는 마음이 없었으니, 그러므로 끝내는 불법을 이어가는 조사의 대열에 끼게 되었읍니다. 그러므로 무심(無心)에서 얻으면 그 도와 덕은 넓어지고, `구할 것이 있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헤아리면 그 명성과 목적은 비루해집니다.
스님께서는 도량이 원대하셔서 고인의 자취를 계승, 관산(管山)에서 11년이나 깃들 수 있었읍니다. 그리하여 드디어는 총림의 훌륭한 그릇을 이루셨읍니다.
요즈음의 납자들은 안으로는 지키는 것이 없고 밖으로 분주하고 화려한 것을 좇아갑니다. 
그리하여 긴 안목은 줄어들고 큰 뜻도 없어 불교를 부지하고 돕지를 못합니다. 때문에 스님보다 한참이나 못한 것입니다." 『고시자기문(高侍者記聞)』

5. 사람의 마음〔常情〕은 미혹이 없는 경우가 드문데, 이는 맹신에 가리우고 의심에 막히며, 가볍다고 소홀히 하고 애착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믿음이 치우치면 말만 듣고 사실을 생각하지 않으므로 드디어는 타당성을 잃는 말을 하게 된다. 의심이 심하면 사실이라 해도 그 말을 듣지 않고 드디어는 사실을 놓치고 듣는 경우가 있게 된다. 어떤 사람을 가볍게 보면 중요한 일까지 빠뜨리고, 그 일만 아끼다 보면 버려야 할 사람을 놔두게 된다. 이는 모두가 자기 생각을 구차하게 멋대로 하고 도리에 맞는지를 묻지 않았기에, 드디어는 불조의 도를 망각하고 총림의 인심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통사람이 경솔하게 여기는 것을 성현은 소중하게 여긴다. 옛 스님은 말하기를, "원대하게 계획하는 자는 우선 가까운 데서 시험하고, 큰 것을 힘쓰는 자는 반드시 은미한 데서 조심한다" 하셨다. 그러므로 널리 듣고 채택하여 중도를 살펴 운용함이 중요할지언정 실로 실정에 맞지 않는 고상함만을 흠모하고 특이함을 좋아하는 데에 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여오급사서(與吳給事書)

6. 간당스님은 성품이 말고 온화하여 자비로운 은혜가 남에게까지 미쳐갔으니, 혹 납자에게 약간의 잘못이 있다 해도 덮어주고 보호하여 그의 덕을 이루어 주었다.
언젠가는 이렇게도 말하였다.
"사람이라면 누군들 허물이 없겠는가. 허물을 고치는 데에 장점이 있는 것이다."
스님이 파양 지방 관산에 머물던 날, 마침 몹시 추운 겨울이라 눈이 연일 내려 죽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하였으나, 스님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러더니 이런 노래를 지었다.

지로(地爐)에 불 없고 객승의 바랑 비었는데
세모(歲暮)에 버들꽃 같은 눈 내리네
누더기 덮었더니 고목 같은 몸 불붙듯 하여
고요하고 쓸쓸한 곳에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렸네.
地爐無火客囊空 雪昭楊花落歲窮
衲被蒙頭燒 木出 不知身在寂寥中

스님은 평생 도에 자적하면서 영화나 명예를 중하게 여기지 않았다. 여산(廬山) 원통(圓通)스님의 청을 받고 부임하던 날도 주장자와 짚신뿐이었으나 스님의 씩씩한 기색을 보는 자들은 속으로 알아보았다.
구강군수(九江郡守) 임숙달(林叔達)은 스님을 가리켜 불법의 대들보이며 나루터라고 평하였다.
그 일로 사방에 이름이 알려졌으나 벼슬에 나아가느냐 들어앉느냐의 문제에 있어서는 실로 옛 스님들의 체통과 품격을 체득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죽던 날엔 천한 심부름꾼까지도 눈물을 흘렸다.

7. 시랑인 장효상(張孝祥)은 풍교(楓橋)*의 연장로(演長老)*에게 편지를 드려 말하였다.
"옛날의 모든 조사들은 주지 맡는 일이 없었읍니다. 문호를 개방하고 제자들을 받아들였던 것은 마지 못해서였읍니다. 그러다가 상법(像法)마저 쇠퇴한 시기에는 실제로 땅을 떼어 주거나 관직 임명장으로 절을 매매한다는 말이 있을 지경에 이르렀읍니다. 지난날 풍교사(楓橋寺)가 어지러웠던 경우도 모두가 이러한 물건들 때문이었읍니다.
스님의 관직에 대한 처신은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바와 같이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올 때, 새끼와 어미가 안팎으로 동시에 쪼아대듯 원래 힘을 들이지 않고 인연이 있으면 머물고 인연이 다하면 문득 떠나셨읍니다.
그런데 여래를 팔아먹는 무리들은 이 주지 자리에 앉으려고 지옥 갈 업을 짓고 있으니, 차라리 누구라고 지적하여 맡기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한산사석각(寒山寺石刻)』

* 풍교:소주의 한산사(寒山寺)앞에 있음. 
* 연장로(演長路):상주 화장(華藏)의 축암(逐庵) 종연(宗演)선사. 대혜선사에게 법을 얻었다. 
남악의 제 16세 법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