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安)은 몸이 되고 반(般)은 휴식이 되며 수의(守意)는 도가 된다. (왜냐면) 수의는 계를 범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고, 금(禁)은 또한 보호하는 것이다. 보호한다는 것은 일체의 것이 잘못되지 않도록 두루 지키는 것이다. 마음이란 의식이 쉬고 있는 것이니, (이때에) 또한 도가 된다.
해설 숨을 들이마시면 배가 불러오고 산소가 들어와서 세포를 활기차게 해준다. 그러므로 숨이 들어오는 것을 생명의 창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숨을 내보내는 것은 그러한 작용을 일단 쉬는, 새로움을 위한 휴식이다. 들숨이 생生이라면 날숨은 멸(滅)이다. 멸이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음의 생을 위해서 쉬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과 멸은 서로 관련되어 있다. 멸을 통해 생이 있고, 생은 멸에 의해서 다시 나타난다. 생과 멸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가진 하나이다. 그러므로 둘이 아니다.
호흡을 살펴보더라도 숨이 들어와서 극치에 이르면 자연히 나가게 마련이다. 들어오는 것과 나가는 것이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즉 입출일여(入出一如)이다. 그런데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에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들숨과 날숨에 혼란이 오기 쉽다. 무의식 상태에서 호흡을 하게 되면 들어오도록 되어 있는 숨이 잘못되는 경우가 많다. 가령 어떤 일 때문에 놀랐을 때에는 숨이 들어오지 못하고 나가는 숨도 제대로 나가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크게 놀랐을 때는 신경이 마비되어 얼굴이 창백해지거나 의식을 잃고 쓰러지기도 한다. 그러나 들숨과 날숨에 정신을 집중하면 호흡은 있는 그대로, 정상적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정상적인 호흡은 자연의 도리요, 있는 그대로의 진리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의식이 한 곳에 집중되어 주관과 객관이 하나가 되면 우리는 의식의 심층에 자리잡고 있는 본래의 마음으로 되돌아갈 수 있게 된다. 심층의식이 우리의 본래 마음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 이끌려 구속받을 때는 의식이 집중되지 못하고 밖으로 달리며 쉴 줄을 모른다. 의식이 밖으로 달려나가지 않고 자신의 심층 속에서 쉬고 있을 때에 비로소 본래의 모습으로 존재하게 된다. 이처럼 정신집중을 통해 의식이 자기 자신 그대로 안정되어 쉬고 있는 상태에서는 주관은 주관대로, 객관은 객관대로 제모습을 갖추게 되고, 또한 제각각 움직이지 않게 된다.
들어오고 나가는 숨에 정신을 집중하면 그 숨은 길고 충분하게 들어오고 또한 길고 충분하게 나간다. 생명의 창조와 휴식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면서 자연의 도리를 그대로 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들숨과 날숨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 곧 안반수의는 우주의 진리 자체이며 살아있는 모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