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부처와 중생의 차이

通達無我法者 2007. 12. 7. 14:26

부처와 중생의 차이

                                                                                          

인터넷 불교대학/ 혜거

 

부제불제불(夫諸佛諸佛) 장엄적멸궁(莊嚴寂滅宮) 
어다겁해(於多劫海) 사욕고행(捨欲苦行)
중생중생(衆生衆生) 윤회화택문(輪廻火宅門)
어무량세(於無量世) 탐욕불사(貪慾不捨)

한문에서 지아비부(夫)자가 처음 나오면 발어사입니다. 말을 시작할 때 한마디하는 것이죠. 제불제불은, 즉 “모든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이니까 수없이 많은 부처님을 뜻하고 모든 부처님께서 적멸궁을 장엄하신 것은 저 수많은 겁 바다에 욕심을 버리시고 고행을 하신 때문이며 삼세의 일체중생들이 불집 속을 윤회하는 것은 한량없는 세상을 살아오면서 탐욕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뜻입니다. 부처님은 적멸궁을 만들고 중생은 아방궁을 만든다고 하죠. 아방궁을 불태우니까 불길이 어느 정도 오래 탔느냐면요, 석달 동안 탓답니다. 여기에 관한 재미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글짓는 것으로 학문의 실력을 겨루곤 했잖아요. 우리나라 선비하고 중국선비가 누가 글을 잘짓는가 내기를 했어요. 시 한수를 나누어 짓자고 했지요. 시는 네 구를 지어야 한수니까 한사람이 두구를 짓고 나머지 한사람이 두 구를 지으면 돼죠. 글에 자신없는 사람은 못해요. 먼저 시를 지으려면 시제(詩題)가 있어야 되는데 ‘소아방궁’ 즉 아방궁이 타버린 것에 대해서 짓자고 했습니다. 먼저 우리나라 선비가

“위수탕탕동유거하니 강동어부습숙어라(渭水湯湯東流去, 江東漁夫拾熟魚).”

이렇게 지었어요. 즉 아방궁전 밑으로 흐르는 강이 위수라는 강이 있어요. 그런데 아방궁전의 탄 불길이 얼마나 강했던지 그 밑으로 흐르는 강물이 뜨거운 물이 되어 흘러가 마침내 동쪽으로 흘러갔더니 그 끓는 물 덕분에 강동쪽에 사는 어부들은 삶은 고기를 쭙더라는 뜻이에요.
이것을 듣고 중국사람이 씩 웃더니 대구를 맞춰요. 

“화제직상구만리하니 상제무둔왈 열열이라(火災直上九萬里, 上帝撫둔曰 熱熱).”

즉 불길이 하늘 높이 구만리 올라가니 옥황제가 궁둥이 뜨겁다고 펄펄 뛰더라는 뜻이죠. 우리나라 선비는 아방궁전 밑으로 흐르는 강에서 동쪽에 있는 강으로 강의 범위를 넘지 않았는데 중국선비는 하늘을 구만리나 올라가 옥황상제까지 닿았어요. 상상력을 초월하는 사람들이 중국 사람입니다. 어쨌거나 그 아방궁은 누가 짓느냐, 세상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죠. 그리고 강동 어부가 삶은 고기 줍고 옥황상제가 궁둥이 뜨겁다고 하는 것이 결국 아방궁의 종말입니다. 그러한 종말이 없는 궁이 적멸궁이구요. 이해되시죠? 적멸궁은 아방궁의 반대말입니다. 아방궁은 허망한 궁전이지만 적멸궁은 영원한 궁전입니다. 모든 부처님께서 마지막 원이요, 최후의 이상세계로 세우는 적멸궁은 부처님께서 장엄하셨기에 영원히 멸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고통없는 세계입니다. 
어다겁해(於多劫海), 즉 다겁의 세월이죠. 다겁은 시간을 뜻합니다. 즉 부처님께서 적멸궁을 장엄하신 까닭은 오랜 세월 동안 자기 욕심을 버리고 고행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적멸궁을 세우려면 고행을 해야 되는데 우리는 수행을 하겠다고 하면서 고행은 피하고 도(道)만 통하려고 합니다. 중생의 욕심이 너무 지나치죠. 
어떤 분들은 “나 고생 많이 했는데......” 하시겠지만 고행에 비하면 그런 고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스님들을 보면 세상 사람들의 힘으로는 못 따라갑니다. 지금 대부분의 스님들이 그럭저럭 사는 것 같지만 수행하는 스님들은 수행에 딱 들어가면 열 시간이고 스무 시간 동안 꼼짝 않고 있습니다. 가부좌 틀고 한번 앉으면 일주일에서 열흘 동안 꼼짝 않고 잠도 안자고 수행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일주일 동안 밤낮없이 앉아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자기 몸뚱이가 그래도 있겠습니까? 자기를 몇 번 죽여야 일주일이 가는지 말로 설명이 안됩니다. ‘나’라는 자기가 있는 한 고통스러워서 견디질 못해요. 그러나 그것을 견딜 수 있다는 것은 자기를 죽이고 또 죽이고 몇 번씩 죽여야 가능합니다. 이러한 고통스런 과정을 거친 후에 세운 것이 적멸궁인 것입니다. 이러한 적멸궁은 사욕고행(捨欲苦行) 즉 욕심을 버리고 고행하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반대로 중생과 중생이 화택문에서 윤회를 합니다.『법화경』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를 화택문에 비유합니다. 즉 불집에 비유했는데 비단 『법화경』뿐 아니라 여름철에 날파리들이 불에 타서 죽는 것을 볼 수 있죠. 불에 다가가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타죽을까요? 바로 날파리들의 소견이 불 옆으로 가게 돼 있어요. 그렇다면 그런 소견이 왜 생겼을까요? 날파리는 불에 가서 타죽을 때 사람들이 본능적인 쾌락을 느끼는 것처럼 그런 쾌락을 느낀다고 해요. 그것이 업(業)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런 업을 갖고 태어나면 정말로 큰일 아니겠습니까. 죽는 자리에 가서 저는 좋다고 펄쩍펄쩍 뛰니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날파리만 그런 것이 아닌 모양입니다.『법화경』의 화택 비유를 살펴보면 아이들이 어마어마한 궁궐 속에서 놀고 있는데 그 집에 불이 나죠. 놀이에 빠진 아이들에게 부모들이 아무리 다그쳐도 소용없어요. 집에 불이 났으니 밖으로 나오라고 소리를 질러도 아이들에게는 소리가 들리지 안잖아요. 그래서 부모가 지혜를 내죠. 아이들이 무엇에 빠졌는가 살펴봅니다. 그리고는 아이들이 놀이에 빠졌으니 놀이로 빼내야겠다 싶어 수레 놀이를 제안합니다. 그 놀이가 삼거(三車), 즉 양이 끄는 수레(羊車), 사슴이 끄는 수레(鹿車), 소가 끄는 수레(牛車) 세 개의 수레죠. 그 당시에는 수레가 아이들이 좋아하는 놀이감이었나 봅니다. 그 결과 세 개의 수레가 아이들을 화택에서 건져냈죠. 여기서 아이들이 불난 집에서 밖으로 나올 줄 모르는 모습은 중생이 탐진치에 빠져서 집이 훨훨 타고 있는데도 버리지 못하는 모습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탐진치보다 더 큰 탐진치를 내놓으셨죠. 큰 욕심 때문에 작은 욕심을 버리게 만든 것이 바로 부처님의 방편이란 말이에요. 그렇다면 중생과 중생이 화택문에서 윤회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불난 집에서 아이들을 꺼내 놨지만 또 다른 아이들이 불난 집에 들어간다는 거죠. 그래서 중생이 윤회한다는 말입니다. 즉 무량한 세월 속에서 탐욕을 못버리니까 화택문에서 윤회를 한다는 거죠. 부처님께서는 욕심을 버리고 고행을 하셨기에 적멸궁을 장엄하시고 중생은 욕심을 버리지 못했기에 화택문을 빙빙 돌면서 윤회를 한다는 거죠. 사람에게 탐욕이 한번 생기면 사람도 안보이고 아무 것도 안보이나 봐요. 우리나라 재벌들 보면 같은 회사를 만들죠. 그러다 결국은 서로 무너지죠. 탐욕이 생기니까 계산이 안되나 봐요. 재벌가들이 정보가 많은 사람인데 왜 무너질까요, 탐욕에 가리면 절대로 다른 게 안보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다음 두 가지는 꼭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첫째 탐욕을 얼마만큼 버릴까? 둘째 탐욕을 버리려면 반드시 더 큰 욕심이 있어야 버려져요. 그것이 원력이에요. 탐욕은 아무것도 안보이게 만들지만 원력은 훤히 보이게 만들어요. 이런 차이가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부터 욕심을 원력으로 바꾸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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