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수행자가 머물 곳(處行)

通達無我法者 2007. 12. 7. 14:50

수행자가 머물 곳(處行)

인터넷 불교대학/ 혜거

수유재지(雖有才智) 거읍가자(居邑家者)
제불시인(諸佛是人) 생비우심(生悲憂心)
설무도행(設無道行) 주산실자(住山室者)
중성시인(衆聖是人) 생환희심(生歡喜心)

“비록 재주와 지혜가 있지만 수행자가 마을에 나와서 살면 모든 부처님이 그 사람으로 인해 슬퍼하고 근심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되고, 설령 도를 닦는 수행이 없더라도 산 속에서 머무는 자는 뭇 성인들이 그 사람으로 인해 기뻐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된다.”

수행을 아무리 많이 했다고 해도 저처럼 서울에 십년 넘게 살면 모든 부처님께서 탄식을 하십니다. 사람이란 언제든지 경계에 따라서 마음이 변하게 돼 있거든요. 경계에 움직이지 않는 경지에 이르기 전까지는 산중에 있어야 발심이 더 잘돼요. 지금 여러분도 집에 계실 때 보다 법당에 들어가면 마음이 한결 달라지는 것을 느끼죠. 마찬가지로 수행자가 산중에서 살면 그와 같아요. 모든 신장이 옹호를 해줘요. 그런데 스님이 산중에 살지 않고 마을로 내려가면 신장님으로부터 옹호를 못 받아요. 그렇게 되면 자기 힘으로 살아야 되니까 모든 부처님이 슬프고 근심스런 마음을 내신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못난 스님이라도 산중에 살면 모든 성인이 환희심을 내고 신장이 옹호를 해주세요. 그래서 스님은 산중에서 살아야 돼요. 저도 이렇게 불자님들 안 만나고 산중에서 혼자 앉아 있으면 이렇게 만난 것보다 여러분들에게 더 큰 힘을 드릴 수 있어요. 사람을 만나서 설득하고 만나서 교화하는 것이 실제로 얼마나 감화를 주겠습니까? 진짜 공부 잘하는 사람이 여러분들에게 말 한마디 안하고 수행만 깊이 들어가면 그 공부가 세상으로 전해져요. 따라서 진정 공부를 하겠다고 발심한 사람은 돌아다니면 안돼요. 시중에 나와서 교화하는 것이 포교인 줄 아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아무런 흔적도 풍기지 않고 동해바다 한복판에 떠있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만날 수도 없어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날마다 그쪽을 향해서 절을 하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면 그 힘이 크겠어요. 아니면 마을에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는 힘이 크겠어요. 여러분들이 스스로 합장하는 그것이 힘이지, 제가 아무리 말씀드려 봐야 그것은 힘이 아니에요. 그래서 저도 산중에 가려고 해요. 저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가서 있어줘야 합니다. 그래야 그 힘으로 세상 사람들을 진정 교화할 수 있습니다.

수유재학(雖有才學) 무계행자(無戒行者)
여보소도이불기행(如寶所導而不起行)


“비록 재주가 있고 공부한 것이 있더라도 계행(戒行)이 없는 자는 마치 보물이 있는 곳으로 끌고 가도 일어나 행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보물이 있는 곳에 앉아만 있으면 자기 것이 되겠어요? 일어나서 갖고 가야 내 것이 되는데 계행이 없으면 보배를 짊어지고 갈 힘이 없는 것과 같아요. 진짜 보배는 마음이 청정하고 견성성불(見性成佛) 하는 것이죠. 그런데 견성성불이라는 보배는 계행으로만 이뤄집니다. 마찬가지로 불자님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힘도 계행에서 나와요. 마음속으로 돈에 대한 욕심이 딱 끊어져 보세요. 어떤 현상이 벌어질 것 같습니까? 일가친척에 사돈에 팔촌까지 돈이라고 하는 돈은 다 나에게 맡기려고 할거예요. 그러나 돈에 욕심 많은 사람 앞에서는 있는 돈도 없다고 하는 게 이치예요. 돈에 욕심이 끊어진 사람은 그래서 부자가 돼 있어요. 욕심으로 돈을 챙기려고 하는 사람에겐 돈이 숨어버립니다.

수유근행(雖有勤行) 무지혜자(無智慧者)
욕왕동방이향서행(欲往東方而向西行)


“비록 부지런하기는 하나 지혜가 없는 사람은 동쪽 방향으로 가고자 하면서도 서쪽으로 가는 것과 같다.”

동쪽으로 가려고 생각하고 갔는데 서쪽으로 가고 말더라는 말이죠. 요즘 사람들이 다 그래요. 동쪽으로 간다고 하고 서쪽에 가 있어요. 그리고는 동쪽이라고 고집까지 부려요. 지혜가 없으니까 그래요. 중국의 공자가 말하기를 큰 부자는 하늘에 있고 작은 부자는 부지런한 데 있다고 했어요. 그러나 영리하게 부지런해야지 미련하면 아무리 부지런해도 부자될 기미가 없어요. 야보 스님께서 『금강경』에서 말씀하셨죠. 

“송곳으로 열번 찍는 것보다 가래삽으로 한번 찍는 게 낫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지혜는 어디서 나옵니까? 자기 소견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남이 행동하는 것을 보고 배우는 겁니다. 옆 사람이 하는 것을 보면 지혜가 생기거든요. 여름 수련대회 때 사람들이 모여서 공부하는 곳에 자주 가야 합니다. 자꾸 가서 보면 자기가 십년 동안 연구할 것을 말 한마디로 배워 버려요. 

유지인소행(有智人所行) 증미작반(蒸米作飯)
무지인소행(無智人所行) 증사작반(蒸沙作飯)


“지혜가 있는 사람의 수행은 쌀로 밥을 짓는 것과 같으며, 지혜가 없는 사람의 수행은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다.”

지혜 있는 사람이 행하는 바는 쌀을 찧어서 밥을 짓는 것과 같고 지혜가 없는 사람이 행하는 바는 모래를 찧어서 밥을 하는 것과 같다. 모래는 억겁을 불을 때도 밥이 되지 않는다란 뜻이죠. 그러니까 산다는 것은 전부 지혜예요. 
지혜는 어떻게 해야 생길까요? 삼매(三昧)라야 진짜 지혜가 나와요. 그래서 우리는 삼매를 체험해야 하고 삼매로 들어가야 하는 거예요. 삼매가 아니면 절대 지혜가 나오지 않습니다. 삼매가 되면 왜 지혜가 나올까요? 여기 구정물통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구정물을 맑게 하려면 가라앉히면 되죠. 가만 놔두면 불순물이 가라앉잖아요. 그것이 삼매입니다. 구정물을 가만 놔두면 맑은 물로 변하지만 흔들면 다시 흐려져 버리죠. 번뇌가 일어나면 다시 구정물이 되고 번뇌가 쉬면 맑은 물이 되는 이치와 같아요. 삼매는 구정물을 가라앉히는 도리예요. 물이 맑으면 뭐든지 비추잖아요. 사물을 갖다 대면 비추는 것, 이것이 지혜란 말입니다. 내 마음의 번뇌가 가라앉아 사물을 비출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해요. 그런데 지금 우리는 물이 탁해서 비추지 않죠. 안 비추니까 자꾸 다른 소리만 하는 거예요. 다른 소리만 하니까 서로 안 비추는 사람들끼리 이것은 하얗다, 저것은 검다 하면서 제대로 판단 못하는 사람들끼리 네가 옳다 내가 옳다 난리를 치는 것이 현실이란 말입니다. 제대로 비추면 하얀지 검은지 알잖아요. 그래서 삼매에 들어간 사람이 말하면 그것이 진리예요. 그래서 삼매가 필요한 거예요. 맑은 물이 사물을 비추는 도리, 사물에 거울을 갖다 대면 비추는 도리, 그것이 지혜입니다. 거울에 때가 끼면 아무것도 비출 수 없듯 우리에게 번뇌망상은 거울의 때죠. 구정물을 맑히고자 한다면 절대 흔들어서는 안됩니다. 정지가 되어야 구정물이 가라앉아요. 따라서 삼매에 들려면 먼저 시선을 한군데 모으고 정지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관세음보살 정근으로 기도해 보신 분들은 아실 거예요. 제1단계로 소리를 자기가 들으라고 하죠.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2단계는 기도하면서 관세음보살이 보여야 해요. 자기 소리가 보여야 해요. 3단계는 관세음보살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것이 삼매예요. 염불 속에 삼매가 있고 경을 보면서도 삼매에 들 수 있고 참선을 하면서도 삼매가 있습니다. 뜻이 있고 원력이 있는 사람은 삼매를 체험하게 돼 있어요. 일생 동안 살아가면서 삼매 한번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이 세상에 안올 사람이 온 거예요. 구정물을 가라앉히는 데 무슨 재주가 필요하겠습니까? 그냥 놔두고 가라앉히면 됩니다. 기운도 필요없고, 재주도 필요없고, 나이도 필요없어요. 가만 놔두면 맑아져 버려요. 이렇게 쉬운 것을 더디게 다른 곳에서 찾고 있어요. 지금부터라도 남은 생애 동안 참회하고 맑혀야겠다는 원을 세워야 합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관세음보살 하나만 붙잡는 거예요. 하나를 붙잡지 않으면 열 가지, 천 가지가 머릿속에서 계속 쏟아져 나오잖아요. 백 가지 생각을 막는 방법은 한가지만 붙잡는 것밖에 없어요. 그러면 다른 생각이 없어져 버려요. 관세음보살을 24시간 동안 잡을 수 있으면 그야말로 일행 삼매요, 보통 끈기로는 안되는 일이죠. 우리는 한 시간 동안 관세음보살 염하는 운동을 하자구요. 아침 먹고 나서 하루에 한 시간만이라도 만사 제쳐두고 관세음보살만 하는 거예요. 설거지하는 시간이면 설거지하면서 관세음보살을 하면 되는 거예요. 일단 무슨 일을 하든지 관세음보살을 들으면 놓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게 1년 동안만 해보세요. 금방 삼매에 들어가요. 공부하는 것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정말로 내가 공부하겠다는 마음만 내면 어렵지가 않아요. 
수행을 하려면 일단 정해진 시간에 공부하고 그 나머지 시간에는 온갖 짓을 해도 업에 걸리지 않는다했습니다. 그러면 분명하고 자신있게 세상을 살 수 있어요. 자기 몫을 해놓고 다른 일을 하세요. 그러는 사이에 업이 바뀌어 버려요. 
한 시간을 완전하게 관세음보살이라고 붙들다 보면 실제로 한 시간을 했는데 자기 생각으로 1분이 안된 것을 체험하게 돼요. 이게 바로 삼매예요. 삼매에 대한 개념이 확실해야 들어갔다 나왔는지 알아요. 삼매가 뭔지 모르고 삼매는 이럴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돼요. ‘관세음보살’ 하면서 한시간을 지냈는데 자기 느낌으로 1분 지난 것으로 느껴지거나 관세음보살을 두 번 부르니까 하루가 다 지나갔다고 느낄 때 그것이 삼매예요. 이것을 체험했으면 고개 끄덕이며 남한테 웃으면서 다녀도 됩니다. 무슨 블랙홀 같은 곳을 통과해야 삼매인 줄로 아는데 그것은 착각입니다. 그런 삼매는 없어요. 삼매의 과정을 거친 후에 지혜가 나오는 것입니다.

공지끽식이위기장(共知喫食而慰飢腸) 
부지각법이개치심(不知覺法而改癡心)


“모두들 밥을 먹어 배고픈 창자를 위로할 줄은 알면서도 불법을 깨우쳐 어리석은 마음 고칠 줄을 알지 못하더라.”

자신이 어리석다고 알면 다 고칠 텐데 아무리 미련한 사람도 자기가 어리석다는 것은 모릅니다. 사람만 어리석은 것을 모르는 게 아니라 소도 소인 줄 모르나 봐요. 알면 자살하지 살겠어요. 한번 생각해 봐요. 사람들이 풀 몇 덩어리 줘놓고 쟁기질시켜 일생 동안 일만 시키고는 죽을 때 도살장으로 보내죠. 모르니까 꾸역꾸역 주는 것 받아먹으며 살고 있잖아요. 그러면서도 소는 어리석은지 모르잖아요. 사람들은 자신이 어리석은 줄도 모르는 데다 자신이 잘났다고 사니까 더 어리석어요. 꾸미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더 어리석죠. 겉모양만 신경쓰다 보면 공부할 마음이 나오겠어요? 내가 부족한 것을 느껴야 공부할 마음이 나오는 거예요. 법을 공부해서 어리석은 마음을 지혜로 바꾸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행지구비(行智具備) 여거이륜(如車二輪)
자리이타(自利利他) 여조양익(如鳥兩翼)


“수행과 지혜를 모두 갖추는 것은 마치 수레의 두 바퀴와 같으며, 나와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은 마치 새의 두 날개와 같으니라.”

행동과 지혜가 일치 안되는 사람, 특히 정치인들이 그렇죠. 말은 번드르르한데 행이 없어요. 종교인들도 마찬가지예요. 정치인들이 나라 살림을 잘하게 하려면 종교인들이 먼저 잘해야 해요. 그래야 배우고 따라가요. 행동과 지혜가 구비되면 자동차 두 바퀴 달린 것과 마찬가지로 잘 굴러갑니다. 또 나와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은 새의 두 날개와 같으니, 자리이타(自利利他)가 동시에 이뤄지는 사람이 인격완성체예요. 쉽게 말하면 이기주의가 극심하면 인격완성이 됐다고 볼 수 없죠. 반대로 이타주의가 심해도 인격완성이 됐다고 볼 수 없어요. 이 세상 사람들에게 종교인이 해야 할 일은 바로 자리이타요, 그 완전한 인격체를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해요. 말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줘야 세상 사람이 보고 배울 수 있어요. 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배울 가치를 상실하게 되면 종교는 있으나 마나한 거예요. 학원처럼 다니는 것이 종교가 아니죠. 최고 지도자들이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요, 세상을 바꾸는 힘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종교인 특히 우리 불자들은 스님들이 공부를 잘하게 만들기 위해 여러분들이 스님보다 공부를 더 많이 하세요. 스님들이 그냥 머리를 깎은 게 아니예요. 급하면 하룻저녁에 해요. 신도들이 공부가 높아 스님들을 능가하겠다, 그러면 바로 합니다. 
옛날에『금강경』을 짊어지고 다니는 한 스님이 있었어요.『금강경』에 대해서는 나만큼 아는 이가 없다며 천하제일이라고 뽐내며 다녔죠. 길을 가다가 한 노파한테 밥을 달라고 하니까 노파가 물었어요.
“스님, 짊어진 것 뭡니까?”
그러자 스님은 자신만만하게 
“『금강경』이올시다.”
했어요. 그러자 다시 노파가 물었죠.
“『금강경』에 과거심불가득이요, 현재심불가득이요, 미래심불가득이라는 말이 있는데 스님은 어디다가 점심을 드시겠습니까?”
노파의 말에 스님은 꼼짝 못하고 그자리에서『금강경』을 불태워 버리잖아요. 이런 선생이 있어야 해요. 그런데 왜 중국에만 그런 재가자가 있고 우리나라에는 없을까요? 
중국 한나라를 통일해서 유방을 임금으로 만든 한신 장군도 빨래하는 아주머니한테 분심을 자극받았잖아요. 한신이 장군이 되기 전에 키는 멀대같이 크고 기운은 장사인데 백수건달이었어요. 얼마나 건달이었으면 밥을 못 먹어서 길거리에 쓰러져 있겠어요. 빨래하는 아주머니가 데려다가 밥 한그릇을 먹였죠. 정신이 돌아온 남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은혜는 제가 반드시 후일에 갚겠습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이놈아 네 한몸도 지탱 못하면서 은혜를 어떻게 갚아.”
그러자 분심이 났어요. 뭔가는 해야겠기에 기웃거리다 군대 소집공고가 났어요. 당장 달려갔죠. 키 크고 힘세니까 가자마자 몇 달 안돼서 장군이 됐어요. 그래서 한나라를 통일시키죠. 그러나 결국 빨래하는 아줌마가 통일시킨 셈이에요.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자리이타예요. 이것을 성취하면 새의 두 날개를 달고 날아가는 것과 똑같죠. 나혼자 잘해서는 안되고 타인과 함께 이뤄져야 인격완성입니다. 그 인격완성을 이룰 수 있는 토양을 만들 수 있도록 발심해야 합니다.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행자의 지계(持戒)  (0) 2007.12.07
수행자의 염불(念佛)  (0) 2007.12.07
인연(因緣)에 따른 수행  (0) 2007.12.07
천당과 지옥에 가는 者  (0) 2007.12.07
부처와 중생의 차이  (0) 2007.1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