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심결(修心訣)

14. 깨달은 뒤에 닦는 수행 방법

通達無我法者 2007. 12. 7. 16:16

14. 깨달은 뒤에 닦는 수행 방법

 

 

 

문=스님께서 말씀하신 바에 이하면, 깨달은 뒤에 닦는 수행 방법 가운데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가지는 뜻에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자기 성품(自性)의 선정과 지혜이고, 둘째는 상(相)을 따르는 선정과 지혜입니다. 

자기 성품의 문(自性門)은 "걸림 없는 고요함과 앎이 원래가 자연 그대로 무위(無爲)이므로 어떠한 객관세계도 상대될 것이 없으니 어찌 번뇌를 떨어버리려는 노력이 필요하겠으며, 한 생각도 감정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얽힌 인연을 잊으려는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고 하시며 결론지어 말씀하시기를 "이것이 단번에 깨닫는 돈문(頓門)에 들어간 사람이 자기의 성품을 떠나지 않고 선정과 지혜를 고루 평등하게 가지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상(相)을 따르는 수행문(隨相門)에서는 "이치에 맞추어 산란함을 거두고 사물을 판단하고 공(空)을 관하여 혼침과 산란함을 고루 다스려서 무위(無爲)에 들어간다"하고, 결론짓기를 "이것은 점차로 깨닫고 닦는 점문(漸門)의 열등한 근기의 수행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선정과 지혜에 관하여 의심이 없지 않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수행할 경우, 먼저 자기 성품(自性)의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은 후에 다시 상(相)을 따르는 방법으로 혼침과 산란함을 고루 다스린 다음에 자기 성품(自性)의 수행 방법에 들어가는지 궁금합니다. 

먼저 자기 성품의 선정과 지혜에 의지한다면 걸림 없이 고요함과 앎이 자유자재하기 때문에 다시 더 다스릴 공부가 없는데 무엇 때문에 또 상(相)을 따르는 선정과 지혜를 필요로 하겠습니까. 이것은 마치 흰옷에 쓸데없는 무늬를 새겨 그 바탕을 망가트리는 일과 같습니다. 

그리고 먼저 상(相)을 따르는 방법으로 선정과 지혜로 다스리는 공부를 이룬 다음에 자기 성품(自性)의 방법으로 나아간다면 그것은 분명히 점차로 수행하는 열등한 근기, 점문(漸門)의 낮은 근기가 깨치기 전에 점차로 익히는 것이니, 어찌 돈오문(頓悟門)을 수행하는 사람이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데 있어서 노력없는 노력을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동시여서 전후가 없다면, 두 가지 방법의 선정과 지혜의 돈(頓)과 점(漸)이 다른데, 어떻게 한꺼번에 같이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즉, 돈오문(頓悟門)의 사람들은 자기 성품(自性)의 방법에 의하여 걸림이 없고 자유로워 노력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점문(漸門)의 열등한 근기의 사람은 상(相)을 따르는 방법으로 나아가 다스리는 공부에 힘쓸 것입니다. 

이렇게 두 가지 방법의 돈(頓)과 점(漸)이 다르고 우열이 분명한데 어떻게 먼저 깨치고 뒤에 닦는 방법에서 어떻게 두 가지를 함께 아울러 말씀하십니까? 다시 잘 설명하시어 의심을 풀어 주십시오. 

답=나의 해석과 설명은 분명한데 그대가 스스로 의심을 내는구나. 말을 따라 알려고 하면 의혹이 더욱 더 생기고, 뜻을 얻어 말을 잊으면 따질 필요가 없다.
만약 그 두 가지 방법에 대해서 각기 수행할 것을 판단한다면, 자기 성품(自性)의 선정과 지혜를 닦는 사람은 돈오(頓悟)하는 방법에서 노력 아닌 노력으로 움직임과 고요함을 함께 활용하여 자기의 성품을 닦아 스스로 불도를 이루는 사람이다. 

상(相)을 따르는 방법으로 선정과 지혜를 닦는 것은 깨닫기 전에 점차로 수행하는(漸門) 근기가 낮은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이며, 마음마다 의혹을 끊고 고요함만을 취함을 수행이라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 두 방법의 수행은 돈(頓)과 점(漸)이 각각 다르니 혼동하면 안된다. 그래서 깨달은 뒤에 수행하는 방법에서 상을 따르는 방법을 겸해서 말한 것은 점차로 닦는 점문의 열등한 근기를 가진 사람이 수행할 것만 전적으로 취한 것이 아니라 그 방편을 취하여 임시로 쓸 뿐인 것이다. 

왜냐하면 단번에 깨닫는 돈문(頓門)에도 근기가 뛰어난 사람이 있고 열등한 사람도 있으므로 한 가지 예로 그 닦는 길을 판단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만약 번뇌가 사라지고, 몸과 마음이 홀가분해서 선(善)에도 근기가 뛰어난 사람이 있고 열등한 사람도 있으므로 한 가지 예로 그 닦는 길을 판단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만약 번뇌가 사라지고, 몸과 마음이 홀가분해서 선(善)에서도 선을 떠나고, 악에서도 악을 떠난 분별심이 없는 무심(無心)한 경지에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동요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성품(自性)의 선정과 지혜에 의지해서 자유롭게 걸림이 없이 겸해 닦으면 천진(天眞)하여 조작이 없다. 움직이거나 고요하거나 항상 선정(禪定)이어서 자연의 이치를 성취할 것이니, 어찌 상을 따르는 방법을 통해 마음을 다스릴 필요가 있겠는가. 병이 없으면 약도 구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비록 먼저 단번에 깨달아 돈오(頓悟)했더라도 번뇌가 두텁고, 지난날 익힌 버릇이 굳고 무거우면 어떤 대상이나 상황을 대할 때마다 생각마다 감정을 일으키고, 얽힌 인연을 만날 때마다 마음이 번뇌의 대상을 만난다. 

혼침과 산란함에 떨어져 고요함과 밝게 아는 마음이 흐려지는 사람은 상(相)을 따르는 방법의 선정과 지혜를 통해서 마음을 다스려서 혼침과 산란함을 고루 다스려 무위(無爲)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