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

선의 입장

通達無我法者 2007. 12. 10. 11:38

불법 핵심 뽑아 근원 설명

 

 

어떤 사람이 대주선사에게 물었다.

“저는 율사와 법사와 선사 가운데 누가 가장 훌륭한 자인지 모르겠습니다.”

대주선사가 말했다.

“말하자면 율사는 계율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려주고 출가자의 수명에 대한 유훈을 전승해준다. 그리하여 계율을 유지하는 것과 범하는 것을 명확하게 알려주어 계율을 지키고 범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도록 해주고, 걷고 머물며 앉고 눕는 위의를 잘하여 계율의 규범을 여법하게 행하도록 하며, 계율을 수지하여 깨침에 이르는 수행의 과위[四果]의 첫걸음을 내디디게 해준다.

 

그리고 법사는 부처님의 설법자리에 앉아서 부처님의 불법을 막힘없이 설해준다. 이로써 수많은 대중을 상대하여 진리로 향하는 길을 알려주고 반야의 오묘한 문을 열어주고 보시하는 자와 보시를 받는 자와 보시물이 청정한 도리를 평등하게 베풀어준다.

 

또한 선사는 불법의 핵심을 뽑아서 곧바로 마음의 근원을 알게 해준다. 이로써 물 밖으로 꺼내고 물 속에 집어넣으며 오므리고 펼치면서 종횡으로 중생을 상대하고, 도리와 현상을 고루 평등하여 곧바로 여래를 친견하게 하고 생사의 깊은 뿌리를 뽑아주며, 있는 그 자리에서 삼매를 터득하게 한다.

 

이와 같기 때문에 만약 참선으로 마음을 안정시키지 못한다면 어떤 경지에 도달하더라도 곧 망연자실하고 말 것이다.”

이에 그 사람이 감사하게 예를 드리고 물러갔다.

 

기존 토대 구축한 교학

차별화 방법 제시 노력

 

규봉종밀은 선교일치를 설명하면서 부처님의 마음은 선이 되었고 부처님의 말은 교가 되었다고 말하였다. 따라서 마음처럼 본래 말이 없는 경지로부터 깨침처럼 말로써 어찌할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선이고, 언설의 가르침처럼 말이 있는 경지로부터 깨침처럼 말로써 어찌할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교라고 하였다. 후대에는 여기에 첨가하여 부처님의 행위는 율이 되었다고 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교와 선과 율의 세 측면으로 말하였다. 이것은 선과 교와 율의 근원이 부처님으로서 차별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기에서는 선과 교와 율의 구분하고 있다. 나아가서 교와 율보다 선이 가장 훌륭하다고 말한다. 그 까닭은 이미 교와 율과는 달리 선의 우위를 강조하려는 목적에서 〈선문보장록〉이 편찬되었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의 몸을 예로 들자면 손발과 몸통과 머리의 역할이 다르다고 해서 각각 어떤 부위는 소중하고 어떤 부위는 소중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 바와 같다.

 

때문에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선문보장록〉이 출현할 무렵의 고려시대 당시에 교학과 율보다는 아직 선의 입장이 보편화되지 못한 시대임을 감안해야 한다. 그것은 마치 신라 말기에 최초로 선법이 도입되었을 때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처음에 중국으로부터 선법을 도입하였을 때는 학문적으로 불교를 공부하거나 또 직접 경전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수행하는 전통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너무나 생소한 것이었다. 중국선의 초기에 보리달마가 교학자들로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박해를 받으며 독살의 위험을 겪은 것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입장에서 선법은 기존에 토대를 구축하고 있던 교학의 틈바구니에서 그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선법이 당시의 교학과는 다르고 나아가서 교학보다 우수하다는 차별화 방법을 시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문에 이 무렵에는 선법이 율이나 교학보다 현저하게 훌륭하고 다르다는 주장이 많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차제에 선과 교와 율을 등장시켜 선사와 법사와 율사의 특징과 그 역할을 각각 피력한 것이다. 곧 무엇을 강조하고 무엇을 부각시키는가 하는 것은 해당 분야에 종사하고 관심을 지닌 사람에게는 무시하지 못할 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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