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입능가경(入楞伽經)

입능가경 제 2 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4. 11:23
[42 / 415] 쪽
  
입능가경 제 2 권
  
  
  원위 천축삼장 보리류지 한역
  
  
  
3. 집일체불법품(集一切佛法品) ①
  
  그 때에 거룩하신 대혜보살은 부처님께 다시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식[諸識]이 몇 가지로 발생[生]하며 머물고[住] 멸(滅)합니까?"
  부처님께서 거룩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대혜여, 모든 식(識)이 발생하며 머물고 멸하는 것은 생각으로 헤아리는 자가 능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혜여, 모든 식은 각각 두 가지로 발생하며 머물고 없어진다. 대혜여, 모든 식이 두 가지로 멸하는 것이란 첫째는 모양[相]이 멸하는 것이요, 둘째는 상속(相續)이 멸하는 것이다.
  대혜여, 모든 식에는 또한 두 가지 머묾이 있으니, 첫째는 모양이 머묾이요, 둘째는 상속이 머묾이다.
  대혜여, 모든 식에는 또한 두 가지 발생함이 있으니, 첫째는 모양이 발생함이요, 둘째는 상속이 발생함이다.
  대혜여, 모든 식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무엇을 세 가지라 하는가? 첫째는 전상식(轉相識)이요, 둘째는 업상식(業相識)이며, 셋째는 지상식(智相識)이다.
  대혜여, 식을 자세히 말하면 여덟 가지가 있지만 간략하게 말하면 두 가지이니, 무엇을 두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요별식(了別識)이요, 둘째는 분별
  
  
[43 / 415] 쪽
  사식(分別事識)이다.
  대혜여, 밝은 거울 속에 모든 물건의 모양이 나타나는 것과 같이 요별식도 또한 여러 가지 거울의 영상(影像)이 나타난다.
  대혜여, 요별식과 분별사식 이 두 가지 식은 차별이 없이 서로 함께 하여 원인이 된다.
  대혜여, 요별식은 헤아릴 수 없는 훈습[不思議薰]과 헤아릴 수 없는 변화[不思議變]가 원인이다.
  대혜여, 분별사식(分別事識)은 분별하여 경계를 취하는 것이 원인이 되고, 무시(無始)로부터 희론(戱論)에 거듭 훈습(薰習)되어 온 것이다.
  대혜여, 아리야식(阿梨耶識)의 허망하게 분별하는 여러 가지 훈습이 멸하면 모든 근(根)도 또한 멸하리니, 대혜여, 이를 모양[相]이 멸한다고 한다.
  대혜여, 상속(相續)함이 멸한다는 것은 상속하는 원인[因]이 멸하면 바로 상속이 멸하고, 원인이 멸하고 연(緣)이 멸하면 바로 상속이 멸한다고 하는 것이다.
  대혜여, 이른바 그는 법에 의지하고 연(緣)에 의지한다는 것이다. 법에 의지한다고 함은 무시(無始)로부터 희론(戱論)과 망상(妄想)에 훈습됨을 말함이요, 연에 의지한다고 함은 자심(自心)의 식(識)이 경계를 보고 분별하는 것이다.
  대혜여, 비유하자면 진흙덩이와 미진(微塵)이 서로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니[非異非不異], 금과 금 장신구 또한 그러하여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
  대혜여, 만약 진흙덩이가 미진과 다르다면 그 미진으로 된 것이 아니겠지만, 그러나 실로 그 미진으로 된 것이니, 그러므로 다르지 않은 것이다. 만약 다르지 않다면 진흙덩이와 미진은 마땅히 차별이 없어야 할 것이다.
  대혜여, 이와 같아서 전식(轉識)과 아리야식(阿梨耶識)이 만약 서로 다른 모양이라면 전식이 아리야식에서 나온 것이 아닐 것이며, 만약 다르지 않다면 전식이 멸한다면 아리야식도 또한 마땅히 멸해야 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자상(自相)1)인 아리야식은 멸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으로 대혜여, 모든 식의 자상은 멸하지만, 그 자상이 멸한다는
  
  
  
1) 범어 sva-lak a a 혹은 svabh va. '공상(共相)'의 대칭으로 자성(自性)이라고도 함. 개별적 존재의 체상(體相)을 가리켜 다른 것과 공통되지 않는 자기의 특질을 말한다. 『성유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 권2에 따르면, 제법의 자체(自體)와 체성(體性)으로 오직 증지(證智)로서 알 수 있는 것이고, 경전과 언어로서 해석할 수 있는 것은 '공상(共相)'이라고 한다.
[44 / 415] 쪽
  것은 업상(業相)이 멸하는 것이다. 만약 자상이 멸한다고 한다면 아리야식도 마땅히 멸해야 한다.
  대혜여, 만약 아리야식이 멸한다면 이것은 외도(外道)의 단견(斷見)과 다르지 않은 희론인 것이다.
  대혜여, 저 외도들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경계를 떠나 상속되는 식이 멸하고, 상속되는 식이 멸하면 곧 모든 식도 멸한다."
  대혜여, 만약 상속하는 식이 멸한다면 무시(無始)로부터 왔던 모든 식도 마땅히 멸할 것이다.
  대혜여, 여러 외도들은 상속하는 모든 식이 짓는 자[作者 : 창조자, 주재자]로부터 생겼다고 말하고, 식이 안(眼)과 색(色), 공(空)과 명(明)의 화합에 의지하여 생겼다고 말하지 않으며, 만드는 자가 있다고만 말한다.
  대혜여, 무엇이 외도가 말한 짓는 것인가? 그 뛰어남[勝], 사람, 자재(自在), 시간, 미진(微塵)들이 그 짓는 것이라 한다.1)
  대혜여, 또한 일곱 가지 자성(自性)이 있으니, 무엇이 일곱인가?
  첫째는 집성(集性) 자성(自性)이요, 둘째는 성(性) 자성이요, 셋째는 상성(相性) 자성이요, 넷째는 대성(大性) 자성이요, 다섯째는 인성(因性) 자성이요, 여섯째는 연성(緣性) 자성이요, 일곱째는 성성(成性) 자성이다.
  대혜여, 또한 일곱 가지 제일의(第一義)가 있으니, 무엇이 일곱인가? 첫째는 마음[心]의 경계요, 둘째는 지(智)의 경계요, 셋째는 혜(慧)의 경계요, 넷째는 두 견해[二見]의 경계요, 다섯째는 두 견을 벗어난 경계요, 여섯째는 불자의 자리를 지난[過佛子地] 경계요, 일곱째는 여래의 자리에 들어가서 안으로 행하는[入如來地內行] 경계니라.
  
  
1) 원문에는 없는 구절이나 문맥의 원만한 전개를 위하여 7권본 『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을 참조하여 삽입하였음.
[45 / 415] 쪽
  대혜여, 이는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여러 부처님·여래(如來)·응공(應供)·정변지(正遍知)의 성자성(性自性) 제일의(第一義)의 마음이다.
  대혜여, 이 성자성 제일의의 마음에 의지하므로 제불여래(諸佛如來)는 결국 세간과 출세간에서 부처의 지혜안(智慧眼)을 얻으시고, 같은 모양[同相]과 개별적인 모양[別相]의 모든 법을 건립하시니, 건립하는 바는 외도의 삿된 견해와 같지 않다.
  대혜여, 어째서 외도의 삿된 견해와 같지 않다고 하는가? 그는 자기 마음의 경계를 분별하여 망상으로 보면서, 자기 마음의 생각으로 본 것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혜여, 모든 어리석은 범부는 실체가 없는 것을 제일의(第一義)라고 하여, 있다 없다 하는 두 가지 견해를 말한다.
  대혜여, 그대는 지금 자세히 들어라. 내가 그대를 위하여 말하리라.
  허망하게 분별하여 사물이 있다[有]고 함에 세 가지 괴로움을 끊어야 하니, 무엇이 세 가지인가? 이는 아는 것이 없는 것[無知]과 애착[愛]과 업의 인연[業因緣]의 멸함이니, 자기 마음에서 보는 바는 환상과 같은 경계인 것이다.
  대혜여, 모든 사문(沙門)과 바라문(婆羅門)들이 말하기를, "본래 처음부터 생긴 것은 아니지만 인과(因果)에 의하여 나타난 것이다"라고 하며, 다시 말하기를, "참으로 사물이 있어, 모든 인연에 의지함으로 머문다. 5음(陰)과 18계(界)와 6입(入)이 발생하고 머물며 멸함이 있으니, 생긴 것은 없어지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대혜여, 저 사문과 바라문이 말한 "상속하는 체(體)는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며, 생(生)·멸(滅)·열반·도(道)·업(業)·과(果)·진리[諦]는 파괴하여 없어지는 모든 법이다"라고 하는 것은 단멸(斷滅)의 논리요, 내가 말하는 바가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현재의 법은 오랫동안 가히 얻을 수 없는 까닭이며, 근본을 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대혜여, 비유컨대 병(甁)이 깨뜨려짐에 병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대혜여, 비유컨대 불에 그을린 종자는 싹이 날 수 없는 것과 같다.
  
  
[46 / 415] 쪽
  대혜여, 저 5음과 18계와 6입은 멸하는 것이니, 과거의 음(陰)·계(界)·입(入)이 멸하며, 현재 미래의 음·계·입도 또한 멸한다. 무슨 까닭인가? 자심(自心)의 허망한 분별로 본 것이기 때문이다.
  대혜여, 저 5음과 18계와 6입이 상속하는 체(體)가 없기 때문이다. 대혜여, 만약 본래부터 생긴 것이 없는데, 세 법에 의하여 여러 가지 식이 생긴 것이라면 거북은 어찌 털이 나지 않으며, 모래에서는 어찌 기름이 나지 않는가? 그대들의 세운 결정의(決定義)는 곧 저절로 파괴될 것이며, 그대들이 있다 없다고 말한 것과 이루어지는 인과(因果)도 또한 파괴될 것이다.
  대혜여, 만약 그와 같이 세 법의 인연에 의한다면, 모든 법의 인과인 자상(自相)과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있음[有]과 없음[無]의 여러 모양과 비유와 교법[阿含]과 스스로 깨달아 관찰하는 것들이 마땅히 생길 것이니, 이는 자신의 견해로 훈습된 마음에 의하여 그와 같은 말을 한 것이다.
  대혜여, 어리석은 범부들이 또한 그와 같아서 그러한 나쁜 견해의 해를 입고, 삿된 견해와 미혹한 뜻으로 지혜가 없으면서 망령스럽게 일체지(一切智)의 말이라고 자칭한다.
  대혜여, 만약 어떤 사문과 바라문들이 있어서, 모든 법이 자성(自性)을 떠났기 때문에 뜬구름과 불 바퀴[火輪], 건달바(乾闥婆)의 성(城)과 같아서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환상과 아지랑이와 물 속의 달과 같고, 꿈과 같아서 안팎의 마음이 끝없는 옛적부터 허망하게 분별함과 희론에 의하여 나타난 것이라고 본다. 자기 마음의 허망한 분별로 보고 취할 수 있는 인연도 떠난 것이며, 망상을 없애는 말과 말할 바도 떠난 것이고, 몸이 생활하는데 가져야할 법도 떠난 것이다. 아리야식이 경계를 취하여 서로 화합하는 것도 떠난 것이고, 고요한 경계에 들어간 것이며, 생각이 발생하며 머물고 멸하는 것을 떠난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이 자심(自心)을 사유하고 관찰하여 이렇게 살아간다면, 대혜여, 이와 같은 보살은 오래지 않아 곧 세간과 열반이 평등하다는 마음을 얻을 것이다.
  대혜여, 그는 뛰어난 방편과 치암(痴暗)을 여는 방편으로 모든 중생계가 모두 환(幻)과 같고 거울 속에 얼굴과 같기 때문에 인연이 생기는 것도 없으
  
  
[47 / 415] 쪽
  며, 안과 밖의 경계를 멀리 떠난 것이며, 마음이 바깥 경계를 드러낸 것임을 관찰하고서 차례로 모양이 없는 곳[無相處]에 들어가며, 차례로 아래로부터 위의 지위에 이르는 삼매경(三昧境)에 들어가며, 삼계(三界)가 자심(自心)의 환상인 것을 믿는다.
  대혜여, 이와 같이 수행하는 자는 마땅히 여환삼매(如幻三昧)를 얻을 것이며, 자기 마음의 고요한 경계에 들어갈 것이며, 피안(彼岸)의 경계에 도달할 것이며, 짓는 자가 법을 생기게 한다는 것을 떠날 것이며, 금강삼매(金剛三昧)를 얻을 것이며, 여래의 몸에 들어갈 것이며, 여래의 변화하는 몸[化身]에 들어갈 것이며, 모든 힘과 신통이 자재하여 대자대비(大慈大悲)로 장엄한 몸에 들어갈 것이며, 모든 부처님 국토에 들어갈 것이며, 일체 중생들이 즐기는 곳에 들어갈 것이며, 마음과 뜻과 의식의 경계를 떠날 것이며, 이 몸을 변하여 묘한 몸을 얻을 것이다.
  대혜여,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수행한다면 반드시 여래의 위없는 묘한 몸을 얻는다.
  대혜여, 보살이 여래의 몸을 얻으려거든 마땅히 5음과 18계와 6입, 마음과 인연으로 화합한 법을 멀리 여의고, 발생하고 머물고 멸하는 허망한 분별과 희론을 떠날 것이며, 모든 법은 오직 마음뿐이니, 마땅히 이와 같이 삼계(三界)의 원인도 시작도 없는 예부터 허망한 분별과 희론으로 있음을 알고, 여래의 자리는 고요하여 생(生)함이 아닌 것임을 관찰하여 속 몸의 거룩한 행(行)에 나아갈 것이다.
  대혜여, 그대는 마땅히 오래지 않아 마음이 자재(自在)하고, 공용(功用)이 없는 행의 구경(究竟)에 도달함을 얻을 것이니, 뭇 색상이 마니주(摩尼珠)의 비춤을 따르듯이, 변화하는 몸은 모든 중생의 미세한 마음에까지 들어갈 것이며, 마음의 자리에 들어감으로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차례로 지위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보살이 수행할 마음의 법[自內法]을 잘 알아야 한다."
  그 때에 거룩하신 대혜보살마하살은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원컨대 세존이시여, 여러 보살마하살을 위하여 마음과 뜻과 의식(意識)과 5법과 자체(自體)가 서로 응하는 법문을 말씀하여 주십시오. 이는 여러 부처
  
  
[48 / 415] 쪽
  님과 보살들의 수행하실 곳으로, 마음의 삿된 견해와 경계로 화합한 것을 멀리 떠난 것이요, 이는 모든 언어(言語)와 비유(譬喩)의 체상(體相)을 능히 쳐부술 수 있는 것이며, 이는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마음 법이니, 이 능가성 마라야산(摩羅耶山) 바다의 여러 보살을 위하여 아리야식이 큰 바다 물결과 같은 경계임을 관찰하신 것을 말씀하여 주십시오. 이는 법신여래(法身如來)가 말씀하실 법입니다."
  그 때 부처님께서 거룩한 대혜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셨다.
  "대혜여, 네 가지 인연이 있어 안식(眼識)이 생기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마음임을 알지 못하고 바깥 경계를 취하는 까닭이요, 둘째는 시작 없는 옛적부터 허망하게 색(色)의 경계를 분별함에 훈습되어 회론에 집착한 까닭이요, 셋째는 식자성체(識自性體)가 그러한 까닭이요, 넷째는 여러 가지 색상(色相)을 보기 좋아하는 까닭이다.
  대혜여, 이를 네 가지 인연이 아리야식(阿梨耶識)의 바다에서 큰 파도를 일으켜 능히 전식(轉識)을 내는 것이라 한다.
  대혜여, 만약 안식이 식별을 일으키면 모든 근(根)과 털구멍에서도 한꺼번에 전식(轉識)이 발생하는 것이 거울 속에 모습이 한꺼번에 나타남과 같다. 또한 인연을 따라 차례로 발생하는 것도 있다.
  대혜여, 마치 바닷물에 거센 바람이 부는 것과 같아서 마음의 바다에서도 식(識)의 파도가 일어나서 끊이지 않는 것은 사상(事相)을 따른 까닭이며, 번갈아 둘이 서로 떠나지 못한 까닭이며, 업체(業體)가 서로 묶이게 한 까닭이며, 색체(色體)를 깨닫지 못한 까닭이며, 5식[五識]이 구르는[轉] 까닭이다.
  대혜여, 저 5식의 인(因)을 떠나지 못하고 요별(了別)하는 식(識)의 모양[相]을 의식(意識)이라 하니, 저 인(因)과 함께 항상 흘러 구른다.
  대혜여, 5식과 모든 심식(心識)은 생각하기를, '내가 번갈아 원인이 되어 마음으로 허망하게 분별하며, 모든 경계를 취한다'고 하지 아니하지만, 그러나 저들은 각각 다르지 않고 서로 함께 분별하는 경계를 나타낸다. 이와 같이 저 식은 미세하게 생멸(生滅)하니, 삼매를 닦는 자는 미세한 훈습(薰習)임을 알지 못하고, 수행하는 자는 생각하기를, '나는 모든 식을 멸하고 삼매에 들
  
  
[49 / 415] 쪽
  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수행하는 자는 모든 식을 멸하고 삼매에 드는 것은 아니다. 대혜여, 종자(種子)를 훈습하여 모은 마음은 멸하지 않고 바깥 경계를 취하는 식만 없어진 것이다.
  대혜여, 이와 같이 아리야식의 행상(行相)은 미세하여 부처님과 10지(地)에 머물러 있는 보살마하살을 제외하고는 그 밖의 성문(聲聞)과 벽지불(辟支佛)과 외도의 수행자들은 능히 알지 못하며, 삼매에 들어간 지혜의 힘으로도 또한 능히 알지 못한다. 이는 모든 자리[地]의 행상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며, 지혜 방편의 차별로서 잘 판단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고, 능히 부처의 모든 선근(善根)을 쌓은 것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며, 스스로 나타내는 경계와 분별하는 희론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며, 여러 가지 많은 숲과 같은 아리야식의 굴에 들어가지 못한 까닭이다.
  대혜여, 이는 오직 처음과 중간과 끝까지 참답게 수행하는 자라야 능히 제 마음속의 허망한 소견을 알아볼 것이며, 능히 한량없는 국토에서 여러 부처님께 지위를 받게 될 것이며, 한량없는 자재한 힘과 신통과 삼매를 얻을 것이며, 선지식(善知識)과 불자들에게 의지하여 마음과 뜻과 의식(意識)과 자심(自心)과 자체 경계를 볼 수 있으며, 생사(生死)의 큰 바다가 업(業)과 애착[愛]과 무지(無智)로서 원인을 삼아 있게 됨을 분별한다.
  대혜여, 그러므로 참답게 수행하는 자는 마땅히 선지식을 찾아 친근하여야 할 것이다."
  그 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비유컨대 큰 바다의 물결은
  거센 바람이 일기 때문인 것,
  크나큰 파도가 바다를 치면서
  끊임없이 항상 일어남과 같이,
  
  아리야식도 또한 그러하여
  경계의 바람이 불기 때문에
  모든 식의 물결이
  
  
[50 / 415] 쪽
  뛰놀고 구르면서 발생한다.
  
  푸르고 붉은 색과 흰 마노와
  소금과 젖 맛과 또 석밀(石蜜)과
  여러 꽃나무와 과일들과
  해와 달의 광명이여.
  
  다르지도 않고 다르지 않음도 아니다.
  바닷물에 파도가 일 듯이
  일곱 가지 식도 마찬가지로
  마음과 화합하여 함께 나는구나.
  
  비유컨대 바닷물이 움직이면
  여러 가지 파도가 구르듯이
  아리야식도 또한 그렇기에
  여러 가지 식이 나는 것이다.
  
  마음과 뜻과 의식은
  여러 가지 모양이기에 말했으나,
  모든 식에 개별적인 모양 없으며
  능견(能見)과 소견(所見)의 모양도 없다.
  
  비유하자면 바닷물과 파도는
  둘이 서로 차별이 없는 것처럼
  식과 마음도 이와 같아서
  다른 점 역시 없는 것이네.
  
  마음[心]은 능히 모든 업을 모으고
  뜻[意]은 능히 쌓인 경계를 관찰하며,
  
  
[51 / 415] 쪽
  의식[識]은 능히 식별하기를 마치며
  5식은 분별을 드러낸다.
  
  그 때 거룩하신 대혜보살마하살은 게송으로 부처님께 여쭈었다.
  
  푸르고 붉은 여러 색깔은
  안식이 이렇게 봅니다만,
  물과 파도의 상대적인 법은
  어이 이와 같이 말씀하십니까?
  
  그 때 세존께서는 게송으로 답하셨다.
  
  푸르고 붉은 온갖 색깔은
  파도 속에는 모두 없는 것,
  전식(轉識)을 마음 가운데에 설함은
  범부를 위하여 상(相)으로 말한 것이다.
  
  저 업(業)은 모두 없으니
  마음은 취할 것을 떠난 것이며,
  취(取)한 바와 또한 취하는 것이
  저 파도와 같은 것이다.
  
  몸과 재물이 생하고 머무는 것도
  중생이 식(識)으로 보는 것이니,
  그러므로 전식(轉識)이 나타나니
  파도와 서로 비슷하다.
  
  바다의 물결이 움직이고

  요동치는 것을 분별하면서도

 

 

 

 

[52 / 415] 쪽
  아리야식이 구르는 것은
  어찌하여 알지 못하는가?
  
  범부는 지혜가 없기에
  아리야식을 바다와 같다고 하여
  파도가 움직임은 대법(對法)으로
  그를 비유하여 말한 것이다.
  
  그 때 거룩하신 대혜보살마하살은 다시 게송으로 말하였다.
  
  하늘에 떠오른 밝은 태양은
  그 빛이 두루 위아래와
  중간의 뭇 중생을
  빠짐없이 골고루 비춘다.
  
  여래의 출세(出世)하심이 또한 그러하시니
  범부에게 참다움을 말씀하기 위함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미 구경법(究竟法)을 얻으셨으니
  어찌 진실을 나타내지 않으십니까?
  
  그 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답하셨다.1)
  만약 진실을 말하자면
  그 마음이 진실치 못하니,
  비유하자면 바다의 파도와
  거울 속의 영상과 꿈들이
  
  
  
1) 원문에는 없는 구절이나 문맥의 원만한 전개를 위하여 7권본 『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을 참조하여 삽입하였음.
[53 / 415] 쪽
  일시에 나타나는 것처럼
  마음의 경계도 또한 그렇지만
  경계가 갖추어지지 못하므로
  차례로 나타나는 것이다.
  
  식(識)이란 인식할 바를 인식하며
  뜻[意]이란 그렇지 않음을 그렇다고 하며
  오식(五識)1)은 견해를 나타나게 하나
  정(定)에는 이와 같음이 없다.2)
  비유컨대 뛰어난 화가와
  그의 제자가
  화포(畵布)에 여러 모양을 그리듯이
  나의 설법도 또한 이와 같다.
  
  채색(彩色)은 본래 무늬가 없으며
  붓도 아니고 그릇 또한 아니지만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보기 좋게 여러 모양 그린다.
  
  말은 진실을 떠나 있으며
  진실은 모든 명자(名字)를 떠나 있다.
  내가 얻은 진실한 자리는
  참으로 마음 속 깊이 아는 것이다.
  
  
1) 7권본 『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 참조 번역. 원본에는 "오(吾)"로 되어 있지만 『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에는 "오식(五識)"으로 되어 있음.
2) 7권본 『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에는 "정해진 차례가 없다[無有定次第]"라고 되어 있음. 참고 바람.
[54 / 415] 쪽
  그 깨달음과 깨달을 바를 떠났지만,
  참답게 말하는 것은
  불자를 위하여 말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다르게 분별하여 말한다.
  
  여러 가지가 모두 환상과 같아
  보는 것마다 진실이 아니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로 말함은
  진실과 진실이 아닌 일을 따라서
  
  이런 사람 위하여 말한 것이니,
  말이 그들에게 마땅치 않으면1)
  그들에겐 말하지 않는다.
  
  저 병든 여러 사람에게
  좋은 의사가 약을 주듯이
  여래가 모든 중생을 위하는 것도
  그 마음과 근기를 따라 말한다.
  
  망상의 경계가 아니며
  성문의 경계도 또한 아니고
  모든 여래·세존께서
  스스로 깨달은 경계를 말한다.
  
  "또한 대혜여, 만약 보살마하살이 마음의 허망한 분별과 능히 취함과 취할 바가 경계상(境界相)을 떠난 것을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시끄러운 것을 떠
  
  
  
1) 원문에 없는 구절이나 7권본 『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에 "所說非所應"이 추가되어 있어 그를 참고하여 논리의 원만한 전개를 위하여 삽입하였음.
[55 / 415] 쪽
  나고 수면개(睡眠蓋)를 떠나고서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항상 스스로 수행하는 방편을 깨달아 외도들의 모든 희론(戱論)과 성문(聲聞)·연각승(緣覺乘)의 상(相)을 떠난다면 그는 마땅히 마음에서 나타나는 허망한 분별상을 알 것이다.
  대혜여, 보살마하살이 지혜의 심상(心相)에 머물고자 한다면, 가장 거룩한 지혜의 세 가지 모양을 마땅히 부지런히 닦고 배워야 할 것이다.
  대혜여, 무엇이 가장 거룩한 지혜의 세 가지 모양인가? 이른바 소유하지 않는 모양[無所有相]과 여러 부처님께서 자기 원(願)으로 주지(住持)하는 모양과 속 몸의 거룩한 지혜로서 깨닫는 모양이니, 이를 수행하면 능히 절름발이 나귀의 지혜의 모양을 버리고 곧 보살의 제8지(地)에 들어가서 이 세 가지 거룩한 지혜의 모양을 닦을 것이다.
  대혜여, 무엇이 소유하지 않는 모양인가? 이는 성문과 연각과 외도를 관찰하는 모양이다.
  대혜여, 무엇이 여러 부처님께서 자기 원으로 주지하는 모양인가? 이는 여러 부처님께서 처음부터 스스로 원(願)을 닦아 주지한 모든 법이다.
  대혜여, 무엇이 속 몸의 거룩한 지혜로서 스스로 깨닫는 모양인가? 이는 온갖 법상(法相)에 집착한 바 없이 환(幻)과 같은 삼매를 얻고, 부처님의 경지에 들어가서 수행함이다.
  대혜여, 이것을 가장 거룩한 지혜의 세 가지 모양이라 한다. 만약 이 세 가지 모양을 성취한다면 스스로 깨닫는 거룩한 지혜의 경계에 능히 도달하리니, 그러므로 대혜여, 보살마하살이 가장 거룩한 지혜의 세 가지 모양을 구하려면 마땅히 이와 같이 배울 것이다."
  그 때 거룩하신 대혜보살마하살은 여러 큰 보살 대중의 생각하는 마음을 아시고 여래의 위신력을 받들어 여래께 거룩한 지혜와 행으로 분별하는 법문을 물으셨다.
  "세존이시여, 원컨대 저희들을 위하여 거룩한 지혜와 행으로 분별하는 법문(法門)의 체(體)와 108의 소견에 의하여 분별하는 말씀과 여래·응공(應供)·정변지(正遍知)께서 여러 보살마하살을 위하여 분별하여 말씀하신 자상(自相)과 동상(同相)인 망상 분별의 체(體)와 수행하는데 차별인 법을 말
  
  
[56 / 415] 쪽
  씀해 주십시오.
  저희와 여러 보살은 이 망상 분별의 자체(自體)와 법행(法行)의 차별을 잘 알았으므로 능히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가 깨끗하며, 모든 지위를 잘 알고, 성문과 벽지불의 선정(禪定)인 삼마발제(三摩跋提)의 즐거움을 벗어나고, 여래의 헤아릴 수 없는 경계를 얻어서 수행하기에 5법 자체의 행상(行相)을 떠나고, 부처님의 법신체(法身體)와 진실한 행에 들은 경계로 이룬 것임을 알았으며, 모든 국토에서는 도솔천(兜率天)으로부터 아가니타천(阿迦尼吒天)에 이르기까지 여래의 법신(法身)을 얻었습니다."
  부처님께서 거룩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외도는 삿된 소견으로 공(空)하여 없음에 집착하고 허망한 생각으로 분별하기를, '지혜의 원인이 둘이 있으니, 자체와 자체가 없는 것이다'라고 하며, 토끼의 뿔이 없는 것을 보고 분별하기를, '토끼는 뿔이 없는 것처럼 모든 법도 또한 없다'라고 한다.
  대혜여, 또 어떤 외도는 사대(四大)의 공덕이 실로 있는 것으로 보지만, 보는 이가 각각 차별의 모양이 있는 것을 보고, '실로 토끼는 뿔이 없다'라는 허망하게 집착하고 망상하며 분별하여 '소는 뿔이 참으로 있다'라고 한다.
  대혜여, 저 외도들은 두 견해에 떨어져서 유심(唯心)의 도리를 알지 못하고, 스스로의 마음에 망상과 분별만 증장시킨다.
  대혜여, 몸과 살림살이와 기세간(器世間) 등도 오직 마음으로 분별함이다. 그 토끼 뿔을 분별하지 말고, 있음과 없음을 떠날 것이다.
  대혜여, 또한 모든 법도 분별하지 말고, 있음과 없음을 떠날 것이다.
  대혜여, 만약 어떤 사람이 있음과 없음을 떠났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토끼 뿔이 있다는 분별을 할 수 없으므로 토끼 뿔이 없다고 하는 분별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상대적인 것으로 보고서 토끼 뿔이 없는 것을 분별하지 않을 것이니, 무슨 까닭인가?
  대혜여, 미세한 미진(微塵)을 분석하고 관찰할지라도 진실한 것은 보지 못하고, 성인(聖人)의 지혜로부터 멀어질 것이다. 또한 소뿔이 있다고도 분별하지 말 것이다."
  그 때 거룩하신 대혜보살마하살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57 / 415] 쪽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어리석은 범부가 분별상으로 보지 않고, 추리하는 지혜로서 분별한다면 그 사람은 없음을 보는 것이옵니까?"
  부처님께서 거룩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대혜여, 이는 분별하는 마음을 관찰함도 아니며, 그 사람은 없음을 본 것이라고도 할 수 없으니, 무슨 까닭인가? 허망한 분별심 때문에 뿔에 대한 분별심이 있는 것이다.
  대혜여, 허망한 뿔에 의하여 분별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니, 그러므로 의지하는 바[所依]1)에 의지한 것이다. 상대적인 법을 떠난다면 그 뿔이 없다는 것도 보지 않는다.
  대혜여, 만약 분별하는 마음을 떠나고도 다시 분별이 있다면, 그는 마땅히 뿔을 떠나서 있을 것이요, 뿔이 있음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대혜여, 만약 저 분별하는 마음을 떠나지 못한다면, 그의 법과 미진을 관찰한다 하여도 진실한 것이 있음을 보는 것이 아니다.
  대혜여, 이 모두가 마음을 떠난 것이 아니어서 저 법은 마땅히 없는 것이니, 그 두 법의 있음과 없음을 얻을 수 없는 까닭이다.
  만약 이와 같이 본다면 어떤 법은 있고 어떤 법은 없겠는가?
  대혜여, 만약 있음과 없음을 이렇게 보지 아니한다면 있음과 없음을 분별하지 못하니, 이 뜻은 어떠한가? 바로 소는 뿔이 있다고 보며, 토끼는 뿔이 없다고 보는 이러한 분별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대혜여, 이는 원인이 서로 비슷하지 않기 때문에 있음과 없음의 뜻[有無義]이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니, 외도와 범부와 성문들이 있음과 없음의 뜻을 말하는 두 가지가 모두 성립할 수 없는 까닭이다.
  대혜여, 또 다른 외도는 물질[色]에 원인이 있다고 보고 망상으로 형태와 모양의 길고 짧은 것에 집착하며, 허공은 형상과 분제(分齊 : 한계, 차별)가 없는데, 물질은 허공과 달라서 분제가 있다고 본다.
  대혜여, 허공은 곧 물질이니, 물질이 허공에 들어 있는 까닭이다.
  
  
1) 원본에는 "의의지인(依依止因)"으로 되어 있으나, 7권본 『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에는 "의소의위인(依所依爲因)"으로 되어 있어 그를 참고하여 번역하였음.
[58 / 415] 쪽
  대혜여, 물질이 곧 허공이니, 이 법에 의하여 저 법이 있고, 저 법에 의하여 이 법이 있는 까닭이며, 물질에 의하여 허공을 분별하며, 허공에 의하여 물질을 분별하는 까닭이다.
  대혜여, 사대(四大)의 종류가 발생함에 제 모양[自相]이 각각 다르고 허공에 머무르지 않지만, 사대 속에 허공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혜여, 토끼 뿔도 또한 그와 같아서 소뿔이 있음으로 인하여 토끼 뿔이 없다고 말함이다.
  대혜여, 또한 저 소뿔을 분석하여 작은 분자로 만들면, 저 작은 분자의 모양은 분별하려 해도 볼 수 없으리니, 그 어떤 법은 있으며 어떤 법은 없겠는가? 그럼에도 있다 없다고 말한단 말인가? 만약 이와 같이 관찰한다면 다른 법도 또한 그러할 것이다."
  그 때 부처님께서 거룩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대혜여, 그대는 마땅히 토끼 뿔과 소뿔, 허공과 물질이 다르다는 허망한 소견들을 버려라.
  대혜여, 그대는 마땅히 여러 보살을 위하여 그들에게 토끼 뿔 등의 모양[相]을 떠나라고 말할 것이다.
  대혜여, 그대는 마땅히 자심(自心)의 소견으로 허망하게 분별하는 모양을 알아야 한다.
  대혜여, 그대는 마땅히 여러 부처님의 국토에서 모든 불자를 위하여 그들에게 스스로 마음에서 일체 허망한 경계를 나타낸 것을 말할 것이다."
  그 때 세존께서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물질은 마음속엔 없는 것을
  경계에 의하여 있다고 보나니,
  속 알음[內識]과 중생의 견해와
  몸과 살림살이와 사는 곳과
  
  마음과 뜻과 의식과
  자성(自性)과 다섯 가지 법과
  
  
[59 / 415] 쪽
  두 가지 무아(無我)가 깨끗하다고
  여래는 이렇게 말하네.
  
  길고 짧고, 있음과 없음 등이
  번갈아 가면서 서로 생기니,
  없음 때문에 있음이 이루어지고
  있음 때문에 없음이 된다.
  
  작은 미진체(微塵體)를 분별하여도
  물질이란 헛된 생각을 아니하고
  다만 마음이 안주하는 곳이더라도
  나쁜 소견은 깨끗할 수 없으리.
  
  이 허망한 지혜의 경계가 아니며
  성문들도 또한 알지 못하니,
  여래께서 말씀한 바인
  스스로 깨닫는 경계이네.
  
  그 때 거룩하신 대혜보살마하살은 자심현류(自心現流)를 청정하게 하기 위하여, 또한 여래께 청하여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자심현류를 깨끗이 제거합니까? 점차로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까? 단번에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거룩한 대혜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셨다.
  "대혜여, 자기 마음에 현재 흐르고 있는 번뇌가 깨끗하게 되는 것은 점차로 깨끗해지는 것이지, 단번에 깨끗해지는 것은 아니다.
  대혜여, 비유컨대 암마라(菴摩羅)의 과일이 점차로 성숙해진 것이요, 단번에 된 것이 아닌 것과 같다.
  대혜여, 중생의 자심현류(自心現流)를 깨끗이 함도 또한 그와 같아서, 점차로 깨끗하게 되는 것이지 단번에 된 것이 아니니, 비유컨대 질그릇을 만드
  
  
[60 / 415] 쪽
  는 사람이 여러 그릇을 만들 때 점차로 된 것이요, 일시에 된 것이 아닌 것과 같다.
  대혜여, 부처님께서 모든 중생의 자심현류를 깨끗이 함도 또한 그와 같아서 점차로 깨끗하게 한 것이요, 일시에 깨끗하게 한 것이 아니다.
  대혜여, 비유컨대 대지(大地)가 모든 숲과 약초와 만물을 자라게 하는데 점차로 자라게 한 것이요, 일시에 이루어진 것은 아닌 것과 같다.
  대혜여, 부처님께서 중생의 자심현류를 깨끗하게 함도 또한 그와 같아서 점차로 깨끗하게 한 것이요, 일시에 깨끗하게 한 것은 아니다.
  대혜여,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모든 음악과 노래와 춤과 글씨 쓰기와 그림 그리기 등 여러 가지 기술을 배우는데 점차로 알아진 것이요, 일시에 아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대혜여, 부처님께서 중생의 자심현류를 깨끗이 함도 또한 그와 같아서 점차로 깨끗하게 한 것이요, 일시에 깨끗하게 한 것은 아니다.
  대혜여, 비유컨대 밝은 거울이 분별하는 마음이 없이 일시에 모든 색상(色像)을 함께 나타내는 것 같아 여래·세존도 또한 그와 같아서 분별함이 없이 중생의 자심현류(自心現流)를 깨끗하게 하지만 일시에 깨끗하게 한 것이요, 점차로 깨끗하게 하지 아니하여 그들로 하여금 고요하고 분별이 없는 곳에 머무르게 한 것이다.
  대혜여, 비유컨대 해와 달의 광명이 일시에 모든 색상(色像)을 두루 비추고 선후(先後)가 있지 않는 것과 같다.
  대혜여, 여래·세존도 또한 그와 같아서 중생으로 하여금 자심(自心)의 번뇌와 습기(習氣)의 허물을 떠나게 하고, 단번에 헤아릴 수 없는[不思議] 지혜와 가장 훌륭한 경계를 보여 준다.
  대혜여, 비유컨대 아리야식(阿梨耶識)은 현재의 경계와 자기 몸과 살림살이와 기세간(器世間) 등을 분별하는데 일시에 아는 것이요, 선후가 없는 것과 같다.
  대혜여, 보불(報佛) 여래도 또한 그와 같아서 단번에 중생계(衆生界)를 성숙케 하여 색구경천(色究竟天)1)의 깨끗하고 훌륭한 궁전에 두어 수행케 한다.
  
  
1) 원본에는 "구경천(究竟天)"으로 되어 있으나 7권본 『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을 참조하여 번역하였음.
[61 / 415] 쪽
  대혜여, 비유하자면 법신불과 보신불이 모든 광명을 놓으시는데 응화불(應化佛)이 있어서 여러 세간을 비추는 것과 같다.
  대혜여, 속 몸의 거룩한 행(行)과 광명의 법체(法體)로 세간의 있음과 없음의 삿된 소견을 비추어 없애는 것도 또한 그와 같다.
  또한 대혜여, 법신불과 보신불의 말씀하신 일체법은 자기 모양과 같은 모양인 것이며, 마음에서 훈습하는 모양을 나타냄으로 인한 것이며, 허망한 분별과 희론으로 인하여 서로 묶인 것이며, 말한 바와 같이 법에는 이러한 체(體)가 없는 것이다.
  대혜여, 비유컨대 마술사가 마술로서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면,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를 보고 참다운 것으로 여기지만, 그러나 그 여러 모양은 실로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대혜여, 허망한 법체(法體)는 인연법에 의한 것이니, 실재한다고 집착함과 분별함으로서 생긴 것이다.
  대혜여, 뛰어난 마술사[幻師]가 풀과 나무, 기와와 돌에 의하여 여러 가지 일들을 지어내며, 주술(呪術)과 인공의 힘으로 모든 중생의 모양과 빛깔과 몸매를 만들어 내니, 이를 환인상(幻人像)이라 한다. 중생들은 그 환상인 여러 가지 모양을 보고 사람으로 집착하지만 그러나 참다운 사람은 없는 것이다.
  대혜여, 중생들은 그를 보고 비록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참다운 사람의 몸은 없는 것이다.
  대혜여, 이 인연의 법체가 마음의 분별을 따름도 또한 그와 같으니, 그는 마음의 여러 가지 환상을 본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허망상(虛妄相)에 집착함은 분별심의 훈습으로 말미암은 까닭이다.
  대혜여, 이것을 이름하여 허망한 체상(體相)을 분별한 것이라 한다.
  대혜여, 이를 보신불께서 설법하신 모양이라 한다.

  법신불의 설법은 마음이 서로 상응하는 체(體)를 여읜 것이며, 안으로 거

 

 

 

[62 / 415] 쪽
  룩한 행을 증득한 경계이니 대혜여, 이를 법신불의 설법하신 모양이라 한다.
  대혜여, 응화불(應化佛)께서 하시는 일이란 보시·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선정(禪定)·지혜를 말씀하시며, 5음(陰)·18계(界)·6입(入)·해탈 등을 말씀하시고, 식의 행상에 차별이 있음을 건립(建立)하며, 외도와 무색(無色)의 삼마발제(三摩跋提)를 말씀하시었다.
  대혜여, 이를 응화불께서 하시는 일과 응화불께서 설법하시는 모양이라 한다.
  대혜여, 법신불의 설법은 반연(攀緣)을 떠났고, 능관(能觀)과 소관(所觀)을 떠났으며, 하는 일들이 모든 상을 떠났으니, 대혜여, 이는 범부와 성문과 연각과 외도의 경계가 아니다. 외도들은 허망한 아상(我相)에 집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혜여, 이와 같이 속 몸으로서 스스로 깨달아 수행하는 훌륭한 법을 마땅히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대혜여, 그대는 마땅히 자심상(自心相)을 보고 진실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떠나야 한다.
  또한 대혜여, 성문승(聲聞乘)에 두 가지 차별상이 있으니, 속 몸으로 성상(聖相)을 증득하였다는 것1)과, 허망한 모양에 집착하여 실물이 있는 것으로 분별2)하는 것이다. 대혜여, 어떤 것이 성문의 속 몸으로 성상(聖相)을 증득하였다는 것인가? 이는 항상됨이 없음[無常]과 괴로움[苦]과 공(空)과 무아(無我)의 경계, 진제(眞諦)와 욕심을 떠남과 적멸(寂滅), 5음과 18계와 6입, 자상(自相)과 동상(同相), 안팎의 멸하지 않는 모양, 진실한 법을 본 것, 마음의 삼매를 얻음, 마음의 삼매를 얻고 나서 선정(禪定)·해탈삼매의 도과(道果)와 삼마발제(三摩跋提)와 물러나지 않는 해탈을 얻은 것, 헤아릴 수 없는 훈습인 변역생사(變易生死)를 떠난 것, 속 몸으로 거룩한 안락의 행과 법을 얻음, 성문의 경지에 머물러 있는 것들이다.
  
  
1) 7권본 『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에는 "스스로 증득한 성스러운 지혜의 뛰어난 모양[自證聖智殊勝相]"으로 되어 있음.
2) 7권본 『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에는 "자성을 분별하여 집착하는 모양[分別執着自性相]"으로 되어 있음.
[63 / 415] 쪽
  대혜여, 이를 성문의 속 몸으로 훌륭한 지혜를 증득하였다는 것이다.
  대혜여, 보살마하살은 성문의 속 몸으로 증득한 거룩한 행과 삼매 안락의 법에 들어갔었지만 적멸인 공문(空門)의 낙을 취하지 않으며, 삼마발제의 낙을 취하지 않고 중생을 불쌍히 여기기 때문에 본원력(本願力)을 일으켜 행하니, 그러므로 그를 비록 알고 있지만 그것을 취하여 구경(究竟)으로 여기지 않는다.
  대혜여, 이를 성문의 속 몸으로 훌륭한 수행과 즐거움을 얻은 것이라 한다.
  대혜여,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속 몸으로 훌륭한 수행과 즐거움을 증득함을 수행하여도 그를 취하거나 집착하지 아니할 것이다.
  대혜여, 어떤 것이 성문이 허망한 모양에 집착하여 실물이 있는 것으로 분별하는 것인가? 이는 사대(四大)의 굳음과 습함과 뜨거움과 움직이는 모양과 푸르고 누렇고 붉고 흰 모양들, 짓는 것 없이 생겨나는 것과 자상(自相)과 동상(同相), 합당한 교리와 옛적의 훌륭한 견해와 좋은 말들이다.
  그 법에 의하여 허망하게 집착하여 그것이 참으로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대혜여, 이것이 성문의 허망한 모양에 집착하여 실물이 있는 것으로 분별하는 것이다.
  대혜여, 보살마하살은 저 성문법을 마땅히 알지만 버리며, 버리고는 법무아(法無我)에 들어가고, 법무아에 들어가고는 인무아(人無我)에 들어가며 인무아를 관찰하고는 차례로 여러 지위에 들어간다.
  대혜여, 이를 성문들이 허망한 모양에 집착하여 실물이 있는 것으로 분별하는 것이라 한다. 대혜여, 말한바 성문승의 두 가지 모양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앞에서 말했노라."
  그 때 거룩하신 대혜보살마하살이 또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신 항상됨[常]과 헤아릴 수 없는[不可思議] 법과 제일의(第一義) 법에 대하여 외도들도 또한 항상됨과 헤아릴 수 없는 것과 인과(因果)를 말하니, 이 뜻은 어떠합니까?"
  부처님께서 거룩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대혜여, 외도들이 말한 항상됨과 헤아릴 수 없는 것과 인과는 성립하지 못하니, 무슨 까닭인가?
  
  
[64 / 415] 쪽
  대혜여, 외도가 말한 항상됨과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은 원인인 자기 모양[自相]과 서로 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혜여, 외도들이 말한 항상됨과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이 만약 원인인 자기 모양과 서로 응하지 못한다면, 이는 어떤 법이요, 또한 어찌 법으로 나타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외도들은 항상됨과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대혜여, 외도가 말한 항상됨과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이 만약 원인인 자기 모양과 서로 응한 것이라면, 마땅히 항상됨과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아닐 것이니, 원인인 모양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항상됨과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대혜여, 내가 말한 항상됨과 헤아릴 수 없는 것과 제일의(第一義)는 항상됨과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제일의 모양의 인과로 더불어서 서로 응하니, 있음과 없음을 여읜 까닭이며, 속 몸으로 증득하는 모양인 까닭이며, 저 모양이 있는 까닭이며, 제일의지(第一義智)의 원인과 서로 응하여 있음과 없음을 떠난 까닭이며, 짓는 바가 아닌 까닭이며, 허공과 열반과 적멸(寂滅)과 비유(譬喩)가 서로 합하는 까닭이니, 그러므로 항상되고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대혜여, 내가 말한 항상됨과 헤아릴 수 없는 것은 외도의 항상됨과 헤아릴 수 없다는 이론과 같지 않은 것이다.
  대혜여, 이 항상됨과 헤아릴 수 없는 것은 부처님·여래·응공·정변지(正遍知)의 참으로 항상되는 법이니, 이는 부처님의 거룩한 지혜를 몸 속 깊이 체득한 까닭이며, 마음과 뜻과 의식의 경계가 아닌 까닭이다.
  대혜여, 이런 까닭으로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항상됨과 헤아릴 수 없는 것과 몸 속 깊이 체득할 바인 거룩한 지혜와 행법(行法)을 수행할 것이다.
  대혜여, 외도들의 항상됨과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은 항상됨이 없는 법[無常法]의 원인과 서로 합한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됨이 없다. 그리고 원인과 부합하지도 않고 이름만 얻었을 뿐이니, 항상된 법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대혜여, 만약 외도의 항상됨과 헤아릴 수 없는 것이라면, 그는 곧 유무법(有無法)을 보고서 항상된다 말하는 것으로, 그의 법은 추리하는 알음으로 항상됨이 있다고 말한다.
  
  
[65 / 415] 쪽
  대혜여, 나도 또한 그와 같이 곧 그의 법으로 인하여 있다 없다는 견해[有無見]를 짓는다면 항상됨이 없는 것도 마땅히 항상된다고 할 것이니, 무슨 까닭인가?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대혜여, 외도들이 만약 원인에 서로 응하여 항상됨과 헤아릴 수 없는 것을 이룬다고 말한다면, 저 외도는 원인인 자기 모양의 있음과 없음을 말한 것이니, 토끼 뿔과 같다.
  대혜여, 이 항상됨과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은 외도들의 허망한 분별이니, 무슨 까닭인가? 토끼 뿔이 없는 것은 다만 허망하게 분별한 것이며, 자체 원인이 없는 까닭이다.
  대혜여, 나의 항상됨과 헤아릴 수 없음은 오직 몸 속 깊이 체득할 원인인 것이며, 있다 없다고 함을 떠난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하며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니, 이는 바깥 모양이 없는 까닭이며, 상법(常法)과 서로 응하는 까닭이다.
  대혜여, 외도들은 바깥 모양이 없는 것을 보고, 추리하여 항상됨과 헤아릴 수 없는 것을 알고서는 항상된 것으로 여기므로, 저 외도들은 항상됨과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자체 원인의 모양과 저 원인의 모양임을 알지 못하니, 그것은 몸 속의 거룩한 지혜로 체득할 경계인 까닭이다.
  대혜여, 저 외도들은 나의 법에 대해서는 마땅히 말하지 못할 것이다.
  대혜여, 성문과 벽지불은 생사(生死)와 망상(妄想)의 괴로움을 두려워하여 열반을 구하지만, 세간과 열반이 차별 없는 것을 알지 못하므로 모든 법과 법이 아닌 것들을 분별하여 여러 근(根)을 멸하여 미래의 경계를 취하지 않으며, 허망하게 그를 열반이라 하고 몸 속 깊이 체득할 수행법을 알지 못하며, 아리야식이 움직여 굴러가는 것을 알지 못한다.
  대혜여, 그러므로 저 어리석은 사람은 삼승법(三乘法)이 있다 말하고, 오직 심상(心想)이 적멸(寂滅)하면 적멸법을 얻는 것임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저 지혜 없고 어리석은 사람은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모든 부처님·여래·응공·정변지의 자심(自心)에서 나타난 경계를 알지 못하며, 바깥 마음의 경계에만 집착한다. 그러므로 대혜여, 저 어리석은 사람은 세상에 나고 죽는 바퀴 속에서 항상 구르기만 하고 머물러 쉬지 못한다.
  
  
[66 / 415] 쪽
  대혜여, 과거와 현재의 여러 부처님께서 모두 온갖 법이 생(生)한 것이 아니라 말씀하시니, 무슨 까닭인가? 이는 마음에서 있고 없는 법을 본 것이니, 만약 있음과 없음을 떠난다면 모든 법이 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대혜여, 모든 법은 생하는 것이 아니다.
  대혜여, 모든 법은 토끼 뿔과 나귀와 낙타들의 뿔과 같다.
  대혜여, 어리석은 범부가 망상 분별로서 모든 법을 분별한 것이니, 모든 법은 생하는 것이 아니다.
  대혜여, 모든 법의 자체의 모습[自體相]은 생하는 것이 아니요, 몸 속 깊이 체득할 거룩한 지혜의 경계이며, 모든 범부의 자체와 분별인 두 경계가 아니다.
  대혜여, 이는 아리야식의 몸과 살림살이와 기세간(器世間)과 오고 가는 자체 모양이며, 능히 취함(能取)과 취하여질 것들을 나타내어 흘러 구르는 것이며, 모든 범부들의 생각이 발생하며 머물고 멸하는 두 모양의 마음에 떨어진 것이며, 모든 법을 분별하여 있음[有]과 없음[無]의 견해를 낸 것이다.
  대혜여, 그대는 마땅히 이와 같은 법임을 알 것이다.
  대혜여, 내가 말한 다섯 가지 승성(乘性)의 증득하는 법은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성문승(聲聞乘)의 성(性)을 증득하는 법이요, 둘째는 벽지불승(辟支佛乘) 성을 증득하는 법이요, 셋째는 여래승(如來乘) 성을 증득하는 법이요, 넷째는 부정승(不定乘)의 성을 증득하는 법이요, 다섯째는 무성(無性)을 증득하는 법이다.
  대혜여, 무엇이 성문승의 성을 증득하는 법인가? 이는 5음(陰)·18계(界)·6입(入) 등의 법을 말한 것이며, 자기 모양과 같은 모양과 증득하는 지혜의 법을 말한 것이며, 그 몸의 털구멍까지 평화롭고 기뻐하여 상지(相智)를 즐겨 닦고, 인(因)과 연(緣)이 서로 떠나지 아니한 모양은 닦지 않는다.
  대혜여, 이를 성문승이 성을 증득하는 법이라 하니, 저 성문의 사람들은 삿된 견해로 증득한 지혜이므로 거친 번뇌만을 떠났고, 무명(無明)이 훈습하는 번뇌는 떠나지 못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증득한 모양을 보고서 말하기를, '초지(初地)에서와 오지(五地)와 육지(六地)에서 모든 번뇌를 떠난 것이 자
  
  
[67 / 415] 쪽
  들의 떠난 것과 같다'고 하지만, 훈습하는 무명의 번뇌 때문에 헤아릴 수 없는 변역생사(變易生死)에 떨어진다. 그럼에도 말하기를, '나의 생은 이미 다했으며, 범행(梵行)을 벌써 이루었고, 하는 일을 다 마쳤으며, 다시 뒷세상의 몸은 받지 않는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이들은 인무아(人無我)에 들어갔었고, 나아가 열반을 얻었노라고 까지 한다.
  대혜여, 또한 어떤 외도는 열반을 증득하려고 하면서 말하기를, '나와 남과 중생과 수명과 짓는 이와 받는 이를 깨달은 사람은 그가 곧 열반이다'라고 한다.
  대혜여, 또한 어떤 외도는 모든 법이 원인에 의지하고 있음을 보고서 열반이라는 생각을 낸다.
  대혜여, 저 모든 외도들은 열반과 해탈이 없으니, 법무아(法無我)의 도리를 보지 못한 까닭이다.
  대혜여, 이를 성문승 외도의 성(性)이라 함이니, 그들은 떠나지 못한 곳에서 떠났다는 생각을 낸다.
  대혜여, 그대는 마땅히 이러한 삿된 견해를 버리고 진실한 행을 수행할 것이다.
  대혜여, 무엇이 벽지불승의 성을 증득하는 법인가? 연각(緣覺)의 증득하는 법을 듣고, 온 몸의 털이 쭈뼛하여 슬피 울고 눈물을 흘리며,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고 모든 인연법을 관찰하기 때문에 인연법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자신의 여러 가지 신통은 떠나기도 하며 합하기도 하여 갖가지로 변화한다는 것을 듣고는 곧 그의 마음이 그에 따라 들어간다. 대혜여, 이를 연각승의 성을 증득하는 법이라 하니, 그대는 마땅히 이 연각을 수순(隨順)하여 말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대혜여, 무엇이 여래승의 성을 증득하는 법인가? 대혜여, 여래승의 성을 증득하는 법이 네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진실한 법을 증득하는 성질이요, 둘째는 진실법을 떠나 증득하는 성질이요, 셋째는 자신이 속으로 거룩한 지혜를 증득하는 성질이요, 넷째는 바깥의 모든 국토를 훌륭하고 묘하게 장엄하는 법을 증득하는 성질이다.
  대혜여, 만약 이 하나하나 법을 들을 적에도 아리야(阿梨耶)의 마음이 바
  
  
[68 / 415] 쪽
  깥 몸에 의지할 것과 살림살이와 기세간(器世間)과 헤아릴 수 없는 경계를 나타낸 것이라 하여도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면 대혜여, 이는 여래승의 성을 증득한 사람이니, 대혜여 이를 여래승의 성을 증득한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대혜여, 무엇이 부정승의 성을 증득하는 법인가? 대혜여, 어떤 사람이 이 세 가지 법을 말함을 듣고 하나하나 법에 좋아하는 바가 있다면 그를 수순하여 말해 줄 것이니 대혜여, 삼승(三乘)을 말함은 수행하는 자리를 일으키기 위한 것이며, 모든 성질의 차별함은 구경(究竟)의 자리가 아니라고 말하여 최후에 고요한 자리를 취함을 건립코자 함이다.
  대혜여, 저 세 종류의 사람은 번뇌장(煩惱障)의 훈습을 떠나고 청정한 법을 얻을 것이며, 법무아(法無我)의 도리를 보고 삼매(三昧)의 즐거움과 행을 얻을 것이며, 그리고 성문과 연각이라도 필경에는 여래의 법신을 증득할 것이다."
  그 때에 세존께서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흐름을 거슬러 무루(無漏)를 닦는 이
  한번 오가고 영영 오지 않는 이
  마땅히 공양을 받을 아라한(阿羅漢)
  이들은 모두 마음이 미혹했다네.
  
  내가 말한 삼승법(三乘法)과
  일승(一乘)과 또한 비승(非乘)은
  여러 성인의 진실한 견해이지만
  범부는 그를 알지 못하네.
  
  제일의(第一義) 법문이란
  두 가르침을 떠났으나,
  삼승(三乘)을 세워 말함은
  고요한 곳에 머무르도록 함이다.
  
  
[69 / 415] 쪽
  여러 선(禪)과 또한 무량(無量)하고
  형색 없는 삼마제(三摩提)와
  생각 없는 정과 멸진정(滅盡定)은
  또한 모두 마음속엔 없는 것일세.
  
  "대혜여, 무엇이 무성승(無性乘)인가?
  일천제(一闡提)를 말함이다. 대혜여, 일천제는 열반의 성질이 없다. 무슨 까닭인가? 해탈법 가운데 믿는 마음을 내지 않기 때문에 그는 열반에 들어 갈 수 없는 것이다.
  대혜여, 일천제는 두 종류 있으니, 무엇이 둘인가? 첫째는 모든 착한 뿌리[善根]를 불태워 없애는 것이요, 둘째는 중생을 불쌍히 여겨 중생계(衆生界)를 다 없앨 원을 가진 것이다.
  대혜여, 어떤 것을 모든 착한 뿌리를 불태워 없애는 것이라 하는가? 이는 보살장(菩薩藏)을 비방함이니, 그가 이런 말을 하기를, '저 법은 수다라(修多羅)와 비니(毘尼)와 해탈의 말을 따른 것이 아니다'라고 하여 모든 선근(善根)을 버리니, 그들은 열반을 얻지 못한다.
  대혜여, 중생을 불쌍히 여겨 중생계를 다 없앨 원을 가진 이는 바로 보살들이니, 대혜여, 보살이 방편으로 원을 세우기를, '만약 모든 중생이 열반에 들지 않으면 나도 또한 열반에 들지 않겠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보살마하살도 열반에 들지 않는다.
  대혜여, 이를 두 종류의 일천제가 열반의 성질이 없다고 말함이니, 이 뜻으로 말미암아 꼭 일천제의 행을 취해야 한다."
  대혜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두 종류의 일천제 가운데 어떤 일천제가 언제나 열반에 들어가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대혜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셨다.
  "보살 일천제는 항상 열반에 들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능히 모든 법이 본래부터 열반인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열반에 들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선근(善根)을 버리는 일천제는 아니니, 무슨 까닭인가? 대혜여, 저 모든 선근을
  
  
[70 / 415] 쪽
  버리는 일천제는 만약 부처님이나 선지식(善知識)을 만난다면 보리 마음을 발하고, 모든 선근을 내게 되어 열반을 체득하리니, 어찌 된 것인가? 여러 부처님·여래께서는 일체 중생을 버리지 않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대혜여, 보살 일천제는 언제나 열반에 들지 않는다."
  
  
 

  
  
 

  
  
 

'經典 > 입능가경(入楞伽經)'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입능가경 제 6 권  (0) 2007.12.24
입능가경 제 5 권  (0) 2007.12.24
입능가경 제 4 권  (0) 2007.12.24
입능가경 제 3 권  (0) 2007.12.24
입능가경 제 1 권  (0) 2007.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