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입능가경(入楞伽經)

입능가경 제 4 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4.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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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능가경 제 4 권
  
  
  원위 천축삼장 보리류지 한역
  
  
  
3. 집일체불법품 ③
  
  그 때 거룩하신 대혜보살마하살은 부처님께 다시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12인연(因緣)은 인(因)으로부터 과(果)가 생한다'라고 말씀하시고, '자심(自心)은 망상분별인 견해의 힘으로 생긴다'라고는 말씀하지 않으시니, 세존이시여, 만약 그렇다 할지라도 외도도 또한 '인으로부터 과가 생한다'라고 말합니다.
  세존이시여, 외도가 또한 말하기를 '자성(自性)과 자재천(自在天)과 시간과 작은 티끌들의 인으로부터 일체법이 생한다'라고 합니다.
  부처님도 또한 '인연에 의하여 모든 법이 생한다'라고 말씀하시고, '스스로 건립한 법은 있지 않다'라고는 말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외도는 또한 유(有)와 무(無)로부터 '모든 법이 생겼다'라고 하며, 세존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모든 법은 본래 없는데, 인연에 의지하여 생기고, 생겼다가는 도로 없어진다'라고 하시며,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무명(無明)으로부터 행(行)을 반연하며, 내지 안식(眼識) 등에 의지함이 있으므로 일체법이 생긴다'라고 하시니, 세존의 말씀과 같다면 또한 모든 법이 인이 없어도 생기는 것이 있으니, 무슨 까닭인가? 인(因)으로부터 생함이 아니기 때문에 일시(一時)인 것이요, 전후(前後)로 생함이 아니니, 이 법으로 인하여 이 법이 생긴 까닭입니다.
  세존께서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허망한 인법(因法)으로 인하여 이 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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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겼다'라고 하시니, 차례로 생긴 것이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그렇다면 외도의 설법이 수승하고, 여래는 그와 같지 못하니, 무슨 까닭인가 하면, 세존이시여, 외도는 말하기를 '인(因)이 인연 없이도 능히 과(果)를 낸다'라고 하고, 여래의 설법하심은 '인도 또한 과에 의지하고 과도 또한 인에 의지한다'라고 하시니, 만약 그렇다면 인연에는 인도 과도 없을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그렇다면 저것[彼]과 이것[此]의 인과(因果)가 전전(展轉)하기를 무궁(無窮)할 것입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법으로부터 저 법이 생한다'라고 하시니, 만약 그렇다면 인이 없이 법이 생긴 것이옵니다."
  부처님께서 거룩한 대혜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셨다.
  "대혜여, 내가 지금 마땅히 말하겠노라.
  내가 말한 '이 법으로 인하여 저 법이 생긴다'는 것은 외도가 세운바 '인과는 인이 없다'는 법과 또한 '인으로부터 생겼다'는 것과는 같지 않으니, 나는 그와 같지 않다.
  내가 말한 '모든 법이 인연으로부터 생긴다'는 것은 인연이 없다는 것도 아니며, 또한 잡란(雜亂)함도 아니며, 또한 전전하기를 무궁한 허물도 없으니, 무슨 까닭인가? 능히 취하며[能取] 가히 취할[可取] 법이 없기 때문이다.
  대혜여, 외도는 자심(自心)에서 나타나 보인 것임을 알지 못하므로 능취(能取)와 가취(可取)의 법에 집착하고, 오직 자심에서 안과 바깥 법을 본 것임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한 것이다.
  대혜여, 저 외도는 자심 안의 경계를 알지 못하므로, 있고 없는 것을 보니, 그러므로 외도는 이와 같은 허물이 있는 것이요 나의 허물은 아니다. 나는 항상 '인연이 화합하여 모든 법이 생하고, 인이 없이 생(生)함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대혜보살은 또한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말함이 있으므로 마땅히 모든 법이 있는가 합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모든 법이 없다면 마땅히 말하지 않으리니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언설(言說)에 의하여 마땅히 모든 법이 있는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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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대혜여, 법이 없어도 말은 또한 있으니, 말하자면 토끼 뿔과 거북 털과 석녀 등은 세상에서 말이 있으니, 대혜여, 그대가 말한 '말이 있으므로 마땅히 모든 법이 있다'라고 한 이 뜻은 벌써 깨진 것이다.
  대혜여, 일체 불국토(佛國土)마다 언어(言語)로 설법함은 아니니, 무슨 까닭인가? 언어는 오직 사람의 마음에서 분별하여 말함인 것이다. 그러므로 대혜여, 어떤 부처님의 세계는 똑바로 보기만 하고 눈을 깜박이지 않고 말이 없어도 설법함이며, 어떤 부처님의 세계는 바로 모양만 보여도 설법함이며, 어떤 부처님의 세계는 다만 눈썹만 움직여도 설법함이며, 어떤 부처님의 세계는 오직 눈 모양만 움직여도 설법함이며, 어떤 부처님의 세계는 웃기만 하여도 설법함이며, 어떤 부처님의 세계는 하품하고 입을 벌려서도 설법함이며, 어떤 부처님의 세계는 기침하여도 설법함이며, 어떤 부처님의 세계는 생각만 하여서도 설법함이며, 어떤 부처님의 세계는 몸짓으로도 설법함이다.
  대혜여, 저 무순(無瞬) 세계와 또한 중향(衆香) 세계와 보현(普賢) 여래·응공·정변지의 세계에서는 그의 보살마하살이 여래의 눈이 잠깐도 깜박이지 않으심을 관찰하고, 무생법인(無生法認)을 얻으며, 또한 한량없는 수승한 삼매법을 얻는다.
  그러므로 대혜여, 그대는 '말이 있으므로 마땅히 모든 법이 있다'라고 말하지 말 것이다.
  대혜여, 여래는 또한 여러 세계 가운데 모든 작은 벌레와 모기와 등애와 파리 등 중생의 종류들이 말하지 않고도 한가지로 자기의 일을 지어 이루는 것을 보았다."
  그 때 세존께서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저 허공과 토끼 뿔과
  또한 석녀는
  없는 것이지만 말은 있으니,
  이와 같이 허망하게 분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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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연으로 화합한 법이거늘
  어리석어서 분별을 내니
  진실한 법을 알지 못했기에
  3유(有)에서 윤회한다.
  
  그 때 거룩하신 대혜보살마하살은 부처님께 또한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신 항상된 법[常法]은 어떤 법에 의하여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까?"
  부처님께서 거룩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대혜여, 미혹법(迷惑法)에 의하여 내가 항상된다고 말함이니, 무슨 까닭인가? 대혜여, 성인도 또한 세간의 미혹법을 보지만, 전도(顚倒)된 마음은 아니다.
  대혜여, 비유컨대 아지랑이와 불 바퀴와 털 바퀴와 건달바성과 환상과 꿈과 물 속의 달과 거울 속의 모습을 세상에서 지혜 없는 자는 여러 색상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것과 같으니, 그는 전도된 견해이다. 지혜 있는 자는 분별은 아니하지만, 저 미혹의 일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대혜여, 지혜가 있는 사람은 저 여러 가지 미혹의 일을 보지만, '진실이다'라고 하는 마음은 내지 않으니, 무슨 까닭인가? 유무법(有無法)을 떠났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거룩한 대혜보살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대혜여, 무엇 때문에 미혹한 법이 유(有)와 무(無)를 떠난 것이라 하는가? 말하자면, 어리석은 범부는 여러 가지 경계가 있는 것을 보는 것이 아귀(餓鬼)가 큰 바다와 항하(恒河)의 물을 보아도 보지 못한 것과 같다.
  대혜여, 이 미혹법은 있다고 말할 수도 없고, 없다고 말하지도 못할 것이니, 대혜여, 다른 중생은 저 물인 것을 보기 때문에 없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대혜여, 미혹의 일도 또한 그와 같으니, 성인은 전도된 견해를 떠났기 때문이다. 대혜여, 미혹법이 항상하다고 말한 것은 생각에 차별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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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혜여, 미혹법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모양을 보지만, 미혹법은 다르고, 차별된 것을 분별하지 않으니, 그러므로 대혜여, 미혹법은 항상됨이다.
  대혜여, 어찌하여 미혹법을 진실이 된다고 하는가? 성인은 미혹법 가운데 전도된 마음을 내지 않으며, 또한 진실된 마음도 내지 않는 까닭이다.
  대혜여, 성인이 저 미혹법을 보고 조금이라도 마음의 생각을 일으키면 거룩한 지혜의 사상(事相)이 생길 수 없는 것이다.
  대혜여, 조금이라도 생각을 일으킨다면, 범부라고 말할 것이요, 성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혜여, 저 미혹법을 분별하는 것은 전도(顚倒)된 것이다. 전도된 것이 아니라면, 능히 이종성(二種性)을 생하니, 무엇이 이종인가? 첫째는 능히 범부성(凡夫性)을 생함이요, 둘째는 능히 성인성(聖人性)을 생함이다.
  대혜여, 저 성인성이 능히 세 가지 차별인 성(性)을 생하니, 이른바 성문과 벽지불과 불국토의 차별성인 것이다.
  대혜여, 어찌하여 어리석은 범부가 미혹법을 분별하여 능히 저 성문승성(聲聞乘性)을 생함인가?
  대혜여, 이른바 저 미혹법의 자기 모양과 같은 모양에 집착하여 능히 성문승성을 이룬 것이다.
  대혜여, 이를 미혹법이 성문승성을 능히 내고 이룬 것이라 한다.
  대혜여, 어찌하여 어리석은 범부가 미혹법을 분별하여 능히 저 벽지불승성(辟支佛乘性)을 내는 것인가?
  대혜여, 이른바 저 미혹법에 집착하여, 모든 법의 자기 모양과 같은 모양을 관찰하고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능히 벽지불승성을 낸 것이니, 대혜여, 이를 미혹법이 능히 벽지불승성을 내고 이룬 것이라 한다.
  대혜여, 어찌하여 지혜 있는 자가 곧 저 미혹법을 분별하여 능히 불승성(佛乘性)을 내는 것인가?
  대혜여, 이른바 저 능견(能見)과 가견(可見)이 오직 자심(自心)임을 보고, 유무법을 분별하지 않는 것이니, 대혜여, 이와 같이 미혹법을 관찰하여 능히 여래승성을 내고 이룬 것이다.
  대혜여, 이와 같은 것을 성(性)의 뜻이 된다 이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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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혜여, 어떤 것이 일체 어리석은 범부가 곧 저 미혹법을 분별하여 여러 가지 일을 보고, 능히 세간에 있는 바 승성(乘性)을 내는 것인가? 모든 법이 이와 같고 이와 같아서 결코 다르지 아니함을 관찰함이다. 그러므로 대혜여, 저 미혹법은 어리석은 범부가 허망하게 여러 가지 법체를 분별함이다.
  대혜여, 저 미혹법은 사실인 일도 아니며, 사실 아닌 일도 아니니, 무슨 까닭인가? 대혜여, 성인은 저 미혹법을 관찰하여 허망하게 분별하지 않으니, 그러므로 성인은 심(心)·의(意)·식(識)의 신상(身相)을 돌이켰고, 번뇌의 습기를 떠났다. 그러므로 성인은 저 미혹법을 돌이켰기 때문에 진여(眞如)가 되는 것이다.
  대혜여, 이를 무슨 법이라 하는가? 대혜여, 이는 진여법(眞如法)이라 이름함이니, 분별을 떠난 법이기 때문이다.
  대혜여, 이 뜻으로 나는 거듭 진여의 법체가 분별을 떠난 것임을 선설(宣說)하니, 저 진여에서 그 허망한 분별법을 떠났기 때문이다."
  대혜보살은 부처님께 다시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 미혹법은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저 미혹법은 여러 가지 상에 집착한 것이므로 있다 이름하지만, 대혜여, 저 미혹법이 망상(妄相) 가운데 만약 있다면, 일체 성인은 마땅히 모두 있다, 없다고 하는 허망한 법에 집착함을 떠나지 못하여야 할 것이다.
  대혜여, 외도가 말한 '12인연이 인(因)으로부터 생(生)함과 인으로부터 생하지 아니함이 있다'는 것과 같아서, 이 뜻도 또한 이와 같다."
  대혜보살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만약 미혹법이 환상으로 본 것 같다면, 이 미혹법은 미혹과 다를 것이니, 그는 미혹법이 능히 법을 생(生)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대혜여, 미혹법이 번뇌의 허물을 내는 것이 아니니, 대혜여, 만약 미혹법을 분별하지 않는다면, 모든 허물은 나지 않는다.
  대혜여, 일체 환법(幻法)은 사람의 공력과 주술(呪術)에 의하여 생기는 것이요, 자심의 분별하는 번뇌로 생기는 것이 아니니, 그러므로 대혜여, 저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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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법은 모든 허물을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사람이 미혹법을 본 것이다.
  대혜여, 어리석은 범부는 허망하고 미세한 일에 집착하여 모든 허물이 생긴 것이요, 성인을 말함은 아니다."
  그 때 세존께서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성인은 미혹을 보지 않고
  세간은 또한 진실함이 없으니,
  미혹이 곧 진실이며
  진실법도 미혹이라네.
  
  모든 미혹을 버리고 떠났다 하여도
  서로 생함이 있다면
  그가 곧 미혹이니,
  깨끗하지 못함은 눈을 가리움과 같다.
  
  "대혜여, 그대는 '환(幻)이란 것은 없는 것으로, 일체법(一切法)이 또한 없는 것이 환(幻)과 같다'라고 말하지 말라."
  대혜보살은 말하였다.
  "세존께서는 모든 법의 환과 같은 상(相)에 집착한 이를 위하여 모든 법이 환과 같다고 말씀하시고, 모든 법의 전도(顚倒)한 상에 집착한 이를 위하여 모든 법이 환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모든 법이 환의 모양과 같음에 집착하였다면, 일체법이 모두 환의 모양과 같다고 말씀하지 않을 것이며, 만약 모든 법이 전도된 모양이라 함에 집착하였다면, 일체법이 환과 같다고 말씀하시지 아니하실 것이니, 무슨 까닭인가 하면, 세존이시여, 색(色)에는 여러 가지 인상(因相)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색에는 모든 상이 있어 환과 같이 볼만한 딴 원인이 있지 않사오니, 그러므로 세존께서는 모든 법에 집착한 일체가 환과 같다고 말씀하시지 아니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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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여러 가지 법상(法相)에 집착했다고 하여 모든 법의 일체가 환과 같다고 말함은 아니다. 대혜여, 모든 법은 전도된 것이어서 빨리 없어지는 것이 번개와 같기 때문에 환과 같다고 말함이다.
  대혜여, 모든 법은 비유컨대 번개 빛이 곧 보였다가 곧 없어지는 것과 같지만, 범부는 보지 못한다. 대혜여, 일체법이 또한 그와 같지만, 일체법을 자심(自心)에서 같은 모양과 다른 모양으로 분별하여, 능히 관찰하지 못하므로 여실히 보지 못하니, 색 등의 법에 허망하게 집착한 때문이다."
  그 때 세존께서는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색(色) 등의 법을 보지 못한 이에겐
  환(幻)이 없는 법이라 말하니,
  그러므로 위아래가 어기지 않음이다.
  
  그리고 나는 일체법에서
  본성(本性)이 있음을 볼 수 없음이
  환과 같은 무생체(無生體)라 말한다.
  
  대혜보살은 부처님께 다시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아서, 모든 법이 생하지 않음[不生]을 또한 환과 같다고 말한다면, 곧 세존의 전후(前後) 말씀하신 바가 스스로 상위(相違)함이 없겠습니다. 여래께서 '일체 모든 법이 환과 같지 않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일체법이 생하지 않음이 환과 같다고 말한 것은 앞뒤가 상위(相違)한 허물이 되지 않으니, 무슨 까닭인가? 모든 어리석은 범부들이 생법(生法)과 불생법(不生法)을 보지 못하고, 자심(自心)의 유무(有無)와 바깥 법의 유무를 능히 깨닫지 못함이니, 무엇 때문인가? 능히 불생법(不生法)을 보지 못한 까닭이다.
  
  
[111 / 415] 쪽
  대혜여, 내가 말한 이와 같은 모든 법에는 앞뒤가 상위한 것이 있지 않다.
  대혜여, 나는 외도가 내세운 인과의 뜻이 합당하지 않는 것을 막기 위하여 모든 법이 생함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대혜여, 일체 외도의 어리석은 무리들이 말하기를, '유와 무로부터 일체법이 생한다'라고 하고, 자심의 분별과 집착의 인연으로 생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대혜여, 나는 모든 법의 유(有)도 또한 불생(不生)이며, 무(無)도 또한 불생이라 말하니, 그러므로 대혜여, 나는 모든 법을 불생이라 말한다.
  대혜여, 내가 일체법이 있다[有]고 말한 것은 제자(弟子)들을 두호하여 그들로 하여금 두 법을 알게 함이니, 무엇이 둘이 되는가? 첫째는 모든 세간(世間)을 섭취(攝取)함이요, 둘째는 모든 단견(斷見)을 두호하기 위함이다. 무슨 까닭인가? 업(業)에 의하므로 여러 가지 몸이 있어서 6도(道)에 태어남을 받으니, 그러므로 나는 모든 법을 있다고 말하여 세간을 섭취한다.
  대혜여, 내가 일체법을 환과 같다고 말한 것은 일체 어리석은 범부로 하여금 필경에 능히 자기 모양[自相]과 같은 모양[同相]을 떠나게 함이니, 모든 범부는 어리석은 마음으로 집착하여 사견(邪見)에 떨어지고, 다만 자심이 허망하게 본 것임을 능히 알지 못하므로, 그들로 하여금 집착의 인연으로서 생긴 법을 떠나게 하기 위하여 나는 '일체 모든 법이 환상과 같고 꿈과 같아서 실체가 없다'라고 말한 것이니, 무슨 까닭인가? 만약 이와 같이 말하지 아니한다면, 어리석은 범부는 사견의 마음에 집착하였기에 자신과 타인을 속이고 기만하고, 일체법을 여실히 보는 것[如實見]을 떠날 것이다.
  대혜여, 어떤 것을 여실견(如實見)에 머무르는 것이라 하는가? 이는 자심이 모든 법을 보는 데에 들어간 것이다."
  그 때 세존께서는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그대가 말한 바와 같이 모든 법이
  일체 생(生)함이 아니라 함은
  이는 인과를 비방함이며
  여실견이 아니네.
  
  
[112 / 415] 쪽
  내가 생함의 법을 말함은
  세간을 포섭하기 위함으로,
  모든 법을 환상과 같이 보아
  모든 보는 상을 취하지 않네.
  
  부처님께서 또한 거룩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대혜여, 내가 지금 여러 보살마하살을 위하여, 명(名)·구(句)·자신(字身)의 상(相)을 말하리니, 보살은 명·구·자신의 상(相)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며, 명·구·자신의 상에 의하여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요, 보리를 얻고서는 중생을 위하여 명·구·자신의 상을 말해야 한다."
  대혜보살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지신 세존이시여, 곧 말씀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혜여, 어떤 것이 명신(名身)인가? 어떠한 법에 의하여 명신이라 이름을 지음이니, 사물(事物)의 이름은 다르나 뜻은 같으니 대혜여, 이를 내가 명신(名身)이라 말한 것이다.
  대혜여, 어떤 것이 구신(句身)인가? 뜻[義]과 사물을 결정함인 구경(究竟)에 보이는 뜻인 것이니, 대혜여, 이를 내가 구신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어떤 것이 자신(字身)인가? 이는 문구(文句)의 필경(畢竟)인 것이다.
  대혜여, 또한 명신은 어떤 법에 의하여 명(名)·구(句)를 요별(了別)하고, 제 형상을 능히 요지(了知)하는 것이다.
  대혜여, 또한 구신은 구(句)와 사(事)의 필경인 것이다.
  대혜여, 또한 명신은 이른바 모든 글자는 이름을 따라서 차별함이니, 아(阿)자로부터 아(啊)자에 이르니 명신(名身)이라 이름함이다.
  대혜여, 또한 자신(字身)은 소리의 장단(長短)과 음운(音韻)의 고하(高下)를 말하여 '자신'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또한 구신(句身)은 골목길의 발자국인 것이니, 사람과 코끼리와 말과 여러 짐승의 발자국 등과 같은 것을 구(句)가 된다고 이름한다.
  
  
 
[113 / 415] 쪽
  대혜여, 또한 명자(名字)는 색(色)과 4음(陰)이 없는 것을 말함이니, 명에 의하여 말한 것이다. 대혜여, 또한 명자(名字)의 상은 능히 명자상을 요별(了別)함을 말함이다. 대혜여, 이를 명·자·구·자신의 상이라 한다.
  대혜여, 이와 같은 명·구·자의 상(相)을 그대는 마땅히 배워서 사람들을 위하여 연설해야 할 것이다."
  그 때 세존께서는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명신(名身)과 구신(句身)
  그리고 자신(字身)의 차별을
  범부가 어리석게 계탁(計度)하고 집착함이
  코끼리가 깊은 진흙에 빠짐과 같다.
  
  대혜여, 미래 세상에 지혜가 없는 자는 사견(邪見)의 마음으로써 여실법(如實法)을 알지 못하므로 세간론(世間論)을 따라서 스스로 지자(智者)라 말한다. 그러나 지자가 있어서 사견상(邪見相)의 같음과 다름, 갖춤[俱]과 갖추지 못함[不俱]을 떠난 여실법을 묻는다면, 저 어리석은 사람은 말하기를, '이 물음은 옳지 않으며, 바른 생각으로 묻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니, 말하자면 색(色) 등의 법과 항상됨과 무상(無常)함이 같음이 되는가? 다름이 되는가? 이와 같은 열반과 유위(有爲)인 모든 행(行)이 같음이 되는가? 다름이 되는가? 형상 가운데에 있는바 능견(能見)과 소견(所見)이 같음이 되는가? 다름이 되는가? 짓는 이[作者]와 짓는 바[所作]가 같음이 되는가? 다름이 되는가? 사대(四大) 가운데 색(色)·향(香)·미(味)·촉(觸)이 같음이 되는가? 다름이 되는가? 능견과 소견이 같음이 되는가? 다름이 되는가? 진흙덩이와 미진(微塵)이 같음이 되는가? 다름이 되는가? 지자(智者)의 아는 바가 같음이 되는가, 다름이 되는가? 이와 같이 위로 올라서 차제상(次第相)과 위로 올라서 무기(無記)와 치답(置答)을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이 말했다고 함이니, 이는 나를 비방함이다.
  대혜여, 나는 이와 같은 법을 말하지 않은 것은 외도가 사견에서 말함을 막기 위함이다. 무슨 까닭인가? 대혜여, 외도들이 말한 것은 '몸이 곧 명(命)
  
  
[114 / 415] 쪽
  이니, 몸이 달라짐에 명도 달라진다'라고 함이니, 이와 같은 법은 외도가 말한 바이고, 이는 무기(無記)법이다.
  대혜여, 외도는 인과의 뜻에 어리석기에 무기(無記)라 함이요, 나의 법에서 말한 무기는 아니다.
  대혜여, 우리 불법에서는 능견(能見)과 가견(可見)의 허망한 생각을 떠나서 분별심(分別心)이 없나니, 그러므로 나의 법에서는 답할 것 없이 그냥 두는 치답(置荅)이 있지 않다.
  모든 외도들은 가취(可取)와 능취(能取)에 집착하여, 다만 자심에서 보여진 법임을 알지 못하므로, 그들을 위하여 나는 법을 묻는 이에게 네 가지로 답하는 것이 있다고 말하였지만, 무기(無記)와 치답(置答)만이 나의 법에서 함이 아니다.
  대혜여, 부처님·여래·응공·정변지께서 중생을 위하여 네 가지로 답하여 말하는 데에 치답(置荅)이 있는 것은 때를 기다려서 하기 위함이므로 이러한 법을 말함이다. 또는 근기(根機)가 성숙하지 못한 이를 위한 것이요, 근기가 성숙한 이를 위한 것은 아니니, 그러므로 내가 치답의 뜻을 말하였다.
  대혜여, 일체 모든 법이 만약 짓는 것과 인연을 떠나면 생하지 않으리니, 짓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일체법이 불생(不生)이라 말한다."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였다.
  "일체 모든 법은 체상(體相)이 없는 것이다."
  대혜보살은 부처님께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일체 모든 법은 실체상(實體相)이 없습니까?"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스스로 증득한 지혜로서 일체 모든 법의 자기 모양과 같은 모양을 관찰하건대, 모든 법이 있지 않으니, 그러므로 나는 '일체 모든 법은 실체상이 없다'라고 말한다."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일체 모든 법은 또한 취하는 상[取相]도 없는 것이다."
  대혜보살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무슨 뜻으로 일체 모든 법은 또한 취하는 상도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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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자기 모양과 같은 모양에도 법을 가히 취할 것이 없으니, 그러므로 나는 '법을 가히 취할 것이 없다'라고 말한다."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일체 모든 법은 또한 버리는 상[捨相]도 없는 것이다."
  대혜보살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모든 법에는 또한 버리는 상도 없다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자기 모양과 같은 모양을 관찰하건대, 법을 가히 버릴 것이 없으니, 그러므로 나는 '일체 모든 법은 또한 버리는 상도 없다'라고 말한다."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법은 불멸(不滅)이다."
  대혜보살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일체 모든 법은 불멸이라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자기 모양과 같은 모양을 관찰하건대, 체상이 없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나는 '모든 법은 불멸이다'라고 말한다."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법은 무상(無常)한다."
  대혜보살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일체 모든 법은 무상합니까?"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일체 모든 법은 항상 무상한 모습이며, 항상 불생(不生)인 것이니, 그러므로 나는 '모든 법이 무상하다'라고 말한다.
  대혜여, 또한 나는 일체법을 무상하다고 말한다."
  대혜보살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일체 모든 법을 무상이라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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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상이 생(生)하지 않으며, 생하지 않는 체상이기 때문에 항상 무상함이니, 그리하여 나는 '모든 법이 무상하다'라고 말한다."
  그 때 세존께서는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기론(記論 : 記論四記答)에 네 가지가 있으니
  그렇다고 바로 답하는 직답(直答)과
  반문해서 답하는 반질답(反質答)
  분별하여 답하는 분별답(分別答)
  
  답할 것 없이 그냥 두는
  사치답(捨置答)이 그것인데,
  이로써 모든 외도들의
  있다, 없다고 함을 제어한다.
  
  승구(僧佉)1)와 비세사(毗世師)2)
  모두 무기(無記)라고
  이와 같은 말로
  그들은 말한다.
  
  바른 지혜로 관찰하건대
  자성(自性)이란 얻을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므로,
  체상(體相)도 없다고 말하노라.
  
  
1) 범어 s khya, 인도 육파철학의 하나인 샹키야학파를 말하고, '승기야(僧企耶)'로 음역되고 '수론(數論)'으로 의역된다. 혹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를 가리키기도 한다. 현응(玄應)의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 권10에서는 "그 논은 '25근(根)'을 종(宗)으로 삼는데, 옛날에는 '25제(諦)'라고 하였다"라고 한다.
2) 범어 Vai e ika, 인도 육파철학의 하나로서 한역 불전(佛典)에서는 '승론(勝論)', '위세사(衛世師)'라고도 한다. 본래 유물론(唯物論)의 특색을 지녔으나 후대에 나아야(Ny ya)학파와 결합하여 인도의 정통학파로 인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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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때 거룩하신 대혜보살마하살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원하오니, 세존께서 저희들을 위하여 수다원(須陀洹) 등 행(行)의 차별상(差別相)을 말씀하여 주십시오.
  저와 일체 보살마하살들이 수다원 등의 수행상(修行相)을 잘 알면, 여실히 수다원·사다함(斯陀含)·아나함(阿那含)·아라한(阿羅漢)을 알아서, 이와 같이 중생을 위하여 설할 것이니, 중생이 듣고서 두 무아상(無我相)에 들며, 두 가지 장애가 깨끗하여 차례로 지위와 지위의 수승한 데에 나아가서, 여래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경계의 수행을 얻을 것이며, 수행처(修行處)를 얻고는 여의보(如意寶)가 중생이 생각하는 수용경계(受用境界)와 몸과 입과 뜻의 행(行)을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훌륭한 대혜여,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어라, 지금 그대를 위하여 말할 것이다."
  대혜보살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지신 세존이시여, 잘 받아 듣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대혜여, 수다원(須陀洹)은 세 가지 과(果)의 차별이 있다."
  대혜보살은 말하였다.
  "어떤 것이 세 가지입니까?"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하(下)와 중(中)과 상(上)이다.
  대혜여, 어떤 것이 수다원의 하(下)인가? 이는 3유(有)에서 일곱 번이나 생(生)을 받는 것이다.
  대혜여, 어떤 것이 중(中)인가? 3생(生)이나 5생 만에 열반에 드는 것이다.
  대혜여, 어떤 것이 상(上)인가? 바로 1생(生)에 열반에 드는 것이다.
  대혜여, 이 세 가지 수다원은 세 가지 결박[結]이 있으니, 말하자면 하와 중과 상이다.
  대혜여, 어떤 것이 세 가지 결박인가? 신견(身見)과 의(疑)와 계취(戒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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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다.
  대혜여, 저 세 가지 결박은 위로 올라서 잘 닦아 정진하여야만 아라한(阿羅漢)을 얻는 것이다.
  대혜여, 신견(身見)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구생(俱生)이요, 둘째는 허망한 분별로서 나는 것이니, 인연으로 분별하는 법과 같다.
  대혜여, 비유컨대 인연의 법상(法相)에 의하여 허망한 분별로서 실상(實相)이라고 함과 같다. 그러나 저 인연법에는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니, 있음과 없다고 분별함이란 실상(實相)이 아닌 까닭이다.
  어리석은 범부가 여러 가지 법상에 집착하는 것은 새와 짐승들이 아지랑이를 보고 물이라고 생각함과 같다.
  대혜여, 이를 수다원(須陀洹)의 신견(身見)이라 하니, 무슨 까닭인가? 지혜가 없기 때문이며, 끝없는 세월로 오면서 허망하게 상(相)을 취했기 때문이다.
  대혜여, 이 신견의 더러움[垢]은 인무아(人無我)를 보아야만 능히 멀리 떠날 것이다.
  대혜여, 어떤 것이 수다원의 구생신견(俱生身見)인가? 이른바 자기 몸과 다른 이 몸인 그 두 가지와 4음(陰)과 무색(無色)과 색음(色陰)이 날 때엔 4대(大)와 4진(塵) 등에 의하여 피차 인연이 서로 화합하여 색(色)이 생기는 것을 보고, 수다원은 그것을 알고서 능히 있다, 없다고 하는 사견(邪見)을 떠나며, 신견을 끊고, 신견을 끊고서는 탐심(貪心)을 내지 아니 하니, 대혜여, 이를 수다원의 신견의 모양이라 한다.
  대혜여, 어떤 것이 수다원의 의(疑)의 모양인가? 법을 증득하는 데에 잘 보는 것을 얻고서, 신견과 이견(二見)인 분별의 마음을 먼저 끊으니, 그러므로 모든 법에서 의심을 내지 않으며, 또한 다른 높은 이에게 높다고 여김과 깨끗하고 깨끗하지 아니하다는 마음을 내지 않으니, 대혜여, 이를 수다원의 의(疑)의 모양이라 한다.
  대혜여, 어떤 것이 수다원의 계취(戒取)의 모양인가? 이는 몸을 받아 날 곳[受生處]이 괴로운 것임을 잘 보았으니, 그러므로 계상(戒相)을 취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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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다.
  대혜여, 계취(戒取)라는 것은 모든 범부들이 계(戒)를 지니고 정진하며 여러 가지 착한 행으로 안락한 경계를 구하며 하늘에 태어나려고 함이니, 저 수다원은 이러한 것을 취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신이 안으로 증득하고 회향(回向)하는 것을 취하여 수승한 곳에 나아가서 모든 망상(妄想)을 떠나고, 무루계분(無漏戒分)을 닦으니 대혜여, 이를 수다원의 계취 모양이라 한다.
  대혜여, 수다원은 세 가지 결박인 번뇌를 끊고 탐(貪)·진(嗔)·치(痴)를 떠난다."
  대혜보살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많은 탐(貪)을 말씀하옵시니, 수다원은 어떠한 탐(貪)을 떠났습니까?"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수다원은 여인들과 더불어 어울림을 떠나서 현재의 즐거움으로 미래의 괴로운 원인[苦因]을 심으려 하지 않고, 치고 두들기며 탄식하고 끌어안으며 곁눈으로 보는 것을 멀리 떠났다.
  대혜여, 수다원은 그와 같은 탐심을 내지 않으니, 무슨 까닭인가? 삼매락(三昧樂)인 행(行)을 얻었기 때문이다.
  대혜여, 수다원은 이와 같은 탐은 떠났으나, 열반의 탐은 떠나지 못하였다.
  대혜여, 어떤 것이 '사다함(斯陀含)'의 과(果)의 모양인가? 한번 가는 것[一往]인데, 색상(色相)을 보고 눈앞에서 곧 마음을 내지만, 허망한 분별의 생각으로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선(禪)의 수행하는 모양을 잘 보고, 그러므로 세간에 한번 왕래하여 문득 고(苦)를 끊어 다하고 열반에 드니, 이를 사다함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어떤 것이 아나함(阿那含)의 모양인가? 과거·현재·미래의 색상 가운데서 있다, 없다는 마음을 내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허망한 분별심(分別心)인 모든 결박[結]으로 하여금 나오지 못하게 하니, 그러므로 이를 아나함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어떤 것이 아라한(阿羅漢)의 모양인가? 분별로서 사유(思惟)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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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유할 바와 삼매와 해탈과 힘과 통(通)함과 번뇌와 괴로움 등의 분별심을 내지 않으니, 그러므로 아라한이라고 이름한다.'
  대혜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께서 세 가지 아라한을 말씀하셨으니, 여기서는 어떠한 아라한을 말하여 아라한이라 이름합니까?
  세존이시여, 결정(決定)·적멸(寂滅)을 얻었다고 말하는 나한(羅漢)입니까? 보리원(菩提願)과 선근(善根)과 선근을 잊는 것을 말하는 나한입니까? 교화하려고 응화(應化)하는 나한입니까?"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결정·적멸을 얻었다고 말하는 성문(聲聞)의 나한이요, 다른 나한이 아니다.
  대혜여, 다른 나한은 말하자면 일찍이 보살행을 수행한 자이고, 또한 응화불(應化佛)이 화현한 나한이니, 본원(本願)인 선근과 방편의 힘으로 여러 부처님 국토에 태어나고 대중 가운데 나타나서 부처님의 큰 회중(會衆)을 장엄한 것이다.
  대혜여, 그는 거래(去來)를 분별하여 여러 가지 일을 말하고, 증득할 과(果)에서 능사유(能思惟)와 소사유(所思惟)로 사유하는 것을 멀리 떠났으므로, 자심(自心)이 견(見)과 소견(所見)으로 된 것임을 보았으니, 그 과(果)를 얻은 모양이라 말할 것이다.
  대혜여, 만약 수다원이 생각하기를, '이것이 세 가지 결박이니, 나는 세 가지 결박을 떠났다'라고 하면, 대혜여, 이는 세 가지 법을 본 것이며 신견(身見)에 떨어진 것이니, 그가 만약 이와 같다면, 세 가지 결박을 떠나지 못할 것이니, 대혜여, 그러므로 수다원은 이와 같은 마음을 내지 않는다.
  대혜여, 만약 선(禪)과 무량(無量)과 무색계(無色界)를 떠나려고 한다면 마땅히 자심의 보는 상을 멀리 떠날 것이며, 소상(少相)인 적멸정(寂滅定) 삼마발제(三摩跋提)의 상을 멀리 떠날 것이다. 대혜여, 만약 이와 같이 않는다면 저 보살은 마음에서 모든 법을 볼 것이니, 사유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 때 세존께서는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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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선(禪)과 사무량(四無量)이며,
  무색(無色)의 삼마제(三摩提)요,
  소상(少相)인 적멸정(寂滅定)은
  모두 마음속엔 없는 것이다.
  
  흐름을 거슬러 무루(無漏) 닦는 이,
  또한 한번 가고 오는 이와
  오지 않는 이와 아라한은
  모두 마음이 미혹했다네.
  
  능소(能所)의 소유로 사유함이란
  진제(眞諦) 보는 것을 멀리 떠난 것이며,
  오직 이 허망한 마음이니,
  그것을 능히 알면 해탈을 얻으리라.
  
  대혜여, 두 가지 지혜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관찰하는 지혜요, 둘째는 허망한 분별로 상을 취하여 머무르는 지혜이다.
  대혜여, 어떤 것이 관찰하는 지혜인가? 어떠한 지혜로서 일체 모든 법의 체상(體相)은 네 가지 법을 떠나서 법을 가히 얻을 수 없다고 관찰함이니, 이를 관찰하는 지혜라 이름한다.
  대혜여, 어떤 것이 네 가지 법인가? 같음과 다름, 갖춤[俱]과 갖추지 못함[不俱]이니, 이를 네 가지 법이라 한다.
  대혜여, 네 가지 법을 만약 떠난다면 일체법은 가히 얻을 수 없으니, 대혜여, 만약 일체법을 관찰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네 가지 법에 의하여 모든 법을 관찰해야할 것이다.
  대혜여, 망상 분별로서 상을 취하여 머무르는 지혜란 이른바 굳음[堅]과 뜨거움[熱]과 젖음[濕]과 움직임[動]에 집착하여 허망하게 사대(四大)의 상(相)을 분별하므로 인(因)과 비유를 내세우는 것에도 집착하고, 진실 아닌 법을 내세우고서 진실로 여김이니, 대혜여, 이를 허망한 분별과 집착으로 상
  
  
[122 / 415] 쪽
  을 취하여 '머무르는 지혜'라고 이름한다.
  대혜여, 이를 두 가지 지혜의 모양이라 한다.
  대혜여, 보살마하살은 필경에 이 두 가지 모양을 알고는, 법무아(法無我)에 나아가서 진실한 지혜의 지위와 행상(行相)을 잘 알 것이며, 알고는 곧 초지(初地)에 올라가서 백 가지 삼매를 얻고, 삼매의 힘에 의하여 백의 부처님과 백의 보살을 볼 것이며, 과거와 미래의 각각 백겁의 일을 능히 알고, 백 가지 부처님의 세계를 비출 것이다. 백 가지 부처님의 세계를 비추고는 모든 지위에 올라가는 지혜 모양을 잘 알 것이다.
  그 본원력(本願力)으로 날세고 신속하게 여러 가지 신통을 보이고 나타낼 것이며, 법운지(法雲地)에서는 법우(法雨)에 의하여 지위를 받고, 여래의 안으로 얻는 구경 법신의 지혜자리를 증득할 것이요, 십무량(十無量)인 선근(善根)과 원(願)에 의하여 이리저리 중생을 교화하여 여러 가지로 응화(應化)하며 자신이 여러 가지 광명을 보이고 나타낼 것이니, 자신이 증득하는 지혜와 삼매락(三昧樂)을 수행하는 것을 얻었기 때문이다.
  대혜여,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사대(四大)와 사진(四塵)의 모양을 잘 알아야 한다.
  대혜여, 어떤 것이 보살의 사대와 사진의 모양을 잘 아는 것인가? 대혜여,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수행할 것이니, 이른바 진실이란 말하자면 사대가 없는 곳이니, 사대를 본래 생하지 않은 것으로 관찰함이다. 이와 같이 관찰하고서는 또 생각하기를, '관찰한 것은 오직 자심의 견(見)과 허망한 각지(覺知)며, 그로써 외진(外塵)을 본 것이요, 실물이 있는 것은 아니니, 그것은 명자(名字) 뿐이며, 분별심으로 본 것이라 이른바 삼계(三界)로 사대와 사진의 상을 떠난 것이다'라고 하여 이와 같이 보고서, 네 가지 견(見)을 떠나 청정 법을 보며, 나와 내 것이라 함을 떠나고, 자기 모양인 여실법(如實法)에 머무른다.
  대혜여, 자기 모양[自相]인 여실법 가운데 머무름이란, 건립한 모든 법이 생(生)함이 없는 자기 모양의 법에 머무름이다.
  대혜여, 사대(四大) 가운데 어찌하여 사진(四塵)이 있는가? 대혜여, 망상(妄想)으로 부드럽고 연하며, 습윤(濕潤)함을 분별하므로 안팎의 수대(水
  
  
 
[123 / 415] 쪽
  大)를 낸 것이다.
  대혜여, 망상으로 '있는 바 굳은 모양'을 분별하므로 안팎의 지대(地大)를 낸 것이다.
  대혜여, 망상으로 안팎과 또한 허공을 분별하므로 안팎의 생각이 생겼으며, 허망한 안팎의 사견(邪見)에 집착하므로 5음(陰)의 취락(聚落 : 집단)과 사대와 사진이 생긴 것이다."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식(識)이 능히 여러 가지 경계에 집착하고, 다른 도[異道]를 구하기 좋아하여 저 경계를 취한 것이다.
  대혜여, 사대(四大)가 넷이 있으니, 색(色)·향(香)·미(味)·촉(觸)이다.
  대혜여, 사대는 원인이 없으니, 무슨 까닭인가? 땅의 자체와 형상과 장단(長短)이 사대의 상을 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혜여, 형상·대소(大小)·상하(上下) 용모에 의하여 모든 법을 낸 것이니, 형상과 대소와 장단을 떠나서 법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혜여, 외도가 허망하게 사대와 사진을 분별하는 것은 나의 법에서 이와 같이 분별함이 아니다.
  대혜여, 내 그대를 위하여 5음(陰)의 체상(體相)을 말하겠다.
  대혜여, 어떤 것이 5음의 모양인가? 이는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이다.
  대혜여, 4음(陰)은 색(色)이 없는 것이니, 이는 수·상·행·식이다.
  대혜여, 색은 사대(四大)에 의하여 생긴 것이니, 사대는 피차(彼此)가 같지 아니한 모양이다.
  대혜여, 색상이 없는 법은 허공과 같으니, 어찌 네 가지의 수상(數相)을 이루겠는가.
  대혜여, 비유컨대, 허공은 수상을 떠났는데, 허망하게 분별하여 이는 허공이라고 함과 같다.
  대혜여, 음(陰)의 수상(數相)은 모든 상을 떠났으며, 유무상(有無相)을 떠나고, 네 가지 상을 떠났지만, 어리석은 범부는 모든 수상을 말하니,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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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대혜여, 내가 말한 '모든 상이 환(幻)과 같아서 여러 가지 형상이 하나와 둘의 모양을 떠났다'라고 함은 가명(假名)에 의하여 말한 것이니, 꿈과 거울의 물상[鏡像]과 같아서 소의(所依)를 떠난 것이 아니다.
  대혜여, 만약 성인의 지혜로 수행하여 분별함에는 5음을 허망함으로 보니, 대혜여, 이를 5음의 5음 체상이 없는 것이라 이름함이다.
  대혜여, 그대는 지금 마땅히 이와 같이 허망하게 분별하는 상을 떠날 것이다.
  이러한 것을 떠나 여러 보살을 위하여 모든 법상(法相)을 떠난 적정(寂靜)의 법을 말해 줄 것이니, 외도의 모든 견(見)의 상을 막기 위함이다.
  대혜여, 적정법을 말하여 청정한 무아(無我)의 상을 증득하고 원행지(遠行地)에 들어가며, 원행지에 들어가고는 한량없는 삼매와 자재(自在)한 여의생신(如意生身)을 얻으며, 제법의 여환삼매(如幻三昧)를 얻고, 자재한 신통력(神通力)을 얻어 행하며 일체 중생에 수순하여 자재한 작용이 큰 땅과 같을 것이다.
  대혜여, 비유컨대 큰 땅이 일체 중생에게 뜻을 따라 쓰임과 같으니 대혜여, 보살마하살이 중생의 쓰임을 따르는 것이 또한 그와 같다.
  대혜여, 외도의 말하는 네 가지 열반이 있으니, 무엇이 넷인가? 첫째는 자체상(自體相) 열반이요, 둘째는 여러 가지 모양이 있고 없는 열반이요, 셋째는 자각체(自覺體)가 있고 없는 열반이요, 넷째는 모든 음(陰)의 자기 모양과 같은 모양과 상속체(相續體)를 끊은 열반이니, 대혜여, 이를 외도의 네 가지 열반이라 함이요, 내가 말한 바는 아니다.
  대혜여, 내가 말한 바는 허망한 경계를 보고 분별하는 식(識)이 없어진 것을 열반이라 이름한다."
  대혜보살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어찌 여덟 가지 식(識)을 말씀하지 아니합니까?"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여덟 가지 식(識)을 말한다."
  
  
[125 / 415] 쪽
  대혜보살은 말하였다.
  "만약 세존께서 여덟 가지 식을 말씀하신다면 무슨 까닭으로 다만 의식(意識)이 전멸(轉滅)한다 말씀하시고, 7식(識)이 전멸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저 념(念)과 관(觀)에 의지하여 있기 때문에, 전식(轉識)이 멸하면 7식이 또한 멸한다."
  대혜여, 의식은 경계에 집착하고 취하여 생긴 것이니, 생기고는 여러 가지 훈습(熏習)으로 아리야식(阿梨耶識)을 증장(增長)하므로 나와 내 것이라 함을 떠난 모양에서 허망한 공(空)에 집착하여 분별을 낸다.
  대혜여, 저 두 가지 식(識)은 차별상(差別相)이 없으니, 아리야식에 의하여 자심에서 나타난 경계의 관(觀)함을 따라서 망상에 집착하여 여러 가지 마음이 생(生)하는 것이 묶은 대나무가 번갈아 서로 인(因)이 되는 것과 같으며, 큰 바닷물결과 같으므로 생멸(生滅)이 있다. 그러므로 대혜여, 의식이 전멸하면 일곱 가지 식도 전멸한다."
  그 때 세존께서는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나는 열반을 취하지 않으며,
  또한 짓는 상[作相]도 버리지 않아
  허망한 마음 굴려서 없앴으니,
  그러므로 열반을 얻었다 말하리.
  
  저 인(因)과 념(念)에 의하여
  의(意)는 모든 경계를 취향하며
  식(識)은 심(心)과 더불어 인을 짓고
  심은 식의 소의(所依)가 되나니.
  
  물의 흐름이 고갈되면
  파랑이 곧 일지 않듯이,
  
  
[126 / 415] 쪽
  이러한 의식이 멸하면
  여러 가지 식도 나지 않는다.
  
  대혜여, 내가 그대를 위하여 허망하게 분별하는 법체(法體)의 차별상을 말했으니, 그대와 보살마하살은 잘 분별하여 허망한 법체인 차별의 모양을 알 것이며, 허망한 법체인 차별의 모양을 알고는 분별과 분별할 바의 법을 떠나고, 자신이 안으로 수행하는 법을 잘 알고 외도의 능취(能取)와 가취(可取)의 경계를 멀리 떠나며, 여러 가지 허망하게 분별하는 인연법의 체상(體相)을 멀리 떠나서 다시 허망한 상을 분별하지 말 것이다.
  대혜여, 어떤 것이 허망하게 분별하는 법체인 차별의 모양인가? 대혜여 허망한 분별의 자체인 차별상이 열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열두 가지인가? 첫째는 언어(言語)의 분별이요, 둘째는 가지(可知)의 분별이요, 셋째는 상(相)의 분별이요, 넷째는 재물의 분별이요, 다섯째는 실체(實體)의 분별이요, 여섯째는 인(因)의 분별이요, 일곱째는 견해의 분별이요, 여덟째는 건립(建立)의 분별이요, 아홉째는 생(生)의 분별이요, 열째는 불생(不生)의 분별이요, 열한째는 화합(和合)의 분별이요, 열두째는 박(縛)과 불박(不縛)의 분별이니, 대혜여 이를 분별의 자체상인 차별상이라 한다.
  대혜여, 언어의 분별이란, 여러 가지 언어는 아름답고 묘한 음성을 좋아하여 집착함이니, 대혜여, 이를 언어의 분별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가지(可知)의 분별이란 생각하기를, '마땅히 현전(現前)의 법과 사실인 일의 모양이 있어서, 성인의 수행함도 저 법에 의지하여 언어가 생긴 것임을 안 것이다'라고 하여 이와 같이 분별함이니, 대혜여, 이를 가지의 분별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상(相)의 분별이란, 곧 저 가지(可知)의 경계 가운데 열(熱)과 습(濕)과 움직임[動]과 견고함[堅]의 여러 가지 모양을 고집하여 사실인척 하는 것이 새, 짐승들이 허공에 아지랑이를 보고 물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음이니, 대혜여, 이를 상의 분별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재물의 분별이란, 금(金)·은(銀) 등의 여러 가지 보배인 경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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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함이니, 대혜여, 이를 재의 분별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실체(實體 : 自體)의 분별이란 법이 있는 자체의 형상을 전념(專念)하기를, '이 법은 이와 같고 이와 같아서 다르지 않고, 정견(正見)의 견(見)이 아니다'라고 분별함이니, 대혜여, 이를 자체의 분별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인(因)의 분별이란, 어떠한 인(因)과 어떠한 연(緣)에서, 유(有)와 무(無)를 요별(了別)하여 인상(因相)으로 요별하는 상을 내는 것이니, 대혜여, 이를 인의 분별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견해의 분별이란, 유와 무, 같음과 다름, 갖춤과 갖추지 못함의 사견(邪見)을 외도가 집착하여 분별함이니, 대혜여, 이를 견해의 분별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건립(建立)의 분별이란, 나와 내 것이라고 하는 상을 취하여 허망한 법을 말한 것이니, 대혜여, 이를 건립의 분별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생(生)의 분별이란, 뭇 인연에 의지하여 유무법에서 집착심(執着心)을 낸 것이니, 대혜여, 이를 생의 분별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불생(不生)의 분별이란, 일체법이 본래 생함이 아니니, 본래 없기 때문이며, 인연에 의하여 있고 인과가 없다는 것이니, 대혜여, 이를 불생의 분별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화합(和合)의 분별이란, 어떠한 법들이 화합하는 것은 금(金 : 바늘)과 누(縷 : 실)가 어울림과 같다 함이니, 대혜여, 이를 화합의 분별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박(縛)과 불박(不縛)의 분별이란, 묶이는 인(因)에 집착함이란 박(縛)과 같다는 것이니, 대혜여, 사람이 방편으로 줄을 맺어서 매듭을 만들어 맺었다가 도로 푸는 것과 같은 것이니, 대혜여, 이를 박과 불박의 분별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이를 허망하게 분별하는 법체의 차별상이라 이름한다. 이 허망하게 분별하는 법체의 차별상에서 모든 범부들이 유와 무에 집착하고, 법상의 여러 가지 인연에 집착한 것이니, 그러므로 대혜여, 법체의 차별상을 분별하여 여러 가지 법을 보고 집착하여 사실로 여기는 것이 환상에 의하여 여러 가지 일을 보는 것과 같지만, 범부는 분별하기를 환상과 다른 이러한 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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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는 것으로 안다.
  대혜여, 나는 여러 가지 법에서 환상과 다르지 않다고 말하고, 또한 다르지 아니함도 아니라고 하니, 무슨 까닭인가? 만약 환상이 여러 가지 법과 다르다면, 마땅히 환상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법이 나지 않을 것이며, 만약 환상이 곧 여러 가지 법이라면, 마땅히 달리 보이지 않겠지만, 이는 환상이며, 이는 여러 가지 법이라 하여 차별됨을 보인다. 그러므로 나는 '다르지 않으며 다르지 아니함도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대혜여, 그대와 여러 보살마하살은 환상의 실(實)이 있거나 없다고 분별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 때 세존께서는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마음은 경계에 의해 속박되며
  지각도 경계를 따라 생하니,
  고요하고 수승한 곳에서만
  평등한 지혜가 생한다.
  
  망상(妄想)은 분별로서는 있지만
  연기법(緣起法)에는 없거늘
  허망을 취해 미란(迷亂)했기에
  다른 힘으로 생김을 알지 못하네.
  
  여러 가지 인연으로 생긴 법이란
  바로 환(幻)이며 진실이 아니니,
  저 여러 가지 생각으로
  허망하게 분별하면 될 수 없으리.
  
  저 생각이란 바로 허물이며
  모두 마음의 속박으로부터 생한 것인데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가 없어
  인연법을 분별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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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모든 망상의 자체는
  곧 이 연기법으로,
  망상이 여러 가지 있으므로
  뭇 인연 가운데 분별함이네.
  
  세제(世諦)와 제일의제(第一義諦)와
  세 번째 인(因) 없이 나는 것이며
  망상으로 세제를 말하니
  이를 끊으면 성인의 경계라네.
  
  비유컨대 수행하는 이가
  하나의 일에서 여러 가지를 나타냄 같으나
  저 법은 여러 가지가 없으니
  분별상도 이와 같다.
  
  눈의 여러 가지 눈병처럼
  망상으로 온갖 색상을 보지만
  눈병은 색(色)과 비색(非色)도 없듯이
  지혜 없이 법을 취함도 그러하다네.
  
  진금(眞金)이 때(垢)를 떠난 것 같으며
  물이 탁한 진흙 떠남과 같고
  허공이 구름을 떠났듯이
  진법(眞法)의 깨끗함 또한 그렇다네.
  
  망상법은 있지 않으며
  인연법도 또한 없는데,
  유(有)를 취하고 무(無)를 비방함이여
  이는 분별로 보는 이의 견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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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상이 만약 진실이 아니고
  인연법이 만약 진실이라면,
  인을 떠나 마땅히 법이 생기며
  실법(實法)은 실법을 생하리.
  
  허망으로 인해 법이라 한 것이며
  모든 인연이 생함을 본 것이니,
  망상과 이름이 서로 떠나지 아니하여
  이와 같이 허망이 생긴 것이라네.
  
  허망은 본래 진실함 없으니
  모든 망상을 벗어나면
  그 때서야 청정한 법을 알 것이니
  이를 제일의(第一義)라 이름한다네.
  
  망상은 열두 가지가 있으며
  인연법도 여섯 가지가 있지만
  속 몸으로 증득할 경계는
  저 차별이 있지 않다.
  
  5법(法)의 진실함이며
  삼종(三宗)도 마찬가지니
  수행하는 이가 이를 행하면
  진여(眞如)를 떠나지 않으리.
  
  중생과 인연이여
  저 법을 분별함이라 이름한다.
  그 모든 망상의 모양이
  저 인연으로부터 생기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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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한 지혜로 잘 관찰하면
  인연도 망상도 없으리,
  제일의(第一義)에는 물건이 없으니
  어찌 지혜로서 분별하랴.
  
  만약 진실로 법이 있다 하여도
  있음과 없음을 멀리 떠났도다.
  만약 있음과 없음을 떠났다면
  어찌 두 법이 있다 하겠는가.
  
  두 법체를 분별하면
  두 가지 법체가 있는 것이요,
  허망으로 여러 가지를 본 것이니
  청정만이 성인의 경계니라.
  
  망상으로 여러 가지를 본 것은
  인연 속에서 분별함이라네,
  만약 이와 달리 분별하는 이는
  곧 외도에 떨어지리라.
  
  망상으로 망상을 말하고
  견(見)을 인하여 화합하여 생하니,
  두 가지 망상을 떠나면
  바로 이 진실법이다.
  
  그 때 대혜보살마하살은 부처님께 다시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원하오니 자신이 안으로 증득하는 거룩한 지혜로 수행하는 모양과 일승(一乘)법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하면 다른 이를 말미암지 않고 일체 부처님의 국토에 돌아다니면서 불법에 통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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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께서 거룩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훌륭한 대혜여,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어라. 마땅히 그대를 위하여 말하리라."
  대혜보살은 말하였다.
  "어지신 세존이시여, 가르치심을 잘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아함(阿含)의 명자(名字)법과 여러 논사(論師)가 말한 바 분별하는 법상을 떠나고, 고요한 곳에서 홀로 앉아 자신의 지혜를 사유(思惟)하고 모든 법을 관찰하여 다른 이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여러 가지로 보는 허망한 모양을 떠나며, 마땅히 부지런히 수행하여 여래지(如來地)의 상상(上上)인 증지(證智)에 들어갈 것이니, 대혜여, 이를 자신의 안으로 증득하여 수행하는 모양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또한 다시 삼계(三界) 가운데 일승(一乘)을 닦는 것이 있으니, 대혜여, 무엇이 일승의 모양인가? 대혜여, 여실히 일승도(一乘道)를 깨달음이니, 그러므로 나는 말하여 일승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어떤 것이 여실히 일승도를 깨달은 모양인가? 가취(可取)와 능취(能取)의 경계를 분별하지 아니하여 이와 같은 모든 법상을 내지 않음이니, 모든 법을 분별하지 않음에 머무른 까닭이다.
  대혜여, 이를 여실히 일승도를 깨달은 모양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이와 같은 일승도를 깨달은 모양이란 일체 외도와 성문(聲聞)과 벽지불(辟支佛)과 범천(梵天) 등도 일찍이 알지 못한 것이요, 오직 나만은 그렇지 않다.
  대혜여, 그러므로 나는 일승도의 모양이라 이름한다."
  대혜보살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무슨 인연으로 삼승(三乘)을 말씀하시고 일승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습니까?"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성문과 연각은 능히 스스로 열반을 증득함을 알지 못하니, 그러므로 나는 오직 일승도만을 말한다.
  
  
 
[133 / 415] 쪽
  대혜여, 모든 성문과 벽지불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세간을 싫어하여 떠나고 스스로 능히 해탈을 얻지 못하니, 그러므로 나는 오직 일승도를 말한다.
  대혜여, 일체 성문과 벽지불은 지장(智障)을 떠나지 못하고, 업과 번뇌와 습기장(習氣障)을 떠나지 못했으니, 그러므로 나는 오직 일승도를 말한다.
  대혜여, 성문과 벽지불은 법무아(法無我)를 증득하지 못하고 헤아릴 수 없는 변역생(變易生)의 떠남을 얻지 못했으니, 그러므로 나는 모든 성문을 위하여 일승도를 말한다.
  대혜여, 성문과 벽지불이 만약 일체 모든 허물과 훈습(薰習)을 떠나고 법무아(法無我)를 얻어 증득한다면, 그 때엔 모든 허물을 떠날 것이며, 삼매(三昧)와 무루(無漏)에 취(醉)한 법을 깨어나고서, 출세간(出世間)인 무루계(無漏界)의 일체 공덕을 수행할 것이며, 수행하여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자재법신(自在法身)을 얻으리라."
  그 때 세존께서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천승(天乘)과 범승(梵乘)과
  성문과 연각승과
  모든 부처님의 여래승(如來乘)이라 하여
  내가 이러한 여러 승(乘)을 말함은
  
  그 마음에 생멸이 있기 때문이요,
  여러 승은 구경(究竟)이 아니니
  만약 저 마음이 멸진(滅盡)한다면
  승(乘)과 승이라 할 것도 없으리.
  
  승의 차별이 있지 않는데
  나는 일승(一乘)이라 말하며
  중생을 인도하려고
  여러 승을 분별하여 말했노라.
  
  
[134 / 415] 쪽
  해탈이 세 가지가 있으며
  또한 두 법무아인데
  두 가지 장(障)을 떠나지 못하면
  참 해탈과는 먼 것이라네.
  
  비유하면 바다에 뜬 나무는
  항상 물결에 따라 움직이듯이
  모든 성문 또한 그러하여
  상풍(相風)에 표탕(漂湯)하니,
  
  수번뇌(隨煩惱)는 떠났으나
  훈습 번뇌에 묶이고,
  삼매락(三昧樂)에 맛 들여서
  무루계(無漏界)에서 편히 머무르네.
  
  완전한 나아감이 있지 않고
  또한 물러가지도 않아,
  삼매를 얻은 몸이
  한량없는 겁에서 깨어나지 못함이여.
  
  비유컨대 술 취한 사람이
  술기운 없어지면 깨어남과 같으니,
  불(佛)의 위없는 체성(體性)을 얻어야만
  이것이 나의 참 법신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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