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입능가경(入楞伽經)

입능가경 제 3 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4.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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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능가경 제 3 권
  
  
  원위 천축삼장 보리류지 한역
  
  
  
3. 집일체불법품 ②
  
  "또한 대혜여,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세 법의 자체 모양[自體相]을 잘 알아야 할 것이니, 대혜여, 무엇이 세 법의 자체 모양인가? 첫째는 허망하게 명자(名字)를 분별하는 모양이요, 둘째는 인연 법체(法體)의 자기 모양[自相]인 모양이요, 셋째는 제일의제(第一義諦) 법체의 모양이다.
  대혜여, 어떤 것이 허망하게 명자를 분별하는 모양인가? 명자를 따라서 허망하게 모든 법의 모양을 분별함이니, 이를 허망하게 명자를 분별하는 모양이라 한다.
  대혜여, 어떤 것이 인연 법체의 자기 모양인 모양인가? 대혜여, 인연 법체의 자기 모양이란 것은 경계와 사상(事相)을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혜여, 인연 법체의 경계와 사상(事相)은 여러 부처님·여래·응공·정변지께서 허망하게 분별하는 차별이라 말씀하신다. 그것은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허망하게 명자와 희론(戱論)에 집착하여 분별함이요, 둘째는 허망하게 명자상(名字相)에 집착하여 경계상(境界相)과 사상(事相)을 분별함이다.
  대혜여, 어떤 것이 허망하게 명자상과 경계상과 사상에 집착하는 것인가? 이는 곧 저것의 안과 바깥 법의 자기 모양과 같은 모양이다.
  대혜여, 이를 인연 법체의 두 가지 자기 모양인 모양이라 하니, 그는 저 법에 의지하여 저 법이 생(生)하는 것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대혜여, 이를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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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 법체의 자기 모양인 모양이라 한다.
  대혜여, 어떤 것이 제일의제(第一義諦) 법체의 모양인가? 부처님·여래는 명자상과 경계상과 사상을 떠나고 거룩한 지혜로 수행하는 경계이니, 대혜여, 이를 제일의제 모양인 여러 부처님의 여래장(如來藏) 마음이라 한다."
  그 때에 세존께서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명상(名相)을 분별하는 것과
  인연법은 두 모양인데,
  진여(眞如)의 바르고 묘한 지혜만은
  이것이야말로 제일의(第一義)의 모습이네.
  
  "대혜여, 이를 5법의 자기 모양을 관찰하는 법문이라 하며, 부처님과 보살의 속으로 증득할 경계를 수행하는 모양이니, 그대와 여러 보살들은 마땅히 이와 같이 배워야 할 것이다.
  대혜여,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두 가지 무아(無我)를 잘 관찰할 것이다.
  대혜여,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인무아(人無我)의 지혜요, 둘째는 법무아(法無我)의 지혜이다.
  어떤 것이 인무아의 지혜인가? 이는 나와 내 것이라 함과 5음·18계·6입의 취(聚) 등을 떠나고, 지(智)와 업(業)과 애착으로 생(生)하는 것이 없으며, 눈과 빛깔들에 의하여 허망하게 집착하는 것과 제 마음에서 일체의 모든 감각기관과 몸과 집들을 나타나 보이는 것과 제 마음의 분별로 분별한 것과 분별하는 식(識)인 것과 강물의 흐름과 같은 종자와 등불 타오름과 바람과 구름과 같아서 생각 생각이 구르면서 앞뒤가 차별이 있으며, 가볍게 날뛰고 움직여 구르는 것은 원숭이와 같으며, 깨끗하지 못한 곳을 좋아함은 파리와 같으며, 만족이 없는 것은 불과 같아, 끝없는 옛적부터 희론(戱論)의 경계로 훈습한 것이 마치 두레박의 바퀴와 수레바퀴가 도는 움직임과 같아서 삼계(三界)에서 여러 가지 형태와 몸을 받아 나는 것이 환술(幻術)로서 시체를 산 사람처럼 일으켜 움직이는 것과 같은 것들이다.
  대혜여, 이와 같이 모든 법의 모양을 관찰하는 선교방편(善巧方便)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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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를 이름하여 인무아를 잘 아는 지혜라 한다.
  대혜여, 어떤 것이 법무아의 지혜인가? 말하자면 참답게 5음·18계·6입의 모양을 분별함이니 대혜여, 보살이 5음·18계·6입 등이 나와 내 것이라 함이 없으며, 5음·18계·6입 등은 업과 애착의 줄에 의하여 번갈아 서로 묶이는 인연으로 생긴 것이며, 나도 없고 짓는 것[作者]도 없는 것임을 관찰함이다.
  대혜여, 5음·18계·6입 등은 같은 모양[同相]과 다른 모양[異相]을 떠난 것이지만 진실치 못한 모양[相]과 분별에 의하여 이름을 얻어진 것이다. 어리석은 범부는 망상 분별로서 있는 것으로 여기지만, 참다움을 증득한 이는 있다고 보지 않는다.
  대혜여, 보살이 이와 같이 관찰하여 마음과 뜻과 의식과 5법의 체상(體相)은 모두 떠난 것이며, 모든 인연은 없는 것이라고 본다면, 법무아 지혜인 경계를 잘 안다고 할 것이다.
  대혜여, 보살이 법무아를 잘 알고서 진여(眞如)를 관찰하고, 적정(寂靜)의 행을 닦는다면 오래지 않아 마땅히 첫 환희지(歡喜地)를 얻을 것이며, 환희지를 잘 관찰하면 이와 같이 모든 지위가 차례로 더욱 밝아져서 법운지(法雲地)까지 증득하게 되리니, 보살이 그 법운지에 머무르면 한량없는 모든 보배가 곳곳에서 얽히고 꾸며져 큰 연꽃자리와 큰 보배궁전에서 진실한 업과 환(幻)의 경계를 닦아 나는 것처럼 그 위에 앉을 것이며, 여러 수행을 같이 하는 불자들이 공손히 둘러 모실 것이다. 또한 시방의 여러 부처님께서 손을 펴시고 그의 정수리에 물을 부어 부처의 지위를 주시는 것이 전륜왕이 그 태자의 정수리에 물을 부어줌과 같아서 불자의 지위를 벗어날 것이며, 불자의 지위를 벗어나고는 부처님 법을 관찰하고 참답게 수행하여 모든 법에서 자재(自在)함을 얻을 것이며, 자재함을 얻고 나면 여래의 최상 법신을 얻을 것이라 말하니, 이는 법무아를 보았기 때문이다.
  대혜여, 이를 진실한 법무아의 모양이라 한다.
  대혜여, 그대와 여러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배울 것이다."
  그 때 거룩하신 대혜보살마하살은 또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비방함이 있음과 없음을 저희를 위하여 말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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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 주십시오.
  세존이시여, 저희와 여러 보살마하살이 만약 이를 듣는다면 있음[有]과 없음[無]이라는 삿된 소견을 벗어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 無上正等覺)를 얻을 것이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서는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의 삿된 견해를 멀리 떠나고 곧 부처님의 정법(正法)을 건립할 것입니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거룩한 대혜보살마하살의 청함을 받으시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마음속엔 단견과 상견
  몸과 살림살이와 사는 곳이 없거늘,
  오직 마음이 어리석고 지혜가 없어
  물건이 없는 데서 있다고 본다.
  
  그 때 세존께서 이 게송의 뜻을 다시 설명하시려고 거룩한 대혜보살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대혜여, 네 가지 비방을 건립하는 모양이 있으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있지 않는 것을 건립하는 모양이요, 둘째는 올바른 견해가 아닌 것을 건립하는 모양이요, 셋째는 원인이 있지 않는 것을 건립하는 모양이요, 넷째는 체(體)가 있지 않는 것을 건립하는 모양이니, 대혜여, 이를 네 가지 건립함이라 한다.
  대혜여, 어떤 것이 이 비방하는 모양인가?
  대혜여, 삿된 소견으로 건립한 법은 실상(實相)을 볼 수 없음을 관찰하고 곧 모든 법을 비방하여 말하기를, '모두가 없다'라고 하니 대혜여, 이를 비방을 건립한 모양이라 한다.
  대혜여, 어떤 것이 있지 않는 것을 건립하는 모양인가? 말하자면 5음·18계·6입은 있지 않는 법이라 분별하며, 끝없는 예로부터 희론은 진실함이 없다고 했기 때문에 같은 모양과 다른 모양에 집착하여, '이 법은 이와 같고, 이와 같아서 결국은 다르지 않다'라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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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혜여, 이는 한량없는 옛적부터 오면서 번뇌의 훈습과 집착으로서 생긴 것이다. 대혜여, 이것이 있지 않는 것을 건립하는 모양이라 한다.
  대혜여, 어떤 것이 올바른 견해가 아닌 것을 건립하는 모양인가?
  대혜여, 저 5음·18계·6입 가운데에는 나와 남과 중생과 수자(壽者)와 짓는 이와 받을 이가 없거늘 삿된 견해를 세워서 나와 남들이 있다고 말하니 대혜여, 이를 올바른 견해가 아닌 것을 건립함이라 한다.
  대혜여, 어떤 것이 원인이 있지 않는 것을 건립하는 모양인가? 말하자면 '처음 식(識)은 원인이 있어서 생긴 것이 아니다. 본래 생긴 것은 아니라면 후에 생긴 것이니, 환(幻)이 본래 없지만 물건으로 인하여 생긴 것과 같아서 눈과 빛깔과 밝음과 생각으로 인하여 식이 생긴 것이요, 생겼다가 도로 없어진다'라는 것이다.
  대혜여, 이를 원인이 있지 않는 것을 건립하는 모양이라 한다.
  대혜여, 어떤 것이 체(體)가 있는 것이 아닌 것을 건립하여 법을 비방하는 모양인가? 이는 허공과 멸함과 열반은 짓는 것도 없고 물건도 없다고 하여 집착함을 세운 것이다.
  대혜여, 저 세 법인 허공과 멸(滅)과 열반은 있음과 없음을 떠난 까닭이다.
  대혜여, 모든 법은 토끼와 말과 나귀와 낙타의 뿔과 털 바퀴[毛輪]와 같아서 있음과 없음을 건립하는 모양을 떠난 것이다.
  대혜여, 비방함을 건립하는 모양은 범부들이 허망하게 분별하여 모두가 오직 마음으로 보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모든 법이 있다고 본 것이니, 이는 성인(聖人)의 본 것이 아니다.
  대혜여, 이는 체가 있는 것이 아닌 것을 건립하여 법을 비방하는 모양이라 함이니 대혜여, 그대는 마땅히 올바르지 못한 견해로 법에 대하여 비방함을 세우는 것을 멀리 떠날 것이다.
  대혜여, 보살마하살이 참답게 심(心)과 의(意)와 의식(意識)과 5법의 체상(體相)과 두 가지 무아(無我)를 알고서 중생을 편안케 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종류와 형상을 나타내니, 저 허망한 것과 같아서 분별할 바가 없는 것은 인연법에 의해서 여러 가지가 있는 것이다.
  대혜여, 보살마하살이 또한 그와 같아서 중생들에 의하여 여러 가지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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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 나타내는 것은 마치 여의주가 모든 중생의 마음 생각을 따르듯이 모든 부처님 세계의 대중 가운데서 환상과 같고 꿈과 같으며 메아리와 같고 물 속의 달과 거울 속의 얼굴과 같은 것을 나타내며, 모든 법의 생멸(生滅)과 단(斷)·상(常)을 멀리 떠났으며, 여래께서 성문과 연각승을 떠난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부처님의 법을 듣고 즉시 한량없는 백 천 만 억의 깊고 깊은 삼매를 얻으며, 삼매를 얻고는 삼매의 힘에 의하여 한 부처님의 세계로부터 또 다른 부처님의 세계에 이를 때마다 여러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며, 여러 궁전 속에서 태어나는 것을 보이어 3보(寶)를 찬탄하며, 불신(佛身)을 나타내고 보살과 성문 대중들이 둘러 모신 곳에서 여러 중생으로 하여금 마음이 경계를 나타낸 진리에 들어가게 하고, 바깥 경계에 대하여 물질이 없고 물질이 있는 것을 말하여 그들로 하여금 있음과 없음을 건립하는 것을 멀리 떠나게 한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불자여, 세상의 온갖 것이
  오직 마음뿐 딴 법 없다고 본다면
  모든 것을 몸으로 짓지 않더라도
  힘을 얻어 자재(自在)를 이루리라.
  
  그 때 거룩하신 대혜보살이 또한 다시 부처님께 청하여 말하였다.
  "원하옵나니 세존이시여, 저희들을 위하여 일체법이 공(空)하여 생(生)함도 없고 둘이 없으며, 자체상(自體相)을 떠난 것을 말씀하여 주십시오. 저희와 여러 보살 대중이 법이 공하여 생함이 없고 둘이 없으며 자체 모양을 떠난 것을 알게 되면 있다 없다는 허망한 망상을 떠날 것이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속히 얻을 것이옵니다."
  그 때에 부처님께서 거룩한 대혜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셨다.
  "착하다. 착하다. 착한 대혜여,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어라. 내가 마땅히 그대를 위해 널리 분별해 말하리라."
  대혜보살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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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쁩니다. 세존이여, 순순히 가르침을 잘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대혜여, 공(空)이라는 것은 바로 허망하게 생각하는 법체(法體)의 어구[句]이다.
  대혜여, 그 허망하게 생각하는 법체에 집착하여 말하기를, '법이 공하여 생함이 없고 자체가 없으며, 둘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대혜여, 공함에는 일곱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일곱인가? 첫째는 모양이 공함이요, 둘째는 일체법의 있는 사물과 없는 사물이 공함이요, 셋째는 행(行)이 공함이요, 넷째는 행 아닌 것이 공함이요, 다섯째는 일체법의 말없는 것이 공함이요, 여섯째는 제일의(第一義)인 거룩한 지혜의 큼[聖智大]이 공함이요, 일곱째는 저기에는 저것이 공함[彼彼空]이다.
  대혜여, 어떤 것이 모양이 공함인가? 일체법의 자기 모양과 같은 모양이 공함이라는 견해가 번갈아 서로 쌓여 모인 것이니, 대혜여, 하나하나 법에서 자기 모양과 같은 모양을 관찰한다면 한 법도 있을 수 없고, 자기 모양과 다른 모양의 두 모양을 떠난 것이어서, 모양들이 머물 수도 볼 수도 없기에 자기 모양이 공한 것이라 함이다.
  대혜여, 어떤 것이 일체법의 있는 사물과 없는 사물이 공함인가? 자체 모양에 실로 법이 있어 생(生)한다고 하지만 대혜여, 모든 법의 자체 모양은 있음과 없음이 모두 공하므로 자체 모양의 있는 사물과 없는 사물이 공함이라 한다.
  대혜여, 어떤 것이 행(行)이 공함인가? 5음 등이 나와 내 것이라 함을 떠났는데 인연과 짓는 것과 업에 의하여 생기게 되니 대혜여, 이러하므로 행이 공한 것이라 한다.
  대혜여, 어떤 것이 행 아닌 것이 공함인가? 5음의 법 가운데 본래 열반일 뿐 행은 있지 않음이니, 대혜여, 이를 행 아닌 것이 공함이라 한다.
  대혜여, 어떤 것이 일체법의 말없는 것의 공함인가? 허망한 생각으로 모든 법을 분별한 것이어서 말로서는 말할 수 없으니 대혜여, 이를 일체법의 말없는 것의 공함이라고 한다.
  대혜여, 어떤 것이 제일의(第一義)인 거룩한 지혜의 큼이 공함인가?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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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이 안으로 거룩한 지혜와 법이 공함을 증득하여 모든 삿된 견해와 훈습의 허물을 떠난 것이니 대혜여, 이를 제일의인 거룩한 지혜의 큼이 공함이라 한다.
  대혜여, 어떤 것이 저기에는 저것이 공함[彼彼空]인가? 어떠한 법들에는 저 법은 없고 이 법은 있으며, 저 법은 있고 이 법은 없나니, 이러하므로 저기에는 저것이 공함이라 말한 것이다. 대혜여, 내가 옛날에 녹모(鹿母; 鹿子母)를 위하여 말한 전당(殿堂)이 공하다는 것은 코끼리와 말과 소와 염소 등이 없으므로 공하다는 것이요, 여러 비구(比丘)들이 있으므로 공함이 아니라 한 것이다. 그리고 전당에는 전당 자체가 없고, 비구에도 비구의 체(體)를 얻을 수 없으며, 코끼리와 말과 소와 염소들이 딴 곳에도 없는 것은 아니다.
  대혜여, 이와 같이 모든 법의 자기 모양과 같은 모양도 또한 얻을 수 없고, 이곳과 저곳을 떠났기 때문에 내가 저기에는 저것이 공함[彼彼空]이라 말한 것이다.
  대혜여, 이를 일곱 가지 공함이라 한 것이다. 대혜여, 이 '저기에는 저것이 공함[彼彼空]'이 가장 거칠고 얕으니, 대혜여, 그대는 마땅히 저것과 저것의 공함을 떠날 것이요, 닦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대혜보살은 말하였다.
  "어떤 것이 생하지 않는 것[不生]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혜여, 자체(自體)가 생하지 않으며 생하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세제(世諦)에 의하여 생(生)함이라 말하고, 본래 생하지 않는 것에 의하여 불생(不生)이라고 말한 것이다."
  대혜보살은 말하였다.
  "무엇이 자체의 모양[體相]이 없는 것입니까?"
  "대혜여, 내가 말한 자체의 모양이 없다는 것은 일체 모든 법의 자체가 본래 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모든 법이 자체가 없고, 상속(相續)되는 자체도 찰나 동안에도 머무르질 않는다'라고 말한 것이다.
  대혜여, 다름[異]과 다른 모양[異相]을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의 자체 모양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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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혜보살은 말하였다.
  "어떤 것을 둘이 아닌 법의 모양[不二法相]이라 말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혜여, 두 법의 모양이라는 것은 햇빛과 그림자, 길고 짧고, 검고 흰 이러한 법들이 각각 이름이 다르니 둘이 아니라고 말 할 수 없다. 대혜여, 세간(世間)과 열반과도 같아서 모든 법도 각각 둘이 있으니 대혜여, 어떤 열반도 그 곳에 세간이 없으며, 어느 곳의 세간도 그 곳에 열반이 없다. 다르다는 것은 모양 때문이니, 그러므로 나는 모든 법이 둘이 아니라 말한다. 모든 법이 둘이 아니라는 것은 세간과 열반이 둘이 아닌 까닭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마땅히 모든 법이 공하며, 생함이 아니요, 자체가 없고 둘이 아닌 것을 닦아 배워야 한다."
  그 때 세존께서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내가 항상 공한 법을 말함은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을 떠난 것이니,
  삶과 죽음은 환(幻)과 꿈 같지만
  그러나 그의 업만은 없질 않네.
  
  허공과 열반이며
  둘을 멸한 것도 또한 이러한데,
  범부들은 분별하지만
  성인은 있음과 없음을 떠났다네.
  
  그 때 부처님께서 거룩한 대혜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셨다.
  "대혜여, 모든 법이 공하여 생함이 아니요, 자체가 없고 둘이 아닌 것들은 모두 여래의 말씀하신 수다라(修多羅 : 經典) 속에 들어 있으니, 모든 법문에 이러한 뜻을 모두 말하였다. 대혜여, 모든 수다라에서 여러 중생의 마음을 따르기 때문에 분별로서 알려 주었으니 대혜여, 비유컨대 아지랑이를 잘 알지 못한 새와 짐승들은 허망한 집착으로서 물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지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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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에는 실로 물이 있지 않는 것과 같다. 대혜여, 모든 수다라에서 말한 법도 또한 그와 같으니, 범부들이 마음속으로 분별하는 것을 위하여 그들로 하여금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요, 진실한 성인의 지혜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다.
  대혜여, 그대는 마땅히 뜻을 따르고 말한 바 명자(名字)나 글귀에 집착하지 말 것이다."
  그 때 거룩하신 대혜보살마하살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수다라에서 말씀하시기를 여래장(如來藏)의 자성(自性)은 청정하여 32상(相)을 갖추고서 일체 중생의 몸 속에 있지만 욕심을 내고 성내고 어리석고 진실치 못한 번뇌의 때로 더럽혀졌으며, 5음·18계·6입의 옷에 얽히고 쌓인 것이 마치 값진 보배가 더러운 옷 속에 묻힌 것과 같다 하시고, 세존께서 또한 말씀하시되, '항상되고 청량(淸凉)하여 변치 않는다'라고 하시니 세존이시여, 만약 그렇다 할지라도 외도도 또한 말하기를, '나에게 신아(神我)가 있어 항상 있으며, 변치 않는다'라고 합니다.
  여래께서 또한 여래장(如來藏)은 항상 떳떳하며 변치 않는다 말씀하시나 세존이시여, 외도도 또한 말하기를 '항상되는 작자(作者)는 모든 인연에 따르지 않고도 자연히 두루하면서 멸하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만약 그와 같다면 부처님과 외도의 말이 다를 것이 없겠습니다."
  부처님께서 거룩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대혜여, 내가 말한 여래장(如來藏)이 항상된다 함은 외도들이 있다고 하는 신아(神我)와는 같지 않은 것이다.
  대혜여, 내가 여래장을 말하는데, 공(空)함과 실제(實際) 열반과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不生不滅]는 것과 모양이 없으며, 원(願)함이 없다는 등의 말과 글귀로서 여래장을 설명하였다.
  대혜여, 여래·응공(應供)·정변지(正遍知)는 여러 어리석은 범부들을 위하여 무아(無我)란 말을 들을 때 놀래고 두려워하는 생각을 내기 때문에 내가 여래장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여래장은 분별하는 바가 없으며, 고요하고 모양이 없기 때문에 여래장이라 말한 것이다.

  대혜여, 현재와 미래의 모든 보살은 마땅히 내가 있다는 상(相)에 집착하지 말 것이니 대혜여, 비유컨대 질그릇 만드는 이가 진흙과 미진(微塵)과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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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퀴와 끈과 인공(人功)과 손과 나무와 방편의 힘에 의하여 여러 가지 그릇을 만드는 것과 같으니, 대혜여, 여래 세존도 또한 그와 같이 저 법이 나라고 함이 없고, 모든 분별하는 모양이 없는데서 지혜와 교묘한 방편으로 여래장(如來藏)이라 말하며, 혹은 무아(無我)를 말하기도 하며, 혹은 실제와 열반 등의 여러 가지 명자와 글귀를 말하여 알려 주는 것이 그 질그릇을 만드는 이가 여러 가지 그릇을 만드는 것과 같으니, 그러므로 대혜여, 내가 말한 여래장은 외도가 말한 내가 있다는 것과 같지 않은 것이다.
  대혜여, 내가 여래장을 말한 것은 외도의 나라고 함에 집착함을 위한 것이니, 그들을 포섭하기 위하여 여래장을 말하여 저 외도들로 하여금 신아(神我)가 있다고 하는 허망한 견해와 마음에 집착한 곳을 벗어나고, 삼해탈(三解脫)1)의 문에 들게 하여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대혜여, 이러한 뜻으로 부처님·여래·응공·정변지는 여래장을 말한 것이니, 그러므로 내가 말한 여래장이 있다는 것은 외도의 신아(神我)가 있다고 집착한 것과 다르다. 그러므로 대혜여, 모든 외도의 삿된 견해를 버리기 위하여 부처님께서 이러한 말을 한 것이니, 그대는 마땅히 여래의 나라고 함이 없는 법을 닦아 배울 것이다."
  그 때 세존께서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남과 나, 그리고 5음(陰)과
  뭇 인연과 또한 작은 티끌과
  자성(自性)이 스스로 지은 것으로
  오직 마음의 허망한 분별일세.
  
  그 때 거룩하신 대혜보살마하살은 미래의 모든 중생을 관찰하고서 또한 부처님께 청하여 말하였다.
  
  
  
1) '삼공(三空)', '삼삼매(三三昧)'라고도 하며, 공해탈(空解脫), 무상해탈(無相解脫), 무원해탈(無願解脫)의 세 가지 선정(禪定)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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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하옵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보살을 위하여 진실한 수행법[如實修行法]을 말씀해 주십시오. 저 여러 보살들이 진실한 수행법(修行法)을 듣는다면 곧 참다운 수행자가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거룩한 대혜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셨다.
  "대혜여, 네 가지 법이 있어야만 큰 참다운 수행자라 할 것이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제 마음에서 나타난 것임을 잘 아는 것이요, 둘째는 생각이 발생하며 머물고 멸하는 것을 멀리 떠나는 것이요, 셋째는 바깥 법의 있음과 없음을 잘 아는 것이요, 넷째는 속 몸으로 증득한 지혜를 좋아하여 닦는 것이니 대혜여, 보살이 이와 같은 네 가지 법을 성취한다면 참다운 큰 수행자라 할 것이다.
  대혜여,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이 자기 마음에서 나타난 것임을 잘 알아 관찰함인가? 삼계(三界)가 다만 한 마음[一心]으로 지은 것이며, 나와 내 것을 떠난 것이며, 움직임도 없고 지각(知覺)함도 없으며, 취하고 버리는 것을 떠났으며, 끝없는 예로부터 삼계의 훈습함과 희론의 마음에 허망하게 잡착한 것이며, 여러 가지 색(色)과 행(行)에 항상 묶인 것이며, 몸과 살림살이와 기세간(器世間) 가운데 6도(道)가 허망하게 나타난 것들을 관찰함이니 대혜여, 이를 보살마하살이 자기 마음에서 나타난 것임을 잘 아는 것이라 한다.
  대혜여, 어떤 것을 모든 보살마하살의 생각이 발생하고 머물며 멸하는 것을 멀리 떠난다고 하는가? 모든 법이 환상과 같고 꿈 같은 것이며, 모든 법의 자타(自他) 두 가지가 없는 것이며, 생하지 않지만 자기 마음에서 나타나는 지견(知見)을 따르는 것이며, 바깥 법이 없는 것이며, 여러 식(識)이 일어나지 않고 모든 인연의 모임이 없는 것을 관(觀)하는 것이며, 삼계가 인연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는 것이며, 안과 바깥의 모든 법이 있는 것으로 보지 않음은 실체가 없기 때문인 것이며, 모든 법이 있다고 하는 바르지 못한 견해를 멀리 떠난 것이다. 모든 법이 환(幻)의 모양과 같은 데에 들어가는 것이니, 보살이 그 때 초지(初地)의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은 것이고, 심(心)·의(意)·식(識)과 5법의 체상(體相)을 멀리 떠나며, 두 가지 무아(無我)와 뜻과 같은 몸[如意身]을 얻고, 제8 부동지(不動地)의 뜻과 같은 몸을 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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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혜보살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뜻과 같은 몸이라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대혜여, 뜻에 따라 빨리 갈 수 있으며 생각하는 대로 곧 이르고, 걸리는 것이 없으므로 뜻과 같은 몸이라 한다. 대혜여, 뜻과 같다고 말한 것은 석벽(石壁)과 산에 막히기를 한량없는 백천만억 유순(由旬)이라도 본래 보았던 여러 가지 경계를 생각만 한다면 자기 마음속에서 장애물에 구애될 것 없이 자재(自在)롭게 갈 수 있는 것이다.
  대혜여, 뜻과 같은 몸도 또한 그와 같아서 여환(如幻)삼매의 자재한 신통력을 얻어 그 몸을 장엄하고 모든 거룩한 지혜의 종류에 나아가는 몸이기 때문에 걸림 없이 뜻을 따라 가지만, 본원력(本願力)의 경계를 생각하므로 일체 중생을 위하여 교화하니, 대혜여, 이를 보살마하살이 발생하며 머물고 멸하는 모양을 멀리 떠난 것이라 한다.
  대혜여,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바깥 법의 있음과 없음의 모양을 잘 아는 것인가? 보살은 모든 법이 아지랑이 같고 꿈 같고 털 바퀴 같으며, 끝없이 오면서 여러 가지 희론 분별과 망상 훈습에 집착된 것이며, 일체법이 체상(體相)이 없는 것임을 보고서 거룩한 지혜의 경계를 증득함을 구하여 수행한다.
  대혜여, 이를 보살의 바깥 법의 있음과 없음을 잘 아는 것이라 한다. 이가 곧 큰 여실수행(如實修行)을 성취한 자이다.
  대혜여, 그대는 마땅히 이와 같이 닦고 배워야 한다."
  그 때 거룩하신 대혜보살은 또한 부처님께 여쭈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원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일체법 인연의 모양을 말씀해 주십시오. 저희와 여러 보살들이 모든 법 인연의 모양을 잘 안다면 있음과 없음의 바르지 못한 견해와 망상으로 모든 법을 분별하여 차례로 생긴 허물과 일시에 생긴 허물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대혜여, 일체법이 두 가지 인연으로 모인 모양이 있으니, 이른바 안[內]과 바깥[外]이다. 바깥 법의 인연으로 모인 모양은 이른바 진흙덩이와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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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둥과 바퀴와 줄과 사람의 공력과 방편의 인연으로 병(甁)이 생긴 것이다.
  대혜여, 진흙덩이 등의 인연으로서 병이 생기는 것과 같이 실[絲]로 짠 것과 초석(草席)과 짜는 틀을 끼움과 젖의 즙과 인공(人功)으로 타락[酪]이 생기고, 타락이 생기고는 수(酥 : 연유)가 생기고, 수가 생기고는 제호(醍醐)를 얻는 것이다.
  대혜여, 이를 바깥 법의 인연으로 모인 모양이라 함이니, 밑에서부터 위에 이르러도 그러한 것을 응당 알 것이다.
  대혜여, 무엇이 안의 법 인연으로 모인 모양인가? 대혜여, 이른바 무명(無明)과 업(業)과 애착[愛]의 이러한 법들을 안의 인연으로 모인 모양이라 하니 대혜여, 무명 등과 음(陰)·계(界)·입(入) 등으로 인한 것임을 인연으로 모인 모양이라 이름함이니, 여러 범부들은 그를 허망하게 분별하여 여러 가지 다른 모양[別相]으로 본다.
  대혜여, 인연이 여섯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여섯인가? 첫째는 당인(當因 :자체인 원인을 말함)이요, 둘째는 상속인(相續因)이요, 셋째는 상인(相因 : 자체에서 움직이는 모양인 원인)이요, 넷째는 작인(作因)이요, 다섯째는 요인(了因)이요, 여섯째는 상대인(相對因)이다.
  대혜여, 당인이란 것은 인연을 지으면 능히 안과 바깥 법을 만드는 것이다. 대혜여, 상속인은 안과 바깥의 법과 음(陰)의 종자 등을 능히 반연하는 것이다. 대혜여, 상인은 능히 상속(相續)을 내고 차례로 일을 지으면서 끊어지지 않는 것이다. 대혜여, 작인은 능히 증상(增上)하는 인(因)을 짓는 것이 전륜왕(轉輪王)과 같은 것이다. 대혜여, 요인은 일이 생기는 것을 허망하게 생각하고서 능히 나타내 보이는 것이 등불이 색상을 비추는 것과 같은 것이다. 대혜여, 상대인은 그 없어질 때엔 허망하게 생긴 법이 보이지 않고 상속(相續)하는 일이 끊어지는 것이다.
  대혜여, 이러한 모든 법은 범부들이 자심(自心)에서 허망하게 분별함이다.
  대혜여, 이 모든 법은 차례로 생긴 것이 아니요, 일시에 생긴 것도 아니니, 무슨 까닭인가? 대혜여, 만약 일체법이 일시에 생긴 것이라면 원인과 결과가 다르지 않을 것이니, 인과의 자기 모양을 볼 수 없을 것이요, 만약 차례로 생긴 것이라면 자기 모양을 얻을 수 없음에 차례로 난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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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아들이 태어나지 않았는데 아버지라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대혜여, 어리석은 범부는 자기 마음에서 차제(次第)와 상속(相續)이 서로 응하지 않는 것을 관찰하여 말하기를, '인연(因緣)과 차제연(次第緣)과 소연연(所緣緣)과 증상연(增上緣)들이 능히 모든 법을 낸다'라고 하니 대혜여, 이러한 차제로서는 모든 법이 생기지 않는다.
  대혜여, 이는 허망한 분별로서 법체상(法體相)을 취한 것이니, 일시와 차례로도 모두 생겨진 것이 아니다.
  대혜여, 이는 자심(自心)에서 몸과 살림살이가 나타나 보인 까닭이다.
  대혜여, 자기 모양과 같은 모양과 바깥 법은 없는 법이니, 그러므로 차례와 일시에 생겨진 것이 아니다.
  대혜여, 다만 허망한 식(識)이 자심의 견해를 낸 것이다.
  대혜여, 그대는 마땅히 인연으로 생겨진 일들이 차제와 일시에 생긴 법이라고 하여 올바르지 못하게 보는 것을 떠나야 한다.
  그 때 세존께서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인연법도 없어 생하지 않나니
  생하지 않으므로 멸하지 않고,
  생멸(生滅)과 인연이 모두 허망하여
  생도 아니며 멸도 아니네.
  
  모든 인연을 가리는 것은
  어리석은 이가 허망하게 취(取)하기 때문이며,
  있고 없는 연(緣)은 생함이 아니니,
  그러므로 모든 법은 생함이 아니다.
  
  그는 삼계(三界)에서 훈습한
  미혹의 마음 때문이니,
  인연이란 본래 없으며
  생도 멸도 아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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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유위법(有爲法)을
  석녀(石女)와 허공 꽃으로 보아
  능취(能取)·소취(所取)를 떠나면
  허망한 견해는 나지 않으리라.
  
  나타나는 것은 본래부터
  모두 생(生)함이 아니며,
  인연인 연기법(緣起法)도
  본래부터 있는 것 아니니,
  
  이러한 모든 법들은
  자체(自體)가 공(空)한 것이며
  또한 머무를 곳도 없건만
  세간에서 있다고 말함이다.
  
  그 때 거룩하신 대혜보살은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원하옵나니 세존께서는 저희를 위하여 언어상(言語相)을 분별함이라고 말하는 심법문(心法門)을 말씀해 주십시오. 저와 여러 보살들이 언어상을 분별함이라 말하는 심법문을 얻어 잘 알게 되면, 곧 말과 뜻의 두 가지 법에 통달하여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얻을 것이며, 보리(菩提)를 얻고는 말과 뜻으로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청정한 알음을 얻게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거룩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다. 대혜여,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어라. 마땅히 그대를 위하여 말할 것이다."
  대혜보살은 말하였다.
  "어지신 세존이시여, 가르침을 잘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대혜여, 네 가지 허망한 모양인 언어가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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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언설(相言說)이요, 둘째는 몽언설(夢言說)이요, 셋째는 망집언설(妄執言說)이요, 넷째는 무시언설(無始言說)이다.
  대혜여, 상언설이란 것은 이른바 색(色) 등의 모든 모양에 집착하므로 생기는 것이다.
  대혜여, 몽언설이란 것은 본래 수용(受用)하던 허망한 경계를 기억하고서 경계에 의거하여 꿈을 꾼다. 꿈을 깨고는 허망한 경계에 의거하여 진실하지 않은 것을 아는 것이 생기는 것이다.
  대혜여, 집착언설이란 것은 본래 듣는 것과 짓는 업을 생각하여 생긴 것이다.
  대혜여, 무시언설이란 것은 끝없는 예로부터 희론번뇌와 종자훈습에 집착하여 생긴 것이다.
  대혜여, 내가 말하던 네 가지 말인 허망한 집착을 이미 모두 말하였다."
  그 때 거룩하신 대혜보살은 또 다시 이 뜻을 부처님께 청하여 여쭈려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원하오니 저희를 위하여 네 가지 허망하게 언어(言語)의 상(相)에 집착하는 것을 거듭 말씀해 주십시오. 중생의 언어는 어느 곳에서 나온 것이며, 어떻게 출현하며, 무슨 원인으로 나오게 됩니까?"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대혜여, 머리와 가슴과 목구멍과 코와 입술과 혀와 어금니와 이로부터 구르기 때문에, 화합하여 소리가 나는 것이다."
  대혜보살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입 속의 언어가 허망한 법상(法相)과 다른 것입니까? 다르지 않은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대혜여, 언어는 허망한 법상과 다른 것도 아니며, 다르지 아니한 것도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저 허망한 법상으로 인하여 언어가 나는 까닭이다.
  대혜여, 만약 언어가 그와 다르다면 마땅히 원인이 없이 생겨야 한다.
  대혜여, 만약 그와 다르지 않다면 언어는 능히 눈앞에 나타나는 경계를 말로 표현할 수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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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혜여, 그러나 저 언어는 눈앞에 나타나는 경계를 능히 표현할 수 있으니, 그러므로 다른 것도 아니며,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
  대혜보살은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언어가 바로 제일의(第一義)입니까? 언어로서 설명하는 것이 제일의입니까?"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언어가 바로 제일의가 아니니, 무슨 까닭인가? 대혜여, 제일의로 하여금 언어를 수순(隨順)하여 성인(聖人)의 경지에 들어가게 함이니, 그러므로 언어로서 제일의를 설명함이 있을 뿐이요, 언어가 바로 제일의(第一義)는 아니다.
  대혜여, 제일의는 거룩한 지혜로 깊이 증득할 바요, 언어의 법은 아닌 것이다. 이는 지혜의 경계이니, 언어로서는 그 경계를 알릴 뿐이다.
  대혜여, 제일의를 설명하는 언어도 생멸(生滅)의 법이니, 생각 생각이 머무르지 않고 인연으로 화합하여 언어가 생긴 것이다.
  대혜여, 인연으로 화합한 그것은 능히 제일의를 나타내지 못하니, 무슨 까닭인가? 자기 모양[自相]과 다른 모양[他相]이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대혜여, 언어로는 능히 제일의를 나타내지 못한다.
  대혜여, 자심에서 바깥의 있고 없는 법들을 보고 분별함을 따르기에 제일의를 능히 알지 못하니, 그러므로 대혜여, 그대는 마땅히 여러 가지 언어로 허망하게 분별하는 상을 떠날 것이다."
  그 때 세존께서는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모든 법은 본래 허망하여
  진실한 자체가 없으니,
  그러므로 여러 가지 말로서
  있다 없다 말하지 못하리라.
  
  공함과 또한 공함이 아님을
  범부는 잘 알지 못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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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법은 자체상이 없으며
  중생이라 말함도 또한 그러하네.
  
  있다 없다 분별하는 법은
  마치 꿈과 환상 같으니,
  일체법을 관찰하여 열반에도
  세간에도 머무르지 아니하리.
  
  왕과 장자(長者)들이
  여러 아들을 기쁘게 하려고
  진흙으로 만든 짐승들을 먼저 주고
  진실한 것을 다음에 주듯이
  
  나도 여러 불자를 기쁘게 하려고
  여러 가지 법과 자체 법이며
  거울 모양과 같은 것들을 말하고서
  뒤에 실제(實際)를 설명하노라.
  
  그 때 거룩한 대혜보살은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원하오니 세존께서 여러 보살과 저를 위하여 있는 것과 없는 것, 같음과 다름, 갖춤[俱]과 갖추지 않은 것[不俱], 있음과 없음, 있음이 아니고 없음이 아닌 것[非有非無], 항상됨[常]과 항상됨이 없는 것[無常]을 떠난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것은 모든 외도가 행하지 못할 바이며, 거룩한 지혜로서 스스로 증득한 깨달음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이며, 자기 모양과 같은 모양을 떠난 것이며, 제일의(第一義)의 참다운 법성(法性)에 드는 것이며, 모든 지위가 차례대로 최상으로 청정하게 되는 것이며, 여래의 지위에 들어가는 것이며, 본원력(本願力)에 의지하여 여의주(如意珠)와 같이 한량없는 경계와 수행하는 것이 저절로 되는 것이며, 일체법에서 자심(自心)으로 차별상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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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 저와 일체 보살들은 이와 같이 망상으로 같은 모양과 다른 모양을 분별하는 것을 떠나고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빨리 얻고, 일체 중생에게 편안함과 좋은 것들을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모두 만족하게 할 것이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대혜여, 그대는 모든 천인(天人)을 불쌍히 여겨, 그들에게 안락과 이익이 많게 하려고 능히 나에게 이러한 뜻을 묻는구나.
  훌륭하고 훌륭하다. 대혜여,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어라. 내 마땅히 그대를 위하여 분별하여 해설하겠노라."
  대혜보살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지신 세존이시여, 가르침을 잘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범부는 오직 이 마음으로 보여진 것을 능히 깨닫지 못하고 밖으로 여러 가지 법상(法相)에 집착하여 참으로 있는 것으로 여기니, 그러므로 허망하게 같음과 다름, 갖춤과 갖추지 않은 것, 있음과 없음, 있음이 아니고 없음이 아닌 것, 항상됨과 항상됨이 없는 것들을 분별하니, 그는 자심의 훈습으로 인한 것이며, 허망하게 분별하는 마음에 의지한 것이다.
  대혜여, 비유컨대 뭇 짐승들이 목마름에 시달려 아지랑이를 보고 마음이 착란하여 그를 물이라 생각하고 동서로 헤매면서 물이 아님을 알지 못함과 같다.
  대혜여, 이와 같이 범부들의 어리석은 마음으로 생(生)·주(住)·멸(滅)의 법을 보고 잘 분별하지 못한 것은 끝없는 예로부터 허망하게 희론(戱論)에 훈습되고, 욕심내고 성내고 어리석음에 집착하여 미혹한 마음으로 시달려서 여러 가지 모든 색경계(色境界)를 좋아하여 구함이니, 그러므로 범부들이 같음과 다름, 갖춤과 갖추지 않은 것, 있음과 없음, 있음이 아니고 없음이 아닌 것, 항상됨과 항상됨이 없는 것들에 떨어진다.

  대혜여, 비유컨대 범부가 건달바(乾達婆)의 성(城)을 보고 진짜 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끝없는 예로부터 허망하게 성이라고 분별하는 생각의 종자와 훈습으로 인하여 보는 것과 같으니 대혜여, 저 성은 성이 아니며, 성 아닌 것도 아니다.

 

 

 

 

[91 / 415] 쪽
  대혜여, 일체 외도도 또한 그와 같아서 끝없는 예로부터 희론과 훈습에 인하여 같음과 다름, 갖춤과 갖추지 않은 것, 있음과 없음, 있음이 아니고 없음이 아닌 것, 항상됨과 항상됨이 없는 법들에 집착하니 대혜여, 그는 오직 마음에서 허망하게 본 것임을 깨닫지 못한 까닭이다.
  대혜여,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꿈속에서 여러 남자와 여인과 코끼리와 말과 수레들이 움직이는 것과 성읍(城邑)과 취락(聚落)과 소와 물소와 동산 숲과 나무와 여러 산과 강과 흐르는 샘과 목욕하는 못과 궁전과 누각과 여러 가지로 장엄하고 광대하며 화려한 것을 보기도 하며, 자기 몸이 그 속에 있는 것도 보다가 문득 꿈이 깨어서는 그 광대한 성읍들을 생각한다면 대혜여, 그대의 뜻에는 어떠한가? 그 사람을 성자(聖者)라고 할 수 있는가?"
  대혜보살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일체 어리석은 범부와 외도의 삿된 견해로 본 여러 가지도 그와 같으니, 그는 모든 법이 꿈속에 있는 마음에서 본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같음과 다름, 갖춤과 갖추지 않은 것, 있음과 없음, 있음이 아니고 없음이 아닌 것, 항상됨과 항상됨이 없는 것들의 견해에 집착한 것이다.
  대혜여, 비유컨대 그림 속의 모양은 높지도 않으며, 낮지도 않는 것과 같지만 대혜여, 어리석은 범부는 허망하게 모든 법이 높고 낮음이 있는 것으로 본다.
  대혜여, 미래의 세상에는 외도의 삿된 견해에 의하여 마음의 훈습함이 더욱 더하여 허망하게 같음과 다름, 갖춤과 갖추지 않은 것, 있음과 없음, 있음이 아니고 없음이 아닌 것, 항상됨과 항상됨이 없는 것들을 분별하리니, 대혜여, 저 외도는 자신도 버리고 남도 버리면서 말하기를, '모든 법은 생하지도 않으며, 멸하지도 아니하여 있음과 없음이 모두 고요하다'라고 하니, 그것을 이름하여 올바르지 못한 견해라 한다.
  대혜여, 저 외도는 인과법(因果法)도 비방하니, 삿된 견해에 빠진 까닭이다. 일체 착한 뿌리[善根]와 깨끗한 법[白法]과 청정한 종자를 뽑아 버린다.
  대혜여, 수승한 법을 구하려면 마땅히 그와 같은 법을 말하는 사람을 멀리
  
  
[92 / 415] 쪽
  할 것이니, 그 사람은 마음이 자타(自他)의 두 견해에 집착하고, 허망한 법에도 집착하였으므로 법을 비방하는데 떨어질 것이며, 삿된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악도(惡道)에 들어갈 것이다.
  대혜여, 비유컨대 병든 눈으로 허공에 털 바퀴[毛輪]가 있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와 같이 푸르고 누르며, 붉고 흰 것을 보지 못하는가'라고 하는 것과 같다.
  대혜여, 그러나 저 털 바퀴는 본래 자체가 없으니, 무슨 까닭인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대혜여, 외도들이 삿된 견해에 의지하여 허망하게 분별함도 또한 그와 같다.
  허망하게 같음과 다름, 갖춤과 갖추지 않은 것, 있음과 없음, 있음이 아니고 없음이 아닌 것, 항상됨과 항상됨이 없는 것들이 모든 법을 내었다고 집착한다.
  대혜여, 비유컨대 하늘의 비가 물거품을 내어 수정 구슬과 같은데, 어리석은 범부는 허망한 견해로 집착하여 구슬이라는 생각하고 동쪽 서쪽으로 헤매는 것과 같다. 대혜여, 그러나 저 물거품은 보배 구슬이 아니며 보배 구슬이 아닌 것도 아니니, 무슨 까닭인가? 구슬이라고 취(取)하며 취하지 않음이 있기 때문이다.
  대혜여, 저 외도의 허망한 마음으로 인하여 분별하며 훈습함도 또한 그와 같다. 그가 있지 않는 법을 말하여, '인연에 의지하여 생겼다'라고 하며, 또한 '실로 법이 없어지는 것이 있다'라고 말한다.
  대혜여, 저 외도가 삼종량(三種量)1)과 오분론(五分論)2)을 세워서 말
  
  
1) 인명학(因明學)의 용어로서 '삼량(三量)', '삼지비량(三支比量)'이라고도 한다. 인명의 입론(立論) 가운데 입(立 : 立論, 主張)과 적(敵 : 問難)의 쌍방공격의 세 가지 방법. ① 자비량(自比量 : 이는 스스로 지키는 논법으로 그 형식은 자신이 인정하는 재료로서 구성한다.) ② 타비량(他比量 : 이는 공격의 논법으로 그 형식은 대적자가 인정하는 재료로서 구성한다.) ③ 공비량(共比量 : 이는 함께 논쟁하는 논법으로 그 형식은 자신과 상대방이 인정하는 재료로서 구성하지 않고 그 宗이 나타나는 쟁론의 주제로서 이루어진다. 각각의 비량은 또한 이 세 가지를 갖추고 있어 모두 九種比量이라고도 한다.
2) 오지작법(五支作法)이라고 하며, 종(宗)·인(因)·유(喩)·합(合)·결(結)의 다섯 가지로 구성된 추론형식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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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기를, '실로 성자(聖者)의 안으로 증득하는 법이 있는데, 두 자체(自體)를 떠난 것이다'라고 하여 허망하게 분별한다.
  대혜여, 심(心)·의(意)·식(識)을 떠나면 이 몸이 변해서 문득 성인(聖人) 종류의 몸을 얻으리니, 여러 가지 행을 수행하지만 그러한 마음이 없이 자심의 견해와 허망한 경계를 취하는 것을 떠날 것이며, 여래의 지위에 들어가서 자신이 정진(精進)하여 거룩한 지혜를 증득할 것이니, 여실히 수행하는 자는 있다 없다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
  대혜여, 여실히 수행하면 반드시 이와 같은 경계를 얻을 것이다.
  대혜여, 만약 유무법(有無法)을 취함이 있다면 곧 아상(我相)·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이 될 것이다.
  대혜여, 유무법과 자기 모양과 같은 모양을 말함은 이는 응화불(應化佛)의 말이요, 법불(法佛)의 말이 아니다.
  대혜여, 응화 여래께서 이와 같은 법을 말함은 어리석은 범부의 보는 마음에 따라서 그들로 하여금 수행하게 함이요, 참다운 수행을 건립하여 자신(自身)의 안으로 증득하는 거룩한 지혜와 삼매락행(三昧樂行)을 보여주기 위함은 아니다.
  대혜여, 비유컨대 사람이 물 속의 나무 그림자를 보는 것과 같다.
  대혜여, 저것은 그림자가 아니며 그림자가 아닌 것도 아니니, 무슨 까닭인가? 나무가 있으면 그림자가 있고, 나무가 없으면 그림자가 없기 때문이다.
  대혜여, 저 외도가 삿된 견해의 마음에 의하여 망상으로 훈습함도 또한 그와 같다. 그는 같음과 다름, 갖춤과 갖추지 않은 것, 있음과 없음, 있음이 아니고 없음이 아닌 것, 항상됨과 항상됨이 없는 것을 분별하니, 이는 망상으로 분별함이다. 무슨 까닭인가? 그는 오직 마음에서 본 것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혜여, 비유컨대 밝은 거울이 인연을 따라 모든 색상을 비추어 나타내지만 분별하는 마음이 없는 것과 같으니 대혜여, 저것은 색상도 아니며 색상이 아닌 것도 아니니, 무슨 까닭인가? 인연이 있으면 나타내 보이고 인연이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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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면 나타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대혜여, 이는 어리석은 범부들이 자심의 분별로 색상이 있음과 없음을 본 것이다.
  대혜여, 비유컨대 여러 음향이 사람과 산과 강물과 허공과 집 등과 함께 어울려서 들리는 것과 같으며, 저 들리는 음향은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니, 무슨 까닭인가? 소리로 인하여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대혜여, 일체 외도는 자심의 허망과 분별의 훈습으로서 같음과 다름, 갖춤과 갖추지 않은 것, 있음과 없음, 있음이 아니고 없음이 아닌 것, 항상됨과 항상됨이 없는 것들을 본다.
  대혜여, 비유컨대 풀과 나무와 동산 숲이 없는 대지에 햇빛과 먼지와 흙이 어울림으로 인하여 물결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저 물결은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닌 것과 같으니, 무슨 까닭인가? 중생들이 그것들을 좋아하기도 하고 좋아하지 않기도 하기 때문이다.
  대혜여, 일체 외도와 어리석은 범부도 또한 그와 같아서 끝없는 예로부터 번뇌의 마음과 희론으로 훈습함을 인하여 생(生)·주(住)·멸(滅), 같음과 다름, 갖춤과 갖추지 않은 것, 있음과 없음, 있음이 아니고 없음이 아닌 것, 항상됨과 항상됨이 없는 것들을 분별하니, 이는 성인이 몸소 깊이 증득하는 지혜의 문에서 아지랑이를 목이 타게 좋아하는 일들을 보여준 것이다.
  대혜여,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주술(呪術)의 힘에 의하여 죽은 사람과 기관목인(機關木人: 움직이도록 만든 나무 사람)을 일으키기도 하며, 중생의 체(體)가 없는데도 바사사(毘舍闍: 癲狂鬼)의 힘과 공교한 환사(幻師)의 힘에 의하여 가고 오게 하는 일들을 하지만, 어리석은 범부는 그에 집착하여 실로 있는 것으로 여기니, 오고 가고 하기 때문이다.
  대혜여, 어리석은 범부와 외도들이 사견(邪見)의 마음에 떨어진 것도 또한 그와 같아서, 허망한 같음과 다름, 갖춤과 갖추지 않은 것, 있음과 없음, 있음이 아니고 없음이 아닌 것, 항상됨과 항상됨이 없는 것들에 집착하니, 그러므로 범부와 외도는 허망하게 이와 같은 법을 세운다. 그러므로 대혜여, 그대는 마땅히 생(生)·주(住)·멸(滅), 같음과 다름, 갖춤과 갖추지 않은 것, 있음과 없음, 있음이 아니고 없음이 아닌 것, 항상됨과 항상됨이 없는 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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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날 것이니, 이것이 몸소 깊이 거룩한 지혜로 분별함을 증득함이다."
  그 때 세존께서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5음(陰)과 식(識)은
  물 속의 나무 그림자 같고,
  꿈과 환으로 보는 것과 같으니,
  의식에 의해 취(取)하지 말라.
  
  모든 법은 털 바퀴 같으며
  아지랑이를 물로 여기는 것과 같으니,
  삼계(三界)의 모든 것을
  환과 꿈으로 관찰하라.
  
  만약 이와 같이 관찰하여
  수행하면 해탈을 얻으리라.
  여름날에 물을 찾는 짐승이
  아지랑이에 착각 일으킴과 같으니,
  
  그곳에 물이 없지만
  허망한 생각이 물로 보이듯
  식(識)의 종자로서
  경계에 움직이는 견해와 같다.
  
  어리석어서 진실인양 취(取)하나
  저 법의 생함은 헛보임 같은데,
  끝없는 세월의 어리석음으로
  물질을 취함이 품에 안음과 같다.
  
  쐐기로서 쐐기를 빼내는 것과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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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부를 속여 들어가게 하는 법이며,
  환술로 시체를 일으키는 기관이라
  꿈·번개·구름이듯 항상 그러하네.
  
  세간을 이와 같은 것으로 관찰하면
  유(有)를 끊고 해탈을 얻으리.
  아지랑이는 허공에서
  모든 알음이 있지 않으니,
  
  모든 법을 이와 같이 관찰하여
  일체법에 집착하지 말라.
  여러 식(識)은 이름뿐이니
  모든 상(相)이 공하기 때문이다.
  
  5음을 보는 것은 털 바퀴와 같으니,
  어느 법에 분별하랴.
  그 그림과 털 바퀴는
  환이요, 꿈이며 건달바(乾闥婆)와 같다.
  
  불 바퀴[火輪]와 새가 물로 본 아지랑이는
  실로 없건만 있다고 보나니,
  항상됨과 항상됨이 없음, 같음과 다름,
  갖춤과 갖추지 않은 것이며,
  
  그것은 끝없는 예로부터
  속박 된 범부의
  미혹한 마음에
  의지하여 된 것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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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밝은 거울 보배 마니(摩尼)와
  맑은 물, 깨끗한 눈(眼)에서
  여러 가지 색상이 나타나면
  허망하게 여러 가지 빛깔을 보느니라.
  
  일체법은 진실함이 없는 것이
  꿈과 석녀(石女)와 같으며,
  짐승이 허공에 아지랑이를
  물로 알고 좋아함과 같다.
  
  대혜여, 부처님·여래의 설법은 네 가지 견해를 떠났으니, 같음과 다름, 갖춤과 갖추지 않은 것을 떠난 것이다. 있음과 없음을 세우는 것을 멀리 떠난 것이다.
  대혜여, 모든 부처님·여래의 설법은 실제(實際)와 인연(因緣)과 적멸(寂滅)과 해탈에 의지한다.
  대혜여, 일체 부처님 여래의 설법은 구경(究竟)의 경계에 의지한 것이며, 인(因)·자성(自性)·자재천(自在天)·무인(無因)·미진(微塵)·시간 등의 이와 같은 설법에 의한 것이 아니다.
  대혜여, 부처님의 설법은 두 가지 장애인 번뇌장(煩惱障)과 지장(智障)을 떠났다. 큰 장사치가 여러 사람들을 거느리고 처음 보는 아주 편안하고 고요한 곳에 이르러 차례로 안치하듯이, 여래도 사람들을 차례로 안치하여 그들로 하여금 법과 지위의 차별상(差別相)을 잘 알게 한다.
  대혜여, 네 가지 선(禪)이 있으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어리석은 범부가 행하는 선[愚癡凡夫所行禪]이요, 둘째는 뜻을 관찰하는 선[觀察義禪]이요, 셋째는 진여를 생각하는 선[念眞如禪]이요, 넷째는 부처님·여래의 선[諸佛如來禪]이다.
  대혜여, 어떤 것이 어리석은 범부가 행하는 선인가? 성문과 연각과 외도의 수행자가 인무아(人無我)와 자기의 몸과 다른 이의 몸을 골쇄(骨鎖)로 관하므로 무상(無常)하고, 괴로움[苦]이요, 내가 없으며[無我], 깨끗하지 못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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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것[不淨]이라 하고, 모든 상에 집착함도 이와 같아서 결코 필경에는 다르지 않다고 하여, 이와 같이 차례로 앞에서 관한 것으로 인하여 차례로 올라가서 내지 비상(非想)과 멸진정(滅盡定)의 해탈에 이르니, 이를 어리석은 범부와 외도와 성문들의 선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어떤 것이 뜻을 관찰하는 선인가? 인무아와 자기의 몸 다른 이의 몸을 관하였음으로 어리석은 범부와 외도가 자기 몸과 다른 이의 몸에 자타(自他)의 모양이 진실함이 없는 것을 보고, 법무아(法無我)와 모든 지위의 행상(行相)과 뜻과 자제(次第)를 관찰함이니 대혜여, 이를 뜻을 관찰하는 선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어떤 것이 진여를 관찰하는 선인가? 허망한 분별의 인연을 관찰하여 두 가지 무아(無我)를 참답게 알고 일체 모든 법에 진실한 체상이 없는 것을 참답게 분별하고, 그 때 분별함에 머무르지 않고 마음에 고요한 경계를 얻음이니 대혜여, 이를 진여를 관찰하는 선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어떤 것이 여래를 관찰하는 선인가? 참답게 여래의 자리에 들어가 안의 몸[內身]의 거룩한 지혜의 모양과 삼공(三空)과 삼종락(三種樂)의 행에 들어갔으므로 능히 중생에게 베풀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을 이룬 것이니 대혜여, 이를 여래를 관찰하는 선이라 이름한다."
  그 때 세존께서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범부들의 행하는 선과
  뜻을 관찰하는 선과
  진여를 관하여 생각하는 선과
  구경인 여래 청정선이여.
  
  마치 해와 달의 모양과
  발두마(鉢頭摩; 붉은 연꽃)와 바다의 모양과
  허공과 불이 다한 모양으로
  수행자가 이렇게 관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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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같은 갖가지 모양은
  외도에 떨어지는 법이며,
  또한 성문과 벽지불의
  수행함에 떨어지는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면
  이는 곧 있는 바가 없음[無所有]이니,
  그 때 시방세계에서
  여러 부처님께서 진여의 손으로
  그 수행자의 이마를 만져 주시며
  진여의 모양이 없는 데에 들게 하리라.
  
  그 때 거룩하신 대혜보살마하살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께서 열반(涅槃)을 말씀하시니, 열반이란 것은 어떤 법을 열반이라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거룩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대혜여, 열반이란 것은 모든 식(識)의 법체상(法體相)을 굴려서 소멸한 것이며, 모든 견해로 훈습함을 돌이켰으며, 심(心)과 의(意)와 아리야식(阿梨耶識)의 법상(法相) 훈습을 돌이켰음으로 열반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나와 여러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열반을 말함은 바로 법체(法體)와 경계가 공하다고 하는 것이다.
  대혜여, 열반이란 것은 안의 몸 거룩한 지혜로 수행할 경계인 것이며, 유무법(有無法)을 허망하게 분별함을 떠난 것이다.
  대혜여, 어찌하여 항상됨[常]이 아니라 하는가? 자기 모양과 같은 모양인 분별법을 떠난 것을 말함이니, 그러므로 항상됨이 아니다.
  대혜여, 어찌하여 단멸(斷滅)이 아니라 하는가?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일체 성인이 안의 몸으로 증득함을 말함이니, 그러므로 단멸이 아니다.
  대혜여, 반열반(般涅槃)이란 것은 죽음도 아니요, 멸함도 아니다.
  대혜여, 만약 반열반이 죽음의 법이라면 마땅히 삶의 속박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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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혜여, 만약 반열반이 멸하는 법이라면 마땅히 유위법(有爲法)에 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대혜여, 반열반이란 것은 죽음도 아니며, 멸함도 아니요, 참다운 수행자가 귀의할 바이다.
  대혜여, 열반이라 말함은 가히 취할 바도 아니고 가히 버릴 바도 아니요, 이곳도 아니고 저곳도 아니요, 단멸도 아니고 항상됨도 아니요, 하나의 뜻도 아니고 여러 가지 뜻도 아니니, 그러므로 열반이라 이름함이다.
  대혜여, 성문(聲聞)의 열반이란 자기 모양과 같은 모양을 관찰하여 모든 법을 깨달으니, 그러므로 성문의 열반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벽지불(辟支佛)의 열반이란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모든 경계를 보니, 항상됨이 없으며[無常], 즐거움이 없으며[無樂], 내가 없고[無我], 깨끗함이 없다[無淨]하여 전도(顚倒)된 상을 내지 않는다. 그리하여 성문과 벽지불은 구경(究竟)이 아닌 곳에서 열반이란 생각을 낸다.
  대혜여, 나는 그대를 위하여 두 법체상(法體相)을 말하리니, 무엇이 둘인가? 첫째는 언설(言說)에 집착하는 체상(體相)이요, 둘째는 세상일에 집착하는 체상이다.
  대혜여, 어떤 것이 언설에 집착하는 체상인가? 끝없는 예로부터 언설의 희론에 집착하고 훈습하여 생긴 것이다.
  대혜여, 어떤 것이 세상일에 집착하는 체상인가? 이는 오직 이 자심(自心)임을 여실히 알지 못하고 바깥 경계를 본 것이다.
  대혜여, 여러 보살마하살이 두 가지 원력(願力)으로 주지(住持)함에 의하여 부처님·여래·응공·정변지께 정례(頂禮)하고서 의심된 일을 묻는다.
  대혜여, 어떤 것이 두 가지 원력으로 주지함인가? 첫째는 삼매(三昧)·삼마발제(三摩跋提)에 의지하여 주지함이요, 둘째는 온 몸이 낙(樂)을 얻음이니, 부처님 여래의 손으로 그의 이마를 만져 주심을 받아 주지하는 힘을 얻는 것이다.

  대혜여, 보살마하살이 초지(初地)에 머물러 부처님의 주지하는 힘을 받으므로 이 보살의 대승광명삼매(大乘光明三昧)에 들고나면, 그 때 시방세계의 여러 부처님·여래·응공·정변지께서 보살에게 주지하는 힘을 주시므로 몸과 입과 뜻을 나타내 보인다.

 

 

 

 

[101 / 415] 쪽
  대혜여, 금강장(金剛藏)보살마하살 그밖에 이와 같은 공덕의 모양을 성취한 보살마하살 같은 이들이다.
  대혜여, 이와 같은 보살마하살은 초지에 머물면서 삼매·삼마발제의 힘으로 주지(住持)함과 백천만억 겁(劫) 동안 닦아 모은 선근(善根)의 힘으로써 차례로 참답게 알아 모든 지위에서 대치(對治)하는 법상(法相)을 성취하니, 그 보살마하살은 법운지(法雲地)에 이르러서 큰 보배 연꽃 궁전의 사자(師子)자리에 앉아 있을 것이며, 동류인 보살마하살의 권속들도 둘러 모시는데, 보관(寶冠)과 영락(瓔珞)으로 그의 몸을 장엄한 것이 염부단금(閻浮檀金 : 閻浮樹의 森林에서 흐르는 강에서 산출하는 砂金)과 해와 달의 광명과 같고, 연꽃의 빛보다 수승하다. 그 때 시방세계의 여러 부처님께서 각기 그의 손으로 멀리 연꽃 자리에 있는 보살마하살의 이마를 만져 주시리니, 이는 자재왕(自在王)과 제석왕(帝釋王)과 전륜왕(轉輪王)이 그 태자의 정수리에 물 부어 왕위를 전수함을 얻은 것과 같은 것이다.
  대혜여, 저 지위를 받은 보살과 그 권속인 보살마하살은 부처님의 손으로 그 이마를 만져 주심으로 온 몸에 낙(樂)을 얻으니, 그러므로 보살의 이마를 만져서 주지하는 힘을 얻는다고 말함이다. 대혜여, 이를 이름하여 보살마하살의 두 가지 주지하는 힘이라 한다.
  대혜여, 보살마하살이 이 두 가지 주지하는 힘을 의지하므로 능히 일체 여래의 몸을 관찰한다.
  대혜여, 만약 이 두 가지 주지하는 힘이 없다면, 부처님·여래를 뵙지 못할 것이다.
  대혜여, 만약 보살마하살이 이 두 가지 주지하는 힘을 떠나서 능히 설법한다면, 어리석은 범부도 또한 마땅히 설법하리니, 무슨 까닭인가? 이른바 부처님의 주지하는 힘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혜여, 여래의 주지(住持)하는 힘에 의지하므로 산하(山河)와 석벽과 풀과 나무와 숲과 또한 여러 가지 종류의 성읍과 취락과 궁전과 집들이 모두 능히 설법하는 소리를 낼 것이며, 저절로 풍류 소리가 날 것인데, 대혜여, 어찌 하물며 마음이 있는 귀머거리와 장님과 벙어리와 한량없는 중생들이 모든 고뇌(苦惱)를 떠나지 않겠는가.
  
  
[102 / 415] 쪽
  대혜여, 여래의 주지하시는 힘으로 한량없이 중생을 이익 되게 하고 안락하게 한다."
  대혜보살은 부처님께 다시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보살마하살이 삼매·삼마발제(三摩跋提)에 들어감과 여러 지위에 들어갈 때 부처님·여래·응공·정변지께서 주지하는 힘을 주십니까?"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마업(魔業)과 번뇌와 산란심(散亂心)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고, 성문의 선정(禪定)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며, 안의 몸으로 여래의 지위를 증득하기 위한 것이고, 안의 몸으로 법을 증득하는 것을 증장(增長)하기 위함이다.
  대혜여, 그러므로 여러 부처님·여래·응공·정변지께서 보살들을 위하여 주지하는 힘을 지어 주시는 것이다. 대혜여, 만약 여래가 보살을 위하여 주지하는 힘을 지어 주지 않는다면 외도와 성문과 벽지불과 마사(魔事)에 떨어질 것이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할 것이니, 그러므로 부처님·여래·응공·정변지께서는 큰 자비로 여러 보살을 거두어 주시는 것이다."
  그 때 세존께서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보살은 자신의 본원력(本願力)이
  청정함에 의지하여
  삼매에 들고 지위를 받는데,
  
  초지(初地)에서 10지(地)에 이르는 동안
  인중존(人中尊)이신 부처님의 신력으로
  주지함을 지어 주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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