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유가사지론 제 22 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4. 15:01
[749 / 829] 쪽
  
유가사지론 제 22 권
  
  
  미륵보살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강명희 번역
  
  
  10) 성문지 ②
  
  (3) 초유가처 출리지(出離地) ①
  위와 같이 취입지(趣入地)를 설하였다.
  무엇을1) 출리지(出離地)라고 하는가?
  세간(世間)의 이욕(離欲)과
  위와 같이 출세간(出世間)과
  그리고 이 두 가지의 자량(資糧)
  이를 출리지(出離地)라고 하네.
  若世間離欲  如是出世間
  及此二資糧  是名出離地
  
  
1) 초유가처(初喩伽處)에는 3지(地)가 있으니, 첫째는 종성지(種姓地)이며, 둘째는 취입지(趣入地)이며, 셋째는 출리지(出離地)이다. 21권에서는 종성지(種姓地)와 취입지(趣入地)를 해설하였고, 본(本) 22권부터는 출리지(出離地)를 해설한다. 출리지(出離地)는 3문(門)으로 해설되는데, 첫째는 세간도(世間道)에 의한 이욕(離欲)을 해설하는 것이고, 둘째는 출세간도(出世間道)에 의한 이욕(離欲)을 해설하는 것이고, 셋째는 세간 출세간의 2도(道)의 자량(資糧)을 해설하는 것이다.
[750 / 829] 쪽
  또는 세간(世間)의 이욕(離欲)에 의하여 이욕(離欲)에 나아가는 것과 또는 출세간도[出世道]에 의하여 이욕(離欲)에 나아가는 것과 또는 이 두 가지의 도(道)의 모든 자량(資糧)을 간추려서 하나로 하여 출세지(出世地)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세간도(世間道)에 의하여 이욕(離欲)에 나아간다고 이름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2)
  어떤 사람이 아래의 욕계[下欲界]에 대하여 추상(麤相)이라고 관(觀)하고, 정(定)이거나 생(生)이거나 간에 초정려(初靜慮)의 이생희락(離生喜樂)에 대하여 정상(靜相)이라고 관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이 자주 관(觀)에 머무를 때에, 곧바로 욕계에서 이욕을 얻기 때문에, 또한 최초(最初)의 정려(靜慮)에 증입(證入)한다. 이와 같이 다시 초정려 위에 대하여 점차로 상응하는 대로 모든 하지(下地)를 추상(麤相)이라고 관(觀)하고 모든 상지(上地)를 정상(靜相)이라고 관(觀)한다. 그는 이와 같이 자주 관할 때에, 곧바로 무소유처(無所有處)에 이르기까지 이욕을 얻기 때문에, 또한 능히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이르기까지 증입(證入)하는 것이다. 위와 같은 것을 세간도(世間道)에 의하여 이욕(離欲)에 나아간다고 이름한다. 이것을 제외한 다시는 지나치거나[過] 증가[增]하는 것은 없다.
  출세간도(出世間道)에 의하여 이욕(離欲)에 나아간다고 이름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3)
  어떤 사람이 선사(善士)를 가까이 하여[親近] 성법(聖法)에 대하여 이미 총혜(總慧)4)를 성취하고 성법(聖法)에 대하여 이미 조순(調順)을 얻고, 고성제(苦聖諦)에 대하여 여실하게 고(苦)를 알고 집성제(集聖諦)에 대하여 여실하게 집(集)을 알며 멸성제(滅聖諦)에 대하여 여실하게 멸(滅)을 알고 도성제(道聖諦)에 대하여 여실하게 도(道)를 알며, 이미 유학(有學)의 지견(智見)을
  
2) 이하는 출리지(出離地)의 3문(門) 가운데 첫 번째로 세간도(世間道)에 의한 이욕(離欲)에 대하여 해설한다.
3) 이하는 출리지(出離地)의 3문(門) 가운데 두 번째로 출세간도(出世間道)에 의한 이욕(離欲)에 대하여 해설한다.
4) 뛰어난 지혜를 의미한다.
[751 / 829] 쪽
  성취함을 얻고 이로부터 이후에 성도(聖道)를 점차 닦으며, 두루 3계(界)의 견도[見] 수도[修] 소단(所斷)의 일체법(一切法)에 대하여 스스로 능히 이계(離繫)하여 스스로 해탈(解脫)을 얻어서, 이와 같이 곧바로 능히 3계(界)를 초월[超過]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위와 같은 것을 출세간도(出世間道)에 이욕(離欲)에 나아간다고 이름한다.
  2도(道)의 자량(資糧)이라고 이름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5)
  올타남(嗢拕南)으로 말하리라.
  
  자(自) 타(他)의 원만(圓滿)과 선법욕(善法欲)과
  계(戒) 근(根)의 율의(律儀)와 음식[食]에 대하여 그 양을 아는 것과
  깨어 있고[覺寤]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르는 것과 선우(善友)와
  들음[聞]과 생각[思]과 장애 없음[無障]과 혜사[捨]와 장엄(莊嚴)이라네.
  自他圓滿善法欲  戒根律儀食知量
  覺寤正知住善友  聞思無障捨莊嚴
  
  자원만(自圓滿)과 타원만(他圓滿)과 선법(善法)의 욕(欲)과 계율의(戒律儀)와 근율의(根律儀)와 음식[食]에 대하여 그 양을 아는 것과 낮이나 밤이나 항상 부지런히 깨어 있으면서[覺寤] 유가(瑜伽)를 닦는 것과 바르게 알면서[正知] 머무르는 것과 선우성[善友性]과 정법(正法)을 듣는 것과 정법
  
5) 이하는 출리지(出離地)의 3문(門) 가운데 세 번째로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의 2도(道)의 자량(資糧)에 대하여 자원만(自圓滿) 타원만(他圓滿) 선법욕(善法欲) 계율의(戒律儀) 근율의(根律儀) 음식에 대하여 그 양을 아는 것 항상 깨어 있으면서 유가(瑜伽)를 닦는 것 바르게 알면서[正知] 머무르는 것 선우성[善友性] 정법(正法)을 듣는 것 정법(正法)을 생각[思]하는 것 장애(障礙)가 없는 것 혜사(惠捨)를 닦는 것 사문(沙門)의 장엄(莊嚴)의 14가지로 해설한다. 22권에서는 자원만(自圓滿) 타원만(他圓滿) 선법욕(善法欲) 계율의(戒律儀)까지 해설한다. 그리고 근율의(根律儀) 이하는 23권에서, 항상 깨어 있으면서 유가(瑜伽)를 닦는 것 이하는 24권에서, 선우성(善友性) 이하는 25권에서 해설한다. 이하는 14가지에 대한 게송과 그 하나 하나의 명칭을 거론하는 부분이다.
[752 / 829] 쪽
  (正法)을 생각[思]하는 것과 장애(障礙)가 없는 것과 혜사(惠捨)를 닦는 것과 사문(沙門)의 장엄(莊嚴)을 말한다. 이와 같은 등의 법(法), 이를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의 여러 이욕(離欲)의 도(道)에 나아가는{趣向] 자량(資糧)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에 자원만(自圓滿) 타원만(他圓滿) 선법(善法)의 욕(欲)의 이 세 가지는 앞에서 종자(種子)를 수집(修集)하는 제 열연(劣緣)에서 이미 그 상(相)을 말한 것과 같은 줄 알아야만 한다.
  무엇을 계율의(戒律儀)라고 하는가?6)
  올타남(嗢拕南)으로 말하리라.
  
  계율의(戒律儀)에 대하여 마땅히 알라.
  세 가지를 말함[辯三]7)과 무너짐[虧]과 원만[滿]의 열 가지이며
  여섯 가지 이문(異門)과 세 가지의 청정함[淨]8)
  뛰어난 공덕의 열 가지라네.
  戒律儀當知  辨三虧滿十
  六異門三諍  勝功德十種
  
  
6) 자원만(自圓滿) 타원만(他圓滿) 선법(善法)의 욕(欲) 계율의(戒律儀) 근율의(根律儀) 음식에 대하여 그 양을 아는 것 항상 깨어 있으면서 유가(瑜伽)를 닦는 것 바르게 알면서[正知] 머무르는 것 선우성[善友性] 정법(正法)을 듣는 것 정법(正法)을 생각[思]하는 것 장애(障礙)가 없는 것 혜사(惠捨)를 닦는 것 사문(沙門)의 장엄(莊嚴)의 14가지의 세 출세간의 자량(資糧) 가운데에 앞의 세 가지에 대한 주석은 생략되고, 이하는 계율의(戒律儀)에 대하여 설명한다. 계율의(戒律儀)에 대해서는 안주구계(安住具戒) 잘 별해탈율의(別解脫律儀)를 수호하는 것 궤칙(軌則)의 원만(圓滿) 소행(所行)의 원만(圓滿) 미소한 죄(罪)에 대하여 대포외(大怖畏)를 보는 것 학처(學處)를 수학(受學)하는 것의 6항이 있다. 이하는 그 6항에 대하여 첫째 하나하나 해석하고, 둘째 약의(略義)로 해석한다.
7) 아래의 성문(聲聞)의 약의(略義) 가운데 두 가지의 3종(種)을 나타내는 것이다. 두 가지의 3종(種)이란 무실괴상(無失壞相) 자성상(自性相) 자성(自性)의 공덕상(功德相)과 수지계성(受持戒性) 출리계성(出離戒性) 수습계성(修習戒性)을 말한다.
8) 신수대장경에는 쟁(諍)으로 되어 있으나 청정함[淨]으로 고쳐서 해석한다.
[753 / 829] 쪽
  계율의(戒律儀)란 어떤 사람이 구족계[具戒]에 안주하고 …… 내지 학처(學處)를 수학(受學)하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구족계[具戒]에 안주하는 것이라고 이름하는 것인가?9)
  수학(受學)해야 할 모든 학처(學處)에 대해서 신업(身業)을 무너지지 않게 하고[不虧], 어업(語業)을 무너지지 않게 하고, 결여하는 일도 없고 뚫는 일도 없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것을 구족계에 안주하는 것[安住具戒]이라고 이름한다.
  무엇을 능히 잘 별해탈율의(別解脫律儀)룰 수호(守護)하는 것이라고 이름하는 것인가?
  능히 7중(衆)10)이 받은 바[所受] 별해탈율의(別解脫律儀)를 수호(守護)하는 것을 말하며, 곧 이 율의(律儀)는 대중[衆]마다 차별이 있기 때문에 많은 율의(律儀)를 이루는 것이다. 지금 여기의 뜻에는 오직 필추(苾芻)의 율의처(律儀處)에 의하여 능히 잘 별해탈율의(別解脫律儀)를 수호(守護)하는 것을 설하는 것이다.
  무엇을 궤칙(軌則)의 원만(圓滿)이라고 이름하는 것인가?
  어떤 사람이 혹은 위의로(威儀路)에서 혹은 소작사(所作事)에서 혹은 선품(善品)의 가행처소(加行處所)에서 궤칙(軌則)을 성취하여 세간(世間)에 수순(隨順)하고 세간을 뛰어 넘지 않으며, 비나야(毘奈耶)에 수순(隨順)하고 비나야(毘奈耶)를 뛰어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위의로(威儀路)에서 궤칙(軌則)을 성취하여 세간(世間)에 수순(隨順)하고 세간을 뛰어 넘지 않으며, 비나야(毘奈耶)에 수순(隨順)하고 비나야(毘奈耶)를 뛰어 넘지 않는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어떤 사람이 응당 행할 곳[所應行]에서 행해야 할 것과 같이 곧 거기에서 그와 같이 행하는 것이니, 이러한 행(行) 때문에 세간에 비방[譏毁]을 받지 않고 현양(賢良)하면서 정지(正至)한 선사(善士)와 법(法)을 함께하는 자
  
9) 게송의 세 가지를 말함[辯三]을 해석한다. 여기에서는 첫째 6구(句)에 대해서 하나하나 해석하고, 둘째 약의(略義)를 해석한다. 이하는 그 첫 번째이다.
10)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사미(沙彌) 사미니(沙彌尼) 식차마나(式叉摩那)를 말한다.
[754 / 829] 쪽
  들과 율(律)을 지키는 자들과 율(律)을 배우는 자들에게 가책(呵責)을 받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소행(所行)에서와 같이 그의 머무르는 곳 앉는 곳 눕는 곳에서도 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만 한다. 이와 같은 것을 위의로(威儀路)에서 궤칙(軌則)을 성취하여 세간(世間)에 수순(隨順)하고 세간을 뛰어 넘지 않으며, 비나야(毘奈耶)에 수순(隨順)하고 비나야(毘奈耶)를 뛰어 넘지 않는 것이라고 이름한다.
  소작사(所作事)에서 궤칙(軌則)을 성취하여 세간(世間)에 수순(隨順)하고 세간을 뛰어 넘지 않으며, 비나야(毘奈耶)에 수순(隨順)하고 비나야(毘奈耶)를 뛰어 넘지 않는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어떤 사람이 그의 소작(所作)인 의복에 관한 일[衣服事]이나 대 소변에 관한 일[便利事]이나 물을 쓰는 일[水用事]이나 양치질하는 일[楊枝事]이나 취락에 들어가 걸식을 행하는 일[入聚落行乞食事]이나 받아 쓰는 일[受用事]이나 바리를 씻는 일[盪鉢事]이나 안치하는 일[安置事]이나 발을 씻는 일[洗足事]이나 와구를 부설하는 등의 일[敷設臥具等事], 곧 이를 간략히 설하면 의복에 관한 일과 바리에 관한 일이며 다시 그밖에 위와 같은 등의 종류인 여러 가지 응당 해야 할 것을 소작사(所作事)라고 이름하는데, 그 상응하는 바대로 응당 지어야 할 곳에서 지어야 할 것과 같이 곧 여기에서도 이와 같이 짓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짓기 때문에 세간한테서 비방[譏毁]을 받지 않고 현양(賢良)하면서 정지(正至)한 선사(善士)와 법(法)을 함께하는 자들과 율(律)을 지키는 자들과 율(律)을 배우는 자들에게 가책(呵責)을 받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소작사(所作事)에서 궤칙(軌則)을 성취하여 세간(世間)에 수순(隨順)하고 세간을 뛰어 넘지 않으며, 비나야(毘奈耶)에 수순(隨順)하고 비나야(毘奈耶)를 뛰어 넘지 않는 것이라고 이름한다.
  제 선품(善品)의 가행처소(加行處所)에서 궤칙(軌則)을 성취하여 세간(世間)에 수순(隨順)하고 세간을 뛰어 넘지 않으며, 비나야(毘奈耶)에 수순(隨順)하고 비나야(毘奈耶)를 뛰어 넘지 않는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갖가지 선품(善品)의 가행(加行)에 대하여, 즉 정법(正法)에 대해서 수지(受持)하고 독송(讀誦)하며, 존장(尊長)한테서 화경(和敬)의 업(業)을 닦으며 찾아 뵙고 모시며, 병자(病者)한테서 자비심(慈悲心)을 일으켜 은중
[755 / 829] 쪽
  (殷重)하게 공대(供待)하고, 여법(如法)하게 고백[白]하는 가행(加行)에 대하여 자비심(慈悲心)에 머물러서 전전(展轉)하며 바라는 것[欲]을 주며, 정법(正法)에 대하여 청문(請問)하고 청수(聽受)하며 매우 부지런히 하여 게으름 없이하며, 여러 지혜가 있고 범행(梵行)을 같이 하는 사람에게는 그 신력(身力)을 다하여 공경하는 일을 닦으며, 다른 사람의 선품(善品)에 언제나 부지런히 칭찬하고 격려하며, 언제나 흔쾌히 다른 사람을 위하여 정법(正法)을 선설(宣說)하고, 고요한 방[靜室]에 들어가 결가부좌하고 생각을 묶고서 사유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등의 종류와 그 밖의 여러 가지 무량(無量)한 닦아야 할 선법(善法)을 모두 설하여 선품(善品)의 가행(加行)이라고 이름한다.
  그는 위와 같이 선품(善品)의 가행(加行)을 선설(宣說)한 것에 따라서 그 상응하는 바대로 응당 지어야 할 것에 대하여 그대로 지어야 할 것에서 곧 그 안에서 이와 같이 짓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짓기 때문에 세간의 비방[譏毁]을 받지 않고 현양(賢良)하면서 정지(正至)한 선사(善士)와 법(法)을 함께하는 자들과 율(律)을 지키는 자들과 율(律)을 배우는 자들에게 가책(呵責)을 받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제 선품(善品)의 가행처소(加行處所)에서 궤칙(軌則)을 성취하여 세간(世間)에 수순(隨順)하고 세간을 뛰어 넘지 않으며, 비나야(毘奈耶)에 수순(隨順)하고 비나야(毘奈耶)를 뛰어 넘지 않는 것이라고 이름한다.
  위와 같이 설한 바 행상(行相)의 궤칙(軌則)의 차별에 대해서 모두 다 구족(具足)하는 것을 궤칙(軌則)의 원만(圓滿)이라고 설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무엇을 소행(所行)의 원만(圓滿)이라고 이름하는 것인가?
  필추(苾芻)들에게는 간략하게 다섯 가지의 가지 말아야 할 곳[非所行處]가 있음을 말한다.
  무엇을 다섯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창령가(唱令家)11)이며, 둘째는 음녀가(
   女家)12)이며, 셋째는 고주가(酤酒家)13)이며, 넷째는 국왕가(國王家)14)이며, 다섯째는 전다라(旃茶羅
  
11) 백정의 집을 말한다.
12) 사창가를 말한다.
13) 술집을 말한다.
14) 궁궐을 말한다.
[756 / 829] 쪽
  )15) 갈치나가(羯恥那家)16)이다. 만약 이와 같이 여래(如來)께서 제정하신 가지 말아야 할 곳[非所行處]에 대하여 능히 잘 원리(遠離)하고 그 밖의 죄(罪)가 없는 모든 갈 곳[行處]에 대해서는 때를 알고서 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소행(所行)의 원만(圓滿)이라고 이름한다.
  무엇을 미소(微小)한 죄(罪)에 대하여 대포외(大怖畏)를 본다고 이름하는 것인가?
  여러 가지 소수(小隨) 소학처(小學處)에서 만약 도로 깨끗해지게 하는 것이 가능한 것에 범한 것이 있으면 미소(微小)한 죄(罪)라고 이름하며, 여러 학처(學處)에서 실제로 훼범(毁犯)을 행하는 것을 설하여 죄(罪)라고 이름하며, 이미 훼범(毁犯)하고 나서 적은 공력(功力)을 써서 도로 깨끗하게 되는 것을 설하며 미소(微小)라고 이름한다. 이러한 인연 때문에 미소(微小)한 죄(罪)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무엇을 거기에서 대포외(大怖畏)를 본다고 하는 것인가?
  '나는 이 훼범(毁犯)의 인연에 대하여 다시는 감능(堪能)이 없어서, 아직 얻지 못한 것은 얻지 못하고, 아직 접촉하지 못한 것은 접촉하지 못하며, 아직 증득하지 못한 것은 증득하지 못하지나 않을까, 나는 이 때문에 여러 악취(惡趣)에 가까워지고, 여러 악취(惡趣)에 나아가고, 혹은 자책(自責)당하고, 혹은 대사(大師)와 제 천(天)과 지혜있는 범행(梵行)을 같이하는 이들에게 법으로 가책(呵責)받지나 않을까, 나는 이 때문에 여러 4방[方]과 4유[維]에 두루 하면서 나쁜 이름[惡名]과 나쁜 일컬음[惡稱]과 나쁜 소리[惡聲]와 나쁜 노래[惡頌]가 멀고 가까운 곳으로 유포되지나 않을까'라고 이러한 관(觀)을 하는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이 현법(現法)과 미래의 훼범(毁犯)의 원인으로부터 생기게 되는 모든 좋지 않은 결과[非愛果]에 대하여 대포외(大怖畏)를 보고 이 인연 때문에 소수(小隨) 모든 소학처(所學處)에서 생
  
15) 범어 Ca la의 음사어로서 인도의 최하층 계급에 속하는 천민을 말한다. 이들은 도살(屠殺) 등의 업(業)을 영위하는 사람들이다.
16) 범어 Kha ika의 음사어로서 도구인(屠狗人) 살구인(殺狗人)으로 번역되며, 천업(賤業)에 종사하는 사람을 말한다.
[757 / 829] 쪽
  명을 곤란하게 하는 인연에 대하여도 역시 일부러 범하지 않는다. 어떤 때에 어떤 곳에서 망념(忘念)하여 범한다하여도 곧바로 빠르게 법다이 드러내어 도로 깨끗해지도록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미소(微小)한 죄(罪)에 대하여 대포외(大怖畏)를 본다고 하는 것이다.
  무엇을 학처(學處)를 수학(受學)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인가?
  먼저 별해탈계(別解脫戒)17)를 백사갈마(白四羯磨)하고 구족계[具戒]를 받을 때 계사(戒師)18)로부터 적은 부분의 학처(學處)의 체성(體性)을 듣게 되며, 다시 친교사(親敎師)와 궤범사(軌範師)로부터 듣게 되는 것이다. 그 밖의 별해탈경(別解脫經)을 간추려 선설(宣說)하면 250학처(學處)를 지나치는데 이 모두를 '일체를 배우리라'고 스스로 서원하는 것이다. 다시 그 밖의 항상 의논하는 자와 같이 의논하는 자와 항상 교류하는 친애(親愛)하는 자로부터 배워야 할 것[所學處]을 들으며, 다시 반 달 마다 항상 선설(宣說)되는 별해탈경(別解脫經)에서 배워야 할 것[所學處]를 듣고서 그 모든 것에 '모두 다 수학(受學)하리라'고 스스로 서원하는 것이다.
  일체의 응당 배워야 할 것[所應學處]에 대해서 모두 다 수학(受學)하기 때문에 별해탈율의(別解脫律儀)를 얻는다고 하며, 이로부터 이후에는 여러 학처(學處)에서 만약 선교(善巧)하였다면 곧바로 능히 범하는 일이 없으며, 설령 범하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바로 법다이 뉘우치는 것이다. 만약 제 학처(學處)에 대해서 아직 선교(善巧)를 얻지 못하고 아직 깨달음[曉悟]을 얻지 못했다면 먼저 수지(受持)할 것을 서원했기 때문에 지금 선교(善巧)를 받으려고 하고 깨달음을 구하려고 하는 것이다.
  
17) 범어 Pr timok a의 의역(意譯)으로서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라고 음역(音譯)된다. 방비지악(防非止惡)의 뜻으로 수계작법(受戒作法)에 따라서 다수의 수칙을 실천하여 신(身) 구(口) 의(意)의 악업(惡業)을 멀리하는 것이다. 따로 따로 계를 보전함으로서 전체로서의 해탈을 얻는 것이다. 다수의 계율을 완비하는 것은 구족계(具足戒)라고 한다.
18) 계화상(戒和尙) 수계사(授戒師) 전계사(傳戒師)라고도 한다. 계를 주는 스승으로서 수계작법(受戒作法)의 의식을 맡아보는 스승이다. 갈마사(羯磨師)라고도 한다. 소승에서는 구족계를 받은지 10년 이상 되어야 계사(戒師)의 자격이 있다고 하지만 대승계(大乘戒)에서는 직접 석존을 계사로 삼고 불조의 법통을 계승하는 스님이 그 역할을 맡는다.
[758 / 829] 쪽
  앞에서 설한 것과 같이 여러 배워야 할 곳[所學處]에서 친교사(親敎師) 혹은 궤범사(軌範師)에게 먼저와 같이 청문(請問)하고 이미 선교(善巧)와 깨달음[曉悟]을 얻은 뒤에는 가르치는 것에 따라서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이 다시 능히 수학(受學)하는 것이다. 또한 존중받는 자와 존중받는 자와 동등한 사람에 의하여 설해진 학처(學處)에 대하여 글[文]이나 이치[義]에 있어서 능히 전도됨이 없이 받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학처(學處)를 수학(受學)하는 것이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이 계율의(戒律儀)를 자세히 분별[廣辨]하였다.
  어떻게 이 가운데에서의 약의(略義)를 응당 알아야만 하는가?19)
  이에 대하여 세존(世尊)께서는 계온(戒蘊)의 약의(略義)를 현시(顯示)하는 데에 세 가지 상(相)이 있다. 첫째는 무실괴상(無失壞相)이며, 둘째는 자성상(自性相)이며, 셋째는 자성(自性)의 공덕상(功德相)이다.
  이것은 다시 무엇을 말하는가?
  만약 구족계에 안주하는 것[安住具戒]을 설명하면 이것에 의하여 시라(尸羅) 율의(律儀)의 무실괴상(無失壞相)을 현시하는 것이며, 만약 다시 별해탈율의(別解脫律儀)를 능히 잘 수호함을 설명하면 이것에 의하여 시라(尸羅) 율의(律儀)의 자성상(自性相)을 현시하는 것이고, 만약 다시 궤칙(軌則)의 소행(所行)이 모두 다 원만(圓滿)함을 설하면 이것에 의하여 별해탈율의(別解脫律儀)를 그 받는 바와 같이 할 경우 다른 사람이 증상(增上)을 관하기 때문에 자성(自性)의 공덕상(功德相)을 현시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다른 이가 이와 같이 궤칙(軌則)의 소행(所行)의 원만(圓滿)함을 관견(觀見)하기 때문에, 아직 믿지 않은 자는 믿고, 믿는 자는 증장(增長)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청정(淸淨)한 신처(信處)를 발생(發生)하고 마음이 염악(厭惡)이 없어서 말로 비방[譏毁]하지 않는다. 만약 이 시라(尸羅)를 구족하고 궤칙(軌則)의 소행(所行)이 모두 원만함과 다르면 다른 사람이 증상(增上)의
  
19) 앞에서는 계율의(戒律儀)의 6구(句)에 대하여 하나하나 해설하였고, 이하는 계율의(戒律儀)의 6구(句)에 대한 두 가지의 3종(種)의 약의(略義)에 대해서 해설한다. 성문(聲聞)의 약의(略義) 가운데 두 가지의 3종(種)이란 무실괴상(無失壞相) 자성상(自性相) 자성(自性)의 공덕상(功德相)과 수지계성(受持戒性) 출리계성(出離戒性) 수습계성(修習戒性)을 말한다.
 
[759 / 829] 쪽
  모든 공덕(功德)을 관할 때에 뛰어난 이익[勝利]이 응당 없게 될 것이며, 이것과 상위(相違)하면 과실(過失)이 응당 있게 될 것이다.
  만약 다시 미소(微小)한 죄(罪)에 대하여 대포외(大怖畏)를 보고 학처(學處)를 수학(受學)함을 설명하면 이것에 의하여 별해탈율의(別解脫律儀)를 그 받는 바와 같이 하여 스스로 증상(增上)의 자성(自性)의 공덕상(功德相)을 관하는 것을 현시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이와 같이 궤칙(軌則)의 소행(所行)이 모두 다 원만(圓滿)하기 때문에, 앞과 같이 다른 사람이 증상(增上)의 공덕(功德)을 관하는 뛰어난 이익[勝利]을 획득(獲得)할지라도 그러나 정계(淨戒)를 훼범(毁犯)하는 인연(因緣)에 의하여 악취(惡趣)에 태어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감능(堪能)이 없어서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앞에서 자세히 설한 것과 같다. 만약 그가 미소(微小)한 죄(罪)에 대하여 대포외(大怖畏)를 보고서 앞서 받은 상품(上品)의 학처(學處)에 대하여 능히 바르게 수학(修學)하면, 이 인연(因緣)에 의하여 몸이 무너지고 나서 나중에 선취(善趣)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 감능(堪能)이 있어서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는다는 것은 앞에서 자세히 설한 것과 같다. 이러한 인연에 의하여 이를 설하여 별율의계(別律儀戒)라고 이름하며, 그 받은 바와 같이 하여 스스로 증상(增上)의 공덕(功德)의 뛰어난 이익[勝利]을 관하는 것이다.
  다시 이문(異門)이 있다. 불(佛) 세존(世尊)께서는 이것에 대하여 간략하게 세 가지 계성(戒性)을 현시(顯示)하시니, 첫째는 수지계성(受持戒性)이고, 둘째는 출리계성(出離戒性)이고, 셋째는 수습계성(修習戒性)이다. 말하자면 만약 구족계[具戒]에 안주(安住)함을 설하면 이것에 의하여 수지계성(受持戒性)을 현시하는 것이며, 만약 다시 별해탈율의(別解脫律儀)를 능히 잘 수호(守護)함을 설하면 이것에 의해서 출리계성(出離戒性)을 현시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별해탈율의(別解脫律儀)에 포함되는 정계(淨戒)를 설하여 증상계학(增上戒學)이라고 이름하며, 곧 이와 같은 증상계학(增上戒學)에 의지하여 증상심학[增上心 : 增上心學]과 증상혜학(增上慧學)을 수습하고 이것에 의하여 능히 일체의 괴로움[苦]이 다한 구경(究竟)의 출리(出離)를 얻는 줄 알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출리(出離)는 증상계(增上
[760 / 829] 쪽
  戒)로써 전행(前行)의 소의지처(所依止處)로 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 별해탈율의(別解脫律儀)를 설하여 출리계성(出離戒性)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만약 다시 궤칙(軌則)의 소행(所行)이 모두 다 원만(圓滿)하고 미소(微小)한 죄(罪)에 대하여 대포외(大怖畏)를 보고 학처(學處)를 수학(受學)함을 설명하면 이것에 의해서 수습계성(修習戒性)을 현시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이와 같이 설한 바 제 상(相)의 별해탈율의에 의해서 정계(淨戒)를 수습하는 것을 잘 수습하고 매우 잘 수습한다[善修習極善修習]고 이름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한 종류의 시라(尸羅) 율의(律儀)를 현전(現前)에 선설(宣說)하면 여섯 가지인 줄 알아야만 한다.
  또한20) 곧 이와 같은 시라(尸羅) 율의(律儀)는 열 가지 인연(因緣), 즉 무너짐[虧損] 등에 의해서 알아야만 한다. 이것과 상위(相違)하는 열 가지 인연 때문에 원만(圓滿) 등을 알아야만 한다.
  무엇을 열 가지의 무너짐[虧損]의 인연이라고 하는가?
  첫째는 맨 처음에 나쁘게 시라 율의를 받는 것[最初惡受尸羅律儀]이며, 둘째는 매우 극도로 밑으로 가라앉는 것[太極沈下]이며, 셋째는 매우 극도로 뜨고 흐트러지는 것[太極浮散]이며, 넷째는 방일 해태에 소속된 것[放逸懈怠所攝]이며, 다섯째는 삿된 원을 일으키는 것[發起邪願]이며, 여섯째는 궤칙이 무너지는 것에 소속된 것[軌則虧損所攝]이며, 일곱째는 정명이 무너지는 것에 소속된 것[淨命虧損所攝]이며, 여덟째는 2변에 떨어져 있는 것[墮在二邊]이며, 아홉째는 능히 출리하지 못하는 것[不能出離]이며, 열째는 받은 것을 잃는 것[所受失壞]이다.
  맨 처음에 나쁘게 시라 율의를 받는 것[最初惡受尸羅律儀]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어떤 사람이 왕에게 핍박받아서 출가(出家)를 구하거나, 혹은 날뛰는 도둑에게 핍박받아서, 혹은 빚쟁이에게 핍박받아서, 혹은 두려움으로 핍박받아서, 혹은 살아가지 못할 두려움에 핍박받아서 출가하기를 구하는 것이니, 사문성
  
20) 이하는 계율의(戒律儀)의 무너짐[虧損] 등의 열 가지 인연과 원만(圓滿) 등의 열 가지 인연을 밝힌다.
[761 / 829] 쪽
  (沙門性)을 위해서가 아니며, 바라문성(婆羅門性)을 위해서도 아니며, 자신의 조복(調伏)을 위해서도 아니며, 자신의 적정(寂靜)을 위해서도 아니며, 자신의 열반(涅槃)을 위해서도 아니면서 출가를 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맨 처음에 나쁘게 시라 율의를 받는 것[最初惡受尸羅律儀]이라고 한다.
  매우 극도로 밑으로 가라앉는 것[太極沈下]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어떤 사람이 그 성품에 염치가 없고 악작(惡作)이 미약하며 성품이 느슨함으로 인하여 모든 학처(學處)에 대하여 소작(所作)이 느슨한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매우 극도로 밑으로 가라앉는 것[太極沈下]이라고 이름한다.
  매우 극도로 뜨고 흐트러지는 것[太極浮散]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어떤 사람이 악취(惡取)를 굳건히 집착하여 비처(非處)에 악작(惡作)하고 마땅히 짓지 않아야 할 여러 가지 악작(惡作)에 대하여 함부로 악작(惡作)을 지으며, 비처(非處)에서 다른 사람이 경멸심(輕蔑心)과 뇌해심(惱害心)을 일으키며 그 비처(非處)에서 억지로 깨달음[曉悟]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매우 극도로 뜨고 흐트러지는 것[太極浮散]이라고 이름한다.
  방일 해태에 소속된 것[放逸懈怠所攝]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어떤 사람이 과거세(過去世)에 훼범(毁犯)을 범했는데도 이 훼범(毁犯)에 대해서 실념(失念)하였기 때문에 한 종류도 여법(如法)하게 도로 깨끗하게 할 수 없으며, 과거에 의한 것과 마찬가지로 미래세(未來世)와 현재세(現在世)에 의해서도 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만 한다. 즉 훼범(毁犯)을 범한 것, 이 훼범에 대해서 실념(失念)하였기 때문에 한 종류도 여법(如法)하게 도로 깨끗하게 할 수 없으며, 또한 먼저의 훼범한 것에 대해서 맹렬하게 범하지 않겠다는 락욕(樂欲)을 일으키지 않고서 '나는 반드시 여여(如如)하게 갈 것이고 여여하게 머무를 것이며 이와 같이 이와 같이 갈 곳을 가고 이와 같이 이와 같이 머무를 곳에 머무르나니, 훼범(毁犯)한 것에 대하여 끝내 훼범하지 않으리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인연 때문에 가고 머무르는 것에 따라서 이와 같이 이와 같이 범할 것을 훼범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전제(前
[762 / 829] 쪽
  際)의 구행(俱行)과 후제(後際)의 구행(俱行)과 중제(中際)의 구행(俱行)의 앞선 때의 소작(所作)과 함께 따라 다니며 행하는 모든 방일(放逸)을 성취하는 것이다. 또한 스스로 수면(睡眠)을 집취하기를 즐거움으로 삼고 눕기를 즐거움으로 삼으며 옆구리를 대고 눕기를 즐거움으로 삼으며, 성품이 매우 부지런하지 아니하고 그 성품으로 인해 나태하여 갖추어 발심(發心)을 일으키지 못해서 여러 지혜가 있고 범행(梵行)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때때로 뵙고 묻거나 공양하거나 섬기지 아니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방일 해태에 소속된 것[放逸懈怠所攝]이라고 이름한다.
  삿된 원을 일으키는 것[發起邪願]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어떤 사람이 삿된 원[邪願]에 의지하여 범행(梵行)을 수행하면서 '나의 모든 계금(戒禁)과 항상 정근(精勤)하는 것과 범행(梵行)을 닦는 것은 마땅히 천(天) 혹은 그 밖의 천처(天處)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혹은 다시 이득[利養]과 공경(恭敬)을 애락(愛樂)하면서 범행(梵行)을 닦나니, 즉 이것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으로부터 이득[利養]과 공경(恭敬)을 희구(希求)하고 곧 이와 같은 이득과 공경에 대하여 깊이 염착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삿된 원을 일으키는 것[發起邪願]이라고 이름한다.
  궤칙이 무너지는 것에 소속된 것[軌則虧損所攝]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어떤 사람이 위의로(威儀路)와 혹은 소작사(所作事) 혹은 제 선품(善品)의 가행처(加行處)에 모든 궤칙(軌則)에 대하여 세간을 수순[順]하지 않고 세간을 뛰어 넘고, 비나야(毘奈耶)를 수순하지 않고 비나야(毘奈耶)를 뛰어 넘는 것이니, 앞에서 자세히 설한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궤칙이 무너지는 것에 소속된 것[軌則虧損所攝]이라고 이름한다.
  정명이 무너지는 것에 소속된 것[淨命虧損所攝]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어떤 사람이 큰 욕심을 부리는 성품 때문에 희족(喜足)을 알지 못하여 생활하기 어렵고 만족하기 어려워서 언제나 비법(非法)으로 의복 음식 와구(臥具) 병에 대한 의약과 제 자구(資具)들을 추구하되, 정법(正法)으로써 하지 아니하며, 또한 탐욕 때문에 갖가지 의복 음식 와구(臥具) 병에 대한 의약 제 자구(資具)의 인연을 구하고 비로소 방편(方便)으로 자기에게 뛰어
[763 / 829] 쪽
  난 공덕이 있다고 나타내어 속임수로 비상한 위의(威儀)를 차리고서는 다른 사람을 속이기 위하여 언제나 거짓으로 모든 감관[諸根]의 들뜸 없음과 모든 감관의 움직임 없음과 모든 감관의 적정함을 나타내며, 이로 인하여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덕이 있어서 보시하는 것이 있어야만 한다. 짓는 것이 있어야만 한다'고 말하게 하니, 이른바 받들어 섬김[承事]과 의복 음식 와구(臥具) 병에 대한 의약 제 자구(資具)를 공급해야 한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한 매우 흉패(凶悖)하면서도 억지로 입으로 교만[矯傲]하고 그 이름을 겉으로 꾸미고 종성(種姓)을 가지고 뽐내며 혹은 다문(多聞)을 구한다고도 하고 혹은 지법(持法)에 머무른다고도 하면서 이득[利養]을 위하여 또한 다시 다른 것을 위하여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나 제자가 설한 정법(正法)을 선설(宣說)하기도 하고, 혹은 스스로 자기가 진실한 공덕이 있다고 선설(宣說)하기도 하고, 혹은 적은 것을 증익(增益)하기도 하고, 혹은 다른 사람 앞에서 방편으로 상(相)을 나타내기도 하면서 의복을 구하고 어느 하나의 사문(沙門)의 자구(資具)를 구하기 위하여 많이 구하기 위해서 정묘(精妙)한 것을 구하기 위해서 비록 부족하지 않은데도 헤진 옷을 입고 나타나서는 깨끗한 믿음[淨信]을 지닌 장자(長者) 거사(居士) 바라문(婆羅門) 등으로 그에게 의복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끔 하여서 은중(殷重)히 받들어 섬기면서 여러 가지 상묘(上妙)한 의복을 베풀어주도록 하는 것이다. 의복을 위해서 하는 것과 같이, 그 밖의 어느 하나의 사문(沙門)의 살림의 기구[資生衆具]들을 위해서도 역시 그와 같이 하는 것이다. 혹은 깨끗한 믿음[淨信]의 장자(長者) 거사(居士) 바라문(婆羅門)한테서 그가 바라는 것대로 합당한 것을 얻지 못하였거나 혹은 그에게 모자란 재물이 있어서 구했는데도 얻지 못했을 때에는 곧바로 억지로 핍박하면서 볶아대고 거친 말로써 심하게 줄 것을 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혹은 그에게 재물이 모자람이 없는데도 하열(下劣)한 것을 얻을 때에는 곧바로 시주(施主)에 대하여 눈 앞[現前]에서 얻었던 재물을 훼손하거나 버리면서 '예끼, 이 남자야. 모 선남자(善男子)와 모 선여인(善女人)은 당신의 족성(族姓)과 재보(財寶)에 견준다면 매우 하열(下劣)하고 매우 가난한데도 이와 같고 이와 같이 많고 좋고 마음에 맞는 여러 가지 자산과 도구를 보시하였
[764 / 829] 쪽
  는데 그대는 그것과 견준다면 족성(族姓)도 존귀하고 재보(財寶)도 풍요로운데, 어찌 이와 같이 하찮고 마음에 맞지 않는 물건만을 베푸는가'라고 이와 같이 말한다. 그는 이와 같이 혹은 속임수와 삿된 거짓말에 의하기도 하고 혹은 거짓으로 그 모양을 나타내기도 하고 괴롭히기도 하고 혹은 이익을 구하는 갖가지 상상(狀相)에 의하여 다른 사람에게서 비법(非法)으로 모든 의복 음식 와구(臥具) 병에 대한 의약과 여러 살림도구[資生具]들을 희구(希求)하면서 정법(正法)으로써는 구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비법(非法)으로써 하기 때문에 설하여 사명(邪命)이라고 이름하며, 이와 같은 것을 시라(尸羅)의 정명이 무너지는 것에 소속된 것[淨命虧損所攝]이라고 이름한다.
  2변에 떨어져 있는 것[墮在二邊]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어떤 사람이 심히 집착하여 극락행(極樂行)의 변(邊)을 수용(受用)하나니, 다른 사람으로부터 법(法) 비법(非法)으로 얻어진 온갖 의복 음식 와구(臥具) 병에 대한 의약과 제 자구(資具)들을 매우 애완(愛玩)하면서 수용(受用하되, 과환(過患)을 관찰할 줄 모르고 출리(出離)를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을 1변(邊)이라고 이름한다.
  다시 한 종류가 있다. 스스로가 고행(苦行)의 변(邊)을 수용(受用)하기를 즐겨 구하니, 한량없는 문(門)으로써 스스로를 괴롭혀서 극한 고초(苦楚)를 받는 것이다. 이른바 가시나무에 의하기도 하고, 혹은 잿더미에 의하기도 하고, 혹은 절구공이에 의하기도 하고, 혹은 나무판자에 의하기도 하고, 혹은 여우같이 쭈그리고 서있기도 하고, 혹은 여우같이 쭈그리고 앉아있기도 하며 요가를 수행하는 것을 끊고, 혹은 다시 불을 섬기니 말하자면 세 번까지 불을 섬기기도 하고, 혹은 물에 올라가니 말하자면 세 번까지 그 물에 올라가기도 하고, 혹은 한 발로 서서 해를 쫓아서 돌기도 하고, 혹은 그 밖의 이와 같은 등의 종류로 스스로 고행(苦行)을 닦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을 제 2변(邊)이다. 이와 같은 것을 2변에 떨어져 있는 것[墮在二邊]이라고 이름한다.
  능히 출리하지 못하는 것[不能出離]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어떤 사람이 계(戒) 금(禁) 견(見)의 집취(執取)에 의해서 '나는 이 계(戒) 금(禁)으로 인하여 청정한 해탈을 얻어서 출리(出離)하게 될 것이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일체 외도(外道)들의 모든 금계(禁戒)는 비록 잘
[765 / 829] 쪽
  방호(防護)하고 비록 잘 청정(淸淨)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그 청정과 같은 것은 출리(出離)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능히 출리하지 못하는 것[不能出離]이라고 이름한다.
  받은 것을 잃는 것[所受失壞]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어떤 사람이 도무지 수치스러움이 없어서 사문(沙門)을 돌아보지 않으며, 정계(淨戒)를 훼범(毁犯)하고 여러 악법(惡法)을 익히며, 안으로 부패(腐敗)를 품고서는 밖으로는 진실한 체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마치 깨끗한 물에서 소생(所生)하는 달팽이가 소라고동 소리를 내며 개가 다니는 것처럼 하는 것과 같다. 진실로 사문(沙門)이 아니면서 스스로 사문(沙門)이라고 지칭하고 진실로 범행(梵行)이 아니면서 스스로 범행(梵行)이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받은 것을 잃는 것[所受失壞]이라고 이름한다.
  간략하게 위와 같이 열 가지 인연 때문에 계(戒)의 무너짐[虧損]이라고 이름한다. 세존께서는 시라(尸羅)의 무너짐[虧損]이라고 설하시기도 하고 혹 때로는 시라(尸羅)의 간난(艱難)이라고 설하시기도 하셨다. 저 여러 가지 인연 중에서는 두 가지 인연, 즉 능히 출리하지 못하는 것과 받은 것을 잃는 것에 의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그 밖의 인연에 의해서도 오직 시라(尸羅)의 무너짐[虧損]을 설하는 것인 줄 알아야만 한다. 이 흑품(黑品)을 안립(安立)하는 인연과 상위하는 백품(白品)의 모든 인연을 설하여 시라(尸羅)의 원만(圓滿) 시라(尸羅)의 청정(淸淨)이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어떤 곳에서21) 세존께서는 시라(尸羅)를 근본(根本)이라고 선설(宣說)하셨으니, 가타(伽他)에서 설한 것과 같다.
  만약 근본(根本)에 잘 머무르면
  그 마음이 곧바로 적정(寂靜)하며
  성견(聖見)과 악견(惡見)의
  상응(相應) 불상응(不相應)에 인하네.
  
21) 이하에서는 계율의(戒律儀)의 여섯 가지 이문(異門)을 해설한다.
[766 / 829] 쪽
  若善住根本  其心便寂靜
  因聖見惡見  相應不相應
  
  어느 곳에서는 세존께서는 시라(尸羅)를 장엄구(莊嚴具)라고 선설(宣說)하셨으니, 가타(伽他)에서 설한 것과 같다.
  
  필추(苾芻) 필추니(苾芻尼)여
  계(戒)의 장엄(莊嚴)을 원만(圓滿)히 하면
  불선(不善)을 능히 버릴 수 있으며
  선(善)을 능히 수습(修習)할 수 있네.
  苾芻苾芻尼  戒莊嚴圓滿
  於不善能捨  於善能修習
  
  어느 곳에서는 세존께서는 시라(尸羅)를 도향(塗香)이라고 선설(宣說)하셨으니, 가타(伽他)에서 설한 것과 같다.
  
  필추(苾芻) 필추니(苾芻尼)여
  계(戒)의 도향(塗香)을 원만(圓滿)히 하면
  불선(不善)을 능히 버릴 수 있으며
  선(善)을 능히 수습(修習)할 수 있네.
  苾芻苾芻尼  戒塗香圓滿
  於不善能捨  於善能修習
  
  어느 곳에서는 세존께서는 시라(尸羅)를 훈향(薰香)이라고 선설(宣說)하셨으니, 가타(伽他)에서 설한 것과 같다.
  아난(阿難)에게 향류(香類)가 있어서
  순풍(順風)에 능히 잘 향내 맡을 수 있고
  역풍(逆風)에도 능히 향내 맡을 수 있으며
  순(順) 역풍[逆]에도 향내 맡을 수 있음 또한 그러하네.
[767 / 829] 쪽
  阿難有香類  順風善能薰
  逆風亦能薰  順逆薰亦爾
  
  어느 곳에서는 세존께서는 시라(尸羅)를 묘행(妙行)이라고 선설(宣說)하셨으니, 가타(伽他)에서 설한 것과 같다.
  
  몸의 묘행(妙行)은 능히 부르니
  가애(可愛)의 제 이숙(異熟)을
  현법(現法)과 미래[當來]에 있어서의
  말의 묘행(妙行) 또한 그러하네.
  身妙行能感  可愛諸異熟
  於現法當來  語妙行亦爾
  
  어느 곳에서는 세존께서는 시라(尸羅)를 율의(律儀)라고 선설(宣說)하셨으니, 가타(伽他)에서 설한 것과 같다.
  
  모든 존재하는 혜시자[惠施主]는
  계를 갖추고[具戒] 율의(律儀)에 머무르며
  아급마(阿笈摩)의 견(見)22)이 있고
  그리고 과(果)의 정견(正見)이 있네.
  諸有惠施主  具戒住律儀
  有阿笈摩見  及有果正見
  다시 어느 곳에서 '구족계[具戒]에 안주하여 별해탈율의[別解律儀]를 능히 잘 수호(守護)한다 내지 …… '라고 말씀하셨다.
   무슨 까닭에 세존께서는 시라(尸羅)를 근본(根本)이라고 선설(宣說)하시는가?
  
22) 아급마(阿笈摩)는 범어 gama의 음사어로서 일반적으로는 아함(阿含)이라고도 음사되며, 또한 전(傳)이라고도 번역된다. 불교의 전(傳)이 흘러오면서 논증(論證)된 정견(正見)을 아급마(阿笈摩)의 견(見)이라고 한다.
[768 / 829] 쪽
   능히 건립(建立)하는 의미[義]와 능히 임지(任持)하는 의미[義]가 근본(根本)의 의미[義]이다. 이 시라(尸羅)에 의하여 일체 세간과 출세간을 건립(建立)하고 임지(任持)하며 무죄(無罪) 최승(最勝) 제 1의 쾌락공덕(快樂功德)을 능히 이끌어 생기게끔 하고 증득하게끔 한다. 이 때문에 시라(尸羅)를 근본(根本)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대지(大地)가 모든 약초와 풀과 나무와 우거진 숲을 건립하고 임지(任持)하여 생기게끔 하고 자라게끔 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시라(尸羅)는 앞에서 자세히 설한 것과 같다.
   무슨 까닭에 세존께서는 시라(尸羅)를 장엄구(莊嚴具)라고 선설(宣說)하시는가?
   그 밖의 여러 세간의 귀걸이 가락지 손목 걸이 팔걸이 그리고 보인(寶印) 금은(金銀)의 화만[鬘] 등의 아리따운 장엄구(莊嚴具)를 만약 어리고[幼稚] 검은머리의 소년인 한창 아름다운 형색(形色)을 이룬 이에게 이것을 입히고 꾸며주면 조금은 아름다움을 더하지만, 썩고 늙고 쇠하여 이가 빠지고 흰머리의 나이가 여든이 넘고 혹은 아흔이 넘은 이에게 이것을 입히고 꾸며주면 아름다움을 성취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광대놀이를 하면서 대중들을 기쁘게 하는 것만은 제외된다. 만약 병들어 괴로워하고 재산과 돈이 없거나 친척의 죽음을 만났을 경우에 그때 이것을 입힌다 하더라도 역시 아름답지 않은 것이다.
  계(戒)의 장엄구(莊嚴具)는 온갖 부류에게 어느 때라도 만약 입히면 모두가 아름답게 된다. 이 때문에 시라(尸羅)를 장엄구(莊嚴具)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무슨 까닭에 세존께서는 시라(尸羅)를 도향(塗香)이라고 선설(宣說)하시는가?
   이 받은 청정(淸淨)하고 죄가 없으며 묘선(妙善)의 시라(尸羅)는 몸과 마음의 타는 듯한 괴로움[熱惱]의 원인이 되는 온갖 받은 악계(惡戒)를 능히 바르게 없애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최고로 폭염이 치성할 때 전단향(栴檀香)과 용뇌향(龍腦香) 등을 바르면 일체의 울화가 모두 다 없어지게 되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시라(尸羅)를 도향(塗香)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769 / 829] 쪽
   무슨 까닭에 세존께서는 시라(尸羅)를 훈향(薰香)이라고 선설(宣說)하시는가?
   계를 갖춘[具戒] 장부(丈夫)인 보특가라(補特伽羅)는 모든 곳[方域]에 두루하며 묘선(妙善)의 칭예(稱譽)칭의 소리가 널리 들리니, 비유하자면 갖가지 뿌리와 줄기의 향(香) 등이 바람에 따라서 날아다니며 모든 곳에 두루 하며 더욱 멀리까지 기분 좋게 향기가 두루 풍기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시라를 훈향(薰香)이라고 이름한다.
   무슨 까닭에 세존께서는 시라(尸羅)를 묘행(妙行)이라고 선설(宣說)하시는가?
   이 시라(尸羅)의 청정(淸淨)하고 착한 행(行)으로 인하여 능히 묘락(妙樂)으로 나아가고 묘한 천취(天趣)에 가며 묘한 안은처[安隱]로 향할 수 있기 때문에 묘행(妙行)이라고 이름한다.
   무슨 까닭에 세존께서는 시라(尸羅)를 율의(律儀)라고 선설(宣說)하시는가?
   이 시라(尸羅)의 청정(淸淨)하고 선(善)한 법(法)은 바로 방호성(防護性)이며, 식제상(息除相)이며, 원리체(遠離體)이기 때문에 율의(律儀)라고 이름한다.
  또한23) 계율의(戒律儀)에는 청정(淸淨)의 인상(因相)을 관하는 세 가지가 있다.
  무엇을 세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신업(身業)을 관(觀)하는 것이며, 둘째는 어업(語業)을 관(觀)하는 것이며, 셋째는 의업(意業)을 관(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제 업(業)을 관찰하여 계율의(戒律儀)로 하여금 모두 청정(淸淨)을 얻게끔 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말하자면 지어야겠다고 희구하고 바로 지으려고 하는 것이다. 신업(身業)을 지을 때에는 다음과 같이 '나의 이 신업(身業)은 능히 자신을 손해 할 수 있고 남을 손해 할 수 있으니, 이 불선성(不善性)은 능히 중고(衆苦)를 일으
  
23) 이하에서는 계율의(戒律儀)의 청정문(淸淨門)을 해설한다.
[770 / 829] 쪽
  키고 고(苦)의 이숙(異熟)을 부를 것인가? 스스로 손해하지도 않고 또한 다른 이도 손해하지도 않으니, 이는 그 선성(善性)으로서 능히 제 낙(樂)을 일으키고 낙(樂)의 이숙(異熟)을 부를 것인가?'라고 관찰한다. 이와 같이 관찰하고 나서 만약 스스로 '나의 이 신업(身業)이 스스로를 손해하고 다른 이를 손해하니, 이는 불선성(不善性)으로 능히 중고(衆苦)를 일으키고 고(苦)의 이숙(異熟)을 부른다'라고 안다면, 곧 이 업(業)에 대해서 거두어서 짓지 않고 또한 짬을 주지 않는다. 만약 스스로 '나의 이 신업(身業)이 자신과 남을 손해하지 않으니, 이것은 그 선성(善性)이다'라고 안다면 나머지 것은 앞에서 설한 것과 같으며, 곧 이 업(業)에 대해서 거두지 않고 짓고 틈을 준다.
  다시 과거에 이미 지었던 신업(身業)에 대해서도 자주 '나의 이 신업(身業)을 관찰하니, 능히 자신을 손해하는 것인가'라고 하며, 나머지 것은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관찰하고 나서 만약 스스로 '나의 신업(身業)은 스스로를 손해하고 남을 손해한다'라고 하고 그 나머지는 앞에서 설한 것과 같이 안다면, 곧바로 지혜가 있고 범행(梵行)을 같이하는 이에게 여실(如實)하게 드러내고 여법(如法)하게 참회하여 없앤다. 만약 스스로 '나의 이 신업(身業)은 자신과 다른 이를 손해하지 않는다'라고 하고 그 나머지는 앞에서 설한 것과 같이 안다면, 곧바로 환희(歡喜)를 일으키고 밤낮으로 안주하면서 자주 자주 수학(修學)한다. 이와 같이 과거 미래 현재세에 지은 신업(身業)에 대해서 능히 잘 관찰하고 능히 잘 청정하게 한다. 신업(身業)에 있어서와 같이 그 어업(語業) 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만 한다.
  과거의 행(行)을 연(緣)으로 하여 의(意)를 일으키고 미래의 행(行)을 연(緣)으로 하여 의(意)를 일으키며 현재의 행(行)을 연(緣)으로 하여 의(意)를 일으키기 때문에, 곧 이 의(意)에 대해서 자주 자주 '나의 이 의업(意業)은 능히 자신을 손해할 수 있는 것인가?'라고 하며, 그 밖의 것은 앞에서 설한 것과 같이 관찰하고, 이와 같이 관찰하고 나서 만약 스스로가 '나의 이 어업(語業)은 그 흑품(黑品)이다'라고 안다면, 곧 이 업을 거두어서 일으키지 않고 그 짬을 주지도 않는다. 만약 스스로 '나의 이 업은 그 백품(白品)이다'라고 안다면, 곧 이 업에 대하여 거두어들이지 않고 일으키면서 짬을 준다. 이와 같이 그 과거 미래 현재세에 일으키는 의업(意業)에 대해서 능히 잘 관찰
[771 / 829] 쪽
  하고 능히 잘 청정(淸淨)하게 한다.
  왜냐 하면 과거 현재 미래세의 모든 사문(沙門)과 바라문(婆羅門)은 신(身) 어(語) 의(意)의 세 가지 업에 대하여 혹은 이미 관찰하였고 혹은 앞으로 관찰할 것이며 혹은 바로 관찰하는 것이며, 혹은 이미 청정히 하였고 혹은 앞으로 청정히 할 것이며 혹은 바로 청정히 하는 것이며, 혹은 이미 많이 머물렀고 혹은 앞으로 많이 머무를 것이며 혹은 바로 많이 머무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체에 대해서 모두 위와 같이 관찰하고 이와 같이 청정히 하였기 때문에 불(佛) 세존(世尊)께서는 장로(長老) 라호라(羅?羅)24)를 위하여 말씀하셨다.
  너 이제 라호라(羅怙羅)야
  신(身) 어(語) 의업(意業)을
  응당 자주 바로 관찰하여
  제 불(佛)의 성교(聖敎)를 염(念)하라.
  汝今羅怙羅  於身語意業
  應數正觀察  念諸佛聖敎
  
  라호라야. 너는 마땅히
  이 사문(沙門)의 업(業)을 배울지니
  만약 이것에 대해서 능히 배우면
  오직 뛰어난 선[勝善]만이 있고 악(惡)이 없으리라.
  
  羅怙羅汝應  學是沙門業
  若能於此學  唯勝善無惡
  
  만약 이와 같이 신(身) 어(語) 의업(意業)에 대하여 자세히 곧바로[審正] 사택(思擇)하면 '모든 이러한 업들은 능히 자신을 손해 할 수 있는 것인가?'라고 하고, 자세한 설명은 앞에서와 같다. 이것을 관찰이라고 이름한다.
  
24) 범어 R hula의 음사어이다. 석존(釋尊)의 아들의 이름이다.
[772 / 829] 쪽
  또한 어떤 부분에서는 거두어서 짓지 않고 또한 짬도 주지 않으며 …… 내지 드러내고 참회하여 없앤다. 다시 어떤 부분에서는 거두어들이지 않고 지으며 또한 짬도 주며 …… 내지 곧바로 환희(歡喜)를 일으키고, 밤낮으로 안주하여 자주 자주 수학(修學)하니, 이것을 청정(淸淨)이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은25) 청정한 시라(尸羅) 율의(律儀)에는 열 가지 공덕(功德)의 뛰어난 이익[勝利]이 있는 줄 알아야만 한다.
  무엇을 열 가지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갖가지 모든 계를 갖춘[具戒] 사부(士夫)인 보특가라(補特伽羅)는 스스로 계(戒)의 청정함을 관찰하여 곧바로 무회(無悔)를 얻으며, 무회(無悔) 때문에 환희로 기쁘기 때문에 기쁨을 일으키고, 마음이 기쁘기 때문에 몸에 경안(輕安)을 얻으며, 몸이 경안(輕安)하기 때문에 곧바로 뛰어난 즐거움[勝樂]을 받고, 즐겁기 때문에 마음이 안정[定]하며, 마음의 안정[定]을 얻기 때문에 능히 여실(如實)히 알고 능히 여실히 보며, 여실히 보기 때문에 곧바로 싫어함[厭]을 능히 일으키고, 능히 싫어함[厭]을 일으키기 때문에 곧바로 이염(離染)을 얻으며, 이염(離染) 때문에 해탈을 증득하고, 해탈을 증득하기 때문에 곧바로 '나는 이미 해탈하였고 내지 나는 능히 무여의열반계(無餘依涅槃界)에 반열반(般涅槃)할 것이다'라고 지견(知見)한다. 이와 같이 모든 계를 갖춘[具戒] 사부(士夫)인 보특가라는 시라(尸羅) 청정의 증상력(增上力) 때문에 무회(無悔)를 획득하고, 점차로 내지 능히 열반(涅槃)에 도달한다. 이것을 첫 번째 시라(尸羅) 율의(律儀)의 공덕(功德)의 뛰어난 이익[勝利]이라고 이름한다.
  다시 그 밖의 계를 갖춘[具戒] 사부(士夫)인 보특가라(補特伽羅)가 있다. 임종(臨終)할 때에 '나는 이미 선(善)의 신(身) 어(語) 의행(意行)을 지었고 나는 악(惡)의 신(身) 어(語) 의행(意行)을 짓지 않았다 내지 …… [廣說] 만약 복업(福業)을 지은 자와 선업(善業)을 지은 자와 능히 여러 가지 포외(怖畏)를 구제(救濟)할 수 있음을 짓는 자가 응당 가야할 곳인 그러한 취(趣)가 있다면 나는 그 취(趣)에 필히 반드시 갈 것이다'라고 이와 같은 염
  
25) 이하에서는 계율의(戒律儀)의 열 가지 승리(勝利)의 공덕(功德)을 설명한다.
[773 / 829] 쪽
  (念)을 일으킨다. 이와 같이 선취(善趣)에 능히 나아가는 두 번째 무회(無悔)를 획득하며, 회(悔) 한(恨)이 없기 때문에 모든 사부(士夫)인 보특가라를 현선(賢善)의 죽음[死] 현선(賢善)의 요절[夭逝] 현선(賢善)의 지나감[過往]이라고 이름한다. 이것을 두 번째 시라(尸羅) 율의(律儀)의 공덕(功德)의 뛰어난 이익[勝利]이라고 이름한다.
  다시 그 밖의 계를 갖춘[具戒] 사부(士夫)인 보특가라(補特伽羅)가 있으니, 두루 제 지역[方域]에 두루하며 묘선(妙善)의 칭예(稱譽)의 소리가 널리 들리는 것이다. 이것을 세 번째 시라(尸羅) 율의(律儀)의 공덕(功德)의 뛰어난 이익[勝利]이라고 이름한다.
  다시 그 밖의 계를 갖춘[具戒] 사부(士夫)인 보특가라(補特伽羅)가 있다. 잠잘 때도 편안하고 깨어서도 편안하여 모든 몸과 마음의 타는 듯한 괴로움[熱惱]을 멀리 여의는 것이다. 이것을 네 번째 시라(尸羅) 율의(律儀)의 공덕(功德)의 뛰어난 이익[勝利]이라고 이름한다.
  다시 그 밖의 계를 갖춘[具戒] 사부(士夫)인 보특가라(補特伽羅)가 있다. 잠을 자거나 깨어있거나 간에 모든 천(天)들이 보호하는 것이다. 이것을 다섯 번째 시라(尸羅) 율의(律儀)의 공덕(功德)의 뛰어난 이익[勝利]이라고 이름한다.
  다시 그 밖의 계를 갖춘[具戒] 사부(士夫)인 보특가라(補特伽羅)가 있다. 다른 사람의 흉폭함에 대하여 그 악함을 염려하지 않고, 여러 가지 포외(怖畏)가 없으며, 마음에 놀람과 두려움을 여의는 것이다. 이것을 여섯 번째 시라(尸羅) 율의(律儀)의 공덕(功德)의 뛰어난 이익[勝利]이라고 이름한다.
  다시 그 밖의 계를 갖춘[具戒] 사부(士夫)인 보특가라(補特伽羅)가 있다. 살생을 좋아하는 자들과 원수 악우(惡友)들이 비록 그 틈을 얻을지라도 역시 언제나 보호하며 '이 사람은 바로 계를 갖춘[具戒] 사부(士夫)인 보특가라이다'라고 분명히 알고서 혹은 선우(善友)가 되기도 하고 그 중간[中平]에 머무르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을 일곱 번째 시라(尸羅) 율의(律儀)의 공덕(功德)의 뛰어난 이익[勝利]이라고 이름한다.
  다시 그 밖의 계를 갖춘[具戒] 사부(士夫)인 보특가라(補特伽羅)가 있다. 시라(尸羅)를 갖춘 증상력(增上力) 때문에 일체의 도깨비[魍魎] 야차(藥
[774 / 829] 쪽
  叉) 택신(宅神) 비인(非人)의 무리들이 비록 그 짬을 얻고 비록 그 틈을 얻는다 하더라도 언제나 보호하는 것이다. 이것을 여덟 번째 시라(尸羅) 율의(律儀)의 공덕(功德)의 뛰어난 이익[勝利]이라고 이름한다.
  다시 그 밖의 계를 갖춘[具戒] 사부(士夫)인 보특가라(補特伽羅)가 있다. 법(法)의 어려움[艱難]이 없어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갖가지 이득[利養], 즉 의복 음식 와구(臥具) 병에 대한 의약 제 자구(資具)를 획득하게 되며, 시라(尸羅) 증상(增上)의 인력(因力)때문에 국왕 대신과 여러 백성들과 재물이 넉넉한 장자(長者)와 상주(商主)들에게 공경받고 존중받는 것이다. 이것을 아홉 번째 시라(尸羅) 율의(律儀)의 공덕(功德)의 뛰어난 이익[勝利]이라고 이름한다.
  다시 그 밖의 계를 갖춘[具戒] 사부(士夫)인 보특가라(補特伽羅)가 있다. 일체의 원하는 것을 모두 다 그에 맞게 얻는 것이다. 만약 욕계(欲界)의 찰제리(刹帝利)의 대족성(大族姓)의 집안이나 혹은 바라문(婆羅門)의 대족성(大族姓)의 집안이나 혹은 여러 거사(居士)의 대족성(大族姓)의 집안이나 혹은 여러 장자(長者)의 대족성(大族姓)의 집안이나 혹은 4대왕중천(大王衆天)이나 혹은 33천(天)이나 혹은 야마천(夜摩天)이나 혹은 도사다천(覩史多天)이나 혹은 화락천(化樂天)이나 혹은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중동분(衆同分)에 태어나길 원하면 계율(戒律)이 청정하기 때문에 곧 이욕(離欲)을 얻고 소원대로 왕생(往生)을 얻는다.
  만약 다시 여러 정려(靜慮)에 들어가 현법락주(現法樂住)하거나 혹은 유색천(有色天)의 중동분(衆同分) 가운데에 머무르거나 태어나려고 원하면 계율이 청정하기 때문에 곧바로 이욕(離欲)을 얻고 소원대로 모두 다 이룬다.
  만약 다시 적정(寂靜)의 승해(勝解)를 원하면 색계[色]의 정(定)을 뛰어 넘어 무색정(無色定)에 들어서 구족(具足)하게 안주하며, 혹은 무색천(無色天)의 중동분(衆同分)에 왕생(往生)을 얻게 되나니, 나머지 것은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 만약 다시 최극(最極)의 구경열반(究竟涅槃)을 증득하길 원하면 계율이 청정하기 때문에 곧바로 일체의 구경(究竟)의 이욕(離欲)을 증득한다. 이것을 열 번째 시라(尸羅) 율의(律儀)의 공덕(功德)의 뛰어난 이익[勝利]이라고 이름한다.
[775 / 829] 쪽
  이와 같이 이미 계온(戒蘊)을 설명하면서 자세하게 계온(戒蘊)의 무너짐[虧損]과 계온(戒蘊)의 원만(圓滿)과 계온(戒蘊)의 이문(異門)과 계온(戒蘊)의 관찰(觀察) 및 청정(淸淨) 계온(戒蘊)의 모든 공덕(功德)의 뛰어난 이익[勝利]을 말하였다. 여기에서 선설(宣說)한 것은 일체종상(一切種相)의 최극원만(最極圓滿)한 자량(資糧)에 포함되는 시라(尸羅) 율의(律儀)를 명료(明了)하게 개시(開示)한 것이다. 만약 스스로 사문성(沙門性)과 바라문성(婆羅門性)을 애락(愛樂)하는 선남자(善男子)가 있다면 응당 부지런히 수학(修學)해야 한다.
 

'經典 >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가사지론 제 24 권  (0) 2007.12.24
유가사지론 제 23 권  (0) 2007.12.24
유가사지론 제 21 권  (0) 2007.12.24
유가사지론 제 20 권  (0) 2007.12.24
유가사지론 제 19 권  (0) 2007.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