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유가사지론 제 24 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4.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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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사지론 제 24 권
  
  
  미륵보살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강명희 번역
  
  
  10) 성문지 ④
  
  (3) 초유가처 출리지(出離地) ③
  다음으로1) 초야(初夜)와 후야(後夜)에 항상 부지런히 각오(覺寤)의 유가(瑜伽)를 닦는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초야(初夜)라고 하며, 무엇을 후야(後夜)라고 하며, 무엇을 각오(覺寤)의 유가(瑜伽)라고 하며, 무엇을 항상 부지런히 각오(覺寤)의 유가(瑜伽)를 수습(修習)한다고 하는가?
  초야(初夜)라고 하는 것은 밤을 4등분2)한 가운데에 처음의 부분을 지나고
  
1) 자원만(自圓滿) 타원만(他圓滿) 선법욕(善法欲) 계율의(戒律儀) 근율의(根律儀) 음식에 대하여 그 양을 아는 것 항상 깨어 있으면서 유가(瑜伽)를 닦는 것 바르게 알면서[正知] 머무르는 것 선우성[善友性] 정법(正法)을 듣는 것 정법(正法)을 생각[思]하는 것 장애(障礙)가 없는 것 혜사(惠捨)를 닦는 것 사문(沙門)의 장엄(莊嚴)의 14가지의 세 출세간의 자량(資糧) 가운데에 이하는 항상 깨어 있으면서 유가(瑜伽)를 닦는 것에 대하여 설명한다. 항상 깨어 있으면서 유가(瑜伽)를 닦는 것은 초야(初夜)와 후야(後夜)와 각오(覺寤)의 유가(瑜伽)와 부지런히 깨어 있으면서[覺寤] 유가(瑜伽)를 닦는 것의 네 가지로 나누어서 해석된다. 첫 번째는 자세히 해석[廣釋]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약의(略義)를 밝히는 것이며, 세 번째는 광(廣) 약(略)에 대해서 결론을 맺는 것이다. 이하는 그 첫 번째로 위의 네 가지에 대하여 거론하고 자세히 해석[廣釋]한다.
2) 인도의 세속법에서는 밤낮을 각각 4등분하고, 부처님 법에서는 밤낮을 각각 3등분하는데, 지금 여기에서는 세속법에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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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으면 밤의 초분(初分)이라고 하며, 후야(後夜)라고 하는 것은 밤을 4등분한 가운데에서 마지막 부분을 지나고 있으면 밤의 후분(後分)이라고 한다. 각오(覺寤)의 유가(瑜伽)란 말한 것과 같이 낮[晝日分]에는 경행(經行)과 연좌(宴坐)로서 순장법(順障法)을 쫓아서 그 마음을 깨끗이 닦으며, 초저녁[初夜分]에는 경행(經行)과 연좌(宴坐)로서 순장법(順障法)을 쫓아서 그 마음을 깨끗이 닦고 마음을 깨끗이 닦은 뒤에는 머무르는 곳[住處]으로부터 밖으로 나와서 그 발을 씻고는 도로 머무르는 곳으로 들어가서 두 발을 포개고서 오른쪽 옆구리를 대고 눕되 광명상(光明想)에 머무르며 정념(正念) 정지(正知)로 사유(思惟)하여 상(想)을 일으키고 방편(方便)으로 눕는 것이다. 새벽[夜後分]이 되면 빨리 깨어나[覺寤] 경행(經行)과 연좌(宴坐)로서 순장법(順障法)을 쫓아서 그 마음을 깨끗이 닦는 것이다.
  항상 부지런히 각오(覺寤)의 유가(瑜伽)를 수습(修習)한다는 것은 어떤 한 세존(世尊)의 제자(弟子)가 각오(覺寤)의 유가법(瑜伽法)을 청문(聽聞)한 뒤에 기꺼이 수학(修學)하려 하면서 곧 다음과 같은 각오(覺寤)의 유가(瑜伽)에 의지하여 다음과 같이 '나는 부처님께서 허락하신 각오(覺寤)의 유가(瑜伽)를 성취[成辦]하겠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욕락(欲樂)을 일으켜서 정진(精進)하고 수고[勤劬]하면서 뛰어나고 용맹한 세력을 일으켜서 세차고 결정적으로 제복(制伏)하지 않으면서 그 마음을 책려(策勵)하여 끊임없이[無間] 상속(相續)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에 낮[晝日分]에는 경행(經行)과 연좌(宴坐)로서 순장법(順障法)을 쫓아서 그 마음을 깨끗이 닦는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낮[晝日]이라 함은 해가 뜨는 때로부터 해가 지는 때까지를 말하며, 경행(經行)이라 함은 넓이와 길이가 그 도량(度量)에 알맞게 정해진 어떤 지역의 방소(方所)3)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상응하는 신업(身業)을 말하며, 연좌(宴坐)라 함은 어떤 사람이 큰 상(床)이나 작은 승상(繩床)이나 혹은 풀과 잎사귀로 만든 자리[草葉座]에서 결가부좌하고 몸을 단정히 하고서 바른 서원[正願]으로 배념(背念)4)에 안주하는 것을 말한다. 장애[障]라고 말하는 것은 다
  
3) 공간의 일부를 점하는 장소를 의미한다.
4) 생사(生死)의 마음에 반하여 열반의 염(念)에 안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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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섯 가지의 개[五種蓋]를 말하며, 순장법(順障法)이라 함은 능히 개(蓋)를 끌어서 개법(蓋法)을 따르는 것이다.
  무엇을 5개(蓋)라고 하는가?
  탐욕개(貪欲蓋) 진에개(瞋恚蓋) 혼침수면개(惛沈睡眠蓋) 도거악작개(掉擧惡作蓋) 및 의개(疑蓋)를 말한다.
  무엇을 순장법(順障法)이라고 하는가?
  정묘상(淨妙相)과 진에상(瞋恚相)과 흑암상(黑闇相)과 친척 국토가 죽지 않는다는 심사[親屬國土不死尋思]와 옛날에 웃고 놀며 희락(喜樂)하고 받들어 섬긴[承事] 수념(隨念)과 3세(世)를 추억하고 혹은 3세(世)의 비리법(非理法)을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경행(經行)할 때에는 몇 가지의 장법(障法)에 따라서 그 마음을 깨끗이 닦으며, 어떻게 그것을 쫓아서 그 마음을 깨끗이 닦는 것인가?
   혼침수면개(惛沈睡眠蓋)와 능히 혼침수면(惛沈睡眠)을 끄는 장법(障法)을 쫓아서 그 마음을 깨끗이 닦는 것이다.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서 광명상(光明想)을 선교(善巧)로 간절하게 잘 붙잡고 잘 생각하고 잘 알고 잘 통달하여, 밝음과 함께 있는 마음[有明俱心]과 빛과 함께 있는 마음[有光俱心]을 지니고 어떤 경우에는 가려진 곳[屛處]에서, 어떤 경우에는 드러난 곳[露處]에서 왔다 갔다 하며 경행(經行)하는 것이다. 경행할 때에는 연(緣)에 따라서 일종의 정묘(淨妙)한 경계가 극히 잘 시현(示現)하여 그 마음을 권도(勸導)하고 찬려(讚勵)하고 경위(慶慰)하는 것이다. 불(佛)을 염(念)하거나 법(法) 승(僧) 계(戒) 사(捨)를 염(念)하기도 하며 혹은 다시 천(天)을 염(念)하기도 하며, 혹은 혼침(惛沈) 수면(睡眠)의 과환(過患)을 선설(宣說)하신 것과 상응하는 모든 정법(正法)을 염(念)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 법에서는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서 무량문(無量門)으로 혼침(惛沈) 수면(睡眠)의 모든 과실(過失)을 가책(訶責)하고 헐뜯으며 무량문(無量門)으로서 혼침(惛沈) 수면(睡眠)을 영원히 끊는 공덕(功德)을 칭양(稱揚)하고 칭탄(稱歎)하나니, 소위 계경(契經) 응송(應頌) 기별(記別) 풍송(諷誦) 자설(自說) 인연(因緣) 비유(譬喩) 본사(本事) 본생(本生) 방광(方廣) 희법(希法) 및 논의(論議)이다. 그것5)을 제거하기 위해서 이 정법(正法)을 청문(聽聞)하고 수지(受
  
5) 혼침(惛沈) 수면개(睡眠蓋)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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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持)하고 큰 음성으로 읽거나 외며, 다른 사람을 위하여 그 이치[義]를 개시(開示)하고 사유(思惟)하며 칭양(稱量)하고 관찰하며, 혹은 방향[方隅]을 관찰하기도 하고, 혹은 별과 달의 여러 별자리가 가는 법도[宿道度]를 관찰하기도 하고, 혹은 냉수로서 얼굴을 씻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 인하여 혼침(惛沈) 수면(睡眠)의 전개(纏蓋)6)를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은 생기지 않게 하고 이미 생긴 것은 제거해 버리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편으로 순장법(順障法)을 쫓아서 그 마음을 깨끗이 닦는 것이다.
   연좌(宴坐)할 때에는 몇 가지의 장법(障法)을 쫓아서 그 마음을 깨끗이 닦으며, 어떻게 그것을 쫓으면서 그 마음을 깨끗이 닦는 것인가?
   네 가지 장법(障法)을 쫓아서 그 마음을 깨끗이 닦는 것이니, 탐욕(貪欲) 진에(瞋恚) 도거악작(掉擧惡作) 의(疑)의 개(蓋)와 능히 그 법을 이끌어서 그 마음을 깨끗이 닦는 것이다. 이미 생긴 탐욕(貪欲)의 전개(纏蓋)를 속히 제거해 버리기 위하여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는 것을 매우 원리(遠離)하기 위해서, 결가부좌하고 몸을 단정히 하고 바른 서원[正願]으로서 배념(背念)에 안주하기도 하고, 혹은 푸른 어혈[靑瘀]을 관찰하기도 하고, 혹은 피고름이 흐르면서 문드러지는 것[膿爛]을 관찰하기도 하고, 혹은 변하여 무너지는 것[變壞]을 관찰하기도 하고, 혹은 종기가 나서 부풀어오르는 것[ 脹]을 관찰하기도 하고, 혹은 씹어먹는 것[食噉]을 관찰하기도 하고, 혹은 피가 흐르는 것[血塗]을 관찰하기도 하고, 혹은 그 뼈[骨]를 관찰하기도 하고, 그 고리[鎖]를 관찰하기도 하고, 혹은 그 골쇄(骨鎖)를 관찰하기도 하고, 혹은 하나 하나의 현선(賢善)의 정상(定相)에 대하여 작의(作意)하고 사유(思惟)하기도 하고, 혹은 탐욕의 과환(過患)을 선설(宣說)하는 정법(正法)에 상응하는 것에 대하여 하는 것이다. 이 법에서는 탐욕을 끊기 위해서 무량문(無量門)으로서 욕탐(欲貪)과 욕애(欲愛)와 욕장(欲藏)과 욕호
  
6) 전(纏)은 번뇌의 이명(異名)으로서 사람의 심신(心身)에 달라붙어 자재롭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부터 붙여진 이름이다. 무참(無恚) 무괴(無愧) 질(嫉) 간(慳) 회(悔) 면(眠) 도거(掉擧) 혼침(惛沈)을 8전(纏)이라고 하며, 염(念) 부(覆)를 더하여 10전(纏)이라고 한다. 개(蓋)도 번뇌의 이명(異名)으로서 마음을 덮어 장애가 되는 번뇌를 말한다. 보통 5개(蓋)로서 설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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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欲護)와 욕착(欲著)의 과실을 가책(訶責)하고 헐뜯으며 무량문(無量門)으로서 일체의 탐욕을 영원히 끊는 공덕을 칭양(稱揚)하고 칭탄(稱歎)한다. 소위 계경(契經) 응송(應頌) 기별(記別) …… [廣說]으로서 한다.
  탐욕을 끊기 위해서 이 정법(正法)을 청문(聽聞)하고 수지(受持)하여 말에 대해서 잘 통리(通利)7) 뜻에 대해서 잘 심사(尋思)하며 견(見)에 대해서 잘 통달(通達)하니, 곧 이 법에 대해서 이와 같이 연좌(宴坐)하여 여리(如理)하게 사유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연에 의해서 아직 생겨나지 않은 탐욕(貪欲纏)의 전개(纏蓋)가 생겨나지 않게 하고 이미 생겨났으면 제거해 버리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편으로 순장법(順障法)을 쫓아서 그 마음을 깨끗이 닦는 것이다.
  진에개(瞋恚蓋)의 법(法)에 차별이 있으니, 이와 같이 연좌(宴坐)하여 자비와 함께하는 마음[慈俱心]으로서 원수도 없고 적도 없고 해침도 없고 괴롭힘도 없어서 광대하고 무량(無量)한 극선(極善)을 수습하며 한편에서 승해(勝解)를 일으키어 구족하고 안주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제 2와 이와 같이 제 3과 이와 같이 제 4의 위[上] 아래[下]와 옆[傍]으로 퍼뜨리면서 모든 무변(無邊)의 세계에 두루하게 승해(勝解)를 일으키어 구족하고 안주하는 것이다. 나머지 것은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
  도거악작개(掉擧惡作蓋)의 법(法)에 차별이 있으니, 이와 같이 연좌(宴坐)하여 마음을 안으로 머물도록 하여 일취(一趣)8)를 성취[成辦]하고 삼마지(三摩地)를 얻는 것이다. 나머지 것은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
  의개(疑蓋)의 법(法)에 차별이 있으니, 이와 같이 연좌(宴坐)하여 과거세(過去世)에 대하여 도리에 맞지 않는 작의[不如理作意]와 사유(思惟)를 하지 않으며, 미래세(未來世)에 있어서, 그리고 현재세(現在世)에 있어서도 도리에 맞지 않는 작의와 사유를 하지 않는 것이다. 즉 '나는 과거에 일찍이 있었을까? 일찍이 없었을까? 나는 과거에 일찍이 어떤 것으로 있었을까? 어떻게 일찍이 있었을까? 나는 미래에 무엇으로 있게 될 것인가? 어떻게 있게 될 것인가? 나는 현재에 어떤 것을 갖게 될 것인가? 어떻게 있는가? 이제 이 유정(有情)은 어느 곳으로부터 왔고 여기에서 죽고 나면 어느 곳으로 갈까?'
  
7) 대상에 통하여 막힘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8)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몰입하는 심일취성(心一趣性)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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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고 하는 이와 같은 등의 정리에 맞지 않는 작의[不如正理作意]와 사유(思惟)를 응당 곧바로 원리(遠離)해야 한다. 도리에 맞게[如理] 과거 미래 현재세를 사유하되, 유법(有法)만을 보고 유사(有事)만을 보고서 있으면 있는 것이라고 알고 없으면 없는 것이라고 알며, 오직 유인(有因)만을 관찰하고 오직 유과(有果)만을 관찰하면서, 실제로 없는 현상[無事]에 대해서는 증익(增益)하지 않으며 실제로 있는 현상[有事]에 대해서는 훼방(毁謗)하지 않으며, 그 실유(實有)에 대해서 실유(實有)를 분명하게 아는 것이다. 말하자면 무상(無常) 고(苦) 공(空) 무아(無我)의 온갖 법에 대해서 무상(無常) 고(苦) 공(空) 무아(無我)를 분명히 아는 것이다. 능히 이와 같이 여리(如理)하게 사유하기 때문에 곧바로 불(佛)한테 미혹[惑]이 없고 의심[疑]이 없는 것이다. 나머지 것은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 법(法)과 승(僧)에 대해서 그리고 고(苦) 집(集) 멸(滅) 도(道)에 대하여 그리고 인(因)과 인(因)에서 생기는 제 법(法)에 대해서도 미혹이 없고 의심이 없는 것이다. 나머지 것은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
  또한 진에개(瞋恚蓋)에 대해서는 마땅히 다음과 같은 설(說)을 지어야만 한다. '진에(瞋恚)와 진에상(瞋恚相)을 끊기 위해서 이 정법(正法)을 청문(聽聞)하고 수지(受持)하고 …… [廣說]'라고 하는 것이다. 도거악작개(掉擧惡作蓋)에 대해서는 마땅히 다음과 같은 설(說)을 지어야만 한다. '도거악작(掉擧惡作)과 그것에 따르는 법을 끊기 위해서 이 정법(正法)을 청문(聽聞)하고 수지(受持)하며 ……[廣說]'라고 하는 것이다. 그 의개(疑蓋)에 대해서는 마땅히 다음과 같은 설(說)을 지어야만 한다. '의개(疑蓋)와 그것에 따르는 법을 끊기 위해서 이 정법(正法)을 청문(聽聞)하고 수지(受持)하며 내지 ……'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편으로 탐욕(貪欲) 진에(瞋恚) 혼침수면(惛沈睡眠) 도거악작(掉擧惡作) 의(疑)의 개(蓋)와 그것에 따르는 법을 쫓아서 그 마음을 깨끗이 닦는다. 이 때문에 경행(經行)과 연좌(宴坐)로 순장법(順障法)을 쫓아서 그 마음을 깨끗이 닦는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미 법의 증상(增上)에 의하여 순장법(順障法)을 쫓아서 그 마음을 깨끗이 닦는 것을 설명하였으며, 다시 자신의 증상[自增上]과 세간의 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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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世增上]에 의하여 순장법(順障法)을 쫓아 그 마음을 깨끗이 닦는 것이 있다.
  무엇을 자신의 증상[自增上]에 의한다고 하는가?
  어떤 사람이 여러 개(蓋) 중에서 어떤 한 가지가 일어남에 따라서 곧바로 스스로 이것은 선법(善法)이 아님을 분명히 알고서, 생겨난 개(蓋)에 대하여 굳게 집착하지 않고 빨리 빨리 버리고 내쫓고 뱉어버리며 또한 능히 스스로가 '이 생겨난 개(蓋)는 매우 수치스러울만하고 마음을 물들이고 괴롭게 하며 지혜[慧]를 약하게 하기 때문에 이는 손해품(損害品)이다'고 관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자신의 증상[自增上]에 의하여 순장법(順障法)을 쫓아 그 마음을 깨끗이 닦는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무엇을 세간의 증상[世增上]에 의하여 순장법(順障法)을 쫓아 그 마음을 깨끗이 닦는다고 하는가?
  어떤 사람이 여러 개(蓋) 중에서 한 가지가 이미 생겼거나 혹은 앞으로 생겨나려고 할 때에는 곧바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다. 즉 '나는 만약 아직 생겨나지 않은 개(蓋)를 일으킨다면 당연히 대사(大師)에게 꾸지람을 받게 될 것이며 또한 여러 천(天)과 여러 지혜가 있고 같이 범행(梵行)을 닦는 사람에게 법으로써 경멸[輕毁]받게 되리라'고 한다. 그는 이와 같이 세간의 증상에 의하기 때문에 아직 생기지 않은 여러 가지 개(蓋)를 능히 생겨나지 않도록 하며 이미 생겨난 여러 가지 개(蓋)를 능히 빨리 버리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세간의 증상[世增上]에 의하여 순장법(順障法)을 쫓아 그 마음을 깨끗이 닦는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여러 와구(臥具)를 호지(護持)하기 위하여 세간의 위의[儀]에 따르기 때문에 초저녁[夜初分]이 다하도록 경행(經行)하고 연좌(宴坐)하면서 순장법(順障法)을 쫓아서 그 마음을 깨끗이 닦는 것이다. 순장법(順障法)을 쫓아서 그 마음을 깨끗이 닦은 뒤에는 머무르는 곳[住處]으로부터 밖으로 나와서 그 발을 씻고 발을 씻은 뒤에는 도로 머무르는 곳으로 들어가서 법다이 누워 자며, 누워 자면서 대종(大種)을 장양(長養)하며 증장(增長)하게 된 뒤에는 그 몸이 자라고 늘기 때문에 더욱 세력이 있어서 끊임없이 언제나 선품(善品)의 가행(加行)을 자세히 하는 데에 수순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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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까닭[因緣]에 오른쪽 옆구리를 대고 눕는 것인가?
   사자왕(獅子王)의 법과 비슷하기[相似] 때문이다.
   어떤 법이 비슷한 것인가?
   사자왕은 모든 짐승 중에서 세차고 용맹스러움이 가장 최고인 것처럼, 비구(比丘)도 또한 그러하여, 항상 각오(覺寤)의 유가(瑜伽)를 수습(修習)함에 부지런히 정진(精進)을 일으키고 세차고 용맹스러움에 있어서 가장 최고이다. 이런 까닭에 사자왕의 눕는 법과 비슷하며, 그 밖의 아귀가 눕고 천(天)이 눕고 탐욕을 받는 사람[受欲者]이 눕는 것과는 같지 않다. 그들은 온갖 것에 난타(嬾墮) 해태(懈怠)하고 하열(下劣)하여 정진(精進)하는 세력이 박약(薄弱)하기 때문이다. 또한 법으로도 응당 그러하다. 사자왕과 같이 오른쪽 옆구리를 대고 누우면, 이와 같이 하여 누울 때에는 몸은 들뜨거나 산란함이 없고 기억은 망실(忘失)되지 않고 잠은 깊이 들지 않고 악몽을 꾸지 않는다. 이것과 달리 눕는 것은 이것과 상위(相違)하므로 온갖 과실(過失)이 갖추어지게 되는 줄 알아야만 한다. 이 때문에 그 두 발을 포개어 오른쪽 옆구리를 대고 누우라고 말하는 것이다.
  무엇을 광명상(光明想)에 머물러 선교방편[巧便]으로 눕는다고 하는가?
  광명상(光明想)을 선교(善巧)로 간절히 잘 붙잡고 잘 생각하고 잘 알고 잘 통달하여 제 천(天)의 광명(光明)을 사유하는 것과 함께하는 마음의 선교방편[巧便]으로 누워 자는 것이다. 이 인연 때문에 비록 다시 누워서 잔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혼매[惛闇]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것을 광명상(光明想)에 머무르면서 선교방편으로 누워 잔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무엇을 정념(正念)의 선교방편[巧便]으로 누워 잔다고 하는가?
  만약 제 법(法)에 대해서 이미 들었고 이미 생각하였고 이미 익혔고 수습한 체성(體性)이라면 이는 잘 의리(義利)를 이끌며, 정념(正念)에 의하기 때문에 내지 꿈에서까지도 언제나 따라 구르며[隨轉], 정념(正念)에 의하기 때문에 꿈속에서도 언제나 기억하여, 그 법상(法相)을 분명히 현전(現前)하게 하기 때문에 곧 그 법에 대하여 마음은 자주 따라 관하며[隨觀] 정념(正念)하기 때문에 그 염하는 것[所念]에 따라서 어떤 경우는 선심(善心)으로 자고 어떤 경우는 무기심(無記心)으로 자는 것이다. 이것을 정념(正念)의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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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편[巧便]으로 누워 잔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무엇을 정지(正知)의 선교방편[巧便]으로 누워 잔다고 하는가?
  정념(正念)에 의하여 누워 잘 때에 만약 어떤 하나의 번뇌가 현전(現前)하여 그 마음을 물들이고 괴롭히면, 그 번뇌가 바로 일어날 때에 능히 바로 각료(覺了)하여 굳게 집착하지 않도록 하고 빨리 버리며 통달하고 나서는 마음으로 하여금 전환(轉還)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정지(正知)의 선교방편[巧便]으로 누워 잔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무엇을 사유기상(思惟起想)에 의하여 선교방편[巧便]으로 누워 잔다고 하는가?
  정진(精進)으로써 그 마음을 책려(策勵)하고 그런 뒤에야 누워 자며, 누워 잘 때에는 때때로 깨어나 있는 것[覺寤]이다. 마치 숲과 들의 사슴이 마땅히 그 마음을 모두 놓쳐 버리지 않고서 잠을 수순하고 취향(趣向)하고 임입(臨入)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다시 다음과 같이 '나는 이제 제 불(佛)께서 허락하신 각오(覺寤)의 유가(瑜伽)를 모두 다 구족하고 성취[成辦]해야겠다. 성취하기 위해서 응당 힘써 부지런히 하고 가장 뛰어나고 짙고 두터운 가행(加行)의 욕락(欲樂)에 머물러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 다음과 같이 '나는 이제 각오(覺寤)의 유가(瑜伽)를 닦기 위해서 부지런한 정진(精進)을 곧바로 일으켜서 머물러야겠다. 여러 선법(善法)을 수습하고자 하기 때문에 곧바로 부지런하 정진을 일으켜서 머물러야겠다. 여러 선법(善法)을 수습하고자 하기 때문에 응당 곧바로 정근을 돌려서 여러 난타(嬾墮)를 여의고, 일어남[起發]을 구족하며 오늘밤을 지나고 내일 아침이 되면 배로 더 부지런한 정진(精進)에 일으켜서 머무르며 일으킴을 구족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여기에서는 첫 번째의 사유기상(思惟起想)에 의하여 깊은 수면이 없어서 응당 일어날 때에는 빨리 일어날 수 있어서 마침내 때를 넘기지 않고 비로소 깨어나며, 두 번째의 사유기상(思惟起想)에 의하여 능히 제 불(佛)께서 공히 허락하신 사자왕(獅子王)처럼 눕는 것에 여법(如法)하게 눕되, 증감(增減)이 없으며, 세 번째의 사유기상(思惟起想)에 의하여 선(善)의 욕락(欲樂)을 언제나 그만둠이 없게 하며 비록 실념(失念)하더라도 능히 나중에 전전(展轉)하며 수학(受學)하여 단절함이 없도록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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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사유기상(思惟起想)에 의하여 선교방편[巧便]으로 누워 잔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무엇을 새벽[夜後分]이 되도록 깨어 있으면서[覺寤] 경행(經行)과 연좌(宴坐)로서 순장법(順障法)을 쫓아서 그 마음을 깨끗이 닦는 것이라고 하는가?
  새벽[夜後分]이라고 하는 것은 밤을 4등분한 가운데에서 맨 마지막 부분을 지나고 있는 것을 새벽[夜後分]이라고 이름한다. 그는 이와 같이 광명상(光明想)에 머무르고 정념(正念) 정지(正知)하고 사유기상(思惟起想)에 의하여 선교방편[巧便]으로 누워 자기 때문에, 밤 동안에 밤을 4등분한 한 부분을 지나치면서 바로 수면(睡眠)을 익히며, 일어날 때에는 몸에 감능(堪能)이 있어서 때에 맞게 일어나며, 상품(上品)의 혼침수면(惛沈睡眠)의 전(纏)에 의하여 제복(制伏)받지 않아서 막 일어나려고 할 때에 암둔(闇鈍) 박약(薄弱) 난타(嬾墮) 해태(懈怠)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암둔(闇鈍) 박약(薄弱) 난타(嬾墮) 해태(懈怠)가 없기 때문에 잠깐동안 작의(作意)할 때 어려움[艱難]이 없으며 빠르게 일어날 수 있어서 여러 장법(障法)을 쫓아 마음을 깨끗이 닦으니, 앞에서와 같이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이와 같이 초야(初夜)와 후야(後夜)에 항상 부지런히 각오(覺寤)의 유가(瑜伽)를 닦는 것에 대한 자세한 설명[廣辯]을 마쳤다.
  다시9) 어떻게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를 아는가?
  항상 부지런히 각오(覺寤)의 유가(瑜伽)를 수습(修習)하는 모든 사부(士夫)인 보특가라에게는 간략하게 네 가지의 바른 소작사[正所作事]가 있는 것이다.
  무엇을 네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내지 깨어 있으면서 항상 닦아야 할 선품(善品)을 버리지 않고, 끊임없이[無間] 항상 자세하게[常委] 선법(善法)을 닦는 가운데에 용맹정진(勇
  
9) 항상 깨어 있으면서[覺寤] 유가(瑜伽)를 닦는 것 가운데 두 번째로 약의(略義)를 밝힌다. 약의(略義)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네 가지 바른 소작사[正所作事]를 밝히는 것이고, 둘째는 앞의 광문(廣門)을 인용하여 차제(次第)로 묻는 것이다. 이하는 그 첫 번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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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猛精進)하는 것이다. 둘째는 때에 맞춰 눕고 때에 맞지 않을 때[非時]는 눕지 않는 것이다. 셋째는 염오가 없는 마음[不染汚心]으로 수면(睡眠)을 익히고 염오심(染汚心)으로는 익히지 않는 것이다. 넷째는 때에 맞게 깨어 있으면서 일어나는 데에 때를 놓치지 않는 것이다. 이를 네 가지의 항상 부지런히 각오(覺寤)의 유가를 수습하는 모든 사부(士夫)인 보특가라(補特伽羅)의 바른 소작사[正所作事]라고 이름한다. 이 네 가지의 바른 소작사에 의하여 제 불(佛) 세존(世尊)께서는 성문중(聲聞衆)을 위하여 각오(覺寤)의 유가(瑜伽)를 수습할 것을 선설(宣說)하신 것이다.
  무엇을10) 선설(宣說)하셨다고 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낮[晝日分]에는 경행(經行)과 연좌(宴坐)로 순장법(順障法)을 쫓아서 그 마음을 깨끗이 닦고 초저녁[初夜分]에는 경행(經行)과 연좌(宴坐)로서 순장법(順障法)을 쫓아서 그 마음을 깨끗이 닦는다'고 하는 이 말에 의하여 첫 번째의 바른 소작사[正所作事]를 선설(宣說)하신 것이다. 말하자면 '내지 깨어 있으면서 항상 닦아야 할 선품(善品)을 버리지 않고 끊임없이[無間] 항상 자세하게[常委] 선법(善法)을 닦는 가운데에 용맹정진(勇猛精進)하는 것이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다시 '머무르는 곳[住處]으로부터 밖으로 나와서 그 발을 씻고는 도로 머무르는 곳으로 들어가서 두 발을 포개고서 오른쪽 옆구리를 대고 눕는다'고 하는 이 말에 의하여 두 번째의 바른 소작사[正所作事]를 선설(宣說)하신 것이다. 말하자면 '때에 맞춰 눕고 때에 맞지 않을 때[非時]는 눕지 않는 것이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다시 '광명상(光明想)에 머무르며 정념(正念) 정지(正知)로 사유기상(思惟起想)을 방편(方便)으로 눕는 것이다'고 하는 이 말에 의하여 세 번째의 바른 소작사[正所作事]를 선설(宣說)하신 것이다. 말하자면 '염오가 없는 마음[不染汚心]으로 수면(睡眠)을 익히고 염오심(染汚心)으로는 익히지 않는 것이다'고 하는 것이다.
  
10) 이하는 항상 깨어 있으면서[覺寤] 유가(瑜伽)를 닦는 것의 두 가지 약의(略義) 가운데 두번째로 앞의 광문(廣門)을 인용하여 차제(次第)로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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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다시 '새벽[夜後分]이 되면 빨리 각오(覺寤)하여 경행(經行)과 연좌(宴坐)로서 순장법(順障法)을 쫓아서 그 마음을 깨끗이 닦는 것이다'고 하는 이 말에 의하여 네 번째의 바른 소작사[正所作事]를 선설(宣說)하신 것이다. 말하자면 '때에 맞게 깨어 있으면서 일어나는 데에 때를 놓치지 않는 것이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설한 광명상(光明想)에 머무르며 정념(正念) 정지(正知)로서 사유기상(思惟起想)에 의하여 선교방편[巧便]으로 눕는다고 하는 것은, 2연(緣)에 의하여 염오가 없는 마음[不染汚心]으로 수면(睡眠)을 익히고 염오심(染汚心)으로는 익히지 않는다는 것을 현시(顯示)한다. 정념(正念)에 의하고 그리고 정지(正知)에 의한다는 것이다. 다시 2연(緣)에 의하여 때에 맞게 깨어 있으면서 일어나는 데에 때를 놓치지 않는 것이다. 광명상(光明想)에 머무름에 의하여 그리고 사유기상(思惟起想)에 의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무엇을 말하는가?
  정념(正念)에 의하기 때문에 선(善)의 소연(所緣)에 대하여 거두어서[攝斂] 누우며, 정지(正知)에 의하기 때문에 선(善)의 소연(所緣)에 대하여 만약 마음이 퇴실(退失)하여 여러 번뇌(煩惱)를 일으키면 곧바로 빨리 바로 훤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2연(緣)에 의하기 때문에 염오가 없는 마음[不染汚心]으로 수면(睡眠)을 익히고 염오심(染汚心)으로는 익히지 않는다고 이름한다. 광명상(光明想)에 머무르며 사유기상(思惟起想)에 의하여 깊은 수면(睡眠)이 없고, 수면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능히 따라 다니는 것[隨逐]을 여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2연(緣)에 의하기 때문에 때에 맞게 깨어 있으면서 일어나는 데에 때를 놓치지 않는 것이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이11) 항상 부지런히 각오(覺寤)의 유가(瑜伽)를 수습(修習)하는 것을 선설(宣說)하는 모든 약의(略義)와 그리고 앞에서 설한 광변(廣辯)의 석의(釋義)를 종합적으로 설하여 초야(初夜)와 후야(後夜)에 항상 부지런히 각오
  
11) 이하에서는 항상 깨어 있으면서[覺寤] 유가(瑜伽)를 닦는 것 가운데 세 번째로 광(廣) 약(略)을 종합하여 결론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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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覺寤)의 유가(瑜伽)를 수습한다고 하는 것이다.
  무엇을12)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른다고 하는가?
  어떤 사람이 가거나[往] 돌아오거나[還] 간에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르고, 보거나[覩] 쳐다보거나[瞻] 간에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르며, 굽히거나[屈] 펴거나[伸] 간에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르고, 승가지(僧伽 )13) 및 의발(衣鉢)을 지니는 데[持]에도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르고, 먹거나[食] 마시거나[飮] 씹거나[噉] 맛보거나[嘗] 간에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르고, 가거나[行] 머무르거나[住] 앉거나[坐] 눕거나[臥] 간에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르고, 깨어 있을 때[覺寤時]에도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르고, 말하거나[語] 가만히 있거나[默] 간에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르고, 피로를 푸는 잠을 잘 때에도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가거나[往] 돌아오거나[還] 간에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른다란 무엇을 가는 것이라고 하며, 무엇을 돌아오는 것이라고 하며, 무엇을 가거나 돌아오면서 정지(正知)하여 머무른다고 하는 것인가?
  가는 것[往]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취락(聚落)에 도달하여 취락 사이로 가고, 가속(家屬)14)에 도달하여 가속 사이로 가고, 도량(道場)에 도달하여 도량 사이로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돌아오는 것[還]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취락(聚落)으로부터 돌아오고, 취락 사이로부터 돌아오고, 가속(家屬)으로부터 돌아오고, 가속 사이로부터 돌아오고, 도량(道場)으로부터 돌아오고, 도량 사이로부터 돌아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가거나 돌아오면서 정지
  
12) 자원만(自圓滿) 타원만(他圓滿) 선법욕(善法欲) 계율의(戒律儀) 근율의(根律儀) 음식에 대하여 그 양을 아는 것 항상 깨어 있으면서 유가(瑜伽)를 닦는 것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르는 것 선우성[善友性] 정법(正法)을 듣는 것 정법(正法)을 생각[思]하는 것 장애(障礙)가 없는 것 혜사(惠捨)를 닦는 것 사문(沙門)의 장엄(莊嚴)의 14가지의 세 출세간의 자량(資糧) 가운데에 이하는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르는 것에 대하여 설명한다. 이하는 그 첫 번째로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르는 것에 대하여 자세히 해석[廣釋]한다.
13) 범어 Sa gh i의 음사어로서 구역(舊譯)에서는 승가리(僧伽梨)라고도 하며 중(重) 또는 합(合)으로 번역된다. 잘라서 다시 합친 가사(袈裟)를 말한다. 3의(衣) 가운데 가장 큰 것을 대의(大衣)라고 지칭하고 조수(條數)가 가장 많은 것을 잡쇄의(雜碎衣)라고 지칭한다.
14) 가족(家族)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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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正知)하여 머무른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가는 것에 대해서는 바로 '나는 간다'고 알며, 스스로 돌아오는 것에 대해서는 바로 '나는 돌아온다'고 알며, 마땅히 가야할 곳과 가지 말아야 할 곳에 대해서는 능히 바로 훤히 알며[了知], 마땅히 돌아와야 할 곳과 돌아오지 말아야 할 곳에 대해서는 능히 바로 훤히 알며, 마땅히 가야 할 때와 가지 말아야 할 때에 대해서는 능히 바로 훤히 알며, 마땅히 돌아와야 할 때와 돌아오지 말아야 할 때에 대해서는 능히 바로 훤히 알며, 거기에 그와 같고 그와 같듯이 마땅히 가야하고 그리고 마땅히 가지 말아야 할 곳에 대해서는 능히 바로 훤히 알고, 거기에서 그와 같고 그와 같듯이 마땅히 돌아와야 하고 그리고 마땅히 돌아오지 말아야 할 곳에 대해서 능히 바로 훤히 아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을 정지(正知)라고 이름한다.
  그는 이 정지(正知)를 성취하기 때문에 스스로 알면서 가고, 스스로 알면서 돌아오며, 마땅히 가야 할 곳에 가고 가지 말아야 할 곳에는 가지 않으며, 마땅히 돌아올 곳에 돌아오고, 돌아오지 말아야 할 곳에는 돌아오지 않으며, 때에 맞게 가고 돌아오며 때에 맞지 않게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그 색류(色類)의 동지(動止) 궤칙(軌則) 예식(禮式) 위의(威儀)에서도 마땅히 가야 하고 마땅히 돌아와야 하는 것과 같이, 그와 같이 가고 그와 같이 돌아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가거나 돌아오거나 간에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른다고 이름한다.
  보거나[覩] 쳐다보거나[瞻] 간에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른다란 무엇을 본다[覩]고 하며, 무엇을 쳐다본다[瞻]고 하며, 무엇을 보거나[覩] 쳐다보거나[瞻] 간에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른다고 하는가?
  본다[覩]는 것은 앞에서 열거한 것과 같은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서 가거나 돌아오거나 간에 먼저 각혜(覺慧)15)가 없고 먼저 공용(功用)이 없으며 먼저 욕락(欲樂)이 없이 그 중간에 눈으로 뭇 색(色)을 보는 것을 말한다. 이를 본다[覩]고 이름한다. 쳐다본다[瞻]는 것은 앞에서 열거한 것과 같은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서 가거나 돌아오거나 간에 각혜(覺慧)를 먼저로 하고 공용(功用)을 먼저로 하고 욕락(欲樂)을 먼저로 하여 눈으로 뭇 색(色)을 보는 것을
  
15) 사고분별(思考分別)하는 의식(意識)의 지력(智力)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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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한다. 말하자면 혹은 여러 왕들과 혹은 여러 왕 등과 동등한 이들과 혹은 여러 벼슬아치들과 혹은 여러 백성들 혹은 바라문(婆羅門) 혹은 여러 거사(居士)들 혹은 여러 넉넉한 재보(財寶)를 가진 장자(長者)와 상주(商主) 혹은 그 밖의 밖에 있는 물질[外物]인 방사(房舍) 가옥[屋宇] 전당(殿堂) 궁전[廊廟] 혹은 그 밖의 세간의 여러 잡스러운 묘사(妙事), 이것들을 관견(觀見)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쳐다본다[瞻]고 이름한다. 또한 다시 보고 쳐다보는 이 자상(自相)에 대하여 능히 바로 훤히 알고 마땅히 보아야 할 것에 대하여 그리고 마땅히 쳐다보아야 할 것에 대하여 능히 바로 훤히 알고, 마땅히 보아야 할 때에 그리고 마땅히 쳐다보아야 할 때에 대하여 능히 바로 훤히 알며, 마땅히 본 것대로 그리고 마땅히 쳐다본 것대로 능히 바로 훤히 아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정지(正知)라고 한다.
  그는 이 정지(正知)를 성취하기 때문에 스스로 알면서 보고, 스스로 알면서 쳐다보며,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고, 마땅히 쳐다보아야 할 것을 쳐다보며, 마땅히 보아야 할 때에 그리고 마땅히 쳐다보아야 할 때에 바로 쳐다보고 보며, 마땅히 본 것대로 그리고 마땅히 쳐다본 것대로 그대로 보고 그대로 쳐다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보거나[覩] 쳐다보거나[瞻] 간에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른다고 이름한다.
  굽히거나[屈] 펴거나[伸] 간에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른다란 무엇을 굽힌다[屈]고 하며, 무엇을 편다[伸]고 하며 무엇을 굽히거나[屈] 펴거나[伸] 간에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른다고 하는가?
  그는 이와 같이 볼 때와 쳐다볼 때에 또는 가는 것을 먼저로 하고 또는 오는 것을 먼저로 하거나 간에 혹은 발을 굽혔다 펴고 혹은 팔을 굽혔다 펴고 혹은 손을 굽혔다 펴고 혹은 다시 어떤 하나의 지절(支節)을 굽혔다 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굽혔다 폄이라고 이름한다. 또한 굽혔다 펴는 모든 자상(自相)에 대하여 능히 바로 훤히 알고[了知], 또는 굽혔다 펴는 것에 대해서 능히 바로 훤히 알고, 또는 굽혔다 펴는 때를 능히 바로 훤히 알고, 또는 이와 같이 굽히고 이와 같이 펴는 것을 능히 바로 훤히 아는 것이다. 이것을 정지(正知)라고 이름한다.
  그는 이 정지(正知)를 성취하기 때문에 굽힘에 대해서, 폄에 대해서 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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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 알면서 굽히고, 스스로 알면서 펴며, 마땅히 굽혀야 할 것에 대해서 그리고 마땅히 펴야 할 것에 대해서 굽히고 펴며, 마땅히 굽혀야 할 때에 그리고 마땅히 펴야 할 때에 굽히고 펴는 것이다. 마땅히 굽힌 것대로 그리고 마땅히 편 것대로 그대로 굽히고 그대로 펴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굽히거나[屈] 펴거나[伸] 간에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른다고 이름한다.
  승가지(僧伽 ) 및 의발(衣鉢)을 지니는 데[持]에도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른다란 무엇을 승가지(僧伽 )를 지닌다고 하며, 무엇을 옷[衣]을 지닌다고 하며, 무엇을 발우[鉢]를 지닌다고 하며, 무엇을 승가지(僧伽 ) 및 의발(衣鉢)을 지니는 데[持]에도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른다고 하는가?
  대의(大衣)16)가 있으니, 어떤 경우는 60조(條)17)이며, 어떤 경우는 9조(條) 등이며, 어떤 경우는 두 겹[兩重]으로 바느질한 승가지(僧伽 )라고 하는 것이 있다. 의복[被服]을 수용(受用)하고 능히 바르게 장호(將護)하는 것을 설하여 지닌다[持]고 이름한다. 또한 중의(中衣)18)가 있고 하의(下衣)19)가 있으며, 혹은 지니면서 옷으로 삼기도 하고 혹은 장의(長衣)20)가 있기도 하고 혹은 응당 깨끗하게 해야 할 것이 있고 이미 깨끗해진 것도 있으니, 이와 같은 일체를 설하여 옷[衣]이라고 이름하며, 의복을 수용(受用)하면서 능히 바르게 장호(將護)하는 것을 설하여 지닌다[持]고 한다. 또한 수지(受持)하는 데에 견딜 수 있는 쇠 또는 토기의 걸식(乞食)의 응기(應器)21)를 설하여 발우[鉢]라고 이름한다. 실제로 수용(受用)에 충실하며 능히 바르게 장호(將護)하는 것을 설하여 지닌다[持]고 이름한다. 또한 이와 같은 승가지(僧伽 ) 혹은 옷[衣] 혹은 발우[鉢]의 모든 자상(自相)에 대하여 능히 바로 훤히 알고, 마땅히
  
16) 승가지(僧伽 )이다.
17) 15조(條)의 가사(袈裟)를 말하며, 각 조(條)에서 세 개는 길고 하나는 짧기 때문에 60조(條)가 된다.
18) 7조의(條衣)이다.
19) 5조의(條衣)이다.
20) 3의(衣) 이외의 옷으로 규정 밖의 의복이라는 의미이다. 비구(比丘)는 원래 쓰레기로 버려진 남루한 옷을 씻어서 물들이고 꿰맨 분소의(糞掃衣)를 입어야 하는데, 이에 반해 삼베 면포 견의 모포 조포 저의의 여섯 가지로 만든 옷을 장의(長衣)라고 하는 것이다.
21) 철발우 등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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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녀야 할 것의 혹은 승가지 혹은 옷 혹은 발우가 깨끗한지 깨끗하지 않은지에 대하여 능히 바로 훤히 알고, 또는 이 때에 승가지이거나 혹은 옷이거나 혹은 발우이거나 간에 이미 지녔던 것과 마땅히 지녀야 할 것을 능히 바로 훤히 알고, 또한 이와 같은 승가지 혹은 옷 혹은 발우를 응당 이와 같이 지녀야 할 것에 대해서 능히 바로 훤히 안다. 이것을 정지(正知)라고 이름한다.
  그는 이 정지(正知)를 성취하기 때문에 마땅히 지녀야 할 것의 혹은 승가지 혹은 옷 혹은 발우에 대해서 스스로 알면서 지니고, 마땅히 지녀야 할 것에 대해서 그리고 마땅히 지녀야 할 때에 대해서 능히 바르게 지니고, 마땅히 지니는 것과 같이 그대로 하여 지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승가지(僧伽 ) 및 의발(衣鉢)을 지니는데[持]에도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른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먹거나[食] 마시거나[飮] 씹거나[噉] 맛보거나[嘗] 간에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른다란 무엇을 먹는다[食]고 하며, 무엇을 마신다[飮]고 하며, 무엇을 씹는다[噉]고 하며, 무엇을 맛본다[嘗]고 하며, 무엇을 먹거나[食] 마시거나[飮] 씹거나[噉] 맛보거나[嘗] 간에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른다고 하는가?
  여러 가지 모두 수용(受用)하는 음식을 통틀어 먹는다[食]고 이름한다. 여기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씹는 것[噉]이며 둘째는 맛보는 것[嘗]이다.
  무엇을 씹는 것[噉]이라고 하는가?
  떡과 미숫가루와 혹은 밥과 혹은 죽과 혹은 국과 혹은 고깃국을 씹는 것이다. 혹은 그 밖의 조작(造作)하고 전변(轉變)하여야 씹을 수도 있고 먹을 수도 있는 것이 있다. 생명을 능히 지탱하는 이와 같은 등의 종류를 모두 씹는다[噉]고 이름하며, 또한 먹는다[食]고 이름한다.
  무엇을 맛보는 것[嘗]이라고 하는가?
  우유 락(酪) 생소(生酥) 숙소(熟酥) 기름 꿀 사탕(沙糖) 어육(魚肉) 초절임과 젓갈[醯鮓]을 맛보는 것이다. 혹은 신선한 과실 혹은 갖가지 씹어먹는 품류들도 있다. 이와 같은 일체를 통틀어 맛보는 것[嘗]이라고 이름하며 또한 먹는 것[食]이라고 이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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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을 마시는 것[飮]이라고 하는가?
  설탕물 혹은 꿀물 혹은 밥물을 마시는 것이며, 혹은 찬락(鑽酪)을 마시는 것이며, 혹은 식초를 마시는 것이라고 하며, 혹은 평락(抨酪)을 마시는 것이며, 내지 물에 관한 것을 통틀어 마신다[飮]고 이름한다. 또한 이와 같이 먹거나 마시거나 씹거나 맛보는 모든 자상(自相)을 능히 바로 훤히 알고, 또는 모든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씹는 것과 맛보는 것을 능히 바로 훤히 알고, 또한 이 응당 먹어야 하고 마셔야 하고 씹어야 하고 맛봐야 할 때를 능히 바로 훤히 알며, 또한 이와 같이 마땅히 먹어야 하고 마셔야 하고 씹어야 하고 맛봐야 할 것에 대하여 능히 바로 훤히 아는 것이다. 이것을 정지(正知)라고 이름한다.
  그는 이 정지(正知)를 성취하기 때문에 스스로 모든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보는 것에 대해서 스스로 알면서 먹고, 스스로 알면서 마시며, 스스로 알면서 씹고, 스스로 알면서 맛보는 것이다. 마땅히 먹어야 할 것과 마땅히 마셔야 할 것과 마땅히 씹어야 할 것과 마땅히 맛봐야 할 것에 대해서 바로 먹고 바로 마시며 바로 씹고 바로 맛보며, 때에 맞춰서 먹고 때에 맞춰서 마시고 때에 맞춰서 씹고 때에 맞춰서 맛보며, 마땅히 먹은 것대로 내지 마땅히 맛본 것대로 그대로 먹고 내지 그대로 맛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먹거나[食] 마시거나[飮] 씹거나[噉] 맛보거나[嘗] 간에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른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가거나[行] 머무르거나[住] …… 내지 피로를 푸는 잠을 잘 때에도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른다란 무엇을 간다[行]고 하며, 무엇을 머문다[住]고 하며, 무엇을 앉는다[坐]고 하며, 무엇을 눕는다[臥]고 하며, 무엇을 깨어있다[覺寤]라고 하며, 무엇을 말한다[語]고 하며, 무엇을 가만히 있다[默]이라고 하며, 무엇을 피로를 푸는 잠이라고 하며, 무엇을 가거나[行] …… 내지 피로를 푸는 잠을 잘 때에도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른다고 하는가?
  어떤 사람이 경행(經行)하는 곳에서 오고 가며 경행(經行)하고 혹은 다시 법을 함께하는 자한테로 이르고 혹은 도로에 걸어 다니는 것과 같은 이와 같은 등의 종류를 설하여 간다[行]라고 한다. 다시 어떤 사람이 경행(經行)하는 곳에 머물고 여러 법을 함께하는 아차리야(阿遮利耶)22)와 오파타야((波拕
  
22) 범어 c rya의 음사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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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耶)23) 및 여러 존장(尊長)과 존장과 동등한 사람들의 앞에 머무르는 것과 같은 이와 같은 등의 종류를 설하여 머무른다[住]고 이름한다. 다시 어떤 사람은 대상(大床)이나 혹은 작은 승상(繩床)에서 혹은 풀과 나뭇잎으로 만든 자리 혹은 여러 가지 부구(敷具)에서 혹은 니사단(尼師檀)24)에서 결가부좌하고 몸을 단정히 하고 바른 서원[正願]으로 배념(背念)에 안주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종류를 설하여 앉는다[坐]고 이름한다.
  다시 어떤 사람이 머무르는 곳[住處]으로부터 밖으로 나와서 발을 씻고서는 도로 머무르는 곳으로 들어가서, 혹은 대상(大床)이나 혹은 작은 승상(繩床)에서 혹은 풀과 나뭇잎으로 만든 자리 혹은 아련야(阿練若)에서 혹은 나무 아래에서 혹은 공한실(空閑室)에서 두 발을 포개고서 오른쪽 옆구리를 대고 눕는 것과 같은 이와 같은 종류를 설하여 눕는다[臥]고 이름한다. 다시 어떤 사람이 낮[晝日分] 동안에 경행(經行)하고 연좌(宴坐)하면서 순장법(順障法)을 쫓아 깨끗이 닦고, 초저녁[初夜分]과 새벽녘[後夜分]에 경행(經行)하고 연좌(宴坐)하면서 순장법(順障法)을 쫓아 그 마음을 깨끗이 닦는 것과 같은 것을 설하여 깨어 있다[覺寤]고 이름한다.
  다시 어떤 사람이 항상 부지런히 이와 같은 각오(覺寤)를 수습(修習)하여 아직 받지 못한 법을 바로 받고 바로 익히어 구경(究竟)을 얻는 것과 같으니, 소위 계경(契經) 응송(應頌) 기별(記別)이며, 자세한 것은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 곧 이와 같이 이미 받은 법에 대해서 말을 잘 통리(通利)하나니, 즉 큰 음성으로 읽거나 외우며 혹은 다시 다른 사람을 위해서 널리 설하고 개시(開示)하며, 시시때때로 여러 지혜가 있고 범행(梵行)을 같이하는 사람과 혹은 그 밖의 재가(在家)의 여러 현선(賢善)들과 말하고 담론(談論)하기도 하며, 함께 서로 경위(慶慰)하면서 권려(勸勵)하고자 하고, 자구(資具)를 구하는 것과 같은 이와 같은 종류를 설하여 말한다[語]고 이름한다.
  다시 어떤 사람이 먼저 들은 것에 따라서, 먼저 익힌 것을 따라서, 말을 잘
  
23) 범어 Up dhy ya의 음사어이다.
24) 범어 Ni dana의 음사어이다. 좌와구(坐臥具)를 말하며, 앉거나 누울 때 땅에 깔거나 또는 와구(臥具) 위에 펴는 것이다. 오늘날의 좌구(座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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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고 통리(通利)하고 제 법(法)을 구경(究竟)하여 홀로 공한처[空閑]에 있으면서 그 이치[義]를 사유(思惟)하고 주량(籌量)하고 관찰하며, 혹은 정실(靜室)에 있으면서 마음으로 하여금 내주(內住) 등주(等住) 안주(安住) 및 근주(近住)25)와 함께하여 조복적정(調伏寂靜)과 최극적정(最極寂靜)하게 하며 한 곳으로 나아가[一趣] 등지(等持)하게 하기도 하고, 혹은 다시 저 비발사나(毘鉢舍那)에 대하여 유가행(瑜伽行)을 닦는 것과 같은 이와 같은 등의 종류를 설하여 가만히 있는다[默]고 이름한다.
  다시 어떤 사람이 그 뜨거운 폭염이 치성할 때에, 혹은 더위에 시달리거나 혹은 수고[劬勞]하였기 때문에 곧 피권(疲倦)이 생겨서 비시(非時)에도 혼매(惛寐)하여 수면(睡眠)을 락착(樂著)하는 이것을 피로를 푸는 잠이라고 이름한다.
  또한 다시 가는 것[行]에서부터 …… 내지 피로를 푸는 잠에 이르기까지 모든 자상(自相)에 대하여 능히 바로 훤히 알고, 마땅히 가야 할 곳에서부터 내지 마땅히 피로를 풀어야 할 잠까지 능히 바로 훤히 알고, 마땅히 가야 할 때로부터 내지 마땅히 피로를 풀어야 할 잠을 잘 때에 이르기까지 능히 바로 훤히 알고, 마땅한 것대로 가고 내지 마땅한 것대로 피로를 풀어야 할 잠을 능히 훤히 아는 이것을 정지(正知)라고 이름한다.
  그는 이 정지(正知)를 성취하기 때문에 그 스스로 가는 곳에서 내지 그 스스로 피로를 푸는 잠을 자는 데에 이르기까지 정지(正知)하면서 가고 내지 정지(正知)하면서 피로를 푸는 잠을 자는 것이다. 또한 마땅히 가야 할 곳[行] 내지 마땅히 피로를 풀어야 할 잠에 이르기까지는 곧 그곳에 가고 내지 그것에 대하여 피로를 푸는 잠을 자는 것이다. 또한 때에 맞춰 가거나 내지 때에 맞춰 피로를 푸는 잠을 잘 때에는 곧 이 때에 가고 내지 이 때에 피로를 푸는 잠을 자는 것이다. 마땅히 가야 한 곳대로 내지 마땅히 피로를 풀어야 할 잠을 잔대로, 이와 같이 가고 내지 이와 같이 피로를 푸는 잠을 자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가거나[行] 머무르거나[住] 앉거나[坐] 눕거나[臥] 간에, 깨어 있으면서[覺寤], 말하거나[語] 가만히 있거나[默] 간에, 피로를 푸는 잠
  
25) 등주(等住) 이하는 9종심주(種心住)를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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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 자거나 간에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른다고 이름한다.
  다음으로 이와 같이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르는 것은 어떤 차제(次第)로 어떤 현상[事]을 드러내는 것인가?
  어떤 사람이 이와 같은 촌읍(村邑) 촌락(村落) 정자[亭]와 초개소[邏]에 의지하여 머무르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 즉 '나는 이제 이와 같은 촌읍과 촌락과 정자와 초개소에 가서 돌아다니면서 걸식(乞食)해야겠다. 이와 같이하여 걸식한 뒤에는 나와서 본래의 곳으로 돌아가겠다. 또한 이와 같은 촌읍들 안에는 어떤 재가(在家)라도 나는 마땅하지 않은 데에 가지 않겠다. 어떠한 집인가 하면 창령가(唱令家) 혹은 고주가(酤酒家) 혹은 음녀가(
  女家) 혹은 국왕가(國王家) 혹은 전다라(旃茶羅) 갈치나가(羯恥那家)이다. 혹은 다시 어떤 한결같이 비방이 가히 회전(廻轉)하지 않은 집이 있으며, 혹은 어떤 재가의 집, 즉 찰제리(刹帝利)의 대족성(大族姓)의 집과 혹은 바라문(婆羅門)의 대족성(大族姓)의 집과 혹은 거사(居士)의 대족성(大族姓)의 집, 혹은 벼슬아치의 집과 혹은 재산이 넉넉한 집, 혹은 장자(長者)의 집, 혹은 상주(商主)의 집들에 응당 가야 할 곳이다. 또한 나는 비록 응당 가야하지만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게 가지 말아야 할 재가의 집이 있다. 시주(施主)의 집에 급한 일이 있을 때에는 가지 말아야 하고 희락(戲樂)할 때나 집을 짓고 꾸미고 하는 일이 있을 때거나 세간의 퇴폐하고 더러운 법을 하는 때거나 분(忿)을 내어 싸우는 때에는 가지 말아야 한다. 또한 가는 곳에 맞게 이와 같이 맞춰서 가야 하니, 난폭하고 악한 코끼리와 함께 가지 않으며 난폭한 여러 가지 수레와 나쁜 말과 나쁜 소와 나쁜 개와 함께 가지 않으며 시끄러운 숲에 들어가지 않고 가시덤불을 밟지 않으며 담장을 넘지 않고 구덩이를 넘지 않으며 산언덕에서 떨어지지 않고 깊은 물에도 빠지지 않으며 똥을 밟지 않고서 응당 월유(月喩)에 따라서 시주의 집에 가야 한다. 참괴(慚愧)를 구족하고 교오(憍傲)를 멀리 여의며 몸과 마음을 씻고, 이득[利養]을 구하지 않으며 공경(恭敬)도 바라지 않는다. 자신이 획득한 모든 이득[利養]에서 마음으로 희열(喜悅)을 내는 것처럼 이와 같이 남이 획득한 이득[利養]에 대해서도 마음으로 또한 희열(喜悅)하며 스스로 고거(高擧)하지 않고 남을 경멸(輕蔑)하지 않으며 마음으로 애민(哀愍)을 품을 것이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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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마땅히 이와 같이 스스로 그 마음을 지니고서 시주(施主)의 집에 가야 한다. '어찌 출가한 이로서 다른 사람한테 나아가 다른 사람의 보시[施]를 요망하고 혜시(惠施)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 내지 빨리 하고 더디지 않은 것을 요망함이 있겠는가.'라고 한다. 또한 이러한 마음을 짓는다. '나는 이제 짐짓 시주의 집에 가면 받은 보시의 물건에 마땅히 그 양을 응당 알 것이며, 또한 나는 이득[利養]의 인연으로 속이거나 거짓말하거나 혹란(惑亂)의 상(相)을 나타내어 이익[利] 때문에 이익을 구하지 않겠으며, 이득[利養]을 얻고 나서는 물들지 않고 애착도 없고 또한 지나치게 즐기거나 탐내거나 번민하거나 고집하거나 집착하면서 수용(受用)하지 않겠다'고 한다.
  다시 이미 갔거나[已往] 정작 간[正往] 때에는 뭇 색(色)을 보게 되는데 이 뭇 색에 대해서 일부분은 마땅히 관해야 하고 혹 어떤 일부분은 마땅히 관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마땅히 관하지 않아야 할 모든 뭇 색에 대해서는 마땅히 그 눈[眼]을 섭수하여 잘 제 근(根)을 지켜야 하고 마땅히 보아야 할 모든 뭇 색에 대해서는 마땅히 잘 염(念)에 머물러 바르게 관찰해야 한다.
  어떠한 색류(色類)의 색(色)을 마땅히 보지 않아야 하는 것인가?
  여러 풍악과 희롱하며 웃는 것과 환오(歡娛)하는 것이며 혹은 그 밖의 장난하고 놀며 노래하고 춤추며 음악 하는 등의 일들이다. 이와 같이 다시 모읍(母邑)26)이 아주 수승하며 젊어 한창 때의 미묘(美妙)한 형색도 있다. 혹은 다시 그 밖의 보이는 여러 가지 색(色)은 능히 범행(梵行)을 무너뜨리고 능히 범행을 장애하고 능히 갖가지 악(惡) 불선(不善)의 심사(尋思)들을 현행(現行)하게 하는 것들이다. 이와 같은 색류(色類)의 모든 여러 가지 색(色)은 마땅히 관하지 않아야 한다.
  어떠한 색류(色類)의 색(色)을 마땅히 보아야 하는가?
  온갖 모든 쇠하고 늙고 썩어서 없어지고 상기(上氣)하는 자의 몸은 곱사등이 되어서 지팡이에 의지하며, 덜덜 떠는 자의 몸 혹은 여러 가지 질병의 고통이 있고 중병(重病)을 앓는 자의 몸은 다리가 부르트고 손이 부르트고 배가 부르트고 얼굴이 부르트고 피부색이 시들고 노란 종기와 옴 등등의 뭇 괴로
  
26) 여자의 용모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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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움에 시달리며, 몸의 형상은 힘이 빠져 있고, 몸의 형상은 크게 문드러져서 모든 감관[根]은 암둔(闇鈍)한 것이다. 혹은 일찍 요절한 자가 죽은 뒤에 하루를 지나기도 하고 이틀을 지나기도 하고 이레가 지났는데 여러 까마귀 까치 굶주린 개 올빼미 수리 여우 이리 야간(野干) 등의 갖가지 포악한 방생금수(傍生禽獸)에게 먹히기도 하고 혹은 목숨이 끊어지고 나서 내와서 높은 상(床)위에 놓고 휘장을 치고서 앞뒤에서 대중이 슬퍼하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그 재와 흙을 몸이나 머리카락에 뒤집어쓰고서는 근심하고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원망하고, 걱정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이와 같은 등의 종류의 모든 뭇 색(色)일 경우에는, 우리는 마땅히 관찰해야 한다. 이러한 뭇 색을 관찰하면 능히 범행(梵行)을 수순할 수 있고 능히 범행을 섭수할 수 있으며 능히 여러 선(善)의 심사(尋思)로 하여금 현행(現行)하게 할 수 있다.
  몸을 흔들고 팔을 흔들며 머리를 흔들고 뜀박질하고 손을 끌고 허리를 안고 어깨를 움츠리면서 시주의 집에 들어가지 않아야 하고, 허락하지 않은 자리에 곧장 앉지 말아야 하며, 자리를 자세히 살피지 않고서 앉지 말아야 하고, 모든 몸을 제멋대로 방일하지 말아야 하며, 발돋움을 하지 말아야 하고, 발을 꼬지 말아야 하며, 발을 지나치게 좁히지도 않고, 발을 지나치게 넓히지도 않으면서 단엄(端嚴)하게 앉아야 한다. 끈을 풀어서도 안되고, 나풀나풀하게 해서도 안되고, 또한 꼿꼿하게 해서도 안되며, 걷어올리지도 않고서 법복(法服)을 입으며, 입은 법복은 가지런히 모두 정돈되어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고 코끼리 코같이 하지도 않고 다라(多羅) 나무의 곁가지 같이 하지도 않으며 용의 머리와 같이 하지도 않으며 콩이 뭉쳐진 것과 같이 하지도 않게 하면서27) 법복을 입어야 한다.
  발우를 가지고 미리 그 음식이 있는 데에 나아가지 않아야 하며 발우를 가지고 음식 위에 두지 않아야 하며, 발우를 여러 더러운 것이 있는 곳이나 구덩이나 골짜기의 물이 있는 곳이나 벼랑이나 언덕이 있는 곳에 놓아두지 않
  
27) 가사(袈裟)의 상각(上角)이 드리워진 것을 코끼리 코와 같다고 하며, 가사의 하각(下角)이 쳐지면서 뻗지르는 것을 다라(多羅)나무의 곁가지와 같다고 하며, 가사의 각두(角頭)가 쳐지지 않고 위로 향하는 것을 용의 머리와 같다고 하며, 팔꿈치에 둘둘 감아 있는 것을 콩이 뭉친 것 같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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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야 한다. 또한 차례로 음식을 수용하되, 밥을 국위에 덮지 말아야 하고, 국을 그 밥 위에 덮지 말아야 하며, 혼자 탐내면서 여러 음식을 받지 말아야 하고, 원망하면서 음식을 받지 말아야 한다. 너무 거칠게 하면서 먹지 말아야 하고, 너무 작게 하면서 먹지 말아야 하며, 둥글게 뭉쳐서 먹어야 하고, 손을 핥아먹지 말아야 하고, 발우를 핥아먹지 말아야 하며, 손을 흔들면서 먹지 말아야 하고, 발을 흔들면서 먹지 말아야 하며, 깨물어 끊으면서 그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한다.
  시주의 집으로부터 머물던 곳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면 밤낮으로 다른 사람이 경행하는 곳까지 갔다 왔다 경행하면서 거닐되, 다른 사람의 곳이거나 맡기지 않은 곳이거나 마음대로 하지 못할 곳이거나 허락하지 않은 곳이 아니거든 경행하며, 몸을 수고롭게[劬勞] 하지 않고, 몸을 피곤하게 하지 않고, 마음을 들뜨게[掉擧] 하지 않으면서 조복되었을 때에도 경행을 익힌다.
  선품(善品)을 닦기 위하여 그리고 선사유(善思惟)를 위하여 안으로 제 근(根)을 섭수하고, 마음은 밖으로 어지럽지 않게 하면서 경행을 익히며, 너무 빨리 치닫지도 않고 너무 느리게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또한 한 방향으로만 오롯이 왔다 갔다 하지 않으면서 경행을 익히며, 때때로 나아갔다가 때때로 머무르면서 경행을 익힌다. 이와 같이 자신이 살고 있는 주처(住處)의 자신의 사원[院]과 자신의 방(房)과 타인과 따로 있는 곳과 승가에서 준 곳에서 하며, 다른 곳에서는 하지 않으며, 맡기지 않은 곳에서는 하지 않으며, 마음대로 못할 곳에서는 하지 않는다.
  경행을 익히고 나서는 다시 큰 상(床)과 혹은 작은 승상(繩床)과 혹은 풀과 잎사귀로 만든 자리 혹은 니사단(尼師檀)이나 혹은 아련야(阿練若) 혹은 나무 아래와 무덤사이에서나 혹은 빈방에서 결가부좌하고 몸을 단정히 하고 바른 서원으로 배념(背念)에 안주하여 연좌(宴坐)를 익힌다.
  밤중[夜中分]에는 여법(如法)하게 자면서 쉬고 낮[晝日分]과 새벽[夜初分]에는 모든 선품(善品)을 닦되, 너무 급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이와 같이 잠잘 때에는 마땅히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이 광명상(光明想)에 머물러 정념(正念) 정지(正知)하여 사유기상(思惟起想)에 의하여 새벽[夜後分]에는 빨리 깨어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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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은 말하고 논의[語論]하며 혹은 독송(讀誦)하는데 있어서 가행(加行)을 부지런히 닦으며 혹은 수단(修斷)하기 위하여 고요한 곳[閑居]에서 연묵(宴默)하면서, 법을 사유할 때에는 마땅히 세상을 따르는 전적(典籍)과 아름다운 글자[綺字]와 아름다운 글귀[綺句]와 아름답게 꾸민 글과 말[綺飾文詞]은 이치 없는 것[無義]을 이끌어서, 신통(神通) 등각(等覺) 구경(究竟) 열반(涅槃)을 증득할 수 없게 하므로 멀리 여의어야 한다.
  다시 여래께서 말씀하신 정법(正法)에 대하여 최극심심(最極甚深)28)과 상사심심(相似甚深)29)의 공성(空性)에 상응하고 수순하는 연성(緣性)과 연기(緣起)를 은중(殷重)하고 끊임없이 잘 거두고 잘 받으며, 굳건하게 하고 머무르게 하며 잃어버리지[失壞] 않게 하며 정행(正行)을 이루기 위하는 것이며 이득[利養]과 공경(恭敬)과 칭예(稱譽)를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이 법의 말씀에 대해서는 잘 통리(通利)하고 지혜로 잘 관찰하며, 시끄럽고 잡스러운 무리에게 가까이 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며, 많은 일[多業]을 좋아하지 않으며, 많은 말[多言]을 좋아하지 않으며, 시시때때로 정념(正念)에 안주하고, 여러 지혜가 있고 범행(梵行)을 같이하는 사람과 말하고 논의하고 서로 서로 경위(慶慰)하면서 청문(請問)하되, 즐겨 여러 선(善)들을 구하며 어기거나 다투는 마음이 없으며, 말[言詞]을 헤아려서 하고 말은 이치에 맞으며, 말은 정직하고 말은 적정하며, 부지런히 다른 이를 위해서 정법(正法)을 선설(宣說)하기를 좋아한다.
  또한 마땅히 연묵(宴默)하여야 할 악(惡) 불선(不善)의 모든 심사(尋思)에 대하여 심사(尋思)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며, 또한 비리(非理)의 모든 제 법에 대해서도 사유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며, 스스로 증득한 것에 대하여 증상만(增上慢)을 여의고, 적고 하열(下劣)한 차별(差別)의 증득에 대해서 희족(喜足)을 일으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뛰어남[上]을 증득한 것에 대해서는 퇴굴(退屈)함이 없으며, 능히 잘 사유하지 말아야 할 것[不應思處]에 대해서 능히 잘 원리하며, 때때로 지(止) 관(觀)의 유가(瑜伽)를 수습하고 끊기[斷]를 좋아하고 닦기[修]를 좋아하며, 쉴 사이 없이 수습하고 은중(殷重)하게 수
  
28) 진여법계(眞如法界)를 말한다.
29) 모든 연기(緣起)의 인연법(因緣法)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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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습한다.
  또한 매우 뜨거운 때에 용맹스럽게 책려하여 부지런한 정진을 일으키고, 한 가지로 마땅히 지어야 할 대상[事]을 따라 지으며, 피로[疲倦]의 인연은 마침내 비시(非時)에 혼침과 수면[惛睡]을 일으키게 되나니, 이러한 이치 때문에 잠시동안 자면서 쉬어야만 한다. 혼침과 수면을 빨리 제거시키기 위하여 오랫동안 선품(善品)을 손감(損減)하고 선품(善品)을 장애(障礙)하지 말라. 자면서 쉴 때에는 어떤 경우 문을 닫아걸기도 하고 어떤 경우 필추(苾芻)로 하여금 곁에 있으면서 엿보게 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 비나야(毘奈耶)의 은밀(隱密)한 궤칙(軌則)인 옷으로 몸을 가리고 매우 은밀한 곳에서 잠깐동안 자기도 하나니, 순식간의 잠으로 휴식해도 여러 피로에서 오는 잠들을 모두 다 제거하게 한다. 이와 같은 것을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른다고 이름한다.
  앞뒤의 차례는 행(行)에 의하는 때와 머무름에 의하는 때이며 또한 선품(善品)에 먼저 취입(趣入)하지 못하는 마음에 가행(加行)을 일으켜서 가행(加行)을 일으키는 여리작의(如理作意)와 함께 행하는 묘혜(妙慧)를 정지(正知)라고 하며, 곧 이 정지(正知)는 행하는 때와 머무르는 때 모두를 성취[成辦]하여 감소시키는 일이 없다. 이와 같은 것을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른다고 이름한다.
  이 가운데에 가거나 돌아오거나 보거나 쳐다보거나 굽히거나 펴거나 승가지(僧伽 )와 의발(衣鉢)을 지니거나 혹은 먹거나 마시거나 씹거나 맛보거나 간에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르나니, 이것에 의해서 촌읍(村邑) 등에서 여법(如法)하게 행할 때에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른다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또한 가거나 머무르거나 앉거나 눕거나 각오(覺寤)를 익히거나 말하거나 가만히 있거나 피로를 푸는 잠을 자거나 간에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르나니, 이것에 의해서 그 머무르는 곳에서 여법(如法)하게 머무를 때에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른다고 이름한다.
  이와 같이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른다고 하는 것을 자세하게 분별[廣分別]한 줄 알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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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이 가운데의 약의(略義)를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30)
  말하자면 행할 때에는 다섯 가지 업(業)이 있고 그 머무를 때에도 다섯 가지 업(業)이 있으며, 행할 때와 머무를 때에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르는 데에도 네 가지 업(業)이 있나니, 이와 같은 것을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른다고 이름한다.
  모든 약의(略義)는 무엇을 말하는가?
  행할 때에는 다섯 가지 업이 있으니, 첫째는 신업(身業)이고 둘째는 안업(眼業)이고 셋째는 모든 지절(支節)의 업이고 넷째는 의발(衣鉢)의 업이고 다섯째는 음식(飮食)의 업이다. 이와 같은 것을 행할 때의 다섯 가지 업이라고 한다. '가거나 돌아온다'라고 하는 이 말은 행할 때의 신업(身業)을 현시하는 것이며, '보거나 쳐다본다'고 하는 이 말은 행할 때의 안업(眼業)을 현시하는 것이며, '굽히거나 편다'고 하는 이 말은 행할 때의 모든 지절(支節)의 업을 현시하는 것이며, 다시 '승가지(僧伽 )와 의발(衣鉢)을 지닌다'고 하는 이 말은 행할 때의 의발(衣鉢)의 업을 현시하는 것이며, '먹거나 마시거나 씹거나 맛본다'고 하는 이 말은 행할 때의 음식(飮食)의 업을 현시하는 것이다.
  머무를 때의 다섯 가지 업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첫째는 신업(身業)이고, 둘째는 어업(語業)이며, 셋째는 의업(意業)이며, 넷째는 낮의 업[晝業]이며, 다섯째는 밤의 업[夜業]이다. '가거나 머무르거나 앉는다'고 하는 이 말은 머무르는 때의 신업(身業)을 현시하는 것이며, 또한 다시 '말한다'고 하는 이 말은 머무르는 때의 어업(語業)을 현시하는 것이며, 또한 다시 '눕거나 가만히 있거나 피로를 푸는 잠을 잔다'고 하는 이 말은 머무르는 때의 의업(意業)을 현시하는 것이며, 또한 다시 '각오(覺寤)를 익힌다'고 하는 이 말은 머무르는 때의 낮의 업[晝業]과 밤의 업[夜業]과 신업(身業)과 어업(語業)을 현시하는 것이며, 또한 '눕는다'고 하는 이 말은 머무르는 때의 밤의 업[夜業]을 현시하는 것이다. 이것을 머무르는 때의 다섯 가지 업이라고 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행할 때와 머무를 때에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르는 데에 있는 네 가지 업
  
30)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르는 것 가운데 두 번째로 약의(略義)를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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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처음에 저 행하는 업[行業]과 머무르는 업[住業]에 의하여 이와 같은 업을 일으키나니, 곧 그 업에 의하여 정념(正念)을 안수(安守)하고 불방일(不放逸)에 머무르는 것이다. 이 업(業)은 정념(正念)에 포함되는 것이며 불방일(不放逸)에 포함되는 것인 줄 알아야만 한다. 만약 이러한 현상[事]과 이러한 곳[處]과 이러한 때[時]에서 척도대로[如量] 이치대로[如理] 그 품류(品類)대로 마땅히 지어야할 것이라면 곧 이러한 현상과 이러한 곳과 이러한 때에서 척도대로 이치대로 그 품류대로 정지(正知)하면서 짓는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이 정지(正知)하면서 짓기 때문에 현법(現法)에서 죄가 없고, 범함이 없으며, 악작(惡作)하는 일이 없고, 변함이 없고, 후회[悔]가 없으며, 미래세[當來世]에 또한 죄가 있지 않으며, 몸이 무너진 사후(死後)에도 악취(惡趣)에 떨어지지 않으며, 일체의 나락가(那落迦)에 태어나지 않으며,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기 위하여 자량(資糧)을 쌓고 익힌다[積習].
  위와 같은 것을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는 데의 모든 약의(略義)라고 한다. 앞의 자세한 분별[廣分別]과 지금 이 약의(略義)를 통틀어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른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ㅡ終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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