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아비달마구사론 제 1 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4. 16:06
[1 / 1397] 쪽
  
아비달마구사론 제 1 권
  존자 세친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
  
1. 분별계품(分別界品) ①
  일체종의 어둠과 온갖 어둠을 멸하시고
  중생을 건져 올려 생사의 늪에서 나오게 하신 모든 이
  이와 같은 참다운 스승[如理師]께 공경 예배하고서
  나는 이제 마땅히 대법장론(對法藏論)을 설하리라.1)
  諸一切種諸冥滅 拔衆生出生死泥
  敬禮如是如理師 對法藏論我當說
  
  논하여 말하겠다. 이제 바야흐로 이 논을 짓고자 함에 있어 우리 스승의 덕체(德體)가 존귀하고 고매하여 온갖 성자들을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먼저 그 분의 덕을 찬양하고 나서 비로소 공경 예배해야 하리라.
  [본송에서] '모든'이라고 하는 말이 나타내는 바는 불(佛) 세존(世尊)을 일컫는다. 즉 이분께서는 어둠[暗, 즉 무지]을 능히 깨트렸기 때문에 '어둠을
  
1) 이 게송은 본서의 서분(序分)에 해당하는 것으로, 제1구는 세존의 자리덕(自利德)의 원만함을, 제2구는 이타덕(利他德)의 원만함을, 제3구는 이 같은 세존에게 공경 예배함을, 제4구는 지금부터 대법장(對法藏), 즉 아비달마의 논의를 설하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고래로 이 게송의 앞의 3구를 귀경서(歸敬序), 마지막 1구를 발기서(發起序)라고 한다. 제1구 중의 '일체종의 어둠'은 불염오무지를, '온갖 어둠'은 염오무지를 나타낸다. 그러나 진제(眞諦)역에서는 '일체종지(一切種智)로써 온갖 어둠을 멸하시고'라고 하여 일체종지라는 말로써 양자 모두를 포괄하고 있다.
[2 / 1397] 쪽
  멸하셨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 [본송에서] '일체종의 어둠과 온갖 어둠을 멸하셨다'고 말한 것은 온갖 경계의 어둠(즉 염오무지)과 일체 품류의 어둠(불염오무지)을 멸하였다는 말이니, 온갖 무지(無知)는 진실의 뜻[實義]을 가리우며 아울러 참된 견해[眞見]를 장애하기 때문에 그것을 '어둠[冥]'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오로지 불 세존만이 일체 경계의 어둠과 일체의 종류의 어둠에 대한 영원한 대치(對治)를 획득하시어 그것의 불생법(不生法)을 증득하셨기 때문에 '멸하셨다'고 일컬은 것이다.
  즉 성문(聲聞)과 독각(獨覺)이 비록 온갖 어둠을 멸하였을지라도 필경 염오무지(染汚無知)만을 끊었기 때문에 일체종의 어둠을 멸한 것은 아닌 것이다.2)
  어째서 그러한가?
  그들은 불법(佛法)에 대한, 지극히 먼 시간과 처소에 대한, 아울러 온갖 의류(義類)의 가이없는 차별에 대한 불염오무지를 아직 끊지 못하였기 때문이다.3)
  세존의 자리(自利)의 덕이 원만한 것에 대해 이미 찬탄하였으니, 다음으로 마땅히 부처님의 이타(利他)의 덕의 원만함에 대해 찬탄해야 하리라. [본송에서] '중생을 건져 올려 생사의 늪에서 나오게 하셨다'고 말함에 있어, 그 같은 생사는 바로 온갖 중생들이 빠져있던 곳으로 가히 빠져 나오기가 대단히 어렵기 때문에, 그래서 '늪'에 비유한 것이다. 즉 중생들이 그 가운데 침몰하여 있어도 구제하는 이가 없으니, 세존께서 그들을 불쌍하고 가련히 여겨 근기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정법(正法)의 가르침과 손길을 주어 [생사의 늪에서] 건져 올려 빠져 나오게 하신 것이다.
  
2) 원문은 '성문 독각은 비록 온갖 어둠을 멸하였을지라도 염오무지는 필경 아직 끊지 못하였기 때문에[聲聞獨覺雖滅諸冥 以染無知畢竟未斷故]'로 되어 있으나 그 다음의 내용으로 볼 때, 글의 내용상, 또한 진제역본이나 현종론에 따라 이같이 번역하였다. 여기서 염오무지(kli a-aj~ na)란 진리의 실상을 능히 알지 못하여 망견(妄見)을 일으켜 생사윤회하게 하는 번뇌성의 무지(번뇌장)를 말하는 것이라면, 불염오무지는 생사 출리(出離)를 장애하지 않는 비번뇌성의 무지(해탈장)를 말한다.
3) 여기서 불법은 부처님만이 갖는 특수한 능력인 18불공법(不共法, 본론 권제27 참조)을 말하며, 지극히 먼 시간과 처소란 8만겁과 삼천대천세계 밖의 시간과 처소를, 온갖 의류의 가이 없는 차별이란 유정이나 세계의 천차만별의 모습을 말한다.
[3 / 1397] 쪽
  부처님의 공덕에 대해 이미 찬탄하였으니, 이제 다음으로 [그에 대해] 공경 예배해야 하리라. [본송에서] '이와 같은 참다운 스승께 공경 예배하리라'고 함에 있어 머리를 조아려 그 분의 발에 갖다 대기 때문에 '공경 예배한다'고 일컬었으며, '모든 이(즉 모든 불 세존)'는 앞서 언급하였듯이 자리와 이타의 덕을 갖추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이라고 말하였으며, 참답고 전도됨이 없이 가르치고 타이르며 힘쓰도록 하였기 때문에 '여리사(如理師)' 즉 참다운 스승이라고 말하였다. 즉 참다운 스승이라는 말은 이타의 덕을 나타내는 것이니, 능히 방편으로써 참답고 올바른 가르침[如理正敎]을 설하여 중생을 생사의 늪으로부터 건져 올려 나오게 하신 이를 말하는 것으로, 어떤 위력(威力)이나 [중생들의] 원(願)에 의해서나 혹은 신통(神通)에 의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4)
  참다운 스승께 예배하고서 무엇을 하고자 함인가?
  '나는 이제 마땅히 대법장론(對法藏論)을 설하리라.' 이는 즉 학도들을 가르치고 타이르는 것이기 때문에 '논(論, astra)'이라고 칭한 것이다.
  그러한 논은 어떠한 것인가?
  말하자면 대법장(對法藏)이다.5)
  무엇을 일컬어 대법장이라고 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정혜(淨慧)와 이에 따르는 행[隨行]을 대법이라 이름하며
  아울러 능히 이를 획득하게 하는 온갖 혜와 논을 대법이라 한다.
  淨慧隨行名對法 及能得此諸慧論
  
  논하여 말하겠다. '혜(慧)'란 택법(擇法)을 말하며, '정(淨)'이란 무루(無漏)를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혜의 권속을 일컬어 '이에 따르는 행, 즉 수행
  
4) 즉 중생을 구제함에 있어 전륜왕은 위력으로, 대자재천(大自在天)은 중생들의 원에 따라, 비쉬누(Vi u)는 신통으로 온갖 형상을 나타내어 중생을 구제한다. 그러나 참다운 스승[如理師, yath rthasa ]이신 불 세존께서는 오로지 참답고 올바른 가르침[如理正敎]에 의해서만 중생들을 생사의 늪에서 구제할 뿐이다.
5) 대법장(對法藏)은 아비달마구사(阿毘達磨俱舍, Abhidharma-ko a)의 의역어(意譯語).
[4 / 1397] 쪽
  (隨行)'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전체적으로 말하면 무루의 5온(蘊)을 설하여 '대법'이라 이름하니, 이는 즉 승의(勝義)의 아비달마(阿毘達磨)이다.
  그리고 세속(世俗)의 아비달마에 대해 설하자면 능히 이러한 무루의 5온을 획득하게 하는 온갖 혜와 논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혜'란 이를테면 이를 획득하게 하는 유루(有漏)의 문(聞)·사(思)·수혜(修慧)와 생득혜(生得慧), 그리고 이에 따르는 행(行)을 말하며, '논'이란 전(傳)하는 바에 따르면 무루의 혜를 낳게 하는 가르침[敎]을 말한다.6) 즉 이러한 온갖 혜와 논도 바로 그것(무루 정혜)을 낳게 하는 것의 자량(資量)이 되기 때문에 역시 아비달마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아비달마의] 명칭을 해석함에 있어 능히 자상(自相)을 보지(保持)하는 것,7) 그것을 법(法)이라 이름하니, 만약 그것이 승의의 법이라면 오로지 열반(涅槃)을 말하지만 법상(法相)의 법일 경우 그것은 4성제(聖諦)와 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8) 즉 [승의의 법인 열반에] 대향(對向)하고 [법상의 법인 4성제를] 대관(對觀)하기 때문에 '대법'이라 일컫게 된 것이다.
  대법에 대해 이미 해석하였다.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이 논을 [대법이라 이름하지 않고] '대법장(對法藏)'이라고 이름하게 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그것(대법)의 승의를 포섭하고 그것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6) 이하 『구사론』 상에서는 '전(傳)하는 바에 따르면', '전설(傳說, kila)에 의하면', '∼하였다고 전한다' 혹은 '∼라고 인정한다'거나 혹은 '허락[許]한다'는 등의 말이 종종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논주(論主) 세친 자신은 찬동하지 않는 내용이지만 전통적인 케시미르의 비바사사(毘婆沙師)들의 정설을 소개하는 경우에 사용하는 상투적인 용어이다.
7) 법(法, dharma)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여기서 말하고 있는 자상(自相) 혹은 자성(自性) 즉 다른 어떤 것과도 관계하지 않는 자기만의 특상을 지닌 것[任持自性]이고, 다른 하나는 사물에 대한 인식을 낳게 하는 것[軌生物解]이다. 즉 자기만의 자상을 지녀 인식의 궤범이 됨으로서 사물에 대한 종합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법'인 것이다.
8) 여기서 '이것'이란 보광(普光)에 의하면 무루혜·유루혜 및 제론(諸論)을 말하며, 법보(法寶)의 경우 오로지 무루혜라고 하였다.
[5 / 1397] 쪽
  이에 대법구사(對法俱舍)라고 하는 명칭을 설정하게 된 것이다.
  攝彼勝義彼依故 此立對法俱舍名
  
  논하여 말하겠다. 그러한 대법론(對法論)9) 중의 승의가 이 논 중에 포섭되어 들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장(藏, kosa)'이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 혹은 이 논은 그것에 근거하고 그것으로부터 이끌어져 나온 것으로, 바로 그것의 내용을 갈무리한 것이기 때문에 역시 '장'이라고 이름한 것이니, 이 같은 이유로 말미암아 이 논을 '대법장(즉 아비달마구사, Abhidharma ko a)'이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그 같은 아비달마를 설하게 된 것이며, 또한 누가 제일 먼저 아비달마를 설하였기에 지금 이 논을 지으면서 공경하여 해석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온갖 번뇌를 능히 소멸할 만한 뛰어난 방편으로
  택법을 떠나서는 그 무엇도 결정코 존재하지 않으니
  번뇌로 말미암아 세간은 존재의 바다를 떠도는 것
  이로 인해 부처님은 대법을 설하였다고 전한다.
  若離擇法定無餘 能滅諸惑勝方便
  由惑世間漂有海 因此傳佛說對法
  
  논하여 말하겠다. 택법(擇法)을 떠나서는 능히 온갖 번뇌[諸惑]를 소멸할 만한 그 어떤 뛰어난 방편도 존재하지 않는다. 즉 온갖 번뇌는 능히 세간을 생사의 대해(大海)를 떠돌게 하는 것으로, 이 같은 이유에서 부처님은 세간
  
9) 여기서 대법론이란 본 『구사론』에서 '근본 아비달마' 혹은 '본론(本論)'으로 일컬어지는 『품류족론(品類足論)』 『식신족론(識身足論)』 『법온족론(法蘊足論)』 『시설족론(施設足論)』 『계신족론(界身足論)』 『집이문족론(集異門足論)』의 6족론과 『발지론(發智論)』, 그리고 이에 대한 광박한 주석서인 『大毘婆沙論』을 말한다.
[6 / 1397] 쪽
  으로 하여금 택법을 획득하게 하기 위해 그 같은 대법을 설하였다고 전(傳)한다. 즉 대법을 설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제자라 하더라도 능히 온갖 법상에 대해 참답게 간택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불 세존께서 곳곳에서 산설(散說)한 아비달마를 대덕(大德) 가다연니자(迦多衍尼子, Katyayan putra) 등의 여러 위대한 성문들이 결집 안치하였으니,10) 이는 마치 대덕 법구(法救, Dharmatrata)가 결집한 「무상품(無常品)」 등의 오타남(柁南, Udana)의 게송의 경우와도 같다.11) 비바사사(毘婆沙師, Vaibha ika)들이 전(傳)하여 설(說)하는 바는 이상과 같다.
  그렇다면 어떠한 법을 일컬어 그러한 대법에서 간택된 법이라고 하며, '이로 인해 부처님은 대법을 설하였다고 전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유루(有漏)와 무루(無漏)의 법이 있는데
  도제(道諦)를 제외한 그 밖의 유위에는
  누(漏)라는 번뇌가 따라 증가[隨增]하니
  그래서 유루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有漏無漏法 除道餘有爲
  於彼漏隨增 故說名有漏
  
  무루는 말하자면 도제와
  아울러 세 가지의 무위
  이를테면 허공과 두 가지 멸(滅)이니
  
10) 가다연니자는 불멸(佛滅) 300년 무렵 서북인도에서 출세한 대논사로서, 『발지론』 20권을 지어 설일체유부 교학을 확립함으로써 이 부파의 비조가 되었다.
11) 불교사에 있어 법구는 3인이 있는데, 여기서의 법구는 불멸 300년 무렵에 출세한 법구(『바사(婆沙)』 회중(會中)의 법구는 불멸 400년 무렵 출세한 인물이며, 『잡심론(雜心論)』의 법구는 불멸 600년 무렵에 출세한 인물임)로, 그는 불타가 감흥에서 설한 경문과 송문(Ud na, 감흥어 혹은 無問自說)을 「무상품」 등으로 분류하여 결집하였다고 전한다. 이것이 바로 『법집요송경(法集要頌經)』이다.
[7 / 1397] 쪽
  이 중의 허공은 장애를 갖지 않는 것이다.
  無漏謂道諦 及三種無爲
  謂虛空二滅 此中空無礙.
  
  택멸(擇滅)이란 말하자면 이계(離繫)로서
  계박하는 것에 따라 각기 다르며
  마땅히 생겨나야 할 법이 끝내 장애 되면
  (택멸과는) 다른 비택멸을 획득한다.
  擇滅謂離繫 隨繫事各別
  畢竟礙當生 別得非擇滅
  
  논하여 말하겠다. 일체의 법을 설함에 있어 간략히 말하면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말하자면 유루와 무루가 그것이다.
  유루법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도제(道諦)를 제외한 그 밖의 유위법(有爲法)이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거기에는 온갖 누(漏)가 동등하게 따라 증가[隨增]하기 때문이다.12) 그리고 멸제(滅諦)와 도제를 반연(攀緣)하여서도 온갖 '누'는 생겨나지만 따라 증가하지 않기 때문에 유루가 아니다. '따라 증가하지 않는다'고 하는 뜻에 대해서는 「수면품(隨眠品)」 중에서 마땅히 설하게 될 것이다.13)
  유루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무루(無漏)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도성제(道聖諦)와 세 가지 무위를 말한다.
  
12) '누(漏, srava)'란 누설의 뜻으로, 6근문(根門)으로부터 누설된 것 즉 번뇌를 말함. 즉 번뇌는 어떠한 법을 인연으로 하여 생겨나는 것으로, 청정법에 대해서는 수증(隨增, 隨順增長의 준말)하지 않는데 반해 염오법을 만나면 수증한다. 곧 이러한 수증의 원인이 되는 것을 유루법이라고 이름한다.
13) 멸·도제를 대상(소연)으로 하여서는 탐 등의 번뇌(즉 漏)가 수증하지 않기 때문에(본론 권제19, p.890 참조), 그것은 무루이다.
[8 / 1397] 쪽
  무엇을 세 가지 무위라고 하는 것인가?
  허공(虛空)과 두 가지의 멸(滅)이다.
  두 가지의 멸이란 무엇인가?
  택멸(擇滅)과 비택멸(非擇滅)이니, 이러한 허공 등의 세 종류의 무위와 도성제를 무루법이라 이름한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거기서는 온갖 '누'가 따라 증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에서 간략히 설한 세 가지 무위 중에서 허공은 다만 무애(無礙 : 공간적 점유·장애성을 지니지 않는 것)를 본질로 하는 것으로, 어떠한 것도 장애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색(色)이 그 가운데에서 작용[行]하게 되는 것이다.
  14) 그리고 택멸은 이계(離繫, visa yoga)를 본질로 하는 것으로, 온갖 유루법의 계박을 멀리 떠나 해탈을 증득하는 것을 일컬어 택멸이라고 한다. 즉 '택'이란 이를테면 간택(簡擇)을 말하는 것으로, 바로 혜(慧)의 차별이다. 즉 [이와 같은 무루의 혜는] 4성제를 각기 개별적으로 간택하기 때문에, 바로 이 같은 간택력에 의해 획득된 멸을 일컬어 '택멸'이라고 하였다. 이는 마치 소에다 멍에를 멘 수레를 우차(牛車)라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중간의 말을 생략하여 버렸기 때문에 이 같이 설하게 된 것이다.15)
  일체의 유루법은 동일하게 택멸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어째서인가?
  계박되는 것[繫事]에 따라 다르다. 이를테면 계박되는 것의 수량에 따라 계박을 떠나는 것[離繫事]의 수량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견고소단(見苦所斷)의 번뇌의 멸을 증득할 때 마땅히 일체소단
  
14) 허공( k a)이란 말하자면 절대공간으로 일체의 물질적 변화를 제거할 때 남는 존재이다. 즉 유부에 의하면 시간(k la 혹은 adhvan, 世路)은 유위제법의 변화상태를 이름한 것이기 때문에 단순한 개념에 지나지 않지만 공간은 그 자신 공간적 점유성 혹은 장애성을 지니지 않아[無礙] 공간적 점유성 그 자체인 물질로 하여금 운동하게 하는 근거로서, 그 자체 불생불멸이기 때문에 무위라고 하는 것이다.
15) 소에 멍에를 멘 수레[牛所駕車]를 줄여 '우차(牛車)'라고 하듯이, 간택력에 의해 획득된 멸[擇力所得滅]을 줄여 '택멸'이라고 하였다는 뜻.
[9 / 1397] 쪽
  (一切所斷)의 번뇌의 멸도 증득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이와 같다고 한다면 [견고소단의 대치도를 제외한] 그 밖의 대치도를 닦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고 말 것이다.16)
  그렇다면 [경에서는] 어떠한 뜻에 의거하여 멸에는 동류(同類)가 없다고 설한 것인가?
  멸에는 그 자체 동류인(同類因)의 뜻이 없으며, 또한 다른 법에 대해서도 동류인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거하여 이같이 설한 것으로, 동류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17)
  이상 택멸에 대해 논설하였다.
  마땅히 생겨날 법을 영원히 장애하여 비택멸을 획득한다. 이는 말하자면 미래법이 생겨나는 것을 능히 영원히 장애함으로써 획득하는 멸로서, 앞에서 언급한 택멸과 다르기 때문에 비택멸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즉 이것의 획득은 [혜의] 간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연을 결여하였기 때문이다. 예컨대 안(眼)과 의(意)가 하나의 색에 전념할 때 그 밖의 다른 색·성·향·미·촉 등은 그대로 과거로 낙사(落謝)하여 그러한 경계를 반연하는 5식신(識身) 등은 미래세에 머물러 필경 생겨날 수 없게 되는 것과 같다. 즉 그 같은 5식신 등은 능히 과거의 경계를 반연할 수 없기 때문으로, 인연이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비택멸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18)
  
16) 번뇌에는 견고(見苦)·견집(見集)·견멸(見滅)·견도소단(見道所斷)의 견도(見道)에 의해 끊어지는 견혹(見惑)과 수도(修道)에 의해 끊어지는 수혹(修惑)이 있으며, 이는 다시 3계(界) 9지(地)에 따라 여든여덟 가지 종류와 81품으로 나누어진다.(본론 「수면품」권제19, p.862를 참조할 것) 따라서 택멸무위 역시 결코 단일하지 않으며, 번뇌의 수만큼 존재한다. 만약 그렇지 않고 택멸이 단일하다면, 그것은 무루혜의 첫 번째 단계인 고법지인(苦法智忍)에 의해 바로 증득될 것이므로 그 후 또 다른 실천도를 닦을 필요가 없게 된다는 뜻.
17) 무위 택멸은 생겨난 과(果)가 아니기 때문에 동류인·등류과의 인과관계에 제약되지 않는다. 이는 다만 견·수소단의 대치도에 의해 증득된 결과[離繫果]로서 유위의 원인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이 또한 유위의 결과를 낳는 것이 아니다.(이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6, p.300을 참조할 것)
18) 택멸무위가 무루혜의 간택력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라면, 비택멸무위는 간택력에 의하지 않고 저절로 그렇게 되는[法爾] 무위를 말한다. 즉 유부의 이론에 따르면 일체의 존재는 과거·현재·미래 삼세에 걸쳐 실재하며, 미래법은 일정한 때 일정한 조건하에서 생기 현현(현재)하지만, 그 같은 조건을 결여한 그것은 잠세태(潛勢態)로서 영원히 미래에 머물게 된다. 이를 연결불생법(緣缺不生法), 혹은 필경불생법(畢竟不生法)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에 소멸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불생불멸인 이것도 일종의 무위법으로 일컬어지는 것이다.
[10 / 1397] 쪽
  그리고 법의 멸을 획득하는 것에 대해 마땅히 4구(句)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혹 어떤 제법의 경우는 오로지 택멸만을 획득하니, 이를테면 온갖 유루로서 과거와 현재에 생겨난 법이 그것이다. 혹 어떤 제법의 경우는 오로지 비택멸 만을 획득하니, 이를테면 불생법이면서 무루와 유위법이 바로 그것이다. 혹 어떤 제법은 두 가지의 멸을 함께 획득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그 같은 불생의 온갖 유루법이 바로 그것이다. 혹 어떤 제법은 두 가지의 멸을 함께 획득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온갖 무루로서 과거와 현재에 생겨난 법이 바로 그것이다.19)
  이와 같이 세 가지 종류의 무위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앞에서 '도제를 제외한 그 밖의 유위법을 바로 유루라고 이름한다'고 설하였는데, 무엇을 일컬어 유위라고 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또한 온갖 유위의 법은
  말하자면 색 등의 5온(蘊)으로
  역시 또한 세로(世路)·언의(言依)
  유리(有離)·유사(有事) 등이라고도 한다.
  又諸有爲法 謂色等五蘊
  亦世路言依 有離有事等
  
19) 4구분별이란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명제에 대해 각각 일방[單]에 적용되는 사례와 양방에 적용되거나[俱是] 적용되지 않는[俱非] 사례를 분별하는 방식을 말한다. 이 경우 제법(諸法) 중 유루로서 과거·현재에 이미 생겨난 법[已生法]은 연결불생법(緣缺不生法)의 조건을 결여하였기 때문에 오로지 택멸만을 획득하며, 아직 생겨나지 않은 유위법은 불생법이기에, 무루법은 과실이 없어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오로지 비택멸만을 획득하며, 유루의 불생법은 유루라는 점에서 마땅히 택멸을, 불생법이라는 점에서 비택멸을 획득할 것이며, 과거·현재에 생겨난 무루법은 이미 생겨난 법일지라도 무루이기에 양자 모두를 획득하지 못한다.
 
[11 / 1397] 쪽
  논하여 말하겠다. '색 등의 5온'이란 이를테면 처음의 색온(色蘊)으로부터 시작하여 내지는 식온(識蘊)을 말한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법은 모두 유위에 포섭되니, 다 같이 조작(造作)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 같은 다섯 가지의 법 중의 그 어떠한 법도 하나의 연(緣)에 의해 생겨난 것은 없다. 그리고 이것도 그것과 한 종류로서, 그렇기 때문에 미래의 법도 [그것이 생기하는 데] 방해받는 일이 없으니, 마치 젖과 같고 땔감과 같다.20)
  이러한 유위법은 역시 또한 '세로(世路, adhvan)'라고도 하니, 이미 작용[已行 : 과거]하였고, 지금 바로 작용[正行 : 현재] 하며, 응당 작용[當行 : 미래] 할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며, 혹은 무상(無常)에 의해 탄식(呑食)되는 것이기 때문이다.21) 혹은 '언의(言依, kathavastu)'라고도 한다. 여기서 '언'이란 말하자면 말[語言]로서, 이러한 말의 소의는 바로 명사적 단어[名]와 함께하는 의미[義]이다.22) 즉 이와 같은 언의는 일체의 유위제법을 모두 포섭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품류족론』에서 설한 바에 위배될 것이니, 거기에서 "언의는 18계에 포섭된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23)
  혹은 유위를 '유리(有離, sani sara)'라고도 이름한다. 여기서 '리(離)'란 영원히 떠나는 것으로, 바로 열반을 말한다. 즉 일체의 유위법은 바로 그 같
  
20) 여기서 '이것'은 미래법, '그것'은 과거·현재 법을 말한다. 즉 이는 과거·현재 법은 중연(衆緣)에 의해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유위(samsk ta)라고 할 수 있겠지만 미래법은 아직 조작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위라고 할 수 없지 않겠는가 하는 난문에 대한 답이다. 미래법은 아직 조작되어 생겨나지 않은 법이지만 생기의 가능성에 따라 유위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젖은 유방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유방 속에 있는 것도 젖이라 할 수 있으며, 땔감은 타고 있는 것 자체를 말하지만 일반의 연료도 그럴 가능성이 있으므로 땔감이라 할 수 있는 것과 같다는 뜻.
21) 여기서 세로(adhvan)는 과정(過程)의 뜻이다. 즉 제 유위법은 삼세의 과정 중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일컬은 것이다. 유부교학상에 있어 시간(k la)이란 객관적으로 독립된 실체, 이른바 '법'이 아니라 다만 생멸변천하는 유위제법을 근거로 설정된 개념일 뿐이다. 이를테면 세간에서의 시간[世]은 유위제법을 근거(路)로 하기 때문에 세로(世路)라고 하는 것이다. (보광, 『구사론기』권제1) 따라서 시간은 바로 유위의 이명(異名)일 뿐이다.
22) 명(名, nama)은 책상·하늘과 같은 명사적 단어를 말하는 것으로, 말의 근거는 이 같은 단어 그 자체[전통술어로 能詮의 名]가 아니라 그것에 의해 드러나는 의미[所詮의 法]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5, p.257) 참조.
23) 『품류족론(品類足論)』 권제9(대정장26, p. 728상), "言義事十八界·十二處·五蘊攝."
[12 / 1397] 쪽
  은 '리'를 지녔기 때문에 이같이 이름한 것이다. 혹은 유위를 '유사(有事, savastuka)'라고도 이름하니, 원인을 지녔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사'란 바로 원인의 뜻이다.
  비바사사(毘婆沙師)가 전(傳)하여 설(說)하는 바는 바로 이와 같으니, 이상과 같은 따위의 종류가 바로 유위법을 차별 짓는 여러 명칭들이다.
  
  여기서 설하고 있는 유위법 중에서 [유루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유루를 취온(取蘊)이라고도 이름하며
  역시 또한 유쟁(有諍)이라고도 설하며
  아울러 고(苦)·집(集)·세간(世間)
  견처(見處)·3유(有) 등이라고도 한다.
  有漏名取蘊 亦說爲有諍
  及苦集世間 見處三有等
  
  논하여 말하겠다.
  여기서는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취온(取蘊)에 대해 말하고자 함이다. 이를테면 역시 '온'이라고 이름하는 것 중의 혹 어떤 것은 오로지 '온'일 뿐으로 취온이 아닌 것이 있으니, 말하자면 무루의 행(行)(즉 무루온)이 바로 그것이다. 즉 번뇌를 일컬어 '취(取, up d na)'라 한 것으로, [유루의] 온은 취로부터 생겨났기 때문에 '취온'이라고 이름하였으니, 이는 마치 풀[草]이나 겨[糠]에서 생겨난 불을 초강화(草糠火)라고 하는 것과 같다. 혹은 [유루의] 온은 취에 속하기 때문에 '취온'이라고 이름하였으니, 이는 마치 신하가 왕에 속한 것을 '제왕의 신하'라고 하는 것과 같다. 혹은 [유루의] 온은 취를 낳기 때문에 '취온'이라고 이름하였으니, 이는 마치 꽃이나 과실을 낳는 나무를 화과수(花果樹)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유루법을 또한 역시 '유쟁(有諍, sara a)'이라고도 이름한다. 즉 번뇌를 일컬어 '쟁'이라 말한 것으로, 그것은 선한 품성을 자극하여 동요[觸動]
  
[13 / 1397] 쪽
  하게 하기 때문이며, 자신과 타인에게 손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즉 [유루법에는] 이 같은 '쟁'이 따라 증가[隨增]하기 때문에 '유쟁'이라 이름한 것으로, 이는 마치 유루의 경우와도 같다.24)
  [유루법을] 또한 역시 '고(苦, du kha)'라고도 이름하니, 성심(聖心)에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역시 '집(集, samudaya)'이라고도 이름하니, 능히 괴로움을 초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역시 '세간(世間, loka)'이라고도 이름하니, 가히 [생(生)·주(住)·이(異)·멸(滅)의 4상(相)에 의해] 훼손 파괴되며, [성도(聖道)에 의해] 대치(對治)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역시 '견처(見處, d isth na)'라고도 이름하니, 견(見)이 거기에 머물며,25) 수면(隨眠, 번뇌의 異名)을 수증(隨增)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역시 '3유(有)'라고도 이름하니, [유루법은] 존재[有]의 원인이자 근거이며, 세 가지 존재(욕유·색유·무색유)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종류가 바로 유루법으로서, 뜻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색 등의 5온을 일컬어 유위법이라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색온이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색이란 오로지 5근(根)과
  5경(境), 그리고 무표(無表)이다.
  色者唯五根 五境及無表
  
  논하여 말하겠다. 5근이라고 함은 이른바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근(根)이 바로 그것이다. 5경이라고 함은 이른바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 경(境)이 바로 그것이다.
  
24) 앞에서 유루란 '누(漏)'를 수증(隨增)하기 때문에 '유루'라고 이름하였다고 하였다.
25) 여기서 견은 유신견(有身見)·변집견(邊執見)·사견(邪見)·계금취(戒禁取)·견취(見取)의 5견을 말함.(이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19, p.861 참조.)
[14 / 1397] 쪽
  [본송에서] '그리고 무표'라고 함은 무표색을 말하니, 오로지 바로 이 같은 수량(5근·5경·무표의 열한 가지)에 의거하여 색온이라는 명칭을 설정한 것이다.
  
  여기서 먼저 5근의 상(相)에 대해 마땅히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그러한 식(識)의 근거가 되는 정색(淨色)을
  이름하여 안(眼) 등의 5근이라고 한다.
  彼識依淨色 名眼等五根
  
  논하여 말하겠다. [본송에서] '그러한'이라고 함은 이를테면 앞에서 논설한 색 등의 5경을 말하며, '식'이란 바로 색·성·향·미·촉에 대한 인식을 말한다. 즉 '그러한 식'의 소의(所依)가 되는 다섯 가지 종류의 정색(淨色)을 그 순서대로 바로 안 등의 5근이라고 함을 알아야 할 것으로,26) 세존께서 설한 바와 같다. 즉 "필추(苾芻)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안(眼)은 말하자면 내처(內處)로서 사대소조(四大所造)의 정색을 본질로 한다"고 이와 같이 널리 설하였던 것이다.27)
  혹은 다시 [본송에서] '그러한'이란 이를테면 앞에서 논설한 안 등의 5근을 말하며, '식(識)'이란 바로 안·이·비·설·신의 인식을 말한다. 즉 '그러한 식'의 근거가 되는 다섯 가지 종류의 정색을 안 등의 근이라 이름한 것으로, 이는 바로 안 등은 식의 소의지(所依止)가 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바로 『품류족론』(권제1)에 따른 것으로, 예컨대 그 논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무엇을 일컬어 안근이라고 하는가? 안식(眼識)의 소의로서, 정색을 본질[性]로 한다"고 이와 같이 널리 설하고 있는 것이다.
  
26) 색에 대한 식(識)의 소의가 되는 정색(淨色)을 안근이라 하고, 내지는 촉에 대한 식의 소의가 되는 정색을 신근이라 이름한다는 뜻. 여기서 정색(r pa pras da)이란 광명이 차단됨이 없는 맑고 투명한 색이라는 정도의 의미.
27) 『잡아함경』 권제13 제322경(대정장2, p. 91하).
[15 / 1397] 쪽
  5근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다음으로 5경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색(色)에는 두 가지, 혹은 스무 가지가 있고
  성(聲)에는 오로지 여덟 가지가 있으며
  미(味)에는 여섯 가지, 향(香)에는 네 종류가 있으며
  촉(觸)은 열한 가지를 자성으로 한다.
  色二或二十 聲唯有八種
  味六香四種 觸十一爲性
  
  논하여 말하겠다. '색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함은 첫 번째가 현색(顯色, var a-r pa)이고, 두 번째가 형색(形色, sa thana-r pa)이다. 현색에는 다시 네 가지가 있으니, 청(靑)·황(黃)·적(赤)·백(白)이 바로 그것이며, 그 밖의 현색은 바로 이러한 네 가지 색의 차별이다. 또한 형색에는 여덟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장(長)이 첫 번째이며 부정(不正 : 평평하지 않음)이 맨 마지막이다. '혹은 스무 가지가 있다'고 함은 이러한 색처를 다시 스무 가지로 설한 것으로, 이를테면 청·황·적·백·장(長)·단(短)·방(方)·원(圓)·고(高)·하(下)·정(正)·부정(不正)·연기[煙]·구름[雲]·먼지[塵]·안개[霧]·그림자[影]·빛[光]·밝음[明]·어둠[闇]을 말한다.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공(空)도 하나의 현색으로, 색처의 스물한 번째이다"고 설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정(正)이란 형태의 평등함(즉 평평함)을 말하며, 형태의 평등하지 않음을 일컬어 '부정'이라고 하였다. 또한 땅으로부터 물의 기운이 비등한 것을 설하여 '안개'라고 하였으며, 태양의 불꽃을 '빛'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리고 달이나 별, 화약, 보주(寶珠), 번개 등의 온갖 번쩍임[焰]을 '밝음'이라고 하였고, 광명을 장애하여 생겨난 것으로서 그 가운데로 여타의 다른 색을 볼 수 있는 것을 '그림자'라고 이름하였으며, 이와 반대되는 것을 '어둠'이라고 하였다. 그 밖의 색은 알기 쉽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더 이상 해석하지 아니
  
[16 / 1397] 쪽
  한다.
  그런데 혹 어떤 경우 색처(色處)로서 현색은 갖지만 형색은 갖지 않는 것 있으니, 이를테면 청·황·적·백·그림자·빛·밝음·어둠이 바로 그것이다. 혹은 어떤 경우 색처로서 형색은 갖지만 현색은 갖지 않는 것이 있으니, 이를테면 장(長) 등의 일부인 신표업(身表業)의 자성이 바로 그것이다.28) 혹은 어떤 경우 색처로서 현색도 갖으며 형색도 갖는 것이 있으니, 이를테면 그 밖의 색이 바로 그러하다.
  그렇지만 유여사(有餘師)는 설하기를, "오로지 빛과 밝음에는 현색 만이 존재하고 형색은 존재하지 않으니(그 밖의 청·황·적·백·그림자·어둠에는 형색도 존재한다), 현재 세간을 보건대 청 등의 색처에는 길이[長] 따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하나의 실체[一事, eka dravya]에 어떻게 현색과 형색이 함께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29)
  이러한 하나의 실체 중에서 두 가지가 모두 알려질 수 있기 때문에 [이같이 설한 것으로], 이 같은 하나의 실체 가운데 [현·형의 두 색이] 존재한다고 한 것은 유지의(有智義) 즉 인식론적 의미에서이지 유경의(有境義) 즉 존재론적 의미에서가 아니다.(비바사사의 대답)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신표업 중에도 역시 마땅히 현색에 대한 앎이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신표업 역시 현·형의 두 가지 색을 본질로 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논주 세친의 평석)30)
  
28) 수족의 굴신[身表業] 등은 오로지 형색[身形]을 본질로 하는 것으로서(이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13, p.598 참조), 색채 즉 현색을 갖지 않은 것이다.
29) 이는 法寶의 『구사론소』 권제1여(餘)(대정장41, p. 478중)에 의하면 경부(經部)의 난문(難問). 여기서 실체[事, dravya]는 극미(極微, param u: 5근 5경 등의 물질을 분할하여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최소 단위, 주52를 참조할 것)를 말함. 식유필경(識有必境)의 전제에서 출발한 유부는 존재론적 의미(有境義, the sense of 'to exist')에서가 아니라 인식론적 의미(有智義, the sense of 'to know')에서 현색과 형색은 동시에 알려지기 때문에 안처소섭색(眼處所攝色)은 이 두 가지를 본질로 한다고 주장한데 반해 경량부에서는 현색만이 실재할 뿐 형색은 그것에 의해 일시 설정된 언어적 가설일 뿐이라고 주장한다.(본론 권제13, p.598 참조.)
30) 이는 앞의 답이 불충분하다는 사실을 밝힌 것으로, 만약 인식론적 의미[有智義]에서 현색·형색의 구별을 설하였다면, 앞에서 형색만이 있고 현색을 갖지 않는다고 한 신표업의 경우에도 흰손이 때리고 검은 발이 찬다고 하듯이 현색의 인식이 가능하기 때문에 무현유형[無顯唯形]이라고 말할 수 없지 않은가 하는 힐난. 이는 곧 논주 세친이 경량부의 형색가립론[形色假立論]에 동조함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17 / 1397] 쪽
  색처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제 마땅히 성처(聲處)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하리라.
  소리[聲]에는 오로지 여덟 가지의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유집수(有執受) 혹은 무집수(無執受)의 대종(大種)을 근거로 한 것과 아울러 유정명(有情名)과 비유정명(非有情名)의 차별에 따라 네 가지가 되며, 이를 다시 가의(可意)와 불가의(不可意)로 차별하여 여덟 가지가 되는 것이다.31)
  여기서 유집수의 대종을 근거로 한 소리란 이를테면 말이나 손 따위에 의해 발성되는 음성을 말하며, 바람·숲·강 등에 의해 일어나는 음성을 무집수 대종을 근거로 한 소리라고 한다. 그리고 유정명의 소리란 이를테면 어표업(語表業)을 말하며, 그 밖의 소리는 바로 비유정명의 소리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어떤 소리는 유집수 대종과 무집수 대종 모두를 근거로 하는 경우가 있으니, 손과 북 등이 결합하여 생겨나는 소리와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비바사사들이] 하나의 현색 극미가 [내외의] 두 가지 종류의 사대소조(四大所造)라고는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32) 소리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성처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제 마땅히 미처(味處)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하리라.
  
31) 여기서 유집수 대종(大種)이란 감각이 있는 유정물의 지·수·화·풍 4대종을 말하며, 무집수 대종은 감각이 없는 무정물의 4대종을 말한다. 유정명과 비유정명은 유정의 말과 비유정의 말이며, 가의성(聲)과 불가의성은 듣기에 즐거운 소리와 불쾌한 소리이다. 따라서 성처의 8종이란 유집수 대종에 근거한 소리로서 언어적인 즐거운 소리[有情名·可意聲 : 이를테면 노래소리], 언어적인 불쾌한 소리[有情名·不可意聲 : 꾸짖는 소리], 비언어적인 즐거운 소리[非有情名·可意聲 : 장단에 맞춘 손뼉소리], 비언어적인 불쾌한 소리[非有情名·不可意聲 : 주위를 환기시키는 손뼉소리], 그리고 무집수의 대종에 근거한 소리로서, 언어적인 즐거운 소리(이를테면 변화인의 부드러운 소리), 언어적인 불쾌한 소리(변화인의 꾸짖는 소리), 비언어적인 즐거운 소리(악기 소리), 비언어적인 불쾌한 소리(천둥소리)가 그것이다.
32) 하나의 현색극미는 한 조의 4대종(大種)을 근거로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소리 만이 예외적으로 두 대종(무집수의 북과 유집수의 손)에 의해 생겨날 이유가 없다는 뜻. 이는 논주 세친의 평파이다.
[18 / 1397] 쪽
  맛[味]에는 여섯 가지의 종류가 있으니, 달고[甘], 시고[酢], 짜고[鹹], 맵고[辛], 쓰고[苦], 담백함[淡]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미처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제 마땅히 향처(香處)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하리라.
  향에는 네 가지의 종류가 있으니, 호향(好香)·오향(惡香)·등향(等香)·부등향(不等香)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33) 그러나 본론(本論) 중에서는 향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설하고 있으니, 호향과 오향과 평등향이 바로 그것이다.34)
  향처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제 마땅히 촉처(觸處)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하리라.
  촉에는 열한 가지가 있으니, 4대종(大種)과 매끄러운 성질[滑性], 거친 성질[澁性], 무거운 성질[重性], 가벼운 성질[輕性], 그리고 차가움[冷], 허기짐[飢], 목마름[渴]을 말한다. 이 중의 대종에 대해서는 마땅히 뒤에서 널리 논설하리라. 그리고 유연(柔軟)함을 일컬어 '매끄러운 것'이라 하였고, 거칠고 강함[麤强]을 '거친 것'이라고 하였으며, 칭량(稱量)할 수 있는 것을 '무거운 것'이라 하였고, 그 반대를 '가벼운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따뜻하기를 바라는 것을 일컬어 '차가움'이라 하였고, 먹기를 바라는 것을 일컬어 '허기짐'이라고 하였으며, 마시기를 바라는 것을 일컬어 '목마름'이라고 하였다. 즉 이러한 세 가지의 촉은 모두 원인에 따라 결과의 명칭을 설정한 것이기 때문에 이와 같이 [차가움·허기짐·목마름이라고] 설하게 된 것으로, 어떤 게송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
  
  제불(諸佛)이 출현하심은 즐거움이며
  정법(正法)을 연설하시는 것도 즐거움이며
  승가의 대중이 화합하는 것도 즐거움이며
  다 함께 수행하며 용맹정진하는 것도 즐거움이라네.35)
  
33) 여기서 등향이란 소의신(所依身)을 증장시키는 향을 말하고, 부등향이란 감손시키는 향을 말한다.
34) 여기서 본론은 『품류족론』을 말함. 즉 이 논 권제1(대정장26, p. 692하)에 나온다.
35) 『불설신세경(佛說新歲經)』 (대정장1, p. 860하)에 이와 유사한 게송이 나온다. 이는 즉 불타의 출현 그 자체는 즐거움이 아니지만 능히 줄거움을 낳기 때문에 제불의 출현을 즐거움이라 할 수 있다는 뜻으로, 다시 말해 원인에 대해 결과의 명칭을 설정할 수 있다는 사실의 예증으로 인용된 게송일 뿐 아비달마교학 상의 별도의 의미는 없다.
[19 / 1397] 쪽
  그리고 색계(色界) 중에는 허기짐과 목마름의 촉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 밖의 촉은 존재한다. 즉 그 세계에서 입는 의복은 유별나서 칭량할 수 없는 것이지만 많이 쌓이게 되면 칭량할 수 있다. [따라서 무거움 등도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거기에서는 차가움의 촉이 능히 [소의신을] 감손(減損)시키는 일은 없을지라도 능히 이익 되게 하는 일은 있으니, 전(傳)하여 설(說)하는 바가 이와 같다.36)
  이상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종류의 색처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그런데 어떤 때의 안식(眼識)은 하나의 사물[一事]을 반연(攀緣)하여 생겨나는 경우가 있으니, 그럴 때에는 그것을 각기 다르게 요별(了別)한다. 또 어떤 때의 안식은 다수의 사물을 반연하여 생겨나는 경우가 있으니, 그럴 때에는 그것을 다르게 요별하지 않는다.37) 예컨대 군인들의 무리나 산림 등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현색·형색, 그리고 구슬이나 보석의 무더기 따위를 멀리서 관찰할 때가 바로 그러하다. 그리고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耳) 등의 온갖 식(識)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설하기를, "신식(身識)은 지극히 많은 [실체를 반연하여 일어나는] 것 같지만 다섯 가지 촉을 반연하여 일어나니, 이를테면 4대종과 매끄러운 성질 따위 가운데 어느 한 가지이다"고 하였다. 또한 어떤 이는 설하기를, "[신식이 반연하는 실체는] 지극히 많으니, 열한 가지 촉 모두를 반연하여 일어난다"고 하였다.38)
  
36) 보광(普光)에 의하면 경부는 '색계에는 차가움의 촉이 존재하지 않는다.' 논주 세친은 이에 따라 비바사사의 이 같은 주장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전설(傳說)'이라 논설한 것이다.
37) 청·황 등의 각각의 색을 개별적으로 인식하는 경우도 있고, 그러한 개개 색의 집합을 총체적으로 인식하는 경우도 있다는 뜻. 그럴 때 전자는 그 차별이 분명하지만 후자의 경우 분명하지 않다.
38) 『대비바사론』 권128(대정장27, p. 665)에는, 신식(身識)은 열한 가지 촉 각각을 반연하여 생겨난다, 4대종과 그 밖의 어느 하나 등 다섯 가지를 반연하여 생겨난다, 열한 가지 모두를 반연하여 생겨난다는 3설이 등장하는데, 여기서의 설은 제2설과 제3설이다. 바사(婆沙)에서는 제3설을 정의(正義)로 평취한다.(같은 논, 권13, p. 65상에도 나온다.)
[20 / 1397] 쪽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5식은 경계를 모두 반연하기 때문에 5식신(識身)은 응당 마땅히 공상(共相)의 경계만을 취하고 자상(自相)의 경계는 취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39)
  처(處)의 자상에 근거[約]하여 5식신이 자상의 경계를 취한다고 인정[許]하기 때문에 사물의 자상을 취하는 것이 아니니,40) 여기에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여기서 마땅히 생각하고 헤아려 보아야 할 것이다. 신(身)과 설(舌)의 두 근에 양 경계(촉경·미경)가 동시에 이르렀을 때 어느 것의 인식이 먼저 일어나게 되는 것인가?
  경계의 강성(强盛)함에 따라 그것(강성한 것)에 대한 인식이 먼저 생겨난다. 그러나 만약 경계의 강성함이 균등한 것이라고 한다면 설식이 먼저 일어나니, 먹고 마심[食飮]이 신식을 인기(引起)하여 상속하게 하기 때문이다.
  
  근(根)과 경(境), 그리고 경계를 취하는 것의 상(相)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제 다음으로 마땅히 무표색(無表色, avij~apti-r pa)의 상(相)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39) 전5식은 개념적 언어적 한정을 떠나 다른 어떤 것과도 관계하지 않는 사물 그 자체의 상(自相, svalak a a)만을 인식할 뿐 보편상(共相, s m nya lak a a)을 인식하는 것이 아닌데, 지금의 어떤 이의 설처럼 5식이 다수의 대상을 동시에 인식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공상에 대한 인식이라고 해야 한다는 난문.
40) 자상에는 6근·6경의 12처 각각의 자상(處自相, 이를테면 색·성·향 등)과 처의 자상이 더욱 세분된 사물의 자상(事自相, 이를테면 청·황·적·백 등)이 있는데, 지금 여기서 '5식신은 자상만을 취(요별)한다'고 하는 일반적 규칙은 처의 자상에 대해 말한 것이지 사물에 자상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며, 또한 역시 5식신이 공상을 취한다고 하는 것도 보다 세분된 사물의 공상에 대해 말한 것일 뿐이지 처의 공상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는 어떠한 과실도 없다는 뜻.
 
[21 / 1397] 쪽
  난심(亂心)과 무심(無心) 등을
  따라 유전[隨流]하여 정(淨)·부정(不淨)이 되는 것으로
  대종소조(大種所造)를 본질로 하기 때문에
  이에 따라 '무표색'이라고 설한 것이다.
  亂心無心等 隨流淨不淨
  大種所造性 由此說無表
  
  논하여 말하겠다. 여기서 '난심'이란 이와는 다른 그 밖의 마음을 말하고,41) '무심'이란 무상정(無想定)과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며,42) '등'이라고 하는 말은 불난심(不亂心 : 행위할 때의 마음과 다르지 않은 마음)과 유심(有心)을 나타낸다.
  그리고 서로 유사(相似)하게 상속(相續)하는 것을 '따라 유전[隨流]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선과 불선을 일컬어 '정·부정'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온갖 득(得)에 의해 서로 유사하게 상속하는 것과 구별하기 위해 다시 '대종소조(大種所造)'라고 말한 것이다.43)
  또한 『대비바사론』에서는 설하기를, "조(造)는 바로 인(因)의 뜻이다"고 하였으니, 말하자면 [대종은 소조색에 대해] 생(生) 등의 다섯 가지 종류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44) 즉 [무표색이라고 하는] 명칭을 건립하게 된 근거를 나타내기 위해 [본송 중에서] '이에 따라'라고 말한 것으로,45) 무표는 비록 유
  
41) '이와는 그 밖의 마음'이란 행위할 때의 마음과는 다른 마음, 이를테면 행위할 때의 마음이 선이면 선 이외의 불선·무기심을 말하며, 행위할 때의 마음이 불선이면 그 이외의 선·무기심을 말한다.
42) 무상정(sa j~ -sam patti)과 멸진정(nirodha-sam patti)은 제4정려(靜慮)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포섭되는 명상의 상태로서, 본론 권제5(p.216)에서 논설되고 있다.
43) 즉 무표색이란 이상의 네 가지 마음을 통해 항상 행위의 상사(相似) 상속을 가능하게 하는 힘으로서, 무표색의 본질이 선·불선이기 때문에 정·부정이 되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이와 같은 성격의 득(得, 불상응행법의 하나)과 구별하기 위해 대종소조라고 규정하였다.
44) 『대비바사론』 권제127(한글대장경123,p.46). 대종은 소조색에 대해 생(生)·의(依)·입(立)·지(持)·양인(養因) 등 다섯 가지의 원인이 된다.(본론 권제7, p.343을 참조할 것.)
45) 즉 무표색은 불가견(不可見) 무대(無對)이지만 대종을 원인으로 하여 생겨난 소조색이기 때문에 '색'이라고 할 수 있다는 뜻.
[22 / 1397] 쪽
  표업(有表業)과 마찬가지로 색업(色業)을 본질로 하는 것일지라도 밖으로 드러나 다른 이들이 알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표'라고 이름한 것이다.
  나아가 '설한 것이다'고 함은, 이는 바로 비바사사종[師宗]에서 주장하여 말한 것임을 나타낸다.46) 즉 [그들의 주장을] 간략히 설하면, 표업과 선정[定]에 의해 생겨난 선·불선의 색을 일컬어 '무표'라고 하였다.
  앞에서 '무표는 대종소조이다'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대종(大種)이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대종이란 이를테면 4계(界)로서
  지(地)·수(水)·화(火)·풍(風)을 말하니
  능히 보지(保持) 등의 작용을 성취하며
  견(堅)·습(濕)·난(煖)·동(動)을 본질로 한다.
  大種謂四界 卽地水火風
  能成持等業 堅濕煖動性
  
  논하여 말하겠다. 지·수·화·풍은 능히 자상(自相)과 소조색(所造色)을 보지하기 때문에 '계(界, dahtu)'라고 이름하였다. 이와 같은 4계를 또한 역시 '대종(mahabhuta)'이라고도 이름하니, 일체의 그 밖의 색(즉 소조색)의 소의가 되는 존재[性]이기 때문에, 즉 그 체(體)가 두루 광대하기 때문에, 혹은 지(地) 등이 증성하여 쌓인 무더기[聚]는 그 형상이 크기 때문에, 혹은 여러 가지의 크나큰 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에 ['대'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47)
  
46) 논주 세친은 경량부설에 따라 이 같은 무표색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는 단지 사종(師宗)이 '설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유부와 경량부의 무표색의 가실(假實)문제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13(p.607-615)에서 상세히 논의되고 있다.
47) 4대종은 그것을 제외한 그 밖의 소조색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 그 체(體)의 두루 광대함[寬廣]에 근거하여 '대'라고 하였다. 혹은 산이나 대지와 같은 것은 지(地)가 증성(增盛)된 것이고, 강이나 바다와 같은 것은 수(水)가, 화롯불이나 타오르는 불길은 화(火), 모래바람이나 회오리바람은 풍(風)이 증성된 것이기에 이러한 형상[相]의 크기에 근거하여 '대'라고 하였다. 혹은 화·수·풍 재(災)는 순서대로 초·제2·제3 정려, 혹은 그러한 색계의 기세간을 파괴하며, 지(地)는 능히 세계를 유지하기 때문에 그 작용[用]에 근거하여 '대'라고 이름하였다.(본론 12, p.586 참조.)
[23 / 1397] 쪽
  그렇다면 이러한 4대종은 능히 어떠한 작용[業]을 성취하는 것인가?
  그것들은 순서대로 능히 보지(保持)·화섭(和攝)·성숙(成熟)·증장(增長)의 네 작용을 성취하니, 지계(地界)는 [물체를] 능히 보지하며, 수계는 능히 인섭하며, 화계는 능히 성숙하게 하며, 풍계는 능히 증장하게 한다. 여기서 증장[長]이란 이를테면 '증가시키고 왕성하게 하는 것[增盛]'을 말한다. 혹은 또한 '유동시켜 끌어당긴다[流引]'는 뜻이다.
  대종의 작용이 이미 이러하다면, 그 자성은 어떠한가?
  그것들은 순서대로 견고성·습윤성·온난성·운동성을 그 본질로 하니, 이를테면 지계는 견고한 성질[堅性]이며, 수계는 축축한 성질[濕性]이며, 화계는 따뜻한 성질[煖性]이며, 풍계는 운동의 성질[動性]이다.
  즉 이러한 [풍계의 운동성]으로 말미암아 능히 대종과 소조색을 끌어당겨 그것들로 하여금 다른 곳에 이르러 상속 생기하게 하니, 이를테면 등잔불에 대해 숨을 불어 내쉬는 것과 같은 것이 바로 그러한 것으로, 그래서 '운동[動]'이라 이름한 것이다.
  또한 『품류족론(品類足論)』이나 계경(契經)에서는 말하기를, "무엇을 일컬어 풍계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가벼움 등으로서, 운동의 성질[動性]이다"고 하였다.48) 나아가 앞에서 가벼움의 성질[輕性, 7所造觸의 하나]을 설하여 소조색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풍계(즉 조색)는 마땅히 운동을 자성으로 삼는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품류족론』이나 계경에서는] 작용[業]을 들어 풍계 그 자체를 나타내었기 때문에 역시 또한 '가벼움'이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땅 등과 지(地) 등의 계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49)
  
48) 여기서 계경은 『잡아함경』(권제11,대정장2, p. 73상), 『품류족론』은 권제1(대정장26, p. 692하).
49) 이하 우리가 현실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可見] 땅·물·불·바람과 같은 가(假)의 4대와, 견(堅)·습(濕)·난(煖)·동(動)과 같은 자신의 고유한 성질과 작용을 갖는 실(實)의 4대 즉 4계와의 차이를 분별하고 있다.
[24 / 1397] 쪽
  게송으로 말하겠다.
  
  땅[地]이란 말하자면 현색과 형색으로
  세간의 언어적 관념[世想]에 따라 설정된 명칭이고
  물[水]과 불[火]도 역시 또한 그러하며
  바람[風]은 바로 계(界)이나 역시 그렇다고도 한다.
  地謂顯形色 隨世想立名
  水火亦復然 風卽界亦爾
  
  논하여 말하겠다. 땅이란 말하자면 현색과 형색으로, 색처(色處)를 본질로 하는 것(즉 소조색)이지만 세간의 언어적 관념[想]에 따라 일시 이러한 지(地) 즉 땅이라는 명칭을 설정하게 된 것이다. 즉 모든 세간 사람들이 땅의 상을 나타내고자 할 때에는 현색과 형색으로써 그 상을 나타내기 때문으로, 물과 불의 경우도 역시 또한 그러하다.
  그러나 바람은 바로 풍계이니, 세간에서도 움직이는 그것[動性]에 대해 바람이라는 명칭을 설정하기 때문이다. 혹은 땅 등이 세간의 언어적 관념에 따라 그 명칭이 설정된 것이듯이 바람에도 역시 현색과 형색이 있기 때문에 [본송에서] '역시 그렇다고 한다'고 말하였으니, 예컨대 세간에서 흑풍(黑風 : 모래바람)이니 단풍(團風 : 회오리바람)이니 하여 이것의 현색과 형색으로써 '풍'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안 등의 5근에서 시작하여] 마지막으로 무표색에 이르는 이러한 온을 설하여 '색(r pa)'이라고 한 것인가?
  이는 바로 변괴(變壞)하기 때문으로, 세존께서 설하신 바와 같다. 즉 "필추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변괴하기 때문에 색취온(色取蘊)이라 이름한다. 무엇이 능히 변괴시키는가? 이를테면 손이 닿기 때문에 바로 변괴하는 것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하셨던 것이다.50) 여기
  
50) 예컨대 빨리 가기[疾行, um ayati] 때문에 말(a va)이라 하고, 바로 가기[正行, gacchati] 때문에 소(go)라고 하듯이 변괴(變壞, r pyate)하기 때문에 색(r pa)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변괴(r pa a)란 뇌괴(惱壞, b dha )의 뜻이다.(『입아비달마론』권상 대정장28, p. 981하, "如變壞故, 或變礙故說名爲色. 如是卽說可惱壞義……如能疾行故名爲馬, 以能行故說名牛等") 이때 b dha a 즉 뇌괴란 viparin motp dana(변이를 낳는 것), 혹은 pratigh to r pe a[(다른) 색과 저촉하여 (그 생기를 장애하는 것)] 등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니지만(櫻部建, 『俱舍論의 硏究』, 동경 : 법장관, p. 164, 주1 참조), 전자의 경우 다른 유위제법과도 공통되는 상이기 때문에 유부아비달마에서는 통상 후자의 논의가 강조되고 있다. 본론에서는 다음의 '어떤 이의 설'임.
[25 / 1397] 쪽
  서 '변괴'란 바로 가히 그 허물어짐을 괴로워한다는 뇌괴(惱壞)의 뜻으로, 그래서 『의품(義品)』 중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는 것이다.51)
  온갖 욕망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항상 그것에 대한 희망을 일으키게 되나니
  만약 온갖 욕망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면
  그 허물어짐에 괴로워함[惱壞]이 마치 화살을 맞은 것과 같다.
  
  그렇다면 다시 색이 어째서 욕망의 '허물어짐에 괴로워하게 되는 것'인가?
  말하자면 욕망에 시달리고 괴롭혀지게 되는 것(즉 색)은 변괴(變壞)하여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변애(變礙)하기 때문에 색이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극미(極微)는 응당 색이라고 이름해서는 안 될 것이니, 변애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힐난은 옳지 않다. 즉 어떠한 극미도 각기 다른 처소에서 머무는, 다시 말해 한 극미가 독립적으로 머무는 일은 없으며, 여러 극미[衆微]가 취집(聚集)하여 머물기 때문에 '변애'의 뜻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52)
  
51) 여기서 『의품(義品)』은 보광이나 법보에 의하면 법구(法救)에 의해 결집된 것이지만, 남전(南傳)의 『경집(經集, S tta nipata)』 중의 「의품(atthaka vagga)」을 말함. 한역(漢譯)은 『의족경(義足經)』으로, '족'은 '품'자의 옛 오사(誤寫)임.
52) 극미(param u)란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물질의 최소단위로서, 하나의 극미는 통상 4방 상하의 6개의 극미에 둘러싸여 최초의 결합을 시작한다. 그리고 이 때 단일한 극미[事極微]는 무방분(無方分)이기 때문에 지각의 대상이 아닌 가설적 극미이며, 현상하여 우리들 경험의 대상이 되는 실제적 극미는 다수의 극미가 취집된 유방분의 극미[聚極微]이기 때문에 '애성(礙性, 공간적 점유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2(p.99)와 권제4(p.156)에서의 관설(關說)을 참조 바람.
[26 / 1397] 쪽
  [변애하기 때문에 색이라 이름한다고 할 것 같으면] 과거·미래의 색 또한 응당 마땅히 색이라고 이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 역시 일찍이 변애하였고 앞으로 변애할 것이기 때문에, 아울러 그러한 종류의 것이기 때문에 [색이라고 이름할 수 있으니], 이는 마치 태워지는 것[所燒]을 땔감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53)
  온갖 무표색 또한 응당 마땅히 색이라고 이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어떤 이는 해석하기를, "표색(表色)이 변애를 지니기 때문에 무표색도 그에 따라 역시 색이라는 명칭을 획득하니, 비유하자면 나무가 움직일 때 그 그림자도 역시 따라 움직이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 같은 해석은 옳지 않으니, 무표색은 변애를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그럴 경우 표색이 소멸할 때 무표색도 응당 마땅히 소멸해야 할 것이니, 마치 나무가 소멸할 때 그림자도 반드시 그에 따라 소멸하는 것과 같다.
  또 어떤 이는 해석하기를, "소의(所依)가 되는 대종이 변애하기 때문에 무표업도 역시 색이라는 명칭을 획득할 수 있다"고 하였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안식(眼識) 등의 다섯 가지도 역시 응당 마땅히 색이라고 이름해야 할 것이니, 소의(5근)가 변애를 지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힐난은 이치에 부합하지 않는다. 즉 무표색이 대종에 의지(依止)하여 일어날 때는 마치 그림자가 나무에 의지하고 빛이 보주(寶珠)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안 등의 5식이 안 등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때와는 같지 않으니, 근(根)은 오로지 [식에 대해] 능히 그것이 낳아지는 것을 돕는 조건[助生緣]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비유로 삼고 있는] '그림자는 나무에 의지하고, 빛은 보주에 의지한다'고 하는 말은 바야흐로 비바사(毘婆沙)의 종의에는 부합하지 않으니, 그들 종의에 따르면 그림자 등의 현색극미는 각기 4대종에 의지하기
  
53) 지금 타고 있는 것만을 땔감이라고 하지 않으며, 이미 태워진 것(과거의 땔감), 앞으로 태워질 가능성을 지닌 것(미래의 땔감)을 모두 땔감이라고 하듯이, 이미 변애한 것, 앞으로 변애의 가능성이 있는 것을 모두 색이라 이름할 수 있다는 뜻.
[27 / 1397] 쪽
  때문이다.54) 설사 그림자나 빛이 나무나 보주에 의지한다고 인정[許]할지라도 무표색의 경우와 그 같은 소의지의 경우는 동일하지 않으니, 그들(비바사사)은 소의가 되는 대종이 비록 소멸할지라도 무표색은 그것에 따라 멸하지 않는다고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 언급한 바는 여전히 힐난에 대한 해석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어떤 이는 그 같은 힐난에 대해 달리 해석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안식 등 다섯 가지는 그 소의가 일정하지 않아 혹 어떤 것은 변애를 지니기도 하니, 이를테면 안(眼) 등의 근이 그러하며, 혹 어떤 것은 변애를 지니지 않기도 하니, 이를테면 무간(無間)의 의근(意根)이 그러하다. 그러나 무표색의 소의는 이와 같지 않기 때문에 [다시 말해 항상 변애의 색법을 소의로 하기 때문에] 앞에서의 힐난은 결정코 이치에 부합하지 않는다."55)
  따라서 '변애를 일컬어 색이라고 한다'는 사실의 이치는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 가운데 근(根)과 경(境)을
  바로 10처(處)·10계(界)라고 인정한다.
  此中根與境 許卽十處界
  
  논하여 말하겠다. 앞에서 논설한 색온의 존재 가운데 [무표색을 제외한] [5]근과 [5]경을 바로 10처(處)와 10계(界)로 인정한다.56) 즉 '처'의 갈래[門]
  
54) 유부종의에서 볼 때 그림자[影]나 빛[光]은 각기 현색극미로서 실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나무나 보주에 의해 나타나는 일시적 존재가 아니다.
55) 이는 논주 세친이 유부의 입장에서 통석(通釋)한 것으로, 변애하는 5근과 변애하지 않는 의근을 소의로 삼는, 다시 말해 그 소의가 일정하지 않는 안 등의 5식의 예로써 항상 변애하는 색법을 소의로 삼는 무표색을 비판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는 뜻.
56) 여기서 '인정한다'(許, i a)는 말은 '전설(傳說)'처럼 유부 비바사사설에 대한 논주 세친의 불신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유부에서는 온(蘊)·처(處)·계(界) 3문(門)의 실유(實有)를 주장하고 있는데 반해 경량부에서는 이 중에 온과 처의 가유(假有)를 주장하며, 따라서 가유인 '처'의 그것으로 실유인 '계'의 체(體)로 삼을 수 없기 때문에 '인정한다'고 설한 것이다. 『구사론기』 권제1말(대정장41, p. 25상)
[28 / 1397] 쪽
  에서는 10처로 설정하니, 안처·색처 내지는 신처·촉처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만약 '계'의 갈래로 설정할 경우에는 그것을 10계로 삼으니, 안계·색계 내지는 신계·촉계이다.
  
  색온과 아울러 그것을 처·계로 설정하는 것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제 마땅히 수(受) 등의 세 가지 온과 그것의 처·계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수(受)는 촉(觸)에 따른 영납(領納)이고
  상(想)은 취상(取像)을 그 본질로 한다.
  受領納隨觸 想取像爲體
  
  네 가지 이외의 것을 행온(行蘊)이라 이름하며
  이와 같은 수 등의 세 가지와,
  아울러 무표와 무위를
  법처(法處)·법계(法界)라고 이름한다.
  四餘名行蘊 如是受等三
  及無表無爲 名法處法界
  
  논하여 말하겠다. 수온(受蘊)은 말하자면 세 가지로서, 촉(觸)에 따라 영납하는 것이니, 고(苦)·낙(樂)·불고불락(不苦不樂)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를 다시 분별하면 6수신(受身)을 성취하게 되니, 말하자면 안촉에 의해 생겨난 '수' 내지는 의촉에 의해 생겨난 '수'가 그것이다.
  상온(想蘊)이란 말하자면 능히 취상(取像)을 본질로 하는 것으로, 능히 청·황·장·단·남·여·원(怨)·친(親)·고·락 등의 상(相)을 집취(執取)한다. 이것도 다시 분별하면 6상신(想身)을 성취하게 되니, 앞의 수온에
  
[29 / 1397] 쪽
  서 논설한 바와 같다.
  그리고 앞에서 설한 색·수·상 온과 다음에 설할 식온(識蘊)을 제외한 그 밖의 일체의 행(行)을 일컬어 '행온'이라고 한다. 그런데 박가범(薄伽梵)께서는 계경 중에서 '6사신(思身)을 행온이라고 한다'57)고 설한 것은 그것이 가장 수승(殊勝)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행'이란 조작(造作)을 말하는데, '사'는 바로 업의 성질로서 조작의 뜻이 강하기 때문에 가장 수승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설하기를, "만약 능히 유루의 유위를 조작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일컬어 행취온(行取蘊)이라고 한다"고 하였던 것이다.58)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그밖의 심소법(心所法)과 아울러 불상응법(不相應法)은 온에 포섭되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고(苦)·집(集)이 아니어야 할 것이며, 그럴 경우 그것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應知]과 마땅히 끊어야 할 것[應斷]이 될 수 없을 것이니,59) 이에 대해서는 세존께서 설하신 바와 같다. 즉 "만약 어떤 하나의 법에 아직 이르지 못하였고 아직 알지 못하였다면 능히 고(苦)의 변제(邊際 : 종극,즉 불생의 열반)를 지을 수 없다고 나는 설한다. 아직 끊지 못하였고 아직 멸하지 못한 법에 대해서도 역시 또한 이와 같이 설하리라."60)
  그렇기 때문에 결정코 4온을 제외한 그 밖의 유위의 행(行)은 모두 행온에 포섭된다고 마땅히 인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설한 수·상·행 온과 아울러 무표색과 세 종류의 무위, 이와 같은 일곱 가지 법을 '처'의 갈래 중에 설정할 경우에는 법처(法處)로 삼고, '계'의 갈래 중에 설정할 경우에는 법계(法界)로 삼는다.
  
57) 『잡아함경』 권제3 제63경(대정장2, p. 15하)
58) 같은 경.
59) 일체 유루의 유위법은 고제(苦諦)와 집제(集諦)에 포섭되는 것으로, 이는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고 '마땅히 끊어야 하는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26, p.1178 참조.) 따라서 수·상·사를 제외한 그 밖의 심소법과 불상응행이 5취온 중에 포섭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고제·집제에도 포섭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이것들은 마땅히 알아야 하고 마땅히 끊어야 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는 뜻.
60) 『잡아함경』 권제8 제223경; 225경(대정장2, p. 55중).
[30 / 1397] 쪽
  수 등의 세 온과 그것의 처·계의 갈래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제 마땅히 식온(識蘊)과 그것을 어떠한 처·계의 갈래로 설정하는가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하리라.
  게송으로 말하겠다.
  
  식(識)이란 말하자면 각기 요별(了別)하는 것으로
  이것은 바로 의처(意處)로 일컬어지고
  아울러 7계(界)로 이름되니,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6식(識)이 (과거로) 전이한 것을 의계(意界)라고 함을.
  識謂各了別 此卽名意處
  及七界應知 六識轉爲意
  
  논하여 말하겠다. 각기 그들의 경계를 요별하는 것으로서 경계의 상을 전체적으로 취[總取]하기 때문에 식온(識蘊)이라 이름한다.61) 이것도 다시 차별하면 여기에는 6식신(識身)이 있으니, 이를테면 안식신(眼識身) 내지 의식신(意識身)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와 같이 논설한 식온을 '처'의 갈래 중에 설정할 경우에는 의처(意處)가 되고, '계'의 갈래 중에 설정할 경우에는 7계가 되니, 이를테면 안식계 내지 의식계와 이러한 6식이 [과거로] 전이한 의계(意界)가 바로 그것이다.
  이처럼 이상에서 논설한 5온은 바로 12처와 18계가 된다. 이를테면 무표색을 제외한 색온을 일컬어 10처라 하며, 역시 10계라고 이름한다. 수·상·행온과 무표색과 무위를 모두 법처라고 이름하며, 역시 법계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마땅히 알아야 할 것으로, 식온을 바로 의처라고 이름하며, 역시 7계라고 이름하니, 이를테면 6식계와 의계가 바로 그것이다.
  
61) 안식(眼識)은 색을, 내지 의식(意識)은 법을 요별(了別)하는 것으로서, 어떤 한 대상의 상을 전체적으로 취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식'은 대상에 따라 그것과 유사하게 생겨난 것일 뿐이다. 따라서 단순히 대상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인식으로 규정될 뿐으로(본론 권제30, p.1380 참조) 대상의 형상을 영납·취상·판단·확인하는 등의 개별적인 작용은 심소(心所)의 역할이다.
 
[31 / 1397] 쪽
  어찌하여 식온은 오로지 6식신으로만 분별되지 않는 것인가? 이와 다른 그 무엇을 설하여 다시 '의계'라고 하는 것인가?
  더 이상 [6식신과는] 다른 법은 존재하지 않으니, 이에 대해 게송으로 말하겠다.
  
  바로 6식신(識身)이
  무간에 멸함에 따라 의계(意界)가 되는 것이다.
  由卽六識身 無間滅爲意
  
  논하여 말하겠다. 6식신은 바로 무간(無間)에 멸하고 나서 능히 후찰나의 의식[後識]을 낳기 때문에 '의계'라고 이름하였으니,62) 이는 마치 여기(현재)서는 아들이었던 자가 다른 곳(과거)에서는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것과 같으며, 또한 여기서는 열매였던 것이 다른 곳에서는 종자로 일컬어지는 것과 같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실제적인 '계'는 응당 마땅히 오로지 열일곱 가지가 되어야 하거나 혹은 오로지 열두 가지뿐이어야 할 것이니, 6식와 의계는 상호간에 포섭되기 때문이다.63) 어떠한 까닭에서 열여덟 가지의 계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여섯 번째 소의(所依)를 성취하기 위해서이니
  그래서 18계가 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리라.
  
62) 전5식에는 안근 등의 소의가 있지만 제6 의식에는 별도의 소의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성립시키기 위해 의근(즉 18계에서의 의계)을 설하였다.(후술) 즉 이 때 의근은 바로 안식 내지 의식이 과거로 낙사하여 무간에 멸한 것으로, 다음 찰나에 일어나는 '식'[後識]의 소의가 된다. 따라서 의근은 전5식의 소의도 되고 제6의식의 소의도 되어 6경(境)을 전체적으로 취할 수 있는 것이다.
63) 6식계와 의계는 별체(別體)가 아니기 때문에 6식을 계로 설정하면 의계는 무용하여 17계가 되어야 할 것이며, 의계를 설정하면 6식계는 무용하여 12계가 되어야 한다는 뜻.
[32 / 1397] 쪽
  成第六依故 十八界應知
  
  논하여 말하겠다. 이를테면 5식계와 같은 것은 안(眼) 등의 5계가 별도로 존재하여 그것의 소의가 되지만 제6의식의 경우에는 별도의 소의가 없으니, 이것의 소의를 성취하기 위해 의계를 설한 것으로, 이와 같이 될 때 소의(所依,즉 根)와 능의(能依,즉 識), 그리고 경계에 각기 여섯 가지가 있어 계(界)는 열여덟 가지가 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무학(無學)의 최후 찰나[念]의 마음은 마땅히 의계가 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즉 이것(무학의 최후찰나의 마음)은 무간에 멸하고 나서 더 이상 후찰나의 의식을 낳지 않기 때문에 의계가 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64)
  그렇지가 않다. 즉 이 같은 무학의 최후 찰나의 마음은 이미 의근의 자성[意性]으로 머물고 있기 때문이니, 다만 그 밖의 다른 연(緣)을 결여하였기 때문에 후찰나의 의식을 낳지 않을 뿐이다.65)
  이상의 논설에 있어서 '온'은 일체의 유위법을 포섭하고, '취온'은 일체의 유루법만을 포섭하며, '처'와 '계'는 일체법(즉 5온과 무위)을 모두 다 포섭한다. [온·처·계의] 개별적인 포섭관계[別攝]는 이와 같거니와 전체적인 포섭관계[總攝]는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일체법을 전체적으로 포섭함은
  하나의 온과 처와 계에 의하는 것으로
  자성만을 포섭하고 그 밖의 것은 포섭하지 않으니
  
64) 무학(a aik a)은 해야할 일을 이미 다하여[所作已辦] 더 이상 후유(後有)를 받지 않는 아라한과의 성자(본론 권제24, p.1104 참조). 따라서 그가 무여열반에 들려고 하는 최후 찰나의 심·심소법은 더 이상 후찰나의 의식을 낳는 일이 없다.
65) 심식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소의(意根)뿐만 아니라 소연(法境)도 필요한데, 아라한의 최후심 이후에는 의근 자체가 멸한 것이 아니라 생기의 조건이 되는 소연이 결여됨으로써 심식이 낳아지지 않는 것이다.
[33 / 1397] 쪽
  타성(他性)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總攝一切法 由一蘊處界
  攝自性非餘 以離他性故
  
  논하여 말하겠다. 하나의 색온과 의처와 법계로써 일체법을 전체적으로 모두 포섭할 수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66) 이를테면 [부처님은] 여러 처소에서 승의(勝義)에 대해 설할 경우 오로지 자성(自性)만을 포섭하였을 뿐 타성(他性)은 포섭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법이란 타성의 법과는 항상 서로 배제[相離]하기 때문이다.67) 즉 이러한 법은 그러한 법을 떠난 것인데 '포섭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이를테면 안근과 같은 것은 오로지 [그것과 동류의 성질인] 색온과 안처와 안계와 고(苦)·집(集)의 두 가지 제(諦) 따위에만 포섭될 뿐이니, 이는 바로 그러한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며, 그 밖의 다른 온이나 다른 처, 다른 계에는 포섭되지 않으니, 그러한 성질을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여러 처소에서 세속(世俗)에 대해 설할 경우에는 다른 법으로도 역시 그 밖의 다른 법을 포섭하였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4섭사(攝事)로써 무리들을 포섭한다'고 하는 것과 같다.68)
  
66) 즉 일체법(5온과 무위, 즉 5位) 가운데 색법(5근·5경·무표색)은 색온에, 심법(6식과 의근)은 의처에, 그 밖의 심소법과 불상응행법과 무위법은 법계에 포섭되기 때문에, 일체법은 하나의 온·처·계 즉 색온·의처·법계에 의해 모두 포섭될 수 있는 것이다.
67) 앞에서 법(法)이란 능히 자상(自相)을 보지(保持)하는 것이라고 하였다.(본론 권제1, p.4) 즉 일체법은 각기 다른 법과 구별되어지는 자신만의 특상을 지닌다. 유부 제법분별과 상섭(相攝)의 원리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으로, 동성(同性)은 상호 포섭하지만, 이는 타성(他性)에 대한 배제를 전제로 한다.
68) 4섭사는 4섭법, 즉 보시(布施)·애어(愛語)·이행(利行)·동사(同事)를 말한다. 즉 『중아함경』 권제9 『평장자경(平長者經)』에서 평장자는 이러한 4섭사로써 자신의 무리들을 포섭하고 무리들은 이에 따라 우리가 섭수(攝受)되었다고 말하게 되었다고 한다. 즉 이 때 '섭'은 동성의 포섭이 아니라 다만 방편유인이라는 세속적 의미의 포섭이라는 뜻(『대비바사론』 권제59, 대정장27, p. 306하 참조).
[34 / 1397] 쪽
  안·이·비의 세 처(處)는 각기 두 개씩 있는데, 어떠한 까닭에서 계(界) 자체는 스물한 가지가 되지 않는 것인가?
  이 같은 힐난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종류와 경계와 인식이 동일하기 때문으로
  비록 두 개일지라도 계(界) 자체는 단일하다.
  類境識同故 雖二界體一
  
  논하여 말하겠다. '종류가 동일하다'고 함은 이를테면 [안의] 2처는 다 같이 바로 안근을 자성으로 삼기 때문이다. '경계가 동일하다'고 함은 이를테면 [안의] 2처는 다 같이 색을 경계로 삼기 때문이다. '인식이 동일하다'고 함은 이를테면 [안의] 2처는 다 같이 안식의 소의가 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안계(眼界)는 비록 두 개이지만 계 자체는 단일한 것이다. 그리고 이계(耳界)와 비계(鼻界)도 역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설정되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능의(能依, 즉 식)을 낳는 곳이 두 곳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그럼에도 단정하고 위엄 있게 하기 위해
  안(眼) 등에 각기 두 개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然爲令端嚴 眼等各生二
  
  논하여 말하겠다. 소의신의 형상을 단정하고 위엄 있게 하기 위해 계(界) 자체는 비록 단일하지만 두 곳의 처(處)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만약 눈(안근)과 귀(이근)가 오로지 하나만이 있고, 코(비근)에 두 개의 구멍이 없다고 한다면 신체는 단정하지 않고 위엄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옳지 않으니, 만약 본래부터 그러하다(한 개이다)고
  
  
[35 / 1397] 쪽
  한다면 누가 그것을 누추하다고 말하겠는가? 또한 고양이나 솔개 따위에도 비록 두 곳의 처가 생겨나 있을지라도 그 무엇이 단정하고 위엄 있다 하겠는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세 근(안근·이근·비근)은 어떠한 까닭에서 두 곳의 처가 생겨나게 되었던 것인가?
  그것에서 생겨나는 식(識)이 명료하며 단정하고 위엄 있게 하기 위해서이니, 지금 바로 세간을 보더라도 한쪽 눈 등을 감고 색 등을 요별하면 그 상이 분명하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세 근에는 각기 두 곳의 처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온갖 온과 아울러 처·계의 포섭관계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제 마땅히 그 뜻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온·처·계의 개별적인 뜻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적취와 생장문(生長門)과 종족
  이것이 바로 온·처·계의 뜻이다.
  聚生門種族 是蘊處界義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유위법의 화합·적취(積聚, r i)의 뜻, 이것이 바로 '온(skandha)'의 뜻이니, 계경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 즉 "존재하는 모든 색으로서 혹은 과거의 것이거나, 혹은 현재의 것이거나, 혹은 미래의 것이거나, 혹은 내적인 것이거나, 혹은 외적인 것이거나, 혹은 거친 것이거나, 혹은 미세한 것이거나, 혹은 저열한 것이거나, 혹은 수승한 것이거나, 혹은 멀리 있는 것이거나, 혹은 가까이 있는 것, 이와 같은 일체의 것을 간추려 하나의 무더기[一聚]로 삼은 것을 설하여 '온'이라고 이름한다"고 하였으니,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적취의 뜻은 온의 뜻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의 내용 중에서 무상하여 이미 멸한 색을 일컬어 '과거의 것'이라고 하였고, 아직 이미 생겨나지 않은 색을 일컬어 '미래의 것'이라고 하였
  
[36 / 1397] 쪽
  으며, 이미 생겨났지만 아직 낙사(落謝)하지 않은 색을 일컬어 '현재의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자기의 소의신을 '내적인 것'이라고 이름하였으며, 그 밖의 색을 '외적인 것'이라고 이름하였는데, 혹 어떤 경우 처(處)에 근거하여 분별하기도 한다.69) 또한 유대색(有對色)을 일컬어 '거친 것'이라고 하였으며, 무대색(無對色)를 일컬어 '미세한 것'이라고 하였는데,70) 혹 어떤 경우 상대적(相待的)인 관점에 따라 설정하기도 한다.71)
  만약 '상대적인 관점에 따라'라고 말한다면, 거친 것과 미세한 것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72)
  이러한 힐난은 옳지 않으니, 상대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 즉 그것에 대해 거친 것은 [그것에 대해] 미세한 것이 되지 않으며, 그것에 대해 미세한 것은 [그것에 대해] 거친 것이 되지 않으니, 이는 비유하자면 아버지와 아들, 고제와 집제의 경우 등과도 같다.73)
  또한 염오(染汚)의 색을 '저열한 것'이라고 이름하였고, 불염오의 색을 '수승한 것'이라고 이름하였으며, 과거·미래의 색을 '멀리 있는 것'이라고 이름하였고, 현재의 색을 '가까이 있는 것'이라고 이름하였다.
  내지는 식온(識蘊)의 경우에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나 여기에는 약간의 차별이 있다. 즉 5근을 소의로 하는 식을 '거친 것'이라고 이름하며, 오로지 의근을 소의로 하는 식을 '미세한 것'이라고 한다. 혹은 지(地, 즉 3계 9지)에 근거하여 분별하는 경우도 있으니, 비바사사(毘婆沙師)가 설
  
69) 5근은 내적인 색, 6경(법경에 해당하는 것은 무표색)은 외적인 색이다.
70) 유대색이란 질애(對礙, pratigha) 즉 공간적 점유성을 지닌 색을 말하는 것으로, 5근·5경을 가리키며, 무대색이란 그렇지 않은 것으로 무표색을 가리킨다.
71) 유견유대(有見有對)·유견무대(有見無對)·무견무대(無見無對)의 3색, 혹은 욕계계(繫)·색계계·불계(不繫)의 3색을 상대적으로 볼 때, 전자는 후자에 비해 거친 색이고 후자는 전자에 비해 미세한 색이다.
72) 예컨대 욕계·색계·불계(不繫)의 색, 혹은 유견유대·무견유대·무견무대의 색에 있어 전자는 후자에 대해 거친 것이고, 후자는 전자에 대해 미세한 것이라고 할 경우, 색계의 색과 무견유대색은 미세한 것이면서 거친 것이라고 하는 두 가지 존재 양태를 지니게 되는 모순을 갖게 된다.
73) 어떤 이는 그 아버지에 대해서만 아들이고 아들에 대해서만 아버지일 뿐이며, 또한 어떤 법은 집인(集因)에 대해서만 고과(苦果)이고 고과에 대해서만 집인이 될 뿐 무차별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
[37 / 1397] 쪽
  하는 바가 그러하다.
  그런데 존자 법구(法救, Dharmatr ta)는 다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5근에 의해 파악된 것을 '거친 색'이라 이름하고, 그 밖의 것(즉 5근에 의해 파악되지 않는 것)을 '미세한 색'이라 이름하며, 마음에 들지 않는 것[不可意]을 '저열한 색'이라 이름하고, 그 밖의 것을 '수승한 색'이라고 이름한다. 또한 볼 수 없는 곳에 존재하는 것을 '멀리 있는 색'이라고 이름하고, 볼 수 있는 곳에 존재하는 것을 '가까이 있는 색'이라고 이름하며, 과거 따위의 색은 그 명칭이 드러내는 바와 같다. 그리고 수(受) 등도 역시 그러하지만 다만 소의(所依)의 힘에 따라 '멀리 있는 것'이라 하고, '가까이 있는 것'이라고 함을 마땅히 알아야 하며,74) '거친 것'과 '미세한 것'의 경우는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심(心)·심소법(心所法)이 생장(生長)하게 되는 문(門, ya-dvara)의 뜻, 이것이 바로 '처(處, ayatana)'의 뜻이다. 즉 이 말을 해석하면, 능히 심과 심소법을 생장시키기 때문에 이를 일컬어 '처'라고 하였으니, 이는 바로 능히 그러한 심·심소법의 작용을 생장시킨다는 뜻이다.
  법의 종족(種族, gotra)이라는 뜻, 이것이 바로 '계(界, dh tu)'의 뜻이다. 이를테면 하나의 산(山) 중에 다수의 동(銅)·철(鐵)·금·은 등이 있는 것을 설하여 [다양한 광물의 세계 즉] 다계(多界)라고 이름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소의신 혹은 하나의 상속(相續) 중에 열여덟 가지 종류의 제법의 종족이 있는 것을 '18계'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여기서 '종족'이란 바로 생의 근본[生本]의 뜻이다.
  그렇다면 안(眼) 등은 어떠한 것의 생의 근본이 되는 것인가?
  말하자면 자신과 같은 종류의 동류인(同類因)이 되기 때문에 [그것 또한 생의 근본이다.]75)
  만약 그렇다면 [생의 근본이 되지 않는] 무위법은 응당 마땅히 '계'라고 이
  
74) 수(受) 등의 법은 처소가 없기 때문에 바로 원근을 분별할 수 없으며, 다만 그것들의 소의가 미치는 힘에 따라 원근을 분별할 수 있을 뿐이다.
75) 전찰나의 눈은 후찰나의 눈(等流果)을 낳는 동류인이 된다.(이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6, p.277 참조.)
[38 / 1397] 쪽
  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심·심소법이 생겨나는데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76)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계'라고 하는 말은 종류(種類)의 뜻을 나타내니, 이를테면 열여덟 가지의 법은 그 종류와 자성이 각기 다르며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18계라고 이름한 것이다"고 하였다.
  그런데 만약 적취의 뜻이 바로 '온'의 뜻이라고 한다면 온은 마땅히 가유(假有)가 되어야 할 것이다.77) 왜냐 하면 그것은 다수의 실체가 적집하여 함께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으로, 마치 [곡물의] 무더기[聚]와도 같으며, 자아와도 같은 것이다.
  이러한 힐난은 옳지 않으니, 하나의 실극미(實極微)도 역시 '온'이라고 이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응당 마땅히 '적취의 뜻이 바로 온의 뜻'이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니, 하나의 실재적 사물[實物]은 적취의 뜻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논주 세친의 평파)
  어떤 이는 설하기를, "능히 결과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는 뜻이 바로 '온'의 뜻으로, 이에 따라 세간에서는 어깨를 '온'이라 하니, 물건이 적취된 곳이기 때문이다"고 하였다.78) 혹은 어떤 이는 설하기를, "나누어질[分段] 수
  
76) 무위법은 그 자체 동류인은 되지 않지만 경계(境界)가 되어 그것에 대한 심·심소를 낳기 때문에 '생기의 근본[生本]'이 된다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계'(즉 법계)라 하여도 무방하다.
77) 온·처·계 3법에 대해 비바사사종(毘婆沙師宗)에서는 실유라고 주장하지만, 경부(經部)에서는 오로지 '계'만을, 세친은 '처'와 '계'를 실유라고 하였다.(『구사론기』권1末, 대정장41, p. 29상 : 『구사론소』 권제1 餘,대정장41, p. 489상 참조) 즉 유부에서는 가(假) 극미가 적취하여 하나의 실(實) 극미가 될 때 비로소 극미로서의 자상을 갖기 때문에, 적취의 뜻인 온(一實極微名爲蘊) 역시 실유라고 주장하였으나, 논주 세친은 온은 어디까지나 적취물이기 때문에 가유(假有)일 뿐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경부에서는 '만약 온이 가유라면 유색처(有色處)도 역시 가유임을 인정해야 할 것으로, 안 등의 극미는 다수가 모여야 비로소 의식을 낳는 문으로서 작용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세친은 다시 '그것은 다수의 극미가 적취한 것이지만, 그 때 극미 하나하나는 처의 작용이 갖추어져 있고, 처 역시 그것과 동일한 작용을 갖기 때문에 실유이다'고 하였다.(주79 참조)
78) '온'의 원어 skandha에는 어깨 신체 등의 뜻이 있다. 즉 전찰나의 5온(身心)을 연으로 하여 후찰나의 5온이 있다고 하는 뜻을 비유로서 결과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39 / 1397] 쪽
  있다는 뜻이 바로 '온'의 뜻으로, 그래서 세간에서는 '그대가 3온(부분)을 돌려주면 나도 마땅히 그만큼을 그대에게 주겠노라'고 말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들은 경에 어긋나는 것이니, 경에서는 '적취의 뜻이 바로 온의 뜻이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계경에서는 말하기를, "존재하는 모든 색으로서 혹은 과거의 것이거나 ……이하 널리 설함은 앞에서와 같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이 경문은 과거 등의 하나하나의 색 따위를 각기 별도로 '온'이라 이름한다는 사실을 나타내며, 그렇기 때문에 일체의 과거의 색 등과 같은 하나하나의 실재적 사물을 각기 '온'이라 이름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러한 주장 역시 이치에 맞지 않는다. 즉 그 경에서는 "이와 같은 일체[의 색]을 간추려 하나의 무더기[一聚]로 삼은 것을 설하여 '온'이라고 이름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적취물과 마찬가지로 온도 역시 가유(假有)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논주 세친의 주장)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응당 마땅히 온갖 유색처(有色處 : 5근과 5경)도 역시 바로 가유라고 인정해야 할 것이니, 안(眼) 등의 극미도 요컨대 다수가 적취되어야 생문(生門) 즉 안식 등을 낳는 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힐난은 이치에 맞지 않으니, 다수의 적취 중에 존재하는 각각의 극미에 원인의 작용이 있기 때문에 [적취하여 능히 생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근(根)과 경(境)이 서로 도와 식(識) 등을 함께 낳으므로 그것들은 응당 마땅히 별도의 처(處)가 아니어야 할 것이며, 그럴 경우 마땅히 12처의 구별도 없게 되고 말 것이다.79)
  그렇지만 『대비바사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대법(對法)의 여러 논사들은 만약 가온(假蘊)의 관점에서 보는 경우 그들은 [하나의] 극미를 1계·1처·1온의 부분이라고 설하지만, 만약 그렇지 않고 [실온(實蘊)의
  
79) 만약 극미 각각에 처(處)의 작용이 없다면 극미소집(極微所集)인 근과 경이 화합하여 작용할 때 비로소 처의 뜻이 성립하게 되며, 그럴 경우 근·경 화합의 6처만 있고 12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는 경량부의 처가립론(處假立論)에 대한 구사논주 세친의 해명이다.
[40 / 1397] 쪽
  관점에서] 보는 경우라면 그들은 극미가 바로 1계·1온·1처라고 설한다"80) 이는 마땅히 [온의 일]부분(즉 색온)에 대해 일시 부분을 지닌 것[有分]이라고 말한 것으로, 이는 마치 옷의 적은 부분이 탔더라도 역시 또한 옷이 탔다고 설하는 것과 같다.81)
  어떠한 까닭에서 세존께서는 지식의 경계[所知境]에 대해 온 등의 갈래에 따라 세 가지 종류를 설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어리석음과 근기와 즐기는 것의 세 가지 때문에
  온과 처와 계의 세 가지 종류를 설하게 된 것이다.
  愚根樂三故 說蘊處界三
  
  논하여 말하겠다. 교화될 유정에 세 종류가 있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그들을 위해 온 등의 세 갈래를 설한 것이다. 즉 전설(傳說)에 따르면 유정의 어리석음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혹 어떤 이는 심소(心所)에 어리석어 그것을 모두 아(我)라고 집착하며,82) 혹 어떤 이는 오로지 색에만 어리석으며,83) 혹 어떤 이는 색과 심(心)에 어리석은 경우가 있는 것이다.84)
  유정의 근기에도 역시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예리함과 중간과 둔중함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유정이 즐기는 것에도 역시 세 가지 종류가
  
80) (대정장27,384상 ; 한글대장경120 비담부8, p. 558). 가온 즉 화합 적취된 온에 있어 1극미는 색계·색온·색처의 일부분에 불과하지만, 1극미(즉 實蘊)라고 하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는 바로 색계·색온·색처가 된다. "이는 마치 곡식더미 위에서 한톨의 곡식을 쥐었을 때 어떤 사람이 그대가 쥔 것은 무엇이요? 하고 물었을 경우, 만약 곡식더미의 관점에서 본다면 '나는 곡식더미 중에서 한톨의 곡식을 쥐었소'라고 말할 것이지만, 만약 곡식더미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곡식의 관점에서 본다면 마땅히 '나는 곡식을 쥐었소'라고 말해야 하는 것과 같다."
81) 여기서 옷은 부분의 집합이 아니라 그 자체 단일한 실재로서, 이것이 유부 비바사사의 온 실유론의 기본입장이다.
82) 이들에게는 심소를 수·상·사로 나누어 상설(詳說)한 5온을 설하였다.
83) 이들에게는 색을 5근과 5경으로 나누어 상설한 12처를 설하였다.
84) 이들에게는 색과 심을 열 가지와 일곱 가지로 나누어 상설한 18계를 설하였다.
 
[41 / 1397] 쪽
  있으니, 이를테면 간략한 글[略文]과 중간의 글[中文]과 자세한 글[廣文]을 즐기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85) 따라서 그 순서대로 세존께서는 그들을 위해 온·처·계의 세 가지를 설하게 된 것이다.
  어떠한 까닭에서 세존께서는 그 밖의 나머지 심소법을 설하여 모두 행온에 포섭시키고, 수(受)와 상(想)을 별도로 나누어 두 가지 온으로 삼은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쟁근(諍根)과 생사(生死)의 원인이고
  아울러 순서상의 이유[次第因] 때문에
  온갖 심소법 중에서
  수(受)와 상(想)을 별도로 온이라 한 것이다.
  諍根生死因 及次第因故
  於諸心所法 受想別爲蘊
  
  논하여 말하겠다. 쟁근(諍根, '쟁'은 騷擾의 뜻으로 번뇌의 다른 이름)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온갖 욕망에 탐착하는 것과 온갖 견해에 탐착하는 것이 바로 그것으로, 이 두 가지는 순서대로 '수'와 '상'을 최승의 원인으로 삼는다. 즉 미수(味受)의 힘에 의해 온갖 욕망에 탐착하게 되는 것이고, 도상(倒想) 즉 전도된 관념의 힘에 따라 온갖 견해에 탐착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생사(生死)의 법은 '수'와 '상'을 최승의 원인으로 삼는다. 즉 '수'에 탐착하고 도상(전도된 생각)을 일으키기 때문에 생사를 윤회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두 가지의 원인과 아울러 뒤에서 마땅히 설하게 될 '순서상의 이유[次第因]'로 말미암아 '수'와 '상'을 별도로 설정하여 온으로 삼은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순서상의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 논설에 이어서 마땅히 분별하게 되리라.
  
85) 여기서 '즐긴다'고 함은 그 이해[勝解]의 즐거움을 지니는 것을 말한다.
[42 / 1397] 쪽
  어떠한 까닭에서 무위법이 처(處)와 계(界)에는 존재한다고 설하면서도 온에는 포섭되지 않는다고 설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온은 무위를 포섭하지 않으니
  그 뜻이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蘊不攝無爲 義不相應故
  
  논하여 말하겠다. 세 가지 무위법이 색 등의 '온' 중에 포함된다고는 설할 수 없으니, 색 등의 뜻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무위법은 그 자체 색이 아니고 내지는 식이 아닌 것이다.
  또한 역시 무위법은 여섯 번째의 온이 된다고도 설할 수 없으니, 그것과 온은 그 뜻이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앞에서 이미 모두 설하였듯이 '적취의 뜻이 바로 온의 뜻'이라고 하였는데, 이를테면 무위법은 색 따위처럼 과거 등의 품류의 차별이 있어 그것들을 하나의 무더기[一聚]로 간추려 '무위온(無爲蘊)'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취온(取蘊)'이라는 말은 염오의 근거[染依]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으로, 염오와 청정 두 가지의 근거를 '온'이라는 말로 나타내었다.86) 그러나 무위에는 이러한 두 가지 뜻이 전혀 없으며, 그 뜻도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온'으로 설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병이 깨어지면 그것은 더 이상 병이 아니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온이 종식되면 그것은 응당 마땅히 온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럴 경우 그는 처(處)와 계(界)의 예(例)로 보건대 응당 과실을 범하게 될 것이다.87)
  
86) 유루취온은 염오법의 소의가 되고, 무루온은 청정법의 소의가 된다. 즉 '온'이라는 말은 유루·무루 모두 통하지만, 무위에는 이러한 두 뜻이 없기 때문에 '온'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다.
87) 5온의 종식(滅)이 무위이기 때문에 '온' 중에 무위가 포함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12처·18계의 종식도 역시 무위라고 해야 할 것이며, 그럴 경우 거기에도 역시 무위가 포합되지 않아야 하는 모순이 성립한다. 여기서 어떤 이의 설은 『대비바사론』 권75(대정장26, p. 385중)에 '무위를 온으로 설정하지 않는 열 가지 이유' 중 제2이며, 본문은 논주 세친의 평파이다.
[43 / 1397] 쪽
  이와 같이 온갖 온의 폐지와 설정[廢立]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제 마땅히 그 순서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하리라.
  게송으로 말하겠다.
  
  거침[麤]과 염착[染]과 그릇[器] 등과
  3계의 차별에 따라 그 순서가 설정되었다.
  隨麤染器等 界別次第立
  
  논하여 말하겠다. '색'은 유대(有對)이기 때문에 모든 온 중에 가장 거칠다. 무색온 중에 가장 거친 것은 오로지 '수'의 행상이니, 그래서 세간에서는 설하기를 '내 손 따위가 아프다'고 말하는 것이다. [행과 식] 두 가지와 비교[待]할 때 '상(想)'이 보다 거치니, 남·녀 등의 개념[想]은 보다 알기 쉽기 때문이다. 그리고 '행'은 '식'보다 거치니, 탐·진 등의 작용[行]이 보다 알기 쉽기 때문이다. 나아가 '식'이 가장 미세하니, 경계의 상을 전체적으로 취[總取]하여 분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로 보건대 거친 정도에 따라 온의 순서[隨麤次第]를 설정하게 된 것이다.
  혹은 시작도 없는 생(生)과 사(死) 이래로 남녀는 '색'에 대해 서로 애락(愛樂)하니, 이는 낙수(樂受)의 맛에 탐착하였기 때문이며, '수'에 대해 탐착하는 것은 또한 전도된 생각[倒想]이 생겨났기 때문이며, 이러한 전도된 생각이 생겨나게 된 것은 번뇌(즉 탐·진·치 등의 행온) 때문이며, 이와 같은 번뇌는 '식'에 근거하여 생겨난 것으로, 이러한 번뇌와 앞의 세 가지는 모두 식을 더럽히는 것이다.88) 이로 보건대 식의 염오에 따라 온의 순서[隨染次第]를 설정하게 된 것이다.
  혹은 이를테면 '색'은 그릇과 같으며, '수'는 음식과 동류이며, '상'은 조미료와 같으며, '행'은 요리사와 유사하며, '식'은 먹는 자에 비유된다.89) 따라서
  
88) 색 그 자체는 번뇌[惑]가 아니지만 능히 연(緣)이 되어 염오식(染汚識)을 낳으며, 수·상도 역시 번뇌와 상응하여 식을 오염시키게 된다.
89) 그릇은 음식의 소의이기 때문이며, 음식(즉 苦樂)은 신체를 증익·감손하기 때문이며, 조미료는 음식의 맛을 분명하게 하기 때문이며, 요리사는 능력(思·貪 등의 업과 번뇌)에 따라 좋고 나쁜 음식(즉 異熟)을 낳기 때문이며, 먹는 자는 이 모든 것을 향수하기 때문에 각기 색·수·상·행·식에 비유되는 것이다.
[44 / 1397] 쪽
  그릇 등에 따라 온의 순서[隨器次第]가 설정된 것이다.
  혹은 3계의 차별에 따라 온의 순서[隨界別次第]가 설정된 것이다. 즉 욕계 중에는 온갖 묘욕(妙欲)이 있어 '색'의 상이 가장 현저하게 요별되며, 색계의 정려(靜慮)에는 뛰어난 기쁨[喜受] 따위가 있어 '수'의 상이 가장 현저하게 요별되며,90) 세 가지 무색계(공무변처·식무변처·무소유처) 중에서는 공(空) 등의 상(相)만을 취하기 때문에 '상'의 상이 가장 현저하게 요별되며, 제일유(第一有,즉 有頂處인 비상비비상처) 중에서는 사(思)가 가장 수승하여 '행'의 상이 가장 현저하게 요별된다. 그리고 이러한 네 가지(색·수·상·사)는 바로 식주(識住)로서 그 가운데 식이 머무니, 이는 마치 세간에서의 밭(앞의 4온)과 종자(식온)의 순서와 매우 유사하다.91)
  그렇기 때문에 제온(諸蘊)의 순서가 이와 같은 것으로서, 이에 따라 5온에는 더 이상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허물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온갖 '순서 상의 이유[次第因]'로 말미암아 행을 떠나 수·상을 별도로 설정하게 된 것이니, 이를테면 수와 상은 온갖 행 중에서 그 상이 거칠고 염오를 낳으며, 음식과 동류이고 조미료와 같으며, 2계(색·무색) 중에서 강력하다. 그래서 별도의 온으로서 설정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마땅히 처·계의 갈래 중에서 먼저 6근의 순서에 대해 분별하여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에 따라 [6]경과 [6]식의 순서도 알 수 있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앞의 다섯 가지의 경계는 오로지 현재하는 것이고
  
90) 즉 색계 초정려에서는 희수(喜受)와 낙수(樂受)가 드러나고, 제2정려에서는 희수가, 제3정려에서는 낙수가, 그리고 제4정려에서는 사수(捨受)가 드러나기 때문에 수가 가장 현저한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28, p.1281을 참조할 것.)
91) '식'을 최후에 두는 까닭은 그것이 마치 밭에 뿌려지는 종자처럼 색·수·상·행 어디에도 머물기 때문이다.(본론 권제8, p.385의 4識住를 참조 바람.)
[45 / 1397] 쪽
  네 가지의 경계는 오로지 소조색(所造色)이기 때문이며
  그 밖의 것은 작용이 멀거나 신속하고 분명함에 따라서이다.
  혹은 그것이 위치하는 장소[處]에 따른 순서이다.
  前五境唯現 四境唯所造
  餘用遠速明 或隨處次第
  
  논하여 말하겠다. 6근 중에서 앞의 5근은 오로지 현재하는 경계만을 취하니, 그렇기 때문에 먼저 설한 것이다. 그러나 의근의 경계는 삼세의 법과 무위로서 일정하지 않으니, 혹 어떤 경우에는 하나의 경계만을 취하며, 혹 어떤 경우에는 두 가지·세 가지·네 가지 경계를 취하기도 하는 것이다.92)
  [본송에서] 말한 '네 가지의 경계는 오로지 소조색이다'고 함은 계속하여 그 같은 5근 중의 앞의 4근의 경계는 오로지 소조색일 뿐으로, 그렇기 때문에 앞에 설한 것이다. 즉 신근(身根)의 경계는 일정하지 않아 혹 어떤 때에는 [능조(能造)의] 대종을 취하고, 혹 어떤 때에는 소조색을 취하며, 혹 어떤 때에는 두 가지 모두를 취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 밖의 것'이란 이를테면 앞의 4근(안·이·비·설 근)을 말하는 것으로, 그것들은 상응하는 바대로 작용이 멀리 미치거나 신속하거나 분명하거나 하니, 그렇기 때문에 앞에 설하게 된 것이다. 즉 안근과 이근은 멀리 있는 경계를 취하기 때문에 [비·설의] 2근보다 먼저 설한 것이고, 2근(안근과 이근) 중에서도 안근의 작용이 멀리까지 미치기 때문에 먼저 설한 것으로, 멀리 있는 산이나 강은 볼 수는 있어도 그곳의 소리는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안근의 작용이 보다 신속하니,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 종이나 북을 치는 것을 먼저 보고 난 다음에 그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근과 설근의 작용은 다 같이 멀리 있는 경계에 대한 것이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비근을 먼저 설한 것은 그 작용이 신속하고 분명하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향기롭고
  
92) 제6 의근은 현재·과거의 대상을, 혹은 3세의 법을, 혹은 3세의 법과 무위법을 동시에 인식하는 경우도 있어 그 대상이 확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가장 뒤에 설하였다. 즉 대상이 확정되어 있지 않으면 그 작용에 뒤섞임이 있어 그 상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46 / 1397] 쪽
  도 맛있는 온갖 음식을 마주할 때 비근이 먼저 향을 맡고 그 후에 설근이 맛을 보는 것과 같다.
  혹은 신체 가운데 소의(所依,즉 根)가 위치하는 처소에 위아래의 차별이 있음에 따라 근의 순서를 설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안(眼)의 소의는 신체의 가장 위쪽에 있고, 다음에는 이근·비근·설근이 있으며, 신근은 대다수 아래쪽에 있다. 그리고 의근은 일정한 처소[方處]없이 온갖 근에 의지하여 생겨나기 때문에 가장 뒤에 설하게 된 것이다.
  
  어떠한 까닭에서 10처(안근 내지 신근, 색경 내지 촉경)는 모두 색온에 포섭되는데, 오로지 한 가지 종류(즉 색경)에 대해서만 '색처'라는 명칭을 설정하게 된 것인가? 또한 12처 자체가 모두 바로 법인데, 어떠한 이유에서 오로지 한 가지 종류(즉 법경)에 대해서만 '법처'라는 명칭을 설정하게 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차별되고 가장 뛰어난 것이며
  다수의 법과 증상법을 포섭하기 때문이니
  그래서 하나의 처만을 색이라 이름하고
  한 종류만을 일컬어 법처라고 한 것이다.
  爲差別最勝 攝多增上法
  故一處名色 一名爲法處
  
  논하여 말하겠다. '차별되기 때문에'라고 함은, 경계와 경계를 지닌 것[有境,즉 根을 말함]의 자성 상에 여러 가지의 차별이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니, 그래서 색온의 차별상을 10처로 건립하지 총괄하여 1처로 건립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만약 안(眼) 등의 차별된 명칭[想名]이 없는 것이면서 그 본질이 바로 색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설정하여 '색처'라고 이름한 것으로, 이는 안 등의 명칭과는 구별되게 하기 위해서이니, 그것이 비록 [색법의] 총칭(總稱)을 나타내는 말이라 할지라도 이는 바로 별명(別名) 즉 개별적인 명칭
  
  
[47 / 1397] 쪽
  일 따름이다.93)
  또한 온갖 색법(5근과 5경) 중에서 색처가 '가장 뛰어난 것이기 때문에' [색이라는] 공통의 명칭[通名]을 설정하였다. 즉 [색처는] 유대(有對)이기 때문에 손 등과 접촉할 때 바로 변괴(變壞)하며, 아울러 이것은 유견(有見)이기 때문에 여기에 있고 저기에 있다는 차별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온갖 세간에서는 오로지 이 처(處)에 대해서만 다 같이 색이라 하고 안처 등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차별되기 때문에' 하나의 법처만을 설정하고 일체법에 대해서는 법처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니, 이는 색처의 경우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이 가운데 수(受)·상(想) 등의 '다수의 법(심소법·불상응행법·무위법·무표색 등)이 포섭되기 때문에' 응당 마땅히 [법이라는] 공통의 명칭을 설정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증상법(增上法 : 즉 뛰어난 법)'이란 이른바 열반으로, 그것이 이러한 법처 중에 포섭되기 때문에 유독 법처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설하기를, "색처 중에는 스무 종류의 색(12종의 현색과 8종의 형색)이 있으며, 가장 거칠게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육안(肉眼)과 천안(天眼)과 성자의 혜안(慧眼) 등 3안(眼)의 경계가 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만 유독 '색'이라는 명칭을 설정하게 된 것이다. 또한 법처 중에는 제법(諸法)의 명칭[名]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제법에 대한 지(智)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만 유독 '법'이라는 명칭을 설정하게 된 것이다"고 하였다.94)
  온갖 계경 중에서는 이와는 다른 그 밖의 여러 가지의 온과 처와 계의 명칭을 찾아볼 수 있는데,95) 그것도 역시 이러한 것(5온·12처·18계)에 포섭
  
93) 10처를 모두 색법이라 할 경우 그 차별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다른 9처에는 각기 안·이……내지 성·향 등의 별명을 설정하고, 안 등의 차별된 명칭이 없을 경우에만 총명(總名)을 그대로 별명으로 삼아 다른 처와 구별하고자 하였다.
94) 제법(諸法)의 성상(性相)을 드러내어 그것을 이해하게 하는 명(名)·구(句)·문(文) 즉 명칭과 문장과 음소 등이, 또한 일체법을 무상·무아·공으로 관하는 공해탈문의 지(智)가 여기에 포섭되기 때문에 그것만을 '법처'라 한 것이다.
95) 8만의 법온 내지 무루온의 온과 10변처(遍處)·8승처(勝處)의 처와 62계 등의 계가 바로 그러한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후술함.
[48 / 1397] 쪽
  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이러한 것과는 다른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모니(牟尼)께서 설한 법온(法蘊)은
  헤아리자면 8만이 있는데
  그 본질은 말[語]이고, 혹은 명칭[名]이니
  이는 색온과 행온에 포섭되는 것이다.
  牟尼說法蘊 數有八十千
  彼體語或名 此色行蘊攝
  
  논하여 말하겠다. 모든 부처님의 교법[佛敎]은 말[語, vac]을 본질로 한다고 주장할 경우, 그가 설한 법온(法蘊)은 모두 색온에 포섭된다. 그러나 만약 모든 부처님의 교법은 명칭[名, n ma]을 본질로 한다고 주장할 경우, 그가 설한 법온은 모두 행온에 포섭된다.96)
  이러한 온갖 법온의 양은 얼마나 되는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96) 말의 본질은 바로 음성이기 때문에, '명칭'은 작상(作想) 즉 개념을 떠올리게 하는 힘으로 불상응행법이기 때문에 각각 색온과 법온에 포섭된다는 것이다. 참고로 본론에서는 이 두 가지 해석 중 어느 한 가지를 선설(善說)로 채택하지 않고 있지만, 『대비바사론』 권126(대정장27, p. 659상·중)에서는 앞의 설을 정설로 평가하고 있다. 즉 불타의 교법[佛敎]을 한편에서는 불타의 어언(語言)으로, 다른 한편에서는 명·구·문신(文身)의 안포 배열로 정의하고 있는 『발지론』 권12의 논설(대정장26, p. 981상·중:한글대장경176. p. 276, "佛敎云何? 答:謂佛語言·評論·唱詞·語路·語音·語業·語表, 是謂佛敎. ……佛敎名何法? 答:名身·句身·文身次第行列, 次第安布, 次第連合")을 해석하여, '명·구·문은 불타교법의 작용을 나타낸 것으로, 교법 자체를 개시(開示)한 것은 아니다'고 하면서 '명을 본질로 한다'는 이설을 전하고 있다. 이설자에 의하면 말이 '명'을 낳고 명이 능히 뜻을 드러내는 것으로, 유부의 언어관에 의하는 한 말 그 자체로서는 어떠한 의미체계도 전달할 수 없으며, 그것이 지시하고 있는 대상의 의미는 오로지 명·구·문이라는 불상응행법에 의해서만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 유부의 정설은 후자인 것처럼 보인다.(이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5, p.257을 참조 바람.)
[49 / 1397] 쪽
  어떤 이는 말하기를, 온갖 법온의
  양은 그러한 논(論)에서의 설과 같다고 하였고
  혹은 온 등의 말에 따른다고 하였지만
  참다운 설은 행(行)의 대치(對治)이다.
  有言諸法蘊 量如彼論說
  或隨蘊等言 如實行對治
  
  논하여 말하겠다. 어떤 여러 논사들은 말하기를, "8만의 법온의 각각의 양은 『법온족론(法蘊足論)』과 같다"고 하였다. 즉 그러한 법온의 각각에는 6천의 게송이 있으니, 대법(對法, 즉 아비달마) 중의 『법온족론』에서 설한 바와 같다.
  혹은 또 다른 어떤 이들은 설하기를, "법온은 온 등의 말 하나하나의 차별에 따라 그 수가 8만을 헤아리니, 이를테면 온(蘊)·처(處)·계(界)·연기(緣起)·제(諦)·식(食)·정려(靜慮)·무량(無量)·무색(無色)·해탈(解脫)·승처(勝處)·변처(遍處)·각품(覺品)·신통(神通)·무쟁(無諍)·원지(願智)·무애해(無礙解) 등의 각각의 교문(敎門)을 하나의 법온이라 이름한 것이다'고 하였다.
  그리고 '참다운 설'이란, 교화될 유정에게는 탐·진 등의 8만의 행(行,즉 번뇌)의 차별이 있어 그러한 8만의 행을 대치(對治)하기 위한 까닭에서 세존께서는 8만의 법온을 널리 설하였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앞에서 그가 설한 8만의 법온은 모두 이러한 5온 중의 2온에 포섭된다고 하였는데,97) 이와 마찬가지로 그 밖의 곳에서 설한 온갖 온·처·계의 종류도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하는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97) 여기서 2온이란 색온과 행온. 즉 부처님의 일체 교법의 본질이 말의 소리[語言]라고 할 경우 그가 설한 법온은 색온에 포섭되고, 말의 의미[名·句·文]라고 할 경우 행온에 포섭된다.
[50 / 1397] 쪽
  이와 같은 그 밖의 다른 온 등은
  각기 그것이 상응하는 바에 따라
  앞서 설한 것 중에 포섭되니
  마땅히 그 자상을 살펴 관찰해야 하리라.
  如是餘蘊等 各隨其所應
  攝在前說中 應審觀自相
  
  논하여 말하겠다. 그 밖의 다른 계경에서 설해지고 있는 온갖 온·처·계는 그것이 상응하는 바에 따라 앞에서 설한 것 중에 포섭되니, 이 논(구사론) 중에서 설한 온(즉 5온) 따위와 마찬가지로 응당 마땅히 그 하나하나의 자성을 살펴 관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바야흐로 여러 계경 중에서 설해지고 있는 그 밖의 다른 5온이란 이를테면 계(戒)·정(定)·혜(慧)·해탈(解脫)·해탈지견(解脫知見)의 5온을 말한다. 이 중에서 계온은 이(즉 5온) 가운데 색온에 포섭되고, 그 밖의 4온은 이 가운데 행온에 포섭된다.98)
  또한 여러 경에서는 10변처(遍處) 등을 설하고 있는데,99) 그 중에서 앞의 여덟 가지의 변처는 무탐(無貪)을 본질[性]로 하기 때문에 이것(즉 12처) 중의 법처에 포섭된다. 그러나 만약 그 조반(助伴 : 동시에 相應隨轉하는 법)을 겸하게 되면 5온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바로 이것 중의 의처와 법처에 포섭된다. 그리고 8승처(勝處)의 포섭관계도 역시 그러하다고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100) [10변처 가운데] 공(空)·식(識)의 두 변처와 공무변처(空無邊
  
98) 계온의 본질은 도와 함께하는[道共戒] 무표색이기 때문에 색온에 포섭되는 것이며, 그 밖의 4온은 순서대로 각기 정(定, 즉 三摩地)·혜(慧)·승해(勝解)·혜의 심소를 본질로 하기 때문에 행온에 포섭된다.
99) 10변처는 지·수·화·풍·청·황·적·백·공(空)·식(識)이 일체처에 두루한다고 관찰하는 것.(본론 권제29, p.1333 참조) 이 중 앞의 여덟 가지는 탐을 대치하기 때문에 무탐을 자성으로 한다.
100) 8승처란 온갖 색에 대해 뛰어나게 알고 뛰어나게 관찰[勝知勝見]하는 것으로, (1) 내적으로 색의 상(想)이 있으면서 외부의 적은 색을 관찰하는 것. (2) 내적으로 색의 상이 있으면서 외부의 많은 색을 관찰하는 것. (3) 내적으로 색의 상이 없으면서 외부의 적은 색을 관찰하는 것. (4) 내적으로 색의 상이 없으면서 외부의 많은 색을 관찰하는 것. (5)∼(8) 내적으로 색의 상이 없으면서 외부의 청·황·적·백을 관찰하는 것.(본론 권제29, p.1331 참조.)
 
[51 / 1397] 쪽
  處) 등의 4무색처는 4온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바로 이것 중의 의처와 법처에 포섭된다.101) 5해탈처(解脫處)는 혜를 본질로 하기 때문에 바로 이것 중의 법처에 포섭된다.102) 그러나 만약 조반을 겸하게 되면, 바로 이것 중의 성처와 의처와 법처에 포섭된다. 이 밖에 다시 두 가지의 처가 있다. 말하자면 무상유정천처(無想有情天處)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가 그것으로,103) 앞의 처는 바로 이 가운데 10처에 포섭되니, 향(香)과 미(味)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뒤의 처는 바로 이 가운데 의처와 법처에 포섭되니, 4(무색)온을 본질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다계경(多界經)』에서는 계(界)의 차별을 설하여 예순두 가지가 있다고 하였는데,104) 그것이 상응하는 바에 따라 모두 이러한 18계에 포섭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바야흐로 그러한 계경 중에서 설하고 있는 6계(界) 중의 지·수·화·풍에 대해서는 이미 분별하였지만, 공(空)과 식(識) 두 계에 대해서는 아직 그
  
101) 여기서 4무색처는 공무변처(空無邊處)·식무변처(識無邊處)·무소유처(無所有處)·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즉 이 같은 4무색처와 10변처 중의 공무변처와 식무변처는 색을 제외한 4무색온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수·상의 심소와 불상응의 행온은 법처에 포섭되고, 식온은 의처에 포섭되는 것이다.
102) 5해탈처란 부처님 등의 설법을 듣는 것, 스스로 독송하는 것, 남을 위해 설법하는 것, 정려사유하는 것, 선한 정상(定相)을 취하는 것. 즉 이 다섯 가지에 의해 해탈 즉 열반을 획득하기 때문에 해탈처라고 말함.
103) 무상유정천처(無想有情天處, asa j~isattva-dev yatana)는 무상천(無想天) 소광천(少廣天) 복덕천(福德天)이라고도 하는데, 색계 제4선천(禪天) 중 광과천(廣果天)의 일부이다. 무상정을 닦아 도달하는 경지(본론 권제5, p.215와 권제8, p.365를 참조할 것). 그리고 비상비비상처는 무색계의 제4처로 그 이전의 7정(定)과 같이 거친 상[麤想]이 아니기 때문에 '비상'이며, 그렇다고 무심과는 같지 않기 때문에 '비비상'이다.(본론 권제8, p.1278 참조.)
104) 『다계경』은 『중아함경』 권제47에 나온다. 『구사론기』 권제1(대정장41, p. 33하)에 의하면, 3종의 6계(地·水·火·風·空·識의 6계, 苦·樂·喜·憂·捨·無明의 6계, 欲·恚·害·無欲·無恚·無害의 6계), 1종의 4계(受·想·行·識), 6종의 3계(欲·色·無色의 3계, 色·無色·滅의 3계, 과거·현재·미래의 3계, 선·불선·무기의 3계, 劣·處中·妙의 3계, 學·無學·非學非無學의 3계), 양종의 2계(유루계·무루계, 유위계·무위계), 그리고 18계를 말한다.
[52 / 1397] 쪽
  상을 설하지 않았다. 바로 허공(虛空)을 일컬어 공계(空界)라고 한 것인가? 또한 일체의 식을 식계(識界)라고 이름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공계(空界)는 말하자면 규극(竅隙)으로
  전설(傳說)에 따르면 이는 바로 명암이며
  식계(識界)는 유루의 식으로서
  유정의 생(生)의 소의가 되는 것이다.
  空界謂竅隙 傳說是明闇
  識界有漏識 有情生所依
  
  논하여 말하겠다. 존재하는 온갖 문이나 창, 그리고 입이나 코 등의 내외의 규극(竅隙,즉 구멍이나 틈)을 일컬어 '공계'라고 한다.
  이와 같은 규극은 응당 어떻게 알려지는 것인가?
  '전설(傳說)에 따르면 이는 바로 명암이다'고 하였다.105) 즉 명암을 떠나 규극은 파악될 수 없기 때문에 공계는 명암을 본질로 한다고 설한 것으로, 이것(공계) 자체는 낮밤을 떠나지 않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즉 이것을 설하여 인아가색(隣阿伽色)이라고도 이름한다. 전(傳)하여 설(說)하기를, "아가(agha)란 이를테면 적집(積集)된 색을 말하는 것으로, 이러한 색은 능히 지극한 장애가 되기 때문에 '아가'라고 이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공계의 색은 그것과 서로 가까우며,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설하여 '인아가색'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는 설하기를, "'아가'란 바로 공계의 색이라는 뜻으로, [그
  
105) 여기서 '전설'은 논주(論主) 세친이 이를 믿지 않는다는 뜻으로서, 세친과 경량부에서는 명암을 본질로 삼는 규극(竅隙) 즉 공계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즉 공계는 허공을 떠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허공 자체도 실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허공이란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잡히는 것이 없는 것을 일시 설정한 개념일 뿐이다.(본론 권제6, p.304 참조) 그러나 유부법상에 의하는 한 명암은 12현색 중의 하나로 실유이기 때문에 그것을 본질로 하는 공계 또한 실유의 법으로서 색법에 포섭된다.(『현종론』 권제3, 한글대장경200, p. 58. "현색의 차별을 일컬어 공계라고 한다.")
[53 / 1397] 쪽
  밖의 다른 색이] 이러한 공계 중에서는 어떠한 장애도 갖지 않기 때문에 '아가'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다. 즉 아가색(공계의 색)은 그 밖의 다른 장애(즉 有礙色)와 서로 가까우며,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설하여 '인아가색'이라고 이름하였던 것이다.
  온갖 유루의 식(識)을 일컬어 '식계'라고 한다.
  어째서 온갖 무루의 식은 식계라고 설하지 않는 것인가?
  6계는 바로 온갖 유정의 생(生)의 소의라는 사실을 인정[許]하기 때문이다. 즉 이와 같은 온갖 계(界)는 상속하여 생기한 마음[續生心]으로부터 목숨을 마칠 때의 마음[命終心]에 이르기까지 항상 생을 유지시키기 때문에, [유루의 식을 일컬어 식계라고 해도] 온갖 무루의 법은 이와 같지 않기 때문에 [식계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6계 앞의 4계는 이것(18계) 가운데 촉계에 포섭되고, 다섯 번째의 계는 바로 이것 중의 색계에 포섭되며, 여섯 번째의 계는 바로 이것의 7심계(心界)에 포섭된다.
  나아가 그러한 경(『다계경』)에서 설하고 있는 그 밖의 계에 대해서는 그것이 상응하는 바대로 모두 바로 이것(18계)의 열여덟 가지 계 중에 포섭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