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아비달마구사론 제 5 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4.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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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구사론 제 5 권
  존자 세친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
  
2. 분별근품 ③
  이와 같이 득과 비득의 상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동분(同分)이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동분이란 유정의 동등함이다.1)
  同分有情等
  
  논하여 말하겠다. 또 다른 개별적 실체[別實物]가 존재하니, 이름하여 동분(同分)이라고 한다. 이것은 이를테면 온갖 유정이 존재로서의 동등함[類等]을 갖고 전전(展轉)하는 것을 말하는데, 본론(本論)에서는 이를 중동분(衆同分)이라고 이름하였다.2)
  여기에는 다시 두 가지의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는 유차별 동분이며, 둘째
  
  
  
1) 여기서 동분(sabh gat )이란 온갖 유정을 유정이게끔 하는 동류상사성(causes of resemblance between living beings, similarity), 혹은 보편성(common charact- eristic of sentient beings), 내지는 비 유정과 차별시키는 고유성·특수성을 말하는 것으로, 유부에서는 이를 자성을 지닌 개별적 실체[別實物]로 간 주하고 있다.
2) 여기서 '본론'이란 『발지론』 권제2(대정장 26, p. 926중). 『품류족론』 권제1(대정장 26, p. 692하) 에도 나온다. 즉 송문에서는 제한된 자수(字數)로 인해 동분이라 하였으나, 완전한 명칭은 중동분(衆同分, nik ya-sabh ga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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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무차별 동분이다. 무차별 동분이란 이를테면 온갖 유정의 '유정으로서의 동분'을 말하니, 일체의 유정에는 각기 [유정으로서의] 동등함이 있기 때문이다. 유차별 동분이란 이를테면 온갖 유정의 3계(界)·9지(地)·5취(趣)·4생(生)·4종(種,바라문 등의 4종성)·성(姓)·남·여·근사(近事, 재가자)·필추(苾芻, 출가자)·학(學)·무학(無學) 등의 각기 다른 동분을 말하니, 한 종류의 유정으로서 각기 동등함이 있기 때문이다.3)
  다시 법동분이 있으니, 이를테면 온(蘊)·처(處)·계(界)에 따른 것을 말한다.4)
  만약 동분이라 이름하는 실체[實物]로서의 무차별상(즉 보편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전전(展轉)하여 차별된 온갖 유정 사이에는 유정과 유정이 동등하여 어떠한 차별도 없다는 인식[覺]도, 시설(施設)도 있을 수 없게 될 것이다.5) 이와 마찬가지로 온(蘊) 따위에 대해서도 [이 온과 저 온은] 동등하여 어떠한 차별도 없다는 인식과 시설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마땅히 참답게 알아야 할 것이다.
  설혹 죽고 태어나는 일이 있을지라도 유정동분을 버리지 않고 획득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인가?
  마땅히 4구(句)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니,6) 제1구는 이를테면 이 곳에서
  
  
3) 무차별(abhinna) 동분은 유정으로서의 보편성 즉 보다 높은 보편이라 할 수 있고, 유차별(bhinna) 동분 은 각각의 유정의 차별에 따라 욕계, 인간, 크샤트리야, 샤캬(族姓), 남자, 필추(출가자), 무학(아라한)으로 서의 보편성 즉 낮은 보편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전자는 인업(引業, 구역은 總報業)에 의해 생겨나고, 후자 는 만업(滿業, 구역은 別報業)에 의해 생겨난다.(『현종론』 권제7, 한글대장경 200, p. 167-168)
4) 동분은 오로지 유정에만 존재하지만, 유정의 소의가 되는 5온·12처·18계와 같은 법은 일체 유정에 공 통되는 것이기 때문에 법동분으로 설정하기도 한다. 비유정 동분을 세우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주9)를 참조 할 것.
5) 즉 유부에서는 이러한 유정의 동류상사성인 동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개별적인 제 유정을 보편적 존재 [無差別相]로서 인식[覺, buddhi]할 수도 없고, 그것을 다른 유정과 차별시켜 언급[施設, prj~ pti]할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개별적인 실체[別實物]로서 실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과 축생, 남자와 여자 등을 분별하는 데에는 각각의 동류상사성인 동분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6) 제1구는 죽고 태어나는 일이 있을지라도 유정동분을 버리거나 획득하는 일이 없는 경우, 제2구는 죽고 태어나는 일은 없을지라도 유정동분을 버리거나 획득하는 일이 있는 경우, 제3구는 죽고 태어나면서 역시 유 정동분을 버리고 획득하는 경우, 제4구는 죽고 태어나지도 않으면서 유정동분을 버리거나 획득하지 않는 경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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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어 다시 이 곳에서 태어나는 경우이며, 제2구는 이를테면 정성이생위(正性離生位)에 들 때 이생의 동분을 버리고 성자의 동분을 획득하는 경우이며, 제3구는 이를테면 이러한 취(趣)에서 죽어 그 밖의 다른 취 등에서 태어나는 경우이며, 제4구는 이를테면 앞에서 언급한 상(相)을 제외한 경우이다.
  만약 이생동분(異生同分)이라고 이름하는 개별적 실체가 존재한다면 이생성(異生性)을 따로이 설정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이를테면 인동분(人同分)과는 다른 인성(人性)이 따로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7) 또한 동분은 색법이 아니기 때문에 세간에서 현견(現見)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역시 별도의 작용이 없기 때문에 각혜(覺慧)에 의해 능히 요별(了別)되는 것도 아닌 것이다.8) 나아가 세간에서는 비록 유정의 동분을 알지 못할지라도 유정에 대해 어떠한 차별도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설혹 [동분이] 실체로서 존재한다 할지라도 역시 또한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또한 어떠한 이유에서 무정동분(無情同分)이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온갖
  
  
7) 이하 동분실유론에 대한 경량부의 일곱 가지 힐난이다. 즉 본 논설은 만약 이생동분이라고 하는 법이 별도로 실재한다면 무엇 때문에 이생성을 따로이 주장하는가 하는 뜻이다. 즉 유부에서는 성법(聖法)의 비득( 非得)을 자성으로 삼는 이생성을 실체적인 것으로 논의하고 있는데(본론 권제4, p.206 참조), 그렇다면 이생 을 이생이게끔 하는 실유로서의 이생동분은 또 무엇인가? 적어도 인동분(人同分)을 배제하고 인성(人性)을 생 각할 수 없듯이 이생동분과 이생성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할 수 없으며, 그럴 경우 유부의 이생설(유정설)은 허물어지고 만다. 이에 대한 중현(衆賢)의 해명은 다음과 같다. 양자는 작용이 다르기 때문에 그 같은 허물은 없다. 이를테면 이생의 신체 형태라든지 작용, 욕락이 서로 유사하게 되는 근거를 일컬어 동분이라고 하는 것 이며, 성도(聖道)의 성취와 상위(相違)하는 것으로서 이생의 근거가 되는 것을 이생성이라고 이름한다. 따라 서 동분의 경우 정성이생에 들 때 이생동분이 버려지고 성자동분이 획득되지만, 이생성의 경우 버려지기만 할 뿐 더 이상 획득되지 않는 것이다.(『현종론』 권제7, 한글대장경 200, p. 168)
8) 동분은 색법처럼 구체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직접 지각[現見]될 수 없으며, 수(受)·상(想)처럼 별도 의 작용이 없기 때문에 추리[覺慧了別]될 수도 없는 것이라는 뜻. 이에 대한 중현의 해명은 이러하다. 그 같 은 결과가 관찰되기 때문에 그것이 존재함을 아는 것이니, 이를테면 현재의 업이 획득한 결과를 보고 전생에 일찍이 지었던 업이 존재함을 아는 것과 같다. 또한 관행자(觀行者)는 지금 바로 깨달아 알기 때문이다.(『현 종론』 권제7, 앞의 책, 200, p.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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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식이나 보리·콩, 금이나 철, 암라(菴羅)나 반나바(半娜婆) 따위도 역시 자신들의 종류와 서로 유사함을 갖기 때문이다.9) 또한 온갖 동분은 전전(展轉)하여 차별이 있으니, 어떻게 그것에 대한 더 이상의 동분 없이 [다른 동분과] 차별이 없다는 인식[覺]과 시설(施設)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인가?10) 또한 마땅히 승론(勝論)에서 주장하는 바를 드러내어 성취하게 될 것이니, 그 종(宗)에서는 총동구의(總同句義, 보편의 범주)가 있어 일체법에 대한 총동의 언지(言智)는 이것에 의해 발생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또한 동이구의(同異句義, 특수의 범주)가 있어 다른 품류에 대한 동이(同異)의 언지는 이로부터 발생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11)
  
  
9) 이하 논설하듯이 유부의 동분설은 바이세시카(Vai e ika) 학파의 '보편[總同, s m nya]'의 개념과 매우 유사한데, 유부에서도 존재[法]에 대한 최고의 보편을 주장하려면 마땅히 그 학파처럼 비유정의 보편성[ 無情同分]도 주장해야 한다는 뜻. 이에 대한 중현의 해명은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생(生)에는 인천(人天) 의 취(趣)나 태(胎)·난(卵) 따위의 그것은 인정되지만 암라수(菴羅樹)의 취나 녹두 등의 생은 인정되지 않으 며, 세존께서도 일찍이 유정에 대해서만 동분이 있다고 설하였고, 풀 등의 비유정에 대해서는 동분을 설하지 않았으니, 풀 따위는 전전(展轉)하는 작용이나 욕락하는 바에 있어 상호 유사함을 갖지 않기 때문에, 또한 풀 따위는 반드시 유정에 의하여 비로소 생겨나기 때문에 유정에만 동분이 있다고 설한 것이다. 또한 동분은 선 행된 업과 현재의 근용(勤勇)에 의해 생겨나는데, 풀 따위에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없기 때문에 동분이 없는 것이다.(『현종론』 권7,대정장 29, p. 805하 ; 앞의 책, p. 169) 여기서 암라( mra)나 반나바(panasa)는 모 두 과일의 명칭.
10) 동분이 개별적이고도 다수의 존재라면 그러한 동분을 동분이게 하는 보편성, 즉 동분의 동분을 설정해 야 하며, 마침내 무한소급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만약 동분의 동분을 설정하지 않을 경우 개별적인 동분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어떻게 동분이라고 이름할 수 있겠는가 하는 뜻의 난문. 이에 대해 중현은 다음과 같이 해명한다. "온갖 동분은 바로 동류(同類) 현상의 근거가 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동분은 동류로 전전하여 서로 유사한 지각과 시설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안(眼)과 이(耳) 등은 대종소조에 의해 비로소 색 의 성질을 성취한다. 그러나 대종은 비록 그 밖의 다른 대종에 의해 조작되는 일이 없음에도 색의 성질을 성 취하는 것과 같다."(『현종론』, 앞의 책, p. 170)
11) 승론(勝論) 즉 바이세시카에서는 실체[實]·속성[德]·운동[業]·보편[同]·특수[異]·내속[和合]의 여섯 가지 범주[句義]로서 세계를 해명하고 있는데, 여기서 총동구의(總同句義)와 동이구의(同異句義)는 제4, 제5 범주로서, 사물을 공통되게 하고 차별되게 하는 원리이다. 즉 그들에 의하면 인식되어진 것[覺]은 이 같 은 원리에 의해 보편과 특수로 개념지어질 수 있다는 것으로, 유부의 무차별동분과 유차별동분은 바로 이러한 승론학파의 두 구의와 다르지 않다는 뜻. 이에 대한 중현의 해명은 이러하다. "만약 승론이 주장한 이러한 두 가지 구의가, 그 본질이 단일하지 않으며, 찰나생멸하는 것으로 영원한 것이 아니며, 소의지(所依止)가 없으 며, 전전차별하는 것이라면, 설사 유부의 동분이 그것과 동일하다고 하더라도 역시 큰 허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승론에서는 안 등의 근이 능히 색 등을 행해(行解)한다고 주장하지 않으며, 불교도[釋子]로 하여금 이 와 같은 견해를 버리고 달리 해석하라고 한다. 따라서 그들이 논란하는 바는 바로 패거리의 말일 뿐으로, 정 리(正理)를 구하는 이는 마땅히 채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앞의 논, p.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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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대해 비바사사(毘婆沙師)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과 이러한 동분은 그 뜻이 동일하지 않으니, [그들은 보편이라고 하는] 단일한 존재[一物]가 다수의 법에서 일어난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12) 또한 그 같은 동분에 [승론의 종의가] 드러나고 있든 드러나고 있지 않든 어쨌든 이러한 동분은 반드시 실체[實物]로서 존재하는 것이니, 계경에서 설하였기 때문이다.13) 즉 세존께서 '만약 [어떤 자가] 이러한 인취(人趣)에 다시 돌아옴이 있으면 인동분(人同分)을 획득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말씀한 바와 같다."
  [계경 중에서] 비록 그렇게 설한 일이 있다 할지라도 '동분'이라 이름하는 개별적인 실체가 존재한다고 설하여 말한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대가 설하는 바 동분은 무엇인가?
  즉 이와 같은 종류의 제행(諸行)이 생겨날 때 그 가운데 인동분(人同分) 따위를 일시 설정[假立]하는 것이니, 온갖 곡식·보리·콩 따위의 동분을 일시 설정함도 이와 같다.14)
  이것은 선설(善說)이 아니니, 우리의 종의에 어긋나기 때문이다.15)
  동분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12) 바이세시카학파의 '보편'은 일체 만유에 유일 편재(遍在)하는 원리이지만, 유부의 동분은 완전히 개별 적인 것으로서 각각의 법에 해당하는 만큼 다수로 존재한다.
13) 여기서 계경은 『중아함경』 권제24 『대인경(大因經)』(대정장1, p. 578하). 이를테면 " 若無有魚魚 種, 鳥鳥種, 蚊蚊種, 龍龍種, 神神種, 鬼鬼種, 天天種, 人人種, 彼彼衆生隨彼彼處無有 "와 같은 경문.
14) 이는 경부의 대답임. 경량부에서는 동분을 유위제법의 존재방식 상의 유사성(a similarity in the manner of being) 즉 그것의 동류상사(同類相似)를 개념적으로 언표한 것(假立, praj~apti)에 지나지 않는 것 으로 이해하여, 유부와는 달리 유정과 비유정법 상에 모두 통용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15) 이는 논주 세친의 평석이다. 논주는 이처럼 유부의 교학적 난점을 지적하였으면서도 항상 논의의 귀결 은 비바사사(毘婆沙師)의 종의로 끝맺고 있다. 혹은 '경부설은 이치에 맞아 옳고 유부설은 우리의 종의여서 옳다'는 식으로 논의를 끝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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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상(無想)이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상과(無想果)란 무상천(天) 중에서
  심·심소법이 소멸한 것으로
  이숙과이며, 광과천(廣果天)에 있는 것이다.
  無想無想中 心心所法滅 異熟居廣果
  
  논하여 말하겠다. 만약 무상유정천(無想有情天 : 색계 제4선의 제3천인 광과천) 중에 태어나면 어떤 법이 있어 능히 심·심소로 하여금 소멸되게 하니, 이것을 이름하여 무상과(無想果)라고 한다. 이것은 실유의 존재[實有物] 즉 실체로서 능히 미래의 심·심소법을 차단하여 잠시 생기하지 않게 하니, 마치 강물을 막는 방죽과도 같다.
  이러한 법은 한결같이 바로 이숙과(異熟果)이다.
  무엇의 이숙인가?
  이를테면 무상정(無想定)의 이숙과이다.
  그렇다면 무상의 유정은 어떠한 처소에 거주하는 것인가?
  광과천(廣果天)에 거주한다. 이를테면 광과천 중에는 중간정려의 그것처럼 높고 뛰어난 곳[高勝處]이 있으니, 이것을 무상천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16)
  그곳은 항상 무상(無想)이라 해야 할 것인가, 역시 유상(有想)이라 해야 할 것인가?
  생사위(生死位) 중에서는 다시(多時)에 걸쳐 유상이지만 그럼에도 무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곳의 유정은 그 중간의 기나긴 시간 동안 상(想)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니,17) 계경에서 "그곳의 제 유정은 상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
  
  
16) 광과천(b hat-phala-deva)이란 색계 제4선의 8천 중 제3천으로, 여기에는 대범천이 거주하는 초정려 의 범보천(梵輔天)처럼 고대누각이 있다.(본론 권제8, p.365 참조) 참고로 케시미르 대논사들은 초정려의 범 보천과 대범천을 하나로 간주하듯이 무상천과 광과천을 하나로 간주하지만, 외국사는 제4정려에 9천을 세워 무상천을 광과천과는 다른 곳으로 생각한다.(『대비바사론』 권제154, 한글대장경 124, p. 91)
17) 무상천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500대겁을 중간의 기나긴 시간이라고 하였다. 곧 생사위 중의 '다시 (多時)'란 무상천에 태어나는 순간과 죽어 욕계에 태어나기 직전의 순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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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곳에서 몰(歿)하게 된다"고 설한 바와 같다. 그래서 그곳의 유정은 마치 오래 잠들었다가 깨어나는 것처럼 다시 상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몰하고서는 반드시 욕계에 태어나지 그 밖의 다른 처소에는 태어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일찍이 닦은 정행(定行)의 세력이 다하였기 때문이며, 그곳에서는 능히 다시 선정을 닦을 수 없기 때문으로, 이는 마치 허공으로 발사된 화살은 그 힘이 다하면 바로 떨어지는 것과 같다. 그리고 만약 제 유정으로서 마땅히 그 곳에 태어나는 자는 반드시 욕계의 순후수업(順後受業)을 갖아야 할 것이니, 이는 마치 응당 그러한 북구로주(北俱盧洲)에 태어나는 자는 반드시 하늘(즉 6欲天)에 태어나는 업을 갖아야 하는 것과 같다.18)
  무상과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두 가지 정(定)이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무상정(無想定)과 멸진정(滅盡定)이 바로 그것이다.
  먼저 무상정의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와 마찬가지인 무상정은
  마지막 정려로서, 해탈을 구하려는 것이며
  선이며, 오로지 순생수업(順生受業)이며
  성자의 것이 아니며, 일세(一世)의 그것만을 획득한다.
  如是無想定 後靜慮求脫
  善唯順生受 非聖得一世
  
  
  
18) 순후수업(順後受業)이란 현세에 업을 짓고 미래 제3생, 혹은 그 이후에 과보를 초래하는 업으로서, 무 상정인 광과천(미래생)의 세력이 다하고 나면 반드시 욕계에서의 생(제3생)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북구로주 는 인취(人趣) 4주(洲) 중의 1주로서 여기에 태어난 이는 다음 생은 반드시 욕계천에 태어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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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하여 말하겠다. 앞에서 설하였듯이 어떤 법이 있어 능히 심·심소로 하여금 소멸되게 하는 것을 이름하여 무상(無想)이라고 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시 별도의 법이 있어 능히 심·심소로 하여금 소멸되게 하는 것을 일컬어 무상정(無想定)이라고 하는데, 무상자(無想者)의 선정이기 때문에 '무상정'이라고 이름하였으며, 혹은 선정이 무상(無想)이기에 '무상정'이라 이름하였다.19) 그리고 게송에서 '이와 마찬가지인'이라고 하는 말을 설한 것은, 오로지 심과 심소를 소멸하는 이러한 선정이 무상[과]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무상정은 어떠한 지(地)에 존재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마지막 정려' 즉 제4정려에만 있는 것으로,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20)
  무상정을 닦는 것은 무엇을 구하기 위해서인가?
  이를테면 해탈(解脫)을 구하기 위해서이다. 즉 그들은 무상정을 참된 해탈이라 집착하여 그것을 증득하기 위하여 무상정을 닦는 것이다.
  나아가 앞에서 무상[과]는 바로 이숙과라고 설하였기 때문에 그것이 무기성에 포섭된다는 사실은 논설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이루어진 셈이다. 그러나 지금의 무상정은 바로 한결같이 선성(善性)이니, 이것은 바로 선이기 때문에 무상유정천(無想有情天) 중의 오온의 이숙을 능히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21)
  
  
19) 전자는 한정복합어[依主釋]에 의한 해석이고, 후자는 동격복합어[持業釋]에 의한 해석이다.
20) 즉 제4정려 이하의 지(下地)에는 희수·낙수·고수·우수 등 다양한 수(受)의 행상이 거칠게 작용하여 심상(心想)을 제거 소멸하기 어렵지만 제4정려에는 오로지 그 행상이 미세한 사수(捨受)만이 있어 단멸하기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또한 무색계에 없는 이유는, 이 같은 선정을 추구하는 이생·외도는 심·심소의 단멸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에서 무상정의 이숙과라고 한 무상과는 광과천에 있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렇다면 결과인 무상과가 최후의 정려라고 해야하지 않겠는가. 『현종론』 권제7(한글대장경200, p. 173)에서 는 이 같은 난문을 제기하고, 이를 참된 해탈의 출리도(出離道)라고 여기는 이생이 닦는 선정[異生定]이라고 만 해명하고 있다. 즉 무상정은 외도·이생들이 이를 참된 해탈이라고 여기고 닦는 것이기 때문에 최후의 정 려라는 것이다.
21) 무상천의 유정은 무상(無想)인 동안은 오온을 취하지 않지만, 처음 태어날 때와 죽을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심 심소를 일으키기 때문에 오온을 갖추게 된다. 다시 말해 무상정은 선성이기 때문에 무상유정천 즉 무상과의 원인(이숙인)이 되어 능히 오온의 이숙과를 초래하여 무상유정천 다음 생에 그 과보를 받게되므로 순생수업(順生受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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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이 이미 선성이라면, [그 과보는] 어떠한 수(受)에 따르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오로지 순생수(順生受 : 미래 즉 다음 생에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일 뿐으로, 순현수(順現受)나 순후수(順後受), 순부정수(順不定受)가 아니다. 만약 이러한 무상정을 일으켰다가 그 후 비록 물러남이 있을지라도, 전(傳)하여 설(說)하기를 현신(現身)에 반드시 다시 그것을 능히 일으켜 당래(當來) 무상유정천 중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22) 따라서 이러한 무상정을 획득하면 반드시 능히 정성이생(正性離生, 즉 견도위)에 들 수 없는 것이다.23)
  또한 이러한 선정은 오로지 이생만이 획득하는 것이라고 인정되니, 온갖 성자들이 획득하려는 바가 아니다. 즉 모든 성자는 무상정을 마치 깊은 구덩이[深坑]와 같다고 보아 거기에 들어가는 것을 즐기지 않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생은 무상(無想)에 집착하여 그것을 참된 해탈이라 여기고 출리상(出離想)을 일으켜 이러한 선정을 닦는 것이지만, 일체의 성자는 유루에 집착하여 그것을 참된 해탈이나 참된 출리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선정을 필시 수행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제 성자가 제4정려의 선정을 수득(修得)할 때, 정려와 마찬가지로 과거와 미래의 무상정도 역시 획득한다고 해야할 것인가, 획득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인가?24)
  [성자뿐 아니라] 그 밖의 이생도 역시 획득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22) 유부(有部) 비바사사(毘婆沙師)의 정의(正義)는 무상정에서는 결코 퇴전(退轉)함이 없다는 것이지만, 비유자(譬喩者)의 경우는 물러남이 있다고 하였다(『대비바사론』 권제152, 한글대장경124, p. 36-37). 즉 논 주 세친은 유부의 정의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예의 '전설'로 설하고 있는 것이다.
23) 즉 무상정은 이생만이 닦는 선정으로, 이 선정에 들게되면 다음 생에는 반드시 500대겁 동압 무상천에 태어나기 때문에 이 사이 무루지를 수득(修得)할 수 없는 것이다.
24) 선정의 획득에는 가행득(加行得)과 이염득(離染得)이 있는데, 만약 제3정려지의 염오를 떠나 제4정려 를 수득한다고 할 때, 과거·미래의 온갖 정려 즉 유심정(有心定)이 획득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상정의 경우 도 역시 그러한가 하는 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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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비록 일찍이 수습하였을지라도 무심이기 때문에, 요컨대 크나큰 가행 방편으로 수득해야 하기 때문에, 처음으로 획득할 때에는 오로지 일세(一世)의 그것만을 획득하니, 이를테면 최초로 별해탈계를 수득(受得)할 때와 마찬가지로 현재의 그것만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정을 획득하고서 제2 찰나[念] 내지 아직 그것을 버리지 않은 동안은 과거의 그것도 역시 성취하지만 무심이기 때문에 미래의 그것을 닦는 일은 없다.25)
  다음으로 멸진정(滅盡定)은 그 상이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멸진정도 역시 그러한 것으로
  정주(靜住)를 위한 것이고, 유정(有頂)이고
  선이고, 두 가지의 수(受)와 부정(不定)이며
  성자가 추구하는 바로서, 가행(加行)에 의해 획득된다.
  滅盡定亦然 爲靜住有頂
  善二受不定 聖由加行得
  
  [부처님은] 가행이 아니라 성불할 때 획득하니
  삼십사 찰나[念]가 걸리기 때문이다.
  成佛得非前 三十四念故
  
  논하여 말하겠다. 앞의 무상정과 마찬가지로 '멸진정도 역시 그러하다' 한 것에서 '역시 그러하다'고 하는 말은 무엇을 예(例)로 삼은 것인가?
  무상정의 심·심소의 소멸을 예로 삼은 것이니, 이를테면 '다시 어떤 개별적인 실체[別法]가 있어 능히 심·심소법으로 하여금 소멸되게 하는 것을
  
  
  
25) 무상정은 지금 현재의 무심의 상태이기 때문에, 또한 오로지 가행득(加行得)일 뿐 이염득(離染得)이 아니기 때문에 미래의 것은 성취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무상정을 처음으로 획득할 때에는 오로지 현재의 그 것만을 획득할 뿐이며, 제2 찰나 이후 출정할 때까지는 과거의 그것도 성취할 수 있지만, 미래의 그것은 획득 성취되는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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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상정이라고 이름한다'고 설하였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다시 어떤 개별적인 법이 있어 능히 심·심소법으로 하여금 소멸되게 하는 것을 멸진정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선정의 차별상은 이러하다. 앞의 무상정의 경우 해탈을 구하기 위하여 출리상(出離想)의 작의(作意)를 우선으로 삼았지만, 이러한 멸진정은 정주(靜住, nta vih ra : 마음이 산란을 떠나 고요히 머무는 것)를 구하기 위하여 지식상(止息想)의 작의를 우선으로 삼았다. 또한 앞의 무상정이 마지막 정려(즉 제4정려)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멸진정은 오로지 유정(有頂) 즉 바로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만 존재하는 것이다.26)
  그리고 이것은 앞의 선정(무상정)과 마찬가지로 그 성(性)은 오로지 선(善)으로, 무기나 염오가 아니니, 선과 등기(等起)하기 때문이다.27)
  앞의 무상정은 오로지 순생수(順生受), 다시 말해 미래 다음 생에 그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이지만, 이러한 멸진정은 순생수·순후수(順後受), 그리고 부정수(不定受) 모두와 통한다. 즉 이숙에 근거하여 볼 때 순생수이기도 하고, 혹은 순후수, 혹은 부정수이기도 하며, 혹은 그 과보를 완전히 받지 않는 경우[不受]도 있으니,28) 이를테면 만약 하지(下地)에서 반열반을 획득하는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29)
  이러한 선정에 의해 초래되는 [이숙과]는 어떠한 지(地)의 몇 가지 온인
  
  
  
26) 유정(有頂, bhav gra)은 비상비비상처를 말하는 것으로, 이는 욕·색·무색의 3유(有) 중 가장 높은 꼭대기이기 때문에, 혹은 거기서 생을 받은 소의신은 최상의 업에 의해 낳아진 것이기 때문에 유정(有頂)이라 고 한다. 즉 일체의 마음을 염배(厭背)하거나, 혹은 가장 꼭대기 끝자리의 마음[邊際心]을 끊어야 비로소 능 히 이러한 뛰어난 해탈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에 멸진정은 유정지에만 존재하는 것이다.(『현종론』 권제7, 한글대장경200, p. 175 참조)
27) 멸진정은 무심정이기 때문에 무심의 상태에서는 선·악 어느 것으로도 기표(記票)할 수 없을지라도 선 의 가행력에 의해 인기된 것이기 때문에 등기선(等起善)이다.
28) 멸진정은 이숙과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과보를 향수(享受)하는 일과 시기가 결정되 어 있지 않다.
29) 하지에서 이러한 선정을 일으키고서 상지에 태어나지 않으면 바로 반열반한다. 즉 아라한이 멸진정을 얻어 욕계에서 반열반하는 경우, 이러한 멸진정에는 그 과보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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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것인가?
  오로지 유정지(有頂地)의 네 가지 온의 이숙과만을 초래한다.30)
  또한 앞의 무상정은 오로지 이생이 획득하는 바였지만, 이러한 멸진정은 오로지 성자만이 획득하는 것이다. 즉 온갖 이생은 능히 멸진정을 일으킬 수 없으니, 그들은 단멸(斷滅)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며,31) 멸진정은 오로지 성도(聖道)의 힘에 의해서만 능히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며,
  32) 현법열반(現法涅槃)의 승해로써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33)
  이러한 멸진정 역시 앞의 무상정과 마찬가지로 이염득(離染得)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의해 획득되는 것인가?
  가행(加行)에 의해 획득된다. 요컨대 가행에 의해 비로소 증득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증득할 때에는 오로지 현재만을 획득하고, 과거는 획득하지 않으며, 미래도 수득(修得)하지 않으니, 요컨대 심력(心力)에 의하여 비로소 능히 수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2 찰나 따위 이후 내지 아직 그것이 버려지지 않았을 때에는 과거도 역시 성취한다.34)
  세존께서도 역시 가행으로써 획득하는 것인가?
  
  
  
30) 멸진정은 유정(有頂) 즉 무색계의 비상비비상처에 포섭되기 때문에 그 과보도 역시 그곳의 유정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색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4온의 이숙이라 하였다.
31) 앞의 무상정의 이숙과는 색계 제4선 광과천으로, 여기서는 소의신을 갖기 때문에 무상(無想)에 들더라 도 존재멸무의 두려움이 없을 것이지만, 멸진정의 경우 그 이숙과가 무색계의 유정천 즉 비상비비상천이기 때 문에 무상에 들게 되면 멸무의 두려움을 느끼게 되기 때문에 이생은 결코 획득할 수 없다.
32) 유정천의 견소단의 혹(惑)을 끊지 못한 자는 멸진정을 일으킬 수 없다. 그리고 유정천의 견혹은 유루 지로써는 끊을 수 없고 오로지 무루지로써만 끊을 수 있기 때문에 오로지 성도(聖道)의 힘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즉 유루 6행관의 도는 하지를 추(酥)·고(苦)·장(障)이라 관하고 상지를 정(靜)·묘(妙 )·리(離)로 관하여 번뇌를 끊는 것인데, 유정천에는 더 이상 상지가 없기 때문에 유루도로써는 멸진정을 일 으키지 못하는 것이다.
33) 현법열반이란 지금 여기서의 열반을, 승해(勝解, adhimukti)는 뛰어난 이해를 의미한다. 물론 멸진정 과 열반은 그 체가 다르지만 멸진정을 닦은 자만이 현법의 열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생은 멸진정을 획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34) 이염득이 아니라 가행득이라는 점은 앞의 무상정의 경우와 동일하며, 따라서 3세의 획득 성취에 있어 서도 무상정의 경우와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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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획득한 것인가?
  성불(成佛) 즉 보리(菩提)를 증득할 때 획득한다. 이를테면 불(佛) 세존께서는 진지(盡智)를 성취할 때, 다시 말해 일체의 번뇌가 이미 다하였다는 것을 알 때 획득한다. 즉 부처님의 어떠한 공덕도 가행에 의해 획득되는 것은 없으니,35) 잠시 욕락(欲樂)을 일으켜 현재전할 때 일체의 원만한 덕성[圓德]이 그러한 욕락에 따라 일어나기 때문에 부처님의 온갖 공덕은 모두 이염득인 것이다.
  세존께서는 일찍이 아직 멸진정을 일으키지 않았으면서 진지를 획득하였을 때, 어떻게 구분해탈(俱分解脫)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인가?36)
  멸진정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서도 자재를 얻었기 때문에 이미 [멸진정을] 일으킨 자와 마찬가지로 구해탈을 성취하는 것이다.37)
  그런데 서방사(西方師)는, "보살은 유학위(有學位)에서 이러한 선정을 먼저 일으키고, 그 후에 보리(菩提)를 획득한다"고 설하였는데,38) 어떻게 여기에서는 그의 설이 인정되지 않는 것인가? 만약 그의 설을 인정하려면 바로 존자 오파국다(波麴多)의 『이목족론(理目足論)』에 따라야 할 것이니,39)
  
  
35) 부처님의 모든 원만한 덕성은 욕락에 따라 갖추어지는 것으로, 노력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따 라서 멸진정도 가행득이 아니라 진지를 획득할 때, 다시 말해 성불할 때 획득된다.
36) 구분해탈(또는 俱解脫)이란 정(定)·혜(慧)의 두 장애로부터 떠나는 것을 말한다. 즉 아라한에는 무루 혜에 의해 일체의 번뇌장에서 해탈한 혜해탈과, 이와 아울러 멸진정의 힘에 의해 정장(定障)에서 해탈한 구해 탈 두 종류가 있는데, 여기서의 문제는 부처님은 3아승기겁 동안 멸진정을 일으킨 적이 없는데 어떻게 구분해 탈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37) 이를테면 부처님은 3아승기겁 동안 불염오무지를 끊고 정장(定障)은 단진하였기 때문에 멸진정을 일으 키는데 자재하다. 따라서 언제라도 일으키려고 마음만 먹으면 획득할 수 있기 때문에 일찍이 멸진정을 일으킨 자와 마찬가지로 '구해탈'이라고 설한다는 뜻.
38) 서방사(p scaty )는 『광기(光記)』나 『보소(寶疏)』에 의하면 건타라(健馱羅)의 유부논사. 즉 이들에 따르면, 보살은 먼저 이생의 단계에서 하(下) 8지(地)까지의 수혹을 끊고, 그로부터 보리수 아래서 34 심으로 결(結)을 끊고 성도하는데, 처음에 견도 16념(念, 찰나)을 닦은 다음 멸진정을 닦고, 다시 유정지(有 頂地) 9품의 번뇌를 끊음에 있어 9무간도와 9해탈도의 18념을 닦아서 불과(佛果)를 성취한다.
39) 오파국다(Upagupta)는 불멸 100년 무렵의 인물로, 북전에서는 아쇼카왕의 스승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그의 『이목족론(Netr pada stra)』도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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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논에서는 이와 같이 설하고 있다. "마땅히 말해야 할 것이니, 여래는 먼저 멸진정을 일으키고, 그 후에 진지를 낳는다." 그러나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의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설하기를, "먼저 멸진정을 일으키고, 그 후에 비로소 진지를 낳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전(傳)하여 설(說)하기를 보살은 34찰나[念]에 보리를 획득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즉 4제(諦)를 현관(現觀)하는 데 16찰나가 걸리며, 유정(有頂)의 탐(즉 수혹)을 떠나는 데 18찰나가 걸리니, 이를테면 유정의 9품(品)의 번뇌를 끊음에 있어 9무간도(無間道)와 9해탈도(解脫道)가 바로 그것이다. 곧 이와 같은 18찰나에 앞의 16찰나를 더하여 34찰나가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체의 보살은 결정적으로 먼저 무소유처에서 이미 이탐(離貪)을 획득하고서 비로소 견도에 들어가므로 다시 하지의 번뇌를 끊을 필요가 없으니, 이러한 34념 중간에 동류가 아닌 마음[不同類心]을 일으키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40) 따라서 모든 보살은 유학위에서는 응당 마땅히 멸진정을 일으키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외국(外國)의 여러 논사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만약 중간에 동류가 아닌 마음을 일으키게 된다면 거기에는 어떠한 허물이 있게 되는 것인가?"41)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34심과는 동류가 아닌 마음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기심(期心)을 어기는 허물이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보살은 기심을 어기지 않는다.42)
  
  
40) 여기서 동류가 아닌 마음이란 이를테면 유정지(有頂地)의 유루심으로, 멸진정에 들어가는 마음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즉 이러한 마음은 무루의 34심과 다르기 때문에 '동류가 아닌 마음'이라 하였다.
41) 여기서 외국제사(諸師)란 앞서 언급한 서방사(西方師) 즉 건타라의 유부를 말한다. 즉 논주 세친은 앞 서 유부의 34심설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전설'로 전하면서, 이같이 외국사의 의견을 인용하여 반문하 고 있는 것이다.
42) 기심(期心)이란 기약하는 마음. 즉 보살이 보리수 아래 앉아 '나는 34념에 성도하리라'고 결심하여 기 약하는 마음을 말한다. 그런데 만약 중간에 무루와 동류가 아닌 멸진정에 들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난다고 하 면, 이러한 기심을 어기게 되는 허물이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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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치상으로 실로 보살은 기심을 어기지 않지만, 그렇다고 무루성도를 어기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43)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기심(期心)을 어떻게 어기지 않는다고 하겠는가?
  이를테면 '나는 온갖 번뇌의 영원히 다함을 획득하지 못할 경우, 끝내 이러한 결가부좌를 풀지 않을 것이다'고 하는 이와 같은 기심을 결정코 어기지 않고 오로지 한자리에서 모든 일을 다 마쳤기 때문이다.44)
  앞의 [유부]설이 보다 좋다고 할 수 있으니, 우리가 종의(宗義)로 삼는 바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 선정(무상정과 멸진정) 사이에 다수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이 있다고 이미 논설하였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 다른 같은 점과 다른 점이 있으니, 게송으로 말하리라.
  
  두 가지 선정은 욕계와 색계에 의지하는 것으로
  멸진정은 인간 중에서 처음으로 [일어난다].
  二定依欲色 滅定初人中
  
  논하여 말하겠다. '두 가지 선정'이라고 말한 것은 이를테면 바로 무상정과 멸진정을 말하는데, 이 두 가지는 다 같이 욕계와 색계 두 곳에 의지하여야 현기(現起)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또한 역시 색계에 의지하여서도 무상정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45) 바로 다음의 글에
  
  
43) 보살은 스스로와의 약속을 어기지는 않지만, 무루성도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다고는 하지 않았기 때문 에 보살에게 유루심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뜻.
44) 즉 그 때 보살의 '기심'은 한 자리에서 모든 일을 다 마칠 것이라고 기약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간에 멸진정이 일어나더라도 기심을 어기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뜻.
45) 『현종론』 권제7(한글대장경200, p. 179)에서는 그러한 이의 주장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즉 어떤 이는 "오로지 밑의 세 정려에 있을 때에만 무상정에 들어가고 제4정려에 있을 때에는 거기에 들지 않으 니, 원인과 결과가 지극히 인접하여 서로를 핍박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고 하였고, 또 어떤 이는 "역시 제4 정려에 있으면서 무상정에 들어간다. 그러나 무상천은 제외하니, 그 하늘에 태어남으로서 바로 그러한 과보를 받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또한 유여사는 말하기를, "오로지 욕계에 있을 때에만 무상정에 들어가며, 색계에 있을 때에는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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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배될 것이니, 이를테면 본론(本論)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46) "혹 어떤 이는 바로 색유(色有,색계의 유정)이면서 이러한 유(有)의 5행(行 : 5온을 말함)이 아닌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색전(色纏 : 곧 색계)의 유정으로서 혹 어떤 경우 유상천(有想天)에 태어나 동류가 아닌 마음[不同類心]으로 머무르거나, 혹은 무상정에 들었거나, 혹은 멸진정에 들었거나, 혹은 무상천에 태어나서 이미 무상에 든 자가 그러하다.47) 이러한 이들을 바로 색유이면서 이러한 유의 5행이 아닌 자라고 하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이와 같은 두 가지 선정은 다 같이 욕계와 색계에 의지하여야 현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아는 것이니, 이것을 일러 두 가지 선정의 같은 점[同相]이라고 한다.
  두 가지 선정의 다른 점[異相]이란, 이를테면 무상정은 욕계나 색계 모두에서 처음으로 일어날 수 있지만, 멸진정이 처음으로 일어나는 것은 오로지 인간 중에서이다.48) 즉 이러한 멸진정은 인간 중에서 처음으로 닦여지고 생기하게 되지만, 이후 먼저 [그러한 선정에서] 물러남에 따라 바야흐로 색계에 태어나게 되고, 색계의 소의신에 의지하여 그 후 다시 [이러한 선정을] 닦아 생기시키게 되는 것이다.49)
  
46) 『발지론』 권제19(한글대장경176, p. 476참조). 다만 여기서는 무상천에 태어나 무상에 든 경우에 대 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47) 즉 색계의 유정은 원칙적으로 색계의 5온으로 이루어지지만, 필시 5온 전부를 갖추지 않은 경우도 있 다. 첫 번째 무상천 이외의 색계에 태어났으면서 그것과 동류가 아닌 마음, 이를테면 무색계심이나 무루심을 낳을 경우, 이러한 상태에서는 색과 행만이 색계이며 다른 것은 색계의 계(繫)가 아니기 때문에 5온을 갖추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둘째 유상천에 태어나 거기서 무상천에 들 경우, 이 역시 색과 행만이 색계이다. 셋째 는 유상정에서 멸진정에 드는 경우이며, 넷째는 무상천에 태어나 무상이숙에 드는 경우이다.
48) 무상정은 범부나 외도가 드는 선정이기 때문에 욕계나 색계 어디에서도 그것의 초기(初起)가 가능하지 만, 멸진정은 오로지 성자에게 한정된 것이기 때문에 무시(無始)이래 일찍이 일어난 적이 없는 선정이다. 따 라서 그 초기는 욕계 인간 중에 한정된다. 즉 인간세 중에서는 불설(佛說)의 힘이 있으며, 또한 강성한 가행 을 닦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색계에는 이러한 힘이 없다.
49) 멸진정은 처음에는 오로지 욕계 인간에게서만 생기하며, 그 후 그이가 먼저 일단 그 선정에서 물러나 고서 색계에 태어날 때 그이의 색계 소의신에 의지하여 비로소 색계에서 생기하게 된다. 왜냐 하면 앞서 언급 한 대로 색계에는 강력한 가행력이 없기 때문이다. 참고로 무색계에서는 소의신이 없기 때문에 멸진정에 들 수 없다. 즉 명근은 반드시 색심에 의지하여 전전하기 때문에, 만약 무색계에 있으면서 멸진정에 들 경우 색 심이 모두 존재하지 않게 되므로 명근은 마땅히 끊어져야 하는 것이다.(『현종론』 앞의 책, p.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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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멸진정도 역시 물러남이 있는 것인가?
  역시 물러남이 있다고 마땅히 말해야 할 것이니,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바로 『오타이계경(陀夷契經)』에 위배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경에서 말하기를, "구수(具壽)여, 여러 필추(불환과를 획득한 비구)들이 있어 먼저 이러한 처소(욕계를 말함)에서 청정한 시라(尸羅)를 갖추고, 삼마지(三摩地)를 갖추고, 반라야(般羅若 : 지혜를 말함)를 갖추면 능히 자주 멸수상정(滅受想定)에 들고 날 수 있을 것이니, 이 처소에서는 그럴 수 있다고 마땅히 참답게 알아야 할 것이다. 그가 현법(現法)에 있어서나 혹은 임종의 상태에서 부지런히 닦았더라도 [무학의] 승해(勝解)로 하여금 능히 만족하게 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몸이 허물어짐에 따라 단식천(段食天)을 초월하며, 그에 따른 일처인 의성천(意成天)의 몸을 받는데,50) 그 곳에 태어나서도 다시 자주 멸수상정에 들고 나니, 이 처소에서도 역시 그럴 수 있다고 마땅히 참답게 알아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곧 이러한 의성천의 몸을 부처님께서는 바로 색계라고 설하였으나, 멸수상정은 오로지 유정(有頂)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이러한 선정을 획득하여 반드시 물러나는 일이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색계로 가 생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51)
  그런데 어떤 다른 부파[有餘部]에서는 "제4정려에도 역시 멸진정이 있다"고 주장하였다.52) 그들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멸진정에는 물러남이 없으며,
  
  
50) 여기서 단식천은 단식을 수용하는 욕계6천을 말하며, 의성천이란 부모의 정혈(精血) 등의 연을 빌리지 않고 마음대로 몸을 성립시킬 수 있는 색계천을 말한다.
51) 경문(經文)의 뜻은, 계·정·혜의 삼학을 갖춘 불환과의 비구는 욕계에서 자유로이 멸진정에 들고 나 지만 병이나 그 밖의 퇴연(退緣)을 만날 경우, 무학의 승해를 일으켜 무학과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즉 사후 바로 유정(有頂)으로 가지 않고 색계로 가 거기서도 역시 멸진정에 들고 나는 것으로, 만약 생전의 욕계 에서 물러남이 없었다면 색계에 태어날 수도 없었을 것이니, 이에 따라 멸진정에 물러남이 있음을 안다는 것 이다.
52) 보광에 의하면 이러한 주장을 한 부파는 대중부이다. 즉 대중부는 색계 제4정려 중에도 멸진정이 존재 하는데, 그럴 경우 앞의 경문에서 욕계에서 몰하여 색계 의성천에 생겨난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로서 물 러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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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뜻 또한 역시 성립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제4정려에 멸진정이 있다고 하는 뜻은 필시 이루어질 수 없는 사실이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계경에서 9차제정(次第定)을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53)
  이것이 만약 필시 그러하다면 어떻게 초월증(超越證)의 뜻은 있을 수 있는 것인가?
  이러한 선정의 순서[次第]는 초학자에 의거하여 설한 것으로, 자재(自在)를 획득할 때에는 뜻에 따라 초월하여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 선정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다른 점이 있었다. 이를테면 지(地)에 다름이 있으니, 제4정려와 유정지이기 때문이다. 가행에 다름이 있으니, 출리상(出離想)과 지식상(止息想)의 작의를 우선으로 하기 때문이다. 상속에 다름이 있으니, 이생과 성자의 상속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숙에 다름이 있으니, 무상(無想)과 유정(有頂)의 이숙과이기 때문이다. 순수(順受,과보를 받는 시기)에 다름이 있으니, 순생수(順生受)와 부정수(不定受), 순생과 2수(順生·順後)이기 때문이다. 초기(初起)에 다름이 있으니, 2계(욕계·색계)와 인간 중에 최초로 일어나기 때문이다.54)
  두 가지 선정은 모두 심·심소의 소멸을 자성으로 삼는데, 어떠한 이유에서 다만 무상정(無想定)이라 이름하고 멸수상정(滅受想定)이라고 이름하는 것인가?
  두 가지 선정은 가행 중에 오로지 이것(즉 수와 상)을 싫어하고 거역[厭逆]하였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역시 수(受) 등을 알지만 [수지(受智)라 하지 않
  
  
  
53) 9차제정이란 4정려와 4무색정, 그리고 멸진정을 순서대로 닦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만약 대중부 주장대로라면 멸진정을 제4선 다음에 5번째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9차제정은 『장아함경』 권제17 『 포타바루경(布婆樓經)』(대정장1, p. 110상); 같은 경 『십보경(十報經)』(대정장1, p. 240상)에 나온다.
54) 즉 무상정과 멸진정 사이에는 각기 4정려와 유정지(有頂地)에 존재한다는 지(地)의 차별, 해탈의 출리 상(出離想)과 정주(靜住)의 지식상(止息想)을 우선으로 한다는 가행의 차별, 이생과 성자의 상속에서 일어난 다는 상속의 차별, 무상(無想)과 유정의 이숙과라는 이숙의 차별, 순생수와 순생·순후·부정·불수의 과보를 받는 시기[順受]의 차별, 욕계·색계와 인간 중에서 최초로 일어난다는 초기(初起)의 차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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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오로지 타심지(他心智)라고만 이름하는 것과 같다.55)
  그런데 이러한 두 가지 선정 중에서는 마음이 이미 오랫동안 끊어져 있었는데 어떻게 그 후에 마음이 다시 생겨날 수 있는 것인가?56)
  비바사사(毘婆沙師)는 과거 [입정] 전의 마음이 [출정] 후 등무간연(等無間緣)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를테면 무색계에 태어나면 색법이 오랫동안 끊어지는데, [하계에 태어난] 후 어떻게 다시 색법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이 생겨나는 것은 결정코 마땅히 [무색계] 마음 [가운데 색법종자]에 의한 것으로, [끊어진 과거] 색에 의한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출정(出定) 후의 마음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할 것이니, 유근신(有根身) [중에 훈습된 마음의 종자]에 의한 것이지 [소멸된 과거 입정전의] 마음에 의해 생기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들 선대(先代) 궤범사(軌範師)는 모두 말하기를. '[색과 심] 두 법은 서로 간에 종자가 된다'고 하였으니, 여기서 두 법이란 이를테면 마음과 유근신을
  
  
  
55) 타심지는 다른 이의 마음[心]뿐만 아니라 수·상 등도 알지만 다른 이의 마음을 알기를 원하여 가행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에 따라 '타심지'라고 이름한 것과 마찬가지로, 무상정은 '상'을 싫어하여, 멸수상정 다시 말해 멸진정은 수와 상을 싫어하여 가행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같이 이름하였다는 뜻.
56) 유부에서는 제방이라는 객관적 실재물에 의해 강물의 흐름이 차단되듯이 무상정과 멸진정이라고 하는 객관적이고도 개별적인 힘에 의해 대종이 평등하게 되고 심 심소 또한 평등하게 되어 완전히 차단될 수 있다 고 하였다. 즉 마음의 완전한 장애 차단은 삼마지와 같은 또 다른 의식작용으로는 불가능하며, 따라서 마음과 는 다른 불상응행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럴 때 이러한 무심정에서 출정할 경우, 과거 입정 전의 마음[定前心]이 어떻게 다시 상속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에 대해 유부에서는 '전정 심이 출정 후 등무간연(等無間緣, 또는 次第緣, 前念이 後念의 緣이 되는 것. 본론 권제7을 참조할 것)이 되 어 바로 마음을 일으킨다'고 하였으나, 무상·멸진 2정의 개별적 실재성을 부정하는 경량부로서는 결국 간단 없는 '상속의 이론'으로서 밖에 설명할 수 없으며, 그것이 이른바 색심호훈설(色心互熏說)이다. 즉 출정심은 과거 입정 전의 마음에 의하는 것이 아니라 소의신 상에 훈습된 심종자(心種子)로부터 상속한다는 것이다. 나 아가 세우(世友 : 『婆沙』의 세우와는 동명이인으로, 보광에 의하면 經部異師)는 멸정유세심설(滅定有細心說 )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즉 완전히 무심의 상태에서는 출정 후의 유심의 상태로 전지상속은 불가능하기 때문 에 정중유심설(定中有心說)을 주장한 것이다. 이에 반해 경부사의 색심호훈설은 정중무심설(定中無心 說)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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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하는 것이다."57)
  그러나 존자 세우(世友)는 『문론(問論)』 중에서 설하기를, "만약 멸진정에 어떠한 마음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출정할 때 마음이 다시 생겨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이러한 과실이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멸진정에도 여전히 미세한 마음[細心]이 있다고 설하기 때문에 그 같은 과실이 없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존자 묘음(妙音)은 설하기를, "이는 참된 이치가 아니다"고 하였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만약 이러한 멸진정 중에 여전히 식(識)이 있다고 한다면 삼사(三事)가 화합하기 때문에 반드시 마땅히 촉(觸)이 있어야 할 것이며, 촉을 연(緣)으로 삼아 응당 수(受)와 상(想)이 있어야 할 것이니, 이는 바로 "의(意)와 법(法)을 연으로 삼아 의식을 낳고, 3사화합의 촉과 함께 수·상·사(思)를 낳는다"고 세존께서 설하신 바와 같다. 즉 이러한 선정 중에는 수·상 등의 법도 역시 마땅히 멸하지 않는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경에서 '수(受)을 연으로 하여 애(愛)가 있다'고 설하고 있듯이 [갈애도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아라한은 비록 온갖 수를 갖을지라도 애는 낳지 않으니, 촉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즉 일체의 촉이 모두 수 등의 연이 되는 것은 아니다"고 한다면, 이러한 예는 옳지 않으니, [촉이 수를 낳는 경우와 수가 애를 낳는 경우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즉 경 자체에서 "만약 무명[과 함께하는] 촉에 의해 낳아진 온갖 수라면, 그것을 연으로 하여 애를 낳는다"고 분별하여 말하고 있지만, 촉이 수를 낳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일찍이 어떠한 곳에서도 분별한 일이 없기 때문에, 두 경우에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도리에 의해 비바사사(毘婆沙師)는 "멸진정 중에서 온갖 마음은 모두 소멸한다"고 설하는 것이다.
  
  
  
57) 이 논설은 보광 법보 공히 경부종의 것으로, 후술하듯이 무상 멸진 두 가지 선정의 개별적 실재성을 부정하는 경량부로서는 출정심과 전정심의 상속의 문제를 예의 '상속의 이론'으로써 밖에 설명할 수 없었으며 , 그것이 이른바 '색심호훈설'이다. 여기서 선대 궤범사(p rv c rya)는 경부의 고사(古師)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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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어떠한 마음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것을 정(定)이라 이름할 수 있을 것인가?58)
  이것은 대종으로 하여금 평등하게 작용[行]하게 하기 때문에 그것을 이름하여 '정'이라고 하였다.59) 혹은 마음의 힘[心力]에 의해 여기에 평등하게 이르기 때문에 이를 이름하여 '정'이라고 하였다.60)
  이와 같은 두 가지 선정은 실유(實有)라고 해야 할 것인가, 가유(假有)라고 해야 할 것인가?
  마땅히 실유라고 말해야 할 것이니, 능히 마음을 차단 장애[遮礙]하여 생겨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61) 이러한 논증은 이치상 마땅히 그렇지 않으니, 그것(심·심소가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은 바로 정전심(定前心, 멸정에 들기 전의 마음)에 의해 차단 장애 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58) 정(定) 즉 등지(等至, sam patti)란 대지법의 하나인 삼마지(samadhi)에 의해 심·심소가 태만[惛沈] 과 탐닉[掉擧] 등을 떠나 평등하게 되는 것[平等至]을 말하기 때문에 유심이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무심으로 써는 심 평등성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59) 즉 비록 무상·멸진정에 의해 평등심이 단멸되어 상속하지 않을지라도 그러한 유정을 구성하는 4대종 으로 하여금 평등하게 하기 때문에 '등지'라고 할 수 있다는 뜻. 『대비바사론』 권제152(대정장27, p. 775중 ;한글대장경124, p. 45)에서는 다음과 같이 논설하고 있다. 마음을 평등하게 하는 것을 일컬어 등지라고 한다 . 여기에는 마음이 없는데 어떻게 등지라고 할 수 있는가? 답: 등지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마음을 평등하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대종을 평등하게 하는 것이다. 즉 무상·멸진정은 비록 평등한 마음을 단절하 여 상속하지 않게 할지라도 평등한 대종을 이끌어 나타나게 하기 때문에 등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60) 마음의 힘 즉 사마디에 의해 입정심(入定心)이 혼침 도거를 떠나 평등하게 됨으로써, 비록 무심이지만 등지라고 할 수 있다는 뜻.
61) 여기서 어떤 이는 보광이나 법보에 따르는 한, 경부사(經部師)이다. 즉 경량부에서는 정전심(定前心) 이 소멸하고서 후기심(後起心)이 아직 일어나고 있지 않는 상태, 혹은 마음이 전생(轉生)하지 않는 소의신의 상태를 일시 설정하여 정(定)이라고 이름할 뿐, 마음을 소멸시키는 개별적 실체로서의 멸진·무상의 두 선정 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그들은 예의 '색심호훈설'을 인용하여 무색계의 중생이 색계로 전생할 때 그때의 색법은 오랫동안 단멸되었던 과거색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앞서 심법 중에 훈습되어 있던 색법의 종자로부터 생겨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정전심은 다음 찰나, 즉 입정시 과거로 낙사하여 그 작용이 없어지지만 그것에 훈습되어 있던 색법의 종자에서 소의신이 인기 상속되며, 그것이 또 다른 마음, 즉 후기심 의 생기를 차단 장애하여 일어나지 않게 한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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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전심과 여타의 다른 마음(출정시의 마음, 곧 後起心)은 서로 다르게 일어나는데, 이러한 정전심이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다만 뒤에 일어날 여타의 마음을 잠시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일 뿐이다. 또한 이러한 정전심은 능히 마음과는 다른 소의신을 인발(引發)하여 상속시키기 때문에, 다만 [그 때 마음이] 전생(轉生)하지 않는 상태를 일시 [멸진]정(定)이라고 설정할 뿐 [그렇게 전생하지 않게 하는] 별도의 실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다만 [마음이] 전생하지 않는 상태를 가정한 것으로, 입정 전이나 출정 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는 바로 유위법에 포섭되는 것이라고 가설한 것이다.62) 혹은 소의신이 정전심에 의해 인발되어 이와 같이 [여타의 마음과는 다르게] 일어나게 한 것을 일시 [멸진]정(定)이라 설정한 것이다.
  그리고 무상정도 역시 이와 같다는 사실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정전심에 의해 [심·심소는 능히 차단 장애 되기 때문에] 여타의 마음 즉 후기심과 다르게 일어난다. 곧 이 같은 정전심이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여타의 다른 마음(즉 후기심)을 잠시 일어나지 않게 하니, 다만 [그같이 마음이] 전생하지 않는 상태를 일시 무상정이라고 설정한 것일 뿐……. 이하 그 밖의 논설은 앞에서와 같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선설(善說)이 아니니, 우리의 종의(宗義)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두 가지 선정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명근(命根)이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명근의 본질은 바로 목숨[壽]으로서
  능히 체온[煖]과 의식[識]을 유지하는 것이다.
  命根體卽壽 能持煖及識
  
  
  
  
62) 그러한 상태는 입정시에 생겨나서 출정시에 소멸하는 생멸의 현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유위법의 하나 로 설정하였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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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하여 말하겠다. 명근의 본질은 바로 목숨[壽]이다. 그래서 대법(對法)에서 말하기를, "무엇을 일러 명근이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삼계의 목숨이다"고 하였던 것이다.63)
  이 또한 잘 알지 못하겠으니, 어떠한 법을 일컬어 목숨이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어떤 개별적인 법으로서 능히 체온[煖]과 의식[識]을 유지하는 것을 일컬어 목숨이라고 한다. 그래서 세존께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던 것이다.
  
  목숨과 체온과, 그리고 의식
  이 세 가지의 법이 몸을 버리게 될 때
  그것이 버려진 몸은 나자빠지니
  어떠한 생각도 없는 나무둥치와도 같다.64)
  그러므로 어떤 개별적인 법이 있어 능히 체온과 의식을 유지하여 [유정으로 하여금] 상속하게 하고 지속하게 하는 근거를 설하여 목숨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러한 목숨은 어떠한 법에 의해 능히 유지되는 것인가?(경부의 문)
  바로 체온과 의식이 다시 이러한 목숨을 유지시키는 것이다.(유부의 답)
  만약 그렇다면 이 세 가지 법은 [마치 세 발의 솥이 넘어지지 않듯이] 서로가 서로를 유지시켜 상속 전생(轉生)하게 하기 때문에 [셋 중의] 어떠한 법이 먼저 소멸하여야 이것의 소멸로 말미암아 나머지 두 가지 법도 따라 소멸하겠는가? 그러한 즉 이 세 가지 법은 마땅히 항상하여 낙사(落謝)함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이미 그렇다고 한다면 이러한 목숨은 마땅히 업이 능히 유지한다고 해야
  
  
  
63) 여기서 대법은 『발지론』 권제14(대정장26, p. 993중;한글대장경176, p. 331). '명근은 욕계계(繫) 내지 무색계계이다. 무엇이 욕계계의 명근인가 하면 욕계계의 목숨을 말한다. 내지 무엇이 무색계계의 명근인 가 하면 무색계계의 목숨을 말한다.'
64) 『잡아함경』 권제21 제568경(대정장2, p. 150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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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 것이니, 업에 따라 인기(引起)되어 상속 전생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오로지 업이 능히 체온과 의식을 유지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다시 수명을 필요로 하는 것인가?
  이치상으로 마땅히 그러하지 않은 것이니, 일체의 모든 의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 이숙이 아니기 때문이다.65)
  이미 그렇다고 한다면 업이 능히 체온을 유지하고, 체온은 다시 의식을 유지한다고 마땅히 말해야 할 것으로, 이러한 목숨이 무슨 필요가 있을 것인가?
  그와 같다고 한다면 의식이 무색계 중에 있을 때에는 응당 마땅히 능히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니, 그곳에는 따뜻함 즉 체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식은 업에 의해 능히 유지하게 된다고 마땅히 말해야 할 것이다.(경부의 답)
  어찌 그대는 어느 때는 이러한 의식은 오로지 체온이 능히 유지하게 한다고 설하면서 혹 어느 때는 다시 오로지 업이 의식을 유지시킨다고 말하는 등 감정에 따라 이리저리 생각을 바꾸는 것인가? 그리고 [후자의 허물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논설한 바 있다.
  앞에서 논설하였다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앞에서 설하여 말하기를, '일체의 모든 의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이숙이 아니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개별적인 법이 있어 능히 체온과 의식을 유지하게 하니, 그것을 일컬어 목숨[壽]이라 한다는 사실을 결정코 마땅히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 [우리 경부] 역시 목숨 자체가 완전히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며, 다만 목숨 자체는 개별적인 실체[別實物]가 아니라는 사실만을 설할 뿐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법을 설하여 목숨이라고 이름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3계의 업에 의해 인기(引起)된 동분(同分)이 머무를 때까지의 세력[勢分]을 설하여 목숨이라고 한다.66) 즉 3계의 업에 의해 인기된 동분이
  
  
65) 만약 체온과 의식이 모두 이숙과로서 과거의 업력에 의해 유지되고 지배되는 것이라면, 이는 완전히 숙명론으로, 일생 동안의 식은 모두 이숙의 식이 되어 정진도, 정명(正命)도, 열반에 대한 염원도, 영원한 출 리도 불가능하게 된다.
66) 여기서 '동분'이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동류상사(同類相似)를 가설하여 일컫는 말로서, 여기서는 일기(一期) 상속하는 오온신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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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무를 때의 세력은 응당 머물러야 할 시간에 따라 그 상속이 결정되며, 그 만큼의 시간만을 머물게 되기 때문에, 이러한 세력을 설하여 목숨이라고 하는 것이다. 예컨대 그것은 곡식의 종자 등에 의해 인기(引起, 즉 발아)되어 내지는 익을 때까지의 세력과 같고, 또한 쏘아진 화살에 의해 낳아진 [동분이] 머무를 때까지의 세력(즉 시위를 떠난 화살이 그 힘이 다하여 땅에 떨어질 때까지 동류상사하는 동분의 세력)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말하기를, "행(行)이 존재하니, 이는 바로 덕(德)의 차별로서 화살 따위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다. 곧 그것의 힘으로 말미암아 떨어지지 않고 항상 작용하여 멈추지 않는다"고 하였다.67) 그러나 그러한 행(行)의 본질은 단일하기 때문에, 장애를 갖지 않기 때문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빠르게 도착하거나 늦게 도착하는 등의 차별은 마땅히 있을 수 없을 것이며, 또한 마땅히 필경 추락하는 때도 없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바람에 장애 되어 추락하였다고 한다면, 마땅히 처음에 바로 떨어지든지, 혹은 떨어지는 때가 없어야 할 것이니, 능히 장애하는 바람과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이다.68)
  개별적인 실체가 있어 능히 체온과 의식을 유지하게 하니, 그것을 일컬어
  
  
  
67) 여기서 어떤 이는 승론(勝論, Vai e ika)학파를 말한다. 즉 그들은, 6구의(句義, pad rtha)의 두 번째인 속성의 원리(德, gu a)로서 스물네 가지를 상정하고 있는데, 그 24번째가 행덕(行德, sa skara gu a)이다. 여기에는 다시 일정한 방향으로 계속 운동하게 하는 타성 혹은 속도(vega), 강열 반복 유의 등의 경 험에 의해 생겨나 기억의 원인이 되는 인상(bh v na), 변화한 것을 원래의 상태대로 회복시키는 탄력(sthitisth paka) 등 세 가지가 있는데, 이를테면 화살은 속도 혹은 타성력에 의해 떨어지지 않고 날아 가는 것이다. 그런데 승론에 의하면 그 같은 속도나 타성력의 본질[行體]은 단일 무차별하고 영속적인 것이다 . 그러나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화살이 날아가는 속도에 완급의 차별도 없어야 할 것이고, 또한 그것이 영속 적이기 때문에 떨어지는 때도 없어야 할 것이다. 만약 바람에 장애 되어 떨어졌다고 한다면 바람 역시 무차별 인 행덕(行德)의 원리에 의해 불고 있으므로 화살은 처음부터 날 수 없든지, 혹은 영원히 떨어지지 않아야 하 는 것이다. 결국 경량부에서는 제유정을 상속 유지시키는 명근과 같은 개별적 실체로서의 힘을 부정하고 다만 일정기간 지속하는, 혹은 날아가는 세력(혹은 승론적으로 말하면 타성)을 명근이라고 이름할 뿐이라는 것이다 .
68) 이상은 명근과 이와 유사한 승론학파의 개념인 행덕(行德)에 대한 경부의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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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숨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설이야말로 뛰어난 것이라 할 수 있다.(歸宗)
  그렇다면 목숨이 다하였기 때문에 죽는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 밖의 다른 원인이 있어 죽는다고 해야 할 것인가?
  『시설론(施設論)』에서는 목숨이 다하였기 때문에 죽는 것으로, 복이 다하였기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고 설하면서, 널리 4구(句)로 분별하고 있다.69) 제1구는 목숨을 초래하는 이숙의 업력이 다하였기 때문이다.70) 제2구는 부락(富樂)의 과보를 초래하는 업력이 다하였기 때문이다.71) 제3구는 이 같은 두 가지를 초래하는 업이 능히 함께 다하였기 때문이다. 제4구는 능히 광횡(橫, 횡액)의 연(緣)을 피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역시 마땅히 수행(壽行)을 버렸기 때문이라고도 말해야 할 것이다.72)
  그리고 목숨이 다한 상태에서 복이 다하였을 경우, 그것(복)은 더 이상 죽음에 대한 공능이 없다. 그렇지만 [목숨과 복이] 함께 다하였을 때의 죽음을 설하여 '함께 다하였기 때문에 죽는 것'이라고 하였다.73)
  그런데 『발지론(發智論)』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74) "이러한 목숨은 응당 상속에 따라 전이하는 것[隨相續轉]이라고 말해야 할 것인가, 아
  
  
69) 『대비바사론』 권제20(한글대장경118, p. 458)에서는 『시설족론』에서 인용한 네 종류의 죽음에 대 해 논설하고 있다. 첫 번째는 수명이 다하여 죽는 죽음, 둘째는 재물이 다하여 죽는 죽음, 셋째는 수명과 재 물이 함께 다하여 죽는 죽음, 넷째는 횡사나 부처님의 반열반과 같은 수명이나 재물과는 관계없는 죽음.
70) 이를테면 부귀자의 죽음처럼 복을 초래하는 업이 다하여 죽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초래하는 업이 다하 여 죽는 경우.
71) 이를테면 아사자처럼 목숨을 초래하는 업이 다한 것이 아니라 복을 초래하는 업이 다하여 죽는 경우.
72) 부처님과 아라한의 사다수행(捨多壽行)은 목숨의 업이 다하여 죽은 것도, 부락(富樂)의 업이 다하여 죽은 것도 아닌 경우이다. 이는 말하자면 비명횡사[非時死]에 해당하는 경우로, 유부에서는 당연히 그러한 다 수행(多壽行)의 실재성을 인정하고 있지만 비유자(譬喩者)나 경부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후술)
73) 이는 앞의 제3구에 대한 보충설명으로, 목숨과 복을 초래하는 업이 함께 다하여 죽는 경우 죽음의 유 력한 원인은 사실상 목숨이 다한 것이지 복이 다한 것이 아니라는 뜻.
74) 『발지론』 권제15(한글대장경176, p. 355). 이하 논의는 명근(命根)에 대한 방론(傍論)으로, 목숨을 상속에 따라 전이하는 것[隨相續轉]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일단 생기하여 머무는 것[一期便住]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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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면 응당 일단 생기하여 머무는 것[一期便住]이라고 말해야 할 것인가? 욕전(欲纏)의 유정으로서 무상정에 들지 않고, 멸진정에 들지 않은 자라면 응당 이러한 목숨은 상속에 따라 전이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무상정에 들거나 멸진정에 든 자라면, 그리고 색·무색전의 일제 유정이라면 응당 이러한 목숨은 일단 생기하여 머무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 같은 말은 무슨 뜻인가?
  만약 소의신이 손해(損害)될 수 있기 때문에 목숨도 따라 손상되는 것이라면, 이것을 첫 번째의 '상속에 따라 전이하는 목숨'이라고 한다. 그러나 만약 소의신이 손상되지 않고 생기한대로 머물러 있으면, 이것을 두 번째 '일단 생기하여 머무는 목숨'이라고 한다. 그런데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의 비바사사(毘婆沙師)는 말하기를, "처음의 것은 장애가 있음을 나타내고, 뒤의 것은 장애가 없음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결정코 비시(非時), 즉 때 아닌 때 죽는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계경에서 '자신의 몸[自體]을 획득하는 데 네 가지 경우가 있다'고 설하였으니, 이를테면 자신의 몸을 획득하여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해코지할 수 있고 다른 이는 해코지할 수 없는 경우가 있으며, 이에 대해 널리 4구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75)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해코지할 수 있고 다른 이는 해코지할 수 없는 경우(제1구)란 이를테면 욕계의 희망념천(戱忘念天)이나 의분에천(意憤恚天)에 태어나는 것이니, 그곳에서는 증상의 기쁨[喜]과 분노[怒]가 발기하기 때문이다.76) 즉 이 경우는 그 같은 자신의 기쁨과 분노에서 죽는 것이지 다른 상
  
  
75) 욕계에서는 횡액과 자해(自害) 타해(他害)에 의해 불시에 목숨을 마치는 경우가 있지만 상계(上界)와 두 무심정(無心定)에서는 그러한 일이 없다는 것을 논구하면서, 자해와 타해에 대해 4구분별하고 있다. 제1구 는 스스로 해코지할 수 있어도 다른 이는 해코지할 수 없는 경우, 제2구는 다른 이는 해코지할 수 있어도 스 스로는 해코지할 수 없는 경우, 제3구는 스스로도 해코지할 수 있고 또한 역시 다른 이도 해코지할 수 있는 경우, 제4구는 스스로 해코지할 수도 없고 다른 이가 해코지할 수도 없는 경우.(『대비바사론』 권제151, 대 정장27, p. 771중하;한글대장경124, p. 23-24 참조)
76) 희망념천(戱忘念天, Kr daprad ika-deva)이란 몸을 장식하거나 유희에 탐착하는데 지쳐 정신을 잃 고 죽기도 하는 하늘을 말하고, 의분에천(意憤恚天, Mana prad ika- deva)이란 분노와 미움에 서로 째려 보다가 극에 이르러 그것을 참지 못하고 죽기도 하는 하늘을 말하는데, 『대비바사론』 권제199(대정장27,p.997중)에서는 이러한 하늘은 묘고(수미)산의 층급 혹은 삼십삼천에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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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에서 죽는 것이 아닌 것이다. 또한 마땅히 제불(諸佛)[의 신체]도 그러하다고 설해야 할 것이니, 스스로 반열반하기 때문이다.77)
  오로지 다른 이만이 해코지할 수 있고 자기 자신은 해코지할 수 없는 경우가 있으니(제2구), 이를테면 탯집[胎]과 알[卵] 속에 처한 온갖 유정류가 그러하다.
  [자기 자신과 다른 이] 모두가 해코지할 수 있는 경우가 있으니(제3구), 그 밖의 대부분의 욕계의 유정이 그러하다.
  [자기 자신과 다른 이] 모두가 해코지할 수 없는 경우가 있으니(제4구), 이를테면 중유(中有)와, 색계·무색계에 존재하는 일체의 유정과,78) 그리고 욕계에 존재하는 일부분의 유정, 예컨대 나락가(那落迦)와 북구로주(北俱盧洲)의 유정과,79) 바로 견도(見道)와 자정(慈定)·멸진정 그리고 무상정에 머무는 자와80) 왕선(王仙)과 부처님의 사자[佛使]와,81) 부처님의 기별(記別)을 받은 달미라(達弭羅)와 올달라(嗢達羅)와 긍기라(殑耆羅)와 장자의 아들 야사(耶舍)와 구마라시바(鳩摩羅時婆)와, 최후신의 보살과 이러한 보살의 어머니로서 보살을 탯집에 품었을 때와, 일체의 전륜왕과 이러한 전륜왕의 어
  
  
77) 이는 논주 세친의 보충설명으로, 부처님의 사다수행(捨多壽行)을 가리킨다.(이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3, p.129 참조)
78) 중유는 반드시 인연을 기다려 생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색계·무색계에는 살생이 없기 때문에, 혹은 색계의 몸은 수묘(殊妙)하고 무색계에는 색신이 없기 때문에 중간의 요절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79) 나락가(nar ka) 즉 지옥의 중생은 악업에 의해 초래된 것이기 때문에 그 과보를 다할 때까지 자해(自 害)나 타해(他害)가 없다. 북구로주(uttarakuru)는 4대주의 하나로, 수명이 천세인데, 중간에 요절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역시 그러하다.
80) 견도(見道)에 머무는 동안에는 중간에 요절하는 일이 없으며, 자정(慈定)은 출정할 때 중생들을 이익 되게 하겠다는 의요가 강렬하여 그 경지가 부처님과 같기 때문에, 멸진정과 무상정에 머무는 자는 정력(定力) 의 힘에 의해 자해나 타해가 없다.
81) 왕선(王仙, rajarisi)이란 전륜왕으로서 출가하여 5통을 갖춘 자를 말한다. 혹은 전륜왕의 태자가 관 정(灌頂)한 뒤 고진선왕(古晉仙王)이 행하였던 범행을 익히는 때를 말하는 것으로, 그는 마땅히 전륜왕의 왕 위를 이어야할 자이므로 자해나 타해가 없다. 부처님의 사자(jina duta)는 그가 할 일을 마치기 전까지는 역 시 자해 타해가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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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니로서 전륜왕을 탯집에 품었을 때가 그러한 경우이다.82)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째서 계경 중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였겠는가?:
  "[존자 사리자가 묻기를] 대덕이시여, 획득한 바의 자신의 몸[自體]을 자기 자신이 해코지할 수도 없고 다른 이가 해코지할 수도 없는 유정은 어떠한 유정인가?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리자여, 이를테면 비상비비상처에 있으면서 생을 받은 유정이 그러하다."83)
  전(傳)하여 설(說)하기를, [유정천을 제외한] 그 밖의 무색계와 [색계 4]정려에서 얻은 자신의 몸은 다만 자지(自地)의 성도(聖道)에 의해 해손(害損)되거나 또한 역시 상계 다른 지의 근분(近分)에 의해 해손 되지만, 유정천의 경우에는 자지와 상지의 두 가지 해손 모두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계경에서] 양자 모두가 해손할 수 없다고 설하게 된 것이다.84)
  유정천 역시 타지(他地,즉 무소유처)의 성도에 의해 해손 되는 것인데, 어찌하여 마땅히 타해(他害) 즉 다른 것에 의해 해손 되는 것이라 이름하지 않는 것인가? [따라서 이 경의 뜻은] 이와 같이 '뒤의 것을 들어 처음의 것을 나타낸다'고 마땅히 설해야 할 것이니,85) 이를테면 혹 어떤 곳에서는 처음의
  
  
82) 부처님으로부터 미래세의 성불을 약속 받은 달미라(Dharmila)·올달라(Uttara)·긍기라(Ga gila)·야 사(Yasa)·구마라시바(Kum rajiva)와, 마침내 이번 생에 성불할 최후신의 보살과 전륜성왕, 그리고 그들을 잉태한 어머니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성불을 이루기 위해, 혹은 그 복덕이 광대하기 때문에 중간에 요절하는 일이 없다.
83) 계경에서 자해도 타해도 되지 않는 소의신을 지닌 유정은 유정천(有頂天) 즉 비상비비상처라고 하였는 데, 어째서 여기서는 색계·무색계 등의 유정 등이라고 한 것인가 하는 난문. 이는 논주 세친의 물음이 아니 라, 『대비바사론』 권제151(한글대장경124, p. 26)에서 사리불의 물음으로 나온 것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84) 이러한 전설(傳說)은 논주 세친의 예의 불신(不信)을 나타내는 것으로, 『바사』(앞의 책, p. 28)에서 는 법구(法救)의 설로 언급되고 있다. 즉 경에서의 뜻은 앞에서의 설명과는 달리 목숨이 아니라 소의신의 해 손(害損)에 관한 것으로, 말하자면 3무색 4정려의 번뇌신(身)은 자지의 무루도에 의해 해손(自害)되고, 상지 의 근분정의 유루도에 의해 해손(他害)되기 때문에 오로지 유정천의 유정만이 자·타에 의해 해손되지 않는다 는 것이다.
85) 즉 경에서 자해 타해가 없는 곳을 비상비비상처라고 하였지만, 그것은 다만 그곳의 유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계의 가장 뒤의 명칭인 비상비비상처를 언급하므로써 그 앞의 명칭, 이를테면 4정려 3무색도 함께 나타낸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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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것을 들어 뒤의 것을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다시 어떤 곳에서는 뒤의 것을 들어 처음의 것을 나타내기도 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경의] 어떤 곳에서는 처음의 것을 들어 뒤의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를테면 계경에서 '범중천과 같은 곳을 제1 낙생천(樂生天)이라 이름한다'고 설한 바와 같다.86)
  [경의] 어떤 곳에서는 뒤의 것을 들어 처음의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를테면 계경에서 '극광정천(極光淨天)과 같은 곳을 제2 낙생천이라 이름한다'고 설한 바와 같다.87)
  그 같은 경에서의 '……와 같은[如, tadyath ]'이라는 말은 비유(譬喩)의 뜻을 나타낸다. 그렇기 때문에 '한 가지를 들어 그 밖의 다른 것을 나타낸다'고 설할 수 있을 것이니, 비유법은 한 가지 사실을 들어 동류(同類)의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세존께서 사리자에게 고한 계경)에는 '……와 같은'이라는 말이 없기 때문에 그것(앞서 인용한 계경)을 예증으로 삼을 수는 없는 것이다.88)
  만약 비유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 바야흐로 '……와 같은'이라는 말이 있어야 한다면, 그런 즉 '……와 같은'이라는 말은 [비유를 나타내지 않는] 그 밖의 다른 경에는 마땅히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비유를 나타내지 않는] 다른 경에서도 "유색의 유정으로서 몸[身]이 다르고 상(想)이 다른 이가 있으니, 예컨대 인(人)과 일부분의 천(天)'과 같은' 이로서, 이것이 바로 제1식주(識住)이다"고 설하고 있다.89) 따라서 비유를 나타내지 않더라도 역
  
  
86) 이를테면 『장아함경』 권제8 『중집경(衆集經)』에는 초선천으로 범중천·범보천(梵輔天)·대범천의 3천이 논설되고 있는데, 제일 앞의 범중천을 언급한 것은 바로 다른 2천을 포함한 제1 낙생천 다시 말해 초선 천 전부를 나타낸다는 뜻.
87) 제2선에는 소광천(小光天)·무량광천(無量光天)·극광정천의 3천이 있는데, 최후의 명칭을 언급함으로 써 다른 2천을 포함한 제2 낙생천 전부를 나타내게 된다는 뜻.
88) 세존께서 자·타해가 없는 곳으로 비상비비상처'와 같은' 곳이라 하지 않고 비상비비상처만을 언급하 였기 때문에, 여기에는 그 밖의 나머지 색계·무색계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뜻.
89) 여기서 계경은 『장아함경』 권제8 『중집경(衆集經)』(대정장1, p. 52상); 『중아함경』 권제24 『대 인경(大因經)』(대정장1, p. 581중). 즉 이 경에서는 '……와 같은'이라는 말이 설해지고 있지만, 그것은 비 유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비상비비상처는 자타에 의해 해손되지 않는 곳의 유예(喩例)가 될 수 없 다는 뜻. 참고로 유부에 있어 의식은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반드시 그 근거[所依]를 갖어야만 한다. 완성된 유부 세계관에서 볼 때 3계 5취의 제유정의 의식이 안주(安住)하는 형태에는 일곱 가지가 있는데, 이 를 7식주(識住)라고 한다. 여기서의 논설은 제1식주로서, 그것은 신체도 서로 다르고[身異] 생각도 서로 다른 [想異] 인취(人趣)와 욕계6천의 유정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8에서 상론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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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와 같은'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방론(傍論)은 바야흐로 여기서 그만 마치기로 한다.
  
  명근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온갖 상(相)이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상(相)이란 말하자면 온갖 유위가
  생(生)·주(住)·이(異)·멸(滅)하는 성질이다.
  相謂諸有爲 生住異滅性
  
  논하여 말하겠다. 이러한 네 가지 종류가 바로 유위의 상(相)이니,90) 법으로서 만약 이러한 상을 갖은 것이라면 응당 마땅히 유위라고 해야 할 것이며, 이와 상위되는 것이라면 바로 무위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상 가운데] 제법을 능히 일어나게 하는 것을 '생(生, j ti)'이라 이름하고, 능히 안주하게 하는 것을 '주(住, sthiti)'라고 이름하며, 능히 쇠퇴하게 하는 것을 '이(異, anyath tva)'라고 이름하고, 능히 허물어지게 하는 것을 '멸(滅, anityat )'이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본송에서 말한] '성질'이란 바로 체(體)의 뜻이다.91)
  
  
90) 이는 유위를 유위이게 하는 네 가지 특징적 근거[相, lak a a]로서, 유위제법을 생성·지속·변이· 소멸하게 하는 원리를 추상화시켜 얻은 개념이다. 따라서 이러한 네 가지 상을 갖지 않은 것이 무위이다.
91) 범본이나 『석론(釋論)』에는 이 구절이 없다. 참고로 『현종론』 권제7(대정장29, p. 808하 ; 한글대 장경200, p. 185)에서는 " [이러한 유위의 상은 바로] 유위의 성질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상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顯彼性故得彼相名)"고 논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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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찌 경에서는 세 가지 '유위의 유위상'이 있다고 설하지 않았던가?92)
  그 경 중에서도 마땅히 네 가지가 있다고 설하여야 하였을 것이다.
  설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주상(住相)이다.
  그렇지만 경에서는 주이(住異)를 설하고 있지 않은가?
  이는 바로 이(異)의 다른 명칭이다. 말하자면 생(生)을 기(起)라 이름하고, 멸(滅)을 의분에천(意憤恚天) 진(盡)이라고 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이(異)를 주이(住異)라고 이름하였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 어떤 법이 [제]행으로 하여금 삼세로 천류(遷流)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이 경에서는 유위의 상이라고 설하였으니, 온갖 유정으로 하여금 [유위법에 대해] 싫어함과 두려움[厭畏]을 낳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를테면 그러한 제행은 생상(生相)의 힘에 의해 옮겨져 미래로부터 현재로 흘러 들어오게 되는 것이며, 이상(異相)과 멸상(滅相)의 힘에 의해 옮겨지고 핍박되어 현재로부터 과거로 흘러 들어가게 되니, 그것(유위법)으로 하여금 쇠퇴하여 변이[衰異]하게 하고, 괴멸(壞滅)하게 하기 때문이다. 전(傳)하여 설(說)하기를,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빽빽한 나무숲에 숨어있는데, 세 사람의 원적(怨敵)이 있어 그에게 손해(損害)를 입히고자 하여 한 사람은 밀림으로부터 그를 끌어내어 나오게 하고, 한 사람은 그의 힘을 쇠진하게 하며, 한 사람은 명근을 괴멸시키듯이 세 가지 [유위]상이 행(行)에 대해서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93) 그런데 주(住)는 그러한 행을 섭수(攝受)하고
  
  
92) 『증일아함경』 권제12(대정장2, p. 607하). 여기에서는 종기(從起)·천변(遷變)·멸진(滅盡)이라는 말로 언급하고 있다.
93) 여기서의 '전설'은 논주 세친의 예의 불신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말 그대로 유부종에서 전해 내려오 는 세 가지 유위상에 대한 비유설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숲속에 숨어 있는 한 사람의 원수는 생겨나 소멸하는 유위법의 비유이고, 그를 색출하여 밀림(미래)에서 그 밖(현재)으로 끌어내는 자는 생상(生相)의 비유이며, 그의 힘을 소진시켜 쇠하게 하고 그의 목숨을 해치는 자는 각기 이상(異相)과 멸상(滅相)의 비유이다. 즉 이 상의 논의는 바로 유위4상을 3상으로 설하게 된 이유를 밝힌 것으로, 이 예화대로라면 그로 하여금 계속 밀림 속에 머물러 있게 하는 자가 주상(住相)일 것이다. 즉 주상은 유위법의 한 특상이기는 하지만, 이를 설할 경 우 일체 유정이 이에 집착하여 사리(捨離)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또한 무위법의 특징인 자상(自相)의 '주( 住)'와 혼동되기 때문에 설하지 않은 것이다.(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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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립(安立)하게 하니,94) [유정은] 그러한 제행과 더불어 항상 즐거워하며 서로 사리(捨離)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경에서는] 그것을 유위상 중에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무위법은 자상으로서 주(住)를 가지니, [유위의] 주상은 그것(무위의 주)과 혼동되기 때문에 경에서 설하지 않은 것이다.95)
  그런데 어떤 이는 일컫기를, "그 경에서는 주(住)와 이(異)를 합해 하나로 설하여 주이상(住異相)이라고 이름하였다"고 하였다.96)
  어떠한 이유에서 이와 같이 합하여 설하게 되었던 것인가?
  '주'는 바로 유정이 애착하는 바로서, 그것을 싫어하여 버리게 하기 위해 서로 다른 것을 합하여 설하게 된 것이니, 이를테면 흑이(黑耳)와 길상(吉祥)이 함께한다고 나타내 보인 것과 같다.97)
  그렇기 때문에 결정코 네 가지 유위상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 등의 상은 바로 유위[법]이라고 하였으니, 그것은 마땅히 [그것을 낳게 하는] 별도의 '생' 등의 네 가지 상을 또 다시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또 다시 그러한 상을 갖는다고 한다면 바로 무한소급[無窮]에 떨어지고 말 것으로, 그것은 다시 또 다른 '생' 등의 상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마땅히 ['생' 등의 네 가지 상을] 또 다시 가져야 한다고 말해야 하지만, 그러나 무한소급에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94) 즉 주상(住相)은 제행을 포섭하여 현재에 안주하게 하는 것이다.
95) 무위법의 주(住, sthiti)는 원래 그 자신의 자성으로서, 본법(本法)과는 개별적인 존재인 주상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다. 즉 주상은 이러한 무위자성으로서의 '주'와 혼동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경에서 설하지 않 았다는 뜻. 한편 중현(衆賢)은 유위와 무위의 공덕과 과실의 차별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하였다.(『현종론』 권제7,한글대장경200, p. 185) 즉 유위법의 과실은 생기·변이·소멸이고 공덕은 지속이지만 제 무위법 역시 그 자상이 '주' 즉 지속이기 때문에 이것과 혼동을 피하기 위해 세 가지만을 설하였다는 것이다.
96) '주'와 '이'는 각기 그 본질은 다르지만 그것을 '주이(住異)'라고 동시에 함께 설하였기 때문에 경에 서는 실질적으로 네 가지 유위상을 설하였다는 뜻.
97) 길상( r )은 행복의 여신이고, 흑이(k lakar )는 불행의 여신으로, 둘은 항상 함께 다니는 자매 이다. 즉 길상에 탐착하지 않게 하기 위해 흑이가 존재하듯이, 유정들로 하여금 '주(住)'에 탐착하지 않게 하 기 위해 '이(異)'를 함께 설하였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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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째서 그러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것(유위4상)은 생생(生生) 등을 가지니,
  여덟 가지와 한 가지 법에 대해 공능이 있다.
  此有生生等 於八一有能
  
  논하여 말하겠다. 여기서 '이것'이란 이를테면 앞에서 설한 네 가지 종류의 본상(本相)을 말한다. 그리고 '생생 등'이란 이를테면 네 가지 수상(隨相)으로, [바로 이러한 생의] 생생(生生)·주주(住住)·이이(異異)·멸멸(滅滅)을 말하는데, 제행의 유위는 네 가지 본상(本相)에 따르고, 본상의 유위는 네 가지 수상(隨相)에 따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상은 소상법(所相法)과 마찬가지로 그 하나하나에 마땅히 네 가지 종류의 수상을 갖아야 할 것이며, 이러한 수상에는 다시 각기 네 가지가 있어야 하는 등 끊임없이 전전(展轉)하게 될 것이 아닌가?98)
  그러한 과실은 없으니, 네 가지의 본상과 네 가지의 수상은 각기 여덟 가지에 대해서와 한 가지에 대해서 그 공능(功能)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99)
  무엇을 일컬어 공능이라 한 것인가?
  법의 작용을 말한다. 혹은 사용(士用) 즉 사람의 활동과 같은 작용을 말하기도 한다. 즉 네 가지 종류의 본상은 하나하나가 모두 8법(法)에 대해 작용이 있으며, 네 가지 종류의 수상은 하나하나 모두 1법에 대해서만 작용이 있
  
  
  
98) 여기서 소상법이란 유위상에 의해 생·주·이·멸하는 본법(本法)을 말한다. 즉 '생' 등의 네 가지 본 상도 불상응행법으로서 결국 유위법의 일종이기 때문에 다시 이를 생기하게 하거나 소멸하게 하는 또 다른 종 류의 4상이 요구되며, 나아가 마침내 무한소급에 빠지게 되지 않는가 하는 난문.
99) 이를테면 어떤 색법이 생기할 때, 거기에는 이미 본법인 색법 자체와 함께 생·주·이·멸 상이 포함 되어 있으며, 동시에 그러한 4상을 가능하게 하는 네 가지 수상이 포함되어 있다(9法俱生). 그리고 여기서 생 상을 제외한 8법은 생상의 작용(공능)에 의해 생겨나며(즉 네 가지 본상은 각기 8법에 대해 작용한다), 생상 은 생생상의 작용에 의해 생겨난다(네 가지 수상은 오직 그것의 본상인 1법에 대해서만 작용한다). 말하자면 본상과 수상은 상호 성립 세력이 된다는 것이다.(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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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뜻인가?
  말하자면 어떤 법이 생겨날 때에는 그러한 법 자체와 아울러 9법(法)이 함께 생기하니, 법 자체가 한 가지이며, 상과 수상이 여덟 가지이다. 즉 본상 중의 생상(生相)은 그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8법을 낳으며, 수상인 생생상은 9법 가운데 오로지 본상인 생상만을 낳을 뿐이다. 이를테면 마치 암탉이 많은 새끼를 낳는 경우도 있고, 오로지 한 마리를 낳는 경우도 있는 것처럼, 생상과 생생상이 여덟 가지 법을 낳고 한 가지 법을 낳게 되는 힘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
  그리고 본상 중의 주상(住相)도 역시 그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8법을 머무르게 하며, 수상인 주주상은 9법 가운데 오로지 본상인 주상만을 머무르게 할 뿐이다. 나아가 이(異)와 멸(滅)의 상(相)도 이에 따라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 등의 상이 다시 상을 갖을지라도 수상에는 오로지 네 가지만 있을 뿐으로, 무한소급[無窮]의 과실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경부사(經部師)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어떠한 연유에서 이와 같이 [실재하지도 않는] 허공을 분석하는 것인가? '생(生)' 등의 상은 [유부(有部) 비바사사(毘婆沙師)가] 분별하는 바와 같이 실유의 법체(法體)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 까닭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을 인식하기 위한] 정당한 인식방법[定量]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러한 온갖 상(相)들은 색법 따위처럼 현량(現量)이나 비량(比量) 혹은 지교량(至敎量)에 의해 그 실체가 증명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100)
  
  
100) 제법의 찰나 '구기(俱起)'가 아니라 '상속(相續)'으로 세계를 해명하는 경량부에 있어 실유법으로서 의 생 등의 4상에 관한 논의는 마치 실재하지도 않는 허공(유부의 경우 이 또한 무위로서 실유법임)을 분석 논구하는 것과 같은 부질없는 일이다. '식유필경(識有必境, 인식에는 반드시 객관적 대상이 존재한다)'이라는 유부교학의 전제에 따를지라도 1찰나에 동시존재[俱有]하는 4상 그 자체는 동시에 지각[現量, pratyak a pram a]되지 않으며, 지각에 근거되지 않은 것은 추리[比量, anum a pram a]될 수도 없기 때문에 그 것을 인식할 만한 정당한 인식수단[量, pram a]이 부재한다. 설사 유위4상에 관한 교설[至敎量, agama]을 인증(引證)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불타교설의 참된 뜻을 망각한 말의 집착일 뿐이라는 것이 경량부의 주장이 었다. 즉 경량부에서는 생성과 소멸 등을 실체로서가 아니라 다만 유위제법의 상속의 한 과정으로 이해하였을 뿐이다.(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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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째서 계경 중에서 "유위법의 생기[起]도 역시 요지(了知)할 수 있고, 다함[盡]과 아울러 주이(住異)도 역시 요지할 수 있다"고 말하였겠는가?101)
  천애(天愛)여! 그대들은 글에만 집착하고 그 뜻에는 미혹하구나. 박가범(薄伽梵)께서 설하신 뜻이야말로 바로 우리가 의지해야 할 바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경에서 설하고 있는 참된 뜻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어리석은 범부들은 무명에 눈이 멀어 행(行)의 상속에 대해 아(我)와 아소(我所)라고 집착하여 오랫동안[長夜] 그것에 대해 탐착을 낳는다.102) 세존께서는 그들의 집착을 끊게 하기 위해 행의 상속 그 자체는 바로 유위의 성질이며 연생(緣生)의 성질임을 밝혔던 것이니,103) 그래서 "세 가지 '유위의 유위상'이 있다"고 설하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 말이] 제행의 1찰나 중에 세 가지 상이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힌 것은 아니니, 1찰나에 생기 등의 세 가지 상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것은 마땅히 상(相)으로 설정해서 안 될 것이니, 그래서 그 계경에서는 다시 "유위법의 생기도 역시 요지(了知)할 수 있고, 다함과 아울러 주이(住異)도 역시 요지할 수 있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104)
  그런데 경에서 유위라는 말을 거듭 설하고 있는 것은,105) 이러한 상이 바로
  
  
101) 『증일아함경』 권제12(대정장2, p. 607하) 참조. 생기와 다함은 생상과 멸상을, 주이는 주상과 이상 을 말한다.
102) 아(我, tman)라고 집착한다 함은 상일주재(常一主宰)하는 실체적인 자아가 유위행의 주체라고 여기 는 것이며, 아소(我所, tman ya)는 그러한 유위행을 '나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인도에 서는 하루를 일야(一夜)라고 하기 때문에 장야(dirgharatra)는 단순히 기나긴 밤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가리 킨다.
103) 연생의 성질(prat tyasamutpannatva)이란 인연화합하여 생겨난 것이라는 뜻으로, 사실상 앞의 유위 의 성질과 동의어이다.
104) 즉 유부는 경설에 근거하여 '생' 등의 유위상의 실재성을 논의하고 그것들의 구생(俱生)을 주장하였 지만, 경량부에서는 1찰나에 4상의 인식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경 중에서 그것을 요지할 수 있다고 설한 것은 결코 1찰나에 그것들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먼저 첫찰나에는 다만 생기만이 있고 다음 찰나 주이, 그리고 소멸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경량부에서는 이 경문을 유위4상은 상속에 근거하여 가립(假立)된 것이라는 주장의 논거로 삼고 있는 것이다.
105) 앞서 언급한 세 가지 '유위의 유위상[有爲之有爲相]'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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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위임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일 뿐으로, 마치 백로가 있다면 물이 있다는 것[非無]을 나타내듯이 이러한 상이 [그것과는 다른] 유위법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며, 또한 역시 마치 동녀(童女)의 상이 선(善) 혹은 선이 아님을 나타내는 것과 같이 유위[법]의 선악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해서도 안 된다.106)
  즉 제행의 상속이 처음으로 일어나는 것을 '생(生)'이라 이름하고, 끝내 다한 상태를 설하여 '멸(滅)'이라 이름하며, 중간의 상속으로 수전(隨轉)함을 '주(住)'라고 이름하며, 이러한 [머무는 때의] 전후 차별을 일컬어 '주(住)의 이(異)'라고 한다. 그리고 세존께서도 이 같은 사실에 의거하여 난타(難陀)에게 설하여 말하기를, "이 선남자(善男子)는 수(受)의 생(生)을 잘 알며, 수의 주(住)를 잘 알며, 아울러 수의 쇠이(衰異)와 괴멸(壞滅)을 잘 안다"고 하였던 것이다.107) 그래서 게송으로 설하여 말하기를,
  상속의 시작을 '생'이라 이름하고
  '멸'이란 끝내 다한 상태를 말하며
  중간에 수전(隨轉)함을 '주'라 이름하며
  '주이(住異)'는 전후의 차별이다.
  
  고 하였던 것이다.
  다시 어떤 게송에서는 말하기를,
  
  
  
  
106) 이는 계속된 경부의 주장이다. 예컨대 백로는 바로 물의 징표이며(백로가 있는 곳에 물이 있다), 동 녀(처녀)의 상, 이를테면 가는 허리나 흰 이빨 같은 것은 그녀의 선(善)·불선을 나타내지만 그 때 물과 선 불선은 백로와 처녀와는 다른 실재이다. 그러나 유위상은 이와 달리 소상(所相)의 본법이 유위임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유위법과는 독립된 개별적 실재가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세 가지 유위[법]의 유위상이라고 설 하였다는 것이다.
107) 『잡아함경』 권제11 제275경(대정장2, p. 73중) 참조. 여기서 난타(Nanda)는 『증일아함경』 권제9( 대정장2, p. 591중하)에 의하면 출가초기 음욕에 탐하였으므로 불타는 수(受)의 생·멸을 관(觀)하게 하였고, 그 결과 아라한과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의 경문은 난타가 득도한 후 불타가 그를 찬탄하였던 구절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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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없다가 지금 있는 것을 '생'이라 하고
  상속하여 수전(隨轉)하는 것이 '주'라고 하며
  전후의 차별을 '주이(住異)'라 하고
  상속의 끊어짐을 '멸'이라 이름한다.
  
  고 하였다.
  혹은 어떤 게송에서는 말하기를,
  
  제법은 찰나성이기 때문에
  머무름[住]은 없고 멸함만이 있으니
  그것은 자연히 멸하는 것인 고로
  머무름이 있다고 집착하는 것은 비리(非理)이다.108)
  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오로지 상속에 있어서만 '주'를 설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대법(對法)에서 설한 이치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 논에서 말하기를, "무엇을 주(住)라고 이름한 것인가? 이를테면 일체의 행(行)으로서 이미 생겨나서 아직 멸하지 않는 것이다"고 하였다.109) 즉 생겨나서 소멸하지 않은 것을 찰나법성(刹那法性)이라고 이름할 수 없는 것이다.110) 비록 『발지론』 중에서 "일심(一心) 중의 무엇이 기(起)인가? 말하자면 생(生)이다. 무엇이 진(盡)인가? 말하자면 사(死)이다. 무엇이 주이(住異)인가? 말하자면 노(老)이다"고 설하고 있을지라도,111) 그 논에서의 말은 중동분(衆同分) 상에 상속의 마음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지 일 찰나의 마음에 근거하여 설한
  
  
108) 본송은 앞의 두 게송과는 그 의미가 약간 다르다. 즉 유부에 의하면 제법은 생기하는 순간 소멸한다. 그리고 그것은 외연(外緣)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저절로 멸하는 것이기 때문에 찰나 중에 주상(住相)이 있다고 주장할 경우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
109) 여기서 대법론은 『품류족론』 권제1(대정장26, p. 694상), " 住云何? 謂令已生諸行不壞."
110) 즉 생겨나 아직 소멸하지 않은 것이 '주(住)'라고 한다면 그것을 찰나법성이라 이름할 수 없기 때문 에 주상(住相)은 오로지 제법이 '상속한다'고 주장하는 경우에만 설할 수 있다는 뜻.
111) 『발지론』 권제2(한글대장경176, p.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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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것이 아니다.112) 또한 각각의 찰나의 제 유위법에 그 같은 실유의 존재[實有物]를 주장하지 않더라도 4상은 역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이를테면 각각의 찰나[念]에 일찍이 없다가 지금 있는 것을 '생'이라 이름하며, 있다가 다시 없어지는 것을 '멸'이라 이름하며, 후후(後後)의 찰나가 전전(前前) 찰나에 이어 일어나는 것을 일컬어 '주'라고 하며,113) 그리고 그러한 '주'의 전후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주이'라고 이름하니, 전후 찰나가 서로 유사하게 생겨날 때에도 전후를 서로 비교해 보면 차별이 없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한 차별의 상은 어떻게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만고불변과 같이 보이는] 금강(金剛) 등에도 던져질 때와 아직 던져지지 않을 때, 강하게 던져질 때와 약하게 던져질 때, 빠르게 추락할 때와 느리게 추락할 때에 각기 차별이 있기 때문에 그것의 대종(大種)이 전변(轉變)하고 차별(差別)된다는 뜻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114) 따라서 제행은 서로 유사하게 상속하며 생겨날 때 그 전후를 서로 비교해 보면 많은 차별이 없기 때문에 비록 다름이 있을지라도 서로 유사하게 보이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최후 찰나의 소리나 빛, 그리고 열반할 때의 최후 찰나의 6처(處)는 더 이상 후념(後念,다음 찰나)이 없기 때문에 마땅히 주이(住異)가 없어야 할 것이며, 그러한 즉 그대들이 설정한 상(相)은 마땅히 유위에 두루 적용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115)
  
  
112) 여기서의 일심은 유정의 한 생애를 말하는 일기(一期)상속의 마음을 말한 것이지 일 찰나의 마음을 말한 것이 아니라는 뜻. 따라서 찰나가 아닌 상속 상에서만 주상을 설할 수 있다는 앞의 주장은 『발지론』에 도 위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113) 선행한 찰나에서 후속하는 찰나로 단절없이 연속하는 것을 '주' 즉 지속이라 한다.
114) 너무나 견고하여 깨트려지지도 변화하지도 않을 것으로 보이는 금강저(vajra, 무기의 일종)와 같은 것도 그것을 던져 보면 타력의 강약에 의해 추락의 속도에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고, 동시에 그것을 구성한 대종에도 역시 전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뜻.
115) 이는 앞의 경량부 설에 대한 유부의 난(難)이다. 즉 최후찰나의 소리나 빛은 더 이상 후찰나가 없기 때문에 상속하는 일이 없을 것이고, 그럴 경우 주이(住異)가 있다고 말할 수 없으며, 그러한 유위상론(相論) 은 이 같은 최후 생의 유위법에는 적용될 수 없어 보편이론이라고 할 수 없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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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주(住)가 유위상이 된다고는 설하지 않았다.
  그것은 무슨 뜻인가?
  이를테면 '주'는 바로 '주(住)의 이(異)'를 말하기 때문이다. 즉 [어떤 법에] '주'가 있다면 역시 또한 반드시 '이'도 있으며,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유위상을 설정함에 있어 두루 적용되지 못하는 과실은 없는 것이다.116) 그렇지만 이 경(최초에 언급한 경) 중에서 세존께서 설한 유위의 상을 간략하게 나타내어 본다면 이러하다. 즉 "유위법은 본래 없다가 지금 있으며(즉 생), 있다가는 다시 없어지며(즉 멸), 아울러 상속으로 머물며[相續住], 이러한 상속을 전후 비교하면 다름[別異]이 있으니, 여기에 '생' 등의 [자성을 지닌] 개별적 존재[別物]가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어떻게 소상(所相)의 법을 설정하여 능상(能相)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117)
  어떻게 대사(大士 :즉 불타)의 상이 대사와 다른 것이라 하겠으며, 뿔과 [목덜미의] 돌기와 [목 아래로 처진] 살과 발굽과 꼬리는 소의 상인데, 그것을 어찌 소와 다른 것이라 하겠는가? 다시 말해 대사의 상은 대사와 다른 것이 아니며, 소의 그러한 상들은 소와 다른 것이 아니다. 또한 견고성[堅] 따위로 일컬어지는 지계(地界) 등의 상과 지계 등은 다른 것이 아니며, 멀리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그것이 바로 연기의 상임을 아는데, 그것과 연기 자체는 다른 것이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유위의 상도 이치상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비록 유위인 색법 등의 자성을 요별(了別)하였을지라도 아직 그것의 선무(先無) 후무(後無)와 상속의 차별을 요별하지 못하였다면 그것은 바로 그 자체가 유위라는 사실을 아직 알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존재 자체(즉 색법의 자성)가 바로 유위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러
  
  
  
116) 최후찰나의 소리 등이 전찰나의 그것과는 다르게 변이한 것을 주이(住異), 즉 상속의 변이[住之異]라 는 뜻의 '이(異)'라고 하였으므로 유위상이 온갖 유위법에 두루 적용되지 않는 과실은 없다는 뜻.
117) 사물(所相法)의 일련의 상속의 과정을 '생' 등의 4상이라 할 뿐 개별적 실체로서의 4상(能相法)을 인 정하지 않을 경우, 소상인 유위법과 능상의 유위4상이 동일하게 되고 만다는 유부의 힐난. 즉 생겨난 것과 생 겨나게 하는 것 사이의 구별을 무시하는 과실을 범하게 된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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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존재를 떠나 '생' 등의 실유물이 [따로이] 존재하는 것도 아닌 것이다.118)
  만약 유위인 색법 등의 자성을 떠나 '생' 등의 [개별적인] 실체[物]가 존재한다면 여기에는 다시 어떤 비리(非理)가 있는 것인가?
  일법은 일시에 마땅히 생겨나고 지속하고 쇠퇴 괴멸해야 할 것이니, 구유(俱有, 동시존재)하는 것이라고 인정하였기 때문이다.119)
  이러한 힐난은 옳지 않으니, 작용하는 시간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생'의 작용은 미래에 있으니, 현재에 이미 생겨난 것은 다시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법이 생겨나서 바로 현재할 때, 비로소 '주' 등 세 가지 상의 작용이 일어나게 된다. 즉 '생'이 작용할 때에는 나머지 세 가지 상은 작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4상이] 구유할지라도 서로간에 모순되지는 않는 것이다.
  바야흐로 마땅히 사택(思擇)해 보아야 할 것이니, 미래의 법체는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런 후에야 '생'이 그러한 상태(미래법)에 대해 작용을 갖게 되는지 갖지 않게 되는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120) 설령 미래[법의 존재]를 인정할지라도 '생'이 작용을 갖는다면 어떻게 미래를 성취할 수 있을 것인가? 마땅히 미래의 [생]상을 설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미래]법이 현재할 때 생상의 작용은 이미 낙사(落謝)하였는데, 어떻게 현재를 성취할 수 있을 것인가? 마땅히 현재의 [생]상을 설해야 하는 것이다.121)
  
  
118) 색법의 자성을 요별하였을지라도 그것은 일찍이 존재하지 않았고 이후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란 사 실과 그 사이 상속[住]의 차별[異]을 알지 못하는 한 그것이 유위법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위법 그 자체만으로는 유위성이 알려지는 것이 아니지만, 다시 말해 색법의 존재(자성)가 그 자체 유위상은 아니지만, 유위법을 떠나 유위상이 따로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는 뜻. 말하자면 유위법의 존재 자 체와 그 상은 동일하지도 다르지도 않은[不卽不離] 관계이다.
119) 즉 생 등의 4상은 유위법을 유위이게 하는 특상이기 때문에 반드시 일찰나 일법 상에 동시에 존재해 야 한다.
120) 제법의 삼세실유를 주장하는 유부에서는 유위4상의 일법구유설(一法俱有說)의 모순을 피하기 위해 생 상은 미래에 작용을 일으킨다고 하였지만, 경량부에서는 과미무체(過未無體)·현재실유(現在實有)를 주장하기 때문에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논의의 선결문제인 것이다. 유부의 삼세실유와 경량부의 비판 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20에서 자세하게 논설되고 있다.
121) 생상이 미래(법)에 대해 작용을 일으킨다 할지라도 유부에 의하는 한 작용의 순간이 현재이므로 이 때 생상은 현재상이며, 따라서 미래(법)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미래의 생상을 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미래법이 현재할 때 생상의 작용은 이미 과거로 낙사하여 사라져 버렸으므로 이 때의 생상은 과거상이며 , 따라서 현재(법)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현재의 생상을 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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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주' 등 3상의 작용이 함께 현재하여 있다면 마땅히 하나의 법체(法體)가 한 찰나 중에 안주하고 쇠퇴하고 괴멸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만약 주상(住相)이 이러한 법을 능히 머무르게 하고, 동시에 이상과 멸상이 능히 쇠퇴 괴멸하게 하는 것이라면, 이 때의 법을 안주하는 것이라고 이름해야 할 것인가, 쇠퇴하는 것이라고 이름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괴멸하는 것이라고 이름해야 할 것인가?
  그러나 여러 논사[諸師]들이 설하고 있듯이 '주' 등의 작용은 동시가 아니라고 할 것 같으면, 그러한 설은 바로 찰나멸의 뜻에 어긋나게 될 것이다.122)
  만약 "우리는 일법이 지닌 온갖 상의 작용이 모두 이루어질 때를 일컬어 일찰나라고 한다"고 말한다면, 그대는 지금 마땅히 설해야 할 것이니, 주상과 다른 두 가지 상(이상·멸상)과 구생(俱生)함에도 주상이 먼저 머물러야 할 법을 능히 머무르게 하고, 이상과 멸상이 먼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에서인가. 즉 이상이 먼저 쇠퇴해야 할 법을 능히 쇠퇴하게 하지 않고, 멸상이 먼저 괴멸해야 할 법을 능히 괴멸하게 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에서인가?
  만약 주상의 힘이 강성하여 능히 먼저 작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 후 어떻게 이열(羸劣)해 져 본법과 더불어 이상과 멸상을 함께 만나 쇠퇴 괴멸하게 되는 것인가?
  만약 생상이 그러한 것처럼 주상도 이미 작용을 일으켰기에 응당 다시 작용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생상은 마땅히 그러할 수 있을 것이다.123) 대저
  
  
122) 주·이·멸의 3상 자체는 동시이지만 그 작용에 전후 차별이 있어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라면, 작 용이 다 마칠 때까지 지속한다는 뜻이므로 찰나멸론을 어기게 된다.
123) 대론자(유부)의 말처럼 생상은 한번 작용을 일으켜 주상이 나타나게 되면 더 이상 작용하지 않지만, 주상은 경우가 다르기 때문에 생상을 그것의 예로 삼을 수 없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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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상의 작용이란 이를테면 생겨나야 할 것을 인기(引起)하여 현재에 들어오게 하는 것으로, 이미 현재에 들어온 것은 마땅히 다시 인기하여 들어오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상은 마땅히 그렇지 않다. 대저 주상의 작용이란 이를테면 머물러야 할 것을 안주시켜 쇠퇴 괴멸하지 않게 하는 것으로, 이미 머무르고 있는 것도 오랫동안 안주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주상의 작용은 마땅히 항상 일어나야 하는 것이므로 생상의 예(例)로서 다시 작용하는 일이 없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무엇이 주상의 작용을 장애하여 잠시 있다가 다시금 없게 하는 것인가? 만약 이상과 멸상이 능히 장애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럴 경우 이상·멸상의 힘은 응당 마땅히 [주상보다] 강성해야 할 것인데, 어찌 주상보다 먼저 작용하지 않는 것인가?
  또한 주상의 작용이 멈추면 이상·멸상과 본법(本法)은 저절로 머무르지 않게 될 것인데, 이·멸의 2상은 어디서 어떻게 작용을 일으키겠는가?124) 또한 다시 무슨 일[事]이 있어 두 가지 작용이 필요한 것인가? 주상이 포섭 유지[攝持]함으로 말미암아 제법은 생겨나서 잠시 소멸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주상의 작용이 사기(捨棄)되면 법은 결정코 안주하지 않을 것이니, 저절로 소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상과 멸상의 작용은 더 이상 해야할 일이 없는 것이다.
  또한 마땅히 일법(일찰나의 법)이 생겨나서 아직 괴멸되지 않은 상태를 '주'라 이름하고, 머물다가 괴멸하는 때를 '멸'이라 이름한다고 하는 것은 이치상으로 그럴 수 있다 할지라도 이상(異相)이 일법 상에 있다는 것은 아무리 앞뒤로 미루어 따져보아도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異)' 즉 다름이란 이를테면 전후 성상(性相)이 전변한 것을 말하는 것
  
  
  
124) 유부에 의하는 한 일찍이 생상(生相)에 의해 생기한 본법은 주상(住相)의 작용에 의해 바로 괴멸하지 않고 안주하게 된다. 그런데 본법에서 주상의 작용이 종식되어 버렸다면 본법은 결정코 더 이상 머무를 수 없 을 것이며, 그것은 다름아닌 소멸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본법이 이미 소멸되고 없는데 이상과 멸상은 어디서 무엇을 쇠퇴 괴멸시킬 것인가. 이 두 상은 그 근거가 상실되어 어떠한 작용도 할 수 없게 되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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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로, 이것과 같은 법을 이것과 다르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125) 그래서 [세존께서는 다음의 같은] 게송을 설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앞의 것과 같으면 이상을 성취할 수 없고
  앞의 것과 다르면 동일한 법이 아니니
  그렇기 때문에 일법(一法) 상에서는
  이상을 세워도 끝내 성취할 수 없는 것이리라.
  
  비록 다른 부파에서 '멸의 인연을 만날 때 멸상은 비로소 괴멸될 법을 능히 괴멸한다'고 설하였을지라도126) 그가 설한 바는 응당 마땅히 어떤 이가 설사약을 먹었을 때 천신이 내려와 이롭게 한다(즉 설사하게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즉 그것은 바로 멸의 인연이 괴멸될 법을 응당 괴멸시키는 것인데, 그것과는 별도로 멸상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또한 심·심소는 찰나멸이라고 인정하였는데, 다시 그 밖의 또 다른 멸의 인연(즉 멸상)을 기다릴 필요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럴 경우 마땅히 멸상과 주상의 작용에 전후가 없어야 할 것이니, 그것은 바로 일법이 동일 시간 중에 머물기도 하고 역시 멸하기도 하는 것이어서 정리(正理)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다.127)
  그러므로 상속에 의해 유위상을 설하는 것이야말로 정리에 어긋나지 않을 뿐 아니라 계경에도 잘 따르는 것이라 하겠다.(경부종의 결론)
  
  
  
125) '이(異)' 즉 다름이란 시간적 전후 상태가 변화되었을 때, 다시 말해 두 찰나에 걸친 2법에 적용되는 말로서, 변화가 없는 동일법 상에서는 인정되지 않는다는 뜻.
126) 보광(普光)에 의하면 이는 정량부의 주장이다. 즉 정량부에서는 유위법을 잠주법(暫住法)과 찰나멸법 으로 나누어 외법(外法)은 대부분 전자에 해당되고, 심심소의 내법(內法)은 후자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그리 고 잠주법은 내·외 두 가지 연에 의해 괴멸하는데, 멸상(滅相)이 바로 내연이 된다. 이를테면 나무는 외연인 불을 만날 때 내연인 멸상에 의해 바야흐로 괴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심심소의 찰나멸법은 오로지 멸상 에 의해만 괴멸한다.
127) 앞의 주에서 언급한대로 정량부 등에서는 심법의 찰나멸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멸할 별도의 인 연을 기다릴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주상과 멸상은 동시에 작용을 일으키게 되므로 동일법이 동시에 안주하고 괴멸한다고 하는 모순을 띠게 된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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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생'이 미래에 있으면서 소생법(所生法) 즉 생겨나야 할 법을 낳는 것이라면, 미래의 일체의 법은 어째서 다 같이 함께 생겨나지 않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생'은 능히 소생법을 낳지만
  인연의 화합을 떠나서는 낳지 않는다
  生能生所生 非離因緣合
  
  논하여 말하겠다. 그 밖의 다른 인(因)과 연(緣)의 화합을 떠나 오직 생상의 힘만으로는 소생법 즉 생겨나야 할 법을 능히 낳을 수 없기 때문에 온갖 미래법은 모두 단박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128)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즉 經部師를 말함)들은 오로지 '생'의 공능은 인연이 갖는 것이라고 간주할 것이다. 즉 생상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더라도 인연만 화합하면 제법은 바로 생겨나며, 그것이 없으면 바로 생겨나지 않으니, 무엇 때문에 생상을 상정하여 번거롭게 할 것인가? 그러므로 오로지 인연의 힘 만 있으면 [제법은] 일어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어찌 그대가 존재하는 온갖 법을 모두 알 수 있을 것인가? 법성(法性)은 그윽하고도 미묘하여 참으로 알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법체가 나타나 있을지라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생상이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법이] '생겨난다'고 하는 인식[覺]도 없을 것이다.129) 또한 이를테면 '색(色)의 생기', '수(受)의 생기'와 같은 제6전(轉) 즉 소유격의 말도 마땅히 이루어질 수 없을 것으로, '색의 색'이라는 말은 마땅히 설할 수 없는 것과 같다.130)
  
  
128) "생상은 비록 동시생기[俱起]의 근인(近因)이 되어 능히 소생법을 낳을지라도 제 유위법은 그래도 반 드시 선행된 자기존재[自類]의 원인과, 그리고 그 밖의 외연과의 화합 섭조(攝助)에 근거해야 하니, 이를테면 씨앗과 땅 등으로 차별되는 인과 연이 싹의 '생'을 도와야 비로소 싹을 낳게 되는 것이다."(『현종론』 권제8, 한글대장경200, p. 195) 온갖 인(因)과 연(緣)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6에서 상설되고 있다.
129) 유부의 경우 대상 없는 인식[無所緣識]은 있을 수 없으며, 인식에는 반드시 객관으로 실재하는 대상 이 존재한다[識有必境]. 따라서 '법이 생기한다'는 인식이 이루어졌을 경우, 거기에는 필시 '법'뿐만 아니라 '생기'라고 하는 것이 개별적인 실체로서 각기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30) 즉 소유격의 '의'라고 하는 말은 두 가지 다른 실체[別體] 사이에서 어느 한편이 다른 어느 한편에 소속됨을 나타내는 말로서, 동일물 사이에는 쓰일 수 없다. 이를테면 '색의 색'이라는 말은 있을 수 없으며, 오로지 '색의 생기'라고 하는 경우에만 쓰일 수 있는데, 이 때 '색'과 '생기'는 반드시 서로 다른 실체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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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책망한 것과 마찬가지로, [주·이] 내지는 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주장에 대해서도 모두 다 그것이 상응하는 바에 따라 이와 같이 책망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공(空)·무아(無我)의 인식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법 이외 마땅히 공성과 무아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해야 할 것이며, 일(一) 이(二), 대소(大小), 각별(各別), 결합 분리, 이것 저것, 유성(有性) 등의 인식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외도(外道)와 마찬가지로 법 이외에 수(數), 양(量), 각별, 결합 분리, 이것 저것, 유 등의 개별적 존재[別性]가 실재한다고 주장해야 할 것이다.131) 또한 제6전의 말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마땅히 '색의 취집(聚集)'이라는 존재가 별도로 실재한다고 주장해야 할 것이며, 또한 이를테면 '색의 자성'과 같은 말을 설할 경우, 이러한 제6전의 말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132)
  그렇기 때문에 '생' 등은 오로지 일시 건립된 것으로서 개별적인 실체가 아니다. 즉 '생'이란 제행이 본디 없다가 지금 있음을 이해시키기 위해 일시 설정한 개념[假立]일 뿐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본디 없다가 지금 있는 것[本無今有]이라는 생상은 색법 등의 법에 의지하는 것으로, 그 종류가 다수이기 때문에 그 밖의 다른 것을 구별하기 위해 제6전을 설하여 '색의 생기' '수의 생기' 등으로 말한 것이다. 즉 다른 이로 하여금 이같이 생기하는 것은 오로지 색일 뿐 그 밖의 수 등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니, 그 밖의
  
  
  
131) '식유필경(識有必境)'이라고 할 경우, 제법무아(諸法無我)나 제법개공(諸法皆空)에서 제법 이외에 그 속성이나 양태라고 할 만한 무아나 공 또한 실재해야 하는데, 이 같은 주장은 바이세시카(勝論)학파에 의해 주장되고 있다. 즉 그들은 실체(dravya) 이외에도 속성(gu a) 운동(karma) 보편(s m nya) 특수(vi e a) 와 같은 범주를 주장하는데, 수·량·각별·결합·분리·이것(此性)·저것(彼性) 등은 속성에 포섭되고, 존재 성(有性)은 보편에 포섭된다.
132) 소유격이 두 가지 다른 실체 사이에 쓰이는 말이라고 한다면, '색의 취집'이나 '색의 자성'이라고 할 경우, 색 이외 취집이나 자성이 실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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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受 내지 識法)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예컨대 세간에서도 '전단(栴檀)의 향'이라든가 '석자(石子)의 체(體)'라고 설하듯이 이것도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와 마찬가지로 '주' 등의 상에 대해서도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 행(行)이 생상을 떠나서도 생겨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허공무위 등은 어째서 생겨나지 않는 것인가?
  제행을 '생'이라 이름하는 것은 본디 없다가 지금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위는 그 체가 항상 존재하니 어찌 생겨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133) 또한 [그대 종의에서는] 법이(法爾)로서 일체법은 모두 생상을 갖는다고 설하지 않으니, 이와 마찬가지로 마땅히 일체법은 모두 생겨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그대 종의에서] 유위법은 다 같이 생상을 갖을지라도 인연이 그러한 유위법에 대해 혹 어떤 경우 [생의] 공능을 갖기도 하고, 혹 어떤 경우 [생의] 공능을 갖지 않는다고 인정하는 것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일체의 유위법과 무위법은 다 같이 생상을 갖지 않을지라도 제 인연은 그러한 두 가지 법에 대해 어떤 경우(즉 유위) 생의 작용[生用]을 갖고 다른 어떤 경우(즉 무위) 생의 작용을 갖지 않는다고 마땅히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설하기를, "생 등의 상이 개별적인 실체[實物]로서 존재한다는 이치는 마땅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비난하는 자가 많다고 하여 어찌 종의로 삼는 바를 버릴 것인가? 사슴이 나타나는 것이 두려워 보리를 파종하지 않는 것은 아니며, 파리가 많이 붙어있는 것이 두려워 맛있는 음식[美團]을 먹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론자가 지적하는] 허물이나 힐난에 대해서는 마땅히 삼가 두루 해석해 보아야 하겠지만, 본 종의에 대해서는 마땅히 따라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온갖 유위상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133) 즉 무위법은 상주하는 것으로, 본디 없었다가 지금 있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 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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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상응행법 총론에서 언급한] 명신(名身) 등의 종류는 그 뜻이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명신(名身) 등이란, 이른바
  상(想)·장(章)·자(字)의 총설(總說)이다.134)
  名身等所謂 想章字總說
  
  논하여 말하겠다. 여기서 '등'이란 구신(句身)과 문신(文身)을 두루 취한다는 말이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여기서 명(名)이란 이를테면 색·성·향·미 등의 상(想)을 설하는 것과 같은 작상(作想)을 말하며,135) 구(句)란 뜻을 드러내는 구경(究竟)인 문장[章]을 말하는 것으로, 이를테면 '제행은 무상하다'는 따위의 문장을 설하는 것과 같다. 혹은 [이것에 의해] 동작[業用] 성질[德] 시제[時]의 상응과 차별을 능히 이해하게 되니, 이러한 문장을 '구'라고 칭한 것이다. 그리고 문(文)이란 문자[字] 즉 음소를 말하니, 이를테면 아(, )·아(阿, a)·일(壹, i)·이(伊, ) 등의 문자를 설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문자(음소)는 역시 또한 글자를 구성하는 부분[書分]의 명칭이 아니던가?
  글자를 구성하는 부분을 나타내기 위해 온갖 음소를 제조한 것이 아니라 다만 온갖 음소를 나타내기 위해 글자를 구성하는 부분을 제조한 것일 뿐이
  
  
  
134) 본 게송에서는 말의 의미를 드러나게 하는 힘으로서의 불상응행을 밝히고 있는데, 여기에는 명신(名 身)·구신(句身)·문신(文身) 세 가지가 있다. '명(n ma)'이란 물질·소리·향기 등과 같은 명사적 개념적 단어[想, sa j~ ]를, '구(pada)'란 '제행은 무상하다'와 같은 문장[章, v kya]을, '문(vya~jana)'이란 a· i·ka·kha와 같은 문자[字, ak ara] 즉 음소를 말하며, 이러한 세 가지 존재의 집합[總說, samukta]을 명신 등이라고 한다. 즉 유부에서는 이러한 존재가 개별적으로 실재함으로 해서 세계에 대한 인식이 가능하다고 하 였는데, 경부에서는 예외 없이 이를 가설로서만 인정하고 있다.
135) 작상의 '상(sa j~ )'은 10대지법의 하나. 이를테면 책상이라는 명칭은 그것을 듣는 이로 하여금 그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힘을 갖는데, 이같이 상(想)을 떠올리게 하는 명사적 단어를 '명(名)'이라 하는 것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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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즉 어떻게 하면 말(說)을 듣지 못하는 자라 할지라도 역시 이해하게 할 수 있을까 하여 글자의 구성부분을 만들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온갖 음소는 글자를 구성하는 부분의 명칭이 아니다.136)
  무엇을 일컬어 명(名) 등의 '신(身)'이라 한 것인가?
  이를테면 상(想) 등의 총설(總說)을 말한다.137) 여기서 '총설'이란 말은 바로 합집(合集)의 뜻이니, 합집의 뜻 중에서 온차(遮)의 계(界)를 설하였기 때문이다.138) 그러므로 여기서 명신이란 이를테면 색·성·향 따위를 말하며, 구신이란 이를테면 '제행은 무상하고, 일체법은 무아이며, 열반은 적정이다'고 하는 따위를 말하며, 문신이란 이를테면 가(迦, ka)·가(?, kha)·가(伽, ga) 따위를 말한다.139)
  이러한 세 가지 존재(명·구·문)는 말[語]을 자성[性]으로 삼기 때문에 마땅히 소리[聲]를 본질[體]로 하니, 어찌 색의 자성(自性, 즉 색법)에 포섭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그것을 어찌하여 심불상행법이라고 설하는 것인가?140)
  이러한 세 가지 존재는 말을 자성으로 삼는 것이 아니다. 말은 바로 음성(音聲)인데, 오로지 음성이 그 뜻을 알게 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141)
  
  
136) 즉 옛날의 성현이 듣지 못하는 자로 하여금 눈으로 그 뜻이 통하게 하기 위해 글자의 구성부분 즉 문 자를 제작하였다는 것으로, 그것은 결국 본래부터 존재하는 문(文, vya~jana)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는 뜻. 다시 말해 '문'은 다만 종이 위에 쓰여진 글자의 각각의 부분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불상응행법으로서 실재하 는 것이며, 그것을 시각의 대상으로 드러낸 것이 바로 글자의 구성부분이라는 것이다.
137) 신(身, k ya)이란 집합[總說]의 뜻으로, 상(想) 즉 명사적 개념의 집합을 명신이라 하고, 문장(章) 의 집합을 구신, 문자 음소(字)의 집합을 문신이라 한다.
138) 온차의 계(界)란, 온차(遮,uca)의 어근 uc(집합하다)를 말한다. 즉 총설의 원어 samukti는 어근 uc의 파생어(sam+ uc+ti)이므로 여기에는 이미 집합 의 뜻이 담겨있다는 말이다.
139) 앞에서 '문'을 설명하면서 언급한 아(, a)·아(阿, )·일(壹, I)·이(伊, ) 등은 모음의 예이고 여기서의 설명은 자음의 예이다.
140) 이는 경량부의 난문이다. 즉 경량부에서는 명·구·문의 3신을 다만 현현된 말의 차별로서 나타나는 일시적 현상[假法]으로 이해하였다.(후술) 그리고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 세 가지 존재는 말[語, abda]을 자 성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는 소리[聲, n da]일 뿐이며, 따라서 그것은 당연히 소리를 자성으로 삼는 물질[聲法]에 포섭되어야 한다고 논의하는 것이다.
141) 중현은 이 같은 경부의 물음에 대해 교증과 이증을 설하고 있는데, 이증의 골자는 소리[聲[와 문자의 의미[字[가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소리를 듣더라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소리는 듣지 않고서 입술의 모양만 보고도 그 뜻을 이해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현종론』 권제8, 한글대장경200, p. 20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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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어떻게 알게 되는 것인가?
  이를테면 말[語]이 명(名)을 낳고, 명이 능히 뜻[義]을 나타내니, 이에 따라 능히 그 뜻을 알게 되는 것이다.142)
  다만 음성을 모두 말이라고 일컫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그것에 의해 그 뜻을 알 수 있는 이와 같은 음성만을 비로소 말이라고 일컫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음성이 그 뜻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능설자(能說者)가 온갖 뜻을 이미 함께 설정하고서 '능히 드러내어야 할 의미의 한계를 결정지은 것[能詮定量]'만이 그 뜻을 알게 하니, 바야흐로 옛날 아홉 가지의 뜻에 대해 다 같이 '구(瞿, go)'라는 하나의 음성을 설정하여 능히 드러내어야 할 의미의 한계를 결정지은 것과 같다. 그래서 어떤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방위와 짐승(소)과 땅과 빛과 말[言]과
  금강과 눈과 하늘과 물,
  이러한 아홉 가지 종류의 뜻에 대해
  지자(智者)는 '구(瞿)'라는 말을 설정하였네.
  
  명(名)이 능히 뜻을 드러낸다고 주장하는 모든 이들도 역시 또한 결정코 이와 같은 뜻의 명(名)을 인정하여야 할 것이니, 말하자면 [명은 실유의 법이 아니라 겁초의 현성들이] 다 같이 함께 설정하여 '능히 드러내어야 할 의미의
  
  
  
142) 이른바 명현론(名顯論)으로 알려지는 유부의 논의에 따르면, 말[語言, vac]에 의해 '명(名, n ma)' 등이 생겨나며, 명에 의해 그 의미[義, artha]가 드러난다. 예컨대 불이라고 하는 말에 의해 불이라는 단어가 생겨나며, 불이라는 단어에 의해 그 의미가 드러난다. 그런데 여기서 '드러난다'고 하는 말은 드러내어야 할 의미대상[所顯義, j~eya]에 대해 그것과는 별도의 관념이나 지식[覺慧, buddhi]를 말하며, 청자는 그 같은 지 식을 통해 대상의 의미를 간접적으로 획득할 수 있다. 곧 '명' 등은 말을 통해 생겨나는 것으로, 마치 지식이 그 의미의 형상을 띠고 나타나듯이 말의 의미(대상 자체의 의미가 아님)를 드러내게 하는 것이 바로 명·구· 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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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계를 결정지은 것[能詮定量]'이라고. 만약 이러한 말의 의미[句義]가 '명'에 의해 능히 드러나는 것이라 할지라도 다만 음성에 의해 [명의] 작용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이미 분별하였으니, 어찌 반드시 실유의 '명'이 개별적으로 존재한다고 그릇되이 헤아릴 것인가?143)
  또한 아직 이러한 '명'이 어떻게 말[語]에 의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하니, 말에 의해 드러나는 것인가, 말에 의해 생겨나는 것인가? 만약 말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말은 소리를 본질[性]로 하기 때문에 응당 마땅히 일체의 소리가 모두 능히 '명'을 낳아야 할 것이다. 만약 '명'을 낳는 소리에 차별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소리) 만으로도 뜻을 드러내기에 충분한데 무엇 때문에 별도의 '명'을 필요로 할 것인가? 또한 만약 말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말은 소리를 본질로 하기 때문에 응당 마땅히 일체의 소리는 모두 능히 '명'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만약 '명'을 드러내는 소리에 차별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만으로도 뜻을 드러내기에 충분한데 무엇 때문에 별도의 '명'을 필요로 할 것인가?144)
  또한 온갖 찰나[諸念]의 소리는 취집(聚集)할 수도 없고, 또한 역시 하나
  
  
  
143) 이는, 모든 음성이 바로 말은 아니며, 그 뜻을 드러내는 음성만이 말이다. 따라서 말은 이처(耳處)에 포섭되는 색이다. 그럴 경우 물리적인 음성이 어떻게 자신의 의미를 이해시킬 수 있는가? 혹은 물리적인 모든 소리 가운데 어떠한 소리만이 자신의 의미를 드러낼 수 있는가 하면, 능설자 즉 최초의 현성(賢聖)에 의해 이 미 그 의미체계가 약속되어진 소리만이 자신의 의미를 이해시킬 수 있다. 나아가 발설자가 언어행위를 함에 있어 자신의 말이 제 의미체계 가운데 어떤 하나의 의미로서만 작용한다고 이미 그 한계를 정하여 언표한 말[ 能詮定量]만이 자신의 의미를 이해시킬 수 있다. 예컨대 범어 go라고 하는 말에는 소[牛]·말[言]·방위·빛[ 光]·금강·감관[眼]·하늘·물[水] 등의 의미가 있어,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지는 발설자에 의해 한정 되어 지시되어야 하며, 그럴 경우 go라고 하는 물리적 소리가 바로 아홉 가지의 의미를 현현시키는 작용을 갖 고 있기 때문에, 자성을 지닌 개별적 실체로서의 '명' 등의 개념을 요청할 필요가 없다는 경부의 논란이다.
144) 즉 유부가 주장하듯이 말 이외 개별적인 실체로서의 '명' 따위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결국 말에 의해 낳아지든지[名生論] 혹은 말에 의해 드러나든[名顯論] 둘 중 하나여야 한다. 만약 말에 의해 명(즉 作想, 단 어의 의미)이 생겨난다고 하면 말은 소리를 본질로 하기 때문에 모든 소리는 당연히 의미를 낳아야 할 것이지 만 현실적으로 그렇지 않다. 혹은 모든 소리가 의미를 낳는 것은 아니며 특별한 소리만이 의미를 낳는다고 한 다면, 소리만으로도 충분히 의미의 차별을 낳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개별적인 실체로서 '명'을 주장할 필요가 없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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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소리[一法]가 나누어져 점진적으로 생겨나는 일도 없는데, 어떻게 말에 의해 '명'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인가?145)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과거의 온갖 표업의 찰나에 근거하여 최후의 표업의 찰나에 능히 무표업을 낳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146)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최후 단계의 소리에서 '명'이 낳아지는 것이므로 단지 최후의 소리만 듣고서도 능히 그 뜻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만약 말[語]이 능히 문(文)을 낳고 '문'이 다시 명(名)을 낳으며, '명'이 바야흐로 뜻[義]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여기서의 허물과 난점은 응당 앞에서와 같다고 설해야 할 것이니, 온갖 찰나의 문(文)은 취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말이 '명'을 드러낸다고 하는 주장(즉 名顯論)의 허물도 [말이 명을] '낳는다'(즉 名生論)의 경우와 응당 마땅히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147)
  또한 말과는 다른 '문(文,즉 음소)'에 대해 온갖 지혜 밝은 자가 마음을 쏟아 사택(思擇)할지라도 그것의 자상을 분별하지 못할 것이며,148) 또한 '문'이 말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든 생겨나는 것이든 [앞에서 논설한] '명'과 말의 관계에 준해 볼 때 그것들은 모두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또한 만약 '명'이 생(生) 등의 [4상]과 마찬가지로 뜻과 구생(俱生)한다고
  
  
  
145) 예컨대 '소나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소' '나' '무'라고 하는 세 찰나에 걸쳐 발성된 소리이다. 따 라서 '소'라고 할 때 '나'와 '무'는 아직 미래에 있어 현재에 존재하지 않으며, '무'라고 할 때 역시 '소'와 '나'는 이미 과거로 낙사(落謝)하여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한다면 현재 존재하지 않는 소리가 어떻 게 의미를 낳을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소나무'라고 하는 일법의 존재가 세 찰나에 걸쳐 생겨날 수도 없지 만, 설혹 그렇다고 하면 일법의 존재가 세 찰나로 나누어지고 만다는 경부의 난문.
146) 유부에 의하는 한 다찰나에 걸친 행위 즉 표업은 집적되어 그 최후찰나에 무표업을 낳게 된다.(본론 권제13 참조) 이와 마찬가지로 세 찰나의 최후찰나인 '무'라고 하는 말에 의해 '소나무'라고 하는 말의 의미 가 생겨난다고 하는 뜻.
147) 즉 말은 소리를 본질로 하기 때문에 모든 소리는 마땅히 의미[名]를 드러내야 할 것이나 현실적으로 는 그렇지 않다. 만약 모든 소리는 의미를 드러내지 않으며, 특별한 소리만이 의미를 드러낸다고 할 것 같으 면 그러한 소리의 차별로써 충분히 의미를 차별시킬 수 있기 때문에 '명'과 같은 별도의 의미의 실재성을 주 장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148) 즉 유부에서 '명'과 마찬가지로 '문' 즉 음소[字] 또한 물리적인 말[語]과는 다른 개별적 실재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의 자상은 현량 비량 성언량에 의해서도 알려지지 않기 때문에 어떠한 지혜자도 분별하지 못 한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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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장한다면 현재세의 '명'으로서 과거·미래세의 뜻에 근거한 것은 마땅히 있을 수 없을 것이다.149) 또한 부모들은 그들이 원하는 바에 따라 자식들의 이름을 짓는 것인데, 어떻게 이름이 생(生) 등[의 4상]과 마찬가지로 뜻과 구기(俱起)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150) 또한 무위법은 마땅히 그 이름을 갖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니, 생(生)의 뜻이 없기 때문이다.151) 해서 마땅히 ['명'이 생 등의 4상과 마찬가지로 뜻과 구생한다는 주장을] 인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존께서 "게송은 '명(名)'과 사(士)에 근거하여 생겨난다"고 설하였으니,152) 이는 온갖 뜻에 대해 [겁초의 현성들이] 함께 분량(分量,즉 能詮의 의미)을 설정한 소리가 바로 '명'이고, 이러한 '명'의 안포(安布) 차별(差別)을 게송이라 한 것으로, 이와 같은 뜻에 따라 [세존께서는] "게송은 '명'에 근거한 것"이라고 설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게송은 바로 '명'의 안포 차별일 뿐으로, [그러한 것을 자성을 지닌] 실체[實物]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리(正理)에 부합하지 않으니, 이는 마치 나무 등의 행렬과 같고, 마음의 차제(次第) 생기와도 같다.153)
  혹은 오로지 '문자[文,즉 음소]'만이 개별적인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마땅히
  
  
  
149) 생·주·이·멸의 유위4상이 유위제법과 함께 생기하는 것처럼 언표되어지는 단어 즉 '명'(能詮의 법 )과 그 의미(所詮의 법)가 함께 생기한다고 할 경우, 과거나 미래의 의미는 현재하지 않기 때문에 언표될 수 없다는 뜻.
150) 예컨대 갓난아기의 이름은 태어난 이후 부모의 뜻에 따라 지어지는 것이므로, 능상(能相)인 유위상과 소상(所相)인 유위법이 구기하듯이 아기(=所詮)와 이름(=能詮)은 함께 생기한다고 할 수 없다는 뜻.
151) '명(名)'이 그 뜻과 함께 생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불생법인 무위법은 마땅히 그 이름이 없어 야 한다는 뜻.
152) 여기서 '사(士)'는 원문에서는 '문(文)'이지만, 범본과 『광기』 등에 따라 '사' 즉 시인으로 번역한 다. 『구사론기』 권제5(대정장41, p. 110상)에서는 "게송은 '명'과 송문을 짓는 시인에 의한 것이다(頌依於 名及造頌文士)"로 되어 있다.
153) '명' 즉 단어란 어떠한 의미체계가 약속되어진[分量, 혹은 定量] 음성으로 '문' 즉 음소의 집합일 뿐 이며, 그러한 음성의 특수한 배열[安布差別]이 '문장[句]' 혹은 게송이다. 따라서 마치 나무나 벌을 떠나 숲 이나 벌의 행렬이 있을 수 없고, 마음(心)을 떠나 심소가 전후 순차적으로 생기할 수 없듯이 단어를 떠나 문 장(혹은 게송)은 있을 수 없으며, 단어는 궁극적으로 문자 즉 음소의 집합이고, 나아가 문자는 글자를 드러내 기 위해 만들어진 기호[書分]일 뿐 각기 개별적 실체가 아니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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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장해야 할 것이니, 바로 이것의 집합[總集]이 명(名) 등의 신(身)이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그 밖의 것(명·구)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비바사사(毘婆沙師)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명(名) 등의 신(身)이라고 하는 개별적 실체[別物]가 존재하니, 이것들은 심불상응행온에 포섭되는 것으로서, 실유의 존재[實]이지 가설적 존재[假]가 아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일체법이 모두 심(尋)과 사(伺)에 의해 능히 요별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154)
  이러한 명신 등은 어떠한 계(界)에 계속(繫屬)되는 것인가?
  바로 유정수(有情數)라고 해야 할 것인가, 비(非) 유정수라고 해야 할 것인가?
  이숙성(異熟性)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소장양(所長養)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등류성(等流性)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선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불선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무기라고 해야 할 것인가?
  이 모두에 대해 마땅히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욕계·색계와 유정수에 포섭되며
  등류성이고 무기성이다.
  欲色有情攝 等流無記性
  
  논하여 말하겠다. 이러한 명신 등은 오로지 욕계와 색계 2계에 계속(繫屬)된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무색계 계(繫)에도 역시 통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설할 수는 없는 일이다.155)
  
  
154) 우리들 인식의 영역에 들어온 것만이 실유법의 전부는 아니다는 뜻. 즉 '명' 등은 심·사에 의한 경 험적 인식으로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이론적 요청에 의해 설정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는 뜻.
155) 앞에서 언급한 대로 명신 등은 소리에 의해 생겨나는 것인데, 무색계에는 소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 에 거기에 계속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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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명신 등은 유정수(有情數)에 포섭되니, 능히 설하는 자가 성취하는 것이지 드러내려고 하는 대상[所顯義]에 의해 성취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156)
  또한 명신 등은 오로지 등류성(等流性)이며,157) 또한 오로지 무부무기성(無覆無記性)에 포섭된다.158)
  나아가 앞에서 논설하였든 그 밖의 다른 불상응행 중 아직 설하지 않은 법의 뜻에 대해서도 여기서 마땅히 간략하게 분별하리라.
  게송으로 말하겠다.
  
  동분도 역시 이와 같으면서
  아울러 무색계와 이숙생에 포섭되며
  득(得)과 상(相)은 세 가지 존재유형[類]과 통하고
  비득과 정(定)은 등류이다.
  同分亦如是 幷無色異熟
  得相通三類 非得定等流
  
  논하여 말하겠다. '역시 이와 같다'고 말한 것은, 동분도 명신 등과 마찬가지로 욕계·색계와 통하며, 유정수이고, 등류성이며, 무부무기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다. 또한 '아울러 무색계이다'고 하는 말은 오로지 욕계와 색계만이 아님을 나타내는 것이며, '아울러 이숙이다'고 하는 말은 오로지 등류만이 아님을 나타낸다. 이는 곧 계(界)에 있어서는 3계와 통하고, 그 존재유형[類]에
  
  
  
156) '명' 등은 그것에 의해 드러나는 대상인 산하대지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것을 설하는 유 정수에게 성취되는 것이다.
157) 명신 등은 오로지 전찰나의 동류인에 의해 생겨나기 때문이다.
158) 그래서 선근이 끊어진 자가 선법을 설할 때, 비록 선한 '명' 등을 성취할지라도 선법을 성취하지는 못하는 것이며, 또한 욕탐을 떠난 자가 불선법을 설하더라도, 무학자는 염오법을 설하더라도 각기 불선법이나 염오법을 성취하지 않는 것이다. 곧 능히 그러한 뜻을 드러내는 '명'[能詮名] 등을 성취하더라도 그것에 의해 드러나는 법[所詮法]은 성취하지 않기 때문이다.(『현종론』 권제8, 한글대장경200, p.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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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어서는 두 가지와 통한다는 말이다.159)
  득(得)과 온갖 상(相)의 존재유형은 세 가지와 아울러 통하니, 이를테면 찰나와 등류와 이숙이 바로 그것이다.160)
  비득과 두 가지 선정(무상정과 멸진정)은 오로지 등류일 뿐이니, 여기서 '오로지'라고 하는 말은 이숙 등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 사용하였다.
  이와 같이 아직 설하지 않은 불상응행법의 뜻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그리고 무상과(無想果)와 명근(命根)에 대해서는 앞(해당 본송의 해석)에서 이미 분별한 바와 같다.
  어떠한 이유에서 '득 등은 오로지 유정수에만 포섭된다'고 설하지 않는 것인가?
  그것은 유정이 성취하는 바 따위라고 이미 설하였기 때문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상(相)은 유정수 비유정수 모두에 통한다'고 설하지 않는 것인가?
  그것은 일체 유위법과 함께하는 것이라고 이미 설하였기 때문이다.
  그 밖에 아직 설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마땅히 이에 준하여 알아야 할 것이다.161)
159) 즉 동분은 등류, 이숙, 소장양, 유실사(有實事), 일 찰나의 다섯 가지 유형(본론 권제2 '18계의 제문 분별'편을 참조바람) 중 등류와 이숙 두 가지에 해당한다는 뜻. 여기서 이숙동분이란 지옥 따위나 난생(卵生) 따위인 취(趣)와 생(生)의 동분을 말하며, 등류동분이란 이를테면 계(界)·지(地)·처(處)·종성(種姓)·족류 (族類)·사문·범지·유학·무학 등이 소유한 동분을 말한다.(앞의 논)
160) 이를테면 견도위(見道位)의 첫 순간인 고법지인(苦法智忍)과 구기(俱起)하는 득과 4상은 전찰나의 등 류도 아니고, 전세로부터의 이숙도 아닌 돌연한 생기, 즉 찰나생이다.
161) 다시 정리하면 동분은 명·구·문과 마찬가지로 욕계·색계이고, 아울러 무색계의 계(繫)이며, 등류 성임과 동시에 이숙생이며, 무부무기이다. 그리고 득과 유위4상은 찰나(이를테면 見道 苦法智忍과 俱起하는 得과 4相)·등류·이숙과 통하며, 비득과 무상정·멸진정은 등류성인데, 그 밖의 계계(界繫), 유정·비유정, 3성의 분별은 명·구·문의 경우와 동일하다. 그리고 무상과와 명근의 경우, 그것을 논설하면서 이미 분별하 였으므로 본 게송에서는 생략하였지만 전자는 색계계이고, 유정수·이숙생·무기성이며, 명근은 3계계이고, 유정수·이숙생·무기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