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아비달마구사론 제 2 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4.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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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구사론 제 2 권
  존자 세친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
  
1. 분별계품 ②
  다시 다음으로 앞에서 설한 18계 중에서 몇 가지가 유견(有見)이고, 몇 가지가 무견(無見)이며, 몇 가지가 유대(有對)이고, 몇 가지가 무대(無對)인가? 또한 몇 가지가 선(善)이고, 몇 가지가 불선이며, 몇 가지가 무기인가?1)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를테면 색 한 가지가 유견이고
  열 가지 유색(有色)이 유대이며
  이 중의 색과 성(聲)을 제외한 나머지 여덟 가지는
  무기이고, 그 밖의 것은 세 가지(선·불선·무기)이다.
  一有見謂色 十有色有對
  此除色聲八 無記餘三種
  
  논하여 말하겠다. 18계 중에서 색계가 유견(有見)이니, 이러한 색과 저러한 색의 차별을 드러내어 나타낼[示現]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뜻
  
1) 본론 권제2에서는 18계법을 유견·무견, 선·불선 등의 스무 가지 갈래[門]로 분별하고 있다. 즉 온·처·계의 제법분별(諸法分別)은 바로 18계에 갖추어진 근 (根)·경(境)·식(識)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제법분별이란 18계에 포섭되는 일체의 만법(萬法)을 여러 관점에서 조명하여 그것의 내포(內包) 외연(外延)을 상세하게 규정하는 논의 방식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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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 준하여 그 밖의 것은 무견이라고 설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유견과 무견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오로지 색온에 포섭되는 10계만이 유대(有對)인데, 여기서 '대'란 바로 장애[礙]의 뜻이다. 유대에는 다시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장애(障礙)와 경계(境界)와 소연(所緣)이 다르기 때문이다.
  장애유대란 열 가지의 색계(즉 유색처)를 말하는데, 그 같은 색 자체는 다른 색이 있는 곳에서는 장애 되어 생겨나지 못하니, 이를테면 손이 손을 장애하고, 혹은 돌이 돌이 장애하며, 혹은 손과 돌이 서로를 장애하는 것과 같다.2)
  경계유대란 12계(6근·6식)와 법계 일부(심상응의 심소)를 말한다. 즉 경계를 갖는 모든 법[有境法]은 색 등의 경계를 [취하는 공능이 있기 때문으로](경계가 부재하면 장애 되어 생겨나지 않음),3) 그래서 『시설론(施設論)』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눈은 물에서는 장애 되어도 육지에서는 장애 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물고기 따위의 눈이 그러하다. 어떤 눈은 육지에서는 장애 되어도 물에서는 장애 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대개의 경우에 따라 설하자면 사람 등의 눈이 그러하다. 어떤 눈은 물이나 육지 모두에서 장애 되는 경우가 있으니, 필사차(畢舍遮, pisaca, 아귀의 일종)나 실수마라(室獸摩羅, sisumara, 악어를 말함), 그리고 물고기 잡는 사람[捕魚人]과 하마(蝦) 등의 눈이 그러하다. 어떤 눈은 물이나 육지 어디에서든 장애 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앞서 언급한 것을 제외한 눈(예컨대 맹인의 눈)이 그러하다.4)
  또한 어떤 눈은 밤에는 장애 되어도 낮에는 장애 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모든 박쥐나 올빼미 따위의 눈이 그러하다. 어떤 눈은 낮에는 장 애 되어도 밤에는 장애 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대개의 경우에 따라 설하자면 사람 등의 눈이 그러하다. 어떤 눈은 낮과 밤 모두에 장애 되는 경우가
  
2) 장애유대( vara a-pratigh ta)란 공간적 점유성[礙性]을 지니는 색법의 상호 제약적 관계를 말한다.
3) 경계유대(vi aya-pratigh ta)란 인식기능과 그 대상 사이의 제약적 관계를 말한다.
4) 제1구는 물 속에서는 볼 수 있어도 육지에는 볼 수 없는 눈, 제2구는 육지에서는 볼 수 있어도 물 속에서는 볼 수 없는 눈, 제3구는 물과 육지 모두에서 볼 수 있는 눈, 제4구는 물과 육지 모두에서 볼 수 없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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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으니, 이를테면 개·여우[野干]·말·표범·승냥이·고양이·이리 등의 눈이 그러하다. 어떤 눈은 밤과 낮 모두에 장애 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앞서 언급한 것을 제외한 눈(예컨대 맹인의 눈)이 그러하다. 이러한 등등의 것을 일컬어 경계유대하고 한다.
  소연유대란 심·심소법이 자신의 소연에 대해서만 [현기(現起)하는] 것을 말한다.5)
  그렇다면 경계와 소연에는 다시 어떠한 차별이 있는 것인가?
  만약 그러한 법(즉 색등의 경계)에 대해 이것(즉 6근· 6식과 심소)이 공능을 갖게 되면, 그것은 이러한 법의 경계가 되었다고 설한다. 그리고 심·심소법의 경우 그러한 법을 집취하여 일어나므로 그러한 법은 심 등에 대해 소연이 된다고 일컫는 것이다.6)
  어떠한 까닭에서 안(眼) 등이 자신의 경계나 소연에서 일어날[轉] 때를 설하여 '장애를 갖는다[有礙]'고 일컫는 것인가?
  이것들은 그러한 것(즉 경계와 소연)을 초월한 다른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다시 여기서 '애(礙)'란 바로 화회(和會, nip ta, 낙하의 뜻. 구역은 到)의 뜻으로, 말하자면 안 등의 법은 자신의 경계나 자신의 소연과 화회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땅히 알아야 할 것으로, 여기(게송)서는 오로지 장애유대에 대해서만 설하였기 때문에 다만 '열 가지 유색(有色)이 유대이다'고 말하였으니, 이러한 유색법은 서로가 서로를 장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뜻에 준하여 그 밖의 것은 무대(無對)라고 설할 수 있다.
  만약 어떤 법이 경계유대라면 그것은 또한 장애유대인가?
  마땅히 4구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7심계와 법계의 일부인 모든 상응법은 바로 제1구(경계유대이면서 장애유대가 아닌 것)이며, 바로 색 등의 5경은 제2구(장애유대이면서 경계유대가 아닌 것)이며, 안 등의 5근
  
5) 소연유대( lambana-pratigh ta)란 말하자면 심·심소와 대상간의 필연적 제약관계로서, 자신의 소연이 부재하면 장애되어 생기하지 않는다.
6) 5근과 심·심소는 경계에 의해 그 생기가 제약되지만(경계유대), 경계는 또한 심·심소에 대해 소연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경계유대의 외연이 소연유대보다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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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 바로 제3구(경계유대이면서 장애유대인 것)이며, 법계의 일부인 비(非)상응법은 바로 제4구(양자 모두 아닌 것)이다.7)
  만약 어떤 법이 경계유대라면 그것은 또한 소연유대인가?
  마땅히 순후구(順後句)로 분별해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만약 소연유대라면 그것은 결정코 경계유대이다. 그러나 어떤 법은 비록 경계유대이지만 소연유대가 아닌 것이 있으니, 이를테면 안 등의 5근이 바로 그러하다.
  이에 대해 대덕(大德) 구마라다(鳩摩邏多)는 다음과 같이 설하니,8) 이는 바로 인정[許]할 만한 것이다.
  그곳(소연)에서 마음이 생기하려 하나
  다른 것이 장애하여 생기하지 않게 하면
  마땅히 알아야 하니, 이것이 바로 유대(有對)이고
  무대(無對)는 이와는 반대되는 것임을.9)
  이와 같이 유대와 무대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여기서 설한 열 가지 유대 중에서 색(色)과 성(聲)을 제외한 나머지 여덟 가지는 무기(無記)이니,10) 말하자면 5색근(色根)과 향·미·촉경이 바로 그
  
7) 여기서 비상응법은 열네 가지 불상응행법(본론 권제4 참조), 세 가지 무위법, 그리고 무표색을 말한다.
8) 구마라다(Kum ral ta). 구역에서는 구마라라다(鳩摩羅邏多)로 동수(童受)로 번역된다. 규기(窺基)의 『성유식론술기』에 의하면 불멸 후 100년 무렵에 출세한 경부본사(經部本師)로 일컬어지지만, 여기에는 이설이 많다. 이를테면 『대당서역기』에서는 마명(馬鳴)·제바(提婆)·용맹(龍孟) 즉 용수와 함께 당시 네 개의 태양[日]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오늘날에는 대개 마명 용수 내지 『대비바사론』보다는 후대, 세친이나 중현보다는 전대, AD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전반의 인물로 파악되고 있다.
9) 즉 경부(經部) 조사(祖師) 구마라다는 앞의 3종의 유대를 유부에서처럼 각각 실재적 관계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다만 의식이 생겨나지 않게 하는 것이라는 인식론적으로 이해하였다. 예컨대 청색에 대향(對向)하여 시의식이 생겨나려고 할 때, 이를테면 소리 따위가 이를 장애하여 생겨나지 않게 하면 이를 유대라 하고, 장애함이 없이 생겨나게 하는 것을 무대라고 하였다. 이는 색과 무표색, 심과 심소의 개별적 실재성을 부정하는 경량부로서는 당연한 이론적 귀결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논주 세친도 여기에 동조하고 있기 때문에 '이는 바로 인정할 만한 것이다[此是所許]'라고 말한 것이다.
10) 무기(avy k ta)란 선·불선 어느 것으로도 언표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에는 다시 유부무기(有覆無記, niv tavy k ta)와 무부무기(無覆無記, aniv tavyak ta)가 있다. 유부무기란 그 자체로서는 무기이지만 번뇌와 상응구기하는 무기이며, 무부무기란 번뇌와 상응하지 않으며, 성도(聖道)를 장애하지 않는 무기로서, 이숙생(異熟生)·위의로(威儀路)·공교처(工巧處)·통과심(通果心) 따위를 말한다. 이를 오로지 무기라고 한 색·성을 제외한 8계로 분별해 보면, 이숙무기는 전세의 업이 초래한 심신의 과보로서 5근과 향·미·촉을 말하며, 위의무기는 행(行)·주(住)·좌(坐)·와(臥)와 같은 위의의 상태에서의 향·미·촉을 말하며, 공교무기는 여러 가지 기술을 행하는 상태에서의 향·미·촉을 말하며, 통과(혹은 변화)무기는 신통력에 의해 변화를 나타낼 때의 향·미·촉을 말한다.(『구사론기』 대정장41, p. 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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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것이다. 즉 그것들은 선·불선의 성질이라고 기표할 수 없기 때문에 '무기'라고 이름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숙과(異熟果)는 능히 [선·불선으로] 기표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일컬어 무기라 한다"고 하였는데,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무루는 응당 마땅히 오로지 무기여야 할 것이다.
  그 밖의 나머지 10계는 선 등의 3성(性)과 통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7심계(心界, 6식계와 의계)로서 무탐(無貪) 등과 상응하는 것을 선이라고 이름하고, 탐 등과 상응하는 것을 일컬어 불선이라 하며, 그 밖의 것과 상응하는 것을 무기라고 이름한다. 법계의 경우, 이러한 무탐 등의 자성과, 상응하는 것과 등기(等起)한 것과 택멸을 선이라고 이름한다.11) 혹은 탐 등의 자성과, 상응하는 것과 등기한 것을 불선이라고 이름하며, 그 밖의 것을 무기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색계와 성계의 경우, 선·불선심의 힘에 의해 등기한 신·어표업에 포섭되는 것을 바로 선·불선이라 하며, 그 밖의 것은 바로 무기이다.
  선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18계 중의 몇 가지가 욕계의 계(繫)이고, 몇 가지가 색계의 계이며, 몇 가지가 무색계의 계인가?12)
  
11) 법계에는 무표색과 마흔여섯 가지 심소, 열네 가지 불상응법, 세 가지 무위 등 총 예순네 가지의 법이 포섭된다. 따라서 여기에는 선의 경우, 그 자체가 선인 자성선(自性善,곧 無貪·無瞋·無癡·慚·愧)과, 자성선과 상응하는 제 심소의 선[相應善]과, 자성선과 함께 일어나는 불상응행의 선[等起善]과, 그리고 궁극의 선인 무위택멸의 승의선[勝義善]이 있다.(본론 권제13, p.624 참조.)
12) 여기서 계(繫,sa yukta)란 계속(繫屬)의 뜻으로, 욕계계라고 하면 그것은 욕계의 번뇌에 계박되어 욕계에 소속되어 머무르게 되는 법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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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송으로 말하겠다.
  
  욕계의 계(繫)는 열여덟 가지이고
  색계의 계는 열네 가지이니
  향·미와 두 가지 식(識)을 제외한 것이며
  무색계는 뒤의 세 가지이다.
  欲界繫十八 色界繫十四
  除香味二識 無色繫後三
  
  논하여 말하겠다. 계(繫)라고 하는 것은 계속(繫屬), 즉 속박된다는 뜻으로, 욕계에 계박되는 것은 18계 모두이다.
  색계에 계박되는 것은 오로지 열네 가지로서, 향경(香境)·미경(味境)과 함께 비식(鼻識)·설식(舌識)이 제외된다. 향경과 미경을 제외한 것은, 그것이 단식(段食)의 성질이기 때문으로,13) 단식에 대한 욕망을 떠날 때 비로소 거기(색계)에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비식과 설식을 제외한 것은 거기에는 그것의 소연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곳에는 마땅히 촉계도 없어야 할 것이니, 그것(촉)은 향경·미경과 마찬가지로 단식의 성질이기 때문이다.
  그곳에 존재하는 촉은 단식의 성질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향·미의 종류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할 것이다.
  향·미는 식(食)을 떠나 별도로 수용되는 일이 없지만 촉은 별도로 수용되는 일이 있으니, 그곳에서는 근(根)과 의복 따위를 갖기 때문이다. 즉 그곳에서는 식욕(食欲)을 떠났기에 향·미가 수용되는 일이 없지만 근과 의복 따위는 존재하기 때문에 촉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이곳(욕계)에 머물면서 그 같은 색계의 정려
  
13) 단식(段食,혹은 搏食)은 4식(食)의 하나. '단'은 분단(分段)의 뜻. 즉 분활되어 섭취되는 물질적 에너지로서, 향·미·촉을 본질로 함. 따라서 이것은 욕계에만 존재하는데, 초정려 근분(近分)의 미지정(未至定)에 의해 욕계의 번뇌를 단진(斷盡)할 때 이를 떠나게 된다.(본론 권제10, p.48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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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靜慮)와 등지(等至)에 의지하여 [천안통을 일으켜 색계의] 색을 보고, 소리를 들을 때 경안(輕安)과 함께 일어나는 수승한 촉이 있어 소의신을 섭익(攝益)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세 가지(색·성·촉)는 그러한 정려에서 생겨나 서로 수축(隨逐)할 수 있지만, 향·미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거기(색계)에는 존재하는 일이 없다"14)고 하였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색계에서는 향·미가 수용되는 일이 없다고 한다면) 그곳에는 응당 마땅히 비근과 설근도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향·미의 경계가 그러한 것처럼 그것도 쓰임새가 없기[無用]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 이 두 근은 그곳에서 쓰임새가 있으니, 말하자면 언설을 일으키고 아울러 소의신을 장엄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만약 그것이 소의신을 장엄하고 언설을 일으키는 용도라고 한다면 다만 의처(依處)만이 있으면 될 것으로, 이러한 두 '근(根)'이 무슨 필요가 있을 것인가?15)
  그곳에서는 남근(男根)이 없으며 또한 역시 그 의처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두 근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그것의 의처도 역시 없어야 할 것이다.16)
  그곳에서는 가히 남근의 의처가 없다고 할 수 있으니, 그것은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비근과 설근의 의처는 그곳에서 쓸모가 있기 때문에 '근'을 떠나 응당 마땅히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비록 쓸모가 없다 할지라도 근이 생겨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포태(胞胎) 속에 있으면서 응당 죽어야 할 자의 경우가 그러하다.17)
  
14) 선정 중에서 상계의 색을 보고 소리를 들어 소의신에 경쾌 안적한 느낌[輕安觸]이 생겨났기 때문에 색계에 태어날 때에도 이 세 가지는 그대로 따라 쫓아오지만[隨逐], 향·미는 선정 중에 부재하기 때문에 색계에 태어날 때에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
15) 여기서 '의처'는 부진근(扶塵根)으로, 색·향·미·촉으로 이루어진 육단(肉團), 즉 눈에 보이는 코와 혀를 말하며, '근'은 공능 그 자체를 뜻하는 승의근(勝義根)을 말한다.
16) 부진근(즉 依處)은 승의근을 돕는[扶]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승의근이 없다면 그것을 돕는 부진근도 역시 없어야 한다는 뜻.
17) 태어나지 못하고 어머니 탯집에서 죽어야 할 아이는 비록 근이 소용없을지라도 6근이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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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록 쓸모가 없다고 할지라도 근이 생겨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한 자(포태 속에 있으면서 마땅히 죽을 자)에게 어떠한 까닭에서 근이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인가?
  근에 대한 애착[愛]이 있어 수승(殊勝)한 업(業)을 일으켰기 때문이다.18)
  그러나 만약 [향·미 등의] 경계에 대한 애착을 떠났다면 근에 대해서도 결정코 그러해야 할 것이다. 즉 그곳(색계)의 유정은 경계에 대한 애탐[貪]을 떠났으므로 [근에 대한 애착도 없을 것이며, 따라서 생겨나게 할 원인이 없으므로] 마땅히 비근과 설근은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혹은 마땅히 그곳의 유정에게도 남근이 역시 생겨난다고 인정[許]해야 할 것으로, 만약 '남근은 생겨나지 않으니, [생겨날 경우 소의신이] 누추하기 때문이다'고 한다면, 음장(陰藏)은 은밀한데 어찌 그 용모가 누추하다고 하겠는가?19) 또한 온갖 근이 생겨나는 것은 쓸모가 있기 때문에서가 아니니, 만약 원인의 힘[因力]만 있으면 쓸모가 없더라도 역시 생겨나게 된다. 따라서 그곳에서의 남근이 비록 누추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생기하게 할] 원인이 있다고만 인정되면 그곳에서도 마땅히 생기하여야 한다. 그럼에도 남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그럴 경우 비근과 설근도 응당 마땅히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20)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계경에서 설하고 있는 바와 어긋나게 될 것이니, "그곳(색계)에서는 4지(支)가 결여되는 일도 없고 온갖 근도 감소되지 않는다"고 논설하고 있기 때문이다.21)(비바사사의 힐난)
  
18) 여기서 수승한 업이란 5근 등을 획득할려고 하는 사업(思業)을 말하는 것으로, 일체의 유위법은 반드시 원인을 갖기 때문이다.
19) 음장(陰藏, ko agatavasti, 혹은 陰馬藏)은 여래의 남근으로, 말의 그것처럼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다. 32상의 하나. 즉 여래의 음장인 남근은 소의신을 누추하게 하지 않기 때문에 색계에 존재할 수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는 힐난.
20) 이상 논주 세친의 해석과 난문으로, 유부 비바사사가 말하듯이 근에 대한 애착이 있어 수승한 업을 일으켰기 때문에 마땅히 포태(胞胎) 속에서 죽을 자에게도 근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남근도 역시 그러해야 하겠지만, 색계에는 성애에 대한 애착이 없기 때문에 남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므로 비근과 설근 또한 마땅히 향과 미에 대한 애착을 떠났으므로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21) 『중아함경』 권제39 제154경 『바라바장경(婆羅婆掌經)』(대정장1, p. 674중, 한글대장경 중아함경2, p. 409). "그 때 세존께서 말씀하기를, 바사타여, 어느 때인가 이 세상은 다 무너진다. 이 세상이 무너질 때 만약 중생이 있으면 그는 황욱천(晃昱天,색계 제2선의 極光淨天)에 태어나는데, 그는 거기서 묘한 빛깔[色]과 생각[意]을 가지고서 일체의 지절(支節)과 온갖 근을 구족하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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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같은 온갖 근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들에 따라 설하여 '감소되지도 않는다'고 말한 것인데,22) 무슨 허물이 있을 것인가? 만약 그렇다고(비근과 설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인정하지 않을 것 같으면, 남근도 응당 존재한다고 해야 하리라.
  여시설(如是說)은 이러하다.23): '그곳(색계)에는 비·설 2근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만 향·미가 존재하지 않을 뿐이다. 즉 6근의 애탐은 내신(內身)에 의해 생겨날 뿐 경계에 의해 현기(現起)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같은 남근의 애탐은 음촉(觸)에 의해 생겨나는데, 그곳에는 음촉이 없기 때문에 남근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24) 그러므로 색계에는 18계 중에 오로지 열네 가지 종류만이 있다고 하는 이치는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무색계의 계(繫)에는 오로지 뒤의 세 가지만 있을 뿐이니, 이른바 의계와 법계와 의식계가 바로 그것이다. 요컨대 색욕(色欲)을 떠나야 그곳에 태어날 수 있기 때문에 무색계에는 열 가지 색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또한 소의와 소연[依緣]이 없기 때문에 5식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로지 뒤의 세 가지만이 무색계의 계(繫)인 것이다.
  
  3계의 계(繫)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18계 중의 몇 가지가 유루이고, 몇 가지가 무루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22) 계경의 내용은 황욱천에서 당연히 있을 수 있는 근에 대해 말한 것이라는 뜻.
23) 여시설(如是說, eva tu var ayanti Vaibh ik )이란 비바사사(毘婆沙師, Vaibh ika)의 여론(輿論)이라는 정도의 뜻이다.
24) 비바사사는 내적 소의신에 의해 일어난 애탐(자발적 능동적 애탐)과 외적 경계를 조건으로 하여 일어난 애탐(수동적 애탐)을 구별하여, 6근의 애탐은 내적 소의신에 의해 일어난 자발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생기의 원인으로 외적 경계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남근의 애탐은 외적 경계에 의해 유발된 수동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외경이 없는 색계에는 남근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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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계·법계·의식계는 모두에 통하며
  그 밖의 나머지는 오로지 유루이다.
  意法意識通 所餘唯有漏
  
  논하여 말하겠다. 의계와 의식계로서 도제(道諦)에 포섭되는 것을 일컬어 무루라 하고, 그 밖의 것을 유루라고 이름한다. 또한 법계의 경우, 만약 그것이 바로 도제와 무위라고 한다면 그것을 일컬어 무루라 하고, 그 밖의 것을 유루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그 밖의 15계는 오로지 유루라고 이름할 따름이다.
  이와 같이 유루와 무루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18계 중의 몇 가지가 유심유사(有尋有伺)이고, 몇 가지가 무심유사(無尋唯伺)이며, 몇 가지가 무심무사(無尋無伺)인가?25)
  게송으로 말하겠다.
  
  5식(識)에만 오로지 심(尋)·사(伺)가 있고
  뒤의 셋은 세 가지이며, 그 밖의 것에는 아무것도 없다.
  五識唯尋伺 後三三餘無
  
  논하여 말하겠다. 안 등의 5식은 유심유사이니, 심과 사와 더불어 항상 함께 상응하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5식신은 그 행상(行相)이 거칠고 [색 등의] 외문(外門 : 외적 감각기관)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뜻이 결정적인 사실임을 나타내기 위해 [본송에서] '오로지'라고 하는 말을 설한 것이다.
  '뒤의 셋'이란 바로 의계와 법계와 의식계를 말하는 것으로서, 6근·6경·
  
25) 여기서 심(尋, vitarka)과 사(伺, vic ra)라고 하는 것은, 마음 즉 전5식과 제6식으로 하여금 각기 그들의 대상을 추구[尋求·伺察]하게 하는 보다 거칠고[麤性] 세밀한[細性] 의식작용으로(본론 권제4, p.185 참조), 욕계와 색계 초정려에는 심·사의 작용이 있지만 중간정에서는 사만이, 색계 제2정려 이상부터는 심·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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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식 중에서 각기 제일 뒤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이러한 뒤의 세 가지 계는 세 가지 모두와 통한다. 즉 의계와 의식계, 그리고 심·사를 제외한 상응의 법계(상응법 중 심·사를 제외한 44심소)로서, 만약 욕계와 초정려 중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유심유사이고, 정려중간에 존재하는 것은 무심유사이며, 제2정려 이상의 온갖 경지 내지 유정천정(有頂天定)에 존재하는 것은 무심무사이다. 법계에 포섭되는 비상응(非相應)의 법과 정려중간의 사(伺)도 역시 이와 같다.26) 그리고 심(尋)의 경우 모든 때에 무심유사이니, 제2의 또 다른 심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다만 사와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伺)의 경우, 욕계와 초정려 중에서는 세 품류 어디에도 포섭되지 않는데, 마땅히 무엇이라고 일컬어야 할 것인가?
  이는 마땅히 무사유심(無伺唯尋)이라고 이름해야 할 것이니, 제2의 또 다른 '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다만 심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심·사를 갖는 경지[有尋伺地, 즉 욕계 미지정과 초정려지]에는 네 품류의 법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바, 첫째는 유심유사(有尋有伺)이니, 이를테면 심·사를 제외한 그 밖의 상응법이 바로 그것이며, 둘째는 무심유사(無尋唯伺)이니, 이를테면 바로 '심'이 그러하며, 셋째는 무심무사(無尋無伺)이니, 이를테면 일체의 비상응법이 바로 그러한 것이며, 넷째는 무사유심(無伺唯尋)이니, 이를테면 바로 '사'가 그러하다.
  그리고 나머지 열 가지 색계에는 심과 사 모두가 존재하지 않으니, 항상 심·사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5식신이 유심유사라고 한다면 어떻게 그것을 무분별(無分別)이라고 설할 수 있는 것인가?27)
  
26) 법계 비상응법이란 열네 가지 불상응행과 3무위 및 무표를 말하는데, 이러한 것에는 물론 심작용이 있지 않기 때문에 무심무사이며, 중간정에 있는 사(伺)는 심을 동반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자신 '사'이므로 다른 사를 동반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 역시 무심무사이다.
27) 전5식을 보통 무분별(無分別, avikalpika,)이라고 한다. 그런데 5식이 유심유사로서 심·사의 심소와 상응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째서 그것을 유분별(有分別)이라고 하지 않는가, 다시 말해 5식상응의 '심'은 바로 분별(사유작용)이기 때문에 5식을 무분별(불확정적인 사유)라고 할 수 없지 않는가 하는 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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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송으로 말하겠다.
  
  다섯 가지 식을 무분별이라고 설한 것은
  계탁(計度)과 수념(隨念) 때문으로,
  그것은 의지(意地)의 산혜(散慧)와
  의지의 온갖 염(念)을 본질로 한다.
  說五無分別 由計度隨念
  以意地散慧 意諸念爲體
  
  논하여 말하겠다. 전설(傳說)에 따르면 분별에는 간략히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자성분별(自性分別)이고, 둘째는 계탁분별(計度分別)이며, 셋째는 수념분별(隨念分別)이다. 즉 5식신은 비록 자성분별을 갖을지라도 나머지 두 가지를 갖지 않기 때문에 무분별이라 설한 것으로, 이를테면 다리가 한 개 밖에 없는 말[馬]을 일컬어 다리가 없는 말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28)
  여기서 자성분별은 그 본질이 오로지 바로 심(尋)일 뿐으로, '심'에 대해서는 뒤(권제4와 권제12)에 심소를 설하는 도중에 응당 자연히 분별 해석하게 되리라. 그 밖의 두 가지 분별은 순서대로 의지(意地)29)의 산란된 혜[散慧]와 온갖 염(念)을 본질로 한다. 여기서 '산란'이란 말하자면 정(定)이 아닌 것으로,30) 바로 의식상응의 산란된 혜를 일컬어 계탁분별이라고 한다. 그러나
  
28) 여기서 5식은 심(尋)·사(伺)를 본질로 하는 자성분별(즉 감성적 지각)일 뿐이고, 그것은 혜(慧)를 본질로 하는 계탁분별(즉 추리 판단의 오성적 지각)과 제6식 상응의 염(念)을 본질로 하는 수념분별(즉 기억이나 재인식)에 의해 확실한 사유[有分別, savikalpa]가 된다. 그러나 논주 세친은 경량부설에 따라 심·사의 개별적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하는 설[傳說]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본론 권제4, p.185 참조.)
29) 의지(意地, mano-bh mi). 여기서 '지'는 소의(所依)의 뜻이므로 '의지'란 의(意)로서 소의가 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뜻은 '제6의근을 소의로 삼아 상응하는'의 뜻.
30) 선정 중에서는 능히 대상을 재고 헤아릴[計度] 수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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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정에 있든, 혹은 산란에 있든 의식과 상응하는 온갖 염을 일컬어 수념분별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유심유사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18계 중의 몇 가지가 유소연(有所緣)이고, 몇 가지가 무소연(無所緣)인가?
  또한 몇 가지가 유집수(有執受)이고, 몇 가지가 무집수(無執受)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일곱 가지의 마음과 법계의 반은
  유소연이고, 그 밖의 것은 무소연이며
  앞의 여덟 가지 계와 아울러 성계(聲界)는
  무집수이며, 그 밖의 것은 두 가지와 통한다.
  七心法界半 有所緣餘無
  前八界及聲 無執受餘二
  
  논하여 말하겠다. 6식과 의계, 그리고 법계에 포섭되는 온갖 심소법을 유소연이라고 이름하니, 능히 경계를 취하기 때문이다. 그 밖의 열 가지의 색계와 법처에 포섭되는 불상응법을 무소연이라고 이름하니, 뜻에 준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유소연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18계 중에서 아홉 가지는 무집수이니, 말하자면 앞에서 설한 7심계와 법계의 전부 등 이러한 8계와 아울러 성계(聲界)는 모두 무집수이다. 그 밖에 나머지 9계(5색근과 색·향·미·촉)는 각기 두 가지 갈래와 통하니, 유집수이자 무집수이기 때문이다. 즉 안 등의 5근으로서 현재세에 머무는 것을 유집수라고 이름하며, 과거세·미래세에 머무는 것을 무집수라고 이름한다. 색·향·미·촉의 경우, 현재세에 머무는 것으로서 5근을 떠나지 않은 것을 유집수라고 이름한다. 그러나 만약 현재에 머무는 것이면서도 근을 떠나지 않은 것이 아닌 것과 과거·미래에 머무는 것을 무집수라고 이름한다. 이를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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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의신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면서도 근(根)과 화합하는 것을 제외한 머리카락·수염·손톱·이빨·대소변·눈물·침·피 등과 소의신 밖에 존재하는 지(地)·수(水) 등의 색·향·미·촉과 같은 것은 비록 현재세에 존재하는 것일지라도 무집수인 것이다.
  유집수, 이는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
  심·심소법이 함께 집지(執持)·포섭하여 의처(依處)로 삼게 되는 것을 유집수라고 이름하니, [심·심소는 그러한 의처에] 손해와 이익을 끼치면서 일어나고[展轉], 다시 서로가 서로를 따르기 때문이다.31) 즉 온갖 세간에서 [고·락 등의] 감촉의 느낌[覺觸]이 있다고 설하는 것은 여러 가지 연(緣)이 감촉되어 즐거움 따위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서로 반대되는 것을 무집수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이 유집수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18계 중에서 몇 가지가 대종성(大種性)이고, 몇 가지가 소조성(所造性)인가?
  또한 몇 가지가 적집될 수 있는 것[可積集]이고, 몇 가지가 적집되지 않는 것[非積集]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촉계 중에는 두 가지가 모두 있고
  나머지 아홉 가지 색은 소조이며
  법계의 일부도 역시 그러하다.
  
31) 유집수(up tta)란 집수(감각)의 의식작용을 갖는 대종(大種)과 조색(造色)을 말한다. 즉 전5근은 심·심소의 직접적인 의처(依處,심·심소의 근거 즉 소의처)가 되고, 성경(聲境)을 제외한 색 등의 4경은 근의 대상으로서 간접적인 의처가 되어 심·심소와 더불어 손해와 이익을 함께하는 것이다('성'을 제외한 이유는 소리는 유집수나 무집수의 대종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본론 권제1, p.17 참조). 이를테면 심·심소가 우고(憂苦)를 일으켜 감손(減損)될 때 의처도 역시 감손되며, 심·심소가 희락(喜樂)을 일으켜 이익될 때 의처도 역시 이익된다. 반대로 의처가 만약 좋은 음식 등을 획득하여 이익될 때 심 등도 역시 이익되는 것이며, 나쁜 음식 등을 획득하여 감손되면 심 등도 역시 감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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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열 가지 색만이 적집될 수 있는 것이다.
  觸界中有二 餘九色所造
  法一分亦然 十色可積集
  
  논하여 말하겠다. 촉계는 두 가지 모두와 통하니, 이를테면 대종(大種)과 소조(所造)가 바로 그것이다. 즉 대종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견고한 성질[堅性, 즉 地] 따위가 바로 그것이며, 소조에는 일곱 가지가 있으니, 매끄러운 성질[滑性] 따위가 바로 그것으로, 이는 대종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소조'라고 이름하는 것이다.32) 그 밖의 나머지 아홉 가지의 색계는 오로지 소조성이니, 이를테면 5색근과 색 등의 네 경계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법계의 일부인 무표업색(無表業色)도 역시 오로지 소조일 뿐이다.
  그리고 나머지 7심계와 무표색을 제외한 법계 일부는 두 가지 종류(대종과 소조색) 모두가 아니다.
  그런데 존자(尊者) 각천(覺天)은 '열 가지 종류의 색처는 오로지 대종성일 따름이다'고 설하고 있다.33) 그러나 그의 설은 옳지 않으니, 계경에서는 오로지 견고성 등의 4상(相)만을 설하여 대종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34) 나아가 이러한 4대종은 오로지 촉처에 포섭되[고 색·성·향 등의 처에는 포섭되지 않]기 때문에, 견고성[堅]·습윤성[濕] 등은 안근 등에 의해 취해지는 것이 아니[라 신근에 의해 취해지는 대상이]고, 색·성 등의 경계는 [안근·이근에 의해 지각되는 것이지] 신근에 의해 지각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시 말해 대종과 색 등의 조색은 그것을 취하는 근(根)도, 포섭되는 처소도 다르
  
32) 즉 촉(觸)에는 견(堅)·습(濕)·난(煖)·동(動)을 자상(自相)으로 하는 4대종과, 매끄러운 성질[滑性]·거친 성질[澁性]·무거운 성질[重性]·가벼운 성질[輕性]·차가움[冷]·허기짐[飢]·목마름[渴] 등 일곱 가지 조색이 있다.(본론 권제1, p.18 참조.)
33) 각천(Buddhadeva, 佛陀提婆로 음역됨)은 설일체유부의 유명한 논사. 바사(婆娑)의 4대 평가(評家) 중의 일인. 그에 의하면 열 가지 색계는 4대종의 안포차별(安布差別)로서, 4대종을 떠나 별도의 실체(소조색)가 존재하지 않는다.(『대비바사론』 권제127,대정장27, p. 661하)
34) 『중아함경』 권제7 『상적유경(象跡喩經)』(대정장1, p. 464하). 이 경에서는 10색계를 대종이라고 설하지 않고 오로지 견·습·난·동의 4상과 4대종만을 설하고 있기 때문에 대종은 오로지 이 네 가지에 국한된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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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 때문에] 그의 설은 결정코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또한 계경에서 설하기를, "필추(苾芻)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안처(眼處)는 이를테면 내처(內處)로서 4대종의 소조(所造)로 정색(淨色)이며, 유색(有色)·무견(無見)·유대(有對)이다. 내지는 신처(身處)의 경우도 널리 설하자면 역시 그러하다. 또한 필추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색처는 이를테면 외처(外處)로서 4대종의 소조이며, 유색·유견·유대이다. 성처는 이를테면 외처로서 4대종의 소조이며, 유색·무견·유대이고, 향·미의 2처도 널리 설하자면 역시 그러하다. 그리고 촉처는 이를테면 외처로서, 이는 바로 4대종과 4대종의 소조이며, 유색·무견·유대이다"35)고 하였다. 이처럼 경에서 오로지 촉처만이 4대종을 포섭하고 그 밖의 유색처는 모두 대종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현시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계경 중에서 " 안(眼)의 살덩이[肉團] 중에 내적으로 각기 다른 견고성[堅性]과 견고한 종류[堅類]가 있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36)
  그 경에서는 안근을 떠나지 않은 살덩이(즉 승의근이 아닌 부진근) 중에 견고성 따위가 있다고 설한 것으로서,37) 앞의 사실과 서로 모순되는 허물은 없다. 즉 『입태경(入胎經)』 중에서 오로지 6계(지·수·화·풍·공·식)를 설하여 사부(士夫, puru a)로 삼은 것은 바로 그것이 능히 사부를 구성하는 근본 실체[本事, m la sattva dravya]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사부를 구성하는 실체는] 오로지 그것만이 아니니, 그 경에서는 다시 6촉처(觸處)를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각천이 '4대종 이외 별도의 소조색이 없으니, 경에서 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한다면, 이러한 『입태경』에서 6계 중 오로지 식(識)만을 설하고 심소를 설하지 않았으므로]
  
35) 『잡아함경』 권제13 제322경(대정장2, p. 91하). "眼是內入處, 四大所造淨色不可見有對……."(본론 권제1, p.14 참조.)
36) 『잡아함경』권제11 제273경(대정장1, p. 72하). 이는 각천(覺天)의 반증으로, 안근은 '견고성[堅, 즉 地]' 등의 4대종이 결합한 것으로서 안근의 살덩이를 분석하면 그것은 또한 '견고성' 등의 4대종일 따름이라는 뜻.
37) 즉 '견고성(堅性)' 따위는 안근(승의근) 중에는 없고 다만 안의 육단(부진근 즉 눈에 보이는 눈)에 있다는 뜻. 즉 이러한 부진근의 육단은 색·향·미·촉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경에서 '안의 육단 중에 견고성 따위가 있다'고 설하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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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갖 심소도 응당 마땅히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하기 때문에 [앞의 경증(經證)은 옳지 않은 것]이다. 또한 마땅히 '심소는 바로 심이다'고 주장해서도 안 될 것이니,38) 계경에서 '상(想)·수(受) 등의 심소법은 심에 의지(依止)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며,39) 또한 유탐심(有貪心) 따위를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40) 이에 따라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은 온갖 계(界)의 대종과 소조가 차별된다는 뜻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대종성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18계 중에서 5근과 5경의 열 가지 유색계는 바로 적집될 수 있는 것이니, 극미의 취집(聚集)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뜻에 준하여 볼 때 그 밖의 나머지 8계는 적집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극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적집될 수 있는 것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18계 중의 몇 가지가 능히 쪼개는 것[能斫]이고, 몇 가지가 쪼개지는 것[所斫]인가?
  몇 가지가 능히 태우는 것[能燒]이고, 몇 가지가 태워지는 것[所燒]인가?
  몇 가지가 능히 재는 것[能稱]이고, 몇 가지가 재어지는 것[所稱]인가?41)
  게송으로 말하겠다.
  
  말하자면 오로지 외적인 4계(界)만이
  능히 쪼개는 것이고, 아울러 쪼개어지는 것이며
  역시 태워지는 것이고, 능히 재는 것이나
  능히 태우는 것과 재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쟁론이 있다.
  謂唯外四界 能斫及所斫
  
38) 『대비바사론』 권제2(대정장27. p.8하)에서 각천(覺天)은 '온갖 심소의 본질은 바로 심이다'고 하여 심·심소 일체설을 주장하고 있다.
39) 『잡아함경』 권제21 제568경(대정장2, p. 150상중).
40) 유탐심(sa-r g di-citT>이란 말 그대로 '탐'을 지닌 마음이란 뜻으로, 이는 바로 '탐'과 '심'이 개별적 존재임을 나타낸다는 뜻. 이는 유부의 심·심소의 상응설은 기본 이론으로, 본론 권제4(p.190)에서 상세히 논의하고 있다.
41) 여기서 '능(能)'은 바로 그렇게 하는 주체를 말하고, '소(所)'는 그렇게 되는 대상을 말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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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亦所燒能稱 能燒所稱諍
  
  논하여 말하겠다. 색·향·미·촉의 4계는 도끼와 장작 등을 성취하니, 이것을 일컬어 능히 쪼개는 것과 쪼개지는 것이라고 한다.
  어떠한 법을 '쪼갠다'고 일컫는 것인가?
  장작 등의 색취(色聚)로서 서로 핍박하며[相逼] 계속 생겨나는 것[續生]을 도끼 따위가 나누어 잘라 각각의 부분으로 하여금 계속 생기하게 하는 것, 이러한 법을 일컬어 '쪼갠다'고 이름한다. 그러므로 신(身) 등의 색근은 '쪼개지는 것'이라고 할 수 없으니, 완전히 절단되어 두 개로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신근 등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니, (4)지(支)의 부분이 몸을 떠나게 되면 감관으로서의 기능[根]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신근 등은 또한 역시 '능히 쪼개는 것'도 아니다. 왜냐 하면 그것은 보배로운 구슬의 빛처럼 참으로 청정 미묘하기 때문이다.42)
  능히 쪼개고 쪼개어지는 것이 오로지 외적인 4계(색·향·미·촉)에 해당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태워지는 것[所燒]과 능히 재는 것[能稱] 그 자체도 역시 그러하다. 말하자면 오로지 외적인 4계만을 태워지는 것이라 하고, 능히 재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 등의 색근은 보배로운 구슬의 빛처럼 그 상이 청정 미묘하기 때문에 역시 두 가지 사실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나 성계(聲界)는 이 모든 사실(능절 등의 여섯 가지 사실)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니, 상속하지 않기 때문이다.43)
  능히 태우는 것[能燒]과 재어지는 것[所稱]에는 이설(異說)의 쟁론이 있다. 즉 어떤 이는 설하기를, "능히 태우는 것과 재어지는 것은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로지 외적 4계뿐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는 다시 설하기를, "오로지 화계(火界)만을 능히 태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재어지는 것은
  
42) 즉 안 등의 색근은 비록 4대 소조색이지만 구슬의 빛처럼 특수한 감관으로서의 기능이 있어 근(根)이라고 한 것이기 때문에, 쪼개고 쪼개지는 등의 범위에 들지 않는다는 뜻.
43) 성계(聲界) 즉 소리는 다른 아홉 가지 유색계처럼 상속하고 속생(續生)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능히 쪼게거나 쪼게어지거나 하는 등의 여섯 가지 사실에 해당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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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로지 무거움[重 : 촉의 성질 중 하나]뿐이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능히 쪼개는 것과 쪼개지는 것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18계 중의 몇 가지가 이숙생(異熟生)이고, 몇 가지가 소장양(所長養)이며, 몇 가지가 등류성(等流性)이고, 몇 가지가 유실사(有實事)이며, 몇 가지가 일찰나(一刹那)인가?44)
  게송으로 말하겠다.
  
  내적인 다섯 가지는 이숙생·소장양이며
  성(聲)으로서 이숙생인 것은 없다.
  여덟 가지 무애(無礙)에는 등류와
  역시 또한 이숙생의 성질이 있다.
  內五有熟養 聲無異熟生
  八無礙等流 亦異熟生性
  
  나머지는 세 가지이고, 실(實)은 오직 법계뿐이며
  일찰나는 오로지 뒤의 세 가지뿐이다.
  餘三實唯法 刹那唯後三
  
  논하여 말하겠다. '내적인 다섯 가지'란 말하자면 안(眼) 등의 5계로서, 이것들은 바로 이숙생이며 아울러 소장양이다. 그리고 게송에서 등류성을 설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이숙생이나 소장양을 떠나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45)
  
44) 여기서 이숙생은 전생의 선악업이 초래하는 무기의 과보로서, 5색근과 색·향·미·촉의 4경, 7심계와 법계가 이숙생이다. 이숙생이 선천적인 것이라면 소장양은 음식 등에 의해 장양되는 후천적인 것으로서, 5색근과 5경이 그것이다. 등류성이란 원인과 동류의 성질을 지닌 결과, 즉 등류과를 말하는데, 7심계와 법계가 여기에 해당한다. 유실사(有實事, dravyavaT>란 견실(堅實)을 본질로 하는 무위를 의미하므로, 이에 해당되는 것은 법계뿐이다. 그리고 한찰나의 마음만으로 낳아지는 것, 즉 고법지인(苦法智忍)이 일찰나인데, 의계·의식계와 법계가 이에 해당된다.
45) 안·이·비·설·신의 5근은 동류인·등류과로서 전후 상속하지만 전찰나의 동류인도, 후찰나의 등류과도 필경 이숙(선천적)·장양(후천적)으로 생기 증장하는 5근의 전후상속으로, 이 두 가지를 떠나 별도의 등류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게송에서 등류성을 설하지 않은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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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 이숙인(異熟因)에 의해 생겨난 것을 '이숙생'이라 이름한 것으로, 이를테면 소에 의해 멍에 지워진 수레를 일컬어 우차(牛車)라고 이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간의 말을 생략해 버렸기 때문에 이같이 설하게 된 것이다.46) 혹은 소조(所造)의 업이 결과를 획득할 때에 이르게 되면 변이[異]하고 능히 성숙[熟]하기 때문에 '이숙'이라 이름하였으며, 그것으로부터 결과가 생겨나게 되는 것을 '이숙생'이라고 이름하였다. 혹은 그것에 의해 획득된 결과는 원인과는 다른 존재[別類]이면서도 바로 이러한 원인이 성숙된 것이기 때문에 '이숙'이라고 이름하였다. 혹은 원인에 대해 일시 결과의 명칭을 설정하고, 결과에 대해 일시 원인의 명칭을 설정한 것과 같으니, 이를테면 계경에서 설하기를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지금의 6촉처(觸處)는 바로 옛날의 지은 소조업이다' 고 하였던 것이다.47)
  음식과 자조(資助 : 몸을 이롭게 하기 위한 塗油나 洗浴)와 수면(睡眠)과 등지(等持) 등의 뛰어난 인연으로서 이익되게 하는 것을 '소장양' 이라고 이름한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범행(梵行)도 역시 능히 장양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다만 감손(減損)시키는 일이 없을 뿐으로 별도의 이익이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장양의 상속이 항상 이숙의 상속을 능히 지키는 것[護持]이니, 이는 마치 외곽이 내성을 방호하는 것과 같다.48)
  성계에는 등류나 소장양은 있지만 이숙생은 없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욕망하는 바에 따라 일어나기 때문이다.49)
  
46) 마치 소가 끄는 수레[牛所駕車]를 우차(牛車)라고 하듯이, 이숙인소생(異熟因所生)에서 '인소(因所)'를 생략하여 이숙생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47) 6촉처란 6근의 결과로서, 이것을 소조의 업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결과조작[所造]의 원인이 되는 업에 따라 일시 그렇게 칭명한 것이다. 즉 5근은 그것의 원인인 이숙인으로부터 생겨났기 때문에 이숙생이다.
48) 즉 음식 등에 의해 후천적으로 길러진 상속신(소장양의 상속)은 이숙으로서 선천적으로 획득되어진 상속신을 마치 외성이 내성을 방호하듯이 지킨다는 뜻. 이를테면 소장양의 안근은 승의근과 부진근으로서, 그것은 외부에 있으면서 내적이고도 본질적인 이숙생의 승의근을 방호하게 된다.
49) 소리가 이숙생이라고 한다면 현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생겨나야 하겠지만 발성자의 욕망에 따라 생겨나기도 하고 멈추어지기도 하기 때문에 이숙생이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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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마땅히 『시설론(施設論)』에서는 '추악어(麤惡語)의 원리(遠離)를 잘 닦았기 때문에 대사(大士)는 범음성(梵音聲)의 상을 감득하였다'고 설하지 않았을 것이다.50)
  그러나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소리는 세 번째 전해진 것[第三傳]에 속하기 때문에 비록 그 같은 업에 의해 생겨날지라도 이숙과는 아니다. 이를테면 그러한 업으로부터 온갖 대종이 생겨나고, 온갖 대종의 인연에 따라 소리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51) 또한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소리는 다섯 번째 전해진 것[第五傳]에 속하기 때문에 비록 그 같은 업에 의해 생겨날지라도 이숙과는 아니다. 이를테면 그러한 업은 이숙의 대종을 낳고, 이것이 전해져 장양의 대종을 낳았으며, 이것이 전해져 다시 등류의 대종을 낳고, 이것이 바야흐로 소리를 낳게 된 것이다."(이상 유부의 해명)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신수(身受)는 업에 의해 생겨난 대종으로부터 낳아진 것이기 때문에 이숙과가 아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수(受)가 소리[聲]와 마찬가지로 이숙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는 바로 올바른 이치[正理]에 어긋나게 될 것이다.(세친의 비평)
  '여덟 가지 무애(無礙, 礙性 즉 공간적 점유성을 갖지 않는 것)'란 7심계와 법계로서, 여기에는 등류와 이숙생의 성질이 있다. 즉 동류인(同類因)과 변행인(遍行因)에 의해 생겨난 것은 바로 '등류성'이다. 그러나 만약 이숙인에 의해 인기(引起)되어 생겨난 것이면 이숙생이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온갖 무애의 법은 적집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해 극미소성(極微所成)이 아니기 때문에 소장양이 아니다.
  '나머지'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그 밖의 나머지 네 가지인 색·향·미·
  
50) 이는 음성을 이숙과라고 주장하는 독자부(犢子部)와 분별론자(分別論者)의 주장(『대비바사론』 권제118, 한글대장경122, p. 411)이다. 즉 부처님은 과거 수행시대 추악어로부터 멀리 떠났기 때문에 그러한 선업력에 의해 범음성을 획득하였다는 뜻. 여기서 범음성은 32상 중의 하나.
51) 과거의 선악업이 제1전, 그러한 업에 의해 생겨난 대종이 제2전, 대종이 인연화합하여 생겨난 소리가 제3전. 즉 소리는 직접적으로는 과거 선악업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현재 대종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이숙생이 아니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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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으로서, 그것들은 세 가지 모두와 통하니, 이숙생이기도 하고, 소장양이기도 하며, 등류성이기도 하다.
  '실(實)은 오직 법계뿐이다'고 한 것에서, '실'이란 바로 견실(堅實)의 뜻이기 때문에 무위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법계에 포섭된다. 그래서 오로지 법계만을 단독으로 '유실사(有實事)'라고 이름한 것이다.
  나아가 의(意)와 법과 의식을 일러 '뒤의 세 가지'라고 하였는데, 여섯의 세 가지(6근·6경·6식) 중에서 가장 뒤에 설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오로지 이러한 3계에만 1찰나가 있으니, 말하자면 첫 번째 무루지(無漏智)인 고법인품(苦法忍品)은 등류가 아니기 때문에 '일찰나'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는 구경(究竟)으로서 등류가 아닌 것을 설한 것으로, 여타의 다른 유위법으로서 등류가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여기서 고법인(즉 무루혜의 심소)과 상응(相應)하는 마음을 일컬어 의계(意界)·의식계라고 하며, 그 밖의 구기(俱起)하는 법을 일컬어 법계라고 한다.52)
  이와 같이 이숙생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여기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어떤 안계(眼界)로서 일찍이 성취되지 않았던 것이 지금 획득[得] 성취되었다고 한다면, 안식(眼識)도 역시 획득 성취되는 것인가?
  또한 만약 안식계로서 일찍이 성취되지 않았던 것이 지금 획득 성취되었다고 한다면, 안계도 역시 획득 성취되는 것인가?
  이와 같은 물음에 대해 지금 마땅히 간략하게 답변하리라.
  게송으로 말하겠다.
  
  안계와 안식계는 단독으로 획득되기도 하고,
  함께 획득되기도, 그렇지 않는 등의 경우가 있다.53)
  
52) 여기서 그 밖의 고법지인과 구기하는 법이란, 무루 율의(律儀)의 색, 수·상·사 등의 상응법, 그러한 법을 획득하게 하는 득(得), 그리고 생(生)·주(住)·이(異)·멸(滅)의 4상을 말한다.(이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4, p.161 참조.)
53) 이 게송은 득(得, pr pti)과 성취(成就, samanv gama)에 관한 6근· 6경· 6식의 관계를 분별한 것이다. 여기서 '득'이란 불상응행법의 하나로, 제법을 유정의 상속상에 획득하게 하는 원리이다. 아울러 성취란 이미 획득한 것을 상실하지 않는 힘을 말한다.(본론 권제4, p.119 이하에서 상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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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眼與眼識界 獨俱得非等
  
  논하여 말하겠다. '단독으로 획득된다'고 함은, 말하자면 혹 안계로서 일찍이 성취되지 않았던 것이 지금 획득 성취되더라도 안식은 그렇지 않은 경우를 말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태생·난생·습생으로서) 욕계에 태어나 점차 안계를 획득할 때와,54) 그리고 무색계에서 몰(歿)하여 제2·제3·제4 정려지에 태어날 때가 그러하다.55)
  혹은 안식으로서 일찍이 성취되지 않았던 것이 지금 획득 성취되더라도 안계는 그렇지 않은 경우를 말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제2·제3·제4 정려지에 태어나 안식이 현기(現起)할 때와,56) 그리고 거기서 몰하여 하지(下地)에 태어날 때가 그러하다.57)
  '함께 획득된다'고 함은, 말하자면 안과 안식의 두 계로서 일찍이 획득되지 않았던 것이 지금 획득 성취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무색계로부터 몰하여 욕계나 범세(梵世,즉 초정려)에 태어날 때가 그러하다.58)
  '그렇지 않다'고 함은 두 가지가 모두 획득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를테면 앞에서 언급한 것을 제외한 경우가 그러하다.
  그리고 '등'이라고 함은 [아직 설하지 않은 그 밖의 다른 사실도 포섭한다
  
54) 이러한 3생의 유정은 처음으로 입태할 때[羯邏藍]에는 안근이 없으며, 그 후 6처위(處位)에 이르면서 점차적으로 획득하는데, 그 때에는 이미 안식을 성취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다시 식을 획득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4생 가운데 화생은 온갖 근을 단박에 획득[頓得]하기 때문에 제외하였다.
55) 중유(中有)로서 위의 세 정려에 태어날 때에는 색계의 안근을 획득하는데, 거기에는 5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안식을 획득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56) 이는 위의 세 정려에 태어난 본유(本有)의 경우로서, 이 때 안근은 처음부터 성취되어 있기 때문에 다시 획득하는 일은 없으며, 또한 이러한 상태에는 식이 존재하지 않지만 초정려의 식을 빌려 일으키기 때문에(이를 借起識이라고 함) 이같이 분별한 것이다.
57) 위의 세 정려에서 몰하여 욕계나 초정려에 태어날 때에는 이미 안근이 성취되어 있기 때문에 다시 획득하는 일이 없지만, 안식은 그 때 비로소 획득된다.
58) 무색계에는 안근도, 안식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거기서 몰하여 욕계나 초정려의 범세에 태어날 경우 두 가지를 동시에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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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말로서,] 이를테면 만약 안계를 성취하면 안식계도 역시 성취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는 등의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59)
  이에 대해서는 마땅히 4구(句)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60) 제1구는 말하자면 제2·제3·제4 정려지에 태어나 안식이 생기하지 않는 경우이다. 제2구는 말하자면 욕계에 태어나 아직 안근을 획득하지 않았거나, 획득하였어도 이미 상실한 경우이다. 제3구는 말하자면 욕계에 태어나 안근을 획득하여 상실하지 않았거나 범세에 태어나거나 제2·제3·제4 정려지에 태어나 바로 색을 볼 때가 그러하다. 제4구는 말하자면 앞에서 언급한 온갖 상을 제외한 때가 그러하다. 이와 같이 안계와 색계, 안식과 색계의 획득·성취에 대해 응당 마땅히 이치에 맞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으로, 이와 같이 아직 설하지 않은 교의를 포섭시키기 위해 게송 중에서 전체적으로 다시 '등'이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획득과 성취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18계 중의 몇 가지가 내적인 것[內]이고, 몇 가지가 외적인 것[外]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내적인 것은 열두 가지로 안계 등이며,
  색계 등의 여섯 가지를 외적인 것이라고 한다.61)
  內十二眼等 色等六爲外
  
59) 엄밀히 말하자면 앞의 경우는 일찍이 획득하지 않았던 것을 지금 획득[獲]할 때의 안근과 안식의 관계였다면, 이 경우는 다만 획득하여 상실하지 않을 때, 다시 말해 성취(成就)할 때의 안근과 안식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즉 불상응행법의 하나인 득(得,pr pti)에는 획득(獲,pr tilambha)과 성취(samanv gama) 두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본론 권제4, p.192 참조.)
60) 제1구는 안근을 획득하더라도 안식을 획득하지 않는 경우, 제2구는 안식을 획득하더라도 안근을 획득하지 않는 경우, 제3구는 양자 모두를 획득하는 경우, 제4구는 양자 모두를 획득하지 않는 경우.
61) 6식은 아집(aha k ra)의 의지(依止)가 되기 때문에 '아(我)'로 가설할 수 있는데, 그럴 경우 그러한 '아'의 소의가 되는 것(親近)을 '내적인 것'이라 하고, 소연이 되는 것[疎遠]을 '외적인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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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하여 말하겠다. 6근과 6식의 열두 가지를 내적인 것이라고 이름하며, 외적인 것이란 이를테면 그 밖의 색 등의 6경을 말한다.
  아(我) 자체가 이미 존재하지 않는데, 어찌 내외가 있을 것인가?
  아집(我執)의 의지(依止)가 되기 때문에 일시 마음을 설하여 '아'라고 한다. 그래서 계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는 것이다.
  
  '아'를 능히 잘 조복함으로 말미암아
  지자(智者)는 하늘에 태어날 수 있는 것이로다.
  
  즉 세존께서는 또 다른 곳에서 이를 '마음을 조복한다'고 설하고 있으니, 계경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 즉
  
  마땅히 마음을 능히 잘 조복해야 할 것이니
  마음을 조복해야 능히 즐거움을 낳을 수 있다.
  
  따라서 단지 마음을 일시 가설하여 '아'라고 하였다. 그리고 안 등은 이것의 소의(所依)가 되는 것으로, 그 관계가 친근(親近)하기 때문에 이를 설하여 '내적인 것'이라고 이름한 것이며, 색 등은 이것의 소연(所緣)이 되는 것으로 그 관계가 소원(疏遠)하기 때문에 이를 설하여 '외적인 것'이라고 이름하였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6식은 응당 마땅히 내적인 것이라고 이름해서는 안 될 것이니, 아직 의계(意界)의 단계에 이르지 않은 것은 마음의 소의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62)
  의계의 단계에 이를 때에도 6식계[의 체상(體相)]을 상실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의계의 단계에 이르지 않았을 때에도 역시 의계[의 체상]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 의계는 오로지 응당 마땅히 과거세에만 존재해야 할 것이고, 6식은 오로지 현재·미래세에만 존재해야 할 것
  
62) 즉 앞(본론 권제1, 주62)에서 6식이 과거로 낙사한 것을 의계라 하고 이것만이 마음의 소의가 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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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며, 그럴 경우 '18계는 모두 삼세와 통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자종(自宗)에 위배되고 말 것이다.63) 또한 만약 미래와 현재의 6식에 의계의 체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과거세의 의계도 역시 마땅히 설정될 수 없을 것이니, 체상은 삼세에 걸쳐 바뀌거나 변이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18계 중의 몇 가지가 동분(同分, sabh ga)이고, 몇 가지가 피동분(彼同分, tat-sabhaga)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법은 동분이며, 그 밖의 나머지는 두 가지이니
  자신의 작용[自業]을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다.
  法同分餘二 作不作自業
  
  논하여 말하겠다. '법은 동분이다'고 함은, 이를테면 어떠한 하나의 법계도 오로지 동분이 된다는 말이다. 즉 동분이란, 만약 [6]경이 [6]식에 대해 결정적으로 소연이 될 때 식은 그 중에서 이미 생겨났거나(과거·현재) 생겨날(미래) 법이 되니, 이러한 식의 소연이 되는 경계를 설하여 동분이라고 이름한다. 따라서 어떠한 법계라도 그것에 대해 과거[已]·현재[正]·미래[當]에 무변(無邊)의 의식을 낳게 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모든 성자는 결정적으로 일체의 법에 대해 마음을 낳아, 그것은 모두 무아(無我)라고 관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때 그러한 무변의 의식은, 그 자체와 그것과 구유(俱有)의 법을 제외한 그 밖의 일체의 법을 소연으로 한다. 그러나 여기서 제외된 것도 역시 제2찰나 마음의 소연의 경계가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두 찰나의 마음은 일체의 경계를 소연으로 하는 것으로, 두루 소연으로 삼지 않는 것이 없다.64) 그렇기 때문에 법계를 항상 동분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63) 여기서 '자종(自宗)'이란 비바사사(毘婆沙師) 즉 설일체유부의 종의를 말한다. '18계는 모두 삼세와 통한다'는 사실은 『대비바사론』 권제71(대정장27, p. 367중:한글대장경120, p. 484)에 '삼세각유십팔계상(三世各有十八界相)'에 근거한 것이다.
64) 즉 법계가 의식의 대상으로서의 동분이 되면 일체법 즉 무변(無邊)의 의식을 낳게한다. 예컨대 어떤 성자가 '제법무아(諸法無我)'를 관하였을 경우, 그것은 삼세 일체법에 관한 것으로, 여기에는 그것과 구기(俱起)하는 다양한 심소와, 생(生) 등의 불상응행법이 수반된다. 그리고 의식자체를 포함한 그것들은 그 순간 동분이 되지 않지만, 다음 순간(제2찰나) 반성력에 의해 객관화됨으로써 마침내 일체의 대상은 법동분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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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밖의 나머지는 두 가지이다'고 함은, 말하자면 그 밖의 나머지 17계는 모두 동분이 되기도 하고 피동분이 되기도 한다는 말이다.
  무엇을 일컬어 동분이라 하고, 피동분이라고 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자신의 작용[自業]을 짓고, 자신의 작용을 짓지 않는 것을 말하니, 자신의 작용을 짓는 것을 일컬어 동분이라 하고, 자신의 작용을 짓지 않는 것을 일컬어 피동분이라고 한다. 이를테면 이(17계) 가운데 안계로서 볼 수 있는 색[有見色]을 이미 보았거나 지금 보고 있거나 당래(미래)에 볼 것을 '동분안(眼)'이라고 이름한다. 이같이 널리 설하여 내지는 의계의 경우도 각기 자신의 경계에 대해 자신의 작용(곧 知)을 행하는 것을 '동분의(意)'라고 마땅히 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피동분의 경우]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 K mira)의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설하기를, "피동분의 안에는 단지 네 가지 종류만이 있을 뿐이니, 이를테면 색을 보지 않고 이미 멸하였거나 지금 멸하고 있거나 당래 멸할 것과 불생법(不生法)이 바로 그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서방(西方,간다라)의 여러 논사들은 다섯 가지 종류가 있다고 설하니, 이를테면 앞의 불생법을 다시 두 가지로 나눈 것이 바로 그것으로, 첫째가 유식속(有識屬)이며, 둘째가 무식속(無識屬)이다.65) 내지는 신계의 경우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며, 의계의 피동분은 오로지 불생법뿐이다.66)
  색계의 경우는 안(眼)을 위해 이미 보여졌거나 지금 보여지고 있거나 당래 보여질 것을 '동분색'이라 이름한다. 피동분의 색에는 역시 네 가지 종류가
  
65) 유식속불생법(구역 與識相應不生法, vij~ nasam yukta-)이란 식과 근이 모두 갖추어졌지만 연이 결여되어 끝내 생겨나지 않는 법을 말하며, 무식속불생법(구역 與識不相應不生法, avij~ nasam yukta-)이란 근만이 있고 식이 없기 때문에 끝내 생겨나지 않는 법을 말함.
66) 의계 즉 마음은 이미 생겨난 이상 어떤 대상(소연)에 대해 작용한 것이기 때문에 동분이며, 따라서 필경(畢竟) 불생법만이 피동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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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으니, 이를테면 안(眼)에 보여지지 않고 이미 멸하였거나 지금 멸하고 있거나 당래 멸할 것과 불생법이 바로 그것이다. 널리 설하여 내지는 촉계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여 각기 자신의 근에 대해 자신의 작용을 행하는 것이 ['동분촉'이고, 신(身)에 감촉되지 않고 이미 멸하였거나 지금 멸하고 있거나 당래 멸할 것과 불생법을 '피동분의 촉'이]라고 마땅히 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동분안(眼)이나 피동분의 안으로서 만약 어떤 한 대상에 대해 동분이 되면 여타의 다른 일체의 대상에 대해서도 역시 동분이 되며, 피동분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나아가 이같이 널리 설하여 내지는 의계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색은 그렇지가 않다. 즉 [어떤 하나의 색은 그것을] 보는 자에 대해서는 바로 동분이 되지만 보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바로 피동분이 되는 것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색에는 이 같은 사실이 있다. 즉 그것이 어떤 한 사람에게 보여지는 것이라면 많은 사람들에게도 역시 보여지는 것이니, 이를테면 달이나 춤이나 씨름 따위의 색을 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안(眼)에는 이 같은 사실이 없으니, 이를테면 어떤 한 사람의 안근으로써 두 사람이 능히 색을 보는 일이 없다. 즉 안근은 공동으로 쓸 수 없기[不共] 때문에 한 사람의 상속(소의신)에 의지하여 동분과 피동분을 건립하지만, 색은 바로 공동의 대상이기 때문에 다수의 사람들의 상속에 근거하여 동분과 피동분을 건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색계에 대해 설한 것과 마찬가지로 성·향·미·촉 계의 경우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성계(聲界)의 경우, [한사람에게 들리는 소리는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역시 들리기 때문에] 색계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향·미·촉의 세 가지 계는 근에 이를 때 비로소 취해지는 것이니, 이는 바로 공동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한 사람 만이 취하지 그 밖의 다른 사람이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67) 따라서 이치상으로 볼 때 응당 마땅히 안계 등과 같은 것
  
67) 향·미·촉은 감관과 직접 접촉하여야 알려지는 것[合中知]이므로 그 당사자만 알 뿐이지만, 색과 성은 그렇지가 않기 때문이다[離中知]. 이처럼 향·미·촉은 공동의 대상이 아니지만 세간에서는 가설적인 개념에 의지하여, '우리는 다 같이 이러한 향을 냄새맡고, 다 같이 이러한 미를 맛보며, 다 같이 이러한 촉을 느낀다'고 말하기도 한다.(『현종론』 권제3, 한글대장경200, p.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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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라고 해야 하지 색계와 같은 것이라고 설해서는 안 될 것이다.
  비록 그 같은 이치가 있을지라도 공동의 대상[共]이 될 수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향 등의 3계는 [그것이 아직 근에 이르지 않았을 때에는] 어떤 한 사람이나 그 밖의 다른 사람 모두에 대해 비식(鼻識) 등을 낳게 할 수 있는, 다시 말해 공동으로 수용될 수 있는 것이지만 안근 등은 그렇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향 등의 3계는 색계의 경우와 같은 경우라고 설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안식 등 6식의 동분은 [자신의 작용을 행하여] 생겨난 것이고, 그것의 피동분은 (필경)불생법이기 때문에 의계(意界)의 경우와 같다고 설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동분과 피동분의 뜻은 무엇인가?
  근·경·식 세 가지는 서로 교섭하기 때문에 이를 일컬어 '분(分, bh ga)'이라고 하였다. 혹은 다시 '분'이란 바로 자신의 작용을 행하는 것이며, 혹은 다시 '분'이란 바로 생겨난 촉[所生觸]을 말한다.68) 즉 [근·경·식 3자가] 동일[同]하게 이 같은 '분'을 갖기 때문에 동분(同分)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서로 반대되는 것을 피동분이라고 이름하니, 동분은 아니지만 그러한[彼] 동분과 비교할 때 종류와 '분'이 동일하기 때문에 피동분이라고 이름한 것이다.69)
  동분과 피동분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18계 중의 몇 가지가 견소단(見所斷, dar anaheya)이고, 몇 가지가 수소단(修所斷, bh van heya)이며, 몇 가지가 비소단(非所斷, aheya)인가?70)
  
68) 근·경·식 세 가지의 교섭이 원만하여 이른바 '동분'의 뜻을 각각 갖게 될 때 촉(觸)이 낳아지므로(三事和合觸), 그러한 촉을 '분'이라 이름한다는 뜻.
69) 그러한 동분과 비교할 때 종류와 '분'이 동일하다고 함은, 말하자면 피동분과 동분은 동일하게 보는 것[同見]이며, 동등한 상[等相]이며, 동일한 처이며, 동일한 계이며, 서로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는 것[相屬]이기 때문에 종류와 '분'이 동일하다고 한 것이다.(『현종론』 권제3, 앞의 책)
70) 견소단과 수소단은 견도(見道 : 무루혜에 의한 4諦 관찰)와 수도(修道 : 선정을 통한 반복된 관찰)로 끊어지는 법이며, 비소단은 무위택멸처럼 끊어지지 않는 법을 말한다.(본론 권제19, p.862 ; 권제23, p.1055 이하에서 상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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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송으로 말하겠다.
  
  열다섯 가지의 계는 오로지 수소단이고
  뒤의 세 가지 계는 세 가지 모두와 통하며
  불염법(不染法)과, 제6처가 아닌 것에서 생겨난 법과
  색법은 결정코 견소단이 아니다.
  十五唯修斷 後三界通三
  不染非六生 色定非見斷
  
  논하여 말하겠다. '열다섯 가지의 계'라고 함은 이를테면 열 가지의 색계와 5식계를 말한다. '오로지 수소단이다'고 함은 이러한 열다섯 가지의 계는 오로지 수소단이라는 것이다.
  '뒤의 세 가지 계'란 의계와 법계, 그리고 의식계를 말하며, '세 가지와 통한다'고 함은 이러한 뒤의 세 가지 계는 각기 세 가지 종류(견소단·수소단·비소단)와 통한다는 말이다. 즉 여든여덟 가지 수면(隨眠)과, 그것과 구유(俱有)하는 법과, 아울러 수행(隨行)하는 득(得)은 모두 견소단이고,71) 그 밖의 나머지 온갖 유루법은 모두 수소단이며, 일체의 무루법은 모두 비소단이다.
  어찌 견소단의 법이 더 이상 없다고 하겠는가? 이를테면 이생성(異生性)과, 악취(惡趣)를 초래하는 신(身)·어업(語業) 등이 바로 그러한 것으로, 이러한 법은 성도(聖道)와 지극히 상위하기 때문이다.72)
  
71) 88수면은 4제 각 행상(行相)에 미혹하여 생겨난 이지적 번뇌 즉 미리혹(迷理惑, 혹은 見惑)으로, 본론 권제19에서 상론된다. 구유법은 이러한 수면과 상응하는 심·심소와 구생하는 생(生) 등의 4상(相)을 말하며, 수행법이란 이러한 제법을 심상속 상에 획득하게 하는 득(得)을 말한다.
72) 여기서 이생성은 성법(聖法)의 비득(非得)을 자성으로 삼는 자. 즉 이러한 이생성과 결정코 악취(지옥·아귀·축생)의 생을 초래할 만한 신·어업은 성도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유신견(有身見)처럼 견소단이 되어야 한다는 난(難). 이는 바사(婆沙)나 칭우(稱友)에 의하면 독자부(犢子部)의 난이지만, 『구사론기』에 의하면 경부(經部)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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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록 그렇다할지라도 이러한 법은 견소단이 아니다. 그러한 법들의 상을 간략히 설할 것 같으면, 이를테면 염오하지 않은 법[不染法]과, 제6에 의해 생겨나지 않은 법[非六生]과 색법은 결정코 견소단이 아닌데 [하물며 이 가운데 염오하지 않은 법의 일부인 이생성이 견소단일 것인가.]73) 즉 그러한 이생성은 바로 불염오 무기성에 포섭되는 것으로, 이미 이욕(離欲)한 자도, 선근을 끊은 자도 오히려 성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생성이 만약 견소단이라고 한다면 고법인(苦法忍)의 단계에서도 응당 이생이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제6이란 이를테면 제6 의처(意處)를 말하는 것으로, 이러한 의처와는 다른 것에서 생겨나는 것을 '제6처가 아닌 것에서 생겨난 법'이라고 하였다. 곧 이는 바로 안(眼) 등의 5근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는 뜻이니, 바로 5식 등을 말한다. 그리고 색법이란 일체의 신·어업 등을 말하니,74) 앞서 언급한 제6에 의해 생겨나지 않은 법과 이러한 색법은 결정코 견소단이 아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이는 4제의 이치[諦理]에 미혹하여 직접 발기(發起)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75)
  이와 같이 견소단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18계 중의 몇 가지가 견(見, d i)이며, 몇 가지가 비견(非見, ad i)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안계와, 법계의 일부인
  
73) 즉 유루선이나 무부무기(無覆無記)와 같은 불염오법과 제6 의근에 의해서가 아니라 안 등 전5근으로부터 생겨난 전5식과, 염오하거나 염오하지 않은 유루의 색법 따위는 결정코 견소단이 아니기 때문에 불염오 무기성에 포섭되는 이생성이나 신·어업 또한 견소단이 아니라는 뜻. 뒤에서 상론하고 있다.
74) 신·어업은 형색(形色, 신체적 형태)과 어언(語言, 언어적 형태)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색법에 포섭된다.(본론 권제13 주13 참조.)
75) 이생성은 불염오성이기 때문에, 전5식은 무분별이기 때문에, 신·어업은 무소연성(無所緣性)이기 때문에 4제의 이치에 미혹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견소단이 아니라 수소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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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덟 가지를 설하여 '견(見)'이라 이름하며
  5식과 함께 생기하는 혜(慧)는
  비견(非見)이니, 판단[度]하지 않기 때문이다.
  眼法界一分 八種說名見
  五識俱生慧 非見不度故
  
  색을 보는 것은 동분의 안근으로
  그것을 의지처로 삼는 식(識)이 아니니
  전설에 의하면, 은폐된 온갖 색을
  능히 볼 수 없기 때문이다.
  眼見色同分 非彼能依識
  傳說不能觀 被障諸色故
  
  논하여 말하겠다. 안근은 모두 바로 '견(見)'이며, 법계의 일부분인 여덟 가지 종류도 '견'이다. 그리고 그 밖의 것은 모두 비견(非見)이다.
  어떠한 것이 여덟 가지인가?
  이를테면 유신견(有身見) 등의 다섯 가지 염오견(染汚見)과 세간의 정견(正見)과 유학(有學 : 무루지를 성취한 성자)의 정견과 무학(無學 : 성도를 모두 성취한 성자, 즉 아라한)의 정견이니, 법계 가운데 바로 이러한 여덟 가지가 '견'이며, 그 밖의 법계와 나머지 16계는 모두 비견이다.
  여기서 다섯 가지 염오견의 상에 대해서는 마땅히 「수면품(隨眠品)」 중에서 설하게 될 것이다.76) 그리고 세간의 정견이란, 이를테면 의식상응의 선인 유루의 뛰어난 혜(慧)를 말한다. 유학의 정견이란, 이를테면 유학의 소의신 중의 온갖 무루의 견을 말한다. 무학의 정견이란, 이를테면 무학의 소의신 중의 온갖 무루의 견을 말한다. 이를 비유하자면 한밤중과 한 낮과 구름이 끼었
  
76) 유신견 등의 5견이란 유신견(또는 薩迦耶見, 소의신을 실유라고 집착하는 견해), 변집견(邊執見, 斷·常 두 극단에 집착하는 견해), 사견(邪見, 인과의 도리를 부정하는 견해), 견취(見取, 그릇된 견해를 올바른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 계금취(戒禁取, 그릇된 계행을 올바른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를 말하는 것으로, 본론 권제19(p.867)이하에서 상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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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 때와 구름이 없을 때에 온갖 색상(色像)을 관찰하면 밝고 어둠의 차이가 있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세간의 온갖 '견'으로서 염오함이 있거나 염오함이 없는 것과, 유학의 견과 무학의 견, 그 같은 온갖 견의 법상(法相)을 관찰하면 그 밝고 어둠이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77)
  어떠한 이유에서 세간의 정견은 오로지 의식과 상응하는 것이라고 한 것인가?
  5식과 구생(俱生)하는 혜는 능히 결탁(決度)하지 않기 때문이다.78) 이를테면 먼저 심려(審慮,심사숙고의 뜻)하고 결탁하는 것을 일컬어 '견'이라고 한다. 그런데 5식과 구생하는 혜는 이와 같은 공능이 없으니, 무분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5식상응의 혜는] 비견(非見)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에 준하여 그 밖의 염오하거나 염오하지 않은 혜와, 아울러 그 밖의 온갖 법도 비견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79)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안근도 능히 결탁하지 않는데, 그것을 어떻게 '견'이라 이름할 수 있을 것인가?(識見家의 물음)80)
  
77) 즉 다섯 가지 염오견은 유루이면서 번뇌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구름(번뇌)이 낀 한밤(유루) 중에 색상을 관찰하는 것과 같고, 세간의 정견은 유루이지만 번뇌가 없기 때문에 구름이 끼지 않은 한밤 중에 색상을 관찰하는 것과 같다. 또한 유학의 정견은 무루지를 획득하였으나 번뇌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구름이 낀 한 낮에 색상을 관찰하는 것과 같고, 무학의 정견은 더 이상 번뇌가 없기 때문에 구름이 끼지 않은 한낮에 색상을 관찰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78) 자성분별만을 본질로 하는 전5식과 상응하는 선혜(善慧)를 어떻게 세간의 정견에 포함시킬 수 있는가 하는 뜻의 물음. 여기서 '결탁(決度, sa t ira a)'은 확인 판단의 뜻이다.
79) 유신견 등의 5견 이외 탐 등과 상응하는 혜나 의식상응의 혜를 제외한 그 밖의 혜, 안근을 제외한 이근(耳根) 등의 모든 근과 일체의 무부무기의 혜, 무학의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 그리고 혜 이외 그 밖의 법계소섭법(法界所攝法)은 심려 결탁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견'이 아니라는 뜻.(『현종론』 권제4, 한글대장경200, p. 83 참조)
80) 이하 앞에서 논의한 견(見)의 주체를 감관 즉 안근으로 볼 것인가, 의식 즉 안식으로 볼 것인가, 다시 말해 '본다'고 하는 사실을 관조[見]으로 규정할 것인가, 요별(了別)로 규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것으로, 전통적으로 전자를 근견설(根見說), 후자를 식견설(識見說)이라고 하며, 유부에서는 근견설의 입장을 취한다. 『대비바사론』 권제13(대정장27, p. 61하)에서는 '견'의 주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설(異說)을 전하고 있다. 안식이 색을 본다는 식견설 : 존자 법구(法救, Dharmatr ta)의 주장. 안식과 상응하는 의식작용으로서 이해·간택력인 혜(慧)가 본다는 상응혜견설(相應慧見說) : 존자 묘음(妙音, Gho a)의 주장. 안근과 안식이 화합하여 색을 본다는 화합견설(和合見說) : 비유자(譬喩者)의 주장. 두 개의 눈은 서로 떨어져 있어 동시에 작용하지 않으므로 하나의 안근이 색을 본다는 일안견설(一眼見說) : 독자부(犢子部)의 주장. 이에 대해 유부에서는 발식취경(發識取境)의 작용을 갖고 있는 두 개의 눈이 본다고 주장한다.(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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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히 밝고 날카로워[明利] 온갖 색을 관조(觀照)할 수 있기 때문이다.(根見家, 즉 유부 비바사사의 답)81)
  그러나 만약 안근이 본다고 한다면 그 밖의 식(識)이 작용할 때에도 역시 마땅히 보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식견가의 再難)82)
  일체의 안근이 능히 현견(現見)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어떠한 안근)이 능히 현견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동분(同分)의 안근이 식과 화합할 때 능히 보는 것으로, 그 밖의 안근은 보는 것이 아니다.83)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응당 마땅히 그것의 능의(能依,주체)인 식이 색을 보는 것이지 안근이 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 않다. 안식은 결정코 능히 보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전(傳)하여 설(說)하는 바에 따르면, 감추어진 색[障色]을 능히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지금 바로 보건대, 벽 등에 의해 은폐된 온갖 색을 능히 볼 수 없으니, 만약 식이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식은 무대(無對)이기 때문에 벽 등에 의해 장애 받지 않으므로 마땅히 감추어진 색도 보아야 하는 것이
  
81) 여기서 관조( locana)란 근이 거울과 마찬가지로 외계대상을 비추어 받아드리는 작용을 말함.
82) 만약 '눈이 본다'고 한다면 그밖의 의식, 예컨대 이식(耳識) 등이 작용할 때에도 역시 동시에 작용하게 될 것이라는 뜻. 즉 유부에서는 두 가지의 의식이 동시에 생기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때문에 보는 작용과 듣는 작용은 동시에 일어날 수 없다. 그런데 만약 보는 것이 안식이 아니라 안근이라고 한다면 다른 하나의 식(識)이 의식의 영역을 차지하게 될 때에도 '본다'고 하는 작용은 일어날 수 있으며, 따라서 근견설은 자설(自說)을 위배하게 된다. 즉 보는 주체가 눈이라면 그것은 의식활동에 관계없이 동시존재하는 모든 대상을 항상 보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83) 예컨대 모든 톱이 항상 자르는 작용을 행하는 것은 아니며 현재 목수와 결합하여 자기 작용을 수행하고 있는 톱만이 자르는 작용을 행하듯이, 모든 눈은 항상 보는 것이 아니며, 안식과 공동하여 현재 자신의 작용을 행하고 있는 눈[同分眼]만이 보는 작용을 행한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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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감추어진 색에 대해 안식은 발생하지 않는다. 식이 이미 생겨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마땅히 볼 수 있을 것인가?
  안식은 [무대로서 벽 등에 의해 장애 받지 않는데] 그러한 감추어진 색에 대해서는 어째서 생겨나지 않는 것인가? 그렇지만 '안근이 보는 것[見]'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우리의 경우, 안근은 유대(有對)이기 때문에 감추어진 색에 대해서는 보는 공능이 없다. 나아가 식과 소의(즉 안근)는 동일한 대상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러한 감추어진 색에 대해 안식도 발생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대가] 만약 오로지 '안식이 보는 것'이라는 사실만을 인정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그것이 생기하지 않는 것인가?
  눈이 어찌 몸(피부)처럼 근(根)과 경(境)이 화합할 때 비로소 대상을 취하는 것이라 하겠으며, 유대이기 때문에 그러한 감추어진 색을 보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파지가(頗迦, 수정을 말함), 유리, 운모(雲母), 물 등에 장애 된 것은 어떻게 볼 수 있는 것인가? 그러므로 안근은 유대이기 때문에 감추어진 색에 대해 보는 공능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84)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대가 주장하는 안식의 경우는 어떠한가?
  만약 이러한 처소(어떤 한 대상)에 광명만 차단되지 않으면 그러한 감추어진 색에 대해 안식은 역시 생겨나겠지만, 그러나 만약 이러한 처소에 광명이 차단되어 있으면 감추어진 색에 대해 안식은 생겨나지 않는다. 즉 안식이 이미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에 능히 그것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경(經)에서 '안근이 능히 색을 본다'고 설한 것은 그것이 바로 견(見)의 소의이기 때문에 '능히 본다'고 설한 것이다.85) 또한 그 경에서 '의근이 능히 법을 인식한
  
84) 눈은 반드시 대상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할 때 비로소 볼 수 있는 이중지(離中知) 즉 비지경(非至境)의 감관이기 때문에 합중지(合中知)의 피부처럼 대상과 직접 접촉할 필요가 없으며, 대상과 직접 접촉할 필요가 없다면 그것이 공간적 점유성을 지니든[有對] 지니지 않든[無對] 관계없다. 따라서 눈이 벽 뒤에 감추어진 대상을 보지 못하는 것은 그것의 유대성으로 인한 불접촉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이다. 이를테면 눈이 수정이나 유리 운모 물 등에 의해 방해받아도 그 뒤에 감추어진 대상을 보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안근이 유대성이기 때문에 감추어진 대상을 볼 수 없다고 한 근견가의 말은 성립할 수 없다는 뜻. 이는 식견가의 재난(再難)이다.
85) 『잡아함경』 권제9(대정장2, p. 64상). "眼是門, 以見色故. 耳鼻舌身意是門, 耳識法故." 여기서 계경의 의미는 눈은 '본다'고 하는 사실의 구체적 근거[見所依]가 되기 때문에 눈을 통해 본다는 것이지 눈 자체가 본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므로 보는 주체[見者]는 눈을 근거로 하고 있는 안식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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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의근이 능히 인식하는 것은 아니니, 그것은 과거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능히 인식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의식이니, 의근은 바로 의식의 소의가 되기 때문에 '능히 인식한다'고 설한 것이다. 혹은 소의(所依, 안근 또는 의근)에 대해 능의(能依, 안식 또는 의식)의 업을 설한 것이니, 세간에서 '평상이나 의자의 소리'라고 설하는 것과 같다.86) 또는 경에서 '안근이 인식한 색은 참으로 애호할 만한 것이고 참으로 즐길 만한 것이다'고 말하고 있듯이 실로 이같이 참으로 애호할 만하고 즐길 만한 색이라는 것은 안근에 의해 인식되는 바가 아닌 것이다.87) 또한 경에서 "범지(梵志)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안근을 문(門)으로 삼아 오로지 색을 보게 되는 것이다"고 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 그러므로 안식이 안근의 문[眼門]에 의지하여 색을 보는 것임을 알아야 하며, 역시 또한 문이 바로 보는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88) 그러니 어찌 경에서 '안근으로 보는 것이니, 그것으로 오로지 색을 보게 되는 것이다'라고 설할 수 있었을 것인가?
  만약 식(識)이 능히 '보는 것[見]'이라면, 무엇이 다시 요별(了別)하는 것이며, '견'과 요별의 두 작용은 무엇이 다른 것인가?89)
  
86) 소리를 내게 하는 주체[能依]는 사람이지만 그 매개[所依]가 평상이기 때문에 '평상의 소리'라고 하듯이, 또는 나무를 자르는 주체는 사람이지만 그 근거가 도끼이기 때문에 '도끼가 나무를 자른다'고 하듯이 '의근이 능히 법을 인식한다'는 경문은 '인식[了別]'이라는 사실의 근거[所依]가 되는 의근에 대해 인식주체인 의식의 주체적 작용[能依業]을 설정한 것이라는 뜻.
87) 참으로 애호하고 즐길만하다는 것은 이미 확인 판단(즉 요별)된 것으로, 그것은 마땅히 식의 작용이라는 경증.
88) 앞의 『잡아함경』에서 눈은 바로 문(門)이라고 하였으므로, 그것은 다만 '견'의 방편[門, dvara]일 뿐이라는 뜻. 즉 색은 눈(안근)이 본 것이 아니라 안식이 그것을 방편으로 삼아 본 것으로, 방편 자체가 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89) 유부와 같은 범주론적 사유체계에 있어서 하나의 존재[法]는 오직 한 가지 본질과 작용을 갖기 때문에 보는 것 즉 견자(見者)가 식이라면 요별자를 반드시 따로이 설정해야만 한다. 즉 '견'이 마음의 감성적 작용이고 요별이 오성적 작용이라면 그 작용의 주체 또한 구별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부의 경우 안근의 본질은 관조이고, 안식의 본질은 요별로서, 각기 개별적 존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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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 식이 색을 보는 것을 일컬어 '색을 요별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러한 허물은 없다.] 비유하자면 일부의 혜(慧)를 일컬어 능히 보는 것이라고도 하고, 또한 역시 능히 간택(簡擇)하는 것이라고도 하듯이,90) 이와 마찬가지로 일부의 식도 능히 보는 것이라 이름하지만 또한 역시 능히 요별하는 것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여사는 [근견설을] 힐난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약 안근이 능히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안근은 바로 보는 주체[見者]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본다'고 하는 작용자체가 주체와는 별도로 상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이 바로 보는 작용[見用]인가?91)
  이러한 말은 힐난이 될 수 없으니, 이를테면 식(識)이 능히 요별하는 것이라고 할 경우, 요별의 주체[了者]와 요별의 작용[了用]에 어떠한 다름도 없듯이 보는 것[見] 역시 응당 마땅히 그러함을 함께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유여사는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안식이 능히 보는 것이다. 다만 이것(안근)은 바로 견(見)의 소의가 되기 때문에 안근 역시 능히 보는 것이라고 일컬은 것이니, 이는 마치 울림의 소의가 되기 때문에 또한 역시 '종(鐘)이 능히 울린다'고 설하는 것과 같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안근은 안식의 소의가 되기 때문에 응당 마땅히 '능히 인식한다'고 일컬어야 할 것이다.
  
90) 유학의 정견(正見) 따위는 미지의 사실을 추구(推求) 추탁(推度)함이 있기에 '견'이라고도 하지만, 동시에 4제법을 간택하는 공능을 갖기도 한다. 여기서 '일부'라고 한 것은, 무학의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는 다만 혜일 뿐 '견'이 아니기 때문이다.
91) 보광(普光)에 의하는 한 이 같은 물음은 근견가로부터 지적된 '하나의 존재가 두 가지 본질적 작용을 갖는 것은 불합리하다'에 대한 식견이사(識見異師)의 반증으로(그러나 法寶에 의하면 이는 독자부의 난이다), 그들에 의하면 안근은 보는 것[見者]이며, 안식은 보는 작용[見用]이다. 즉 보는 것은 눈이지만, 실제적으로 보는 작용을 수행하는 것은 안식이며, 그것은 바로 요별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여기서 편의상 작자와 작용을 차별하였지만, 초기불교이래 작자의 실재성은 부정되므로 '본다'고 하는 구체적 사실은 바로 안식에 소속되어야 한다는 것이 본 절의 취지이다.(『구사론기』 권제2 대정장41, p. 50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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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같은 과실은 없으니, 세간에서도 안식이 바로 보는 것이라고 다 같이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생겨날 때 '능히 색을 본다'고 설하지 '색을 인식한다'고는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비바사론』 중에서도 역시 이렇게 설하고 있다. "안근이 획득한 바를 안식이 요별함을 설하여 '보여진 것'이라고 이름한다."92) 그렇기 때문에 다만 안근을 설하여 능히 보는 것이라고 일컫는 것이지 능히 인식하는 것이라고는 일컫지 않는 것이다. 오직 식이 현전(現前)할 때만 '능히 색을 인식한다'고 설하니, 비유하자면 태양을 설하여 능히 낮을 만드는 것, 다시 말해 태양이 뜨면 낮이 되는 것이라고 일컫는 것과 같다.93)
  [이상의 논의에 대해] 경부(經部)의 여러 논사들은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어찌하여 함께 모여 [실재하지도 않는] 허공을 서로 움켜쥐려고 맞붙어 싸우는 것인가? 안근과 색경 등을 반연하여 안식이 생겨나는 것인데, 이러한 것들 중 어느 것을 '견(見)'에 대한 주체[能]라 하고 객체[所]라 하겠는가? 그것은 오직 법(法)으로서 인과(因果) 관계일 뿐, 그것들 사이에는 실로 어떠한 작용도 없는 것이다. 다만 세간의 관습[世情]에 따르기 위해 일시 언설을 일으켜 '안근을 능히 보는 것'이라 일컫고, '안식을 능히 요별하는 것'이라 일컬은 것뿐이니, 세존께서 "지역에 따른 언어적 습관[方域言詞]에 마땅히 견고히 집착해서도 안 되며, 세속의 언어개념[世俗名想]을 견고히 추구해서도 안 된다"고 설하신 것처럼 지자(智者)는 응당 마땅히 여기에 크게 집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94)
  
92) 『대비바사론』 권제73(대정장27, p. 380상 : 한글대장경120, p. 539). "謂世共說 , 眼所受境名爲可見 ."
93) 즉 '본다'고 하는 구체적 사실은 식견가처럼 관조하고 요별하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겠지만, 분석론적 입장에서 본다면 '보는 것[見者]'은 어디까지나 안근이다. 그렇기 때문에 안근은 본다고만 할 뿐 인식(즉 요별)한다고는 하지 않는 것이다. 인식이란 오로지 식이 현전할 때만 가능하다. 그러나 식의 현전은 감관[根]과 대상[境]에 의한 부대적 상황일 뿐이므로 '인식[요별]' 역시 '본다[見 즉 관조]'는 사실의 부대적 작용일 뿐이다. 마치 태양이 뜨면 저절로 낮이 되는 것처럼 감관과 대상 사이에 '본다'고 하는 사실이 성립하면 인식 즉 요별은 자연히 드러나게 된다는 뜻. 이는 근견가의 절충적 해석으로 이해된다.
94) 이상의 근견가(根見家)와 식견가(識見家)의 논의에 대해 경부 즉 경량부(Sautrantika)는 양자 파기의 중도적 입장을 취한다. 경량부에 의하면 대상[色境]이 생기하는 순간과 눈[眼根]이 작용하는 순간, 의식[眼識]이 일어나는 순간은 각기 시간을 달리하고 있어 동시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시간적으로 계기(繼起)하는 세 가지 존재 사이에 직접적인 작용관계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실재하지 않는 작용을 놓고서 인식성립의 본질적 요소가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는 것은 마치 실재하지 않아 잡히지도 않는 허공을 쥐고 맞붙어 싸우는 것[虛空]과 같다. 즉 인식이 일어나고 있을 때에는 그 원인이 된 감관의 찰나, 외계대상의 찰나는 이미 과거하여 더 이상 존재하지도 작용하지도 않으며, 현재 존재하는 것은 오직 대상이 보여지고 있다고 하는 결과로서의 인식 그 자체[法] 뿐이다. 따라서 경량부에서는 인식을 유부에서처럼 동일 순간에 공존하는 감관과 대상, 그리고 의식의 상호작용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대상 즉 의식에 부과된 형상이 원인이 되고, 다음 순간 상속의 결과로서 인식이 생겨난다고 하는 인과의 관계로서 설명한다. 그리고 현재 존재하는 것은 오직 결과로서 드러나는 인식이라는 사실뿐이기 때문에 그것을 주관적 계기나 객관적 계기로 분석하는 것은 인간의 사유나 언어의 습관적 설정일 뿐이며, 인식 그 자체는 주관과 객관으로 나눌 수 없는 하나의 단일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상 근견과 식견, 그리고 이에 대한 경량부의 논의에 대해서는 권오민,『유부아비달마와 경량부철학의 연구』(서울 경서원,1994) 제2부 제5장 「아비달마 인식론의 중도적 지양」을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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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지만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 비바사사(毘婆沙師)의 종의(宗義)에서는 "안근이 능히 보고, 이근이 능히 들으며, 비근이 능히 냄새 맡고, 설근이 능히 맛을 보며, 신근이 능히 느끼며, 의근이 능히 요별한다"고 설한다.
  
  색을 볼 때 하나의 눈으로 본다[一眼見]고 해야 할 것인가, 두 눈으로 본다[二眼見]고 해야 할 것인가?95)
  여기에는 일정한 기준은 없다.96)
  게송으로 말하겠다.
  
95) 이하 앞의 '견론(見論)'에 부수된 방론(傍論)으로, 본 단의 주제인 일안견(一眼見)과 이안견(二眼見)의 문제를 비롯하여, 근과 경의 접촉[至] 불접촉 및 양적인 관계, 극미의 문제, 6식과 그 소의의 시간적 관계, 근이 소의가 되는 이유와 그에 따른 6식의 명칭, 그리고 근·경·식의 3계(界) 9지(地) 상에서의 관계 등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96) 왜 이 같은 논의가 필요한 것인가? 두 눈 가운데 한 눈을 막거나, 혹은 하나의 눈이 손상되었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다른 한 눈의 '견'의 공능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하나의 눈으로도 역시 능히 색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두 눈이 손상되지 않아 함께 뜨게 되면, 두 개의 안근이 동시에 색을 보게 되는데, '하나의 눈이 색을 본다'고 하는 뜻은 쉽게 이해될 수 있지만, '두 눈이 함께 본다'고 하는 사실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분별 해석하는 것이다.(『현종론』 권제4, 한글대장경200, p.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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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 두 눈[二眼]으로 함께 볼 경우
  색을 보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或二眼俱時 見色分明故
  
  논하여 말하겠다. 아비달마(阿毘達磨)의 여러 위대한 논사(論師)들은 모두 '혹 어떤 때에는 두 눈이 함께 본다'고 말하고 있으니,97) 두 눈을 뜰 때는 색을 보는 것이 분명하지만 한 눈만을 뜰 때는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한쪽 눈을 뜨고 한쪽 눈에 뭔가를 접촉시킬 때에는 바로 현전에 두 개의 달 등을 보게 되지만, 한쪽 눈을 막고 한쪽 눈에 뭔가를 접촉시키면 그러한 일도 없다.98) 그렇기 때문에 혹 어떤 때에는 두 눈이 함께 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소의가 다르다고 해서 인식이 둘로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니, [심법은] 방처(方處)가 없이 머무르기 때문에 공간적 점유성을 지닌 색[礙色]과는 다른 것이다.99)
  만약 이 종(宗, 유부종)에서 안근이 보고, 이근이 들으며, 내지는 의근이 요별한다고 설하였다면, 근이 바로 그 같은 소취(所取)의 경계를 취할 때 직접 접촉해야 하는 것[至]인가, 직접 접촉하지 않아도 되는 것[不至]인가?
  
97) 『발지론』 권제1(한글대장경176, p. 10), "한 눈을 감고 색을 보면 부정식(不淨識 : 명료하지 않은 인식)이 일어나며 두 눈을 뜨고 볼 때 정식(淨識 : 명료한 인식)이 일어나기 때문에 두 개의 눈이 색을 본다." 이에 따라 『대비바사론』 (권제13초)을 비롯한 모든 유부 아비달마에서는 이 같은 사실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아비달마 제(諸) 대논사가 모두 말하고 있다고 설하는 것이다.
98) 양쪽 눈을 뜨고 한쪽의 눈등에 손가락을 갖다대어 반쯤 뜨게되면 하나의 달이 둘로 보이기도 하지만, 만약 한쪽을 막고 그렇게 할 경우 두 개의 달도 보이지 않는다는 뜻.
99) 즉 안식의 소의가 두 가지라면, 능의인 안식도 반분되어 역시 두 가지가 되어야 하고, 그럴 경우 동일찰나에 두 가지 인식이 동시에 생겨나야 하는 모순을 범하게 된다. 그러나 그 같은 일은 있을 수 없으니, 식은 색처럼 방처(方處, 부피)를 갖는 것이 아니기에 분할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비바사론』 권제13(대정장27, p. 61하)에 의하면 두 개의 눈은 비록 서로 떨어져 있어 동시에 작용하지 않고, 작용 역시 서로 다르지만 그 작용이 빠르게 전이하기 때문에 보는 근거는 달라도 하나의 인식을 일으키는 것으로, 마치 몸의 두 팔이 서로 떨어져 있어도 어떤 사물과 접촉할 때 동시에 감촉하여 하나의 신식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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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송으로 말하겠다.
  
  안근·이근·의근과 그 대상은
  접촉하지 않으며, 나머지 세 가지는 이 반대이다.
  眼耳意根境 不至三相違
  
  논하여 말하겠다. 안근과 이근과 의근은 직접 접촉하지 않은, 다시 말해 그것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는 대상[非至境]을 취한다. 즉 안근은 능히 먼 곳의 온갖 색은 볼 수 있어도 눈 속에 넣은 약 등은 능히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근 역시 먼 곳의 소리나 음향은 능히 들을 수 있어도 이근을 핍박하는 것은 능히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안근과 이근이 오로지 직접 접촉한 대상[至境]만을 취한다면 선정을 닦는 자는 응당 마땅히 천안(天眼)과 천이(天耳)의 근을 낳지 못하게 될 것이니, 비근(鼻根) 등의 경우와 같다.100)
  만약 안근이 직접 접촉하지 않은 색만을 능히 볼 수 있다면, 어째서 멀리 떨어져 있거나 장애를 갖는[有障, 감추어진] 등의 온갖 색을 능히 널리 볼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어찌하여 자석은 직접 접촉하지 않은 철(鐵)을 끌어당기는 것이면서도 직접 접촉하지 않은 일체의 철을 끌어당기지 않는 것인가?101) 또한 직접 접촉한 대상만을 본다고 주장할지라도 역시 마찬가지로 이러한 힐난이 적용될 것이니, 어떠한 이유에서 일체의 안약이나 눈에 약을 넣는 산가지[籌, 솔] 등 눈과 직접 접촉한 온갖 색을 두루 보지 못하는 것인가? 또한 비근(鼻根) 등은 능히 직접 접촉한 대상을 취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근과 구유(俱有)하는 일체의 향 등을 능히 취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안근이
  
100) 이는 승론(勝論, Vai e ika)학파의 지경설(至境說)을 논파한 것이다. 즉 승론에서는 안근은 화(火)를 본질로 하여 멀리 빛을 펼쳐 대상에 이르고, 이근의 경우 소리가 공중을 날아와 귀에 들어온다고 주장하였는데, 그럴 경우 수정자(修定者)가 천안·천이를 수생(修生)하더라도 천계의 그러한 경계는 너무나 멀고 피차의 성질이 다르기 때문에 취할 수 없다는 뜻.
101) 이는 논주 세친의 답이다. 즉 자석은 직접 접촉하지 않은 철을 끌어당기지만 모든 철을 끌어당기지 않는 것처럼 안근 등도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모든 대상을 취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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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록 직접 접촉하지 않은 대상을 볼지라도 그러한 일체의 대상을 보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이근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의근의 경우, 무색근(無色根)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공간적인 방처(方處)를 갖지 않는 근이기 때문에 능히 직접 접촉한 대상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주장하기를 "이근은 직접 접촉한 대상과 직접 접촉하지 않은 대상 두 가지 모두를 취하니, 자신의 귓속에서 나는 소리(이를테면 耳鳴)도 역시 능히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그 밖의 비(鼻) 등의 세 가지 유색근(有色根, 비근·설근·신근)은 앞의 것과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오로지 직접 접촉한 대상만을 취한다.
  어떻게 비근이 오로지 직접 접촉한 향만을 취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인가?
  숨을 멈출 때 냄새를 맡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일러 '직접 접촉하는 것[至]'이라고 일컬은 것인가?
  이를테면 무간(無間)이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102)
  그렇다면 또한 제 극미(極微)는 상호간에 접촉[相觸]한다고 해야할 것인가, 접촉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인가?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의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서로 접촉하지 않는다고 설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만약 제 극미가 전체적[遍體]으로 상호 접촉하는 것이라면, 실유[實物]의 극미 자체가 서로 뒤섞이고 마는 허물이 있게 된다. 또한 만약 부분적으로 접촉하는 것이라면, 극미가 부분을 갖는다는 오류를 낳게 된다. 그러나 제 극미는 세분할 수 없는 것이다.103)
  
102) 무간(無間, nirantaratva)은 근과 경 사이에 어떠한 간격도 없이 절대적으로 근접한다는 뜻으로, 그것이 바로 '직접 접촉한다[至]'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럴 경우 이러한 유색근을 조성하는 원자, 즉 극미 상호간의 접촉 불접촉의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할 것인데, 이하 이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103) 결론적으로 말해 정통유부인 카슈미르의 비바사사(毘婆沙師)들은 극미의 직접적인 상호접촉을 부정한다. 왜냐 하면 만약 극미가 결합한다고 할 때, 그것은 부분적 결합 아니면 전체적 결합이다. 하나의 극미는 통상 사방상하 6개의 극미에 둘러쌓여 최초의 결합을 시작하는데, 그럴 경우 극미는 6부분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극미라고 하는 것은 더 이상 부분을 갖지 않는 것[無方分]이기 때문에, 그 같은 부분적 결합은 불가능하다. 반대로 극미는 너무나 미세하여 공간을 점유하지 않는다고 하여 7개의 극미가 동일공간에서 전체적[遍體]으로 접촉한다면 결국 구체적인 물질도 하나의 극미 크기 밖에 되지 않을 뿐더러 각 극미의 본질 자체가 뒤섞여 버리고 만다. 따라서 유부에서는 제 극미가 절대적으로 근접하여 그 사이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無間]을 접촉이라 이름하고, 그 실재성을 인정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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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제 극미는 상호간에 접촉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극미와 극미 사이에는 간격이 있어야 할 것인데] 어떠한 까닭에서 서로 부딪쳐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다만 극미의 무간에서 생겨나는 것일 뿐이다. 그렇지 않고 만약 상호간에 접촉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돌을 치거나 손뼉을 칠 때 극미 자체는 응당 마땅히 서로 뒤섞여[相糅] 버리고 말 것이다.104)
  극미는 상호간에 접촉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취색(聚色)이 서로 부딪칠 때 어떻게 흩어지지 않는 것인가?
  풍계(風界)가 섭지(攝持)하기 때문에 흩어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105) 그러나 혹 어떤 경우 풍계는 능히 허물고 흩어지게[壞散] 하는 일이 있으니, 이를테면 겁(劫)이 허물어질 때에 그러하다. 그러나 혹 어떤 경우 풍계는 능히 이루고 포섭하게[成攝] 하는 일이 있으니, 이를테면 겁이 이루어지는 때에 그러하다.106)
  [제 극미가 상호간에 접촉하지 않는 것이라면] 어떻게 '세 가지 근(비·설·신 근)은 [대상과 어떠한 간격도 없는] 무간이 생겨남으로 인해 직접 접촉하는 대상[至境]을 취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즉 무간으로 말미암아 직접 접촉하는 대상을 취한다고 일컬은 것이니, 말
  
104) 제 극미가 절대적으로 근접하여 어떠한 간격도 없게 될 때 소리가 나게 된다. 그러나 만약 제 극미가 혼연의 일체가 되어버려[遍體觸] 그 사이에 간격이 없다면 도리어 어떠한 소리도 나지 않게 될 것이다는 뜻.
105) 여기서는 제 극미간의 견인력을 풍계에서 구하고 있다. 그런데 앞(권제1)에서 풍계는 운동의 성질[動相]과 물체를 동요하게 하는 작용[長用]을 갖고있다고 하였고, 물체를 인섭(引攝)하여 흩어지지 못하게 하는 작용[攝用] 내지 물체를 능히 보지 저항하게 하는 작용[持用]은 각각 수대(水大)와 지대(地大)의 것이었다.
106) 겁이 허물어질 때는 이 세계가 파괴되는 괴겁(壞劫)의 시기를 말하고, 겁이 이루어지는 때는 이 세계가 성립하는 성겁(成劫)의 시기를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분별세품」 권제12(p.553 이하)에서 상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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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자면 그 중간에 어떠한 조그마한 조각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화합색(和合色)은 부분을 지니는 것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서로 접촉한다 하여도 여기에는 아무런 허물이 없다.107) 이러한 이치를 인정되기 때문에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의 문의(文意)는 잘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논에서 물어 말하기를, "온갖 '이러한 접촉된 존재[是觸物, 곧 화합색]'는 바로 '이러한 접촉된 것[是觸]'을 원인으로 삼았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해야 할 것인가, '접촉되지 않은 것[非觸, 곧 극미]'을 원인으로 삼았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해야 할 것인가?"고 하였다.108) 그리고 온갖 '접촉되지 않은 존재[非觸物]'에 대해 물어보는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109) 그 논에서는 이러한 이치에 대해 일정하게 답하고 있지 않다. 즉 어떤 때에는 '이러한 접촉된 것'을 원인으로 삼아 '접촉되지 않은 것'을 낳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화합된 물건이 이산(離散)할 때가 그러하다.110) 또 어떤 때에는 '접촉되지 않은 것'을 원인으로 삼아 '이러한 접촉된 것'을 낳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이산되었던 것이 바로 화합할 때가 그러하다. 또 어떤 때에는 '이러한 접촉된 것'을 원인으로 삼아 '이러한 접촉된 것'을 낳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화합된 물건이 다시 화합할 때가 그러하다. 또 어떤 때에는 '접촉되지 않은 것'을 원인으로 삼아 '접촉되지 않은 것'을 낳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향유진(向遊塵)이 동류로 상속하는 때가 그러하다.111)
  
107) 이는 유부 이사(異師)의 주장이다. 여기서 화합색은 극미소성(極微所成)의 색. 즉 제 극미 상호간에는 접촉하지 않지만 그러한 극미의 집적에 의해 조성된 분할할 수 있는 현상의 구체적인 색은 상호 접촉한다는 설. 이 같은 견해는 바사(婆沙)에는 보이지 않으나,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 (대정장31, p. 76상)에서는 유부정설로 설하고 있다. "迦濕彌羅國毘婆沙師言 ; 非諸極微有相合義, 無方分故 ……但諸聚色有相合理, 有方分故."
108) 『대비바사론』 권제132 (대정장27, p. 184상, 한글대장경123, p. 145).
109) 온갖 '접촉되지 않은 존재[非觸物, 극미]'는 '접촉되지 않은 것'을 원인으로 삼아 생겨났다고 해야 할 것인가, 바로 '이러한 접촉된 것[是觸, 화합물]'을 원인으로 삼아 생겨났다고 해야 할 것인가?
110) 이하 상기 물음에 대해 4구분별로 답하고 있는 바사(婆沙)의 문장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이는 제1구로서, 화합물(이러한 접촉된 것)이 흩어져 극미(접촉되지 않은 것)로 환원될 때가 '이러한 접촉된 것'을 원인으로 '접촉되지 않은 것'이 생겨나는 경우이다.
111) 향유진(또는 隙遊塵)은 1극미의 7의 7승으로, 이를테면 문틈[隙]으로 들어온 광선에 비쳐 겨우 눈으로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티끌을 말하는데(본론 권제12, p.550 주5 참조), 이러한 미세한 색취[細聚]는 다시 그러한 미세한 티끌을 낳기도 하고, 혹은 더욱더 미세한 것을 낳기도 하여 전후 차별은 있을지라도 다 같이 미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접촉되지 않은 것을 원인으로 하여 접촉되지 않을 것을 낳는 것으로 분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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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존자(尊者) 세우(世友)는 설하기를, "제 극미가 상호 접촉하게 되면, 이는 즉 응당 마땅히 후념(後念, 후찰나)에 이르도록 지속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하였다.112)
  그러나 대덕(大德)은 설하기를, "일체의 극미는 실로 상호 접촉하지 못하며, 단지 그 사이가 무간(無間)이기 때문에 일시 '접촉'이라는 명칭을 설정하게 된 것이다"고 하였다.113) 이러한 대덕의 뜻은 참으로 애락(愛樂)할 만한 것이라 할 수 있으니, 만약 이와 다르다고 할 것 같으면 이러한 제 극미는 응당 마땅히 간극(間隙, 틈)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며, 중간이 이미 비었다면 무엇이 그러한 법(5근과 5경)의 작용[行]을 장애하길래 유대(有對)로 인정하는 것인가?114) 또한 극미를 떠나 화합색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화합색이
  
112) 세우(Vasumitra), 화수밀(和須蜜) 또는 바소밀다라(婆蘇蜜多羅)로도 음사됨. 십 수명의 세우가 전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설일체유부의 교의를 집대성한 바사(婆沙)의 4대평자 중 일인. 여기서의 그의 주장은, 모든 극미는 순간적으로 출현하여 소멸(찰나생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극미가 출현하여 접촉하였다면 그것은 이미 두 찰나에 걸친 것으로, 극미의 접촉은 시간적으로도 불가능하다는 뜻.
113) 대덕(Bhadanta). 이는 위대한 덕행이 있는 사람이란 뜻으로, 특정의 개인에 대한 존칭의 보통명사인지 또는 고유명사인지는 불명. 『대비바사론』에는 대덕의 설이 지금 여기서의 설(권제132, 한글대장경123, p. 145)을 포함하여 116회에 걸쳐 언급되고 있는데, 목촌태현(木村泰賢)은 그를 각천(覺天, Buddhadeva)으로, 궁본정존(宮本正尊)은 법구(法救, Dharmatr ta)로 보고 있다. 지금 여기서의 설은 접촉이란 다만 그 중간에 일 극미도 들어갈 여지도 없는 절대적 근접[無間]을 개념적으로 가설(假說)한 것일 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
114) 이는 논주 세친의 평석이다. 즉 그는 '접촉'이란 다만 개념상의 설정일 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대덕의 설을 적극 수용하여 실재론에 근거한 앞의 제설을 비판하고 있다. 즉 유부에 의하는 한 제극미는 서로 접촉하지 않지만, 화합색의 상호접촉을 인정하게 되면 결국 그것을 조성한 극미의 상호 접촉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후술) 그리고 만약 제 극미가 서로 접촉하지 않는다면 그것들 사이에는 마땅히 간격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며, 극미들 사이에 간격이 있어 가운데가 비었다면 5근·5경의 유색근은 공간을 점유하여 타(他)를 장애하며, 따라서 불가침투성(sapratigh tva, 礙性 혹은 有對)라고 하는 유부종의에 위배되고 만다. 나아가 제 극미의 접촉은 절대적 근접[無間]으로, 그것들 사이에 다른 어떤 하나의 극미도 들어갈 수 없는 극점(極點)이라 하여 불가침투성을 고수한다면 극미보다 작은 극점을 설정함으로 해서 극미는 더 이상 극미가 아닌 것이다. 이 같은 논의는 바로 유부의 '촉'의 실재성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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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호 접촉한다고 하는 즉, 그것은 바로 [화합색 중의] 극미가 접촉하는 것이니, 변애(變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또한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115)
  또한 극미가 만약 방분(方分, 부피)을 지닌다고 인정할 것 같으면, 접촉하거나 접촉하지 않거나 간에 그것들은 모두 마땅히 방분을 갖는 것이며, 만약 방분을 지니지 않는다고 한다면 설혹 상호 접촉을 인정하더라도 그러한 과실이 없는 것이다.116)
  다시 또한 안 등의 근은 자신의 대상에 대해 오로지 같은 양[等量]만을 취하여, 이를테면 횟불을 빨리 회전시키면 마치 불바퀴[旋火輪]처럼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너무나 빨리 전전(轉傳)하기 때문에 큰 산 따위를 보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대상에 대해 같은 양과 같지 않은 양[不等量]을 모두 취하는 것인가?117)
  게송으로 말하겠다.
  
115) 화합색이 변애로 정의된다면 그 조성원자인 극미도 변애하는 것으로 정의되어야 하듯이, 화합색의 상촉(相觸)이 인정된다면 그것을 조성한 극미 또한 상촉하여야 한다는 난(難).
116) 이는 이상의 접촉 불접촉에 관한 논주 세친의 총평이다. 유부의 경우 극미 무방분(無方分)설을 취하지만 경량부에서는 유방분설을 취한다.(『유부아비달마와 경량부철학의 연구』, p. 160-168 참조) 그럴 경우 유방분이라면 더 이상 분석할 수 없는 극소의 색인 극미에도 방분이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일 방분이 서로 접촉하면 다른 방분은 접촉하지 않으므로 극미가 서로 접촉한다고 하든 하지 않는다고 하든 문제될 것이 없다. 즉 이미 유방분이라고 하였으므로 접촉함으로써 극미가 분석될 수 있다는 논란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극미가 무방분이라고 주장할지라도 문제되지 않으니, 원래 방분이 없다고 하는 극미가 서로 접촉한다(즉 無間觸)고 설해도 거기에 방분을 갖는다는 의미는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요컨대 논주 세친의 뜻은 근·경 화합이라는 인식의 문제에 있어 접촉 불접촉의 논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117) 본 단의 주제는 인식[見]의 과정상에서 근과 경의 양적관계에 대한 것으로서, 예컨대 눈이 큰 산을 볼 경우, 눈의 극미와 같은 크기[等量]의 대상을 각각으로 취하여 빠르게 전이함으로서 전체로서의 큰 산을 보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눈에 자재하는 작용이 있어 대상의 크기에 관계없이 취하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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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비근 등의 세 가지는
  오로지 같은 양[等量]의 대상만을 취한다.
  應知鼻等三 唯取等量境
  
  논하여 말하겠다. 앞에서 직접 접촉하는 대상[至境]을 취하는 것은 비(鼻) 등의 세 가지 근이라고 설한 바 있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것들은 또한 오로지 능히 같은 양의 대상만을 취한다. 즉 [비·설·신] 근의 미(微, a u)의 양과 마찬가지로 [향·미·촉]경의 미의 양도 역시 그러하니, 서로 대칭적으로 화합하여 '비' 등의 식을 낳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근과 이근은 일정하지 않다. 즉 안근은 색에 대해 어떤 때에는 보다 적은 것을 취하기도 하니, 이를테면 털끝을 보는 경우가 그러하다. 또 어떤 때에는 보다 큰 것을 취하기도 하니, 이를테면 잠시 동안 눈을 떠 큰 산 등을 보는 경우가 그러하다. 또한 어떤 때에는 같은 것을 취하기도 하니, 이를테면 포도나 대추 등을 보는 경우가 그러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근도 모기나 구름 등이 일으키는 여러 가지 작거나 큰 음성(音聲)을 들으니,118) 그것이 응하는 바에 따라 작거나 큰 양의 소리를 취하는 것이다.
  의근의 경우은 질애(質礙 : 즉 공간적 점유성)를 갖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취하는 대상의 형태와 양의 차별을 분별할 수 없다.
  
  안(眼) 등 제근의 극미는 어떻게 안포(安布 : 분포 배열의 뜻)되어 차별되고 있는 것인가?
  안근의 극미는 눈동자[眼星] 위에서 횡으로 배열되어 머물고 있으니, 마치 향직화(香花 : 미나리과 식물로, 꽃이 한방면으로 향하고 있음)와도 같다. 또한 맑고 투명한 막에 덮여 있어 분산되는 일이 없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겹겹이 쌓인 둥근 알[丸]과 같은 모양으로 머물며, 그 자체 맑고 투명하기 때문에 마치 파지가(頗迦 : 수정)처럼 서로 장애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118) 구름이 일으키는 큰 소리란 천둥소리를 말함. 범문에는 '구름의 소리(megha abda)'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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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의 극미는 귓구멍 안에 있으면서 나선형으로 머무니, 마치 돌돌 말린 자작나무 껍질[樺皮]과도 같다.
  비근의 극미는 콧줄기 안에서 뒤쪽[背]을 위로 하고 안쪽[面]을 아래로 하고 있으니, 마치 손톱을 쌍으로 한 것과 같다. 그리고 이상의 앞의 세 가지 근은 횡으로 행도(行度)를 짓고 있기 때문에(배열되어 있기 때문에) 높고 낮음이 없으니, 마치 화만(花鬘)을 쓴 것과 같다.
  설근의 극미는 혀 위에 퍼져 있으며, 그 형태는 반달과도 같다. 그런데 전설(傳說)에 따르면, "혀 중앙에 털끝의 양 만한 곳이 [따로] 있어 설근의 극미가 혀 전체에 두루 퍼져 있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119)
  신근의 극미는 몸의 부분부분에 두루 머물며, 신체형태[身形]의 양과 같다. 그리고 여근(女根)의 극미는 그 형태가 장구와 같고, 남근(男根)의 극미는 그 형태가 골무와 같다.
  또한 안근의 극미는 어떤 때에는 모두가 다 동분이며, 어떤 때에는 모두가 다 피동분이며, 또 어떤 때에는 일부는 피동분이고 그 나머지는 바로 동분이다. 내지 설근의 극미도 역시 그러하다. 신근의 극미로서 모두가 다 동분이 되는 일은 결정코 존재하지 않는다. 내지 극열날락가(極熱捺落迦 : 날락가는 지옥을 말함) 중에서 맹렬한 불길이 몸을 휘감는다 할지라도, 오히려 무량한 신근의 극미가 존재하고 있으니, 그것은 바로 피동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설(傳說)에 따르면, '만약 신근의 극미가 두루 신식을 낳는다면, [그곳에 떨어진] 몸은 응당 마땅히 산괴(散壞)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고 하였다.120)
  
119) '전설'은 곧 논주 세친의 불신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보광(普光)의 『구사론기』에 의하면 이는 서방의 고덕(高德)이 전하는 의가(醫家)의 설로서, 혀 가운데 설근극미가 없는 지극히 작은 한 지점이 있으니, 그곳이 바로 사혈(死穴,즉 末摩, marman)이라는 것이다.
120) 즉 유부에 의하면 안(眼) 등 제근의 극미는 동시작용[同分]하지만, 신근의 경우 신근과 그 대상이 되는 각각의 극미에 간극(間隙)이 있어 동시에 신식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에 동시작용하지 않는다. 예컨대 눈의 극미는 하나만 작용하여도 전체의 극미가 동시에 작용하지만, 신체의 경우 손끝에 느낌이 있다해서 발끝에도 동일한 느낌이 있는 것은 아니며, 또한 신체 어느 한 극미가 손상되어도 전체의 극미가 손상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경량부는 신근의 극미 역시 동시에 작용한다고 하였다[身根遍發識說]. 그래서 논주 세친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극열지옥에서 신근 전체가 동분의 상태에 놓이게 될 것이고, 결국 신체는 전체로서의 통일을 유지하지 못하여 허물어져 버리고 말 것이다'는 비바사사의 논파를 빌려 논설하였지만, 그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전설'이라 한 것이다. 이는 결국 앞에서 설한 극미배열[安布差別]에 관한 문제로서, '처(處)'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경량부로서는 제극미가 실제적으로 접촉 배열되든, 떨어져 배열되든 무방한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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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신근과 촉경은 각각 하나의 극미를 소의와 소연으로 삼아 능히 신식을 낳는 일은 없다. 왜냐 하면 5식은 결정적으로 다수의 극미를 적집하여야 비로소 그것을 소의와 소연의 존재로 성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치에 따라 역시 또한 극미를 설하여 무견(無見)을 본질로 한다고 일컬은 것이니, 볼 수 없는 것[不可見]이기 때문이다.121)
  앞에서 설한 것처럼 식(識)에는 여섯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안식계 내지 의식계가 바로 그것이다. 이 중에서 5식은 오로지 현재만을 소연(所緣)으로 삼고, 의식은 삼세과 삼세 아닌 것[非世 : 즉 무위법을 말함]을 모두 소연으로 삼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여러 식의 소의(所依)도 역시 그러하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어째서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뒤의 것(즉 제6의식)의 소의는 오로지 과거(즉 의근)뿐이며
  5식의 소의는 혹은 두 가지 모두[俱]이다.
  後依唯過去 五識依或俱
  
  논하여 말하겠다. 의식은 무간(無間)에 멸한 의근을 소의로 삼는다.122) 그러나 안(眼) 등 5식의 소의는 혹은 두 가지 모두이다. 여기서 '혹은'이라고 하는 말은, 이것도 역시 과거[의 의근]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안근은 이러한 안식과 구생(俱生)하는 소의이며, 이와 마찬가지로 내
  
121) 즉 1극미는 5식의 소의·연이 될 수 없고, 반드시 다수의 극미가 취집하여야 비로소 볼 수 있는 것[可見]이 된다. 다만 1극미는 혜안(慧眼)에 의해 알려질 뿐이다.
122) 6식신이 무간에 멸한 것이 의근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과거의 6식이 의근이기 때문에 의식은 오로지 과거 의근을 소의로 삼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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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 신근은 바로 이러한 신식과 구생하는 소의이니, 그것들은 다 같이 현재세(現在世)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간에 멸한 의근은 바로 과거의 소의이다. 이렇듯 5식신의 소의에는 각기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안 등의 다섯 가지 근은 바로 바로 개별적인 소의[別所依]이며, 의근은 5식 모두에 공통하는 소의[通所依]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이 설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바로 안식의 소의성이 되는 것이면, 이것은 바로 안식의 등무간연(等無間緣)이 되는 것인가? 만약 바로 안식의 등무간연이 되는 것이면, 다시 이것은 바로 안식의 소의성이 되는 것인가?
  마땅히 4구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제1구는 말하자면 구생(俱生)의 안근이며, 제2구는 말하자면 무간에 멸한 심소의 법계이며, 제3구는 말하자면 과거의 의근이며, 제4구는 말하자면 앞에서 언급한 법을 제외한 것이다.123) 내지 신식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니, 4구 각각에다 마땅히 자신의 근을 설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의식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땅히 앞의 구(句)에 따라 답해야 할 것이다. 즉 이러한 의식의 소의성이 되는 것은 결정적으로 이러한 의식의 등무간연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의 등무간연이 되는 것이면서도 의식의 소의성이 되지 않는 것이 있으니, 이를테면 무간에 멸한 심소의 법계이다.
  식(識)은 동시에 두 가지의 연(緣 : 根과 境)에 의탁하여 생기하는 것임에도 어떠한 이유에서 근만이 소의(所依)라는 명칭을 얻게 되고, 경은 그렇지 않은 것인가?
  
123) 여기서는 4구의 내용이 생략되어 있다. 제1구는 안식의 소의성이 되면서 등무간연이 되지 않는 것. 구생의 안근은 안식의 소의성이지만 그 자체 심심소가 아니기 때문에 등무간연이 되지 않는다. 제2구는 안식의 등무간연이 되면서 소의성이 되지 않는 것. 즉 과거로 멸해버린 심소는 다음 찰나의 그것에 등무간연이 되지만 소의성은 되지 않는다. 제3구는 안식의 소의성이 되면서 동시에 등무간연도 되는 것. 과거인 의근은 안식의 소의성이 되면서 다음 찰나의 의식의 등무간연이 된다. 제4구는 안식의 소의성도 되지 않으면서 등무간연도 되지 않는 것. 무위나 색 등의 5경, 불상응행법은 소의성이 아니며(다만 소연성일 뿐), 또한 심법도 아니기 때문에 등무간연도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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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송으로 말하겠다.
  
  근(根)의 전변에 따라 식(識)도 변이하니
  그래서 안(眼) 등의 근을 소의라고 이름한 것이다.
  隨根變識異 故眼等名依
  
  논하여 말하겠다. [본송에서] '안(眼) 등'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안 등의 6계를 말하는 것으로, 안 등의 근에 전변(轉變)이 있기 때문에 온갖 식도 변이한다. 곧 근이 증장(增長) 감손(減損)함에 따라 식에 밝고 어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색 등이 변화하더라도 식이 달라지게 되는 것은 아니니, 식은 바로 근에 따르지 경에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의라고 하는 명칭은 오로지 안 등의 근에 해당하는 것이지 다른 것(즉 법)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알려지는 것[所識]은 바로 색 따위임에도 어떠한 이유에서 안식(眼識) 내지 의식(意識)이라 이름하고, 색식(色識) 내지 법식(法識)이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그것과 아울러 불공인(不共因)이기 때문에,
  근(根)에 따라 식(識)을 설하게 된 것이다.
  彼及不共因 故隨根說識
  
  논하여 말하겠다. [본송에서] '그것'이라 함은, 이를테면 앞에서 설한 '안 등을 소의라고 이름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즉 근은 바로 소의이기 때문에 근에 따라 식의 명칭을 설한 것이다. '아울러 불공(不共)'이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안근은 오로지 자신의 안식에만 소의가 된다는 것(즉 不共法)이다. 그러나 색은 다른 이의 안식에도 역시 통하고, 아울러 자신과 다른 이의 의식에도 모두 수용되는 것(즉 共法)으로, 내지 신(身)과 촉(觸)의 관계도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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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소의는 수승(殊勝)하고 아울러 불공인(不共因)이 되기 때문에 식의 명칭은 근에 따르는 것이지 경에 따르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마치 북소리나 보리의 싹 따위로 이름하는 것과 같다.124)
  소의신이 머무는 바에 따라 안근이 색을 본다고 할 때, 소의신과 안근과 색경과 안식의 지(地)는 같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인가?125)
  마땅히 이러한 네 가지는 어떤 경우에는 다르고, 어떤 경우에는 같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욕계에 태어나, 만약 자지(自地)의 안근으로써 자지의 색을 보는 경우, 네 가지는 모두 자지에 속한다. 만약 초정려의 안근으로써 욕계의 색을 보는 경우, 소의신과 색은 욕계에 속하지만 안근과 안식은 초정려에 속한다. 그러나 초정려의 색을 보는 경우, 소의신은 욕계에 속하지만 그 밖의 세 가지는 초정려에 속한다. 만약 제2정려의 안근으로써 욕계의 색을 보는 경우, 소의신과 색은 욕계에 속하지만 안근은 제2정려에 속하고, 안식은 초정려에 속한다. 그러나 초정려의 색을 보는 경우, 소의신은 욕계에 속하지만, 안근은 제2정려에 속하고, 색과 안식은 초정려에 속한다. 또한 제2정려의 색을 보는 경우, 소의신은 욕계에 속하고, 안근과 색은 제2정려에 속하며, 안식은 초정려에 속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약 제3, 제4 정려지의 안근으로써 하지(下地)의 색이나, 혹은 자지의 색을 보는 경우에 대해서도 마
  
124) 북소리는 손과 북이 합하여 생겨나지만 북은 소리의 뛰어난 소의이고 불공인(不共因)이기 때문에 '손소리'가 아닌 북소리라고 이름하는 것이며, 보리의 싹은 보리씨앗과 땅 수분 온도 등의 조건에 의해 생겨나지만 그 주요원인에 따라 보리싹이라고 이름한다는 뜻.
125) 이 단에서는 인식의 문제와 관련하여 3계(界)·9지(地) 상에서의 소의신·근·경·식 네 가지의 관계를 분별하고 있다. 즉 유부에 의하면 욕계에는 18계 전부가 있지만, 색계 초선에 이르면 향·미와 비식·설식이 없으며, 제2선 이상 제4선에서는 앞의 네 가지 이외 안·이·신 식이 없으며, 다시 무색계에 이르면 앞의 15계가 부재하고 오로지 의·법·의식의 3계 만이 남게 된다. 그런데 하지(下地)에 있더라도 선정지(智)나 천안·천이통에 의해 상지를 인식할 수 있으며, 상지에서도 하지의 인식이 가능하다. 그럴 때 바로 이 같은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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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히 참답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초정려에 태어나, 만약 자지의 안근으로써 자지의 색을 보는 경우에도 네 가지는 모두 같은 지에 속한다. 욕계의 색을 보는 경우에는 세 가지는 초정려에 속하지만 색은 욕계에 속한다. 그러나 만약 제2정려의 안근으로써 초정려의 색을 보는 경우, 세 가지는 초정려에 속하지만 안근은 제2정려에 속한다. 욕계의 색을 보는 경우, 소의신과 안식은 초정려에, 색은 욕계에 속하지만, 안근은 제2정려에 속한다. 또한 제2정려의 색을 보는 경우, 소의신과 안식은 초정려에, 안근과 색은 제2정려에 속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약 제3, 제4 정려지의 안근으로써 자지의 색이나 혹은 하지(下地) 상지(上地)의 색을 보는 경우에 대해서도 마땅히 참답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제2, 제3정려에 태어나 자지(自地)나 타지(他地)의 눈으로써 자·타지의 색을 보는 경우에 있어서도 마땅히 참답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안근 등을 제외한] 그 밖의 계(界)에 대해서도 역시 마땅히 이와 같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마땅히 이러한 제법의 결정적인 상(相)에 대해 간략히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안근은 소의신보다 하지(下地)가 아니며
  색과 안식은 안근보다 상지(上地)가 아니다.
  색은 안식의 일체 지와 통하며
  소의신에 대한 두 가지(색·안식)도 역시 그러하다.
  眼不下於身 色識非上眼
  色於識一切 二於身亦然
  
  안근과 마찬가지로 이근도 역시 그러하며
  다음의 세 가지는 모두 자지(自地)이다.
  그리고 신식은 자지이거나 하지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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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근은 결정되어 있지 않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如眼耳亦然 次三皆自地
  身識自下地 意不定應知
  
  논하여 말하겠다. 소의신과 안근과 색의 세 가지는 모두 다섯 지(地)와 통하니, 이를테면 그것들은 욕계와 4정려 중에 존재한다. 그리고 안식은 오로지 욕계와 초정려에만 존재한다. 여기서 안근을 소의신이 생겨난 지(地)와 비교해 본다면, 혹 어떤 경우 등지(等地)이기도 하고,126) 혹 어떤 경우 상지(上地)이기도 하지만,127) 소의신보다 하지에는 끝내 존재하지 않는다. 색과 안식을 안근과 비교해 본다면, 등지나 하지에는 존재하지만 그 상지에는 존재하지 않는다.128) 즉 하지의 안근은 상지의 색을 능히 볼 수 없기 때문이며, 상지의 식은 하지의 안근을 소의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129) 색을 안식과 비교해 보면, 등지·상지·하지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할 수 있다.130) 그리고 색과 안식을 소의신과 비교해 보면, 색을 안식에 비교하는 경우와 같다.
  이계(耳界)에 대해 널리 설하자면 이 또한 안계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이근은 소의신보다 하지에 존재하지 않으며, 성(聲)과 이식은 이근보다 상지에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성은 이식에 대해 일체 즉 상·등·하지 어느 곳에도 존재할 수 있으며, 두 가지(즉 성과 이식)를 소의
  
126) 소의신은 욕계에 있으면서 욕계의 눈으로써 욕계의 색을 보는 경우.
127) 욕계의 눈으로써 색계의 천안을 얻어 색계의 색을 보는 경우.
128) 색과 안식이 안근과 등지라는 것은, 소의신은 욕계에 있으면서 욕계의 안근으로써 욕계의 색을 보는 경우이며, 하지라는 것은 제2정려의 안근으로써 초선의 색을 보는 경우이다. 이 때 색과 안식은 초정려에 속하고, 안근은 제2정려에 속한다.
129) 하지의 안근은 거친 색[麤色]을 보는데 익숙하여 상지의 미세한 색[細色]에 대해서는 '견(見)'의 공능이 없으며, 또한 하지의 안근은 뛰어난 작용을 갖고 있지도 않다. 그리고 상지는 자신의 수승한 안근을 갖으며, 하지에 대해 자신의 안식을 갖는다. 그러므로 하지의 안근은 상지의 식에 소의가 되지 않는 것이다.(『현종론』 권제4, 한글대장경200, p. 97)
130) 등지는 욕계의 안식으로써 욕계의 색을 보는 경우이며, 상지는 제2정려의 천안을 획득하고 초정려의 안식을 빌려 제2정려의 색을 보는 경우(이 때 색은 제2정려에 속하고, 안식은 초정려에 속하기 때문에 색은 식의 상지임)이며, 하지는 초정려의 안식으로써 욕계의 색을 요별하는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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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과 비교하는 경우에도 역시 그러하니, 그것이 대응하는 바에 따라 안근과 마찬가지로 널리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비근과 설근과 신근의 세 가지 경우에는 모두 다 자지(自地)에만 존재한다.131) 그런데 여기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은, 신근과 촉경은 그 지(地)가 필시 동일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신식을 촉과 신근에 비교해 보면, 혹 어떤 경우에는 자지에 존재하고, 어떤 경우에는 하지에 존재한다. 여기서 자지란 말하자면 욕계나 초정려에 태어나는 경우이며, 위의 세 가지 정려에 태어나는 그것을 일러 하지라고 하였다.132)
  그리고 의계(意界)의 네 가지는 일정하지 않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의근은 어떤 때에는 소의신과 의식과 법과 더불어 다 같이 동일한 지(地)에 존재하는 경우도 있으며, 또 어떤 때에는 상지와 하지에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소의신은 오로지 5지(地 : 욕계와 4정려)에만 존재하며, 나머지 세 가지(의근·법·의식)는 일체(무색계를 포함하는 3계 9지)에 존재하니, 등지(等至)에 노닐거나 수생(受生)할 때 각기 그 상응하는 바에 따라 혹 어떤 경우 동일하기도 하고, 혹 어떤 경우 다르기도 하다.133) 이에 대해서는 뒤의 「분별정품(分別定品)」에서 마땅히 널리 분별하는 바와 같다. 지금은 번거로운 말을 피하기 위해 더 이상 분별하지 않을 것으로, 앞뒤에서 거듭 논술하는 것은 소용도 적을 뿐더러 공만 많이 들기 때문이다.
  방론(傍論)을 두루 다 마쳤으니, 이제 마땅히 정론(正論)을 분별해야 할 것이다.
  
131) 왜냐 하면 대개 '분(分 : 작용)'이 동일하기 때문이며, 향·미에 대한 두 가지의 식(즉 비식과 설식)은 오로지 욕계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며, 비근과 설근은 오로지 직접 접촉한 대상[至境]만을 취하기 때문이다.(『현종론』 권제4,한글대장경200, p. 98)
132) 제2정려 이상에서 태어나 초정려의 식신을 빌려 상지의 촉경을 느낄 경우, 식신은 신근과 촉경보다 하지임.
133) 소의신이 초선에 태어나 초정려에 들어 초선의 법경을 관할 때는 네 가지는 모두 동일한 지에 존재한다. 그러나 소의신이 욕계에 있으면서 초선에 들어 욕계의 법경을 관할 때, 제1념(念)은 소의신도 의근도 법경도 욕계에 존재하지만 의식만은 초선에 존재하며, 제2념 이후에는 소의신과 법경은 욕계에, 의근과 의식은 초선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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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18계는 오로지 6식 중의 몇 가지 식에 의해 인식되는 것인가?
  몇 가지가 영원한 것[常]이며, 몇 가지가 무상(無常)한 것인가?
  몇 가지가 근(根)이며, 몇 가지가 비근(非根)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다섯 가지 외계는 두 가지 식(識)에 의해 인식되며
  영원한 것은 법계인 무위이며
  법계의 일부는 바로 근(根)이며
  아울러 내계의 열두 가지도 역시 그러하다.
  五外二所識 常法界無爲
  法一分是根 幷內界十二
  
  논하여 말하겠다. 18계 중의 색(色) 등의 5계는 그 순서에 따라 안(眼) 등의 5식이 각기 하나씩 인식하며, 또한 이것들은 모두 의식에 의해 인식된다. 이처럼 5계는 각기 6식 중의 두 가지 식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사실에 준하여 볼 때, 그 밖의 나머지 13계는 모두 의식에 의해 인식되는 것임을 알 수 있으니, 그것은 5식신의 소연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18계 가운데 어떠한 계도 그 전부가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오로지 법계의 일부인 무위법만이 영원하다. 그리고 이러한 뜻에 준하여 본다면, 무상한 것은 무위법을 제외한 그 밖의 법계와 다른 여타의 [17]계이다.
  또한 경에서는 22근(根)을 설하고 있으니, 이를테면 안근·이근·비근·설근·신근·의근·여근(女根)·남근(男根)·명근(命根)·낙근(樂根)·고근(苦根)·희근(喜根)·우근(憂根)·사근(捨根)·신근(信根)·근근(勤根)·염근(念根)·정근(定根)·혜근(慧根)·미지당지근(未知當知根)·이지근(已知根)·구지근(具知根)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아비달마의 여러 대논사들은 모두 경에서 설하고 있는 6처의 순서를 뛰어넘어 명근 다음에 비로소 의근을 설하고 있으니, 유소연(有所緣)이기 때문이다.134)
  이상에서 설한 22근은 18계 중 내적인 12계(6근과 6식)와 법계의 일부에
  
134) 아비달마의 여러 대논사가 설한 것이란 『발지론』(권제14,한글대장경176, p. 324)과 『대비바사론』(권제142, 한글대장경123, p. 374)을 말하는 것으로, 유부 아비달마에서는 전통적으로 22근을 설정함에 있어 무소연의 색법을 먼저 설하고, 그 후에 의근이나 낙(樂)·희(喜) 등 유소연의 심·심소법을 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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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섭된다. 여기서 법계의 일부란 명(命) 등의 11근과 뒤의 세 가지 중의 일부를 말하니, 이것들은 법계에 포섭되기 때문이다.135) 내적인 12계란, 안 등의 5근은 자신의 명칭과 같은 계에 포섭되고, 의근은 7심계에 모두 포섭되며, 뒤의 세 가지(즉 3무루근을 말함)의 일부는 의계와 의식계에 포섭되는 것이다. 그리고 남근과 여근은 바로 신계(身界)의 일부에 포섭되니, 뒤(본론 권제3)에서 응당 분별하는 바와 같다.
  이상과 같은 뜻에 준하여 본다면, 그 밖의 나머지 색 등의 5계와 법계의 일부는 모두 그 본질이 근이 아니다.
135) 뒤의 세 가지란 미지당지근(未知當知根)·이지근(已知根)·구지근(具知根)의 3무루근으로서, 무루지의 본질이다. 즉 첫 번째는 견도위의 무루지이고, 두 번째는 수도위의 무루지, 세 번째는 소작이판(所作已辦) 즉 무학위의 무루지이다. 그런데 이러한 세 가지 무루근은 의(意)·희(喜)·낙(樂)·사(捨)·신(信) 등의 5근을 본질로 하여, 이 중 의근은 법계에 포섭되지 않기 때문에 '일부'라고 한 것이며, 나아가 뒤에서 그 일부가 의식에 포섭된다고 설하고 있다. 유부 아비달마에서는 이를 다른 여러 근과 함께 22근으로 정리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3, p.111 이하를 참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