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아비달마구사론 제 4 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4.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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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구사론 제 4 권
  존자 세친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
  
2. 분별근품 ②
  여기서 마땅히 사택(思擇)해 보아야 할 것이니, 일체의 유위법은 그 상이 동일하지 않은 것처럼, 생겨나는 것도 역시 각기 다른 것인가? 나아가 제법은 결정코 구생(俱生)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결정코 구생한다. 이를테면 일체법에는 간략히 다섯 가지의 품류가 있으니, 첫 번째는 색법(色法)이며, 두 번째는 심법(心法)이며, 세 번째는 심소법(心所法)이며, 네 번째는 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이며, 다섯 번째는 무위법(無爲法)이다.1) 그러나 무위법은 생겨나는 일이 없기에 여기서는 설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먼저 색법이 결정코 구생하는 것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욕계의 미취(微聚)는, 성(聲)도 없고
  근(根)도 없으면 여덟 가지 사(事)로 생겨나며
  신근을 갖는 미취는 아홉 가지 사로,
  열 가지 사로 생겨나는 것은 그 밖의 근을 갖을 때이다.
  
  
  
1) 이상 색·심·심소·불상응행의 유위법과 무위법을 5위(位)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색법에 5근·5경·무 표색의 열한 가지, 심법 한 가지, 심소법에 마흔여섯 가지, 불상응행법에 열네 가지, 그리고 무위법에 택멸· 비택멸·허공을 열거하여 '5위 75법'으로 규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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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欲微聚無聲 無根有八事
  有身根九事 十事有餘根
  
  논하여 말하겠다. 색취(色聚)로서 지극히 세밀한 것을 건립하여 '미취(微聚)'라고 이름하니, 이는 이보다 더 이상 미세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이다.2) 이러한 미취는 욕계에서, 성(聲)이 없고 근도 없을 때에는 여덟 가지 '사'가 함께 생기[八事俱生]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라도 감소하여서는 생기하지 않는다.
  무엇이 여덟 가지인가?
  이를테면 4대종(大種)과 4대종에 의해 이루어진[所造] 색·향·미·촉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소리는 없더라도 근이 있을 경우, 제 극미취(極微聚)로서 구생하는 사(事)는 혹은 아홉 가지, 혹은 열 가지가 된다. 즉 신근이 있을 경우, 미취는 아홉 가지 사가 함께 생기[九事俱生]하니, 여덟 가지 사는 앞에서와 같고, 신근이 아홉 번째의 그것이다. 그 밖의 근이 있을 경우, 미취는 열 가지 사가 함께 생기[十事俱生]하니, 아홉 가지 사는 앞에서와 같고, 여기에 안근 등의 하나를 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즉 안·이·비·설
  
  
  
2) 공간적 부피를 지닌 색(즉 有對의 色聚)을 세분하여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것을 극미(極微, param u)라고 하는데, 이러한 다수의 극미가 화합한 것을 미취(微聚)라고 한다. 그런데 공간적 점유성을 지닌 물질 의 최소단위를 극미라고 할 때, 이 때 극미는 부피[方分]를 갖는 것인가, 갖지 않는 것인가. 만약 극미가 부 피를 갖는다면 그것은 다시 분석될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극미라 할 수 없을 것이며, 만약 부피를 갖지 않 는다면 그것은 공간적 점유성[礙性]을 본질로 하는 색이라 할 수도 없을 뿐더러 아무리 많은 극미가 취합하여 도 역시 부피를 갖지 않게 된다. 이에 대해 중현은 극미를 실제적[實] 극미와 가설적[假] 극미라는 이중의 구 조로 해석하여, 전자는 감각[五識]으로 인식되는 물질의 극소, 후자는 관념적으로 더욱 분할되어 추리에 의해 알려지는 물질의 극소라고 하였는데,(『현종론』 권제17, 대정장29, p. 855중하 ; 한글대장경200, p. 454) 『잡아비담심론』 권제2(대정장28, p. 882중)에서는 전자를 취(聚)극미라 하고, 후자를 사(事)극미라고 하였 다. 그리고 이 때 가설적 극미는, 이미 최극소의 시간으로 상정된 찰나처럼 더 이상 분할 불가능한 관념적 소 산[覺慧所知]이기 때문에 또 다른 관념으로 분석될 수 없다는 것이다.(『현종론』 권제5, 대정장29, p.799상). 나아가 이러한 가설적 극미의 다수가 화합한 것이 바로 미취(微聚)로서, 비로소 색법의 자상을 갖 게 되며, 따라서 적취의 뜻인 '온'은 실재한다는 것이다.(본론 권제1, p.38 참조) 그런데 여기서는 다만 취색 (聚色)을 극도로 세분한 것을 '미취'라고 하였을 뿐, 이 같은 극미와 4대종의 관계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설하 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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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은 반드시 소의신을 떠나지 않고, 그것의 전전(展轉)함을 서로 비교해 보면 그 처소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의 제 미취에 있어 만약 소리가 생겨나는 경우라면 순서대로 그 수는 증가하여 아홉 가지, 열 가지, 열한 가지가 된다. 왜냐 하면 어떤 성처(聲處)는 근을 떠나지 않고 생겨나는 일이 있기 때문으로, 이를테면 유집수대종을 근거로 하여 일어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3)
  만약 4대종이 서로를 떠나지 않고 생겨나는 것이라면, 제 미취가 어떻게 견(堅)·습(濕)·난(煖)·동(動) 중의 하나만 일 수 있고 다른 [세 가지]는 아니라고 하는 것인가?4)
  그러한 미취 중에 세력과 작용[勢用]이 증가한 것은 명료하게 인식될 수 있을지라도 그 밖의 다른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 이를테면 바늘이나 칼날과 산가지[籌]가 결합한 것의 감촉을 느끼는 것과 같으며, 소금과 보릿가루가 합해진 것을 맛보는 것과 같다.5)
  
  
3) 색취(色聚) 즉 객관의 물질일반은 반드시 지·수·화·풍의 4대종과 그 결합물인 색·향·미·촉의 4조 색(造色) 등 8사구생[八事俱生 隨一不減]하지만, 유정물의 경우 신근(身根)이 있으면 8사에 신근을 더한 9사 구생이고, 여기에 안·이·비·설의 4근 중 하나가 있을 때에는 10사구생이며, 여기에 다시 소리가 있을 경우 , 각기 증가하여 8사구생은 9사로, 9사는 10사로, 10사는 11사구생이 된다. 예컨대 안근의 경우, 이것은 반드 시 신근에 따른 것이며, 이것은 다시 8사와 구유(俱有)한다. 따라서 안 등이 근이 존재하기 위한 최소한의 미 취는 10사이며, 여기에 소리가 더해질 경우 11사구생이 된다. 이를테면 입으로 소리를 낼 경우, 이 때 소리는 유집수대종(감각이 있는 대종)에 근거한 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무집수대종에 근거한 소리일 경우 객관의 물질 자체는 다만 9사구생이 될 것이다.
4) 최소단위의 물질이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견·습·난·동을 속성으로 하는 지·수·화·풍의 4대종과 소조색이 반드시 구생해야 하는 것이라 할 때, 본질적으로 4대종의 결합체인 제물질은 어떻게 그 중 한 가지 속성만을 띠게 되는 것인가, 이를테면 그 역시 8사구생인 마른 나무토막은 어떻게 딱딱함[堅性]만을 특상으로 하는 것인가 하는 난문.
5) 여기서 산가지[籌]는 셈을 하는 가는 막대기를 말하지만, 원어 t l 는 면(綿)의 뜻으로 구역에서는 그렇게 번역하고 있다. 즉 바늘과 가는 막대기(혹은 면)의 묶음을 신체에 접촉시키면 둘 중 세력이 강한 바늘 의 느낌만이 있고, 또한 소금과 보릿가루가 섞인 것을 맛보면 짠맛만이 있듯이, 4대종은 서로 분리되지 않지 만 세력과 작용이 강한 것에 따라 견고성의 지대 등으로 일컬어진다는 뜻. 즉 유부에 의하면 4대종이 결합하 여 현상할 때, 각각의 세력들이 조건에 따라 현현하기 때문에 4대종의 현실적인 차이가 있지만 그렇다고 현현 하지 않은 속성이 상실된 것은 아니다[隨一不減]. 예컨대 액체에 습성(濕性)이 풍부한 것은 수대(水大)의 세 력이 강하게 나타났기 때문이고(지·화·풍대는 두드러지지 않아 나타나지 않았을 뿐), 그것이 얼어 고체가 되었을 때에는 견성(堅性, 즉 지대)이, 증발하여 기체가 됨은 동성(動性, 즉 풍대)이 강성하여 두드러지게 현 현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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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거기에 그 밖의 다른 [세 가지] 실체도 역시 또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인가?
  섭(攝)·숙(熟)·장(長)·지(持)의 작용[業]이 있기 때문이다.6)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인연을 만나면 견(堅) 등도 바로 흐름[流] 등의 상을 지니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수취(水聚) 중에 지극히 차가움이 있기 때문에 난(煖)의 상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7) 비록 [차가움과 따뜻함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 것일지라도 차가움의 작용이 증성(增盛)하였기에 [차가움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니], 수(受)나 소리의 작용에 수승함과 열등함이 있는 것과 같다"8)고 하였다.
  그러나 유여사(有餘師)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이러한 수취(水聚) 중에 있어 그 밖의 실체는 종자(種子)로서만 존재하여 아직 그 자체의 상(相)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서 계경에서도 설하기를, '나무라고 하는 구체적인 물질[木聚] 중에는 여러 가지의 계(界)가 있다'고 하였으니, 여
  
  
  
6) '섭'은 물체를 능히 인섭(引攝)하여 흩어지지 못하게 하는 수대의 작용이고, '숙'은 물체를 성숙하게 하는 화대의 작용, '장'은 물체를 동요하게 하는 풍대의 작용, '지'는 물체를 능히 보지(保持) 저항하게 하는 지대의 작용이다. 즉 이러한 작용에 의해 그 기체(基體)가 존재함을 추리하여 알 수 있다는 뜻으로, 이를테면 금 등이 뜨거워질 때 용해되어 액체가 되고, 서로 부딪쳐 불이 일어나고, 팽창하고 수축하는 등의 동요가 있 음에 의해 거기에는 지대뿐만 아니라 수·화·풍 대가 존재함을 추리하여 아는 것이다.
7) 여기서 어떤 이는 칭우(稱友)에 의하면 실리라다(室利羅多, r lt )이나 보광에 의하면 유부사. 즉 견성(堅性)의 금도 용해하면 유동성의 액체가 되므로 거기에는 지대뿐만 아니라 수대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또한 물 중에 극냉(極冷) 중냉(中冷) 등의 강도에 따라 약간이라도 따뜻함이 느껴지는 것은 물 중에 화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주장 또한 앞의 설과 마찬가지로 작용의 두드러짐에 의해 물질의 인식관계를 설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특히 인연에 근거하여 그 밖의 대종의 존재를 추리하여 알 수 있다고 설하고 있다.
8) 지옥이나 제선천(諸禪天)에는 사수(捨受)도 존재하지만, 각기 고수(苦受)와 낙수(樂受)가 수승하기에 지옥 고통을 받는 곳, 제선천을 낙생천(樂生天)이라고 이름하며, 또한 손으로 북을 칠 때 손의 소리도 있지만 북의 소리가 수승하기 때문에 북소리라고 이름한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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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서 '계'란 이를테면 종자를 말하는 것이다."9)
  어떻게 바람 중에 현색(顯色)이 있음을 아는 것인가?10)
  이러한 뜻은 다만 믿어야 할 사실일 뿐 [이론적으로] 헤아려 알 수는 없는 사실이다. 혹은 [바람과] 결합되어진 향은 현재 취할 수 있기 때문으로, 향과 현색은 서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색계에는 향과 미가 다 같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하였다. 따라서 그곳에 성(聲)이 없을 경우 여섯 가지, 일곱 가지, 여덟 가지의 사(事)가 있고, 성이 있을 경우에는 일곱 가지, 여덟 가지, 아홉 가지의 사가 있어 구생하는 것이니, 이는 욕계에 준하여 알 수 있기 때문에 따로이 설하지 않는다.
  이상의 논설 중에서 설한 '사(事)'라고 하는 말은 [자상을 갖는 색법] 그 자체[體]에 근거한 것인가, 처(處)에 근거한 것인가?11)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과실이 있는 것인가?
  만약 법 자체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라면 여덟 가지, 아홉 가지, 열 가지 등은 너무 적은 것이 될 것이니, 온갖 미취(微聚)에는 반드시 형색이 있어야 하고 다수의 극미가 있어 함께 적집(積集)한 것이기 때문으로, 무거운 성질[重性]과 가벼운 성질[輕性] 중 어느 하나도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고, 매끄로운 성질[滑性]과 거친 성질[澁性] 중의 하나도 역시 또한 그러해야 하며, 혹 어떤 곳에는 차가움[冷]이 있기도 하고, 허기짐[饑]이 있기도 하며 목마
  
  
  
9) 보광의 『구사론기』 권제4에 의하면 이는 경부사의 주장이다. 즉 경량부에서는 어떤 색취 중 현행하고 있지 않은 것은 실체로서 잠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종자(bija,가능성)의 형태로 상속하여 아직 그 자체의 본질을 드러내지 못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대정장41, p. 72상) 이를테면 나무 중에는 견고함의 지대( 地大)만이 현행하는 것일 뿐 수대 등 그 밖의 것은 오로지 종자로서만 상속하다 인연을 만나 현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계경은 『잡아함경』 권제18 제494경(대정장2, p. 129상).
10) 이는 8사구생에 부수하는 문제로서, 바람도 색취인 이상 4대종과 색·향·미·촉의 소조색의 결합체일 것이고, 그렇다면 그것에도 형(形)·현(顯)의 색이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11) 이는 팔사구생(八事俱生)이라 할 경우, 이때 '사(事)'를 색법 그 자체[體, dravya], 이를테면 색경의 경우 8형색과 12현색, 촉경의 경우 4대종과 무거운 성질 등 열한 가지 각각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 인가, 아니면 처(處, yatana : 12처)에 근거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즉 만약 전자라 면 8사·9사·10사 등은 너무 적은 것이 되고, 후자라면 4대종은 모두 촉처(觸處)에 포섭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럴 경우 4事가 되어야 함) 너무 많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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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름[渴]이 있기도 한 것이다. 그러한 즉 앞서 말한 바(여덟 가지 내지 열 가지)는 너무 적다는 과실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처(處)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라면 여덟 가지, 아홉 가지, 열 가지 등은 너무 많은 것이 될 것이니, 4대종은 촉처(觸處)에 포섭되기 때문에 마땅히 네 가지 등이라고 설해야 할 것으로, 그러한 즉 앞에서 말한 바는 너무 많다는 과실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모두에 과실이 없으니, 여기서 말한 '사'란, 일부는 법 자체에 근거하여 설한 것으로, 이를테면 소의(所依)인 대종이 바로 그것이며, 일부는 처에 근거하여 설한 것으로, 이를테면 능의(能依)인 조색이 바로 그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대종으로서의 '사'가 응당 많아져야 할 것이니, 소조색은 각기 별도로 하나의 4대종에 근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2)
  여기에서는 법 자체의 유형에 의거하여 설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온갖 4대종은 유형 상의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13)
  어찌 [그릇된] 분별로써 이와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무릇 말이란 원하는 바에 따라 생겨나는 법이니, 그 뜻을 마땅히 사택(思擇)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14)
  이와 같이 색은 결정코 구생(俱生)한다. 다시 말해 동시에 함께 생기한다는 사실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이제 다음으로 그 밖의 법으로서 결정코 구생하는 것에 대해 마땅히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12) 만약 소조색인 색·향·미·촉의 4경을 처(處)에 의거하여 설한 것이라면, 그것들은 각기 4대종에 의 한 것이므로 결국 열여섯 가지 대종에 의한 것이 되고, 여기에 다시 4대종을 더하여 색취는 적어도 20사구생( 나아가 9사는 25사로, 10사는 30사구생)이라고 설해야 한다는 뜻.
13) 다수의 4대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본질이 동일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그 존재유형이 동일하 기 때문에 그것들을 다 같이 4대종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는 뜻.
14) 보광에 따르면 이는 이상의 색(色) 구생설(俱生說)에 대한 논주 세친의 판결이다. 즉 말이란 화자가 욕락(欲樂)하는 바대로 설할 수 있는 것이기에 그 뜻을 자세히 살펴야 한다는 의미로서, 이는 곧 논주가 이러 한 실유(實有)의 제법 구생설 자체에 찬동하지 않음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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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송으로 말하겠다.
  
  심(心)과 심소(心所)는 반드시 함께하며
  제행(諸行)은 상(相), 혹은 득(得)과 [반드시 함께한다.]
  心心所必俱 諸行相或得
  
  논하여 말하겠다. 심과 심소는 반드시 결정코 구생하니, 둘 중의 어느 하나라도 결여될 때에는 다른 하나도 생기하지 않는다.
  [본송에서] 제행(諸行)이라 함은 바로 일체의 유위를 말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색과 심과 심소와 심불상응(心不相應)의 행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 앞의 구절에서 언급한 '반드시 함께한다'고 하는 말은 여기에도 적용되니, 이를테면 색이나 심 등의 제행이 생겨날 때에는 반드시 유위의 4상(相 : 즉 生·住·異·滅의 네 가지 상)과 구생하는 것이다. 나아가 '혹은 득(得)'이라고 말한 것은, 이를테면 제행 가운데 오로지 유정의 법만이 득과 구생하고 그 밖의 법은 그렇지 않으니, 그렇기 때문에 '혹은'이라고 말한 것이다.
  
  앞에서 심소(心所)를 말하였는데, 무엇이 심소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심소법에는 바야흐로 다섯 가지가 있으니,
  대지법(大地法) 등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心所且有五 大地法等異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심소법에는 바야흐로 다섯 가지의 품류가 있다.
  무엇을 다섯 가지라고 하는 것인가?
  첫 번째는 대지법(大地法)이며, 둘째는 대선지법(大善地法)이며, 셋째는 대번뇌지법(大煩惱地法)이며, 넷째는 대불선지법(大不善地法)이며, 다섯째는 소번뇌지법(小煩惱地法)이다. 여기서 '지(地)'란 이를테면 행처(行處), 즉 생기하는 영역을 말하니, 만약 이것이 이러저러한 것(즉 심소)의 행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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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될 경우 이것을 설하여 그러한 법의 '지'라고 하는 것이다.15)
  곧 대법(大法)의 '지'가 되기 때문에 '대지(大地)'라고 이름하는 것이다.16) 그리고 이러한 제법 가운데 만약 어떤 법이 '대지'에 소유되었다면, 이것을 대지법이라고 이름하니, 이를테면 일체의 마음에 항상 존재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법이란 바로 어떠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수(受)·상(想)·사(思)·촉(觸)·욕(欲)과
  혜(慧)·염(念)·작의(作意)와
  승해(勝解)·삼마지(三摩地)는
  일체의 마음에 두루하는 것이다.
  受想思觸欲 慧念與作意
  勝解三摩地 遍於一切心
  
  논하여 말하겠다. 전(傳)하여 설(說)하기를, 이와 같이 열거한 열 가지의 법은 온갖 마음과 [동일] 찰나에 화합하여 두루 존재한다고 하였다.17)
  여기서 수(受)란 이를테면 세 가지의 종류를 말하니, 고(苦)와 낙(樂)과 양자 모두 아닌 것(즉 不苦不樂)을 영납(領納)하는 데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15) 즉 심왕(心王)이 이러저러한 심소법이 일어나는 소의처가 될 때 그러한 심왕을 '지'라고 한다는 뜻.
16) 여기서 대법이란 수(受)·상(想) 등의 심소를 말하는 것으로, 그것은 일체의 마음에 두루 통하며, 반 드시 함께 생겨나기 때문에 '대법'이라 하는 것이다. 곧 마음은 이러한 대법(大法)을 소유하며 그것의 소의처 가 되고 통솔자로서 구기하기 때문에 '대법의 지' 즉 '대지'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17) 여기서의 전설(傳說)도 예의 논주의 불신을 나타낸다. 논주 세친은 욕·승해·염·삼마지·혜의 다섯 가지는 일체의 마음과 상응구기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심소의 개별적 실재성도 인정하지 않았 다. 예컨대 이하에서 논의하고 있듯이 경각성(警覺性)인 작의(作意)가 무경각성인 사(捨, 대선지법의 하나), 이해 간택의 작용인 혜(慧)와 무지인 무명(無明,대번뇌지법의 하나)이 어떻게 상응구기할 수 있는가. 경량부 에 의하면 심소는 마음의 변이 차별상일 뿐이다. 본론 권제10(p.486 이하)과 권제28(p.1267)에서도 심소법에 대한 유부와 경부와의 대론이 논설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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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想)이란 이를테면 대상[境]에 대한 차별의 상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
  사(思)란 이를테면 능히 마음으로 하여금 조작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촉(觸)이란 이를테면 근(根)·경(境)·식(識)이 화합하여 생겨나는 것으로, 능히 대상과 접촉[觸對]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욕(欲)이란 이를테면 지어야 할 사업을 희구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혜(慧)란 이를테면 법에 대해 능히 간택(簡擇)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염(念)이란 이를테면 소연을 명기(明記)하여 망실하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한다.
  작의(作意)란 이를테면 능히 마음으로 하여금 경각(警覺)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승해(勝解)란 이를테면 능히 대상에 대해 인가(印可)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삼마지(三摩地)란 이를테면 심일경성(心一境性)을 말한다.18)
  제(諸) 심·심소의 각기 다른 상은 너무나 미세하여 그 하나하나의 상속을 분별하기도 어렵거늘 하물며 1찰나에 동시에 존재함에 있어서야! 구체적인 형태를 지닌 유색(有色)의 온갖 약을 색근(色根, 여기서는 舌根을 말함)으로 취하여 그 맛의 차별을 알기도 어렵거늘 하물며 어떤 구체적 형태도 갖지 않는 무색의 법을 오로지 각혜(覺慧, 관념)만으로 파악함에 있어서랴!19)
  
  
18) 수(vedan )란 영납(領納)의 뜻으로, 대상에 대한 고(苦,不快의 減損)·낙(樂,快의 增益)·불고불락을 감수하는 의식작용이다. 상(sa j~ )이란 취상(取像)의 뜻으로, 사물의 형상이나 언어적 개념의 차별상을 취 (표상)하는 의식작용이다. 사(cetan )라고 하는 것은 마음으로 하여금 선·불선·무기를 조작(造作)하게 하 는 의사[意業]의 의식작용이다. 촉(spar a)이란 근·경·식의 화합에 의해 생겨난 것으로, 마음으로 하여금 대상에 대해 촉대(觸對)하게 하는 의식작용이다. 욕(chanda)이란 마음으로 하여금 뭔가를 희구(希求)하게 하 는 의식작용이다. 혜(praj~ )란 소연이 되는 대상에 대해 능히 판단·간택(簡擇)하게 하는 의식작용이다. 염 (sm ti)이란 대상을 명기(明記)하여 잊어버리지 않게 하는 의식작용이다. 작의(manask ra)란 마음으로 하여 금 대상에 대해 주의·경각(警覺,곧 留意)하게 하는 의식작용이다. 승해(adhimukti)란 대상에 대해 인가(印可 )·결정하게 하는 의식작용이다. 삼마지(sam dhi)란 마음을 평등(平等)하게 유지하여 그것으로 하여금 하나 의 대상에 전념하게 하는 의식작용[心一境性]으로, 이를테면 '마치 뱀이 죽통(竹筒)에 들어가면 바로 펴지듯 이 마음이 삼마지에 들면 산란되지 않고 바로 곧게 전이하는 것이다.'
19) 이는 10대지법은 위에서와 같이 분별되지만 그것들은 마음과 동일찰나에 동시생기함으로 그것을 분별 하기란 참으로 어렵다는 뜻의 탄식이다. 유부 제법분별론에 따르는 한 유위제법은 각기 개별적인 실체이기 때 문에 그러한 제법의 동시구기는 불가피한 일이다. 왜냐 하면 제법은 각기 자기만의 고유한 작용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인식이 완전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구기해야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만약 구기 하지 않고 계기(繼起)한다면 각각의 작용은 찰나생멸하기 때문에 산괴(散壞)하여 하나의 인식을 이룰 수 없게 되고 만다. 유부에서는 이러한 이유에서 심·심소를 별개의 존재로 간주하면서도 그것들 사이의 상응을 주장 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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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같이 열 가지 대지법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나아가 대선법(大善法)의 '지(地)'를 대선지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제법 가운데 어떤 법이 만약 '대선지'에 소유되었다면 이를 대선지법이라고 이름하니, 이를테면 항상 온갖 선심에 존재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법이란 바로 어떠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신(信)과, 그리고 불방일(不放逸)과
  경안(輕安)·사(捨)·참(慚)·괴(愧)와
  두 가지의 근(根)과, 그리고 불해(不害)와
  근(勤)은 오로지 선심에만 두루하는 것이다.
  信及不放逸 輕安捨慚愧
  二根及不害 勤唯遍善心
  
  논하여 말하겠다. 이와 같은 제법은 오로지 선심에만 두루 존재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 신(信)이란 마음으로 하여금 징정(澄淨)하게 하는 것이다.20)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4제(諦)나 3보(寶), 업과 그 과보에 대해 현전에서 인가하고 허락[忍許,즉 확신]하기 때문에 그것을 일컬어 '신'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20) 신( raddh )이란 마치 청수주(淸水珠)를 연못에 놓아두면 더러운 물이 깨끗하게 되는 것처럼 마음을 맑게 하는 의식작용을 말한다.(『입아비달마론』 권상, 대정장28, p. 982,중). 혹은 마음의 맑은 상태로서, 전도됨이 없는 인과는 각기 개별적으로 상속(相屬)됨을 즉각적으로 인가하며, 욕(欲)의 소의가 되어 능히 승 해를 낳게 하는 것을 일컬어 신(信)이라고 한다.(『현종론』 권제5, 한글대장경200, p.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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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방일(不放逸)이란 온갖 선법을 닦는 것이다.21)
  [선법 그 자체가 이미 닦는 것인데,] 온갖 선법을 떠나 다시 무엇을 일컬어 닦는 것이라고 할 것인가?
   이를테면 그것은 바로 선에 대해 전념[專注]하는 것을 본질로 한다. 그런데 다른 어떤 부파의 경에서는 이와 같이 해석하는 일이 있으니, "능히 마음을 수호하는 것을 일컬어 불방일이라 한다"고 하였다.22)
  경안(輕安)이란 이를테면 마음의 감임성(堪任性)을 말한다.23)
  어찌 경에서 [심경안(心輕安) 이외] 신경안(身輕安)이 있다고 역시 또한 설하고 있지 않았던가?24)
  비록 설하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이는 신수(身受)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심수는 의식과 상응하고 신수는 5식과 상응하듯이 심경안은 의식과, 신경안은 전5식과 상응한다고 하면 신경안은 유루인데,] 어떻게 이것을 세워 [무루의] 각지(覺支)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계경 중에서 설한 신경안이란 몸의 감임성이라는 사실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다시 이것을 어떻게 설하여야 [무루의] 각지로 삼을 수 있는 것
  
  
  
21) 오로지 자신의 이익에서 몸과 말과 마음을 방호하는 것으로서, 방일의 반대되는 것을 불방일(apram da)이라고 한다.(『현종론』 권제5, 한글대장경200, p. 134)
22) 여기서 다른 부파의 경이란 『증일아함경』 권제4(대정장2, p. 563하). "云何爲無放逸行. 所謂護心 也."
23) 경안(pra rabdhi)이란 즉 마음이 가볍고 편안[輕利安適]하여 능히 선법을 감당할 수 있게 하는 성질[ 心堪任性]의 의식작용을 말한다.
24) 이 난문은, 유부 범주표상에서 대선지법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는 경안에 대해 계경(『잡아함경』 권제 27,대정장2, p. 191하)에서 신(身) 경안도 설하고 있듯이 심소로만 한정지을 수 없지 않느냐?고 한 경량부의 물음이다. 즉 유부에서는 신수(身受, 5식과 상응하는 감성적 지각)와 심수(心受, 제6의식과 상응하는 오성적 지각)의 경우에서처럼 신경안도 심경안과 마찬가지로 심소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심·심소를 상응을 부정 하는 경량부에서는, 만약 신경안이 유루인 5식상응의 심소라면 유루의 경안을 어떻게 무루도인 7각지(覺支)의 하나[輕安覺支]로 꼽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여 심경안과 구별하고 있다. 또한 심경안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개별적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의지[思]의 차별로서 정심(定心)에서만 나타날 뿐 산심(散心)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5식에 상응하는 것은 법상의 이론상 실재하는 것이 아니지만, 신경안은 바람[風]의 촉(觸)을 본질로 하는 경안으로, 삼매중에서 일어나 무루인 심경안을 인기(引起)하기 때문에 7각지에 포섭시 킬 수 있다고 논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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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가?(유부의 물음)
  능히 각지에 따르기 때문에 여기에는 어떠한 과실도 없으니, 신경안으로써 능히 [무루의] 각지인 심경안을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밖의 다른 곳에서도 이와 같은 설(說)을 찾아볼 수 있는가?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경에서 "희(喜)와 희에 따르는 법을 희각지라 이름하고,25) 진(瞋)과 진의 인연을 진에개(瞋恚蓋)라 이름하며,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근(正勤)을 혜온(慧蘊)이라 이름한다"고 설한 바와 같다. 즉 사유와 근(勤)은 비록 혜를 본질로 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역시 혜라는 명칭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경안도 각지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명칭을 얻어도, 다시 말해 각지라 이름해도 아무런 과실이 없는 것이다.26)
  마음의 평등성(平等性), 무경각성(無警覺性)을 일컬어 사(捨)라고 한다.27)
  어떻게 한 찰나의 마음[一心] 중에서 경각성과 무경각성, 즉 작의(作意)와 사(捨)라고 하는 두 가지 심소가 [마음과] 상응하여 함께 일어난다고 설할 수 있는 것인가?28)
  어찌 앞에서 '제 심·심소는 그 상이 미세하여 참으로 알기 어렵다'고 설하지 않았던가?
  비록 알기 어렵다고 할지라도 깊이 살피고 헤아리면 다시 알 수 있는 점도
  
  
  
25) 여기서 경은 『잡아함경』 권제27(대정장2, p. 191중). 그리고 희에 따르는 법이란 희와 상응하는 심 과 심소, 득(得), 그리고 생·주·이·멸의 4상(相)을 말한다.
26) 이상은 경안에 대한 유부와 경부의 대론. 참고로 보광(普光)은 더 이상 유부의 반론이 이루어지고 있 지 않은 것으로 보아 논주 세친 역시 경량부의 의견에 동조하였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27) 사(upek )란 혼침(惛沈)과 도거(掉擧 : 대번뇌지법의 하나)를 떠난 마음의 평등성(平等性), 마음에 동요됨이 없는 것(무경각성)을 말한다.
28)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사'는 무경각성(無警覺性)으로 정의되는데, 그럴 경우 이것은, 심대지법의 하나 로서 마음을 자극 경계하여 대상에 대해 주의(注意) 경각(警覺)하게 하는 작용인 작의(作意)와 어떻게 서로 관계하며 함께 일어날 수 있는 것인가? 즉 이 논설은 상호모순되는 무경각의 '사'와 경각의 작의가 어떻게 구 기할 수 있는가 하는 데 대한 난문이다. 광기(光記)나 보소(寶疏)에서는 이를 유부의 심·심소 상응구기설에 대한 비판으로만 전하고 있지만, 칭우(稱友)는 이를 경량부의 설로 평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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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을 것이나 이는 가장 알기가 어려우니, 이를테면 서로 위배되는 것이면서도 [한 찰나의 마음 중에서 상응 구기한다고 하면서] 모순[乖反]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작의)에는 경각이 있고, 다른 것(사)에는 경각이 없는 것으로, 이 두 가지는 이미 [그 작용에 있어] 현격하게 다른데 무슨 모순이 있을 것인가?29)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 두 가지는 마땅히 동일한 대상을 소연으로 삼지 않아야 하거나, 혹은 마땅히 일체의 법도 모두 서로 상응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30)
  이와 같은 종류의 그 밖의 제법도 여기서 마땅히 탐구되어야 할 것이고, 그와 같은 이치에 따라 지금 이 문제에 대해서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31)
  참(慚)과 괴(愧)의 두 종류에 대해서는 응당 뒤에서 해석하는 바와 같다.32)
  두 가지의 근(根)이란 이를테면 무탐(無貪)과 무진(無瞋)을 말한다.33) 그리고 무치(無癡)의 선근은 혜를 본질로 하기 때문에 앞서 대지법 중에서 이미 설하였으니, 대선지법으로 거듭 설하지 않는 것이다.
  
  
29) 작의는 경각성의 심소이고, 사는 무경각성의 심소로서, 이 두 가지는 이미 법 자체가 다른 것이기 때 문에 그 작용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뜻.
30) 만약 이 두 가지가 동일한 대상을 소연으로 삼지 않을 경우, 심·심소의 오의평등(五義平等) 중 소연( 所緣)평등에 위배될 것이고, 혹은 이 두 가지가 작용을 달리하는 것임에도 상응한다고 주장할 것 같으면 그 행상(行相)을 달리하는 탐(貪) 진(瞋) 등 일체의 법도 모두 서로 상응한다고 해야 한다는 뜻의 난(難).
31) 예컨대 심(尋)·사(伺), 수(受)·상(想)처럼 그 행상(行相)이 동일하지 않더라도 상응구기하는 경우도 있고, 탐(貪)·진(瞋)처럼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으므로 작의와 사는 이러한 이치에 따라 이해되어야 한다는 뜻. 즉 주의 경각의 작의는 일체 정신활동의 근저이므로 마음의 평정심 '사'와 모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 하려는 것.
32) 대불선지법(大不善地法)인 무참(無慚)·무괴(無愧)를 설하면서 함께 언급한다. 『현종론』 (권제5, 한 글대장경200, p. 134)에서는 참다운 진리로 나아감으로써 스스로와 법에 대해 뛰어난 힘이 생겨나니, 애(愛) 의 등류(等流)를 거스릴려는 마음의 자재성을 일컬어 참(慚)이라고 하고, 수습(修習)을 애락하고 공덕을 우선 하는 것으로서, 치(癡)의 등류를 어기고 열등한 법을 혐오하는 것을 일컬어 괴(愧)라고 하였다.
33) 무탐이란 이미 획득하였거나 아직 획득하지 않은 경계에 대한 탐착 희구와 반대되는 것으로서, 마음에 애염이 없는 성질[無愛染性]을 말하며, 무진이란 유정이나 비유정에 대해 미워하거나 해치려는 마음이 없는 애민(哀愍)의 종자를 말한다.(『현종론』 권제5, 한글대장경200, p.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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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해(不害)라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다른 이를 손상시키고 괴롭히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근(勤)이란 이를테면 마음으로 하여금 모질게 노력하게 하는 것[勇悍]을 본질로 한다.34)
  이와 같이 대선지법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나아가 대번뇌법(大煩惱法)의 '지'를 대번뇌지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제법 가운데 어떤 법이 만약 '대번뇌지'에 소유되었으면 이것을 대번뇌지법이라고 이름하니, 이를테면 항상 염오심에 존재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법이란 바로 어떠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치(癡)·일(逸)·태(怠)·불신(不信)과
  혼(惛)·거(擧)는 오로지 항상 염오한 것이다.
  癡逸怠不信 惛掉恒唯染
  
  논하여 말하겠다. 이(본송) 중에서 치(癡)란 이른바 우치(愚癡)를 말한다. 즉 이는 바로 무명(無明)이고, 무지(無智)이며, 무현(無顯)인 것이다.35)
  일(逸)이란 이를테면 방일(放逸)로서, 온갖 선을 닦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는 바로 온갖 선을 닦는 것[즉 不放逸]에 의해 대치(對治)되는 법이다.
  
  
  
34) 이미 생겨난 온갖 공덕은 수호하고 과실은 내버리며, 아직 생겨나지 않은 온갖 공덕 생겨나게 하고 과 실은 생겨나지 않게 하는 것으로서, 마음의 타락됨이 없는 성질[無墮性]을 일컬어 근(勤)이라고 한다. 즉 이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마음은 참다운 이치에 따라 지어지는 일로 견고히 나아가 멈추지 않는 것이다.(『현종 론』 권제5, 한글대장경200, p. 134) 참고로 『순정리론』 권제11(대정장29, p. 391,중)과 『현종론』 권제5( 상동)에서는 열 가지 대선지법에 흔(欣)과 염(厭)을 포함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데, 대 선지법에는 '흔'과 '염'도 사실상 포함되어야 할 것이지만, 이 두 가지는 상위되는 것이어서 한 찰나 마음에 구기할 수 없기 때문에 배제한다고 논의하고 있다. 여기서 '염'이란 유전의 생사를 염오(厭惡)하게 하는 의식 작용이며, '흔'은 환멸의 열반을 흔락(欣樂)하는 의식작용이다.
35) 무지는 밝게 결택(決擇)할 수 없는 상태이고, 무현이란 일체 사리(事理)의 경계가 은폐되어 드러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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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怠)란 이를테면 해태(懈怠)로서, 마음이 모질게 노력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는 바로 앞에서 설한 근(勤)에 의해 대치되는 법이다.36)
  불신(不信)이란 이를테면 마음 징정(澄淨)하지 않은 것으로, 이것은 바로 앞에서 설한 '신'에 의해 대치되는 것이다.37)
  혼(惛)이란 이를테면 혼침(昏沈)을 말하는 것으로, 대법(對法) 중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즉 "무엇을 혼침이라 하는가? 이를테면 몸의 무거운 성질과 마음의 무거운 성질, 몸이 민활하지 못한 성질[不堪任性]과 마음이 민활하지 못한 성질, 몸이 혼미하거나 침울한 성질[昏沈性]과 마음이 혼미하거나 침울한 성질, 이것을 혼침이라 이름한다."38)
  이것은 바로 심소(心所)인데, 어찌하여 몸[身]이라고 일컬은 것인가?
  신수(身受)라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따라서 이렇게 말하더라도 아무런 과실이 없는 것이다.39)
  도(掉)란 이를테면 도거(掉擧)로서, 마음으로 하여금 고요히 안정되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한다.
  오로지 이와 같은 여섯 가지 종류가 있어 이것을 대번뇌지법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어찌 근본 아비달마 중에서는 열 가지 종류의 대번뇌지법이 있다고 설하지 않았던가? 또한 그 논에서는 혼침을 설하지도 않았지 않는가?40)
  
  
36) 선한 일에 있어서는 뛰어난 능력을 없애거나 감소시키고, 악한 일에 있어서는 날쌘 사나움을 따라 성 취시키는 무명의 등류(等流)를 일컬어 해태라고 한다. 이는 바로 비천하고 열등하게 노력하는 것[鄙劣勤性]으 로, 비천하고 더러운 것을 닦고 익히기 때문에 해태라고 이름하는 것이다.(『현종론』 권제6,한글대장경200, p. 138)
37) 불신은 사견(邪見)의 등류(等流)로서, 4제의 온갖 진리[諦]와 실유의 법[實]과 정려와 등지에 대해 직 접적으로 경솔히 험담하고, 보시 등의 원인이나 그 과보에 대해 즉각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을 일컬어 불신 이라고 한다.(앞의 논, p. 138)
38) 여기서 본론은 『발지론』 권제2(한글대장경176, p. 39).
39) 5식상응의 '수'를 신수라고 이름하듯이 5식이 혼미하여 작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몸이 혼미하고 침울하 다고 일컬을 수 있다는 뜻. 그런데 『현종론』 권제6에서는 혼침을 다만 마음의 무거운 성질이라 하였다. 즉 마음은 대종을 능히 낳는 원인[能生因]이 되기 때문에, 이에 따라 몸의 무거운 성질을 일으키는 것을 먼저 혼 침이라고 가설하지만, 그것은 바로 식신(識身)의 소연이 되는 대상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혼침이 아니라는 것 이다.(한글대장경200, p. 138).
40) 여기서 근본 아비달마는 『품류족론』(권제2, 대정장26, p. 698하). 『계신족론』 권제1(대정장26, p. 614중)과 『대비바사론』 권제42(대정장27, p. 220상)을 참조할 것. 다만 여기서는 실념이 망념(忘念)으로 되 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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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이 열 가지인가?
  이를테면 불신·해태·실념(失念)·심란(心亂)·무명(無明)·부정지(不正知)·비리작의(非理作意)·사승해(邪勝解)·도거·방일이 바로 그것이다.
  천애(天愛)여! 그대는 다만 말[言至]만을 알고 그 뜻[意旨]은 알지 못하는구나.41)
  그 뜻이 무엇인가?
  이를테면 실념과 심란과 부정지와 비리작의와 사승해는 이미 대지법(大地法) 중에서 설하였기에 마땅히 거듭하여 대번뇌지법으로 삼지 않은 것이다. 예컨대 무치(無癡)의 선근은 혜를 본질로 하기 때문에 대선지법이 아니라고 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들도 역시 마땅히 그러한 것이다. 즉 염오한 염(念)을 일컬어 실념이라 하였고, 염오의 등지(等持)를 일컬어 심란이라 하였으며, 온갖 염오혜를 일컬어 부정지라 하였으며, 염오한 작의와 승해를 일컬어 비리작의와 사승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니, 만약 그것이 바로 대지법이라면 역시 또한 대번뇌지법이기도 한 것인가?
  마땅히 4구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니, 제1구는 이를테면 수(受)·상 (想)·사(思)·촉(觸)·욕(欲)이며, 제2구는 이를테면 불신·해태·무명·도거·방일이며, 제3구는 이를테면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은 염(念) 등의 다섯 가지 법이며, 제4구는 이를테면 앞에서 언급한 제 법상을 제외한 것들이다.42)
  그런데 어떤 이는 주장하기를, "사등지(邪等持)가 바로 심란(心亂)은 아니다"고 하였으나,43) 그가 짓는 4구는 이와는 다른 것이다.44)
  
  
41) 여기서 천애(dev n priya)란 어리석은 이를 조롱하는 말.
42) 제1구는 대지법이면서 대번뇌지법이 아닌 것, 제2구는 대번뇌지법이면서 대지법이 아닌 것, 제3구는 대지법이면서 역시 대번뇌지법인 것, 제4구는 두 가지 모두가 아닌 것을 말한다.(『대비바사론』 권제42, 한 글대장경119, p. 408 참조)
43) 이는 『대비바사론』 권제42(대정장27, p. 219하 ; 한글대장경119, p. 407)의 어떤 이의 설이다. 즉 그에 의하면 심란이라고 하는 것은 등지 즉 삼마지와는 독립된 개별적인 심소의 하나이다. 이에 대해 바사에 서는 삼마지와 번뇌가 상응하여 마음으로 하여금 대상으로 자꾸자꾸 이전하게 하는 것을 심란이라고 하기 때 문에 심란은 염오의 삼마지를 자성으로 삼는 것이라고 하였다.
44) 즉 심란은 사(邪) 삼마지(즉 염오등지)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가 분별하는 4구는 다음과 같다. 제1구 는 앞의 다섯 가지 법(수·상·사·촉·욕)과 삼마지이며, 제2구는 역시 앞의 다섯 가지 법(불신·해태·무명 ·도거·방일)과 심란이며, 제3구는 앞의 다섯 가지 법(염 등의 5법)에서 심란을 제외한 네 가지 법이며, 제4 구는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대비바사론』 상동, p. 40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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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근본 아비달마에서] 혼침은 일체의 번뇌와 상응한다고 인정하면서도 대번뇌지법에서 그것을 설하고 있지 않았으니, 이는 누구의 허물인가?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마땅히 여기(대번뇌지법)에서 설해야 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본론에서] 설하지 않은 것은 등지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45) 그것은 이를테면 제 유정으로서 혼침을 행하는 자는 신속하게 등지를 일으키지만 도거를 행하는 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인데,46) 그렇다면 누가 혼침을 행하면서 도거를 행하지 않는 것이며, 누가 도거를 행하면서 혼침을 행하지 않는 것인가? 이 두 가지는 미상불 함께 작용[俱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47)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어느 한편의 작용이] 증가함에 따라 그것을 행하는 자라고 설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48)
  비록 어느 한 쪽의 작용이 증가함에 따라 행하는 자를 설하였다고 안다고 할지라도 실유의 법체에 의거하여 지법(地法)을 건립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지법(즉 대번뇌지법)에는 오로지 여섯 가지의 뜻만이 성취되니, 이러한 법들은 오로지 염오심에 두루 구기(俱起)하지만 다른 마음에
  
  
  
45) 『대비바사론』 권제42(대정장27, p. 220상). '이 다섯 가지 법(불신 등 5법)은 염오함에 따르는 것이 수승하기 때문에 거듭 설하였지만, 혼침은 정(定)에 따른 것이고, 그 밖의 것은 두루 염오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대번뇌지법 중에서 설하지 않은 것이다.' 즉 혼침은 선정을 일으킬 수 있어도 도거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도거는 대번뇌지법에 포함시킬 수 있어도 혼침은 포함시킬 수 없다는 뜻.
46) 여기서 '이를테면'은 전설(傳說, kila)에 해당하는 역어로 논주의 불신을 나타낸다. 곧 다음 문장에서 이에 대해 바로 힐난하고 있다.
47) 혼침과 도거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으로 다 같이 선정을 방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하나는 대 번뇌지법에 포함기키고 다른 하나는 포함시키지 않는 것은 불가하는 뜻.
48) 도거와 혼침은 항상 함께 작용하는 것일지라도 혼침이 증가한 자를 혼침을 행하는 자라 하였고, 도거 가 증가한 자를 도거를 행하는 자라고 하였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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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그러하지 않기 때문에 [대번뇌지법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대번뇌지법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나아가 대불선법(大不善法)의 '지(地)'를 대불선지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제법 가운데 어떤 법이 만약 대불선지에 소유되었으면 이것을 대불선지법이라고 이름하니, 이를테면 항상 불선심에 존재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법이란 바로 어떠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오로지 불선심에 두루하는 것은
  무참(無慚)과 무괴(無愧)이다.
  唯便不善法 無慚及無愧
  
  논하여 말하겠다. 오로지 두 가지의 심소만이 일체의 불선심과 함께할 뿐이니, 이를테면 무참(無慚)과 무괴(無愧)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오로지 두 가지 심소만을 대불선지법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이 두 가지 법의 상(相)에 대해서는 응당 뒤에서 분별하는 바와 같다.
  
  이와 같이 대불선지법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나아가 소번뇌법(小煩惱法)의 '지'를 소번뇌지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제법 가운데 어떤 법이 만약 소번뇌지에 소유되었으면 이것을 소번뇌지법이라고 이름하니, 이를테면 일부의 염오심과 함께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법이란 바로 어떠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분(忿)·부(覆)·간(慳)·질(嫉)·뇌(惱)
  해(害)·한(恨)·첨(諂)·광(誑)·교(憍)
  이와 같은 종류의 법을 일컬어
  소번뇌지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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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忿覆慳嫉惱 害恨諂誑憍
  如是類名爲 小煩惱地法
  
  논하여 말하겠다. '이와 같은 종류의 법'은 오로지 수소단(修所斷)으로서 의식 지(地)에서만 일어나며, 무명과 상응하고, 각각 별도로 현행하기 때문에 이를 일컬어 '소'번뇌지법이라고 한 것이다.49) 이러한 법에 대해서는 응당 수번뇌(隨煩惱) 중에서 널리 분별하는 바와 같다.50)
  이와 같이 다섯 가지 품류의 심과 심소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다시 이 밖에도 부정(不定)의 심소로서 악작(惡作)·수면(睡眠)·심(尋)·사(伺) 등의 법이 존재한다.51)
  
  
49) 『구사론기』에 의하면 고덕(古德)은 6식과 통하지 않고, 5단(斷)에 통하지 않고, 3성(性)에 통하지 않고, 3계(界)에 통하지 않고, 별두기(別頭起) 즉 각기 개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라는 다섯 가지의 뜻으로서 소번뇌지법을 규정하였다. 따라서 이것은 탐 등의 번뇌와는 관계없이(隨從起가 아니다) 완전히 독립적으로 하 여 일어나는 자재기(自在起 혹은 自力起)의 번뇌로서, 오로지 무명과 상응할 뿐이다(즉 여기서 '소'라고 하는 말은 이와 상응하는 법이 '적다'는 뜻으로, 이러한 열 가지의 소번뇌지법은 일체의 염오법과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무명과 상응할 뿐이다). 즉 여섯 가지 대번뇌지법은 그 밖의 탐 등의 번뇌에 따라 일어나고[隨從 起, 혹은 相應起], 항상 동시에 함께 생기하는 것[幷頭起]이지만, 열 가지 소번뇌지법은 스스로의 힘으로서 일어나는 번뇌[自力起]로서 무명과 상응할 뿐 다른 번뇌와 함께 일어나는 일이 없으며, 또한 동시에 함께 일 어나는 일[別頭起]도 없기 때문에 '소'번뇌지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50) 수번뇌(upakle a)란 탐(貪)·진(瞋)·만(慢)·무명·견(見)·의(疑)의 근본번뇌에 따라 일어나는 번 뇌를 말한다. 완성된 유부교학에서는 보통 여기에 무참(無慚)·무괴(無愧)·악작(惡作)·수면(睡眠)·도거(掉 擧)·혼침(昏沈)·분(忿)·부(覆)·질(嫉)·간(慳)의 10전(纏)과 뇌(惱)·회(悔)·한(恨)·첨(諂)·광(誑)· 교(憍)의 6번뇌구(垢)가 포함된다. 수번뇌는 본론 「수면품」 권제21(p.952 이하)에서, 교(憍)는 권제4(p.188)에서 설명되고 있다.
51) 심소법에는 이상의 대지법·대선지법·대번뇌지법·소번뇌지법의 4품 이외 선·염오·무기 무엇과도 상응할 수 있어 그 구생관계가 결정적이지 않은 악작·수면(睡眠)·심(尋)·사(伺) 등의 존재가 있는데, 이를 부정지법(不定地法)이라고 한다. 그리고 여기서 '등'이라고 함은, 보광(普光)의 『구사론기』에 의하면 탐(貪 )·진(瞋)·만(慢)·의(疑)인데, 이에 따라 심소법이 마흔여섯 가지가 되어 일반에서 유부의 법수(法數)를 75 법으로 일컫게 된 것이다. 이 중 악작과 심·사는 본권에서 후술되며, 수면은 본론 권제21에서 설명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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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마땅히 설하여 보아야 할 것이니, 어떠한 마음의 품류에 몇 가지의 심소가 결정코 구생(俱生)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욕계는 유심유사(有尋有伺)이기 때문에
  선한 마음의 품류 중에 있어서는
  스물두 가지의 심소가 구생하며
  어떤 때에는 악작(惡作)을 더하기도 한다.
  欲有尋伺故 於善心品中
  二十二心所 有時增惡作
  
  불선으로서 불공(不共)이거나
  견(見)과 함께하는 경우는 오로지 스무 가지이며
  네 가지 번뇌나 분(忿) 등이나
  악작과 함께하는 경우라면 스물한 가지와 구생한다.
  於不善不共 見俱唯二十
  四煩惱忿等 惡作二十一
  
  유부무기(有覆無記)의 마음에는 열여덟 가지가 있고
  무부무기의 마음에는 열두 가지가 있다고 인정되며
  수면(睡眠)은 두루 어긋나지 않기 때문에
  만약 그것이 존재한다면 모두에 하나씩을 더하게 된다.52)
  有覆有十八 無覆許十二
  睡眠遍不違 若有皆增一
  
  
  
  
52) 제2구의 '인정한다[許]'는, 외방(外方)의 여러 논사(圓暉의 『俱舍論頌疏』에 의하면 經部)들은 악작 도 무기와 통하기 때문에 무부무기의 마음에는 열세 가지의 심소가 있다고 주장한데 반해 카슈미르 비바사사 들은 악작을 제외한 열두 가지만을 인정하고 있다는 말로서(주61 참조), 세친은 이를 불신하여 '인정한다'라 고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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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하여 말하겠다. 바야흐로 욕계에서의 마음의 품류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선에는 오로지 한 가지가 있고, 불선에는 불공무명(不共無明)과 상응하는 것과 그 밖의 다른 번뇌 등과 상응하는 것 두 가지가 있으며, 무기에는 유부무기와 무부무기 두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욕계의 마음에는 결정코 항상 심(尋)·사(伺)가 존재하기 때문에, 선한 마음의 품류는 반드시 스물두 가지의 심소가 구생하니, 이를테면 열 가지 대지법과 열 가지 대선지법과 그리고 부정지법의 두 가지 심소 즉 심(尋)과 사(伺)가 바로 그것이다.
  온갖 선심에 모두 악작(惡作)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53) 그것이 존재할 때에는 그 수가 증가하여 스물세 가지에 이른다.
  악작이란 무엇인가?
  그릇되게 지어진 것[惡所作] 자체를 일컬어 악작이라고 한다. 즉 그릇되게 지어진 것을 소연으로 하여 [생겨난] 법을 설하여 악작이라고 이름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그릇되게 지어진 것을 소연으로 하여 [생겨난] 마음의 추회(追悔)하는 성질을 말한다. 이는 마치 공(空)을 소연으로 하는 해탈문(解脫門)을 설하여 '공'이라 이름하고, 부정(不淨)을 소연으로 하는 무탐(無貪)을 설하여 '부정'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54) 또한 세간일반에서 보더라도 소의처(所依處)에 근거하여 그것에 능히 의지하는 것[能依事]을 설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일체의 시골이나 나라[國土]가 모두 와 모였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55) 즉 악작은 바로 추회의 소의가 되기 때문에 소의에 근거하여 악작이라고 설하게 된 것이다. 또한 결과 자체에 대해 일시 원인의 명칭을 설정할 수 있으니, 이를테면 이러한 6촉처를 설하여 숙작업(宿作業)
  
  
53) 악작이란 이를테면 후회로서, 이전에 착한 일을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것이 선한 악작이지만, 모든 선심에는 반드시 이러한 작용이 있지 않기 때문에 선심과의 상응 유무가 일정하지 않은 것이다.
54) 공을 소연으로 하는 해탈문은 그 자체 무루정으로서 공을 소연의 경계로 삼기 때문에 소연에 따라 '공 '이라 하였으며, 부정(不淨)의 자체는 무탐이지만 이 또한 소연에 따라 '부정'이라 이름하였다는 뜻.
55) 일체의 시골[村邑]이 모두 와 모였다고 함은 시골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와 모였다는 뜻으로, 머무는 처소[所依處]에 근거하여 거기에 머무는 이[能依事]를 나타낼 수 있다는 예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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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라 이름하는 것과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56)
  만약 아직 지어지지 않은 일을 소연으로 할 때는 어떻게 악작이라고 일컬을 수 있을 것인가?57)
  아직 짓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역시 '작(作)'이라고 하는 명칭을 설정할 수 있으니, 이를테면 '내가 일찍이 이와 같은 일은 짓지 않았던 것은 바로 나의 악작(즉 잘못된 일)이다'고 후회하여 말하는 것과 같다.
  어떠한 악작을 일컬어 선의 악작이라 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선을 짓지 않았거나 악을 지은 것에 대해 마음으로 추회(追悔)하는 성질을 선의 악작이라 하며, 이와 반대되는 것을 일컬어 불선의 악작이라 하니, 이러한 두 가지의 악작은 각기 두 가지 처소(선·불선)에 근거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만약 불선으로서 불공(不共)인 마음의 품류라면 반드시 스무 가지의 심소가 있어 함께 생기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열 가지 대지법과 여섯 가지 대번뇌지법과 두 가지 대불선지법, 그리고 심과 사의 두 가지 부정법이 바로 그것이다.
  무엇을 일컬어 불공인 마음의 품류라고 한 것인가?
  이러한 마음의 품류에는 오로지 무명만이 존재할 뿐 그 밖의 탐번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58)
  그리고 불선의 견(見)과 상응하는 마음의 품류에서도 역시 스무 가지의 심소가 존재하여 함께 생기하니,59) 그 명칭은 바로 앞의 불공품(不共品)에서
  
  
56) 숙작업(숙세의 선악업)을 원인으로 삼아 6촉처(6촉의 소의처가 되는 6근)의 결과가 생겨날 때, 결과인 6근에 원인의 명칭을 부여하여 숙작업이라고 할 수 있듯이, 악작으로 인해 추회(追悔)가 생기기 때문에 결과 인 추회하는 마음에 대해 그 원인이 되는 악작이라는 명칭을 부가할 수 있다는 뜻.
57) 이미 지어진 일에 대해 후회하는 것은 악작이라 할 수 있어도, 아직 짓지 않은 업에 대해 설사 그것을 하였더라면 하고 후회하였을지라도, 거기에는 소연의 경계가 될만한 지어진 것이 없기 때문에 악작이라고 이 름할 수 없지 않은가 하는 난문.
58) 여기서 탐수면 등이란, 탐(貪)·진(瞋)·만(慢)·의(疑)의 네 가지 근본번뇌와, 10전(纏, 無慚·無愧·慳·悔·眠·掉擧·昏沈·忿·覆)과 6구(垢, 惱·害·恨·諂·誑·憍)로서, 이러한 제번뇌와 상응구기하는 무명은 상응무기임.
59) 불선의 견이란 사견(邪見)·견취(見取)·계금취(戒禁取)의 세 가지 견. 5견 중 이러한 세 가지만이 불 선이고, 나머지 유신견(有身見)과 변집견(邊執見)의 두 가지는 유부무기(有覆無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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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한 바와 같다. 즉 그것은 다만 견이 증가한 것이기 때문에 스물한 가지가 되지 않는 것으로, 바로 열 가지 대지법 가운데 혜(慧) 작용의 차별을 설하여 견(見)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선의 견과 상응하는 마음이란 이를테면 이러한 마음 중에 혹 어떤 경우 사견(邪見)이 존재하거나, 혹 어떤 경우 견취(見取)가 존재하거나, 혹 어떤 경우 계금취(戒禁取)가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네 가지 불선인 탐(貪)·진(瞋)·만(慢)·의(疑)의 번뇌와 상응하는 마음의 품류에서는 스물한 가지의 심소가 존재하여 함께 생기하는데, 그 중의 스무 가지는 불공품에서 설한 바와 같고, 여기에 탐 등 가운데 어느 한 가지를 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설한 분(忿) 등의 수번뇌와 상응하는 마음의 품류에서도 역시 스물한 가지의 심소가 함께 생기하는데, 스무 가지는 불공품에서 설한 바와 같고, 여기에 분 등 가운데 어느 한 가지를 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불선의 악작과 상응하는 마음의 품류에서도 역시 스물한 가지의 심소가 함께 생기하니, 이를테면 바로 악작이 스물한 번째이며, [스무 가지는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이상 불선심의 구생관계에 대해] 간략히 설한다면 불선의 불공(즉 무명)이나 견(見)과 상응하는 마음의 품류 중에는 오로지 스무 가지의 심소만이 존재하며, 그 밖의 네 가지 번뇌나 수번뇌와 상응하는 마음의 품류 중에는 스물한 가지의 심소가 존재한다.
  만약 무기로서 유부심(有覆心)의 품류라면 오로지 열여덟 가지의 심소만이 존재하여 함께 생기하니, 이를테면 열 가지 대지법과 여섯 가지 대번뇌지법과 그리고 두 가지 부정지법인 심(尋)과 사(伺)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욕계의 무기의 유부심이란, 이를테면 살가야견(薩迦耶見 : 즉 유신견을 말함)이나 변집견과 상응하는 마음을 말하는데, 여기에서 견이 증가하지 않은 것은 앞에서 해석한 바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60) 그 밖의 무기인 무부심(無覆心)의 품류에서는 오로지 열두 가지 심소만이 함께 생기한다고 인정[許]해야 할 것이니, 말하자면 열 가지 대지법과 아울러 부정지법인 심과
  
  
60) 즉 견은 열 가지 심대지법 중의 하나인 혜의 차별로서 그 본질이 동일하기 때문에 그것을 따로이 더하 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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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외방(外方)의 여러 논사들은 "악작도 역시 무기(즉 무부무기)와 통한다"고 주장하고자 하였다. 그럴 경우 이것과 상응하는 마음의 품류에서는 바로 열세 가지의 심소가 존재하여 함께 생기하게 되는 것이다.61)
  수면(睡眠)은 앞에서 설한 일체의 마음의 품류와 상위하지 않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그것은 선·불선·무기의 3성(性)과 통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음의 어떠한 품류에서도 이것이 존재하면 이를 더하여 설해야 하니, 이를테면 스물두 가지(선심의 경우)는 스물세 가지가 되고, 만약 스물세 가지(선심에 악작이 존재하는 경우)라면 스물네 가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불선심과 무기심의 경우도 이 같은 예에 따라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욕계에서 심소가 함께 생기[俱生]할 때, 온갖 품류에서의 정해진 수량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제 마땅히 상계(上界)에 대해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초정려에서는 불선과,
  그리고 악작과 수면(睡眠)을 제외하며,
  중간정려에서는 또한 심(尋)을 제외하며,
  그 이상에서는 아울러 사(伺) 등을 제외한다.
  初定除不善 及惡作睡眠
  中定又除尋 上兼除伺等
  
  논하여 말하겠다. 초정려 중에서는 앞(욕계)에서 설한 온갖 심소법 중에서 오로지 불선과 악작(惡作)과 수면(睡眠)을 제외한 그 밖의 것을 모두 갖추고
  
  
  
61) 여기서 외방제사(外方諸師)는 카슈미르 이외 나라의 논사 즉 외국사(外國師)를 말한다. 즉 그들은 무 부무기인 공교처·이숙·통과심(通果心) 등에서도 짓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이미 지은 것을 후회하며, 짓고 도 완전히 이루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등의 마음이 생겨나기 때문에 악작은 무기와 통한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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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다. 여기서 '오로지 불선의 심소'라고 한 것은 진수면(瞋隨眠)과 첨(諂)·광(誑)·교(憍)를 제외한 그 밖의 분(忿) 등과 무참·무괴를 말하며, '그 밖의 것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함은 욕계에서 설한 바와 같다.62)
  중간정려에서는 앞에서 제외한 것을 제외하고, 여기에 다시 심(尋)을 제외한 그 밖의 것을 모두 다 갖추고 있다.63)
  제2정려 이상에서부터 무색계 중에 있어서는 앞에서 제외한 것을 제외하고, 또한 사(伺) 등을 제외하는데, 여기서 '등'이라고 한 것은 첨·광도 제외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 밖의 나머지 처소에서는 모두 앞에서와 같이 갖추고 있다.
  그런데 경에서 설하기를, "첨과 광의 지극함은 범천에까지 이른다"고 하였으니,64) 중생(즉 梵衆)이 서로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지(上地, 제2정려 이상)에는 그러한 일이 없[기 때문에 첨과 광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65) 이를테면 대범왕이 자신의 범중(梵衆)에 처하고 있다가 문득 마승필추(馬勝苾芻)로부터 '이러한 4대종은 응당 어떠한 상태에서 멸진하여 남음이 없게 되는가'하는 질문을 받게 되었다. 범왕은 남김없이 소멸한 상태에 대해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바로 교란(憍亂)되어 답하기를, "나는 이러한 범중 가운데
  
  
62) 색계에는 불선과 우근(憂根)과 단식(段食) 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오로지 불선인 소번뇌지법 일 곱 가지(첨·광·교를 제외한 것)와 무참 무괴와 진(瞋) 등 열 가지 번뇌와, 우근과 상응하는 악작과, 단식성 인 수면을 제외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수면품(隨眠品)」에서 상론하고 있음.
63) 중간정려란 초정려과 제2정려 사이를 말하는 것으로, 이를 따로이 규정하는 것은 이러한 경지가 무심 유사(無尋唯伺)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2정려는 무심무사(無尋無伺)로서, 여기서 심과 사는 8동법(動法, 혹 은 災患)의 하나로, 색계 4정려의 차별은 이것의 원리(遠離) 불원리에 따라 설정된 것이다.(본론 권제28, p.1308 참조.)
64) 『정법념경(正法念經)』 권제33(대정장17, p. 193), "諂曲一法遍於欲界及於梵天." 이하 초선에 첨(諂, 아첨)과 광(憍, 속임수)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밝히고 있다.
65) 초선천은 범중천(梵衆天)·범보천(梵輔天)·대범천(大梵天)의 처소로, 이 모두를 대범왕을 중심으로하 는 범천(梵天)이라 부른다. 여기에는 왕과 신하 민중의 상하존비의 차별이 있고, 이러한 계급적 차별에 의해 질서를 유지하여 서로 의지하는 바로 삼기 때문에 첨과 광이 존재한다. 그러나 제2선 이상에는 왕과 신하의 차별이 없기 때문에 첨과 광이 없다는 것이다. 『현종론』 권제6(한글대장경200, p. 146)에서는 이 같은 사실 을 바로 논설하고 있다. '욕계에서부터 범천에 이르기까지는 왕과 신하와 중생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첨과 광 이 존재하지만, 그 이상의 단계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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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대범(大梵)이며, 바로 자재(自在)이며, 바로 작자(作者)이며, 바로 화자(化者)이며, 바로 양자(養者)이며, 바로 일체의 아버지이다"고 하였다.66) 그리고 이렇게 말하고 나서 범중 밖으로 그(마승필추)를 불러내어 아첨하여 말하기를 부끄럽다고 사죄하고서 돌아가 부처님께 물어보게 하였던 것이다.67)
  이와 같이 온갖 계(界)와 지(地)에 존재하는 온갖 마음의 품류와 [함께 생기하는] 심소의 수량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제 다음으로 마땅히 앞에서 분별한 온갖 심소법 가운데 약간의 차별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무참(無慚)과 무괴(無愧), 애(愛)와 경(敬)의 차별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참과 무괴는 존중하지 않는 것이고
  죄를 두렵게 여기지 않는 것이며,
  '애'와 '경'이란 말하자면 신(信)과 참(慚)으로서
  오로지 욕계와 색계에만 있을 뿐이다.
  無慚愧不重 於罪不見怖
  愛敬謂信慚 唯於欲色有
  
  논하여 말하겠다. 무참과 무괴의 차별은 이러하다. 온갖 공덕(戒·定·慧의 삼학을 말함)과 공덕 있는 자(즉 스승)에 대해 공경하는 일이 없고, 숭배하는 일이 없으며, 어렵게 여겨 꺼리는 일[忌難]도 없을 뿐더러, 따라 속하는 일[隨屬], 즉 제자로서의 예의도 없는 것을 일컬어 무참이라고 한다. 즉 이는 바로 공경에 적대되는 법이다.68)
  
  
66) 여기서 자재( vara)란 일체의 세간을 통섭(統攝)하여 마음대로 지배하는 자. 작자(kart )는 기세 간을 조작하는 자. 화자(nirm t )는 유정세간을 화작(化作)하는 자. 생자(sra )는 일체의 생류를 산출 하는 자. 양자(po a)는 유정세간을 양육하는 자의 뜻.
67) 이 이야기는 『장아함경』 권제16 『견고경(堅固經)』(대정장1, p. 102상)과 『대비바사론』 권제129( 대정장27, p. 670하)에 나온다.
68) 그러나 무참은 공경이 결여된 상태는 아니며, 개별적 존재[別體]로서 공경과 대응하는 법이다. 무명( 無明)과 명(明)의 관계 역시 이러하다.(본론 「세간품」 권제1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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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모든 선사(善士)가 꾸짖고 싫어하는 법을 일컬어 죄(罪)라고 하는데, 이러한 죄에 대해 두렵게 보지 않는 것을 일컬어 무괴라고 한다. 그리고 여기서 '두렵다'는 말은 애호할 만하지 않은 과보를 나타내니, 그것은 능히 두려움을 낳기 때문이다.69)
  '두렵게 보지 않는다'는 말은 어떠한 뜻을 나타내고자 한 것인가? 그것(죄)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일컬어 '두렵게 보지 않는다'고 한 것인가, 아니면 그것(죄의 과보)의 두려움을 보지 않는 것을 '두렵게 보지 않는다'고 말한 것인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과실이 범하게 되는 것인가?
  두 가지 모두에 과실이 있게 될 것이니, 만약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라면 마땅히 지혜를 드러내게 될 것이며, 그것의 두려움을 보지 않는 것이라면 마땅히 무명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70)
  [두렵게 보지 않는다고 하는] 이 말은 견(見,즉 사견의 지혜)이나 불견(不見,무명)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나타내는 것인가?
  이는 어떤 수번뇌(隨煩惱)의 법으로서 그러한 두 가지 원인(혜와 무명)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을 설하여 무괴라 이름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71)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지은 죄에 대해 그 자체를 관찰하여 부끄러워함이 없는 것을 일컬어 무참이라 하고, 다른 것(이를테면 이숙과)을 관찰하고서도 부끄러워함이 없는 것을 일컬어 무괴라 한다"고 하였다.72)
  
  
69) 미래에 지옥 등의 과보를 받는다는 말을 듣고서 현재 두려움을 낳게 되는 것을 말함.
70) 즉 전자는 악과(惡果)인 줄 알면서도 두렵지 않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견(邪見,판단의 慧를 본질 로 함)이 되는 것이고, 후자는 두려워할 만한 과보를 초래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명이 되는 것이다.
71) 이러한 원인을 『현종론』 권제6(한글대장경200, p. 147)에서는 인근인(隣近因)이라 한다. 즉 사견과 무명의 동인이 되는 수번뇌를 일컬어 무괴라고 한다는 뜻. 이를테면 미래의 악과를 두렵게 보지 않는 무괴의 수번뇌에 의해 인과부정의 사견과 인과도리에 미혹하는 무명이 인기(引起)되어 현행하게 되는 것이다.
72) 말하자면 이숙인은 마땅히 때가 되어 현기하기 때문에 '그 자체'라고 하였고, 그것의 이숙과는 후시( 後時)에 비로소 있을 것이기 때문에 '다른 것'이라고 하였다.(『현종론』 권제6, 한글대장경200, p.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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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그렇다면 이 두 가지는 관찰되는 바가 동일하지 않은데, 어떻게 구기(俱起)할 수 있는 것인가?
  이 두 가지가 일시에 구기하여 그 자체와 다른 것을 별도로 관찰하는 것이라고는 설하지 않았다.73) 그렇지만 부끄러워함이 없는 것[無恥]이 죄 그 자체를 관찰할 때 두드러진 것을 설하여 무참이라 이름하고, 또한 부끄러워함이 없는 것이 [죄 그 자체와는] 다른 것을 관찰할 때 증성한 것을 설하여 무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참(慚)과 괴(愧)의 차별은 이러한 해석와 반대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첫 번째 해석과는 반대로 공경함이 있고, 숭배함이 있으며, 어렵게 여겨 꺼리는 일이 있을 뿐더러, 따라 속하는 일[隨屬, 즉 제자로서의 예의]이 있는 것을 설하여 '참'이라고 하고, 죄에 대해 두렵게 보는 것을 일컬어 '괴'라고 한다. 그리고 두 번째 해석과는 반대로 지은 죄에 대해 그 자체를 관찰하여 부끄러워함이 있는 것을 일컬어 '참'이라 하고, 다른 것을 관찰하여 부끄러워함이 있는 것을 일컬어 '괴'라고 한다.
  무참과 무괴의 차별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애(愛)와 경(敬)의 차별은 이러하다. '애'란 애락(愛樂)을 말하는 것으로, 그 본질[體]은 바로 신(信)이다.74) 그런데 '애'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염오함이 있는 것이고, 둘째는 염오함이 없는 것이다. 염오함이 있는 '애'란 바로 탐(貪)을 말하니, 이를테면 처자식 등을 애락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염오함이 없는 '애'란 바로 신(信)을 말하니, 이를테면 스승[師長] 등을 애락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신'이면서 '애'가 아닌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고(苦)·집(集)을
  
  
  
73) 이러한 무참과 무괴가 동시에 구기하여 각기 별도로 죄 자체나 다른 사실을 관찰한다는 것이 아니라, 죄 자체를 관찰할 때에도 다른 사실을 관찰하는 마음이 수반되는 경우가 있지만 다만 죄 그 자체에 대해 부끄 러워함이 없는 마음[無恥]이 두드러진 것을 무참이라 한다. 즉 이 때에도 역시 무괴라고 할 수 있지만 다른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작용이 저열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지 않으며, 다만 수승한 작용에 근거하여 무참이 라고 한다는 뜻. 그리고 무괴는 이 반대의 경우이다.
74) 왜냐 하면 법성이나 공덕 있는 자를 믿고 존경하여야 비로소 그것을 애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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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연으로 하는 '신'이 바로 그것이다. '애'이면서 '신'이 아닌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온갖 염오의 애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신'과 '애' 모두에 통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멸(滅)·도(道)를 소연으로 하는 '신'이 바로 그것이다.75) 그리고 '신'과 '애' 모두가 아닌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앞의 세 가지를 제외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신(信)이란 덕 있는 자를 인허(忍許)하는 것으로, 이것이 선행함에 따라 비로소 애락을 낳게 된다. 따라서 '애'는 '신'이 아니다"고 하였다.76)
  경(敬)이란 이를테면 경중(敬重)을 말하는 것으로, 그 본질은 바로 참(慚)이다. 즉 앞에서 '참'에 대해 해석한 바와 같으니, 이를테면 '공경함[敬]이 있고……'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경'이면서 '참'이 아닌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고(苦)·집(集)을 소연으로 하는 '참'이 바로 그것이며, '참'과 '경' 모두에 통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멸(滅)·도(道)를 소연으로 하는 '참'이 바로 그것이다.77)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경(敬)이란 숭배하고 존중[崇重]하는 바가 있는 것으로, 이것이 선행함에 따라 비로소 참의 부끄러워함[慚恥]을 낳게 된다. 따라서 '경'은 '참'이 아니다"고 하였다.78)
  
  
75) 멸·도를 인허(認許)하기 때문에 그것은 신(信)의 대상이며, 또한 무루법은 참으로 애호할 만한 것이 기 때문에 애(愛)의 대상이다. 따라서 멸·도는 신과 애 모두와 통하는 것이다.
76) 이러한 유설(有說)은 유부의 정의(正義)가 아닌 것으로 평석되는데, 칭우는 이를 논주 세친의 설로 이 해하였다. 즉 『현종론』 권6(한글대장경200, p. 148)에 의하면 '신'에는 인허(忍許)와 원락(願樂) 두 가지 상이 있어 유덕자(有德者)를 소연으로 삼아 지금 바로 인허하면, 원하는 즐거움도 역시 낳아지기 때문에, 혹 은 원인에 대해서도 역시 결과의 명칭을 설정할 수 있으므로 '신'은 바로 '애'의 인근인(隣近因)이기 때문에 '애'라고 일컬어도 과실이 없다고 하였다.
77) 고·집은 유루의 인과로서 가염법(可厭法)이기 때문에 공경할 마음이 없으며, 따라서 '참'이면서 '경' 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멸·도는 무루법으로서 마음에 오히려 공경함이 있기 때문에 '참'이면서 역시 '경'인 것이다.
78) 이 또한 주76)에서의 신과 애의 관계처럼 양자를 다만 인과관계로서 이해한 것으로, 논주 세친의 설이 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현종론』(동p.149)에서는 그럴 경우 먼저 공경을 일으켰을 때에는 아직 참의 부 끄러워함을 갖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참의 부끄러워함이 없는 자일지라도 능히 공경을 일으켜야 하며, 또한 만약 공경할 때 이미 참의 부끄러워함이 있었다고 한다면, 마땅히 '공경이 선행함에 따라 비로소 참의 부끄러 워함을 낳게 되었다'고도 설해서는 안 된다. 만약 '공경할 때 참의 부끄러워함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경이 바로 참은 아니다'고 한다면, 여기에는 '경은 참이 아니다'고 하는 말의 근거[證因]가 없기 때 문에 이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다. 따라서 '경'은 바로 '참'의 차별일 뿐이라고 논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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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연의 경계인 보특가라(補特伽羅, pudgala: 인간을 말함)를 통해 볼 때, '애'와 '경'의 유무에 대해서는 마땅히 4구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애'가 있으면서 '경'이 없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처자식이나 함께 사는 이나 문인(門人) 등에 대해서가 바로 그러하다. '경'이 있으면서 '애'가 없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다른 이의 스승이나 덕이 있는 귀인(貴人) 등에 대해서가 바로 그러하다. '애'도 있고 '경'도 있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자신의 스승이나 부모 백숙(伯叔) 등에 대해서가 바로 그러하다. '애'도 없고 '경'도 없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앞의 세 가지를 제외한 이에 대해서가 바로 그러하다.
  나아가 이와 같은 '애'와 '경'은 욕계와 색계에만 존재할 뿐 무색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신(信)과 참(慚)은 대선지법인데, 어찌 무색계에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겠는가?79)
  '애'와 '경'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법(法)과 보특가라를 소연으로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즉 법을 소연으로 하는 '애'와 '경'은 3계에 모두 존재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뜻은 보특가라를 소연으로 하는 것에 대해 설한 것이기 때문에 욕계와 색계에는 존재하지만 무색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80)
  이와 같이 애와 경의 차별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79) 애(愛)는 신(信)을 본질로 하고, 경(敬)은 참(慚)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애와 경 대신에 대 선지법에 포섭되는 신과 참을 언급한 것이다.
80) 욕계·색계에는 색신이 존재하고 거기에는 존비(尊卑) 내지 모양새 등 현색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애 '와 '경'이 있는 것이다. 물론 무색계에도 무색의 유정이 있기 때문에 보특가라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거 기에는 색신이 없고 모양새 등의 현색이 없기 때문에 보특가라를 소연으로 한 애경심(愛敬心)을 일으키는 일 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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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심(尋)과 사(伺), 만(慢)과 교(憍)의 차별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심(尋)과 사(伺)는 마음의 거칠고 세밀함이며
  만(慢)은 타인에 대한 마음의 오만함[擧]이며
  교(憍)는 자신의 법에 염착함으로써
  마음이 고양되어 돌아봄이 없는 것이다.
  尋伺心細麤 慢對他心擧
  憍由染自法 心高無所顧
  
  논하여 말하겠다. 심(尋)과 사(伺)란 이를테면 마음의 거칠고 세밀함을 말한다. 즉 마음의 거친 성질[麤性]을 일러 '심'이라고 이름한 것이며, 마음의 세밀한 성질[細性]을 일러 '사'라고 이름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심·사의] 두 가지가 한 찰나의 마음[一心]과 상응하[여 동시에 일어날 수 있]는 것인가?81)
  
  
81) 이 난문은 보광이나 법보에 의하면 경부에 의한 것이다. 즉 유부 범주표 상에서 다른 의식작용과 다양 하게 결합할 수 있는 부정지법에 속하는 심(尋, vitarka)과 사(伺, vic ra)는 일반적으로 마음(전5식)으로 하여금 감각적 대상(5경)을 추구하게 하는 보다 거친 성질의 의식작용[心之麤性], 제6의식으로 하여금 비감각 적 대상(법경)을 파악하게 하는 보다 세밀한 성질의 의식작용[心之細性]으로 정의되는데, 양자는 마치 찬물 위에 숙소(熟酥)를 띄워놓고 뜨거운 햇볕을 쪼이면 풀리지도 않고 서로 엉키지도 않은 채 각기 제 형태를 유 지하듯이 개별적 실체(別體)로 상응구기함으로써 마음으로 하여금 추(酥)·세(細)에 치우치지 않고 고른 인식 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한다. 말하자면 유부에서는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의식작용(麤·細)의 기체로서 '심' 과 '사'라고 하는 존재를 상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햇볕과 찬물은 숙소를 엉키 거나 풀리지 않게 하는 원인으로, 그 본질[體]이 아니듯이 심과 사 역시 마음을 추·세에 치우치지 않게 하는 원인일 뿐, 그 자체 추·세의 본질이 될 수 없으며, 따라서 그 자체의 본질을 갖지 않은 어떤 것을 개별적 실 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경량부의 기본논리이다. 그렇다고 할 때 개별적 실체가 아닌 추·세, 즉 서로 모순 되는 두 가지 사태는 한 찰나의 마음에 동시에 일어날 수 없으며, 또한 상응한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왜 냐 하면 상호 모순되는 그것들은 다만 동일물[心]의 계시적 차별상이기 때문이다. 곧 '종자상속의 이론'을 교 설의 기본틀로 삼는 경량부로서는 유부의 개별적 실체로서의 심·심소 상응구기설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으며 , 여기서의 논의도 그 한 예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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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이는 이와 같이 해석하고 있다. 즉 "찬물 위에 떠 있는 숙소(熟酥) 상에 뜨거운 햇볕이 비추어 쪼이더라도 숙소는 풀리지도 않고 엉키지도 않는 것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한 찰나의 마음에 심도 존재하고 사도 존재하니, 마음은 이러한 심과 사로 말미암아 두루 세밀하지도 거칠지도 않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 찰나의 마음에 [이 두 가지 심소는] 함께 존재하여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비바사사의 제1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심과 사는 바로 거칠고 세밀함의 원인으로서, 거칠고 세밀함 그 자체는 아닐 것이니, 이를테면 [찬]물과 햇볕은 바로 [숙소가] 엉키고 풀리는 것의 원인으로서, 그 자체가 엉키거나 풀리는 것은 아닌 것과 같은 것이다. 또한 거칠고 세밀한 성질[麤·細性]은 상대(相待)적으로 설정된 것이니, 3계(界) 9지(地) 9품(品)의 차별은 상하로서 서로 형성된 것이며, 그럴 경우 나아가 유정천(有頂天)에도 마땅히 심과 사가 존재한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82) 또한 거칠고 세밀한 성질은 [다만 마음의 차별일 뿐] 개별적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에 의해서는 심과 사를 분별할 수 없는 것이다.(세친의 난)
  다시 어떤 이는 해석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심과 사의 두 가지 법은 바로 어언(語言)의 행(行)이니,83) 그래서 계경에서 말하기를, '요컨대 심·사가 있어 비로소 어언이 있게 된 것이다'고 하였던 것이다. 곧 심과 사가 없다면 이러한 어언의 행도 있지 않을 것이니, 그러한 것 중에서 거친 것을 '심'이라 이름하고, 세밀한 것을 '사'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그러니 1찰나의 마음 안에 개별적인 법[別法]으로서의 거친 것(심)과 개별적인 법으로서의 세밀한 것(사)이 있을지라도 이치상 무슨 모순이 있을 것인가?(비바사사의 제2설)
  
  
82) 3계 9지 9품 중에서 보다 상계 상지의 상품의 심소는 세밀하다고 해야 할 것이고, 보다 하계 하지의 하품의 심소는 거칠다고 해야 할 것이며, 나아가 유정천 즉 비상비비상처의 상품은 하품보다 세밀하지만 하품 은 그 지의 멸진정보다는 거칠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유부에 의하는 한 초선 이상에는 심·사가 존재하지 않 는다.
83) 여기서 어언(語言)의 '행(sa sk ra)'이란 말의 원인이 되어 그것을 능히 일으키게 하는 근거를 말한 다. 이 설은 보광은 비바사사의 학설로, 법보는 유부 이사(異師)의 학설로 평석하고 있으나 칭우는 경량부의 학설로 평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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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자성의 차별을 지닌] 개별적인 실체의 종류[別體類]로서 존재한다면 이치상 실로 어떠한 모순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개별적인 실체의 종류로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치상 모순이니, 하나의 실체의 종류 중에 상·하 [두 품류]가 동시에 일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84) 만약 [이러한 두 가지] 실체의 종류 역시 차별이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마땅히 그러한 실체의 차별상이 어떠한가에 대해 설해보아야 할 것이다.(세친의 再難)
  이러한 두 가지 실체의 종류의 차별상은 [너무나 미묘하여] 설하기 어려우며, 다만 상·하(즉 細·麤)에 의해 그 차별상을 나타낼 수 있을 뿐이다.(비바사사의 답)
  상·하에 의해 능히 그 차별상을 나타낼 수 없으니, [심·사 뿐만 아니라] 각각의 종류 중에도 상·하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심·사의 두 가지 법은 결정코 한 찰나의 마음과 상응한다고 주장할 수 없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세친의 재난)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계경 중에서 "초정려에서는 5지(支)를 구족한다"고 설하였겠는가?(비바사사의 반증)85)
  '5지를 구족한다'는 말은 어떤 한 지(地)에 대해 설한 것으로, 1찰나에 그러하다는 말은 아니기 때문에 거기에는 어떠한 허물도 없는 것이다.(세친의 釋經)
  이와 같이 심과 사의 차별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만(慢)과 교(憍)의 차별은 이러하다.
  '만'은 이를테면 타인에 대해 마음이 스스로 치켜세우는 성질[自擧性]을 말하니, 자신과 다른 이의 덕(德)의 차별을 재고 헤아려 마음이 스스로를 믿고 거들먹거리며[擧恃] 다른 이를 능멸하기 때문에 '만'이라고 일컬은 것이
  
  
  
84) 세친 역시 경량부처럼 심·사 무별체설을 취한다. 따라서 각기 개별적인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 심· 사 즉 상·하 2법이 동시에 구기하는 일은 없기 때문에 심·사의 일심 상응설은 이치상 모순이라는 것이다.
85) 『중아함경』 권제58 『법락니경(法樂尼經)』(대정장1, p. 788). '초선에는 5지(支)가 있으니, 각(覺, 尋의 구역)·관(觀, 伺의 구역)·희(喜)·락(樂)·일심(一心, 즉 心一境性)이 그것으로, 이것을 이른바 초선 의 5지라고 한다' 정려지에 대한 논의는 본론 권제28(p.1281 이하)을 참조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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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86)
  '교'는 이를테면 먼저 자신의 법에 대해 염착하여 마음으로 하여금 오만 방일[傲逸]하게 하여 다른 것을 돌아보는 일이 없는 성질을 말한다.87)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술에 의해 생겨난 흔거(欣擧, 들떠 거들먹거리는 것)의 차별을 설하여 취한 것이라고 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탐으로부터 생겨난 흔거의 차별을 설하여 '교'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다.88)
  이상이 이를테면 '만'과 '교'의 차별상이다.
  
  이와 같이 온갖 심과 심소의 품류의 동일하지 않음과 동시생기[俱生]의 관계와 그 이상(異相)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그런데 심과 심소에 대해 계경 중에서는 그 뜻에 따라 여러 가지의 명칭과 개념[名想]을 설정하고 있다. 이제 여기서 마땅히 이러한 명칭의 뜻의 차별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심(心)·의(意)·식(識)은 그 본질이 동일하며
  심과 심소는 유소의(有所依)로도
  
  
  
86) 만이란 자신의 입장에서 타인의 덕을 차별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다시 일곱 가지가 있다. 즉 가문·재 산·지위·용모·힘·지식·기예·지계(持戒) 등에 있어 자신보다 열등한 이에 대해 자신이 더 뛰어나다 하고 , 동등한 이에 대해 동등하다고 하는 만(慢), 자신과 동등한 이에 대해 자신이 더 뛰어나다 하고, 자기보다 더 뛰어난 이에 자기와 동등하다고 하는 과만(過慢), 자신보다 더 뛰어난 이에 대해 자기가 더 뛰어나다고 하 는 만과만(慢過慢), 오취온을 나, 혹은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는 아만(我慢), 예류과의 뛰어난 덕을 증득하지 못했으면서 증득했다고 여기는 증상만(增上慢), 가문 등이 자신보다 월등히 뛰어난 이에 대해 자기가 조금 열 등하다고 하는 비만(卑慢).,덕이 없으면서 자기에게 덕이 있다고 하는 사만(邪慢)이 그것이다.
87) 즉 자신의 용감함이나 건강, 재산, 지위, 도덕규범[戒], 지혜, 친족 등의 존재[法]에 대해 먼저 염착 을 일으킴으로써 마음에 오만 방일함이 생겨 온갖 선본(善本)을 되돌아보는 바가 없기 때문에, '교'라고 일컬 은 것이다. 온갖 선본에 대해 되돌아보는 바가 없다고 함은, 마음이 오만해짐에 따라 온갖 선업을 즐거이 수 습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현종론』 권제6, 한글대장경200, p. 152)
88) 이는 곧 염오의 희(喜)가 '교'라는 뜻으로, 유부 비바사사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희는 제2선 이상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교는 3계에 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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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소연(有所緣)으로도, 유행상(有行相)으로도,
  상응(相應)으로도 일컬어지니, 뜻에 다섯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心意識體一 心心所有依
  有緣有行相 相應義有五
  
  논하여 말하겠다. 집기(集起)하기 때문에 '심(心)'이라 이름한 것이고, 사량(思量)하기 때문에 '의(意)'라고 이름한 것이며, 요별(了別)하기 때문에 '식(識)'이라고 이름한 것이다.89) 다시 어떤 이는 해석하여 말하기를, "정(淨)과 부정(不淨)의 계(界)에 여러 가지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심'이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며,90) 이러한 '심'은 다른 것의 소의지(所依止)가 되기 때문에 '의'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며, 능의지(能依止)가 되기 때문에 '식'이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91) 그렇기 때문에 심·의·식의 세 가지 명칭은 비록 그것이 드러내는 뜻은 다를지라도 그 본질은 동일하다"고 하였다.
  심·의·식의 세 가지 명칭은 그것이 드러내는 뜻은 다를지라도 본질이 동일한 것과 마찬가지로 온갖 심과 심소를 유소의(有所依)·유소연(有所緣)·유행상(有行相)·상응(相應)으로 이름하는 것 또한 역시 그러하여, 비록 그 말의 뜻은 다를지라도 그 본질은 동일하다. 즉 심·심소를 모두 '유소의(sasraya)'라고 이름하니, 소의가 되는 근(根)에 의탁하기 때문이며, 혹은 '유소연(salambana)'이라고 이름하니, 소연의 경계를 취하기 때문이며, 혹은 '유행상(s k la)'이라고 이름하니, 즉 소연의 품류를 차별함에 있어 [심
  
  
  
89) 심(心, citta)의 어원 cit는 생각하다, 이해하다의 뜻이지만, 그것은 다시 ci(쌓다)에서 유래한 것 으로 보고 '집기'라고 번역한 것이다. 곧 마음은 신(身)·구(口)·의(意) 3업을 집기한다. 의(意, manas)는 어근 man(생각하다)에 근거하여 '사량'으로 번역한 것이고, 식(識, vij~ na)는 vi-j~ (다르게 알다)에서 유래한 것이므로 '요별'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90) 여기서 정(淨)·부정(不淨)이란 선·불선을 말한다. 즉 마음에는 닦고 닦지 않음에 의해 선·불선·무 기 등 여러 단계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citta로 이름한 것으로, 이는 citra(種種)에 근거한 경부(經部) 혹은 유가사(瑜伽師)의 해석이다.
91) 소의지가 된다고 함은 현행식의 근거가 되는 전찰나의 의근(意根)을 말하며, 능의지가 된다고 함은 의 근에 근거하는 현행의 의식(意識)을 말한다. 즉 본론 권제1에서 의근을 분별하면서 과거로 낙사한 무간멸(無 間滅)의 의(意)가 다음 찰나 의식의 소의지가 된다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이를 근거로 해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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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 심소가] 평등하게 행상(行相)을 일으키기 때문이며,92) 혹은 '상응(samprayukta)'이라고 이름하니, 평등하게 화합하기 때문이다.93)
  무슨 뜻에 근거하여 '평등하게 화합한다'고 일컬은 것인가?
  다섯 가지의 뜻이 있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심과 심소는 다섯 가지의 뜻에서 평등[五義平等]하기 때문에 '상응'이라고 설한 것이다. 즉 소의·소연·행상·시(時)·사(事)가 모두 평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사평등이란, 하나의 상응 중에서는 심의 체(體)가 하나이듯이 여러 심소도 각기 역시 그러하다는 것이다.94)
  심과 심소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고, 그 뜻에 대해서도 널리 분별하였다.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이란 어떠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심불상응행법이란,
  득(得)과 비득(非得)과 동분(同分)과
  무상과(無想果)와 두 가지 정(定)과 명(命)과
  네 가지 상(相)과 명신(名身) 등의 종류이다.95)
  
  
92) 여기서 '행상( k ra)'이란 심·심소 상에 나타난 형상으로서, '행'은 행해(行解) 즉 능연이 심(心) 을 뜻하고, '상'은 상모(相貌) 즉 마음 위에 나타난 이미지를 뜻한다.
93) 즉 평등하게 동시[俱時]에 다른 심·심소와 화합하여 소연이 되는 대상을 행해(行解)하기 때문이다.
94) 즉 유부에서는 심과 심소는 각기 개별적 실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하나의 인식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는 반드시 그것들이 상응 구기(俱起)해야만 하는데, 양자는 이 때 다섯 가지의 관계로서 상응한다. 이를테면 동일한 시간[時, kala]에, 동일한 감관[所依, raya]에 의해, 동일한 대상[所緣, alambana]에 대한 동일한 형상 즉 이미지[行相, k ra]를 갖는데, 이 때 심과 온갖 심소 자체[事, dravya]는 각기 하나이다. 예를 들 어 어떤 순간에 눈과 푸른 항아리에 의해 푸른색의 형상을 띤 1법의 시의식이 생겨났다면, 동일한 순간에 동 일한 소의·소연을 근거로 하여 동일한 형상을 띤 1법의 수·상 등이 심과 동등한 관계[평등, samat ]로서 반드시 함께 일어난다는 것이다.
95) 득(得)·비득(非得)·동분(同分)·무상과(無想果)·무상정(無想定)·멸진정(滅盡定)·명(命)·생(生) ·주(住)·이(異)·멸(滅)·명(名)·구(句)·문(文) 등의 불상응행법 열네 가지는, 이를테면 존재양태에 관한 관념을 추상화시켜 얻은 개념으로, 유부에서는 '식유필경(識有必境)'에 근거하여 이를 각기 개별적 실체[別法 ]로 인정하고 있다. 이에 반해 경량부에서는, 이는 다만 소의신의 상속상에 나타나는 제 상태를 개념적으로 가설한 것(praj~ pti)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하였고, 세친도 대체로 이에 동조하고 있기 때문에 이하 열네 가 지 법의 해설과 더불어 이것의 가실(假實)문제에 대한 유부와 경량부 사이의 대론이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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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心不相應行 得非得同分
  無想二定命 相名身等類
  
  논하여 말하겠다. 이와 같은 온갖 법은 마음과도 상응하지 않으며, 색 등의 자성도 아닌 것으로 행온(行蘊)에 포섭된다. 그렇기 때문에 심불상응행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 중에서 바야흐로 득(得)과 비득(非得)의 상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하리라.96)
  게송으로 말하겠다.
  
  득(得)이란 말하자면 획득[獲]과 성취이며,
  비득은 이와 서로 반대되는 것이니,
  득과 비득은 오로지
  자상속(自相續)과 두 가지의 멸(滅)에만 있을 뿐이다.
  得謂獲成就 非得此相違
  得非得唯於 自相續二滅
  
  
  
  
96) 득(pr pti)과 비득(apr pti)은 서로 상반된 개념으로, 득이 한 개인(유정)으로 하여금 자신이 상속 한 유위제법이나 택멸 비택멸의 무위법과 적극적으로 관계[合·持]시키는 힘이라면, 비득은 그러한 제법과 소 극적으로 관계[離·失]시키는 힘을 말한다. 다시 말해 유부에서는 유정들로 하여금 지옥 등의 악과(惡果)를 얻게 하고 천상의 선과(善果)를 얻게 하는 등 3계·9지·5취·4생·범성(凡聖)·유루 무루의 차별을 있게 하 는 힘(所得諸法의 生因)을 개별적인 실체(別法, p thag dharma)로 상정하여 그 실재성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만약 이러한 득의 실재성을 부정하게 되면 범성(凡聖)의 차별은 물론 번뇌의 이단(已斷)·미단(未斷)을 구별 할 수도 없게 되기 때문이다. 즉 번뇌단멸의 획득은 그것을 획득하게 하는 힘(불상응행)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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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하여 말하겠다. 득(得)에는 두 가지의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는 아직 획득하지 않았거나 이미 상실한 것을 지금 획득하는 것[獲, pr tilambha]이고, 둘째는 획득하여 상실하지 않는 성취(成就, samanv gama)이다. 그리고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비득(非得)은 이와 서로 반대되는 것임을.97)
  어떠한 법에 대해서 득과 비득이 있는 것인가?
  자신의 상속(相續)과 두 가지 멸(滅)에 대해서만 있으니, 이를테면 유위법으로서 만약 자신의 상속 중에 떨어져 존재[墮在]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에 대해서는 득과 비득이 있다. 그러나 타인의 상속 중에 [존재하는 법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으니, 다른 이의 법을 성취하는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98) 또한 비상속(비유정)에 [존재하는 법에] 대해서도 그렇지 않으니, 비 유정의 법을 성취하는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유위법의 경우는 결정적으로 이와 같다.
  무위법 중에서는 오로지 두 가지 멸(택멸과 비택멸)에 대해서만 득과 비득이 있다. 즉 일체 유정으로서 비택멸을 성취하지 않은 자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대법(對法) 중에 전(傳)하여 설(說)하는 바가 이와 같으니, "누가 무루법(즉 비택멸)을 성취하는가? 이를테면 일체의 유정이다"고 하였던 것이다.99) 그리고 초찰나의 구박(具縛)의 성자와 그 밖의 일체의 구박의 이생을 제외한 그 밖의 모든 유정은 다 택멸을 성취한다.100) 나아가 결정코 허공(虛
  
  
97) 즉 이전에 아직 획득하지 않았거나 획득하여 이미 상실한 법의 비득을 일컬어 '불획(不獲)'이라 하고, 이미 상실한 법의 비득을 일컬어 '불성취'라고 한다.
98) 나에게는 나의 번뇌와 나의 업 등에 대한 득과 비득이 존재하지만, 타인의 번뇌와 업 등은 결코 나와 관계(득)되거나 이미 관계되었다가 상실되는 일(비득)은 없는 것이다.
99) 이는 『발지론』 권제19(대정장26, p. 1022상 ; 한글대장경176, p. 466)의 "등각지(等覺支)를 성취하 는 모든 이, 그들은 무루법도 성취하는가? 답: 등각지를 성취하는 모든 이, 그들은 무루법도 성취한다. 그러 나 어떤 이는 무루법을 성취하더라도 등각지를 성취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제 이생이다"에서 뜻 을 빌려온 것으로, 무루법에 대해서는 성취(득)와 불성취(비득)가 있을 수 있다는 논증이다.
100) '초찰나의 구박(具縛)의 성자'란 견도 제1찰나인 고법지인(苦法智忍)의 단계에 들어간 성자로서, 아 직 욕계 수혹 중의 1품도 끊지 못한 자를 말한다. 즉 이러한 단계에 있는 성자는 능단(能斷)의 무루도와 소단 (所斷)인 이혹(理惑)의 번뇌가 병존하기 때문에 아직 일체의 번뇌의 속박을 떠나지 못하였으므로 '구박'이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단계에서는 택멸은 미래 생상(生相)으로서는 존재할지라도 현행하지 않기 때문에 성취 운운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밖의 일체의 구박의 이생'은 어떠한 견·수혹도 끊지 못한 이생범부를 말 하며, 그들을 '제외한 그 밖의 모든 유정'이란 견도 제2찰나 고법지(苦法智) 이후의 성자와 유루 6관행으로써 수혹의 일부를 끊은 범부의 행자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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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空)을 성취하는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허공에 대해서는 득이 있다고 말할 수 없으며, 득이 없기 때문에 비득도 역시 없는 것이다. 즉 [유부]종에서는 득과 비득은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설정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득이 있는 모든 것에는 비득 역시 있으니, 이러한 뜻에 준하여 알 수 있기 때문에 [허공의 비득에 대해서는] 별도로 해석하지 않는다.
  어떠한 근거에서 '득'이라고 이름하는 개별적 실체[別法]가 존재함을 아는 것인가?101)
  계경에서 설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계경에서 말하기를, "성자는 그러한 열 가지 무학법을 낳음으로써, 획득[得]함으로써 성취함으로써 5지(支)를 이미 끊었고……(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하였던 것이다.102)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자상 속에 속하는 법뿐만 아니라] 비유정과 타상 속의 그것 역시 마땅히 성취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계경에서 설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계경에서 말하기를, "필추는 응당 알아야 할 것이니, 전륜왕(轉輪王)이 있어 7보(寶)를 성취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하였던 것이다.103)
  
  
101) 이하 경량부와 유부 사이의 득의 실재 비실재에 관한 논란이 이루어지고 있다.
102) 『광의법문경(廣義法門經)』(대정장1, p. 922상). 여기서 열 가지 무학법이란 무학의 8정도와 정해탈 (正解脫)과 정지(正智)를 말하며, 5지란 상계의 색탐·무색탐·도거·만(慢)·무명의 5순상분결(順上分結)을 말한다.
103) 『장아함경』 권제3 『유행경(遊行經)』(대정장1, p. 21중); 『중아함경』 권제11 『칠보경(七寶經) 』(대정장1, p. 493상); 『잡아함경』 권제27 제721경과 제722경(대정장2, p. 194상). 전륜왕이란 정법으로 통치하는 이상적 군주로서, 부처님과 마찬가지로 32상을 갖추고서 윤보(輪寶)·상보(象寶)·마보(馬寶)·신주 보(神珠寶)·옥녀보(玉女寶)·장신보(藏臣寶,혹은 居士寶)·병신보(兵臣寶) 등의 7보를 성취한다. 전륜왕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12를 참조 바람. 여기서의 난문의 뜻은 곧 이러한 경설로 보건대 윤보와 같은 비유정물이 나 옥녀 같은 타인의 상속에 속한 제법에 대해서도 획득 성취한다고 할 수 있으며, 그럴 경우 자상 속에 속한 법에만 득과 비득이 있다고 한 유부정설에 어긋나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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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는 자재(自在)를 설하여 성취(成就)라고 일컬은 것이니, 이를테면 전륜왕은 그의 7보에 대해 자재력을 갖는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 하면 원하는 바에 따라 일으킬 수 있기[隨樂轉] 때문이다.104)
  그것이 이미 자재를 설하여 성취라고 일컬은 것이라면, 그 밖의 다른 경우(즉 앞의 경설에서 무학법을 성취한다고 하는 경우)는 다시 어떠한 근거에서 그것이 개별적인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임을 아는 것인가?
  개별적인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인정할 경우, 거기에는 어떠한 비리(非理)가 있는 것인가?
  이와 같은 비리가 있다. 이를테면 [그대들이] 주장하는 득은 색(色)·성(聲) 따위나 탐(貪)·진(瞋) 따위처럼 실체[體, sv bh va, 그 자체 자성을 지닌 존재]로서 알려지는 일이 없으며, 안(眼)·이(耳) 따위처럼 그 작용이 알려지는 일이 없기 때문에 '득'이라고 이름하는 개별적인 실체가 존재한다고 인정할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이 개별적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비리인 것이다. 만약 이러한 득에도 역시 작용이 있으니, 이를테면 그것은 소득(所得) 제법의 생인(生因)이 된다고 말한다면, 그러한 즉 무위에는 마땅히 득이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105) 또한 획득되어야 할 법이 아직 획득되지 않았거나, 계(界)·지(地)를 바꾸었거나 이염(離染)하였기 때문에 [일찍이 획득된 법을] 이미 사기(捨棄)하였을 경우, 그러한 법에는 현재 득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생겨날 수 있는 것인가?106) 만약 [어떤 법과] 동시에 생겨나는 득[俱生得]만이 생인이 된다고 한다면, 생(生)과 생생(生生)의
  
  
104) 즉 이 때 '성취'라는 말은 원하는 바대로 사용하고 지배할 수 있다는 뜻으로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
105) 득이라고 하는 원리가 있어 획득된 제법의 생인(生因)이라고 한다면, 무위는 불생법이기 때문에 마땅 히 획득되지 않아야 할 것이며, 또한 앞에서 득은 무위법에도 적용된다고 하였으므로 득의 실재성을 주장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뜻.
106) 이를테면 무루의 고법지(苦法智)·인(忍)처럼 수행의 결과 장래 획득될 것으로 아직 획득되지 않은 법[未得法]이나 계(界)와 지(地)를 바꿈으로써, 혹은 번뇌를 끊음으로써 버려진 법[已捨法, 예컨대 욕계 유루 법은 상지에 태어남으로써 버려지고, 유루의 염법은 번뇌를 떠남으로써 상실된다]에는 득이 없는데, 그것들이 어떻게 생겨날 수 있는 것인가? 다시 말해 그 발생대상이 되는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의 발생원인인 득 이 장차 무엇을 발생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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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相)은 또한 어떠한 작용을 하는 것인가?107) 그럴 경우 또한 비정법(非情法)은 응당 결정코 생겨나지 않게 될 것이다.108) 또한 구박자(具縛者)에게 상·중·하 품의 번뇌가 현기하는 차별도 마땅히 없을 것이니, [생인(生因)이 되는] 득에는 그 같은 차별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109) 그러나 만약 그 밖의 다른 원인에 의해 차별이 있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마땅히 그러한 원인에 의해 제법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득에는 다시 어떠한 작용이 있는 것인가? 그러므로 그들(유부 비바사사)이 말한 바, 득에는 획득될 제법의 생인이 되는 작용이 있다고 하는 이치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득이 법의 생인(生因)되는 것이라고 누가 말한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이러한 득에는 다시 어떠한 작용이 있는 것인가?
  이를테면 차별을 건립하는 원인[建立因]이 된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만약 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생(異生)과 성자(聖者)가 세속의 마음을 일으킬 때 마땅히 이생과 제 성자의 차별을 건립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번뇌의 이단(已斷)과 미단(未斷)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그럴 경우에도 마땅히 차별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인데, 어찌 그렇지 않다고 하겠는가?
  만약 득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번뇌의 이단과 미단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득'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한다고 인정할 때 단(斷)과 미단(未斷)이 성립할 수 있을 것이니, 그것은 바로 번뇌의 득(得)을 떠나고[離] 아직 떠나지 않음[未離]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107) 법과 동시에 생겨나는 득(즉 法俱得 ; 이에 대해서는 후술한다)만이 그 법의 생인으로서 작용한다면, 그것은 바로 유위제법을 생겨나게 하는 원리인 생상(生相)과 그러한 생상을 생겨나게 하는 원리인 생생상(生 生相)과 어떠한 구별도 없게되고 만다는 난문. 역시 불상응행법의 하나인 '생' 등의 상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 5에서 논설한다.
108) 만약 생상이 아무런 작용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무정물[非情法]은 마땅히 생겨날 수 없게 된다. 이 를테면 득과 제법과의 관계에 있어서 유정이 무정물로 변화 성취하는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만약 그렇게 될 경우 유정·무정이 雜亂하는 과실이 있게 됨) 무정물은 소득(所得) 제법(諸法)의 생인(生因)인 득과는 아 무런 관계도 없게 되는 것이다.
109) 구박자란 9품의 번뇌 가운데 아무것도 끊지 못한 자를 말한다. 즉 제법 생인이라고 하는 득은 단일한 성질로 9품의 차별이 없기 때문에 그 결과인 번뇌에도 상·중·하 9품의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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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경우 소의신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번뇌의 이단과 미단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이를테면 제 성자는 견도(見道)와 수도(修道)의 힘으로써 소의신을 전변(轉變)시켜 본래의 그것과 다르게 하니, 그럴 경우 그러한 두 가지 도에 의해 끊어지는 혹(惑) 중에 다시는 번뇌의 공능(功能)이 그것(번뇌)으로 하여금 현기(現起)되게 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110) 마치 종자가 불에 태워져 전변하여 그 이전과는 달라짐으로써 능히 싹을 틔우는 작용이 없어지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성자의 소의신 중에 번뇌를 낳을 능력[生惑能]이 없어진 것을 번뇌의 '단(斷)'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혹은 세간도(世間道)로써 소의신 중의 번뇌종자를 손상시키는 것도 역시 '단'이라 이름하며, 이와 반대되는 것(번뇌종자를 손상시키지 않은 것)을 일컬어 '미단'이라고 한다.111) 그리고 온갖 번뇌가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未斷]을 설하여 '성취'라고 이름하며, 모든 번뇌가 이미 끊어진 것[已斷]을 '불성취'라고 이름하지만 이와 같은 두 가지 종류는 다만 일시적 언표[假]일 뿐 실체가 아니다.112)
  나아가 선법(善法)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공력(功力)이나 수습(修習)에 의하지 않고 획득되는 것이며, 둘째는 요컨대 공력이나 수습에 의해 획득되는 것으로, 이를 곧 생득선(生得善, 선천적으로 획득된 선)과 가행득선(加行得善, 후천적 노력에 의해 획득된 선)이라고 이름한다. 여기서 공력이나 수습에 의하지 않고 획득된 선법의 경우, 만약 소의신 중의 종자가 아직 손상되지 않은 상태라면 그것을 일컬어 '성취'라고 하고, 만약 소의신 중의 종자가 이미 손상된 상태라면 그것을 일컬어 '불성취'라고 한다. 말하자면
  
  
  
110) 여기서 '공능'이란 번뇌종자의 이명(異名)으로, 종자가 원인이 되어 결과를 낳는 작용을 공능이라 한 다.
111) 이처럼 경량부에서는 번뇌의 '단'을 성자의 단과 범부의 단, 즉 무루도에 의한 필경단(畢竟斷)과 유 루도에 의한 손복단(損伏斷)으로 구별하여 해석하고 있다. 전자는 무루도의 힘으로써 번뇌종자를 완전히 끊는 것이라면, 후자는 유루도의 힘으로써 번뇌종자를 억제하여 그 공능을 감퇴시키는 것이나, 만약 어떤 조건에 의해 그 상태가 변화하게 되면 감퇴(損伏)된 번뇌는 다시 일어나게 된다.(『구사론기』 권제4, 대정장41, p. 86하)
112) 즉 성취·불성취라고 하는 것은 요컨대 번뇌의 유무에 관계하는 일시적 언표(prajnapti)일 뿐이지 ' 득·비득'이라고 하는 개별적 실체로서 실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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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근을 끊은 자가 사견(邪見)의 힘에 의해 소의신 중의 선근종자를 손상시킨 것을 '단'이라 이름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소의신 중의 선근종자가 완전히[畢竟] 손상되었을 때를 일컬어 '단'이라고는 하지 않는다.113) 그리고 요컨대 공력이나 수습에 의해 획득된 선법의 경우, 만약 소의신 중에 그러한 법(선법종자)이 이미 일어나 그것(가행득선)[의 현행]을 낳는 공력이 자재하여 손상됨이 없으면 이것을 설하여 '성취'라고 이름하며, 이와 서로 반대되는 것을 '불성취'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종류의 법(성취와 불성취) 역시 일시적 언표[假]일 뿐 실체가 아니다.
  따라서 오로지 소의신 중에 [어떤 법의] 종자가 미발(未拔)·미손(未損)·증장(增長) 자재(自在)함이 있을 때,114) 이러한 상태에서만 성취라는 '명칭'을 설정하는 것일 뿐 그것이 개별적인 실체[別物, 즉 득]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여기서 어떠한 법을 일컬어 종자(種子, b ja)라고 한 것인가?
  이를테면 명(名)과 색(色)이 자신의 결과를 낳을 때 갖는 전전(展轉)과 인근(隣近)의 공능을 말하니, 이것은 상속(相續)의 전변(轉變)과 차별(差別)에 의한 것이다.
  무엇을 '전변'이라 이름한 것인가?
  이를테면 상속 중에 전후의 성질을 달리함이다.
  무엇을 '상속'이라 이름한 것인가?
  이를테면 인과성인 삼세의 제행(諸行)이다.
  무엇을 '차별'이라 이름한 것인가?
  이를테면 무간(無間)에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공능을 갖는 것이다.115)
  
113) 왜냐 하면 생득선의 종자는 상속 중에 완전히 소멸해버리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114) 여기서 '미발'이란 번뇌종자를 아직 무루도로써 뿌리뽑지 못한 상태를 말하며, '미손'이란 생득선의 종자와 무루종자가 아직 유루도에 의해 손상되지 않은 상태를, '증장자재'란 유루도로써 가행득선을 자유자재 로 성취하는 상태를 말한다.
115) '상속의 전변과 차별'이란 종자(種子, b ja)가 결과를 낳기까지 특수하게 변화해 가는 과정을 나타 내는 말로서, 그것은 사실상 종자와 동의어이다. 왜냐 하면 경량부에 있어 종자는 실체적 개념이 아니라 종자 적 성격을 지닌 공능( akti, 혹은 samartha)으로, 그 자체 상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선 행된 원인에 따라 결과를 낳게 될 때까지 찰나찰나 상속 변화(轉變)하다 마침내 특수하게 변화(差別)함으로써 결과로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상속(sa tati)이란 계시적 인과에 있어 전찰나 유위법은 후찰나의 그것에 대해 원인이 되고, 후찰나의 유위법은 전찰나의 그것에 대해 결과가 되는 인과적 관계[因果性]를 말한 다. 그럴 때 그것은 연속적으로 생멸하는 제법과는 다른 어떤 영속적 원리(anasthita, 불상응의 別法)가 아니 라 선행된 행위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색과 심(즉 名色)이 단절되지 않고 연속 계기하는 힘으로, 이는 즉 종 자 그 자체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같은 상속이 전후 다르게 일어나는 것을 전변(pari ma)이라 하고, 마침 내 전변의 최후 순간에 이르러 바로 결과로 이어지는 특별한 공능을 지님으로써 여타의 상속과는 성격을 달리 하는 전변을 차별(vi e a)이라고 한다. 나아가 그 같은 전변과 차별은 종자 자체가 보지(保持)한 상속 전변 하는 공능(展轉功能, p ra praye a samartha ; 결과를 낳기 전까지 간단없이 연속하는para para 능력. 결 과 산출의 시점에서 보면 과거 찰나의 전변이므로 舊譯에서는 '當時功能'이라 번역함)과 상속 차별하는 공능( 隣近功能, s k at samartha ; 명료하게 현전하여 눈ak a에 의해 확증되는 직접적 능력으로 구역에서는 '現 時功能'이라 번역함)에 의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종자설'은 유부 득론(得論)의 대안으로 제출된 것 이지만, 경량부 교학의 핵심이라 할 만한 대단히 중요한 교설로서, 본론 권제13에서는 이를 '밀의(密意)'로 규정짓고 있다. 상기의 논설은 예로부터 너무나 중요시된 나머지 갖가지 훈독과 해석법이 있어 왔는데, 보광( 普光)도 『구사론기』 권제4(대정장41, p. 87상)에서도 이를 다음의 세 가지로 평석하고 있다. 명색(名色)이 라 함은 수·상·행·식의 4온과 색온을 말하는데, 경부종(經部宗)이 주장하는 종자는 명과 색에 훈습되어 있 다.제1석: 명색이 스스로의 결과를 산출함에 있어 그것이 소유한 종자가 상속하여 단절되지 않음을 '전전(展 轉)'이라 하고, 장차 자신의 결과를 낳으려고 함을 '인근(隣近)'이라고 하며, 곧 바로 자신의 결과를 산출함 을 '공능'이라 하니, 이 세 가지는 바로 종자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전전은 종자의 상속에 의하므로 전전 하여 단절되지 않으며, 인근은 종자의 전변이므로 결과에 인근하고, 공능은 종자의 차별에 따르므로 바로 공 능을 일으키게 되니, 이 세 가지 역시 종자의 다른 이름이다.(이 평석에 따를 경우 '所有展轉隣近功能 此由相 續轉變差別'은 '명색이 소유한 바가 전전·인근·공능이니, 이는 상속·전변·차별에 따른다'로 해석된다.)제 2석: 결과는 종자의 상속·전변의 차별에 따라 생겨난다. 전변이 어째서 두 번째인가 하면, 종자가 상속하는 도중에 장차 결과를 산출하기를 원하여 전변하고, 그런 후 선행한 것과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상속하 든 종자가 장차 싹을 틔울 것을 원하여, 그 자체가 전변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상속이 어째서 첫 번째이냐 하면, 이 종자는 후찰나의 것에 대해 원인이 되고 전찰나의 것에 대해 결과가 되기 때문에 삼세제행에 두루 통할 수 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이름하여 상속이라 한 것이다. 또한 이 논설에서 전전을 먼저 해석하고, 상 속을 뒤에 한 것은 상속에 근거하여 전전을 밝히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나아가 차별이 어째서 세 번째이냐 하 면, 무간에 결과를 산출할 공능을 갖고 있는 종자는 후찰나의 그것과 전찰나의 그것이 다르기 때문에 차별이 라 이름한 것이다. 그리고 경량부에서는 인과의 전후가 같지 않기 때문에 무간에 결과를 산출하는 공능을 설 한 것이다.(이 평석에 따를 경우, 앞의 논설은 '명색이 소유한 바인 전전·인근의 공능은 이 같은 상속·전변 의 차별에 따른다'로 해석된다.)제3석: 전변의 공능이며, 인근의 공능이다. 또한 상속의 전변이며, 상속의 차 별이다. 이러한 상속의 전변에 따르는 것은 전전의 공능이고, 상속의 차별에 따르는 것은 인근의 공능이다.( 이 평석에 따를 경우 앞의 논설은 '명색이 소유한 바인 전전·인근의 공능은 이러한 상속의 전변·차별에 따 른다'로 해석된다.)이 가운데 제3석의 내용은 칭우의 평석과도 일치하며, 오늘날 일반적으로 채용되고 있는 해석법으로, 여기서의 번역도 이에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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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어떤 곳에서 "만약 탐(貪)을 성취하면 능히 4념주(念住)를 닦을 수 없다"고 설하고 있지만, 그것은 탐번뇌에 탐착한 자는 능히 [그것을] 염사(厭捨)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성취'라고 일컫게 되었다는 사실을 설한 것이니, 탐애에 집착할 때에는 4념주를 필시 능히 닦을 수 없기 때문이다.116) 이와 같은 성취는 일체의 종류에 두루 하는 것으로서, 오로지 일시적 언표[假]일 뿐 실체가 아니다.117) 그리고 오로지 이러한 성취에 반대되는 것만을 불성취라고 이름하니, 이것 역시 일시적 언표일 뿐 실체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설하기를, "이러한 두 가지 종류(득과 비득)는 모두 다 개별적인 존재[別法]로서, 실체이지 일시적 언표가 아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두 가지의 주장은 모두 다 뛰어난 설[善說]이라 할 수 있다.118)
  어째서 그러한가?
  [경량부의 설은] 이치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며, [유부의 설은] 우리가 종취(宗趣)로 삼는 바이기 때문이다.119)
  
  
116) 즉 '탐애를 성취하면……'이라고 하는 경설(經說)에서의 '성취'는 그 자체로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집착을 의미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염사(厭捨)하지 못할 경우 4념처를 닦을 수 없다고 한 것이라는 뜻.
117) 여기서 일체의 종류란 제법의 생기원인, 제법차별을 건립하는 원인, 명색을 소의처로 삼는 종자, 그 리고 집착 등을 말하는 것으로, '성취'라고 하는 말은 이러한 일체 종류에 따라 두루 통용되는 언어적 표현(praj apti) 즉 가설(假說)일 뿐이라는 뜻.
118) 이는 유부의 득·성취론과 경량부의 종자설에 대한 논주 세친의 평석으로, 이중적 태도를 취하고 있 지만, 보광은 이것 역시 논주가 경량부 의견에 동조한다는 의미로서 해석하고 있다.(『구사론기』 권제4, 대 정장 41, p. 87중. "論主意朋經部, 故作斯解")
119) 경량부의 종자설에 대해 신(新) 유부의 논사 중현(衆賢)은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만약 종자에 제법 생인(生因)의 작용이 있다고 한다면, 이치상으로 옳지 않으니, 왜냐 하면 종자는 다른 법의 본질[體]과 차별 이 있든 없든 다 같이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즉 제법생인의 근거로서 종자를 설정할 경우, 이 때 종자는 그 러한 제법의 본질과 다른 것[別體]인가, 동일한 것인가. 만약 다르다면 그것은 '득'과 다르지 않으며 단지 이 름만 다른 것일 뿐이다. 또한 만약 동일하다면 선과 불선, 잡염과 청정등의 제법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 되어야 할 것이고, 애와 비애의 업과(業果)도 잡란되고 말 것이며, 그럴 경우 해탈의 본질 역시 마땅히 따로 이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현종론』 권제6, 한글대장경 200, p. 159이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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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득과 비득의] 자성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그 차별은 어떠한가?
  바야흐로 마땅히 득[의 제문(諸門)]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삼세법에는 각기 세 가지 득이 있으며
  선법 등에는 오로지 선 등의 득이 있으며
  유계(有繫)에는 자계(自界)의 득이 있으며
  무계(無繫)의 득은 네 가지와 통한다.
  三世法各三 善等唯善等
  有繫自界得 無繫得通四
  
  비학비무학법에는 세 가지 득이 있으며
  비소단법에는 두 가지의 득이 있다.
  非學無學三 非所斷二種
  
  논하여 말하겠다. 삼세법(三世法)의 득에는 각기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과거의 법에는 과거의 득이 있으며, 현재의 득이 있으며, 미래의 득이 있으며, 이와 마찬가지로 미래와 현재법에도 각기 세 가지 종류의 득이 있다.120)
  
  
120) 득은 결코 단일하지 않으며, 삼세법에 따라 아홉 가지가 있다. 즉 과거·현재·미래의 삼세의 법에는 각기 과거득·현재득·미래득이 있는데, 이를 획득되는 법[所得法]과의 선후관계로서 분별하면 법전득(法前得 )·법구득(法俱得)·법후득(法後得)의 세 가지로 고려될 수 있다.(삼세법이 아닌 무위2법의 득은 非前後俱得 임) 이를테면 획득될 법과 동시에 존재하는 득인 법구득은 과거법의 과거득과 현재법의 현재득과 미래법의 미 래득이다. 삼세의 득의 삼세법과의 규정은 대단히 번쇄한데, 자세한 내용은 『대비바사론』 권제157(대정장 27, p. 797하 - 798상)과 『구사론기』 권제4를 참조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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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선(善) 등의 법의 득은 오로지 선 등이니, 이를테면 선과 불선과 무기의 법에는 그 순서대로 선·불선·무기의 세 가지 득이 있는 것이다.121)
  또한 유계법(有繫法 : 3계에 계박되어 소속하는 유루법)에는 오로지 자계(自界)의 득만이 있으니, 이를테면 욕계·색계·무색계의 법에는 그 순서대로 오로지 욕계·색계·무색계의 세 가지 득만이 있는 것이다. 만약 무계법(無繫法 : 삼계에 繫屬되지 않는 무루법)의 득이라면 네 가지와 통한다. 이를테면 무루법에 대해 전체적으로 말해 본다면 득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3계의 득과 무루의 득이 바로 그것이다. 이를 개별적으로 분별해 본다면, 비택멸의 득은 3계계(界繫)와 통하지만, 그러나 만약 택멸의 득일 경우 색·무색계의 계(繫)와 무루이고, 그러한 도제(道諦)의 득은 오로지 무루일 뿐이다. 따라서 무계법의 득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는 것이다.122)
  또한 유학법(有學法)의 득은 오로지 유학이며, 무학법(無學法)의 득은 오로지 무학일 뿐이다. 그러나 비학비무학법(非學非無學法)의 득에는 차별이 있으니, 이를테면 이러한 법을 전체적으로 설하면 세 가지가 있다. 이를 다시 개별적으로 분별하여 보면, 일체의 유루와 세 가지 무위법의 득을 모두 비학비무학법이라고 이름하니, 바야흐로 유루법에는 오로지 비학비무학의 득만이 있을 뿐이며, 비택멸의 득과 성도(聖道)에 의해 인기(引起)된 것이 아닌 택멸의 득도 역시 이와 같다. 그러나 만약 유학도에 의해 인기된 택멸의 득이라면, 그것은 바로 유학이며, 만약 무학도에 의해 인기된 택멸의 득이라면 그것은 바로 무학인 것이다.
  
  
  
121) 획득되는 법이 선이면 그것을 획득하게 하는 득도 선이며, 불선·무기이면 그것 또한 불선·무기이다 .
122) 3계에 계속(繫屬)되지 않는 무루법의 경우, 비택멸의 득은 유계법과 마찬가지로 3계계로서, 욕계의 연(緣)이 결여되어 비택멸을 획득하면(비택멸이란 緣缺不生法임) 그 때의 득은 욕계계이며, 색계·무색계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택멸의 경우 색계·무색계에서 유루도(6行觀)로써 증득하였으면 그 때의 득은 각기 색계·무색계의 계이지만, 성도인 무루도(즉 도제)로써 증득하였다면 무루로서 불계(不繫)이다. 그리고 도제는 유위이나 유위법의 득은 획득되는 법[所得法]에 따라 그 성격이 결정되기 때문에, 도제의 득은 오로지 무루이다. 그래서 무계법의 득에는 네 가지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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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견(見)·수소단(修所斷)의 법에는 그 순서대로 견소단과 수소단의 득이 있으며, 비소단법(非所斷法)의 득에는 차별이 있으니, 이를테면 이러한 법의 득을 전체적으로 설하면 두 가지가 있다. 이를 개별적으로 분별해 보면, 온갖 무루법을 비소단이라고 이름하니, 비택멸의 득은 오로지 수소단이며, 성도에 의해 인기된 것이 아닌 택멸의 득도 역시 이와 같으며, 성도에 의해 인기된 택멸과, 도제(道諦)의 득은 모두 비소단인 것이다.
  
  앞에서 비록 삼세의 법에는 각기 세 가지의 득이 있다고 전체적으로 설하였을지라도, 여기서 마땅히 그러한 법들의 차별상에 대해 간별(簡別)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부무기의 득은 [생겨나는 법과] 구기하는데
  두 가지의 신통과 변화심은 제외되며
  유부무기색의 경우도 역시 구기하며
  욕계색의 경우에는 앞서 일어나는 일이 없다.
  無記得俱起 除二通變化
  有覆色亦俱 欲色無前起
  
  논하여 말하겠다. 무부무기법(無覆無記法)의 득은 오로지 [생겨나는 법과] 구기(俱起)할 뿐 앞이나 뒤에 생겨나는 일이 없으니,123) 그 세력이 열등하기
  
  
123) 득(得)에는 소득법(所得法) 즉 생겨나는 법에 선행하는 법전득(法前得)과 동시 구기(俱起)하는 법구 득(法俱得)과 과거로 낙사(落謝)한 후에 존재하는 법후득(法後得) 세 가지가 있는데, 무부무기의 득은 소득법 과 함께 생기하는 법구득이다. 본문에서 앞뒤란 법전득 법후득을 말한다. 즉 법전득이란 소득법이 현재 생겨 나기 전에 이미 득의 세력이 나타나서 소득법을 유정에 획득되게 하는 것으로, 이를테면 극(極)선심이나 극악 심과 같은 것은 그 성질이 치성(熾盛)하기 때문에 그 결과가 현재 생겨나기 전에 미리 득의 세력이 유정상에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어미소(득)가 송아지[所得法]를 이끌고 나아가는 것과 같으며, 태양이 떠오르 려고 할 때 그 서광이 동녘에 비치는 것과 같다. 법후득은 소득의 법이 이미 과거로 낙사(落謝)한 후에도 여 전히 득의 세력이 남아 낙사한 법을 유정에게 계속시키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송아지(득)가 어미소(낙사한 과거법)를 따르는 것과 같고, 해가 진후에도 그 빛이 서쪽하늘에 비치는 것과 같다. 이 밖에도 비전후구득(非 前後俱得)이 있는데, 이는 위의 세 가지 득이 아닌 것으로, 말하자면 상주하여 전·후·구(俱)의 차별이 없는 택멸과 비택멸의 무위법의 득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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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문이다. 따라서 본법(本法)이 만약 과거이면 득도 역시 과거이며, 본법이 만약 미래이면 득도 역시 미래이며, 본법이 만약 현재이면 득도 역시 현재이다.
  일체의 무기무기법의 득은 모두가 그러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러면 어떠한가?
  천안통(天眼通)과 천이통(天耳通), 그리고 능히 변화하는 마음[能變化心]을 제외하니, 이를테면 천안·천이통의 혜와, 능히 변화하는 마음은 그 세력이 강하기 때문에,124) 가행의 차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비록 무부무기의 성질에 포섭되는 것일지라도 앞(즉 法前得)과 뒤(즉 法後得), 그리고 동시에 생기하는 득(즉 法俱得)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공교처(工巧處)나 위의로(威儀路)를 지극하게 수습(數習)한 자의 득일 경우, 그것 역시 그러하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125)
  오로지 무부무기법의 득만이 [생겨나는 법과] 구기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어떠한가?
  
  
  
124) 천안과 천이통은, 선정력에 의해 인기된 색계의 수승한 안·이근에 의지하여 일어난 안·이식과 상응 하는 혜로서, 수득(修得) 무기인 천안·천이식과 상응하는 혜이기 때문에 이 역시 무기이다.(본론 권제27, p.1263 참조) 또한 능변화심은 몸을 변화시키고 애기나 궁전 따위를 화작(化作)하기 때문에 능히 변화하는 마 음으로, 이는 신경통(神境通)에 의해 인기된 것으로서 신통의 결과이기에 역시 무기이다. 즉 이러한 2가지 신 통은 먼 곳의 색과 소리를 보고 들으며, 변화심은 변화 화작하기 때문에 그 세력이 강하다고 한 것이다.
125) 공교처란 기술과 공예를 말하는 것으로, 신(身)공교는 색·향·미·촉을 본질로 하고, 어(語)공교는 색·성·향·미·촉을 본질로 한다. 그리고 위의로란 행(行)·주(住)·좌(坐)·와(臥)와 같은 일상의 행동거 지로, 일반인의 경우 이 두 가지의 득은 삼세단(斷)이고 찰나단이기 때문에 법구득이지만, 이를테면 부처님과 비습박갈마천신(毘濕縛羯磨天神 : Vi vakarman deva, 제석천의 신하로 工作의 신), 혹은 부처님과 마승필추( 馬勝苾芻 : 초전법륜시 다섯 비구의 한 사람)와 같이 공교처 혹은 위의로를 지극히 잘 수습한 자의 경우 이 두 가지 득은 법전·법후·법구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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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부무기색(有覆無記色)의 득도 역시 그러하니,126) 이를테면 온갖 유부무기의 표색의 득도 역시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다만 오로지 생겨나는 법과 구기(俱起)할 뿐이다. 비록 상품(上品)으로 있을지라도127) 그것 역시 능히 무표를 낳을 수 없기 때문에 세력이 미약하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생겨나는 법보다 앞에, 혹은 뒤에 생겨나는 득은 결정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무기법의 득에 별이(別異)함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과 불선의 득에도 역시 다른 별이함이 있는 것인가?
  역시 있다.
  그렇다면 그 내용은 어떠한가?
  이를테면 욕계의 계로서 선·불선인 색의 득에는 생겨나는 법보다 먼저 일어나는 것(즉 法前得)이 없으며, 오로지 함께 일어나거나[法俱得] 뒤에 일어나는 득[法後得]만이 있을 뿐이다.128)
  그렇다면 비득(非得)도 역시 득과 마찬가지로 앞에서와 같은 품류의 차별이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비득은 정(淨)의 무기로서
  과거·미래세에 각기 세 가지가 있다.
  非得淨無記 去來世各三
  
  
  
126) 유부무기의 표색(表色)이란 수소단의 번뇌에 의해 일어난 유부무기의 신·어표업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오로지 색계 초정려에 국한된 법이다.
127) 상품(上品) 즉 색계의 번뇌심에 의해 유부무기의 표색이 일어나는 것일지라도의 뜻.
128) 욕계의 계속(繫屬)되는 선의 색이란 별해탈계 등의 표·무표업을 말하며, 불선의 색은 살생 등의 표 ·무표업을 말한다. 즉 이러한 것들은 소위 불수심전(不隨心轉)의 계로서 세력이 미약하기 때문에 법전득이 아니며, 다만 법구득이고 법후득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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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계의 계(繫)와 불계의 법에도 세 가지가 있으며
  성도(聖道)의 비득을 설하여
  이생성(異生性)이라고 이름함을 인정하며
  법을 획득하고, 지(地)를 바꿈으로써 비득을 버리게 된다.129)
  三界不繫三 許聖道非得
  說名異生性 得法易地捨
  
  논하여 말하겠다. 3성(性)의 차별을 논한다면, 일체의 비득은 모두 오로지 무부무기성에 포섭된다.130)
  삼세의 차별을 논한다면, 과거와 미래에만 각기 세 가지 종류의 득이 있다. 이를테면 현재의 법에는 결정코 현재의 비득이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과거와 미래의 비득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과거의 법과 미래의 법에는 각각에 3세의 비득이 있다.131)
   계(界)의 차별을 논한다면, 3계계(界繫)의 법과 불계(不繫)의 법에는 각기 세 가지의 비득이 있으니. 이를테면 욕계계의 법에는 3계의 비득이 있으며,132) 색계·무색계의 계(繫)와 불계의 법에도 역시 그러하다.133)
  
  
129) 본송의 제2·제3구는 이생성의 정의로서, 세친은 '다만 성법이 생겨나지 않은 상속의 분위차별(分位 差別)을 일컬어 이생성이라고 한다'는 경부사(經部師)의 설을 선설로 받아드리고, 실체로서의 비득의 존재를 주장하는 유부의 이생성의 설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게송 중에서 '인정한다[許]'고 한 것이다.
130) 비득의 성(性)은 소의신에 의거하여 판별하지 않는다. 즉 만약 번뇌의 비득이 염오(불선)라 한다면 이미 번뇌를 끊은 자도 번뇌를 구족한 자가 되어야 할 것이며, 만약 번뇌의 비득이 선이라고 한다면 이미 선 근을 끊은 자도 끊지 않은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니, 왜냐 하면 이생에게도 연결불생(緣缺不生)인 번뇌의 비득 이 항상 존재할 것이기 때문에 이미 선근을 끊은 자도 이러한 비득을 획득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무루법 의 비득이 무루라고 한다면 이생도 역시 성법을 성취할 것이기 때문에 이생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이유에서 비득은 오로지 무부 즉 정(淨)의 무기이다.
131) 현재법은 모두 성취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현재의 비득은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과거·미래의 비 득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과거·미래법에는 각기 삼세의 비득이 있다. 그리고 이를 획득되지 않는 법[所不 得法]과의 선후관계로서 분별하면 법전비득(法前非得)과 법후비득(法後非得)의 두 가지로 고려될 수 있다.
132) 즉 욕계의 유정이 욕계법을 획득하지 않았을 때의 비득은 욕계의 비득이고, 색계의 유정이 욕계법을 획득하지 않았을 때의 비득은 색계의 비득이며, 무색계의 유정이 욕계법을 획득하지 않았을 때 비득은 무색계 의 비득이다.
133) 이하 득의 제법분별에 준하여 비득에 대해서도 3학(學)·3단(斷)을 분별해야 하지만, 다음에서 논의 하듯이 비득은 결정코 유루이기 때문에 비학비무학이고 수소단임이 자명하므로 이에 대해 분별하지 않은 것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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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득은 결정코 무루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성도(聖道)의 비득을 설하여 이생성(異生性)이라고 이름함을 인정하기 때문'이니, 본론(本論)에서 "무엇을 일러 이생성이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성법을 획득하지 않은 것이다"고 말한 바와 같다.134) 여기서 '획득하지 않는 것[不獲]'이란 바로 비득의 다른 명칭이다. 따라서 이생성이 바로 무루라고 설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성법을 획득하지 않아야 이생성이라고 이름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일체의 성법을 획득하지 않은 것이니,135) [본론에서] 별도로 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획득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 말은 '획득을 떠나는 것'을 나타낸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제불(諸佛) 세존도 역시 성문이나 독각종성의 성법을 성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땅히 이생이라 이름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 논(『발지론』)에서는 마땅히 '순전히[純]'이라고 하는 말을 설했어야 할 것이다.136)
  반드시 그 말을 설할 필요는 없으니, 이러한 한 구절 가운데 '순전히'의 뜻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러한 유형은 '물을 먹고 바람을 먹는다'고 설하는 것과 같다.137)
  
  
134) 여기서 본론은 『발지론』 권제2(대정장26, p. 926중: 한글대장경 176, p. 56).
135) 여기서 일체의 성법이란 고법지인(苦法智忍)에서 고류지(苦類智)를 비롯한 진(盡)·무생지(無生智) 등 유·무학의 일체의 성법을 말한다.
136) 일부의 성법만 획득하여도 이생이 아니라고 한다면, 『발지론』에서는 '획득하지 않은 것'에 '순전히 '라는 말을 덧붙여 '순전히 획득하지 않은 것'이라는 뜻을 나타내었어야 한다는 뜻.
137) 즉 '모기는 물을 먹고 매미는 바람을 먹는다'고 설하는 경우, 여기에 비록 '순전히'이라는 말이 없을 지라도 그것들은 순전히 물과 바람만을 먹으며, 거기에 다른 어떤 것이 섞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현종론』 권제7, 한글대장경200, p.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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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고법지인과 그 구생의 법을 획득하지 않은 것을 이생성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그럴 때 '도류지(道類智)에 이를 때 이 법(고법지인)을 버리기 때문에 마땅히 성자가 아니어야 할 것이다'고 힐난하여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니, 앞(고법지인에 이르렀을 때)서 이미 그러한 성법의 비득을 영원히 끊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러한 존재[性,즉 고법지인]는 이미 3승(乘)과 통하는 것인데, 그 중의 어떠한 것을 획득하지 않아야 이생성이라 이름하는 것인가?
  이 역시 일체를 획득하지 않는 것이라고 마땅히 말해야 할 것이다.138)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여기에도 마땅히 앞에서와 같은 힐난이 제기되어야 할 것이다.139)
  이러한 힐난은 다시 마땅히 앞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통석(通釋)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거듭하여 논설하였건만 그 공(功)이 아무런 쓸모없이 되고 만 것이다.140)
  경부사(經部師)가 설한 바가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경부에서 설한 바의 뜻은 어떠한가?
  이를테면 아직 성법을 낳지 않은 상속(相續)의 분위차별(分位差別)을 이생성이라 이름한다.
  이와 같은 비득은 어느 때에 응당 버리게 되는 것인가?
  이러한 법의 비득은 이러한 법을 획득할 때, 혹은 지(地)를 바꾸게 될 때, 이러한 비득을 버리게 된다.141) 즉 성도(聖道)의 비득을 설하여 이생성이라고
  
  
138) 3승 즉 성문·연각·보살의 고법지인 중 어떠한 이의 그것도 획득하지 않는 것이 이생성이라는 뜻.
139) 즉 3승 모두의 고법지인을 획득하지 않는 것이 이생성이라면, 보살은 성문·연각의 고법지인을 버렸 을 것이기 때문에 역시 이생성이어야 한다.
140) '일체의 성법을 획득하지 않은 것을 이생성이라 한다'고 하였다가 난문을 덜기 위해 일체의 성법이 아니라 다만 견도(見道)의 첫 번째 과위(果位)인 '고법지인을 획득하지 않은 것을 이생성이라 한다'고 하였지 만, 이 또한 동일한 난문에 봉착하게 됨으로 쓸데없이 헛수고[唐捐]만 한 셈이라는 뜻.
141) 비득이란 어떤 법을 획득하지 않는 것이므로 그 같은 법을 획득하게 될 때 그것의 비득을 버리게 되 며, 또한 욕계·4정려·4무색정의 9지 중에서 생을 바꾸게 될 때 바꾸어진 생의 비득을 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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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하였으므로 이러한 성도를 획득할 때, 혹은 지(地)를 바꿈으로써 바로 [그것의 비득을]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밖의 법의 비득도 이에 유추하여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비득의 획득이 끊어지면 비득의 비득이 생겨나니, 이와 같은 것을 일컬어 비득을 버리는 것이라고 한다.
  득과 비득에 어찌 다시 그 밖의 다른 득과 비득이 있다고 하겠는가?
  이러한 두 가지(득과 비득)에는 각기 그 밖의 다른 득과 비득이 있다고 마땅히 말해야 할 것이다.142)
  만약 그렇다면 어찌 무한소급[無窮]의 과실이 있지 않겠는가?
  무한소급의 과실은 없으니, 득이 전전(展轉)하며 서로를 성취한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즉 어떤 법이 생겨날 때 그 자체와 더불어 세 가지 법이 구기(俱起)하기 때문이니, 첫 번째는 본법(本法)이고, 두 번째는 법의 득이며, 세 번째는 득의 득이 바로 그것이다. 이를테면 상속의 소의신 중에 법의 득이 생기하였기 때문에 본법과 득의 득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며, 득의 득이 생기하였기 때문에 법의 득을 성취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는 무한소급의 과실이 없는 것이다.143)
  이처럼 선하거나 혹은 염오한 법 그 자체가 각각 처음으로 생기할 때에는 법 그 자체와 더불어 세 가지 법(본법과 대득과 소득)이 구기하고, 제2찰나에는 여섯 가지 법이 구기하니, 이를테면 [앞의] 세 가지 법의 득과 [이러한] 세 가지 득의 득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제3찰나에는 열여덟 가지의 법이
  
  
  
142) 그 밖의 다른 득과 비득이란, 득을 획득하게 하고(즉 득의 득) 획득하지 못하게 하며(득의 비득), 또 한 비득을 획득하게 하고(비득의 득) 획득하지 못하게 하는(비득의 비득) 존재를 말하는 것으로, 이를 소득( 小得)·소비득(小非得)이라 하고, 이에 대한 것을 대득(大得)·대비득(大非得)이라고 한다.
143) 어떤 법을 획득하게 하고 획득하지 않게 하는 것이 득과 비득이라면, 그것을 다시 획득하게 하고 획 득하지 않게 하는 득과 비득이 있어야 하고, 마침내 무한소급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유부에서는 본법을 획득 하게 하는 득을 대득(大得, 비득은 大非得)이라 하고, 대득을 획득하게 하는 득을 소득(小得, 비득은 小非得) 이라고 하여, 대득은 본법과 소득을 획득하고, 소득은 대득을 획득하는 것이라고 논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 한 논의형태는 유위 4상(相)의 본상(本相, 이를테면 生相)과 수상(隨相, 이를테면 生生相)의 경우와 동일하다 .(본론 권제5, p.243 이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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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기하니, 이를테면 제1 제2 찰나에 생겨난 제법에는 아홉 가지 법의 득과 이러한 아홉 가지 득의 득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온갖 득은 다음 찰나찰나에 따라 증가하여 일어나니, 일체의 과거·미래의 번뇌·수번뇌와 더불어 생득선(生得善)에 상응(相應)하고 구유(俱有)하는,v 무시무종(無始無終) 생사 윤회하는 [제법 중에는] 무변(無邊)의 득이 있는 것이다. 바야흐로 한 유정의 생사상속의 찰나찰나에도 무변의 득이 일어나거늘 이렇듯 일체 유정의 상속은 그 하나하나 각기 다르니, 무량 무변의 온갖 득이 구기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온갖 득은 어떻게 그토록 지극히 많이 모일 수 있는 것인가?
  득은 공간적 점유성[對礙]을 갖지 않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수용할 수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한 유정의 득은 허공에조차 수용되지 못할 것이거늘 하물며 두 번째 유정 따위의 득을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