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아비달마구사론 제 6 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4.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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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구사론 제 6 권
  존자 세친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
  
2. 분별근품 ④
  이와 같이 불상응행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그런데 앞에서 '생상(生相)이 소생법(所生法)을 낳을 때 그 밖의 다른 인(因)과 연(緣)과의 화합을 떠나서는 그것을 낳지 않는다'고 말하였다.1) 여기서 어떠한 법을 설하여 '인'이라 하고, '연'이라고 한 것인가?
  바야흐로 원인[因]에는 여섯 가지가 있다.
  무엇이 여섯 가지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능작(能作)과 구유(俱有)와
  동류(同類)와 상응(相應)과
  변행(遍行)과 이숙(異熟)이니
  원인은 오직 여섯 가지라고 인정하고 있다.2)
  
  
1) 본론 권제5, p.154 참조.
2) 능작인 등 6인(因)은 유부에서만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논주 세친은 게송 중에서 '인정하고 있다[許]' 고 설한 것이다. 6인론은 4연(緣)이나 5과(果)의 그것과는 달리 유부 특유의 이론으로 『발지론』 (권제1)에 서 처음으로 설해지고 있는데, 『증일아함』의 「증육경(增六經)」에서 설해지고 있던 것이 은몰되었기 때문 에 존자 가다연니자(迦多衍尼子) 등이 명감(冥感) 혹은 원지(願智)에 의해 관찰 찬집(撰集)하여 부활시킨 것 이라고 한다.(『대비바사론』 권제16, 한글대장경118, p. 358-359; 『현종론』 권제8, 한글대장경200, p. 21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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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能作及俱有 同類與相應
  遍行幷異熟 許因唯六種
  
  논하여 말하겠다. 원인에는 여섯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가 능작인(能作因)이며, 둘째가 구유인(俱有因)이며, 셋째가 동류인(同類因)이며, 넷째가 상응인(相應因)이며, 다섯째가 변행인(遍行因)이며, 여섯째가 이숙인(異熟因)이다. 대법(對法)의 여러 논사들은 원인에는 오로지 이와 같은 여섯 종류 만이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3)
  바야흐로 첫 번째 능작인의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자체를 제외한 그 밖의 것이 능작인이다.4)
  除自餘能作
  
  논하여 말하겠다. 일체의 유위법은 오로지 그 자체를 제외한 그 밖의 일체의 법으로써 능작인을 삼으니, 그것이 생겨날 때 장애함이 없이 머무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그 밖의 다른 원인도 역시 능작인이 된다고 할 수 있을지라도 능작인은 달리 별칭(別稱)이 없어 색처 등과 마찬가지로 총칭을 별칭으로 삼았기 때문에 [능작인이라 이름한 것이다.]
  
  
  
3) 여기서 대법은 『발지론』 권제1(한글대장경176, p. 15이하); 『대비바사론』 권제16(앞의 책, p. 135 이하) 참조.
4) 능작인(karana-hetu)이란 다른 법의 생기를 장애하지 않는 소극적 원인을 말하는 것으로, 일체의 유위 법은 그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유위·무위법을 능작인으로 삼는다. 이를테면 어떤 법이 생겨날 때 그것을 제외한 다른 모든 법은 그 생기에 어떠한 장애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능작인의 외연이 가장 넓으며, 다른 다섯 가지 원인도 역시 능작인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들은 별도의 명칭이 있기 때문에 능작인 이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이에 대해 능작인은 별도의 명칭이 없으며, 총명이 바로 별명이다.) 여기에는 어의 (語義)상 결과를 낳는 힘을 갖는 유력(有力, 혹은 與力)능작인과 결과를 낳는 데 장애함이 없는 무력(無力,혹 은 不障)능작인이 있지만, 게송에서 말한 것은 바로 후자이다. 유력능작인이라 함은 간접적인 조력(助力)이 되는 원인으로, 이를테면 안식에 대한 안과 색, 소의신에 대한 음식물의 경우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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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진리를] 알지 못하는 자에게는 온갖 번뇌[諸漏]가 응당 일어나겠지만 이미 알았기 때문에 온갖 번뇌는 생겨나지 않는다. 그럴 때 지(智)는 번뇌가 생겨나는 것에 대해 어찌 능히 장애가 된다고 하지 않겠는가? 또한 햇볕은 지금 뭇 별들을 보는 데 능히 장애가 되고 있는데, 어떻게 유위법은 오로지 그 자체를 제외한 다른 일체의 법으로써 능작인을 삼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인가?5)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것이 생겨날 때 저것은 모두 어떠한 장애함도 없이 머물기 때문에 저것은 이것에 대해 바로 능작인이 되는 것이다.6) 만약 이것이 생겨나는 것에 대해 저것이 능히 장애가 될 수 있음에도 장애가 되지 않았다면 원인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나라 백성들은 그 나라의 왕[國主]이 손해만 끼치지 않으면 모두 다 같이 '우리는 국왕으로 인해 안락하게 산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만약 이것이 생겨나는 것에 대해 저것에 장애하는 작용이 없다고 한다면, 설혹 장애가 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것을 어떻게 원인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 바야흐로 열반과 불생법(不生法,즉 비택멸)과 같은 것은 일체 유위법이 생겨나는 것에 대해 두루 장애하는 작용이 없으며, 나락가 등의 유정의 상속신에는 무색계의 제온(諸蘊)이 생겨나는 것에 대해 능히 장애하는 작용이 없는데, [어떻게 그것을 장애하는 작용이] 있음에도 [장애하고] 있지 않는 원인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
  비록 장애하는 작용이 없을지라도 역시 원인으로 삼을 수 있으니, 이를테면 [폭정을 할] 힘이 없는 국왕도 역시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설할 수 있는 것이다.7)
  
  
5) 이는, 생기하는 법 자체를 제외한 그 밖의 모든 법이 능작인이라고 한다면, 무루지와 번뇌, 혹은 햇빛 과 별빛의 경우처럼 서로 모순되는 법 또한 능작인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능작인이 된다면 '장애 하지 않는 것'이라는 정의와 상응하지 않게 되며, 만약 능작인이 되지 않는다면 '자체를 제외한 나머지 일체 법이 능작인'이라고 하는 정의는 틀린 것이 되고 만다는 난문이다.
6) 여기서 '이것'이란 번뇌나 뭇 별들에 대한 인식, 저것은 무루지와 햇빛. 즉 무루지는 번뇌의 생기를 장 애하고 햇빛은 뭇별을 인식하는 데 장애가 되지만, 현실적으로 어쨌든 번뇌가 일어나고 뭇 별들을 인식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장애 되지 않은 결과이기 때문에, 그것 역시 능작인이라는 것이다.
7) 장애하는 작용이 있음에도 장애하지 않는 것은 원인으로 삼을 수 있다 할지라도 택멸의 열반이나 비택 멸의 불생법처럼 애당초 장애할 힘이 없는 법을 어떻게 원인을 삼을 수 있느냐 하면, 장애할 힘이 없어 장애 하지 않은 것과 능히 장애할 수 있음에도 장애 되지 않은 것은 결과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에 원인으로 삼을 수 있다는 말. 예컨대 폭정할 힘이 없어 폭정을 하지 않는 왕에 대해서도 백성들은 역시 '우리는 국왕으로 인해 안락하게 산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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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은 바로 온갖 능작인에 대해 공통으로 설한 것이다.8) 그렇지만 수승한 것(즉 유력능작인)에 대해 말하자면 [결과를] 낳는 힘이 없지 않으니, 이를테면 안(眼)과 색(色) 등이 안식 등을, 음식이 몸을, 씨앗 등이 싹 등을 낳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힐난하고 있다. "만약 일체법이 장애함이 없이 머무르기 때문에 모두 능작인이 된다고 한다면, 어떤 이유에서 제법은 모두 단박에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 또한 어떤 사람이 살생을 하였을 때, 어떤 이유에서 일체의 모든 이는 그 살생자와 마찬가지로 살생의 업을 성취하지 않는 것인가?"9)
  이러한 힐난은 옳지 않으니, 생겨나는 것에 대해 직접적인 조작의 힘[親作力]을 갖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장애함이 없기 때문에 일체의 법이 능작인이 된다고 인정하였을 뿐이다.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설하기를, "온갖 능작인은 모두 결과가 생겨나는 것에 대해 능히 조작[能作]하는 힘을 갖는다"고 하였다.
  그럴 경우 바야흐로 열반 등은 안식이 생겨나는 데 대해 어떻게 능히 조작의 힘을 갖는다고 하겠는가?
  의식은 그것을 소연으로 삼고 경계로 삼아 혹 어떤 경우에는 선한 의식을, 혹 어떤 경우에는 악한 의식을 낳으며, 이러한 의식에 의해 후시(後時)에 안식이 점차로 생겨날 수 있으니, 전전(展轉)하면서 [선행한 법은 뒤에 생겨나는 법에 대해] 원인이 되기 때문에 그 같은 열반 따위도 안식이 생겨나는 것
  
  
  
8) '일체 유위법은 오로지 그 자신을 제외한 그 밖의 일체법에 대해 능작인이 된다'고 하는 말은 직접으로 결과를 낳게하는 유력(有力)능작인과 결과를 낳는데 장애하지 않는 무력(無力)능작인 두 가지 모두에 대한 설 명이라는 뜻.
9) 어떤 사람이 살생의 업을 행한 것은 그를 제외한 다른 모든 이가 그것을 방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다른 모든 이 역시 간접적으로라도 살생의 업을 성취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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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 대해 능히 조작하는 힘을 갖는 것이다.10) 이와 마찬가지로 그 밖의 다른 법에 대해서도 이 같은 경우[方隅]에 따라 '능히 [결과를] 낳는 힘을 갖고 있다.'고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능작인의 상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두 번째로 구유인(俱有因)의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구유인은 서로에 대해 결과가 되는 법으로
  이를테면 대(大)와, 상(相)과 소상(所相)과,
  심수전(心隨轉)에 대한 심(心)과 같은 것이다.11)
  俱有互爲果 如大相所相 心於心隨轉
  
  
  
  
10) 즉 열반을 소연으로 하여 선한 의식이 생겨나고, 그것으로부터 점차로 여러 법이 생겨나며, 이윽고 그 후 그러한 법을 근거로 하여 안식이 생겨나는 경우, 열반도 안식에 간접적인 연(緣)이 되므로 바야흐로 그것 이 생겨나는데 능작인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11) 구유인(sahabhu-hetu)이란 결과와 동시 병존하는 원인으로, 서로가 서로에 대해 인이 되고 과(즉 士用 果)가 되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4대종은 각각의 '대' 자체로서는 현현하지 않으며 반드시 다른 3대와 구기 (俱起)하여 서로가 서로에 대해 인이 되고 과가 되며, 능상의 4상과 소상법 역시 서로가 서로에게 인이 되고 과가 된다. 즉 능상은 소상에 의해, 소상은 능상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다. 또한 구생(俱生)의 관계에 있는 심 왕과 심수전법도 서로가 서로에게 구유인이 된다. 다만 예외적으로 수상(隨相)은 본상에 대해서만 구유인이 될 뿐, 본법에 대해서는 구유인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반대로 수상은 본법에 의해서만 전전하므로 본법은 수 상에 구유인이 된다. 따라서 이것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인이 되고 과가 되지는 않지만, 동일한 결과를 산출한 다는 점에 있어서 구유인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구유인에는 두 가지 이상의 법이 서로가 서로에게 인이 되 고 과가 되는 호위과구유인(互爲果俱有因)과 두 가지 이상의 법이 서로 도와 동일한 결과를 낳는 동일과구유 인(同一果俱有因)이라고 하는 두 가지가 있는데, 본론에서는 구유인을 전자로 이해하고 있는데 반해 중현(衆 賢)은 후자로 이해하여 본송을 "구유인은 동일한 결과를 낳는 법으로,……심(心)과 심수전(心隨轉) 등과 같은 것이다.(俱有一果法 如大相所相 心心隨轉等)"로 개작하고 있다.(『현종론』 권제9, 한글대장경200, p. 219) 이는 아마도 본론 상에서 전자가 경부(경부는 마음과는 독립된 심수전법이나 유위상, 대종체상의 개별적 실재 성을 인정하지 않음)에 의해 비판되고 있기 때문에 보다 광의의 의미인 후자를 취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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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하여 말하겠다. 만약 어떤 법으로서 서로가 서로에게 사용과(士用果)가 되는 것이라면 그러한 법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구유인이 된다.
  그 상은 어떠한가?
  이를테면 4대종(大種)과 같은 것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구유인이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제상(諸相)과 소상법(所相法), 심(心)과 심수전법(心隨轉法)도 역시 서로가 서로에 대해 구유인이 된다. 그러한 즉, 구유인은 서로에 대해 결과(즉 사용과)가 되기 때문에 각기 상응하는 바대로 (일체의) 유위법을 두루 포섭한다고 할 수 있다.12)
  그런데 유위법과 수상(隨相)은 서로에 대해 결과가 되지 않는다.13) 그렇지만 유위법은 수상에 대해 구유인이 되지만 수상은 본법에 대해 구유인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기에서 마땅히 분별해 두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일컬어 심수전법(心隨轉法)이라고 하는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심소와 두 가지 율의(律儀)와,
  그러한 것과 마음의 온갖 상(相)이니,
  
  
  
12) 유부의 법의 이론상 지·수·화·풍 4대종이나 유위제상과 소상(所相), 심법과 심수전법(이를테면 心 所, 定心과 무루심인 정려율의와 무루율의) 등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원인이 되는 동시존재[俱有, sahabh ] 이다. 이를테면 '지대(地大)'는 반드시 그 밖의 나머지 3대와 동시존재하면서 서로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특 히 심과 심수전법은 동시에 생주이멸하고, 미래·과거에도 함께하는 등 열 가지 점에서 공동하며, 나아가 심 법은 최소한 열 가지 심대지법과 그 각각의 4상과 심법의 4상 등 도합 54법과 서로 구유인이 된다.(후술) 따 라서 색·심·심소·불상응행의 일체의 유위법은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구유인이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다.
13) 유부에서는 본법에 대한 수상, 수상 상호간의 관계, 심에 대한 제 심수전법의 수상, 제 심수전법의 수 상 상호간의 관계, 유대조색(有對造色) 상호간의 관계, 정려와 무루율의를 제외한 무표색(無對造色) 상호간의 관계, 대종에 대한 소조색(즉 소조색은 대종과 구기하지만 대종의 因은 될 수 없다), 이미 획득 성취된 소득 법(所得法)에 대한 득(得). 즉 이러한 여덟 가지 범주에 속하는 법들은 동시존재하기는 하지만 구유인은 아니 다. 왜냐 하면 그것들의 결과(등류나 이숙)는 동일하지 않으며, 또한 득(得, pr pti)은 소득법과 반드시 함 께하지 않으며, 먼저 생기기도 하고 혹은 뒤에 생기기도 하기 때문이다.(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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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이 바로 심수전법이다.
  心所二律儀 彼及心諸相 是心隨轉法
  
  논하여 말하겠다. 존재하는 일체의 모든 심상응법(心相應法,즉 심소)과, 정려(靜慮)와 무루(無漏)의 두 가지 율의(律儀)와, 그러한 법(심상응법과 두 가지 율의)과 마음의 '생(生)' 등의 상(相)으로, 이와 같은 것을 모두 심수전의 법이라고 한다.14)
  어떠한 까닭에서 이러한 법을 심수전(心隨轉)이라고 일컬은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시(時)와 과(果)와 선(善) 등에 의해서이다.
  由時果善等
  
  논하여 말하겠다. 간략히 설하면 시(時)와 과(果) 등과 선(善) 등으로 말미암아 '심수전'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가령 '시(時)에 의한다'고 함은, 이러한 법(즉 심소와 율의와 그것의 유위상)과 마음은 동일한 시간에 생기·지속·소멸하며, 아울러 동일한 세에 처함[墮一世]을 말한다.15) '과(果) 등에 의한다'고 함은, 이러한 법과 마음은 동일한 결과(사용과와 이계과)를 획득하며, [동일한] 이숙과와 동일한 등류과를 갖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앞(즉 時)의
  
  
14) 수상(隨相)이 심수전법이 되지 않는 까닭은 마음에 대해 구유인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상인 생생상에 의하지 않고도 마음은 생겨날 수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해 수상은 오로지 본상의 일법에 대해서만 공 능이 있기 때문에 구유인이 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심왕(心王)과 더불어 동일한 하나의 결과[同一果] 를 낳지 않기 때문이며, 마음의 취(聚) 중의 많은 부분은 그것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에 마음의 구유인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수상은 심왕에 따르는 '생' 등의 온갖 상태에 의해서만 전전하기 때문에 마음은 능히 수 상에 대해 구유인이 된다.(『현종론』 권제9, 한글대장경200, p. 221)
15) 과거·현재·미래의 3세(世)를 시간과는 별도로 설한 이유는 시간만으로는 심수전법과 마음이 과거와 미래에도 역시 서로 떠나지 않는 것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혹은 온갖 불생법의 경우도 역시 그러함을 나 타내기 위해서이다. 또한 그 반대로 3세와는 별도로 시간을 설한 이유는 그것을 배제하고는 3세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현종론』 권제9, 앞의 책 200, p. 22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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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일함은 '함께함[俱, 동일한 시간(俱時)]'을 나타내고, 뒤(즉 果)의 동일함은 '공통됨[共, 공동의 과보(共果)]'를 나타내는 것으로, 그 뜻이 동일하지 않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선 등에 의한다'고 함은, 말하자면 이러한 법과 마음은 다 같이 선·불선·무기의 성질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열 가지 이유로 말미암아 '심수전'이라 이름하게 된 것이다.16)
  여기서 심왕(心王)은 지극히 적을 때라도 �여덟 가지의 법에 대해 구유인이 되는데, 이를테면 열 가지 대지법(大地法)과 그것의 마흔 가지 본상(本相)과, 마음의 본상과 수상(隨相) 여덟 가지이니, 이것을 쉰여덟 가지 법이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이러한 쉰여덟 가지 법 가운데 마음의 네 가지 수상을 제외한 나머지 쉰네 가지 법은 마음에 대해 구유인이 된다.17)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마음의 [구유]인이 되는 것은 오로지 열네 가지 법뿐이니, 이를테면 열 가지 대지법과 아울러 마음의 본상이 바로 그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설은 옳지 않은 것이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품류족론』에서 설하는 바에 어긋나기 때문이니,18) 그 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혹 어떤 고제(苦諦)는 유신견(有身見)을 원인으로 삼아도 유신견에 대해서는 원인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19) 이를테면 미래의 유신견과 아울러 그것과 상응하는 법의 생(生)·노(老)·주(住)·무상(無常)을 제외한 그 밖의 모든 염오한 고제이다. 혹 어떤 고제는 유신견을 원인으로 삼고, 유신견에 대해서도 역시 원인이 되는 경우가 있으니, 바로 앞에서 제외된 법(즉 미래의 유신견과 그것과 상응하는 생·노·주·무상)이다." 그런
  
  
16) 여기서 열 가지 이유[因]는 시(時)의 네 가지(동일한 生·住·滅과 동일한 世)와 과(果)의 세 가지(동 일한 과보와 동일한 異熟·等流 果)와 성(性)의 세 가지(동일한 선·불선·무기)이다.
17) 이 경우 '생생' 등의 네 가지 수상은 마음의 과(果)는 되지만, 마음이 생기하는 데 직접적인 인(因)은 아니기 때문에 제외하는 것이다. 아울러 10대지법의 수상 마흔 가지도 마음과는 직접 관계하지 않기 때문에 동시에 존재하기는 하지만 구유인은 되지 않는 것이다.
18) 『품류족론』 권제13(대정장26, p.745상중).
19) 여기서 고제는 일체의 유루법, 일체의 염오법을 말한다. 그리고 유신견(혹은 薩迦耶見, satkaya-d i)은 고제의 이치(무상·고·무아·공)에 미혹하여 일어난 아견(我見)으로, 견고소단(見苦所斷)의 염오법을 낳는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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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 유여사(有餘師, 앞의 어떤 이)는 '아울러 그것과 상응하는 법'이라는 말을 외워 [전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의 비바사사(毘婆沙師)는 말하기를, "그 문장은 반드시 그와 같이 외워 [전해야] 할 것이다. 혹은 마땅히 [구유인의] 뜻에 준하여 [유여사의] 설에 그 밖의 다른 점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20)
  무릇 구유인이 되기 때문에 원인을 성취하는, 다시 말해 구유인으로서의 원인이 되는 모든 법, 그것은 반드시 동시에 존재[俱有]한다. 그렇지만 혹 어떤 경우 동시에 존재하는 법일지라도 구유인으로서의 원인은 되지 않는 법도 있다. 이를테면 온갖 수상(隨相)은 각기 본법(本法)에 대해 [구유인이 되지 않으며], 이 같은 본법의 온갖 수상은 각기 서로에 대해 [구유인이 되지 않는다]. 수심전법(隨心轉法)의 수상은 마음에 대해 [구유인이 되지 않으며], 이 같은 수심전법의 온갖 수상으로 전전(展轉)하는 것은 서로에 대해 [구유인이 되지 않는다]. 구생(俱生)하는 유대(有對)의 조색(造色)으로 전전하는 일체의 법은 서로에 대해 [구유인이 되지 않는다].21) 구생하는 무대(無對)의 조색으로 전전하는 일부의 법은 서로에 대해 [구유인이 되지 않는다].22) 구생하는 일체의 조색과 대종은 서로에 대해 [구유인이 되지 않는다]. 구생하는 일체의 득(得)과 소득(所得)의 법은 서로에 대해 [구유인이 되지 않는다]. 즉 이와 같은 따위의 제법은 비록 동시에 존재[俱有]하는 것이라고 이름할 수는 있을지라도 구유인으로서의 원인은 되지 않으니, 동일한 결과, 동일한 이숙, 동일한 등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득과 소득의 법은 결정코 함께 작용[俱行]하지 않으니, 혹 어떤 경우에는 [득]이 앞서 생겨나기도 하고, 혹 어떤 경우에
  
  
20) 마음에 구유인이 되는 것은 오로지 열네 가지 법 뿐이라고 주장하는 유여사는 『품류족론』에서의 '아 울러 그것(유신견)과 상응하는 법의……'를 외워 전승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유부에서는 반드시 그대로 전승 해야 하며, 혹 그렇지 않은 경우라 할지라도 적어도 구유인의 뜻을 헤아려 그러한 의미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
21) 색법은 최소한 4대종과 4소조색(색·향·미·촉)의 8사(事)가 구생하는데(본론 권제4 참조), 소조색은 서로에 대해 구유인이 되지 않으며, 또한 역시 대종에 대해서도 구유인이 되지 않는다.
22) 무대조색이란 무표색. 이 중에 정려율의(定俱戒)와 무루율의(道俱戒)를 제외한 나머지 무표색, 즉 산 심(散心)에서의 무표색은 서로에 대해 구유인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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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뒤에 생겨나기도 하며, 혹 어떤 경우에는 구생하는 일도 있기 때문이다.23)
  이와 같은 일체의 이치는 바야흐로 그럴 수 있다고 하겠으나 씨앗 등과 싹 등의 관계와 같은 세간에서 상식적으로 인정[極成]되고 있는 인과상생(因果相生) 중에서는 이와 같은 동시인과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떻게 동시생기[俱起]한 제법에 인과의 뜻이 있을 수 있는지 여기서 마땅히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24)
  어찌 [세간일반에서] 현견(現見)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인가? 등불[燈焰]과 불빛[燈明], 싹과 그림자는 동시적 관계이지만 역시 인과가 되는 것이다.25)
  이에 대해 마땅히 보다 상세하게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니, 등불이 빛의 원인이 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앞서 생겨난 인연의 화합에 의해 등불과 빛이 구기(俱起)하는 것인가?26) 그리고 어떤 사물이 광명을 장애하는 경우 그림자가 나타나는 것인데, 어찌하여 이러한 그림자가 싹을 원인으로 삼아 생겨나는 것이라고 설하는 것인가?
  이치상으로 볼 때 마땅히 그렇지 않으니, [인과관계란] 있고 없음에 따르기 때문이다. 인명(因明)에 뛰어난 이들은 인과의 현상에 대해 설하여 말하기를, "만약 이것이 있거나 없을 때 저것도 따라서 있거나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결정적으로 원인이 되고, 저것은 결정적으로 결과가 된다"고 하였다. 나아가 동시에 존재하는 법 가운데 어떤 하나의 법이 존재하면 일체의 법이 존재하
  
  
  
23) 순서대로 법전득(法前得)·법후득(法後得)·법구득(法俱得). 이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4, 주123)을 참 조할 것.
24) 보광과 법보에 의하면 이는 경부(經部)의 물음이다. 즉 상속의 전변과 차별을 주장하는 경부에 있어 인과관계란 반드시 전후 조건에 대한 제약관계로서 동시가 아닌 이시(異時)여야 하기 때문에 유부의 구유(俱 有)의 인과 즉 동시 인과설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씨앗과 싹은 서로가 서로를 낳는 인과상생(相生) 의 관계이지만 그것이 동시가 아니라는 것은 세간의 일반상식[世間極成, loka prasiddha]이라는 것이다. 여기 서 '이와 같은 일체의 이치'란 구유인이 되지 않는 앞의 여덟 가지 예외조항을 말한다.
25) 등불은 빛을 낳고 등불에 비친 싹은 그림자를 낳는다. 그럴 때 등불은 빛의 원인이고 싹은 그림자의 원인으로, 양자는 동시적 인과이다.
26) 앞서 생겨난 인연이란 기름이나 심지 등 등불의 제 조건을 말한다. 즉 이러한 제 조건이 화합함에 따 라 등불과 빛이 동시에 존재하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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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어떤 하나의 법이 존재하지 않으면 일체의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때 이치상 여기에는 인과가 성립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구기(俱起)의 인과는 이치상 바야흐로 그럴 수 있다 할지라도 어떻게 서로가 서로에 대해 인과가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27)
  바로 앞에서 말한 바(일법과 일체법의 동시인과)에 따라 이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앞에서 설한 것처럼 소조색(所造色)은 서로 간에 상리(相離)하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서로에 대해 원인이 되어야 할 것이며, 이와 마찬가지로 조조색과 제 대종, 마음의 수상(隨相) 등과 마음 등의 법도 모두 상리하지 않기 때문에 응당 마땅히 서로에 대해 원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28) 만약 세 개의 막대기는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여 서 있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동시에 존재하는 법의 인과의 뜻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한다면, 이와 같은 세 개의 막대기는 동시에 생기한 상호의존력[相依力]에 의해 서 있다고 해야 할 것인지, 혹은 앞서 생겨난 인연화합의 힘(이를테면 사람이 막대기 세 개를 한곳에 모아둔 것과 같은 인연)이 그러한 세 개의 막대기로 하여금 동시생기하여 서 있게 한다고 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거기에 막대기 이외의 별도의 물건, 이를테면 끈이라든지 못 혹은 땅 등이 연속적으로 유지되어 그것들이 서 있게 되는 것인지를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동시에 존재하는 법)에는 또한 역시 이 밖에 동류인(同類因) 등이 관계하고 있으니, 그렇기 때문에 구유인의 뜻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29)
  이와 같이 구유인의 상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27) 예컨대 싹(형상)과 그림자처럼 원인과 결과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양자가 서로 에 대해 인과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난문.
28) 앞에서 언급한 구유인이 되지 않는 여덟 가지 예외조항 가운데 다섯 번째와 일곱 번째, 그리고 첫 번 째를 말한다. 예컨대 욕계에서 색·향·미·촉의 소조색은 반드시 구생하지만, 유부에서는 그것들 상호간의 구유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29) 세 개의 막대기에는 동시생기한 상호의존력(구유인) 이외에도 못이나 대지 등의 또 다른 원인이 작용 하고 있듯이 동시에 존재하는 제법에도 구유인뿐만 아니라 동류인 등의 다른 원인이 함께 작용하고 있다는 전 제하에서 구유인을 이해해야 한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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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세 번째 동류인의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동류인이란 결과와 서로 유사한 법으로
  자부(自部)·자지(自地)에 대한 원인으로, 먼저 생겨난 법이지만
  무루도의 경우 전전하여 9지(地)에 대해 원인이 되며
  오로지 동등하거나 뛰어난 것만을 결과로 삼는다.
  同類因相似 自部地前生
  道展轉九地 唯等勝爲果
  
  유루의 가행생(加行生)도 역시 그러하니
  문(聞)·사소성(思所成) 등이 그것이다.30)
  加行生亦然 聞思所成等
  
  논하여 말하겠다. 동류인이란 서로 유사한 법[相似法]이 서로 유사한 법에 대해 동류(同類)의 원인이 되는 것을 말하니, 이를테면 선한 오온은 선한 오온에 대해 이러저리 서로 견주어보면 동류의 원인이 되며, 염오는 염오에 대해, 무기는 무기에 대해 각각의 오온을 서로 견주어보더라도 역시 그러함
  
  
  
30) 동류인(sabhaga-hetu)이란 결과와 유사한 성질을 지닌 원인으로, 이를테면 선한 오온은 선한 오온에 대해 동류인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동류인은 5부 9지의 모든 법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자지·자부의 법에 대해서만 동류인이 된다. 예컨대 견소단법은 견소단법에 대해서만, 욕계법은 욕계법에 대해서만 동류인 이 된다. 또한 자지·자부의 법이라 하더라도 선행된 법만이 후법(後法)에 대해 동류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미래법은 동류인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무루도는 불계(不繫)이기 때문에 9지의 모든 유사한 법에 대해 동류 인이 된다. 또한 무루는 가행에 의해 생겨나기 때문에 원인과 동등하거나 뛰어난 유사법에 대해 동류인이 될 뿐이다. 이를테면 견도는 견도·수도·무학도에 대해, 수도는 수도와 무학도에 대해, 무학도는 무학도 한 가 지에 대해서만 동류인이 된다. 그리고 유루도로서 가행생인 문(聞)·사(思)·수소성법(修所成法)도 역시 동등 하거나 뛰어난 법에 대해 동류인이 된다. 나아가 이러한 문·사·수소성법에도 각기 하하품에서 상상품에 이 르는 9품이 있는데, 하하품의 법은 9품에 대해 동류인이 되며, 하중품은 8품에 대해, 상상품은 자신의 1품에 대해 동류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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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설하기를, "정무기온(淨無記蘊 : 즉 無覆無記의 蘊)의 다섯 가지는 바로 색온의 과(果)이지만 [그 밖의] 4온은 색온의 인(因)이 아니다"고 하였다.31) 또한 어떤 유여사는 설하기를, "다섯 가지는 바로 4온의 결과이지만 색온은 4온의 인이 아니다"고 하였다. 또한 어떤 유여사는 설하기를, "색온과 4온은 이리저리 서로를 견주어 보더라도 모두 [동류]인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한 한 소의신 중에서 갈랄람(?剌藍)의 단계는 능히 열 가지 단계[十位]에 대해 동류인이 되며, 알부담(?部曇) 등의 아홉 단계는 각각이 모두 앞의 단계를 제외한 그 밖의 단계에 대해 [동류]인이 된다.32) 그렇지만 만약 다른 소의신에서의 열 단계에 대해서라면 각각의 단계는 모두 [다음 생의] 열 단계에 대해 [동류]인이 된다.33) 그리고 이 같은 예에 따라 외계의 보리나 벼 따위의 자류(自類)와 자류의 관계에 대해서도 마땅히 널리 사택해 보아야 할 것이다.34)
  그런데 만약 색온이 색온에 대해 동류인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35) 그 같은 주장은 바로 본론(本論)에서 설한 바에 어긋나게 될 것이니,36) 본론에서는 설하기를, "과거의 대종은 미래의 대종에 대해 인연(因緣)과 증
  
  
31) 심·심소법은 승법(勝法)이기 때문에 열법(劣法)인 색온의 인이 되지 않는다.
32) 여기서 10위란 탁태(托胎)서부터 이후 죽을 때까지를 열 단계로 나눈 것으로, 태내의 5위와 태외의 5 위가 있다. 태내 5위란 갈랄람(?剌藍, kalalam, 凝滑)·알부담(?部曇, arbudam, 胞)·폐시(閉尸, p s , 血肉)·건남(鍵南, ghanam, 堅肉 : 이상 탁태 후 5주일 동안의 상태)·발라사가(鉢羅奢?, pra akh , 支節 : 5주 이후부터 출산 때까지의 상태). 태외 5위란 영해(?孩)·동자·소년·성년·노인의 다섯 단계를 말함. 즉 이러한 열 가지 상태 중 앞의 것은 그것과 서로 유사한 뒤의 상태를 인기하기 때문에, 앞의 상태는 동류인 이고 뒤의 상태는 등류과임.
33) 다른 소의신이란 다른 생에서의 소의신을 말하는 것으로, 현재생의 열 단계는 각기 다음 생에서의 열 단계에 대해 동류인이 된다는 뜻.
34) 보리는 보리의 동류인이 되고 벼는 벼의 동류인이 된다는 뜻. 여기서 자류(自類)와 자류의 관계란 종 자로서의 보리와 과실로서의 보리의 관계를 말한다.
35) 색이 색의 동류인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이는 『대비바사론』 권제17(한글대장경118, p. 394) 에 의하면 외국제사(外國諸師) ; 『순정리론』 권제16(한글대장경178, p. 402)에 의하면 비유자(譬喩 者)이다.
36) 여기서의 본론 『발지론』 권제13(대정장26, p.986중;한글대장경176, p. 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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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연(增上緣)이 된다"고 하였던 것이다.37)
  그렇다면 서로 유사한 온갖 법은 서로 유사한 법에 대해 모두 동류인이 된다고 설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어째서인가?
  자부(自部)와 자지(自地)의 법은 오로지 자부·자지의 법에 대해서만 동류인이 된다. 그래서 [본송에서] '자부·자지'라고 설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부'란 이를테면 5부(部)로서, 견고소단(見苦所斷) 내지 수소단(修所斷)을 말하며,38) '지'란 이를테면 9지(地)로서, 욕계의 한 가지와 [4]정려와 [4]무색의 여덟 가지를 말한다. 즉 이 가운데 욕계의 견고소단의 법은 다시 욕계의 견고소단에 대해 동류인이 되지만 그 밖의 법에 대해서는 동류인이 되지 않으며,39) 이와 마찬가지로 수소단의 법은 다시 수소단의 법에 대해 동류인이 되지만 그 밖의 법에 대해서는 동류인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각각의 법으로서 욕계지의 그것은 다시 욕계의 그것에 대해 동류인이 되고, 초정려지의 그것은 초정려의 그것에 대해 동류인이 되며, 내지 유정지(有頂地)의 그것은 유정지의 그것에 대해 동류인이 되는 것으로, 다른 지의 그것에 대해 동류인이 되는 일은 결코 없다.
  또한 이러한 자부와 자지의 법은 일체의 자부와 자지의 법에 대해 동류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자부와 자지의 법에 대해 동류인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먼저 생겨난[前生] 법'이다. 오로지 먼저 생겨난 제법만이 그 후 서로 유사하게 생겨나는 법과 아직 생겨나지 않은 법에 대해 동류인이 되는
  
  
  
37) 인연(因緣)은 4연의 하나로, 그것은 6인 중 능작인을 제외한 5인에 해당하는데, 이 5인 가운데 과거대 종과 미래대종의 관계에 대한 것은 동류인 등류과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증상연은 능작인에 해당한다(4 연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7, p.326을 참조할 것).
38) '부(prak ra)'란 번뇌가 끊어지는 유형으로, 여기에는 사제 각각에 대한 네 가지 관찰(dar ana, 見 苦諦所斷 내지 見道諦所斷)과 선정올 통한 반복된 관찰 실수(bh van , 修所斷) 등 5부가 있다. 이에 대해서 는 본론 「수면품」 권제19, p.862를 참조할 것.
39) 예컨대 고제 하에 소속된 사견(邪見)은 역시 고제 하에 소속된 후찰나 사견의 동류인이 되지만, 집제 하의 사견에 대해서는 동류인이 되지 않는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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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것이다.
  어떻게 그러함을 아는 것인가?
  본론(本論)에서 설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발지론』에서 설하기를, "무엇을 일컬어 동류인이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먼저 생겨난 선근은 이후에 생겨나는 자계(自界)의 선근과 아울러 그것의 상응법에 대해 동류인이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선근은 그 밖의 2세(과거와 현재)의 법에 대해, 과거·현재의 선근은 미래의 선근에 대해 동류인이 된다는 사실 따위에 대해서도 마땅히 널리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40)
  그런데 그 논에서는 바로 다음과 같이 묻고 있다. "만약 어떤 법이 그 같은 법에 대해 인[연]이 되었다고 한다면 혹 어느 때 이 법이 그 같은 법에 대해 인[연]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인가?" 그리고는 그 논에서 답하여 말하기를, "어떠한 때라도 인[연]이 되지 않는 경우는 없다"고 하였다.41)
  이는 바로 구유·상응·이숙의 세 가지 원인에 근거하여 은밀히 설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미래법에는 동류인이 없다는 주장)에는 아무런 허물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는 말하기를, "미래 정생위(正生位)의 법은 결정코 능히 그 같은 법에 대해 동류인이 되니,42) 그렇기 때문에 그 논의 글에서는 최후의 단계(즉 미래 生相位)에 근거하여 은밀하게 '어떠한 때라도 인[연]이 되지 않는 때는 없다'고 답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힐난된 내용에 대해 잘 해석한 것이 아니니, 미래법은 정생위 이전에는 동류인이 되지 않으며, 그 뒤 [생상위(生相位)에 이르러] 비로소 동
  
  
  
40) 권제1(대정장26p.920하; 한글대장경176, p. 15).
41) 『발지론』 권제20(대정장26, p.1026중; 한글대장경176, p. 488). 즉 동류인은 자부(自部)와 자지(自 地)의 법 중 먼저 생겨난 법만이 동류인이 될 수 있는 것이므로 미래법에는 동류인이 없다. 본 단은 바로 이 같은 유부설에 대한 논란이다. 즉 『발지론』에서 어떤 법이 다른 어떤 법에 인연이 되는 것이라면 어느 때라 도 인연이 되지 않는 경우는 없다고 하였으므로(4연 중의 하나인 인연은 구유·상응·동류·변행·이숙인에 해당함;본론 권제7 참조) 미래법도 동류인이 될 수 있다는 뜻.
42) 즉 미래법에는 동류인이 없지만 미래법이 지금 바로 현재화하려는 단계[正生位, 이를테면 半미래 半현 재의 상태]에서 그 법은 '그 같은 법' 즉 아직 생상위(生相位)에 오지 않은 미래법에 대해 동류인이 될 수 있 기 때문에 『발지론』의 논의가 틀린 것은 아니라는 유부의 통석(通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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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인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미래 생상위의 법이 동류인이 된다고 한다면, [그 논에서의 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즉 그 논에서 다시 물어 말하기를, "만약 어떤 법이 그 같은 법에 대해 등무간연이 되었다고 한다면 혹 어느 때 이 법이 그 같은 법에 대해 등무간연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인가?" 그리고는 그 논에서 바로 답하여 말하기를, "만약 이 법이 아직 이생위(已生位,즉 현재)에 이르지 않았을 때 [등무간연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43) 만약 그의 해석대로 라고 한다면, 마땅히 이 역시 '어떠한 경우라도 [등무간]연이 되지 않는 때는 없다'고 대답하여야 하였을 것인데, [논에서는] 어찌하여 '만약 이 법이 아직 이생위에 이르지 않았을 때라면 [등무간연이 되지 않는다]고 대답하였던 것인가?
  그런데 그는 다시 해석하기를, "[『발지론』의 논의는] 두 갈래[二門]로 나타내고자 하였으니, 그곳에서 설한 바대로 여기에서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할 것이며, 여기에서 설한 바대로 그곳에서도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하였다.44)
  그러나 이와 같이 해석하여 작문(作文)한들 도대체 무슨 공덕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인가? 오로지 논주(論主, 『발지론』의 저자 迦多衍尼子)가 글에 능숙하지 않다는 사실만을 드러낼 뿐이다. 그러므로 앞의 해석이 뛰어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45)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품류족론』에서 이같이 설하였겠는가?46): "혹은 어떤 고제(苦諦)는 유신견(有身見)을 원인으로 하지만 유신견에 대해 원인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미래의 유신견과 아울
  
  
43) 『발지론』 권제20(대정장26, p.1026중; 한글대장경176, p. 488).
44) 『발지론』에서 인연에 대해서는 '어떠한 경우라도 인연이 되지 않는 때는 없다'고 하고, 등무간연에 대해서는 '아직 이생위(현재)에 이르지 않았을 때는 등무간연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두 갈래의 대답은 결국 두 곳(인연에 대해 문답한 곳과 등무간연에 대해 문답한 곳) 모두에 적용될 수 있다는 뜻
45) 여기서 앞의 해석이란 '이는 바로 구유·상응·이숙의 세 가지 원인에 근거하여 은밀히 설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미래법에는 동류인이 없다)에는 아무런 허물이 없다'는 해석.
46) 미래에서는 동류인이 없다고 하는 유부의 주장에 대한 두 번째 난. 이하는 『품류족론』 권제13(대정 장26, p. 745상중)에서의 인용. 『대비바사론』 권제17(한글대장경118,p38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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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 그것과 상응하는 고제를 제외한 그밖의 온갖 염오한 고제가 바로 그것이다. 혹은 어떤 고제는 유신견을 원인으로 삼고 또한 역시 유신견에 대해 원인이 되는 경우가 있으니, 앞에서 제외한 법이 바로 그것이다.47)
  그 논에서의 글귀는 응당 '미래의 유신견과 상응하는 고제의 법을 제외한……'을 설한 것으로, 설사 그와 같이 설하였다고 할지라도 뜻에 따라 그것은 마땅히 비리(非理)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48)
  또한 다시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시설족론』에서의 설은 어떻게 통석(通釋)할 것인가? 즉 그 논에서 설하기를, "제법은 네 가지[四事]가 결정되어 있으니, 이른바 인(因)과 과(果)와 소의(所依)와 소연(所緣)이 바로 그것이다"고 하였다.49)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그 논문(論文)에서 '인'이라고 한 것은 능작인과 구유인과 상응인(相應因)과 이숙인(異熟因)을 말한 것이며,50) '과'라고 한 것은 증상과(增上果)와 사용과(士用果)와 이숙과를 말한 것이며,51) '소의'라고
  
  
47) 즉 유신견을 원인으로 삼고 또한 그것에 대해 원인이 되는 고제의 법이 미래의 유신견과 그 상응법이 라고 한다면, 이는 바로 미래의 유신견은 유신견에 대해 원인이 된다는 뜻이므로 미래에도 동류인이 존재한다 는 말이다. 왜냐 하면 미래의 유신견이 유신견을 낳은 원인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미래의 유신견은 그것이 낳 을 유신견과 동시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동류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48) 난문자는 앞에서 '미래의 유신견과 아울러 그것과 상응하는 고제의 법'이라고 읽었지만, 그것은 사실 '미래의 유신견과 상응하는 고제의 법'이라고 읽어야 한다. 그럴 경우 유신견을 원인으로 하고 유신견의 원인 이 되는 것은 유신견 자체가 아니라 유신견과 상응하는 고제의 법이며, 그 같은 법은 동류인이 아니라 상응인 혹은 구유인이 된다. 따라서 『품류족론』의 글귀는 미래의 동류인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설사 백보 양보 하여 '아울러 그것과 상응하는'이라고 읽는다고 할지라도 그 뜻은 이같이 이해되어야지 그렇지 않을 경우 그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뜻.
49) 즉 인과가 법이(法爾)로서 결정되어 있다고 한다면 어떤 법이 현재 정생위에서 갑자기 동류인이 될 수 는 없으며 마땅히 미래 어떤 순간부터 동류인으로 결정되어 있어야만 법이로서 결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미래에도 동류인이 존재한다고 해야 한다는 뜻. 『대비바사론』 권제17(한글대장경118,p389) 참조.
50) 능작인 등의 4인은 법체(法體)에 대해 설정한 원인이기 때문에 본래부터 결정된 것이지만 동류인과 변 행인의 경우는 법이 현재 나타나 작용을 일으키는 상태[位]에 근거하여 설정된 원인이기 때문에 동류인은 본 래부터 결정된 원인이 아니라는 뜻. 그런데 구역에서는 상응인만을, 범본에서는 상응·구유인 두 가지만을 언 급하고 있다.
51) 이들 세 과는 이미 미래 잡란위(雜亂位) 중에서도 어떤 원인에 대한 결과로 결정되어 있지만, 등류과( 等流果)는 전념(前念)에 의해 인생(引生)된 작용 상에 설정되는 것이며, 이계과(離繫果)는 무위택멸 상에 건 립된 것이어서 삼세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결정된 것이 아니다. 5과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6(p.313)에 논설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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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것은 안(眼) 등의 6근을, '소연'이라고 한 것은 색(色) 등의 6경을 말한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동류인은 일찍이 없다가 지금 있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52)
  [유부에서도 그렇다고] 인정하기 때문에 어떠한 과실도 없다. 즉 동류인은 작용하는 상태[位]에 근거하여 설정된 것이지 본질 자체[體]에 근거하여 설정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인연이] 화합하여 작용하는 상태가 결과를 낳는 것이지 법체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동류인은 이숙인처럼 미래세에 존재한다고 하면 여기에는 어떤 허물이 있는 것인가?
  미래세에 만약 동류인이 있다고 한다면 본론(本論,아비달마논서) 중에서 마땅히 논설하였을 것이다.(비바사사 反難)
  본론에서는 오로지 능히 취과(取果)와 여과(與果)의 공능을 갖는 동류인에 대해서만 설하였기 때문에 [미래 동류인에 대한 논설이 없을지라도 그것이 있다고 하는 것에는] 어떠한 과실도 없는 것이다.53)
  그와 같은 뜻은 없으니, 동류인은 등류과(等流果)를 인기(引起)하기 때문이다. 즉 미래에는 전후가 없기 때문에 이러한 등류과가 미래에 있다고 하는 것은 이치상 옳지 않은 것이다. 또한 과거로 낙사한 법이 현재법의 등류과일 수 없듯이 이미 생겨난 법(즉 현재의 법)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법(미래의 법)의 등류과일 수는 없는 일로서, 그것은 결과가 먼저이고 원인이 나중이 되는 과실을 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54) 따라서 미래세에는 동류인이 없는 것
  
  
52) 동류인은 결정적이지 않고 지금 생겨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주장은 삼세실유설에 위배된다는 뜻.
53) '취과'란 결과를 직접 인기하는 공능을 말하며, '여과'는 결과를 생기하게 하는 간접적인 공능을 말한 다.(본권 주169 참조) 즉 아비달마에서는 이러한 공능을 지닌 동류인 만을 설하고 그렇지 않은 미래 동류인에 대해서는 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같은 사실에 근거하여 동류인의 일반론을 설해서는 안 된다는 뜻.
54) 미래세는 시간상의 전후차별이 결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미래세의 전찰나의 법이 후찰나에 동류의 법을 결과(등류과)로서 낳을 수 없다. 혹은 반대로 미래의 동류인이 현재나 과거의 등류과를 낳는다고 할 경 우, 결과가 원인보다 선행하게 되는 모순을 낳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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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숙인도 마땅히 미래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니, 응당 마땅히 이숙과가 원인보다 먼저이거나 동시라고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며,55) 미래세의 법에는 전후가 없기 때문이다.
  [이숙인에는] 이와 같은 과실이 없으니, [원인과 결과가] 서로 유사하지 않기 때문이다.56) 즉 앞에서 말한 대로 동류인과 그 결과는 서로 유사한데, 만약 시간적인 전후차별이 없다고 한다면 응당 마땅히 서로가 서로에게 원인이 되어야 할 것이고, 이미 서로에 대해 원인이 되었다면 응당 마땅히 서로에 대해 결과가 되어야 할 것이며, 이와 같이 서로가 서로에 대해 원인과 결과(동류인·등류과)가 된다고 하는 것은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숙인은 결과와 서로 유사하지 않기 때문에 비록 [미래세가] 전후의 차별을 떠나있다고 할지라도 앞에서와 같은 허물은 없다. 따라서 동류인은 [현재 작용하는] 상태[位]에 근거하여 건립된 것이기 때문에 미래세에는 있을 수 없으며, 이숙인은 [법의 체]상(體相)에 근거하여 건립된 것이기 때문에 미래세에도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앞에서] '동류인은 오로지 자지(自地)에 대한 것이다'고 말한 것은 결정적으로 어떠한 법에 근거하여 설한 것인가?
  그것은 결정코 유루법에 의거하여 설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무루도의 경우 이리저리 서로 견주어 보면 그 하나하나는 모두 9지(地)에 대해 인이 된다. 즉 미지정(未至定)과 정려중간과 4근본 정려와 아울러 3근본 무색정의 9지의 도제(道諦)는 모두 서로에 대해 동류인이 된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이러한 무루도는 그 같은 온갖 지(地)에서는 모두 손님[客]이 머무는 것처럼 3계에 포섭되어 떨어지지 않으니, 그 같은 온갖 지에 애착하고 집착하여 자기가 있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9지의 무루도는 비록 그
  
  
  
55) 이숙인 이숙과도 동류인 등류과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시간적인 전후관계 상에 설정된 것인데, 어째서 이숙인은 미래에 있다고 하면서 동류인은 없다고 하는 것인가 하는 난문.
56) 즉 원인은 선 혹은 악이고, 결과는 무기이기 때문에 이숙인과 이숙과는 다 같이 함께 미래세 잡란(雜 亂)되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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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가 동일하지 않을지라도 전전(展轉)하며 동류인이 될 수 있으니, 동등한 종류이기 때문이다.57) 그렇지만 [9지는 일체의 무루도에 대해 동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동등한 것[等]과 뛰어난 것[勝]에 대해서만 동류인이 될 수 있고 열등한 법에 대해서는 동류인이 될 수 없으니, 가행(加行)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이미 생겨난 고법지인(苦法智忍)은 다시 미래의 고법지인에 대해 동류인이 되니, 이와 같은 [미래의 고법지인을] 일컬어 '동등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이러한 고법지인은 이후 다시 고법지로부터 내지 무생지(無生智)에 이르는 법에 대해 능히 동류인이 되니, 이와 같은 [상지의] 법을 일컬어 '뛰어난 것'이라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지는 이미 생겨난 온갖 무생지는 오로지 동등한 종류의 법에 대해서만 동류인이 되니, 더 이상 뛰어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미 생겨난 온갖의 견도(見道)와 수도(修道), 그리고 무학도(無學道)는 그 순서대로 세 가지와 두 가지와 한 가지에 대해 동류인이 된다.58) 또한 이 중에서 온갖 둔근(鈍根)의 도는 둔근과 아울러 이근(利根)의 도에 대해 동류인이 되며, 만약 이근의 도라면 오로지 이근의 도에 대해서만 동류인이 된다.
  또한 수신행(隨信行)과 아울러 신승해(信勝解) 시해탈(時解脫)의 도와 같은 것은 그 순서대로 여섯 가지, 네 가지, 두 가지에 대해 동류인이 되며, 수법행(隨法行)과 견지(見至)와 비시해탈(非時解脫)은 그 순서대로 각기 세 가지, 두 가지, 한 가지에 대해 동류인이 된다.59)
  
  
57) 즉 무루도는 비록 9지(地)에 근거하여 일어나지만 그 지를 자기의 것이라 여기지 않기 때문에 지에 계 속(繫屬)되지 않으며, 지에 제한받지도 않는다. 따라서 종류가 동일하다면 비록 지에 차별이 있을지라도 서로 에 대해 동류인이 된다.
58) 즉 견도는 견·수·무학의 3도에 대해, 수도는 수·무학 2도에 대해, 무학도는 오로지 무학도에 대해 서만 동류인이 된다.
59) 수신행은 수신·수법·신승해·견지·시해탈·비시해탈의 여섯 가지에 대해, 신승해는 신승해·견지· 시·비시해탈의 네 가지에 대해, 시해탈은 시·비시해탈의 두 가지에 대해 동류인이 된다. 수법행은 수법·견 지·비시해탈의 세 가지에 대해, 견지는 견지와 비시해탈 두 가지에 대해, 비시해탈은 비시해탈에 대해서만 동류인이 된다. 여기서 수신행·신승해·시해탈이란 각기 견·수·무학위를 닦는 둔근의 종성을 말하며, 수법 행·견지·비시해탈은 각기 견·수·무학도를 닦는 이근의 종성를 말한다. 유·무학의 종성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25(p.1145-1146)를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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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지(上地)의 온갖 도가 하지의 인이 된다면, 어째서 혹은 동등하고, 혹은 뛰어난 것이라고 일컫는 것인가?60)
  원인의 증장(增長)에 의해, 그리고 근(根)에 따라 그렇게 일컬은 것이니,61) 이를테면 견도 등[의 3도]와 하하품 등[의 9품]은 그 다음다음 단계로 나아갈수록 원인이 점차 증장되는 것으로, 비록 어떤 한 상속(相續) 중에 수신행과 수법행의 두 도가 현기하는 것은 있을 수 없지만, 이미 생겨나 있는 법은 미래 [수법행 등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62)
  그렇다면 오로지 성도(聖道)만이 '동등한 것'과 '뛰어난 것'에 대해 동류인이 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어째서인가?
  그 밖의 세간법으로서 가행(加行)에 의해 생겨난 것도 역시 '동등한 것'과 '뛰어난 것'에 대해서는 동류인이 되지만 열등한 것에 대해서는 동류인이 되지 않는다.
  가행에 의해 생겨난 법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문소성(聞所成)과 사소성(思所成) 등이다. 여기서 '등'이라고 함은 수소성(修所成) 따위도 두루 취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문(聞)·사(思)·수(修)에 의해 생겨난 공덕을 그것의 '소성'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그것들은 곧 가행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오로지 그것과 '동등한 것'과 '뛰어난 것'에 대해 동류인이 되고, 열등한 것에 대해서는 동류인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를테면
  
  
  
60) 앞에서 9지의 무루도는 서로에 대해 동류인이 된다고 하였다.
61) 여기서 원인이란 견·수·무학도로서, 이러한 원인은 지(地)의 상하에 의해 승열(勝劣)이 결정되는 것 이 아니라 근의 이둔(利鈍)에 의해, 9품(品)의 차별에 의해 결정된다. 예컨대 상지일지라도 둔근의 도는 열등 하고, 하지일지라도 이근의 도는 뛰어나며(견도의 경우), 상지의 하하품의 지(智)보다는 하지 하중품의 지가 뛰어나며 또한 상지의 하중품의 지보다는 하지 하상품의 지가 뛰어나다. 이를테면 제2정려지의 하하품의 무루 지보다도 초정려지의 하중품의 지가 뛰어난 것과 같다.
62) 이는 수신행은 수법행의 동류인이 된다고 한 데 대한 난문의 답이다. 즉 견도는 빠르게 전이하는데 어 떻게 수신행으로부터 수법행으로 전득(轉得)할 수 있는 것인가? 동일한 소의신 중에 두 법이 현기할 수는 없 지만 둔근으로부터 이근으로 전근(轉根)할 때 이미 생겨난 수신행의 도가 아직 생겨나지 않은 미래 수법행의 동류인이 되며, 아울러 신해는 견지의, 시해탈은 불시해탈의 동류인이 된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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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계에 계속(繫屬)되는 문소성의 법은 능히 자계(自界)의 문·사소성에 대해 동류인이 되지만 수소성의 인은 되지 않으니, 그것(즉 수소성의 법)은 욕계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소성의 법은 사소성에 대해 동류인이 되지만 문소성의 인은 되지 않으니, 그것(즉 문소성의 법)은 열등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색계에 계속되는 문소성의 법이라면 능히 자계의 문·수소성에 대해 동류인이 될 수 있지만 사소성의 인은 되지 않으니, 그것(즉 사소성의 법)은 색계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소성의 법은 오로지 자계의 수소성의 법에 대해서만 동류인이 되지만 문소성의 인은 되지 않으니, 그것(즉 문소성의 법)은 열등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무색계에 계속되는 수소성의 법은 오로지 자계의 수소성의 법에 대해서만 동류인이 되지만 문·사소성의 인은 되지 않으니, 그것은 무색계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열등한 것이기 때문이다.63)
  이와 같은 문·사·수소성의 제법에는 다시 9품(品)이 있는데, 만약 하하품(下下品)의 법이라면 그것은 9품에 대해 동류인이 되고, 하중품(下中品)일 경우 8품에 대해 인이 되며, 내지 상상품일 경우 오로지 상상품에 대해서만 동류인이 될 뿐이니, 앞의 열등한 것을 제외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생득(生得)의 선법에도 9품이 있는데, 그것들을 서로 견주어보면 이리 저리 동류인이 된다.64)
  염오법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65)
  무부무기(無覆無記)에는 모두 네 가지 종류가 있다. 이를테면 이숙생(異熟生)·위의로(威儀路)·공교처(工巧處)·변화심[化心]과, 그것과 함께 일어나는 것[俱品 : 즉 네 가지 무기와 함께하는 심소와 4相 등]이 바로 그것인데, 이것들은 그 순서에 따라 능히 네 가지와 세 가지와 두 가지와 한 가지에
  
  
  
63) 즉 무색계에서는 듣는 일이 없으며, 또한 문소성의 지(智)는 수소성의 그것보다 열등한 것이기 때문이 다.
64) 생득의 선법은 9품 모두가 서로에 대해 동류인이 된다. 참고로 생득의 선법은 가행선에 대해 동류인이 되지만 가행선은 생득의 인이 되지 않으니, 그것은 열등한 것이기 때문이다.
65) 유부무기(有覆無記)를 포함한 염오법에도 역시 9품의 차별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그 대치도(對治道) 에 9품이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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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해 동류인이 된다.66) 또한 욕계의 변화심은 4정려의 결과(즉 등류과)로서 존재하는데, 상(上) 정려의 결과는 하(下) 정려의 결과에 대해 동류인이 되지 않으며, 가행의 원인에 의해 하정려의 열등한 결과는 획득되지 않으니, 공력(功力)을 들여 벼와 보리 따위를 뿌린 것처럼 힘들여 수고하였으므로 획득되는 바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뜻('뛰어난 것'은 열등한 것의 동류인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으로 말미암아 어떤 이가 물어 말하였다. "이미 생겨난 제 무루법으로서 아직 생겨나지 않은 상태[未生位]의 무루법에 대해 동류인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는가?"
  그러한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이미 생겨난 고법지품(苦法智品)은 아직 생겨나지 않은 고법인품(苦法忍品)에 대해 [동류인이 되지 않으며],67) 또한 [이미 생겨난] 일체의 뛰어난 무루법은 열등한 일체의 무루법에 대해 [동류인이 되지 않는다.]68)
  "한 상속신 중의 온갖 무루법으로서 이전에 결정적으로 획득된 것은 이후에 생겨난 무루법에 대해 동류인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는가?"
  그러한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미래의 고법인품은, 그 이후(고법인 이후)에 이생(已生)의 고법지품에 대해 [동류인이 되지 않으니],69) 결과가 원인에 앞서 존재하는 일은 필시 없기 때문이다. 혹은 동류인은 미래세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 생겨난 제 무루법으로서 그 이후에 이미 일어난 무루법에 대해 동류
  
  
  
66) 네 가지란 이숙생의 마음이 자신과 다른 세 가지에 대해 동류인이 되는 것, 세 가지란 위의로의 마음 이 자신과 다른 두 가지에 대해 동류인이 되는 것, 두 가지란 공교처가 자신과 다른 한 가지에 대해 동류인이 되는 것, 한 가지란 변화심이 자신에 대해 동류인이 되는 것. 즉 이숙생의 마음은 과거 업역에 의해 낳아진 것으로 네 가지 무기심 중 그 세력이 가장 열등하며, 위의로는 현재 작의(作意)에 의해 일어나므로 이숙무기 보다는 뛰어난 법이라는 것이다.
67) 고법지는 뛰어난 것이고, 고법인은 열등한 것이기 때문이다.
68) 이를테면 아라한과에서 물러나 불환과의 도를 낳았을 때 전생(前生)의 무학도는 후생(後生)의 유학도 즉 불환과의 도에 대해 동류인이 되지 않는다.
69) 견도 첫단계에 미래수(未來修)로서 획득된 미래의 고법인은 고법지에 의해 이전에 획득되었지만 법체 가 미래에 있기 때문에 현재 이생(已生)의 고법지에 대해 동류인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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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는가?"
  그러한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앞서 생겨난 뛰어난 무루법은, 그 이후에 이미 일어난 열등한 무루법에 대해 [동류인이 되지 않으니], 이를테면 상과(上果)에서 물러난 자에게 하과(下果)가 현전하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70) 또한 이전에 이미 생겨난 고법지의 득(得)은, 그 이후 이미 생겨난 고법인의 득에 대해서도 동류인이 되지 않으니, 그것(고법인의 득)은 열등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동류인의 상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네 번째로 상응인(相應因)의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상응인은 결정코 심·심소 뿐으로
  소의가 동일한 것[同依]이다.71)
  相應因決定 心心所同依
  
  논하여 말하겠다. 오로지 심·심소만이 바로 상응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소연(所緣)과 행상(行相)에 다름이 있는 것도 역시 마땅히 서로가 서로에 대해 상응인이 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소연과 행상이 같은 것만을 '상응'이라고 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시간을 달리할지라도 소연과 행상이 같은 것이라면 마땅히 상응인이라고 설해야 하는 것인가?
  
  
  
70) 예컨대 아라한과 등과 같은 상과(上果)에서 불환과 등의 하과(下果)가 현전하는 경우, 제4과의 무루는 과도(果道)의 무루로서 '뛰어난 것'이며, 그 뒤의 무루는 향도(向道)로서 열등한 것이다. 이런 경우 앞의 뛰 어난 무루법은 뒤의 열등한 무루법의 동류인이 되지 않는다.
71) 상응인(sa prayuktaka hetu)이란 구유인의 일부를 독립시킨 것이다. 즉 구유인이 상호간에 과(果)가 되는 일체의 유위법이라면, 상응인은 소의·소연·행상·시(時)·사(事)의 다섯 가지로써 평등하게 관계[五義 平等](본론 권제4, p.190 참조)하는 심·심소뿐으로, 따라서 양자는 상호간에 인과 과가 되며 항상 상응·구 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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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지 않다. 요컨대 소연과 행상과 아울러 시(時)가 동일한 것만을 '상응'이라고 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소의신은 다를지라도 소연과 행상과 시간이 동일한 것이면 마땅히 상응인이라고 설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이를테면 여러 사람이 초생달을 보는 것과 같은 것으로,72) 한마디로 말하면 이와 같은 여러 비방과 힐난을 모두 막기 위해 [본송에서] '소의가 동일한 것[同依]'이라고 설한 것이니, 이를테면 요컨대 동일한 소의를 갖는 심·심소법이야말로 비로소 서로에 대해 상응인이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동일하다'고 하는 말은 소의가 하나임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만약 안식이 지금 이 찰나의 안근을 소의로 삼았다면, 그것과 상응하는 수(受) 등도 역시 지금 이 찰나의 안근을 소의로 삼는다. 내지 의식과 그 상응법도 역시 그러하여 의근을 동일한 소의로 삼은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상응인의 본질은 바로 구유인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원인은 그 뜻에 어떠한 차별이 있는 것인가?
  서로에 대해 결과가 되기 때문에 구유인으로, 이를테면 상인들이 서로 의지하며 험난한 길을 함께 가는 것과 같다. 그리고 5의(義)가 평등함에 따라 함께 상응하기 때문에 상응인을 세우니, 그것은 이를테면 상인들이 식사 등을 함께하고 사업을 함께하는 것과 같다.73) 그(5義) 중 어느 한 가지만 결여되어도 그것들은 모두 상응하지 않으니, 그렇기 때문에 [심과 심소는] 서로에 대해 [상응]인이 된다는 사실은 잘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상응인의 상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다섯 번째로 변행인(遍行因)의 상은 어떠한가?
  
  
  
72) 여러 사람이 동일한 시간에 초생달을 볼 경우, 소연·행상·시간이 동일하다고 해서 그것을 상응인이 라고 하지 않는다는 힐난. 즉 상응이라 함은 반드시 소의가 동일한 것을 말한다.
73) '함께 상응한다(samarayoga)'란 '함께 작용한다(samaprv tti)'는 뜻이다. 곧 여러 상인들이 각기 평 등한 입장에서 함께 사업을 조작하듯이 심·심소 또한 평등한 관계로써 함께 작용하는 것이 바로 상응의 뜻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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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송으로 말하겠다.
  
  변행인이란 이전에 생겨난 변행의 법이
  같은 지(地)의 염오법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74)
  遍行謂前遍 爲同地染因
  
  논하여 말하겠다. 변행인이란, 이를테면 이전에 이미 생겨난 변행의 제법은 그 후 같은 지(地)의 온갖 염오의 제법에 대해 두루 작용하는 인[遍行因]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변행의 제법에 대해서는 「수면품(隨眠品)」(본론 권제19) 중의 변행의 뜻을 밝히는 곳에서 마땅히 널리 분별하리라.
  이것은 염오법에 대해 공통의 원인[通因]이 되기 때문에 동류인(同類因) 밖에 별도로 건립한 것이다. 또한 역시 다른 부[他部]의 염오법에도 [두루 작용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이러한 세력으로 말미암아 다른 부의 염오법과 그 권속도 생장하게 되는 것이다.75)
  성자의 소의신 중의 온갖 염오법이 어찌 역시 이러한 [변행의 염오]법(즉 변행혹)으로써 변행인을 삼을 것인가?76)
  
  
74) 변행인(sarvatraga-hetu)이란 동류인의 협의로서, 선행된 변행의 수면[遍惑]과 이와 상응·구유하는 법[隨行法]은 그 후에 생겨나는 자지(自地)의 자부(自部)·타부(他部)의 온갖 염오법에 대해 원인이 되는 것 을 말한다. 즉 견고소단의 5견(見) 즉 유신견(有身見)·변집견(邊執見)·사견(邪見)·견취(見取)·계금취(戒 禁取)와 의(疑)와 아울러 이와 상응하는 무명과 불공(不共)무명, 그리고 견집소단의 사견·견취와 의(疑)와 아울러 상응하는 무명과 불공무명 등 열한 가지 수면(보통 7見·2疑·2無明으로 일컬어짐)과 이와 상응 구기 하는 법은 일체의 번뇌에 대해 원인이 되는데, 동류인이 오로지 자부에 대해서만 원인이 되는 데 반해 변행인 은 5부의 모든 염오법에 대한 원인이 되기 때문에 동류인과는 별도로 변행이라는 명칭의 인을 설정하게 된 것 이다.
75) 즉 변행인은 동류인처럼 결과와 서로 유사한 법이지만 오로지 염오법에 대한 원인으로, 동류인이 오로 지 자지(自地) 자부(自部)에 국한되는 원인이라면 변행인은 5부에 통하기 때문에(그래서 '통인'이라 하였다) 별도로 건립하게 되었다.
76) 앞서 변행인을 별립(別立)한 이유 가운데 '이러한 변행혹의 세력에 의해 일체의 염오법(성자의 그것도 포함하여)을 생장하게 된다'고 한 데 대해 이같이 물은 것이다. 여기서 성자는 유학의 성자로, 그는 견소단의 혹[見惑]을 이미 끊고 수소단의 혹[修惑]을 남기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온갖 염오법이란 수혹으로, 난문자의 뜻은 유학의 성자에게는 이미 견혹의 변행혹은 없기 때문에 그 나머지 수혹은 변행인의 등류과가 아니어야 한 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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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 비바사사(毘婆沙師)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체의 염오법은 견소단[의 변행의 혹]을 원인으로 삼는다. 그렇기 때문에 『품류족론』에서 "무엇이 견소단을 원인으로 삼는 법인가? 이를테면 온갖 염오법과 견소단법에 의해 초감(招感)된 이숙이 바로 그것이다.77) 무엇이 무기를 원인으로 삼는 법인가? 이를테면 온갖 무기의 유위법과 아울러 불선법이 바로 그것이다.78) 혹은 고제로서 유신견을 원인으로 삼으면서 유신견에 대해 원인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미래의 유신견과 아울러 그것의 상응법인 생(生)·노(老)·주(住)·무상(無常)을 제외한 그 밖의 온갖 염오의 고제이다"79)라고 논설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성자의 번뇌도 변행혹을 인으로 삼아 일으킨다고 한다면 어떻게 『시설족론』의 논설을 통석할 수 있을 것인가? 즉 그 논에서 말하기를, "불선의 법으로서 오로지 불선만을 원인으로 삼는 경우가 있는가? 있다. 이를테면 성자가 이욕(離欲)에서 물러날 때 최초에 현기하는 염오의 사(思)가 바로 그것이다"고 하였다.80)
  
  
77) 『품류족론』 권제6(대정장26, p. 716하). 즉 '온갖 염오법'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성자가 일으킨 염 오법도 견소단의 변행혹을 원인으로 한다는 뜻.
78) 같은 논 권제7(대정장26, p.719중). 무기의 유위란 유부·무부무기를 말하는데, 유부무기는 욕계의 유 신·변집의 2견과 그 상응법, 그리고 색계·무색계의 염오법이다. 즉 일체의 무기의 유위와 불선법은 무기를 원인으로 삼는다고 『품류족론』은 설하고 있지만, 성자의 소의신 중의 수소단의 염오법도 만약 상 2계의 것 이라면 상계의 무기법을 원인으로 삼으며, 만약 욕계의 그것이라면 불선에 포섭되어 견소단법 중의 유신견과 변집견의 두 가지 무기를 원인을 삼는다. 그렇기 때문에 견소단의 법이 일체의 염오법의 원인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욕계 탐욕 등의 '불선법'은 변행인의 성질이기 때문에 유신견 등을 원인으로 한다. 그래서 견 ·수소단에 통하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특히 성자의 소의신 중의 불선법은 유신견 등을 원인(즉 변행인)으로 한다는 사실에 주의하고 있다.
79) 같은 논 권제13(대정장26, p. 745상중) 본권 주18)에서도 인용됨.
80) 이욕에서 물러나는 것[離欲退]이란 욕계9품의 수혹을 단진하여 이미 욕계의 번뇌를 떠나 불환과를 증 득한 성자가 다시 욕계의 번뇌를 일으켜 불환과에서 물러나는 것을 말한다. 이 논문이 성자의 수소단의 염법 은 견소단의 변행에 의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되는 까닭은 본문 중에서 오로지 불선만을 원인으로 삼는다고 설 하여 무기을 원인으로 삼는다는 의미를 부정하였기 때문이다. 즉 변행 중 유신·변집의 2견은 무기를 변행인 을 삼는다고 한다면 '오로지 불선만'이라고 말하지 않았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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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끊어지지 않은 원인에 의거하여 은밀하게 이와 같이 설한 것으로, 견소단의 법도 비록 이 같은 원인이라 할 수 있지만 이미 끊어졌기 때문에 [이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폐(廢)하여 설하지 않은 것이다.81)
  이와 같이 변행인의 상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여섯 번째 이숙인(異熟因)의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숙인은 불선과
  아울러 선법으로, 오로지 유루이다.82)
  異熟因不善 及善唯有漏
  
  논하여 말하겠다. 오로지 불선과 아울러 선한 온갖 유루의 법만이 바로 이숙인으로, 다르게 익는 법[異熟法]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연유에서 무기는 이숙과를 초래하지 않는 것인가?
  그 힘이 열등하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부패한 종자와 같다.
  어떠한 연유에서 무루는 이숙과를 초래하지 않는 것인가?
  애(愛)의 윤택함이 없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견실한 종자[貞實種]에 물의 윤택함이 없는 것과 같다.83) 또한 무루법은 이미 지(地)에 계속(繫屬)되지
  
  
81) 이욕에서 물러날 때 염오의 사(思)를 일으키는 원인에는 미단(未斷)과 이단(已斷)이 있는데, 전자는 바로 염오한 '사'와 상응하는 수소단의 번뇌를 말하고, 후자는 바로 견소단의 변행혹으로 이미 끊어졌기 때문 에 '이단'이라고 하였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대비바사론』 권제19(한글대장경118, p. 426)에서 논의되고 있다.
82) 이숙인(vipaka-hetu)이란 온갖 불선과 선의 유루로서 고·락 등의 이숙의 과보를 초래하는 원인을 말 한다. 즉 무기는 그 힘이 열등하기 때문에, 또한 무루는 애(愛)에 의해 윤택되지 않고 지(地)에 계속(繫屬)되 지 않기 때문에 이숙인이 아니지만, 불선이나 선의 유루는 애를 윤택하게 하고 지에 계속되기 때문에 이숙인 이 되며, 따라서 이숙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83) 이를테면 견실한 종자(因)일지라도 이를 적셔 윤택하게 하는 물(助緣)이 없으면 싹(果)을 낳지 못하는 것처럼, 무루업은 무기와는 달리 과보를 낳을 힘이 있어도 자타 번뇌의 애수(愛水)에 윤택되지 않기 때문에 과보를 낳지 않는다. 이에 반해 무기는 부패한 종자처럼 그 힘이 열등하기 때문에 과보를 낳지 않지만, 그 밖 의 유루업은 종자가 견실하고 애수의 윤택함을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이숙의 과보를 초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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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않는 것이니, 어찌 능히 지에 계속되는 이숙과를 초래할 것인가?
  그러나 그 밖의 [선이나 불선의] 법은 이러한 두 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다.84) 그렇기 때문에 견실한 종자가 물에 윤택되어 질 때처럼 능히 이숙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이숙인의 뜻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이숙의 원인을 이숙인이라고 일컬은 것인가, 이숙이 바로 원인인 것을 이숙인이라고 일컬은 것인가?85)
  이숙인의 뜻에는 두 해석이 모두 갖추어져 있으니, 그럴 경우 무슨 허물이 있을 것인가?
  만약 이숙의 원인을 이숙인이라고 이름한다면 성교(聖敎)에서 응당 마땅히 '이숙에 의해 생겨난 눈[眼]'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을 것이며, 만약 이숙이 바로 원인인 것을 이숙인이라고 이름한다면 성교에서 응당 마땅히 '업의 이숙'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두 해석은 다 같이 통하는 것이니, 이미 앞에서 분별한 바와 같다.86)
  그렇다면 지금 말하고 있는 '이숙' 즉 다르게 성숙한다는 뜻은 무엇인가?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이와 같이 해석하고 있다. "이류(異類)로서 성숙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숙의 뜻이다." 말하자면 이숙인이란 오로지 이류로서 성숙하는 것이고, 구유인 등은 오로지 동류(同類)로서 성숙하는 것이며, 능작인 한 가지는 동류와 이류 모두로서 성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로지 [이류로서 성숙하는] 이 한 가지만을 이숙인이라고 일컬은 것이다.87)
  
  
84) 여기서 두 가지란 이숙인이 될 수 있는 앞의 두 가지 조건, 즉 애(愛)의 윤택함과 지(地)에 계속(繫屬 )되는 것을 말한다.
85) 이를테면 전자는 '이숙'을 한정복합어[依主釋]로 규정하여 '다르게 성숙하는 것의 원인'(異熟之因, cause of vip ka)으로, 후자는 동격복합어[持業釋]으로 규정하여 '원인이란 바로 다르게 성숙하는 것'(異熟 卽因, cause which is vip ka)으로 해석한 것이다.
86) 본론 권제2, 18계의 제문분별 중 이숙생 등을 분별하면서 이에 대해 언급하였다. 즉 이숙인에 의해 생 겨난 것이기 때문에, 혹은 소조업이 결과를 획득할 때 다르게 성숙하기 때문이라는 등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 같은 해석에 성교에 어긋나는 허물은 없다는 뜻.
87) 즉 유부 비바사사는 이숙을 다만 '다르게 성숙하는 것[異類而熟]' 다시 말해 '이'와 '숙'을 별개의 것 으로 간주하여 원인과 결과의 '다름'을 해석의 본질로 삼았다. 따라서 그 같은 관점에서 오로지 동일하게 성 숙하는[同類而熟] 규유·상응인과 동류·변행인, 그리고 동일하거나 혹은 다르게 성숙하는 능작인과 구별하고 있다. 그러나 이하에서 논설하고 있듯이 경량부에서는 이숙을 '변이하면서 성숙하는 것[變異而熟]' 즉 '변이 즉 숙[變異卽熟]'으로 간주하여 '숙'을 상속과 변화라고 하는 두 가지 뜻으로 해석함으로써 여타의 인과유형 과 차별시키고 그것들의 난점을 비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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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숙과(異熟果)는 마땅히 다른 [다섯 가지] 원인에 의해 획득되는 결과와는 다르다. 즉 그것은 두 가지 뜻을 갖추었기에 비로소 '숙(熟)'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니, 첫 번째는 상속의 전변과 차별에 의해 그것 자체(즉 果體)가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며,88) 둘째는 원인의 세력이 뛰어나고 열등함에 따라 시간적인 지속의 차이[分限]가 있다는 것이다.89) 그러나 그 같은 구유와 상응의 두 원인에 의해 생겨난 결과(즉 士用果)는 요컨대 상속의 전변과 차별에 의해 비로소 생겨날 수 있는 결과가 아니니, 취과(取果)의 순간이 바로 여과(與果)이기 때문이다.90) 또한 능작인과 동류·변행인의 세 원인에 의해 낳아진 결과(즉 증상과와 등류과)는 역시 또한 원인의 세력이 뛰어나고 열등함에 따른 시간적인 지속의 차이를 갖지 않는다. 왜냐 하면 [이 때 원인과 결과는 동류상사하여] 선악 등의 원인은 생사를 되풀이하면서 끊임없이 결과를 산출하고 [그 결과는 다시 원인이 되어 또 다시 무수한 결과를 산출할 것이므로] 시간적 한정이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다만 '변이하면서 성숙하는 것[變異而熟], 이것이 바로 이숙의 뜻이다'라고 해석하여야 하지 단지 '다르다[異]'는 사실만으로써 이숙인을 그 밖의 다른 원인과 구별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91)
  
  
88) 이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4에서 논설되고 있는 유부 '득론(得論)'에 대한 경량부의 대안인 '종자상속의 전변과 차별설'을 참조하라.
89) 이를테면 강력한 업에 의해 인기된 결과가 백 년을 지속한다면 약한 업에 의해 인기된 결과는 일 년도 지속하지 못하듯이 원인의 승열(勝劣)에 따라 결과가 지속하는 시간에 분한(分限)이 있는 것으로, 이 같은 사 실에 따라 비로소 '이숙'이라고 이름할 수 있다는 것이다.
90) 즉 구유인과 상응인은 결과와 동시존재[俱有]하는 것이기 때문으로, 이는 이숙의 첫 번째 의미가 결여 된 것이다.
91) 이상의 논설에 대해 보광은 경부종의(經部宗義)로, 법보에 따르면 논주의 자석(自釋)으로 평석하고 있 지만 '상속의 전변과 차별'을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경량부설로 이해된다. 그런데 이 논설은 범본이나 진제(眞諦)의 『구사석론(俱舍釋論)』에는 전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 경량부 인과론에 대한 현장(玄?) 의 종합적 평석인지 아니면 번역에 사용된 텍스트의 논설인지 획인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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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계 중에 있어서 어떤 때에는 하나의 온(蘊 : 즉 행온)이 이숙인이 되어 함께 하나의 결과를 초래하니,92) 이를테면 유기(有記)의 득(得)과 아울러 그것의 '생(生)' 등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때에는 두 가지의 온(즉 표업의 색온과 행온)이 이숙인이 되어 함께 하나의 결과를 초래하니, 이를테면 선·불선의 신업·어업과 아울러 그것의 '생' 등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때에는 네 가지 온(즉 색온을 제외한 네 가지 온)이 이숙인이 되어 함께 하나의 결과를 초래하니, 이를테면 선과 불선의 심· 심소법과 아울러 그것의 '생' 등이 바로 그것이다.93)
  색계 중에 있어서 어떤 때에는 하나의 온(즉 행온)이 이숙인이 되어 함께 하나의 결과를 초래하니, 이를테면 유기의 득과 무상등지(無想等至) 및 그것의 '생' 등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때에는 두 가지의 온(즉 표업의 색과 행온)이 이숙인이 되어 함께 하나의 결과를 초래하니, 이를테면 초정려의 선한 유표업(有表業)과 아울러 그것의 '생' 등이 바로 그것이다.94) 어떤 때에는 네 가지 온(즉 색온을 제외한 네 가지 온)이 이숙인이 되어 함께 하나의 결과를 초래하니, 이를테면 비등인(非等引)의 선한 심·심소 법과 아울러 그것의 '생' 등이 바로 그것이다.95) 어떤 때에는 오온이 이숙인이 되어 함께 하나의 결과를 초래하니, 이를테면 바로 등인의 심·심소법과 아울러 그것의 '생' 등이 바로 그것이다.
  무색계 중에 있어서 어떤 때에는 하나의 온(즉 행온)이 이숙인이 되어 함
  
  
  
92) 이하 여러 종류의 이숙인이 그것과 동일한 이숙과를 낳는 것에 대해 삼계에 걸쳐 밝히고 있다. 즉 이 숙인에는 욕계에 세 가지, 색계에 네 가지, 무색계에 두 가지 등 아홉 가지 품류의 차별이 있다. 먼저 욕계의 가장 단순한 형태의 이숙인은 1온 중에 포섭되는 것으로, 선 또는 불선의 득(得)과 그것을 낳게 하는 생(生) 등의 4상이 공인(共因)이 되어 하나의 결과를 낳는 경우이다.
93) 그러나 욕계에는 수심전(隨心轉)의 색 즉 정려율의나 무루율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5온이 이숙인 이 되어 함께 하나의 동일한 결과를 초래하는 일은 없다.
94) 제2정려 이상에서는 심(尋) 사(伺)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표업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색계 중 에서 2온을 이숙인으로 삼는 경우는 다만 초정려에 국한되는 것이다.
95) 여기서 '비등인의 심·심소'란 등인(sam hit , 혹은 等至sam patti) 즉 정심(定心)이 아닌 산심(散 心)을 말한다. 즉 산심 중에는 수심전의 인(因)이 없기 때문에 색온을 제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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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께 하나의 결과를 초래하니, 이를테면 유기의 득과 멸진등지(滅盡等至) 및 그것의 '생' 등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때에는 네 가지의 온이 이숙인이 되어 함께 하나의 결과를 초래하니, 이를테면 일체의 선한 심·심소법과 아울러 그것의 '생' 등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어떤 업은 오로지 일처(一處)의 이숙만을 초래하는 경우가 있으니,96) 이를테면 법처 즉 명근 등을 초래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만약 의처(意處)를 초래하는 업이라면 결정적으로 두 가지의 처를 초래하게 되니, 의처와 법처가 바로 그것이다. 만약 촉처(觸處)를 초래하는 업의 경우에도 역시 그러함(촉·법 두 가지 처를 초래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 신처를 초래하는 업이라면 결정코 세 가지의 처를 초래하게 되니, 신처와 촉처와 법처가 바로 그것이다.97) 만약 색처(色處)·향처(香處)·미처(味處)를 초래하는 업의 경우에도 역시 그러함(각각의 처와 촉처·법처를 초래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 안처(眼處)를 초래하는 업이라면 결정코 네 가지의 처를 초래하게 되니, 이를테면 안처와 아울러 신처·촉처·법처가 바로 그것이다. 이처(耳處)·비처(鼻處)·설처(舌處)를 초래하는 업의 경우에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98)
  어떤 업은 혹 어떤 경우 다섯 가지의 처를, 혹은 어떤 경우 여섯 가지의 처를, 혹은 어떤 경우 일곱 가지의 처를, 혹은 어떤 경우 여덟 가지의 처를, 혹은 어떤 경우 아홉 가지의 처를, 혹은 어떤 경우 열 가지의 처를, 혹은 어떤 경우 열한 가지의 처를 능히 초래하기도 한다.99) 즉 업에는 그 결과가 적은 경우도 있으며, 혹은 많은 경우도 있기 때문이니, 마치 밖에 뿌린 씨앗의 결
  
  
96) 이하 이숙인이 초감(招感)하는 처(處)의 다소에 대해 밝힌다. 참고로 1처 내지 4처를 초감할 때는 원 인이 되는 업이 동성(同性)이고 또한 초감되는 결과가 구유(俱有)하기 때문에 결정감(決定感)이라고 하며, 5 처부터 11처까지를 초감할 때는 반드시 자성의 업이 초감하는 것도, 구유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부정감(不 定感)이라고 한다.
97) 어떤 이숙업이 신처를 초래하는 경우, 신처 이외 능조(能造)의 4대를 포섭하는 촉처와 생(生) 등의 상 을 포섭하는 법처를 반드시 초래한다.
98) 이러한 해석은 중현의 그것과 조금 다르다. 즉 중현은 안(眼)·이(耳)·비(鼻)·설(處) 처(處)를 초래 하는 업은 반드시 그것 이외 신(身)·색(色)·촉(觸)·법(法) 처(處)를 초래하게 된다고 설하고 있다.(『현종 론』 권제9, 대정장29, p.818중; 한글대장경200, p. 239)
99) 어떠한 업도 12처를 초래하는 일은 없으니, 성(聲)은 이숙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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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가 혹은 적기도 하고, 혹은 많기도 한 것과 같다. 여기서 씨앗의 결과가 적다고 하는 것은 곡식이나 보리 따위와 같은 것이며, 씨앗의 결과가 많다고 하는 것은 연(蓮)이나 석류, 약구타(若瞿陀) 등과 같은 것이다.100)
  또한 일세(一世)의 업이 삼세에 이숙되는 일은 있어도 삼세의 업이 일세에 이숙되는 일은 없으니,101) 힘들여 수고하였으므로 결과가 원인보다 감소하는 일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한찰나[一念]의 업이 다찰나[多念]에 걸쳐 이숙되는 일은 있어도 다찰나의 업이 한찰나에 이숙되는 일도 없으니, 그 이유는 앞에서와 같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숙과는 업과 함께하는 일이 없으니,102) 업을 지을 때 바로 과보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역시 무간(無間)에도 [함께하는 일이] 없으니, 다음 찰나는 등무간연(等無間緣)의 힘에 의해 인기(引起)되기 때문이며, 또한 이숙인이 다른 종류[異類]의 결과를 초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속에 근거해야만 비로소 능히 그것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103)
  이와 같이 6인은 결정코 어떠한 세(世)에 존재하는 것인가?
  6인이 어떠한 세에 존재하는지 결정적인 뜻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논설하였지만, 아직 송문(頌文)에 포섭하여 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땅히 거듭하여 분별하리라.
  게송으로 말하겠다.
  
  
  
100) 보광에 따르면 곡식이나 보리 따위는 한 번 뿌리면 한 번만 수확하고 또한 그 뿌리나 줄기가 적지만, 연이나 석류 등은 다년에 걸쳐 계속 수확하며 그 뿌리와 줄기도 크기 때문에 이같이 설하였다. 약구타(nyagrodha)는 용수(榕樹) 즉 뿌리를 마구 내리는 나무의 일종이다.
101) 일세에 지어진 업이 과거·현재·미래 삼세에 걸쳐 이숙과를 초래하는 일은 있어도 삼세에 걸쳐 지어 진 업이 일세에 이숙과를 초래하는 일은 없다는 뜻.
102) 원인과 결과가 동시인 것은 구유인과 상응인이다.
103) 원인과 무간에 결과가 있는 것은 동류인과 변행인이다. 즉 무간에 생겨나는 것은 등무간연(본론 권제 7에서 논의함)에 의한 것으로, 이숙인이 등무간연이라면 그것이 무간에 인기한 법은 선·불선 혹은 무기와 통 하기 때문이다.(그러나 이숙과는 무기이다) 곧 이숙과는 적어도 업으로부터 일찰나를 지나, 다시 말해 상속하 여 초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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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행과 동류는 2세(世)에 존재하며
  삼세에 존재하는 것은 세 가지이다.
  遍行與同類 二世三世三
  
  논하여 말하겠다. 변행인과 동류인은 오로지 과거와 현재에만 존재하며 미래세에는 존재하지 않으니, 그 이유는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그리고 상응·구유·이숙의 세 가지 원인은 삼세 중에 모두 두루 존재한다.
  그런데 게송에서는 능작인이 존재하는 세에 대해 설하지 않고 있지만 뜻에 준하여 그것은 삼세와 비세(非世 : 즉 삼세와는 무관한 무위법을 말함)에 통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이상에서 6인의 차별과 그것의 삼세 규정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러한 6인은 무엇을 결과로 삼아 그것들에 대해 원인을 성취하게 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결과에는 유위와 이계가 있으며
  무위법은 인과를 갖지 않는다.
  果有爲離繫 無爲無因果
  
  논하여 말하겠다. 이를테면 본론(本論)에서 설하기를, "과법(果法)이란 무엇인가? 말하자면 온갖 유위와 아울러 택멸이다"고 하였다.104)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무위가 바로 결과임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마땅히 원인을 가져야 할 것이니, 요컨대 그 같은 원인에 대해 비로소 이것은 결과가 된다고 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105) 또한 이러한 무위는 바로 원
  
  
104) 여기서 본론은 『품류족론』 권제6(대정장26, p. 715상).
105) 여기서 무위는 택멸무위 즉 이계(離繫)의 열반으로, 이계가 결과라면 거기에는 마땅히 원인이 있어야 할 것이며, 이는 무위가 인과를 벗어난 것이라고 하는 유부 정의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계를 결과라고 해 서는 안 된다는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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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이라고 인정하였기 때문에 응당 마땅히 결과를 가져야 할 것이니, 요컨대 그 같은 결과에 대해 비로소 이것은 원인이 된다고 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106)
  오로지 유위법만이 원인을 갖고 결과를 갖는 것으로, 온갖 무위는 그렇지가 않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6인(因)을 갖지 않기 때문이며, 5과(果)도 없기 때문이다.107)
  어찌 제 무간도(無間道)는 이계과에 대해 능작인이 된다고 인정하지 않았든가?
  생겨나는 것에 대해 장애하지 않는 것을 능작인이라 설정한 것으로, 무위는 생겨나는 일이 없으니 그 같은 도에 무슨 [능작인으로서] 작용이 있을 것인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택멸의 이계과가 능작인의 결과가 아니다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의 결과이며, 이 때 결과란 무슨 뜻인가?
  이를테면 이것은 바로 무간도의 결과이며, 도의 힘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다.108)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무간도의 결과는 응당 마땅히 오로지 득(得)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도는 득에 대해서는 공능(功能)이 있어도 택멸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109)
  
  
106) 여기서 무위는 허공·택멸·비택멸의 3무위. 즉 앞에서 무위는 유위의 생기를 장애하지 않기 때문에 능작인이 된다고 인정하였으므로 마땅히 그에 상응하는 결과(증상과)를 가져야 한다는 난.
107) 무위법은 상주 불생법으로 인과적 제약으로부터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6인에 의해 생겨나는 것도 아 니며, 5과를 낳는 것도 아니다. 즉 무위법은 무루도와 같은 능증(能證)의 도가 아니기 때문에 이계과도 갖지 않는다.
108) 즉 택멸은 무간도의 힘에 의해 번뇌를 끊고 증득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도의 결과이다. 그러나 이때 결과는 생겨난 결과가 아니라 증득된 결과이다. 즉 택멸무위는 생성 소멸하지 않으며 인과적 제약을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택멸의 이계과는 원인을 갖지 않는 결과로서, 6인 4연에 의해 생겨난 결과가 아니다. 말하자면 무간도를 택멸무위의 생인(生因)이라고 할 수 없지만, 어쨌든 택멸의 이계과는 도의 힘에 의해 획득되었다는 점에서 도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09) 앞서 택멸은 무간도의 결과라고 하였지만 사실 엄격히 말하자면 이 때 무간도는 택멸을 획득하게 하 는 힘 즉 득(得, pr pti)을 인기하는 공능만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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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지가 않으니, 득에 대한 도의 공능과 택멸에 대한 도의 공능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110)
  그렇다면 득에 대해 무간도가 갖는 공능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능히 낳는[能生] 공능이다.
  택멸에 대해 무간도가 갖는 공능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능히 증득[能證]하는 공능이다. 이러한 이치로 말미암아 무간도가 비록 택멸의 원인은 아니라 할지라도 택멸은 무간도의 결과가 된다고 설할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온갖 무위는 증상과를 갖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능작인이 된다고 설할 수 있는 것인가?
  온갖 무위법은 그 밖의 다른 법(즉 유위법)이 생겨나는 것에 대해 장애하지 않기 때문에 능작인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무위법은 삼세의 시간적 제약을 떠난 법[離世法]으로서 능히 취과(取果)와 여과(與果)의 작용이 없기 때문에 [증상]과를 갖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경부사(經部師)는 설하기를, "무위는 [능작]인이 되지 않으니, 경(經)에서 '[능작]인은 바로 무위이다'고 설한 일이 없기 때문이며, 경에서 '[능작]인은 오로지 유위이다'고 설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어떤 경에서 설하고 있는 것인가?
  이를테면 어떤 경에서 설하기를, "온갖 인(因)과 온갖 연(緣)으로서 능히 색을 낳는 것은 모두 다 무상하다. 무상한 인연에 의해 낳아진 온갖 색이 어떻게 항상하다고 하겠는가?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식(識)도
  
  
  
110) 무간도는 득에 대해서도 공능이 있지만 택멸에 대해서도 공능이 있는 것으로, 다만 양자는 작용방식 상에 차별이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무간도가 인기한 득에 의해 택멸이 증득(證得)되기 때문에 무간도는 '득' 에 대해서만 능생(能生)의 공능이 있고 택멸에 대해서는 능증(能證)의 공능이 있다. 따라서 무간도는 택멸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닐지라도 택멸은 도의 결과라고 설할 수 있다는 것이다(후술). 참고로 택멸에 대해 『대비 바사론』 권제31(대정장27, p. 161상)에서는 "무엇을 택멸이라고 하는가? 제 유루법의 멸이 바로 이계이다. 즉 유루제법이 멸하고 역시 또한 이계의 득을 획득하는 것을 말하니, 이계의 득 이것을 택멸이라고 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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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이와 같다"고 하였다.111)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무위 역시 마땅히 능연(能緣)인 식(識) 등에 대해 소연연(所緣緣)이 된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112)
  [경에서는] 오로지 '능히 낳는 것'만을 설하였기 때문에 [무위가] 소연연이 될 수 있는 것이다.113) 즉 경에서는 오로지 '온갖 인과 온갖 연으로서 능히 식(識)을 낳는 것은 모두 다 무상하다'고만 설하였지 식의 연이 되는 일체 모든 것이 모두 다 무상하다고는 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힐난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경에서는] 오로지 능생(能生)의 원인만이 무상하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무위는 오로지 [다른 것의 생기를] 장애하지 않으므로 능작인이 된다'는 사실을 어찌 부정하였다고 하겠는가?114)
  계경 중에서 무위법은 소연연이 된다고 설한 일은 있어도 어떠한 계경 중에서도 무위법이 능작인이 된다고는 설한 일이 없기 때문에, 마땅히 오로지 장애하지 않는 원인의 존재[不障因性, 즉 능작인]로 설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비록 경에서 설한 일이 없을지라도 또한 역시 부정한 곳도 없다. 그리고
  
  
  
111) 『잡아함경』 권제1 제12경(대정장2, p. 2중).
112) 소연연이란 인식을 낳게 하는 조건으로 인식의 대상을 말한다. 즉 무위가 인식되었다고 할 때 그것은 이미 소연연으로서 작용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무상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유부의 난(難).
113) 즉 경에서는 인식을 낳게 하는 인과 연이 무상하다고 하였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인식의 대상이 되는 것이 모두 무상하다고는 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주법인 무위도 소연연이 될 수 있다는 경부의 답. 그러나 유 부에 의하면 택멸무위는 소연연이 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사실상 그것은 개념지을 수 없는 것이며, 우리에게 알려진 그것은 다만 세속명언(世俗名言)을 통해 알려진 앎일 뿐이기 때문이다. 즉 의(意)와 법(法)이 연이 되 어 의식을 낳는다고 할 때 '능히 낳는다'고 함은 일반적인 경우에 의거하여 설한 것일 뿐으로, 혹 택멸무위가 소연연이 되어 능히 식을 낳는다고 할지라도 택멸은 낳아지는 것이 아닐뿐더러 능생(能生)의 인(因)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 때 식은 이계가 아니다는 것이 중현(衆賢)의 생각이었다.(『순정리론』 권제17, 대정장29, p. 429상)
114) 즉 경에서 '능생의 인은 바로 무상하다'고 하였지만 능작인은 적극적인 능생의 인이 아니라 다만 다 른 것의 생기를 장애하지 않는 것이므로 무위법을 능작인이라고 하더라도 경부가 인용한 경문에 저촉되지 않 는다는 유부의 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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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경들이 이미 은몰(隱沒)하여 버렸는데, 어떻게 결정적으로 경에서 설한 일이 없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법을 일컬어 택멸(擇滅)이라고 하는 것인가?115)
  즉 본론(本論) 중에서 설한 바의 택멸이 바로 그것이다.116)
  앞에서 '무엇이 택멸인가?'라고 물었을 때는 '바로 이계(離繫)이다'라고 답하지 않았던가?117) 그런데 지금 '어떠한 법을 일컬어 택멸이라고 하는 것인가?'하고 물으니 '바로 택멸이다'고 답하고 있으니, 이와 같은 두 가지 답은 상호간에 의존하는 설명으로 그 자성에 대해서는 끝내 능히 드러내지 못하였다. 따라서 마땅히 그 자성을 별도의 갈래[別門]로서 나타내 보여야 할 것이다.
  이 법(택멸)의 자성은 실유(實有)로서 언어를 초월해 있어 오로지 제 성자들만이 각기 개별적으로 내증(內證)하는 것이다.118) 다만 방편으로 그 전체적인 상[總相]에 대해 설하여 보면 선하고 항상하는 실체[實物]가 별도로 존재하니, 이것을 일컬어 '택멸'이라고 하고, 또한 역시 '이계'라고도 이름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부사(經部師)는 설하기를, "일체의 무위는 모두 [각기 자상과 자성을 갖는] 색(色)이나 수(受) 따위처럼 개별적인 실체로서 존재하는 실유의 법이 아니니, 이것들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고 하였다.119)
  
  
115) 일단 유부의 주장대로 무위가 능작인이 된다는 사실을 일단 수용하고서 이하 택멸을 비롯한 무위법의 가실(假實)문제에 대해 논쟁한다.
116) 여기서 본론이란 본 항 첫머리(주104)에서 언급된 『품류족론』. 즉 거기서는 본송에서의 '이계'를 택멸이라 규정하였다.
117) 본론 권제1, p.8(「계품」 첫머리에서 '택멸은 이계를 본질로 한다'고 논설하였다.
118) 이 때 제 성자는 견도위(見道位) 이상의 무루지를 일으킨 성자, 즉 예류향 이상의 성자를 말한다.
119) 무위(asa sk ta)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인과상속의 삼세 시간적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생·주·이· 멸의 유위상을 갖지 않는 초월적 존재로서, 유부에 의하는 한 여기에는 공간적 점유성과 시간적 변이성[變?] 을 자성으로 하는 색법의 기체(基體)가 되는 허공무위( k a-asa sk ta), 4제의 간택력인 무루혜에 의해 증득되는 번뇌소멸(이계)의 택멸무위(pratisa khy nirodha-asa sk ta), 연이 결여되어 생겨나지 않았으므 로 소멸하지도 않는, 다시 말해 간택력에 의하지 않고서 자연적으로 획득되는 불생불멸인 존재인 비택멸무위(apratisa khy nirodha-asa sk ta)가 있다.(본론 권제1, p.8 참조) 즉 유부에서는 그 철학적 전제인 식유필경(識有必境)의 논리적 귀결로서 이 세 존재의 실재성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지만 경량부에서는 대단히 소극적으로 해석하여 다만 유위의 제 조건, 이를테면 점유성의 물질, 고(苦)나 후유(後有), 생기 등이 결여된 상태를 가설(假說)한 것일 뿐이며, 따라서 자성을 지닌 개별적인 실체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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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어째서 '허공' 등이라고 이름한 것인가?
  오로지 접촉되는 바가 없는 것을 설하여 '허공(虛空)'이라 일컬은 것이니, 이를테면 어둠 속에서 촉대(觸對)되는 바가 없으면, 다시 말해 아무것도 잡히는 것이 없으면, '이것은 허공이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이미 일어난 수면(隨眠)과 그것에서 생겨난 종자[生種]가 소멸한 상태에서 간택력(簡擇力)에 의해 그 밖의 다른 번뇌가 더 이상 생겨나지 않는 것을 설하여 '택멸'이라 이름한다. 그리고 간택력과는 관계없이 인연이 결여됨으로써 더 이상 달리 생겨나지 않는 것을 '비택멸(非擇滅)'이라 이름하니, 마치 중동분(衆同分)을 남기고서 중간에 요절한 자의 나머지 온(蘊)과 같은 것이다.120)
  그런데 다른 부파의 논사는 설하기를, "무루혜의 공능에 의해 수면이 생겨나지 않는 것을 일컬어 택멸이라 하고, 수면의 연이 결여되어 이후 괴로움의 과보가 생겨나지 않는 것은 무루혜의 공능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택멸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121)
  간택력을 떠나서 이러한 멸은 성취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같은 괴로움의 과보가 생겨나지 않는 것은 바로 택멸에 포섭된다.122)
  
  
120) 이를테면 100년을 살 사람이 중간에 요절하여 50살에 죽었을 때, 나머지 50년의 오온은 연을 결여하 여 더 이상 생기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은 간택력에 의하지 않고도 자연적으로 획득되는 소멸[비택멸]이라 는 뜻.
121) 보광에 의하면 이는 상좌부의 주장이다.
122) 이는 앞의 상좌부의 주장에 대한 경량부의 논파이다. 즉 상좌부에서는 수면이 생겨나지 않는 것을 택 멸이라 하고, 연이 결여되어 고과(苦果)가 생겨나지 않는 것을 비택멸이라고 하였는데, 경량부에 의하는 한 중고(衆苦)불생은 바로 택멸의 열반이다. 곧 이후 전개되는 유부와 경량부 사이의 택멸의 가실(假實)문제는 바로 중고단(斷)의 '단'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식유필경가 그에 따른 제법분 별, 그리고 그것의 삼세실유를 주장하는 유부의 경우 무루 간택력에 의해 삼세 중고의 득(得)이 끊어질 때 그 자체로서 실재하는 멸(滅)이 증득된다. 그러나 과미무체(過未無體)·현재실유를 주장하는 경량부의 경우 과거 ·현재를 연으로 하여 일어난 번뇌, 즉 미래 중고를 낳는 공능인 현행종자가 끊어지는 것을 '단'으로 이해하 였다. 그럴 때 택멸의 열반은 사실상 중고단이 아니라 중고불생(衆苦不生)으로 규정된다. 따라서 번뇌의 멸( 불생 혹은 비존재)는 번뇌와는 독립된 개별적 실체가 아니라 다만 번뇌에 근거한 개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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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이는 설하기를, "제법은 생겨났다가 그 후 존재하지 않으니, 자연적으로 소멸하기 때문에 비택멸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123)
  이와 같이 주장된 비택멸은 마땅히 무상멸(無常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법이 아직 멸하지 않은 때에는 그것(대중부가 주장하는 비택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124)
  택멸도 간택력이 선행하여 [뒤에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일찍이 존재하지 않다가 비로소 존재하는 것[先無後有]'이어야 하므로 역시 또한 어찌 무상하다고 하지 않겠는가?
  간택력이 선행하고 나서 비로소 택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택멸을 역시 또한 무상멸이라고 하겠는가.125)
  그 까닭이 무엇인가?
  먼저 간택력이 있고, [그것에 의해] 그 후 아직 생겨나지 않은 법[未生法]이 비로소 생겨나지 않게 되는 것[不生]은 아니다.
  왜 그러한가?
  [제법의] 불생은 본래 스스로 존재하는 것[自有]으로, 만약 간택력이 없다면 제법은 마땅히 생겨나겠지만, 간택력이 생겨날 때 법은 영원히 생기하지 않는다. 이같이 [제법이] 생기하지 않는 것에 간택력의 공능이 있으니, 이를테면 그 이전에는 [제법의] 생기가 장애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생기가 장애
  
  
  
123) 보광에 의하는 한 이는 대중부의 해석이다. 즉 대중부에서는 과미무체를 주장하여 법이 과거로 낙사 하면 그것은 더 이상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를 비택멸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124) 경부의 평파. 즉 무상을 비택멸이라고 한다면, 유위법이 아직 멸하지 않았을 때에는 그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소멸할 때 비로소 존재하기 때문에 대중부가 주장하는 바의 비택멸은 '일찍이 존재하지 않다가 비로 소 존재하는 것[先無後有]'이 되어야 하고, 그럴 경우 그것을 무위라고 할 수 없다는 뜻.
125) 경부의 답. 중고 '불생'의 택멸은 어쨌든 간택력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지만, 그 당체는 미래 존재하 는 것으로 간택력에 의해 비로소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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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되는 것으로, [간택력이 제법의] 불생(不生)을 조작하는 것은 아니다.126)
  만약 오로지 [제법의] 불생만이 열반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경의 문구는 응당 어떻게 회통될 수 있는 것인가? 즉 경에서 말하기를, "[신(信) 등의] 5근(根)을 혹은 닦고, 혹은 익히고, 혹은 많이 닦고 익히면 능히 과거·미래·현재의 중고(衆苦)를 영원히 끊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127) 말하자면 이같이 '영원히 끊는 것[永斷]' 자체가 바로 열반임에도, [그대들은 열반을 중고 불생이라고 하고] 불생의 뜻은 오로지 미래에만 존재하며 과거·현재에는 존재하지 않다고 하니 어찌 [앞의 경설과] 서로 모순된다고 하지 않겠는가?(유부의 난문)
  비록 그러한 경의 문구가 있을지라도 의미상으로는 모순되지 않는다. 즉 그러한 경문의 뜻은 '과거·현재의 고과(苦果)를 연(緣)으로 하는 번뇌를 끊었기 때문에 중고단(衆苦斷)이라 이름하였다'는 사실을 설한 것으로, 이는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그대들은 색(色)에 대해 마땅히 탐욕을 끊어야 할 것이니, 탐욕이 끊어질 때를 일컬어 '색이 끊어졌다[色斷]'고 하고 '색이 변지되었다[色遍知]'고 한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식(識)에 대한 것도 역시 이와 같다." 즉 과거·현재의 고과가 끊어지는 경우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128) 설사 다른 경에서 '과거·현재·미래
  
  
126) 택멸에 대한 간택력의 공능을 간단하게 말하면, 끊임없이 인과상속하는 유위법은 간택력의 작용에 의 해 더 이상 속생(續生)하지 않고 영원히 불생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불생의 당체(當體)를 택멸이라 이름하기 때문에 간택력의 작용은 다만 유위법의 속생을 장애하는 것일 뿐, '불생'을 직접 조작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 서 경량부에서는 이러한 택멸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것이다.(후술)
127) 이상 경부와 대중부와의 문답을 마치고, 이하 택멸을 중고 불생(不生)의 가설(假說)로 규정하는 경량 부와 중고단(斷)의 실체로 해석하는 유부 사이의 대론이 전개된다. 여기서 경은 『잡아함경』 권제26 제660경 (대정장2, p. 184상)으로, 신(信)·근(勤)·념(念)·정(定)·혜(慧)의 무루5근을 닦는다[修]고 함은 견도위를 말하고, 익힌다[習]고 함은 수도위를, 많이 닦고 익힌다[多修習]고 함은 무학위를 말한다.
128) 『잡아함경』 권제3 제77경(대정장2, p. 19하) 참조. 여기서 '색단'은 무간도로써 탐욕을 끊는 것이 고, '색변지'는 해탈도로써 탐욕의 계박을 떠나는 것 즉 택멸을 증득하는 것을 말한다. 즉 이 경에서는 능연( 能緣)인 탐욕을 끊는 것을 소연(所緣)에 근거하여 '색이 끊어졌다'고 일컫듯이, 앞서 유부에서 인용한 경문의 의미도 능연인 종자를 끊는 것을 소연에 근거하여 과거·현재의 고과(苦果)를 끊게 된다고 말한 것일 뿐이므 로 그것이 과거·현재에 중고영단(永斷)의 택멸이 존재한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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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제 번뇌를 끊는다'고 말한 경우가 있을지라도 앞의 이치에 준하여 해석하게 되면 의미상으로 어떠한 모순도 없는 것이다.(경부의 회통)
  혹은 이러한 경설 중에는 별도의 다른 뜻이 있으니, 과거의 번뇌란 과거의 생에 의해 일어난 번뇌를 말하고, 현재의 번뇌란 현재의 생에 의해 일어난 번뇌를 말하니, 마치 애행(愛行) 중에 열여덟 가지 애행이 설해지고 있는 것과 같다.129) 즉 과거세에 일어난 것은 과거생에 의거하였다고 설하고 내지는 미래·현재의 경우도 역시 마땅히 그러함을 알아야 한다. [지금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로 과거·현재의 2세에 의해 일어난 번뇌는 미래의 제 번뇌를 낳기 때문에 현재의 상속신 중에 종자(種子)를 인기한다. 그리고 [간택력에 의해] 이러한 종자가 끊어지기 때문에 그것(종자의 원인이 되는 과거와 현재의 번뇌)도 역시 끊어졌다고 일컬은 것으로, 이는 마치 이숙과가 다하였을 때를 설하여 역시 또한 업이 다하였다고 일컫는 것과 같다. 나아가 미래의 중고(衆苦)와 제 번뇌는 바로 이러한 종자가 부재[無]하기 때문에 필경 생겨나지 않게 되니, 이를 설하여 '단(斷)'이라고 일컫게 된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과거·현재[의 중고]는 어떠한 이유에서 반드시 끊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이미 멸[已滅]하였거나 지금 멸[正滅]하고 있는데 힘들게 노력하여 그것을 소멸시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이상 경부의 별석)
  만약 무위법 그 자체가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 것[無]이라고 한다면 어째서 경에서 "유위든 혹은 무위든 존재하는 일체의 제법 중에서 이염(離染, viraga, 택멸열반을 말함)이 제일이다"고 설하였겠는가?130) 어떻게 존재하지 않는 법[無法]을 비존재[無] 가운데 제일이라고 설정할 수 있는 것인가?131)
  
  
129) 18애행이란 탐기의(貪嗜依)와 출리의(出離依) 각각의 18의근행(意近行) 중 탐기의의 18의근행을 말한 다. 여기서 열여덟 가지는 희(喜)·우(憂)·사(捨)의 3수가 각기 색 등의 6경을 소연으로 삼은 것으로, 이는 의식을 근연(近緣)으로 삼아 경계로 유행(遊行)하기 때문에 의근행이라고 하였다.(본론 권제10, p.474) 그런 데 『광기』에 의하면 여기서 18애행은 과거·현재·미래 각각의 6경을 소연으로 하여 애행이 일어나기 때문 에 열여덟 가지라고 하였다.
130) 『잡아함경』 권제31 제903경(대정장2, p. 225하).
131) 경량부가 3무위를 비존재라고 할 경우, 존재하지도 않는 택멸을 그러한 비존재 중에 제일이라고 한 것은 마치 비존재 중의 최고는 석녀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처럼 결국 의미없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 즉 비존재에는 우열 고하가 없어야 하는 것이다.(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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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부의 난문)
  우리도 역시 온갖 무위법 자체가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는 설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설하는 바대로 '있다[有]'고 할 뿐이니, 이를테면 '이러한 소리(즉 현재의 소리)는 [발성되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고 있으며[有先非有] [발성된] 이후에도 존재하지 않고 있다[有後非有]'고 설하는 것과 같다. 즉 비존재[非有]를 [그대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방식의] 존재[有]라고는 설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 경부에서 말하는] '있다'의 뜻은 이루어질 수 있으니, '무위가 있다'고 하는 것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132)
  즉 '있다'고 하는 것이 비록 비존재라 할지라도 칭탄할 수 있으니, 그래서 온갖 재앙과 횡액의 완전한 비존재를 일컬어 이염(離染)이라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일체의 존재와 비존재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으로, 교화될 중생으로 하여금 깊이 흔락(欣樂)을 낳게 하기 때문에 마땅히 이것을 [비존재 가운데] 제일이다고 칭탄해야 하는 것이다.(이상 경부 답)
  만약 무위법이 오로지 비유 즉 비존재라고 한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無]이기 때문에 마땅히 멸성제(滅聖諦)라고 일컬어서는 안 될 것이다.(유부 난문)133)
  대저 성제(聖諦)라고 하는 것, 그 뜻이 무엇인가? 이 말이 어찌 전도됨이 없다는 뜻이라 하지 않겠는가? '성'이라고 함은 있고 없음을 봄에 있어 모두 전도됨이 없이 보는 것이니, 이를테면 성자는 괴로움에 대해서는 오로지 괴로움이라고만 보며(제1성제 즉 고성제), 괴로움의 비존재에 대해서는 오로지 괴로움의 비존재라고만 보니(제3성제 즉 멸성제), 이것이 성제의 뜻과 어떠한 모순이 있는 것인가?(경부의 해석)
  어떻게 비존재를 설정하여 제3의 진리로 삼을 수 있는 것인가?(유부의 난
  
  
  
132) '비존재[非有]'에 대해서도 역시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 자기존재로서 실 재하는 것이 아니라(바이세시카 학파의 비존재abh va-pad rtha가 바로 그러하다) 다만 비존재의 상태를 드 러내는 가설적 개념으로서의 존재[假有]일 뿐이다.
133) 택멸무위가 비존재라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실재하지도 않는 법을 제3의 진리(satya)로 삼을 수 있 는가 하는 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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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
  성자께서 제2의 진리와 무간에 보았고, 그리고 설하셨기 때문에 제3의 진리가 된 것이다.134)(경부의 답)
  만약 무위법 자체가 오로지 비존재라고 한다면 허공과 열반에 대한 인식은 마땅히 존재하지 않는 대상[無境]을 소연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135)(유부의 힐난)
  이 같은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소연으로 삼더라도 역시 어떠한 과실도 없으니, 이에 대해서는 과거·미래에 대해 분별하면서 응당 마땅히 널리 사택(思擇)하게 될 것이다.136)(경부의 해명)
  만약 무위법이 개별적인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여기에는 어떤 과실이 있는 것인가?(유부의 문)
  또한 거기에 무슨 공덕이 있을 것인가?(경부의 반문)
  [무위법이 개별적인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바로 비바사사(毘婆沙師)의 종의를 옹호하는 것이니, 이것이 공덕이다.(유부의 답)
  만약 그것에 옹호할 만한 점이 있다면 결정코 천신(天神)이 알아 응당 스스로 옹호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무위를 실유로 인정하는 것은 허망한 관념[虛妄計]과 벗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과실이다.(경부의 조롱과 답)
  그 이유가 무엇인가?(유부의 문)
  이것은 색(色)이나 수(受) 따위처럼 [지각될 만한] 자성[體]이 있는 것도
  
  
  
134) 성자 즉 불타가 무루지를 일으켜 4제의 이치를 관찰할 때, 제2 집제 바로 다음으로 멸제를 관찰하였 고, 또한 4제의 법문을 설할 때에도 역시 제2 집제 바로 다음으로 멸제를 설하였기 때문에 제3의 진리라 일컫 게 된 것이지 제3의 실체가 있음으로 해서 제3이라 한 것은 아니라는 뜻.
135) 유부가 고(苦)의 비유(非有) 즉 멸(滅)을 하나의 실체로 간주하게 된 것은 '인식에는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 하며, 그것은 외계 실재한다'는 그들 철학의 선결조건[道理究竟, siddh nta prasiddham]에서 파생된 논리적 귀결이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여기서 택멸실재의 논거로서 무경식[無境識]의 불가능함을 들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경량부에서는 "인식은 존재하는 것이나 존재하지 않는 것 모두에 대해 일어날 수 있다[識 通緣有非有境]"(본론 권제20, p.921 참조)고 주장한다.
136) 본론 권제20에서 제법의 삼세실유의 문제를 논설하면서 이에 대해 다시 논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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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며, 또한 역시 안(眼)이나 이(耳) 등처럼 [추리될 만한] 작용[用]이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만약 이것이 개별적으로 실재한다면 어떻게 [성교에서] '그것(번뇌)의 소멸'이라고 하는 소유격[第六轉]의 용법을 설정하였을 것인가? '소멸'과 '그것'은 서로 소속되어 관계하는 것이 아니니, 이것과 저것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로지 '그것'이 부정될 때 소유격이 성립할 수 있으니, 그것의 비존재를 일컬어 택멸이라고 하기 때문이다.137)(경부의 답)
  멸이 비록 개별적으로 실재하는 것일지라도 '그것'인 혹(惑)의 득(得)이 끊어질 때 비로소 이러한 멸을 획득하므로 이러한 멸은 그것(혹)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138)(유부의 답)
  어떠한 이유에서 이것(번뇌)의 멸이 결정코 이러한 득(번뇌득)에 속한다고 한 것인가?(경부의 문)
  계경에서 말한 바와 같으니, "비구들이여, 현법열반(現法涅槃, 현신의 열반)을 획득하라"고 하였다.139) 나아가 열반이 만약 비존재라면 어떻게 획득하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유부의 답과 난)
  대치도(對治道)를 획득함에 따라 바로 번뇌와 후유(後有)에 영원히 모순되는 소의신을 획득하기 때문에 '열반을 획득하라'고 일컬은 것이다.140) 또한
  
  
137) 즉 만약 번뇌[苦]도, 그것의 소멸[滅]도 각기 개별적으로 실재하는 것이라면 계경에서 설해지고 있는 '번뇌의 소멸'이라는 소유격의 용법이 성립할 수 없다는 뜻. 즉 '번뇌의 소멸'이라는 말은 번뇌의 유(번뇌)와 번뇌의 무(소멸)를 의미하는 모순관계로서, 그 사이에는 어떠한 인과 포섭관계도 있을 수 없다. 그런데 만약 '번뇌'와 '소멸'이 각각 실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번뇌가 갖고 있는 소멸성을, 유(有)가 갖고 있는 무성( 無性)을 의미하게 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양자는 실체로서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언어적 관 계로서, 번뇌의 무를 소멸이라고 이름하는 것일 뿐 실체로서의 '소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38) 유부에서는 이를테면 '왕의 신하'라고 하는 것처럼 소유격의 '의'를 개별적인 실체의 관계로 해석하 기 때문에 당연히 '번뇌'와 '소멸'을 서로 다른 존재로 이해하면서 득(得, pr pti)이라는 또 다른 존재를 통 해 양자 사이의 관계를 성립시키고 있는 것이다.
139) 『잡아함경』 권제9 제237경(대정장2, p. 57하). 여기서 열반의 획득이 '득'에 의해 현신(現身)에 소 속되듯이 멸의 획득 또한 '번뇌득의 단(斷)'에 의해, 다시 말해 번뇌가 현신과 관계하게 되는 조건이 득이 끊 어질 때 이루어질 수 있으므로 개별적 실체로서의 번뇌의 소멸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140) 즉 자성을 지닌 열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치도(무간도)를 획득함으로써 더 이상 번뇌와 후유( 後有)에 상응하지 않는 소의신을 획득하게 되고, 그것을 다만 '열반을 획득하였다'고 할 뿐이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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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교(聖敎)에서 '열반은 오로지 비유(非有)를 그 자성으로 삼는다'는 사실을 나타낸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계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141) "존재하는 중고(衆苦)를 모두 남김없이 끊고[斷], [3계 9지에 따라] 각기 개별적으로 버리고[捨棄] 다하고[盡] 이염(離染)하고 멸(滅)하고 고요히 종식[息]하고 영원히 몰[歿]하며, 그 밖의 다른 고(苦)가 속생(續生)하지 않고 취(取)하지 않고 생겨나지 않으면 이것이 궁극의 적정(寂靜)이며 궁극의 미묘(美妙)이니, 말하자면 온갖 근거[諸依, 즉 유위제법을 말함]와 일체의 갈애를 버리고 다하고 이염하고 멸한 것을 열반이라 이름한다."(경부의 답)
  [여기서] '생겨나지 않는다[不生]'는 말은, 이것(즉 실유의 택멸)에 근거하여 [고과(苦果)가] 생겨나는 일이 없기[無生] 때문에 '생겨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는 사실을 어째서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유부의 난)142)
  우리가 이러한 처격(處格, 第七轉)의 용법을 관찰하건대, 택멸의 실재성을 논증하는데 아무런 공력(功力)도 없는데 어떠한 의도에서 '이것(택멸)에 근거한 무생'이라고 설하는 것인가? [이것(즉 택멸)에 근거한 괴로움의 불생이라고 할 때] 만약 '이것에 근거한'이라는 말을 '이미 이전부터 존재하는[已有] 택멸에 의해'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열반(즉 택멸)은 상주(常主)하기 때문에 [괴로움은] 응당 마땅히 본래부터 불생일 것이다. 또한 만약 '이것에 근거한'이라는 말을 '이미 택멸을 획득하게 한[已得] 힘에 의해'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이는 곧 대치도의 획득에 의한 것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오로지 대치도에 의해, 혹은 도의 획득에 의해 고(苦)가 생겨나지 않게 된다고 그대
  
  
  
141) 『잡아함경』 권제13 제306경(대정장2, p. 88상) 참조.
142) 앞에서 인용한 경문 끝 부분에서 열반을 설하여 불생(不生) 등이라 함은 단순히 소극적으로 생겨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택멸열반이라고 하는 실유의 체가 있어 번뇌를 낳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는 뜻. 이는 유 부가 제출하는 택멸실재론의 또 다른 논거로서, 위치 상태 등을 나타내는 처격(處格, 所依格 즉 제7轉聲)을 이용한 논증방법이다. 즉 '번뇌의 불생'이 택멸이라 할 때 그것은 막연한 불생이 아니라 '무언가'에 근거한 불생, 즉 택멸에 근거한 불생이며, 그럴 경우 택멸을 하나의 실체로서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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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마땅히 신수(信受)해야 하는 것이다.143)
  그리고 이 같은 사실에 의해 경(經)에서 설한 비유의 말씀을 능히 잘 해석할 수 있으니, "마치 등불이 열반(즉 소멸)하는 것처럼 심해탈(心解脫)도 역시 그러하다"고 하였다.144) 즉 이러한 경설의 뜻은, 마치 등불의 열반이 다만 등불의 불꽃이 사라진 것[謝]일 뿐 그 밖의 별도의 실유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세존께서는 마음이 해탈을 획득한 것도 다만 제온(諸蘊)이 소멸하여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한 것이다. 아비달마(阿毘達磨)에서도 역시 이렇게 말하고 있다.145) "무사법(無事法)이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온갖 무위법이다." 여기서 '무사'라고 하는 말은 이를테면 본체나 자성[體性]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이상 경부의 답과 경증)
  비바사사(毘婆沙師)는 그 같은 해석을 인정하지 않는다.
  만약 그러하다면 그들은 '사(事)'의 뜻에 대해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 것인가?
  그들은 '사'라고 하는 것에 간략히 다섯 종류가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자성(自性)의 사(事)이니, 어떤 곳에서 '만약 이미 이러한 사를 획득하면 그는 이러한 사를 성취한다'고 말한 바와 같다.146) 둘째는 소연(所緣)의 사(事)이니, 어떤 곳에서 "일체의 법은 지(智)에 의해 알려지고 그러한 사에 따른다"고 말한 바와 같다.147) 셋째는 계박(繫縛)의 사(事)이니, 어떤 곳에서 '만
  
  
143) 즉 택멸이 이전부터 존재하여 본래부터 불생이면 괴로움의 불생은 택멸이 아니라 비택멸이 되어야 할 것이고, 또한 그것이 성도(聖道)에 의한 획득이라면 개별적인 실체로서의 멸의 존재를 구태여 설정할 필요가 없다. 왜냐 하면 '성도의 획득' 그 자체가 바로 택멸의 열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처격에 의한 택멸실재의 논증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뜻.
144) 『잡아함경』 권제29 제816경(대정장2, p. 210상) 참조.
145) 『품류족론』 권제6(대정장26, p. 716상).
146) 자성의 사(svabh va-vastu)란 법 자체라고 하는 뜻으로, 여기서 어떤 곳은 『발지론』 권제20(대정장26, p. 1026하;한글대장경176, p. 490)으로, 여기서의 사(事)는 『바사』 권제197(한글대장경125, p. 499)에 의하면 부정관(不淨觀)·지식념(持息念) 등의 5정심(停心), 별상(別相)과 총상(總相)의 념주(念住), 3의관(義觀) 따위로, 이러한 법의 획득과 성취의 관계를 분별하고 있다.
147) 소연의 사( lambana-vastu)는 심·심소에 연이 되는 소연의 경계를 말하는 것으로, 여기서 어떤 곳이란 『품류족론』 권제6(대정장26, p. 713하)으로, 4제법 중 유루의 인과법은 고지(苦智)와 집지(集智)에 소연되고 무루의 인과법은 멸지(滅智)와 도지(道智)에 소연이 된다고 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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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 이러한 사[此事, 계박되는 법]에 애결(愛結)이 계박되면 이러한 사에 에결(?結)도 계박되는 것인가?'라고 말한 바와 같다.148) 넷째는 소인(所因)의 사(事)이니, 어떤 곳에서 '유사(有事)의 법이란 무엇인가? 말하자면 제 유위법이다'고 말한 바와 같다.149) 다섯 번째는 소섭(所攝)의 사(事)이니, 어떤 곳에서 '전사(田事, 밭일), 택사(宅事, 집일), 처자 등의 사(事)를 [섭수하려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 바와 같다.150)
  따라서 지금 여기(앞서 인용한 아비달마)서는 [실체나 자성이 아니라] 원인을 설하여 '사'라고 일컬었으며, 무위법은 어떠한 원인도 갖지 않는 법임을 밝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위는 비록 실유의 존재라 할지라도 항상 작용을 갖지 않기 때문에 원인도 갖지 않고 결과도 갖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5과(果)에 대한] 전체적인 논의를 이미 마쳤으니, 이제 온갖 결과 중에서 마땅히 어떤 결과가 어떤 원인에 의해 획득되는지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마지막의 원인의 결과는 이숙이고
  앞의 원인의 결과는 증상이며
  동류와 변행인의 결과는 등류이고
  구유와 상응인의 결과는 사용이다.
  後因果異熟 前因增上果
  同類遍等流 俱相應士用
  
  
  
  
148) 계박의 사(sa yogan ya-vastu)는 번뇌에 계박되는 법을 말한다. 여기서 어떤 곳이란 『발지론』 권제3(대정장26, p. 933하;한글대장경176, p. 76).
149) 소인의 사(hetu-vastu)는 원인이 되는 법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서 어떤 곳은 『품류족론』 권제6(대정장26, p. 716상).
150) 소섭의 사(parigraha-vastu)는 사람들에게 포섭되어지는 일이나 물건을 말한다. 여기서 어떤 곳이란 『대비바사론』 권제56(대정장27, p. 228상;한글대장경120, p. 121)으로, 여기서는 이상의 다섯 종류의 사를 자체사(自體事)·소연사·계사(繫事)·인사(因事)·섭수사(攝受事)로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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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하여 말하겠다. '마지막의 원인'이란 말은 이숙인을 말하니, 6인(因) 중에 가장 마지막으로 논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5과(果) 중의] 첫 번째인 이숙과(異熟果)는 바로 이러한 원인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다.
  '앞의 원인'이란 말은 능작인을 말하니, 6인 중에서 최초로 논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5과 중의] 최후인 증상과(增上果)는 바로 이러한 원인에 의해 획득되는 것으로, [원인의] 증상력에 의해 생겨난 과이기 때문에 증상과라고 이름한 것이다.
  [능작인은] 오로지 장애함이 없이 머무는 것인데 어떠한 증상력이 있는 것인가?
  즉 장애함이 없기 때문에 '증상'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151) 혹은 능작인도 역시 뛰어난 힘이 있으니,152) 마치 10처계(處界)가 5식(識)에 대해, 온갖 유정의 업이 기세간(器世間)에 대해 뛰어난 힘이 있는 것과 같다.153) 이를테면 이근(耳根) 등도 안식의 생기 등에 대해 역시 증상의 생기력이 있으니, 뭔가를 듣고 나서 바로 그것을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이러한 등등의 증상에 대해 마땅히 경우에 맞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동류인과 변행인은 등류과(等流果)를 획득하니, 이러한 두 가지 원인의 결과는 모두 원인과 유사하기 때문이다.154)
  구유인과 상응인은 사용과(士用果)를 획득하는데, 사부(士夫)의 체(體)를 떠나 별도로 사부의 작용이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이러한 사부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용과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용'이라는 명칭은 어떠한 법에 근거한 것인가?
  즉 제법이 갖은 작용에 근거한 것으로, [제법의 공능은] 사부의 작용과 같
  
  
  
151) 이는 무력(無力,혹은 不障) 능작인에 대한 설명으로, 만약 다른 법이 생기하는데 장애함이 있다면 결과는 생겨나지 않을 것이므로 장애하지 않는 작용에 '증상'이라는 명칭을 붙일 수 있다는 뜻.
152) 이는 유력(有力,혹은 與力) 능작인에 대한 설명이다.
153) 10처계란 5식의 소의와 소연이 되는 5근과 5경을 말한다. 유정의 업이 증상력이 되어 기세간을 낳는 것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11(p.503)을 참조할 것.
154) 동류·변행인의 결과는 원인과 유사하기 때문에 등류라고 이름한 것으로, 그 같은 두 가지 원인은 과 상(果相)과 서로 유사하기 때문에 원인은 비록 두 가지이지만 그것의 결과는 오로지 한 가지 뿐인 것이다.(『 현종론』 권제9, 한글대장경200, p. 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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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 때문에 '사용'이라는 명칭을 획득하게 된 것이니, 마치 세간에서 '아족(鴉足) 약초' '취상(醉象) 장군'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155)
  [그렇다면] 오로지 이러한 두 가지 원인만이 사용과를 갖는다고 해야 할 것인가, 다른 원인도 역시 그러하다고 해야 할 것인가?156)
  어떤 이는 설하기를, "그 밖의 원인에도 역시 이러한 사용과가 존재하는데, 다만 이숙인은 제외된다. 왜냐 하면 사용과는 원인과 구생(俱生)하거나 혹은 무간에 생겨나지만,157) 이숙과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유여사는 설하기를, "이러한 이숙인에도 역시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진[隔越] 사용과가 있으니, 비유하자면 농부가 수확하는 과실과도 같다"고 하였다.158)
  이숙과 등의 상(相)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숙과는 무기의 법으로서
  유정에 속하고, 유기(有記)로부터 생겨난다.
  등류과는 자신의 원인[自因]과 유사하며
  이계과는 혜(慧)에 의해 모든 번뇌를 다한 것이다.
  異熟無記法 有情有記生
  
  
  
155) '사용(士用)'이라고 하는 명칭은, 사부(士夫, puru a) 즉 인간 자체[體]는 구체적인 작용[用]을 갖 는 것처럼 제법 또한 그러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이를테면 용맹스러운 사람은 사자와 유사하기 때문에 그를 일러 '사자'라고 하는 것과 같다. 아족약초는 갈가마귀 발과 유사한 약초를, 취상장군은 술취한 코끼리 와 같이 용맹한 장군을 말한다.
156) 즉 앞에서 논설된 사용과는 원인과 구생(俱生)하는 것이었는데, 지금 여기서 제법의 공능(작용)을 사 람의 작용에 빗대어 그렇게 일컬었다고 하였으므로 구유·상응인 뿐만 아니라 다른 온갖 원인에도 통하는 것 이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난문.
157) 구생하는 원인은 구유인과 상응인이고, 무간에 생겨나는 원인은 동류인와 변행인이다. 그러나 이숙과 는 원인과 계시이다. 그래서 사용과는 이숙인을 제외한 다른 네 가지 원인에 대한 결과라는 것이다.
158) 즉 사용과는 그것과 구기하는 원인에는 결정적으로 존재한다. 무간이나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원인 에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지만,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 작용이 뛰어나지 않으며, 또한 그에 상응하는 다른 결과와 혼동되기 때문에 구유인과 상응인에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현종론』 권제9, 한글대장 경200, p. 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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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等流似自因 離繫由慧盡
  
  만약 그것의 힘에 의해 생겨난 것이면
  이러한 과를 이름하여 사용이라 하며
  이전에 생겨난 것을 제외한 유위법을
  유위의 증상과라고 한다.
  若因彼力生 是果名士用
  除前有爲法 有爲增上果
  
  논하여 말하겠다. 오로지 무부무기법 중에만 이숙과가 있다.159)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비유정수(非有情數)와도 역시 통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이것은 오로지 유정에 국한된다.
  [만약 그렇다면] 등류(等流)나 소장양(所長養)과도 통한다고 해야할 것인가?160)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러한 이숙과는 오로지 유기(有記)에 의해서만 생겨난다. 즉 일체의 불선과 아울러 선한 유루의 업은 능히 그 이숙을 기표(記表)하기 때문에 '유기(有記)'라고 이름하는데, 그것(즉 선·불선의 유기업)으로부터 구시(俱時)나 무간이 아닌 후시(後時)에 비로소 이숙이 일어나기 때문에 [본송에서] '유기로부터 생겨난다'고 일컬은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이숙과의 상이다.
  비유정수도 역시 업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인데, 어찌 이숙과가 아니라고 하는 것인가?
  
  
  
159) 이숙과(vip ka-phala)란 무부무기법으로서 유정에만 있을 뿐 비유정에는 없으며, 또한 유정수 중의 장양(長養)이나 등류(等流)는 이숙과 통하지 않으며, 오로지 선·불선의 유기(有記)의 유루업으로부터 구시( 俱時)나 무간이 아닌 후시(後時)에 일어나는 것이다.
160) 이숙이 오로지 유정에게만 존재하는것이라면 유정 가운데 등류로서 생한 것[等流生]이나 음식 등에 의해 장양된 것[所長養]도 마땅히 이숙이라고 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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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정이] 공유(共有)하는 것이기 때문으로,161) 이를테면 다른 이들도 이와 같은 비유정수(즉 기세간)을 능히 수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저 이숙과는 반드시 다른 이와 함께 수용되는 일이 없으니, 다른 이가 업을 짓고 다른 이가 그러한 업에 의해 이숙과를 받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162)
  그 같은 증상과(增上果,즉 산하대지의 비유정수)도 역시 업에 의해 생겨난 것인데, 어떻게 [여러 유정들에게] 함께 수용될 수 있는 것인가?
  공업(共業)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원인[自因]과 유사한 법을 등류과(等流果)라고 이름하니, 이를테면 동류와 변행의 두 원인과 유사한 결과를 말한다.163)
  만약 변행인도 역시 등류과를 획득하는 것이라면 어째서 이것을 동류인이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인가?
  변행인의 결과는 다만 [그것이 계속(繫屬)되는] 지(地)와 염오함이 동등하기 때문에 원인과 서로 유사하다고 한 것으로, 종류 즉 끊어지는 부류(部類)가 동등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약 어떤 결과가 종류에 있어도 역시 원인과 유사하다면, 이러한 결과의 원인이 되는 것을 동류인이라고 한다.164)
  그렇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바로 동류인이면서 역시 변행인인 경우가 있는가?"
  마땅히 4구(句)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니, 제1구는 변행이 아닌 법으로서 동류인이 되는 법이며, 제2구는 타부(他部)에 두루하는 법으로서 변행인이 되는 법이며, 제3구는 자부(自部)에 두루하는 법으로서 변행인이 되는 법이며, 제4구는 앞에서 언급한 온갖 상을 제외한 법이다.165)
  
  
161) 비유정수 즉 무생물의 기세간(器世間)은 공업(共業)에 의해 초래된다. 즉 그것은 여러 중생의 각각의 업이 함께 지은 것으로, 그 결과가 모든 유정에 공통되기 때문에 이숙이라 할 수 없다. 이숙은 오로지 각자에 게 개별적으로 초래되는 과보이다.
162) a가 업을 짓고 b가 그 업으로 인해 a와 같은 이숙과를 받는 일은 없다는 뜻.
163) 등류과(ni yanda-phala)란 자신의 원인(즉 동류인이나 변행인)과 유사하게 생겨난 법을 말한다.
164) 즉 동류인의 등류과는 자신의 원인과 선·염오·무기 등의 성(性)과 지(地)와 종류(즉 部)가 동류이며, 변행인의 등류과는 자신의 원인과 염오성과 지에 있어서는 동류이지만 종류는 반드시 동류가 아니다. 이를테면 견고·견집소단의 열한 가지 변혹(遍惑)은 일체의 지와 부(자부와 타부)의 염오법에 원인이 되기 때문에 동류인이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전술)
165) 제1구는 동류인이면서 변행인이 되지 않는 경우로서, 열한 가지 변행혹 이외의 법으로 동류인이 되는 것. 제2구와 3구는 변행인이면서 동류인이 되지 않는 경우와 동류인이면서 변행인이 되는 경우로서, 이를테면 유신견 등이 견멸·견도소단과 수소단 등 타부의 염오법에 원인이 될 때가 제2구이며, 견고·견집소단 등 자부의 염오법에 원인이 될 때가 제3구이다. 제4구는 양자 모두 아닌 경우로서, 동류 변행 이외의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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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慧)에 의해 [유루의] 법을 다한 것을 이계과(離繫果)라고 이름하는데, 소멸하였기 때문에 '다하였다[盡]'고 일컬은 것이며, 간택[擇]하였기 때문에 '혜'라고 일컬은 것이다. 즉 택멸(간택에 의한 소멸)을 설하여 이계과라고 이름하였다.166)
  만약 어떤 법이 있어 그것의 세력에 의해 생겨난 것이면, 이러한 법을 설하여 사용과(士用果)라고 이름한다.167) 이를테면 하지의 가행선심의 세력에 의해 상지의 유루와 무루의 선정이 낳아지며, 아울러 청정한 정려심의 세력에 의해 변화신(變化身)이 낳아지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은 따위의 유형도 [사용과이다]. 그리고 택멸도 마땅히 도(道)의 세력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온갖 유위법으로서 이전에 생겨난 것을 제외한 그 밖의 유위를 증상과라고 한다.168)
  그렇다면 사용과 증상의 두 결과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인가?
  '사용과'라고 하는 명칭은 오로지 조작하는 자[作者]에 대한 것이지만, '증
  
  
  
166) 이계과(visa yoga-phala)란 무루혜(無漏慧)에 의해 유루의 법을 멸진한 것으로, 이는 바로 택멸을 말한다. 즉 무루 간택력으로 일체의 유루번뇌를 멸하였기 때문에 '택멸'이며, 간택력을 '인'으로 하여 온갖 계박(繫縛)을 떠나 그 소멸을 증득하였기 때문에 이계의 '과'라고 이름한 것이다.(『현종론』 권제10, 한글대장경200, p. 247 참조)
167) 사용과(puru ak ra-phala)란 어떤 법의 세력에 의해 생겨난 결과를 말한다. 그럴 때 구유인과 상응인은 구생(俱生)으로, 동류인과 변행인은 무간으로, 능작인은 혹은 구생으로, 혹은 무간으로, 이숙인은 시간적인 간격을 두고서 사용과를 획득하기 때문에, 나아가 무간도는 택멸의 생인(生因)은 아니지만 그것을 증득하기 때문에 넓은 의미로서 사용과를 낳는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무간도를 불생사용과라고도 한다.
168) 증상과(adhipati-phala): 결과는 원인에 앞서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원인에 앞서 생겨난 법을 제외한 그 밖의 법과 동시이거나 후에 생겨나는 유위법을 모두 증상과라고 한다. 즉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법에 인이 되는 능작인의 증상력(與力과 無障)에 의해 획득된 과이므로 증상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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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과'라고 하는 명칭은 그 밖의 것(향수하는 자)에 대해서도 다 통하니, 예컨대 어떤 장인이 만든 조각품은 그것을 만든 장인에 대해서는 사용과와 증상과라는 명칭을 모두 획득하지만, 그 밖의 다른 장인이 아닌 이에 대해서는 오로지 증상과의 명칭만을 획득하는 것과 같다.
  
  앞에서 설한 여섯 가지 종류의 원인 중에서 어떠한 상태에 있는 어떠한 원인이 취과(取果)하고 여과(與果)하는 것인가?169)
  게송으로 말하겠다.
  
  다섯 가지의 취과(取果)는 오로지 현재할 때이며
  두 가지(구유·상응)의 여과(與果)도 역시 그러하다.
  과거·현재에 여과하는 것은 두 가지(동류·변행) 인이며
  한 가지(이숙)의 여과는 오로지 과거에 있을 때이다.
  五取果唯現 二與果亦然
  過現與二因 一與唯過去
  
  논하여 말하겠다. [능작인을 제외한] 다섯 가지 원인의 취과(取果)는 오로지 현재할 때로서, 결정코 과거에서는 취과하지 않으니, 그것(즉 과거법)은 이미 취과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미래에서도 역시 취과하지 않으니, 그 작용이 아직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이다.170)
  또한 역시 능작인의 취과에 대해서도 마땅히 이와 같이 설해야 하겠지만, 결정코 반드시 결과를 갖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서 설하지 않은 것이다.171)
  
  
169) 여기서 취과란 직접적으로 결과를 초래할 능력이 있는 것(예컨대 종자)으로 질료인에 상당하는 것이고, 여과란 제법의 생기에 간접적인 조력(助力)을 부여하여 결과를 초래하게 하는 것으로 동력인에 해당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취과는 현재에 능히 원인이 되어 후과(後果)를 취하는 것이며, 여과는 제법이 장차 생기하려고 할 때 그것에 힘을 부여하여 현재로 출현하게 하는 것이다. (후술)
170) '취과라고 하는 말은 능히 인기(引起)한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미래법을 인기하여 그것으로 하여금 생겨나게 하는 것이므로 취과의 작용은 오로지 현재법에만 있으며, 과거·미래법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현종론』 권제10, 한글대장경, p. 249)
171) 즉 능작인도 역시 현재에 존재할 때에만 취과하지만 무위법의 경우처럼 취과하지 않는 능작인도 있기 때문에 게송에서 설하지 않았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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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구유인과 상응인의 여과(與果)도 역시 그러하여 오로지 현재할 때만 여과하니, 이 같은 두 원인의 취과와 여과는 반드시 동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류와 변행의 두 원인의 여과는 과거·현재와 통한다.
  과거는 그럴 수 있다 할지라도 어떻게 현재에 등류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인가?
  등류과는 [원인과] 무간에 [미래 정생위(正生位)에서] 낳아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172) 그리고 만약 결과가 이미 생겨난 때라면 이러한 두 가지 원인은 이미 과거로 지나가 버렸을 것이고, [현재에 있을 때] 이미 여과하였기 때문에 마땅히 더 이상 여과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173)
  선의 동류인은 어떤 때 취과는 하더라도 여과는 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마땅히 4구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제1구는 이를테면 선근을 끊을 때 최후로 버리는 선근의 득(得)이다.174) 제2구는 이를테면 선근을 속생(續生)할 때 최초로 획득하는 선근의 득이다.175) 그러나 이 때 속생하는 것은 앞서 [선근을 끊을 때 최후로 버렸던] 선근의 득이라고 마땅히 설해야 한다. 제3구는 이를테면 선근을 끊지 않은 자가 그 밖의 다른 상태[에 있을 때의 득]이다.176) 제4구는 앞서 언급한 상을 제외한 그것이다.177)
  
  
172) 즉 등류과가 무간에 낳아지는 경우, 원인이 현재할 때 결과는 바로 미래 생상위(곧 정생위)에 오게 되기 때문이다.
173) 따라서 이러한 2인이 무간에 등류과를 취할 때에는 현재에 여과하며, 시간적 간격을 두고서 등류과를 취할 때에는 과거로 낙사한 후 여과한다.
174) 취과는 하지만 여과는 하지 않는 경우로서, 선근을 끊을 때 최후찰나의 선근의 득(得)은 현재세에 머물면서 이미 원인의 작용을 성취하였기 때문에 취과라고 이름할 수 있지만, 다음 찰나 선심을 더 이상 인기하지 않기 때문에 여과라고는 이름할 수 없다.
175) 여과는 하지만 취과는 하지 않는 경우로서, 앞서 선근을 끊은 자가 정견을 일으켜 선근을 속생할 때 최초로 획득하는 선근의 득은 다음 찰나 선근을 낳기 때문에 여과라고는 할 수 있어도 아직 결과를 낳지 않았기 때문에 취과라고는 할 수 없다.
176) 취과하면서 여과하는 경우로서, 선근을 속생시킨 자에게 선근의 득이 상속하여 일어나는 상태가 그러하다. 즉 전찰나의 득이 현재 취과하고, 후찰나의 득이 미래 생상위에 나타나 여과하는 것이다.
177) 취과도 여과도 하지 않는 경우로서, 이미 선근을 끊은 자가 선근을 속생하지 않고 있을 때의 선근의 득이 그러하다. 즉 단선근 최후에 버려진 선근의 득은 이미 취과하였기에 지금 취과하지 않으며 더 이상 선의 득이 속생하지 않기 때문에 여과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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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선의 동류인에 대해서도 역시 4구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제1구는 이를테면 욕탐을 떠날 때 최후로 버려지는 [번뇌의] 득이다.178) 제2구는 이를테면 이욕(離欲)에서 물러날 때 최초로 획득하는 [번뇌의] 득이다.179) 그러나 이 때 물러나는 것은 앞서 [욕탐을 떠날 때 최후로 버렸던 번뇌]의 득이라고 마땅히 설해야 한다. 제3구는 이를테면 아직 욕탐을 떠나지 않은 자가 그 밖의 다른 상태[에 있을 때의 득]이다. 제4구는 앞서 언급한 상을 제외한 그것이다.
  유부무기의 동류인 중에도 역시 4구가 있으니, 아라한과를 획득할 때와 물러날 때와 아직 획득하지 않았을 때,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상태가 바로 그것으로, 마땅히 이치에 맞게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180)
  무부무기의 동류인 중에는 순후구(順後句)가 있다. 이를테면 그것이 여과할 때는 반드시 역시 또한 취과하지만, 혹 어느 때 취과는 하더라도 여과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아라한이 [무여열반에 들 때의] 최후의 제온이 그러하다.181)
  유소연(有所緣)의 찰나의 차별에 근거한 선의 동류인에도 역시 4구가 있으니,182) 제1구는 이를테면 선심과 무간에 염오심과 무기심이 일어나는 때이고, 제2구는 이를테면 이와 반대되는 경우이고, 제3구는 이를테면 선심과 무
  
  
178) 이러한 최후찰나의 득은 다음 찰나의 득을 인기하므로 취과의 작용은 있지만, 다음찰나의 득이 속생하지 않기 때문에 여과하는 일은 없는 것이다.
179) 원문에서는 '욕탐'으로 되어 있지만, 전후의 문맥을 고려하여 '이욕'으로 고쳐 번역한다.
180) 제1구는 유정천(有頂天)의 번뇌를 끊고 아라한과를 획득할 때, 최후로 버려지는 번뇌의 득은 취과하지만 여과하지 않는다. 제2구는 아라한과에서 물러나 다시 유부무기를 일으킬 때, 최초로 획득하는 앞서 버려진 최후찰나의 득은 오로지 여과할 뿐 취과하지 않는다. 제3구는 아직 아라한과를 획득하지 않은 이는 유부무기의 득이 찰나찰나 상속하고 있기 때문에 취과하고 여과한다. 제4구는 그 밖의 무학위는 유부무기의 번뇌가 획득되지 않기 때문에 취과도 여과도 하지 않는다.
181) 아라한이 무여열반에 들 때 최후 일찰나의 온(즉 색신·명근·중동분 등의 무부무기온)은 취과는 하지만 더 이상 후유가 없기 때문에 여과하지 않는다.
182) 이는 선·악·무기의 심·심소(유소연법)가 잡기(雜起)하여 전후찰나에 차별이 있을 경우의 취과와 여과에 대한 분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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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에 다시 선심이 일어나는 경우이고, 제4구는 이를테면 앞서 언급한 상을 제외한 그것이다.183)
  그리고 불선심 따위의 동류인에 대해서도 그것이 상응하는 바에 따라 역시 4구가 있으니, 앞의 예에 준하여 설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취과(取果)와 여과의 뜻은 무엇인가?
  능히 그것(즉 결과)의 종자[種]가 되기 때문에 '취과'라고 이름하며, 바로 그것에 힘을 부여하기 때문에 여과라고 이름한다.
  이숙인의 여과는 오로지 과거에 있을 때이니, 이숙과는 이숙인과 구유하거나 무간인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앞에서 논설한] 5(果)과 이외에 별도로 4과를 설하고 있다.184) 첫 번째는 안립과(安立果)이니, 이를테면 마치 수륜(水輪)이 풍륜(風輪)의 결과가 되고, 내지는 풀[草] 따위가 대지의 결과가 되는 것과 같다. 둘째는 가행과(加行果)이니, 이를테면 마치 무생지(無生智) 등이 부정관(不淨觀) 등의 먼 결과가 되는 것과 같다. 셋째는 화합과(和合果)이니, 이를테면 마치 안식 등이 안근 등의 결과가 되는 것과 같다. 넷째는 수습과(修習果)이니, 이를테면 마치 변화심 등이 온갖 정려의 결과가 되는 것과 같다.185)
  그러나 이와 같은 4과는 모두 사용과와 증상과에 포섭된다.186)
  원인과 결과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183) 염오·무기심과 무간에 염오 혹은 무기심이 현기할 때 그러한 유소연의 선한 동류인은 이미 취과하였기 때문에 취과하지 않으며, 무기심이 현기하였기 때문에 여과하지 않는다.
184) 『대비바사론』이나 중현(『현종론』 권제10, 한글대장경200, p. 251)에 의하면 이는 서방사(西方師)의 학설이다.
185) 안립과(prati h -phala, 구역에서는 依止果)란 어떤 토대 위에 안립된 결과를 말하는 것으로, 이를테면 가옥이나 초목 사람 등은 대지를 토대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의 안립과라고 하는 것이다. 가행과(prayoga-phala)는 가행도인 부정관(不淨觀) 등을 닦고 나아가 마침내 무생지 등이 생겨나기 때문에 부정관 등을 가행과라고 하는 것이다. 화합과(sam gr -phala, 구역은 集果)란 여러 가지 인연 화합에 의해 생겨난 과이며, 수습과(bh van -phala)란 수습함으로 나타난 결과를 말한다.
186) 첫 번째 안립과는 증상과에, 나머지 세 가지는 사용과에 포섭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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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마땅히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어떤 법은 이 가운데 몇 가지의 원인에 의해 생겨나는 것인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법에는 간략히 네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염오법(染汚法)과 이숙생법(異熟生法)과 첫 번째 무루법(즉 苦法智忍)과 이 세 가지 이외의 나머지 법이 그것이다.
  나머지 법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말하자면 이숙을 제외한 그 밖의 무기법과 첫 번째 무루법을 제외한 그 밖의 다른 여러 선법이다.187)
  이와 같은 네 가지 법[이 몇 가지 원인에 의해 생겨나는지]에 대해 게송으로 말하겠다.
  
  염오법과 이숙생법과
  그 밖의 법과 첫 번째 성도는 차례대로
  이숙인과 변행인과 이 두 가지와,
  아울러 동류인을 제외한 그 밖의 인에 의해 생겨난다.
  染汚異熟生 餘初聖如次
  除異熟遍二 及同類餘生
  
  이것은 말하자면 심·심소에 대한 것으로
  그 밖의 법은 아울러 상응인을 제외한다.
  此謂心心所 餘及除相應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염오법은 이숙인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 가지 원인에 의해 생겨나니, 이숙인에 의해 생겨나는 제법은 염오하지 않기 때문이다.188) 이숙생법은 변행인을 제외한 그 밖의 다섯 가지 원인에 의해 생겨난
  
  
187) 이숙생을 제외한 그 밖의 무기법이란 위의로(威儀路)·공교처(工巧處)·변화심(變化心)를 말하며, 첫 번째 무루를 제외한 그 밖의 다른 선법이란 고법지인(苦法智忍)과 그것과 상응·구유하는 법을 제외한 무루법과 일체의 유루선법을 말한다.
188) 이숙인에 의해 생겨나는 법은 무기이다. 즉 염오법은 심·심소이기 때문에 상응인에 의해, 염오법이기 때문에 변행인에 의해 생겨나며, 동류·구유·능작인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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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189) 세 가지 이외의 나머지 법은 양쪽 모두에 걸친 이숙과 변행의 두 가지 원인을 제외한 나머지 네 가지 원인에 의해 생겨난다.190) 첫 번째 무루법은 앞에서 [제외한] 두 가지 원인과 아울러 동류인을 제외한 나머지 세 가지 원인에 의해 생겨난다.191)
  이와 같은 네 가지의 법은 무엇에 대해 설한 것인가?
  이를테면 심과 심소에 대해 설한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불상응행이나 색의 네 가지 법은 다시 몇 가지 원인에 의해 생겨나는 것인가?192)
  심·심소법에서 제외된 원인 이외에 상응인도 아울러 제외하니,193) '그 밖의 다른 법'(즉 불상응행과 색법)은 그와 같은 원인을 제외한 나머지 네 가지·세 가지·두 가지 원인에 의해 생겨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즉 이 가운데 염오와 이숙생법은 나머지 네 가지 원인에 의해 생겨난다.194)
  세 가지 이외의 나머지 [색과 불상응행]법은 [이숙·변행인과 아울러 상응인을 제외한] 나머지 세 가지 원인에 의해 생겨난다. 그리고 첫 번째 무루[의 색과 불상응행]법은 [이숙·변행·동류인과 아울러 상응인을 제외한] 나머
  
  
  
189) 변행인에 의해 생겨나는 제법은 오로지 염오법이기 때문이다.
190) 즉 염오법과 이숙생법과 첫 번째의 무루법을 제외한 그 밖의 법은 이숙생이 아니기 때문에 이숙과를 제외하는 것이며, 염오법이 아니기 때문에 변행인을 제외하는 것이다.
191) 첫 번째 무루법 즉 고법지인(苦法智忍)은 선법이며, 앞서 생겨난 동류의 법을 갖지 않기 때문에 이숙·변행인과 동류인을 제외하는 것이다.
192) 불상응행의 네 가지 법이란 심·심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염오법(염오법과 구생하는 득과 4상), 이숙생법(중동분·무상과·명근과, 이생성과 구생하는 득과 4상), 첫 번째 무루법(고법지인과 구생하는 득과 4상), 그 밖의 법(비득·무상정·멸진정·名·句·文과, 심심소의 그 밖의 법과 구기하는 득과 4상)을 말하며, 색법의 경우는 염오색(이를테면 불선율의)·이숙색(5根)·첫번째 무루색(고법지인 상의 道共戒)·앞의 세 가지를 제외한 그 밖의 색(이를테면 도공계와 定共戒)을 말한다.
193) 상응인을 제외하는 것은, 그것은 오로지 심·심소법에만 한정된 원인이기 때문이다.
194) 즉 염오의 색법과 불상응행법은 이숙인과 상응인을 제외한 나머지 네 가지 원인에 의해, 이숙생의 색법과 불상응행법은 변행인과 상응인을 제외한 나머지 네 가지 원인에 의해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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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 두 가지 원인에 의해 생겨나니, '하나의 원인'에 의해 생겨나는 존재[法]는 결정코 아무것도 없다.195)
195) 일체의 존재는 적어도 능작·구유의 두 가지 원인 이상을 갖기 때문으로, 이러한 논의는 외도의 일인론(一因論), 이를테면 대자재천(大自在天, mahe vara)이나 생주신(生主神, prajap ti)와 같은 제일원인에 의해 일체 만유가 생겨났다고 하는 외도설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권에서 온갖 연(緣)에 대해 논의하면서 다시 언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