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아비달마구사론 제 18 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4.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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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구사론 제 18 권
  존자 세친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
  
4. 분별업품 ⑥
  앞에서 분별한 세 가지 무거운 장애 중에서, 다섯 가지의 무간업이 업장의 본질이라고 논설하였다. 그렇다면 다섯 가지 무간업의 본질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 같은 다섯 가지 무간업 중에서
  네 가지는 신업이고, 한 가지는 어업이며
  다시 세 가지는 살생이고, 한 가지는 허광어이며
  한 가지는 살생의 가행이다.1)
  此五無間中 四身一語業
  三殺一虛誑 一殺生加行
  
  논하여 말하겠다. 다섯 가지 무간업 중에서 네 가지는 바로 신업이고, 한 가지는 바로 어업이다.2) 또한 세 가지는 살생의 근본업도이고,3) 한 가지는
  
  
1) 본 송은 현장역본 『구사론』에만 있는 것으로, 범본이나 진제 역본에서는 다만 장행으로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2) 5무간업 중에서 어미를 죽이고 아비를 죽이고 아라한을 죽이고 악심으로 부처의 몸에서 피를 나게 하는 것은 바로 신업이고, 화합승가를 파괴하는 것은 바로 어업이다.
3) 여기서 세 가지는 어미를 죽이고 아비를 죽이며 아라한을 죽이는 것이다. 부처의 몸에서 피를 나게 하는 것은 살생의 근본업도가 아니라 다만 가행일 뿐이다. 그 이유는 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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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광어의 근본업도이며, 한 가지는 바로 살생업도의 가행이니, 여래의 몸은 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승가를 깨트리는 무간업은 바로 허광어이다.
  이같이 [승가를 깨트리는 무간업의 본질이] 허광어라면, 어떠한 이유에서 '승가를 깨트리는 것[破僧]'이라고 다시 이름하는 것인가?
  원인에 결과의 명칭을 부여한 것이다. 혹은 [원인 즉 허광어가] 능히 승가를 깨트렸기 때문이다.4)
  만약 그렇다면 '승가의 파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며, 능히 파괴하는 이[能破]와 파괴되는 이[所破] 중에 누가 파괴를 성취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승가의 파괴란 화합하지 않음이니
  심불상응행온(心不上應行蘊)과
  무부무기를 본질로 하는 것으로,
  파괴되는 승가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다.
  僧破不和合 心不上應行
  無覆無記性 所破僧所成
  
  논하여 말하겠다. '승가의 파괴'라고 하는 것의 본질은 바로 불화합성(不和合性)으로, 무부무기로서 심불상응행온에 포섭된다.5)
  그렇다면 어찌 무간업이 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승가의 파괴는 허광어(거짓말)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4) 허광어는 파화합승(破和合僧)의 본질이지만, 그것을 원인으로 하여 승가의 화합이 깨어졌기 때문에 결과를 원인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며, 혹은 허광어가 능히 승가의 화합을 깨트렸기 때문에 '파화합승'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5) 승가의 파괴란 화합성을 상실하는 것, 즉 화합성의 비득(非得)을 의미하기 때문에 무부무기로서 불상응행법에 포섭된다. 그래서 승가가 파괴되는 것 자체는 무간업이 아니며, 무간업인 허광어의 결과이다.(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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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가를 파괴하는 것'은 바로 무간업의 결과라고 설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승가의 파괴는 능히 그것을 파괴하는 자가 성취하는 것이 아니며, 다만 파괴되는 승가의 대중에 의해 성취될 뿐이다.
  
  그렇다면 이같이 능히 파괴하는 자는 무엇을 성취하며, 승가를 파괴하는 업의 이숙은 어떠한 처소에서 얼마간 이루어지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능히 파괴하는 자는 오로지
  이 같은 허광어의 죄를 성취하니
  무간지옥에서 일 겁 동안 이숙하며
  죄가 증가함에 따라 괴로움도 증가한다.
  能破者唯成 此虛誑語罪
  無間一劫熟 隨罪增苦增
  
  논하여 말하겠다. 능히 승가를 파괴하는 자는 파승죄(破僧罪)를 성취한다. 즉 이러한 파승죄는 허광어를 본질[性]로 하는 것으로, 허광어는 바로 승가의 파괴와 동시에 생겨난 어(語)의 표업과 무표업이다.
  이 같은 파승죄를 지은 이는 반드시 무간(無間)의 대지옥 중에서 일 중겁(中劫)을 보내면서 지극히 무거운 괴로움을 받게 되는데, 그 밖의 다른 역죄의 경우는 반드시 무간지옥에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만약 다수의 역죄를 짓고 그것들이 모두 다음 생에서 이숙하였다면 어떻게 다수의 역죄가 동일한 생을 초래하게 되는 것인가?6)
  그가 지은 죄가 증가함에 따라 괴로움 또한 증가하여 극심해지니, 이를테
  
  
  
6) 역죄(逆罪) 즉 무간업은 반드시 무간의 다음 생에 이숙하는 것이라면, 다수의 역죄을 짓더라도 무간지옥의 생을 한 번만 받을 것이며, 그럴 경우 다른 역죄의 과보는 없게 되는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처음에 한 번 무간지옥의 생을 이미 초래하였다면 그 밖의 역죄에는 과보가 없게 될 것이 아닌가? 하는 난문. 이에 대한 유부의 답변 ; 무간지옥의 생은 한 번 받지만 그 강도가 지은 역죄에 비례하여 증가하기 때문에 과보가 없다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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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 다수의 역죄로 말미암아 지옥 중에서 크게 유연해진 몸과 맹렬한 고통을 주는 수많은 형구를 초래하여 두 배, 세 배, 네 배, 다섯 배나 무거운 괴로움을 받게 되는 것이다.
  
  누가 어떠한 처소에서 누구를 능히 파괴하는 것인가? 또한 파괴는 어느 때에 일어나 얼마 동안 지속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필추로서, 견(見)과 청정의 행자(行者)가
  다른 처소에서, 어리석은 이들을 파괴하니
  [파괴되는 이들이] 다른 스승과 성도를 인허할 때
  '파괴'라고 이름하며, 밤이 다하도록 지속하지 않는다.
  苾芻見淨行 破異處愚夫
  忍異師道時 名破不經宿
  
  논하여 말하겠다. 능히 승가를 파괴하는 이는 요컨대 대(大) 필추로서 필시 재가자나 필추니 등이 아니며,7) 오로지 견행자(見行者)로서 애행자(愛行者)가 아니며,8) 청정한 행[淨行]에 머무는 자로서 계를 범한 자가 아니니, 범계자의 경우 말에 위덕이 없기 때문이다.
  승가의 파괴는 요컨대 [여래가 머무는 처소와는] 다른 처소에서 성취되는 것으로, 대사(大師,부처님을 말함)와 대면하고 있을 때는 파괴되지 않는다. 즉 모든 여래에 대해서는 가벼이 여기거나 핍박할 수 없으며, 언사(言詞)에 위엄이 있고 엄숙하여 직접 대면하여서는 필시 능히 파괴하는 일이 없기 때
  
  
  
7) 그들의 몸과 마음[依止]에는 위덕이 없기 때문에 허광어가 성취되지 않으며, 따라서 승가는 파괴되지 않는다.
8) 여기서 '견행자'란 성질상 이지적인 면이 강하여 의지가 강건한 이를 말하고, '애행자'란 비교적 정에 약하여 정리에 이끌리기 쉬운 자를 말한다. 즉 견행자는 악한 의요가 지극히 견고하고 깊기 때문에 능히 승가를 파괴하지만 애행자는 염(染)·정(淨)의 품류에 대해 다 같이 조급하게 동요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고 한다. (『현종론』 권제23, 한글대장경201, p.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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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이다.
  또한 오로지 이생의 승가만을 파괴할 수 있을 뿐 성자의 승가는 파괴되는 것이 아니니, 모든 성자는 법성(法性)을 증득하였기 때문이다.9)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인(忍)을 획득한 이도 역시 능히 파괴할 수 없다"고 하였지만,10) [본송에서는] 두 뜻(이생과 忍位)을 포함하기 위해 '어리석은 이[愚夫]'라는 말로 설하게 된 것이다.
  또한 요컨대 파괴되는 승가에서는 부처님과는 다른 스승을 인허하고, 부처님의 교설과는 다른 그 밖의 성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허하는데, 승가의 파괴는 마땅히 그와 같은 사실을 인허할 때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설해야 할 것이다.
  또한 [승가의 파괴는] 반드시 그날 밤 안에 화합하며, 밤이 다하도록 지속하지 않는다.11)
  이상과 같은 승가의 파괴를 일컬어 '파법륜승(破法輪僧)'이라고 하는데, 능히 부처님의 법(즉 聖道)의 수레바퀴를 장애하여 승가의 화합을 깨트리기 때문이다.
  
  어떠한 주(洲)에서, 몇 사람에 의해 법륜승가[法輪僧]가 파괴되며, 갈마승가[羯磨僧]는 어떠한 주에서, 몇 사람에 의해 파괴되는 것인가?12)
  게송으로 말하겠다.
  
  
  
9) 이에 반해 『현종론』 (권제23, 앞의 책, p. 91)에서는 '성자 이외의 다른 이는 능히 증정(證淨)을 인기하여 획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여기서 '증정'이란 무루지로서 여실히 4제의 이치를 깨달아 불·법·승 3보와 계(戒)를 믿는 것을 말한다.
10) '인'을 획득한 자란 4선근(순결택분의 內凡位. 즉 무루 견도지에 접근한 단계) 중의 세 번째 단계를 획득한 현자(賢者)를 말한다. 본론 권제23(p.1041) 참조.
11) 승가의 화합이 깨어지면 그 날 밤 안에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다음 날 아침에까지 지속하지 않는다. 이는 제바달다가 승가의 파괴를 기도하였지만 그 날 밤에 사리불의 권고에 의해 다시 화합하였던 사실을 가리킨다. 즉 그는 우유 등을 수용하지 말고, 고기를 먹지 말고, 소금을 먹지 말고, 재단되지 않은 옷을 입고, 마을의 변두리에 머물 것을 주장하며 승가의 파괴를 기도하였다.(여기에는 이설이 있다)
12) '파법륜승(破法輪僧)'이란 제바달다가 부처님의 권위를 부정하고 별도의 교단을 세운 것과 같은 분열을 말하고, '파갈마승'이란 동일교구에서 포살이나 갈마작법의 규칙을 달리함으로 말미암아 분열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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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부주에서, 아홉 사람 등에 의해
  비로소 법륜승가는 파괴되며
  갈마승가는 오로지 세 주(洲)에서
  여덟 사람 등에 의해 파괴될 뿐이다.
  贍部洲九等 方破法輪僧
  唯破羯磨僧 通三洲八等
  
  논하여 말하겠다. 오로지 섬부주 사람으로서 적게는 아홉 명, 혹은 그 이상이 되어야 능히 법륜을 파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밖의 다른 주에서는 법륜이 파괴되지 않으니, 그곳에는 부처님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으로, 부처님이 계시는 곳이어야 비로소 다른 스승[異師]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덟 명의 필추가 분열하여 두 그룹[衆]이 될 때 승가는 파괴되는 것이며, 능히 파괴하는 자가 아홉 번째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법륜승가의 파괴에는] 최소한 아홉 명이 필요한 것이다. 나아가 [본송에서] '등'이라고 말한 것은 그 이상은 한정이 없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오로지 갈마승가만은 세 주(洲)에서 두루 파괴될 수 있는 것으로, 최소한 여덟 명이 필요하지만 많게는 역시 한정이 없다. 그리고 세 주에 통한다고 함은, 그곳에 모두 성교(聖敎)가 존재하기 때문이다.13) 요컨대 동일한 결계(結界,교구를 말함) 중에서 승가가 두 부파로 나누어져 각기 별도의 갈마(羯磨, 즉 의식작법)를 조작하기 때문에 여덟 명이 필요하다고 한 것으로,14) 이를 초과하더라도 무방하기 때문에 [본송에서] 역시 '등'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시기에 법륜승가가 파괴되는 일이 없는 것인가?15)
  
  
13) 성교가 존재하는 곳이라면 출가제자의 무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14) 승가의 최소인원은 4명 이상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법륜승의 분열은 최소한 두그룹으로 분열되는 8명과 불도(佛道)와는 다른 주장을 하는 이사(異師) 1명 등 9명이 필요한 것이며, 갈마승의 분열은 특정한 주장자에 의해 분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최소한 8명이 필요한 것이다.
15) 결계(結界)가 이루어진 이후로부터 법이 아직 멸하지 않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법륜승가는 언제라도 파괴될 수 있지만 여섯 시기만은 파괴되는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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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송으로 말하겠다.
  
  처음과 마지막과, 부스럼과 쌍(雙)이 생겨나기 이전과
  불멸(佛滅) 이후와 아직 결계가 이루어지지 않은 때이니
  이와 같은 여섯 시기에 있어서는
  법륜의 승가가 파괴되는 일이 없었다.
  初後雙前 佛滅未結界
  於如是六位 無破法輪僧
  
  논하여 말하겠다. '처음'이란 이를테면 세존께서 법륜을 굴리신 지 아직 오래되지 않은 때를 말하며, '마지막'이란 이를테면 선서(善逝, 여래10호의 하나)께서 장차 반열반에 들고자 할 때를 말하니, 이러한 두 때 중에는 승가가 일미(一味)였기 때문에 [법륜승가가 파괴되는 일이 없는 것이다].16)
  정계(正戒)와 정견(正見)에 대한 두 가지의 부스럼[]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때[에도 역시 법륜승가가 파괴되는 일이 없으니],17) 요컨대 이러한 두 가지 부스럼이 생겨나야 비로소 승가가 파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 지(止)·관(觀)이 제일인 쌍(雙)이 출현하지 않았을 때[에도 법륜승가가 파괴된 일이 없었으니], 승가가 파괴되었을 때에는 자연적으로 그들에 의해 신속하게 다시 화합하기 때문이다.18)
  부처님께서 입멸하고 난 이후[에도 법륜승가가 파괴된 일이 없었으니], 이
  
  
  
16) 처음에는 유정들에게 선한 아세야(阿世耶,意樂)만이 있었을 뿐이기 때문이며, 마지막에는 성교가 증광하여 훌륭히 안주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렇게 하여 승가가 화합하고 있어야 비로소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들기 때문이다.
17) 부스럼[, arbuda]이란 정계(正戒)·정견(正見)에 대한 사계(邪戒)·사견(邪見)의 과실이나 허물(dosa)를 말하는 것으로, 사계란 앞서 언급한 제바달다의 5법을 진정한 도라고 주장하는 것이며, 사견이란 이러한 5법을 믿고 8정도를 부정하는 것이다.
18) '지(선정)'의 제일은 목건련이고, '관(지혜)'의 제일은 사리불. 제바달다의 경우에서 보듯이 승가에 이설이 생겨 분열의 조짐이 보이면 이들이 설득하여 다시 화합하게 하였다. 따라서 제일의 쌍벽을 이루는 두 제자가 나타나기 전에 승가가 파괴되었다면 화합시키기가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에 자연히 승가의 파괴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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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에는 진실로 부처님에 대적할 만한 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9)
  또한 결계(結界)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도 승가가 파괴된 일이 없었으니], 하나의 결계 안에서 승가가 두 부류로 나누어진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여섯 시기에는 법륜이 파괴된 일이 없었다. 그런데 법륜승가의 파괴가 모든 부처님에게 다 있었던 것은 아니니, 반드시 숙업에 의해서만 이 같은 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20)
  이제 바야흐로 방론(傍論)을 마치고 마땅히 역죄(逆罪)의 인연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은혜와 공덕의 밭을 져버리고 파괴하였기 때문으로
  모습[形]을 바꾸었더라도 역시 역죄를 성취하는데,
  어머니란 말하자면 그의 피가 자식의 원인이 된 이로서
  잘못하여 죽였을 경우 등에는 성취되는 일이 없거나, 혹은 있다.
  棄壞恩德田 轉形亦成逆
  母謂因彼血 誤等無或有
  
  그리고 때리려는 마음으로 불신(佛身)에서 피를 내거나
  
  
  
19) 불멸 이후 어떤 이가 '내가 바로 진실의 대사(大師)이며, 여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면, 대중들이 그를 힐책하여 '대사가 세상에 머물러 있을 때는 가만 있다가 지금 여래께서 열반에 들고 난 이후에야 그렇게 말하는 것인가'하고 상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승가의 파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
20) 숙세에 다른 승가를 파괴한 업이 있어야 이 같은 법륜승가의 파괴를 당하게 되니, 일찍이 석가모니께서도 현겁(賢劫)의 가섭파불(迦葉波佛) 시절에 다른 대중의 무리를 파괴하였기 때문에 승가의 파괴를 당하게 된 것이다.(『현종론』 권제23, 앞의 책, p. 94) 여기서 현겁이란 성·주·괴·공의 대겁(권제12, p.553 이하 참조) 중에서, 현재의 대겁을 말한다. 과거의 대겁은 장엄겁(莊嚴劫), 미래의 대겁은 성수겁(星宿劫). 현겁의 주겁에 구류손불(拘留孫佛)·가섭불(迦葉佛) …… 석가모니불 등 천불이 출현하는데, 석가모니불 시절의 제바달다에 의한 승가의 파괴는 그가 가섭불 시절에 행한 파승가의 과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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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에 무학이 된 자를 해친 경우에는 성취되는 일이 없다.
  打心出佛血 解後無學無
  
  논하여 말하겠다. 어떠한 이유에서 어머니 등을 살해하는 것은 무간업을 성취하고 그 밖의 다른 살생은 무간업을 성취하지 않는 것인가?
  은혜의 밭[恩田]을 져버리고, 공덕의 밭[德田]을 파괴하였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부모를 살해하는 것은 바로 은혜의 밭을 져버리는 일이다.
  어떻게 은혜가 있는 것인가?
  몸을 낳아 준 근본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들을 져버리는 것인가?
  말하자면 그들을 [죽임으로써]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공덕의 밭이란, 이를테면 그 밖의 아라한 등을 말하는 것이니, 그들은 온갖 뛰어난 공덕을 갖추고 있으며, 아울러 능히 [다른 이로 하여금 뛰어난 공덕을] 낳게 하기 때문이다. 즉 [아라한을 죽이는 것은] 그 같은 공덕의 소의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역죄를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부모의 모습이 바뀌었을 때 살해하더라도 역죄를 성취하게 되는 것인가?21)
  역시 역죄를 성취하니, 의지(依止)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로 인해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묻고 있다.
  "혹 남자의 명근(命根)을 떠나게 하였지만 그가 아버지도 아니고 아라한도 아닌 때에도 무간죄에 저촉되는 일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인가?
  [무간죄에 저촉되는 일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어머니의 모습이 [남자로] 바뀌었을 때이다.
  혹 여자의 명근을 떠나게 하였지만 그가 어머니도 아니고 아라한도 아닌 때에도 무간죄에 저촉되는 일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인가?
  
  
  
21) 부모의 모습이 바뀌었다[形轉]고 함은, 아버지의 남근이 여근으로 전환되고, 어머니의 여근이 남근으로 전환된 때를 말한다. 그 때는 이미 옛날의 부모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역죄를 성취하지 않을 것이 아닌가 하는 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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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간죄에 저촉되는 일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아버지의 모습이 [여자로] 바뀌었을 때이다."22)
  만약 어떤 여인이 갈랄람(羯剌藍, 잉태 후 첫 7일간의 상태)을 낙태하였을 때, 다른 여인이 그것을 수취(收取)하여 자신의 자궁[産門] 안에 두고 길러 아들을 낳았을 경우, 누구를 죽여야 어머니를 죽이는 역죄를 성취하게 되는 것인가?
  그녀(앞의 여인)의 피는 몸이 생겨나게 된 근본이기 때문에 [역죄를 성취하는 것은 앞의 여인에 대해서이다]. 그리고 지어진[所作] 모든 것은 마땅히 뒤의 어머니에게 [그 은혜를] 물어야 할 것으로, 능히 마시게 하고 능히 길러주고 능히 장성시켜 주었기 때문이다.23)
  만약 부모에 대해 살생의 가행을 일으켰지만 잘못하여 다른 사람을 죽였을 때에는 무간업을 성취하지 않으며, 부모가 아닌 이에 대해 살생의 가행을 일으키고 잘못하여 부모를 죽였을 경우에도 역시 역죄를 성취하지 않으니, 이를테면 아들이 몽둥이를 쥐고 어버지 몸에 기어오른 뱀을 후려치거나 어머니를 평상에 숨어있는 어떤 이(이를테면 도적)로 여기고서 죽이는 경우가 그러하다. 그러나 만약 동일한 가행으로 어머니와 그 밖의 다른 이를 죽였을 경우에는 두 가지(무간업과 살생) 무표가 생겨나지만, 이 때의 표업은 오로지 역죄일 뿐이니, 무간업의 세력이 강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자 묘음(妙音)은 설하기를, "역시 두 가지의 표업이 있으니, 표업은 바로 극미가 적집하여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고 하였다.24)
  만약 [어떤 이가] 아라한을 살해하였을 경우, 그에 대해 아라한이라는 생각이 없었을지라도 그의 의지(依止) 즉 소의신에 대해 결정코 살해하려는 마음을 품었다면 거기에는 간택의 차별[簡別]이 없었기 때문에 역시 역죄를 성
  
  
  
22) 이 같은 성 전환[轉形]과 부모를 살해하는 무간업의 관계에 대해서는 『대비바사론』 권제119(한글대장경122, p. 443)에서 논설되고 있다.
23) 자식을 잉태한 어머니의 피에 식(識)이 의탁하여 비로소 증장하였기 때문에 오로지 인취로서 결생(結生)하게 한 뛰어난 인연을 해치는 경우에만 어머니를 살해하는 역죄를 성취하게 되며, 오직 품고 길러 준 이를 해친 경우에는 역죄를 성취하지 않으며 다만 무간과 동류의 죄를 성취할 뿐이다.
24) 이에 대해 중현은 '표업에는 다수의 극미가 있어 역죄를 포함하기도 하고, 그 밖의 다른 죄를 포섭하기도 한다'고 하여 존자 묘음의 설을 지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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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하게 된다.25)
  만약 어떤 이가 아버지를 살해하였을 경우, 아버지가 바로 아라한이었을지라도 한 가지의 역죄를 획득하니, 의지(依止)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비유의 설과는 어떻게 통할 수 있을 것인가? 즉 부처님께서는 시흠지(始欠持)에게 고하기를, "그대는 이미 두 가지 역죄를 지었으니, 이른바 아버지를 살해한 것과 아라한을 살해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고 하였던 것이다.26)
  그것은 한 가지의 역죄가 두 가지 인연으로 말미암아 성취된다는 사실을 나태내기 위해, 혹은 두 갈래로써 그의 죄를 꾸짖어 책망하려고 한 것일 뿐이다.
  만약 부처님의 소의신[佛所]에 악심으로써 피가 나게 하였다면, 그 같은 이는 모두 무간죄를 획득하게 되는 것인가?
  요컨대 반드시 죽이려는 마음[殺心]으로써 피가 나게 하여야 비로소 역죄를 성취되는 것으로, 때리려는 마음으로써 피가 나게 하였다면 무간죄는 성취되지 않는다.27)
  만약 살생의 가행을 일으키는 단계에서 그는 아직 아라한이 아니었지만, 장차 죽으려 할 때 바야흐로 아라한과를 획득하였다면, 능히 그를 살해한 자는 역죄를 성취하게 되는 것인가?
  역죄를 성취하는 일이 없으니, 무학의 소의신에 대해 살생의 가행을 일으킨 일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무간업을 짓는 가행을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염오를 떠나거나
  
  
  
25) 그가 아라한임을 알지 못하고 죽였을지라도 '상대방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죽였다면, 그러한 결의 중에 '아라한이면 죽이지 않겠다'는 마음이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역시 역죄를 성취하게 된다는 뜻.
26) 이는 '아라한인 아버지를 죽였을 경우, 경에서 설하고 있듯이 두 가지 역죄를 지은 것인데, 어떻게 한 가지 역죄를 성취한다고 하는가'하는 난문이다. 아버지인 아라한을 죽인 시흠지( ikha in, 이후 頂髻王이 됨)의 이야기는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 권제46(대정장23, p. 878)에 나온다. 『대비바사론』 권제119(한글대장경122, p. 443)에서는 시등지(始騫持).
27) 즉 결정코 복전(福田)을 파괴하려는 마음은 품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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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자의 과위를 획득하는 일은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28)
  게송으로 말하겠다.
  
  역죄를 짓는 것이 결정된 가행에 의해서는
  염오를 떠나 성자의 과위를 획득하는 일이 없다.
  造逆定加行 無離染得果
  
  논하여 말하겠다. 만약 무간업의 가행을 반드시 결정적으로 성취한 자라면 그 중간에, 다시 말해 무간의 업도를 성취하기 전에 염오를 떠나 성자의 과위를 획득하는 일은 결코 없다. 그러나 그 밖의 다른 악업도의 가행을 성취하였으면서 중간에 만약 성도가 낳아졌다면 근본업도는 일어나지 않으니, [바뀌어 획득된] 의지(依止) 즉 소의신의 상속이 결정코 그것(즉 악업도)과 다르기 때문이다.29)
  온갖 악행의 무간업 중에서 어떠한 죄가 가장 무거우며, 온갖 묘행의 세간 선업 중에서 어떠한 업이 가장 큰 과보를 초래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승가를 파괴하는 허광어가
  죄 중에서 가장 큰 죄이며
  제일유(第一有)를 초래하는 사업(思業)이
  세간의 선업 중에서 가장 큰 과보를 낳는다.
  破僧虛誑語 於罪中最大
  感第一有思 世善中大果
  
  
  
28) 유부에 의하면 일단 무간업의 가행을 일으켰을 때에는 필연적으로 그것의 근본업도를 성취하게 되며, 그 중간에 염오를 떠나 성자의 과위를 획득하여 가행업을 영원히 소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29) 중현에 의하면 가행에는 근본업도와 가까운[近] 가행과 먼[遠] 가행 두 가지가 있는데, 근본업도가 바뀔 수 없는 것은 가까운 가행이며, 먼 가행은 바뀔 수가 있다.(『현종론』 권제23, 앞의 책, p.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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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하여 말하겠다. 비록 법과 비법에 대해 알고 있을지라도 승가를 파괴하기 위해 허광어를 일으키고 전도(顚倒)하여 현시하면 이것이 무간업 중에서 가장 큰 죄이니,30) 이로 말미암아 부처님의 법신(法身)을 훼손하였기 때문이며, 세간의 생천(生天)과 해탈로의 도를 장애하였기 때문이다. 즉 승가가 이미 파괴되어 아직 화합하지 않았다면 일체 세간의 입성(入聖)과 득과(得果)와 이염(離染)과 누진(漏盡)은 모두 다 차단되고, 선정을 익히거나 경전을 독송하고 올바로 사유하는 등의 업이 종식되며, 대천세계에 법륜이 구르지 않아 천(天)·인(人)·용(龍) 등의 신심(身心)이 요란해지기 때문에 무간지옥에서의 일 겁의 이숙을 초래하게 된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승가를 파괴하는 죄를 가장 큰 죄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밖의 무간죄 중에서는 그 순서대로 다섯 번째와 세 번째와 첫 번째가 그러하니, 뒤의 것일수록 점차 그 죄가 가벼우며, 두 번째 무간죄가 가장 가벼우니, 은혜 등이 적기 때문이다.31)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부처는 세 가지 벌업(罰業) 중에서 의벌(意罰)을 가장 큰 죄라고 설하였으며, 또한 죄 중에서는 사견이 가장 큰 죄라고 설하였던 것인가?32)
  5무간업에 근거하여서는 승가를 파괴하는 죄가 가장 무겁다고 설하였으며, 3벌업에 근거하여서는 의벌의 죄가 가장 크다고 설하였으며, 5벽견(僻見)에 근거하여서는 사견이 가장 무겁다고 설하신 것이다. 혹은 큰 과보를 초래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많은 유정을 해친다고 하는 사실에 근거하여, 모든 선근을 끊는다고 하는 사실에 근거하여 이와 같이 무겁다고 설한 것이다.33)
  
  
30) 이는 예컨대 제바달다가 법에 대해 법이라 생각하며, 비법에 대해 비법이라 생각하며, 대사(大師)에 대해 대사라고 생각하며, 자기 자신에 대해 일체지자(一切智者)가 아니라고 생각함에도 교단을 파괴하기 위해 깊고도 견고한 악한 아세야로써 이러한 생각을 감추고서 고의로 허광어를 발하였던 사실을 말한다.
31) 다섯 번째는 부처의 몸에서 피를 내는 것, 세 번째는 아라한을 살해하는 것, 첫 번째는 어머니를 죽이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아버지를 죽이는 것이다.
32) 만약 파승죄(破僧罪)가 가장 큰 죄라고 한다면 어째서 부처는 신·구·의의 세 벌 중 의벌이 가장 무겁다고 하였으며, 유신견·변집견 등의 5견 중에서 사견이 가장 무거운 죄라고 설한 것인가 하는 난문.
33) 앞의 답이 법문의 상위에 따른 해석이라면, 이는 결과의 상위에 따른 해석이다. 즉 승가를 파괴하는 것은 무간지옥이라는 최대의 과보를 초래한다는 점에서, 의벌은 많은 유정을 해친다고 하는 점에서, 사견은 선근을 끊는다고 하는 점에서 각기 가장 중죄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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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세간의 선업 중 가장 큰 과보를 낳는 것은 제일유(第一有, 비상비비상처를 말함)의 이숙과를 초래하는 사업(思業)이니, 이것은 8만 대겁(大劫)의 지극한 적정(極靜)의 이숙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이 설한 것은 이숙과에 근거하였기 때문이고, 만약 이계과에 근거할 경우 금강유정(金剛喩定,제일유의 번뇌를 끊는 선정)과 상응하는 사업이 가장 큰 과보를 능히 획득하는 것이니, 모든 결(結,번뇌의 다른 이름)이 영원히 끊어지는 것은 바로 이것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같은 세간과 출세간의 차별을 간택하기 위해 [본송에서] '세간의 선업'이라는 말을 설하게 된 것이다.
  
  오로지 무간죄에 의해서만 결정코 지옥에 태어나게 되는 것인가?
  무간죄와 동류(同類)인 업에 의해서도 역시 결정코 그곳에 태어나게 된다.
  그러나 유여사는 설하기를, "무간에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고 하였다.34)
  무간죄와 동류인 업은 어떠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어머니인 무학니(尼)를 더럽히는 것과
  주정(住定)의 보살과
  유학의 성자를 살해하는 것과
  승가화합의 인연을 침탈하는 것과
  솔도파(窣堵婆)를 파괴하는 것
  이것이 바로 무간죄와 동류인 업이다.
  汚母無學尼 殺住定菩薩
  及有學聖者 奪僧和合緣
  破壞窣堵婆 是無間同類
  
  
  
  
34) 무간죄와 동류인 업도 역시 지옥에 태어나지만, 동류업 중에는 순후차수업이나 부정수업도 있기 때문에 반드시 무간, 즉 바로 다음 생에 태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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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하여 말하겠다. 이와 같은 다섯 종류의 업은 그 순서대로 바로 5무간업과 동류의 업이다. 이를테면 어떤 이가 어머니인 아라한니(尼)에 대해 비범행과 같은 지극히 더럽고도 욕된 업을 행하거나, 혹은 주정(住定)의 보살을 살해하거나,35) 혹은 유학의 성자를 살해하거나, 혹은 승가화합의 인연을 침탈하거나,36) 혹은 솔도파(窣堵波, stupa, 탑)를 파괴하는 경우, 이것은 바로 5역죄와 동류의 업이다.37)
  그런데 이숙업은 세 시기에 있어서는 지극한 장애가 되기도 한다.
  세 시기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장차 인(忍)과 불환과와 무학을
  획득하려고 할 때의 업은 장애가 된다.
  將忍不還得 無學業爲障
  
  논하여 말하겠다. 만약 정(頂)의 단계로부터 장차 인(忍)을 획득하려고 할 때 악취를 초래하는 업은 모두 지극한 장애가 되니, '인'은 그 같은 이숙지(地)를 초월하기 때문으로,38) 마치 어떤 사람이 장차 본래부터 머물던 나라를 떠나고자 할 때 일체의 빚쟁이들이 모두 몰려와 떠나는 것을 지극히 장애하는 것과 같다.
  또한 만약 어떤 이가 장차 불환과를 획득하려고 할 때 욕계에 계속(繫屬)되는 업은 모두 지극한 장애가 되는데, 여기서는 순현법수업(順現法受業)은 제외된다.39)
  
  
35) 주정의 보살이란 32묘상이 예정된 보살을 말한다.(후술)
36) 승가화합의 인연이란, 가람이나 그곳에서 사용되는 자구(資具) 등을 말하는 것으로, 그것을 빼앗을 경우 승가는 결집력을 상실하여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37) 순서대로 어머니, 아버지, 아라한을 살해하고, 승가를 파괴하고, 악심으로써 부처님 몸에 피를 내는 것과 동류의 업이다.
38) 4선근에서 세 번째 단계인 '인(忍)'을 획득하면 더 이상 악취에 떨어지는 일이 없기 때문에(본론 권제23, p.1050 참조), '정'으로부터 '인'을 획득하고자 할 때에는 악취를 초래하는 이숙업이 그것을 지극히 장애하는 것이다.
39) 순현법수업은 현세에 이숙하여 미래세를 계박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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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어떤 이가 장차 무학과를 획득하려고 할 때 색계·무색계의 업은 모두 지극한 장애가 되는데, 역시 순현법수업은 제외된다. 그리고 이러한 뒤의 두 가지 단계에 대한 비유는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40)
  앞에서 언급한 주정(住定)의 보살은 어떠한 단계에서 '주정'이라고 하는 명칭을 획득하게 되는 것인가? 또한 그의 무엇을 설하여 '결정적인 것[定]'이라고 한 것인가?41)
  게송으로 말하겠다.
  
  묘상(妙相)의 업을 닦으면서부터
  보살은 '결정적인 이'라는 명칭을 획득하니
  선취(善趣)의 고귀한 집에, 감관을 갖추고
  남자로 태어나며, 기억하고, 견고하기 때문이다.
  從修妙相業 菩薩得定名
  生善趣貴家 具男念堅故
  
  논하여 말하겠다. 미묘한 서른두 가지 대장부(大丈夫)의 상(相)이라는 이숙과를 능히 초래할 만한 업을 닦으면서부터 바야흐로 보살에 '주정'이라는 명칭을 붙일 수 있는 것이니, 이 때로부터 성불할 때까지 항상 선취(善趣)와 고귀한 집[貴家] 등에 태어나기 때문이다.
  즉 '선취에 태어난다'고 함은 이를테면 인취와 천취에 태어나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취(趣)는 참으로 미묘하고 애호할 한 곳이기 때문에 선취라는 명칭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40) 즉 불환과와 무학과를 획득하면 더 이상 욕계와 색계·무색계에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그곳의 업이 장애가 되는 것으로, 그곳의 빚쟁이가 그곳을 떠나는 것을 장애하는 것과 같다.
41) 이하 5송에 걸쳐 묘상(妙相), 즉 32상을 초래할 업을 성취하는 보살(菩薩)에 대해 논설하는데, 먼저 주정(住定)의 상태를 밝히고, 계속하여 그가 닦은 업과 제불(諸佛)에 대한 공양과 6바라밀의 실천에 대해 논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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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선취 중에서도 항상 고귀한 집에 태어나니, 이를테면 바라문이나 혹은 찰제리(刹帝利), 대단히 부유한 장자(長者), 대 사라가(娑羅家)와 같은 가문을 말한다.42)
  고귀한 집안 중에 태어나더라도 감관[根]을 갖추고 태어나는 이도 있고, 그것을 결여하고서 태어나는 이도 있다. 그렇지만 그 같은 보살은 항상 수승한 감관을 갖추고, 항상 남자의 몸을 받아 태어난다. 그러니 여자의 몸으로도 태어나지 않는데 하물며 선체(扇) 등의 몸을 받는 일이 있을 것인가?
  또한 태어날 적마다 항상 숙명을 기억하며, 그 때마다 짓게되는 선한 일에서 항상 물러나는 일[退屈]이 없다. 이를테면 유정을 이익되게 하고 즐겁게 함에 있어 온갖 괴로움이 몸을 핍박할지라도 그 모두를 능히 참으며, 다른 이로부터 갖가지 악행이 가해져 그것(유정을 이익 되게 하고 즐겁게 하는 일)을 어기고 거스르려는 마음이 있을지라도 그 같은 보살의 마음에는 싫어하거나 지치는 일이 없으니, 이를테면 세간에서 이루 값어치를 따질 수 없는 '무가(無價)의 타사(馱娑)가 있다'는 말이 전하는데, 이 말은 바로 그 같은 보살을 두고 한 말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43)
  그 대사(大士)는 비록 수승하고 원만한 일체의 공덕을 이미 성취하였을지라도 오랫동안 무연(無緣)의 대비(大悲)를 익혔기 때문에, 임의대로 항시 다른 유정에 계속(繫屬)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체의 유정류에 대해 널리 교만함이 없는 마음으로써 모두를 섭수(攝受)하여 자기와 같다고 여긴다. 혹은 항상 자기를 그들의 노복과 같다고 관(觀)하기 때문에 일체의 어려운 일에 있어서 그 모두에 대해 능히 참고 견디며, 아울러 일체의 수고롭고 절박한 일에 있어서도 그 모두에 대해 능히 짐을 떠맡는 것이다.
  
  [보살은] 묘상(妙相)의 업을 닦았다고 하였는데, 그 상은 어떠한가?
  
  
  
42) 대 사라가(maha salakula)란 대 세력가인 명문을 말함. 원문에서는 대 바라가(婆羅家)로 되어 있으나, 이는 사라를 잘못 쓴 것임. 진제 역본의 『구사석론』 (권제13)에서는 '마하사라가(摩訶娑羅家).'
43) '타사(dasa)'란 종 또는 노복의 뜻으로, 급료를 주지 않고도 부릴 수 있는 노복을 '무가의 타사'라고 한다. 즉 보살은 일체 유정을 위해 기꺼이 무가의 타사가 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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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송으로 말하겠다.
  
  섬부주에서, 남자가 부처와 대면하여 짓는데
  부처님에 대한 염원[思]은 사소성(思所成)이다.
  그(3무수겁) 이외 다시 백 겁 동안 닦으니
  [묘상은] 각기 백 가지 복으로 장엄되어 있다.
  贍部男對佛 佛思思所成
  餘百劫方修 各百福嚴飾
  
  논하여 말하겠다. 보살은 요컨대 섬부주 중에 있어야 비로소 능히 묘상을 인기하는 업을 짓고 닦을 수 있으니, 이 주는 각혜(覺慧)가 가장 밝고 날카롭기 때문이다.
  또한 보살은 오로지 남자로서 여자 등의 몸은 아니니, 그 때는 이미 여자 등의 단계를 초월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묘상의 업은] 오로지 현재의 부처님과 대면하여 지으며,44) 부처님을 대상으로 하여 일으킨 사업(思業)으로, 이는 바로 사소성(思所成)이지 문소성(聞所成)이나 수소성(修所成)의 종류는 아니다.45)
  또한 [묘상의 업은] 오로지 [3무수겁(無數劫)] 이외 다른 백 겁 동안 짓고
  
  
  
44) 보살은 항상 현전의 부처에 대하여 그 같은 묘상을 획득하려고 수행하기 때문에 부처가 출세할 때에만 묘상의 업을 일으킨다. 즉 부처님의 단정하고 엄숙하며 여러 가지 기특한 불공(不共)의 색신 상호(相好)를 보고서 그 같은 종류의 상호를 초래하려는 염원[思]을 인기하게 되는 것으로, 여래에 대면하지 않고서는 그 같은 염원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45) 보살의 32묘상의 업은 현전하는 부처를 대상으로 하여 일어난 뛰어난 염원(思願)에 의한 것으로, 다른 경계를 대상으로 삼아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염원은 산심(散心)에서, 사유에 의해, 가행을 통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사소성(思所成)이다. 즉 그 같은 묘상의 업은 오로지 3무수겁(無數劫) 동안 보시 등의 바라밀다(波羅蜜多)를 수행하여 원만하게 될 때 비로소 소의신 중에 획득되는 것으로, 선정의 세계[定界]에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초래되는 이숙과(즉 32상)는 여기(思, 즉 염원)에 계속(繫屬)되기 때문에 수소성(修所成)이 아니며, 그것은 이열(羸劣)하기 때문에 문소성(聞所成)도 아니며, 가행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생득(生得), 즉 태어나면서 획득되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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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닦아야 하는 것으로, 그 이상은 아니다.
  그런데 모든 부처님은 인위(因位,수행의 시기) 중에서의 법(3무수겁 이외 백 겁 동안의 수행)은 마땅히 이와 같지만, 오로지 박가범(薄伽梵) 석가모니(釋迦牟尼)만은 정진이 치연(熾然)하여 9겁을 뛰어넘어 91겁에 묘상의 업을 성취하였다. 그래서 여래는 취락의 주인(즉 촌장)에게 고하기를, "내가 91겁 이래로 기억하건대 나에게 먹을 것을 보시한 어떠한 집도 조그마한 손상이 생겨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며 오로지 크나큰 이익을 성취하였을 뿐이니, 이 때로부터 자성(自性)으로 항상 숙생(宿生)을 기억한다"고 하였다.46) 그렇기 때문에 다만 91겁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숙구사(宿舊師)는 설하기를, "보살은 첫 무수겁(즉 아승기겁)을 마치면서부터 네 가지 과실을 떠나고 두 가지 공덕을 획득한다"고 하였다.47)
  앞에서 분별한 바와 같이 각각의 묘상은 백복(百福)으로 장엄되어 있다.48)
  얼마 정도를 일컬어 일복의 양이라고 한 것인가?
  어떤 이는 설하기를, "부처에 가까이 근접한 보살[近佛菩薩]을 제외한 그 밖의 일체의 유정이 닦은 부락(富樂)의 과보를 초래하는 업, 이것이 바로 일
  
  
  
46) 『잡아함경』 권제32 제914경(대정장2, p. 230중). 여기서는 니간타 교도인 도사씨촌장이 부처님의 걸식을 탓하자 지난 91겁 동안 어떠한 사람도 보시함으로써 망한 사람을 보지 못했음을 설하고 있다.
47) 여기서 '숙구사(옛날 논사)'는 보광에 의하면 경부의 숙구사. 즉 경부구사(舊師)는 '보살은 첫 아승기겁을 거치면 바로 악취·빈가(貧家)·결지(缺支,불구)·여자의 몸 등에서 벗어나고 숙명념(宿命念)과 불퇴굴(不退屈)의 공덕을 획득한다'고 하였는데, 이 같은 주장의 이론적 근거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제2 아승기겁부터 욕상(想欲)·에상(恚想)·해상(害想)을 일으키지 않아 성자이나 유정의 요익(饒益)을 위해 원하기만 하면 악취에 태어난다'(『이부종륜론술기』)고 한 대중부의 보살관만큼은 진보적이지 않지만, 첫 아승기겁을 지나고 바로 6종의 묘과(妙果)을 획득한다고 함으로써 유부보다는 한층 보살의 위덕을 칭탄하고 있는 것이다.
48) 여기서 '백복'이라고 함은 백 가지 사업(思業)으로, 묘상의 업을 짓기 전에 신기(身器)를 청정히 하는 쉰 가지의 사업을 짓고 난 다음 한 가지 상(相)을 인기하는 업을 일으키고, 그 후에 다시 쉰 가지의 선한 사업을 일으켜 인업(引業)을 장엄함으로서 그것을 원만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쉰 가지 사업이란 10업도 각각에 다섯 가지 사업을 일으키는 것으로, 이를테면 첫 번째 업도인 살생을 떠나려는 사업[離殺思]과 그것을 가르치고 훈도하려는 사업[勸導思]과 그것을 찬미하려는 사업[讚美思]과 함께 기뻐하려는 사업[隨喜思]과 회향하려는 사업[廻向思]이 바로 그것이다.(『대비바사론』 권제177, 한글대장경125, p. 41 ; 『현종론』 권제24, 앞의 책, p. 104)
[824 / 1397] 쪽
  복의 양이다"고 하였다.
  또 어떤 이는 설하기를, "세계가 장차 이루어지려고 할 때의 일체의 유정이 삼천대천의 세계[大千土]를 초래하는 업의 증상력을 일복의 양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또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것의 양은 오로지 부처님만이 아실 뿐이다"고 하였다.
  
  지금 우리의 대사(大師)께서 옛날 보살이었을 때 3무수겁 동안 얼마나 되는 부처님들께 공양하였던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3무수겁 동안에
  각기 7만의 부처님께 공양하였으며
  또한 순서대로
  5천·6천·7천의 부처님께 공양하였다.49)
  於三無數劫 各供養七萬
  又如此供養 五六七千佛
  
  논하여 말하겠다. 최초의 무수겁 중에는 7만 5천의 부처님들께 공양하였고, 다음의 무수겁 중에서는 7만 6천의 부처님들께 공양하였으며, 최후의 무수겁 중에서는 7만 7천의 부처님들께 공양하였다.
  3무수겁의 각각의 겁이 다 찼을 때와 초발심하였을 때, 각기 어떠한 부처님을 만났던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3무수겁이 다 찼을 때에는
  반대의 순서로 승관불(勝觀佛)·
  
  
  
49) 본송은 현장 역본의 『구사론』과 일련의 현장 역본 이를테면 『현종론』과 『순정리론』에서만 전할 뿐, 범본이나 진제의 『구사석론』에는 전하고 있지 않다.
 
[825 / 1397] 쪽
  연등불(燃燈佛)·보계불(寶髻佛)을 만났으며,
  초발심시에는 석가모니불을 만나셨다.
  三無數劫滿 逆次逢勝觀
  燃燈寶髻佛 初釋迦牟尼
  
  논하여 말하겠다. 여기서 '반대의 순서[逆次]'란 뒤에서부터 앞으로 향한다는 말이니, 이를테면 세 번째 무수겁이 다 찼을 때에 만나 섬긴 부처님의 명칭은 승관(勝觀)이고, 두 번째 무수겁이 다 찼을 때에 만나 섬긴 부처님의 명칭은 연등(燃燈)이며, 첫 번째 무수겁이 다 찼을 때에 만나 섬긴 부처님의 명칭은 보계(寶髻)이다.50)
  그리고 최초로 발심할 때에는 석가모니(釋迦牟尼)를 만나셨다. 즉 우리 세존께서는 그 옛날 보살이었을 적에 석가모니라고 이름하는 한 부처님을 만나셨으니, 마침내 그 앞에서 '원하건대 나는 마땅히 부처가 되어 지금의 세존과 똑같이 되리라'고 하는 크나큰 서원을 발원하였다. 그 부처님도 역시 말겁(末劫, 즉 괴겁)에 세간에 출현하시었으며, 멸도(滅度) 후에 정법이 역시 천 년을 머물렀다. 그래서 지금의 여래께서는 그 부처님과 하나하나의 행적이 동일한 것이다.
  
  우리의 석가보살(釋迦菩薩)은 어떠한 상태에서, 어떠한 바라밀다(波羅蜜多)를 닦고 익히어 원만하게 하였던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다만 자비로써 널리 보시하였고
  몸이 잘려도 분노함이 없었으며
  저사불(底沙佛)을 칭탄하였고
  그런 다음 무상의 보리를 증득하였다.
  
  
  
50) 승관불(Vipasyin-buddha)의 구역어는 비바시불(毘婆尸佛)이고, 연등불(D pa kara-buddha)은 역시 연등불이며, 보계불(Latnasikhin-buddha)은 보광불(寶光佛)이다.
[826 / 1397] 쪽
  但由悲普施 被折身無忿
  讚歎底沙佛 次無上菩提
  
  6바라밀다는
  이와 같은 네 단계에서
  한 가지와 두 가지를, 또한 한 가지와 두 가지를
  순서대로 닦아 원만하게 하였다.
  六波羅蜜多 於如是四位
  一二又一二 如次修圓滿
  
  논하여 말하겠다. 만약 어느 때 보살이 일체의 유정에 대해 능히 일체의 [사물] 내지 눈과 골수에 이르기까지 널리 보시하였다면, 그렇게 행한 보시와 희사는 다만 비심(悲心)에 의한 것일 뿐 자신의 수승한 생의 차별을 희구하여 행한 것이 아니니,51) 이렇게 함으로써 보시바라밀다를 닦고 익히어 원만하게 하였던 것이다.
  혹은 어느 때 보살은 신체와 사지가 잘려 나갔지만, 비록 그 때는 아직 욕탐을 떠나지 않았을지라도 마음으로는 어떠한 분노도 없었으니, 이렇게 함으로써 지계(持戒)바라밀다와 인욕(忍辱)바라밀다를 닦고 익히어 원만하게 하였던 것이다.
  혹은 어느 때 보살은 용맹정진하다가 우연히 저사여래(底沙如來)께서 보감(寶龕)에 앉아 화계정(火界定)에 들어 찬란히 빛나기가 평소와는 다른 것을 보고서 그 자리에 선 채로 한마음으로 우러러보며 한 발을 내리는 것도 잊고서 7일 낮밤을 지나도록 어떠한 나태함도 없이 청정한 마음에서 미묘한 가타(伽陀)로써 그 부처님을 다음과 같이 찬탄하였다.
  
  
  
  
51) 석가보살이 대비심에 의해 일체의 유정에 대해 자신의 눈이나 골수를 포함한 일체의 사물을 보시하였지만 그러한 행위의 과보로서 인(人)·천(天)에 태어나는 뛰어난 생의 차별을 희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로소 보시바라밀다를 닦고 익히어 원만하게 할 수 있었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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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장부 우왕(牛王)이신 대사문(즉 저사여래)께 대적할 이
  하늘에도, 땅에도, 이 세계에도, 다문실(多聞室, 즉 毘沙門의 天宮)에도
  서궁(逝宮, 범천궁)에도, 그 밖의 하늘의 처소에도, 시방의 세계에도 없으며,
  땅과 산과 숲을 두루 찾아보아도 그와 동등한 이 어디에도 없도다.
  
  이와 같이 찬탄하고 나서 바로 9겁을 뛰어 넘었으니, 이렇게 함으로써 정진바라밀다를 닦고 익히어 원만하게 하였던 것이다.52)
  혹은 어느 때 보살은 금강좌(金剛座)에 처하여 장차 위없이 높은 정등(正等)의 보리(菩提)에 오르려고 할 때 무상각(無上覺)을 증득하기 직전에 금강유정(金剛喩定)에 머물렀으니, 이렇게 함으로써 선정바라밀다와 지혜바라밀다를 닦고 익히어 원만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가야만 할 원만한 피안에 능히 이르렀기 때문에 이러한 여섯 가지를 일컬어 바라밀다(波羅蜜多, paramita, 到彼岸)라고 한 것이다.
  
  계경에서 설하기를, "세 가지의 복업사(福業事)가 있으니, 첫째로는 시류(施類) 복업사이며, 둘째로는 계류(戒類) 복업사이며, 셋째로는 수류(修類) 복업사이다"고 하였다.53) 여기서 무엇을 일컬어 복업사라고 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52) 지금의 세존께서 미륵보살과 함께 용맹정진할 때 저사(혹은 補砂, Tisya)여래를 7일간 찬탄한 결과 통상 100겁에 걸쳐 증득하는 무상도를 9겁 단축하여 91겁에 증득하였다고 본생담은 전한다.(『대비바사론』 권제177, 한글대장경125, p. 43이하 참조)
53) 이하 4송에 걸쳐 6바라밀의 방론으로, 보시·지계·선정의 세 가지에 대해 논의한다. 여기서 계경이란 보시·조복(調伏)·수도(修道)를 설하는 『잡아함경』 권제10 제264경(대정장2, p. 68상). 또한 『중아함경』 권제11 「우분유경(牛糞喩經)」(대정장1, p. 496하)과, 같은 경 권제34 「복경(福經)」(동, p. 646중)에서도 보시·조어(調御)·수호(守護)의 세 가지 복업사를, 『장아함경』 권제8 『중집경』 (대정장1, p. 50상)에서는 시업(施業)·평등업(平等業)·사유업(思惟業)으로 설하고 있다. 참고로 여기서 '유(類)'란 체(體, svabhava)의 뜻으로, 시류복업사란 바로 보시를 본질로 하는 복업사를 말한다.(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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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시·지계(持戒)·수정(修定)의 세 종류는
  각기 그것이 상응하는 바에 따라
  복(福)·업(業)·사(事)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으니
  그 차별은 업도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施戒修三類 各隨其所應
  受福業事名 差別如業道.
  
  논하여 말하겠다. 세 종류는 모두 다 복(福)이며, 혹은 업(業)이며, 혹은 사(事)로서,54) 그것은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업도(業道)의 경우에서와 같이 설해야 할 것이다. 즉 10업도를 분별하면서, '업'이면서 역시 '도'인 경우가 있으며, '도'이면서 '업'이 아닌 경우가 있다고 설한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복'이면서 역시 '업'이고 '사'인 경우가 있으며, '복'과 '업'이면서 '사'가 아닌 경우가 있으며, '복'과 '사'이면서 '업'이 아닌 경우가 있으며, 오로지 바로 '복'이면서 '업'도 아니고 '사'도 아닌 경우가 있는 것이다.
  바야흐로 시류(施類) 중에 신업과 어업의 두 가지는 복·업·사의 세 가지 뜻의 명칭을 모두 갖추고 있지만, 그것(신업·어업)과 등기하는 사업(思業)은 오로지 '복'과 '업'이라고만 이름할 뿐이며, 사업과 구유하는 법은 오로지 '복'이라는 명칭만을 획득할 뿐이다.55)
  계류(戒類)는 이미 오로지 신업·어업만을 자성으로 하는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것들은 복·업·사라는 명칭을 모두 획득할 수 있다.
  수류(修類) 중에서 자(慈)는 오로지 '복'과 '사'라고만 이름하니, 그것은 바로 업의 근거[事]이기 때문이다.56) 즉 '자'와 상응하는 사(思)는 '자'를 근거
  
  
54) 보시·지계·수정은 선이기 때문에 '복(pu ya)'이라고 이름한 것이며, 신업·어업과 사업(思業)으로써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업(kriya)'이며, 사(思) 즉 의지의 소의처이기 때문에 '사(vastu)'라고 하는 것이다. 즉 보시 등은 신업·어업의 사(思,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보시하려고 하는 의지작용)를 등기하고, 소의문(所依門)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역시 '사'이다.(『현종론』 권제24, 앞의 책, p. 109)
55) 신업·어업과 등기하는 사업은 선이기 때문에,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복'이고 '업'이지만, 사(思)는 '사' 자신을 소의로 삼는 일이 없기 때문에 '사(事)'가 아니며, 사업과 구유하는 법, 예컨대 수(受) 등의 심소법이나 생(生) 등의 4상은 조작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역시 또한 '업'이 아니다.
56) 자(慈, maitr )는 4무량심의 하나로 무진(無瞋)을 본질로 하는 선이기 때문에 '복'이며, 또한 '자'와 상응하는 사(思)는 그것을 근거로 하여 조작되기 때문에 '사(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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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門]로 하여 조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와 구유하는 사(思)와 계(戒)는 오로지 '복'과 '업'이라고만 이름하며, 그 밖의 구유하는 법은 오로지 '복'이라고만 이름한다.
  혹은 복업이라는 명칭은 '복을 짓는다[作福]'는 뜻을 나타내니, 이를테면 복의 가행을 말하며, '사(事)'는 소의를 나타내니, 이를테면 보시·지계·수정은 바로 복업의 '사'인 것이다. 즉 그 같은 세 가지를 성취하기 위해 복의 가행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설하기를, "오로지 사(思)만이 참된 복업이며, 복업의 사(事)란 이를테면 보시·지계·선정을 말하니, 이와 같은 세 가지를 근거로 삼아 복업이 일어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57)
  어떠한 법을 일컬어 보시라고 이름하는 것이며, 보시는 어떠한 과보를 초래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것에 의해 희사되는 것을 보시라고 이름하니
  이를테면 다른 이를 공양하고 이익되게 하는
  신업·어업과, 능히 이것을 낳는 것으로서
  이 같은 보시는 크나큰 부귀의 과보를 초래한다.
  由此捨名施 謂爲供爲益
  身語及能發 此招大富果
  
  논하여 말하겠다. 비록 희사되는 물건도 역시 '보시'라고 이름할 수 있을지라도 여기에서는 희사의 작구[具]를 보시라고 이름한다. 즉 이러한 작구에 의해 희사하는 일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으로, 희사의 유래가 되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보시의 본질인 것이다.58) 혹은 두려움이나 희구 탐욕 등으로
  
  
57) 여기서 어떤 이란 보광에 의하면 경부 중의 어떤 이의 설이다.
58) 보시란 주어진 물건과 주려고 하는 마음에 의해 성립하기 때문에 주어진 물건도 역시 보시라고 이름할 수 있지만, 참된 보시란 희사의 작구(作具)가 되는 무탐심[能發心]과 그러한 마음에 의해 낳아진 신업·어업이라는 뜻. (후술) 본송 제1구의 '이것'이란 바로 이 같은 작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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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미암아 역시 희사하는 일이 이루어질 수 있지만, 이러한 뜻으로 [보시를] 설한 것이 아니다.59) 따라서 이 같은 사실과 구별하기 위해 [본송에서] '다른 이를 공양하고 이익되게 하는 것'이라고 설한 것으로, 이를테면 다른 이에 대해 공양하고 이익되게 하기 위해 소유한 것을 희사하는 것, 이러한 작구[具, 즉 무탐심]를 보시라고 이름한다.
  여기서 '작구'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신업·어업과 아울러 그것을 능히 낳는 것[能發]이다.
  '능히 낳는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무탐(無貪)과 함께 작용하면서 능히 그 같은 신업·어업을 일으키는 취(聚,심·심소법의 취)를 말하니,60) 어떤 이가 게송으로 말한 바와 같다.
  만약 어떤 사람이 청정한 마음으로
  자신을 제쳐두고 보시를 행하였다면,
  이러한 찰나의 선한 5온에 대해
  모두 '보시'라고 하는 명칭을 설정하는 것이로다.
  
  또한 이와 같은 시류(施類)의 복업사는 능히 미래와 현재의 크나큰 재물과 부귀를 초래하니, 이것이 바로 보시의 과보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시류(施類)의 복이라고 말한 것은 보시를 본질[體]로 삼는다는 뜻을 나타내니, '엽류(葉類)의 그릇'이라 하고 '초류(草類)의 집'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61)
  
  
59) 승부욕 따위에서, 혹은 두려움이나 희구나 탐욕에서 보시하는 것은 진정한 보시가 아니며, 오로지 자발적 의사와 이에 따른 신업·어업이 진정한 보시라는 뜻.
60) 즉 신업·어업과 아울러 능히 그것을 일으키는 마음 및 그 마음과 함께 작용하는 심소법을 모두 보시의 본질이라고 하며, 그것이 바로 보시의 작구이다.
61) '시류의 복'에서 '류(類)'는 본질[體, svabhava]의 뜻이다. 따라서 '시류의 복'이란 '보시를 본질로 하는 복'이라는 뜻으로, 이는 마치 '연잎으로 만들어진 그릇'을 '엽류의 그릇' 즉 연잎을 본질로 하는 그릇이라 하고, '억새풀로 만들어진 집'을 '초류의 집' 즉 억새풀을 본질로 하는 집이라 하는 것과 같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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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아가 계류(戒類)와 수류(修類)라는 말에 대해서도 이에 준하여 해석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떤 이의 이익을 위하여 보시를 행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자신과 다른 이와 둘 모두를 이익되게 하기 위해
  또한 둘 모두를 위해서가 아니면서 보시를 행한다.
  爲益自他俱 不爲二行施
  
  논하여 말하겠다. 이 중에서62) 아직 욕탐을 떠나지 않은 모든 이와 이미 욕탐을 떠난 이생의 존재가 자신의 소유물을 갖고서 제다(制多, caitya, 塔廟를 말함)에 공양하고 보시하는 경우, 이러한 보시를 일컬어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 하고, 다른 이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하니, 이로 말미암아 스스로 이익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온갖 성자로서 이미 욕탐을 떠난 이가 온갖 유정에 대해 보시하였을 경우, 순현법수업을 제외한 이러한 보시를 일컬어 오로지 '다른 이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하니, 다른 이들이 이로 말미암아 요익을 획득하게 되기 때문이며,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하니, 그는 그 같은 [이숙]과의 경지를 초월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아직 욕탐을 떠나지 않은 모든 이와 이미 욕탐을 떠난 이생의 존재가 자신의 소유물을 갖고서 온갖 중생에게 보시하는 경우, 이러한 보시를 일컬어 '[자신과 다른 이] 둘 모두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62) 여기서 '이 중에'란 시주(施主) 즉 보시하는 자의 제 유형 중에서라는 뜻이다. 즉 보시하는 자 중에는 번뇌를 가진 자와 번뇌를 갖지 않은 자가 있으며, 전자에는 다시 아직 욕탐(욕계의 애탐)을 떠나지 않은 자와 이미 욕탐을 떠난 자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중에도 각기 성자와 이생이 있다.(『현종론』 권제24, 앞의 책, p.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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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만약 그러한 성자로서 이미 욕탐을 떠난 이가 제다에 대해 보시하였을 경우, 순현법수업을 제외한 이러한 보시를 일컬어 '둘 모두의 이익을 위하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즉 이것은 오로지 공경과 보은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미 보시는 크나큰 부를 초래한다는 사실에 대해 모두 밝혔다. 이제 다음으로 마땅히 보시의 과보가 다른 이유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시주와 시물과 복전(福田)이 다르기 때문이니
  그래서 보시의 과보에는 차별이 있는 것이다.
  由主財田異 故施果差別
  
  논하여 말하겠다. 보시에 차별이 있는 것은 세 가지 원인 때문이다. 즉 시주(施主)와 보시하는 재물 즉 시물(施物)과 복전(福田, 즉 시물을 받는 자)에 차별이 있기 때문으로, 보시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그 과보에도 차별이 있는 것이다.
  
  바야흐로 시주에 의한 차별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시주의 차이는 믿음 등에 의한 것이니
  공경하고 존중하는 따위의 보시를 행하면
  존중받고, 광대한 재물을 애락하며
  때에 맞는, 탈취되기 어려운 과보를 획득한다.
  主異由信等 行敬重等施
  得尊重廣愛 應時難奪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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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하여 말하겠다. 시주가 믿고[信], 계를 지니고[戒], 들은[聞] 등의 차별되는 공덕을 성취함으로 말미암아 시주에 차이가 있다고 하였다.63) 즉 시주의 차이로 말미암아 보시의 차별이 생겨나고, 보시의 차별로 말미암아 과보가 다르게 획득되는 것이다.
  예컨대 온갖 유정으로서 시주가 이와 같은 공덕을 갖추고서 능히 여법하게 공경하고 존중하여 보시하는 등의 네 가지의 보시를 행하면 순서대로 바로 존중받는 등의 네 가지 과보를 획득한다. 즉 만약 시주가 공경하고 존중하여 보시[敬重施]를 행하면 항상 다른 이로부터 공경받고 존중받는 과보를 바로 초래하게 된다. 만약 스스로의 손으로 보시[自手施]하면 능히 광대한 재물을 애락하며 수용하는 과보를 초감(招感)하여 획득하게 된다. 만약 때에 맞춰 보시[應時施]하면 때에 맞게 재물을 수용하는 과보를 초감 획득하게 되니, 필요한 때에 맞춰 시기를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다른 이의 기분을 손상시키지 않고 보시[無損施]를 행하면 바로 다른 어떤 이로부터 탈취되지 않으며 불 따위에 의해 괴멸되지도 않는 자재(資材)를 수용하는 과보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보시된 재물에 의한 차별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시물의 차이는 색 등에 의한 것으로
  미묘한 색[妙色]과 좋은 명예[好名]와
  대중들의 사랑과, 때에 따라 낙촉(樂觸)을 갖는
  
  
  
63) 시주가 인과를 믿고[信], 계를 지니고[戒], 교법을 들은[聞] 등의 공덕의 차별로 말미암아 시주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혹 어떤 시주는 인과에 대해 결정적인 믿음을 갖거나 의심을 품거나 경솔하게 욕망에 따르면서 보시하기도 한다. 혹 어떤 시주는 청정한 시라(尸羅)를 갖추고서, 혹은 조금 어기고서, 혹은 완전히 계를 갖지 않고서 보시하기도 한다. 혹 어떤 시주는 부처님의 교법을 많이 들어 구족하고서, 혹은 조금 듣고서, 혹은 아무것도 들은 일이 없으면서 보시하기도 한다. 즉 믿고 지니고 듣는 것은 소위 7성재(聖財 : 즉 信·戒·聞·慚·愧·捨·慧財로서, 중생이 지극히 빈궁한 것은 이를 획득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의 하나로서, 시주가 이를 갖추었는가, 갖추지 않았는가에 따라 보시의 공덕에도 차별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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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연한 몸의 과보를 획득한다.
  財異由色等 得妙色好名
  衆愛柔軟身 有隨時樂觸
  
  논하여 말하겠다. 보시된 재물이 색과 향과 맛과 감촉을 결여하였거나, 혹은 갖추고 있음에 따라 순서대로 미묘한 색 따위를 결여하기도 하고, 혹은 갖추기도 하는 과보를 획득하게 된다. 즉 보시된 재물에 색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바로 미묘한 색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며, 향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바로 좋은 명예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니, 마치 향의 분분함이 모든 곳에 두루 퍼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또한 맛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바로 대중들의 사랑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니, 미묘한 맛이 대중들로부터 사랑받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촉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유연한 몸과 아울러 여보(女寶) 등과 같은 때에 따라 낙수(樂受)를 낳는 촉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 같은 과보가 감소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원인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64)
  이와 같이 [보시되는 재물에] 색계·향 등을 갖추었는가에 따라 '시물의 차이'가 있다고 하였으니, 시물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보시 그 자체와 그 과보에 모두 차별이 있게 되는 것이다.
  
  보시를 받는 복전에 의한 차별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복전의 차이는 취(趣)와 괴로움과
  은혜와 덕(德)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田異由趣苦 恩德有差別
  
  
  
  
64) 즉 미묘한 색신을 결여하였다면 색이 결여된 재물을 시여하였기 때문이며, 대중들의 사랑이 결여되었다면 향이 결여된 재물을, 유연하지 못한 몸을 초래하였다면 감촉이 결여된 재물을 시여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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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하여 말하겠다. 보시를 받는 복전에게는 각기 취(趣, 즉 5취를 말함)와 괴로움과 은혜와 덕(德)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복전의 차이[田異]'가 있다고 말한 것으로, 복전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보시의 과보에 다름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취의 차별로 말미암아 [과보에 차별이 있다]'고 함은, 이를테면 "만약 방생에게 보시하면 백 배의 과보를 받고, 계를 범한 이에게 보시하면 천 배의 과보를 받는다"고 세존께서 설한 바와 같다.
  '괴로움의 차별로 말미암아 [과보에 차별이 있다]'고 함은, 이를테면 일곱 가지 유의(有依)의 복·업·사의 경우에서와 같은 것으로, 앞의 계경에서도 설하기를, "마땅히 나그네와 행려자와 병자와 간병인에게 원림(園林)과 일상의 먹거리[常食]를 보시해야 할 것이며, 아울러 춥거나 바람이 불거나 더울 때에 따라 옷과 약을 보시해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65) 또한 다시 설하기를, "청정한 믿음을 갖추고 있는 남자와 여인으로서 여기서 설한 일곱 가지 종류의 유의의 복업사를 성취하는 자라면, 그가 획득된 복덕은 감히 그 양을 취할 수도 없을 것이다"고 하였다.
  '은혜의 차별로 말미암아 [과보에 차별이 있다]'고 함은, 부모나 스승, 그리고 그 밖의 은혜 있는 자에게 보시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를테면 『본생경(本生經)』에서 곰이나 사슴 등 온갖 은혜 있는 종류에 대해 설한 바와 같다.66)
  
  
65) 유의, 즉 세간의 일곱 가지 복업사는 비구중에게 보시하는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13 주51)을 참조할 것. 그리고 원림이란 승가를 위한 건조물, 일상의 먹거리는 돈이나 장전(莊田) 등을 말한다. 즉 방사(房舍)가 없거나 와구 의복이 없는 이, 여행자나 병자, 간병인 등 그들의 괴로움에 따라 보시의 과보에는 각기 차별이 있는 것이다.
66) 곰의 인연은 이러하다 : 옛날 어떤 사람이 나무를 하러 산에 갔다가 눈을 만나 길을 잃고 추위와 굶주림에 죽게 되었는데, 곰보살이 그를 자신의 굴로 데리고 가 먹을 것을 주어 구해 주었다. 마침내 날이 개이고 길이 열려 하산하는 중에 사냥꾼을 만나 그 곰이 사는 곳을 일러 주고 고기를 나누어 갖자 망은의 악업보로 말미암아 바로 팔이 떨어지는 대환을 만나게 되었다.(『대비바사론』 권제114, 한글대장경122, p. 322) 사슴의 인연담은 이러하다. '뿔이 눈과 같이 희고 털이 아홉 가지 색으로 빛나는 사슴보살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주었는데, 마침 왕이 그 사슴을 잡기 위해 거처를 알려 주는 이에게 많은 상금을 준다고 하였다. 그러자 그 사람이 은혜를 잊고 알려 주자 바로 나병의 과보를 받게 되었다.'(『보살본연경』 권하 「녹품(鹿品)」대정장3, p. 66하) 이 본생담은 모두 순현법수업의 예증으로 인용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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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의 차별로 말미암아 [과보에 차별이 있다]'고 함은 "지계인(持戒人)에게 보시하면 억 배의 과보를 받게 될 것이다"고 계경에서 말한 따위와 같다.
  
  온갖 보시의 복 가운데 가장 수승한 것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해탈한 자가 해탈한 자에게 보시하는 것과
  보살의 보시와 여덟 번째의 보시가 가장 수승하다.
  脫於脫菩薩 第八施最勝
  
  논하여 말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 설하기를, "만약 염오를 떠난 이(즉 해탈한 자)가 염오를 떠난 이에 대해 온갖 자재를 보시하는 경우, 재시 가운데 이것이 가장 수승하다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모든 보살이 행한 혜시(惠施)로서 그것이 만약 모든 유정을 널리 이익되게 하고 즐겁게 하는 것이라면, 비록 해탈한 자가 해탈한 자에 대해 보시한 것과 같지는 않을지라도 보시의 복 중에 역시 가장 수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같은 보시를 제외한 여덟 가지 종류의 보시 중에서 여덟 번째 보시의 복도 역시 가장 수승한 것이라고 할 만하다.
  여덟 가지 보시란 무엇인가?
  첫째는 수지시(隨至施)이며, 둘째는 포외시(怖畏施)이며, 셋째는 보은시(報恩施)이며, 넷째는 구보시(求報施)이며, 다섯째는 습선시(習先施)이며, 여섯째는 희천시(希天施)이며, 일곱째는 요명시(要名施)이며, 여덟째는 마음을 장엄하기 위해, 마음을 자조(資助)하기 위해, 유가(瑜伽)를 자조하기 위해, 상의(上義) 즉 열반을 획득하기 위해 혜시(惠施)를 행하는 것이다.67)
  
  
67) '수지시'란 그 누구든 자기 근처에 이른 자에게 보시하는 것이며, '포외시'란 재물에 괴상(壞相)이 현전하여 망실될까 두려워하여, 혹은 재액을 종식시키기 위해 보시하는 것이며, '보은시'란 일찍이 보시받은 이에게 보답으로 보시하는 것이며, '구보시'란 보답을 기대하여 보시하는 것이며, '습선시'란 선조들이 행한 전통에 따라 보시하는 것이며, '희천시'란 하늘에 태어나기를 기대하여 보시하는 것이며, '요명시'란 명예를 추구하여 보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덟째 '마음을 장엄하기 위해서'란 신(信) 등의 7성재(聖財)를 인발하여 신통을 획득하기 위해, '마음을 자조하기 위해서'란 인색한 마음을 소멸하고 제거하기 위해, '유가를 자조하기 위해서'란 선정을 수습하기 위해, '상의(上義)를 획득하기 위해서'란 아라한과 혹은 열반을 획득하기 위해서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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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번째] 수지시에 대해 숙구사(宿舊師)는 말하기를, "[어떤 이가] 자기 근처에 이름에 따라 비로소 능히 시여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그리고 포외시란 이 같은 재물에 괴상(壞相)이 현전하는 것을 보고 차라리 보시하여 상실하지 않으려는 것이며, 습선시란 선인(先人)이나 조부, 가법(家法)에 따라 혜시(惠施)를 행하는 것이다. 그 밖의 보시에 대해서는 알기 쉽기 때문에 별도로 해석하지 않는다.
  
  계경에서 설하기를, "예류향(預流向)에게 보시하면 그 과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예류과(預流果)에 보시하면 그 과보의 양은 더욱더 증가한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하였다.68) 혹 성자가 아닌 이에게 보시하여도 그 과보가 역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경우가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부모와 병자와 법사와
  최후생의 보살은
  비록 성법을 증득한 자가 아닐지라도
  보시의 과보는 역시 무량이다.
  父母病法師 最後生菩薩
  設非證聖者 施果亦無量
  
  논하여 말하겠다. 이와 같은 다섯 종류는 비록 이생일지라도 그들에게 보시하면 역시 능히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과보를 초래한다. 그리고 최후의 존재로 머무는 이(보살)를 '최후생'이라고 이름하였다.
  
  
  
68) 『중아함경』 권제47 『구담미경(瞿曇彌經)』 (대정장1, p. 722중), 이 경에서는 여래·연각·4향4과·이욕선인·정진자와 정진하지 않는 자·축생에 대한 사사로운 보시[私施]에 대해 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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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사는 네 가지 복전 중에서 어떠한 복전에 포섭되는 것인가?69)
  바로 은혜의 복전[恩田]에 포섭된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법사 즉 설법사(說法師)는] 모든 세간의 대 선우(善友)가 되기 때문에, 무명에 눈먼 자에게 능히 혜안을 보시하기 때문에, 세간의 평안(법)과 위험(비법)을 알려 주기 때문에, 유정에게 무루법신을 낳게 하기 때문이다. 요점을 설하자면 좋은 설법사는 바야흐로 능히 부처님이 하시는 일을 행하기 때문에 그에 대해 보시를 행하는 경우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과보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업의 경중(輕重)을 알기 원한다면, 그와 같은 경중에는 간략히 말해 여섯 가지 원인에 의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 같은 여섯 가지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후기와 대상[田]과 근본과
  가행과 사(思)와 의요(意樂),
  이것에 상·하가 있기 때문에
  업에도 상·하 품이 성취되는 것이다.
  後起田根本 加行思意樂
  由此下上故 業成下上品
  
  논하여 말하겠다. '후기'란 이를테면 [근본업도를] 짓고 나서 그에 따라 짓는 업을 말한다. '대상[田]'이란 이를테면 그것에 대해서 손해를 끼치거나 이익을 끼치게 되는 대상을 말한다. '근본'이란 근본업도를 말하며, '가행'이란 그것(근본)을 인기하는 신업·어업을 말한다. '사(思)'란 이를테면 그것으로
  
  
  
69) 앞에서 복전에는 취(趣)·괴로움·은혜·덕의 네 가지가 있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부모와 최후생의 보살은 은혜의 복전이고, 병자는 괴로움의 복전이지만 법사는 어떤 복전인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이같이 묻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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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미암아 업도가 구경에 이르게 되는 것을 말하며, '의요'란 이를테면 '나는 마땅히 이러이러한 일을 지어야 한다'거나 '나는 당래 이러이러한 일을 지을 것이다'고 마음먹는 것[意趣]을 말한다.
  혹 어떤 업은 오로지 후기에 섭수(攝受)됨으로 말미암아 중품(重品)을 획득하는 경우가 있으니, 결정코 [후기가] 그것의 이숙과를 안립하기 때문이다.70) 혹 어떤 업은 대상으로 말미암아 중품을 성취하는 경우가 있으며,71) 혹 어떤 대상에 대해서는 근본업도의 힘으로 말미암아 중품을 성취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으니, 부모를 대상으로 하여 살생을 행하면 중품을 성취하지만 투도 등의 업도는 그렇지 않은 것과 같다.72)
  그 밖의 원인으로 말미암아 중품을 성취하게 되는 경우에 대해서도 이에 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만약 이러한 여섯 가지 원인이 모두 상품이라면, 이 때의 업이 가장 무겁다. 그리고 이와 반대되는 경우의 업이라면 가장 가벼우며, 이를 제외한 중간의 경우라면 가장 무거운 업도 아니며, 가장 가벼운 업도 아니다.
  
  계경에서 설하기를, "두 가지 종류의 업이 있으니, 첫째는 조작업(造作業)이고, 둘째는 증장업(增長業)이다"고 하였는데, 어떠한 원인에 의해 지어진 업을 설하여 '증장업'이라고 일컬은 것인가?73)
  다섯 가지 종류의 원인에 의해 지어진 업이다.
  무엇을 다섯 가지라고 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70) 이를테면 불상을 훔쳐 예배하였다면 근본업도의 죄는 무겁지 않지만, 그것을 녹였을 경우는 무거우며, 이 때 불상을 훔친 업의 이숙과는 후기에 의해 크게 결정된다는 뜻.
71) 다 같이 살생의 업도라도 축생을 죽인 것과 어미를 죽인 것은 그 경중이 질적으로 다르다.
72) 이를테면 살생과 투도는 다 같은 근본업도이지만 부모를 죽이면 다른 이를 죽이는 것보다 더 무거운 무간업을 성취하지만 부모의 물건을 훔치면 다른 이의 물건을 훔치는 것보다 더 무겁지 않은 것과 같다.
73) 앞에서는 여섯 가지 종류에 근거하여 업의 경중을 분별하였지만, 여기서는 완전하게 성취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에 따라 업의 경중을 분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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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펴 생각하고 원만함으로,
  악작과 대치가 없으므로,
  조반(助伴)과 이숙을 갖기 때문에,
  이러한 업을 '증장'이라고 이름한다.
  由審思圓滿 無惡作對治
  有伴異熟故 此業名增長
  
  논하여 말하겠다. '살펴 생각함[審思]으로'라고 함은, 그가 지은 업이 이전에 전적으로 아무런 생각 없이 이루어진 것도 아니며, 경솔히 생각나는 대로 조작한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원만함으로'라고 함은, 이를테면 온갖 유정 중에는 [3악행 가운데] 혹 어떤 경우 한 가지 악행으로 말미암아 악취에 떨어지는 자도 있고, 내지는 혹 어떤 경우 세 가지 악행으로 말미암아 악취에 떨어지는 자도 있으며, [10업도 가운데] 혹 어떤 경우 한 가지 업도로 말미암아 악취에 떨어지는 자도 있고, 내지는 혹 어떤 경우 열 가지 업도로 말미암아 악취에 떨어지는 자도 있는 데, 마땅히 악취에 떨어질 만한 양의 업을 말한다. 즉 아직 [악취에 떨어질 만큼] 원만하지 않을 때는 다만 '조작'이라고만 이름하고 '증장'이라고는 이름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업이 [악취에 떨어질 만큼] 원만해 질 때 역시 '증장'이라는 명칭을 획득한다.
  '악작과 대치가 없으므로'라고 함은, 이를테면 [지어진 악업에 대해] 후회하는 일도 없고 그것에 대치되는 업도 없는 경우를 말한다.
  '조반을 갖기 때문에'라고 함은, 이를테면 불선의 업을 지으면서 그것을 보조하는 동반하는 업을 갖는 경우를 말한다.74)
  '이숙을 갖기 때문에'라고 함은, 이를테면 결정코 이숙과를 낳는 경우를 말한다.
  
  
  
74) 여기서 조반(助伴)이라 함은 주인(主因)을 돕는 부차적인 원인 내지 조건을 말하는 것으로, 예컨대 어떤 사람이 불여취(不與取)를 행한 후 다른 이의 처첩과 음행을 행하거나 다른 이를 죽였을 경우, 이 때의 업은 조반을 갖기 때문에 단순히 조작업이 아니라 증장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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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선업의 경우는 이와 반대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나아가 이와 같지 않다면 [다시 말해 이상의 다섯 가지 원인에 의해 지어진 업이 아니라면] 오로지 조작업이라고 이름할 뿐이다.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이 아직 욕탐을 떠나지 않은 자 등이 자기의 소유물을 갖고서 제다(制多)에 공양하고 보시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보시를 수용하는 이가 없는데, 어떻게 보시의 복이 성취될 수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제다에 대한 보시는 사류(捨類)의 복으로
  자(慈) 등에도 이를 수용하는 자가 없는 것과 같다.
  制多捨類福 如慈等無受
  
  논하여 말하겠다. [보시의] 복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희사하는 종류[捨類]의 복이며, 둘째는 수용하는 종류[受類]의 복이다. 희사하는 종류의 복이란 이를테면 선심에 의해 단지 자재(資材)를 희사할 때 일어나는 보시의 복을 말하며, 수용하는 종류의 복이란 이를테면 보시를 받는 복전이 시물을 수용할 때 비로소 일어나는 보시의 복을 말한다. 따라서 제다에 공양되고 보시되는 공구(供具)에는 비록 수용하는 종류의 복은 없을지라도 희사하는 종류의 복은 있는 것이다.75)
  그것(제다)이 이미 수용하지 않았는데 복은 무엇에 의해 생겨나는 것인가?
  그렇다면 다시 어떠한 근거[因]에서 '복은 요컨대 그 같은 복전이 [시물을] 수용하기 때문에 생겨나고, 수용하지 않으면 생겨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75) 즉 사류(捨類)의 복은 먼저 자재를 희사함으로서 생겨나는 것으로, 바로 탐의 대치를 성취하였기 때문에, 무탐과 함께 작용하는 사(思)에 의해 등기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류(受類)의 복은 복전이 그 같은 시물을 수용함에 따라 생겨나지만, 혹 수용하지 않더라도 복이 망실되는 일은 없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어떤 이가 승가에 보시한 온갖 자구(資具)가 어떤 이유에서 아직 사용되지 않았을 경우 시물의 복은 바로 망실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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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것인가?
  수용하지 않으면 다른 이(즉 그들)들에게 섭수(攝受)되어 이익되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결정적인 논증이 아니다. 만약 복은 요컨대 [시물이] 다른 이들에게 섭수되어 그들을 이익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성취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자정(慈定) 등을 닦든지 정견(正見) 등을 닦을지라도 마땅히 복을 낳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76) 그렇기 때문에 제다에 공양할 때에도 마땅히 많은 복이 생겨나는 일이 있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니, 자정 등을 닦을 때와 같다. 즉 자정 등을 한번이라도 닦았을 경우, 비록 그것을 받는 자도 없고 아울러 다른 이를 섭수하여 이익되게 하는 일도 없을지라도 스스로의 마음으로부터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복을 낳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덕 있는 자[有德者]가 비록 이미 멸도(滅度)하여 과거로 사라졌다고 할지라도 그를 쫓아 공경하고 공양할 때 복은 자신의 마음에서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이러한 보시와 공경을 쓸모없다고 하지 않겠는가?77)
  그렇지가 않으니, 그 같은 업을 일으킴에 따라 마음이 비로소 수승해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원수를 해치고자 하였을 때 그 원수의 목숨이 비록 끊어졌을지라도 오히려 원한의 마음을 품고서 여러 가지의 악한 신업·어업을 일으켜 많은 비복(非福)을 낳게 될 때 단지 마음만을 일으키지 않는 것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대사(大師)께서 비록 과거로 사라졌다고 할지라도 그를 쫓아 공경하고 공양하여 신업·어업을 일으켜 비로소 많은 복을 낳게 될 때 단지 마음만을 일으키는 것은 아닌 것이다.78)
  
  
76) 즉 자(慈)·비(悲)·희(喜)·사(捨)의 4무량심에 머물거나 정견의 선정을 닦을 때에도 다른 이가 이를 수용하는 일이 없으며, 다른 이에게 섭수되어 그들을 이익되게 하는 일도 없지만 자신의 뛰어난 선심에 의해 복이 생겨나게 된다. 즉 '자' 등의 선정을 닦으면 모든 유정에 대해 평등하게 즐거움을 주려는 의요가 발기하여, 비록 받는 자가 없으며, 섭수되어 이익되게 하는 일도 역시 없다 할지라도 승해의 힘으로 말미암아 많은 복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77) 제다에 공양하고 보시하는 공덕이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시물을 베풀고 예배하는 것과 같은 일은 필경 무용하여 헛된 것이 아닌가 하는 힐난.
78) 즉 마음 상으로만 공양하지 않고 신업·어업으로써 보시하고 공경하면 더 한층 많은 뛰어난 복이 생겨나기 때문에 신업·어업에 의한 보시와 공경은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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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선한 복전에 보시라고 하는 업의 종자를 뿌릴 때에는 참으로 애호할 만한 과보가 생겨날 것이지만, 그러나 만약 악한 복전에 뿌렸을 경우 비록 보시하였을지라도 다만 참으로 애호할 만한 것이 아닌 과보를 초래해야 할 것이다.
  이는 응당 그렇지가 않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악한 복전에도 애호할 만한 과보가 생겨나니
  열매가 종자와 다르게 달리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惡田有愛果 果種無倒故
  
  논하여 말하겠다. 지금 바로 보더라도 밭에 뿌린 종자와 그 열매가 바뀌는 일은 없다. 예컨대 말도가(末度迦, m dv ka, 구역에서는 포도)의 종자로부터는 말도가의 열매가 생겨나니, 그 맛은 지극히 달콤하며, 임바(賃婆, n mba)의 종자로부터는 임바의 열매가 생겨나니, 그 맛은 지극히 쓰다. 즉 밭의 힘으로 말미암아 종자와 그 과실이 바뀌는 경우는 없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주가 비록 악한 복전[惡田]에 다른 이를 이롭게 하려는 마음으로 보시의 온갖 씨앗을 뿌렸을지라도 다만 애호할 만한 과보를 초래할 뿐, 애호할 만한 것이 아닌 과보를 초래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밭의 허물로 말미암아 뿌려진 종자는 그 열매를 적게 맺기도 하고, 혹은 전혀 열매를 맺지 않기도 한다.79)
  이상 시류(施類)복업사의 방론(傍論)을 이미 마쳤다.
  이제 마땅히 계류(戒類)의 복업사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79) 보시의 공덕은 밭에 좋고 나쁨의 관계없이 다른 이를 이익되게 하고 즐겁게 하려는 시주의 마음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그것으로 인해 결코 애호할 만한 것이 아닌 과보는 초래하지 않는다.
[844 / 1397] 쪽
  게송으로 말하겠다.
  
  범계(犯戒)와 차죄(遮罪)에서 떠나는 것을
  '계(戒)'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각기 두 가지가 있다.
  그리고 범계와 그 원인에 의해 파괴되지 않으며
  대치와 멸(滅)에 의지하는 것 등을 '청정계'라고 한다.
  離犯戒及遮 名戒各有二
  非犯戒因壞 依治滅淨等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불선업의 색을 일컬어 범계(犯戒)라고 하는데, 여기(본송)서는 성죄(性罪)에 대해 범계라는 명칭을 설정하였다.80) 차죄(遮罪)란 이를테면 [부처님께서] 하지 못하도록 한 업으로서 때 아닌 때에 먹는 것[非時食] 따위이니, 이것은 비록 성죄는 아닐지라도 부처님께서 법과 유정을 지키기 위해 별도의 뜻에서 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수계 받은 자가 이를 범하게 되면 이 역시 '범계'라고 하지만, 여기서는 성죄와 구별하기 위해 차죄라는 명칭을 설정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 같은 성죄와 차죄에서 떠나는 것을 다 같이 '계(戒)'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각기 두 가지가 있으니, 말하자면 표업과 무표업이 바로 그것으로, [계는] 신업·어업을 자성으로 삼기 때문이다. 계의 자성과 그 차별에 대해서는 [앞(본론 권제13)에서] 이미 간략히 분별하였다.
  만약 [어떤 계가] 네 가지 덕을 갖출 경우 청정계(淸淨戒)라고 일컬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불청정계라고 이름한다. 여기서 네 가지 덕이란, 첫 번째로는 범계로 인해 파괴되지 않는 것이니, 여기서 범계라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앞에서 논설한 대로 온갖 불선업의 색을 말한다.81) 두 번째로는 그 같은 범계의 원인으로 인해 파괴되지 않는 것이니, 여기서 범계의 원인이란
  
  
80) 즉 범계란 살생으로부터 잡예어에 이르는, 그 자체가 죄[性罪]인 신(身)3 어(語)4의 불선업을 말한다.
81) 그 중에서도 특히 우연히 혹은 무심코 범한 것이 아니라 살펴 헤아려 범하는 것[審思犯]을 범계라고 한다.
 
[845 / 1397] 쪽
  탐 등의 번뇌와 수번뇌를 말한다. 세 번째로는 대치(對治)에 의지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염주(念住) 등에 의지하는 것을 말한다. 즉 이것은 범계와 그 원인을 능히 대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네 번째로는 멸(滅)에 의지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열반에 의지하는 것을 말한다.82) 즉 계는 열반으로 회향하기 위한 것이지 수승한 생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송에서] '등'이라고 말한 것은 이 밖에 다시 이설(異說)이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즉 어떤 이는 설하기를, "계의 청정은 다섯 가지 원인으로 말미암아서이니, 첫째는 근본업도가 청정한 것[根本淨]이고, 둘째는 권속 즉 가행이 청정한 것[眷屬淨]이고, 셋째는 욕심(欲尋) 등에 의해 침해되지 않는 것[非尋害]이고, 넷째는 염주(念住)에 섭수되는 것[念攝受]이고, 다섯째는 적정(寂靜)으로 회향하는 것[廻向寂]이 바로 그것이다"고 하였다.83)
  그러나 유여사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계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다. 첫 번째는 포외계(怖畏戒)이니, 생활하지 못하는 것[不活]과 악명(惡名)과 처벌과 악취를 두려워하여 시라(尸羅)를 수호하는 것을 말한다. 두 번째는 희망계(希望戒)이니, 이를테면 온갖 존재[有]와 수승한 지위와 많은 재물과 공경과 칭예(稱譽)를 탐하여 정계(淨戒)를 수지하는 것을 말한다. 세 번째는 순각지계(順覺支戒)이니, 이를테면 해탈과 정견 등을 얻기 위해 정계를 수지하는 것을 말한다. 네 번째는 청정계(淸淨戒)이니, 이를테면 무루계를 말하는 것으로, 그는 능히 업과 혹의 더러움[垢]을 영원히 떠났기 때문이다."
  
  계류(戒類)의 복업사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82) 열반에 의지하는 것이란, 이를테면 열반을 목표로 하여 계를 지닐 경우 그것은 청정계이지만, 재부(財富)나 생천(生天)과 같은 유루과를 얻기위해 계를 지니는 경우 그것은 불청정계임을 말한다.
83) 첫째와 둘째는 불선의 근본업도와 그 방편을 떠나는 것이며, 셋째는 욕(欲)·에(恚)·해심(害尋)의 세 가지 나쁜 각(惡覺)의 뇌란에서 떠나는 것이며, 넷째는 삼보(三寶)를 섭수 염호하여 온갖 무기심으로부터 떠나는 것, 또는 4념주에 머물면서 계를 섭수 염호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부재(富財)나 뛰어난 생을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정 즉 열반을 획득하기 위해 계를 지키는 것을 말한다. 『잡아비담심론』 권제8(대정장28, p. 933중 ; 한글대장경177, p. 683) 참조.
[846 / 1397] 쪽
  이제 마땅히 수류(修類)의 복업사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등인(等引)의 선법을 '수(修)'라고 이름하니
  마음에 매우 잘 훈습되어 스며들기 때문이다.
  等引善名修 極能熏心故
  
  논하여 말하겠다. [본송에서] 말한 등인(等引)의 선법은 그 본질이 무엇인가?
  이를테면 삼마지(三摩地,心一境性의 等持)의 자성과 그 구유법을 말한다.
  '수(修)'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를테면 마음에 훈습되는 것을 말한다. 즉 선정에서의 선법은 마음의 상속에 매우 잘 훈습되어 온갖 덕의 종류[德類]를 성취하게 하니, 마치 거승(苣,참깨)의 꽃향기가 거승에 훈습되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선정의 선법만을] 따로이 '수'라고 이름한 것이다.84)
  앞에서 보시의 복은 능히 크나큰 부를 초래한다는 사실에 대해 분별하였다. 그렇다면 계류와 수류의 두 가지 복업사에 의해 초래되는 과보는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계류와 수류는 뛰어나니, 순서대로
  생천(生天)과 해탈의 과보를 초래한다.
  戒修勝如次 感生天解脫
  
  논하여 말하겠다. 계류의 복업사는 생천, 즉 하늘에 태어나는 과보를 초래하고, 수류의 복업사는 해탈의 과보를 초래한다. 그리고 [본송에서] '뛰어나
  
  
  
84) 즉 선정에 들지 않고 획득되는 선법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선정의 선법만을 '수'라고 이름한 것이다.
[847 / 1397] 쪽
  다'고 말한 것은, 뛰어난 것에 대해 말하자면 그렇다고 하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즉 보시도 역시 능히 생천의 과보를 초래하지만 [생천의 과보를 초래하는] 뛰어난 것으로서 지계(持戒)를 설한 것이며, 지계도 역시 능히 이계(離繫)의 과보를 초래하지만 [이계의 과보를 초래하는] 뛰어난 것으로서 수정(修定)을 설한 것이다.85)
  경에서 설하기를, "네 사람은 능히 범복(梵福)을 낳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86) 여기서 네 사람이란 첫째는 여래의 타도(馱都)에게 공양하기 위해 솔도파(窣堵波)가 아직 세워지지 않은 곳에 그것을 세우는 자이며,87) 둘째는 사방승가(四方僧伽)에 공양하기 위해 절을 짓고 원림을 보시하며, 네 가지 물건을 공급하는 자이며,88) 셋째는 화합이 깨어진 불제자들을 능히 화합시키는 자이며, 넷째는 유정에 대해 널리 자정(慈定) 등을 닦는 자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이의 범복의 양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1겁 동안 하늘에 태어나는 복 따위를
  1범복(梵福)의 양이라고 한다.
  感劫生天等 爲一梵福量
  
  논하여 말하겠다. 선대 궤범사(軌範師)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복업에 따라 능히 1겁 동안 하늘에 태어나 온갖 쾌락을 향수하니, 이것을 1범복의 양이라고 한다. 즉 그에게 초래된 쾌락을 향수하는 시간이 범보천(梵輔天)의 1겁의 수명과 동일하기 때문이니,89) 다른 부파의 어떤 가타에서,
  
  
85) 이와 마찬가지로 지계와 수정도 역시 크나큰 부를 초래하지만, 크나큰 부를 초래하는 뛰어난 것으로서 보시를 설하였다.
86) 『증일아함경』 권제21 「고락품(苦樂品)」(대정장2, p. 656중).
87) 여래의 타도(tathagatasya dhatu)란 여래가 남긴 몸[遺身], 즉 사리(sar ra)를 말하며, 솔도파(stupa)는 탑파, 즉 탑을 말한다.
88) 사방승가(caturdisa sa gha)란 현전승가(現前僧伽)와는 반대로 미래에 출현할 승가까지 포함하여 시간적·공간적으로 한정되지 않은 승가를 말하며, 네 가지 물건[四事]이란 음식·의복·와구(臥具)·의약품을 말한다.
89) 범보천의 수명은 신장의 길이가 1유선나이듯이 1겁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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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과 정견을 가진 이로서
  열 가지 뛰어난 행[勝行]을 닦은 자는
  바로 범복을 낳게 될 것이니,90)
  1겁 동안 하늘의 쾌락을 얻기 때문이다.
  
  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즉 [앞서 보살의] 묘상업(妙相業)을 분별하면서 언급한 일 복의 양, 이것이 바로 그 같은 이의 범복의 양과 같다"고 하였다.91) 그리고 [본송에서의] '따위'라는 말은 이와는 다른 이설이 있음을 나타낸다.
  재시(財施)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법시(法施)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법시란 염오하지 않은 마음으로
  참답게 계경 등을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法施謂如實 無染辯經等
  
  논하여 말하겠다. 만약 온갖 유정들을 위해 염오하지 않은 마음으로써 능
  
  
  
90) 진제(眞諦)에 의하면 열 가지 뛰어난 행이란, 앞에서 언급한 네 가지 이외 부·모·아라한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버리고, 스스로 정법 중에 출가하고 다른 이를 출가하게 하고, 아직 법륜이 구르지 않는 곳에 법륜을 굴리는 것이다.(『구사론기』 권제18 참조)
91) 선대 궤범사(보광에 의하면 경부 혹은 대중부사)는 1범복을 일겁의 천락(天樂)이라 하여 그 양을 구체적으로 명시한데 반해 유부 비바사사는 추상적인 무제약수로 해석하고 있다. 즉 32묘상 각각은 백복의 업에 의해 초래되는데, 그 때 일복의 양은 (1) 근불보살(近佛菩薩)을 제외한 일체 유정이 닦은 부락과(富樂果)의 업, (2) 3천대천세계를 낳는 업의 증상력, (3) 부처만이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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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 참답게 계경 등을 분별하고, 올바른 이해을 낳게 하면, 이것을 일컬어 '법시'라고 한다. 따라서 전도(顚倒)되었거나 혹은 염오한 마음으로써 이익과 명예와 공경을 구하여 [계경을] 분별하는 자가 있으면, 이 같은 이는 바로 자신과 다른 이의 크나큰 복을 잃게 될 것이다.
  
  앞에서 세 가지 복업사에 대해 이미 개별적으로 해석하였다.
  이제 경에서 설하고 있는 순삼분(順三分)의 선업, 즉 세 가지 상태를 초래하게 되는 선업에 대해 해석해 보아야 할 것이다.92)
  게송으로 말하겠다.
  
  순복(順福)과 순해탈(順解脫)과
  순결택분(順決擇分)의 세 가지는
  순서대로 애호할 만한 과보와
  열반과 성도(聖道)를 초래하는 선이다.
  順福順解脫 順決擇分三
  感愛果涅槃 聖道善如此
  
  논하여 말하겠다. 순복분(順福分)이라고 하는 말은, 이를테면 세간이 애호할 만한 과보를 초래하는 선을 말한다.
  순해탈분(順解脫分)이란, 이를테면 결정코 능히 해탈의 과보를 초래하는 선을 말하니, 이러한 선이 생겨나면 그들 유정들로 하여금 '소의신 중에 열반법이 존재한다'고 일컫게 한다. 즉 만약 어떤 이가 '생사에는 허물이 있고, 제법은 무아이며, 열반에는 [미묘한] 덕이 있다'고 설하는 것을 듣게 되면 몸의 털이 곤두서고 슬픔에 겨워 눈물 흘리게 되니, 그러한 이는 이미 순해탈분의 선법을 심은 자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으로, 이는 마치 비가 내린 마당에 싹이 트는 것을 보고서 거기에는 이미 이전부터 그 종자가 있었음을 아는 것과 같은 것이다.93)
  
  
92) 여기서 '분'은 인(因)의 뜻으로, 복과 해탈과 결택의 원인이 되는 것을 순복분(順福分)·순해탈분(順解脫分)·순결택분(順決擇分)이라고 한다.
93) 순해탈분의 선이란 해탈에 수순하여 그 원인이 되는 5정심위(停心位)·별상념주·총상념주의 3현위(賢位)를 말하는 것으로, 본론 권제23(p.1019)에서 논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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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순결택분(順決擇分)이란, 이를테면 능히 성도의 과보를 초래하는 선으로서 난(煖) 등의 네 가지를 말하니, 이에 대해서는 뒤에 널리 논설하게 될 것이다.94)
  세간에서 설해지고 있는 서(書)·인(印)·산(算)·문(文)·수(數)와 같은 다섯 가지는 그 본질[自體]이 어떠한 것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인가?95)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치대로 일어나는 세 가지 업과
  그것을 능히 일으키는 온갖 것이
  차례대로 서(書)와 인(印)과
  산(算)과 문(文)과 수(數)의 본질이다.
  諸如理所起 三業幷能發
  如此爲書印 算文數自體
  
  논하여 말하겠다. '이치대로 일어나는 것'이란 올바른 가행에 의해 생겨나는 것을 말하며, '세 가지 업'이란 바로 신·어·의업이라는 사실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능히 일으키는 것'이란 바로 능히 이러한 세 가지 업을 일으키는 것으로, 그것과 상응하는 수(受)·상(想) 등과 같은 법을 말한다.
  이 중에서 '서(書)'와 '인(印)'은 앞의 신업과 그것을 능히 일으키는 5온을 본질로 한다.96) 다음으로 '산(算)'과 '문(文)'은 앞의 어업과 그것을 능히 일으
  
  
94) 순결택분의 선이란 무루성도의 과보를 초래하는 난(煖)·정(頂)·인(忍)·세제일법(世第一法)의 4선근을 말하는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23(p.1038)에서 상설함.
95) 본 단은 업론의 여설(餘說)로서, 세간 일상사와 관계하는 업 자체에 대해 분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데, 여기서 '서'란 글을 쓰는 것[書字]이고, '인'은 수인(手印, mudra)을 짓거나 도장을 새기는 것[調印]이고, '산'은 숫자를 헤아리는 것[語算]이고, '문'은 문장이나 시·노래를 읽고 읊는 것[文章]이고, '수'는 계산하는 것[計數]이다.
96) 즉 온갖 글자의 모양[字像]을 '서'라고 하거나, 새겨진 도장의 글을 일컬어 '인'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업(즉 신업)에 의해 글자의 상과 도장의 글을 조작하는 것을 '서'와 '인'이라 한다. 다시 말해 글씨[書] 와 도장[印]은 원인에 결과의 명칭을 설정한 것이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것과 도장을 새기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업의 본질은 신업(즉 색온)과 그것을 능히 등기시키는 수·상·행·식 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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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는 5온을 본질로 하며, 마지막의 '수(數)'도 앞의 의업과 그것을 능히 일으키는 4온은 본질로 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단지 의사(意思)만이 능히 법을 헤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마땅히 성교에서 언급된 온갖 법상의 여러 다른 이름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선한 무루를 '묘(妙)'라고 이름하며
  염오를 유죄·유부(有覆)·열(劣)이라 하며
  선한 유위법을 응습(應習)이라고 하며
  해탈을 무상(無上)이라고 이름한다.
  善無漏名妙 染有罪覆劣
  善有爲應善 解脫名無上
  
  논하여 말하겠다. 선한 무루법을 역시 '묘(妙, pra ta)'라고도 이름한다.97)
  모든 염오법(불선과 유부무기법)을 또한 역시 '유죄(有罪, savadya)'나 '유부(有覆, niv ta)', 그리고 '열(劣, h na)'이라고 이름한다.98)
  그리고 이러한 묘법과 열법에 준하여 그 밖의 중간에 해당하는 법은 이미 그것의 분별이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게송에서 분별하지 않은 것이다.99)
  
97) 무루법은 무기법이나 염오법, 그리고 유루법보다 뛰어난 것이기 때문에 '묘'이다.
98) 염오법은 모든 지자(智者)가 꾸짖고 싫어하는 것이기 때문에 '유죄'이며, 능히 해탈도를 가리어 장애하기 때문에 '유부'이며, 역시 또한 지극히 비루하고 더러워 버려야 할 것이기 때문에 '열'이다.
99) 즉 유루선과 무부무기의 법을 모두 '중(中, madhya)'이라고 이름한다.(『현종론』 권제 24, 한글대장경201, p.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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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갖 유위의 선법을 역시 또한 '응습(應習, sevitavya)'이라고 이름하며, 이 밖에 '마땅히 익히지 않아야 할 법[非應習]'도 이에 준하여 이미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100)
  어째서 무위법을 '응습'이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인가?
  무위법은 자주 익혀 증장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또한 닦는 것은 결과를 위한 것이지만 이것(무위)은 결과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해탈 열반을 역시 또한 '무상(無上, anuttara)'이라고 이름하니, 열반보다 뛰어난 것은 아무것도 없을 뿐더러, 이는 바로 선이고, 상주(常住)이며, 모든 법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밖의 법이 '유상(有上)'의 뜻을 갖는다는 것은 이에 준하여 이미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101)
100) 유위의 불선·무기법은 승진법이 아니기 때문에 또한 역시 '비응습(非應習, asevitavya)'이라고 이름한다.
101) 즉 일체의 유위법과 허공·비택멸법이 바로 그러한 것으로, 앞에서 설한 선과 상주의 상을 갖지 않기 때문에 '유상의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