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아비달마구사론 제 19 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4.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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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구사론 제 19 권
  존자 세친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
  
5. 분별수면품(分別隨眠品) ①
  앞(권제13 초)에서 세간의 차별은 모두 업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업은 수면(隨眠, anusaya)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생장할 수 있으며, 수면을 떠난 업은 유(有, 욕계·색계·무색의 3유)를 초래할 만한 공능을 갖지 않는다.
  그 까닭은 무엇이며, 수면에는 몇 가지가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수면은 모든 '유(有)'의 근본으로,
  이것의 차별에는 여섯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탐(貪)·진(瞋)과, 역시 만(慢)·
  무명(無明)·견(見), 그리고 의(疑)이다.
  隨眠諸有本 此差別有六
  謂貪瞋亦慢 無明見及疑
  
  논하여 말하겠다. 이러한 수면은 바로 모든 '유'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이것을 떠난 업은 유를 초래할 만한 어떠한 공능(功能)도 갖지 못하는 것이다.
  어째서 수면이 능히 '유'의 근본이 된다고 하는 것인가?
  모든 번뇌는 현기(現起)하면 능히 열 가지 사업[事]을 행하기 때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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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번째는 근본(根本)을 견고하게 하며,1) 두 번째는 [번뇌의] 상속을 일으키며, 세 번째는 자신의 소의신[自田]이 번뇌를 일으키기에 적합하게 하며, 네 번째는 등류(等流)[인 수번뇌(隨煩惱)]를 인기하며, 다섯 번째 업유(業有) 즉 후유를 초래하는 업을 일으키며, 여섯 번째는 자구(自具)를 포섭하며,2) 일곱 번째 [정혜(正慧)를 손상시켜] 소연에 대해 미혹하게 하며, 여덟 번째 식(識)의 흐름을 인도하며,3) 아홉 번째는 선품(善品)을 어기게 하며, 열번째는 널리 속박하는 것이니, [유정을 속박하여] 자계·자지를 초월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즉 수면은 이러한 열 가지 사업으로 말미암아 능히 '유'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업은 이것에 의해 비로소 '유'를 초래할 공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수면의 차별에는 간략히 여섯 가지가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탐(貪, raga)과 진(瞋, pratigha)과 만(慢, mana)과 무명(無明, avidya)과 견(見, d i)과 의(疑, vicikitsa)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본송에서 '역시'라고 하는 말을 설한 것은, '만' 등도 역시 탐의 힘으로 말미암아 경계에 수증(隨增)하는 것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탐으로 말미암아 수증한다'는 뜻에 대해서는 뒤에서 분별하는 바와 같다. 또한 [본송에서] '그리고'라고 하는 말은 여섯 가지 수면의 본질[體]이 각기 동일하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다.
  
  만약 모든 수면의 본질이 오로지 여섯 가지 뿐이라고 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경에서 '일곱 가지 수면이 있다'고 설한 것인가?4)
  
  
1) 여기서 '근본'은 번뇌의 득(得)을 말한다. 즉 번뇌가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번뇌의 득이 더욱더 견고해져 끊을래야 끊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2) 여기서 '자구'는 번뇌 자신의 자량이 되는 비리작의(非理作意) 즉 참답지 못한 사유를 말한다.
3) 식의 흐름에는 다음 생을 받을 때 부모에 대한 애념(愛念)을 일으키는 속생(續生)의 식과, 소연의 경계에 대해 촉(觸)을 일으키는 촉연(觸緣)의 식이 있다. 곧 번뇌는 후유의 소연에 대해 능히 속생의 식을 일으키며 소연에 대해 능히 염오식을 낳기 때문에 '식의 흐름을 인도한다'고 말한 것이다.
4) 이를테면 『잡아함경』 권제18 제490경(대정장2, p. 127상)과, 『증일아함경』 권제34 「칠일품(七日品)」 제3경(동p. 738하), 『장아함경』 권제10 『십상경(十上經)』 (대정장1, p. 54중) 등에서는 각기 7사(使, '사'는 수면의 구역어)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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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송으로 말하겠다.
  
  6수면은 탐의 차이로 말미암아 일곱 가지가 되니
  유탐(有貪)은 상(上) 2계의 그것으로
  내문(內門)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해탈이라는 생각을 막기 위해 [따로이 설정하였다].
  六由貪異七 有貪上二界
  於內門轉故 爲遮解脫想
  
  논하여 말하겠다. 바로 앞에서 논설한 여섯 가지 수면 중에서 '탐'을 둘로 나누었기 때문에 경에서 일곱 가지라고 설한 것이다.
  무엇을 일곱 가지라고 한 것인가?
  첫 번째는 욕탐(欲貪)수면이며, 두 번째는 진(瞋)수면이며, 세 번째는 유탐(有貪)수면이며, 네 번째는 만(慢)수면이며, 다섯 번째는 무명(無明)수면이며, 여섯 번째는 견(見)수면이며, 일곱 번째는 의(疑)수면이다.
  욕탐수면은 무슨 뜻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인가? '욕탐 자체가 바로 수면[欲貪體卽隨眠]'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욕탐의 수면[欲貪之隨眠]'이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할 것인가?5) 그 밖의 다른 여섯 가지 수면의 뜻에 대해서도 역시 이같이 따져 물어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떤 과실을 범하게 되는 것인가?
  
  
  
5) 이하 욕탐수면의 본질[體]을 둘러싸고 유부·대중부·경부의 대론이 펼쳐지고 있다. 욕탐수면을 '욕탐이 바로 수면'이라는 지업석(持業釋, 동격복합어)으로 해석해야 할 것인가, '욕탐의 수면'이라는 의주석(依主釋, 한정복합어)으로 해석하여야 할 것인가? 만약 전자라면 욕탐은 현행하는 것이므로 수면 역시 현실의 번뇌로서 번뇌의 다른 이름일 뿐이지만, 후자라면 수면은 욕탐을 일으키는 것으로서 심·심소와는 별도의 실체여야 한다. 유부의 경우 욕탐의 본질은 탐·진과 마찬가지로 수면이고, 그것은 바로 현행의 번뇌인 전(纏, paryavsth na) 즉 심상응법의 하나로 해석하고 있지만, 대중부의 경우 현행의 번뇌인 욕탐을 야기하는 불상응행법으로 간주하였다. 이에 대해 경부에서는 수면을 번뇌종자의 뜻으로 해석하여, 번뇌가 잠자고 있는 상태를 수면, 깨어 활동하고 있는 상태를 '전'이라고 하였다. 곧 '번뇌종자인 수면은 심상응도 아니고 불상응행도 아닌 마음 자체의 차별공능이다'고 논의함으로서 유부와 대중부를 동시에 비판하고 있는데, 이는 논주 세친에 의해 선설(善說)로 평취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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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가지 모두에 과실이 있다. 만약 '욕탐 자체가 바로 수면'이라고 한다면 계경에 위배될 것이니, 이를테면 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만약 어떤 존재[類]가 오랜 시간 동안 욕탐 전(纏)에 마음이 속박[纏]되어 머물지 않을 것 같으면, 설령 마음이 잠시 욕탐전을 일으켰을지라도 출리(出離)의 방편을 심구(尋求)하여 참답게 알 경우 그는 이로 말미암아 욕탐전을 능히 제거하고 아울러 수면을 끊게 될 것이다."6) 그러나 만약 [욕탐수면이] 이같이 '욕탐의 수면'이라는 뜻이라고 한다면, 수면은 바로 심불상응법(心不相應法)이 되어야 하며, 그럴 경우 대법(對法)에 위배될 것이니, 이를테면 본론(本論)에서는 "욕탐수면은 세 가지 근(根)과 상응한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7)
  이에 대해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욕탐 등의 본질이 바로 수면이다"고 설하고 있다.
  그럴 경우 어찌 경에 위배되지 않을 것인가?8)
  경에 위배되는 과실이 없으니, [경에서] '아울러 수면'이라고 한 것은 아울러 수박(隨縛)을 [끊게 되는 것을]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9) 혹 어떤 경에서
  
  
6) 출처불명. 즉 이 경에서는 욕탐전 이외 수면을 따로이 언급하고 있으므로 욕탐과 수면은 개별적 존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7) 여기서 본론은 『발지론』 권제6(한글대장경176, p. 130), '7수면 중의 욕탐수면 등은 고근(苦根)을 제외한 네 가지 근과 상응한다.' 그럴 경우 욕탐수면은 상응법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8) 제 주석에 따르면 이는 바로 수면을 불상응행법으로 이해한 대중부(大衆部)의 난문이다. 즉 그들에게 있어 "수면은 심(心)도 아니고 심소도 아니며, 따라서 그것은 어떤 대상(所緣)도 갖지 않는다. 즉 수면과 전(纏)은 서로 다른 존재로서, '전'이 심과 상응하는 것이라면 수면은 상응하지 않는 것이다."(『이부종륜론』, 대정장49, p. 15하-16상) 즉 '전'이 현재 작용하고 있는 제 번뇌로서 마음과 상응하는 것이라면(그럴 경우 그것은 마음과 동일한 구체적 대상을 갖는다;所緣平等), 수면은 바로 그것을 낳게 하는 잠세적인 힘이다. 따라서 그것은 마음도 아니고, 마음과 상응하는 심소도 아니며, 구체적이고도 특정의 대상을 갖지 않는 추상적 원리로서의 불상응행법인 것이다.
9) 즉 앞의 경문에서 '(욕탐전을 능히 제거하고) 아울러 수면을 끊게 될 것이다'라고 한 것은, 다만 욕탐 자체만을 끊을 뿐만 아니라 아울러 그 같은 탐과 상응하는 법과 소연의 수박도 역시 끊게 되기 때문에 그같이 말한 것이지 수면이 욕탐과는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는 뜻. 여기서 '수박(anubandhnanti)'이란 다른 번뇌에 수순하여 생겨나는 것으로, 경에서 욕탐에 속한 이러한 수박을 수면이라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곧 '가행도로써 그것이 생겨나지 않게 하더라도, 혹은 애써 노력하여 그 생기를 막더라도 자주 현기하기 때문에 수박이다'(본론 권제20, p.94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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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욕탐)의] 획득을 일시 수면이라 설한 것으로, 불[火] 등에 대해 괴로움 등의 상(想)을 설정한 것처럼 아비달마에서는 실상에 의거하여 온갖 번뇌를 설하여 수면이라 이름한 것이다.10) 그리고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수면은 바로 상응법이다.
  어떠한 이치를 증거로 삼아 [수면이] 결정코 상응법임을 아는 것인가?
  모든 수면은 마음을 오염시키고 어지럽히기[染惱] 때문이며, 마음을 덮고 가리우기[覆障] 때문이며, 능히 선을 어기기 때문이다.11) 즉 수면의 힘은 능히 마음을 오염시키고 어지럽혀 아직 생겨나지 않은 선을 생겨나지 않게 하며, 이미 생겨난 선을 퇴실(退失)하게 한다. 그래서 수면의 본질은 불상응법이 아닌 것이다. 만약 불상응법이 능히 이 같은 작용[事]을 한다고 하면 온갖 선법은 마땅히 일어나는 때가 없어야 할 것이니, 불상응법은 항상 현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온갖 선법이 일어나는 때도 있었으므로 수면은 바로 상응법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는 모두 [올바른] 논증이 되지 못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만약 수면이 상응법이 아니라고 인정하는 자라면 앞에서 언급한 세 작용은 수면의 작용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12)
  그래서 경부사(經部師)가 설하는 바가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경부는 이에 대해 어떻게 설하고 있는 것인가?
  그는 이같이 설하고 있다. "[욕탐수면은] '욕탐의 수면'이라는 뜻이다. 그렇
  
  
  
10) 불은 괴로움의 원인이기 때문에 '불은 괴로움이다'고 하는 것처럼 '탐 등의 수면의 득'을 잠시 수면이라 하고, 그 득을 끊는 것을 '아울러 수면을 끊게 된다'고 하였다는 뜻.
11) 수면을 상응법이라고 해야 하는 이 같은 세 가지 이유는 법승(法勝)의 설이다.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 권제2(대정장28, p. 817하), " 以諸隨眠 染惱心故, 覆障心故, 能違善故, 非不相應." 즉 수면이 만약 불상응법이라면 이같이 마음과 관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12) 대중부처럼 수면이 불상응행법이라고 주장할 경우, 마음을 오염시키고 어지럽히는 등의 작용은 수면의 작용이 아니라 현행하는 번뇌의 작용이라 주장할 것이기 때문에, 이는 그들의 힐난에 대한 올바른 논증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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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만 수면 자체는 심상응법이 아니며 불상응법도 아니니, [욕탐과는 다른] 개별적 실체[實物]로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번뇌가 잠자고 있는 상태[睡位]를 설하여 '수면'이라 이름하고, 깨어 있는 상태[覺位]를 설하여 바로 '전(纏)'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일컬어 잠자고 있는 상태라고 한 것인가?
  이를테면 현행하지 않고 종자(種子)로서 수축(隨逐)하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일컬어 깨어있는 상태라고 한 것인가?
  이를테면 온갖 번뇌가 현기(現起)하여 마음을 속박[纏]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일컬어 번뇌의 종자라고 하는 것인가?
  예컨대 염(念)종자가 [선행된] 생각[證智, anubhava jnana,곧 5식에 따라 일어나는 의식상응의 智, 혹은 현량의 證智]으로부터 생겨나 능히 현재찰나의 생각을 낳는 공능(功能)의 차별이듯이, 또한 싹 등은 선행한 결과(즉 종자)로부터 생겨나 능히 후찰나의 결과(즉 열매)를 낳는 공능의 차별이듯이, [전찰나의] 번뇌로부터 생겨나 능히 [후찰나의] 번뇌를 낳는 [색심] 자체 상의 차별되는 공능이다. 그런데 만약 번뇌와는 다른 별도의 수면이라는 심불상응법이 있어 그것을 번뇌종자[煩惱種]라고 이름한다고 주장한다면, 마땅히 생각의 종자[念種]도 다만 공능의 차별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는] 다른 불상응법으로서 존재하면서 능히 후찰나의 생각을 인생(引生)한다고 주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그렇지 않으니, 그것이 어떻게 그러할 것인가? 즉 이 두 가지 사실을 차별할 만한 어떠한 인연도 획득될 수 없기 때문이다.13)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육육계경(六六契經)』과 상위하게 될 것이니, 경에서는 '낙수(樂受)에 탐수면이 존재한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14)
  
  
13) 즉 수면을 번뇌를 낳게 하는 불상응의 개별적 실체로 이해할 경우, 현행의 생각 역시 그것을 낳게 하는 '생각의 종자[念種]'라는 개별적 실체에 의해 낳아졌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경량부에 있어 번뇌의 종자나 생각의 종자는 다 같이 개별적인 실체가 아니라 다만 전찰나의 법에 내재하는 공능(功能, akti) 즉 힘일 뿐이다.
14) 『육육계경』에서 육육이란 6근(根)·6경(境)·6식(識)·6수(受)·6상(想)·6사(思, 혹은 愛)를 말하는 것으로, 이는 『잡아함경』 권제13 제304경, 제305경(대정장2, p. 68하-69하)에서 설해지고 있지만, 인용한 경문은 같은 경 권제17 제468경(동 p.119중)에 나온다. "낙수를 관하는 것은 낙수에 대한 탐사(貪使, 탐수면의 구역)를 끊기 위해서이다." 즉 경에서 낙수의 상태에서 탐수면이 현행하는 것을 설하고 있기 때문에, 이는 곧 탐수면이 낙수와 상응하여 일어난 상응법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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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에서는 다만 '존재한다[有]'고 설하였을 뿐 '그 때에 바로 수면이 존재한다'고는 말하지 않았는데, 무슨 어긋남이 있을 것인가?15)
  그렇다면 [탐수면은] 어느 때 존재하는 것인가?
  그것이 잠자고 있을 때에 존재한다.16) 혹은 원인에 대해 수면이라는 말[想]을 일시 설정한 것이다.17)
  이상 방론에 대해 마치고 이제 마땅히 본래의 논의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탐을 둘로 나눈다고 함은, 말하자면 욕탐(欲貪)과 유탐(有貪)이다.
  여기서 유탐은 무엇을 본질로 삼는 것인가?
  이를테면 색계와 무색계 중의 탐이다.
  이러한 ['유탐'이라는] 명칭의 수면은 무슨 까닭에 오로지 그곳에만 설정하는 것인가?
  그곳의 탐은 대개 내문(內門) 즉 내적인 경계에 의탁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오로지 그곳에만 '유탐'이라는 명칭의 수면을 설정하게 된 것이다. 또한 어떤 이들은 상 2계에서 해탈하였다는 생각을 일으키기 때문으로,18) 그 같은 생각을 막기 위해서였다. 즉 상계에 '유탐'이라는 명칭의 수면을 설정하여 그들의 소연(所緣)이 참된 해탈이 아님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즉 여기서는 존재 자체(自體)를 설정하여 '유'라고 일컬었으니, 그곳의 모
  
  
  
15) 즉 낙수의 상태에 탐수면이 존재한다고 함은 종자(이를테면 가능태)로서 존재한다는 말이지 수면이 이미 생겨나 현행하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는 뜻.
16) 즉 낙수가 가능태로서 탐의 종자를 훈습하고 있을 때(즉 잠자고 있을 때), 그 때를 '탐수면이 존재한다'고 말한 것이며, 그것이 현실태가 되면(다시 말해 잠에서 깨어나면) 그것은 수면이 아닌 현행의 번뇌 즉 전(纏)이 된다.
17) 결과인 탐번뇌에 그 원인(종자)인 수면이라는 명칭을 일시 설정한 것이라는 뜻. 즉 경에서는 '탐번뇌가 존재한다'고 해야 하지만, 그 원인에 근거하여 탐수면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18) 즉 어떤 이들은 색계와 무색계에서의 존재[有]를 해탈한 존재라는 생각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것을 막기 위해 '유탐'이라는 명칭의 수면을 설정한 것으로, 이생 외도는 무상천(無想天)의 5백 대겁 동안의 무상을 진실의 해탈로 간주한다. 본론 권제5 (p.217) '무상정'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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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든 유정은 대개 등지(等至)나 소의지(所依止)에 깊이 미착(味著)하기 때문이다.19) 즉 그들은 오로지 그들 자체에 대해서는 미착한다고 설할 수 있을지라도 외적 대상[境]에 대해서는 미착하지 않으니, [그것에 대한] 욕탐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로 말미암아 오로지 그곳에만 '유탐'이라는 명칭의 수면을 설정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미 유탐이 상 2계에 존재하는 번뇌라고 설하였으니, 이러한 뜻에 준하여 볼 때 욕계의 탐을 욕탐이라고 이름한다.20) 그래서 본송 중에서 별도로 나타내지 않은 것이다.
  앞에서 설한 여섯 종류의 수면은 본론(本論) 중에서 다시 나누어져 열 가지가 된다.21)
  어떻게 하여 열 가지가 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6수면은 견(見)의 차별에 의해 10수면이 되니
  여기서 차별이란 말하자면 유신견(有身見)과
  변집견(邊執見)과 사견(邪見)과
  견취(見取)와 계금취(戒禁取)가 바로 그것이다.
  六由見異十 異謂有身見
  邊執見邪見 見取戒禁取
  
  
  
  
19) '유(有)'란 내외의 일체의 존재를 포함하는 말이지만, 상 2계의 소연을 의미할 경우 정려심과 그 소의지(所依止)인 신체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즉 상계의 유정은 이미 욕탐을 떠났기 때문에 외적 경계에 집착하는 일이 없으며, 오로지 선정과 자신에 대해서만 미착(味著)하기 때문이다.
20) 즉 욕탐수면은 대개 외적 대상 즉 5욕경(欲境)을 소연으로 하여 일어나는 외문전(外門轉)이다.
21) 10수면의 교설이 독자적으로 논설되는 곳은 보이지 않으며, 다만 욕계 견도소단(見道所斷)의 10수면으로 논의되고 있다. 『발지론』 권제5(한글대장경176, p. 118)에는 욕계의 성자가 수증하는 수면으로 열 가지를 언급하고 있지만, 이는 98수면 중 욕계 수소단의 10수면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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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하여 말하겠다. 6수면 가운데 '견(見)'은 그 행상(行相)이 달라 다섯 가지가 되고, 그 밖의 나머지는 '견' 아닌 다섯 가지(즉 탐·진·치·만·의)이니, 그 수를 합하면 모두 열 가지가 되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열 가지 수면 중에서 다섯 가지는 바로 '견'의 성질로서,22) 첫 번째는 유신견(有身見)이며, 두 번째는 변집견(邊執見)이며, 세 번째는 사견(邪見)이며, 네 번째는 견취(見取)이며, 다섯 번째는 계금취(戒禁取)이다. 그리고 그 밖의 다섯 가지는 '견'의 성질이 아니니, 첫 번째는 탐(貪)이며, 두 번째는 진(瞋)이며, 세 번째는 만(慢)이며, 네 번째는 무명(無明)이며, 다섯 번째는 의(疑)이다.
  또한 앞서 설한 여섯 종류의 수면은 다시 본론(本論) 중에서 98수면으로 논설되고 있다.23)
  어떠한 뜻에 근거하여 아흔여덟 가지를 설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6수면은 행상(行相)과 부(部)와 계(界)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아흔여덟 가지가 되니
  욕계 견고(見苦) 등에 의해 끊어지는
  열·일곱·일곱·여덟·네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六行部界異 故成九十八
  欲見苦等斷 十七七八四
  
  이는 말하자면 순서대로 [열 가지를] 다 갖춘 것과,
  3견과, 2견과, 견(見)·의(疑)를 배제시킨 것이고
  색계와 무색계에서는 진을 제외하니
  그 밖의 것들은 욕계에서 설한 것과 같다.
  
  
  
22) 여기서 '견(d i)'이란 먼저 숙고[審慮]한 다음 확인 판단[決度]하는 것을 말한다.(審慮爲先 決度名見) 본론 권제2(p.86) 참조. 5견에 대해서는 본권 후술.
23) 『발지론』 권제4(앞의 책, p. 98) ; 동론 권제5(같은 책, p.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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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謂如次具離 三二見見疑
  色無色除瞋 餘等如欲說
  
  논하여 말하겠다. 여섯 가지 종류의 수면은 행상(行相)과 부(部)와 계(界)의 차별로 말미암아 아흔여덟 가지가 된다. 이를테면 6수면이 견(見)의 행상의 차이로 말미암아 열 가지로 나누어졌다고 하는 것은 앞에서 이미 분별한 바와 같다. 즉 이렇게 분별된 열 가지 종류의 수면은 각기 '부'와 '계'가 동일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아흔여덟 가지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부(prakara)'란 이를테면 4제(諦)를 관찰하여 끊어지고 수습(修習)하여 끊어지는 다섯 갈래의 부류[五部]를 말하며, '계(dhatu)'란 욕·색·무색의 3계를 말한다.24)
  바야흐로 욕계의 수면은 5부가 동일하지 않음에 따라 10수면에 근거하여 서른 여섯 가지가 되니, 말하자면 견고제소단(見苦諦所斷)으로부터 수소단(修所斷)에 이르기까지 그 순서대로 열 가지와 일곱 가지와 일곱 가지와 여덟 가지와 네 가지가 있으며, 이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5부의 한 가지(견고소단)와 두 가지(견집소단·견멸소단)와 한 가지(견도소단)와 한 가지(수소단)에 있어서 그 순서대로 10수면을 모두 다 갖춘 것과, 세 가지 견과 두 가지 견과 견·의를 각기 배제시킨 것이다. 이를테면 견고제소단은 10수면을 모두 다 갖추고 있으며,25) 견집제소단과 견멸제소단에는 각기 유신견과 변집견과
  
  
24) 98수면이란 탐(貪)·진(瞋)·만(慢)·무명·의(疑)·유신견·변집견·사견·견취·계금취의 10수면이 작용하는 세계 즉 3계와, 끊어지는 유형 즉 4제(諦) 각각에 대한 네 가지 관찰[見道]과 선정을 통한 수습[修道]의 다섯 가지 유형[五部]에 따라 분류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번뇌에는 이지적 측면의 번뇌[迷理惑]와 정의적 측면의 번뇌[迷事惑]가 있는데, 전자는 사설(邪說)·사교(邪敎)에 의해 일어나는[分別起] 후천적 번뇌이기 때문에 올바른 관찰에 의해 즉각적으로 제거될 수 있는 반면, 후자는 선천적으로 갖는[俱生起] 본능적 번뇌이기 때문에 오랜 시간에 걸친 반복된 수습이 필요하다. 유부에서는 전자를 견혹(見惑) 즉 4제의 진리성의 관찰에 의해 끊어지는 이른바 견소단(見所斷, 여기에는 見苦·見集·見滅·見道 所斷의 4부가 있다)이라 하고, 후자를 수혹(修惑) 즉 수습에 의해 끊어지는 수소단(修所斷)의 번뇌라고 하는데, 5견과 '의'가 오로지 견소단이라면 나머지 탐·진·만·무명은 양자에 공통된 번뇌이다. 98수면이란 이처럼 10수면을 3계·5부와 관련시켜 분류한 것이다. (후술)
25) 일체의 모든 수면은 모두 고제(苦諦) 즉 무상·고·무아·공에 위배되기 때문이다.(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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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금취를 제외한 일곱 가지가 있으며, 견도제소단에는 유신견과 변집견을 제외한 여덟 가지가 있다. 수소단에는 5견과 의(疑)를 제외한 네 가지가 있다. 이상의 수면을 모두 합하면 바로 서른여섯 가지 종류가 되는 것으로, 그 중에 앞의 서른두 가지를 견소단(見所斷)이라고 이름하니, 4제를 관찰할 때 그것은 바로 끊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후의 네 가지를 수소단(修所斷)이라고 이름하는데, 4제를 관찰하고 나서 그 후 오랜 시간 동안 자주자주 도(道)를 수습하여야 비로소 그것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이상의 사실로 볼 때 10수면 중의 살가야견(薩伽耶見, satkaya-d i, 유신견의 원어)은 오로지 1부에만 존재하니, 이를테면 견고소단이 바로 그것으로, 변집견도 역시 그러하다. 계금취는 2부에 모두 존재하니, 이를테면 견고소단과 견도소단이 바로 그것이다. 사견은 4부와 통하니, 이를테면 견고소단·견집소단·견멸소단·견도소단이 바로 그것으로, 견취와 의(疑)도 역시 그러하다. 그리고 그 밖의 탐 등의 네 가지(탐·진·만·무명)는 각기 5부와 통하니, 이를테면 견사제소단과 수소단이 바로 그것이다.26)
  이 중의 어떠한 상을 견고소단이라 하고, 내지는 어떠한 상을 수소단이라고 하는 것인가?27)
  
  
26) 탐·진·만·무명 중 앞의 세 가지는 수혹이기는 하지만 5견과 의(疑)를 연(緣)으로 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며(예컨대 5견에 탐착하므로 그것을 정견이라 주장하고 그러한 견해에 오만해 하고, 나아가 타인을 증오 무시한다), 무명의 경우 그 자체로서 생기하는 독두무명(獨頭無明)이나 5견과 서로 관계하여 생기하는 상응무명은 견소단이지만 탐·진·만과 상응 구기하는 무명은 수소단이자 견소단이기 때문이다. 또한 제법의 인과관계상에서 일시 설정된 5취온을 실유의 자아로 집착하는 유신견은 인과관계상 현행의 결과(이것은 고·비상·비아·공으로 관찰됨)를 대상으로 하는 염오혜(染汚慧)이기 때문에, 변집견 역시 인과관계상의 현행의 결과에 대한 영속·단멸 등의 염오혜이기 때문에 오로지 견고소단이며, 계금취는 자재천 등이 세간의 참된 원인이 아님에도 그것을 상주하는 원인이라고 간주하는 염오혜이자 그릇된 금계를 청정도라고 판단하는 염오혜이기 때문에 견고소단이고 견도소단이다. 그리고 단멸의 입장에서 행위와 행위의 상속을 부정하는 사견은 인(집·도)과 과(고·멸)의 구조를 띤 사제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견취는 유신·변집·사견 등의 저열한 지식을 뛰어난 이치, 즉 사제로 견집(堅執)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는 4제에 대한 의심이기 때문에 견4제소단이다.
27) 즉 5견과 의(疑)는 지적 번뇌이기 때문에 당연히 견혹이지만, 앞서 언급한 나머지 네 가지 수면 즉 탐·진·무명·만이 견소단과 수소단 모두와 통하는 것이라면 어떠한 경우의 탐이 견혹이고 어떠한 경우의 탐이 수혹인가 하는 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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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이러한 성제(聖諦)를 관찰하여 끊어지는 것(견소단의 번뇌 즉 見惑)을 소연의 경계로 삼는 것이라면 견차제소단(見此諦所斷)이라 이름하고, 그 밖의 것은 수소단이라 이름한다.28)
  이와 같이 6수면 중에서 견(見)은 열두 가지로 나누어지고, 의(疑)는 네 가지로 나누어지며, 나머지 네 가지는 각기 다섯 가지(즉 5부의 수면)로 나누어지기 때문에 욕계 중에는 서른여섯 가지의 수면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색계와 무색계의 5부에는 각기 진(瞋)이 제외되며,29) 그 밖의 다른 것은 욕계에서와 동일하기 때문에 색계·무색계에는 각기 서른한 가지의 수면이 있다. 이에 따라 본론(本論)에서 '6수면은 [견의 차별적인] 행상과 [5]부와 [3]계의 차별로 인해 아흔여덟 가지가 된다'고 설하였던 것이다.30)
  이상에서 분별된 98수면 가운데 여든여덟 가지는 인(忍)에 의해 해손(害損)되기 때문에 견소단이며, 열 가지는 지(智)에 의해 해손되기 때문에 수소
  
  
  
28) 5견이나 의(疑)와 같은 지적 번뇌를 소연으로 삼아 일어나는 탐 등은 견소단이며, 지적 번뇌없이 다만 습관적으로 일어난 탐 등은 수소단이다.
29) 그곳에는 진(瞋)수면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진'은 전5식이 감수하는 고수(苦受)에서 수증되는 것인데, 거기에는 고수가 없기 때문에 '진'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곳에서의 상속은 삼매[定]에 의해 윤택해지기 때문이며, 그곳에는 '진'의 이숙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진'은 그 속성상 불선의 악으로 분류되나 상계의 수면번뇌는 악이 아닌 유부무기, 다시 말해 올바른 지혜의 생기를 방해하는 그릇된 의식일 뿐이기 때문이다.(『현종론』 권제25, 앞의 책, p. 138 참조)
30) 이상의 98수면을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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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이다.31)
  이와 같이 논설된 견소단·수소단은 결정적으로 그러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러면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인(忍)에 의해 해손(害損)되는 수면의 경우
  유정(有頂)은 오로지 견소단이지만
  그 밖의 나머지는 견소단·수소단과 통하며
  지(智)에 의해 해손되는 것은 오로지 수소단이다.
  忍所害隨眠 有頂唯見斷
  餘通見修斷 智所害唯修
  
  논하여 말하겠다. [본송에서] 인(忍)이라는 말은 법지(法智)와 유지(類智)의 '인'을 모두 설한 것이다.
  즉 '인'에 의해 해손되는 온갖 수면 중에서 유정지(有頂地, 즉 3계 9지 중의 가장 꼭대기인 非想非非想處)에 포섭되는 것은 오로지 견소단인데, 그것은 오로지 유지인(類智忍, 즉 고·집·멸·도 류지인)으로서만 비로소 능히 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밖의 8지(地,욕계로부터 무소유처)에 포섭되는 것은 견소단·수소단 모두와 통한다. 즉 성자의 경우 법지인(法智忍, 즉 고·집·멸·도법지인)과 유지인에 의해 각기 상응하는 바대로 끊어지기 때문에 오로지 견소단으로 수소단이 아니다.32) 그러나 만약 이생의 경우라면 세속지(世俗智, 즉 유루 6行觀)를 자주 되풀이하여 익힘으로서 끊어지기 때문에 오
  
  
31) 인(忍)과 지(智)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23 참조. 이를테면 욕계에서의 4제의 관찰을 법지(法智)라 하고, 대상[境]과 지식[智]이 법지와 유사한 색계·무색계에서의 4제의 관찰은 유지(類智)라고 하며, 이 같은 '지'를 '지'로서 인가하는 것을 '인'이라 하는데, 후자에 의해 번뇌가 끊어지며, 전자에 의해 이계(離繫)가 확증된다. 즉 '인'이 무간도라면 '지'는 해탈도이다.
32) 즉 욕계의 수면은 법지인(法智忍)에 의해, 유정(有頂)을 제외한 상 2계의 수면은 유지인(類智忍)에 의해 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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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지 수소단으로 견소단이 아니다.
  지(智)에 의해 해손되는 온갖 수면으로서 일체 지(地)에 포섭되는 것은 모두 오로지 수소단이니, 모든 성자와 모든 이생이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모두 무루지와 세속지를 자주 되풀이하여 익힘으로 말미암아 끊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여사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외도의 모든 선인(仙人)들은 견소단의 혹을 능히 항복받아 끊을 수 없으니, 예컨대 『대분별제업계경(大分別諸業契經)』에서 '욕탐을 떠난 모든 외도들에게는 욕계를 소연으로 하는 사견이 현행하는 경우가 있다'고 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33) 아울러 『범망경(梵網經)』에서도 역시 '그들에게는 욕계를 소연으로 하는 온갖 견(見)이 현행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전제(前際)에 대해 분별하는 논자 중에 어떤 이는 완전한 상주론[全常]을 주장하였고, 어떤 이는 부분적인 상주론[一分常]을 주장하였으며, 어떤 이는 제법은 원인 없이 생겨난다는 사실 등을 주장하기도 하였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34) 즉 색계의 혹(惑)은 욕계를 연으로 하여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욕계의 경계에 대해서는 이미 탐을 떠났다. 따라서 그들은 바로 결정코 욕계의 온갖 견을 아직 끊지 못하였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바사사(毘婆沙師)는 그 경의 뜻을 해석하여 "제바달다(提婆達多)의 경우처럼 견을 일으킬 때 잠시 물러난 것일 뿐이다"고 하였다.35)
  
  
33) 구역에서는 『대분별업경』. 『중아함경』 권제44 『분별대업경』 (대정장21, p. 707중)을 말한다. 즉 이 경에서 '욕탐을 떠났다'는 것은 수혹을 복단(伏斷)하였음을 의미하지만, '사견이 현행한다'고 함은 견혹을 끊지 못했음을 나타낸다. 즉 여기서 유여사는 외도 이생은 수혹은 끊을 수 있지만, 아직 정지(正智)를 획득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견혹은 능히 끊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34) 여기서 『범망경』은 『장아함경』 권제14 『범동경(梵動經)』 (대정장1, p. 88), 혹은 『범망육십이견경(梵網六十二見經)』. 즉 그들이 비록 욕탐을 떠났다할지라도 상주론자이기에 상 2계의 제법뿐만 아니라 욕계의 제법을 대상으로 하여 상견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욕계의 견혹이 남아 있는 것이다. 참고로 전제(과거)에 대해 분별하는 견해에는 네 가지 변상론(遍常論)과 네 가지 일분 상론(常論)과 두 가지 무인생론(無因生論)과 네 가지 유변(有邊) 등의 논과 네 가지 불사교란론(不死憍亂論) 등 모두 18견이 있다.(『대비바사론』 권제199, 한글대장경125, p. 557 이하 참조)
35) 이생도 역시 하(下) 8지의 견혹과 수혹을 다 같이 끊을 수 있지만, 욕계의 혹을 떠났음에도 욕계의 오온을 소연으로 하여 사견을 일으키는 것은 그것을 아직 끊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잠시 욕계로 퇴타(退墮)하였기 때문이라는 뜻. 예컨대 제바달다는 4근본정을 획득하고서 신통력으로 어린이로 변화하여 아사세[未生怨]왕의 무릎에 앉아 온갖 재롱을 부리다가 문득 이욕(利欲)을 탐하여 왕이 입 속에 넣어준 침을 삼켰다가 부처의 꾸짖음을 듣고 정려를 획득하였다고 한다.(『대비바사론』 권제85, 한글대장경121, p.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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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상[行]에 다름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견'을 다섯 가지로 나눈 것인데, 그 명칭은 이미 앞에서 열거하였다. 그렇다면 그 자체의 본질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아(我)·아소(我所)와 단(斷)·상(常)과,
  없다고 부정하고, 저열한 것을 뛰어난 것이라 하며,
  원인과 도(道)가 아닌 것을 그릇되이 그것이라고 말하는
  이것이 바로 5견 자체의 본질이다.
  我我所斷常 撥無劣謂勝
  非因道妄謂 是五見自體
  
  논하여 말하겠다. [5취온에 대해] 아(我, 즉 나)·아소(我所, 즉 나의 것)라고 집착하는 이 같은 견해를 일컬어 살가야견(薩伽耶見, satkaya-d i)이라고 한다. 즉 허물어지기 때문에 '살(sad=saT>'이라 하고, 취집된 것이기 때문에 '가야'라고 하였다. 이것은 바로 무상한 화합온(和合蘊)의 뜻으로, '가야(화합온)'가 바로 '살(무상)'이므로 살가야라고 이름하였다. 곧 이 살가야는 바로 5취온으로, 영속[常]과 단일[一]의 관념을 비판하기 위하여 이 같은 명칭을 설정한 것이다. 요컨대 [영속 단일론자들은] 이러한 관념을 선행시키고 난 후에 비로소 자아를 주장하기 때문이다.36)
  
  
36) 보광이나 법보 모두 이를 경부사의 해석으로 평석하고 있다. 즉 경량부에서는 살가야를 동격한정복합어(持業釋)로 해석하여 무상의 오취온이라 하였다. 따라서 살가야견은 비실재인 허위의 5취온에 대한 지식이다.(이 경우 壞身見·虛僞身見으로 번역됨), 이 때 견의 소연은 실재하지 않으며 단일하지 않다. 그리고 이 같은 견해 『대비바사론』 (권제8, 대정장27, p. 36상 ; 한글대장경118, p. 167) 상에서 비유자(譬喩者)의 주장으로 전해진다. "살가야견은 실재적인 대상[實所緣]을 갖지 않는다. 곧 살가야는 실재적인 아(我)와 아소(我所)에 대한 주장이지만, 궁극적으로 볼 때 아와 아소는 실재하지 않는다. 마치 새끼줄을 뱀으로 보고, 나무 그루터기를 사람 등으로 착각하듯이 이것 역시 실재적 대상을 갖지 않는 인식[見]인 것이다." 이에 반해 유부에 의하는 한 살가야견은 실재하는 오취온(즉 有身)에 대해 그것을 '아' 등의 단일한 실재로 파악하는 그릇된 지식이란 뜻이며, 그래서 보통 유신견(有身見)으로 번역하는 것이다.(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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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대해 비바사자(毘婆沙者)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실재하는 것[有]이기 때문에 '살(saT>'이라 이름하고, 신(身, 즉 가야)의 뜻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즉 어떠한 소연도 없이 아(我)와 아소를 헤아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견은 실재하는 신[有身]을 소연으로 한다고 설해야 한다. 다시 말해 살가야를 소연으로 하여 이러한 견해를 일으키기 때문에 이러한 견을 살가야견이라는 명칭으로 나타낸 것이다."
  온갖 '견'으로서 다만 유루법을 연으로 하는 것은 모두 마땅히 '살가야'라는 명칭으로써 나타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단지 아와 아소에 대한 집착에 대해서만 이 명칭을 나타낸 것은 이러한 견해는 살가야(즉 5취온)를 연으로 하여 일어는 것으로, [그것이 진실의] 아와 아소가 아님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으니, 아와 아소는 필경 존재하지 않기 때문으로, 계경에서 설한 바와 같다. "세간의 사문과 바라문들로서, 자아를 주장하는 모든 이들이 두루 관찰하는 일체는 오로지 5취온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필추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37)
  또한 바로 그같이 주장된 아·아소의 존재에 대해 단멸[斷]한다고 주장하고, 상주[常]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일컬어 변집견(邊執見, antagraha-d i)이라고 하는데, 그릇되이 단멸과 상주의 극단[邊]에 집착하여 그것을 취하기 때문이다.
  또한 실유의 존재인 고(苦) 등의 진리[諦]에 대해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부정의 견해를 일으키는 것을 일컬어 사견(邪見, mithya-d i)이라고 한다. 물론 일체의 그릇된 견해[妄見, 즉 5견]는 모두 전도되어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아울러 마땅히 '사견'이라고 이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단지
  
  
  
37) 『잡아함경』 권제2 제45경(대정장2, p. 11중), "만약 사문과 바라문이 자아가 존재한다고 본다면 그것은 모두 바로 이러한 5음(陰)에서 자아를 보는 것이다." 즉 아와 아소에 대한 주장을 일으키는 것은 뭔가 특별한 법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오온상에서만 일어나는 것이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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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제의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정하는 것만을 사견이라고 일컬은 것은 그 허물이 더욱 심하기 때문이니, 마치 취소(臭蘇)나 악집악(惡執惡) 따위로 설하는 것과 같다.38) 또한 이것만이 오로지 감손(減損)의 견해이며, 그 밖의 다른 것은 증익(增益)의 견해이기 때문이다.39)
  또한 저열한 것에 대해 수승하다고 하는 것을 일컬어 견취(見取, d i-paramarsa)라고 한다. 여기서 '저열한 것'이란 유루를 일컫는 말로서, 성도에 의해 끊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열한 것에 집착하여 수승하다고 하는 것을 모두 일컬어 '견취'라 한다고 하였으므로, 이치상으로 볼 때 '견등취(見等取)' 즉 '견해 따위를 [수승하다고] 취하는 것'이라고 하는 명칭을 설정해야 하겠지만, '따위'라고 하는 말을 생략하고 단지 '견취'라고만 이름하였다.
  또한 원인과 도(道)가 아닌 것에 대해 그것을 원인과 도라고 하는 일체의 견해를 모두 계금취(戒禁取, lavrata-paramarsa)라고 이름한다. 이를테면 대자재천(大自在天, Mahesvara)이나 생주신(生主神, prajapai), 혹은 그 밖의 존재는 세간의 참된 원인이 아님에도 그릇되이 원인이라고 주장하고, 물이나 불에 뛰어드는 등의 여러 가지 삿된 행은 하늘에 태어나는 원인이 아님에도 그릇되이 참된 원인이라고 집착하며, 오로지 계금(戒禁)을 수지하거나 수(數)와 상응(相應)의 지혜 따위는 해탈의 도가 아님에도 그릇되이 해탈의 도라고 집착하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40) 또한 이치상 실로 '계금등취
  
  
38) 소(蘇)는 자소(紫蘇, 차조기로 이름되는 꿀풀과에 속하는 일년초). 집악은 전타라(旃陀羅, candala, 인도의 천민). 즉 냄새나는 자소 중에서도 더 심하게 냄새나는 것을 '취소'라 하고, 천민 중에서도 악인을 '악집악'이라고 함. 4제의 진리성을 부정하는 것은 이처럼 사견 중의 더욱 사견이기 때문에, 그것만을 '사견'이라 일컬었다는 뜻이다.
39) 즉 이 같은 사견은 실유의 4제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감손의 견해이지만, 변집견 중의 상견과 그 밖의 3견은 무상하고 저열하고 실재가 아니고 청정도가 아닌 것을 상주하고 뛰어나고 실재하고 청정도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긍정하려는 증익의 주장이다.
40) 불이나 불에 뛰어든다고 함은 하늘에 태어나기 위해 몸을 불로 지지거나 갠지즈 등의 강에서 목욕하는 것을 말하며, 계금을 수지하는 것은 해탈하기 위해 개처럼 살고[狗戒禁] 재나 소똥을 온몸에 바르는 식으로 고행하는 것을 말한다. '수'와 '상응'은 샹캬(Sa khya)와 요가(Yoga)의 의역어로서, 이 학파에서 추구하는 지혜란 그들의 형이상학적 실재인 프라크리트(물질적 질료)와 푸루샤(순수자아)에 대한 식별지를 말한다. 『현종론』 (권제25)에서는 앞의 생천의 참된 원인이 아닌 것을 원인으로 헤아리는 것을 증상생도(增上生道)이고, 뒤의 해탈의 참된 도가 아닌 것을 도라고 헤아리는 것을 결정승도(決定勝道)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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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戒禁等取)'라고 이름하여야 하지만 '등'이라는 말을 생략하여 다만 '계금취'라고 이름한 것이다.
  5견의 본질은 이상과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 [세간의] 참된 원인이 아닌 것에 대해 그것이 바로 참된 원인이라고 하는 견해(즉 非因計因의 계금취견)를 일으킨다면, 이와 같은 견해는 [원인에 미혹한 것인데] 어째서 견집소단(見集所斷)이 아닌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대자재천 따위에 대해
  원인이 아님에도 원인이라고 그릇되이 주장하는 것은
  상도(常倒)와 아도(我倒)로부터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오로지 견고소단(見苦所斷)이다.
  於大自在等 非因妄執因
  從常我倒生 故唯見苦斷
  
  논하여 말하겠다. 대자재천과 생주신 혹은 그 밖의 존재(이를테면 자성prakriti이나 시간kala)가 세간의 원인으로 그것이 세간을 낳았다고 주장하는 이는 반드시 먼저 그것의 본질이 상주하는 것[常]이며, 단일한 것[一]이며, 자아이며, 작자라고 헤아린 후에 비로소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잠시 고제(苦諦)를 관찰할 때 자재천 등에 대한 상집(常執)과 아집(我執)은 영원히 끊어져 남김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생겨난 모든 것의 원인[所生因]이라는 주장도 역시 끊어지게 되는 것이다.41)
  
  
41) 자재천 등 세간의 참된 원인이 아닌 것을 참된 원인이라고 계탁하는 계금취견은, 자재신 등을 상주하는 것이고 진정한 자아라고 하는 주장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오온취집의 고과(苦果) 즉 현실에 미혹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고제(苦諦)를 현관하면 즉각 제거되는 견고소단의 번뇌이다.(『대비바사론』 권제119, 한글대장경125, p. 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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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물이나 불에 뛰어드는 등의 여러 가지 삿된 행이 바로 하늘에 태어나는 원인이라고 주장하거나, 혹은 다만 계금(戒禁) 등을 수지하는 것에 의해 청정도를 획득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즉 非道計道의 계금취견)은 견고소단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42) 그런데 본론(本論)에서는 이같이 설하고 있다. "온갖 외도가 있어 이와 같은 견해를 일으키고 이와 같은 논의를 주장한다. 만약 어떤 사부(士夫) 보특가라(補特伽羅)가 소처럼 행동하는 계[牛戒], 사슴처럼 행동하는 계[鹿戒], 개처럼 행동하는 계[狗戒]를 수지하면 바로 청정과 해탈과 출리를 획득하여 모든 고락을 영원히 초월하며 고락을 초월한 경지에 이르게 된다. 즉 이와 같은 따위의 [청정 등의] 참된 원인이 아닌 것을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이 같은 일체의 견해는 바로 계금취로서 견고소단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43) 나아가 그 밖의 내용 또한 그곳에서 널리 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
  그런데 이것이 다시 어떤 이유에서 견고소단이 되는 것인가?
  고제(苦諦)에 미혹한 것이기 때문이다.44)
  [그럴 경우] 유루를 소연으로 하는 혹(惑)은 모두 고제에 미혹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크나큰 과실을 범하게 된다.45) 또한 어떠한 상의 차별을 갖는 계금취를 견도소단이라고 설할 수 있을 것인가?
  온갖 견도소단의 법을 소연으로 하여 생겨난 것이다.46)
  
  
42) 비인계인(非因計因)의 계금취견은 상집(常執)과 아집(我執)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견고소단이라면 비도계도(非道計道)의 계금취견은 해탈에 대한 그릇된 방법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도제에 미혹한 것이기 때문에 견도소단이어야 한다는 논주 세친은 힐난. 그러나 유부에 의하면 도제를 비방하고 사견 등을 청정도라고 여기는 것은 견도소단이지만, 유루계를 해탈계로 여기는 것은 견고소단이다.
43) 『발지론』 권제20(한글대장경176, p. 501-502). 이하 갠지즈 강물에 목욕하는 것, 범행을 수지하는 따위의 계금취도 견고소단임을 밝히고 있다.
44) 우계 등을 청정도라고 간주하는 것은 우계의 진상을 철저히 관찰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으로, 그것 역시 자재천과 마찬가지로 현재 추과(麤果)인 유루의 5취온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45) 비도계도(非道計道)는 고제에 미혹한 것이기 때문에 견고소단이라 할 경우, 다음의 네 가지 과실을 범하게 된다. 본 논설은 그 첫 번째 과실. 즉 유루를 소연으로 한 혹으로서 고제에 미혹하지 않은 것은 없으며(욕계 견고소단은 10수면 전부이다), 그럴 경우 유루를 소연으로 한 그 같은 혹이 왜 견집소단은 되지 않는가 하는 이유를 논증해야만 한다.
46) 이는 유부의 답으로, 사견 등 여덟 가지 견도소단의 수면을 소연으로 생겨난 계금취가 견도소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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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그것도 역시 마땅히 고제에 미혹한 것이라고 일컬어야 하기 때문에 [견고소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47) 또한 도제를 소연으로 하는 사견과 의(疑)는 혹은 부정하고 혹은 의심하여 해탈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어떻게 이것(계금)들을 능히 영원한 청정(즉 열반)을 획득하는 도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인가?48) 만약 그것이 참된 해탈도를 부정하고 그 밖의 별도의 청정의 원인이 있다고 하는 헛된 주장이라면, 그것은 바로 그 밖의 다른 도가 있어 능히 청정을 획득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므로 사견 등이 아니어야 할 것이며, 그럴 경우 견도소단의 제법을 소연으로 한다는 그 같은 이치 역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만약 견집소단·견멸소단의 사견 등을 소연으로 하는 [계금취를] 청정의 원인이라고 한다면 이 같은 계금취는 다시 어떠한 이유에서 그것(집제와 멸제)을 관찰함으로써 끊어지는 것이 아닌 것인가?49) 따라서 [비바사사(毘婆沙師)가 앞서] 주장한 뜻에 대해서는 마땅히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50)
  
  
47) 계금취의 소연이 되는 사견 등의 여덟 가지 수면도 유루법으로서 고제 하에 포섭되기 때문에 견고소단이지 견도소단이 아니지 않는가? 만약 정도(正道)를 비방하고 사도(邪道)를 주장하는 것은 도제의 진상(道·如·行·出)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견도소단이라고 한다면, 계금취 등도 역시 업의 원인에 미혹한 것이기 때문에 견집소단이라고 해야 한다는 힐난.
48) 즉 견도소단의 계금취가 견도소단의 사견 등을 소연으로 하여 일어나는 것이라면 그 때의 사견은 해탈도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인데, 그 같은 사실을 주장하는 외도가 어떻게 계금 등을 해탈도로 여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힐난.
49) 만약 도제를 비방하고 그것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견 등을 소연으로 하는 계금취를 견도소단이라고 한다면, 집제나 멸제를 비방하고 그것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견을 청정 해탈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계금취는 어째서 견집소단·견멸소단이 아닌가 하는 힐난.
50) 중현에 의하면 해탈도가 아닌 것을 해탈도로 집착하면서 도제를 비방하는 것이면 바로 견도소단이다.(『현종론』 권25, 앞의 책147) 즉 도가 아닌 것을 도라고 간주하는 이른바 비도계도(非道計道)에는 개처럼 사는 유루도를 해탈도라고 집착하고, 도제를 비방하는 사견 등을 청정도로 집착하는(이를 親迷道라고 함) 등의 두 종류가 있는데, 전자는 거칠게 나타나는 과상(麤果相, 이를테면 자재천)에 미혹하여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견고소단이며, 후자는 성도를 직접 어긴 것이라 하더라도 인과의 상에 대해 별도로 미혹하여 집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견도소단이다.(『대비바사론』 권제199, 대정장27, p. 994,상 ; 한글대장경125, p. 54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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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이 계금취는 상주라는 전도(顚倒) 즉 상도(常倒)와 자아라는 전도 즉 아도(我倒)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그렇다면 단지 이러한 두 가지 종류의 전도만이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전도에는 모두 네 가지 종류가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으로, 첫째는 무상한 것에 대해 상주하는 것[常]이라고 집착하는 전도이며, 둘째는 온갖 괴로운 것에 대해 즐거운 것[樂]이라고 집착하는 전도이며, 셋째는 부정(不淨)한 것에 대해 청정한 것[淨]이라고 집착하는 전도이며, 넷째는 무아에 대해 자아[我]라고 집착하는 전도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전도의 본질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네 가지 전도 그 자체의 본질은
  말하자면 세 가지 견(見)으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오로지 뒤바뀌고, 헤아리고, 증익하기 때문에 전도인데
  상(想)과 심(心)의 전도는 '견'의 힘에 따른 것이다.
  四顚倒自體 謂從於三見
  唯倒推增故 想心隨見力
  
  논하여 말하겠다. 세 가지 '견'에 따라 4전도를 설정한 것으로, 이를테면 변집견 중에서는 오로지 상견(常見)만을 취하여 상주의 전도[常倒]라 하였으며, 온갖 견취 중에서는 [괴롭고 부정한 것을] 즐겁고 청정한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만을 취하여 즐거움의 전도[樂倒]와 청정함의 전도[淨倒]라 하였으며, 유신견 중에서는 오로지 아견(我見)만을 취하여 자아의 전도[我倒]라 하였다.51)
  
  
51) 4전도의 자성을 이처럼 변집견·견취·유신견의 일부라고 하는 주장은 오로지 『구사론』상에서만 설해지고 있을 뿐이다. 즉 단·상의 변견(邊見) 중의 상견, 저열한 것을 수승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견취 중에서는 낙(樂)과 정(淨)의 두 가지만을, 아견(我見)과 아소견(我所見)의 유신견 중에서 아견만을 취하여 4전도로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유부 비바사사(이하 어떤 이의 설)에 따르면 유신견 중의 '아'는 아소에 대해 자재력이 있기 때문에 아소견은 아견에 포섭되며, 따라서 4전도는 견취와 유신견 전부와 변집견의 일부를 자성으로 한다.(『현종론』 권제25, p. 14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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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어떤 이(毘婆沙師)는 설하기를, "자아의 전도는 유신견 전부를 포섭한다"고 하였다.
  자아의 전도가 어떻게 아소견(我所見)을 포섭할 수 있는 것인가?
  어떻게 해서 포섭되지 않는 것인가?
  『도경(倒經)』 에 따랐기 때문으로,52) "아(我)를 주장[計]하는 모든 이는 그러한 존재[事, 즉 '아'의 소유인 5취온]에 대해 자재력을 가지니, 이것이 바로 아소견인 것이다." 이것은 바로 아견은 두 가지 갈래[門]에 따라 일어난다는 사실을 말한 것으로, '아'와 '아에 속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53) 그러나 만약 아견과 아소견을 다른 견이라고 한다면, '아에 의한 견해'와 '아를 위한 견해'도 역시 마땅히 다른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54)
  어떠한 까닭에서 그 밖의 혹(惑)은 전도가 아닌 것인가?55)
  요컨대 세 가지 조건을 갖추어 두드러진 것만을 전도라고 한다. 즉 세 가지 조건이라고 하는 것은, 한결같이 전도되어 있기 때문이며, 추리하여 헤아리는 성질[推度性]이기 때문이며, 그릇되이 증익(增益)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계금취는 한결같이 전도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적으나마 청정을 연으로 하기 때문에 [전도가 아니다].56) 또한 단견(변집견의 일부)과 사견은 허무의 갈래
  
  
52) 원문에서는 '도전(倒纏)'이나 범본에 따라 『도경(倒經, Vipary sa-s tra)』으로 정정 번역한다. 4전도는 『칠처삼관경(七處三觀經)』 (대정장2, p. 876하)이나 『대집법문경』 권상(동1, p. 229하)에서 언급되고 있지만, 이하의 내용은 설해지고 있지 않다.
53) 즉 아소견(我所見)이란 의복 등의 물건을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는 견해로서 아견에 포섭된다. 따라서 아견은 '아' 자체와 아소의 두 갈래에서 일어난다는 뜻.
54) 즉 아와 아소는 두 가지 갈래에 의해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별도로 설한 것일 뿐 개별적 존재가 아니다. 즉 '아(我,I)'는 8전성(轉聲) 가운데 제1 주격이고, '아에 속한 것[我所, mine]'은 제6 소유격의 표현일 뿐이다. 그것이 만약 그렇지 않고 개별적 존재라면, 제3 구격(具格)인 '아에 의한 것[由我, by me]'과 제4 위격(爲格)인 '아를 위한 것[爲我, for me]'에 대한 '견'도 역시 각기 다른 개별적 존재여야 한다. 그러나 그 모두는 결국 동일한 '아'에 대한 주장일 뿐이다.
55) 온갖 번뇌는 모두 전도되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그 모두를 '전도'라고 해야 할 것임에도 어찌하여 변집견 등 3견만을 '전도'라고 하는 것인가 하는 물음.
56) 계금취는 추리하고 헤아려 일어나는 번뇌로서 점점 더 증익하는 것이지만, 그 중에는 유루의 관행으로 염오함을 떠나 적으나마 청정을 획득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한결같이 전도된 것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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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無門]에서 일어나는 것이어서 그릇되이 증익하는 것이 아니며,57) 그 밖의 번뇌는 능히 추리하여 헤아리는 성질이 아니니, 견(見)의 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다.58) 즉 세 가지 조건을 갖추어 두드러진 것만이 전도를 성취하니, 그렇기 때문에 그 밖의 혹은 전도가 아닌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째서 계경 중에서 "무상을 상(常)이라고 간주하는 것에는 상(想)과 심(心)과 견(見)의 전도가 있으며, 고와 부정과 무아의 경우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하다"고 말하였던 것인가?59)
  이치상으로 본다면 실로 오로지 '견'만이 바로 전도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상'과 '심'은 '견'과 상응하며 그 행상이 동일하기 때문에, '견'에 따라 역시 전도라는 명칭을 설정한 것일 뿐이다.60)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째서 수(受) 등은 [전도라고] 설하지 않는 것인가?
  그것은 세간의 상식적인 사실[極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심'과 '상'의 전도는 세간의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지만, '수' 등의 전도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경에서 설하지 않은 것이다.61)
  그리고 이와 같은 모든 전도는 예류과(預流果)에서 이미 끊어지니, '견'과 그 상응법은 견소단이기 때문이다.62)
  
  
57) 변집견 중의 단견과, 사견은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관찰하여도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관찰하지는 않기 때문에 감손의 견해일 뿐 증익의 견해가 아니다. 허무의 갈래 즉 무문(無門, 『현종론』에서는 壞事門)이란 세계를 존재한다거나, 영원한 것, 즐거운 것으로 보지 않고 반대로 부정적으로 관찰하여 감손 파괴하는 견해의 갈래를 말한다.
58) 이를테면 5견을 제외한 탐·진·만·의 등은 한결같이 전도된 것이고 증익하는 것이지만, '견'을 본질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추탁(推度)의 성질이 아니다.
59) 『대집법문경(大集法門經)』 권상(대정장1, p. 229하) : 『칠처삼관경(七處三觀經)』(대정장2, p. 876하). 즉 상(常)·낙(樂)·아(我)·정(淨)에 각기 상(想)·심(心)·견(見)의 세 전도가 있어 도합 열두 가지의 전도가 있다고 설하고 있다.
60) 즉 '상'과 '심'은 추리하고 헤아리는 성질이 아니기 때문에 전도가 아니지만, '견'과 상응하고 그 행상이 동일하기 때문에, '견'의 전도된 힘에 따라 역시 전도라고 하는 명칭을 설정하였을 뿐이다.
61) 즉 도상(倒想)이나 도심(倒心)은 세간에서 잘 쓰이는 말이지만 도수(倒受)라고 하는 등의 말은 잘 사용되지 않는다는 뜻.(『대비바사론』 권제104, 한글대장경122, p. 79 참조)
62) 유부에 의하면 제 견(見)과 그 상응법은 견도소단이기 때문에 이미 견도를 획득한 예류과는 이것을 모두 끊은 성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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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유여사는 이같이 설하고 있다. "전도에는 열두 가지가 있다. 이를테면 무상에 대해 상(常)이라고 헤아리는 전도 중에 상(想)과 심(心)과 견(見)의 세 종류의 전도가 있으며, 내지는 무아에 대해 아(我)라고 헤아리는 전도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그리고 이 중에서 여덟 가지는 오로지 견소단이며,63) 네 가지는 견소단·수소단에 통하니, 이를테면 낙(樂)과 정(淨)의 '상'과 '심'의 전도가 바로 그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아직 욕탐을 떠나지 못한 성자는 즐거움의 생각과 청정함의 생각을 떠났음에도 어찌하여 욕탐을 일으키는 것인가?"64)
  그러나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이 같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만약 낙(樂)과 정(淨)의 '상'과 '심'의 전도가 현행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성자에게도 '낙'과 '정'의 전도가 있다고 인정한다면 성자도 역시 유정(즉 我)에 대한 생각[想]과 마음[心]을 일으키므로 역시 마땅히 '아'의 전도가 존재한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인 등이나 자신에 대해 유정이라는 생각과 마음을 떠나 욕탐을 일으키는 일이 없기 때문에, 계경에서 '만약 다문(多聞)의 성(聖) 제자가 고성제에 대해 여실히 지견(知見)하고, 내지 [집·멸·도성제에 대해 여실히 지견하면] 그 때 그 성 제자는 무상을 상이라고 헤아리는 상과 심과 견의 전도를 모두 영원히 끊게 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하고 있기 때문에 '상'과 '심'은 오로지 '견'의 전도와 상응하는 힘을 취하여 일어나는 것일 뿐이니, 전도란 바로 이런 것으로 다른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65) 그런데 성자는 혹 어떤 때 잠시 미란(迷亂)하
  
  
63) 무상과 무아에 대해 각기 상(常)과 아(我)라고 헤아리는 상(想)·심(心)·(見)의 여섯 전도와, 고와 부정에 대해 각기 낙과 정이라고 헤아리는 견의 전도는 견도소단이다.
64) 『대비바사론』 권제104(한글대장경122, p. 78)에 의하면 이상은 분별론자(대중부의 일파)의 설. 즉 낙상(樂想)·낙심(樂心)과 정상(淨想)·정심(淨心)이 수도단이 아니고 오로지 견소단이라고 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견도위의 성자가 욕탐을 일으키는 것인가? 그것은 견도에서는 아직 낙·정의 심(心)·상(想)을 끊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65) 즉 유부에 의하면 '상'과 '심'은 '견'과 상응하며, '견'과 행상을 같이 하기 때문에 '상'과 '심'의 전도는 다만 '견'의 전도에 따라 설정된 것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그 같은 12전도는 모두 견도소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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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 때문에 갑자기 경계에 대한 욕탐이 현전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는 마치 돌아가는 불바퀴에 대해, 그림으로 그려진 약차(藥叉)에 대해 잠시 미란하는 것과 같다."66)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째서 존자 경희(慶喜)는 존자 변자재(辯自在)에게 다음과 같이 고하였을 것인가?67)
  생각[想]에 어지러운 전도가 있기에
  그대의 마음이 몹시 타오르는 것으로
  그 같은 생각을 멀리 떠나게 되면
  탐이 종식되어 마음은 바로 청정해지리라.68)
  그래서 유여사는 다시 이와 같이 설하고 있는 것이다. "여덟 가지의 '상'과 '심'의 전도는 유학의 성자로서는 아직 모두를 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여덟 가지 전도는 종국적으로 참답하게 성제(聖諦)를 지견(知見)함으로써 비로소 영원히 끊을 수 있으며, 이를 떠나 그 밖에 달리 영원히 끊을 만한 방편이 없으니, 그래서 이와 같은 주장은 그 같은 경설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다."69)
  
  
  
66) 돌아가는 불바퀴를 보고 그것을 순간적으로 실재하는 불바퀴[旋火輪]라고 생각하고, 그려진 약차를 보고 순간적으로 실재하는 약차로 생각하여 공포를 느끼는 것처럼 '상'과 '심'의 전도가 일어날지라도 그것은 실재하는 대상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뜻.
67) 여기서 경희는 아난다(구역에서는 大德 阿難). 변자재(Va g sa, 구역에서는 婆耆舍)에 대해서는 『증일아함경』 권제3 「제자품」 제4(대정장2, p. 557중)에 나온다. 여기서는 붕기사(鵬耆舍).
68) 변자재는 예류과의 성자. 즉 상(想)의 전도가 있기 때문에 변자재의 마음이 욕탐에 시달리지만 그 후 무학과를 증득하여 '상'의 전도를 끊으면 욕탐은 소멸하고 마음은 청정해진다는 뜻. 이는 곧 '상' 등의 전도는 수소단과도 통한다는 경증이다.
69) 여기서 유여사는 보광에 의하면 경부사(經部師)이다. 이는 이를테면 앞의 유여사와 비바사사의 설의 절충으로, 12전도에서 네 가지 '견' 전도는 오로지 4제 이치에 대한 미혹[迷理]이기 때문에 견소단이지만, '상' '심'의 8전도는 이치와 정의(情意)에 공통된 미혹[迷理事]이기 때문에 견소단·수소단으로, 정의적 미혹은 오로지 수소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4제를 여실 지견하면 반드시 견소단 뿐만 아니라 수소단의 혹도 끊을 수 있기 때문에(즉 견도 제16심인 道類智부터는 수도임) 비바사사가 인용한 경설은 전도 영단(永斷)의 방편을 설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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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로지 견(見)수면에만 많은 차별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 밖의 수면에도 역시 [차별의 상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만(慢)에도 역시 차별이 있다.
  어떠한 차별이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만(慢)은 일곱 가지로, 9만은 3만에 따른 것인데
  그것들은 모두 견소단과 수소단에 통하지만
  성자에게는 살생의 전(纏) 등이 현행하지 않듯이
  수소단의 그것도 현행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慢七九從三 皆通見修斷
  聖如殺纏等 有修斷不行
  
  논하여 말하겠다. 바야흐로 만수면의 차별에는 일곱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만(慢)이며, 둘째는 과만(過慢)이며, 셋째는 만과만(慢過慢)이며, 넷째는 아만(我慢)이며, 다섯째는 증상만(增上慢)이며, 여섯째는 비만(卑慢)이며, 일곱째는 사만(邪慢)이다.
  즉 마음으로 하여금 잘난 체하고 거들먹거리게 하는 것[高擧心]에 대해 모두 '만(慢)'이라고 하는 명칭을 설정한 것으로, 일어나는 행상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일곱 가지 종류로 나눈 것이다.
  [자기보다] 열등하거나 동등한 이에 대해 순서대로 자기가 뛰어나다고 하거나 동등하다고 하여 마음으로 하여금 잘난 체하게 하는 것을 모두 '만'이라고 설한다. [자기와] 동등하거나 뛰어난 이에 대해 순서대로 자기가 뛰어나다고 하거나 동등하다고 하는 것을 모두 '과만'이라고 이름한다. [자기보다] 뛰어난 이에 대해 [자기가 그들보다] 뛰어나다고 하는 것을 일컬어 '만과만'이라고 한다. 오취온에 대해 그것을 자기[我]라고 하거나 자기의 것[我所]이라고 집착하여 마음으로 하여금 잘난 체하게 하는 것을 일컬어 '아만'이라고 한다. 아직 증득하지 않은 수승한 덕성을 이미 증득하였다고 하는 것을 일컬어 '증상만'이라고 한다. [자기보다] 월등히 뛰어난 이에 대해 자기가 조금 열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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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다고 하는 것을 일컬어 '비만'이라고 한다. 아무런 덕도 없으면서 자기에게 덕이 있다고 하는 것을 일컬어 '사만'이라고 한다.
  그런데 본론(本論)에서는 설하기를, "만의 종류에는 아홉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동등한 이에 대해 내가 뛰어나다고 하는 만의 종류[我勝慢類]이며, 둘째는 동등한 이에 대해 나와 동등하다고 하는 만의 종류[我等慢類]이며, 셋째는 뛰어난 이에 대해 내가 조금 열등하다고 하는 만의 종류[我劣慢類]이며, 넷째는 뛰어난 이에 대해 그는 나보다 조금 뛰어난 점이 있다고 하는 만의 종류[有勝我慢類]이며, 다섯째는 동등한 이에 대해 그는 나와 동등한 점이 있다고 하는 만의 종류[有等我慢類]이며, 여섯째는 그는 나보다 열등한 점이 있다고 하는 만의 종류[有劣我慢類]이며, 일곱째는 그는 나보다 뛰어난 점이 없다고 하는 만의 종류[無勝我慢類]이며, 여덟째는 그는 나와 동등한 점이 없다고 하는 만의 종류[無等我慢類]이며, 아홉째는 그는 나보다 열등한 점이 없다고 하는 만의 종류[無劣我慢類]이다."70)
  이와 같은 아홉 가지 종류의 만은 앞에서 언급한 7만 중의 세 가지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세 가지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앞에서 언급한 만과 과만과 비만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이와 같은 세 가지 만이 만약 아견(我見)에 의거하여 행해(行解)를 낳을 경우 차례로 두드러짐이 있기 때문에 세 가지 만의 세 가지 유형(즉 9만)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71) 즉 처음의 세 가지는 순서대로 과만과 만과 비만이며, 중간의 세 가지는 순서대로 비만과 만과 과만이며, 마지막 세 가지는 순서대로 만과 과만과 비만인 것이다.72)
  
  
70) 『발지론』 권제20(한글대장경176, p. 499).
71) 즉 만·과만·비만의 세 가지는 아견을 근본으로 하는 것으로, 상대방의 상태와 그것에 대한 자기 자신의 태도[行解]에 의해 9만을 성취하게 된다.
72) 즉 '내가 뛰어나다'고 하는 것은 바로 '과만'의 종류이며, '나와 동등하다'고 하는 것은 바로 '만'의 종류이며, '내가 조금 열등하다'고 하는 것은 바로 '비만'의 종류이다. '그는 나보다 조금 뛰어난 점이 있다'고 하는 것은 바로 '비만'의 종류이며, '나와 동등한 점이 있다'고 하는 것은 바로 '만'의 종류이며, '나보다 열등한 점이 있다'고 하는 것은 바로 '과만'의 종류이다. '나보다 뛰어난 점이 없다'고 하는 것은 바로 '만'의 종류이며, '나와 동등한 점이 없다'고 하는 것은 바로 '과만'의 종류이며, '나보다 열등한 점이 없다'고 하는 것은 바로 '비만'의 종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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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보다] 월등히 뛰어난 이에 대해 자기가 조금 열등하다고 말한다면 '비만'을 성취하는 것이니, 잘난 체함[高擧]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나보다 열등한 점이 없다고 하는 만의 종류[無劣我慢類]'에서 잘난 체 함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이와 같이 자신이 애락(愛樂)하는 뛰어난 유정의 무리에 대해 비록 자기 자신은 지극히 열등한 자임을 알고 있을지라도 스스로를 존중하는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73)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은 바야흐로 『발지론』에 의거하여 해석한 것이다.74)
  그러나 『품류족론』에 의거하여 만의 종류를 해석할 것 같으면 바야흐로 '내가 뛰어나다고 하는 만[我勝慢]'은 세 가지 만으로부터 도출된 것으로, 이를테면 만과 과만과 만과만의 세 가지가 바로 그것이니, 열등하고 동등하고 수승한 경계를 관찰하는 데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75)
  그렇다면 이와 같은 7만은 무엇에 의해 끊어지는 것인가?
  일체의 만은 모두 견소단·수소단과 통한다.
  모든 수소단의 만은 성자가 아직 그것을 끊지 않았을 때에 현행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이는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76) 이를테면 수소단의 만일지라도 성자에게는 결정코 현행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아직 욕탐을 떠나지 않은 성
  
  
73) 예컨대 전다라(栴茶羅, 천민)는, 그가 비록 세상이 다 함께 혐오하는 자임을 스스로 알고 있을지라도 좋은 점을 드러내어 지어야 할 바에 대해 집착할 때에는 자신을 존중하게 되기 때문에, 여기에도 고거심(高擧心)은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74) 『발지론』 권제20(한글대장경176, p. 489), '모든 만(慢), 그것은 모두 자기 집착[自執]이다.'
75) 『광기』에 의하면 '내가 뛰어나다고 하는 만[我勝慢]' 중에서 열등한 경계를 관하여 자기가 뛰어나다고 하는 것은 바로 '만'에 포섭되고, 동등한 경계를 관하여 자기가 뛰어나다고 하는 것은 바로 '과만'에 포섭되며, 수승한 경계를 관하여 자기가 뛰어나다고 하는 것은 바로 '만과만'에 포섭된다고 하였다. 현존 『품류족론』에서는 7만에 대해서는 논설하고 있어도 9만에 대한 언급은 없다.(권제1, 한글대장경117, p. 20-21)
76) 7만 중만과 아만을 제외한 5만은 수소단이기 때문에 욕탐을 떠나지 않은 성자에게 일어나는 일이 있지만, 만과 아만은 아직 끊지 않았을지라도 결정코 일어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881 / 1397] 쪽
  자에게] 살생의 전(纏)이 현행하지 않는 것과 같다. 즉 이것은 수소단이지만 모든 성자에게는 필시 현행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살생의 전'이란 이러한 혹(惑)에 의해 고의적인 의사[故思]를 발동시켜 중생의 생명을 끊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본송에서] '등'이라고 말한 것은 투도와 음행(즉 욕사행)과 허광어(즉 거짓말)의 전(纏)과, 무유애(無有愛)의 전부와 유애(有愛)의 일부도 역시 그러함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무유애란 어떠한 법을 일컫는 말인가?
  이를테면 3계의 무상(無常)으로, 이에 대해 탐구(貪求)하는 것을 무유애라고 한다.77) 그리고 유애의 일부란 이를테면 '원컨대 당래 애라벌나(藹羅伐拏,Airava a, 제석천이 타는 용왕) 대용왕 따위가 되리라'고 하는 것을 말한다.
  즉 이러한 [살생 등의] 온갖 '전'과 '애'는 모두 수소단을 연으로 하기 때문에 오로지 수소단일 뿐이다.78)
  만의 종류 등에 수소단이 있음을 이미 논설하였다.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아직 그것을 끊지 못한 성자에게도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만(慢)의 종류 등과 아만과
  악작 중의 불선은
  성자에게 존재하더라도 일어나지 않으니
  견(見)과 의(疑)에 의해 증장된 것이기 때문이다.
  
  
  
77) 3계의 무상이란 3계의 중동분 상의 멸상(滅相)으로, 바로 중동분의 존재를 단멸시키는 이 같은 멸상에 집착하는 것을 무유애(vibhava-t a)라고 한다. 이에 반해 유애(bhava-t a)는 미래존재에 대한 탐애로서, 성자는 미래존재 중 일부인 악취 등의 존재를 바라는 일이 없기 때문에 '유애의 일부'가 현행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78) 즉 살생 등의 '전'은 수소단인 신업을 연으로 하여 일어나며, 허광어 등의 '전'은 어업을 연으로 하여 일어나며, 무유애는 수소단인 중동분 상의 멸상(滅相)을 연으로 하여 일어나며, 유애의 일부는 수소단인 당래의 소의신을 연으로 하여 일어난다. 이렇듯 이것들은 모두 수소단만을 연으로 하는 수소단의 법이지만, 성자로서 그것을 아직 끊지 못한 자 일지라도 결코 일어나는 일이 없다.
[882 / 1397] 쪽
  慢類等我慢 惡作中不善
  聖有而不起 見疑所增故
  
  논하여 말하겠다. [본송에서] '등'이라고 하는 말은 살생 등의 온갖 전(纏)과 무유애의 전부와 유애의 일부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즉 이러한 만의 종류 등과 아만과 악업에 대한 후회(즉 악작)는 바로 견(見)과 의(疑)에 의해 직접적으로 증장된 것이기 때문으로, 비록 수소단이라 할지라도 그 배후의 법인 '견'과 '의'가 끊어졌기 때문에 성자에게는 능히 일어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만의 종류와 아만은 유신견에 의해 증장된 것이며, 살생 등의 전(纏)은 사견에 의해 증장된 것이며, 온갖 무유애는 단견에 의해 증장된 것이며, 유애의 일부는 상견에 의해 증장된 것이며, 불선의 악작은 바로 의(疑)에 의해 증장된 것이기 때문에 성자의 소의신 중에서 그 모두는 결정코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98수면 가운데 몇 가지가 바로 변행(遍行)이며, 몇 가지가 변행이 아닌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견고소단·견집소단의
  온갖 견(見)과 의(疑)와, 상응 및
  불공(不共)의 무명은
  자계·자지에 변행한다.79)
  見苦集所斷 諸見疑相應
  及不共無明 遍行自界地.
  
  
  
79) 이하 본권 말(무기에 관한 방론 이전)까지 98수면의 변행·비변행, 유루·무루연, 상응·소연의 수증(隨增), 불선·무기, 근·비근 등의 제문(諸門)에 대해 분별한다. 여기서는 먼저 변행과 비변행에 대해 분별하는데, 변행수면이란 자계(自界)·자지(自地)의 5부의 법을 소연으로 하여 그러한 법을 오염시키는 작용을 갖는 번뇌를 말하고, 비변행수면이란 오로지 자과(自果)·자부(自部)의 법만을 오염시키는 번뇌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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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중에서 두 가지 견을 제외한
  나머지 아홉 가지는 능히 상계를 연으로 하는데,
  득(得)을 제외한 그 밖의 수행(隨行)도
  역시 바로 변행에 포섭된다.
  於中除二見 餘九能上緣
  除得餘隨行 亦是遍行攝
  
  논하여 말하겠다. 오로지 견고소단·견집소단의 견(見)과 의(疑)와, 그것과 상응하는 무명과 상응하지 않는 불공(不共)의 무명은 그 힘이 능히 자계·자지의 5부에 두루 작용[遍行]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열한 가지는 모두 변행이라는 명칭을 획득하니, 이를테면 일곱 가지 '견'과 두 가지 '의'와 두 가지 무명의 열한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80)
  이와 같은 열한 가지는 자계와 자지의 5부(部)의 제법을 두루 반연하고, [5부를 두루 반연하여] 수면을 수증하며, 그것을 원인으로 하여 두루 5부의 염법을 낳으니,81) 이러한 세 가지 뜻에 근거하여 '변행'이라고 하는 명칭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말한 '5부를 두루 반연한다'고 함은 점차적으로 소연[漸緣]이 된다는 말인가, 단박에 소연[頓緣]이 된다는 말인가? 만약 점차적으로 소연으로 삼는다고 한다면 그 밖의 다른 법도 역시 마땅히 변행이 되어야 할 것이며, 만약 단박에 소연으로 삼는다고 한다면 누가 다시 욕계의 제법에 대해 뛰어나다거나 능히 청정을 획득한다고 단박에 헤아릴 것이며, 혹은 세간의 원인
  
  
  
80) 5부의 번뇌 가운데 자계의 모든 부의 번뇌를 두루 연으로 하여 작용하는 것은 그 힘이 가장 강력한 고제·집제 하에 포섭되는 번뇌 중 지적 사유작용과 관계하는 번뇌이다. 즉 견고소단의 유신견 등의 5견과 의, 견집소단의 사견·견취와 의, 그리고 견고·견집소단으로 앞의 온갖 수면과 상응하거나 독립적으로 일어나는 무명(즉 불공 혹은 獨頭無明)의 열한 가지를 변행수면, 혹은 변행혹(구역에서는 遍使)이라고 한다. 보통 7견·2의·2무명으로 일컬어진다.
81) 이것이 이른바 변행(sarvatra-ga)의 세 가지 근거로서, 1) 자계·자지의 5부의 제법을 두루 소연으로 삼으며, 2) 그같이 소연이 되는 5부의 제법을 두루 오염시키며, 3) 그것에 의해 두루 염법을 낳는다. 바로 이러한 세 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변행'으로 일컬어진다.
[884 / 1397] 쪽
  이라고 헤아릴 것인가?82)
  자계 자지의 일체의 법을 단박에 연으로 삼는다고 설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이 같은 변행혹은] 공능이 있어 능히 단박에 5부 [중의 일부]를 연으로 삼는다고 설한다.
  비록 그렇다할지라도 변행은 역시 오로지 이것만이 아니니, 여기에 아견(我見)이 작용함이 있으면 여기에는 필시 마땅히 아애(我愛)와 아만(我慢)이 일어난다고 해야 할 것이며, 만약 여기에 청정하다거나 수승하다고 하는 견해(즉 견취)가 작용할 경우, 여기에는 필시 마땅히 희구(希求, 즉 愛)와 거드름(高擧, 즉 慢)이 일어난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즉 '애'와 '만'도 역시 마땅히 변행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견소단·수소단의 법을 단박(한꺼번)에 반연하는 것이므로, 이 두 가지(애와 만)를 무엇에 의해 끊어지는 법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마땅히 수소단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니, 경계를 뒤섞어 반연하기 때문이다. 혹은 마땅히 견소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견'의 힘에 의해 인기된 것이기 때문이다.83)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이와 같이 설하고 있다. "이러한 두 가지의 번뇌는 자상혹(自相惑)이지 공상혹(共相惑)이 아니어서 [5부의 법을] 단박에 소연
  
  
  
82) 즉 앞에서 언급한 열한 가지의 변행혹이 5부의 법을 두루 연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단박에 소연이 되는 것인가, 점진적으로 소연이 되는 것인가? 만약 후자가 변행의 뜻이라면 탐 등도 역시 견에 의해 5부의 번뇌를 소연으로 삼을 것이기 때문에 일체의 번뇌가 모두 변행이 되어야 할 것이며, 전자라면 실제적으로 그러한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변행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예컨대 일체의 유루법을 단박에 뛰어난 것이라거나 생천의 원인이라고 간주하여 견취나 계금취가 일어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유부에서는 '변행이란 후자의 뜻이지만, 그렇다고 자계·자지의 일체의 유루법을 한꺼번에 연으로 삼는 것은 아니고 5부의 일부씩만을 단박에 연으로 삼는다'고 하였다.(후술) 이에 대해 경부사는 다시 그럴 경우 아견이 작용할 때에는 반드시 아애와 아만이 함께 일어나기 때문에 11변행 이외 다시 집제 하의 아애와 아만도 변행혹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83) 즉 견소단의 애와 만이라면 견의 힘에 의해 각 부의 법을 각각 따로이 소연으로 삼겠지만, 이러한 애와 만은 5부의 경계를 뒤섞어서도 반연하기 때문에 수소단이라는 것이다.
[885 / 1397] 쪽
  으로 삼는 힘이 없기 때문에 변행이 아니다.84) 그렇기 때문에 변행은 오로지 이러한 열한 가지 번뇌뿐이며, 이 같은 사실에 준하여 볼 때 그 밖의 번뇌가 변행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는 굳이 설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이루어진 셈이다.
  나아가 이 같은 열한 가지 변행 중에서 유신견과 변집견을 제외한 나머지 아홉 가지 종류는 상계(上界)의 수면도 역시 능히 소연으로 삼는다.85)
  여기서 '상'이라고 하는 말은 바로 상계 상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아울러 하지의 수면을 소연으로 삼는 법은 존재하지 않음을 나타낸다.86) 그리고 이러한 아홉 가지 수면은 비록 자(自)·상(上)의 계(界)·지(地)의 수면은 능히 연으로 삼을 수 있을지라도 이치상 자·상의 수면을 단박에 소연으로 삼는 일은 없다. '상'의 수면을 소연으로 삼는 경우에 있어서도 계(界)에 근거하여 설하여 보면, 혹 어떤 경우 오로지 하나의 계만을 소연으로 삼기도 하며, 혹 어떤 경우 두 가지 계를 함께 소연으로 삼기도 한다. 그래서 본론(本論)에서 "온갖 수면으로서 욕계 계(繫)이면서 색계 계를 반연하는 것이 있으며, 온갖 수면으로서 욕계 계이면서 무색계 계를 반연하는 것이 있으며, 온갖 수면으로서 욕계 계이면서 색계·무색계 계를 반연하는 것이 있으며, 온갖 수면으로서 색계 계이면서 무색계 계를 반연하는 것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87) 그리고 지(地)에 근거하여 분별하는 경우에 대해서도 계(界)에 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84) 유부 비바사사에 의하는 한 변행이란 5부의 제법과 관계하는 보편적 번뇌[共相惑]를 말하는 것으로, 아애와 아만은 다만 개별적 번뇌[自相惑]인 아견(我見)과 관계하기 때문에 비변행이다.
85) 이를 상연혹(上椽惑)이라 한다.
86) 하계·하지의 수면을 소연으로 할 경우 마땅히 변지의 계가 허물어지게 된다.(『현종론』 권제25, 앞의 책, p. 159) 즉 이미 그러한 염법을 떠난 자만이 상지의 번뇌를 현전시키기 때문에, 상지의 번뇌는 이염(離染)한 하지의 법을 소연으로 삼는 일이 없는 것이다. 참고로 욕계 내지 제4정려는 상계·상지를 연으로 하여 변행하는 경우가 있지만, 3무색정 중에서는 상계를 연으로 하는 일이 없으며, 유정지(有頂地)에서는 두 가지(즉 상계·상지) 모두를 연으로 하는 일이 없으니, 무색계의 공무변처 등의 아래 3지는 상지는 있어도 더 이상 상계가 없으며, 유정처 즉 비상비비상처에는 더 이상 상지도 없기 때문이다.
87) 『품류족론』 권제5(대정장26, p. 72상 ; 한글대장경117, p. 112).
[886 / 1397] 쪽
  욕계에 태어나 존재하면서 [타계인] 대범천을 연으로 하여 유정의 견(見)을 일으키거나 혹은 상주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일으키기도 하는데, 어째서 유신견과 변집견은 상계·상지를 연으로 삼지 않는다고 한 것인가?
  그것(대범천)에 대해 아(我)나 아소(我所)라고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88)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을 헤아려 유정이라 하고 상주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어떠한 '견'에 포섭되는 것인가?
  대법자(對法者)는 말하기를, "이러한 두 가지는 '견'이 아니며 바로 사지(邪智)에 포섭된다"고 하였다.89)
  어떠한 이유에서 그 밖의 수면(즉 견취·계금취·사견)으로서 그것(대범천)을 소연으로 하는 것은 바로 '견'이라고 하면서, 이것 역시 그것을 소연으로 하는 것임에도 '견'이 아니라고 하는 것인가?
  [비바사사(毘婆沙師)의] 종의를 정량(定量)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같이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변행은 오로지 이러한 [열한 가지의] 수면뿐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88) 타계·타지의 오취온을 소연으로 하여 그것을 아·아소라고 집착하거나, 혹은 단멸하고 상주하는 것이라고는 주장하지 않기 때문에 유신견과 변집견은 제외되는 것이다. 예컨대 어떤 계·지의 유정이 타계·타지의 온(蘊)을 '나'로 집착하는 것은 이치상 있을 수 없으며(그럴 경우 자계와 타계의 두 개의 '나'가 존재하게 됨), '나'라는 집착이 부재하므로 '나의 것'이라고 하는 집착도 역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89) 즉 현견되는 온에 대해서만 그것을 '나'라고 하거나 상주하는 것이라고 집착할 따름이며, 현견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추리[比]하여 그렇게 말하는 것일 뿐이다. 이를테면 욕계에 태어나서 '내가 바로 대범천이다'고는 주장하지 않으며, 또한 역시 '범천은 바로 나의 것이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유신견이 아니며, 유신견이 아니기 때문에 변집견도 역시 아니니, 변집견은 반드시 유신견에 따라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밖의 다른 견의 경우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행상을 짓지 않기 때문에 이는 바로 유신견과 변집견에 의해 인기된 사지일 뿐인 것이다.(『현종론』 권제25, p. 161) 『구사론기』 (권제19)에 따르면, 먼저 욕계 중에서 유신견과 변집견을 일으켜 욕계의 오온을 '나'이고 상주하는 것이라고 집착하며, 그 다음에 불공무명을 일으켜 대범천을 '나'이고 상주하는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인데, '견'의 행상은 견고하게 집착하는 것임에 반해 이것은 맹매(盲昧)하여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견'이 아니다. 즉 이러한 불공무명과 상응하는 혜의 심소를 바로 '사지'라고 하는 것이다.
[887 / 1397] 쪽
  무엇이 또한 변행인가?
  [이러한 열한 가지 수면과] 아울러 그 수행법(隨行法)이 변행이다. 말하자면 앞에서 설한 열한 가지 수면과 아울러 그것에 수행하는 법은 모두 변행에 포섭된다. 그렇지만 그것의 득(得)은 제외되니, 동일한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90) 그리고 이 같은 사실로 말미암아 어떤 이는 이같이 물어 말하였다. "모든 변행수면은 다 변행인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답하여 말하면 이에 대해서는 마땅히 4구(句)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니, 제1구(변행수면이면서 변행인이 아닌 것)는 이를테면 미래세의 변행수면이며, 제2구(변행인이면서 변행수면이 아닌 것)는 이를테면 과거·현재세의 변행수면과 구유(俱有)하는 법이며, 제3구(변행수면이면서 변행인인 것)와 제4구(변행수면도 아니고 변행인도 아닌 것)에 대해서는 이치에 맞게 마땅히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91)
  98수면 가운데 몇 가지가 유루를 연으로 하며, 몇 가지가 무루를 연으로 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견멸소단·견도소단의
  사견과 의(疑)와, 상응 및
  불공인 무명의 여섯 가지는
  능히 무루를 연으로 한다.
  見滅道所斷 邪見疑相應
  及不共無明 六能緣無漏
  
  
  
90) 즉 앞서 언급한 열한 가지 수면과 상응 구유하는 수행법(隨行法, 심·심소와 生 등의 4相)은 11변행과 불가분의 관계로서 동일한 결과이기 때문에 역시 변행이지만, 그러나 득(得)의 경우 3득 중의 법전득(法前得)과 법후득(法後得)은 소득법(所得法) 즉 변행의 수면과 불가불리의 관계가 아니며, 동일한 결과도 아니기 때문에 변행이 아니다.
91) 제3구는 과거·현재의 변행수면이며, 제4구는 앞에서 언급한 것을 제외한 그 밖의 법이다.
[888 / 1397] 쪽
  이 중에 멸제를 연으로 하는 것은
  오로지 자지의 멸제만을 연으로 하며
  도제를 연으로 하는 것은 6지와 9지의 그것을 연으로 하니
  대치는 다르나 서로간에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於中緣滅者 唯緣自地滅
  緣道六九地 由別治相因
  
  탐·진·만과 두 가지 취(取)는
  다 같이 무루를 연으로 하지 않으니
  [무루는] 마땅히 떠난 것이고, 경계에 대해 원한이 없으며
  고요하고 청정하고 뛰어난 성질이기 때문이다.
  貪瞋慢二取 並非無漏緣
  應離境非怨 淸淨勝性故
  
  논하여 말하겠다. 오로지 견멸소단·견도소단의 각기 세 가지, 즉 사견(邪見)과 의(疑)와, 그것과 상응하는 무명과 불공인 무명 등의 여섯 가지는 능히 무루를 연으로 한다.92) 그리고 그 밖의 수면이 유루를 연으로 한다는 것은 이에 준하여 저절로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러한 여섯 가지 중에서 멸제를 연으로 하는 수면은 각기 자지의 멸제를 소연으로 삼으니, 서로에 대해 인과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93) 이를테면 욕계에 계속(繫屬)되는 세 가지 수면은 오로지 욕계 제행(諸行)의 택멸(擇滅)만을 연으로 하며,94) 나아가 유정지(有頂地)의 세 가지 수면은 오로지 유정지의 제행의 택멸만을 연으로 한다.
  
  
92) 이를 '무루연혹(無漏緣惑)'이라고 한다. 즉 이 같은 여섯 가지 수면은 멸제·도제를 직접적인 대상으로 하여 일어나는 것(그래서 親迷惑이라고도 함)이지만, 그 밖의 견멸·도소단의 수면은 이 같은 수면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그래서 그 밖의 수면을 重迷惑이라고도 함).
93) 즉 3계 9지의 멸제는 서로가 서로에게 인(因)이 되고 과(果)가 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94) 욕계제행의 택멸이란 욕계의 유루법을 끊어 증득하는 무위택멸, 즉 열반을 말한다.
[889 / 1397] 쪽
  그리고 도제를 연으로 하는 수면은 6지와 9지의 도제를 연으로 한다. 즉 욕계에 계속되는 세 종류의 수면은 오로지 6지의 법지품(法智品)의 도제만을 연으로 하는데, 욕계의 혹을 대치하는 것이든 혹은 그 밖의 다른 혹(색계·무색계의 수혹)을 능히 대치하는 것이든 모두 그것(욕계계의 세 수면)의 소연이 되니, 그 종류가 동일하기 때문이다.95) 또한 색계·무색계의 8지에는 각기 세 종류의 수면이 있어 각각은 오로지 능히 9지의 유지품(類智品)의 도제만을 연으로 하는데, 자지를 대치하는 것이든 혹은 그 밖의 다른 혹을 능히 대치하는 것이든 모두 그것의 소연이 되니, 그 종류가 동일하기 때문이다.96)
  어떠한 이유에서 멸제를 연으로 하는 수면은 자지의 멸제만을 연으로 삼고 다른 지는 연으로 삼지 않으면서, 도제를 연으로 하는 수면은 6지와 9지에 동일한 종류로 통하는 것인가?
  온갖 지(地)의 도제는 서로 간에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97)
  [그렇다면 어째서 욕계계의 세 가지 수면은 6지의 도제만을 소연으로 삼고 9지의 그것은 소연으로 삼지 않는 것인가?]
  비록 법지품과 유지품도 역시 서로 간에 원인이 될지라도 유지품은 욕계를 대치하지 못하기 때문에, 유지품의 도제는 욕계의 세 수면의 소연이 되지 않는 것이다.
  법지품은 이미 색계·무색계를 능히 대치한다고 하였으므로 마땅히 그것은 8지의 각 세 수면의 소연이 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95) 도제를 연으로 하는 욕계계의 사견·의·무명수면은 미지정·중간정·4근본정이라고 하는 6지의 도법지품(道法智品)을 연으로 한다. 즉 미지정의 도법지는 욕계의 혹(惑)을 대치하고, 중간과 4근본정의 도법지는 상계의 수혹을 대치하는데(멸·도의 법지품은 수혹도 능히 대치할 수 있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6지의 도법지는 욕계를 관찰하여 일어난 지식 즉 법지(法智)라는 점에서 동류이기 때문에 모두 욕계에 계속되는 수면의 연이 되는 것이다.
96) 상 2계의 8지(4정려·4무색정)의 도제를 연으로 하는 세 가지 수면은 미지·중간·4근본정과 아래 3무색정이라고 하는 9지의 도류지품(道類智品)를 연으로 한다. 9지의 도류지품은 자지의 혹을 대치하는 것과 상지의 혹을 대치하는 것의 구별이 있지만 다 같이 상 2계를 관찰하여 일어난 지식 즉 유지(類智)라는 점에서 동류이기 때문에 모두 상 2계에 계속되는 8지의 수면의 연이 되는 것이다.
97) 멸제는 제지(諸地) 상호간에 인과가 되지 않지만, 도제는 6지와 9지 서로간에 동류인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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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법지품)의 모두가 색계·무색계를 능히 대치하는 것은 아니니, 고·집의 법지품은 그것을 대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역시 그(법지품) 전부는 색계·무색계를 능히 대치하지 않으니, 그것(색계·무색계)의 견소단을 능히 대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두 가지 경우에서 처음의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상2계의 세 수면은] 그것(법지품)의 소연이 되지 않는 것이다.98)
  즉 이 같은 이유로 말미암아 변행혹 중 고제·집제를 연으로 하는 것은 온갖 지(地)에 방해받는 일이 없으니, 대상[境]이 서로의 연(緣)과 인(因)이 되더라도 능히 대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탐과 진과 만과 계금취와 견취견은 무루단(無漏斷)이면서 무루를 연으로 하지 않는 것인가?99)
  탐수면은 마땅히 사리(捨離)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탐수면이] 무루를 소연으로 한다면, 그것은 선법욕(善法欲)처럼 과실이 아니어야 할 것이며, 마땅히 사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100)
  진수면은 원망과 해코지[怨害]를 소연으로 하여 일어나는 것이지만, 멸·도제는 원망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만수면은 거칠고 동요함[麤動]함을 소연으로 하여 일어나는 것이지만, 멸제·도제는 고요한 것[寂靜]이기 때문에 진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101)
  
  
98) 욕계 법지품인 고법지와 집법지는 앞에서 설한 것처럼 색계·무색계의 4제 중 처음의 것인 고·집 2제를 능히 대치하지 못하며, 따라서 견·수소단 중의 처음의 것인 상계의 견소단을 능히 대치하지 못하기 때문에 법지품은 상2계의 세 수면의 소연이 되지 않는다는 뜻.
99) 멸·도제 하의 사견·의·무명은 무루도에 의해 끊어지는 것이면서 무루를 소연으로 삼는 것임에 반해 멸·도제 하의 탐·진·만·견취와 도제 하의 계금취는 무루단이지만 무루를 소연으로 삼지 않는 이유에 대해 밝힌다.
100) 만약 탐번뇌가 무루법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면 그것은 열반이나 성도를 희구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해탈을 구하는 자는 마땅히 이러한 탐을 버리지 못하게 될 것이며, 또한 그것을 버릴 경우 멸·도제도 마땅히 끊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101) 즉 '만'이란 거들먹거리고 잘난 체하는 것[高擧]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그 성질이 고요[寂靜]하지 않다. 그러나 모든 무루법은 지극히 고요한 것이기 때문에 잘난 체하는 마음을 낳지 않으니, 이를테면 무루법은 '나는 이러한 법을 획득하였다'고 하는 '만'을 능히 대치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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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정하지 않은 법을 청정함의 원인이라고 집착하는 것을 일컬어 계금취라고 하지만, 멸제·도제는 진실의 청정함이기 때문에 계금취의 경계가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탐 등은 무루를 소연(대상)으로 삼지 않는 것이다.
  
  98수면 중 몇 가지가 소연으로 말미암아 수증(隨增)하는 것이고, 몇 가지가 상응으로 말미암아 수증하는 것인가?102)
  게송으로 말하겠다.
  
  아직 끊어지지 않은 변행수면은
  자지(自地)의 일체의 법을
  비변행의 수면은 자부의 법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에 수증한다.
  未斷遍隨眠 於自地一切
  非遍於自部 所緣故隨增
  
  무루와 상계 연의 수면은 그렇지 않으니
  섭수되는 일이 없고,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수면은] 상응법에 따라
  상응하기 때문에 수증한다.
  非無漏上緣 無攝有違故
  隨於相應法 相應故隨增
  
  논하여 말하겠다. 변행의 수면은 널리 자지(自地)의 5부의 제법을 소연으로 삼아 수증하니, 능히 자지의 법을 두루 소연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 밖의
  
  
  
102) 이하 98수면의 제문분별 중 세 번째인 소연·상응의 두 가지 수증(隨增)에 관한 분별로, 여기서 '수증'이라 함은 '∼을 따라서 증장한다'는 뜻이다. 즉 소연수증이란 소연의 경계와 능히 그것을 연으로 하는 수면이 서로 연이 되어 번뇌의 힘이 증장되는 것이고, 상응수증이란 번뇌와 그것과 상응하는 심·심소가 서로 연이 되어 번뇌의 힘이 증장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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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부의 비변행의 수면은 오로지 자부의 법에 대해서만 소연수증하니, 오로지 자부의 법만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는 전체적으로 설한 것이고, 개별적으로 분별하면, 여섯 가지 무루연혹(無漏緣惑, 무루를 소연으로 하는 혹)과 아홉 가지 상연혹(上緣惑, 상계 상지의 수면을 소연으로 하는 혹)은 소연의 경계에서 수증하는 일이 없다.103)
  그 이유는 무엇인가?
  무루와 상지의 경계는 섭수되지 않으며, 아울러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다.104) 이를테면 만약 어떤 법이 이러한 지(地) 중의 유신견이나 아애에 포섭되어 거기에 자기가 존재한다고 할 경우, 이러한 유신견과 아애의 지 중에 존재하는 수면은 소연수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마치 옷이 축축하면 먼지가 그것에 따라 거기에 머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온갖 무루의 법과 아울러 상지의 법은 하지의 온갖 유신견과 아애에 포섭되어 거기에 자기가 존재한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소연의 경계에서 수증하지 않을 뿐더러] 그것을 연으로 하는 하지의 혹도 소연수증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하지에 머무는 마음이 상지 등을 희구하는 것은 바로 선법욕(善法欲)으로서 수면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와 열반, 그리고 상지의 법은 능히 그것을 소연으로 하는 하지의 혹과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그러한 두 가지(무루와 타계를 연으로 하는 수면)는 소연수증할 리가 없는 것으로, 이는 마치 뜨거운 돌에 발이 따라 머물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수면이란 바로 따라 순응한다[隨順]는 뜻으로, 무루와 상지의 경계는 온갖 하지의 수면에 따라 순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록 이것이 [하지의 수면에] 소연은 될지라도 수증하는 일은 없으니, 마치 풍병(風病)이 있는 자가 땀을 마르게 하는 약[乾澁藥]을 먹을 경우 병자는 그 약으로 인해 어떠한 수증(곧 효능)도 없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소연에 근거하여 수증하는 것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103) 즉 앞서 언급한 6무루연과 9상연(上緣)의 혹은 모두 소연법을 갖지만 소연법이 그 같은 혹에 따라 염오증장하지 않기 때문에 수증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104) 여기서 '섭수'란 어떤 법을 유신견과 아애가 포섭하여 거기에 자기가 있다고 하는 것이며, '서로 어긋난다'고 함은 능연의 혹과 소연이 서로 모순되는 것을 말한다.(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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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다음으로 마땅히 상응수증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어떠한 수면도 자신과 상응하는 법에 대해서는 상응하기 때문에, 그러한 상응법에서 수증한다.105) 그리고 여기서 설한 '수증한다'고 함은 말하자면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이 그러하기 때문에 앞의 게송 첫머리에서 '아직 끊어지지 않은'이라는 말을 나타낸 것이다.
  그렇다면 수면으로서 무루를 소연으로 삼지도 않고 상계를 소연으로 삼지 않으면서 다만 소연이 아닌 상응법에서만 수증하는 것이 있는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수증하는 것이 있으니, 이를테면 상지를 소연으로 삼는 온갖 변행의 수면이 그러하다.106)
  98수면 중의 몇 가지가 불선이고, 몇 가지가 무기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상 2계의 수면과 아울러
  욕계의 유신견과 변집견과
  이와 구기하는 치(癡)는 무기이며
  그 밖의 것은 모두 불선이다.
  上二界隨眠 及欲身邊見
  彼俱癡無記 所餘皆不善
  
  논하여 말하겠다. 색계·무색계의 일체의 수면은 무기성이니, 염오법(즉 불선이나 유부무기법)으로서 만약 불선이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고(苦)의 이숙이 있을 것이지만 고의 이숙과는 상 2계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105) 즉 변행이나 비변행, 자계를 연으로 하거나 타계를 연으로 하는 일체의 수면은 그것과 상응하는 심·심소법에 따라 그 힘이 증장된다.
106) 예컨대 초정려의 변행수면이 위의 세 지를 소연으로 삼는 경우 다 같이 색계이기 때문에 상계를 소연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무루법을 소연으로 삼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9상연혹이 소연수증하지 않는 것처럼 그것은 상지를 경계로 삼기 때문에 상응수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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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을 핍박하거나 뇌란시키는 원인이 거기에는 결정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신견과 변집견의 두 견과, 아울러 이와 상응하는 치(癡, 즉 무명)로서 욕계에 계속되는 수면도 역시 무기성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이것은 보시 등과 서로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니, 자아의 당래(미래세) 즐거움을 위해 현재에 보시·지계(持戒) 등을 부지런히 닦아야 하기 때문이다.107) 그리고 단견에 집착하는 변집견은 능히 해탈에 따르는 것이라 할 수 있으니, 그래서 세존께서 설하기를, "온갖의 외도들의 여러 견해의 갈래[見趣] 중에서 이 같은 견해가 가장 뛰어나니, 이를테면 '나[我]는 존재하지 않으며, 나의 것[我所]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당래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나의 것도 역시 당래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고 하였던 것이다.108) 또한 이러한 두 견(유신견과 변집견)은 자신의 5취온[自事]에 미혹한 것으로, 다른 유정을 핍박하거나 해코지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선이 아니라 무기]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천상의 쾌락을 탐하여 구하거나 아만을 일으키는 것도 이 같은 예에 따라 역시 그러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 선대 궤범사는 이와 같이 설하고 있다. "[소의신과] 구생(俱生)하는 유신견은 바로 무기성이니, 새나 짐승 등에게도 유신견이 현행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만약 분별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면 바로 불선성이다."109)
  
  
107) 자아의 상주에 집착하는 이는 그 같은 자아의 복락과 생천을 향유하기 위하여 보시와 지계를 닦기 때문이다.
108) 『중아함경』 권제54 「아리타경(阿梨經)」(한글대장경 중아함경3, p. 273)의 6견처(見處)를 참조할 것.
109) 보광에 의하면 이는 경부(經部)의 선대 궤범사의 설이다. 즉 경량부에서는 살가야견을 현재 신체와 함께 생겨난 허위의 망집(선천적인 俱生身見)과 사유 분별에 의해 생겨난 허위의 망집(후천적인 分別身見)으로 나누어 전자는 새나 짐승 등에 공통하는 현행의 유신견이지만, 후자는 오로지 사유하는 인간에게만 생겨나는 것으로 불선성이기 때문에 견도소단이다. 그러나 유부에 의하면 유신견은 오로지 분별생 내지 견소단일 뿐이며, 구생신견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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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밖의 욕계에 계속되는 일체의 수면으로서 앞에서 언급한 것과 상위되는 것은 모두 불선성이다.
  
  위에서 설한 불선의 혹(惑) 중에서 몇 가지가 불선근이고, 몇 가지가 불선근이 아닌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불선근은 욕계의
  탐·진과 불선의 치(癡)이다.
  不善根欲界 貪瞋不善癡
  
  논하여 말하겠다. 오로지 욕계에 계속(繫屬)되는 일체의 탐(貪)과 진(瞋)과 아울러 불선의 치(癡, 앞서 언급한 유신·변집견과 상응하는 것을 제외한 치)가 불선근에 포섭된다. 세존께서는 이를 그 순서대로 탐·진·치의 세 가지 불선근이라고 설하였는데, 그 본질[性]은 오로지 불선의 번뇌이다. 즉 모든 불선법의 근본[根]이 되기 때문에 '불선근'이라고 설정한 것으로, 그 밖의 다른 번뇌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 밖의 번뇌가 불선근이 아니라고 하는 뜻은 이 같은 사실에 준하여 이미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본송에서 설하지 않은 것이다.110)
  위에서 논설한 무기의 혹 중에서 몇 가지가 무기근이고, 몇 가지가 무기근이 아닌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110) 이를테면 탐·진과 불선의 치는 견·수의 5부소단과 통하고, 6식과 두루 상응하며, 각기 탐·진에·무명수면을 본질로 하며, 일체의 추악한 신·어업을 낳으며, 선근을 끊는 것이지만, 5견과 의는 5부와 통하지 않고, 만은 6식과 상응하지 않으며(전5식과 상응함), 10전(纏)과 6번뇌구(垢)는 수면성이 아니다.(이는 隨煩惱로서 본론21 참조) 그리고 이 같은 다섯 가지 뜻 중의 뒤의 두 가지가 바로 불선근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자세한 것은 『대비바사론』 권제47(한글대장경119, p. 504)과 권제112(동122, p. 266이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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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기근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무기의 애(愛)와 치(癡)와 혜(慧)가 그것이며
  無記根有三 無記愛癡慧
  
  나머지는 두 갈래와 잘난 체함에서 생기기 때문에 무기근이 아니다.
  외방의 논사들은 무기근으로 네 종류를 설정하였는데
  중(中)의 애(愛)·견(見)·만(慢)·치(癡)가 바로 그것으로
  세 가지는 정(定)의 근거로서 모두 '치'의 소생이기 때문이다.
  非餘二高故 外方立四種
  中愛見慢癡 三定皆癡故
  
  논하여 말하겠다.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의 모든 비바사사(毘婆沙師)는 무기근에도 역시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설하니, 이를테면 온갖 무기의 애(愛)와 치(癡)와 혜(慧)의 세 가지가 바로 그것으로,111) 아래로는 이숙생[의 혜]에 이르기까지 역시 무기근에 포섭된다.
  어떠한 이유에서 의(疑)와 만(慢)은 무기근이 아닌가?
  '의'는 두 가지 갈래[趣]에서 일어나며,112) '만'은 잘난 체하는 것[高]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즉 그 논사(가습미라국의 비바사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의'는 두 갈래의 행상에서 일어나 그 성질이 동요하는 것이기 때문에 '근'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며, '만'은 소연에 대한 거들먹거리고 잘난 체하는 상[高擧相]에서 일어나 뿌리[根]의 존재와는 다르기 때문에 '근'으로 설정
  
  
111) 즉 무기근에는 유부무기의 '애'와 유부무기의 무명과 유부·무부의 '혜' 세 가지가 있는데, 여기서 무기의 애란 상 2계의 5부의 애를 말하며, 무기의 무명(즉 癡)란 욕계의 유신·변집견과 상응하는 무명과 상 2계의 5부의 무명을, 유부무기의 혜란 욕계의 유신·변집견과 상 2계의 5부의 염오혜(즉 5견)을, 무부무기의 혜란 위의로·공교처·이숙생·변화심과 구생하는 혜를 말한다. 그리고 온갖 무기 가운데 이 세 가지만을 '근'으로 설정한 것은 제법을 낳는 뛰어난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즉 애는 바로 번뇌의 뿌리[足]이며, 무명은 온갖 혹과 두루 상응하며, 혜는 능히 간택하여 온갖 번뇌를 이끄는 도수(導首)가 되기 때문이다.(『구사론기』 권제19)
112) 여기서 '두 갈래'란 있을까 없을까, 그럴까 그렇지 않을까 하는 의혹의 망설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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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 않은 것이다. 즉 '근'이라고 할 만한 것은 반드시 견고하게 머물며, 마땅히 아래로 뻗어 내린다는 것은 세간이 다 같이 알고 있는 바이기 때문에 이것들은 '근'이 아닌 것이다."113)
  그런데 외방(外方)의 모든 논사들은 무기근에 네 가지가 있다고 하였는데,114) 이를테면 온갖 무기의 애(愛)와 견(見)과 만(慢)과 치(癡)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본송에서] 무기를 일컬어 '중(中)'이라고 한 것은 그것이 선·악을 막아 멈추게 하기 때문이다.115)
  어떠한 이유에서 이 네 가지를 무기근으로 설정한 것인가?
  어리석은 범부로서 상계의 정려[上定]을 닦는 모든 이는 애·견·만의 세 가지에 의탁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 세 가지는 모두 무명의 힘에 의해 생겨나기 때문에 이 네 가지를 설정하여 무기근으로 삼은 것이다.
  
  여러 계경 중에서는 열네 가지의 무기를 설하고 있는데,116) 그것도 역시 이러한 무기에 포섭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럼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 경에서는 다만 마땅히 그냥 내버려두어야[捨置] 할 물음에 근거하여 '무기'라는 명칭을 설정한 것이니, 이를테면 묻고 답하는 논의[問記論]에는
  
  
  
113) 즉 세간일반에서 관찰되는 뿌리[根]는 굳건하게 아래로 뻗어 내리지만, '의'는 동요를, '만'은 잘난 체하여 위로 지향하는 성질이기 때문에 '근'이 아니라는 것이다.
114) 『대비바사론』 권제156(한글대장경124, p. 155)에 의하면 서방사(西方師), 『구사론기』 (권제19) 등에서는 경부(經部).
115) 즉 무기는 비선비악(非善非惡)이기 때문에 '중'이다.
116) 『중아함경』 권제60 「전유경(箭喩經)」(대정장1, p. 804), 혹은 『잡아함경』 권제32 제905경·권제34 제965경 등에 이른바 14무기가 설해지고 있다. 즉 세간은 영원[常]한가, 영원하지 않은가, 영원하고 영원하지 않은가, 영원한 것도 아니고 영원하지 않은 것도 아닌가? 세간은 끝[邊]이 있는가, 없는가, 있고 없는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가? 여래의 사후는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가? 신체[身]와 영혼[命]이 동일한가, 다른가? 이 같은 물음에 대해 석존은 침묵하여 언표하지 않았는데, 이를 무기(avyakta) 혹은 사치기(捨置記)라고 한다.(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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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 네 가지의 종류가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응일향(應一向)·분별(分別)·
  반힐(反詰)·사치(捨置)의 언표[記]이니
  이를테면 죽는가, 태어나는가, 수승한가,
  아(我)와 온은 동일한가 다른가 등에 대한 언표이다.
  應一向分別 反詰捨置記
  如死生殊勝 我蘊一異等
  
  논하여 말하겠다. 바야흐로 묻고 답하는 논의의 네 가지란, 첫째는 응일향기(應一向記)이며, 둘째는 응분별기(應分別記)이며, 셋째는 응반힐기(應反詰記)이며, 넷째는 응사치기(應捨置記)이다. 즉 이러한 네 가지는 그 순서대로 어떤 문자(問者)가 '죽는가', '태어나는가', '수승한가', '아(我)와 온은 동일한가 다른가'라고 물은 것에 대한 것으로, 언표에 네 가지가 있다고 함은 바로 이러한 네 가지 물음에 대해 답하는 방식을 말한다.
  만약 어떤 이가 '일체의 유정은 모두 마땅히 죽을 것인가, 죽지 않을 것인가?'라고 물으면, '일체의 유정은 모두 결정코 마땅히 죽을 것이다'라고 마땅히[應] 한결같이[一向] 언표[記]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이가 '일체의 죽은 이는 모두 당래 다시 태어나는 것인가, 태어나지 않는 것인가?'라고 물으면, '번뇌가 있는 자는 마땅히 다시 태어나겠지만 번뇌가 없는 자는 그렇지 않다'고 마땅히 분별하여 언표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이가 '사람은 수승하다고 해야 할 것인가, 저열하다고 해야 할 것인가?'라고 물으면, '어떠한 처소에 비해 그렇다는 것인가? 만약 천(天)에 비해 그렇다고 말한다면 사람은 저열하다고 해야 할 것이며, 만약 하처(下處, 즉 악취)에 비해 그렇다고 말한다면 사람은 수승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고 하여 마땅히 반문[反詰]하여 언표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이가 '온은 유정과 동일하다고 해야 할 것인가, 다르다고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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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 것인가?'라고 물으면, 마땅히 그냥 내버려두는 것[捨置]으로 언표해야 할 것이다. 즉 유정(pudgala, 我의 다른 이름)은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온과] 동일하다거나 다르다고 말할 수 없으니, 마치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石女]의 아들이 희다거나 검다는 등으로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117)
  어떻게 대답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면서도 '언표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어떤 물음에 대해 '이는 마땅히 언표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이와 같은 설을 주장하였다. "두 번째 물음에 대해서도 역시 마땅히 '일체의 모든 이가 당래 다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한결같이 언표해야 할 것이다."118)
  그렇지만 문자(問者)는 '죽은 이는 모두 당래 다시 태어날 것인가, 태어나지 않을 것인가?'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이치상으로 마땅히 그가 물은 바에 대해 분별하여 언표해야 하는 것으로, 전체적인 대답[總答]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전체적으로 알게 하였을지라도 [부분적으로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이렇게 설하고 있다. "세 번째 물음에 대해서도 역시 마땅히 '사람은 역시 또한 수승하기도 하고 역시 또한 저열하기도 하니, 마치 식(識)이 결과도 되고 원인도 되는 것처럼 상대하는 바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고 한결같이 언표해야 할 것이다."119)
  그렇지만 그것을 물은 이는 한결같이 물었으나 [다시 말해 두 가지 사실 중 어느 일단을 물었으나] 한결같이 언표할 성질의 물음이 아니기 때문에 마
  
  
  
117) 제온(諸蘊)과 자아(補特伽羅, pudgala)가 동일한가 다른가에 대한 사치기(捨置記)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30 「파아품(破我品)」(p.1366)에서 상론한다.
118) 제2 분별기도 역시 일향기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 즉 '죽은 자는 모두 재생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 '죽은 자가 모두 재생하는 것은 아니다'고 한결같이 대답해야 한다. 왜냐 하면 죽은 이 중에는 재생하지 않는 자도 있기 때문이다. 칭우에 의하면 여기서 어떤 이는 대덕(bhada ta) 라마(羅摩, Rama)이다.
119) 역시 앞의 대덕 라마의 이설. 즉 12연기에서 '식'은 앞의 '행'에 대해서는 결과이지만, 뒤의 명색에 대해서는 원인이 되는 것처럼, 사람 또한 상대에 따라 수승하기도 하고 저열하기도 하므로 일향기로 대답하여야 한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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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히 분별하여 언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만 여기서는 마땅히 묻는 이의 뜻이 어느 처소에 비해 그러하다는 것인지를 따져 물은 것으로, 그래서 이것을 일컬어 '응반힐기'라고 한 것이다.
  또한 [그는] 이렇게 설하고 있다. "네 번째 물음의 경우에도 '온과 유정이 혹은 다르다거나 혹은 동일하다'고 이미 완전히 대답하지 못하였는데, 어떻게 '언표한다[記]'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만 그가 물은 바는 이치상 마땅히 내버려두어야 할 성질의 문제이기에 '마땅히 그냥 내버려두어야 한다'고 언표하여 말한 것이니, 어찌 '언표'라고 일컫지 않을 것인가?
  즉 대법(對法)의 모든 논사들은 이와 같이 설하고 있다.120) 일향기(一向記)란 만약 어떤 이가 "세존은 바로 여래이신가? 마땅히 정등각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그가 설한 법은 요컨대 바로 선설(善說)인가? 모든 제자 중(衆)의 행은 묘행(妙行)인가? 색 내지 식은 모두 무상인가? 고(苦) 내지 도(道)는 좋은 시설(施設)인가?"고 물으면, 마땅히 한결같이 그렇다고 언표하는 것을 말하니, 진실한 뜻과 계합하기 때문이다.
  분별기란, 만약 어떤 이에게 정직한 마음[直心,진실로 법을 듣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 "원하건대 존자께서는 나를 위해 법을 설하소서"라고 청하여 말하면, 마땅히 "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과거법과 미래법과 현재의 법이 그것으로, 그 중의 무엇을 설하여 주기를 바라는 것인가?"고 분별해야 한다. 만약 "나를 위해 과거의 법을 설해 주소서"라고 말하면, 마땅히 "과거법에도 역시 여러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색 내지 식이 바로 그것이다"고 다시 분별해야 한다. 만약 색에 대해 설해 주기를 청하면 마땅히 "색 중에도 세 가지가 있으니, 선과 악과 무기가 바로 그것이다"고 다시 분별하여 말해야 한다. 만약 선에 대해 설해 주기를 청하면, 마땅히 "선에는 일곱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살생을 떠나는 것과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잡예어를 떠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고 분별하여 말해야 한다. 만약 그가 다시 살생을 떠나는 것에 대해 설해 주기를 청하면, 마땅히 "여기에
  
  
  
120) 『집이문족론』 권제8(한글대장경115, p. 179-181); 『대비바사론』 권제15(한글대장경118, p. 341-34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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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무탐·무진·무치의 3선근에서 일어난 것이 바로 그것이다"고 분별하여 말해야 한다. 만약 그가 무탐에서 일어난 이(離) 살생에 대해 설해 주기를 청하면, 마땅히 "여기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표업과 무표업이 그것으로, 무엇을 설해 주기를 원하는가"고 분별하여 말해야 하는 것이다.
  반힐기란, 만약 어떤 이에게 아첨하는 마음[諂心]이 있어 "원하건대 존자께서는 나를 위해 법을 설하소서"라고 청하여 말하면,121) 마땅히 그에게 반문하여 "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 도대체 무엇을 설하여 주기를 바라는 것인가?"고 힐난하여, 더 이상 마땅히 분별하지 않고서 그로 하여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하든지 혹은 스스로 알게 하여 시비를 걸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 두 가지(분별기와 반힐기)에는 도무지 법에 대한 물음은 없고 오로지 그것을 설해 주기를 청하는 것만 있으며, 또한 역시 대답[記]은 없고 오로지 '무엇을 설해 주기를 원하는가?' 하는 반문의 힐난만 있지 아니한가? 그러니 어떻게 이 두 가지를 묻고 답하는 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마치 어떤 이가 "나를 위해 도를 설하여 주소서"라고 청하여 말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어찌 도를 묻는 것이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즉 반문하여 힐난하는 것으로써 그가 물은 바에 답한 것이니, 어찌 도에 대답한 것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두 가지 모두 반힐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 물은 이의 마음에 정직함과 아첨함의 차이가 있으며, 대답에도 분별함과 분별하지 않음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사치기란, 만약 어떤 이가 "세간은 그 끝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없다고 해야 할 것인가" 따위에 대해 물을 경우, 이에 대해 마땅히 그냥 내버려두어야 할 것으로, 그를 위해 아무것도 설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이상 유부 아비달마논사의 四問記說)
  그러나 지금 여기서 계경에 근거하여 묻고 답하는 논의[問記論]의 특징을
  
  
  
121) 여기서 '아첨하는 마음'이란 뭔가 상대방의 결점을 찾아내려고 논의를 시도하면서 표면적으로는 법을 청문하는 것과 같은 이중적 태도를 취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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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별해 보면, 예컨대 대중부(大衆部)의 계경에서는 이같이 말하고 있다.
  "필추들은 마땅히 알아야 하니, 묻고 답하는 논의에는 네 가지의 종류가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이를테면 혹 어떤 이가 물으면 마땅히 한결같이 그렇다고 대답해야 할 것이고, 나아가 어떤 이가 물으면 다만 마땅히 그냥 내버려두어야 할 것[應置]이다.
  무엇을 일컬어 어떤 물음에 대해 마땅히 한결같이 그렇다고 대답해야 하는 것[應一向記]이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제행(諸行)은 다 무상한가?'라고 물을 경우, 이 같은 물음을 일컬어 '마땅히 한결같이 그렇다고 대답해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
  무엇을 일컬어 어떤 물음에 대해 '마땅히 분별하여 대답해야 하는 것[應分別記]'이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만약 고의적 의사[故思]로써 업을 조작하고 나면 어떠한 과보를 받게 되는가'하고 물을 경우, 이 같은 물음을 일컬어 '마땅히 분별하여 대답해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
  무엇을 일컬어 어떤 물음에 대해 '마땅히 반문 힐난하여 대답해야 하는 것[應反詰記]'이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사부(士夫)라는 명상(名想)과 아(我)를 동일하다고 해야 할 것인가,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물을 경우, '그대는 어떤 아에 근거하여 이같이 묻는 것인가? 만약 거친 아[麤我, 5온의 假我를 말함]에 근거하여 말한 것이라면 마땅히 명상과 다르다고 대답해야 한다'고 마땅히 힐난하여 말해야 할 것이니, 이러한 물음을 일컬어 '마땅히 반문 힐난하여 대답해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
  무엇을 일컬어 어떤 물음에 대해 다만 '마땅히 그냥 내버려두어야 하는 것[應捨置]'이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만약 세간은 항상[常]하다고 해야 할 것인가, 무상하다고 해야 할 것인가, 역시 항상하고 역시 무상하다고 해야 할 것인가, 항상하지도 않고 무상하지도 않다고 해야 할 것인가? 세간은 끝이 있다[有邊]고 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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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인가, 역시 끝이 있고 역시 끝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인가, 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끝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인가? 여래는 사후(死後)에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인가, 역시 존재하고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인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인가? 영혼[命者, j va]이 바로 몸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영혼은 몸과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인가? 이러한 물음을 일컬어 다만 '마땅히 그냥 내버려두어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