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아비달마구사론 제 20 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4.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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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구사론 제 20 권
  존자 세친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
  
5. 분별수면품 ②
  온갖 유정류가 이러한 사(事, 즉 소연) 중에서 수면을 수증(隨增)하는 경우,1) 이러한 '사'를 계박한다[繫]고 말한다. 그렇다면 과거·현재·미래의 어떠한 수면이 능히 어떠한 '사'를 계박하는가에 대해 마땅히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만약 이러한 경계에 대해 계박하는 것이면
  그것은 아직 끊어지지 않은 탐·진·만으로서
  과거의 것과, 현재에 이미 생겨난 것이다.
  미래의 의식상응의 그것은 변행(遍行)이며
  若於此事中 未斷貪瞋慢
  過現若已起 未來意遍行
  
  
  
  
1) '사(事, vastu)'에는 자체사(自體事)·소연사(所緣事)·계사(繫事)·인사(因事)·섭수사(攝受事) 등이 있지만(『대비바사론』 권제56, 한글대장경120, p. 119: 본론 권제6, p.112∼113), 여기서의 '사'는 두 번째로서 번뇌에 의해 계박되는 소연의 경계로서의 '사'[所繫事]이다. 이를테면 안식 상응의 수면이 능히 계박하는 것[能繫事]이라면 계박의 대상이 되는 색경이 바로 소연의 사이다.(이하 '사'를 소연의 경계로 번역한다) 그리고 번뇌에 계박되는 심·심소도 역시 계박의 대상이 되는데, 전자를 소연계(所緣繫)라고 한다면 후자를 상응계(相應繫)라고 한다.(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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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식상응으로서 생겨날 수 있는 것은 미래[自世]의 경계를 계박하며
  생겨나지 않은 것은 역시 변행이며
  그 밖의 것(견·의·치)으로서 과거·미래의 것은 변행이며
  현재의 그것은 지금의 경계를 연으로 할 때만 능히 계박한다.2)
  五可生自世 不生亦遍行
  餘過未遍行 現正緣能繫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수면에는 모두 두 가지의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자상혹(自相惑)으로 이를테면 탐(貪)·진(瞋)·만(慢)이 바로 그것이며, 둘째는 공상혹(共相惑)으로 이를테면 견(見)·의(疑)·치(癡)가 바로 그것이다.3)
  '사(事)'에는 비록 다수가 있을지라도 여기서는 소계사(所繫事)를 설한 것으로, [본송에서] '아직 끊어지지 않는[未斷]'이라고 하는 말은 상응하는 바대로 이후에도 두루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4)
  만약 이러한 소연의 경계 중에 존재하는 탐·진·만으로서 과거세에 이미 생겨나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과,5) 현재 이미 생겨난 것은 능히 이러한 소연의 경계를 계박한다. 즉 탐·진·만은 바로 자상혹으로서 온갖 유정에 대해 결정코 두루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6)(제2·제3 구)
  
  
2) 변행수면에는 삼세의 소연을 모두 계박하는 세(世)변행과 자신과 동시[自世]에 존재하는 경계만을 모두 계박하는 사(事)변행이 있는데, 본 송에서는 이 두 가지와 모두 통하는 것을 '변행'이라고 하였다.
3) 자상혹(svalak a a-klesa)이란 자상에 미혹한 번뇌라는 뜻으로, '탐'은 좋아하는 대상을, '진'은 좋아하지 않는 대상을 연으로 하여 일어나듯이 특정한 경계에 대해 일어나는 번뇌를 말한다. 공상혹(samanyalak a a-klesa)은 낙수·고수에 관계없이 어떠한 대상에 대해서도, 다시 말해 다수의 법을 연으로 하여 일어나는 번뇌를 말한다.
4) 이를테면 어떤 유정이 어떤 소연의 경계[事]를 대상으로 하여 수면을 수증할 경우, 이를 '소연의 경계를 계박하는 것[繫, sa prayukta]'이라고 하기 때문에, 수면이 소연의 경계를 능히 계박하기 위해서는 '아직 끊어지지 않은[未斷]'이어야 하는 것이다.
5) 정의적인 번뇌인 수소단의 수면 즉 수혹(修惑)은 견소단의 그것처럼 4제의 관지(觀智)와 무간에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관찰에 따라 분류되는 것이 아니라 상상에서 하하에 이르는 번뇌의 강약(9품)과 선정의 상태(9지)에 따라 81품으로 분류된다. 따라서 욕계(탐·진·만·무명) 상상품의 번뇌가 끊어졌을지라도 그 밖의 품류는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경우가 있다. 본론 권제23(p.1070) 참조.
6) 과거세에 이미 생겨나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과 현재 이미 생겨난 탐·진·만은 자상혹이기 때문에 삼세에 걸친 소연의 경계를 두루 대상으로 하여 일어나지 않으며, 다만 자세(自世)의 경계만을 능히 계박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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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세의 의식상응의 탐·진·만 세 가지는 삼세를 두루 연으로 하기 때문에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이라면 그것들은 모두 [삼세의 소연의 경계를] 능히 계박한다.7)(제4구)
  그러나 미래세의 5식상응의 탐·진으로서, 만약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이면서 생겨날 수 있는 것이라면 오로지 미래세의 경계만을 계박하며,(제5구) 미래세의 5식과 상응하는 탐·진으로서 만약 끊어지지 않은 것이면서 결정코 생겨나지 않은 것이라면 역시 삼세의 경계를 능히 계박한다.8)(제6구)
  그 밖의 일체의 견·의·무명의 경우, 과거·미래의 것이면서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은 두루 삼세의 경계를 계박한다.(제7구) 즉 이러한 세 종류의 수면은 바로 공상혹이어서 일체의 유정은 [그것에 의해 삼세의 소연을] 모두 두루 계박하기 때문이다.9) 그러나 만약 현재세의 그것은 바로 지금[正]의 경계를 연으로 할 때만 상응하는 바대로 능히 이러한 소연의 경계를 계박한다.(제8구)
  온갖 소연의 경계[事]로서 과거·미래의 그것을 실로 존재한다[有]고 해야 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다[無]고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마땅히 분별해 보아야 할 것으로, 그런 후 비로소 계박에 대해 논설할 수 있을 것이다.10)
  
  
7) 아직 생겨나지 않은 미래세의 의식상응의 번뇌는 무변이고 헤아릴 수 없이 많기 때문에 삼세를 계박할 가능성이 있음은 물론 자신의 소연이 되는 일체의 경계를 계박할 가능성도 갖고 있다. 왜냐 하면 이미 일어난 것에는 일정한 제한이 있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은 모든 것에 대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으로, 따라서 미래세의 의식상응의 번뇌는 세(世)변행인 동시에 사(事)변행이다.
8) 즉 미래의 미단(未斷) 불생(不生)의 5식상응법은 이루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그 같은 탐·진은 자신의 소연이 되는 일체의 경계를 계박할 수 있어 사변행이며, 또한 능연의 식이 불생이기 때문에 미래·현재·과거의 어떠한 것도 이것의 소연이 될 수 있어 세변행이다.
9) 공상혹은 의식상응의 법이기 때문에 삼세의 경계를 연으로 하는 작용이 있어 세변행이며, 현재의 특정한 소연에 제한받지 않고 자신의 경계를 모두 연으로 하기 때문에 사변행이다.
10) 앞에서 삼세에 걸친 수면과 소연의 경계에 대한 계박의 관계를 논설하였는데, 만약 수면이 과거·현재·미래의 경계를 계박한다면 그 때 과거·미래법은 실재하는 것[實]인가, 실재하는 것이 아닌 가설적인 것[假]인가? 만약 실재하는 것이라면 상주설(常住說)에 빠지게 될 것이고, 가설적인 것이라면 어떻게 능히 계박하고 계박되며, 이계(離繫)가 가능할 것인가? 이하 이 같은 문제에서 야기된 삼세법의 실유에 관한 논설이 전개되고 있다. '삼세실유설'은 그 명칭이 시사하듯이 설일체유부의 가장 특징적인 교설로서, 과거·미래의 무체설(無體說)을 주장하는 경량부와의 대론은 이론적인 면에서나 양적인 면에서 아비달마불교의 최대의 논쟁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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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런데 만약 [소연의 경계로서 과거 미래의 그것이] 실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일체의 행(行)은 항시(恒時)에 존재하기 때문에 마땅히 상주한다고 설해야 하며, 만약 실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능히 계박함[能繫]과 계박되는 것[所繫]과 그리고 그러한 계박으로부터의 떠남[離繫]이 존재한다고 설할 수 있을 것인가?
  비바사사(毘婆沙師)는 결정코 실유(實有)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제행(諸行)을 일컬어 '상주하는 것[常]'이라고는 하지 않으니, 유위의 온갖 상(相, 즉 생주이멸)과 화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비바사사가] 주장한 바를 결정코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 마땅히 그 종의를 간략히 밝히고 그 이취(理趣)를 드러내어 보아야 할 것이다.11)
  게송으로 말하겠다.
  
  
  
11) 유부에 의하는 한 과거·현재·미래의 제법은 실재하는 것으로, 이 같은 사실은 또 다른 지식의 근거 없이 그 자체로서 알려진다.(『현종론』 권제26, 한글대장경201, p. 184): "'실유(實有)와 가유(假有)의 상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대상이 되어 지각을 낳게 하는 이것은 모두 '유(有)'의 상이니, 색(色)·수(受) 따위처럼 만약 더 이상 뭔가 의지하는 바[所待]가 없는 것에 대해 지각을 낳으면, 이것이 바로 실유의 상이다. 그러나 항아리나 군대 등과 마찬가지로 만약 뭔가 의지하는 바가 있는 것에 대해 지각을 낳으면, 이것은 바로 가유의 상이다. 따라서 과거·미래는 오직 가유일 뿐이라고는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니, 가유라고 할 만한 근거가 없기 때문이며, 또한 뭔가에 의지하는 바가 없이도 능히 지각을 낳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오온이 색·수·상 등에 의해 생겨나 알려지는 것처럼, 항아리는 진흙에 의해, 군대는 군인에 의해 생겨나 알려지는 것이므로 그것의 상은 실유가 아닌 가유이다. 반대로 색·수·상 등이나 진흙은 그 자체로서 알려지기 때문에 실유이다. 즉 여기서 '실유'하는 것이란 더 이상 환원불가능한 지식의 구성요소를 말한다. 그리고 참고로 과거·현재·미래의 삼세가 실유한다고 하는 말은 시간 자체가 실유라는 뜻은 아니다. 유부에 있어 시간 자체는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 생멸 변천하는 유위제법에 근거하여 설정된 것, 다시 말해 시간[世路, adhvan, 세간의 시간(世)은 유위를 근거(路)로 하기 때문에 '세로'임]은 유위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에(본론 권제1, p.11) 바로 제법의 실유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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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세의 실유는 교설과
  두 가지와, 대상과 과보가 있기 때문으로,
  삼세의 실유를 설하였기 때문에
  설일체유부로서 인정되는 것이다.
  三世有由說 二有境果故
  說三世有故 許說一切有
  
  논하여 말하겠다. 삼세는 실유(實有)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계경 중에서 세존께서 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세존께서 설하기를, "필추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 과거의 색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다문(多聞)의 성(聖) 제자들은 마땅히 과거의 색에 대해 그 염사(厭捨)를 부지런히 닦을 수 없을 것이니, 과거의 색이 존재하기 때문에 다문의 성제자들은 마땅히 과거의 색에 대해 그 염사를 부지런히 닦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만약 미래의 색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다문의 성제자들은 마땅히 미래의 색에 대해 그 흔구(欣求)를 부지런히 끊을 수 없을 것이니, 미래의 색이 존재하기 때문에 다문의 성 제자들은 마땅히 미래의 색에 대해 그 흔구를 부지런히 끊을 수 있는 것이다"고 하였다.12)
  또한 두 가지 연(緣)을 갖추어야 비로소 식(識)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즉 계경에서 설하기를, "식은 두 가지 연에 의해 생겨난다. 그 두 가지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안과 색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의(意)와 온갖 법이 바로 그것이다"고 하였다.13) 그런데 만약 과거·미래세가 실유가 아니라고 한다면, 능히 그것을 연으로 하는 식은 마땅히 두 가지 연 [중의 하나]를 결여해야 하는 것이다.
  이미 성교(聖敎)에 근거하여 과거 미래의 실유를 논증하였으니, 이제 마땅히 정리(正理)에 의거하여 과거나 미래의 실유를 논증해 보아야 할 것이다.
  식이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그 대상[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반드시
  
  
  
12) 『잡아함경』 권제3 제79경(대정장2, p. 20상).
13) 같은 경 권제8 제214경(동, p.54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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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상이 존재하여야 식은 생겨날 수 있으며, 대상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생겨나지 않으니, 이러한 이치는 결정적인 것이다. 그런데 만약 과거·미래세라는 대상 자체가 실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마땅히 소연을 갖지 않는 식[無所緣識]이 존재해야 할 것이지만, 소연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식 또한 마땅히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이미 [과거로] 낙사(落謝)한 업에는 당래의 과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만약 진실로 과거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선과 악 두 업의 당래 과보는 마땅히 존재하지 않아야 하며, 과보가 생겨날 때 현재의 원인은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14)
  이 같은 교증과 이증으로 말미암아 비바사사(毘婆沙師)는 결정코 과거·미래의 2세가 진실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스스로 '일체의 실유를 설하는 종의[說一切有宗]'라고 말한다면 결정코 마땅히 과거·미래세도 실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인정해야 할 것이니, 삼세는 모두 결정코 실유라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설일체유종에서는 바로 이 같은 사실을 인정하니, 이를테면 만약 어떤 사람이 삼세의 실유를 설하면 바야흐로 그는 바로 설일체유종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오로지 현재세와 아직 과보를 낳지 않은 과거세의 업만이 실재한다고 설하고, 미래세와 이미 결과를 산출한 과거세의 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하면 그는 분별설부(分別說部)로 인정되는데, [유부종은] 이러한 부파에 포섭되지 않는다.
  
  지금 이 부파 중의 [학설의] 차별에는 몇 가지가 있으며, 누구의 주장이 시간[世]에 관한 가장 뛰어난 것으로 의지할 만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14) 과거가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면 과거로 낙사(落謝)한 선악업은 이미 소멸해버렸으므로 현재 어떠한 결과도 산출하지 못할 것이며,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현재의 행위 역시 어떠한 결과도 산출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마땅히 무인유과(無因有果)·유인무과(有因無果)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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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부파 중에는 네 종류의 학설이 있어
  존재[類]·양상[相]·상태[位]·관계[待]가 다르다 하니
  세 번째 작용의 상태에 근거하여 말한 것이
  시간에 관해 가장 잘 정립된 것이다.15)
  此中有四種 類相位待異
  第三約作用 立世最爲善
  
  논하여 말하겠다. 존자 법구(法救)는 다음과 같은 설을 주장하였다. "현상적 존재[類, bhava]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삼세에 다름이 있다." 그는 말하기를, "제법이 어떤 시간에 일어날 때 현상적 존재에 다름이 있기 때문에 [삼세에 시간적 차별이 있는 것으로] 본질 그 자체에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금으로 만들어진 그릇이 깨어져 다른 물건이 될 때 비록 형태상의 변화는 있을지라도 금 자체에는 어떠한 차이도 없는 것과 같으며, 또한 젖이 변하여 낙(酪)이 될 때 맛 등은 버리더라도 현색은 버리지 않는 것과 같으니, 이와 마찬가지로 제법이 어떤 시간에 작용할 때 미래로부터 현재세에 이르고, 현재로부터 과거세로 들어가는 동안 오로지 그 현상적 존재만을 버리고 획득하는 것일 뿐 본질 자체는 버리고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고 하였다.
  존자 묘음(妙音)은 다음과 같은 설을 주장하였다. "양상[相, lak a a]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삼세에 다름이 있다." 그는 말하기를, "제법이 어떤 시간에 작용할 때 과거법은 바로 과거의 양상과 화합한 것으로, 그렇더라도 현재·미래의 양상을 여의었다고는 말하지는 않는다. 미래법은 바로 미래의 양상과 화합한 것으로, 그렇더라도 과거·현재의 양상을 여의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현재법은 바로 현재의 양상과 화합한 것으로, 그렇더라도 과거·미래의 양상을 여의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한
  
  
  
15) 본송은 삼세의 시간적 차별에 대해 논의한 것이다. 즉 과거·현재·미래가 실재한다면 그것은 마땅히 삼세의 혼재(混在)로서, 삼세의 시간적 차별은 불가능하다. 이 같은 시간적 차별에 대해서는 고래로 바사(婆沙)의 4대평자(評者)로 일컬어지는 법구(Dharmatrata)·묘음(Gho a)·세우(Vasumitra)·각천(Buddhadeva)의 학설이 전하고 있는데, 케시미르 유부에서는 이 중 세우의 설을 선설로 평취한다. 『대비바사론』 권제77(한글대장경121, p. 32이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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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의 부인[妻室]을 더럽힐 때에도 그 밖의 다른 무희나 계집종 등의 여인에 대해 염오함을 떠났다고는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16)
  존자 세우(世友)는 다음과 같은 설을 주장하였다.
  "작용하는 상태[位, avastha]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삼세에 다름이 있다."
  그는 말하기를, "제법이 어떤 시간에 작용할 때 어떤 상태로부터 어떤 상태 중에 이르면서 [삼세에] 각기 다름이 있다고 설한다. 즉 [작용하는] 상태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삼세의 차별이 있는 것으로] 본질 자체에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니, 마치 수를 헤아리는 산가지[籌]가 일의 위치에 오게 되면 일로 불리고, 백의 위치에 오게 되면 백으로 불리며, 천의 위치에 오게 되면 천으로 불리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존자 각천(覺天)은 다음과 같은 설을 주장하고 있다.
  "관계[待, apek a]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삼세에 다름이 있다."
  그는 말하기를, "제법이 어떤 시간에 작용할 때 전후의 상호관계에 따라 [삼세의] 명칭에 다름이 있는 것으로, 마치 어떤 한 여인을 [딸과 관계하여서는] 어머니라 불리고, [어머니와 관계하여서는] 딸이라고 불리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17)
  일체법이 실재한다는 이 같은 네 종류의 학설 중 첫 번째(법구의 설)는 법에 전변(轉變)이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마땅히 수론(數論)의 무리 중에 포함시켜야 한다.18) 두 번째 주장은 삼세가 서로 뒤섞이게 되니, 삼세가 모두
  
  
16) 즉 어떤 한 남자가 어떤 한 여인과 사랑에 빠져 있다 할지라도(현재상) 다른 여인에 대한 사랑의 능력(과거·미래상)을 상실하지 않는 것처럼, 제법이 서로 다른 시간대에 나타나는 것은 각기 그 양상을 달리하기 때문이지만 과거법은 그것의 미래나 현재의 양상을 여의지 않은 채 과거의 양상을 유지하며, 미래법은 그것의 과거나 현재의 양상을 여의지 않은 채 미래의 양상을 유지하며, 현재법은 그것의 과거나 미래의 양상을 여의지 않은 채 현재의 양상을 유지한다.
17) 이와 마찬가지로 제법이 어떤 시간에 일어날 때 현재·미래와 관계하여 과거라고 불리고, 과거·현재와 관계하여 미래라고 불리며, 과거·미래와 관계하여 현재라고 불릴 뿐, 제법 자체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다.
18) 법구의 설은 득(得)·사(捨)에 의한 금의 전변을 주장하기 때문에 세계를 물질적 질료인 자성(自性, prak ti)의 전변으로 이해한 수론(Sa khya)학파의 전변설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즉 수론에 의하면 자성의 세 가지 역동적 속성인 사트바(sattva, 純質)·라자스(rajas, 激質)·타마스(tamas, 鬱質)의 은현(隱顯)에 따라 다양한 차별상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중현은, 법구의 설은 유위법이 그 자체로서 상주하며 삼세에 따라 숨거나 드러난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제법이 어떤 시간에 일어날 때 법 그 자체의 상[體相]은 비록 동일할지라도 현상적인 존재유형[性類]이 다르다고 설한 것일 뿐이기 때문에 수론의 전변설과는 다르며, 세 번째 존자 세우의 설과 부분적으로 동일하다고 해석하고 있다.(『현종론』 권제26, 앞의 책, p.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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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세의 상을 갖기 때문이다.19) 즉 어떤 사람이 한 명의 부인에 대한 애탐이 현행할 때 그 밖의 다른 대상에 대한 애탐은 오로지 성취되기만 할 뿐 현재 [그들에 대한] 애탐이 일어나는 일이 없는데, 어떠한 의미에서 동일하다고 하겠는가? 그리고 네 번째 주장에 따르면 전후의 상호관계에 따라 일세법 중에도 삼세가 존재해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과거세의 전후 차별을 과거와 미래라 이름하고 그 중간을 현재라고 해야 할 것이며, 미래세와 현재세의 경우도 역시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20)
  따라서 이 네 가지 설 중에 세 번째의 설이 가장 뛰어나다. 즉 작용에 근거함에 따라 상태에 차별이 있는 것으로, 작용하는 상태[位]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삼세에 다름이 있는 것이다. 즉 그(세우)는 말하기를, "제법이 아직 작용하지 않을 때를 일컬어 '미래'라 하고, 작용하고 있을 때를 일컬어 '현재'라고 하며, 이미 작용이 소멸한 때를 일컬어 '과거'라고 하지만, 본질상으로는 어떠한 다름도 없다"고 하였다.
  이(실유에 관한 4종학설)에 대해서는 이미 모두 알았다. 그는 마땅히 다시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니, 만약 과거·미래세의 법체가 실유라고 한다면 마땅히 현재라고 이름해야 할 것임에도 어찌 과거·미래라고 말하는 것인가?21)
  앞에서 작용에 근거하여 설정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현재 안(眼) 등의 근도 피동분(彼同分)에 포섭되는 경우가 있는데, 어떻게 작용이 있다고 하겠는가?22)
  
  
19) 즉 묘음의 설은 제법이 동일한 시간에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양상과 공존함을 뜻하기 때문에 시간의 혼란을 야기시킨다.
20) 각천의 설은 삼세 각각에 삼세의 상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해 과거세의 전후도 과거·미래라 할 수 있으며 그 중간을 현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묘음의 설과 마찬가지로 시간의 상[世相]이 서로 잡란되는 과실이 있다.
21) 이하 난문자는 경량부이다. 즉 과거·미래세가 실유라고 한다면, 다시 말해 항상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항상 현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22) 만약 작용으로써 삼세를 구별한다면 현재 발식취경(發識取境)의 작용을 행하고 있지 않는 피동분의 안근은 현재의 눈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힐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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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피동분의 안근)에도 어찌 취과(取果)와 여과(與果)의 공능이 없다고 하겠는가?
  그와 같다고 한다면 과거의 동류인(同類因) 등에도 여과의 공능이 있으니 마땅히 작용을 갖는다고 해야 할 것이며, [취과와 여과의 공능 중] 절반의 작용을 갖을 경우 삼세는 서로 뒤섞이고 말 것이다.23)
  [삼세 실유설에 대해] 이미 간략하게 따져 보았으니, 다음으로 마땅히 널리 비판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엇이 작용을 장애하며, 작용이란 무엇인가.
  [작용이 법체와] 다르지 않다면 시간의 차별은 바로 허물어질 것이며,
  [미래·과거가] 실재한다면 아직 생겨나지 않고 이미 멸한 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이러한 법성은 매우 깊고도 깊도다.
  何礙用云何 無異世便壞
  有誰未生滅 此法性甚深
  
  논하여 말하겠다. 마땅히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니, 만약 법 자체가 항유(恒有)한다면 응당 마땅히 모든 때에 걸쳐 능히 그 작용이 일어나야 할 것인데, 어떠한 힘이 장애하여 이러한 법체로 하여금 어느 때는 그 작용을 일으키게
  
  
  
23) 즉 피동분의 안근 역시 다음 순간의 안근을 산출하는[與果] 직접적인 원인(동류인)이 되기 때문에 현재라고 한다면, 현재에 작용하고 있는 동분(同分)의 안근도 결국 과거의 그것과 동일한 것이 되고 만다. 왜냐 하면 선행된 원인에 의해 산출된 그 같은 결과[取果]의 작용이 현재 순간 수행되고 있기 때문에, 과거는 현재와 같은 의미가 되고 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미래에 나타날 결과의 일반적 성격을 규정하는 제법의 힘이 과거에 속한다면 그것은 과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현재 순간에 결과를 산출하기 때문에 현재라고 한다면 삼세의 기준이 모호해져 결국 시간적 차별의 혼란이 야기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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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고 어느 때는 일으키지 않게 하는 것인가? 만약 중연(衆緣)이 화합하지 않을 때 [작용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 같은 해명은 이치에 맞지 않으니, 항상 존재하는 것이라고 인정하였기 때문이다.24)
  또한 이러한 [또 다른] 작용은 어떻게 과거·미래·현재가 된다고 설할 수 있을 것인가? 어찌 작용 중에 또다시 다른 작용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25)
  만약 이러한 작용은 과거·미래·현재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그럼에도 다시 설하여 말하기를, '작용은 존재한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무위이기 때문에 마땅히 항상 존재해야 할 것[非無]이며, 따라서 마땅히 '작용이 이미 소멸한 법을 과거라 하고 아직 작용을 갖지 않은 법을 미래라고 이름한다'고 말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만약 작용이 법체와 다른 것이라고 인정할 경우 이 같은 과실이 있을 것이지만, [작용과 법체는]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땅히 이 같은 과실이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앞에서] 설정한 삼세의 의미는 바로 허물어지고 만다. 이를테면 만약 작용이 바로 법체라고 한다면, 법체가 이미 항유(恒有)이기 때문에 작용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데, 어떻게 어느 때를 일컬어 과거니 미래니 할 수 있을 것인가?26) 따라서 그들(유부종)이 설정한 삼세의 의미는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어째서 성립하지 않는 것인가?
  유위의 법으로서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을 '미래'라 이름하고, 이미 생겨나
  
  
  
24) 즉 중연이 화합할 때 비로소 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각각의 인연법 역시 실유로서 화합하지 않은 때가 없어야 하기 때문에, 이것이 작용의 생기를 장애할 수 없다는 힐난.
25) 만약 작용에 의해 삼세가 차별된다면, 그 같은 작용의 시간적 차별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다시 말해 작용은 무엇에 의해 과거·현재·미래로 구별되는가? 만약 또 다른 작용에 의해 그것의 삼세가 구별된다면 무한소급[窮致]에 빠질 것이며, 삼세 이외 작용이 있다고 한다면 이 때의 작용은 무위로서 항상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후술)
26) 즉 작용과 법체가 다르지 않다고 한다면, 법체가 삼세에 실유이듯이 작용 또한 그러하며, 따라서 유부가 주장하듯이 작용의 유무에 의한 삼세의 차별은 설정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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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소멸하지 않은 것을 '현재'라 이름하며, 이미 소멸한 것을 '과거'라고 이름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유부종)은 마땅히 다시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니, 만약 현재의 법체가 실유인 것처럼 과거·미래의 법체도 역시 그렇다고 한다면 무엇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이며, 또한 다시 무엇이 '이미 소멸한 것'인가? 이를테면 유위의 법체가 진실로 항유라고 한다면, 어떻게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과 '이미 소멸한 것'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인가? [생겨나기] 이전에는 무엇이 결여되어 그것이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즉 미래)'이라고 이름한 것이며, [생겨난] 후에 다시 무엇이 결여되어 그것이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미 소멸한 것(즉 과거)'이라고 이름한 것인가? 따라서 '법은 본래 없었다가 지금 존재[本無今有, 즉 현재]하며, 존재하다가 다시 비존재로 돌아간다[有已還無, 즉 과거]'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삼세의 의미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마땅히 일체종(一切種)의 유위법도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유부종)이 설한 '항상 유위의 온갖 상(相, 즉 생주이멸)과 화합하고 있기 때문에 제행(諸行)은 상주하는 것이 아니다[非常]'는 사실, 이것은 다만 헛된 말일 뿐이니, 생멸의 이치가 없기 때문이다. 즉 '법체는 항유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 존재[性]는 상주하는 것이 아니다'고 설하니, 이와 같은 의미의 말은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이 같은 뜻에 근거하여 어떤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법체가 항유한다고 인정하면서
  그 존재는 상주하는 것이 아니라고 설하지만
  법체와 그 존재는 더 이상 다르지 않으니,
  이러한 주장은 진정코 자재신의 조작인 것인가?27)
  
  
  
27) (許法體恒有 而說性非常 性體復無別 此眞自在作). 이는 제법실유의 타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존재의 본질[法體]과 존재[性, 혹은 用]를 별개의 것으로 분별하는 유부교학을 변덕스러운 자재신( svara)의 짓거리에 빗대어 조롱하는 내용의 게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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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그들(유부종)이 "세존께서 설하였기 때문에 과거·미래 2세의 법체 실유이다"고 말한 것에 대해, 우리(경부사)도 역시 과거·미래세가 존재한다고 설한다. 이를테면 과거세는 증유(曾有) 즉 일찍이 있었던 것으로서의 존재이고, 미래세는 당유(當有) 즉 앞으로 있을 것으로서의 존재이니, 원인과 결과이기 때문이다.28) 이와 같은 뜻에 의거하여 과거와 미래가 존재한다고 설하였지만, 과거·미래가 현재와 같은 실유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경부)
  누가 그러한 [과거·미래세의] 존재[有]가 현재세와 같은 것이라고 말하였던가?(유부)
  현재세와 같은 의미가 아니라면 그러한 존재는 어떠한 것인가?(경부)
  그것은 과거·미래 2세의 법 그 자체[自性]로서 존재한다.(유부)29)
  이에 대해서는 마땅히 다시 힐난해야 할 것이니, 만약 [과거와 미래의 법이] 다 같이 실유라고 한다면 어떻게 과거·미래의 존재[性]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계경에서] 그것이 존재한다고 설하였을지라도 그것은 다만 일찍이 있었든 원인적 존재[曾因性], 앞으로 있을 결과적 존재[當果性]라는 사실에 근거한 것일 뿐 그 자체 실유라는 말이 아니다. 즉 세존께서는 인과를 비방하는 견해를 부정하기 위하여 증유와 당유의 의미로써 '과거·미래가 존재한다'고 설한 것이니,30) '존재한다[有]'는 말은 실재하는 것이나 실
  
  
28) 이하 앞서 유부의 삼세실유 논거였던 두 가지 경증과 두 가지 이증에 대한 경량부의 비판이 진술된다. 이 논설은 그 첫 번째로, '과거색이 존재하기 때문에 다문의 성제자는 이를 염사(厭捨)코자 수행하며, 미래색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를 끊으려고 노력한다'는 경문에서 '존재한다[有]'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서 설정된 것이기 때문에 과거색은 과거의 존재[曾有]로서의 '유'이고, 미래색은 미래존재[當有]로서의 '유'이다. 다시 말해 과거는 현재라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에 일찍이 있었던 원인(曾有의 因)이고, 미래는 현재라는 원인에 의해 낳아질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 있을 결과(當有의 果)이다. 즉 과거와 미래는 현재를 중심으로 하여 설정된 가설적 언표(prajnapti)로서 증유와 당유로서만 존재할 뿐 현재와 같은 의미의 실유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29) 즉 과거·미래의 법은 현재법처럼 작용은 갖지 않지만 법 자체로서는 각기 개별적으로 실재한다.
30) 계경에서 말한 '과거도 존재하고 미래도 존재한다'고 하는 말은 과거행위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부정하는 사명외도( j vika)와 논쟁할 때 사용하였다. 즉 세존께서는 과거의 원인과 미래의 결과 사이에 어떠한 관계설정도 부정하는 그들의 교의를 비판하고, 선행된 원인과 미래 결과 사이의 인과상속을 나타내기 위해 그같이 말하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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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하지 않는 법 모두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세간에서 '등불은 [그것을 켜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고 있다[有燈先無]'거나 '등불은 [그것을 끈] 후에는 존재하지 않고 있다[有燈後無]'고 설하고 있으며, 또한 '등불이 이미 꺼져 있다[有燈已滅]. 그러나 지금 내가 끈 것은 아니다'고 말하는 것처럼, '과거와 미래가 존재한다'고 설할 경우, 그 뜻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그 자체로서 실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과거와 미래의 존재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세존께서는 무엇에 근거하여 그들 장계외도(杖髻外道)를 위해 "업이 과거로 낙사하여 멸진(滅盡) 변괴(變壞)하였을지라도 그럼에도 그것은 오히려 존재한다"고 설하였겠는가? 어찌 그들(외도)이 업이 일찍이 존재하였음[曾有性]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세존께서 거듭하여 '존재한다'고 설한 것이라고 하겠는가?31)
  그것('업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업에 의해 인기된 현재 상속신 중의 여과(與果)의 공능에 근거하여 은밀히 '존재한다'고 설한 것으로, 만약 그렇지 않고 그 같은 과거의 업이 현재 실유하는 존재라면 과거를 어찌 성취할 수 있을 것인가?32) 이치상 필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니, 박가범께서 『승의공경(勝義空經)』 중에서 "안근이 생겨날 때 그것은 어디(즉 미래)로부터 온 곳이 없으며, 안근이 멸할 때에는 [어떤 다른 곳으로 가] 조작하여 집기[造集]하는 바도 없다. 그것은 본래 없었다가 지금 존재하며, 존재하다가는 다시 비존재가 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33) 그러나 만약 과거·미래의 안근이 실유한다면
  
  
31) 즉 과거의 업이 일찍이 존재하였음은 누구라도 아는 사실로서, 장계외도가 과거에 행하였던 업의 존재를 부정하였기 때문에 그 같은 법문을 설한 것이 아니라 과거업의 현재 실유를 모르기 때문에 설하였다는 뜻.
32) 장계외도에게 '업이 존재한다'고 할 때의 업은 삼세에 걸쳐 실제적 효력을 갖는 실체[業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업이 산출한 현재 상속신 상에 과보를 산출하는 힘, 즉 여과(與果) 공능의 종자(種子)가 훈습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은밀하게 '존재한다'고 설한 것일 뿐이다. 설사 업이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의 결과 즉 작용은 현재에 이루어지므로 과거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33) 여기서 『승의공계경』은 『잡아함경』 권제13 제335경(일명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대정장2, p. 92하). "云何爲第一義空經? 諸比丘眼生時無有來處, 滅時無有去處. 如是眼不實而生, 生而滅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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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에서 마땅히 '본래 없었다가 지금 존재한다[本無今有]'는 등의 말씀을 설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말씀(『승의공계경』)이 현세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해명은 이치에 맞지 않으니, 현세의 존재[性]와 그러한 안근은 그 자체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즉 만약 현세에 [근거하여] 본래 없었다가 지금 존재하며 존재하다가는 다시 없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안근이 과거·미래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이미 성립한 것이다.34)
  또한 그들(유부종)이 설한 "요컨대 두 가지 연(緣)을 갖추어야 비로소 식(識)이 생겨나기 때문에 과거·미래 2세 자체는 실유이다"고 한 것에 대해 마땅히 다 같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의근과 법경을 연으로 하여 의식이 일어난다고 할 때, 법경은 의근과 마찬가지로 능히 [의식을] 낳는 조건[能生緣]이 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법경은 다만 능히 소연의 경계[所緣境]가 된다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법경이 의근과 마찬가지로 능히 [의식을] 낳는 조건이 된다고 한다면 어떻게 미래 백천 겁 후에 응당 존재하게 될 그러한 법이나 혹은 응당 존재하지 않을 법이 능히 [의식을] 낳는 조건이 되어 지금 의식을 낳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열반의 존재는 생겨난 일체의 모든 존재와 상위하는 것인데, 그것이 능히 [의식을] 낳는 것이라고 한다면 정리(正理)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법경은 다만 능히 소연의 경계가 될 뿐이라고 한다면, 우리(경부사)도 과거·미래 역시 소연이 된다고 설하고 있다.35)
  
  
34) 즉 『승의공계경』에서의 '본무(本無)' 혹은 '환무(還無)'는 과거·미래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다만 현재에 나타나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일 뿐이라고 한다면, 불교에 있어 현재(시간)란 법을 떠나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안근이 존재하는 때가 바로 현재이며, 안근이 존재하지 않는 때가 과거·미래인 것이다.
35) 즉 의근과 법경을 연으로 하여 의식이 일어난다고 할 때, 여기서 법은 의근과 같은 인식의 실제적 원인[能生緣]인가, 단지 의식에 의해 인식되는 대상[所緣境]일 뿐인가? 만약 전자라고 한다면 현재로부터 까마득히 먼 미래에 일어날 사실(즉 未來可生法)이나 아예 일어나지 않을 미래의 사실(즉 緣缺不生法)이 어떻게 의식의 실제적 원인임을 알 수 있는 것인가? 다시 말해 현재 우리가 과거의 대상을 인식하기 때문에 그것이 실유라면, 애당초 일어나지 않았던 사실을 인식했다고 해서 어떻게 그것을 실유라고 할 수 있으며, 나아가 그것이 실유가 아니라고 한다면 어떻게 인식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모든 작용이 억제 정지된 상태인 무위열반은 어떻게 인식의 실제적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만약 후자라면, 경부에서도 역시 과거·미래가 인식의 대상이 된다고 설하니, 그것은 다만 실유로서가 아니라 현재 인식되고 있는 과거는 이미 있었던 존재[曾有]로, 미래는 앞으로 있을 존재[當有]로서 인식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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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과거·미래법이] 존재하지 않는 것[無]이라면 어떻게 소연의 경계가 될 수 있을 것인가?(유부)
  우리는 '그것(과거·미래법)은 소연을 성취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설한다.(경부)
  어떠한 방식으로 소연을 성취하는 것인가?(유부)
  말하자면 증유(曾有) 즉 일찍이 존재하였던 것과 당유(當有) 즉 앞으로 존재할 것으로서의 소연을 성취한다. 즉 과거의 색계·수 등을 기억할 때 현재처럼 분명하게 그것을 관찰하여 '존재한다'고 하지 않으며, 다만 그것이 일찍이 존재하였을 때의 형상을 추억할 뿐이다. 또한 반대로 미래의 당유를 관찰하는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말하자면 일찍이(즉 과거) 현재시점에서 지각[領]하였던 색상의 경우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과거를 추억하여 '존재한다' 하고, 역시 또한 당래(미래) 현재시점에서 지각될 색상의 경우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미래를 거슬러 관찰하여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니, 만약 [과거·미래가] 현재처럼 존재한다면 응당 마땅히 현세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과거·미래] 자체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실재하지 않는 대상을 소연으로 삼는 식[緣無境識]'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으로, 그 이치는 저절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과거·미래는 극미가 산란(散亂)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현재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치 또한 그렇지 않으니, 그것의 상을 취(인식)할 때에는 산란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36) 또한 그러한 [과거·미래의] 색이
  
  
36) 과거·미래의 색은 실재하지만 현재에는 극미로 산란되어 나타나지 않은 것일 뿐이라고 한다면, 이는 유부교학의 일관성을 상실한 해명이다. 즉 유부에 의하면 산란된 극미(獨住극미)는 인식대상(소연)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극미가 산란된 과거·미래의 색은 알려질 수 없으며, 따라서 실재한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과거·미래의 색이 알려졌다고 하면, 그것은 어쨌든 산란되지 않은 형태 즉 과거나 미래 시점에서의 소조색(즉 微聚)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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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한다는 것은 현재의 색과 동일하지만 오로지 극미의 산란만이 다르다고 한다면, 극미의 색법 자체는 마땅히 상주하는 것이어야 한다.37) 또한 [삼세의] 색법은 오로지 극미의 취집·산란일 뿐이기에 궁극적으로 생성·소멸이라고 이름할 만한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는 바로 사명자(邪命者)의 주장을 존중하고 선서(善逝, 여래의 다른 이름)가 설한 계경을 버리고 배반하는 꼴이 될 것이니, 이를테면 계경에서 "안근이 생겨날 때 그것은 어디로부터 온 곳이 없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38) 또한 수(受) 등은 극미가 취집하여 이루어진 것도 아닌데, 어떻게 과거·미래를 [극미가] 산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만 '수' 등에 대해 [과거의 그것을] 추억하고, [미래의 그것을] 거슬러 관찰하는 경우에도 역시 아직 소멸하지 않고 이미 생겨난 때(즉 현재)의 상에 대해 그러한 것이다. 따라서 만약 현재의 그것처럼 [과거·미래의 그것도] 그 자체 실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들은 마땅히 상주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만약 그 자체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도리어 마땅히 '실재하지 않는 대상을 소연으로 삼는 식[緣無境識]'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으로, 그 이치 역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만약 그 자체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 것이 소연이 될 수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소연은 마땅히 제13처(處)가 되어야 할 것이다.(유부)39)
  모든 이가 제13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인식하는데, 이러한 능연(能緣)의 식(識)은 무엇을 소연으로 삼는 것인가? 만약 '그 같은 [제13처라고 하는] 명칭을 소연의 경계로 삼는다'고 한다면, 이는 바로 마땅히 그 같은 명칭을 부
  
  
  
37) 극미의 취집(聚集, 결합)과 산란(散亂, 분리)에 의해 현재와 과거 미래를 구분한다면 극미의 색법 자체는 영원한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되고, 이는 바이세시카학파의 극미상주론과 다를 바가 없다.
38) 사명자는 아지비카( j vika)외도를 말하지만, 여기서는 바이세시카와 같은 외도(pa a in)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즉 삼세가 다만 극미의 취집과 산란의 차이일 뿐이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사실상의 실제적으로 새로이 생겨난 것도 소멸한 것도 없게 되는 것이다. 인용한 계경은 앞서 인용하였던 『승의공계경』이다.
39) 일체의 존재[有]는 12처에 포섭된다고 하였는데, 그 같은 비존재가 소연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그러한 대상을 포섭할 제13의 입처(入處)라는 새로운 범주를 설정해야 한다는 유부의 힐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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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하여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40) 또한 만약 일찍이 [발성되지 않아] 존재하지 않는 말[聲先非有]을 소연으로 삼는 경우, 이 때 이러한 능연의 식은 무엇을 소연으로 삼은 것인가? 만약 '그러한 말을 소연의 경계로 삼는다'고 한다면, 그 때의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추구하는 자[求聲無者]도 응당 마땅히 [그것을 인식하기 앞서] 발성해야 할 것이다. 만약 '말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그 말의 미래 상태이다'고 한다면 [그대의 종의에서는] 미래가 실유인데 어떻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만약 과거·미래의 말은 현세에 나타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것도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그 본질[體]은 [삼세에 걸쳐] 동일하기 때문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그 본질상에 차별이 있다고 한다면, '본래 존재하지 않다가 지금 존재한다[本無今有]'는 이치는 저절로 이루어진 셈이다. 그러므로 식은 존재하는 대상이나 존재하지 않는 대상 모두를 소연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보살(즉 석가보살)께서 "세간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나는 알고 나는 본다고 하지만 이런 일은 결코 없다"고 설하였지만, 이 말의 뜻은 '다른 이들은 증상만을 품고 또한 역시 존재하지 않는 것[非有]에 대해 [존재의] 상을 드러내어 존재한다고 말할지라도 나는 오로지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만 바야흐로 존재한다고 관찰한다'는 사실을 설한 것일 뿐이다. 만약 그 뜻이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존재하는 것만이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한다면], 일체의 지각[覺, 심소를 말함]은 모두 [실재하는] 소연을 갖는 것인데, 어떠한 이유에서 대상에 대한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심이 있을 수 있고, 혹은 차별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41) 이치상 필시 마땅히 그러해야 할 것이니, 박가범께서 다른 곳에서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기 때문이
  
  
40) 즉 제13처는 거북의 털이나 토끼뿔처럼 실재하지 않는 것인데, 그 같은 사실을 인식하였을 경우 그 때 인식의 대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제13처'라는 명칭[名, 불상응법의 하나]이겠지만, 그럴 경우 이미 제13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므로 그 명칭 역시 실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하지 않는 것도 인식대상이 될 수 있는 것[緣無境識]이다.
41) 어떤 대상이 존재하는 것인지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 의심할 경우, 그것은 바로 대상에 유무의 차별이 있음을 나타내며, 따라서 유를 연으로 삼듯이 무를 연으로 삼는 마음도 있을 수 있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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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잘 왔도다, 필추여! 그대들이 만약 능히 나의 제자가 되어 아첨함[諂]이 없고 거짓[誑]이 없고 믿음[信]이 있고 부지런함[勤]이 있으면 나는 아침에 그대들을 가르쳐 저녁에 수승함을 획득하게 할 것이며, 나는 저녁에 그대들을 가르쳐 아침에 수승함을 획득하게 할 것이니, 바로 존재하는 것은 바로 존재하는 것이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바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유상(有上)은 바로 유상이고, 무상(無上)은 바로 무상임을 알게 할 것이다."42)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들(유부종)이 설한 "인식에는 그 대상이 존재하기 때문에 과거·미래는 실유이다"는 사실 역시 [삼세실유의] 근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그들(유부종)이 설한 "업에는 과보가 존재하기 때문에 과거·미래는 실유이다"는 사실 역시 이치상 그렇지가 않으니, 경부사(經部師)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과거의 업이 능히 미래의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선행한 업에 의해 인기된 상속(相續)이 전변(轉變) 차별(差別)되어 미래의 결과로 낳아지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파아품(破我品)」(본론 권제30) 중에서 널리 현시(顯示)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과거·미래가 실유라고 주장한다면 결과 자체[果體]도 모든 때에 항상 존재해야 한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업은 그러한 결과에 대해 어떠한 공능을 갖는 것인가? 만약 능히 낳는 것이라고 한다면, 생겨난 결과는 일찍이 존재하지 않다가 지금 존재하는 것[本無今有]으로, 그 같은 이치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일체의 법이 모든 때에 존재한다면 무엇이 무엇에 대해 능생(能生)의 공능이 있을 것인가? 또한 [그럴 경우] 우중외도(雨衆外道)의 사론(邪論)을 드러내어 성취하게 될 것이니, 그들은 다음과 같은 설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필시 영원히 존재하며, 존재하지 않는 것은 필시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것이니, 존재하지 않는 것은 필시 생겨나지 않으며, 존재하는 것은 필시 소멸하지 않는다."43)
  
  
42) 『잡아함경』 권제26 제703경(대정장2, p. 189상). 여기서 유상은 위있는 법 즉 저열한 법을 말하고, 무상은 위없는 법, 즉 최상 무이(無二)의 법으로 택멸의 열반을 말한다.
43) 여기서 우중외도는 구역에서는 바사건약(婆沙乾若, Varsaganya). 250∼350년 무렵 활동하였든 수론(Sa khya)논사. 즉 상캬학파에서는 모든 결과가 이미 원인 즉 자성(自性, prakriti) 가운데 내재되어 있다고 하는 인중유과론(因中有果論)을 주장하기 때문에 무(無)에서는 어떠한 것도 생겨날 수 없으며, 자아(puru a)를 제외한다면 존재하는 것으로서 원인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존재하는 것은 결코 소멸하지 않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 결코 생겨나는 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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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만약 [과거의 업이] 능히 결과로 하여금 현재를 성취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결과로 하여금 현재를 성취하게 할 수 있는 것인가?44) 만약 [결과를] 인기(引起)하여 다른 처소(즉 현재)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인기된 결과는 그 자체 마땅히 상주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또한 무색법은 당래 어떻게 인기하여 [다른 처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것인가? 또한 이러한 결과가 인발(引發)된 것(낳아진 것)이라면 마땅히 그 자체는 본래 존재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만약 [과거의 업이 결과를 인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본질 상에 차별이 있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본래 존재하지 않다가 지금 존재한다[本無今有]'는 그 같은 이치는 저절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 만약 '과거와 미래가 실로 존재한다'고 설할 것 같으면, 이는 성교(聖敎)에 대해 잘 설한 것[善說]이 아닌 것이다.
  나아가 만약 '일체는 존재한다'는 사실을 잘 설하려고 한다면, 마땅히 계경에서 설한 바대로 설해야 할 것이다.
  경에서는 어떻게 설하고 있는 것인가?
  이를테면 계경에서는 이같이 말하고 있다. "범지여!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일체의 존재는 오로지 12처(處)이며, 혹은 삼세는 오로지 그것이 존재하는 방식대로 존재한다는 말을 설할 뿐이다."45)
  
  
44) 즉 선행된 행위가 그러한 결과로 하여금 현재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현행의 결과는 이미 원인 가운데 내재되어 있으므로 업에 의하지 않고도 자기 전개할 수 있는 것이다.
45) 『잡아함경』 권제13 제320경(대정장2, p. 91중)에서는 일체유(一切有)로서 12처를 설하고 있다. 경량부에서는 '처(處) 가립(假立)'을 주장하기 때문에 이것이 결코 경부설은 될 수 없겠으나, 법보와 보광은 다 같이 이를 경부설로 평석하여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경량부에서 주장하기를 '유(有)'라고 하는 말에는 가유(假有)·실유·증유(曾有)·당유(當有) 등 여러 뜻이 있어 그것이 존재하는 방식대로 존재한다고 설한 것이니, 이 모두는 현재가 실재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의 실유는 아니다. 삼세유라고 해도 과거는 증유이고, 미래는 당유이며, 실유는 오직 현재뿐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현재의 12처를 의미하는 것으로, 엄격히 말한다면] 12처 중 8처는 실유이고 나머지 색·성·촉·법의 4처는 부분적으로 실유이기도 하고 실무(實無)이기도 하다. 즉 색처 중 현색은 실유이나 형색은 실무이다. 촉처 중 4대는 실유이고 나머지 촉은 실무이다. 법처 중 삼매의 경계인 색·수·상·사(思)는 실유이나 여타의 심소법은 '사' 상에 가립된 실무이고, 불상응행법과 3무위법 역시 실무이다.( 『구사론기』 권제20(대정장41, p. 314상) ; 『구사론소』 권제20(동p. 706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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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과거·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능히 계박함[能繫]과 계박되는 것[所繫]과, 그리고 그러한 계박으로부터의 떠남[離繫]이 존재한다고 설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과거번뇌)에 의해 생겨나 [미래번뇌의] 원인이 되는 수면이 존재하기 때문에 과거·미래의 능히 계박하는 번뇌가 존재한다고 설하는 것이며,46) 그것(과거·미래의 경계)을 소연으로 하는 번뇌의 수면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과거·미래의 경계에 의해 계박되는 일[所繫事]이 있다고 설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러한 수면이 끊어지는 경우 이계(離繫)라는 명칭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이와 같이 설하고 있다. "현재와 마찬가지로 실로 과거와 미래는 존재한다. 그러나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능히 회통하여 해석하지 못하였지만, 자신의 종의를 애호하는 모든 이는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할 것이니, '법성(法性)은 너무나 심오하여 헤아릴 만한 경계가 아닌 것이다' 그러니 어찌 능히 해석하지 못하였다고 해서 그것을 부정하여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겠는가?
  곧 다른 갈래[異門]가 있기 때문으로, 이것이 생겨나면 이것이 멸하니, 이를테면 색 등이 생겨나면 바로 색 등이 멸한다. 또한 다른 갈래가 있기 때문으로, 다른 것이 생겨나면 다른 것이 멸하니, 이를테면 미래세가 생겨나면 현재세가 멸하는 것이다. 또한 다른 갈래가 있기 때문으로, 시간[世]을 '생(生)'이라고 이름하니, 바로 생겨나는[正生] 때는 시간에 의해 포섭되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갈래가 있기 때문으로, 시간에 [제법의] 생이 존재한다고 설하니, 미래세는 다찰나로 존재하기 때문이다.47)
  
  
46) 과거의 번뇌에 의해 생겨난 수면종자가 현재에 존재하기 때문에, 또한 미래 번뇌의 원인이 되는 수면종자가 현재 존재하기 때문에 과거·미래의 능히 계박하는 번뇌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47) 이상은 법성의 심심(甚深)에 대한 용례를 논설한 것으로, 여기서 '다른 갈래'란 설하는 방식의 동일하지 않음을 말한다. 즉 동일한 존재[법]상에서 생멸을 설할 수도 있고 서로 다른 존재상에서 생멸을 설할 수도 있으며, 존재와 시간[世]의 관계 또한 여러 갈래로 설할 수 있어(이를테면 시간은 바로 생기이다, 혹은 존재는 시간으로부터 생기한다. 즉 찰나적 존재를 설하는 유부에 있어 존재와 찰나는 동의어이다) 법성은 한마디로 말할 수 없으며, 따라서 제법의 실유도 능히 헤아릴 만한 경계라 아니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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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론(傍論)에 대해서는 이미 다 마쳤으니, 이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온갖 소연의 경계[事]가 이미 끊어졌으면, 그것은 계박을 떠난 것(즉 離繫)인가? 만약 소연의 경계가 계박을 떠난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온갖 소연의 경계가] 끊어진 것인가?48)
  만약 소연의 경계가 계박을 떠난 것이면 그것은 반드시 이미 끊어진 것이다. 그렇지만 소연의 경계가 이미 끊어졌을지라도 계박을 떠나지 않은 경우가 있다.49)
  끊어진 것이면서도 아직 계박을 떠나지 않은 그 같은 소연의 경계란 어떠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견고소단이 이미 끊어졌을지라도
  그 밖의 변행수면과,
  아울러 전품(前品)이 이미 끊어졌을지라도
  이를 연으로 하는 그 밖의 수면이 여전히 그것을 계박한다.
  於見苦已斷 餘遍行隨眠
  及前品已斷 餘緣此猶繫
  
  논하여 말하겠다. 바야흐로 견도위(見道位)에서 고지(苦智)가 이미 생겨
  
  
  
48) 본 단에서는, '삼세'에 근거하여 수면과 소연의 경계[事] 사이의 계박관계를 밝힌 본권 초두의 논의에 이어 5부소단의 '단(斷)'에 근거한 계박관계를 밝히고 있다.
49) 여기서 '끊어짐[斷]'이란 번뇌의 '득'을 떠남으로서 자신을 계박하는 번뇌로부터 벗어났다는 뜻이고, 계박을 떠나는 것 즉 '이계'란 능연인 번뇌가 끊어짐에 따라 번뇌는 물론 계박으로부터도 벗어났다는 뜻이다. 예컨대 남녀관계에 있어 한사람이 완전히 욕정을 끊은 것을 '단'이라고 한다면 '이'란 그 위에 다시 상대편도 이쪽에 대해 욕정을 끊은 것을 말하는 것으로, '단'의 광의이다. 따라서 이계는 필시 이단(已斷)이지만, 이단은 필시 이계가 아니기 때문에 이 같은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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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났으나 집지(集智)는 아직 생겨나지 않았을 경우, 견고소단의 온갖 소연의 경계는 이미 끊어졌을지라도 아직 영원히 끊어지지 않았고 능히 이(견고소단의 소연의 경계)를 연으로 하는 견집소단의 변행수면이 여전히 이를 계박한다.
  아울러 수도위(修道位)에서 어떠한 도가 생겨나 9품(品)의 소연의 경계 중에서 전품(前品)은 이미 끊어졌을지라도 능히 이(이미 끊어진 소연의 경계)를 연으로 하는 그 밖의 아직 끊어지지 않은 품류의 수면은 여전히 이것을 계박한다.50)
  [소연의 경계는] 끊어졌을지라도 계박을 떠나지 않은 경우는 이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어떠한 소연의 경계에, 몇 가지의 수면이 수증하는 것인가?
  만약 소연의 경계에 따라 각기 개별적으로 답하게 되면 많은 말과 논의를 허비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간략한 비바사(毘婆沙)를 지어 보아야 할 것이니, 이것에 의해 적은 공력을 들이고서도 능히 크나큰 물음의 강물을 건널 수 있는 것이다.
  즉 법은 비록 다수일지라도 간략히 분별하면 열 여섯 종류가 되니, 3계의 5부(部)와 무루의 법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능히 그것을 연으로 하는 식(識)의 명칭과 수(數)도 역시 그러하다. 따라서 여기서는 다만 마땅히 어떠한 법이 어떠한 식의 경계가 되는 것인가에 대해 알아보아야 할 것이니, [그렇게 할 때] 어떠한 소연의 경계에 어떠한 수면이 수증하는지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바야흐로 어떠한 법이 어떠한 식의 경계가 되는지 마땅히 알아 보아야 하는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견고·견집·수소단의 법으로서,
  
  
  
50) 이를테면 욕계 9품(상상품 내지 하하품)의 수혹 중 그 상상품을 끊었다고 할지라도 상중품 등이 남아있는 한 그것은 또한 상상품의 경계를 연으로 하기 때문에 참된 이계라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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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욕계에 계속되는 것이라면
  자계의 세 가지와 색계의 한 가지와
  무루식에 의해 현행한다.
  見苦集修斷 若欲界所繫
  自界三色一 無漏識所行
  
  색계의 그것은 자계와 하계의 각 세 가지와
  상계의 한 가지와 정식(淨識, 즉 무루식)의 경계가 되며
  무색계의 그것은 삼계 모두의
  각 세 가지와 정식에 의해 현행한다.
  色自下各三 上一淨識境
  無色通三界 各三淨識行
  
  견멸·견도소단의 법은 모두
  여기에 자계·자부의 식을 더한 것의 경계가 되며
  무루의 법은 삼계 중의
  뒤의 세 가지(즉 견멸·도·수소단)와 정식의 경계가 된다.
  見滅道所斷 皆增自識行
  無漏三界中 後三淨識境
  
  논하여 말하겠다. 욕계에 계속(繫屬)되는 견고·견집·수소단의 법은 각기 다섯 가지 식(識)의 소연이 되니, 이를테면 자계(自界)의 세 가지는 앞에서 설한 바와 같고, 색계의 한 가지는 수소단의 식이며, 무루의 식은 다섯 번째인데, 이 모두는 소연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51)
  
  
51)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해 보면, 욕계의 견고·견집·수소단의 법은 각기 자계의 견고·견집·수소단의 식과 색계의 수소단의 식과 무루식의 소연이 되는데, 욕계 견고소단의 법은 욕계 견고소단의 일체의 수면과 상응하는 식과, 견집소단의 변행수면과 상응하는 식과, 수소단의 선과 무부무기의 식의 소연이 되고, 견집소단의 법은 욕계 견고소단의 변행수면과 상응하는 식과, 견집소단의 일체 수면과 상응하는 식과, 수소단의 선과 무부무기의 식의 소연이 되며, 수소단의 법은 욕계 견고·견집소단과 상응하는 식과, 수소단의 선과 염오와 무부무기의 식의 소연이 된다. 또한 욕계 견고·견집·수소단의 법은 다 같이 색계 수소단의 선과 무부무기의 식의 소연이 된다. 또한 욕계 견고소단의 법은 고법지인과 고법지의 무루식, 견집소단의 법은 집법지인과 집법지의 무루식, 수소단의 법은 4법지의 무루식의 소연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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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색계에 계속되는 앞에서 설한 3부(견고·견집·수소단)의 제법은 각기 여덟 가지 식의 소연이 된다. 즉 자계와 하계(즉 욕계)의 세 가지는 모두 앞에서 설한 바와 같으며, 상계의 한 가지는 수소단의 식이며, 무루의 식은 여덟 번째인데, 이 모두는 소연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52)
  만약 무색계에 계속되는 앞에서 설한 3부의 제법은 각기 열 가지 식의 소연이 된다. 즉 삼계 각각의 세 가지는 모두 앞에서 설한 바와 같으며, 무루의 식은 열 번째인데, 이 모두는 소연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견멸·견도소단의 제법은 각기 자식(自識, 자계·자부의 식)의 소연이 된다는 사실을 더해야 한다.
  이는 다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욕계에 계속되는 견멸소단의 법은 여섯 가지 식의 소연이 되니, 다섯 가지의 식은 앞(욕계 견고소단)에서 설명한 바와 같고, 여기에 [욕계] 견멸소단의 식을 더한다는 말이다.53) 그리고 견도소단의 경우도 여섯 가지 식의 소연이 되니, 다섯 가지의 식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고, 여기에 [욕계] 견도소단의 식을 더한 것이다.
  색계와 무색계에 계속되는 견멸·견도소단의 법은 상응하는 바에 따라 아홉 가지와 열한 가지 식의 소연이 된다.
  만약 무루법의 경우라면 열 가지 식의 소연이 되니, 이를테면 삼계 중의 각기 뒤의 세 부(部), 즉 견멸·견도·수소단의 식이며, 무루의 식은 열 번째
  
  
  
52) 즉 색계의 견고·견집·수소단의 법은 각기 자계와 욕계의 견고·견집·수소단의 식과 무색계의 수소단의 식과 무루식의 소연이 되는데, 이 중 견고소단의 법의 법을 예로 들면 그것은 색계 견고소단의 일체의 수면과 상응하는 식과, 견집소단의 변행수면과 상응하는 식과, 수소단의 선과 무부무기의 식과, 욕계 견고소단의 상계를 연으로 하는 식(이는 타계연의 번뇌와 상응하는 식임)과, 견집소단의 상계를 연으로 하는 혹과 상응하는 식과, 수소단의 선한 식(무부무기의 식은 상계를 연으로 하지 않음)의 소연이 되고, 무색계 공무변처의 근분정의 선한 식의 소연이 되며, 고류지인과 고류지의 무루식의 소연이 된다.
53) 즉 욕계 견멸소단의 법은 자계 자부의 유루연의 수면과 상응하는 식의 소연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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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데, 이 모두는 소연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논설의 뜻을 포섭하기 위해 다시 게송으로 설하여 말하면 이와 같다.
  
  견고·견집·수소단의 법으로서
  욕계·색계·무색계에 계속되는 것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순서대로
  다섯·여덟·열 가지 식(識)의 소연이 된다.
  
  견멸·견도소단의 법은
  각기 자식(自識)의 소연이 되는 것도 더하며,
  무루법의 경우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능히 열 가지 식(識)의 경계가 된다.
  
  이와 같이 열여섯 가지 종류의 법은 열여섯 가지 식의 소연의 경계가 된다는 사실에 대해 이미 알았다. 이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어떠한 소연의 경계에 어떠한 수면이 수증하는 것인가? 만약 각기 개별적으로 밝힌다면 글월이 너무나도 번잡하게 늘어날 것이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그것의 일부분만을 간략히 언급하기로 한다.
  바야흐로 어떤 이가 물어 말하기를, "계박되는 소연의 경계[所繫事] 가운데 낙근(樂根)에는 몇 가지 수면이 수증하는가?"고 하면, 마땅히 낙근에는 모두 일곱 가지 종류가 수증한다고 관찰해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욕계 한 가지 즉 수소단과 색계의 5부와, 일곱 번째로서 무루단이 바로 그것이다.54) 그러나 일체의 무루식은 온갖 수면에 의해 수증되지 않는다는 것은 앞(본론 권제19)에서 이미 논설한 바와 같다. [따라서] 이 중에서는 앞의 여섯 가지에
  
  
54) 즉 욕계의 낙근은 전5식과 상응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로지 수소단으로서, 견도의 4부와는 통하지 않는다. 또한 초정려의 그것은 안·이·신식 상응으로 수소단이지만, 제3정려의 낙근은 제6식 상응이기 때문에 색계에는 수·견의 5부와 통하는 낙근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루단은 바로 제3정려지 중에 존재하는 무루근 중의 낙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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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이 상응하는 바에 따라 욕계 수소단과 아울러 온갖 변행수면, 그리고 색계의 일체의 수면이 수증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이가 물어 말하기를, "낙근을 연으로 하는 식에는 다시 몇 가지 종류의 수면이 수증하는가"고 하면, 마땅히 이 같은 식에는 모두 열 두 가지가 수증한다고 관찰해야 할 것이다. 즉 욕계에는 견멸소단을 제외한 네 가지가, 색계에는 5부가, 무색계에는 견도제소단과 수소단의 두 가지가, 그리고 무루가 열두 번째가 되니, 이것들은 모두 능히 낙근을 연으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상응하는 바에 따라 욕계의 4부와 색계의 유위연과 무색계의 2부와 아울러 온갖 변행의 수면이 수증하는 것이다.
  만약 다시 어떤 이가 물어 말하기를, "낙근을 연으로 하는 식을 연으로 하여서는 다시 몇 가지의 수면이 수증하는가?"고 하면, 마땅히 이 같은 식에는 모두 열네 가지가 수증한다고 관찰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앞에서 언급한 열두 가지에다 다시 두 가지 종류를 더한 것이니, 바로 무색계의 견고·견집소단이 바로 그것이다. 곧 이와 같은 열네 가지 식은 능히 낙근을 연으로 하는 식을 연으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상응하는 바에 따라 욕계와 색계에 수증하는 수면은 앞에서와 같고, 무색계에는 4부의 수면이 수증한다.
  그리고 이 같은 부분적인 논설에 준하여 그 밖의 경우에 대해서는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마음이 그것(즉 수면)에 의한 것이라면, 이를 '유수면(有隨眠)'이라 이름한다.55)
  그렇다면 그것은 이러한 마음, 즉 유수면심에서 반드시 수증하는 것인가, 수증하지 않는 것인가?
  이는 결정되어 있지 않다. 혹 수증하는 경우도 있으니, 이를테면 [그러한 수면이] 마음과 상응하고, 아울러 마음을 연으로 하면서 아직 끊어지지 않았을 때가 그러하다. 그러나 [그러한 수면이] 마음과 상응하고 나서 끊어졌을 때에는 더 이상 수증하지 않는 것이다.
  
  
  
55) 수면에 의한 마음, 다시 말해 수면과 상응하는 3계 5부의 식(識)을 '유수면(sanusaya)의 마음'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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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과 같은 뜻에 의거하여 마땅히 이같이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유수면의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유염(有染)과 무염(無染)인데,
  유염의 마음은 두 가지와 통하지만
  무염의 마음은 수증에 국한된다.
  有隨眠心二 謂有染無染
  有染心通二 無染局隨增
  
  논하여 말하겠다. 유수면의 마음에는 모두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유염과 무염의 마음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56)
  이 중에서 [수면은] 유염의 마음에 수증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상응수면과 소연수면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을 때이다. 그런데 상응수면이 이미 끊어져 수증하지 않을 때에도 '유수면'이라고 설하는 것은 항상 상응하고 있기 때문이다.57)
  그러나 만약 무염의 마음인 경우 오로지 수증하는 때에 국한하여 [유수면이라 이름]한다. 그리고 이것을 연으로 하는 수면은 반드시 영원히 끊어지지 않으니, 이것은 오로지 수증에 의거하여서만 '유수면'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58)
  
  
56) 사제소단의 전부와 수소단의 일부인 불선과 유부무기를 유염심(有染心)이라 하고, 수소단 중 선과 무부무기를 무염심(無染心)이라고 한다.
57) 유염의 마음과 상응하거나 그것을 소연으로 하는 수면(즉 상응수증하는 수면인 相應縛과 소연수증하는 수면인 所緣縛)으로서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은 수증하지만, 상응하고 나서 이미 끊어진 것은 수증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자, 즉 상응수증하는 수면의 경우 이미 끊어져 수증하지 않을지라도 이 때의 마음은 동반의 성질[伴性]이 아직 끊어지지 않아 수면과 항상 상응하고 있기 때문에 '유수면'으로 일컬어지며, 소연수증하는 수면의 경우 더 이상 유수면이 아니다. 그래서 유염심은 상응·소연수증의 수면 모두에 걸쳐 '유수면'이며, 무염심의 경우 소연수증의 수면 한 가지에 한정되어 '유수면'으로 일컬어지는 것이다.(후술)
58) 즉 이미 끊어져 수증하지 않는 것이라면 '유수면'이라 이름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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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에서 논설한 바와 같은 열 가지 종류의 수면이 차례대로 생겨난다고 할 때, 무엇이 앞에 생겨나고 무엇이 뒤에 생겨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명과 의(疑)와 사견과 유신견과
  변집견과 계금취와 견취와
  탐(貪)과 만(慢)과 진(瞋)의 순서대로,
  앞의 것에 의해 뒤의 것이 인기되어 생겨난다.
  無明疑邪身 邊見戒見取
  貪慢瞋如次 由前引後生
  
  논하여 말하겠다. 바야흐로 온갖 번뇌가 차례대로 생겨난다고 할 때, 먼저 '무명'으로 말미암아 진리[諦]를 알지 못하여 고제 내지 도제를 관찰하지 않으려고 한다.
  [진리를] 알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다음으로 '의(疑)'를 낳게 되니, 이를테면 [진리를] 듣고도 바로 '괴로움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괴로움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하는 두 가지 갈래의 유예(猶豫, 즉 의심)를 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유예로부터 '사견'을 인기하여 낳게 되니, 이를테면 그릇되게 듣고 그릇되게 생각하여 그릇된 결정을 낳아 '고제는 존재하지 않는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진리의 존재를 부정함에 따라 '유신견'을 인기하여 낳게 되니, 이를테면 5취온 중의 괴로움의 이치가 없다고 부정하여 '이것(오취온)은 바로 나[我]이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신견으로부터 '변집견'을 인기하여 낳게 되니, 이를테면 '아'에 근거하여 단멸과 상주의 극단[邊]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집견으로부터 '계금취'를 인기하여 낳게 되니, 이를테면 '아'에 따른 그 중의 한 극단에 집착하여 이러한 집착을 능정(能淨, 청정도를 말함)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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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금취로부터 '견취'를 인기하여 낳게 되니, 이를테면 [한 극단에 대한 집착을] 능정이라고 간주하고서 반드시 그 같은 집착을 수승한 것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취로부터 다음으로 '탐'을 인기하여 낳게 되니, 이를테면 자신의 견해에 대해 깊이 애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탐으로부터 다음으로 '만'을 인기하여 낳게 되니, 이를테면 자신의 견해에 대해 깊이 애착하여 거들먹거리면서 다른 이를 능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만으로부터 그 후 '진'을 인기하여 낳게 되니, 이를테면 자신의 견해에 대해 깊이 애착하여 자기를 믿고 다른 이가 일으킨 견해가 자신의 견해와 다르면 능히 이를 참지 못하고 미워하고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자신의 견해를 취하고 버리는 상태에서는 [반드시 진을 낳아 버려지는 견해에 대해] 미워하고 싫어함을 일으키기 때문이니, 견제소단(見諦所斷)의 탐 등을 낳을 때에도 자상 속의 견(見)을 소연의 경계로 삼기 때문이다"고 하였다.59)
  이상과 같은 논설은 바야흐로 순서에 따라 일어나는 경우이지만, 만약 그러한 순서를 뛰어넘어 논설한다면 전후로 정해진 바가 없이 일어난다.
  
  온갖 번뇌가 일어나는 것은 몇 가지 인연에 의해서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아직 수면을 끊지 않았고
  아울러 그에 따른 경계가 현전하며
  비리의 작의가 일어남으로 말미암아서이니
  이것을 혹(惑)에 인연이 갖추어진 것이라고 한다.
  由未斷隨眠 及隨應境現
  非理作意起 說惑具因緣
  
  
  
59) 즉 견소단인 탐 등은 타상 속에서는 일어나지 않으며 오로지 자상 속의 자신을 소연의 경계로 삼는다. 그렇다면 '진'을 일으키는 것도 사기(捨棄)되는 자신의 견해에 대해 일으키는 것이라고 해야하지 않는가 하는 이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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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하여 말하겠다. 세 가지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온갖 번뇌가 일어난다.60) 바야흐로 장차 욕탐의 전(纏)을 일으키려고 하는 때는 욕탐수면을 아직 끊지 않았고 아직 변지(遍知)하지 않았기 때문이며,61) 욕탐에 수순하는 경계가 현재전하기 때문이며, 그것을 연으로 하는 비리(非理)의 작의(作意,올바르지 못한 의욕·경각)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세 가지] 힘으로 말미암아 욕탐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러한 세 가지의 인연은 그 순서대로 바로 원인과 경계와 가행의 세 가지 힘인 것이다.
  그 밖의 번뇌가 일어나게 되는 것도 이에 준하여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이상의 논의는 바야흐로 인연을 모두 갖춘 번뇌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지만, 혹 어떤 경우 오로지 경계의 힘에만 의탁하여 번뇌가 일어나는 일도 있으니, 이를테면 퇴법근(退法根)의 아라한 등이 그러하다.62)
  앞에서 논설한 수면과 아울러 전(纏)을 경에서는 누(漏)·폭류(瀑流)·액()·취(取)라고 설하고 있다.63)
  
  
60) 『순정리론』 권제53(한글대장경180, p. 358-359)에서는 온갖 번뇌를 일으키는 다수의 인연으로서 여기서의 세 가지 인연 이외 동분(同分)·부와 쾌락·지역·사론(邪論)·과문(寡聞)·많은 잠·음식·습관·소의신의 경계[身境]·시간[時分] 등을 설하고 있다. 이를테면 번뇌는 유정의 중동분에 따라 소에게는 소의 번뇌가, 인간에게는 인간의 번뇌가 일어나며, 남방에 태어남으로써 탐욕이, 북방에 태어남으로써 진에가 치성하며, 병서를 익힘으로 진에가, 창가론을 들음으로써 욕탐이, 외도서를 배움으로써 우치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61) 고법지인(苦法智忍) 내지 도류지인(道類智忍)의 무간도에 의해 번뇌가 아직 끊어지지 않았고, 고법지 내지 도류지의 해탈도에 의해 아직 택멸 이계의 득이 증득되지 않은 것을 말함. 변지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21(p.977 이하) 참조.
62) 아라한은 이미 수면을 끊고 변지하였기 때문에 아라한과에서 물러나는 이는 잠깐 나타난 경계에 미혹하여, 다시 말해 오로지 경계의 힘에 의해서만 번뇌를 일으킬 뿐이다. 혹은 번뇌의 생기에는 이전의 번뇌로부터 무간에 인기되어 생겨나는 것과 다음 순간 번뇌가 아닌 그 밖의 다른 것에서 생겨나는 것의 두 종류가 있는데, 아라한의 경우 후자에 의한 생기이다. 즉 번뇌의 생기에 이러한 두 종류가 없다고 한다면 선·무기심과 무간에 번뇌가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현종론』 권제27, 앞의 책, p. 205)
63) 이를테면 『잡아함경』 권제18 제490경(대정장2, p. 127상) ; 『장아함경』 권제8 『중집경(衆集經)』 (대정장1, p. 50이하). 여기서 '전(纏)'이란 근본수면으로부터 파생된 수번뇌(隨煩惱)를 의미하는 것(『현종론』 권제27에서는 '수면과 동반하는 것'이라고 논설하고 있다)으로, 여기에는 무참(無慚)·무괴(無愧)·질(嫉)·간(慳)·회(悔, 혹은 惡作)·수면(睡眠)·도거(掉擧)·혼침(惛沈)·분(忿)·부(覆)의 열 가지가 있다. 본론 권제21(p.95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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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asrava)'란 3루를 말하는 것으로, 첫째는 욕루(欲漏)이며, 둘째는 유루(有漏)이며, 셋째는 무명루(無明漏)이다.
  '폭류(ogha)'란 4폭류를 말하는 것으로, 첫째는 욕폭류(欲瀑流)이며, 둘째는 유폭류(有瀑流)이며, 셋째는 견폭류(見瀑流)이며, 넷째는 무명폭류(無明瀑流)이다.
  '액(yoga)'이란 4액을 말하는 것으로, 4폭류에서 설한 것과 같다.
  '취(upadana)'란 4취를 말하는 것으로, 첫째는 욕취(欲取)이며, 둘째는 견취(見取)이며, 셋째는 계금취(戒禁取)이며, 넷째는 아어취(我語取)이다.64)
  이와 같은 '누' 등의 본질 등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욕계의 번뇌와 아울러 전(纏)에서
  치(癡)를 제외한 것을 욕루라고 하며
  유루는 상 2계의 번뇌로서
  오로지 치를 제외한 것이다.
  欲煩惱幷纏 除癡名欲漏
  有漏上二界 唯煩惱除癡
  
  즉 다 같이 무기이며, 내면에서 생겨나고
  정려지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하나로 합한 것이며
  무명은 모든 유(有)의 근본이기 때문에
  따로이 하나의 '누'로 삼은 것이다.
  
  
  
64) 이는 모두 번뇌의 다른 이름으로, '누'란 6근으로부터 누출되어 유정을 생사에 머물게 하고, 유전시킨다는 뜻이며, '폭류'는 홍수가 모든 것을 씻어버리듯이 유정의 선품을 표탈(漂奪)한다는 뜻이며, '액'은 소를 멍에에 속박시키듯이 유정을 괴로움의 존재인 6취와 화합·속박시킨다는 뜻이며, '취'는 땔감이 불길을 취하여 끊임없이 타오르듯이 유정은 번뇌를 집취(執取)하여 업의 불길을 끊임없이 타오르게 한다는 뜻이다. (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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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同無記內門 定地故合一
  無明諸有本 故別爲一漏
  
  폭류와 액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지만
  견(見)을 따로이 건립한 것은 날카롭기 때문으로
  견은 '머물게 한다'는 뜻에 따르지 않기 때문에
  '누'에서는 따로이 독립시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瀑流亦然 別立見利故
  見不順住故 非於漏獨立
  
  욕액과 유액과 아울러 '치'와,
  '견'을 두 가지로 나눈 것을 '취'라고 이름하니
  무명(즉 치)을 따로이 설정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유(有)를 능히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欲有幷癡 見分二名取
  無明不別立 以非能取故
  
  논하여 말하겠다. 욕계의 번뇌와 아울러 전(纏)에서 치(癡)를 제외한 마흔 한 가지의 법[物]을 모두 '욕루'라고 이름하니, 이를테면 욕계에 계속되는 서른한 가지의 근본번뇌와 아울러 열 가지 전이 바로 그것이다.65)
  색계·무색계의 번뇌 중의 치를 제외한 쉰두 가지의 법을 모두 '유루'라고 이름하니,66) 이를테면 상 2계의 근본번뇌로서 각기 스물여섯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65) 욕계의 서른두 가지 견소단 중 4제소단의 무명 네 가지를 제외한 스물 여덟 가지와, 무명을 제외한 수소단 세 가지에 10전을 더하여 마흔한 가지가 된다. 무명을 제외한 이유는 무명루를 따로이 설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문에서는 '법'이 '물(物)'로 되어 있으나 그것은 유자성의 개별적 실체[別實物]를 의미하기 때문에 이하 '법'으로 번역한다.
66) 상 2계의 견·수소단의 번뇌에서 각기 5부의 무명을 제외한 스물여섯 가지를 합하여 쉰두 가지가 된다. 여기서 유루(bhava-asarva)는 욕루에 대응하는 말로서, 무루에 대응하는 유루(sasrava)와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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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찌 거기에도 혼침(惛沈)과 도거(掉擧,각기 10전의 하나)의 두 종류의 전(纏)이 존재하지 않는가? 『품류족론』 중에서도 역시 이와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을 유루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무명을 제외한 그 밖의 색계·무색의 2계에 계속되는 결(結)과 박(縛)과 수면과 수번뇌(隨煩惱)와 전(纏)이 바로 그것이다."67) 그런데 지금 여기서 그것을 어찌 설하지 않는 것인가?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의 비바사사(毘婆沙師)는 말하기를, "그 같은 2계에는 '전'이 적고 스스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고 하였다.68)
  어떠한 이유에서 상 2계의 수면을 모두 함께 설하여 하나의 유루로 삼은 것인가?
  다 같이 무기성이면서 내면에서 일어나며, 동일한 삼매의 상태[定地]에서 생겨나니, 이러한 세 가지 뜻이 동일하기 때문에 [상 2계의 수면을] 합하여 하나로 삼은 것이다.69) 즉 앞(본론 권제19 초두)에서 설한 '유탐(有貪)'이라 이름하게 된 것과 같은 이유에서 여기서도 '유루'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뜻에 준하여 볼 때 3계의 열다섯 가지의 무명을 무명루로 설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어떠한 이유에서 오로지 이것(즉 무명)만을 따로이 '누'라고 하는 명칭으로 설정한 것인가?
  
  
  
67) 여기서 '결'이란 9결 중 무명결과, 상계에 존재하지 않는 에(恚)·질(嫉)·간(慳)을 제외한 애(愛)·만(慢)·의(疑)·견(見)·취(取)의 5결을 말하며, '박'이란 3박 중 상계에 존재하지 않는 진박(瞋縛)과, 별도로 건립하는 무명박을 제외한 탐박(貪縛) 한 가지를 말하며, '수면'은 10수면 중 진과 무명을 제외한 나머지 여덟 가지를 말하며, 근본번뇌에 부수하는 '수번뇌'란 대번뇌지법의 여섯 가지에서 무명을 제외한 방일·해태·불신·혼침·도거와 첨(諂)·광(誑)·교(憍)의 세 가지 소번뇌지법 등 여덟 가지를 말하며, '전'이란 10전 중 상 2계에 존재하는 혼침과 도거 두 가지를 말한다.
68) 색계·무색계에도 비록 혼침과 도거가 역시 존재하지만, 전(纏)의 경우 계(界)에 의거하여 분별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상계의 전은 그 수가 적을 뿐더러 자력으로 일어나는 것[自在轉]이 아니기 때문으로, 이에 따라 오로지 (근본)번뇌 만을 유루로 설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전' 역시 계(界)에 의거하여 분별하였다면 유루에는 쉰여섯 가지 번뇌가 있게 된다.
69) 이에 대해 중현은 상계의 수면은 내면[內門]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색(色)·성(聲)·촉(觸)을 소연의 경계로 삼아 그 대치가 동일하기 때문에 하나로 설하게 된 것이라고 하면서 본송마저 '다 같이 무기이고 대치가 동일하며(同無記對治)'로 개작하고 있다.(『현종론』 권제27, 앞의 책, p. 207-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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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명은 능히 모든 존재[有]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70)
  폭류와 액의 본질은 '누'와 동일하다. 그렇지만 거기에서도 역시 견(見)을 따로이 설정하였다. 즉 앞에서 언급한 욕루는 바로 욕폭류와 욕액이며, 이와 마찬가지로 유루는 바로 유폭류와 유액이다. 그리고 거기서 온갖 견을 따로이 떼어내어 견폭류와 견액으로 삼은 것은, 이를테면 그것의 성질이 지극히 날카롭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견루(見漏)는 별도로 건립하지 않은 것인가?]
  [생사의 바다 중에] 머물게 하는 것을 일러 '누'라고 이름하니, 뒤(다음 본송)에서 마땅히 논설하는 바와 같다. 그러나 '견'은 그러한 뜻에 따르지 않을 뿐더러 그 성질 또한 지극히 날카롭기 때문이다. 곧 이 같은 사실에 따라 '누'에서는 [견루(見漏)라는] 독립된 명칭을 건립하지 않고 다만 다른 번뇌와 합하여 '누'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이상에서 스물아홉 가지의 법을 욕폭류라고 이름한다는 사실을 이미 나타낸 셈이니, 이를테면 탐·진·만에 각기 다섯 종류가 있고, 의(疑)의 네 가지와 전(纏)의 열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71) 스물여덟 가지의 법을 유폭류라고 이름하니, 이를테면 [색계·무색계의] '탐'과 '만'의 각 열 가지와, '의'의 여덟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서른여섯 가지의 법을 견폭류라고 이름하니, 이를테면 삼계 중의 각기 12견이 바로 그것이다. 열다섯 가지의 법을 무명폭류라고 이름하니, 이를테면 삼계의 무명 각각에 다섯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4액와 4폭류는 동일하다.
  다시 4취의 본질은 4액과 동일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욕취와 아어취에 각기 무명을 더한 것과, '견'을 나누어 두 가지로 삼은 것은 앞의 액()과 다르다.72) 즉 앞의 욕액에 욕계의 무명을 더한 서른네 가지의
  
  
70) "무명의 허물과 환란[過患]이 특히 뛰어나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니, 이를테면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 능히 생사의 근본되기 때문으로, '무명을 원인으로 하여 탐염(貪染)을 낳는다. ……'고 계경에서 설한 바와 같다. 게송에서도 '존재하는 모든 악취와/ 이 세간과 저 세간은/ 모두 무명을 근본으로 삼으니/ 탐욕과 동등하게 일어나는 것이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현종론』 권제27, 앞의 책, p. 209)
71) 즉 마흔한 가지 욕루 중에서 견고소단의 5견과 견집·견멸소단의 사견과 견취, 그리고 견도소단의 계금취·사견·견취 등 도합 열두 가지의 견을 따로이 떼어내어 견폭류로 삼았기 때문에 욕폭류에는 스물아홉 가지가 있는 것이다.
72) 4취와 4액은 그 본질이 동일하지만 설정하는 방법이 약간 다르다. 즉 욕취는 욕액의 스물여덟 가지에 욕계의 5무명을 합한 서른네 가지, 아어취는 유액의 스물여덟 가지에 색계·무색계의 열 가지 무명을 합한 서른여덟 가지, 그리고 견액을 견취와 계금취로 나눈 것이 바로 4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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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을 모두 욕취라고 이름하니, 이를테면 탐·진·만·무명의 각기 다섯 가지와, '의'의 네 가지와 아울러 10전이 바로 그것이다. 앞의 유액에 상 2계의 무명을 더한 서른여덟 가지의 법을 모두 아어취라고 이름하니, 이를테면 탐·만·무명의 각기 열 가지와, '의'의 여덟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견액 중의 계금취를 제외한 나머지 서른 가지의 법을 모두 견취라고 이름하며, 그 밖의 나머지 여섯 가지(3계의 견고·견도소단)의 법을 계금취라고 이름한다.
  어떠한 이유에서 계금취를 별도로 설정한 것인가?
  이것만이 홀로 성도(聖道)에 적대되는 원수가 되기 때문이며, 두 가지(즉 非因計因과 非道計道) 모두 출가와 재가의 무리를 속이는 것이기 때문이다.73) 이를테면 재가의 무리들은 이것에 속아서 스스로 굶주리는 일 등을 하늘에 태어나는 도라 여기기 때문이며, 온갖 출가의 무리들은 이것에 속아서 애호할 만한 경계를 버리는 것(즉 고행)을 청정도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무명을 별도의 '취'로 건립하지 않는 것인가?
  능히 온갖 존재에 [집착하여] 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취'라는 명칭을 건립한 것인데, 모든 무명은 능히 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알지 못하는 것을 설하여 '무명'이라 이름한 것으로, 그것은 지극히 날카롭지 않기 때문에 능히 취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다만 다른 번뇌와 합쳐서 '취'로 건립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계경에서 설하기를, "욕액(欲)이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온갖 '욕' 중의 욕탐(欲貪)·욕욕(欲欲)·욕친(欲親)·욕애(欲愛)·욕락(欲樂)·욕민(欲悶)·욕탐(欲耽)·욕기(欲耆)·욕희(欲喜)·욕장(欲藏)·욕수(欲隨)·욕착(欲著)이 마음을 묶어 누루는 것이니, 이것을 욕액이라 이름한다. 유액
  
  
  
73) 즉 계금취는 상캬학파 등에서 주장하는 프라크리트와 푸루샤의 식별지는 참된 해탈도가 아님에도 해탈도라고 간주하는 것이며, 물이나 불에 뛰어드는 것이 생천의 도가 아님에도 생천의 도로 간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론 권제19(p.86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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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有)과 견액(見)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74)
  또 다른 경에서는 '욕탐을 취(取)라고 이름한다'고 설하고 있으니,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욕' 등의 네 가지에 대해 일으키는 욕탐을 '욕' 등의 '취'라고 이름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75)
  이와 같이 수면과 아울러 전(纏)을 경에서 누·폭류·액·취라고 설한 것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수면 등의 명칭에는 어떠한 뜻이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미세, 두 가지에서의 수증
  수축(隨逐)과 수박(隨縛)
  머묾과 유전·표류·화합·집취
  이것이 바로 수면 등의 뜻이다.
  微細二隨增 隨逐與隨縛
  住流漂合執 是隨眠等義
  
  
74) 이 경문은 『집이문족론』 권제8(한글대장경115, p. 168)에 인용되고 있다. 『광기』 에 의하면 이는 '4액은 오로지 탐을 본질로 한다'는 경부사(經部師)의 경증이다. 즉 보광은 이 경문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욕액이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온갖 5욕의 경계에 대한 '욕'에 대해 탐을 일으키고, '욕'에 대해 욕을 일으키고, '욕'에 대해 친연(親戀)을 일으키고, '욕'에 대해 탐애(貪愛)를 일으키고, '욕'에 대해 탐락을 일으키고, '욕'에 대해 취민(醉悶)을 일으키고, '욕'에 대해 탐착(耽著)을 일으키고, '욕'에 대해 탐기(貪嗜)를 일으키고, '욕'에 대해 희락을 일으키고, '욕'에 대해 집장(執藏)을 일으키고, '욕'에 대해 수집(隨執)을 일으키고, '욕'에 대해 탐착(貪著)을 일으킨다. 즉 탐애 등의 열두 가지는 모두 탐의 다른 이름이며, 욕은 바로 5욕경으로, 욕을 연으로 하여 탐을 일으켜 마음을 묶어 억누르니, 이것은 모두 탐을 해석한 것으로, 이를 욕액이라 이름한다."
75) 『광기』에 의하면 이 또한 경부사의 경증으로, '5욕경을 소연으로 하여 탐을 일으키는 것을 욕취라고 하고, 견을 소연으로 하여 탐을 일으키는 것을 견취라 하고, 계금을 소연으로 하여 탐을 일으키는 것을 계금취라 하고, 삼계의 아어(我語)를 소연으로 하여 탐을 일으키는 것을 아어취라고 한다' 즉 이 같은 경증에 따라 경량부에서는 앞의 4액과 4취를 모두 '탐'을 본질로 한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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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하여 말하겠다. 근본번뇌(즉 10수면)가 현재전할 때 그 행상(行相)을 알기 어렵기 때문에 '미세(微細)'라고 이름한다.76)
  '두 가지에서의 수증'이란, 말하자면 [수면은] 능히 그것의 소연 및 그것에 상응하는 법과 뒤엉켜[惛滯] 증장하기 때문이다.
  '수축'이라고 하는 말은, 이를테면 [수면의] 득(得)을 일으켜 항상 유정을 쫓아다니면서 과환(過患)이 되는 것을 말한다.
  가행을 지어 그것(수면)을 생겨나지 않게 하더라도, 혹은 애써 노력하여 그것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지라도 자꾸자꾸 일어나기 때문에 '수박(隨縛)'이라고 한다. 곧 이와 같은 뜻으로 말미암아 수면이라 이름하게 된 것이다.
  나아가 [수면은] 유정을 생사(生死)에 체류시켜 오래 머물게[住] 하며, 혹은 유정천으로부터 무간지옥에 이르기까지 생사 중에 유전(流轉)시키는 것으로,77) 그들의 상속은 육창문(六瘡門, 즉 6근을 말함)에서 끊임없이 번뇌를 누설하기 때문에 수면을 일컬어 '누(asrava)'라고 하였다. 또한 선품을 극심히 표탈(漂奪)시켜 버리기 때문에 '폭류(ogha)'라고 이름하였고, 유정을 [3계·5취·4생과] 화합시키기 때문에 '액(yoga)'이라고 이름하였으며, 능히 의지하여 집착하게 되기 때문에 '취(upadana)'라고 이름하였다.
  그러나 만약 좋은 해석이 되려면 마땅히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할 것이다.78) 온갖 경계 중으로 상속(相續)을 흘러들게 하여 끊임없이 허물을 누설(漏泄)하기 때문에 '누'라고 이름한 것이니, 계경에서 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 즉 "구수(具壽)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비유하자면 배를 당기어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으니, 설혹 크나큰 힘을 들이더라도 [거슬러 올라] 가는 것은 오히려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만약 이 배를 그대로 놓아두어 강물의 흐름에 따라 가게 하면 비록 힘을 들이지 않을지라도 [내려] 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선심이나 염심을 일으키는 것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76) 수면의 원어 anu-saya의 anu를 미세[微, a u]의 뜻으로 이해하여 해석한 것이다.
77) '누'의 원어 a-srava는 a-sru(유출·유동하다)라는 동사의 파생어이지만, 여기서는 이와 유사한 as(앉다)의 사역어 asayati(머물게 하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머물게 하는 것'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또한 '유전시키는 것'이라는 말은 a-sru의 사역어 asravayati(=asravayati)에 근거한 해석이다.
78) 이하 논주 자신의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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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것이다."79) 즉 이 경의 뜻에 준하여 본다면, 경계 중에서 번뇌가 끊어지지 않는 것을 일컬어 '누'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만약 [수면의] 세력이 강력하게 될 때를 설하여 '폭류'라고 이름한다. 즉 모든 유정이 거기에 떨어질 경우 오로지 거기에 따라야 할 뿐 능히 어기거나 거역할 수 없으니, 솟구치거나 떠오르거나 떠내려가거나 물결치면 그것을 어기거나 거역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현행할 때 지극히 두드러지지 않은 수면을 설하여 '액'이라 이름하니, 다만 유정으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여러 가지 종류의 괴로움과 화합하게 하기 때문에, 혹은 자주자주 현행하기 때문에 '액'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수면은] 욕경(欲境) 따위에 집착하기 때문에, 그것을 설하여 '취'라고 이름한 것이다.80)
79) 『잡아함경』 권제18 제493경(대정장2, p. 128중하) 참조. 즉 선법을 행하는 것은 크나큰 가행이 필요하다는 비유로서, 수면은 경계라는 강물을 따라 끊임없이 흘러가면서 허물을 누설하기 때문에 '누'라는 것이다
80) 5욕경에 대해 집착하는 것은 욕취이며, '견'에 집착하는 것은 견취, 계에 집착하는 것은 계금취, 아어에 집착하는 것은 아어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