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보감(人天寶鑑)
해월 변도사(海月辯都事:도사는 都僧正으로 승직의 최고위를 말함)는 운간(雲間) 사람이다. 태어나면서 남다른 바가 있어 그의 부모가 보조사(普照寺)에 들여보내 출가시켰다. 명지(明智)법사에게 법을 얻었는데 명지법사가 늙자 명을 받고 8년간 대신 강의를 하다가 마침내 절 일을 맡게 되었다.
한림학사 심시경(沈時卿)이 항주(杭州)의 승려들을 사납게 대하므로 그를 만나는 사람마다 겁을 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유독 법사만은 평소와 다름없이 여유로웠으므로 공이 남다르다고 하여 승직에 앉게 하였고, 그후 도승정(都僧正)으로 옮겨 앉게 되었다.
당시 소동파가 항주태수로 있었는데 그의 도행이 높고 말씨가 아름다움을 좋아하여 한번은 이런 글을 지었다.
“승려가 많은 것으로는 아마도 전당(錢塘)이 으뜸가는데 그중에는 도력과 덕성, 재주와 지혜가 있는 분과 망령되고 옹졸하며, 잔꾀나 부리고 거짓되게 사는 사람들이 뒤섞여 있어서 그들을 일률적으로 부르기가 어렵다. 그래서 승직에 승정(僧正)과 부승정(副僧正)을 두고, 그 밖에 별도로 도승정(都僧正) 한사람을 보충하였다. 그리하여 장부나 문서관리, 또는 쫓아다니며 손님을 맞이하는 수고는 전적으로 부승정 이하에게 맡기고 도사는 중요한 일만을 맡게하였으니 실제로는 수행과 깨달음이 대중의 표상이 되는 것뿐이다.”
법사는 용모와 행동이 단정하고 조용하였으며 쓸데없는 물건을 쌓아두지 않았다. 밤에 도둑이 그의 방에 들었는데 입었던 옷을 벗어주고 샛길로 도망치게 하였다.
그 자리에 있은 지 얼마 안되어 사람 만나는 일이 귀찮아서 초당에 돌아가 은거하였는데 여섯가지 필수품〔六事:3의와 발우, 방석, 물병〕만이 몸에 딸려왔을 뿐이었다.
입적하면서 소동파가 도착하거든 관뚜껑을 닫으라고 미리 유언을 남겼다. 소동파가 나흘만에야 산에 도착하여 스님이 산사람처럼 단정히 앉아 있는 것을 보았는데 이마는 그때까지도 따뜻하였다.
마침내 절구시 3수를 지어 그를 조곡(吊哭)하였다.
그대가 남긴 자취를 찾고저
굳이 옷을 적시며 찾아왔네
본래 그대로가 태어남이 없는데
없어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오늘밤 그대 강당에 떠오른 달은
옛날처럼 뜰에 가득하건만 서리같이 차구나.
欲尋遺跡强沾裳 本自無生可得亡
今夜生公講堂月 滿庭依舊冷如霜
나고 죽는 일 굽혔다 펴지는 것 같은데
망정 모여 생긴 우리들 한결같이 쓴고생이라
백낙천(白樂天)은 봉래섬의 손님이 아니었고 서방정토에 기대어 그곳 주인되었다네
生死猶如譬屈伸 情鍾我輩一酸辛
樂天不是逢萊客 憑仗西方作主人
뜬구름 일어났다 꺼지는 인연을 찾고저 하나
인연은 없고 도리어 꿈 속의 몸만을 보네
마음을 편히하여 잘 머문 사람은 왕문도(王文度)이니
이 도리를 남에게 물어볼 것 있겠는가.
欲訪浮雲起滅因 無綠却見夢中身
安心好住王文度 此理何須更問人
고려의 승통(僧統)인 의천(義天 :1055∼1101)은 왕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중국에 불법을 물으러 왔다. 처음 사명군(四明郡)에 도착하자 연경사(延慶寺)의 명지(明智)법사와 삼학사(三學寺)의 법인(法隣)법사 두 사람을 수행원〔館伴〕으로 임명하였다. 항주(抗州)에 이르러 혜조(慧照)율사를 찾아가 율학 배우기를 원하니 혜조율사가 그를 위해 계율법문을 설하고 의례와 법도를 익히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3의와 발우, 석장을 전수하고 이어 게송을 지어 주었다.
그대를 위해 법의를 만들어주고
다시 발우와 석장으로 위용을 도우니
그대 일숙각의 노랫말을 들어보라
이는 모양을 내려 허트로 지니게 합이 아니라 했네*
爲汝裁成應法衣 更將盂錫助威儀
君看宿覺歌中道 不是標形虛事持
조정에서는 다시 양차공(樓次公)에게 명하여 수행케 하였는데 지나는 절마다 왕에게 하는 예로 맞이하고 전송하였다. 그러나 금산사(金山寺)에 이르니 불인요원(佛印了元 :1032∼1098)스님만은 유독 선상에 앉아 큰절을 받았다. 양차공이 놀라서 그 까닭을 물어보니 불인스님이 말하였다.
“의천 역시 다른 나라의 승려일 뿐이다. 갖가지 성씨가 출가하면 누구나 석씨의 아들로 이름하는 법이니 어떻게 귀족을 따지겠는가. 만일 불도를 굽혀 속법을 따른다면 무엇보다도 지혜의 눈을 잃어버리는 일이니 무엇으로 중국의 모범을 보여주겠는가.”
이 일로 조정에서는 요원스님을 일의 대체(大體)를 아는 사람이라 하였다.
천축사(天竺寺)의 오(悟)법사는 전당(錢塘) 사람인데 다라니를 외울 때마다 사리가 나왔으며 그가 공양올리는 불상에서도 꼭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천성3(天聖 : 1028)년에 자운(慈雲)법사가 지자대사의 교관(敎觀)을 대장경 안에 넣자고 청하였다. 문목공(文穆公) 왕종(王 )이 이를 황제께 아뢰려 하자 오법사는 “이는 보통 일이 아니니 소승이 돕고저 합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천수관음을 그려놓고 대비주를 외우면서 “일이 과연 이루어지면 이몸을 불사르겠나이다” 하고 서원하였다. 얼마되지 않아서 왕종이 죽자 오법사는 밤낮으로 쉬지 않고 더욱 열심히 정진하였다.
그해가 지나 마침내 뜻대로 일이 이루어지자 오법사는 드디어 전날의 서원에 보답하여 몸을 불살랐다. 장작불이 다 꺼져도 시신은 그대로 있었고 가사로 몸을 두른 채 마치 산사람처럼 엄연하였으므로 대중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이에 자운법사가 다시 향나무를 쌓아 불을 지르니 마침내 몸이 부서지고 무수한 사리가 나왔으며 3년 뒤까지도 신도들이 사리를 찾을 수 있었다.
자운법사는 이에 찬을 써서 돌에 새겼다.
오법사는 나의 문도라 불법 짊어지고 몸을 버리니
불꽃이 타오를수록 그 즐거움도 끝이 없었네 불이 다 꺼지려 하는데 엄연하게 가부좌하고
뒤에 뼈를 부수니 찬란한 사리 등근 구슬 같았네
아주 옛날에는 있었겠지만 지금 세상엔 없는 얼이니
꽃다운 나이 서른에 참으로 대장부였네.
悟也吾徒荷法損軀 其 赫赫其樂愉愉
逮火將滅儼如跏趺 逮骨後碎璨若圓珠
信古應有今也則無 芳年三十眞哉丈夫
회당 조심(晦堂祖心)선사는 처음에 혜남선사의 유명을 받아 주지할 인연을 맡았다. 그후 13년이지나 법석이 한창 융성할 때에 의연히 주지 일을 그만두고 서원(西園)에서 기거하였다. 그리고는 그 방을 회당(晦堂)이라 이름짓고 말하기를 “내가 그만둔 것은 세상일일 뿐이니 지금부터는 오로지 불법수행에 전념하고자 한다”라고 하고 그 방문에 방을 써붙였다.
“선을 닦는 모든 학인에게 고하노라. 도를 철저히 캐려면 무엇보다도 스스로가 보아야하니 남이 대신해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중에 혹시 인연을 보아내어 스스로에게 기뻐하며 들어갈 곳이 생겼거든 얼른 방장실에 들어와서 털어놓고 옳은지 그른지, 얕은지 깊은지 평가를 기다려야 한다. 아직 밝혀내지 못했거든 저절로 나타날 것이다. 고생고생 달려가며 구하면 도리어 미혹과 번민만 더하게 된다. 이것은 말을 떠난 도리이니 요는 스스로가 긍정하는 데 있는 것이지 남에게 의지해서 깨닫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밝혀내는 것을 무량겁으로부터 내려오는 생사의 근본을 확실히 통달했다고 말한다.
만약 말 떠난 도리를 볼 수 있다면 성색과 언어, 시비 등 모두가 전혀 다른 법이 아님을 보게 된다. 그러나 말 떠난 도리를 보지 못하면 눈 앞의 차별된 인연을 비슷하게 이해한 것으로 도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은 오직 눈 앞에 전개 되는 헛그림자를 오인하여 자기도 모르게 쓸데없는 법을 만들어 놓고 머리끝까지 자만에 차서 심력을 헛되이 써버릴까 걱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밤낮으로 자신을 이기고 행주좌와에 정성으로 관찰하여 미세한 곳까지 자세히 생각하면 별로 마음을 쓰지 않아도 자연히 도에 들어가는 길이 열린다. 이것은 하루 아침 하루 저녁에 배워서 이루어지는 공부가 아니다. 만일 이와같이 치밀하게 참구하지 못한다면 경읽고 절하며 여생을 보내는 것이 좋을것이니, 그것이 마구 불법을 비방하는 것보다는 나은 일이다. 이렇게 늙은 시절을 보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아무 일 없는 사람이 되어 아무런 매임이 없으리라고 내가 감히 장담할 수 있다.
이밖에 입실하는 일은 지금부터 초하루와 보름 이틀만 와주기를 바란다.”
* 일숙각 영가스님의 중도가에 나오는 구절.
“용을 항복받은 발우와 범 싸움 말린 석장이여
양쪽의 쇠고리는 짤랑짤랑 울리는도다
이는 모양을 내려 허트로 지님이 아니요
부처님 보배 지팡이를 몸소 받음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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