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가장 행복한 공부] 마음의 고향 - 1. 마음이 편안 해야지요

通達無我法者 2007. 12. 26. 17:15
 

    늘 좋은 날 모두 좋은 사람


- 알고 가는 길

대체로 우리 인간 가운데 마음의 안락이나 평안 같은 자기 안정을 도모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행복도 마음이 안정되지 않으면 아무리 얻고자 해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 부처님 법문의 대요 또한 안심법문(安心法門), 즉 마음을 평안하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달마스님께서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신 뜻도 안심법문을 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길을 갈 때 평탄하게 갈 수 있는 순로(順路)나 길목을 잘 모르면 마음이 안정될 수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살이도 '인생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 하는 의미를 알고,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하는 목적의식도 알아서, 갈 길을 훤히 알고 살아간다면 참으로 수월할 것입니다. 반면에 삶의 목표는 물론이고 그 방법도 제대로 모르고 살아가면 불안하기 이를 데 없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주변의 혼돈상태 또한 불안한 마음을 제거할 수 없는 데서 오는 당연한 귀결입니다. 마음에 불안이 있기 때문에 괴롭기도 하고 때로는 불행하다고 느끼기도 하는 겁니다.

대체 우리의 마음은 어떤 것이며, 또한 물질이란 무엇인가? 그토록 우리가 생명을 바쳐 서로 사랑하고 또한 서로 증오하기도 하는 것은 모두 다 우리 눈앞에 전개되는 상황에 대해서 확실히 알지 못하는 결과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즉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불투명해서 혼란스럽기만 한 것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평생을 두고 의식주 때문에 고생스럽게 헤매거나 또는 아귀다툼을 하면서까지 권력을 추구하기도 합니다만, '의식주란 대체 어떤 것인가?' '물질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습니다. 확실한 인생관이 서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불안하게 되고, 따라서 안심입명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누구 할것없이 사람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성패 여부가 불확실하면 괴롭게 마련입니다. 괴로울 때는 '괴로운 마음이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하고 끝까지 그 정체를 파헤쳐서 알아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괴로운 마음의 정체를 알려고 하지는 않고, 그냥 잘못 보면 잘못 본 그대로, 자기 마음속에 번뇌를 짓고 꾸며서 고통을 받습니다. 남을 미워하거나 증오할 때도 역시 '미워하는 이 마음의 정체는 무엇인가?' 하고 파악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대체로 우리는 별로 생각해 보지도 않고 그냥 덮어놓고 미워하다가 마침내는 죽고 죽이고 합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우리가 남을 미워하거나 증오하고 혹은 너무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은 모두 다 실제로는 아무런 자취가 없는 것입니다. 자취가 없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가령 우리 범부중생들이 가장 중히 여기는 것은 자기 몸뚱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자기 몸이라는 관념, 즉 '나'라고 하는 이 몸에 있어서도 몸뚱이라는 현상적인 상(相)이야 있겠습니다만, 이 몸뚱이가 '내 몸'이라고 하는 관념은 사실 자취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심할 나위 없는 진실입니다.

부처님 법문을 보면, 우리 마음 - 좋든, 궂든, 싫든 또는 어떻든지 간에 - 이 자취가 없다는 것은 짐작이 될 것입니다. 당연히 마음은 모양이 없으니까 자취가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판단하고 인식하는 대상은 어떻습니까? 우리 범부들은 분명히 대상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부처님 법문은 그러한 대상까지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불교가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기 주관적인 관념으로, 마음은 형체가 아닌 것이니까 무(無)라 하고, 공(空)이라 하면 납득이 되겠습니다만, 우리 눈으로 인식되는 모든 천차만별의 대상 자체가 비어 있다는 말은 납득이 안 갈 것입니다. 비록 그렇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이것을 납득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인생의 고난을 해결할 수 있고, 불안의식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눈으로 인식되는 대상도 모두 공이라는 것을 몰라서는 아무리 불교를 많이 안다고 할지라도 인생고와 번뇌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번뇌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은 바로 인생의 제반문제를 해결할래야 해결할 길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인간의 성품

아시는 바와 같이 부처님께서는 과거 전생에 설산(雪山)에 들어가셔서 구도의 고행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때는 부처님의 법도 없었던 때라서 어떻게 무엇을 구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부처님은 선근(善根)이 깊으셨으므로 무엇인가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서 고행을 하신 것입니다. 선근이 깊은 사람들은 그와 같이 무엇인가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업장이 무거워서 눈에 보이는 세계에 만족하는 그런 천박한 사람들은 구도와 무관하게 살아가지만, 업장이 가벼워서 깊이가 있는 사람들은 그만큼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업장이 무거운 사람들은 인간성이 얕아서 눈에 보이는 세계에만 머물러 버리지만 업장이 가벼워서 깊이가 있는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구합니다.

우리는 또한 그 이유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본래 부처인지라 모두가 불성(佛性)이라고 하는 기묘한 성품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석가모니 부처님이 안 나오셨다면, 부처님 성품인 불성이 무엇인가를 알 길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설사 알 턱이 없다 치더라도 역시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은 실존적 사실이므로 우리는 불성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설령 불교를 배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또 젊어서는 이성에 대한 욕망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 보아도 그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마음이 있다는 말입니다. 현상적인 것은 제아무리 많이 소유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의식은 절대로 해소시켜 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에게는 본래 불성이라고 하는 것이 갖추어져 있어서, 불성이라고 하는 뿌리까지 가지 못하면 평안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불교는 우리가 불성까지 미처 못 가면, 즉 성불하지 못하면 윤회라고 하는 인생고를 면할 수 없다는 내용을 근본교리로 하지 않습니까?

관세음보살의 상호는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두려움을 없애주는 무외시인(無畏施印)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무외시인의 구체적인 의미는 중생들을 향하여 "모든 것은 내가 다 안심시켜 줄 테니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런 뜻입니다. 즉 우리 중생의 공포심이나 불안한 마음을 제거하기 위한 하나의 형상입니다.

만약 저 같은 사람이 이렇게 무외시인을 짓고 서 있다면 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진실로 자광삼매(慈光三昧), 즉 자비로운 광명이 삼천대천세계에 두루 비치는 그런 분이므로, 이렇게 손을 드시면 실제로 모든 중생의 고난이 소멸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안심입명(安心立命)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데바닷타가 부처님을 살해하고자 하여, 독주(毒酒)를 먹여서 영악스러워진 코끼리를 부처님이 오시는 길에다 풀어 놓았습니다. 독주를 먹은 코끼리는 어떻게 할지를 몰라 울부짖으면서 부처님에게 돌진해 갔습니다. 바로 그때 부처님께서 하신 형상이 무외시인이요, 그때 하신 믿음이 이른바 무외심(無畏心)입니다. 부처님께서 무외시인 형상으로 이렇게 손을 턱 드시자 그렇게 영악스럽던 코끼리가 마치 순한 양처럼 부처님 앞에 무릎을 꿇고서 눈물을 철철 흘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비유나 상징적인 말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의 힘은 그와 같은 것입니다. 레이저 광선이 저 산을 뚫고, 말 그대로 철벽을 뚫고 저쪽까지 다 비치는 것을 보십시오. 부처님의 신통묘지(神通妙智)가 그 정도 힘도 없겠습니까?

우리 중생의 눈에는 지금 안 보이지만 물리학적으로 보면 천지우주라는 것은 전자장(電磁場), 즉 전자기광파(電磁氣光波)로 충만해 있습니다. 어느 공간이나 어느 별이나 어떤 것이든 모두가 다 전자기 파동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나 또는 너라는 존재도 말입니다. 산천초목 모두가 다 전자기 광명, 전자기 파동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만 사이클(cycle)과 진동의 차이 때문에 각 원소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소중한 내 몸이나 미워하는 사람의 몸, 혹은 좋아하는 사람의 몸이나 할것없이 모든 존재는 다 전자기 파동으로 되어 있습니다.

만약 지금 우리가 전자기 파동을 볼 수 있는 안경을 쓴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는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 할것없이 모두가 다 전자기 파동만 눈앞에서 꾸물꾸물 진동하고 있을 것입니다.

삼천대천세계는 찬란한 부처님의 광명이 충만해 있는 화장세계입니다. 전자기 파동 차원에서는 아직 그 형상이 있으므로 공간성을 지닌 것이 되고, 따라서 물질이라 할 수 있겠으나 부처님께서는 그보다 더 생생한 생명, 즉 전자기 파동을 일으킨 본체인 생명을 바로 보십니다. 전자기 파동도 그것이 본래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순수생명이 파동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합니다. 파동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진동하고 움직이므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따라서 현미경으로 보든 육안으로 보든 우리 중생이 볼 수 있는 모든 존재는 파동치는 무상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고유한 존재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어떤 것이든 모두가 다 무상합니다. 일체가 다 무상뿐이라는 말입니다. 내 몸뚱이도 무상이요, 내 관념도 무상입니다. 관념이란 것도 결국 금생에 나와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그런 것들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관념 또한 그러한 마음이 잠시 찰나 순간에도 가만히 정지해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 마음이 동요부단(動搖不斷)해서 요시랑 저시랑 하는 것을 비유하여 '경거망동하는 원숭이'라 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마음으로 우리가 행복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마음으로는 우리가 안심(安心)을 할래야 할 수가 없습니다. 수험생은 수험생대로 그 시험에 꼭 합격해야 되겠다는 강박관념이 앞서 있고, 부모님들은 거의 협박 비슷하게 아이들을 졸라대는 상황에서는 마음이 안심할래야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모두가 다 이렇습니다. 한 당파든 무엇이든 할것없이 조직이 있으면 이른바 집단 이기심이란 것이 생기기 때문에 자기 본마음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범부의 마음은 하찮은 양심에 불과합니다만, 이렇게 하찮은 양심마저도 하나의 조직에 들어가면 마음대로 할 수 없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나'라는 상황은 어떠한 환경에 처해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상황판단을 잘 해야 합니다. 상황판단을 잘 해야 평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평안히 마음을 못 가지면 그만큼 불안하게 되고, 따라서 자기가 하는 일이 잘 안 됩니다. 공부를 하든 또는 사업을 하든 간에 우리 마음이 편안해야 됩니다.

- 참선 공부

우리가 하는 공부가 참선 공부 아닙니까? 참선 공부는 안락법문(安樂法門)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참선이 굉장히 고차원적인 공부니까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참선이 제일 쉽고 안락한 공부입니다. 몸도 편하고 마음도 편하면 안락하다고 할 수 있고, 안락하다는 것은 곧 행복과 직결된다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참선 공부가 안락한 것인가? 참선 공부에 대해서 우리는 알음알이, 다시 말해서 인식이나 이해로는 모든 것을 다 압니다. 그러나 내 마음이란 대체 무엇인지, 내 몸뚱이는 무엇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소중하게 여기고 아낍니다. 이토록 소중하게 아끼는 내 한 몸 잘 먹이기 위해서 별짓 다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자기 몸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은 자기 몸뚱이가 무엇인지 잘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몸뚱이가 무엇인지 잘 안다면 그와 같이 자기 몸뚱이를 살리기 위해 남의 몸뚱이를 죽인다거나 또는 엉뚱한 짓을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여러 가지 사회적 불안 현상을 치유하기 위해서 이러저러한 치유방법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정치적 차원에서는 또 그 나름대로 적당한 방편을 내세우고, 일반 종교는 종교인대로 여러 가지 사회적인 병폐를 치유하는 방법을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금 현대사회가 앓고 있는 병은 그런 미봉책으로 치료될 수 있는 정도의 병이 아닙니다. '고황(膏肓)에 난 병은 백 약이 무효'라고 하지 않습니까? 고황은 명치 끝의 안쪽에 난 병입니다. 고황은 속 깊숙한 곳에 난 치명적인 병이므로 그 누구도 손을 쓸 수 없는, 그야말로 백 약으로도 고칠 수가 없는 병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 중생들이 걸려 있는 병이 바로 백 약이 소용없는 중병인 것입니다. 그 병은 무슨 병인가 하면, 이른바 무명병(無明病)입니다. 무명병은 무지몽매하여 진리를 모르는 병입니다. 무엇이 무지인가 하면 '나'가 무엇인가를 잘 모르는 것이 무지입니다.

내 생명이 대체 무엇인가 하는, 다시 말하면 내 생명을 모르고, 내 관념의 형태가 무엇이며 그 근본이 무엇인지, 내가 소중히 아끼는 내 몸뚱이가 무엇인지 등 이러한 것들을 모르는 것이 가장 근원적인 무지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바로 그러한 무명을 제거하자는 것입니다. 12인연법문(十二因緣法門)이나 사제법문(四諦法門)이나 할것없이 모두가 다 무지를 제거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무명 때문에 행(行)이 있고, 식(識)이 있고, 결국은 인간의 번뇌가 거기에 이어져 연결되어 갑니다. 무명 때문에 옳지 못한 행(行)이 있다는 말입니다. 행이 있으면 따라서 망식(妄識)인 식이 생긴다는 뜻이고 말입니다.

우주는 또 무엇입니까? 우주의 모든 것들, 그야말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을 포함한 각각의 별들은 또 어떻게 해서 생겨나는 것인가?

그 답도 또한 간단합니다. 이들도 역시 무명 때문에 생길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과학을 좀 했다고 하는 사람들은, '천체나 우리 지구가 어찌하여 무명이라고 하는, 형체도 없는 것이 형체가 있는 지구를 낳았다는 말인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좀 전에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형체가 있는 모든 것은 사실 실체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잘 몰라서, 즉 무명 때문에 형체가 있다고 보는 것일 뿐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는 안 보이고, 또 현대의 과학적인 지식으로도 납득이 안 갈지라도 부처님 말씀은 믿어야 합니다. 부처님 말씀은 실상지혜이자 실존지혜입니다. 키에르케고르나 하이데거 같은 분들에 의하여 시작된 현대 실존철학은 불안의식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불안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불안을 제거하려면 인간, 즉 우리 인생의 실존을 파악해야 됩니다. 따라서 실존철학에서의 문제의식은 우리 불교에서 무명을 떼라고 하는 것과 사실은 똑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들은 깊이가 좀 부족하므로 실존을 제대로 파악하지는 못했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20세기 후반기에 살고 있는 현재 우리들이 느끼고 있는 고황에 나 있는 것과 같은 무겁고도 깊고 깊은 병, 말하자면 백 약이 무효인 병을 치료하자면 그저 보통 약으로는 안 됩니다. 다들 "자비를 베풀어라" "봉사를 많이 해라" 합니다. 또한 실제로 봉사도 많이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으로는 치유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누구나 자비심을 베풀고 싶겠지요. 자비심을 베풀고 싶지만 자기 몸뚱이와 남의 몸뚱이는 별개로 따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몸을 더 중히 여기고, 남의 몸은 나중으로 여기게 됩니다. 자비라는 것이 원래 말은 쉬워도 무명을 제거하지 못하면 실천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자비에 대한 강조만으로는 우리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중병을 치유하기는 어렵습니다.

좋든 궂든 우리 마음이 비어 있다는 것은 인식합니다만,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내 몸이나 상대의 몸이나 할것없이 객관적인 모든 것이 텅텅 비어 있다는 것은 인식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도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반야심경》의 '제법(諸法)이 공(空)'이라고 하는 것은 다 아시지 않습니까? 제법이란 것은 일체만유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일체만유가 다 비어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지구 땅덩어리를 포함한 끝도 갓도 없는 은하계의 수백억의 별들도 모두가 다 텅텅 비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것들이 생겨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질이 물질을 낳는 것이 아니라, 본래는 물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다만 우리 무명심이 움직여서 잘못 보는 현상이라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