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사한 세상
철학을 공부하신 분들도 많이 계시겠습니다만, 이른바 칸트 철학은 그야말로 굉장히 천재적인 동시에 위대한 철학 아닙니까? 칸트 철학이 왜 위대한가 하면 우리 인식(認識)이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서 칸트는 우리 인식이라는 것은 오직 인식의 주체인 내 주관(主觀)을 떠나서는 성립될 수가 없다는 것을 파헤쳐 놓았기 때문입니다. 즉 '모든 인식은 우리 주관에 의존해 있다'는 것이 이른바 칸트 인식론의 대요입니다. 이렇게 말해 놓고 칸트는 이 말이 얼마나 훌륭한 말이라고 느꼈던지 자기 스스로 감탄하기를, 마치 코페르니쿠스가 말한 지동설(地動說)과 같은 위치에 있다고 보았을 정도입니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말하기 이전에는 지구는 가만히 있고 하늘이 움직인다고 하는 천동설(天動說)이 천문학을 지배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코페르니쿠스가 반대로 지동설을 주장하는 바람에, 당시 기독교의 교조(敎條)와 상치되어 박해를 받았습니다만, 아무튼 그것이 하나의 정설로 되면서 천문학의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되었듯이 칸트도 자신의 이론이 그런 지동설과 같은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칸트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외계에 단단한 것이 있으니 우리가 단단하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내 관념, 내 주관이 그렇게 보므로 그렇게 인식된다고 보았습니다. 밉게 보는 것도 미운 사람이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밉게 본다는 말입니다.
모든 인식은 자기 주관에 의존해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미운 저놈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할 때가 더러 있겠습니다만, 이럴 때도 그 대상은 내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의 관념일 따름인 것입니다.
물론 행실이 좋지 않은 사람일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아무튼 그런 나쁜 사람이라 하더라도 부처님이나 어떤 성자가 보신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런 분들은 그런 사람도 나쁜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 곧 죽일 놈이라 하더라도 미울 수가 없습니다. 본래는 부처님인데, 그야말로 부처와 똑같은 하나의 생명존재인데, 다만 잘못 생각해서 나쁜 행동을 나한테 보이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 은혜 가운데, 제가 가끔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만, 은승창렬(隱勝暢劣)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즉 좋은 것은 숨겨 놓고 용렬한 것을 나타낸다고 하는, 다시 말하면 진여불성이라고 하는 좋은 것은 숨겨 놓고서 그냥 나쁜 상(相), 못된 현상만 우리한테 보이는 은혜란 말입니다. 똑같은 부처이므로 만일 어느 것 하나도 부처 아닌 것이 있다고 한다면 불법이 성립되지 못합니다. 너나할것없이, 심지어 티끌 하나까지도 모두가 다 불법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나쁜 사람이나 지금 곧 죽일 듯이 미운 사람도 역시 부처님 은혜라는 말입니다.
무엇이 부처님 은혜인가 하면, 불성이라는 그 소중하고도 영원히 변치 않는,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불구부정(不垢不淨)한 그러한 생명 자체는 숨겨 놓고서 우리한테 겉의 상만 나쁘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부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바르게 보고, 바르게 판단하여 실상을, 실존을 알고 느끼게 된다면 모든 것이 사실은 감사할 뿐입니다. 누구에게 따귀를 얻어맞아도 감사한 것이고, 그러기에 진실로 겸허한 사람들은 누가 얼굴에 침을 뱉어도 자기 손이나 손수건으로 침을 닦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그러는 것인가? 그 사람이 무안할까 봐서, 까닭없이 애매하게 침을 뱉었어도 말입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그냥 참기도 어렵겠지요. 그러나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닦지도 않는단 말입니다. 그 사람이 무안할까 봐서, 그런 것도 역시 그렇게 하라고 시키면 쉽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근본 뿌리를 생각하지 않고, 본래 성품을 생각하지 않고 현상만 생각할 때는 한 대 맞으면 두세 대를 때리고 싶겠지요.
부처님 제자라는 것은 어째서 부처님 제자인가? 밉고 곱고 그런 형상만을 보지 않고 본성품을 보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본성품을 본다는 점에서 우리 불자는 일반 중생과 차이가 있습니다.
아쇼카 왕의 왕자 가운데 눈이 하도 예뻐서 '구나라'라고 이름 붙여진 왕자가 있었습니다. 인도에는 눈이 굉장히 예쁜 구나라라는 새가 있었습니다. 눈이 예쁘기도 하고 소리도 영롱하여 천하에 명성을 내는 새입니다. 그 왕자가 장성해서 결혼까지 했는데, 아쇼카 왕의 여러 왕비 가운데 마음이 못된 어떤 왕비가 구나라의 눈이 하도 예쁘니까 그냥 반해 버렸단 말입니다. 물론 구나라의 생모는 아니었겠지요. 그래서 그 왕비는 구나라 왕자에게 접근하면서 음탕한 말을 자꾸 했습니다. 왕자는 처음에는 좋은 말로 뿌리치다가 나중에는 준열하게 뿌리쳐 버렸습니다. 그러자 그 왕비가 왕자에게 '이놈 두고 보자'고 하는 원망의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이웃나라에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아쇼카 왕은 석가모니 부처님보다 대략 250년 뒤에 나셔서 인도를 통일한 왕 아닙니까? 그래서 이집트까지 부처님 법을 홍포(弘布)하신 분입니다. 사실 예수가 태어난 유태 지방도 아쇼카 왕 때 부처님 법이 포교가 된 지역입니다. 우리는 그걸 생각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신약과 우리 부처님 법과는 상당히 유사점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예수가 나오시기 200여 년 전, 아쇼카 왕이 이집트에까지 불교 포교사를 보냈으니 그보다 가까운 유태까지도 부처님 가르침이 유포되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웃나라에 반란이 일어나자 아쇼카 왕의 그 잘생긴 왕자가 반란을 평정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좋은 사람이 가면 그 사람의 모양만 보고도 마음이 순화되는 것입니다. 선근이 매우 좋은 왕자가 가자 반란군이 별 싸움도 없이 굴복해 와서 반란은 쉬이 평정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반란을 평정한 후에 왕자가 그 나라에서 떠나 오려고 해도 못 가게 말리게까지 되어, 결국 못 떠나 오고 그곳에서 십여 년 동안이나 살게 되었습니다.
그때 원망하는 마음을 품었던 그 왕비는 이 기회에 복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 가지 복잡한 사연이 많이 있습니다만 생략을 하겠습니다. 아무튼 그 왕비가 아무도 모르게 왕의 직인을 찍은 문서로 "지금 아쇼카 왕이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구나라의 그 예쁜 양쪽 안구를 먹으면 병이 낫는다고 한다"는, 즉 구나라의 눈알을 빼서 보내라는 교칙을 보냈습니다. 그러자 효심도 극진한 구나라는 정말 자기 안구를 빼서 보냈단 말입니다.
아쇼카 왕이 실제로 그런 명을 내렸을 리는 만무합니다. 그 당시에는 치아(齒牙)에 인주를 묻혀 가지고 인장을 대용하던 때입니다. 그래서 아쇼카 왕이 잠들었을 때 그 왕비가 몰래 아쇼카 왕 치아에 인주를 물려서 직인을 찍게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보냈기 때문에 구나라도 결국은 곧이듣고 자신의 안구를 빼서 보냈습니다. 따라서 구나라는 소경이 되어 버렸겠지요.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 소식, 저런 풍문을 통하여 구나라는 자신의 안구를 보내라는 교칙이 정작 자기 아버님이 내리신 것이 아니라, 자기한테 음탕한 짓을 하려고 했던 그 왕비의 소행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구나라는 워낙 선근이 깊은 사람인지라, '내가 지금 양쪽 눈알을 빼앗긴 것은 왕비가 나빠서가 아니라 과거 무수한 생을 지내오면서 그이한테 내가 나쁜 짓을 했으니까, 내 업장이 금생에 내 눈알을 뺀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용맹정진으로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육안(肉眼)은 어긋나 버렸지만 참다운 마음의 눈인 천안(天眼), 즉 참다운 법의 눈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소경인지라 살던 곳에서 가만히 빠져 나와 내외간에 걸식행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생전에 아버지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어찌어찌하여 자기 나라로 돌아와서 부왕을 만났습니다. 물론 그 사이에도 사연은 많이 있습니다만 아무튼 부왕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쇼카 왕이 보니까 분명히 윤곽은 자기 아들인데, 그 아름답던 눈이 없을 뿐만 아니라 쑥 들어가서 컴컴하게 보였겠지요. 그토록 사랑하던 아름다운 아들이 그렇게 되어 버렸으니, 부왕은 그만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단 말입니다. 왕자는 자기 아버지를 겨우 일으켜 세워서 다시 자리에 앉게 한 다음 "아버지시여! 슬퍼하지 마십시오.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며, 모두가 다 과거 전생 또는 금생의 저의 무거운 업(業)이 제 눈을 뺀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원망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분노에 떨면서 누가 어떤 연유로 눈을 빼앗았는지 아들을 추궁했습니다. 그러나 구나라 왕자는 이에 대해 전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구나라 왕자는 말을 하지 않았으나, 이렇게 저렇게 추궁도 하고 수소문도 해서 나중에는 아쇼카 왕도 자기의 왕비가 그렇게 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왕비를 극형에 처해서 죽였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구나라 왕자는 슬픔에 잠겼습니다. 왕자는, 결국은 제 업이 제 눈을 뺀 것인데 아버지가 잘못하셨구나 생각하고는 병석에 누웠다가 얼마 안 가서 죽고 말았다는, 그런 애화(哀話)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업연의 사슬은 비단 법을 깊이 알아서 그렇게 했던 구나라 왕자에 한한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사실은 누구나 지금 어떤 상황에 있든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하든 간에 모두가 다 자기 업장이 자기를 괴롭히고 자기를 죽이고 합니다.
우리는 자기 어버이를 원망하고, 스승도 원망하고, 또 사회도 원망하고 합니다만, 이런 것은 사소한 하나의 계기에 불과한 것이지 근원적인 것은 모두가 다 자기 업에 원인이 있습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야말로 우리 마음은 고요한 것입니다. 이런 것은 비유도 무엇도 아닙니다. 과거 전생까지 소급해서 올라간다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모두 인연이 얽히고설킨 고리인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 그것이 이러저러하다는 것은 천지우주가 거기에 다 같이 동참되어 있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기분 사나운 누군가를 딱 때린다고 생각합시다. 때리는 손을 움직이는 그 하나의 행동에도 역시 천지우주가 다 동참되어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지구도, 천지에 있는 모든 별들도 인간의 무명이 쌓이고 쌓여서, 무명심의 파동이 달같이 보이고 해같이 보이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은《구사론(俱舍論)》이나《기세경(起世經)》같은 경에도 나옵니다. "중생의 공업력(共業力)으로, 즉 우리 중생의 공통 업력이 모이고 모여서 그 모인 번뇌의 그림자로 인하여 은하계같이 보이고, 또는 태양계가 성립되며, 지구가 성립된다"고 했습니다. 조금 어려워도 이런 문제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불교라는 것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아닙니까? 모두가 다 마음뿐이라는 것이 일체유심조입니다.
- '마음'인가 '물질'인가
다시 말하자면 불교는 마음 일원주의(一元主義)입니다. 인류역사를 통하여 가장 치열한 이데올로기 싸움이 무엇이었습니까? 유물론(唯物論)과 유심론(唯心論)의 싸움이었습니다. 유물론은 "모두가 물질뿐이다"라고 말하고, 유심론은 "모두가 마음뿐이다"라고 말합니다. 여러 가지 형태의 이데올로기가 많이 있으나, 따지고 보면 결국은 '마음'인가 '물질'인가 하는 싸움인 것입니다. 일반 중생들은 자기 마음의 깊이를 짐작하지 못하니까 눈에 보이는 대로 '아! 이놈의 몸뚱이는 다 물질이 아닌가?' 합니다.
마르크스의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은 유물론의 기조 위에서 세워졌습니다. 따라서 공산주의도 "모두가 다 물질뿐이다. 마음은 결국 우리 육체에 있는 뇌의 반사(反射)에 불과하다" 이렇게 말합니다. 따라서 불교나 기독교에서 본다면 그런 입장을 진리로 볼 수 없습니다.
물질은 허망한 것이지만, 가급적이면 마땅히 평등하게 경제적으로 공정한 분배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 앞서 인간성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부터 풀어 나가야 됩니다. 인간성 문제만 바로 풀어 버리면 다른 문제는 저절로 풀립니다. 그런 것이 부처님 법문에서 "약명료심(若明了心) 하면 만행구비(萬行具備)"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만약 마음을 깨달아 버리면 만 가지 행이 거기에 다 따라간다는 말입니다.
불교에서는 근본적인 치유약을 아가타약(阿伽陀藥, 不死藥)이라 합니다. 즉 만병통치약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아가타약은 반야의 약 혹은 반야의 탕(湯)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야의 사상을 가지지 않고서는 절대로 고황에 들어 있는, 백 약이 무효한 그런 병은 고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반야의 약을 아십니까? 반야는 모든 법이 공하다는 도리입니다. 제법이 공하다는 것은, 이것은 나요 혹은 저것은 너요 하는 모든 것이 다 비었다는 도리입니다. 미운 마음도 비어 있고 미워하는 몸도 비어 있으며 미운 대상도 비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초기설법은 모두가 다 무상(無常)이요 무상(無相)이며, 무아요 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보면 다 무상인 것이고, 무상이어서 '나'라고 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잘못 봐서 '나'라는 고집을 한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이런 도리를 두고두고 그때그때 천만 번 되풀이해서 새겨 봐야 합니다. 따라서《반야심경》도 그냥 얼른 가져다가 소리 좋게 외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뜻을 음미하면서 봐야 됩니다. 그렇게 음미하고 생각하다 보면 자기 암시가 되어서, 실제로 본래 비어 있는 것이므로 결국은 "아!" 하고 텅 비어 온단 말입니다. 이것을 불교용어로 신심탈락(身心脫落)이라고 합니다. 몸과 마음의 탈락이라는, 즉 다 떠넘겨 버려질 때는 몸과 마음이 그렇게 텅텅 비어 버린다는 말입니다. 불교는 그냥 이론적으로 알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실제로 체험하는, 즉 실체화시켜야 하는 진리입니다. 그래야 본체를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본래 빈 것인데, 우리 중생의 번뇌 낀 마음으로 보기 때문에 모두가 다 물질뿐이란 말입니다. 천지우주가 다 물질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다 비었다'고 말하면 납득이 안 가는 게 당연하지요.
그러나 훤히 다 알고 있는 부처님 말씀이므로 우리는 우선 믿어야 하겠지요. 믿은 다음에는 우리 스스로도 체험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체험해야 하는가? 우리 마음을 오로지 한마음으로 통일시킨단 말입니다. 좋다 궂다 밉다 예쁘다 혹은 이래저래 그것이고 이것이고 하는 그런 산란한 마음 때문에 우리 마음이 흩어져서, 혼탁해져서 바닥이 안 보이게 됩니다.
부처님 공부는 모두가 다 바닥을 보기 위해서, 우리 마음의 본성품인 진여불성 자리를 보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가만히 두면 본래 부처인지라 앙금이 가라앉을 텐데, 자꾸만 시비 분별하므로 흩어진 마음이 안정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험공부 하는 사람도 공부를 몇 시간 하면 머리가 띵 하고 그럴 것입니다만, 그런 머리도 가라앉히려면 내 몸뚱이도 여러 종류의 원소들이 결합되어서 빙빙 돌고 있는 세포들의 유기적인 집합체에 불과한 것이라 생각해야 합니다. 내 몸뚱이를 구성하는 원소도 모두가 다 본래는 물질이 아닌 순수한 진여불성의 파동입니다. 그 파동이 원자가 되고, 원소가 되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존재든 모두가 다 진여불성의 한 파동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마음의 파동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천지우주가 텅텅 비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무명심으로 생겨난 번뇌가 상(相)을 만들고, 그 상으로 말미암아 달이 되고 해가 되고, 은하계가 되고 태양계가 되고 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렇게 상을 낸다 하더라도 그것은 있는 그대로 고유한 실체를 지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달도 별도 태양도 모두가 한 순간도 한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매순간 변화해 마지않는 것입니다.
내 몸도 역시 매순간마다 변동해 마지않습니다. 일반 중생들은 그걸 보지 못하므로, 내가 고유하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무상(無常) 아닙니까? 무상은 항상(恒常)이 아니다, 항상한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일체만법 모두가 다 무상입니다. 무상한 것은 어려운 말로 하면, 한순간도 공간성을 지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매순간 변화하는데 어떻게 고유한 공간성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그것이 공(空)이란 말입니다. 여러분은 무상을 잘 느껴야 됩니다.
《반야심경》의 제법공 도리는 그렇게 심심미묘(甚深微妙)한 도리입니다. 그저 '물질은 물리학적으로 분석하면 에너지가 되겠지' 하는,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가령 수분은 0도에서 냉각되어 얼음이 되겠지요. 즉 고체가 된다는 말입니다. 또 100도 이상으로 가열하면 비등해서 수증기가 되겠지요. 그리고 그것이 공중에 올라가서 식혀지면 구름이 되지요. 그러므로 수분이 얼음이 되든 물이 되든 간에 수분이라는 것은 조금도 변질이 없지 않습니까? 그와 똑같이 진여불성이 달을 구성하건 태양을 구성하건 우리 몸을 구성하건 간에 그 자체는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물질이 아닌 진여불성, 우리가 그것을 마음이라 한다 해도 이름을 그렇게 붙인 것일 뿐, 본래 이름을 가지고 있었겠습니까? 다만 공간성과 시간성이 없으니까 우리가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질이 아닌 진여불성이 이렇게 저렇게 모여서 된단 말입니다. 그것이 내 몸이요 네 몸이며, 모든 물질이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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