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을 누리시기를
우리는 근본적으로 생각해야 됩니다. 왜 우리가 아까운 생명을 낭비해야 합니까? 우리가 할 일은 근본으로 가는 것이며, 그 외에는 모두가 다 헛것입니다. 석가모니가 못나서 집을 나갔겠습니까? 그렇게 잘난 분이 집을 나오고 재산과 지위를 포함한 모든 것을 뿌리쳐 버렸단 말입니다. 석가모니는 자신이 왕이 되고자 했으면 충분히 될 수 있었던 분입니다. 그러나 자기 생명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석가모니가 무슨 필요로 출가를 했겠습니까? 오직 한 길, 바르게 사는 길을 찾으려는 것밖에는 없었습니다. 다만 세속에서 그런대로 닦을 것인가, 출가해서 온 힘을 다해 100퍼센트 수행할 것인가 하는 그 차이뿐이었습니다.
우리는 누구 할것없이 행복을 추구합니다. 인간 존재 그 구조 자체가 행복을 추구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왜인가 하면 인간 존재는 원래 모든 행복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진여불성의 자리는 자비도 지혜도 혹은 능력도 행복도 본래로 다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본성은 본래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갖추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자리에 가야만 비로소 안심입명(安心立命)합니다. 자비도 지혜도 행복도 능력도 다 갖추고 있는 그 본성의 자리에 가기 전까지는 어떤 것도 우리한테 만족을 못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이라는 그 파랑새를 찾기 위해 산으로 들로 그토록 헤매었지만 안 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 보니까 집 안의 새장 속에 그 예쁜 파랑새가 있단 말입니다.
행복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어느 누구나 자기에게 본래 갖추어져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물질이 아닌 마음, 그 마음이 행복을 본래로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렇게 아끼는 몸뚱이가 어디서 나왔는가 하면, 과거생에 우리 마음 씀씀이에 따라서 부모와의 인연 따라서 금생에 이런 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몸을 얼마나 씁니까? 저 같은 사람이야 이제 십여 년도 못 쓰면 흔적도 없어져 버리겠지요. 젊은 사람들의 몸이라 하더라도 더러는 비명횡사(非命橫死)에 간다고 생각하면 몇 년도 못 쓰고 가게 되고, 또 수(壽)를 다 누리고 간다고 해도 고작 몇십 년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발 생각을 바로 해야만 합니다. 어차피 없어질 이 몸뚱이에는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게 꾸며 놓아도 결국은 땀 한 번 흘려 버리면 냄새가 나는 게 바로 그 몸입니다.
진여불성 자리에 이르는 것만이 사람으로 태어난 근본목적입니다. 공자도 소크라테스도 모두 다 그 길로 갔던 것입니다. 니체나 칸트나 쇼펜하우어나 모두가 그 길로 갔단 말입니다. 다만 각도에 따라서 조금 차이가 있게 표현했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그 길을 지향했습니다. 자본주의나 무슨 주의나 모두가 그 길로 가려고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다만 바른 도리를 모르기 때문에 자꾸만 이렇게 저렇게 한 것이지 인간 자체는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완전해야겠다' '모두가 평등해야겠다' '모두가 자유로워야겠다'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진여불성 자리로 가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내 마음도 허망하고, 내 앞에 선 대상도 허망하고, 모두가 다 허망무상한 것입니다. 허망무상하기 때문에《금강경》에서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하였으며,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이라 한 것입니다. 즉 꿈이요, 허깨비요, 물거품이요, 그림자요, 풀 끝에 이슬이요 또는 번갯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지랑이를 구해서는 안 됩니다. 저 멀리 아지랑이가 그렇게 좋게 보이고 꿈 같은 신기루가 좋게 보인다 하더라도, 고생고생해서 달려가 보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구하는 대통령 자리나 또는 부자나 모두가 다 구해 놓고 보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검소하게 살아야 됩니다. 검소하게 살면 그만큼 죄를 덜 짓고 빚을 덜 집니다. 몸뚱이 하나 잘 먹이고 잘 입히기 위해서 사치하고 과소비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그만큼 더 많은 죄를 짓고 빚을 많이 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인과이기 때문에 어떠한 것도 인과를 벗어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이 몸뚱이 하나 보존하기 위해서 너무나 과다한 물질을 소모한다고 생각할 때에는 꼭 그에 따르는 보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몸뚱이로 금생에 와서 먹고 입지만, 우리가 부처님 길을 가는 데에는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치 않습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 당시 프랑스군이 모조리 포위됐을 때, 잔 다르크는 16세의 어린 소녀로 선두에 서서 그 포위망을 뚫고 오를레앙 성을 탈환했습니다. 그런 힘이 잔 다르크한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석가모니에게 있는 힘, 예수에게 있는 힘이 우리에게도 똑같이 있습니다. 다만 어둠에 가려서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는 자기 스스로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런 힘이 있는데 하물며 대학입시 하나 합격 못 하겠습니까?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부처님 힘은 무한의 힘입니다. 다만 우리는 무한의 힘을 자아내서 쓰지 못하고, 자꾸만 이것을 생각하고 저것을 생각합니다.
입시 준비하는 수험생이든 누구든 우선 마음을 가라앉혀서 맑게 해야 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도 텅텅 비어서 자취가 없고, 자기 집안 식구 가운데 동생이 밉다고 하는 것도 자취가 없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아무것도 흔적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 어머님 아버님이 섭섭하게 해도 그 섭섭한 것도 흔적이 없고 말입니다. 이런 것 저런 것 다 허망한 것이니까 생각 자체를 그렇게 바꾸고, 오직 부처님만 생각하면서 공부한다면, 기억력이라든지 그런 모든 것이 다 완벽하게 됩니다. 따라서 입시든 다른 무엇이든 다 이룰 수 있습니다. 천재적인 능력은 어느 누구 할것없이 다 가지고 있는 힘입니다. 우리 학생들이 공부할 때 머리가 아프거나 한 것은 머리에 필요 없는 것들이 많이 차 있기 때문입니다. 다 버려야 합니다. 모두가 다 원래 허망한 것인데, 우리가 괜히 그런 것들을 머리에 채워 놓고 있습니다. 모두가 다 자취 없는 것이고, 사실은 꿈이나 그림자뿐인데, 꿈의 자취가 어디에 있다고 채워 놓습니까?
우리 범부중생은 자꾸만 필요 없는 생각을 떠올립니다. 그러므로 이러저러한 생각을 내려놓기 위해서 염불도 하고 화두도 듭니다. "염도념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하니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이라." 생각생각을 하다 보면 결국은 그야말로 무념처인 무념지에 이르게 되고, 무념처에 이르면 육문, 즉 자기 눈과 입, 코, 귀에서나 자기 몸 전체에서 그야말로 훤히 트여 있는, 빛나는 우주와 둘이 아닌 자마금색(紫磨金色)이, 오색찬란한 광명이 항시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그 한 길,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참다운 반야의 지혜를 떠나서는 도저히 우리에게 행복은 없습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나 할것없이 꼭 행복해야 합니다. 또 행복은 본래로부터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대무량의 보배가 원래 갖추어져 있습니다. 대무량의 보배란 물질적인, 즉 세간적인 보배가 아닙니다. 물질은 본래 자취가 없는 것이라서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고 맙니다. 참다운 보배인 우리 불성보배만이 영생불멸하는 대무량 보배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염송하는 '지장보살!'이나 '관세음보살!'이나 또는 '나무아미타불!' 혹은 화두를 잡으셔서, 앞서 제가 말씀드린 마음이 하나로 딱 모아지는 일념무심(一念無心) 공부를 해야 합니다. 일념무심은 우주를 움직입니다. 그와 같이 공부를 해야만 진여불성인 우주의 근본 핵심을 움직이게 된단 말입니다. 우리가 진여불성까지 움직이게 된다는 말입니다. 꼭 그와 같이 하셔서 마음이 편안해지고 다시 없는, 위없는 행복을 누리시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불기 2535년 6월, 태안사 정기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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