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성철스님] 인천보감(人天寶鑑) 17

通達無我法者 2008. 1. 4. 11:36

인천보감(人天寶鑑)

영지사(靈芝寺) 원조(元照 : 1048~1116)율사는 전당(錢塘)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속세의 인연이 익어져 나이 열여덟에 경에 통달하여 출가하였으며, 사미로 있을 때 이미 대중을 위해 경을 강의하였다.
계율을 배우면서는 배울만한 스승이 없다고 늘 탄식하였다. 당시 신오 처겸(神悟處謙)법사라는 이가 있었는데, 그는 천태의 도를 깊이 터득하고 있었다. 율사가 찾아 법고는 ꡒ참으로 나의 스승이시다ꡓ하고 청을 해서 문하에 있게 되었다.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거나, 춥거나 덥거나 날마다 몇 리 길을 걸어와 배웠다. 처겸법사는 강론을 할 때마다 반드시 율사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어쩌다 조금 늦어져 대중들이 시간이 지났다고 강론을 청하면 언제나 ꡒ강을 들을 사람이 아직 오지 않았다ꡓ고 말했으니 그는 이토록 율사를 사랑하였다. 율사가 익혀왔던 것을 버리고 법사를 따르려 하니 법사가 말하였다.

ꡒ요즘 들어서 율의 가르침이 점점 약해지는데 그대는 뒷날 반드시 종장이 될 것이니 꼭 법화(法華)를 밝히고 사분율(四分律)을 널리 펴도록 하여라. 나의 도는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ꡓ 율사는 마침내 많은 종파를 널리 연구하고 그 중에 율을 근본 삼았는데 단지 말로만 하지 않고 실천에 옮겼다.
일찍이 남산 도선(南山道宣)율사에게 귀의하여 하루 여섯 차례씩 예배를 드리고 밤낮으로 도를 닦았다. 발우를 들고 걸식을 다녔는데 옷이라고는 큰 베옷 하나만 걸쳤을 뿐이었고 정오가 지나서는 밥을 먹지 않았다. 발우 하나와 옷 세벌 뿐 바랑 속에 쓸데없는 물건은 없었다.
기도를 하면 언제나 그 정성이 하늘에 닿아 메뚜기를 없애달라고 빌면 메뚜기가 경계 밖으로 떠나고, 비가 오게 해달라고 빌면 장마비가 내렸다. 술고방공(術古龐公)이 율사에게 비를 빌도록 명하였는데, 축원〔懺〕이 입에서 끝나기도 전에 천둥이 치며 소나기가 쏟아지니 공이 말하였다.

ꡒ우리집안은 대대로 불법을 섬기지 않았는데 지금 율사를 만나고 보니 귀의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ꡓ
태사(太師) 사월왕(史越王)이 율사의 비 뒷면에 이렇게 썼다.

ꡒ유학을 하는 사람은 유학으로 자기를 묶고, 계율을 하는 사람은 계율로 자기를 묶는 것이 공부하는 이들의 큰 병통이다. 그런데 유독 율사만은 3천 가지 몸가짐과 8만 가지 세세한 행을 갖추어 흠잡을 데 없는데도 늘 정혜(定慧)의 테두리를 껍질벗 듯 초탈하였으니 율장 중에 진짜 법왕의 아들이었다. 그러므로 수백년 뒤까지도 사람들을 분발케 하니 곧 남산율사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하나 그 공은 배가 된다고 하겠다.
만일 일찍이 율사로 하여금 승복을 입게 하지 않았더라면 반드시 유교의 우두머리로서 특출난 조예를 가진 사람이 되었을 터인데, 아까운 일이다.ꡓ
율사가 돌아가신 지 26년이 되도록 그 남긴 향기가 없어지지 않자 조정에서는 ꡐ대지율사(大智律師)ꡑ라는 호를 내리고 탑을 ꡐ계광(戒光)ꡑ이라 이름지어 시호를 하사하는 은혜를 주었다. 이 일은 유공(劉公)의 글에 언급되지 않았기에 비의 뒷면에 써둔다ꡓ
현사사비(玄沙師備 : 835~908)선사는 복주(福州)사람이며 성은 사씨(謝氏)다. 젊어서 남대강(南臺江)에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홀연히 배를 버리고 불문에 들어왔다. 스님은 짚신과 베옷에, 겨우 기운을 이어줄 정도로만 먹고 하루종일 좌선을 하니 설봉 의존(雪峰義存)선사가 불러 말씀하셨다.

ꡒ스님은 두타행(頭陀行:청정행, 고행)을 하던 이가 다시 이 세상에 온 사람인데 어찌 제방에 두루 다니며 법을 묻고 추구하지 않는가?ꡓ 스님이 말하기를 ꡒ달마는 동쪽에 오지 않았고, 2조는 서천에 가지 않았습니다ꡓ라고 하자 설봉스님이 그렇다고 하였다.
스님이 현사(玄沙)땅에 움막을 엮었는데 대중이 서로 물어물어 찾아와 마침내 총림을 이루었다. 스님은 경에 부합되는 말씀으로 법을 설하니 요점을 분명히 알지 못한 자들이 제방․에서 찾아와 모두 해결을 보았다.
대중에게 말하였다.

ꡒ불도는 드넓어서 정해진 길이 없고 3세에 있는 것도 아니니 어찌 떴다 가라앉음이 있겠느냐. 세워지고 무너지고 하는 것은 조작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움직이면〔動〕 번뇌 경계에 빠지고 고요하면〔靜〕 어둡고 몽롱한 곳에 가라앉는다. 또한 움직임과 고요함을 다 없애면 아무 것도 없는 데 떨어지고 움직임과 고요함을 다 받아들이면 불성을 더럽히게 된다. 그러니 경계를 마주할 때 굳이 마른나무나 꺼진 재처럼 할 필요가 있겠는가. 마치 거울에 물건을 비춰도 거울 빛이 어지러워지지 않듯, 새가 공중을 날되 하늘 색을 더럽히지 않듯, 그저 상황에 임해서 타당함을 잃지 않고 응용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ꡐ시방에 그림자가 없고 3계에 발자취가 끊겼으며 가고 오는 테두리에 떨어지지 않고 중간에 있다는 생각에 머물지도 않는다. 이는 마치 장사가 팔꿈치를 펼 때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 사자가 거닐 때 짝을 짓지 않는 것과 같다ꡑ라고 하였다.
하늘을 가리운 것이 없는데 무슨 뚫고 통과할 것이 있는가. 한줄기 빛은 이제껏 어두운 적이 없었으나 여기에 이르러서는 그 바탕〔體〕은 적적하되 항상 밝게 빛나며 활활 타오르는 불꽃같이 가이 없다. 원각(圓覺)의 빛 속에서 움직이지 않으면서 하늘땅을 삼키고 불살라서 다시 비춘다.ꡓ

대혜 종고(大慧宗杲:1088~1163)선사가 담당 준(湛堂文準:1061~1115)스님을 찾아가니 준스님은 도에 들어가는 지름길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선사가 제멋대로 생각하며 물러섬이 없자 준스님은 ꡒ그대가 깨닫지 못하는 것은 알음알이로 이해하려는 데 병통이 있기 때문인데 이것이 바로 소지장(所知障)이라는 것이다ꡓ라고 꾸짖었다.
당시 뛰어난 선비였던 이상노(李商老)가 준스님을 찾아뵙고 도를 묻고 있었는데 마침 선사가 이런 말을 하였다.

ꡒ도는 신령하게 깨달아야 하며 그 묘는 마음을 비우는 데 있다. 이를 체험하는 데에는 총명함이 필요치 않고 이를 얻는 데는 보고 들음을 훌쩍 뛰어넘어야 한다.ꡓ
그러자 이상노가 무릎을 치고 감탄하며 ꡒ어찌 사고(四庫)의 책을 다 읽고 나서야 학문을 했다고 하겠는가ꡓ라고 하였으며 이 일로 두 사람은 도반이 되었다.
준스님이 입적하자 선사는 승상 무진거사(無盡居士, 張商英:1043~1120)를 찾아가 준스님의 탑명(搭銘)을 부탁하였다. 공은 평소 선공부를 했다고 자부하고 있어서 대단한 지견을 갖춘 사람이 아니고는 감히 그의 문턱을 오르지도 못했다. 선사는 그를 만나 대화하는데 탁월하면서도 여유가 있었다. 공이 이를 보고는 ꡒ자네의 선은 격식을 넘어섰네ꡓ라고 칭찬을 하니, 선사가 ꡒ그래도 스스로는 긍정하지 못하겠는데야 어떻게 합니까ꡓ라고 하자, 공이 ꡒ고대는 천근(川勤 :원오극근)스님을 만나 보면 될 것 같소ꡓ라고 하였다.
이에 선사는 서울 천녕사(天寧寺)로 원오 극근(圓悟克勤:1063~1135)스님을 찾아갔는데 원오스님은 마침 법좌에 올라 거량법분을 하고 있었다.

ꡒ한 스님이 운문 문언(雲門文偃)스님께 묻기를 ꡐ무엇이 모든 부처님들의 몸이 나오신 곳입니까? ꡑ라고 하니 운문스님께서 ꡐ동산(東山)이 물위로 간다ꡑ라고 하셨는데 만약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그에게 ꡐ훈풍이 남쪽에서 불어오니 전각에 서늘한 기운이 돈다ꡑ라고 대답하겠다.ꡓ
선사는 여기서 홀연히 앞뒤가 다 끊겼다. 그리하여 움직임〔動相〕은 생겨나지 않았으나 도리어 깨끗하여 아무 것도 없는 경계(淨顆顆處)에 빠지게 되었다. 선사가 방장실에 들어갈 때마다 원오스님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가 이런 경계에 도달한 것도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아깝구나! 죽기만 했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니, 화두(語句)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로다. 듣지 못했는가. 깍아지른 낭떠러지에서 손을 놓고 스스로 긍정해야 맨 끝에 다시 살아난다는 말을, 이렇게 되면 그대를 속일 수 없으니 이런 도리가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한번은 방장실(東山五祖法演)에서 원오스님이 묻기를 “있다는 말[有句]과 없다는 말[無句]이 등넝쿨이 나무에 기대 있는 것과 같으니 입을 열고 말을 했다 하면 틀립니다. ” 라고 한 일이 있었다.
선사가 하루는 손님과 함께 저녁밥을 먹는데 젓가락을 손에 잡고도 먹는 것을 잊고 있으니 원오스님이 웃으며 손님에게 말하였다.
“저놈은 회양목선(黃楊木禪: 선을 함께 있어서 융통성 없이 꼭 막힌 것을 잘 자라나지 않고 딱딱한 회양목에 비유한 말)을 참구해 터득했다오”
대혜선사가 분개하여 물었다.
“스님께서는 일찍이 오조스님께 ‘등넝쿨이 나무에 기대 있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는데 오조스님께서는 무어라 대답하셨습니까?”
“묘사하려 해도 묘사할 수 없고 그림으로 그리려 해도 그릴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또 묻기를 ‘나무도 자빠지고 등도 말라버리면 있다 없다하는 그 말은 어디로 돌아갑니까?’라고 하니 오조는 ‘서로 따라오느니라’라고 하셨다.
선사는 여기서 “나는 알았다!”라고 외쳤다. 이 때부터 마음이 확 트여 응어리지고 막히는 곳이 없었다. 그후 얼마 안되어 길을 떠나 강서지방을 가다가 대제(待制) 한자창(韓子蒼)을 만나 유학과 불학에 대해 열띤 토론을 했는데, 한자창이 깊이 탄복하여 선사는 그이 서재에 반년을 묵게 되었다. 새벽에 일어나 서로 인사하는 외에 때가 아니면 강론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길을 가는 데 선후를 사양하는 일이 없고 앉을 때에도 주인자리 손님자리를 따지지 않았다. 너와 나를 서로 잊고 마음 속에 있는 것까지 다 쏟아 놓으며 하루도 법락을 맛보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후 승상 장위공(張魏公 : 張商英)의 청으로 경산(徑山)에 주지하니 천하의 납자들이 모여들어 따르는 대중이 2천 명이나 되었다.
선사는 청규(淸規)로 대중들은 묶지 않는 것은 아니나 자율에 맡기기도 하였다. 납자들이 불법의 요의를 서로 따지다가 혹 기분이나 이론이 맞지 않아 선사 앞에서 다투는 일이 있으면 그때마다 선사는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결정을 지어주지 않고 으레 담당자를 보내서 쫓아내버렸다. 당시 유나(維那)로 있던 소진(紹眞)스님은 촉(蜀) 땅의 선비였는데 선사가 명을 내리면 잠만 자면서 그대로 시행하지 않고 심지어는 그들에게 산유람을 하도록 하였다. 이 일이 나중에 선사에게 알려지니 선사는 “이 묘희(妙喜: 대혜의 호)의 용상굴(龍象屈)이 아니면 어떻게 이러한 열중(悅衆: 대중을 통솔하는 직무)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칭찬하였다.
형중온(瑩仲溫)이 말하였다.
“선사는 뜻이 크고 의리를 좋아하였으니 취향과 식견이 고명하였다. 성격은 비록 급했으나 도량은 실로 너그러워 성이나서 꾸짖는 가운데도 사실은 자비로움이 있었다. 대중가운데 계율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명령대로 거행케 하지만 한번도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물건을 상하게 할 마음은 없었으니 선사가 소진유나를 칭찬한 이유에는 깊은 뜻이 있는 것이다. 뒷사람들이 거울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혜어록에는 이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매일 방장실 원오에 들어가 ‘있다는 말과 없다는 말이 등넝쿨이 나무에 기대 있는 것과 같다’함을 거량하고사, 내가(대혜) 대답하려고 입만 열면 원오스님은 다 ‘틀렸다’라고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