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보감(人天寶鑑)
효종(孝宗:宋1163∼1189재위)황제가 경산사(徑山寺) 주지 보인(寶印 :1109∼1190)선사를 선덕전(選德殿)에 초청하여 말하였다.
“3교(三敎:佛儒仙) 성인들의 도리는 본래 같은 것입니까?”
보인선사가 아뢰었다.
“그것은 허공에 동서남북이 애초에 따로 있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래도 성인들이 세우신 방편은 각기 다른점이 있으니, 예컨대 공자는 중용(中庸)으로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중용의 가르침이 아니면 어떻게 세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화엄경」에 말하기를 ‘세간의 모습을 허물지 않고 세간 벗어나는 법을 이룬다’ 하였고, 「법화경」에는 말하기를 ‘세간을 다스리는 말과 삶을 지탱해 주는 생업들이 모두 실상(實相)과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의 사대부들은 공자의 가르침을 배우는 사람이 많은데 오직 문자만 파고들 뿐 공자의 도는 보지 못하고, 더욱이 공자의 마음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직 석가부처님은 문자로 사람을 가르치는 방법을 쓰이 않았습니다. 다만 마음의 근원을 그대로 지적하여 중생에게 열어 보이시어 저마다 깨달아 들어가게 하니 이 점이 훌륭하지 않습니까.”
“비단 요즘의 공부하는 사람들만 공자의 도를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열 분 제자 가운데 안자(顔子) 같은 분은 바탕을 갖추었다고 일컬어지는 사람인데 자기 평생의 역량을 다하고서도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었습니다. ‘우러러보니 앞에 있는 듯하다가는 홀연히 뒤에 있으시다.’ 이렇게 보건대 그의 입신이 탁월하긴 했으나 결국은 공자의 그림자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분명하게 털어놓고 여러 제자에게 말씀하기를 ‘제자들아, 너희들은 내가 무엇을 감추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나는 아무 것도 감춘 것이 없느니라. 나는 모든 행동에서 너희들과 함께 하지 않은 적이 없으니, 제자들이여 이것이 공구(孔丘)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볼 때 공자는 한번도 제자들을 피한 적이 없는데도 제자들의 눈이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옛날 승상 장상영(張商英)이 말하기를 ‘나는 정작 불교를 배우고 나서야 유교를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황제가 말하기를 “짐의 생각도 그렇습니다”라고 하면서 또 묻기를 “장자와 노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였다.
“이 사람들은 불법에서는 소승인 성문(聲聞)일 뿐입니다. 무릇 소송은 몸을 감옥이나 형틀같이 생각하여 싫어하고, 지혜를 잡독으로 여겨 멀리합니다. 그리하여 불 속에 몸을 태워 무위(無爲)의 경지에 들어가니 이것이 바로 장자가 말한 ‘폼은 본래 고목같이 만들 수 있고 마음은 본래 꺼진 재처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황제는 마음에 꼭 맞는 말이라 하였다.
고승 가구(可久)는 전당(錢塘) 사람이다. 강원을 두루 다녀 천태의 종지를 깊이 터득하고, 그 뒤 상부사(祥符寺)에 살았다. 스님은 옛 음률로 시 짓기를 좋아하여 담담하면서도 맑은 경지에 이르렀는데 소동파(蘇東坡)는 스님을 ‘시로(詩老)’라고 불렀다.
소동파가 정월 대보름에 관료들과 함께 관등놀이를 갔다. 그는 혼자 스님을 찾아뵈었는데 스님이 조용히 앉아 좌선을 하고 계시는 것을 보고는 절구(絶句) 한 수를 지었다.
문 앞엔 노래소리 북소리 왁자지껄한데
말쑥한 방 하나, 얼음같이 차구나
부질없이 유리로 사물을 비쳐보지 않고서야
무진한 그것이 본래 등이 아님을 비로소 알았네.
門前歌鼓鬧分崩 一室蕭然冷欲永
不把瑠璃閑照物 始知無盡本非燈
스님은 매우 엄격하게 봄을 다스려 눕지 않고 지내며 하루 한끼 먹고 행주좌와에 법복을 벗은 일이 없었다. 스스로 근검절약을 하여 평생 누더기 한 벌을 바꾸지 않았으며, 혹 양식이 떨어지면 벽곡( 穀:곡물을 먹지 않고 솔잎이나 야채를 먹음)을 하며 좌선할 뿐이었다.
만년에는 서호(西湖)가에 살았는데 말끔한 선상(禪床) 하나 뿐 쓸데없는 물건은 남겨두지 않았다. 창밖에는 오직 붉은 파초 몇대공과 푸른 대나무 몇백줄기 뿐이었는데 그곳을 스스로 ‘소소당(蕭蕭堂)’이라 이름 짓고 살았다. 임종하면서 사람들에게 “내가 죽고나면 파초와 대나무도 죽을 것이다”라고 하더니 뒤에 그 말대로 되었다.
양차공(楊次公:楊偕)이 말하였다.
“원력이 크신 아미타불은 정토에서 오지만 와도 실제 오는 것이 아니며, 신심 깊은 범부는 정토로 가지만 가도 실제 가는 것이 아니다. 저쪽에서 이곳으로 오지 않고 이쪽에서 저곳으로 가지도 않으나 그들 성인과 범부는 만나서 양쪽이 교제할 수 있다.
아미타불의 밝은 빛은 크고 둥근 달과 같아서 법계를 두루 비춘다. 염불하는 중생이 이를 간직해서 버리지 않으면 모든 부처의 마음 속에 있는 중생은 티끌같이 무수한 극락을 얻게되고 중생의 마음 속에 있는 정토는 생각생각 아미타불이 될 것이다. 만약 발심하여 저 명호를 염(念)할 수 있으면 그대로 왕생하여 강가의 모래같이 많은 모든 부처님이 업을 모아 칭찬하고 시방의 보살들이 함께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 말씀을 믿지 못한다면 무슨 말을 믿을 것이며 정토가 가서 날만한 곳이 아니라면 어느 땅이 가서 날만한 곳인가. 스스로 자기의 신령함을 버린다면 그것은 누구의 허물이겠는가.”
공은 임종 때 금으로 된 자리〔臺〕가 공중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는 곧 게송을 짓고 돌아가셨다.
삶이라해서 연연할 것도 아니고
죽음이라해서 버릴 것도 아니니
크나큰 허공 속에
오고 가는 것일 뿐인데
잘못에 잘못을 더하여
서방극락이 되었구나.
生亦無可戀 死亦無可捨
太虛空中 之乎者也
將錯就錯 西方極樂
문로공(文潞公)이 낙양(洛陽)에 있을 때 한 번은 재를 올리러 용안사(龍安寺)에 가서 불상을 우러러 보고 예불을 드렸다. 하루는 홀연히 불상이 허물어져 땅에 떨어졌다. 그러자 공은 조금도 공경하는 기색없이 오직 뚫어지게 바라만 보다가 나가버렸다. 옆에 있던 스님이 왜 예불을 안하느냐고 물으니 불상이 허물어졌는데 내가 어디다 예불을 하겠느냐고 하였다. 그러자 그 스님이 말하였다.
“옛 성인은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이가 개인적으로 관리들이 다니는 길에서 흙을 파다가 불상을 만드니, 지혜로운 사람은 길가의 흙인줄 알지만 어리석은 범부는 불상이 생겼다고 한다. 뒷날 관리가 지나가려고 도로 불상으로 길을 메우니 불상은 본래 생겼다 없어진 것이 아니고 길 역시 새 길 옛 길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공은 이 말을 듣고 느낀 바 있어 이로부터 도를 흠모하는 데 매우 힘써 아흔이 넘도록 아침에 향사르고 저녁에 좌선하는 일을 한 번도 그만둔 일이 없었다. 공은 매일 다음과 같이 발원하였다.
“원컨대 내가 항상 정진하여 모든 선업을 부지런히 닦게 하여지이다. 원컨대 내가 심종(心宗)을 깨달아 모든 중생을 널리 제도하게 하여지이다.”
묘보(妙普:1071∼1142)수죄는 스스로를 ‘성공(性空)’이라 하였다. 사심오신(死心悟新)선사에게서 종지를 얻고 오랫동안 화정(華亭)에 살았으며 쇠피리를 즐겨 불면서 자재하게 스스로 즐기니 아무도 그 경지를 헤아려볼 수 없었다. 또한 즐겨 시구를 지어 세상 사람들을 일깨워주었는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도를 배움은 궁성을 지키는 일과 꼭 같아서
낮에는 6적(六賊)을 막고 밤에도 초롱초롱 해야하니
장군과 주장이 호령을 행사하면
창과 방패 움직이지 않고도 태평을 이루네
學道尤如守禁城 防六賊夜惺惺
將軍主將能行令 不動千 致太平
또 이런 게송을 지었다.
밭갈지 않고 밥먹고
누에치지 않고도 옷입으며
세상 밖에서 맑고 한가롭게 지내니
성군의 시절보다 더 편하네
허나 조사의 관문 빗장을
뚫지 못했거든
모름지기 뜻을 두어
마땅한 곳에 마음을 붙여야 하리
不耕而食不蠶衣 物外淸閑過聖時
未透祖師關房子 也須存意看便宜
하루는 대중들에게 알렸다.
“앉아서 죽고 선 채로 죽고 하는 일도 수장(水葬)하는 것만은 못하다. 첫째는 땔감을 절약하고 둘째는 외구덩이 파는 일을 안해도 되기 때문이니, 손 놓고 그냥 떠나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누가 내마음 알아줄까. 선자(船子)화장*이로다. 그 높은 풍모 천백년 이어지기 어려워 어부가 한 곡조를 부르는 이 적구나.”
그리고는 마침내 청룡강(靑龍江)으로 가서 나무쟁반을 타고 베돗대를 친 다음 먼곳으로 떠나가 죽었다.
우법사(愚法師)는 가화(嘉未)사람으로 유학(儒學)을 버리고 불법에 귀의하였다. 각고의 노력으로 정진하기 33년에 더욱더 수행에 힘써 하루도 그만둔 적이 없었다.
일찍이 도잠(道潛), 칙장(則章) 두 스님과 도반이 되었다. 도잠스님은 시를 잘해서 명예를 가까이했으나 칙장스님과 법사는 빛을 감추고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으며 오직 자기 일에만 힘썼다. 그런던 중에 칙장스님이 먼저 죽고 우법사도 입적할 때가 되자 대중에게 말하였다.
“내 꿈에 신선이 나타나 알려주기를 ‘그대 도반인 칙장스님은 보현보살의 원행삼매(願行三昧)를 얻어 이미 정토에 가서 났다. 그곳에서 그대를 기다린 지 오래되는데 어찌 머뭇거리는가’라고 하였다. 이어서 정토의 거룩한 모습과 여러 가지 꽃이며 음악이 모조리 눈앞에 나타나더라.”
그리고는 게송을 저어놓고 돌아가셨다.
허공 속에 온갖 꽃이 그물처럼 피었고
꿈 속에 칠보연못이 보이네
서방정토 돌아가는 길 편안히 밟으니
다시는 한 점의 의심도 없구나.
空裏千花羅網 夢中七寶運池
路得西歸路穩 更無一點狐疑
* 선자덕성(船子德誠) : 당나라 약산 유엄스님의 재자. 화정에 배를 띄우고 오가는 사람을 건네주다가 협산 선회스님에게 법을 전하고 배를 뒤집어 물 속에 자취를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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