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성철스님] 선문정로 / 으뜸되는 뜻(第一義)에서 세운 바른 뜻은

通達無我法者 2008. 1. 22. 09:08

선문정로

으뜸되는 뜻(第一義)에서 세운 바른 뜻은 무여의열반(無蘇依涅樂)의 경계가 진정한 무심의 지위이다. 왜냐하면 이 경계에서는 아뢰야식이 또한 영원히 없어진 까닭이다. 이 무여의열반 이외의 모든 지위는 전전하는 식(轉識)이 소멸하였으므로 무심의 지위라고 거짓으로 부르기는 하나 아뢰야식이 영영 없어지지 못했으므로 으뜸되는 뜻에 있어서는 무심의 지위가 아니다. -「瑜伽論」十三
진정한 무심은 미세한 무명인 제8아뢰야식이 영원히 없어진 무여열반, 즉 부처지위〔佛地〕만이다.
제6식과 제7식의 전전하는 식(轉識) 이 없는 제8아뢰야식의 무기(無記)를 무심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으나 제8식의 무기에서는 6식과 7식의 전식인 거친 망념은 없어졌으나 제8식의 미세하게 움직이는 생각이 남아 있으므로 진정한 무심이 아니다.
가끔 아뢰야식 무기를 무심이라고 잘못 착각하는 경우도 있으나 견성은 구경각 즉 부처지위이므로 무여열반인 진여의 무심이다.

오직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의 경계에서만 모든 망령된 마음이 다 소멸하므로 무심의 지위라고 부른다. 그 나머지 모든 지위는 전전하는 식(轉識)이 끊어 없어졌기 때문에 무심이라고 거짓으로 부르지만, 제 8아뢰야식이 아직 다 없어지지 않았으므로 유심(有心)의 지위라고 이름한다.- 「瑜伽論」

제6식과 제7식의 전전하는 식, 즉 6추(六?)가 아주 없어진 멸진정(滅盡定)도 무심(無心)이 아니고 유심(有心)이며, 십지(十地)와 등각(等覺)도 유심이 다. “성품을 보기만 하면 곧바로 무심이다”라고 하는 무심은 모든 부처님의 여래승(如椰練)까지도 다 없어진 무여열반의 부처지위에서의 무심이니 구경각만이 견성인 까닭이다.
이는 불교에서 만세의 표준이 되는 「종경록(宗鏡錄)」 「기신론(起信論)」 「열반경(涅槃經)」「유가론(瑜伽論)」 등에서의 정론(正論)이다. 즉 견성은 망념이 없어지고 진여를 증득한 무심이요, 미세망념을 멀리 여읜 구경각이며,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대열반이니, 이로써 견성이란 여래의 지위 곧 부처를 이름을 말하는 것이 확연하고 명백하다.

오조가 육조에게 말하였다. 만약 자기 마음을 환히 알고 자기 심성을 밝게 보면 곧 하늘과 인간의 스승인 부처라고 이름하느니라.-「壇經」

이는 오조(五祖:弘忍大師)가 육조(六祖:慧能大師))를 인가하고 법을 전할 때의 말이다. 이처럼 구경인 부처과위(佛果)를 성취하지 못하면 견성이 아님은 종문의 철칙이다.

견성하면 곧 여래가 되느니라. -「宗鏡錄」四十四
부처성품을 밝게 보기 때문에 곧 대열반에 머무느니라.- 「宗鏡錄」三十六
경성이 곧 여래며 대열반이며 성불이니, 이는 견성이 불교의 최후 궁극적 과위임을 증언한 것이다.

만약 부처의 심성을 분명히 보면 곧 부처성품을 꿰뚫어본 것이며, 대열반에 머물러 있는 것이니 여래와 같느니라.-「宗鏡錄」十一

심성을 분명히 본다 함은 견성과 같은 내용이다.

부처의 성품을 밝게 보아 대열반에 머물면 곧 부사의 해탈경계에 항상 머무느니라.-「宗鏡錄」二十四

견성을 하면 모든 업의 속박에서 벗어나므로 불가사의한 해탈이 아닐 수 없다.

다만 법성을 밝게 보면 대열반에 머무느니라. - 「宗鏡錄」八十四
일체만법에서 참마음의 자성을 밝게 보면 곧 실 다운 구경의 깨달음이니 곧 완전히 부처를 이룸이니라.- 「宗鏡錄」 三十六

불법은 만법의 자성(自性)이므로 또한 법성(法性) 이라고도 하니, 법성을 봄은 곧 불성을 봄이다.

모든 부처의 경계는 광대무변하여 삼세육추(三細六種)의 알음알이(情蘭)로는 알지 못하고 오직 견성하여야만 완전히 알 수 있느니라.- 「宗鏡錄」十八

광대무변한 모든 부처님의 경계는 십지나 등각도 전혀 알지 못하며 확실히 크게 깨쳐서 본성을 환히 보아야 도달할 수 있으니 성불은 오직 견성에만 있다.

모든 법에 있어서 의혹이 없는 깊고 현묘한 곳에 직접 도달함은 자기 마음을 완전히 깨달아야만 비로소 밝게 알며, 온갖 경계에 모양 없는 오묘한 문을 완전히 비추어 봄은 본성을 밝게 보아야만 비로소 완전히 통달하니 이는 여래께서 행하는 것이며 대각세존이 아시는 것이다.- 「宗鏡錄」九十六

마음을 완전히 깨달음이 곧 견성이니 이것은 대각이신 여래께서 실천하는 것이며 깨달아 아는 것이다.
지금까지 「종경록」에서는 견성이 곧 구경이며 성불이며 대열반이며 부사의 해탈임을 더 현충 입증하였다.

서천(西天 : 인도)의 28대 조사 가운데는 한 사람도 견성하지 않고 조사가 된 분이 없느니라.
-「宗鏡錄」十九
여래의 열반묘심과 정법안장을 전해 받아야만 조사(祖師)라고 하는데, 어찌 견성을 하지 않고 조사가 될 수 있는가. 인도에서 28대를 이어온 조사뿐만 아니라 달마(達慶) 직계의 종사들도 모두 견성을 하여 도에 통달한 사람들이니 견성하지 않으면 달마를 바로 이은 본분종사의 후손이 아니다.

구경의 깊은 뜻을 깨치면 조사의 보배로운 지위에 오르니 그 누가 ‘돈(頓)’과 ‘점(漸)’의 문을 논의하며, 진여의 본성을 바로 보면 당장에 대각(大覺)에 있어서 원통(圓通)을 완전히 깨치니 어찌 앞과 뒤의 지위를 나타내겠는가.- 「宗鏡錄」- 標宗章
‘구경의 깊은 뜻을 깨침(得旨)’은 ‘진여인 불성을 바로 봄(見性)과 같은 내용이다. ‘당장에 대각에 있어서 완전히 깨침(現證圓通) ‘은 영명연수(永明延壽)선사가 밝혔듯이 “온갖 성(性)과 상(相)의 본뜻은 대각(大覺:佛地를 말함)에 있어서 원통 한다고 한 원통(圓通)이니 이것은 ‘대각이신 세존께서 증득하여 보이신 바이다.
견성하면 대각의 원통을 당장에 깨쳐 약과 병이 모두 없어지고 가르침과 수행을 함께 쉬므로 돈(願)이니 점(漸)이니 하는 각각의 방법(門)이나 삼현과 십성(十聖)의 지위구별은 전연 필요 없다. 만약 수행에 지위구별과 돈과 점이 필요하다면 이는 병이 있어 약이 필요한 것으로서 망념이 다 없어지고 진여(眞如)를 증득하여 병이 다 나아 약마저도 필요 없는 구경무심이 아니니 절대로 견성이라 할 수 없다.

만약 당장에 무심하기만 하면 그 한량이 허공 밖을 뛰어 벗어나는데 어찌 다시 사다리 같은 점차를 닦아 밟겠는가-「宗鏡錄」 二十三

자성하면 곧바로 무심하므로 수행상의 모든 지위와 점진적인 차례(漸 )를 뛰어넘는다.

모든 성인은 부분적인 깨침이요 모든 부처님은 원만하고 완전한 깨침이니라.-「宗鏡錄」
만약 근본무명을 끊어 없애면 일시에 완전히 깨치느니라.-「宗鏡錄」二十五
조사와 부처는 진여법계를 원만히 깨치느니라.- 「宗鏡錄」七十八
근기가 날카롭고 지혜가 으뜸가는 이는 모름지기 원만히 증득하는 것이니 삼현십성을 한 생각에 단박 뛰어넘는다.- 「宗鏡錄」

견성은 무명이 영원히 없어진 구경의 부처지위이므로 원만한 깨침(圓登)이며 완전한 깨침(廳登)이요 부분적 깨침(分登)이 아니다.
그러므로 종문에서 말하는 깨쳐 견성함(證悟)은 반드시 모든 성인의 부분적 깨침이 아니고 부처지위의 원만한 깨침을 내용으로 한다.

만약 깨달음의 모습을 설명하면 두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하나는 이해적 깨달음이니 성품의 이치와 법의 모양을 명백하게 완전히 아는 것이요 둘은 증득한 깨달음이니 깨친 마음이 깊고 현묘하여 궁극에 도달함을 말한다. 만약 돈오점수를 말한다면 이는 이해적 깨달음을 말함이니 심성을 활연히 완전히 알고 난 다음에 점점 닦아 배워서 계합하게 하는 것이다.

활연히 성품과 모양을 완전히 아니 곧 이해적 깨달음인 최초의 깨달음이 되고 수행하여서 현묘한 구경에 계합하여 실제로 깨침은 마지막에 들어감이라 한다.
깨달음의 문에 이해적 깨달음과 중득한 깨달음이 있다. 맨 처음 이해적 깨달음을 얻어 그것을 의지해서 수행하여 수행이 원만히 이룩되고 노력한 결과가 가득 차면 곧 증득한 깨달음을 얻는다.

심성을 꿰뚫어보아서 즉시에 무심하면 열반심(涅槃心)과 여래심(如來心)도 찾을 수 없으니 어찌 이해적 깨침과 증득한 깨침을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중생의 근생이 각각 달라서 가끔 잘못된 길로 들어가서 도적을 자식으로 잘못 아는 실례가 많으므로 방편상 해오와 증오를 빌려서 이해와 증득의 깊고 낮음과 잘못되고 바른 것을 말해 보고자 한다.
대체로 이해와 증득은 상반된 입장에 있으니 이해는 맨 처음이요 증득은 맨끝이다. 사랑하고 분별하는 허망된 의식 속에서 이치와 형상을 명백하게 완전히 아는 것, 즉 불법에 대해 아는 것(知見)을 이해적 깨침이라 하고, 아는 것이다 없어지고 구경의 오묘하고 지극한 곳에 도달함은 증득한 깨침이라고 한다. 이 중오는 교가에서는 여러 가지로 분류하지만 선문에서는 오직 원만한 깨달음뿐이다. 교가에서는 신(信) ·해(解) ·행(行) ·증(證)의 원칙에서 해오에서 시작하여 삼현(三玄)과 십성(十聖)의 여러 지위를 지나며 닦아서 맨 마지막인 중오 즉 묘각(妙覺)에 점점 들어 간다고 한다.
그러나 선문에서 말하는 깨달음인 견성은 ‘당장에 대각의 원통을 완전히 깨치는’ 구경각이므로 부분적인 증득함(分證) 가 해오를 부정하고 또 삼현과 심성을 초월하여 무여열반의 무심지인 증오에 곧 바로 들어감을 철칙으로 하니 이것이 선문에서 높이 외치는 ‘한 번 뛰어 곧바로 여래의 지위에 들어감’이다.
따라서 여러 성인의 부분적 깨침도 미세한 지식의 이해에 속하며 견성이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조금의 지해가 남아 있어도 증오하지 못하며 모든 지혜의 견해가 철저하게 다 없어져야만 견성하게 되므로 분증과 해오는 수도함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 즉 알음알이의 장애라 하여 절대로 배제한다. 이것이 선(禪)과 교(敎)의 서로 반대되는 입장이며 선문의 특정인 동시에 명맥이니, 옥석을 혼동하여 후학을 의혹에 빠뜨리면 부처와 조사의 지혜생명을 끊어버리는 중대한 과오를 범하게 된다.
부처와 조사가 정통으로 전하는 견성은 미세한 망상을 멀리 여의고 무명을 아주 끊어버린 진여무심이며 무여열반이며 구경각이며 여래지를 내용으로 하는 원만한 깨침이며 완전한 깨달음 증오임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그러므로 정맥을 이은 큰 조사 스님들은 묘각의 마지막 지위인 원만한 깨침이 아니면 견성을 했다거나 깨달음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분증과 해오는 잘못되고 나쁜 지혜며 망정의 식견이라 하여 적극 배척하는 것이다. 선문에 해독이 되고 폐단이 되는 분증과 해오를 견성이라고 주장하는 무리들이 종종 있으니 이런 잘못된 주장에 현혹되지 말고 단박에 대각의 원통을 완전히 깨쳐 확연히 견성하여 구경의 무심지에서 부처와 조사가 바로 전한 이것을 높여 많은 미혹한 것들을 인도해 주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원증(顧登)하여 견성한 바른 안목을 갖춘 종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