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보감(人天寶鑑)
한퇴지가 그 자신이 불교를 돕지 않고 배척한데는 그 만한 이유가 있다고 하였고, 그것이 구양수(願易修)에 이르러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불법이 우리 중국의 근심거리가 된 지 천여 년이 되었다. 그동안 불교에 현혹되지 않고 세상에서 우뚝하게 힘을 쓰는 사랍들은 모두 불교를 없애려 하였다. 그러나 이미 없어졌다 싶으면 또 모여들고 치면 잠시 깨졌다가 더욱 굳어지고 때리면 없어지기도 전에 더욱 치열해져서 마침내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다.”
이 두 사람은 모두 그들의 유도(橋道)를 키우기 위해 불교를 배척하고 파괴했으나 사실상 우리 불도를 드날려 준 셈이니 무슨 해가 되었겠는가.
서왕(舒王)이 불혜 법천(佛慧法果)선사에게 물었다.“선가에서 말하는 세존의 염화시중은 어느 경에 나오는 말씀입니까?”
“대장경에는 실려 있지 않습니다.”
그러자 왕이 말하였다.
“내가 얼마 전 한립원에 있을 때 우연히 대범왕문불결의경(大楚王問佛決疑經) 3권을 발견하여 읽어 보니, 그 경에 매우 상세하게 이 말이 실려 있었습니다. 범왕이 영산회상에 이르러 부처님께 금색 연꽃을 바치고 몸을 던저 좌석을 만들고는 중생을 위해 셜법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세존께서 자리에 오르시어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니 인간 천상의 백만 중생이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가섭존자만이 빙그레 웃었습니다.
그러자 세존께서 ‘나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파열반묘심(波熱樂妙心)이 있는데 이것을 마하가섭에게 나누어 맡기도다’ 하셨습니다.”
법천스님은 그의 해박한 연구에 탄복하였다.
진국부인(奏國夫人) 계씨(計民)는 법형이 법진 (法眞)이다. 과부가 되고부터는 화장도 안하고 채식을 하고 헌옷을 업고 지냈으나 유위법(有寫法)만 익혔지 선(輝)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경산 대혜선사가 겸(講)선사를 보내 안부를 물었는데, 그의 아들 위공(鐘公)과 준공(浚公)이 겸선사를 머물게 하고 조사의 도로 그의 어머니를 이끌어주게 하였다. 법진이 하루는 겸선선사에게 물었다.
“경산사 대혜스님은 평소에 어떻게 사람들올 가르치십니까?”
“스님께서는 오직 사람들에게 ‘개에게 불성이 없다’는 화두만을 들게 하십니다. 여기에는 말을 불여도 안되고 이리저리 헤아려도 안됩니다. 오직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 한데 대하여 조주스님이 ‘없다’라고 한 말씀만올 들라 하십니다.
오직 이렇게 학인을 가르칠 뿐입니다.”
법진은 마침내 크게 믿음이 가서 무(無)자 화두를 밤낮으로 참구하였다. 한번은 밤중까지 앉아 있다가 갑자기 깨닫고 게송 몇 수를 지어 대혜 스님에게 보냈는데 그 마지막 송은 다음과 같다.
종일토록 경문을 읽으니
예전에 알던 사람 만난 듯하네
자주 막히는 곳 있다고 말하지 마라
한 번 볼 때마다 한 번씩 새로워진다
終日看經文 如逢舊讓人
莫言頻有 一擧一回新
신광(神光)은 자주(磁州) 사람으로 마음이 넓고 뜻이 높은 사람이었다. 유학(橋學)을 하면서 많은 책을 널리 읽었고 현묘한 도리를 잘 논하였는데 한번은 이렇게 탄식하였다.
“공자와 노자의 가르침은 법도와 규범에 관한 것이며 불교의 경론도 묘한 도리를 다하지는 못했다. 요즘 듣자니 달마(達薦)대사가 소림사(少林寺)에 머물고 있다고 하는데, 도인이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거기 가서 현묘한 경계에 도달해야 되겠다.”
마침내 그곳으로 가서 새벽에서 밤까지 찾아뵈었으나 대사는 단정히 앉아서 담장만 마주보고 있을 뿐이었다. 스승의 가르침이라고는 한마디도 듣지 못하자 신광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였다.
“옛사람은 도를 구하기 위해 뼈를 두들겨 골수를 냈고 몸을 내던쳐 게송을 들었다. 옛사람도 이렇게까지 했는데 나는 또 어떤 사람인가?”
그해 12월 9일 밖에는 큰 눈이 내렸다. 신광은 뜰 가운데 서 있었는데, 새벽이 되자 눈이 무릎까지 쌓이니 달마대사가 가엽게 생각하여 품었다.
“그대는 눈 속에 서서 무슨 일을 구하느냐?”
신광은 슬픈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오직 자비로 감로문을 열어 널리 중생을 제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든 부처님의 위없는 묘한 도는 오랜 겁을 부지런히 구해야 한다. 하기 어려운 것올 해내야 하고 참기 어려운 것을 참아내야 하는데 그대는 어찌 작은 덕과 작은 지혜, 경망스런 마음과 오만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진실된 가르침을 엿보려 하느냐?”
이에 신광은 가만히 날카로운 칼을 꺼내서 스스로 자기 왼팔을 잘라 스승 앞에 갖다 놓으니 달마는 그의 근기를 알아보고 마침내 말하였다.
“모든 부처님도 처음 도를 구할 때는 법을 위해 자기 몸을 잊어버렸다. 너도 지금 내 앞에서 팔을 잘랐으니 그 구도심은 옳은 점〔可〕이 있다.”
그리하여 이름을 ‘혜가(響可)’라고 바꾸게 하였다.
신광이 물었다.
“모든 부처님의 법인(法印)에 관해 말씀해 주십시오”
“모든 부처님의 법안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다.”
“저의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스님께서 마음을 면하게 해주십시오”
“마음을 가져 오너라. 그러면 너에게 편안케 해주마.”
“마음을 찾아보아도 아무곳에도 없습니다.”
“벌써 너의 마음을 편안케 해주었다.”신광은 여기서 깨달았다.
영명 연수(永明延壽)선사악 조상은 단양(丹陽)사람이다. 그의 아버지가 전란에 휘말려서 오월(吳越)에 귀순하여 선봉이 되었다가 마침내 전당(錢塊)에 살게 되었다. 선사는 태어날 때부터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돌이 되었을 때 부모가 말다툼을 하여 사람들이 말려도 듣지 않자 선사가 높은 책상에서 바닥으로 몸올 던지니 양친이 놀라서 안고 울며 말다툼을 그만두었다.
커서는 유생이 되었는데 34세에 용책사(龍冊寺)로 가서 출가하고 구족계를 받았다. 그 후 고행하면서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하루 한 끼 먹으면서 아침에는 대중들에게 공양하고 저녁이면 선을 익혔다. 이어 태주(台州) 천주봉(天柱奉)에 가서 90일 동안 선정올 익혔는데 종달새가 옷에다가 둥지를 쳤다.
천태 덕소(天台德騷)국사를 봐오니, 국사는 한번에 그가 큰 그릇임을 알았다. 그리하여 가만히 깊은 종지를 전해주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는 원(元)선사와 인연이 있으니 뒷날 불사를 크게 일으킬 것이다.”
처음에는 명주(明州) 자성사(寶聖츄)에 주지하다가 건륭(題옳) 왼년(960)에 오월(吳越) 충의왕(忠廳王)의 청으로 영은신사(靈隱新寺)에 머무니 그 절의 첫번째 주지가 되었다. 다음해에 청을 받아 영명사(永明寺) 도령을 주지하니 대중이 2천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모두 두타행을 잘 닦아 승려 가 되려는 사람들이었는데 선사는 왕에게 아뢰어 도첩을 받게 하고 삭발하고 먹물옷을 입혀 주었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영명의 종지입니까?” “영명의 종지를 알고 싶은가. 서호(西湖)의 물이니, 해가 뜨면 빛이 나고 바람이 불면 물결이 인다.”
또 한 스님이 물었다.
“제가 오랫동안 영명도량에 있었으나 어찌하여 영명의 가풍을 알지 못합니까?”
“알지 못하는 곳을 알아라.”
“알지 못하는 곳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소의 뱃속에서 코끼리 새끼가 태어나고 푸른 바다에 티끌 먼지가 일어난다.”
개보(開寶) 7년(974)에 주지를 그만두고 화정봉 (華頂뿔)으로 돌아가면서 송을 지었다.
목마르면 물 반국자 떠 마시고
배고프면 솔잎 한 업 따 먹으며
가슴속에는 한가지 일도 없어
높이 백운봉에 누웠노라
우연히 「화엄경」을 읽다가 “만일 보살이 큰 원력을 내지 않으면 그것은 보살의 마장(魔事)이다”
한 대목에서 마침내 「대승비지원문을 지어 미혹한 뭇 중생들을 대신해서 날마다 한번씩 두루 발원하였다. 국청사(國淸寺)에서 참회법을 닦고 있을 때, 밤중에 절올 돌아보다가 보현 보살상 앞에 공양한 연꽃이 훌연히 자기 손에 있는 것을 보고 이때부터 일생동안 꽃을 뿌리는 공양을 하였다.
또 관음보살이 감로수를 업에 부어주는 감용을 받고 설법하는 재주야를 얻게 되어「종경록(宗鏡錄)」 100권을 저술하였다.
적음(寂音:慧洪遭範)이 이에 대해 말하였다.
“내가 이 책을 깊이 읽어보니 방동부 계통의 경전을 누비며 넘나든 것이 60종이었으며, 중국과 외국 성현의 말씀을 관통해서 논한 것이 3백가(家)였다. 천태종(天台宗)과 화엄종(華嚴宗)의 핵심을 알았고 유식(唯識)을 깊이 있게 논하였으며, 세 종파의 다른 이치를 대략 분석하여 하나의 근원으로 귀결시키려 하였다. 그러므로 의문이 마구 생기면 깊은 뭇을 낚고 먼 뜻을 길렀으며 어두운 점을 쪼개고 파혜철 때는 치우치고 삿된 견해를 쓸어버렸다.
그의 문장은 아름답고 자유분방하다. 그러므로 이 글은 자기 마음을 활짝 깨우쳐 성불하는 으뜸이며 달마가 서쪽에서 온, 전할 수 없는 바로 그 뜻을 분명히 알려준다.”
선사가 입적하고 나서도 총림에서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는데 희령(熙寧 :1068~1077) 연간에 원조(圓照)선사가 비로소 이 책을 들고 나와 널리 대중에게 알렸다.
“예전에 이 보살께서는 스승 없이 터득하는 지혜〔無師智〕와 져절로 터득하는 지혜〔自然智〕를 숨기고 오로지 보통지혜만을 써서 모든 종파의 강사들에게 서로 질분공세를 펴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심종(心宗)의 저울대를 가지고 그들의 이치를 고르게 달았으니 그 정묘한 극치는 가히 마음의 거울로 삼을 만하다.”
이로부터 납자들이 다투어 그 책을 전하고 읽게 되었다.
원우(元祐 :1086~1093) 연간에 보각조심(賣覺祖心)선사는 그때 이끼 나이가 많았으나 손에서 이책을 놓지 못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이 책올 블게야 보게 된 것이 한스럽다.
평소에 보지 못한 글과 노력으로는 미칠 수 없는 이치가 그 속에 다 모여 있다.”
그리고는 그 요점만을 골라서 세 권의 책으로 만들어 「명추희요」라고 이름지으니 세상에 널리 퍼졌다. 후세에 이 두 분 노스님이 없었다면 총림은 숭상할 바가 없었을 것이며. 오래된 학인은 날로 속스럽고 게을러져서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을 것이며 늦게 온 사람은 날로 숨이 막혀 공연히 근거없는 말만 할 뿐일 것이니 무엇으로 이 책을 알 것이며 그 뜻을 논하고 음미할 수 있겠는가.
설사 아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크게 마음에 두지 않고 그저 조사의 교외 별전이거니 불립문자 거나라고만 생각할 것이니 어찌 문자의 속까지를 찌를 수 있겠는가. 그들은 유독 이 점을 생각지 않는다. 달마 이전 마명(,勳뚫)과 용수(龍樹)도 역시 조사였으나 논올 쓸 때는 백가지 경의 이치를 아울렀고, 광범위하게 보려 할 때는 용란의 책까지도 빌려다 보았다. 달마 이후에도 판음-대적(觀音킷浪 :馬祖道一) ·백장회해(百文樓海) ·황벽 희훈(黃廳希運) 같은·분도 역시 조사였지만 그런데도 모두 3장(三藏)올 치밀하게 연구하고 모든 종파들 널리 공부하였다. 지금 그 분들의 써록이 모두 남아있어 가져다’볼 수 있는데 어찌따여 달마만을 이야기하는까
성인의 세상이 멀어질수록 중생의 근거가 날아져 뜻과 생각이 치우치고 짧다. 도를 배우는 일이 간단한 것이라고는 하나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앉아서 이루려 한다면 그것은 마치 농부까 밭갈고 김매는 일은 게을리하면서 침올 흘리며 밥먹는 것만 쳐다보는 것과 같으니 웃을 일이다.
영명선사는 늘 이렇게 발원하였다.“널리 발원하옵니다. 시방 모든 학인과 뒤에 오는 현인들이 도는·부자가 되고 몸은 가난하며, 정(情)은 성글고 지혜는 빈틈없게 되어지이다. 그리하여 불조의 마음·종지를 펼치고 인간천상의 안목을 활짝 열거하여 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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