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정로(禪門正路)
중생의 부처성품(聚生佛性)
일체중생이 진여본성인 부처성품을 다 가지고 있어서 불 ·법 ·승이 명동하여 추호도 중감이나 차별이 없느니라.
일체중생이 갖추고 있는 진여 본성은 모든 부처님의 과덕(果德)을 원만하게 갖추었으므로 이것을 불성(佛性), 법성(法性), 불심(佛心), 불지(佛智) 등으로 부른다.
이 불성은 절대적으로 평등하여 가장 높은 궁극의 과위(果位)를 성취하여 광대무변한 지혜의 덕을 완전하게 갖춘 모든 부처님이나, 극악 중죄인 오역죄나 십악(十惡) 내지 일천제인 중생까지도 원만하게 갖추고 있으므로 여래와 중생의 차별이 없다. 그러므로 선근이 끊기어 없어진 일천제라도 불성만 바로 보면 모두 성불하니 이것이 불교의 생명이며 다른 모든 종교가 따를 수 없는 가장 뛰어난 특색이다.
일체중생이 그 누구를 막론하고 평등하게 부처성품을 갖추고 있지만 항상 한량없는 번뇌망상이 덮고 있는 까닭에 부처성품을 보지 못하느니라.
중생이 번뇌망상에 가려져서 자기가 본래 가지고 있는 불성을 보지 못하나 불성은 항상 무한한 대광명을 발하여 시방법계를 비추고 있다. 이것은 태양이 중천에 높이 떠서 우주를 비추고 있으나 먹구름이 가려버리면 사람들이 보지 못함과 같다.
네 가지 걸림 없는 지혜 〔四無智〕가 곧 부처성품이니 부처성품은 곧 여래니라.
모든 부처님의 성불한 뒤의 지혜 (漂智)인 네 가지 걸림 없는 지혜가 곧 불성이므로 불성은 바로 여래이다.
부처성품은 불가사의한 것이니 이는 모든 부처님의 경계이니라.
한없고 끝없는 모든 오묘함을 갖추고 있는 불가사의한 이 불성은 위 없는 바른 깨달음을 성취한 모든 부처님의 깊고 현묘한 경계이다. 이 불가사의 하고 신묘하고 신령스런 불성이 번뇌망상에 가리어 중생들이 이를 보지 못함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12인연을 완전히 본 사람은 곧 일체만법을 바로 본 사람이요, 만법을 바로 본 사람은 곧 부처를 완전히 본 것이다. 부처란 곧 부처성품이다.
무엇 때문인가 하면 모든 부처님께서 이것으로 자성을 삼기 때문이니라.
법을 봄이 즉 부처를 봄이며 부처란 곧 부처성품이다. 법의 성품과 부처성품은 같은 것이나 이름만 다를 뿐이니 이를 진여(眞如), 여래장, 법계(法界), 정변지, 심지(心地) 등 여러가지 이름으로 부른다.
부처성품은 모든 부처님의 궁극적 과위인 열 가지 큰 힘(十力)과 네 가지 두려움 없음과 큰 자비 덩와 네 가지 생각하는 곳〔四念處〕이니라.
중도를 불성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불성은 상주하고 한결같아서 변동과 바뀜이 없느니라.
석가세존이 보리수 아래에서 위 없는 바른 깨달음(無上正覺)을 성취한 뒤에 녹야원으로 다섯 비구를 찾아가서 맨 처음 하신 말씀이 ‘나는 중도를 바르게 깨달았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석가세존께서 크게 깨달으신 내용을 열어보이신 중도대선언(中道大宣言)이다. 중도는 불성이므로 중도를 바로 깨달았다 함은 불성을 바로 본 것이니 견성하였다 함이다.
중도의 큰 법을 불성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불성은 항상함〔常〕과 즐거움(鷹)과 나(我)와 깨끗함〔種〕이니라.
항상함과 즐거움과 나와 깨끗함은 대열반의 네 가지 덕〔四德〕이니 불성은 곧 여래의 대열반 경계를 말한다.
불성은 으뜸되는 공이라 부르며 으뜸되는 공은 지혜라 부르느니라.
불성은 으뜸되는 공, 곧 여래의 위 없이 바르고 넓은 지혜이다.
12인연을 불성이라 부르니 불성은 곧 으뜸되는 공이요, 으뜸되는 공은 중도라 부르며, 중도는 곧 부처니 부처는 열반이라 하느니라.
으뜸되는 공(第一義空) ·중도·부처 ·열반 등은 모두 불성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시방삼세의 모든 여래께서도 불성을 철저히 보아서 도를 중득하고 성불하신 것이다.
자성이 무량무변한 일체의 공덕을 원만하게 갖추었느니라.
자성이 법신과 보신과 화신의 삼신(三身)을 갖추었고 깨치면 네 가지 지혜〔四智〕가 되니 보고 듣는 반연을 여의지 않고 초연히 부처지위에 오르는 도다.
자성 즉 불성은 불교의 궁극적 과위인 세 가지 몸〔三身〕과 네 가지 지혜〔四智〕를 갖추었고 모든 애쓰는 수행과 덕의 활용〔德用〕을 원만하게 갖추어 추호의 부족함도 없으니 참으로 불가사의 중의 불가사의다. 그러므로 자성을 완전히 보면 ‘한번 뛰어 여래의 경지에 곧바로 들어감’은 너무도 당연하다.
석가세존이 중생에게 이바지한 최대의 공헌은 불성의 발견이다. 만일 불성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과 그것을 계발하는 방법을 밝혀보여 주시지 않았다면 중생들은 영원히 중생으로서 고통바다를 벗어나는 해탈의 길은 영원히 닫혀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중생이 진여본성인 부처성품을 다 가지고 있다는 큰 진리에 의지하여 노력하고 수행하여 진리의 바다에서 걸림 없이 자유로운 큰 해탈의 길을 생취하여야 할 것이다.
두가지 번뇌망상
근본무명(根本離明)이 진여본성을 움직여 세가지 미세한 망상〔三細〕을 이루니, 아뢰야라 하느니라. 그리고 여러가지 경계를 반연하여 허망한 마음인 업의 바다를 움직여 여섯 가지 거칠고 무거운 번뇌를 다시 일으키니, 이를 의식이라 하느니라.
번뇌망상에는 분별이 없는 세 가지 미세한 것과 분별이 있는 여섯 가지 거친 것〔六圍이 있어서 8만4천의 한없는 번뇌를 파생한다. 3세(三細)는 근본무명(根本無明)으로서 아뢰야 또는 아타내 또는 제8식 등으로 부르며, 육추는 의식 또는 제6식(第6識)이라고 한다. 그리고 제7말에 대하여 현수(賢首)는 “안으로는 아(我)가 되어 앞의 삼세에 속하고 밖으로는 아소가 되어 뒤의 6추에 속하므로 말하지 않는다 라 하였다.
여러 조사의 논·소에서 3세를 제8식인 아뢰야라 함은 일치하지만 6추에 대해서는 6식만이라 하거나 혹은 7식까지를 포함한다 하여 설명이 꼭 같지 않다. 그러나 현수(賢首)는 물론이고 갑산덕청(愁山德淸)도 “7식이란 곧 거짓된 것”이니 그러므로 「능가경」에서 “7식은 흐르며 구르지 않으므로 생사의 원인이 아니다”라 하였다.
그러므로 제7말나를 따로 논하지 않아도 수도를 하는데 있어서는 관계가 없으므로 여기에서는 현수의 주장을 취하였다.
삼세 육추는 일체의 생멸하는 더럽혀진 법을 모두 포함이니 이는 모두 진여본성을 위배하기 때문에 생긴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라. 삼세 육추의 근본인 무명이 능히 모든 생멸하는 법을 파생한다고 하느니라.
3세는(三細)는 근본무명(根本無明)이요 6추(六識)는 지말무명(技末熹明)이다. 7지 이하의 모든 중생은 6추의 망상 속에 있고 해 이상의 자재보살은 3세의 망상 가운데 있다. 이 근본과 지말의 두 가지 무명 즉 번뇌망상이 진여불성을 가리고 있으므로 본생을 바로 보려면 이 두가지를 제거해야만 한다. 만약에 6추만 제거하고 핸가 남아 있으면 이것은 자재보살의 경지로서 종문에서는 제8마계라 하고 구경각인 견성(見性)이 아니다.
견성(見性)은 재8아뢰야식인 땅W를 영원히 끊은 무여열반이어야 하니, 무여열반은 즉 무심(無心)이다. 그리하여 자재위 이상의 대보살들도 미세무명을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제8아뢰야식에 머물러 있으므로 견생(見性)이 못된다. 제8의 극히 미세한 망상까지 모두 없애야만, 여래의 정법안장을 받아 가진다. 만약에 객진번뇌가 전과 다름이 없어서 6추도 버리지 못한 해오를 견성(見性)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정법을 파멸하는 것이며 용서할 수 없는 큰 파오이며, 부처님과 조사혜 대한 반역이다.
6도(六度)에서 생사에 윤회할 때 저들 유정 중생이 생멸하는 유정 가운데 떨어져 있느니라. 그중 최초에 일체 생멸하는 종자인 섬식이 펼치고 화합하여 더욱 자라고 커지니 이 근본식을 아타나 또는 아뢰야(阿賴耶) 또는 마음이라 부르니라. 이 아타나식이 근거가 되어서 세우기 때문에 여섯 가지 식의 몸〔六轉識身〕이 굴러 움직이니, 이를 눈 ·귀 ·코 ·혀 ·몸 뜻이라고 하느니라.
해심밀경(解探密寶)은 우「식(唯諸)을 바탕으로 하는 법상종에서 근본으로 하는 경전이다. 최초의 종자식 즉 아타나는 쩌를 말한 것이고, 여섯 가지 구르는 식의 몸은 곧 6추다. 즉 해섬밀경에서는 근본식에서 6식신이 변한다고 했지 제7식을 말하지 않았다.
번뇌망상인 여러 식심에 두 가지 남이 있으니, 유주생(流注生)과 상생이니라.
유주생(流注生)은 제8아뢰야 가운데의 3세(三細)를 말하고, 상생은 6추를 말한다.
아타나식이 매우 깊고 세밀하여 모든 생멸의 종자가 폭포같이 흐르니라. 내가 우매한 범부에게 이 아타나식올 열어 설명하지 않는 것은 저들이 분별하여 참나라고 잘못 집착할까 염려해서 이니라.
무공용행과 무분별지를 갖춘 8지의 자재보살이 구경각올 성취하지 못함은 아타나에 머물러 집착하기 때문이니 항상 부처님의 야단을 면하지 못한다.
* 4념처
몸(身)은 부정(不淨)하다고 관하며, 감각(受)은 괴로움이라고 판하고, 마음(心)은 항상하지 않는 다고 판하고, 법(法)은 본질이 없다라고 관하여 정락상아에 대한 뒤바뀐 견해를 없애는 것을 말함.
* 4무소외, 십력(十力)
4가지 두려움 없는 것과 107가지 험이란 부처님께서 정각[正覺]을 성취함으로써 얻게 되는 비범한 능력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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