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성철스님] 선문정로 / 바른 종지, 무념(無念正宗)

通達無我法者 2008. 2. 1. 14:07

선문정로(禪門正路)

바른 종지, 무념(無念正宗)

이 법을 완전히 깨친 이는 생각이 없다(無念). 기억과 집착이 없어서 망념이 일어나지 않고, 자기의 진여본성을 사용하여 지혜로 관조하므로 일체 법을 취하지도 버리지도 않으니, 이것이 자성을 봄이며 불도를 이룸이다. 「壇經」
망념을 없애고 진여를 깨친 구경의 무심을 무념無念이라고도 한다. 이 무념이 즉 무생無生이며 돈오頓悟이며 견성見性이며 성불成佛이다.
무념법을 철저히 깨친 이는 만법에 모두 통달하며, 무념법을 깨친 이는 모든 부처님의 경계를 환히 보며, 무념법을 깨친 이는 부처지위에 이른다. 「壇經」
돈오, 무념, 견성은 모두가 궁극적인 부처님의 경계이다.

그러므로 무념법을 완전히 깨친 이는 만법에 통달하며 모든 부처님의 경계를 본다고 하였으니, 만약 무념법문에 들어가기만 하면 찰나간에 성불함을 알겠다. 「宗鏡錄十五」
금강유정, 즉 등각等覺 이하의 일체중생은 모두 생각이 있으므로(有念) 중생이라 하고, 모든 부처님은 전부 생각 없음(無念)을 깨쳤으므로 부처라고 부른다.「宗鏡錄十四」
금강유정金剛喩定을 닦으며, 금강무간도金剛無間道에 있는 등각等覺도 아직 극히 미세한 망념은 끊어버리지 못한 까닭에 중생이라 하며, 등각이 금강심金剛心으로써 가장 미세한 망념인 제8아뢰야를 모두 끊고 묘각妙覺에 단박 들어감을 자성을 본다, 또는 부처가 되었다고 하니, 이것이 돈오이다. 그러므로 중생과 부처의 차이는 망념이 있는가 망념이 없는가에 있다.
육조六祖가 설한 "생각 없는 바른 깨침(無念正悟)"은 구경의 부처지위로서, 원만히 깨치고(圓證) 단박에 깨치는(頓證) 깨침(證悟)이며 견성의 표준이다.

나는 오조五祖 홍인弘忍화상의 처소에서 한 번 듣고 말끝에 문득 깨쳐서 진여의 본성을 단박에 보았다. 그러므로 단박 깨쳐 본성을 보는 이 법을 세상에 널리 펴서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보리를 단박 깨쳐 본래 성품을 스스로 보게 하느니라. 「壇經」
여기서 돈오와 견성은 무념을 내용으로 하는 구경의 부처지위이다.

오직 자성 보는 법만을 전하여, 세상에 나가서 삿된 주장을 부순다.「壇經」
부처와 조사의 바른 가르침은 자성을 보는 데 있고, 이 견성은 부처지위인 증오證悟를 말한다. 그러므로 불조의 혜명을 이어받은 정안종사는 돈오견성법을 정통으로 전하고 그밖의 것은 모두 그릇된 주장이라고 하여 쳐부순다. 이는 나와 남을 갈라놓고 남의 종지를 비방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바른 법을 수호하기 위한 자비의 발현이다.
고금의 불조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 돈오견성법은 불교의 생명이요 정법의 골수이다. 그밖에 각각의 종지들은 형편에 따른 일시적인 방편설에 불과하므로 정법의 근본 입장에서 논할 때에는 그릇된 종지(邪宗)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방편설(假說)을 실법實法으로 잘못 알고 집착하여 버리지 않으면, 중생들이 이 방편설에 얽매여 정법에는 영영 돌아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통렬히 부수고 배격하여 근본의 바른 법을 드러내는 것이다.

만약 자기 본성의 진정한 반야인 관조觀照가 눈앞에 일어나면 찰나에 망념이 싹 없어진다. 그리하여 자기 본성을 알면 한 번 깨쳐 그대로 부처지위에 도달한다.「壇經」
망념이 모두 없어지면 자기 본성을 밝게 보고, 자성을 밝게 보면 이것이 바른 깨침이며 무념이니 지위와 계급을 거치지 않고 구경각인 부처지위에 단박에 들어간다. 이것이 한 번 뛰어 곧바로 여래지로 들어가는(一超直入如來地) 묘한 비결이어서 다른 종파들이 뒤따를 수 없는 선문의 특징이다.

나의 이 법문은 무념無念으로 종취를 삼고, 모양 없음(無想)으로 바탕을 삼고, 머뭄 없음(無住)으로 근본을 삼는다. 「壇經」
견성법문인 무념의 정통종지는 고금의 불조가 등불을 이어온 가장 높은 혜명이다.

없음(無)은 무엇이 없음이며 생각함(念)은 무엇을 생각함인가? 없다 함은 서로 대립하는 두 모양과 번뇌망심이 없는 것이요, 생각한다 함은 진여본성을 생각함이니, 진여는 생각의 근본바탕(體)이요, 생각은 진여의 큰 활용(用)이다. 「壇經」
망심이 완전히 없어지면 진여본성이 나타나니, 진여를 바로 생각함이 곧 무념이다.

만약 진여인 본심, 즉 자성을 알면 그것이 근본해탈이요, 해탈을 체득하면 그것이 반야삼매며 무념이다. 「壇經」
자재해탈自在解脫, 반야삼매般若三昧, 무생무념無生無念, 마음을 알아 본성을 봄(識心見性), 원만히 깨침과 단박에 깨침(圓證頓證),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됨(成佛作祖) 등은 똑같은 내용이니, 구경 무심의 다른 이름이다.

"어떤 것을 단박 깨침(頓悟)이라고 합니까?"
"단박(頓)이라 함은 일체 망념을 끊어 없애는 것이요, 깨침(悟)이라 함은 깨침에 얻을 것이 없음이다.".「頓悟要門」
위에서 말한 돈오는 망념을 없애고 진여를 깨친 구경의 무심이니, 부처지위의 무념이며 견성見性이다.

"이 돈오법문은 무엇을 표방하며 무엇을 내용으로 하는가? 또한 무엇을 바탕으로 삼고 무엇으로 활용을 삼는가?"
"무념을 표방하고 망념이 일어나지 않음으로 내용을 삼는다. 청정함으로 바탕을 삼고 지혜로 활용을 삼는다." 「頓悟要門」
망념을 단박 없애고 무념을 깨쳐 얻으면, 청정하고 때가 없는 반야의 큰 지혜만이 밝게 비추니, 이것이 선문에서 정통으로 전한 근본종지이다.

무념이라 함은 모든 것에 무심함이니, 모든 경계가 없으며 생각과 구함이 없는 것이다. 모든 경계와 물건은 대하여도 일었다 꺼지는 움직임이 영영 없는 것이 무념이니, 무념이란 곧 진여의 바른 생각이다. 만약 일체처에 무심한 무념을 떠나서 보리해탈과 열반적멸과 선정견성을 체득하려면 될 수 없다.「頓悟要門」
일체처에 무심인 무념은 구경의 부처지위이니 이것이 곧 해탈열반이며 돈오견성이다.

단박에 깨친 이는 망념을 단박 없애고 인아견人我見을 영원히 끊어서 필경에 공적하므로, 부처님과 나란하여 조금의 차이도 없다.「頓悟要門」
일체 망념이 영원히 없어진 대공적삼매大空寂三昧를 돈오라 하니, 이는 구경의 부처지위이다.

망념이 생기지 않음이 선禪이요, 똑바로 앉아 본성을 밝게 보는 것이 정定이다. 본성이란 너희의 남이 없는 마음이며, 정定이란 바깥 경계를 대하여도 무심하여 여덟 가지 바람(八風)*이 움직이게 하지 못함이다. 만약 이와 같은 정을 체득하면 비록 범부일지라도 곧바로 부처지위에 들어간다.
망념이 모두 없어지고 무생의 본성을 완전히 보아서 무심을 체득하였으니, 부처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무심할 수만 있으면 그대로가 구경인 성불이다.「傳心法要」
돈오와 견성의 내용인 무심과 무념이 구경각究竟覺이라고 함은, 고금의 불조가 한결같이 하신 말씀이다.

만약 마음이 어느 곳에도 머물지 않음을 분명히 알면, 그것을 본심을 분명히 보았다, 또는 본성을 분명히 보았다고 한다. 어느 곳에도 머물지 않는 이 마음을 불심, 해탈심, 보리심, 무생심이라고 하며 경에서는 이것을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쳤다고 하였다. 「傳心法要」
식심견성해서 마음이 어느 곳에도 머물지 않으면 무생무념을 체득한 것이다. 이는 일을 해 마친 대장부로서 자재하고 걸림없는 큰 해탈문을 얻은 무심도인이 아닐 수 없다.
영산의 정통 맥이며 조계로부터 직접 전해진 견성법은 그 내용이 근본무명인 제8아뢰야의 미세망상이 영원히 없어진 무심·무생·무념 등의 구경 부처지위에 있음이 명확하다. 이는 망상을 없애고 진여를 증득하여 병도 낫고 약도 없애며, 교와 관을 다 쉬어 버리고 원통을 깨치는, 원증돈증의 증오로서 부처와 조사가 바로 전한 견성이며 돈오이다.
만일 제8아뢰야의 미세망상은 고사하고 끝없이 생멸하는 6식·7식의 거칠고 무거운 망상도 벗어나지 못한 해오解悟를 견성이라 한다면, 이는 부처와 조사의 혜명을 단절하고 중생의 바른 길을 파괴하는 정법의 대역죄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단의 잘못된 견해에 잘못 떨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여덟 가지 바람(八風) :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여덟 가지 심리적 환경, 곧 마음에 드는 일, 안 드는 일, 훼방, 명예, 비난, 칭찬, 고뇌, 쾌락을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