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정로(禪門正路)
점점 공부해서 오매일여에 도달했을 때, 마음속에 화두를 놓쳐서는 안 된다. 망정이 잊혀지고 마음이 끊긴 깊은 경계까지 참구해 도달하면 금 까마귀(해)가 한밤중에 하늘을 뚫고 높이 날 것이다. 그때 기쁘다거나 슬프다거나 하는 생각을 내지 말고 반드시 눈바른 본색 종장을 찾아가서 의심을 영원히 결단하라. 「太古集」
여기서의 오매일여는 여래의 진여일여를 제외한 것이다. 오매일여가 된 뒤에 확철히 깨달아 남음이 없으면 자성을 훤히 본다. 그러나 근기에 따라 확철히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니, 반드시 눈 바른 종사를 찾아가 인가를 받아야 참으로 의심을 놓을 수 있다.
태고스님은 이십 년 간의 피나는 참구 끝에, 삼십칠세에 오매일여가 되고 삼십팔세에 대오하였다.중국의 석옥石屋선사를 찾아가 인가를 받고 임제의 전통 맥을 이어 받았다.
공부가 이미 동정動靜에 틈이 없고 오매寤寐에 일여한 곳에 도달하여, 부딪혀도 부숴지지 않고 흩어져도 잃어지지 않으면 마치 개가 끓는 기름솥을 보듯 하여 핥을래랴 핥을 수도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도 없다. 이럴 때 어찌해야 합당하겠느냐? 「懶翁錄」
이 대목은 나옹이 수도의 지침사로 지은 공부십절목工夫十節目 가운데서 여섯 번째이다. 참선해서 도를 깨치는 데에는 오매일여를 통과함이 필수 조건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통과하지 못하면 견성이 아니며 오도가 아니다.
십지 등각을 넘어선 구경무심을 철저히 증득하여 진정한 오매일여에서 영겁토록 어둡지 않아야 견성이며, 이 대무심지를 보임保任하는 것이 깨달은 뒤의 행임은 불조정전의 철칙이다. 그러면 구경무심을 실제로 증득한 종사가 얼마나 될는지 의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몽중일여가 되면, 벌써 화엄칠지며, 숙면일여가 되면 팔지 이상이다. 선문의 정안종사 치고 이 오매일여의 관문을 뚫지 않고 견성했다고 한 자는 없으며, 팔지 이상인 숙면일여 이상에서 깨달았으니 구경각이 아닐 수 없다. 객진번뇌가 전과 다름이 없고 거치른 망식도 멋어나지 못한 해오解悟는 견성도 아니고, 돈오도 아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9. 죽음 가운데서 살아남(死中得活)
지금 수도하는 사람은 대부분 몸과 마음이 고요하고, 앞 뒤 경계가 끊어지며 쉬고 또 쉬어 한 생각이 만 년 됨을 곧 구경으로 삼는다. 그러나 도리어 이 자기 마음이 가리워져서 자기의 바른 지견이 나타나지 못하며 신통한 광명이 드러나지 못함을 모른다.「眞淨文 古尊宿語錄 四十四」
몸과 마음이 고요하여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앞 뒤 경계가 끊어진 뛰어나고 오묘한 경계(勝妙境界)도 깨달음이 아니다. 하물며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여 한 생각도 일지 않음이 되지 못한 사람은 말할 것도 없다.
"쉬고 또 쉬어 한 생각이 만 년이며 앞 뒤 경계가 끊어진다" 하니, 제방 총림에 몇 사람이나 이 깊고 깊은 경지에 도달하였겠는가. 진정眞淨은 이것을 승묘경계라고 불렀으니 옛날 보봉寶峯*의 광도자廣島者가 바로 이런 사람이다. 자기 한 몸을 전혀 잊어버려 세간일이 있는 줄도 모르고 따라서 세간번뇌가 그를 어둡게 하지 못한다. 그렇긴 하나 도리어 승묘경계에 떨어져서 도道의 안목이 가려진다. 참으로 한 생각도 나지않고 앞 뒤 경계가 끊어진 승묘경계에 도달하여서는 바로 큰스님을 찾아 뵙고 물어야 함을 알아야 한다.「五祖演/大慧錄 十七」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앞뒤 경계가 끊어진 것을 규봉圭峯은 돈오돈수라 찬탄해 마지 않았다. 그러나 바른 전통의 큰스님들은 이를 승묘경계라 하여 배제하였으니, 그 깊고 얕음과 우열을 알 수 있다. 실제로는 얻기 어려운 승묘경계도 바른 안목을 가리는 큰 병이므로, 바른 안목을 가진 스승을 찾아 뵙고 물어야 한다. 몸과 마음이 고요한 이 죽음의 경지에서 크게 살아나지 않으면 바른 깨달음이 아니다.
달마가 말했다. "바깥으로는 온갖 반연을 쉬고 안으로 마음의 헐떡임이 없어서, 마음이 담장과 같아야만 큰 도에 바로 들어갈 수 있다."
한 생각도 나지 않고 앞 뒤 경계가 끊어져서 번뇌가 순식간에 쉬고 혼침과 산란을 끊어 없애어 종일토록 전혀 분별이 없어 진흙으로 만들거나 나무로 깎은 것과 흡사하니 그러므로 담장과 다름이 없다고 하였다. 이런 경계가 나타나면 바른 깨달음의 고향에 도달하는 소식이 결정코 멀지 않다.「高峰妙」
밖의 경계와 안의 마음을 고요히 쉬어 버려 담벽이나 목석과 같은 무심한 경지가 되어야만 큰 도에 깨달아 들어간다.
만약 한 생각도 나지 않으면 곧 앞뒤 경계가 끊어져서 비추는 바탕이 홀로 서며 대상과 내가 하나로서 바로 마음의 근원에 도달하니, 앎도 얻음도 없고 취하지도 버리지도 않으며 대치對治할 것도 닦을 것도 없다.「澄觀/必要 傳燈錄 三十」
모든 생각이 다 고요해지면 진여인 자기 본성을 완전히 깨치게 되니, 곧 견성이요 돈오며 성불이다.
나는 원오 노스님께서 '훈풍이 남쪽에서 불어온다'** 는 것을 들려 주시자 갑자기 앞뒤 경계가 끊어졌다. 마치 한 웅큼 얽힌 실을 날카로운 칼로 단번에 끊은 것과 같아서, 비록 바뀌는 움직임(動相)은 생기지 않으나 도리어 적나라한 자리에 앉게 되었다.
노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애석하다. 죽어버리고는 다시 살아나지 못하구나. 언구를 의심하지 않음이 큰 병이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만 그대를 속이지 못한다"고 하셨다.
매일 법을 물으러 가면(入室) 다만 유구有句와 무구無句가 마치 등넝쿨이 나무를 의지함과 같다는 것을 들려 주시고는 내가 대답하려고 입을 열기만 하면 곧 아니라고 하였다. 나는 비유로써 말하였다. "이 도리는 마치 개가 끓는 기름가마를 보는 것과 같아서 핥으려 하나 핥을 수 없고 버리려 하나 버릴 수도 없습니다."
하루는 "나무가 넘어지고 등넝쿨이 마를 때는 어떠합니까?" 하니 노스님이 "함께 하느니라" 하셨다. 나는 이 말에 환하게 이치를 깨달았다. 그리하여 "제가 이치를 알았습니다"고 말하자, 노스님께서 "다만 네가 공안을 뚫지 못했을까 두렵다"고 하시고는 드디어 어렵고 까다로운 공안을 계속 들려 주셨다. 내가 두세 번 대응(轉)하여 끊어버림이 마치 태평무사한 때에 큰 길을 가는 것같이 다시 막히거나 걸림이 없었으므로 "비로소 '내가 그대를 속이지 못한다'고 한 말을 알 것이다"고 하셨다. 「大慧錄 十七」
오매일여에 몽중일여와 숙면일여의 얕고 깊음이 있는 것처럼 승묘경계인 한 생각도 나지 않고 앞뒤 경계가 끊어진 지위도 7지에서의 무상정無想定과 8지에서의 멸진정滅盡定은 차별이 있다. 대혜는 몽중일여인 7지의 크게 죽은 경계에서 구경지까지 뚫어 지났으니, 과연 뛰어난 근기이다. 이것은 8지인 멸진정에서의 크게 죽은 경계는 아니지만, 여기에서도 깊이 깨치면 정각을 성취한다. 이와 같이 앞뒤 경계가 끊어진 승묘경계를 선문에서는 '죽어버리고는 살아나지 못한 것(死不了活)'이라 하여 극력 배제한다. 여기에서 철저히 깨쳐 활연히 크게 살아나야만 바른 안목을 갖추었다고 인가하는 것이다.
오직 생명선은 '언구를 의심하지 않음이 큰 병'이어서 크게 죽었다가 크게 살아나기 이전에는 부처와 조사의 공안公案이 깊고 묘한 뜻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7지 대보살 지위의 대혜에게도 언구言句를 힘써 참구시켰으며 "함께 하느니라" 함에서 분명히 깨쳤어도, "네가 공안을 뚫지 못했을까 두렵다"고 하였으니, 그밖의 경우는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 설사 8지 이상에서도 공안의 귀결처는 아득하여 알지 못하며, 구경정각을 성취하여야 완전히 아는 것이다.'언구를 의심하지 않음이 큰병'이니, 참학하는 납자는 만세의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
반달 남짓하여 생각의 움직임(動相)이 생기지 않았으나, 이 가운데 앉아 버리면 옳지 못하니, 견해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하는 것으로 바른 지견을 장애하는 것이다. 깊이 잠들 때마다 꿈도 없고 생각과 보고 듣는 것도 없을 때에는 끊어져서 두 동강이가 되니 경전이나 어록에서도 이 병을 낫게 하는 것이 없었다. 가슴속에 응어리져 있은 지 십 년이더니 하루는 마른 잣나무를 보고는 눈에 띄는 순간 크게 깨달으니, 이전에 얻었던 경계는 산산히 흩어져 버리고, 마치 어두운 방에서 밝은 햇빛으로 나온 것과 같았다. 비로소 경산徑山 노스님(無準)의 선자리를 알게 되었으니 서른 방을 때려주어야 좋을 것이다.「雪岩錄」
깊은 잠을 잘 때에는 정신을 잃어버려 경계가 한결같지 못하니, 이는 전체가 병이다. 이 큰 병을 바른 깨달음으로 착각하여 인정하면, 밝은 대낮같이 환한 깨침은 미래겁이 다하여도 있을 수 없다.
주* 보봉 寶峯/진정문 선사의 제자인데, 총림에서는 광무심廣無心이라고 하였다.
주** 원오스님이 상당하여 법문하시되, 운문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묻기를 "어떤 곳이 모든 부처님이 나오신 곳입니까?" 하니, 운문스님이 "동복산은 물위로 간다"고 대답한 법문을 들려주고는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겠다. 나에게 누군가가 '어떤 곳이 모든 부처님의 몸이 나온 곳입니까?' 하고 물으면, '훈풍이 스스로 남쪽에서 오니 전각에 서늘한 기운이 나는구나' 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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