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정로(禪門正路)
조주趙州가 투자投子에게 물었다. "크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때는 어떠한가?" 투자가 대답하였다. "어두운 밤에는 가지말고, 날이 밝아야만 합니다."
굉지宏智가 소참에 이 법문을 들려주고 나서 말하였다. "만일에 이 경계를 안다면 '밝음 가운데 어둠이 있으니 어둠으로 서로 만나지 말고, 어둠 가운데 밝음이 있으니 밝음으로 서로 만나지 말라'*1고 함을 곧 알 것이다. 모든 법이 다 없어진 때에는 분명하게 항상 있고, 모든 법이 일어난 때에는 텅 비어 항상 고요하니, 참으로 '죽음 가운데 삶이 있고, 삶 가운데 죽음이 있다' 함을 알 것이다.「宏智錄 五」
크게 죽었다가(大死) 크게 살아나면(大活) 아뢰야 무기無記까지 다 없어져 참으로 크게 죽은 경지가 나타나니, 항상 죽고 항상 살며, 항상 살고 항상 죽으며, 밝음과 어둠이 함께 고요하고(明暗雙寂), 밝음과 어둠이 함께 비추니(明暗雙照), 이것이 바로 불조의 바른 안목이다.
숨이 완전히 끊어 없어진 때와 자취가 끊어 없어진 곳에서, 참으로 바른 안목을 갖추어야 한다. 그때에는 분명하여 혼침하지 않고 신령스러워 서로 마주함이 끊어져서, 곧 능히 온 천하를 막힘없이 걸으며 두루 베풀고 널리 상응하리라.「宏智錄 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만" 현묘한 기틀의 큰 활용이 눈앞에 나타나서, 죽이고 살리는 것을 자재로이 하고 종횡으로 걸림이 없다.
마음자리가 안온하여 꽉 찬 곳과, 사량분별이 냉담하여 싸늘한 때에 문득 한없이 세월이 비어 버림을 보니, 털끝만큼도 반연에 얽힘이 없고 실날만큼도 가리워 장애됨이 없다. 공허함이 지극하여 빛이 나고 청정함이 원융하여 밝게 비추니, 만고에 뻗쳐 어둡지 않은 한 가지 사실이 있다.「宏智錄 六」
만고에 뻗쳐 어둡지 않으며 미래겁이 다하도록 한결같이 변하지 않는 크고 고요한 광명(大寂光)은 오직 크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만(大死卽活) 나오는 것이다. 아뢰야의 무기無記까지 영원히 없어진 참으로 크게 죽은 경지인 대적광大寂光 중에서 나오는 대광명은 천겁을 지나도 옛것이 아니고 만세에 뻗치도록 언제나 지금이다.
추중망상이 다 없어져 한 생각도 나지 않고, 앞뒤 경계가 끊어져 크게 죽은 깊은 곳도 제8 마계魔界이어서 도를 깨침이 아니고 견성이 아니다. 다 없어진 죽음의 경지에서 문득 크게 살아나서 항상 죽고 항상 살며(常死常活), 항상 고요하고 항상 비추며(常寂常照), 고요함과 비춤이 동시이면서도 고요함과 비춤이 성립됨이 없이(寂照不立) 밝음과 어둠이 서로 통하는(明暗雙雙) 구경무심을 완전히 깨쳐야 비로소 참구함을 마친 눈 푸른 납자이다.
다만 이 크게 죽었다가 살아나는 깊은 곳은 옛 부처님도 도달하지 못하였으며, 천하의 큰 스님들 또한 도달하지 못하였으니, 아무리 석가釋迦와 달마達磨라 해도 반드시 다시 참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달마가 분명히 알았다고는 하겠으나 깨달았다고는 인정할 수 없다"말하노라.「圓悟 碧岩錄」
너희가 말후구 末後句를 알려 하는가? 그러나 달마가 분명히 알았다고는 하겠으나 깨달았다고는 인정할 수 없다.「碧岩錄」
말후구를 그대를 위해서 말하니, 밝음과 어둠이 서로 짝하는 시절이다.「碧岩錄」
초경招慶이 나산羅山에게 물었다. "암두岩頭가 말하기를 '이렇고 이러하며 이렇지 않고 이러하지 않다'고 하였는데, 그 뜻이 무엇입니까?" 나산이 말하기를 "쌍으로 맑으면서 또한 쌍으로 어두운 것이다" 하였다. 초경이 물었다. "무엇이 쌍으로 맑으면서 쌍으로 어두움인가?" 나산이 말하였다. "함께 나서 또한 함께 죽음이다."「碧岩錄」
쌍으로 비추고 쌍으로 막으며, 함께 나고 함께 죽으며, 전체로 밝고 전체로 어두우며, 전체로 죽이고 전체로 살린다.
「圓悟錄 七」
크게 죽었다 크게 살아남(死活), 항상 고요하고 항상 비춤(寂照), 밝고 어두움이 서로 짝함(明暗), 함께 나고 함께 죽음(生死), 전체로 밝고 전체로 어두움(明暗), 전체로 죽이고 전체로 살리는 것(殺活), 이들은 말후구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는 옛 부처님들도 도달하지 못했던 최후의 깊고 깊은 곳이니, 오직 실제로 참구하여 실제로 깨침에 있을 뿐이다.
10. 크고 둥근 거울같은 지혜(大圓鏡智)
위산僞山이 앙산仰山에게 말했다. "나는 대원경지大圓鏡智로 으뜸 법문을 삼아 세 가지 생生을 벗어난다. 그 세 가지 생이란 상생想生, 상생相生, 유주생流住生이다." 여기서 상생想生이란 생각하는 '마음'이 어지러움을 말하고 , 상생相生이란 생각할 '경계'가 뚜렷이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미세 유주微細流注는 두 가지 모두에 공통되는 염법이다.*2 「人天眼目」
제8 아뢰야식인 미세 유주를 다 없애 진여인 자성을 훤히 보면 구경무심인 대원경지가 그대로 드러나니, 이것이 바로 크게 죽었다 다시 살아난 본래의 면목이다. 이 대원경지는 여래의 과지果智로서, 선禪과 교敎의 공통되는 구경처이다. 이 대원경지를 성취해야 견성을 하니, 위산뿐만 아니라 불조 정전은 모두 이 경지鏡智로 종문의 근본을 삼았다. 제8 아뢰야의 미세 유주를 벗어나지 않으면 원통圓通을 깨친 바른 안목은 지니지 못한다. 이것으로서도 견성은 과果를 성취한 부처자리임이 한층 더 명확하다.
참된 마음의 근원에 도달하지 못하면 제8 미세인 마구니 경계에 떨어진다.「洞山初 古尊寂語錄 三十八」
거짓 무심인 제8 아뢰야의 미세 유주微細流注도 마구니 경계이니, 제 6의식의 거칠고 무거운 망상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공적하여 둥글게 밝아 움직이지 아니함이 대원경지이다.「頓悟要門」
미세한 흐름을 벗어나서 구경의 무심을 깨치면, 육조의 말씀과 같이, 뚜렷이 밝아 항상 고요하면서도 항상 비치는 위없는 대열반을 이루니 그것이 곧 대원경지다.
갓난아기가 비록 육식六識을 두루 갖추어서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지만 아직 6진六塵을 분별하지 못하여 좋고 싫음과 길고 짧음과 시비와 득실을 전혀 알지 못하듯이, 도를 배우는 사람도 그런 아이와 같아서 영욕과 공명, 거슬리는 마음과 순탄한 경계가 전혀 그를 움직이지 못한다. 아무 느낌없이 바보처럼 눈으로 물건을 보나 장님과 같고, 귀로 소리를 들으나 귀머거리와 같아서, 그 마음이 수미산과 같이 움직이지 않는다. 조작과 생각이 없어 천지가 덮어주고 떠받치되, 무심한 까닭에 만물을 길러내듯 애씀이 없는(無功用) 가운데 힘을 베푼다.
그렇더라도 이 굴속에서 뛰쳐나와야만 한다. 보지 못했는가. 경전에 "제8 부동지보살은 무공용지無功用智로서 저절로 살바야 곧 모든 지혜의 바다에 흘러든다"고 하였다. 그러나 납승은 여기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능가경伽鏡」에서 말하기를, "상생相生은 집착의 장애요, 상생想生은 망상이요, 유주생流注生이란 곧 허망한 인연을 좇아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무공용지에 도달했다 하여도 아직은 유주생 가운데에 있는 것이니, 반드시 세번째인 유주생상을 벗어나야만 비로소 쾌활하고 자재로울 것이다.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급류를 고요하고 담담한 물 보듯 한다"고 하였으니, 아이의 6식이 비록 애씀은 없으나 생각생각의 흘러감이 급류와 같음을 어찌하리오.「碧岩錄 八」
제8 부동지不動地 보살은 무공용無功用의 무심한 상태에 있으나, 이는 아직 제8 아뢰야, 곧, 미세 유주의 거짓 무심이다. 이 미세함을 끊고 대원경지를 실제로 깨쳐야만 견성인 참 무심이며, 크게 살아난 바른 안목이다.
*1이것은 석두스님의 '참동계參同契'에 있는 귀절이다.
*2주관적으로 생기는 것이 想生이고, 객관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相生이다. 주관과 객관이 완전히 떨어지면 제8 아뢰야에 들어가는데 이것을 미세 유주라 한다. 미세 유주를 벗어나야만 대원경지가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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