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보감(人天寶鑑)

105. 황룡 심 (心) 선사의 행적

通達無我法者 2008. 2. 20. 17:04
 


105. 황룡 심 (心) 선사의 행적



황룡 심 (黃龍祖心: 晦堂祖心, 1025~1100) 선사는 남웅 (南雄) 사람이다. 유생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열아홉살에 눈이 멀어 부모가 출가를 허락하자 홀연히 다시 보게 되었다. 행각하

면서 남 (黃龍慧南) 선사를 찾아뵈었는데 비록 이 일을 깊이 믿기는 하였으나 깨닫지는 못

했다. 그리하여 하직을 하고 운봉 (雲峯文悅) 선사의 회하에 갔는데 운봉선사가 세상을 떠나

자 석상 (石霜楚圓) 선사에게 가서 머물렀다. 거기서 전등록 (傳燈錄) 을 보다가 한 스님이

다복 (多福) 선사에게 묻는 것을 읽었다.



ꡒ무엇이 다복의 한 줄기 대 (竹) 입니까?"

ꡒ한두 줄기는 비스듬하다."

ꡒ잘 모르겠습니다."

ꡒ서너 줄기는 굽었다."



선사는 이 대목에서 문득 두 분 선사의 면목을 보게 되었다.

그 길로 혜남선사에게 돌아와 제자의 예를 올리고는 좌구를 펴고 앉자 혜남선사가 ꡒ그대는

내 방에 들어왔다"라고 하였다. 선사도 역시 뛸 듯이 기뻐하면서 응수하였다. ꡒ큰 일이란

본래 이런 것인데 스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사람들에게 화두를 들게 하십니까?"

ꡒ만일 네가 깊이 참구해서 마음 쓸 곳 없는 경지까지 가게 하고, 거기서 스스로 보고 스스

로 긍정하도록 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너를 매몰시키는 것이다."

마침 혜남선사가 입적하자 스님들과 신도들이 선사에게 그 뒤를 이어달라고 청하였고, 사방

에서 귀의하여 혜남선사가 있을 때 못지 않았다. 그러나 선사는 진솔함을 숭상해서 일하는

것을 즐기지 않았으므로 다섯 번이나 그만두겠다고 해서 마침내 주지를 그만두게 되었다.

얼마 안돼서 사사직 (謝師直) 이 담주 (潭州)  태수가 되어 대위산 (大山) 에 주지자리가 비

었다고 선사를 초청하였다. 선사가 세 번이나 사양하자 또 강서 (江西) 의 전운사 (轉運使)

인 팽기자 (彭器資) 에게 부탁해서 장사사 (長沙寺) 를 마다하는 이유를 알려달라고 청하니

선사가 말하였다.

ꡒ마조나 백장스님 전에는 주지란 것이 없었고, 도인들은 서로 고요하고 한가한 곳을 찾아

다녔을 뿐이다. 그 후에도 비록 주지란 제도가 있었으나 왕처럼 존경을 받아 인간과 하늘의

스승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이름을 관가에 걸어 놓고 바로 심부름꾼을 보

내 오라가라 하니 이 어찌 다시 할 짓이겠는가."

팽기자가 그대로 전하자 사사직은 다시 편지를 보내 ꡒ한번 만나보고자 할 뿐 감히 주지 일

로 서로를 궁색하게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선사는 사방의 공경대부와 사귀는 데 있어서 뜻이 맞으면 천 리라도 가지만 뜻이 맞지 않으

면 수십 리밖에 안되는 곳도 가지 않았다. 선사는 불전 (佛冶) 뿐 아니라 다른 책들을 가지

고도 자세히 따져가면서 법문하여, 저마다 공부해 온 것을 바탕으로 욕심을 극복하고 스스

로 보게 하였다. 그리하여 깨닫게 되면 같은 길로 돌아오게 하고, 돌아오면 가르칠 것이 없

었다. 이 일로 제방에서는 다른 책과 불전을 뒤섞어서는 안된다고 비난하니 선사가 말하였

다.

ꡒ견성을 못하면 불조의 비밀한 말씀도 모조리 바깥 책이 되고, 견성을 하면 마구니 설이나

여우 선 〔狐禪〕 도 불조의 비밀한 말씀이 된다."

이런 까닭에 40년 동안 그의 도풍을 듣고 깨달은 사대부가 많다. 황정견 (黃庭堅:1045~

1105) 은 오래 전부터 수기를 받은 일로 큰 법을 맡아볼 만한 사람이었으나 안목이 아직 완

전하지 않았다. 그는 선사의 탑을 찾아와 보고서는 크게 우러러보는 마음으로 깊은 탄식을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단단한 옥돌에 글을 새겨 선사가 남기신 아름다운 자취를 공경히

송하였다. 「탑명 (塔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