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보감(人天寶鑑)

122. 종경록 (宗鏡錄) / 영명연수 (永明延困) 선사

通達無我法者 2008. 2. 20. 17:34
 

122. 종경록 (宗鏡錄) / 영명연수 (永明延困) 선사



영명연수 (永明延困:904~976, 법안종) 선사의 조상은 단양 (丹陽)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가

전란에 휘말려서 오월 (吳越) 에 귀순하여 선봉이 되었다가 마침내 전당 (錢塘) 에 살게 되

었다. 선사는 태어날 때부터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돌이 되었을 때 부모가 말다툼을 하여

사람들이 말려도 듣지 않자, 선사가 높은 책상에서 바닥으로 몸을 던지니 양친이 놀라서 안

고 울며 말다툼을 그만두었다.

커서는 유생이 되었는데 34세에 용책사 (龍冊寺) 로 가서 출가하고 구족계를 받았다. 그 후

고행하면서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하루 한 끼 먹으면서 아침에는 대중들에게 공양하고 저녁

이면 선을 익혔다. 이어 태주 (台州)  천주봉 (天柱峯) 에 가서 90일 동안 선정을 익혔는데

종달새가 옷에다가 둥지를 쳤다.

천태 덕소 (天台德韶) 국사를 뵈오니, 국사는 한번에 그가 큰 그릇임을 알았다. 그리하여 가

만히 깊은 종지를 전해주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ꡒ그대는 원 (元) 선사와 인연이 있으니 뒷날 불사를 크게 일으킬 것이다."

처음에는 명주 (明州)  자성사 (資聖寺) 에 주지하다가 건륭 (建隆)  원년 (960) 에 오월 (吳

越)  충의왕 (忠懿王) 의 청으로 영은 (靈隱) 의 새로 지은 절에 머무니 그 절의 첫번째 주

지가 되었다. 다음해에 청을 받아 영명사 (永明寺)  도량을 주지하니 대중이 2천명이나 되었

다. 그들은 모두 두타행을 잘 닦아 승려가 되려는 사람들이었는데 선사는 왕에게 아뢰어 도

첩을 받게 하고 삭발하고 먹물옷을 입혀 주었다.

한 스님이 물었다.

ꡒ무엇이 영명의 종지입니까?"

ꡒ영명의 종지를 알고 싶은가. 서호 (西湖) 의 물이니, 해가 뜨면 빛이 나고 바람이 불면 물

결이 인다."

또 한 스님이 물었다.

ꡒ제가 오랫동안 영명도량에 있었으나 어찌하여 영명의 가풍을 알지 못합니까?"

ꡒ알지 못하는 곳을 알아라."

ꡒ알지 못하는 곳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ꡒ소의 뱃속에서 코끼리 새끼가 태어나고 푸른 바다에 티끌 먼지가 일어난다."

개보 (開寶)  7년 (974) 에 주지를 그만두고 화정봉 (華頂峯) 으로 돌아가면서 송을 지었다.



목마르면 물 반국자 떠 마시고

배고프면 솔잎 한 입 따 먹으며

가슴속에는 한가지 일도 없어

높이 백운봉에 누웠노라.

渴飮半?水  飢 一口松

胸中無一事  高詛白雲峯



우연히 「화엄경」을 읽다가 ꡒ만일 보살이 큰 원력을 내지 않으면 그것은 보살의 마장

〔魔事〕 이다" 한 대목에서 마침내 「대승비지원문 (大乘悲智願文)」 을 지어 미혹한 뭇중

생들을 대신해서 날마다 한 번씩 발원하였다. 국청사 (國淸寺) 에서 참회법을 닦고 있을 때,

밤중에 절을 돌아보다가 보현보살상 앞에 공양한 연꽃이 홀연히 자기 손에 있는 것을 보고

이때부터 일생동안 꽃을 뿌리는 공양을 하였다. 또 관음보살이 감로수를 입에 부어주는 감

응을 받고 설법하는 재주 〔大辯才〕 를 얻게 되어「종경록 (宗鏡錄)」 100권을 저술하였다.

적음 (寂踵:慧洪覺範) 이 이에 대해 말하였다.

ꡒ내가 이 책을 깊이 읽어보니 방등부 계통의 경전을 누비며 넘나든 것이 60종이었으며, 중

국과 외국 성현의 말씀을 관통해서 논한 것이 3백가 (家) 였다. 천태종 (天台宗) 과 화엄종

(華嚴宗) 의 핵심을 알았고 유식 (唯識) 을 깊이있게 논하였으며, 세 종파의 다른 이치를 대

략 분석하여 하나의 근원으로 귀결시키려 하였다. 그러므로 의문이 마구 생기면 깊은 뜻을

낚고 먼 뜻을 길렀으며, 어두운 점을 쪼개고 파헤칠 때는 치우치고 삿된 견해를 쓸어버렸다.

그의 문장은 아름답고 자유분방하다. 그러므로 이 글은 자기 마음을 활짝 깨우쳐 성불하는

으뜸이며 달마가 서쪽에서 온, 전할 수 없는 바로 그 뜻을 분명히 알려준다."

선사가 입적하고 나서도 총림에서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는데 희령 (7寧:1068~1077) 

연간에 원조 (圓照) 선사가 비로소 이 책을 들고 나와 널리 대중에게 알렸다.

ꡒ예전에 이 보살께서는 스승없이 터득하는 지혜 〔無師智〕 와 저절로 터득하는 지혜 〔自

然智〕 를 숨기고 오로지 보통지혜만을 써서 모든 종파의 강사들에게 서로 질문공세를 펴도

록 명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심종 (心宗) 의 저울대를 가지고 그들의 이치를 고르게 달았으

니 그 정묘한 극치는 가히 마음의 거울로 삼을 만하다."

이로부터 납자들이 다투어 그 책을 전하고 읽게 되었다.

원우 (元祐:1086~1093)  연간에 보각조심 (寶覺祖心) 선사는 그때 이미 나이가 많았으나 손

에서 이 책을 놓지 못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ꡒ나는 이 책을 늦게야 보게 된 것이 한스럽다. 평소에 보지 못했던 글과 노력으로는 미칠

수 없는 이치가 그 속에 다 모여 있다."

그리고는 그 요점만을 골라서 세 권의 책으로 만들어 「명추회요 (冥樞會要)」라고 이름지

으니 세상에 널리 퍼졌다. 후세에 이 두 분 노스님이 없었다면 총림은 숭상할 바가 없었을

것이다. 오래된 학인은 날로 속스럽고 게을러져서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을 것이며 늦게 온

사람은 날로 숨이 막혀 공연히 근거없는 말만 할 뿐일 것이니 무엇으로 이 책을 알 것이며

그 뜻을 논하고 음미할 수 있겠는가. 설사 아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크게 마음에 두지 않

고 그저 조사의 교외별전이거니 불립문자거니라고만 생각할 것이니 어찌 문자의 속까지를

찌를 수 있겠는가. 그런 이들은 달마 이전 마명 (馬鳴) 과 용수 (龍樹) 도 역시 조사였으나

논을 쓸 때는 백가지 경의 이치를 아울렀고, 광범위하게 보려 할 때는 용궁의 책까지도 빌

려다 보았으며 달마 이후에 관음대적 (觀踵大寂:馬祖道一) ․백장회해 (百丈懷海) ․황벽 희

운 (黃岫希運)  같은 분도 역시 조사였지만 모두 3장 (三藏) 을 치밀하게 연구하고 모든 종

파들 널리 공부하였다는 사실을 전혀 생각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그 분들의 어록이 모두

남아있어 가져다 볼 수 있는데 어찌하여 달마만을 이야기하는가.

성인의 세상이 멀어질수록 중생의 근기가 낮아져 뜻과 생각이 치우치고 짧다. 도를 배우는

일이 간단한 것이라고는 하나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앉아서 이루려 한다면 그것은 마치 농부

가 밭갈고 김매는 일은 게을리하면서 침을 흘리며 밥먹는 것만 쳐다보는 것과 같으니 웃을

일이다.

영명선사는 늘 이렇게 발원하였다.

ꡒ널리 발원하옵니다. 시방 모든 학인과 뒤에 오는 현인들이 도는 부자가 되고 몸은 가난하

며, 정 (情) 은 성글고 지혜는 빈틈없게 되어지이다. 그리하여 불조의 마음 종지를 펼치고

인간․천상의 안목을 활짝 열게하여 지이다" 「보록등 (寶錄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