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어서화(東語西話)

20. 자심의 현량(現量)이란 무엇인가 ?

通達無我法者 2008. 2. 27. 18:05
20. 자심의 현량(現量)이란 무엇인가 ?

자기 마음에서 화복의 싹도 트는데,
증오와 사랑인들 어찌 다른 곳에서 오겠는가?
한 때에 발생한 번뇌는 3세(三世)를 통하여 나타나면서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소멸하지 않고 털끝만큼도 빗나가지 않는다.
일대장교(一大藏敎)에서는 과(果)를 들어 인(因)을 밝혔는데,
모두가 자기 마음의 현량(現量)으로서
한 법도 마음 외에 다른 곳에서 온 것이 없다.
도인은 생각마다 자기 마음을 잘 관찰하여
그것의 형상은 물론 자취로도 구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만 옛날보다 밝고,
미래세가 다하도록 뚜렷하여 다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능엄경」에는,
"새어나감이 없는 진정(眞淨)이다" 고 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이 가운데서 다른 무엇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그 때문에 옛 스님들은 이것을 금강보검(金剛寶劍)이라고도 했고,
청정태허(淸淨太虛)라고도 했다.
칼[劍]은 베지 못하는 물건이 없고,
허공은 모든 장소를 포섭한다.
한량없는 광명을 지닌 여래의 몸[大光明藏]은 본체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밖의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불조는 이것을 깨달아 잘못된 생각을 담박에 비웠고,
중생들은 이것을 몰라 허망하게 알음알이를 는다.
그래서 3계(三界)가 생기고 만법(萬法)이 이루어지며,
생멸거래(生滅去來)의 모습이 복잡하게 생기며,
복과 재앙을 받는 이치가 분명해진다.
이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자기 마음의 현량(現量)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복을 받고 화를 피하려는 생각이 쉴 새 없이 일어나고,
싫은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은 취하려는 감정이 끊임없이 계속된다.
허망한 견해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업(業)은 더더욱 많아진다.
세속의 사람으로서 세상의 그물에 아교를 붙인 것처럼
딱 붙은 것은 그래도 어느 정도 용서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애욕의 그물을 찢어버리고 출가한 자면서도
알음알이를 쫓는 것을 그만두지 못하는 출가자는 책망해야 할 것이다.

「능엄경」에서도, "미친 마음이 쉬지 않았으나,
 일단 쉬었다 하면 보리(菩提)이다" 고 하였다.
이는 교종에서 하는 질책이다. 언어·문자의 가르침으로 책망한 것이다.

반면에 달마스님은 말씀하시기를,
"외부로는 모든 반연을 쉬고,
 안으로는 마음이 헐덕이지 않아야 한다" 고 하였다.
또 고덕스님도,
"불법을 배울 것이 아니라, 마음 쉬기를 힘쓸 뿐이다" 고 하였다.
이것은 선종의 질책이다.
4무량심(四無量心)·6도(六度)·만행군선(萬行群善)·
37조도품(三十七助道品) 등은 가벼운 것이 무거운 것으로,
우수한 것이 못한 것으로 바뀌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그런 것이다.
모두가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을 써서 책망한 것이다.

바로 마음의 본체를 말해 보자.
쉼[歇休]이란 말도 따지고 보면, 벌써 황금가루가 눈에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어찌 우열경중을 더 의론할 것인가?
그러므로 성인께서는 중생들이
제 마음의 현량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드디어 화성(化城)의 방편을 써서 중생들을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한 것이다.
그렇다면 자심(自心)이란 무엇이고, 또 현량(現量)이란 무엇인가?
자심(自心)이란 불조가 증오한 본래부터 있던 원만한 보리의 본체이다.
그리고 현량(現量)이란 중생이 식(識)의 변화에 따라 집착하여
도저히 바꾸어 줄 수 없는 견해이다.

어떤 사람이 물어왔다.

"어떻게 이를 버려야 합니까?"

내가 대답하였다.

"버리려 해서는 안됩니다
 일부러 버리려 하면, 버리려는 자취와 함께 현량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장자(莊子)는,
 `죽은 뒤 점치는데 쓰이는 신성스런 거북이가 되어 호강하느니,
 차라리 살아서 진흙탕 속에서 자유롭게 꼬리를 끌고 다니는 것이 낫겠다' 고
 비유하였습니다.
 믿는 마음이 확고하고 참구를 그치지 않아 확연하게 개오(開悟)하면,
 자심(自心)의 현량이 모조리 사라져 도리어 자각한 성지(聖智)로 됩니다.
 이것은 마치 미혹했을 때는 황금을 구리로 잘못 알다가,
 깨닫고 나서는 그것이 황금이지 구리가 아니라는 것을
 담박에 아는 것과도 같습니다.
 처음에는 구리라고 잘못 알았지만,
 그것은 본래부터 황금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자각한 성지이며,
 본래 황금인 것을 구리라 생각하는 것이 자심(自心)의 현량(現量)입니다.
 달마스님은 「능엄가경」 한 권의 요의(要義)를 지니고
 직지(直指)의 마음에 그대로 계합하여 현량을 버렸읍니다.
 그리하여 재앙을 재앙으로 여기고 복을 복으로 여기는 자취를
 모두 용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배우는 사람들은 이것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알음알이[情]란 대체 어떠한 것인가?
알음알이란 집착해서 바꾸기 어려운 허망한 견해이다.
알음알이가 있는데도 그것에 집착하지 않을 수 없고,
집착이 있는데도 알음알이가 없을 수 없다.
알음알이에 집착하는 까닭은 바로 미망(迷妄) 때문이다.
이러한 미혹의 대상은 무엇인가 하면 바로 자성(自性)이다.
이 자성을 미혹하여 알음알이가 된다.
중생이 알음알이로 집착하는 것에는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같은 점은 증오와 사랑이 그런 것이고
다르다는 것 또한 증오와 사랑이 그런 것이다.
생각하는 견해의 차별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모두 한결같을 수는 없다.
예컨대, 두 사람이 있다고 하자.
한 사람은 동쪽을 집착하여 옳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향하는 대상이 모두 동쪽일 것이다.
다른 한 사람은 서쪽을 집착하여 옳다고 한다면
향하는 대상이 모두 서쪽일 것이다.
동쪽에 집착하여 옳다고 하는 자는 매양 서쪽을 비난하고,
서쪽에 집착하여 옳다고 하는 자는 자기가 비난받는 것을 모른다.

또한 동쪽을 고집하는 자는 서쪽으로 향해 있는 사람이
자기의 동쪽을 가리키며 잘못이라고 하는 것을 모른다.
그는 동쪽으로 가면 갈수록 스스로 옳다고 더 믿어 상대방을 더욱 비난한다.
서쪽을 고집하는 자도 이와 같다.
두사람의 고집은 서로 부수지 못하는 창과 방패같다.
이것을 서로 부수지 못한다면
천하의 시비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세상에 나와 이를 구제하려 하였다.
말씀과 가르침을 베풀어 시비를 가리는 마음을 해결하고,
알음알이를 따르는 중생들을 교화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성인의 가르침도 그 자취가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시비가 더욱 성해졌던 것을 어찌하겠는가?

옛부터 유·불·도(儒佛道) 3교(三敎)가 정립해서 서로 헐뜯었던 것도
각각 자기 파만을 옳다고 주장하여 시비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베푸신 교화는 만법이 모두 한 마음일 뿐이며,
한 마음이 바로 만법이라고 했다.
그래서 만법의 측면에서 교(敎)라 하였고,
한 마음의 측면에서 선(禪)이라 한 것이다.
이렇게 명칭은 항상 서로 달랐지만,
그 본체는 항상 같았다.
교(敎)는 문자를 매개로 하였지만,
선(禪)은 문자를 매개로 하지 않았다.
그 까닭을 살펴보면,
선(禪)은 알음알이의 미망(迷妄)을 타파하여
신령한 근원자리인 일심(一心)으로 들어가게 하려는 것일 뿐이다.
문자를 매개로 하느니, 문자를 떠났느니 하는 집착을 떠나지 못해서
결국 교와 선이 얼음과 재처럼 겉돌았다.
문자를 떠났느니, 문자를 매개로 하느니 하는 두 주장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교가 교가 아니고,
선이 선이 아닌 경지에 이르러서는 성인이라 해도 옷깃을 여미고
그 앞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다.

또 불성(佛性)의 이치〔性理〕를 매일 직접 수행하면서도
시비에 대한 집착을 끊지 못하고 있다.
평소부터 교리(敎理)에 어두운 사람에게 그가 집착했던 것을 끊어버리고
시비를 따르지 말라고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이것은 마치 배고픈 사람 앞에 밥을 갖다놓고는
그 밥을 먹지 말라고 하는 것과 같다.
고덕스님의 훈계에,
"다른 사람의 잘못과 나의 옳음을 들추지 않으면,
자연히 아랫 사람은 윗 사람을 공경하고
윗 사람도 아랫 사람을 공경하며 서로 존경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불법은 시시때때로 드러나고,
번뇌는 그때그때마다 사라지리라" 고 한 말씀이 있다.
참으로 옳으신 말씀이다.
그런데도 그 교훈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까닭은 알음알이가 있어
상대방의 시비를 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집착을 끊는데는 알음알이를 없애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고,
알음알이를 없애는 데는 본성을 깨닫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다.
본성을 깨닫고 나면 알음알이는 굳이 없애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지며,
알음알이가 없어지고 나면 시비에 대한 집착은
봄날 서리가 밝은 햇빛에 녹아내리듯 하리니,
교화가 되지 않을 이치가 있겠는가?

      

우리 집안은 대대로 항주(杭州)의 신성(新城) 땅에서 살았으며,
성은 손씨(孫氏)이다.
그런데 할아버지 대에 전당(錢塘) 땅으로 이주하여
부모가 그 곳에서 일곱 자녀를 낳았는데,
나는 그중 제일 막내였다.
나는 겨우 포대기를 떠나던 시절부터 범패(梵唄)를 읊조리며
불사(佛事)를 흉내내며 소꿉장난을 했다.
이웃 사람들은 이런 나를 이상히 여겼다.
일곱 살이 되자 나는 외전(外傳)인 「논어(論語)」·「맹자(孟子)」를 읽었고,
아홉 살이 채 못되어 어머니를 잃어서 그만 학문을 중지하였다.
어려서부터 출가할 뜻을 갖고 있었지만,
세상일에 얽매어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쉽지가 않았다.
그러다 24세가 되자 그 속박이 자연히 풀렸다.

이 때가 바로 지원(至元) 연간의 병술(丙戌;1286)년이었다.
이 해 5월 혼자 산에 올라 선사(先師)의 제자로 들어갔다.
이윽고 「금강경」을 지송하던 중,
"여래를 걸머진다[邊擔如來]" 는 문구에서 분명하게 느끼는 바가 있었다.
이로부터 경서(經書)와 어록(語錄)의 맛에 상당히 심취했는데,
깨닫지는 못했었다.
그 이듬해인 정해(丁亥;1287)년 2월에 우바새 양씨(楊氏)가 생활용품을 주어
산해옹(山海翁)을 따라 산에 올랐는데,
그때야 비로소 머리를 깎고 먹물옷을 입었다.
기축(己丑;1289)년에 당사(堂司)의 소임을 맡았는데,
경인(庚寅;1290)년에 몰래 이곳을 떠나려 하다가 그만 송공(松公)에게 들켰다.
그래서 다시 기름진 전답 3묘(三)를 도와주며 참선을 하였다.
그런지 얼마 안되어 코피가 나는 병에 걸려
그것을 그만두고 선사(先師)의 시봉을 했다.

신묘(辛卯:1291)년 봄에 구공( 公)이 전장(田莊)을 시주하였으나,
편지를 해서 되돌려주게 하였다.
임진(壬辰;1292)년에는 고무(庫務)의 소임을 맡았다.

계사(癸巳;1293)년과 갑오(甲午;1294)년에는 시주의 문전이 분주했을 뿐이다.
원정(元貞) 연간 을미(乙未;1295)년에는 선사께서 병으로 누우셨는데,
끝내 일어나지 못하셨다.
장례를 마친 나는 즉시 산을 떠나 오랜 뜻을 이루게 되었다.

병신(丙申;1296)년에는 오문(五門) 땅을 왕래하였다.
대덕(大德) 연간 정유(丁酉;1297)년 봄에는 봇짐을 짊어지고
천주산(天柱山)으로 갔다가,
가을이 되자 여산(廬山)으로 갔다.
겨울에는 건강(建康)땅으로 가서 초가집에 자취를 감추고 10개월간을 지냈다.

무술(戊戌;1298)년 겨울에는 변산(弁山) 땅에 환주암(幻住庵)을 지었고,
이듬해 겨울에는 오문땅에 환주암을 지었다.
경자(庚子;1300)·신축(辛丑;1301) 연간에는 두 곳에서 다 거처하였다.

임인(壬寅;1302)년에는 대각사(大覺寺)에서 주지를 맡아달라고 청하여
남서(南徐) 땅으로 피해갔다.
이듬해 계묘(癸卯;1303)년에는 대각사로 목면가사를 되돌려 보냈다.

갑진(甲辰;1304)년에는 산으로 되돌아가 선사의 탑을 지켰다.
을사(乙巳;1305)년 겨울에 사자원(師子院) 일을 맡았고
병오(丙午1306)·정미(丁未;1307)에서 무신(戊申;1308)년 겨울에 이르기까지는
오송(吳松)땅을 번갈아 왕래하느라고 산으로 되돌아 오질 못했었다.

기유(己酉;1309)년에는 의진(儀眞) 땅에서 배를 사서 여름에
삽성( 城) 땅에 닻줄을 매었다.
경술(庚戌;1310)년에 천목산(天目山)으로 되돌아가 산과 배에서 거처하였다.
신해(辛亥;1311)년에 다시 배를 만들어 타고 변수( 水)로 갔다.

황경(皇慶) 연간 임자(壬子;1312)년 봄에는
육안산(六安山)에 암자를 지었고,
가을에는 배를 타고 동해주(東海州)로 갔다.
이듬해 계축(癸丑)년에는 개사(開沙)에 배를 정박시키고,

정수(定¿)스님을 대각사(大覺寺)로 보내어 머물게 하였다.
그리고 나는 환산(環山)에 가 머물렀다.

연우(延祐) 연간 갑인(甲寅;1314)년 봄에는
다시 사자원(師子院)의 일을 맡았다.
이듬해 을묘(乙卯)년에는 대와(大窩) 땅에 암자를 지었고,
병진(丙辰;1316)년 봄에는 당뇨병이 생겨 고생하였다.
그 해 여름에는 남심(南¡)에 배를 정박시켰다.

정사(丁巳;1317)년에는 단양(丹陽) 땅의 대동암(大同庵)에서 거처하였다.
그 이듬해 무오(戊午)년에 다시 천목산으로 되돌아 왔다.
기미(己未;1319)·경신(庚申;1320)에서
지치(至治) 연간의 신유(辛酉;1321)·임술(壬戌;1322)에
내 나이 60 세가 되었다.
이 해 여름 중최산(中崔山)에 암자를 지었다.
출가했던 병술(丙戌;1286)년에서 60 세가 되던 임술(壬戌;1322)년까지
37 년간의 생활을 모두 고백하고,
허깨비같은 자취를 멀리 이끌고 가서 인연을 피할 계획을 세웠다.

내가 처음 발심하여 출가했던 뜻은
초의(草衣)에 때묻은 얼굴로 두타행(頭陀行)을 익히며
농사꾼의 옷을 입으려 했는데,
결국 종신토록 부끄러움을 안게 되었다.
또 문자를 주물렀지만 학문을 완성하지도 못했고,
참구했지만 깨달아 밝히지는 못했다.
평소에 쓸데없는 일을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칭찬했던 것은
보연(報緣)의 우연일 뿐이었다.
항상 은퇴하여 쉬는 것을 흠모했을 뿐이고,
세상을 바로잡거나 세속의 일을 끊지도 못하고 앉아서
신자들의 시주만 받아먹었으니 위태롭고 불안할 뿐이다.

옛 사람은 나이 50이 되어서 지난 49 년간의 잘못을 알았다고 했다.
지금 나는 60이 되어 지난 일들을 돌이켜 생각해볼 때,
대개 헛된 알음알이에 가리웠던 세월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 이치에 합당한 것인가?

물에 비친 달그림자〔浮光〕와 환영(幻影)은 잠깐 사이에 변한다.
이러한 나의 회포를 글로 써서 스스로를 경책하려 한다.